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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유신묘 慶州 金庾信墓 Tomb of Kim Yu-sin, Gyeongj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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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 |
면적 | 579,569㎡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통일신라 문무왕13년(674) |
<colbgcolor=#344c3c> 경주 김유신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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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유신의 묘는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의 송화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사적 제21호이며 입장료는 2023년 기준 2천원.인근에 위패를 모신 사당 숭무전, 9천평 규모의 흥무공원이 있다.
후술하는 이유로 전 김유신묘, 흥무대왕릉 등으로도 불린다.
2. 내용
김유신은 왕이 아니었지만 사후 왕으로 추존된 영향인지 그의 묘는 신라왕릉에 준하는 양식으로 조성됐는데, 주위에 둘레돌[護石]을 만들었으며 십이지신상을 부조로 조각해 두었다. 김유신의 묘는 어지간한 왕릉 못지 않게 큰 규모를 자랑한다.묘 앞에 묘비가 두 개인데 이는 모두 후대에 세워진 것으로, 하나는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운이 세운 묘비로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라고 적혀 있다. 다른 하나는 1970년대에 세워진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인데, 이 비석의 능(陵) 자가 비가 오면 '묘(墓)' 자로 바뀐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김유신은 사후 162년 후에 흥무왕으로 추존되는데 국성 외 가문[1]의 인물이 왕으로 추존된 것은 수천년 한국사에서 김유신이 유일했으므로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다.
1970년에 비석을 세울 당시 처음엔 김유신이 어쨌든 왕족이 아닌 일반인이므로 흥무왕묘(墓)라고 새겨 놨으나, 추존이긴 하나 '왕'이 되었으므로 왕에게는 능(陵) 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에 처음엔 묘(墓)라고 써있던 것을 메우고 능(陵)이라고 다시 새겼다고 한다. 글자를 고친 것이므로 옛날 묘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있어서 두 글자가 겹친데다가, 원래 비석에 쓰인 석재와 글자를 메울 때 쓴 석재의 색과 질감이 미묘하게 달라서 물을 뿌리면 글자가 바뀌는 듯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예전에 스펀지에서도 이 능 자에 물을 뿌려 묘 자로 바뀌는 실험을 했는데 이후 이 신비한 현상(?)을 직접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물을 하도 뿌려대서 비석이 중간부터 아래쪽은 살짝 색이 변해있다. 2022년 들어서는 아예 물을 뿌리지 않아도 묘 자가 보일 정도다. 하지만 이 비석도 상당히 오래된 문화재고 여기에 물을 뿌려서 훼손시키는 것은 문화재보호법에 위반하는 행위이니 하지 말자. 보고 싶으면 유튜브에서 보자.
지금 남아있는 후대의 두 비석 말고, 김유신이 사망한 당시에도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기록돼 있다. 이 비석은 천 년 가까이 지나 조선 후기에는 파괴되어 없어져있었고 대신 탁본이 남아있었다고 전하는데, 유득공이 이 탁본을 봤는데 마모가 심해 50여 글자만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 탁본도 없어져서 원래 비석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이 묘는 사실 김유신의 진짜 묘가 아니고 오랜 세월이 지나며 와전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도 제기한 문제이기도 하고 해방 후 이병도는 사실은 김유신의 묘가 아니라 신무왕의 능이며 진짜 김유신의 묘는 오늘날 태종 무열왕의 차남인 김인문의 묘로 전해지고 있는, 무열왕릉의 옆에 딸려있는 '배총'인 '각간묘'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신라왕릉은 각자 수 년~수십 년의 텀을 두고 만들어졌으므로 세세한 형태가 변하는 흐름이 존재하는데, 김유신 묘의 둘레돌이나 십이지상을 두른 양식은 동시대 인물인 무열왕릉의 양식과는 확실히 다르고, 전 신문왕릉[2]을 거쳐서 후대 성덕왕릉 이후에나 확립된 양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병도의 설에 김상기 박사는 훗날 흥덕왕이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면서 흥덕왕 무렵의 신라 후기 양식으로 김유신묘를 개수한 것이라고 반박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당시 이미 추봉된 여러 선왕들의 능을 개수하지 않고 있었는데 굳이 김유신의 묘만을 개수할 이유는 없다는 점이 이 설의 주요 논지.[3]
여기에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 경주 서악서원의 모태였던 서악정사를 지은 목적이 원래는 인접한 김유신묘의 관리를 위해서였다는 것도 포함된다. 서악정사는 동시에 김유신을 모신 사당이기도 했는데 서악서원은 김인문의 묘로 알려진 각간묘에서 약 300m, 지금의 김유신장군묘에서는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이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차무진의 <김유신의 머리일까?>[4]이다. 또한 현재 김유신장군묘로 알려진 무덤이 신무왕릉이 아니라 경덕왕릉으로 보는 설도 있다.[5]
어쨌든 이런 견해도 있지만 오늘날의 그 묘를 김유신의 묘로 간주하고 있다. 무덤을 발굴하는 행위는 유교적 관점에서 금기시되고 있으며, 후손 김해 김씨 문중이 엄연히 지금도 존재하는데 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릉원의 주인을 알 수 없는 능들처럼 대대적으로 발굴할 수도 없는 노릇이며, 설령 그렇게 발굴한다고 해도 무령왕릉마냥 지석을 부장하지 않았다면 '김유신묘가 맞다' 혹은 '아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이 무덤 대신 김유신묘로 추정된 '각간묘'는 일제강점기 서악서원에서 발굴된 김인문의 묘비 조각과 남아있는 각간묘의 귀부(비석을 받치는 거북 모양 받침돌)의 이음매가 일치하여 김인문의 무덤으로 비정된 상태라서 발굴조사는 경주 김씨들도 순순히 하도록 놔둘 거라 보기 힘들다. 그리고 7세기 신라 묘제를 감안하면 각간묘에서도 지석 같이 이 무덤이 김인문묘인지 김유신묘인지를 밝히는 구체적 증거는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만에 하나 각간묘에서 증거가 나와서 각간묘가 진짜 김유신묘로 밝혀진다면 김인문묘는 또 어디냐는 끝없는 퍼즐 찾기가 시작되는 셈이다. 따라서 여러 입장이 얽혀있는 골치아픈 문제라 그냥 여태 하던 대로 현상유지하는 것이다.
3. 기타
밑으로 중앙선 철길[6]이 있어 기차가 수시로 지나갔으나, 경주 시내 문화재 훼손 우려로 동해선과 함께 2021년 12월 28일 경주역으로 이설되었다.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경주 김유신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김유신묘
- 한국고중세사사전: 김유신묘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김유신 묘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김유신 묘
- 대한민국 구석구석: 경주 김유신묘
- 두산백과: 경주 김유신묘
5. 사적 제21호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김유신묘 → 경주 김유신묘)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興德王)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김유신묘 → 경주 김유신묘)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김유신은 김해 김씨, 신라 왕가는 경주 김씨.[2] 현대 학자들 사이에선 신문왕설과 효소왕설이 있다. 일단 전 신문왕릉의 둘레돌 등 석물 양식을 보면 무열왕과 성덕왕 사이 과도기에 해당한다.[3] 다만 김유신이 통일신라 사회에서 그만큼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4] 끌레마. 2010[5] 이것은 2011년에 작고한 이근직 교수(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의 설. 사후 이근직 본인의 주장을 담은 《신라왕릉연구》가 2012년에 출간되었다. 이근직은 아예 경주에 왕릉이라고 전해지는 가운데 7기(27대 선덕여왕릉, 29대 태종무열왕릉, 30대 문무왕릉(대왕암), 33대 성덕왕릉, 38대 원성왕릉(괘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그 비정이 잘못되었으며(실제로는 다른 왕의 무덤이거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왕족 또는 귀족 인사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정) 영원히 사라져버린 왕릉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한 그의 주장 때문에 이근직 교수는 생전에 박, 석, 김씨 이렇게 세 문중에게 항의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후에 이근직 교수는 2011년 6월 17일 아침 경주대학교 앞 사거리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유고가 된 신라왕릉연구는 고인이 생전에 썼던 영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신라 왕릉의 기원과 변천'을 단행본으로 출판하고자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편집까지 완료한 상태로 PC에 남아 있었고 부인 주진옥 씨와 그와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한 동료가 찾아냄으로써 출판되었다고 한다.[6] 묘지인근에 터널2개 가 잇다.(충효1터널, 충효2터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