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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황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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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의 위기
Discrimen Tertii Saeculi
파일:로마3갈죽.jpg
3세기의 위기가 극에 달했던 갈리에누스 시기의 로마 제국.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235년~284년
주요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아우렐리아누스
프로부스
카루스

1. 개요2. 상세3. 원인4. 해당 시기의 로마 황제5. 비공식적 세습왕조들6. 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3세기 위기
군인 황제 시대()는 서기 235년부터 284년까지 로마 제국 각지의 군대가 스스로 황제를 옹립하고 폐위한 시대를 일컫는다.

영어권에서는 3세기의 위기(Crisis of the Third Century)[1] 또는 military anarchy라 칭한다.

군인 황제 시대는 3세기 경 로마 제국의 혼란을 설명하는 시대로, 일본에서 번역한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중국어권에서는 군대무정부상태(軍隊無政府狀態)라 번역한다.

2. 상세

3세기의 위기, 군사적 무정부 상태, 제국의 위기 등으로 불린 235년부터 284년까지 이어진 로마 제국의 약 50년 간의 혼란기를 일컫는다. 간단히 말하면, 로마 제국이 반복적인 외세의 침략, 내전, 경제적 붕괴 속에서 기존 체계가 붕괴하면서 벌어진 위기의 절정기로 평가받는 시대다.

위기는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어머니 율리아 마마이아와 함께 로마군에게 불신임을 받고 암살되면서 시작됐다. '군국주의, 권위주의적인 로마식 입헌군주제'로 평가받는 세베루스 왕조는 40년여 만에 붕괴됐고, 팍스 로마나 아래에서 부각되지 않던 각종 문제가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몰락 과정 속에서 펼쳐진 여섯 황제의 해 속에서 폭발했다. 4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제국은 영내 게르만족 침략과 집단 이주, 야심가의 중상모략 속에서 벌어진 황제 참칭과 내전, 농민 반란, 무장 도적 집단의 출현과 무너진 도시 경제, 정치적 불안정을 겪었다. 여러 찬탈자가 권력을 놓고 경쟁했다.

도시 경제와 삶의 질은 혼란 속에서 떨어졌고, 통화는 평가절하되며 지중해 무역망 또한 고대 경제 한계 속에서 생산성이 붕괴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아래에서 시작된 안토니누스 역병이 다시 창궐했고, 이 모든 것이 일시다발적으로 폭발한 로마 제국의 서방은 본래부터 취약한 현실 속에서 모두 붕괴됐다. 제국 남부에선 라티푼디움이 기형적 구조로 확대되었고, 제국 동부에선 도시 경제와 도시 공동체 문화가 아노미 현상 속에서 혼란을 겪었다. 설상가상 제국 동부 일대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흥기, 대(對) 로마 정책 속에서 과거와는 달라진 상황에 직면했다.

로마군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포에데라티라고 부르는 이민족 징집병 규모를 늘리고 그들 전투력을 활용하는 전술이 발전하는 환경에 놓였다. 이런 상황은 현장 로마 지휘관이 명목상 황제에 충성하되 중앙 권위로부터 점점 더 독립적으로 목소리를 내게 환경을 바꿨고, 야심가가 그들과 접촉해, 발레리아누스가 페르시아에게 포로로 붙잡힌 뒤부터는 제국 전역의 중앙 권위 붕괴라는 초유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이런 모습은 단순히 속주와 로마군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원로원은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를 연달아 겪으며, 권모술수 속에서 본인과 가문의 흥망을 놓고 대립했지만,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뒤부터는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 필리푸스 아라부스, 데키우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등의 등장 속에서, 킹메이커이자 야심가로 혼란한 상황을 증폭시켰다. 그 결과, 3세기의 위기로 불린 군인 황제 시대 속에서 스스로를 임페라토르라고 주장한 최소 26명이 원로원이 같은 기간 동안 원로원이 인정한 황제로 승인한 황제였고, 비승인 황제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욱 늘었다. 그러니 이런 권력 투쟁 속에서 합법적 황제, 비합법적 황제는 제국이 세 개로 쪼개진 뒤에도 무력 충돌을 벌였고, 이들은 각각 여러 장군과 엮여, 각 군대를 동원하는 식으로 내전 규모를 키웠다.

여기까지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죽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즉위하는 사이의 49년간 18명의 황제가 바뀌었던 군인 황제 시대에 관한 일반적인 개괄적 설명이다. 다만, 이런 설명 역시 이마저도 18대에 걸쳐서 그랬다는 이야기이고, 공동 황제까지 포함하면 26명이나 된다. 전염병으로 병사한 클라우디스 고티쿠스와 노령으로 죽은 타키투스를 제외하면 천수를 누린 자가 없다. 데키우스처럼 고트족과 전쟁 중 늪지대에 빠져 시체를 못 찾고 전사한 것이 그나마 나은 축에 속했으며, 무기나 독극물을 사용한 암살로 목숨을 잃거나 일가 전체가 멸족되거나, 체포 직전 자살을 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황제의 평균 재위기간은 2.7년이지만 15년[2] 동안 옥좌를 지키던 갈리에누스와 같은 경우도 있는가하면 15일 만에 죽은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가 있는 등 재위기간의 편차가 큰 편이다.

3. 원인

오현제 시대때부터 로마 제국 내외에서 쌓여가던 문제점들이 터진 시기로,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체제의 단점과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목소리가 커진 군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후 제국의 관료, 원로원, 총독 인재풀이 된 군대 장교들의 성장과 권좌를 둘러싼 야심가들의 정쟁이 외부의 침략과 맞물린 시대다.

'3세기의 위기'라는 명칭에 걸맞게 실제 당시 로마 제국은 과거와 비교해 내외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태에 처해있었다. 외부로는 게르만족사산조 페르시아의 침략이 활발히 일어났고, 이로 인해 막대한 국방비와 군대의 인적자원이 소모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제정 이후 로마의 지배 계층이던 원로원 계급의 정치력이 약화되고, 그 자리를 기사 계급이 장악하는 변화가 가속화되는 것에 더해 프라이토리아이와 일리리아 출신 기병 장교 집단으로 대표되는 군부 세력의 입김이 그 어느 시대보다 강해지는 상황에 빠지게 됐다. 따라서 '공화정 위에 실질적 황제인 프린켑스(임페라토르)가 올라탄 형세의 공화정 체제'인 기존 원수정 체제는 과거와 다른 환경 속에서 표류했고, 여러 야심가들의 정략과 원로원 안팎의 정쟁은 그렇지 않아도 취약점이 뚜렷한 로마 제정을 상당히 불안하게 만든다. 더욱이 갈수록 강해지는 외부 세력의 등장과 그들의 침공이 장기화, 정례화되면서, 중앙에선 프라이토리아이가, 각 속주에서는 제국 각지 군대들의 힘이 커지게 되는 현상까지 벌어졌다.

제국 내외의 불안정으로 치안은 자연스럽게 상당히 악화되었고, 여기저기 들어갈 돈은 많아져 과도한 증세로 인해 국내 상업이 쇠퇴하고 황제로 대표되는 정계가 민심을 잃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대두하고 그 과정에서 몇 명의 황제들은 이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칙령을 반포하고 실제로 탄압(박해)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의외로 로마 내 모든 속주가 흔들렸던 건 아니었다. 물론 증세 문제는 전국이 겪었겠지만, 그렇다고 전국이 전쟁터가 된 것은 또 아니었다. 3세기의 로마 제국은 정국이 불안하긴 했어도, 게르만족이 히스파니아나 아프리카 같은 제국의 후방까지 위협하는건 거의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르만족이 로마를 약탈하고,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 눌러앉고, 북아프리카까지 뚫어버리는건 200년 정도 뒤인 5세기의 일이다. 사산조 역시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등 훌륭한 전과를 올렸지만 막상 시리아나 이집트, 아나톨리아를 점령하진 못했다.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고 있었더라도 여전히 게르만족과 당시 로마 제국 사이의 문화 차이는 상당하여 게르만족들 사이에서도 로마 정규군에 합류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상업이 쇠퇴했을지언정 게르만족과 비교대상이 될 정도로 처참하지는 않았다. 후대에 이러한 연구 결과들이 속속 이어지다보니 일부 고고학자들은 당시 전쟁터 최전방이 된 속주들은 말그대로 생지옥이었던 반면 전쟁과는 무관한 속주 시민들은 갑자기 나라에서 돈 많이 뜯어간다는 감상만 남겼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 시대는 이전 내전기, 왕조 교체기와 달리 가장 길고 침체된 내전 속에서 제국 경제의 순환 상태에 장애를 가져다줬다. 따라서 군인 황제 시대, 3세기의 위기라는 이름이 나올 때, 느끼는 통상적인 이미지는 대단히 부정적이다. 그렇지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이 시대는 마냥 혼란만 가지고 온 시대가 결코 아니었다. 더욱이 군인 황제로 불린, 비(非) 원로원 출신의 프라이토리아니, 로마군 지휘관 황제들은 되레 유능한 인물들이 매우 많았다.[3] 따라서 일반적인 내전이나 제국의 혼란으로 벌어진 국가의 쇠망의 원인을 이 시대로 단정짓고 보면 대단히 곤란하다.

3세기의 위기의 원인은 직접적으로는 로마 제국 내의 내전과 치안불안, 제국 경제와 재정 운용 순환의 장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점점 로마 사회를 본받아 정치적-사회적 역량을 쌓아가고 있던 야만족 사회의 성장과 로마 제국 체제 자체의 한계 수익성 악화 이 둘로 압축된다. 더 요약하자면 외부 상황은 변화하며 가혹해지는데 그에 대처하는 내부 역량은 약화된 상태로, 이 두 가지 문제점에 대응하는 것이 당대 로마 사회의 최대 과제였다.

로마 제국의 둘러싼 외부 세력을 먼저 살펴보면 동방에선 파르티아의 쇠퇴와 혼동 속에서 신흥국 사산 왕조가 혜성처럼 등장해 왕조교체가 벌어졌다. 이는 그나마 유연한 외교 상대였던 파르티아 대신 대로마 강경 일변도인 사산 왕조가 등장해, 동부 방어선 재정비와 새로운 외교 관계 수립의 문제를 대두시켰다.

서방 혹은 제국 북방에선 게르만족의 흥성과 왕국화 속에서, 야만족의 로마 영내 공격 횟수가 증가하고 그 강도가 강해지고 있었다. 이는 로마인들이 레누스 강, 다누비우스 강으로 각각 부른 오늘날의 라인 강, 다뉴브 강 일대에서의 산발적인 접전을 넘어 기존 방어체계선의 고민을 안겼다. 설상가상 3세기의 위기, 군인황제 시대로 부른 이 시절의 로마는 서방의 두 방어선 안쪽에 자리잡은 갈리아, 판노니아, 일리리아 일대까지 침공받으며 서방 속주 전체의 피해가 커지고 재건 사업이 지연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두 외부 세력 중 군인 황제 시대의 로마 입장에서, 골머리를 앓게 한 세력은 게르만족 문제였다. 통상적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대 말 혹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 즉위부터 시작된 게르만 족 문제는 로마군, 로마 국고의 피로도를 가중시키고 해결방안이 있어도 그 한계가 명확했다. 이는 여러 황제들이 군을 모아 여러 번에 걸쳐 진군해 대결한 사산 왕조와의 관계와 게르만족 문제가 로마 입장에서 동일선상에 마냥 놓고 볼 수 없다는 고민까지 안겼다.

원래 게르만족은 강한 부족이 깊은 숲속에 틀어박혀 약한 부족의 상납을 받으면서 살다가 기근이 들면 로마인에 비해 체격적으로 우월한 수만 명의 부족전사들로 침공했다. 따라서 로마인은 그에 맞서 정복전은 피하면서, 중무장 방진과 우회포위기동, 하천 선방어선, 예방 전쟁이라는 해법으로 상대했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래의 로마 제국은 비교적 적은 수의 현역병만으로 북방방위가 가능했고,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을 경계로 한 방어 전략 및 군사 기지를 통한 병참 활용 역시 이런 계산 아래 운용됐다.

그런데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대 후반부터 국경 밖의 게르만족들은 전혀 다른 게르만족으로 변해 로마와 마주했다. 그나마 온건하던 가까운 게르만 부족들이 먼 게르만 부족들에게 축출되거나, 입장을 바꿔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게 된 것이다. 이는 게르만족들이 오랫동안 로마와 싸우고, 교류하면서 로마군의 습성을 파악해 이들 부족의 입장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방법을 익혔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아퀼레이아 공성전에 참전하기 직전부터, 로마는 전통적인 서방의 두 방어선에서 전혀 다른 게르만족들의 공격 방법과 전술에 허를 찔리게 된다. 진화한 게르만 부족들은 이미 연맹국가 형태로 진화하면서, 로마군의 형태 등을 받아 들여 군대가 정예화됐다.

이들은 이때부터는 그 체계만 모방하거나 차용하지 않고, 그 습속까지 바꿔 영리하게 활용했다. 이는 그들이 과거처럼 힘만 믿고 마냥 백병전으로 덤비기 보다는, 로마군의 장점인 보병전에 맞서거나 대규모 회전을 치르는 것을 최소화했다는 말이 된다. 하여 이때부터 게르만족들은 그들의 장점을 살려, 기마전사들을 뽑아 대규모 기병대를 만들고 산발적으로 부대를 나눠 시간차로 요새화 되지 않은 민간 도시를 한껏 약탈 파괴한 다음 도망쳐버리는 방식을 쓰기 시작했다.[4]

이는 로마군에게 큰 고민을 안겼는데, 이런 상황에서 로마는 방어선 안쪽에 있는 지역까지 털리게 된다. 이 상황은 우리가 흔히 "오현제의 마지막 황금기"로 알고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에 벌어졌다. 이때 게르만족들은 이런 방법을 이용해 풍요로운 그리스, 마케도니아 일대를 유린하고, 로마 공화정가이우스 마리우스 시절 이후 처음으로 본국 이탈리아의 최대도시 아퀼레이아를 포위한다. 즉, 건국 이래 외부 세력에게 내준 적이 없는 로마 제국의 본체(本體)인 본국의 북부 지방까지 게르만족들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로마가 많은 인력, 물자를 투입해 안그래도 돈만 들고 얻을게 없는 땅을 정복하지 않고 냅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로마는 3세기의 위기 시대의 서막으로 불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시대보다 훨씬 앞 시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때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전쟁을 통해 게르마니아 땅을 로마 아래로 편입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허나 이 대규모 프로젝트 원정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대 드루수스의 요절로 시작된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문제 및 잘못된 인사 선정, 게르만족들의 끝없는 궐기와 대항, 일리리아 대반란 등 제국 대외적 상황 앞에서 처참히 실패했다. 따라서 로마로서는 게르마니아와 게르만족을 완전히 갈아버리지 않는 이상 근본적으로 방위선 유지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문제가 벌어지기 전의 황제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트라야누스가 오랜 군대 경험, 다키아 전쟁 준비 및 전후 처리 과정, 조치 속에서 어느 정도 가이드라인을 그려줬다는 점, 달라진 게르만족을 대응하게 된 이 문제를 처음 경험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취한 대처와 그가 그린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달라진 게르만족의 아퀼레이아 공격은 당시 로마에게 큰 충격을 줬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일평생 이탈리아와 로마 밖을 떠나지 않다시피한 이탈리아 귀족 성향이 짙은 황제였고, 군대와는 담을 쌓은 백면서생이자 철학자였다. 그러나 이런 결점에도 그는 책임감과 놀라운 통찰력으로 이 문제점을 깨닫고는 백방으로 최선을 다했다. 이때 로마의 수뇌부들이 주목한 것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알려준 교훈이었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도미티아누스가 다키아의 왕 데케발루스와 강화를 체결해, 다키아와 싸우는 사이에 도나우 강 유역에 거주하던 야만족들이 로마로 쳐들어올 조짐을 보이는 것을 막으려는 정적인 국방 정책에서, 오랜 만에 팽창 및 방어선 밖 외부세력 억제책을 가져간 황제였다. 트라야누스는 분명히 로마를 위협한 적의 본거지를 제압하고 때론 속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내보였다. 물론,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전쟁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의견이 학계에서 분분하다. 그렇지만 다뉴브 강 일대의 게르만족은 이 전쟁에 보조군으로 참전하거나, 제3자 입장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자신들이 착각하면 곤란하다고 분명히 인식했다. 트라야누스의 대외 전쟁은 제국의 힘이 한계점에 도달했고 자원이 막중한 국방 부담을 뒷받침하기 턱없이 부족하다는 오해를 살 법한 생각을 할 법한 게르만족에게 확실히 로마의 힘을 보여줬다. 또한 트라야누스는 재위 기간 내내 정적 방어 정책 속에서도 유연한 점이 필요하다고 후임자들에게 알려줬다. 그는 전쟁 수행 외에도 끝없이 로마가 맞서야 할 적의 무기, 전술을 채택해 군제 개혁에도 손을 놓지 않아야 하는 것을 보여줬는데, 이 외에도 트라야누스는 속주 점검과 개편 등을 병행했다. 또한 외교 전략에서도 로마가 언제라도 전쟁 준비가 되었다고 보여주면서, 로마가 외부 세력과 외교를 벌일 때, 다양한 카드를 손에 쥐고 협상장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줬다.

따라서 로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지휘 아래 게르만족 문제 해결에 진력하고, 로마군 편제 개편, 병참 체계 점검 등을 하면서 대(對) 게르마니아 문제에 최선을 다할 때, 이 교훈을 많이 참고해 적용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폐화된 도나우 강 남쪽 속주에 살던 게르만계 주민들을 이탈리아 반도로 이주시켜 농경민족으로 정착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물론, 이 조치는 전염병, 이주해 익숙하지 않은 농업생활을 해야 될 게르만계 주민들의 불만과 일탈, 마적떼의 계속된 정착촌 습격 등으로 쉽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재위 기간 내내 이를 꾸준히 밀어 붙였고, 로마 속주 내로 이주한 게르만족의 반란, 불만 등을 접하면서 쌓인 선례를 기반으로 판노니아, 일리리아, 게르마니아 일대의 경제력 복구라는 성과를 일부나마 냈다. 이와 함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도나우 강 남쪽의 주요 속주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지대를 늘리기 위해 전쟁도 불사했다. 그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등 당대 최고의 젊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이곳 레가투스로 배치했고, 이들을 도울 후방 병참 기지를 운용할 총독 인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동시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아내 소 파우스티나를 대동해 1년의 절반 이상을 빈도보나(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에 머물며, 로마군과 먹고 자면서, 도나우 강 북쪽 지역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황실 재산까지 다 팔아 전시국고에 쑤셔넣어가면서 억지로 아우렐리우스의 게르마니아 전쟁으로 일컬어진 마르코만니 전쟁을 수행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동생으로 공동황제이자 후계자였던 루키우스 베루스는 아퀼레이아 포위 전쟁 승리 이후 귀환 중, 과로로 요절했고, 전염병 문제로 로마의 인적 소모는 큰 문제가 됐다. 전쟁 수행 중에는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전쟁 중 억지로 평화교섭을 체결해, 휴전하는 일까지 겪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군사적,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상황 조짐이 현실화된다. 이때가 178~180년인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통용주화인 데나리우스 은화의 은 함유량을 임시 평가절하해 군비충당 속에서 인플레이션 억제를 시도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노력은 언발에 오줌 누기였고, 황제 본인이 전쟁 야전 본부인 오늘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병사한다. 이렇게 되자 아버지와 공동황제였던 후임 콤모두스는 단독황제로 등극한 뒤부터 이 부분부터 해결해야 됐다.

당시 로마의 국고 상황은 심각하고, 물가상승 속에서 전시 세금 문제로 로마인들의 피로도가 상상 이상이었다. 따라서 즉위 연설에서 전쟁 지속 의지를 밝힌 콤모두스는 곧 제국 관료들에게 적당한 선에서 전쟁을 중지해야 된다는 진언을 듣는다. 이때 황제의 매형 폼페이아누스와 전선에 있던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등의 제장들은 전쟁 지속을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한계상 전쟁은 중단된다. 그 결과, 로마는 콤모두스의 결단 아래 다시 평시 체제로 전환되고, 재위 2년차에 터진 루킬라 공주의 동생 콤모두스 암살 시도 미수 후 간신들이 판을 치게 됨에도, 민생을 안정시킨다. 그렇지만 게르만족의 근거지를 제압해 서방과 북방을 안정시킬 기회를 놓쳐버린다. 이후 로마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카라칼라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비슷한 시도를 하는데, 이 역시 어디까지나 임기응변의 땜빵 손질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제국 서방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 말년, 고트족 등이 침공하면서 완전히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연이은 방위 실패는 극심한 치안 불안정과 사회기반 붕괴를 일으켰고, 당연히 군대의 정예도 및 충성도 문제를 야기했다. 사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 이후 로마에서 내전은 수십 년 주기로 자주 일어났고, 군인 황제 시대 이전에도 병사들이 전선을 시찰 나온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하극상을 일으켜 죽여버린다든가, 근위대가 황제를 암살한다든가[5] 하는 등 이미 징조가 있었다. 애당초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낸 프린키파투스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부자의 상당한 정치력과 그 일가의 권위를 바탕으로 권력구조의 균형을 통해, 기민한 공화정 전통에 프린켑스가 영구집권체제를 정착시킨 시스템이었다. 이때 황제라는 지위는 호민관 권한을 쥔 제1권력자 정도여서 군대가 자신들이 따르는 장군을 황제로 지지하고 원로원의 승인만 얻어낸다면 이론상 쉽게 황제가 되는 게 가능했다. 이는 같은 성씨만 제위를 이을 수 있는 동양의 전제군주정에 비해 로마 황제 계승 시스템의 큰 문제점이었다.[6]

학술상 용어로 프린키파투스(Principatus), 즉 원수정(元首政) 로마는 형식상 공화국이자 실질상 제국이라는 독특한 이중 구조였다. 이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정치 천재가 40년 집권 속에서 공화정 위에 두 번의 조정 헌법으로 완성한 회복된 공화정체라는 구호로 완성한 제정 탄생 특성상 불가피한 태생적 한계였다. 따라서 카이사르 등장 이후부터 로마인은 아우구스투스 이후의 시대 내내 황제라고 부른 자들이 언제부터인가를 놓고 이론적 논쟁을 펼쳤다. 수에토니우스, 타키투스로 대표된 고대 기록 저술가들은 카이사르를 그 시작으로 보고, 군인 황제 시대 직전까지 살았고, 권력의 정점까지 오른 디오 카시우스로 대표된 저술가들은 아우구스투스를 그 시작으로 봤다. 그들은 자신을 포함한 원로원 동료와 자신이 면담한 황제들마저도 이에 대한 이론적 논쟁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지적해 밝혔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 논쟁은 학계에서 꾸준히 나온다.
"로마인들이 군주제라는 이름을 너무 싫어해 황제를 독재자나 왕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시민과 원로원의 권력은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손에 넘어갔고, 그의 시대부터 엄밀히 말하면 두 세 사람이 나중에 집권하게 되더라도 '군주'라는 가장 정확한 이름이 되도록 했다."
디오 카시우스

즉, 제국이 공화국의 외관을 유지한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가 만들고, 티베리우스가 계승하고, 칼리굴라가 완성한 다음, 클라우디우스 1세가 뿌리 박게 한 로마식 제정은 태생적으로 군주제가 공화제 위에 올라탄 구조였다. 그러니 원수정의 시작부터 제국의 계승에 대한 명확한 규칙은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른, 로마인이 말한 카이사르 가문의 세 황제(티베리우스,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 1세)는 이런 한계 속에서 이 문제를 자신과 가문이 가진 후광으로 현실적인 방법 아래 해결했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들어 내민 교과서적인 방법을 활용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가문원 승계를 위해, "원로원의 선포, 대중의 승인, 군대와 프라이토리아니의 수용과 충성"이라는 구조로 로마식 입헌군주제로 문제를 해결한 것을 그들의 직계 및 상속자라는 위치에서 활용한 셈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군대와 실력으로 권력을 쟁취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손이라는 타이틀로 이용했다. 이들은 가족적 관계 아래 공식적인 공화정 시대의 로마 귀족 세습을 잘 알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론적 논쟁을 피했다. 그들은 기원전 2세기 이후 스키피오 가문과 메텔루스 가문의 프린켑스 세나투스 지위 승계 형태를 연합 가문 정권으로 재해석했고, 상속 측면에서 이 문제를 보완했다. 하지만 네로 아래에서 이 문제는 즉위 이후 골육상쟁으로 로마인에게 큰 의문을 낳았다. 네로는 클라우디우스 급사 직후,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충성 명목의 하사금을 내리는 식으로 이를 재해석했다. 전임자의 유언장을 바탕으로 공화적 전통 아래 귀족 상속 세습은 이렇게 재해석되었고, 세네카가 만든 연설문을 읽으면서, 이론상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의 방법을 편법적 조치 아래에서 벌어진 반(反) 공화적 산물이라고 네로 스스로 인정한다. 이런 상황 아래, 네로의 실정과 몰락은 원로원의 선택과 군대의 수용이라는 부분은 긴장을 조성했다.

네 황제의 해를 거쳐 플라비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래에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제위 계승과 관련된 법안을 성문법으로 선사받아 그 불씨를 잡았다. 하지만 이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제국의 로마 시민은 사실상 두 개의 계급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법적 처리에 관한 칙령 속에서 나타났고, 팍스 로마나 속에서 원로원 의원 계급의 정치적 영향력이 감소했지만, 속주 출신 엘리트가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고 이탈리아 귀족으로 변모해 제국의 다양성이 성장했다. 이런 변화는 계승이 불확실해 보일 때마다 상당한 군대의 지원을 받는 장군이 권력을 탈취하려는 동기를 이론적 확신 속에서 키웠다.

따라서 안정적인 평화기로 불린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세베루스 왕조 사이에서는 늘 네 황제의 해, 황제의 암살, 다섯 황제의 해 등과 같이 정치적 혼란이 벌어졌고, 이 내전에는 개인적 야심과 그 부흥을 기치로 내건 속주 총독과 전선 사령관들이 그 주인공으로 참여했다. 왜나하면 선례가 뚜렷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이론적 확신과 논쟁 속에서 군인 황제 시대의 쟁점이 된 제위 계승과 합법적 황제라는 틀은 다섯 황제의 해 속에서 등장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그의 승리로 탄생한 세베루스 왕조 아래 재해석됐다. 그리고 세베루스 황제와 그 후계자들의 해석 방향은 235년 세베루스의 마지막 후계자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어이없게 몰락한 뒤, 권력을 잡는 방법만으로만 선례가 됐다. 세베루스 왕조가 전복된 후, 야심가 아래 3세기 후반까지 로마는 일련의 장군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제국을 황폐화시킨 잦은 내전을 통해 그들은 권력을 잡았다.

그런데 3세기의 위기 당시 로마는 이렇게 권력을 잡더라도, 이를 유지할 통치자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를 시작으로 늘 이런 내전이 일상화되었고,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부자는 모두 합쳐 15년간 소위 리키니우스 왕조로 불린 세습 체제를 시작했지만 내외부적인 요인 속에서 이를 지키지 못했다. 두 사람의 개혁은 방향성이 맞더라도 미완으로 끝났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외부의 적들이 예전보다 강해진 전력으로 로마를 위협하는 상황이 됐다. 여기에 더해 세베루스 왕조 시대 시작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의도적인 주화 평가절하 속에서 초인플레이션이 196년부터 시작되고, 카라칼라 단독 통치기인 210년대 말부터 만성화된 부분은 군대의 보너스 지급이 늘어도 병사들이 체감상 느끼지 못한 도돌이표같은 상황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또다른 문제로 떠오른 것은, 카라칼라 시대 후기부터 갈리아 일대 등지에서 탈영병, 범죄자, 탈주 노예들이 무장한 도적이 되어 치안을 흔들고, 제국 동쪽과 남쪽에선 율리아 돔나,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소아이미아스, 율리아 마마이아의 재산 불리기 아래 이 지역들의 치안이 유지되더라도 정작 내전 상황이 터질 때 상황을 악화시킬 요소들이 늘어난 부분이었다.

이런 경향은 중앙의 황제 자리를 놓고 내전이 벌어질 수록 방치됐는데,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로 대표된 이들이 나서면서 그 상황을 심화시켰다. 또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신병 충원과 훈련 역시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렇게 된 주된 이유는 계속되는 내전으로 군대가 동원되고 그 비용 문제로 신병이 충원되어도 시간 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것이 컸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처럼 일부 속주 총독들 중 제위 찬탈을 꿈꾼 일부 인사들은 토착세력이나 주변 부족장들을 보조군이나 지지자로 포섭해 내전에 동원하면서, 경쟁자 암살을 시도하고 원로원 내 인사들에게 내전 참여를 요청해, 이 사태를 키우기도 했다.[7]

게다가 내부적, 외부적으로 상황이 매우 안 좋았던 시기로 밖으로는 사산조 페르시아게르만족의 침공이 점점 거세어지는 데다, 2세기부터 내재된 로마 내 경제 상황은 정체기를 넘어 위기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 도미티아누스 시대까지 계속된 이탈리아와 서방 일대의 경제적 성장이 둔화되고[8], 동서 간의 경제적 격차 심화 그리고 이탈리아 일대의 지속적인 경제적 쇠퇴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아래에서 거의 방치되거나 현상유지된 이유가 컸다고 현대 연구들은 말한다. 물론, 최근 연구 발표들처럼 오현제 중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러한 이탈리아, 서방 일대의 경제적 쇠퇴와 하락을 막고, 트라야누스 시대의 다키아 원정으로 경제, 사회적으로 결정타를 맞은 이탈리아와 갈리아 일대를 되살리기 위해 알리멘타 수혜를,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쏟아붓는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내정 개혁 중 일부 조치까지 문제를 심화시키면서 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등장 전까지 거의 방치됐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3세기의 위기를 오현제 시대 아래에서 도금된 황금기라는 이유로 여러 문제가 내재됐다가,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정치적 안정을 통해 늦춰진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암살을 기점으로 수면 아래에 잠재된 각종 문제들이 내전을 통해 일제히 폭발했다고 주장한다. 이 외에도 로마 내에서의 은화의 질이 점점 떨어지고 정복전쟁이 멈추면서 대농장을 돌릴 노예의 공급이 멈추게 된다.[9]

그 시기에 그런 단점이 크게 돌출되지 않았던 것은 기독교완 전혀 무관한 극히 우연적인 몇 가지 요소가 원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3세기의 위기를 종식시킨 대가로 후기 로마 제국이 그전 로마 제국의 유연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실상과는 정반대의 주장이다. 그녀가 말하는 유연성이란 체계적인 관료제 운영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무질서한 황위 계승 방식을 고집하면서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이데올로기 확립은 그만두란 얘긴데, 사실 3세기의 위기는 그런 게 미비했던 내부 상황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대응을 못해 벌어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전통에 대한 이상한 강박적인 집착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대응을 늦춰서 국가를 파국으로 몰아갔기에, 로마인들도 슬슬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여러 대응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3~4세기의 경제 회복과 체제 안정화이다. 로마 제국이 3세기에 이런 과제들을 그저 손놓고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며, 그 해결책들을 종합해서 본격적인 체제 수술에 들어간 건 디오클레티아누스지만 그런 작업들도 3세기의 황제들이 이미 한 여러 조치들 같은 선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게다가 테트라키아 이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의 체제변화로 인해 제국 동부는 동로마 제국으로 무려 11세기를 더 존속할 수 있었다. 서부는 경제력부터가 동쪽에 비해 약해서 150년 만에 멸망해버렸지만.

결국 이 50년에 육박하는 군인 황제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어 2명의 황제와 2명의 부제 제도를 두어 질서를 되찾는 듯 하면서 끝나는 듯 싶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위가 끝난 후 다시 황제들끼리 내전이 일어난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다른 경쟁자들을 모조리 누르면서 로마의 혼돈은 잠시 진정된다. 이후 로마의 황제는 전제 군주로 바뀌어가고 제국 내에는 기독교의 세력이 커지기 시작하지만, 이후로도 로마의 황제 암살이나 군부의 황제 교체는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군인 황제 시대의 등장은 로마의 행정 체계가 현실을 감당하지 못한 것에서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장 황제가 어딘가로 간다하면 바로 황제가 떠난 자리에서 찬탈하고 난리가 나는 판이었다. 로마 제국은 더 이상 로마인과 로마화되어가는 야만인, 로마와는 별개인 속주민들의 나라가 아니었고 게르만족이니 뭐니 구별하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제대로 된 세계 보편제국에 이른 상태였으나 행정은 개념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이 문제는 오현제 시대까지만 해도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지만, 이미 다키아 원정에서 이미 로마가 더이상 과거 체제를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보였고 원수정의 매우 큰 문제인 너무 쉬운 황제 옹립과 부실한 행정 체계 탓에 각 속주들이 '황제의 관심을 요구'한 결과 사방 팔방에서 황제가 튀어나오게 되는 사태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4. 해당 시기의 로마 황제

3세기 가운데 235~284년 집권한 황제들의 대체적 연표와 중요한 이정표적 업적을 나열한다. 악행이나 실수는 워낙 다루는 곳이 많아서, 해당 황제의 목록에서 상세히 기술한다.

소위 말하는 '군인 황제'들을 살펴보면 생각보다 역량이 뛰어난 인물도 많고, “난세만 아니었다면...”라고 부를 정도로 불운한 황제들이 생각보다 많다. 즉, 이미지와 달리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었던 자는 적다. 다만 더 강력한 경쟁자가 있거나 예상하지 못한 돌발상황 등의 일이 터진 경우가 많아서,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제거당한 경우가 꽤 많다.

이는 그전 시기와 그 후 시기를 살펴봐도 드문 일이며, 제위 계승 시스템이 극도로 불안정하지만 반면 나태하거나 현실안주형 군주는 오래 못 가는 로마 특유의 황제 계승 시스템의 장단점이 극도로 표출된 시기인 게 원인이다. 그리고 정말 이들이 군인 황제였는지도 의문시 되고 있다.

사실 소위 군인 황제라고 칭해야 하는 기간은 알렉산데르 세베루스가 암살되고 즉위한 대대장 출신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 시대와 갈리에누스 사후 일리리쿰 출신들이 연달아 황제가 되는 시기 외에는 많지 않다. 이 시기 동안 제위를 차지한 이들을 보면 많은 황제들이 원로원 계층이었고, 생각 외로 이름난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들도 꽤 보인다.[11]

그러나 이 시기를 대표하는 황제들을 보면 알듯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부터 사두정치 황제까지 일부를 제외하고 죄다 발칸 반도 출신 군인이 많고, 군대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황제가 대다수라고 해석한다면 ‘군인 황제 시대’라는 것은 말이 된다. 더군다나 막시미누스 트라쿠스는 논외로 치더라도, 타키투스 외에는 로마 황제 중 문민정부의 상징이며 원로원 대표를 뜻하는 프린켑스 직위를 겸임한 로마 황제는 없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 제정에서 "로마 황제(임페라토르) = 프린켑스"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또 군대의 추대 혹은 근위대의 지지가 황제의 정통성과 직결되고 있는 흐름을 알게 되면 왜 군인황제시대라고 부르는지 단번에 이해가 된다. 따라서 이 기간 중 원로원이 추대한 황제는 몇 없었고 그들은 군대의 불신임, 원로원의 배신, 내전 등으로 인해 거진 단명했다. 특히 발레리아누스 이후로는 타키투스만이 원로원이 추대한 황제이고 그마저도 패닉에 빠진 군대가 원로원에게 황제 선출을 떠넘겨서 세워졌다. 그리고 이들 군인 황제는 이미지와 달리 제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쪼개질 뻔한 제국을 구했으며 개혁도 해냈다.

위의 인물들은 로마 공화정의 인정을 받거나 그에 준한 주요 황제들이며, 이들 외에도 황제로 참칭한 인물들은 더 많다. 예를 들면 스폰시아누스를 들 수 있다. 당대 로마의 문서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그의 얼굴과 이름이 찍혀진 주화가 실제 3세기에 유통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 이 주화가 발견된 위치가 트란실바니아라는 점에서, 그는 아마도 당시 다키아, 즉 다뉴브 강 하류에 배치되었던 로마 군단으로부터 황제로 추대받은 현지 사령관일 가능성이 높다. 유사한 인물들로는 잉게누우스, 실반나쿠스, 레갈리아누스 등이 있으며, 현재에는 대부분 고대 동전으로만 존재를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5. 비공식적 세습왕조들

대중들에게도 난세로 알려진 시대인 만큼 황제가 눈뜨고 일어나면 바뀐 시대지만, 제위에 오른 황제들은 이전 세습왕조와 같은, 항구적 세습왕조 구축 시도를 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세습 시도를 하는 과정을 보면 눈에 띄는 만큼 약육강식으로 계속 제위찬탈만 일어나지 않았던 시대라면 과거 왕조들처럼 몇 십 년 이상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냐는 황제와 그 가문이 보인다고 한다. 한 예로 리키니우스 가문과 에그나티우스 가문의 결합을 시도해, 제위 승계 구축을 항구적으로 모색한 발레리아누스갈리에누스 부자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로마사 연구 학자들 중에서 일부는 몇몇 황제들을 묶어 세습왕조로 서술하는 경우도 있는데, 밑의 왕조는 비공식적인 명칭일 뿐이다.

6. 매체에서의 등장


[1] 라틴어: Discrimen Tertii Saeculi[2] 단독 재위만 취급할 경우 그 절반 정도인 8년이다.[3] 군인 황제 시대의 황제들은 평균적인 재위 기간은 짧을지언정 일단 무능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애초에 황제 자리는 거저 딸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며, 공로도 있어야 하고 지지도도 있어야 가능했다. 무능했다면 애초에 차기 황제권을 노릴 주자 위치에도 올라갈 수 없었던 것.[4] 원래 게르만족은 누미디아 기병 못지 않게 기병으로 유명했고 또한 강력한 승마보병이기도 했다. 카이사르도 아리오비스투스 격퇴전 이래로 게르만족 기병을 고용해서 매우 쏠쏠히 써먹었다. 그런데 이 경기병 겸 승마보병들이 3세기부터는 느려터진 중장보병 군단을 요리조리 피해 양민만 학살하고 돌아니는 철저한 비대칭전을 개시한 것이다.[5] 단적인 예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절조차도 암살당한 황제가 하나(칼리굴라)에 자살한 황제가 하나(네로)이다.[6] 반면 바로 그랬기에, 어제까지 야만족 족장이었던 자도 제국의 성공한 고관이나 장군을 할 수 있었고 이론적으로는 로마 시민들의 합의만 얻어내면 로마 황제를 할 수 있었으며, 나태하고 통치에 무책임한 황제는 바로바로 쫓겨나거나 제거되는 뜻밖의 장점도 있었다. 3세기 황제들의 자질이 다들 그렇게 나쁘지 않았던 건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7] 평화기와 난세를 모두 경험한 헤로디아누스는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반란 소식과 몰락 소식에 대해, "고르디아누스는 노령이라는 이유를 들어 황제직을 고사하긴 했지만, 사실 권력에 대한 야심이 있었으므로 기꺼이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고 증언하면서 "본인은 고령인 터라 죽어도 된다고 도박을 했지만, 트락스를 몰락시키는 것 외에는 국가 혼란을 장기화시킬 것"이라며 강하게 이를 비난했다. 또 그는 이런 논평과 함께 앞으로 이를 선례삼아 내전이 심화될 것이라고 예언까지 했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휘하 병력을 이용해 아이밀리아누스를 내쫓고 제위를 차지했던 황제였다. 또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르디아누스 부자에게 비밀리에 반란 참여를 요청받은 경험을 했던 터라 원로원 내부에서 어떻게 행동할 지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비슷한 문제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원로원과 속주총독들의 군사동원 및 지휘, 파견 문제 등을 대대적으로 손봤다.[8] 2000년대 이후 여러 연구들의 발표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로마, 남갈리아 일대의 발전은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부터 시작돼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이르러 안정기가 되고 플라비우스 왕조때 절정을 찍으면서, 지중해 동쪽 속주들과의 본국+서방 속주 간의 상대 격차가 완화돼 세수 확보 등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트라야누스의 대외전쟁, 특히 다키아 원정 후 유입된 다키아 일대의 금, 은 유입으로 서방속주 간의 무역과 산업에 큰 변화가 생기고,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는 이런 저런 이유로 동방 일대 일부가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는 등 사건이 터지면서 안토니누스 시대에 이르러 알리멘타로 황제가 경제재건에 힘쓰는 모양새 등으로 유지되는 모습이 보인다 한다.[9] 로마 말기에는 그래서 노예로 운영되던 라티푼디움이 부자유 소작농, 즉 농노로 운영되는 콜로나투스로 바뀌게 된다. 기존의 노예도 일부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는 거의 다 해방시켜 소작농으로 전환했다. 참고로 이들 농노는 거주 이전의 자유, 참정권 등을 인정받지 못한 대신 병역도 어지간해서는 부과되지 않는 등(실제로 전쟁의 대부분은 기사와 용병에 의해 치러진다) 스파르타의 노예 계급인 헤일로타이와 유사한 측면이 꽤 많다. 다만 철저히 탄압만 당한 헤일로타이와 달리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기본적인 생명권 등 최소한의 권리는 보장받았다는 점에서 차이도 존재한다.[주의] 다만,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리우스의 개혁'이라고 할만한 사건은 없었으며, 이는 마리우스 시대부터 카이사르의 시대 이후까지 점진적으로 변화해간 것을 상징할 뿐이라고 한다.[11]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12] 고대전승에 따르면 대장장이 아들이었으나 귀부인의 양자가 된 케이스라고 하는데, 20세기 이후 유물, 유적 등을 통해 이탈리아 세습귀족임이 밝혀졌다.[13] 전승된 이야기에서는 암살됐다고 하지만, 교전국 페르시아 측의 기록에 따르면 전투 중 전사했다고 한다.[14] 소 발레리아누스인데 형 갈리에누스가 암살될 때 같이 밀라노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로마에서 조카와 같이 살해됐다는 이야기도 있다.[15] 장남은 요절, 차남은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날 당시 살해됐고 막내아들은 로마에서 숙부 소 발레리아누스와 함께, 또는 아버지숙부가 밀라노에서 암살된 직후 로마에서 처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