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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c8c8c><colcolor=#fff> 곽재우 郭再祐 | |
출생 | 1552년(명종 7) 9월 16일[1] |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 (現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2동길 33)[2] | |
사망 | 1617년(광해군 9) 5월 14일[3] (향년 64세) |
경상도 영산현 청암진 망우정 (現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 우강리) | |
이름 | 곽재우(郭再祐) |
시호 | 충익(忠翼) |
자 | 계수(季綬) |
호 | 망우당(忘憂堂) |
본관 | 현풍 곽씨[4] |
종교 | 유교 (성리학) |
별칭 | 홍의 장군 |
부모 | 부친 - 곽월(郭越, 1518 ~ 1586) 친모 - 진주 강씨 - 강응두(姜應斗)의 딸 계모 - 김해 허씨(金海 許氏, ? ~ 1597) - 허경(許瓊)의 딸 |
형제자매 | 형 - 곽재희(郭再禧), 곽재록(郭再錄) 누나 - 김해 허씨 허언심(許彦深, 1542 ~ ?)의 처 이복 남동생 - 곽재지(郭再祉), 곽재기(郭再祺) 이복 여동생 - 창녕 성씨 성천조(成天祚)의 처 |
부인 | 상주 김씨(尙州 金氏)[5] - 김행(金行)의 딸[6] |
자녀 | 장남 - 곽영(郭濚) 차남 - 곽활(郭活) 장녀 - 창녕 성씨 성이도(成以道)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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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시대 의병장이자 성리학자. 일반인들에게는 학자보다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자는 계수(季綬),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옷의 장군) 혹은 이를 줄인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신출귀몰한 전술 및 붉은 옷을 입은 장수에 산신령같은 뭔가 도인스러운 신비한 인상에 각종 활약상들 덕분인지 임진왜란 의병장 중에서도 대중적인 인지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7]
곽재우의 삶은 조선왕조실록, 첩 이씨의 아버지 이로의 용사일기, 외손자 신시망이 지은 문집, 지인 배대유가 쓴 전기에 흩어져 있다. 현대전의 관점으로 볼 때 완벽에 가까운 게릴라, 유격전을 펼쳤던 지휘관으로 직접적인 전투 뿐 아니라 심리전, 기만전술까지 능숙하게 수행했다.
2. 생애
2.1. 집안 내력
외조부 강응두는 진주 강씨의 일원으로 의령 세간리에서 누대에 걸쳐 살아온 부호로 김해 허씨, 의령 남씨, 의령 심씨, 의령 옥씨, 의령 여씨, 담양 전씨, 고성 이씨 등과 함께 의령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일찍이 의주목사, 황해감사 등을 역임한 바 있는 아버지 곽월(郭越)은 강씨와 혼인했던 현풍현[8]을 떠나 처가가 있는 세간리로 이주했다. 강씨가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곽월은 장인의 가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다. 곽월의 2번째 부인 허씨는 이황의 1번째 부인 허씨와 4촌간이었고 아버지 허경맥으로 이어진 데서 알 수 있듯이, 곽재우의 집안 역시 지역에서 알아주는 명가였다.현풍의 현풍 곽씨는 고려 시대 때부터 현풍 지역에 뿌리내린 토호 집안으로 고려 때에는 현풍이 밀양부의 아래에 있던 까닭에 밀양에서 강한 토호 집안인 밀양 박씨와 혼맥으로 이어져 위세를 단단히 했다. 현풍 곽씨 중시조이자 청백리(淸白吏)인 곽안방(郭安邦)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원종공신이 되었고 지방 세력을 누르려 했던 새 왕조 조선에서 현풍 곽씨가 뿌리내리는 기반이 되었다. 곽안방의 아들 곽승화(郭承華)는 선산 김씨의 딸과 결혼했는데 선산 김씨는 김종직의 가문이다. 곽승화 본인도 김종직의 제자이자 훗날 조광조의 스승이 되는 한훤당 김굉필과 절친해서 지역 유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아들 곽위(郭瑋)는 현감 벼슬을 지냈고 평산 신씨 신승준의 딸과 혼인했는데 밀양 지역의 송계 신계성의 고모였다. 곽위의 아들 곽지번(郭之藩)은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2.2. 왜란 이전
1552년, 경상도 의령현 세간리에 있는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친모 강씨가 3남 곽재우가 3살 때 세상을 떠났지만, 친가와 외가 모두 엄청난 부잣집이어서 타격은 없었다. 이후 부친 곽월은 또다른 부잣집 여식 허씨와 재혼했고, 어린 곽재우는 계모 허씨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허씨는 본인이 낳은 세 명의 친자녀들[9]는 물론 전처 소생의 곽재우 포함 네 명의 의붓자녀들[10]에게도 아낌없는 사랑을 쏟았고, 곽재우는 이런 의붓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한다.곽재우는 10대 중반에 의령과 가까운 경남 산음[11]에 정착한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6세 때 창원과 단성에서 막강한 재지기반을 가진 상주 김씨 집안 여식과 혼인했다. 부인 김씨는 만호 김행의 딸로 조식의 외손녀이기도 했으며, 이 혼인 역시 조식의 주선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역시 조식의 손녀와 혼인한 동강 김우옹과는 동서 지간이 되었다. 그 덕분에 곽재우는 경상 우도 사대부들과 쉽게 연계와 교류를 할 수 있었다.
전기에 의하면 곽재우는 19세 때부터 무업(武業)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며, 《장감박의(將鑑博議)》를 읽어 문리를 터득했다고 한다. 사실 곽재우가 유독 특별했던 것은 아니라 당대 지방 사족 자제들의 시류에 따른 것이었다. 대과에 급제해 중앙에 나아가는 방법이 가장 좋지만, 지방 출신이 한양에 터 잡은 쟁쟁한 집안들과 경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만큼, 기준선이 좀 낮은 무과를 노리거나 군역을 통해 정병으로 복무하다 군관이 되는 것도 출세의 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장인 김행이 무관 출신이어서 그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34세 되던 1585년(선조 18) 정시(庭試, 학업을 권장하거나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비정기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나, 일부 답안이 문제가 되어 파방(罷榜, 전원 불합격)되면서 최종 불합격했다. 인터넷상에선 이때 치른 시험이 대과고, 선조를 비판하는 답안을 내서 곽재우만 불합격했다는 풍문을 주워섬기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파방한 이후 재응시 없이 고향 의령에서 농업 경영에 집중하여 큰 부를 이루었고, 한편으론 꾸준히 군역을 수행했다.
1586년, 부친 곽월이 사망해 3년상을 치렀으며, 이후 임진왜란 이전까지 의령에 눌러 앉아 지냈다. 후손들이 지은 전기 기록에서는 은거하며 지냈다고 하는데, 말 그대로 숨어 지냈다는 의미가 아니라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농업 경영에 힘써 매우 많은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임진년에 반협박으로 의병에 끌어들인 매제 허언심도 상당한 부호였고, 곽재우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정에 천거한 김성일과 그를 비판한 김수의 장계 모두 곽재우의 재산이 많았다고 언급했다.
2.3. 의병 활동
임진왜란에 활약한 의병장 중 제일 유명하다.[12] 사실 의병장 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유명세에 비해 의병 활동은 불분명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김덕령처럼 아무런 공적 없이 이름만 높았기 때문은 아니고, 공이 있으나 당사자가 기록을 남기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해군 9년(1617)까지 살았던 사람이라 기록을 남길 여유는 충분했음에도 전투일지는 고사하고 말년에 회고록 하나 남기지 않았다.임진왜란 의병 연구에 곧잘 쓰이는 사료는 이탁영의 <정만록>, 오희문의 <쇄미록>, 정경운의 <고대일록>, 이로의 <용사일기>가 있지만 그중에 곽재우의 의병 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사료는 없다. 이탁영은 김수를 수행한 아전이었기 때문에 김수가 윤선각(윤국형), 이광과 삼도 근왕군을 편성해 북상하기 위해 경상도를 떠난 5월 16일부터 용인 전투에서 패하고 6월 17일 이전까지 경상도 지역에 대한 정보는 소략한데 이 시기가 하필 곽재우 의병 부대가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때였다. <용사일기>의 저자 이로는 곽재우의 첩 장인으로 가까운 사이이기는 하나, 개전 당시 한양에 있었고 이후로는 초유사 김성일을 수행했기에 <용사일기>는 김성일의 행보에 초점을 맞췄고, 곽재우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암진 전투를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바로 다음에 벌어진 일로 착각하는 등 오류가 있다. <쇄미록>과 <고대일록>은 곽재우에 대해 전해들은 말에 의거한 단편적인 서술만을 남겼다. 곽재우에 대한 기록이 가장 풍부한 사료는 조경남의 <난중잡록>이다. 관청 서기로서 각종 공문서를 손쉽게 열람할 수 있었던 조경남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일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출처를 남겼는데 그중에 곽재우의 의병 활동에 대한 내용도 다수 포함되었다.
곽재우의 거병일자는 4월 20일설,[13] 4월 22일설,[14] 4월 24일설,[15] 4월 27일설[16]로 나뉘는데 학자 대부분은 22일설을 지지한다. 그 이유는 곽재우가 경상감사 김수와의 갈등을 조정에 해명하기 위해 올린 자명소(自明疏)에서 자신의 거병 일자를 22일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심대승, 권란 등 평소 알고 지내던 장정 10여 명과 그들이 거느린 노비들을 합쳐 50여 명 남짓한 조촐한 병력으로 의병장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곽재우가 거병한 22일까지는 왜군의 손길이 의령에 닿지 않았는데 경상좌도 지역을 지난 왜군은 신속하게 한양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왜군이 경상우도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은 탄금대 전투 하루 전인 4월 27일부터였다. 창원에 잔류하던 소규모 왜군이 피난민들을 쫒아 의령 속현인 신반현으로 들어와 관아와 성문을 불사른 후 삼가와 합천을 지나 고령 쪽으로 사라졌다.[17] 의병 창설을 위해 자기 처자의 의복까지 모두 내놓은 곽재우였지만 병력을 유지하고 무장시키기에는 모자랐다. 처자의 의복까지 걷어다가 자신을 따라준 병사들의 가족에게 나눠주어서 곽재우의 처자들은 매부 허언심의 집에 의탁해야 했다. 추수철이 아니니 논에서 곡식을 베어올 수도 없고 의령 관아의 창고는 난리통에 불에 타버려서 군량을 충당할 수 없었다. 결국, 곽재우는 인접한 초계와 신반현 관아의 창고를 뒤져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고 강에 버려진 세곡선의 세곡을 가져다가 군량에 보태었다.
물자를 확보한 곽재우는 적은 병력이나마 이끌고 왜군과 교전에 나섰다. 곽재우 의병대의 전투는 임진년 5월 초부터 확인된다. 초유사 김성일에게 통유문을 받은 직후 보낸 답신에서 5월 4일에 부장 4명과 함께 낙동강 하류에서 왜선 3척을 공격했고 6일에는 13명을 거느리고 같은 장소를 거슬러 올라오는 왜선 11척을 공격해 쫒아내었다고 알렸기 때문이다.[18] 의령에 접경한 낙동강 지류는 기강(岐江)이라 불리는데 낙동강과 남강의 합류 지점이었다.
당시 왜군 주력 부대는 한양으로 진격한 상태였으니 손쉬운 승리에 안심하고 별다른 경계없이 움직이던 왜군 수송선을 공격해 물러가게 했다고 추정한다. <난중잡록>에서는 곽재우 의병대의 분전으로 의령, 삼가, 합천 등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군 소부대가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적었다.[19] 곽재우는 전쟁 발발 후 불과 10일도 되지 않아 의병을 일으키고 소규모 의병대를 이끌며 왜군의 수송선을 공격해 적은 수였지만 경상우도를 약탈하던 왜군들이 물러나게 하였다. 물론 이는 왜군이 본격적으로 전라도 공략을 위해 경상우도로 향하기 전이기에 가능했다. 임진년 6월 이전까지 경상우도의 왜군은 작은 무리를 이뤄 노략질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문제는 이 시점까지 곽재우 의병대는 국가의 지시나 관의 요청도 없이 사적으로 군사를 일으킨 상황에서 관청 창고의 물자와 세곡미를 전용했다는 점으로 도적 내지는 전란을 틈탄 반란 세력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있었다. 어느 정도 폐단을 감수하고 수령 고소 금지법까지 만들어 적용시킨 조선 정부는 사족들이 중앙의 허락도 없이 자유롭게 무장하도록 내버려 둘 정도로 관대한 집단이 아니었다. 또한 곽재우와 같은 지역에서 정대성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집한답시고 장정들을 모아 도적질하다가 합천군수 전현룡에게 잡혀 참수되는 일이 있었다. 전현룡은 관물 남취 사건을 일으킨 곽재우도 의심해 경상우병사 조대곤에게 보고했고, 조대곤은 곽재우를 도적으로 오인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전쟁 전부터 지역 사족층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경상감사 김수 역시 곽재우의 행적이 미심쩍었는지 구명을 해주지 않아 궁지에 몰린 곽재우는 거느린 병사들을 해산시키고 지리산에 은둔하려 했다. 그렇게 도망자가 되어 사라질 뻔한 곽재우를 구원해준 사람은 초유사 김성일이었다. 이황의 제자로 영남 민심에 정통하며 인적 네트워크도 충실했던 그는 5월 4일 함양에 도착해 조종도와 이로에게 곽재우의 일을 전해들었다. 김성일은 곽재우에게 죄가 없음을 짐작하고, 도민들에게 초유문을 작성해 고시하고 곽재우에게는 공문으로 통유문을 발송했다. 이는 곽재우 의병대의 활동을 국가에서 인정한 조치로서 곽재우 의병대는 명실공히 의로 일어난 군대로 인정받았고 합법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곽재우는 김성일이 보낸 글을 아예 깃대에 걸어 모두가 볼 수 있게 했으므로 고을 수령들도 더는 뭐라 하지 못했는데 <망우집>에서는 5월 11일 통유문을 접수했다고 적고 있다. 곽재우는 5월 중순 단성에서 김성일을 만나 진주까지 동행한 후 의병을 재건했는데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김성일은 전 목사 오운(吳澐)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삼아 모병 임무를 맡게 하고 그때까지 모은 병력을 모두 곽재우 아래 편제해 주었다.
정암진 전투[20]는 곽재우 의병대가 간신히 재정비를 마친 시점에서 벌어졌다. 곽재우의 전과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정암진 전투지만 정암진 전투의 정확한 날짜와 전투 내용에는 불분명한 점이 있다. <용사일기>에는 정암진에 이른 왜군이 의령 쪽으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짧은 기록만 존재한다. <선조실록>도 마찬가지이며(임진년 6월 28일 기사, 수정실록 임진년 6월 1일 기사) <쇄미록>에는 곽재우가 정암에 진을 치니 왜적이 김해로 돌아갔다는 전투를 했다는 말인지, 안 했다는 말인지 분간하기 힘든 모호한 기록만 전한다. 정암진 전투를 기록한 사료 중 가장 접하기 쉬운 사료는 <난중잡록>으로 5월 26일 의령의 정진(鼎津)으로 쇄도하는 왜군을 곽재우가 의병을 매복시켜 격퇴했다고 짤막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성 출신 의병장 신흘이 남긴 <난적휘찬(亂蹟彙撰)>에는 보다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전라 순검사라고 칭하는 왜적이 정암진을 건너야겠다는 격문을 돌렸는데, 그 격문에는 맞이하는 자는 안전하고 항거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씌어 있었다. 모든 사람이 어쩔줄 모르며 항간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이에 곽재우가 분연히 크게 꾸짖기를
"감히 말하노니, 적을 맞이하는 자는 죽으리라."
하고 적에게 보내는 격서를 쓰기를, 천자께서 네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사실을 들으시고 미리 홍의 장군을 보내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중에 습격하도록 하셨노라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한 사람에게 붉은 옷으로 갈아 입혀 산 위에서 내달리게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 같은 색깔의 옷을 입혀 말을 타고 산 위로 치달리도록 하여, 서로 바라보이는 땅을 달리게 하였더니 능히 산골짜기를 날아 넘는 듯했다. 저쪽에서 사라지면 이쪽에서 나타나고, 이쪽에서 사라지면 저쪽에서 나타나는 왕래 동작이 깜짝할 사이인지라, 왜적이 몹시 이상하게 여기다가 마침내 놀라 흩어져 강을 건너지 못했다.
"감히 말하노니, 적을 맞이하는 자는 죽으리라."
하고 적에게 보내는 격서를 쓰기를, 천자께서 네놈들이 우리나라를 침범하려 한다는 사실을 들으시고 미리 홍의 장군을 보내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도중에 습격하도록 하셨노라 하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한 사람에게 붉은 옷으로 갈아 입혀 산 위에서 내달리게 하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 같은 색깔의 옷을 입혀 말을 타고 산 위로 치달리도록 하여, 서로 바라보이는 땅을 달리게 하였더니 능히 산골짜기를 날아 넘는 듯했다. 저쪽에서 사라지면 이쪽에서 나타나고, 이쪽에서 사라지면 저쪽에서 나타나는 왕래 동작이 깜짝할 사이인지라, 왜적이 몹시 이상하게 여기다가 마침내 놀라 흩어져 강을 건너지 못했다.
<기재사초> 임진일록 4권에서는 김수와 곽재우의 충돌과 이에 대한 조정의 대응을 서술하며 간략하게 정암진 전투를 언급했다.
곽재우(郭再祐)는 의령(宜寧) 사람으로 승지 곽규(郭﨣)의 아들이다. 일찍이 글을 업으로 하였는데, 적이 의령 근처로 온다는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그들을 회유하기를,
"적이 이미 육박해 왔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가 적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오. 우리 마을에서 젊은 나이로 싸울 만한 자가 수백 명이 됩니다. 만일 마음을 같이하여 정진(鼎津)을 근거지로 삼아 지키면 마을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겠소."
하니, 여러 사람이 호응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나룻가 언덕 위에다 매복케 하였다. 또 호각 부는 자를 많이 구해서 붉은 옷을 입혀서 산 꼭대기로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사면에 벌여 두고, 적이 이르면 사면에서 일제히 호각 소리를 내고 언덕 뒤의 복병은 또 마구 쏘기로 했다. 적은 이것을 보고 놀라 흩어졌다. 드디어 적의 목 백여 급을 베었고, 이 때문에 적은 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했다.
"적이 이미 육박해 왔으니, 우리의 부모 처자가 적에게 붙잡히게 될 것이오. 우리 마을에서 젊은 나이로 싸울 만한 자가 수백 명이 됩니다. 만일 마음을 같이하여 정진(鼎津)을 근거지로 삼아 지키면 마을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겠소."
하니, 여러 사람이 호응하였다. 드디어 군대를 나룻가 언덕 위에다 매복케 하였다. 또 호각 부는 자를 많이 구해서 붉은 옷을 입혀서 산 꼭대기로 올라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사면에 벌여 두고, 적이 이르면 사면에서 일제히 호각 소리를 내고 언덕 뒤의 복병은 또 마구 쏘기로 했다. 적은 이것을 보고 놀라 흩어졌다. 드디어 적의 목 백여 급을 베었고, 이 때문에 적은 감히 다시 가까이 오지 못했다.
<정만록>에서도 위 기록들과 유사하면서 보다 세밀한 전황을 기록하고 있다. <정만록>에 의하면 곽재우는 장사 10여 명을 뽑아 자신과 똑같이 붉은 옷을 입히고 백마를 태워 매복시킨 다음 스스로 미끼가 되어 왜군을 유인했다. 10여 리쯤 왜군을 유인한 뒤 화살로 신호를 보내자 곽재우와 같은 복장을 한 장사 10여 명이 불시에 튀어나왔다. 놀란 왜군이 혼란에 빠지자 숲에 숨겨두었던 강노를 쏘아 왜군을 공격했다.
왜군은 강기슭으로 달아났는데 이는 곽재우가 의도한 것으로 그는 물이 잔잔한 곳에 장애물을 설치해 놓았다. 곽재우는 장애물에 막힌 왜군을 급습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水爲不流 其設機應賊 以小擊中多如此) <난적휘찬>, <기재사초>, <정만록>의 기록은 모두 공통적으로 정암진에서 붉은 옷을 이용한 기만술을 사용해 왜군을 혼란시켰다고 적고 있다. 숫자가 적은 곽재우 의병대는 임진왜란기 대부분의 의병대가 보여준 매복 후 궁시 공격으로 교전했을 가능성이 높고 여기에 곽재우 특유의 기만전술이 더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아는 정암진 전투는 왜군이 도하 지점을 골라 푯말을 세워두고 가자 푯말의 위치를 바꿔 늪으로 유인한 다음 기습했다는 것인데, 상술한 사료들에서는 그런 기술은 일언반구도 없다. <망우선생문집>에 포함된 '용사별록'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홍의장군전>에 서술된 기록이다. 1636년 둘째 사위 성이도가 주도하여 <망우선생문집>을 편찬했는데 조카 곽유와 곽륭이 양을 늘려 재판한 때가 1689년으로 곽재우가 죽은 지 73년 후이다. 사건 발생 연대와 시간 차이가 너무 길고 곽재우가 소과 파방 후 은둔해서 살았다고 적으며 곽재우와 김성일 같은 남인계 관료들의 관계를 축소하는가 하면 정암진 전투가 첫 전투인걸로 적는 등 오류가 적지 않다. <청장관전서>는 1795년에 출간되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왜군이 남긴 푯말을 바꿔서 혼란시키고 기습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윤색일 가능성이 높다.
초유사 김성일은 운봉현감에게 보낸 왜군 동향 기밀문서에서 5월 22일 김해의 왜군이 전라감사, 어사, 도사, 찰방을 자처하며 전라도로 간다는 통문을 함안, 의령, 삼가, 단성, 산음, 함양 등 경상우도 여러 고을과 남원, 전주 같은 전남 일대에 보내고 있으며 이들이 이미 함안, 의령, 정진에 도달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난중잡록 5월 20일조) 이 기록을 신뢰한다면 정암진 전투는 5월 22일 이후에 벌어졌을 것이다. 정암진을 건너 삼가, 함양을 지나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저지되자 왜군은 북상해서 다른 길을 찾았다. 왜군을 인솔한 안코쿠지 에케이는 전라감사 권한대행을 자처하며 영산과 창녕을 거쳐 기강을 건너려 했다. 신속히 이동한 곽재우군은 산 속에 숨어있던 백성을 불러내 타이르고 창고의 곡식을 풀며 방어 태세를 다잡았다.(난중잡록 임진년 6월 5일조) 이에 안코쿠지 군은 다시 현풍의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 오늘날 달성군)을 거쳐 뱃길을 통해 성주로 향했으나 거기까지 추격해온 곽재우 군과 소규모 교전을 벌이고 퇴각했다.
곽재우가 왜장 안국사와 강을 격하고 서로 맞서자 왜적은 강을 건너지 못하여 강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재우 역시 서로 바라보며 쫒아 올라가 성주 안억역로에 이르자 정병을 거느리고 가까이 나가서 교전했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겨우 목 몇 급만 얻고서는 물러났다.
ㅡ 난중잡록 임진년 6월 19일조
ㅡ 난중잡록 임진년 6월 19일조
<난중잡록>에서는 쌍산역에서 안코쿠지 군을 태운 배가 18척이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 수치가 정확하다면 안코쿠지 군은 많이 잡아도 2천 미만이다. 물론 계사년에 세가 크게 불어난 상황에서도 2천에 불과했던 곽재우 의병 부대보다 월등히 많은 숫자였을 것이다. 곽재우와 안코쿠지 군의 전투는 정암진 전투 하나만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낙동강 지류를 중심으로 벌어진 경상우도 방어전으로 정암진 전투 외에 최소 1번의 전투가 더 있었다. 이로써 경상우도로 통해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왜군의 시도는 일단 좌절되었으며 경상우도의 저항이 만만치 않다고 여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방향을 바꿔 무주, 금산 방면에서 전주로 내려가려 했으나 전라도 의병과 관군이 이치, 웅치, 금산 전투로 저지하였다. 안고쿠지 군을 물리친 다음에도 곽재우 의병 부대는 의령, 삼가 지역에 머무르며 낙동강 유역에 출몰하는 왜선과 왜군을 공격했다. 이 중 구체적으로 전적이 전해지는 것은 <난중잡록> 6월 19일조의 기록이다.
낙동강의 적선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오다 2척은 침몰하고 한 척은 노를 풀어 두고 내려갔다. 곽재우가 전선을 포획하여 27급을 목 베었다. 배에 실려 있는 것이 모두 궁중의 보물이었으며, 태조가 신었던 신발도 또한 있어 곧 이것을 초유사에게 보내었다.
정암진은 곽재우와 다른 연관성이 있다. 곽재우의 첩 장인인 이로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전쟁 준비에 대해 비판하면서 '우리 고을의 정암진을 왜적이 어떻게 넘겠느냐?'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성룡은 전후 집필한 징비록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왜적을 막지 못했는데 한줄기 개울 가지고 이러니 참으로 우습다'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정작 그 정암진을 왜군이 넘지 못하게 막은 사람이 바로 이로의 사위인 곽재우인 것.
<난중잡록>에서는 19일에 실었는데 <난중잡록> 7월 3일에 김성일이 곽재우와 김면에 되찾은 궁중 유물을 남원에 옮겨 보관토록 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아 실제로는 6월 말이었을 수도 있다. 위 전투는 신흘의 <난적휘찬>에서는 6월 18일조에 기록했다. 성공적으로 왜적으로부터 거점을 방어한 곽재우는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용인 전투 패배로 위신이 떨어진 김수를 강하게 공격했다가 하마터면 위험 인물로 조정에 찍힐 뻔했다. 조정과 곽재우 사이의 오해를 풀어주고 우도감사가 된 김성일은 삼가현의 윤탁 의병대를 곽재우에게 배속하여 곽재우의 군세를 크게 불려주었다. 곽재우는 이 병력을 의령과 삼가에 나눠 주둔시키고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7월 1일 김수에게 현풍, 창녕에 있던 왜군의 움직임이 심상찮으며 대규모의 왜 선단이 낙동강 하구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온다.[21] 이 첩보에 등장한 왜선 70여 척은 의령에 상륙하려 했으나 곽재우 부대에게 공격받아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22] 왜군의 도하 시도를 저지한 뒤 곽재우는 왜군에 항복하여 길잡이 노릇을 하던 공휘겸을 매복 작전으로 생포하여 처형했다.[23]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간략하게 복병으로 사로잡았다고 기록했는데 <난적휘찬>에는 보다 자세한 전말이 기록되었다. 영산의 영반이었던 공휘겸은 왜란이 발발하자 한양으로 간 다음 집에 편지를 보내 경주부윤이나 밀양부사 정도는 될 수 있다고 하며 임금을 두고 불경한 발언을 쏟아내었는데 왜군의 침입으로 혼란한 틈에 역모를 꾀하려 했던 듯하다. 이 소식을 접하고 곽재우는 공휘겸이 영산에 돌아옴을 기회로 삼아 죽이려 했으며 공휘겸과 동향 사람으로 친분이 있던 훈련봉사 신초와 접촉하여 그에게 공휘겸을 끌어오게 했다. 사람을 모았으니 같이 모의를 하자는 신초의 말에 공휘겸이 넘어와 순순히 따라왔다가 숨어있던 곽재우의 부하들에게 사로잡혔으며 곽재우는 공휘겸의 팔다리를 하나씩 자른 다음 참수했다.
7월 이후 곽재우는 왜군이 점령한 창녕, 현풍, 영산 3개 현의 탈환 작전에 참여한다. 고령, 합천, 초계 지역 의병들까지 소집해 진행된 이 작전은 <난중잡록> 기사, 김성일의 장계, <고대일록>, <정만록>을 모두 종합해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난중잡록> 7월 9일조에서 전하는 3개 현 탈환전은 다음과 같다. 곽재우가 정예 부대 수백 명을 거느리고 현풍에 주둔 중인 적을 유인하려 했으나 적이 반응하지 않자 밤중에 산에 올라 가지가 5개 달린 횃불을 들어 수가 많은 듯이 속이고 함성과 포성으로 왜군을 심리적으로 공격하자 이튿날 왜군이 달아났으며 5일 뒤 창녕의 왜군이 그 소문을 듣고 역시 달아났다.
이후 김성일에게 보고하고 영산 공략에 나서니 윤탁이 지휘한 합천, 삼가 지역 의병들도 지원왔으며 적진과 마주보는 산 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대치했는데 왜군 기병 1백여 명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역시 다음날 조선군이 만만치 않음을 본 왜군이 퇴각한 덕에 영산까지 수복했다. 그런데 김성일이 8월에 조정에 올린 장계에 의하면 창녕은 탈환되었고 현풍과 영산은 여전히 왜군의 수중에 있었고 초계, 합천, 고령의 병력으로 현풍의 적을 공격하고 창녕과 의령 병력으로 영산을 공격하는 탈환 작전이 논의 중에 있었다. 곽재우는 윤탁, 전 목사 오운과 함께 창녕, 영산, 현풍 및 낙동강을 왕래하는 왜군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 장계는 <난중잡록> 8월 4일조에 실렸는데 조경남은 왜군의 이동이 일정치 않아 그랬다고 논평했지만 <정만록> 7월 18일조에 창녕, 영산의 왜군이 의령, 초계 방면으로 침입하려 한다는 대목이 있다. 아마도 최소한 7월까지는 3개 현을 왜군이 점령했으나 이후 탈환했을 것이다. <고대일록> 9월 16일조에 곽재우가 의령과 창녕 군사를 이끌고 영산의 왜적을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김성일이 장계에서 밝힌 의령과 창녕 병력으로 영산을 탈환한다는 작전과 일치한다. 이를 보아 영산을 9월 중순에 탈환했고 비슷한 시기에 현풍도 탈환했다고 짐작할 수 있으므로 <난중잡록> 기사는 조선군의 작전 시기를 2달 이상 당겨지고 순서도 현풍-창녕-영산 순으로 바뀐 채 잘못 기록되었다.
10월에는 진주 대첩에 원군으로 참여했다. 왜군이 진주를 노린다는 첩보를 입수한 김성일은 곽재우, 윤탁, 초계의 정언충, 합천의 김준민, 고성의 김준민, 전라 의병장 최경회 등에게 급히 진주를 구원하라는 영을 내렸다. 이때 지시를 받은 장수들의 행동을 보면 윤탁과 정운충은 병사를 각각 2백, 1백을 거느리고 마현[24]에서 왜군과 교전하다 군사를 모두 잃고 돌아왔다. 김준민은 결사대 80명을 꾸려 단계현[25]에서 관사에 불을 지르고 약탈하던 왜군을 급습해 공을 세웠다. 곽재우는 이들과 달리 직접 교전을 회피하고 심대승에게 산에 올라 횃불을 밝히고 포성을 울리며 전라 의병 1만과 홍의장군이 내일 도착해 왜군과 싸울 것이라 소리치는 심리전을 벌였다.[26] 곽재우가 지속적으로 공을 세우자 조정은 관직을 내려 치하하였다.
1592년 6월 29일 유곡찰방에 임명되었고 1592년 8월 16일 비변사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도 이를 내세우지 않은 점을 고려해 5품 벼슬을 제수할 것을 건의함에 따라 형조정랑에 임명되었다. 10월 23일에는 김면이 당상관에 제수되었으니 곽재우도 올리는게 좋겠다는 선조의 뜻에 의해 정3품 통정대부에 제수되었다. 12월 9일 비변사에서는 곽재우 의병대를 불러 올려 근왕 임무에 투입하자는 건의를 내기도 했는데 실제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계사년 1월 기준으로 2천 명이었던[27] 곽재우 부대에 조정이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28]
1593년 4월 15일 성주목사에 임명된 곽재우는 함안, 의령 등지에서 활동하는 왜군의 동태를 파악해 보고하고[29] 도체찰사 류성룡의 지시를 받아 정암진을 방어했다.[30] 선조 역시 신뢰를 내비치며 9월 8일 목사로만 두지 말고 조방장을 겸임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곽재우는 전쟁이 장기화될 기미를 보였던 1593년 말부터는 경상도 지역의 산성 수축과 정비에 많은 공을 들였다. 임진왜란 초창기 전면 패주의 원인에는 평지의 읍성 위주로 짜여진 방어 계획도 있었는데 곽재우는 전쟁 초기부터 산성 위주 방어 전략을 구상했던 듯하다.[31] 비변사에서도 그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삼가, 의령, 단성, 고령 등 낙동강 일대의 주요 산성들을 수축, 관리하는 일을 총괄케 하였다.[32]
곽재우는 허가를 받은 뒤 경상도 각 지역을 순시하며 가야산의 용기산성, 지리산의 귀성산성 등 방어 거점으로 적합한 산성들을 보고하고 수축을 전담했다.[33] 휴전 협상 기간인 1594년 10월 윤두수가 강력히 주장하여 시행된 장문포 해전에 참가해 김덕령과 함께 육군을 맡았으나 적이 적극 대응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리수가 많은 작전이라 실패했다. 1594년 12월 진주목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때도 성주목사 시절과 마찬가지로 조방장을 겸한채 경상우도 군무와 산성 수축 임무를 계속 담당했다.
1594년까지 열성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곽재우는 1595년 말 돌연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사직 기사나 사유는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지지 않으나 1595년 12월 5일 기사에서 이덕형이 강화 협상에 불만을 가져 떠났다고 언급한다. 조정에서는 곽재우를 재등용하려 했으나 정유년까지 거의 2년을 초야에 묻혀서 지냈다. 도체찰사 이원익이 격서를 보내 2~3차례 불렀으나 병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34] 이 때문에 선조가 곽재우에게 보내던 신뢰도 흔들렸는데 왕명의 대행자인 도체찰사의 지시에 불응한 자를 등용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이몽학의 난에 김덕령, 홍계남과 함께 이름이 거론되는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선조가 처음부터 다수의 증언이 쏟아져 나온 김덕령을 제외한 나머지는 불문에 부쳐 화를 입지는 않았다. 1596년 11월 비변사에서 다시 한번 곽재우의 재등용을 건의했는데 이때는 선조도 반대하지 않아 경상좌도 방어사로 제수되어 정유재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막아 화왕산성을 수비했다.[35] 이때 서기로 인연을 맺은 이가 뒷날 역모에서 곽재우를 구해주고 전기를 쓴 배대유였다. 그러나 재출사 기간은 1년이 되지 않았으며 1597년 8월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사직하고 계모의 묘가 있는 울진에 머물렀다. 조정이 수 차례 기복 명령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왜란이 끝날 때까지 재야에 머물렀다.
2.4. 말년
정유재란이 끝난 이후 곽재우는 1599년 2월 진주 목사, 9월에 경상 좌병사에 임명되어 영남 지역의 군무를 총괄하였다. 10월 임지에 부임한 곽재우는 12월 장계를 올려 영남 방어 대책을 건의했는데, 핵심은 과거에도 주장했던 산성을 거점으로 한 방어였다. 그러나 불과 4개월 만인 1600년 2월 한 장의 장계를 선조에게 올려 당대 정치와 군정의 문제점을 지적한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 장계에서 그는 엄청난 피해를 복구하고 전후 복구 사업에 매진해야 할 시점에서 조정 신하들은 붕당을 나누어 서로 대립하고 배척하기만 하며 국내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 화의가 필요함에도 일본과의 화의를 반대하고 사신을 구금해 일본을 자극하는 외교적 미숙함, 이원익 같은 경륜을 갖춘 명신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정승직에서 몰아내는 인사, 수군만 중시하고 육군을 등한시해 산성 수축과 방어 체계 수립에 소홀한 군사 정책 등 국정 전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었다.[36]일본과 화의를 주장하는 등 장계 내용도 큰 문제였지만, 왕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낙향해버린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곽재우가 왕명은 기다리지도 않고 낙향해버렸다는 경상감사의 보고를 들은 관료들은 당장 곽재우를 체포해 추국할 것을 주장했다. 선조는 전후부터 심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다고 생각한 선조의 분노는 대단했다. 즉시 형벌이 논의되었고 의금부에선 대명률에 따라 장 100대에 변방으로 보낸 군역을 지게한다는 조항이 있음을 보고하자 선조는 그 정도론 안 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후 곽재우가 받은 형벌은 선조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곽재우의 문집인 망우선생문집에 수록된 연보(年譜)에는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되었다가 1602년에 풀려났다. 이 유배는 곽재우 인생의 큰 전기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도가의 영향을 받아 벽곡찬송[37]을 시작했다.
1600년 6월, 1601년 3월 곽재우를 다시 서용하는 방안이 논의되었으나 선조는 단호히 반대했다. 이는 공신책봉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공신도감에서 경상 우도를 보전한 공을 들어 곽재우를 공신으로 책봉하자 건의하자 조선군의 공적 자체를 폄하하고 의병은 아예 없었던 사람 취급해 거부 의사를 밝혔다.[38] 그렇다고 곽재우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었던 공신도감은 1603년 4월 공신에 책봉될 만한 장수 26명을 선발해 보고할 때 곽재우의 이름을 넣었으나, 곽재우는 결국 선무공신에는 들지 못했다.
유배에서 풀려나고 2년이 지난 1604년 곽재우는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찰리사에 임명되어 원수 지휘 하에 경상도 지역의 방어와 군사 훈련 등의 군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때도 변함없이 산성의 수축과 관리에 집중했다. 선조실록 1604년 4월 14일 장계에서 그는 안동의 천생 산성은 그 형세가 험난한 곳으로 전에 이시언이 수축공사를 시작하여 대강 수선을 마쳐 놓았으므로, 자신이 직접 가서 형세를 살펴보고 미진한 부분을 보수하여 수축을 마무리 짓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를 곱지 않게 본 대북의 비방을 받아 1년을 채우지 않고 친가의 고향 현풍에 낙향해 망우정을 짓고 벽곡을 하며 지냈다. 곽재우의 벽곡에 대해선 조정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1607년 5월 4일 사헌부에선 곽재우를 탄핵하여 벽곡은 도가의 방술로서 유교적 교화에 장애가 되니, 곽재우를 서용하지 말고 선비들 중에 벽곡을 따라하는 자를 적발하여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자고 청했다. 곽재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선조지만 벽곡에 대해선 그런 것으로 죄를 주겠냐며 각하하고 이후 재론하지 말게 했다. 남명 조식의 제자인 사람이 도가의 수련 방법에 심취함을 두고 이래저래 말이 나왔는데, 윤근수는 김덕령이 누명을 쓰고 죽은 것을 보고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 세상에서 도피하기 위한 방법이라 해석했다.[39] 그러나 김덕령과 곽재우의 교분이라곤 1594년 장문포 해전에 함께 참전했던 것뿐이고 김덕령이 옥사한 후에도 3번이나 더 관직에 나갔다는 점을 고려하면 도가 쪽에 관심이 생겼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조식의 제자로 정인홍 같은 북인계 인사들과 학맥은 같았지만, 정작 정치적 지향이나 관직 생활은 남인에 가까웠다. 창의 초기에 초유사 김성일에게 큰 은혜를 입었고 1593년~1596년엔 영의정 류성룡, 1597년~1598년엔 체찰사 이원익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 외에 그를 추천한 김응남, 정구, 김우옹(이쪽은 동서지간), 이덕형, 이정형은 모두 남인계 중신이었다. 서인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아 윤두수 - 윤근수 형제도 그를 높이 평가하고 중용할 것을 주장했다.[40] 반면 집권당인 대북과는 원수나 다름 없었다. 대북은 주화론을 빌미로 류성룡을 탄핵했는데 곽재우는 1600년 상소를 올려 주화론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남인의 중신 이원익을 정승직에서 체직한 것을 비판했으며 대북계 대사헌 홍여순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갔고 해배 후엔 벼슬자리를 얻었을때도 근거없는 소문에 마음 고생을 해야 했다.[41] 사적으로 절친했던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북인 세력의 손으로 몰락했다. 김우옹은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인천과 청주를 전전하다가 생을 마감했고, 정구는 대구 칠곡에 죽은 듯 은거했다.
그 많던 재산은 의병 활동에 다 털어넣었고 전후에는 경제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1608년 광해군이 즉위했을 무렵에는 단벌 옷에 선전관이 보낸 교지에 답서를 보낼 종이 한 장도 없는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그래도 광해군이 곽재우를 높이 사서 경상우병사, 삼도수군통제사, 함경도관찰사, 전라병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 고위직에 차례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북과 척을 진 관직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그는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상소를 올려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낙향하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의 정치 생명은 1613년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으로써 끝났다.[42] 이 상소에 그나마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광해군도 등을 돌렸고 기회를 잡은 대북은 1614년 5월 터뜨린 자작 역모극에 곽재우를 집어 넣어 죽이려 했을 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장령 배대유의 변호 덕분에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자작 역모극 사건을 끝으로 그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이후의 일화에 따르면, 정인홍 일파의 사람이 곽재우를 찾아와서 대화하는데 곽재우는 고명 7신[43]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에 그 사람이 기뻐하며 왜 그러한지를 말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7신은 이미 선왕(先王)의 부탁을 받았으니 마땅히 의(㼁)와 함께 죽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아무말 못한 채 구차히 살고 있으니, 그 죄가 크다.’
쉽게 표현하자면, 곽재우는 "선왕께서 영창대군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리셨는데도 그자들은 결국 대군을 못 지켰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말한 것. 이에 그 일파 사람은 매우 두려워했다고. (출처: 광해군일기 중초본 114권, 광해 9년 4월 27일 신유 13번째기사 곽재우 졸기) 곽재우는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세를 풍미한 의병장이 남긴 것이라고는 단벌 옷에 거문고, 낚싯배 한 척이 전부였다.
退居琵琶山(퇴거비파산) 물러나 비파산에 살면서
朋友憐吾絶火煙(붕우연오절화연) 친구들은 속세와 인연 끊은 나를 불쌍히 여겨
共成衡宇洛江邊(공성형우낙강변) 함께 낙동강 변에 집을 지어주었네
無饑只在啖松葉(무기지재담송엽) 굶지 아니하나 다만 솔잎을 씹고
不渴惟憑飮玉泉(불갈유빙음옥천) 목마르지 아니하나 오직 맑은 샘물 마시네
守靜彈琴心淡淡(수정탄금심담담) 고요함을 지키며 거문고를 연주하니 마음은 담담하고
杜窓調息意淵淵(두창조식의연연) 두견새 우는 창가에 앉았더니 생각은 맑고 깊어라
朋友憐吾絶火煙(붕우연오절화연) 친구들은 속세와 인연 끊은 나를 불쌍히 여겨
共成衡宇洛江邊(공성형우낙강변) 함께 낙동강 변에 집을 지어주었네
無饑只在啖松葉(무기지재담송엽) 굶지 아니하나 다만 솔잎을 씹고
不渴惟憑飮玉泉(불갈유빙음옥천) 목마르지 아니하나 오직 맑은 샘물 마시네
守靜彈琴心淡淡(수정탄금심담담) 고요함을 지키며 거문고를 연주하니 마음은 담담하고
杜窓調息意淵淵(두창조식의연연) 두견새 우는 창가에 앉았더니 생각은 맑고 깊어라
3. 성격
가끔은 지나쳐서 화를 부를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또한 경솔한 행동을 자주 했는데 대표적인 게 경상감사 김수와의 갈등으로 사실 김수와 곽재우는 전쟁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수는 열성적으로 전쟁 대비를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읍성 중심의 축성 작업이었다. 김수는 축성에 필요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향교 유생을 뽑는 고강을 다른 때보다 엄격하게 실시한 후 떨어진 유생들을 축성 작업에 투입시켰다. 이에 지역 사족층은 반발했고 합천 지역 유지였던 문덕수가 선봉에 서서 "지방관들이 탐학을 일삼고 김수는 실정을 거듭한다"며 비판하고 나섰다.이에 김수가 문덕수를 잡아가두자 불만은 더 커졌는데 문덕수의 구명에 힘쓴 그의 외조카가 곽재우의 첩장인인 이로였다. 전국에서도 사족의 세력이 특히 강했던 경상도에서 전쟁에 대비하라는 중앙의 지시를 이행하려는 지방관과 기존 이권을 지키려는 지역 사족층이 충돌한 사례인데 곽재우 역시 지역 사족의 일원인만큼 김수에게 좋은 감정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초기에도 둘 사이에는 앙금이 있었는데 처음 의병을 일으켰을 때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의령 속현인 신반현의 관청 창고에 있던 곡식, 초계 관청의 병기와 군량, 기강 기슭에 버려져 있던 조세선의 세미를 가져다 썼다.[44] 합천군수 전현룡과 경상우병사 조대곤은 이런 곽재우의 행동을 화적질로 오인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김수도 별다른 조치를 취해주지 않아 궁지에 몰린 곽재우는 병사들을 해산하고 지리산에 은거하려 했는데 이후 김성일의 도움으로 공식 의병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광, 윤석각과 함께 용인 전투에 참전했다 패배하고 돌아온 김수는 함양으로 귀환한 후 경상도 내 의병 부대를 흡수하여 감사와 병사를 중심으로 통합된 지휘 체계를 구축하려 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의병 지휘관의 반발을 불러왔다. 김면, 정인홍, 손인갑 등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연락망을 구축하고 협조적으로 나온 것으로 보이나 곽재우는 반발했는데[45] 김수의 죄목을 열거하며 "그를 당장 참해야 한다"는 격문을 경상우도 전역에 돌렸다. 지역 유림은 곽재우에게 동정적이었으나[46] 전쟁 중에 아군끼리 자중지란을 초래하고 무직자에 불고한 그가 한 도의 감사를 죽이라고 주장한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행동이었다.[47]
곽재우가 이런 식으로 관리를 죽이려든게 처음이 아니었다. 1592년 5월 단성에서 자신의 의병 활동을 공인해준 김성일을 만나고 의령에 돌아갔는데 함안군수 유숭인(柳崇仁)[48]이 몰래 의령을 지나가다 발각되었다. "왜 몰래 지나갔냐"하니 유숭인은 왜군이 쳐들어오자 성을 버리고 산 속에 숨어있다 나온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곽재우는 "전쟁 중에 성을 못 지킨 책임을 묻겠다"며 현직 지방관인 유숭인을 무기나 활로 쏴서 죽이려 들었는데 때마침 김성일에게 의령의 임시 수령으로 임명받아 와 있던 조종도(趙宗道)가 급히 막아섰고 유숭인을 곽재우 진영에 머물게 했다. "김수를 죽여버리겠다"는 곽재우는 워낙 강경파에 강한 군인이라 이 엄포는 절대 허언이 아니었으며 진심이었다. 곽재우를 지속적으로 옹호하고 지원해준 김성일조차 조정에 올린 보고에서 "패주한 수령이나 변장의 이야기만 들으면 참수를 주장하고 감사와 병사에게까지 불손한 말을 늘어놓아 미친 도적이라는 비방을 받는다"며 그 성품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49] 김수는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려 곽재우를 강하게 공격했는데 김수의 장계를 본 선조는 곽재우가 '자기 군세를 믿고 딴 마음을 품은 게 아닌가'하고 의심을 품게 되었다. 곽재우 의병 부대의 2번째 위기였는데 이번에도 구원 투수는 김성일이었다. 김성일은 조정에 전후 사정을 설명해 오해를 풀고 곽재우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그의 능력이 꼭 필요함을 역설했으며 곽재우에게도 따로 서신을 보내 달래고 김면 등 다른 의병장에게도 서신을 보내 관군과의 협력을 거듭 강조했다. 전모를 파악한 조정은 논의 끝에 김성일을 경상우도 감사로 삼고 김수는 한성판윤으로 전임시켜 사건을 일단락을 지었다.
4. 기타
- 의병장들을 야사와 문중이 과장해서 실제 행적을 조사해보면 야사 속 기묘한 전략은 허구인 경우가 많은데 곽재우는 일반인들이 흔히 아는 홍의장군이라는 칭호나 부하들에게 붉은 옷을 입혀 적 혼란시키기, 매복, 기습, 각종 기만술 등이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은 물론 곽재우를 옆에서 본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서 확실하게 교차검증된다. 이 정도로 대중의 기억과 실제에 차이가 없는 의병장도 드물다.
- 전투시 아버지 곽월이 명나라에 갔을 때 가져온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철릭을 착용해서 적아를 막론하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렸다.[50] <난중잡록>에서는 붉은 생초(紅綃)에 안을 댄 옷을 착용하고 당상관(堂上官)의 입식(笠飾 장식)을 갖춘 갓을 쓰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을 칭했다고 적었다.
- <난중잡록>에서는 곽재우의 전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정보 수집과 정찰을 중시해 아군 진영에서 왜군 진영까지 2, 3식경(食頃)의 거리마다 척후소를 세워 적의 동향을 은밀히 보고하도록 조치해 왜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최대한 여유있게 군사를 운영하려 노력했다. 긴요한 지형에는 정예 병력을 숨겨두었다가 안심하고 다가오는 적을 활로 저격해 진격 의지를 꺾었고 적의 수가 많다 싶으면 적진이 잘 보이는 산기슭에 가지가 5개 달린 횃불을 든 군사들을 배치하고 소리를 지르게 해 아군의 숫자가 많은양 속였다고 한다. 적이 대담하게 나오면 쓸 수 없는 계책이므로 세심한 정찰로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게 중요했을 것이다. 나타날 때는 신속했지만 움직일 때는 요란하게 북을 치며 여유있게 움직여서 적이 아군의 숫자를 짐작하기 힘들게 하기도 했다. <학봉전집>에 김수와의 충돌로 위기에 빠진 곽재우를 구명하는 신구차가 수록되었다. 김성일은 곽재우의 전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는데 적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먼저 앞장서서 힘차게 돌진하였으며 행군시에는 말 위에서 북을 치거나 사람을 시켜 피리와 호각을 불며 당당하게 행군해 왜군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음을 드러냈다. 전투에 임할 때는 산이나 숲 속에 의병(疑兵)을 숨겨두어 피리 불고 북을 치며 떠들게 했고 복병도 많이 써서 감쪽같이 위장했다가 적이 이르면 사살하거나 강 주변에 매복해 있다 왜군의 배를 발견하면 강가를 따라 올라가며 활을 쏘았다.
-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수급을 베기보다 적을 1명이라도 더 살상하는데 중점을 뒀다. <송압집>에 실린 학봉 김선생의 용사사적(鶴峯金先生龍蛇事蹟)에 의하면 곽재우는 거병 시작 때부터 적의 수급을 베는 것을 금지하고 "전공을 탐내어 참수를 즐기면 반드시 해를 입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사살한 왜적은 비록 많았지만 왜적의 머리를 베러 감히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없었는데 첩장 이로가 나서서 "본래 의도는 매우 좋으나 종군하여 힘써 싸우는 자들 중 누가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수급을 베지 못하게 하면 결국에는 반드시 태만해질 것입니다."하고 충고하자 방침을 바꾸어 참수를 허락해 공을 세우면 최대한 챙겨주려 노력했다.
- 가끔은 지나쳐서 화를 부를 정도로 강직한 성품이었고 왜군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심도 엄청 났지만 지휘관으로서는 지는 싸움, 공연한 인명 손실을 철저하게 피하는 유연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곽재우가 불리한 상황에서 정면 대결을 불사하기는 성주에서 안고쿠지 에케이와 싸울 때 1번뿐이었다. 그외에는 철저한 기만 전술과 매복, 사전 정찰로 최대한 유리한 전장 환경을 조성해 놓고 싸웠다. 제1차 진주성 전투 때는 윤탁, 정언충처럼 숫적으로 월등한 적에게 정면 승부를 거는 대신 심리전만 수행했고 제2차 진주성 전투 때는 체찰사 한효순이 구원에 나서라고 지시했는데도 거부했다. 병사를 다루는 방식에도 절도가 있었는데 수급을 탐하지 말라는 그의 지시를 아무도 어기지 않은데서 알 수 있듯 군기는 확실하게 잡았지만 아래 사람들을 너무 엄하게 다뤄서 말이 나왔던 김덕령과 달리 못 이겼다고 채근하는 일도 없었다. 이 때 곽재우가 가진 왜군에 대한 적개심을 왜군을 잡으면 산채로 심장을 구워먹는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가슴이 뜨거웠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임할 때는 아군의 현실을 파악하고 그에 맞춰 움직이는 냉철함이 있었다.
- 군인으로서 전공으로 보나 지휘력으로 보나 가장 거품이 없는 의병장이라 할 수 있는데 보고 들은 모든 일을 꼼꼼히 기록한 조경남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난중잡록>이 아니었다면 곽재우는 <조선왕조실록>의 긍정적인 평가와 후손이 지은 화려한 행장에 비해 실체가 없는 장군이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김덕령, 정기룡과 도매금으로 묶였을지도 모른다. 곽재우의 평가는 높을 수 밖에 없는데 서인들이 선정한 임진 4충신[51]에도 포함되고 동인들이 선정한 임진왜란 3대 의병장[52]에도 포함된다. 같은 당색에 포함될 동인들이 띄워주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서인들이 뽑은 충신 명단에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 곽재우가 임진왜란 이후에 정치적으로 뭘 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53] 활약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여러 책에서 언급되는 일화로 화왕산성 전투를 할 때 곽재우가 일부러 병사가 적은 것처럼 왜적들을 속인 다음 나무 상자 몇 개를 놓아 두었다. 왜군들은 화왕산성을 침략하려고 할 때 상자를 발견하고 식량이 들었을 거라 생각하여 열었는데, 벌떼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왜군들이 크게 혼이 난 틈을 타 매복해있던 의병들이 왜군들을 무찔렀다. 그 뒤 퇴각한 왜군들이 또다른 상자들을 보고 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하지 않는다 하여 불을 질렀는데 거기에는 화약이 들어있었다. 여러 왜군들이 폭사하여 혼란스러운 틈을 타 기습하여 또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화왕산성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었다는 일화가 있다.[54]
- 2010년부터는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킨 1592년 음력 4월 22일을 양력으로 환산해서 6월 1일을 '의병의 날'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에 곽재우의 동상이 있는데 동상이 있는 공원의 이름은 곽재우의 호 '망우당(忘憂堂)'에서 딴 망우당공원이다. # 1971년 4월 22일 곽병원[55]의 창립자 곽예순 박사가 조성했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대암리의 현풍 곽씨 문중 묘역인 현풍 곽씨 신당묘소에 홍의장군 곽망우당 묘소가 있는데 본인과 부인 김씨의 합장묘이다. 대구국가산업단지 서남편에 있는데 대중교통으로는 쉽게 올 수 없으니[56] 방문하려면 반드시 자가용을 이용하도록 하자. 묘소 앞에 주차장이 있고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자가용 이용에 불편할게 없다.
5. 대중매체에서
-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에서는 배우 이동신이 연기했다.
- 게임 <임진록 2> 및 조선의 반격에서 분신술을 사용한다. 부하들에게 자신과 같은 붉은 옷을 입혔다는 것을 반영했다. 참고로 조선의 반격에서는 용왕탕 때문에 작중 최악의 흉캐이다. 그냥 용왕탕 먹어서 마나 만땅 만들고 분신술만 쏴주고 도망가면 상대방 적진이 초토화 된다.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는 배우 임혁이 연기했다.나, 의령 사람 곽재우다!이 사람, 벼슬이라고는 닭벼슬도 하지 못한 이 곳 의령땅 곽재우요. 비록 나라의 녹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우리의 조상과 우리의 탯줄이 묻힌 이 산천이 왜적들에게 유린되는 참상을 차마 눈을 뜨고 보지를 못하여 붓 대신 칼을 들고 일어났소이다.의기 있는 조선의 장정들은 들으시오. 왕실과 조정이 비록 왜적들을 피해 북으로 몽진하였다고는 하나 우리마저 손을 놓고 산 속으로 숨어든다면 우리들의 고향산천은 왜적들의 땅이 되고 말 것이며 우리들의 자식 또한 잔학무도한 왜놈들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오. 그토록 참혹한 땅에 사느니 이 곽재우와 함께! 우리 땅을 능욕질을 한 왜놈들과 원 없이 싸워보는 것이 어떻겠소!
-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사무라이의 시대>라는 다큐멘터리에도 등장했는데 다른 유명한 설화들을 제쳐두고 곽재우의 붉은 의복이 생리혈로 염색한거라 동에번쩍 서에번쩍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스티븐 턴불(Stephen Turnbull)[57]의 황당한 설명이 등장했다. 해당 다큐멘터리는 일본을 중심으로 만들었고 일본이고 조선이고 가릴 것 없이 재현이 엉망진창이기에[58] 이런 재현 오류가 생긴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조선인들이 기모노를 입고 있을 정도. 그래도 의병 활동에 관련된 내용들은 어느 정도 기록과 일치한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는 당시의 유행하던 설화를 소개한 것일 뿐, 그가 이를 사실이라고 한 것은 아니다.
- 일본에 연재 중인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후속편에 28화 후반부에 등장.
경상도 중북부를 돌며 약탈하는 모리 테루모토가 이끄는 군대를 의병들과 함께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걸로 등장하였다.
그 뒤 31화에 군량을 조달하러 북으로 향하는 모리군의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끄는 군대를 습격한다.
[1] 음력 1552년 8월 28일.[2] 지번 주소로는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 독립유공자 이청로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음력 1617년 4월 10일.[4] (족보)[5] (족보)[6] 조식의 외손녀.[7]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인 의병들로는 곽재우 외에도 조헌, 권응수, 고경명, 김면, 정문부, 이정암, 김덕령 등 다른 여러 인물들도 많이 있는데, 이들은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지만, 곽재우는 역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라도 아는 사람이 많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곽재우는 위인전도 있다.[8]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의 남부 지역에 있었던 행정구역으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달성군에 통폐합 됐다.[9] 아들 둘, 딸 하나.[10] 아들 셋, 딸 하나.[11] 오늘날의 산청군.[12]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은 김해성 전투에서 활약한 송빈이라는 사람이다. 김해성 전투가 4월 19일에 벌어졌기에 시기상 며칠 앞선다. 사후 김득기, 이대형, 류식과 함께 김해를 지키다 순국한 사충신으로 불리고 있다.[13] 선조실록 권32, 선조 25년(1592) 11월 25일 1번째 기사에서 김수가 증언했다.[14] 난중잡록[15] 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16] 이긍익, 연려실기술 권 16, 선조조 고사본말 임진의병 곽재우[17] 난중잡록 임진년 4월 27일조[18] 쇄미록 권1, 임진남행일기, 임진 5월[19] 임진년 5월 4일조[20] 현재의 의령군 정암리 남강변에 위치한 나루터. 일제 시대에도 거창, 함양, 산청의 물산이 이 곳을 통과했으며 지금도 79번 국도가 지나고 있다.[21] 정만록 7월 1일[22] 고대일록 7월 2일, 3일조[23] 수정실록 7월 1일[24] 馬峴, 진주시 옥봉동.[25] 丹溪縣, 산청 일대.[26] 임진년 12월 5일[27] 계사년 1월 11일[28] 관직 임명, 날짜, 건의사항의 출처는 모두 <선조실록>이다.[29] 계사년 7월 12일[30] 계사년 9월 2일[31] 계사년 12월 19일[32] 계사년 12월 21일[33] 갑오년 2월 27일[34] 1596년 3월 1일 기사[35] 자세한 시기는 불명이지만 1597년 4월 26일 기사에 방어사 곽재우가 찾아왔다라는 대목이 있는 것을 보아 그 전에 경상좌도 방어사로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36] 선조실록 1600년 2월 20일[37] 곡식을 끊고 솔잎을 먹으며 수행함.[38] 이 와중에 공이 있는 장수라고 거론된 사람 중에 원균이 있었다.[39] 광해군일기 즉위년 8월 13일. 윤근수나 그 형 윤두수는 곽재우를 높이 평가해 중용할 것을 선조에게 건의한 바 있고, 곽재우 본인도 학맥만 같을 뿐 북인과는 거리가 있었기에 곽재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한 말은 아니다.(선조 28년 12월 28일, 광해군 즉위년 8월 13일 기사 참조) 선조수정실록에 김덕령이 죽은 후 용력 있는 자들은 숨어버렸다고 나오지만 수정실록은 서인이 편찬했기에 김덕령에게 유독 동정적이라 그럴 뿐이다. 정유재란 때 의병이 많이 일어나지 않은건 의병을 일으킬 인물들이 이미 다 죽거나 관직을 받았고, 육군의 주력이 명군이었기 때문이지 다른 게 아니다.[40] 특히 기재사초 임진일록4 9월의 내용에 의하면 선조가 곽재우는 역적이니 죽여야겠다고 말하자 윤두수는 선조에게 전쟁이 어지러운데 때에 어찌 사람마다 다 예법으로써 책할 수 있겠냐며 선조를 말려 곽재우를 살려준 일이 존재한다.[41] 선조 37년 8월 8일 기사에 의하면 조정에서 곽재우를 마뜩찮게 여긴다는 소문이 떠돌아 곽재우를 괴롭혔다고 한다.[42] 이건 곽재우 잘못이나 처신 문제라 보기 어려운게 영창대군은 당시 10살도 안된 매우 어린 나이로 현대는 물론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역적의 아들이라도 영창대군처럼 어린 나이면 평생 노비형이 최고형이었고 왕족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전후술하다시피 곽재우의 성품이 강직했기에 너무나 어렸던 영창대군의 사사는 선을 넘었다고 본 것이다.[43] 선조가 유언으로 영창대군을 지켜달라는 고명을 내린 7명을 말한다. 명단은 한응인, 박동량, 유영경,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44] 곽재우 입장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있었던게 관군이 식량과 물자들을 죄다 버리고 급박하게 후퇴했는데 그걸 가져다 쓸 수 있게 누구에게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릴 상황도 아니었고 허락할 권한이 있는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몽진한 상태였으며 만약 의주까지 몽진한 조정에 쫓아가서 허락받고 다시 돌아오는 삽질을 한다면 그 사이에 이미 적에게 물자를 모조리 탈취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현대 국군도 청와대, 국방부, 참모본부의 명령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는 현지 지휘관에게 어느 정도 재량권을 행사하게 한다. 부산을 공격하라는 어명이 말도 안 된다고 판단한 현지 지휘관 이순신의 의견을 무시하고 해임한 후 원균에게 부산을 공격하게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곽재우가 이순신과 같은 정규군 지휘관이 아닌 일개 민간인 의병장이었다.[45] 난중잡록 6월 17일조[46] 용사일기, 고대일록, 난중잡록.[47] <쇄미록>의 저자 오희문은 곽재우의 전공을 인정하면서도 이런 점을 들어 곽재우를 비판했다.[48] 유숭인이 원균같은 겁쟁이였냐면 전혀 아니었으며 그는 뒷날 전공을 세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까지 올라갔고 제1차 진주성 전투 때 창원에서 진주를 구하기 위해 출병해 진주성 외곽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이다. 김시민이 "나보다 상관인 당신이 성에 들어오면 지휘 체계가 흔들리니 이해해달라"며 입성을 거부했던 그 사람이다. 임진왜란 초기에는 아무도 예상 못했던 국가간 전면전이 불러온 전장 공포로 용감하고 유능한데도 전투를 회피한 사례가 많았다. 진주 대첩의 영웅 김시민도 처음에는 진주 목사와 함께 지리산 산 속에 숨어있다 김성일이 오자 그제서야 나와 영접했으니 유숭인의 행동이 특별히 비판받을건 아니었다.[49] <선조실록> 임진년 6월 28일.[50] 선조실록 임진년 6월 28일[51] 고경명, 김천일, 조헌, 곽재우. 이 중에서 곽재우를 제외하면 모두 서인 출신이며 전공이나 의병장으로서 능력에 거품이 많이 끼었다. 고경명은 금산 전투에서 전사했고 조헌은 청주성 탈환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금산 전투에서 죽는다. 김천일도 큰 공적은 없는건 매한가지.[52] 정인홍, 김면, 곽재우.[53] 정치적인 주장도 대북의 주장보다는 서인에 가까웠다. 오죽하면 같은 조식 계열임에도 대북과 곽재우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겠나?[54] 판본에 따라 왜군이 또다른 상자를 발견했을 때 함정이 있을거라 생각해서 도망쳤다는 이야기도 있다.(사실은 빈 상자다.)[55]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 서성네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1952년 4월 10일 설립했다. 현재는 곽예순 박사의 3남 곽동협씨가 병원장을 맡고 있다.[56] 가장 가까운 시내버스 정거장이 600m(대암내길/갈미실마을 정류장) 정도 떨어져 있고 인도 없는 위험한 길을 걸어야 하며 농촌 특성상 시내버스도 하루에 몇 번 운행되지 않는다. 굳이 대중교통으로 방문하려면 서부정류장이나 현풍시외버스터미널에서 경전여객의 의령/신반행 완행버스를 타고 갈미실마을에서 내려서 600m를 걸어오거나 현풍시외버스터미널에서 대구 버스 달성7을 타고 대암내길에서 내리면 된다. 단 의령/신반행 버스는 환승할인이 되지 않으니 주의.[57] 전국시대 일본군사사 연구자. 영어권에서 임진왜란을 다룬 단행본의 1세대라고 할만한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1598을 내기도 했다.[58] 당장 조선만 보면 경복궁 광화문은 멀쩡히 등장하는데 경복궁 내부에 서양식 알현실이 있고 방 가운데에 서양식 왕좌가 있으며 주변을 군인 4명이 지키고 있고 선조는 홍룡포에 익선관이 아닌 평범한 양반의 한복에 흑립을 쓰고 있다. 게다가 이 다큐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순신 대제독은 언급조차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