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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17:22:55

도요토미 히데요시/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1. 유년기2.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3. 천하인이 되다
3.1. 혼노지의 변3.2. 오다 가문의 분열3.3. 천하인3.4. 바테렌 추방령
4. 조선 침공
4.1. 동기4.2. 당시 일본의 반응4.3. 감도는 전운과 막고자 하는 세력의 술수4.4. 임진왜란의 시작과 진행4.5. 엇갈린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4.6. 결론
5. 후계자 문제와 죽음6.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1. 유년기

본인의 주장으로는 일본 오와리국(尾張国, 아이치현 서부)에서 아시가루[1]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확실치는 않으나 유년기 시절 상당히 곤궁하게 보냈으며 자신의 양부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히데요시의 출생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관백 취임 후에 자신의 모친이 주나곤의 딸로, 궁정에서 시녀로 일하다 낙향한 후 자신을 낳았다고 선전한 적은 있으나, 부정적인 주장을 따르면 미천한 신분까지 고귀한 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 그나마 부친이 아시가루였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누나 닛슈니, 동생 히데나가아사히히메, 히데요시가 평생 효도한 어머니 오만도코로(이름은 '나카')를 제외하면 친가 쪽의 친척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2]

아명은 고자루(小猿, 새끼 원숭이) 또는 히요시(日吉).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きのした とうきちろう)로 개명하였고, 오미 국을 평정한 뒤에는 노부나가로부터 치쿠젠노카미(筑前守)의 관위를 받으면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개명하였다가 태정대신(太政大臣), 관백(關白)이 되면서 도요토미(豐臣)라는 을 썼다. 더해서 후지와라 가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 도 있다. 또한, 당시 겐지(源氏) 씨족이었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시(平氏)계임을 자처한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탓에 조선 측 기록을 비롯한 일부 문헌에선 '평수길(平秀吉, 다이라노 히데요시)'이라고도 불린다.[3]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인 평(헤이지)는 분명 오기록이다. 히데요시가 후지와라를 받은 건 간파쿠가 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당시 간파쿠는 후지와라 가문에서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이 "후지와라노"로 시작하던지 "오섭가"의 다섯가지 성 중 하나로만 되어 있는 사람만 계속 간파쿠를 했고, 헤이지(타이라)[4]는 아예 없었다. 간파쿠에 대해서 제대로 조사했다면 쓸 수 없는 기록이다. 단, 위에 기록한 헤이지, 후지와라, 도요토미는 '우지(氏)'이므로, 실제 사용한 성씨(苗字)는 계속 하시바였다는 주장도 있다.

2.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 어머니가 재가하여 의붓아버지와 살았다가[5] 집을 떠나 마츠시타 유키츠나를 섬기며 그에게 병법, 무예, 학문 등을 배웠으나 얼마 안 가 그만두고[6], 18세 때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된다. 이후 기요스 성 수리 실무자와 주방 담당자 등을 담당하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추운 날 노부나가의 신발을 데우려고 품 속에 품고 있자 노부나가가 크게 마음에 들어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한데,[7] 사실 이 일화는 명확한 사료가 있는 게 아니라 전설의 영역에 가깝다고 한다. 강항간양록에 따르면 노부나가가 뭔가 사와야 할 게 있어서 가신들에게 시키면 비싸기만 하고 질이 엉망인 것만 잔뜩 가져오기 십상인데 히데요시는 가신들이 주고 산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더 싼 가격으로 구해오기 때문에 노부나가가 중용했다고 한다. 1555년에는 하치스카 마사카츠의 가신으로 들어갔다고도 하며, 하룻밤만에 성을 만들어내보인 것으로 유명한 스노마타 이치야 성(墨俣一夜城)의 일화도 이 시기(1561)의 것이지만, 이 일화도 후세에서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높다.[8] 히데요시의 이름이 사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568년의 일인데, 간논지 성 공략 당시의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해에 교토 입성에 성공한 노부나가의 명으로, 아케치, 니와 등과 함께 교토의 정무를 담당하였다.

1570년의 가네가사키 전투에서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반으로 인해 급히 퇴각하는 노부나가의 후위(신가리)를 자청하여 자살에 가까운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살아나 큰 공을 세웠고, 1573년의 오다니 성 전투에서도 3천의 군세를 이끌고 아자이 격파에 일조하였다. 아자이 나가마사 사후 그의 옛 영지인 북 오우미 3개 군 18만 석을 영지로 받아 다이묘가 되었으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았는데, 이때 오다 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丹長秀)와 시바타 카츠이에(田勝家)의 성으로부터 한 글자씩 따와 하시바(羽柴)라는 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오미 출신의 인재들을 발굴하는데 힘을 쏟았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이시다 미츠나리이다. 히데요시는 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그의 가신들은 대부분 그와 그의 아내 코다이인의 친인척들일 수밖에 없었고, 정식으로 가신들을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오우미에 터를 잡으면서부터의 일이었다. 이런 정황 때문에 히데요시 사후 이시다 미츠나리를 중심으로 하는 오미 계열 가신들과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을 중심으로 하는 오와리 계열 가신들의 갈등이 일어났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1575년에는 나가시노 전투에 종군하였고, 이듬해에는 상락해오는 우에스기 겐신을 막기 위해 시바타 카츠이에와 연합전선을 펼쳤으나 쌍방의 견해 차이로 히데요시가 이탈, 오다 군이 대패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졌다(데토리가와 전투). 이 일로 노부나가의 격분을 샀지만, 이후 용서받고 시키산성의 마츠나가 히사히데를 공략하여 이를 멸하였다. 이후에는 주고쿠 지방 공략에 참가하여, 1579년까지 아카마쓰(赤松)[9], 마츠바라(松原)[10], 벳쇼(別所)[11], 고데라(小寺)[12], 우키타(宇喜多) 등을 항복시켰으나, 연달아 일어난 반란으로 모리 공략은 연기되었다.

1581년부터 재개된 모리 공략에서, 돗토리 성, 빗추 다카마쓰 성 등을 공략하였다. 하루만에 간 미치나가의 이와야 성을 함락시키는 등 대활약했으며[13], 특히 다카마쓰 성을 공략할 때 물줄기를 돌려 성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 '다카마쓰 수공'으로 히데요시의 전공 중 가장 유명한 일화이다.

3. 천하인이 되다

3.1. 혼노지의 변

이 빗추 다카마쓰 성을 포위할 때 노부나가가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살해당하는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는데, 히데요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다카마쓰 성주인 시미즈 무네하루 한 명만 할복하고 더 이상의 진군을 멈추는 내용[14]으로 모리 측과 즉시 화친하였다. 이후 황급히 교토로 향했는데, 이를 주고쿠 대회군(中国大返し)[15]이라 한다. 현재 유력한 설을 따르자면 6월 6일 오후에 다카마쓰를 출발하여 7일 밤에 히메지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30시간 만에 70km를 주파했다는 기록만으로도 그의 군사적 재능을 알 수 있을 것이다.[16]

몸에 번잡한 장비를 최소한으로 줄인 식량을 휴대하지 않은 경보병 정도면 가능한데 히데요시가 혼노지에서의 소식을 전해듣고 퇴각하기 전에 미리 발이 빠른 사람을 시켜 병사들이 지나게 될 길목에 위치한 마을마다 돈을 줘서 병사들이 도착하면 바로바로 식사 및 새 신발을 조달받을 수 있도록 해둔 뒤에 보급없이 무장을 최소화한 병사들을 선발대로 보내는 방법으로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17]

이후 13일에 교토 근교인 야마자키에 도착하여 미츠히데와 회전(야마자키 전투), 이를 격파하고 교토에 입성하였다.

3.2. 오다 가문의 분열

6월 27일에 기요스 회의가 열렸다.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는 혼노지의 변에서 부친 노부나가와 함께 자살하여 차남 오다 노부카츠와 삼남 오다 노부타카 파로 중신들이 대립하는 가운데, 장남 노부타다의 적자인 산보시(훗날의 오다 히데노부)를 지지하여 이를 옹립하였다. 이 일로 오다 노부타카 및 타키가와 카즈마스 등으로부터 탄핵장을 받았으나, 자신의 양자이자 노부나가의 4남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상주로 삼아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는 것으로 회피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폭설로 군을 움직일 수 없는 틈을 타서 기후 성의 오다 노부타카를 공격하여, 생모와 딸을 인질로 받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고, 이듬해 봄에는 이세의 타키가와 카즈마스를 공격하여 3월에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2월 말에 출진한 시바타 카츠이에와 그에 동조하여 다시 거병한 오다 노부타카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나, 마에다 토시이에의 배반과 신속한 반격으로 승리, 4월 24일에 시바타 가츠이에와 시즈가타케에서 일전을 벌이고 그 결과 가츠이에는 부인인 오이치와 함께 자살한다. 곧이어 5월 2일에는 오다 노부타카가 할복하였다.

오다 가문은 몇 파벌로 갈렸는데,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한 노부타다의 아들 산보시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히데요시가 데려다 옹립한 상태였다. 오다 노부카츠는 도쿠가와의 편에 섰으나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이후 영토와 영향력을 상실한다. 오다 노부타카는 히데요시를 반란을 일으킨 종놈쯤으로 취급하고 공개적으로 대항했으나 패배한 게 어지간히 분했던지, 아주 섬뜩한 절명시를 남겼다. "예로부터 주인을 치는[18] 곳이로구나.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19]

1584년에는 오다 노부카츠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일으켰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키이의 사이카슈, 쵸소카베 모토치카 등이 오다 측에 가담하였다. 히데요시는 이세의 구키 요시타카 및 오다 노부카네, 미노의 이케다 츠네오키 등을 포섭하여 초반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어갔으나, 하구로, 나가쿠테 등에서 연패하였다. 이에 히데요시 본인이 직접 전선에 나서자, 오다 노부카츠가 단독으로 강화에 응하여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투에서는 승리하지 못해 오다나 도쿠가와를 멸망시키는 데는 실패하지만, 이후 도요토미가 정치적으로 우세한 상황에 서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아 히데요시에게 귀순하고, 오다 노부카츠는 소국의 다이묘로 쫓겨난다.

전쟁이 한창이던 10월 중순에 정5위하 좌근위권소장[20]에 임명되었는데, 그로부터 약 한 달 만인 11월 22일에는 권대납언[21]으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관위로도 오다 가(家) 필두가 되어, 명실공히 히데요시 정권을 수립하였다.

3.3. 천하인

이해에 난공불락에 가까운 오사카 성을 쌓았고, 1585년 3월 10일에는 정이위 내대신에 서임, 임관되었다. 3월 21일에는 토도 타카토라로 하여금 키슈를 정벌하게 하여 이를 평정하였다. 또한, 시코쿠의 쵸소카베 가문을 정벌하였고 7월 25일에 쵸소카베로부터 상락을 약속받는 등 평정하였다.

같은 달에는 관백상론의 종결을 위하여 후지와라 씨의 수장인 코노에 사키히사의 양자로 들어가 관백 직을 수여받았다. 관백이란 헤이안 시대에 등장한 율령 외 직위로써, 헤이안 시대 후지와라 가문이 섭정(셋쇼), 관백(간파쿠)를 장악한 섭관정치를 벌인 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명예직에 불과한 공가의 직위였다. 유래는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의 “모든 정사는 곽광에게 거친 뒤에야 천자에게 아뢰었다.”는 글에서 나온 것이다.

이듬해에는 관백이 된 뒤 오기마치 천황으로부터 ([ruby(氏, ruby=うじ)])로서 도요토미를, 성([ruby(姓, ruby=かばね)])으로서 아손([ruby(朝臣, ruby=あそん)])을 하사받아 도요토미노 아손([ruby(豊, ruby=とよ)][ruby(臣, ruby=とみノ)][ruby(朝臣, ruby=あそん)])을 칭하게 되었고[22], 10월에는 총무사령을 선언하며, 다이묘끼리의 사사로운 전투를 금지시켰다. 12월 25일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되었다. 태정대신은 조정 최고위 관직으로, 히데요시의 경우는 헤이안 말기의 타이라노 키요모리처럼 단순히 명예직이 아니라 조정과 일본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 권력자로서의 지위를 상징하는 관직으로 봐야 한다.

관백 취임에 대해 조금 더 서술하면, 당시 일본의 직위 체계는 조정의 권위 실추와 함께 개판이 되어 있었다. 막부 정치 이후 어차피 실권은 슈고 등의 막부 무가직에 있었으나 전국시대에 오면 그것 또한 유명무실에 가까웠고, 다이묘들은 무가직 뿐만 아니라 조정의 관위 또한 뇌물을 주고 얻어내거나, 혹은 참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최고직인 관백직은 공가에서도 최고 명문이었던 후지와라 씨의 오섭가끼리 돌아가면서 취임하였는데, 혼노지 사건 직전 조정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정이대장군, 관백, 태정대신 중 원하는 관직을 주겠다고 한 바 있었으나 그 대답을 듣기 전에 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게 된다. 이 부분은 소위 '삼관추임문제'라고 하여 일본 역사학계에서는 끊이지 않는 논쟁이다.

히데요시는 무가 출신으로써는 최초로 관백에 취임하였고, 게다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음으로써 오섭가가 아닌 무가 출신의 새로운 가문이 관백에 취임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일본의 성씨 제도는 우리의 성(姓)에 해당하는 (氏;우지)와 거기서 갈라져 나온 가문을 나타내는 묘지/묘자(苗字)가 구별되었는데, 히데요시는 오섭가의 일가인 후지와라(氏) 씨- 여기서 후지와라는 본성(本姓) - 코노에(묘지(苗字) 가의 일원으로 관백에 취임했으나, 천황으로부터 도요토미(氏;우지)를 하사받음으로써 새로운 가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원평등귤(源平藤橘; 미나모토, 타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 등의 기존 4대 씨족)과 어깨를 견주는 풍신(豊臣, 도요토미)씨를 창설한 셈이 되었다. '원평등귤'의 4대 성씨는 성립한지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어떤 도전도 받아들인 적이 없는 일본 고유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다.[23] 이 과정에서 히데요시의 어머니가 사실 공가나 황족의 씨를 받아 히데요시를 낳았다는 굴욕적인(...) 내용을 날조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 전체를 쥐고 흔들던 최고권력자 히데요시조차도 조정의 최고위직인 관백에 오르기까지는 실로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24]

그런 고생을 해가면서까지 관백에 오른 것은 히데요시가 앞으로는 막부가 아닌 조정의 일원으로써 율령체계에 입각한 통치를 하겠다는 의미였으며, 이후로도 조정의 관직을 무사들에게 수여하고 조정의 실권을 회복시킨다. 그리고 그 정점인 관백직을 도요토미 가가 세습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는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헤이안 시대의 섭관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다.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관백 직을 후계자로 내정하였던 도요토미 히데츠구에게 물려주었고,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사사한 후에도 다른 누구에게도 관백 직을 내리지 않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장성을 기다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체제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도요토미 가문의 당주가 관백이 된다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너무 어렸고 히데요리가 장성하기도 전에 히데요시 사망 직후 관백이 되지 못했고 후견 세력도 마땅치 못하여 정권이 무너진다. 이는 히데요시가 스스로 벌인 실책이었는데 양아들이자 관백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살려두고 실권을 전부 빼앗으면 후환이 있을지 모르니 중요한 것만 빼앗고 히데요리를 받쳐줄 권력 기반을 만들어 두는게 상책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히데츠구가 후일 히데요리를 죽이려 들거나 히데츠구가 죽지 않는 이상 히데요리가 장성해도 이어받지 못 하는 등 걸림돌이라 판단해 나머지 히데츠구와 그의 가족들을 전부 숙청시켜 버렸다.

세키가하라 전투로 실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관백 직을 다시 오섭가에 돌려주었고, 자신은 정이대장군에 취임하여 막부를 통한 통치로 돌아갔으며, 관직을 공가의 것과 무가의 것으로 엄격하게 나누게 된다. 후대 메이지 유신 시대에 히데요시의 이러한 정치체제 구상은 천황을 존중한 것으로 높게 평가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도 막부 개창은 천황을 무시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어 히데요시는 충신으로, 이에야스는 역신으로 평가하여 천황의 권위 강화에 써먹었다. 이는 메이지 유신 자체가 기존 패권세력인 도쿠가와 가문을 권력에서 거세해 버리고 존황 세력이 정권을 잡는 과정이었기에, 유신 마무리 과정에서 유신의 당위적 명분을 위해 도쿠가와 집안 자체를 무조건 악질적인 권력 집단으로 매도할 필요가 컸기 때문이다.[25]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이 되어 조정 내에서 정치를 한 이유는 그가 정이대장군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일본 황실이 무력화된 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그 상징성까지 없어지는 게 아니어서 일본은 누가 뭐라 해도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권세를 잡기 위해서는 황실과 최소한의 혈연적 유사성은 있어야 했다. 막부정이대장군은 천황과 혈통상 연관성이 존재하는 가문의 후손이어야만 한다는 전제가 반드시 붙었는데 잘해봐야 농민 출신인 아시가루의 아들에게 그런 고귀한 혈통이 존재했을 리 없고, 있어도 증명이 불가능하다. 이전의 쇼군가인 미나모토 씨와 그 방계인 아시카가 씨는 본래 황족에서 신적강하한 겐지이므로 천황과 먼 혈연이 있고 나중에 쇼군이 된 도쿠가와가 선조라고 주장한 닛타 씨도 겐지에 속한다.

물론 그 휘하의 병력을 동원해 압박할 수는 있었겠으나 히데요시가 자신의 친위세력 칠본창의 공적을 쌓게 하고 다른 다이묘들의 병력과 재산을 소모시키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하필 선봉장 역할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피해가 컸기에 이후 서군에 붙는 고니시는 2번의 왜란의 여파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7천명밖에 동원을 못 했다. 설상가상으로 친위 무장세력인 칠본창들은 히데요시 가문 아래 있던 문치파와 충돌을 벌이며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 칠본창 중 카스야 타케노리만 빼고 전부 도쿠가와에 붙어 버렸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칠본창도 전부 평민 출신이었고 이들에게 하사할 영지가 더이상 없었기에 성장에는 한계가 있었고 대다이묘들이 다수 뭉친 도쿠가와를 압박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도요토미 가문이 확실하게 믿을 만한 병력은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오오타니 요시츠구, 우키타 히데이에 등 소수에 불과했고, 오사카 성 전투 겨울 때는 좀 더 병력이 늘긴 했지만 이것도 실상은 진짜 충성하는 자들이 아니라 에도 막부에 대한 반감이 큰 낭인들을 도요토미 가문이 지닌 막대한 금은보화로 고용한 인물들이었고 이 외에는 도쿠가와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당하던 가톨릭 신도 일부가 가세한 것이다.

미나모토모 요시이에(源義家)의 증손인 닛타 요시스에(新田義季)의 후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교하여, 천황의 혈통 관계를 주작하면 쇼군이 될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솔직히 무리수이다. 애초에 본인부터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고작 모친의 주나곤 딸 썰 따위를 주장한 것이다. 참고로 일본도 부계를 중시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후지와라씨의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26]가 되기 위해 발광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쇼군직을 폐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일본은 무가인 사무라이들은 몰라도 천황과 공가인 귀족들은 항상 남아있는 편이라 혈통 세탁이 난이도가 높았다. 그래서 속임수를 써도 딱히 의미가 없어서 정식으로 세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587년에는 히데요시의 호령하에 모인 20만 대군으로 규슈를 정벌하여 시마즈 가문을 복속시켰고, 같은 해 교토에 주라쿠다이(聚樂第, 취락제 또는 聚樂臺, 취락대)라는 대저택을 건축하여 이듬해 천황을 초청했다. 또한 이 해에 칼사냥(刀狩り) 및 해적 금지령을 내렸다.[27] 또한, 규슈 일대의 기독교도들의 횡포를[28] 목격한 후에 바테렌 추방령(バテレン追放令)을 내려 기독교에 압박을 가했다.

1588년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명목뿐이기는 하나 그때까지 유지하고 있던 쇼군 직을 비로소 사임하였다. 후임자가 없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취임하기까지 정이대장군 직은 15년간 공석이 된다.

1589년에는 측실인 요도도노[29]로부터 장남 도요토미 츠루마츠(鶴松)를 얻으면서 정식 후계자로 얻었으며 도요토미 가문은 탄탄대로의 길을 밟았다.

이듬해인 1590년에는 간토 지방의 강자였던 후호조씨호조 우지마사를 노렸다. 과거 천황까지 초청했던 취락대에 불참했던 호조 가문을 곱게 보지 않았지만 호조의 오다와라 성이나 간토 6주 평원에서 나오는 인구수가 있었으며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가신들도 전쟁보다 최대한 설득해 상락을 시키자는 의견이 강했다. 이때는 츠루마츠가 살아있었기에 흑화하기 전의 히데요시라 이를 받아들였고 즉시 상락하라는 의도의 사신을 보냈으며 이에 우지마사도 일단 상락을 하되 1590년 봄이나 여름 즈음에 상락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히데요시는 즉각적인 상락을 원했기에 거부했고 호조 가문 침공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때 우지마사에게 몰락으로 연결되는 사건이 터진다. 호조는 이전부터 다케다 가문과 누마타 지역을 가지고 분쟁하였고 다케다 가문 멸문 이후 다케다 가문 휘하에 있던 사나다 가문이 이를 차지한 뒤 분쟁지역 중 하나였으며 히데요시가 다이묘들끼리 전쟁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기에 사나다 가문은 히데요시에게 항전 허락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일단 재판을 열었고 중재 하에 '사나다 가문이 통지하던 누마타 영지의 2/3을 호조에 넘기고 사나다 측이 사나다 가문의 선조 선산이 있다고 주장한 나구루미 지역(누마타 영지의 1/3)은 사나다가 통치한다'는 판결을 내려 중재시켰다. 그러나 호조 우지마사는 이 판결이 만족스럽지 못했고 나구루미가 누마타보다 고지대에 있어서 움직임이 훤히 보인다고 판단하며 도요토미의 중재를 무시하고 병력을 출진시켜 사나다 가의 나구루미를 무단으로 침범하여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취락대에 불참하여 호조가 불편했고 자신의 중재도 무시하며 나구루미를 침공하여 빼앗음으로써 먹칠을 한 만큼 히데요시는 말 그대로 뚜껑이 제대로 열렸다. 일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분을 위해 최후통첩으로 "좋은 말 할 때 나구루미 성을 사나다 가문에게 돌려주고 중재안을 따르면서 상락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호조 가문은 이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화친에서 항전을 선택하며 병력을 모으기 시작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조 정벌을 결정, 자신에게 복속된 다이묘들에게 병력을 모아 집결하라는 한마디에 22만 병력이 모였고 복속된 가문들이 진군하기 편하도록 2개의 방향으로 병력을 나눈다. 히데요시를 비롯해 간토 기준 서쪽에 있는 다이묘[30]들은 간토 평야로 진군해 오다와라성을 포위했고, 간토 평야 북측에 있는 다이묘[31]들은 사나다 가문의 영지를 거쳐 간토 평야 북쪽을 침공 후 특정 지점에서 갈라져서 총 3방향으로 침공해왔다.

오다와라성은 난공불락으로 유명했던 성이었고 오다와라성만 해도 3만이라는 수비하는 군이 있었지만 히데요시가 이끄는 본대는 그것의 몇 배나 많은 만큼 정면으로 승산이 없었기에 호조는 철저히 농성을 하였다. 호조는 식량 문제나 예산 문제로 히데요시가 끌고 온 다이묘들이 내분으로 스스로 파훼되거나 자기보다 식량이 떨어져서 후퇴할 것이고 동맹이었던 다테 가문이 북쪽의 호조 병력과 함께 도우러 올 것이라는 행복회로를 돌리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간토 평야 북쪽도 우에스기를 주축으로 한 히데요시 침공군에 의해 성이 계속 함락되고 있었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호조를 지원하기는커녕 백의를 입고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맹세하였고, 히데요시가 사카이 항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가까운 이익으로 쌓인 막대한 금은보화 덕에 3개월간 식량이나 전쟁 비용 또한 멀쩡한 반면, 호조는 외부가 막혀서 보급도 없었고 비축해둔 식량도 급격한 속도로 줄어들며 사방이 포위되어 원군은 오지 않는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호조 우지마사는 3개월 만에 무조건적인 항복을 하였다. 포위 중에 다테 등 토호쿠의 다이묘들도 항복의 의사를 표했으므로, 이 시점에서 일본의 통일은 완수되었으며 히데요시는 도쿠가와를 경계했고 이에 미카와 지방을 다스리던 도쿠가와를 간토 6주로 전봉시켜 오사카서 좀 멀리 배치시킴으로써 천하인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32]

완전한 천하인이 되어 내정을 바라볼 무렵 히데요시의 흑화를 억제하고 나름 정상적인 판단을 도와준 도요토미 히데나가가 병사했고 같은 해 적장자 도요토미 츠루마츠도 3살의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33] 1591년에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양자로 삼아 관백 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태합(太閤, 전 관백/관백에 대한 경칭)을 칭하여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언하였다.

3.4. 바테렌 추방령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와는 달리 천주교를 매우 탄압했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같은 선교사는 "우수한 기사로 전투에 숙련되어 있으나 기품이 부족하다. 키가 작고 추악한 용모에 한 손에 여섯 손가락이 있었다. 극도로 음탕하고 악덕에 오염되어 있었다. 빈틈없는 책모가이다. 그가 지은 오사카 성에는 300여 명의 여자들이 우글거려서, 성이라기보다는 유곽에 가까웠다."라고 히데요시를 평가했다. 이에 반해 그의 부인인 네네에 대해서는 "이교도이지만 대단한 인격자이며, 그녀에게 부탁하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호평하기도 했다.[34]

히데요시 초기에는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기독교에 대해 긍정적이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꿔 1587년 바테렌(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는데, 동기로는 일본의 천하인으로써 일본의 전통 종교인 불교-신토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생겼다는 것, 그리스도교 포교가 상대국의 식민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규슈 정벌 중에 구마모토 지방에서 일본 백성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포르투갈 노예 상인들의 행태를 목격한 사건이 주로 꼽힌다. 주로 서양인들과 교류가 잦은 규슈 지방을 중심으로 일본인 노예를 팔아넘겼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고수하는 원인이 되었다. 비록 선교사들이 노예 무역에 부정적이었으며, 실제로 1598년에 일본인도 아닌 조선인 노예 무역을 파문으로 위협하여 제재할 정도로 이 문제를 심각하게 여긴 것은 분명하지만, 일본인과 서양인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던 선교사의 포지션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선교사를 의심할 동기를 준 것이다.[35] 때문에 히데요시는 16세기 말에 천주교 금압과 함께 일본 내에서 노예매매 또한 금지시키게 되지만 완전히 금지시킨 건 아니고, 노예로 전락시키는 대상을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포로들로 바꿨을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노예무역은 17세기 초 에도막부 시절에 가면 사실상 완전히 사라지면서 조선인 노예들은 전국시대 당시 일본인 노예들만큼 많이 팔려나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에 대한 제재에 나선 것은 종교적인 이유보다 정치적 이유가 더 강한 결정이었다. 애초에 히데요시의 바테렌 추방령은 이후의 에도 막부의 금교령처럼 무차별적이고 무조건적인 기독교도 박해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 바테렌 추방령의 내용은 신토불교에 대한 배척[36] 그리고 강제개종(하거나 혹은 시키거나)을 금지하되, 영지의 백성들이 제 뜻대로 기독교를 믿는 생각까지 막은 것은 아니었고 다만 다이묘가 기독교인이 되려거든 허락을 받고 되라고 함으로써, 예수회가 다이묘들에게[37] 선교를 빌미로 접촉해 연계하고 나아가 그들을 지원하는 상황이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기독교 선교사 자체는 이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시절부터 여러 차례 보아왔던 것이었지만, 그가 예수회, 나아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달리 보게 된 것은 대체로 규슈 정벌(1586.7~1587.4)을 전후해서였다. 당시 규슈 지역에는 고니시 유키나가[38], 아리마 하루노부[39], 타카야마 우콘[40], 오토모 소린[41], 오무라 스미타다[42], 가모 우지사토[43] 같은 기독교 다이묘들이 꽤 많이 있었다.[44] 이들은 서양 선교사들과의 연줄을 통해 남만이라 불리던 유럽 국가들의 상인들과 교역하면서 재력을 쌓거나, 조총이나 불랑기포 같은 신무기를 수입해 보유하기도 했으며[45] 동시에 기독교인 다이묘들에게 종교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그들 다이묘의 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모습은 가뜩이나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와 만인의 꼭대기에 서고 싶어 안달이 난 히데요시에게는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루이스 프로이스에 따르면 규슈 정벌이 시작되기 전인 덴쇼 14년(1586년) 3월 1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서 예수회 선교사 가스파르 코엘류(Gaspar Coelho)[46]와 접견했는데, 그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이 끝나면 조선에 출병해 명나라가 있는 중국 대륙까지 침공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코엘류에게 털어 놓으면서 “대륙 정복에 성공하면 각지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선교사들을 지원해 줄 테니까, 그 때가 오면 포르투갈 선박 2척과 항해사를 나한테 좀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고, 명나라 정복에 성공하면 조선과 중국에 기독교 포교를 허락하겠다며 회유했다.

사실 선교사들 입장에서 보기에 굳이 성직자로서의 양심 때문만이 아니어도 히데요시의 전쟁을 반대할 명분은 많았다. 당장 일본보다 먼저 중국에 들어가 전도하면서 명나라의 국력에 비하면 일본의 국력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선교사들 본인이니까. 나중에 가서 히데요시의 전쟁은 명분도 정의도 없다고 비판하기는 하지만, 당장 히데요시의 제안을 들었던 그 오사카 성에서 선교사들은 히데요시의 중국 침공 계획을 대놓고 말리거나 또는 우회적으로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히데요시의 계획을 돕겠다고 나섰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 따르면 가스파르 코엘류는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히데요시의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는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들이 많습니다. 예수회 선교사인 제가 주선해 드릴 테니까, 그들과 합동해서 작전을 짜보도록 하시지요"라고 제안했다.[47] 하지만 루이스 프로이스 외에도 이 자리에는 30명이 넘는 가톨릭 사제수도자도 함께 있었는데, 이들의 이야기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과는 정반대이다. 조선과 명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서양식 군함과 항해사를 히데요시에게 제공하는 안건을 논의한 이 날의 자리에서 프로이스나 코엘류와 함께 히데요시를 접견하는 그 자리에 있었던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48] 신부는 "서양식 군함 및 항해사를 히데요시의 대륙 공격에 맞춰 제공하는 안건은 히데요시가 아니라 프로이스와 코엘류가 먼저 꺼낸 말이었다"고 기록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전12권)를 일본어로 완역한 일본의 사학자 마쓰다 기이치(松田毅一)는 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남만인>에서 정황상 오르간티노 그네키 솔도의 증언대로 히데요시의 대륙 공격에 대한 서양 군함과 항해사 제공에 대해 히데요시가 아니라 루이스 프로이스와 가스파르 코엘류가 먼저 제안한 것이 맞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써 이미 코엘류 본인부터가 히데요시와 접견하기 2년 전인 1583년부터 "일본의 가톨릭을 군사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루손의 에스파냐 총독에게 지속적으로 군사 지원 요청을 보내고 있었으며, 같은 시기에 루손에서 활동하던 사제 알론소 산체스(1547~1593)는 코엘류와 시기를 같이 해서 에스파냐가 중국을 무력으로 정복해서,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오고 있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명나라 정복 구상을 1586년에 루손 총독은 실제로 승인하고, 산체스를 마드리드로 보내어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구상하기 이전에 이미 에스파냐나 예수회의 종교적인 '콩키스타도르' 대상에 엄연히 중국도 포함되어 있었던 셈이다.

애초에 산체스를 비롯한 이들 가톨릭 신부들은 당시 명에서 활동하며 기독교 전도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던 마테오 리치를 앞세우면 쉽게 명을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히데요시에게 몰수당한 규슈의 예수회 영지를 되찾겠다며 에스파냐 병력을 일본으로 지원해 달라는 코엘류의 요청을 거절하고 본국에 보내는 편지에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은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고 딱 잘라 말할 정도로 온건파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조차 히데요시의 중국 정복 구상에는 찬성했다.[49] 선교사들이 먼저 히데요시의 조선 및 명나라 침략에 대한 지원을 제안했든 히데요시의 조선 및 명으로의 침략 계획에 못 이기는 척 맞장구친 것이든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는 최고 권력자가 된 히데요시의 기분을 맞춰주면서 동시에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도를 더욱 수월하게 하고, 나아가 중국이라는 더 넓은 전도 시장을 얻고 싶다는 욕심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라는 더 넓은 전도 시장을 얻겠다는 욕심에 "우리가 나서서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교섭을 돕겠다. 그들과 함께 작전을 짜 보자. 본국에 말해서 항해사와 군함도 지원해 줄 수 있다"라며 히데요시에게 찬동하는 선교사들을 본 히데요시는 선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물론 이들 선교사들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안 그래도 규슈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 기리시탄 영주들이 각지의 사찰이나 신사를 '우상숭배' 내지 '미신'으로 몰아 파괴해 버리는 등 매우 강압적으로 굴었다는 점, 나가사키에서 일본인이 노예로 팔려나가는 점이[50] 통치자로써의 히데요시 자신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민심의 반발을 불러 일으켜 반역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었던 히데요시였다. 아울러 대놓고 소와 말을 식용으로 도살한다는 사실도 그의 불교적 감성으로는 못마땅했다.[51]

코엘류나 다른 선교사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히데요시는 규슈의 기리시탄 다이묘들과 예수회 선교사들이 생각 이상으로 밀접하게 유착되어 있으며 또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들에게 영향을 주니 위험하다는 위기감을 품었다. 코엘류가 히데요시의 중국 대륙으로의 침공 계획에 찬동하면서 "규슈에 기리시탄 다이묘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그 사람들하고 주선해 드릴 테니까 그들과 함께 작전을 짜 봅시다"라고 호언하는 것은 히데요시에게 센고쿠 시대 불교처럼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여 뒷배가 되는 꼴을 연상시켰다.

히데요시는 이후 다시 한번 기리시탄 다이묘 뒤에 있는 예수회나 기독교의 '위험성'을 자각하게 되는데, 규슈 정벌이 끝난 뒤인 덴쇼 15년(1587년) 6월 10일 히데요시가 하카타에 왔을 때 가스파르 코엘류는 다시 자신이 타고 온 범선인 푸스타(Fusta) 호를 타고 하카타 해상에서 히데요시를 접견했다. 이때 거의 군함 수준으로 무장이 되어 있는 예수회 소유의 범선 푸스타 호 안을 둘러본 히데요시는 놀라워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도 히데요시에게 포르투갈 전함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이런 무장력을 가진 예수회라는 집단에 대한 공포감을 더 부추겼다.[52] 선교사로써 코엘료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전도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권력자 히데요시에게 예수회는 언제든 당신의 편에서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다며 환심사기용으로 예수회가 가진 무장력을 보여준 것이었지만, 히데요시는 굳이 평화적으로 종교를 전도하러 왔다는 인간들이 무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했을 뿐더러 그 무장력이 확실히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함을 확인하고서 위협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히데요시는 당장 자신이 말단 병사에서 시작해 주군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며 경력 쌓던 시절 내내 영적인 스승을 자처하는 동시에 자체적인 군사력을 가진 종교가 세속의 정치 권력에 맞서 강력하고 위협적인 적대 세력(내지 그 후원)이 될 수 있다는 것그걸 자기 주군이나 다른 다이묘들이 얼마나 힘들게 밟아 조져야 했는지를 본인 눈으로 직접 보면서 살았던 사람이다.[53] 일본의 다른 다이묘들은 말할 것도 없다.[54] 특히나 일본 내에서도 중앙으로부터의 독립성이나 반골 기질 세기로는 정평이 나 있었던[55] 규슈의 히데요시에 대한 반대파 다이묘들이 언제고 예수회의 무장력을 끌어들여 히데요시의 권력을 끌어내리지 않을 것이라고[56]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가스파르 코엘류는 히데요시가 바테렌 추방령을 발호하고(1587년) 나가사키 등 일본 내의 예수회 영지를 몰수해 히데요시 자신의 직할령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며 무력으로 몰수당한 예수회 영지를 되찾기 위해 키리시탄 다이묘들로부터 군수물자를 지원받으려 했지만, 키리시탄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나 아리마 하루노부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코엘료는 다시 마닐라, 마카오, 고아에 연락해 2,300명의 병력을 일본으로 급파할 것을 요청했지만, 예수회 동인도 관찰구역 순찰사였던 알레산드로 발리냐노(Alessandro Valignano)[57]의 조치로 끝내 무산되었다.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덴쇼 18년(1590년) 인도 총독의 대사 자격으로 주라쿠다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회견하고 외국의 진기한 물품을 선물한다. 이는 히데요시가 내린 바테렌 추방령, 즉 선교사들에 대한 추방 명령을 철회시켜보려는 목적이었고, 히데요시를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의 조선 침략 계획에 전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다시금 밝히게 된다.[58] 이때, 발리냐노와 함께 히데요시를 만난 게 덴쇼 소년사절단이다.

4. 조선 침공

4.1. 동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도 있고 그 중에는 1591년에 겨우 낳은 아들 츠루마츠의 죽음과 맞물려 그 충격으로 말미암은 '히데요시 노망설'도 있지만[59] 사실 히데요시가 대륙 진출을 운운한 최초의 기록은 1585년부터 나타나며 오다 노부나가의 대륙 진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존재한다. 다만, 오다 노부나가가 정말로 일본 통일 후 대륙 침략 전쟁을 할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60] 즉 일본을 완전히 통일하기 전부터 대륙 진출을 운운했다는 뜻으로 대륙에 '진출' 한다는 생각은 어떤 형태로든 히데요시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망상에 가득찬 계획에 불과했고, 히데요시와 관련된 많은 사료에서 그런 과대망상적인 심리가 드러난다. 조선에 보낸, 오만방자한 국서가 대표적이다. 본인 스스로를 태양의 아들이라 칭하며 그 근거는 자기 어머니의 태몽이고, 대륙을 정복하여 제국의 정치를 억만 년을 시행하겠으며, 늦게 따라오는 나라는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삼가 나의 사적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이지만,[61]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가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로 인하여 나에게 적심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00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의 정화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가 되어 입조한다면 원려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조수정실록>> 19년 3월 1일

이 외에도 루손(=스페인령 필리핀)[62], 태국, 고산국(=대만), 류큐(=오키나와) 왕국에도 비슷한 내용의 친서를 보냈다. 심지어 포르투갈 선교사 편으로 인도에 있는 포르투갈령 고아에 (내가 인도까지 정복할 테니까) 거기서 보자는 내용의 글을 보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해당 국가들에게 엄청난 어그로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후금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뿐만 아니라 태국과 류큐도 조선을 도와 참전할 계획이 있었지만[63] 그러면 일이 복잡해진다면서 명나라와 조선이 임진왜란 참전은 자신들만으로 정리했다. 이런 것에도 나타나듯 그는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나라들까지 괜히 적대하게 만든 것이다.

당시는 16세기로, 조선과 중국의 엄청난 쇠퇴기였던 19세기 말 및 20세기 초와 정세가 전혀 달랐다. 당시 명나라는 황제가 막장이어서 그렇지, 군사력도 엄청나게 형편없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수도인 북경을 지켜내지도 못했던[64] 훗날의 청나라 말기와 달리 국력만은 동아시아 최강국 수준이었다.[65] 조선 또한 비록 오랜 평화와 세조·연산군·중종 때의 실책으로 조선 초기보다는 군사력이 약해져 있었지만[66] 명종 시기부터의 군제 개혁으로 강한 조선 수군이순신을 갖춰놓고 있었다. 그리고 진작부터 워낙 어그로를 끌어댄지라 명나라는 멸망 직전의 조선을 돕기 위해 전쟁에 개입했다. 조선과의 교역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군사적 안정을 위해 조선 정부로부터 관직을 받기까지 했던 쓰시마의 도주 소 요시토시가 조작질까지 하면서 막은 건 그만한 이유가 있던 것이다. 대마도주 뿐 아니라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도 지쳐있어서 상당수의 일본의 영주들도 히데요시의 원정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과대망상에 부풀려 명나라는 물론 인도까지 점령하겠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목표치는 명나라까지이고 조선의 저항이 강하고 전황이 불리하자 조선의 하삼도를 점령하는 것으로 수정하였다. 그리고 설사 인도까지 점령하겠다 생각하더라도 긴 보급 문제와 당시 인도를 지배하고 있는 무굴 제국의 황제는 그 유명한 정복 군주인 악바르 대제이다. 당시 무굴 제국군은 오스만 제국군과 명나라군과 견주어 아시아의 최강의 군대였고 백병전에 강한 일본군도 두려워하는 코끼리 부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인도의 기후도 그렇게 고온다습하기로 유명한 일본의 여름보다도 더욱 고온다습하여 풍토병에 걸리기 딱 좋아서 진격하기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이를 두고 정치나 경제적인 면에서 이유를 찾는 많은 이론이 있지만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겨우 10년이었으나 그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자가 되었다. 여러 봉건영주를 복속시킨 후 그의 권력은 무제한의 공중에 떠서 무중력적 기분이 되어 망상세계의 병자가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표현했다.

이외에도 미천한 출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른 자들보다 기반이 부족했는데, 그렇기에 권세를 대대손손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다이묘들을 휘어잡을 만한 확실한 업적이 있거나 그들을 압도할 만한 카리스마를 갖거나 해야 했다. 당장 히데요시 생전에는 천하통일의 업적을 명분으로 통치할 수 있으나 그 후손이 이어갈만한 정통성은 충분치 않았고 이렇게 정통성이 부족한 권신의 세습 정권은 미숙한 후계자가 나오면 다시 찬탈당하기 매우 쉬운 환경이다.[67] 그렇다고 일단 굽히고 들어온 다이묘들을 다 억지명분으로 잡아족칠 수도 없으니[68] 그 대신으로 조선을 정복하여 나름의 업적을 인정받고 조선을 새로운 자기 친위 세력의 영지로 삼아[69] 동일본 쪽의 다이묘들도 전부 제압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만약 그게 성공했다면, 하다못해 조선의 곡창인 삼남만 집어삼키는 것에 성공했다면[70] 에도 막부는 영원히 세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히데요시가 간토의 호조 가문[71]을 정벌할 때 규슈의 시마즈나 막 규슈에 배치된 부하 장수들의 병력을 부르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72]에서였다. 도요토미는 도쿠가와를 조선 공격에 크게 동원할 의도가 없었고, 조선 침략에 동원된 장수들의 면면은 대개 히데요시가 비교적 신뢰할 수 있거나 히데요시 정권과 관계가 가까운 심복들 및 서일본의 영주들로 채워져 있었다.

프로이스 일본사 등 여러 문헌에서 히데요시는 자신이 신뢰할 만한 장수들을 성장시키려는 속내를 일정 부분 드러내고 있다. 총대장이 둘 다 애송이급인 것도 그러한 연유인데, 우키타 히데이에(임진왜란 당시 20세)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정유재란 당시 15세)는 둘 다 히데요시의 친족이었다.[73] 여하튼 도요토미가 조선 및 명 정벌에 성공해 영지를 대폭 늘리고 부하들에게도 뿌렸다면 세력을 엄청나게 키울 수 있었겠지만 결과는 패착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가문과 부하들이 멸문으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에서 결국 리스크만 본 셈이다.

아울러 동일본의 장수들은 히데요시가 신뢰할 수 없었고[74] 영지도 멀어서 동원할 만한 메리트가 없었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다테 마사무네 같이 고쿠다카의 크기가 거대한[75] 다이묘들이 동일본에 상당수 포진해있었는데, 이들은 배부른 호랑이였기에 조선으로 진출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일본 내에서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여러 성 건축 등의 사업을 시행하고 있었고, 기존의 세력 기반이었던 미카와에서 간토 지방으로 영지가 바뀐 이에야스는 새 영지를 안정화[76]하는 사업 때문에[77] 병사를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도쿠가와 등 동일본 지역의 다이묘들로서는 출병하는 데에 서일본의 다이묘들보다는 더 많은 비용이 소모될 텐데, 이는 히데요시에게는 논공행상에서 그들에게 그만큼 더 많은 몫을 두둑히 쳐줘야 한다는 양날의 검이 있다. 도쿠가와의 영지는 상술했듯이 안정화되지 않은 지역이 많았으며 워낙 간토 사람들의 텃세가 심해서 치안 유지에도 골머리를 앓고 있을 정도였다.[78]

실제로 히데요시는 껄끄러운 다이묘들을 통치가 힘든 지역으로 전봉시켜서, 이를 거부할 시 내쳐버리거나(오다 노부카츠), 이후 반란이 일어나는 등 영지의 경영에 실패할 시 그것을 구실로 숙청하는(삿사 나리마사) 일이 많았다. 호조 가문의 세력이 깊이 뿌리내려 있고 반항적, 독립적 풍습이 있는 간토를 다스리는 것은 상당한 난관이었으므로 봉지 경영 때문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은 합리적인 이유다.[79]

그리고 또다른 이유가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히데요시의 통치력 부족이었다.[80] 히데요시는 급한 불을 끄는 건 잘했지만 오랫동안 국가경영을 하는 능력은 매우 미숙했다. 한마디로 일개 군 사령관으로 일하면 잘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실격인 스타일이[81]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능력과 인격이었다. 그 때문에 어떻게든 일본은 계속 다스려야겠고 결국 전투지휘관 스타일로밖에 리더 자질이 없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내부의 전쟁 상황이 어느 정도 임시로 끝나자, 바로 이웃나라인 조선에 전쟁을 걸었고 또다시 전투지휘관이 되었다.

4.2. 당시 일본의 반응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이 동기에 대해 히데요시가 종종 주변인들에게 "이 정도의 권력을 얻었는데 커다란 위업을 이뤄내지 못한다면 지금 가진 권력이나 영광을 조만간 잃고 말 것이다." 라는 발언을 했다고도 하며, 반란이나 음모를 통해 일을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한 봉건영주들을 통제하기 위한 방안으로의 성격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히데요시의 생각은 아주 근거없는 말은 아닌데,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에서 천하인으로 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다른 일본 다이묘들이 가진 두터운 가신단 같은 지지기반도 거의 없었던데다, 그 가신단마저도 오와리 계통의 가신단과 자신이 오우미에서 새롭게 육성한 가신단 사이의 반목까지 존재했다.[82] 여러 면에서 기존 기득권층과 충돌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관백이면서 군권까지 장악한 히데요시가 죄다 박살낼 수는 있었겠지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히데요시와 동고동락하며 성장한 시즈가타케의 칠본창도 이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크게 있지는 않았다. 리더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만 해도 고쿠다카 11만 석 이상의 다이묘였고, 가토 기요마사는 24만석이었고, 가토 요시아키는 10만석 정도 되었다. 물론 간토를 지배하던 256만 석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주고쿠를 지배하던 112만 석의 모리 데루모토 등의 오대로에 비하면 새발의 피인 것이 사실이나, 요시아키보다 급 떨어지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임진왜란에 1,500명을 끌고 온 것에서 알 수 있듯, 칠본창이 임진왜란 직전에 쌓아올린 것만 해도 대대손손 자랑할 수준의 출세였다. 고쿠다카 1만석 이상이면 다이묘 취급을 받았는데, 다이묘는 영주로서, 그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다. 이미 다이묘가 되었고, 적더라도 수백, 수천 석의 봉급을 받는데[83] 굳이 적지에서 싸우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을 리 없었다.

한편, 서일본 입장에서는 상상하기 싫은 일이었다. 일단 히젠 나고야성이 건축된 것이나, 쓰시마 섬과 이키 섬이 전선기지로 사용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조선과 가까운 규슈, 주고쿠 등의 서일본 다이묘들은 최전선에 설 것이 뻔한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임진왜란에 주력으로 투입된 왜군의 상당수는 서일본 소속이었다.

쓰시마 섬 입장에서는 완전한 재앙이었다. 삼포왜란, 사량진 왜변, 을묘왜변 등이 일어나며 조선 정부는 일본 세견선의 수를 낮춰버렸고, 사실상 '대마도주(소 가문)'만을 무역 파트너로 삼았다. 을묘왜변 이후에는 조선 정부가 허용한 세견선 규모가 줄을 대로 줄어 30척 수준이었다. 주고쿠의 오우치 가문이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를 생각해 보면,[84] 쓰시마는 물론 서일본 입장에서도 조선과의 무역은 크게 중요한 것이었다. 쓰시마는 생산력이 부족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과의 무역으로 돈을 벌고, 조선산 쌀을 들여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조선 침공이 일어나면 이게 몽땅 날아가버리는 상황이 된다.

또한, 설령 조선 침공이 성공했어도 쓰시마 섬 입장에서는 문제가 컸다. 이전에 쓰시마가 무역으로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쓰시마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조선과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침공의 성공은 한반도에 일본 다이묘가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게 되면 쓰시마의 지리적 이점이 소멸한다. 결국 쓰시마는 몰락하게 되는 것이다. 쓰시마 다이묘인 소 요시토시와 그의 장인이자 규슈 지역 다이묘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란 직전 발작한 것이나, 소 요시토시가 정유재란 이후 조선과의 국교 정상화를 위해 국서를 위조해대며 간 큰 짓을 밥먹듯 벌였던 것에서만 봐도 쓰시마와 서일본 입장에서 조선 침공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결국 히데요시 이외의 대다수가 이 침략 계획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끌려갈까봐 두려워했다. 그 중에서도 반란을 계획할까 망설이는 사람이나 '외국 땅에 끌려가서 죽을 바에는 자살하는 게 낫다'라고 처자식과 함께 한탄하는 사람들까지 나왔다고 한다. 조선이 신라구처럼 침략을 밥 먹듯이, 혹은 원나라처럼 대대적으로 침략하는 나라였다면 선빵이라도 날리자며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 세종의 쓰시마 정벌 이후 조선이 일본을 공격한 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왜인들, 정확힌 왜구삼포왜란, 사량진 왜변, 을묘왜변 등을 저지르며 조선에 선빵을 날리고 있는 상태였다. 센고쿠 시대의 종말과 이후의 평화가 보이는 시점에서, 결국 조선 및 그 이후 명나라까지 치고 나가더라도 전사하면 쌓인 것도 잃는 빼도박도 못할 개죽음인지라, 일개 아시가루부터 고급 지휘관에 이르기까지 죄다 이 침략에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중앙집권이 패시브로 깔린 조선과 달리, 센고쿠 시대 일본은 각 지역의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를 거느리는 봉건주의적 권력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 전란이 이어지는 군웅할거의 시대였는데,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가신이 다이묘를 죽이고 세력을 삼키는 등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고 하극상이 만연한 시대이기도 했다.

천황은 실질적인 통치력이나 권력이 전무하였다. 굳이 센고쿠 시대의 막장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이랬던 것이 아니다. 가마쿠라 막부(1192)가 설립되고, 이후 무로마치 막부, 도쿠가와 막부로 이어지는 바쿠후 정치가 이어졌으며, 대정봉환(1867년)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국가 권력이 다시 천황에게 돌아온다. 히데요시는 16세기의 사람인데, 가마쿠라 막부 설립(12세기) 후 약 400년이나 지난 것이다. 즉, 센고쿠 시대의 천황은 명함만 군주였을 뿐, 자기 소유의 재산조차 가지지 못한 채, 국가(정이대장군(군부 리더))에 의해서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명예직 최고제사장[85] 밖에 안 되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명과 조선과 달리 권신들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던 시대였으며, 각 지역들은 영주들이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영지에 권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다이묘들은 막부의 지침을 받기는 하나, 실질적으로 영지내에서는 다이묘들의 뜻대로 정책이 행해졌던 시대였다. 그래서 막부의 통제력이 떨어지면 막부가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으며, 이는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고 무로마치 막부가 설립된 사건에서도 알 수 있다. 다이묘들은 각자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 쪽에 붙는 존재였다.

분명, 히데요시는 관백과 태정대신이 되며 당시 일본의 최고권력자에 오르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정이대장군이 되어 막부를 열려면 겐지 성씨가 있어야 했고, 혈통이 매우 중요했다.[86] 오다 노부나가와 얽힌 부쇼군직 제시, 삼직추임문제(三職推任問題)가 있었던 것이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에 올랐던 것을 통해 관위, 쇼군 임명 문제에 혈통이 생각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하지만, 오다 가문이나 마츠다이라[87] 가문이나 전부터 다이묘를 해오던 가문이었기에, 타이라, 겐지라고 주장할, 혹은 사칭할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것은 천하인인 오다 노부나가가 인증한 것이었고, 히데요시 본인도 밑바닥에서 천하인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때문에 자신이 원평등귤(源平藤橘)[88]이라고 조작할 여지 자체가 없었으며, 히데요시가 관백, 태정대신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도 고셋케에 속하는 고노에 가 당주인 고노에 사키히사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분이 미천한 히데요시로서는 언제든지 정적들, 특히 히데요시 본인과 겨룰 수 있을 정도로 고쿠다카가 많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공격당해서 자신이 일궈놓은 인생역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서쪽으로 나있는 아시아 대륙인 명과 조선, 태국, 류큐, 인도등의 대륙을 자신이 정벌해 자신의 위치와 권력유지의 명분으로 삼겠다는 망상을 품게 되었던 것이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은 어떠한 대의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괜히 시바 료타로가 히데요시를 가르켜 정신질환자라고 깠던 게 아닌 셈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일본에 중앙정부가 없었냐면 그건 아니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럼 나라가 다수 산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나라 안에 있는 여러 영지의 제후들이 서로 누가누가 잘나고 힘이 강한가 겨루면서 전쟁을 벌이고 이긴 쪽이 진쪽의 영지와 재산을 수탈하며 세를 불리고 같은 다이묘들 사이에서도 누가 더 발언력이 강하냐를 가지고 싸워댔던 것이다. 다만,일본의 중앙정부의 천황은 이러한 것을 적절히 조율할 수 있는 권력과 발언력이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고셋케로 대표되는 공가가 있어 다이묘 사이에 껴서 조율해주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싸움질 잘 하는 양아치, 조직폭력배에 가까운 다이묘들이 출신성분에 대한 열등감 등으로 인해 공가를 대우해 줬으며, 공가나 관위를 별 대단하지 않게 보던 인물이라도[89] 이런 특수성을 고려해 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중앙정부 자체가 이미 약화되었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은 통제불능의 상황에 빠져 제멋대로들 행동하며 서로 패권을 두고 전쟁을 벌여댔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에서부터 위로 올라가 이러한 난잡했던 전국시대를 어느 정도 종식을 시키고 통제불능의 다이묘들을 굴복시켜 앞으로는 천황을 내세우고 뒤에서는 자신이 관백의 자리에 올라 중앙정부로서, 어떻게 보면 정이대장군을 뛰어넘는 위치에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다들 히데요시에게 이러다할 간언이나 전쟁에 대한 반대의사를 적극적으로 표명하기 어려웠다.

좋게 얘기하면 난잡했던 전국시대가 히데요시로 인해 어느 정도 해소는 되었지만 도리어 자신의 성공에 지나치게 도취된 나머지 자신의 권력과 성공을 미천한 신분으로 인해 잃을까봐 두려움에 빠졌던 것이 그의 패착이었다. 전국시대를 해결한 것 자체는 어찌되었든 히데요시의 공적이긴 했다. 차라리 자신의 공적인 미천한 신분으로 당시 중앙정부와 기득권계층이 손도 못쓰던 다이묘들의 전국시대를 해소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다면 권력은 그대로 유지했을 것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고 별다른 수확없이 손해만 잔뜩 입었던 히데요시였지만, 이후 정유재란을 일으킨 한편 말년까지 장수하며 평화롭게 즐길 거 즐기고 살다 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자신도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를 따르던 인물 중 하나기도 해서 그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받은 도요토미를 명분으로 밀어붙이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가 지나쳐서 직접 일본의 귀족들과 기득권층에 맞서기보다는 옆나라 조선과 명에게 시비를 걸며 자신의 입지를 확장하려 했던 것이 그의 오판이었다.[90]

대규모 무리한 전쟁 준비 때문에 죽는 사람이 속출할 정도의 대역사가 이뤄졌지만 절대적인 권력을 손에 쥔 히데요시에게 간언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다들 히데요시의 위광에 위압당했으며, 임기응변에는 귀재인 히데요시가 불만을 살살 달래주는 한편,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마구 을러대는 등 밀당을 엄청나게 잘 했기 때문에, 히데요시의 가신들조차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 프로이스의 설명이다. 즉 어떻게든 임진왜란을 막아보겠다고 사기까지 친 소 요시토시고니시 유키나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다들 조선 침략이 실패하리라고 예상했다는 것이다.

25개 조의 각서에 따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정복하고 나서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를 명(明)의 황제로 옹립해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마사히토 친왕(政仁親王)이나 하치조미야 도모히토 친왕(八条宮智仁親王)을 일본의 천황으로 삼겠다 주장했다. 그러나 고요제이 덴노는 히데요시의 외부로의 군사적 침략을 반대했고, 히데요시에게 「억지스러운 짓이다」(無体な所業)라며 말렸다는 것으로 보아 일본 황실에서도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던 모양이다.

사실 천황가 입장에서도 임진왜란을 썩 좋아할 이유가 없었다. 센고쿠 시대에 가장 피해를 본 지역 중 하나가 교토이다. 오닌의 난으로 초토화된 후, 이름난 다이묘들이 상경한다면서 와서 행패를 부리는 등, 교토에는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것으로 유명한 혼노지의 변도 교토에서 일어났다. 권력에 접근할 수 없는 천황가 입장에서는 조선이든 명이든 일본에 복속되어봐야 의미가 없다. 그냥 일본이 통일되고 평화가 와서 안전해진 교토에 있으면서, 유력자나 다이묘들에게 공경과 예물이나 받아먹으며 사는 것이 최고이다. 그런데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하다가 괜히 자리가 흔들려서 센고쿠 시대가 더 길어지면 괜히 교토의 치안만 더 불안해지고, 그러면 그 피해는 교토에 사는 공가, 천황이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다만 유일하게 예외인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222만 석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 유일하게 고쿠다카가 많은 256만 석의 다이묘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 당시 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누를 만큼 강했던 것은 아니다. 그 256만 석도 히데요시가 강제로 보낸 간토의 오지였다. 이후 에도 시대가 열린 것에서 알 수 있듯, 에도(현 도쿄)는 분명 잠재력이 있는 땅이었지만, 오랫동안 후호조씨의 지배를 받아 거주민들의 반발과 텃세가 심하였으며, 중국과 한반도에서 가까워 선진 문물, 지식을 받아들이기 쉬운 서일본, 애당초 수도인 교토와 달리 간토, 도호쿠는 무지렁이들이 사는 땅 취급을 받았다.

히데요시의 영지 중 적지 않은 부분이 한솥밥 먹던 선배 출신으로 자기를 지지해 준 사실상의 부하들,[91] 어린 시절부터 먹이고 재워가면서 키웠거나 기타 자기의 직속 부하라고 할 만한 이들,[92] 양자 제도 등을 이용해 어쨌든 굳건히 도요토미 가를 지지해줄 만한 부하들[93]에게 떨어졌고, 그렇기에 히데요시 본인의 석고는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94]

단순히 정복자로서의 짬밥만 따지면 히데요시는 하리마국에서 시작하다시피 해서 친구들을 잘 사귀어서 오다가의 영토를 사실상 제패하고 규슈(시마즈), 시코쿠(쵸소카베), 간토(호조) 일대는 아예 정복했고 주고쿠(모리)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다시피 해서 일본을 통일한 달인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히데요시가 억지로 이에야스와 동생을 결혼시켰다는 것과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최대 위협이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이에야스의 석고가 250만 석 이상이라고 해도 그 중 150만 석은 일문중이나[95] 가신들에게 배분했기 때문에 직할령은 약 100만 석 전후였다. 물론 이 정도의 직할령만으로도 다른 오대로 중 2, 3번째로 석고가 많았던 모리 테루모토,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전체 석고에 버금갈 정도로 강대한 세력이긴 하지만, 도요토미의 220만 석이 히데요시의 직할령이고 중신들의 영지는 따로 분리된 것을 감안하면 세력비로도 도쿠가와는 도요토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96]

다만 도요토미는 날 때부터 다이묘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올라간 경우라 완전히 믿을만한 가신이 많지 않았다.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들이 현대의 회사원처럼 여기저기 이직할 수 있다고는 하나 개중에서는 한 가문에 대대로 뿌리박은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후다이'라 불리며 중신으로 대우받았다. 이것은 가문이 오래되어 후다이 가신들과 다이묘 가문의 결합이 강해야 가능한 것이기에, 도요토미는 후다이가 당연히 없었다. 오대로조차도 마에다 토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를 제외하면 히데요시가 믿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도요토미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전력은 직할령 220만 석, 마에다 토시이에의 83만 석[97], 기타 중소 규모의 다이묘 몇몇과 칠본창 정도였다. 정작 칠본창은 무단파를 형성해서, 문치파인 이시다 미츠나리와 파벌항쟁을 벌이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졌을 때 죄다 동군으로 붙어서 집안싸움으로 이에야스보다 우월한 도요토미 세력을 알아서 말아먹었다. 반면에 도쿠가와의 가신들은 대대로, 혹은 수 십년 이상 도쿠가와를 섬긴 가신들이라 250만 석 전체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다.[98] 도요토미가 도쿠가와보다는 명백히 강했지만 명분도 없이 단번에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도쿠가와가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히데요시의 가신 출신 다이묘들이나 마에다, 모리 등 다른 오대로급 다이묘들 전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무시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결론적으로 히데요시와 이에야스는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었고 그 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단 1명의 병력도 조선 정벌에 파병하지 않게 되었다. 수천 명 정도의 소규모 병력[99]을 히젠 나고야에 예비대 형태로 주둔시킨 게 전부였다. 그 덕분에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 안정을 위해 전후 처리를 할 당시 이를 빌미로 조선과 화친할 수 있었다.[100]

4.3. 감도는 전운과 막고자 하는 세력의 술수

1590년, 조선은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이 통신사의 파견은 자기 생계를 위해서 전쟁을 막고자 했던 소 요시토시가 조선에 항복하라고 한 히데요시의 말을 조선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간파하고 전국통일 축하 기념으로 통신사를 파견하라 속였고, 이에 조선이 일본의 정세를 확인하고자 파견한 것이었다. 이에 히데요시는 항복하러 온 줄 알았고 통신사를 무례히 대했지만,[101] 통신사는 전국통일 축하하러 온 건지라 당연히 말이 엇갈렸다.

히데요시는 조선에 대한 답서로 보낸 국서에서 조선 국왕이 입조할 것이며, 명을 칠 테니 조선이 앞장서라(정명향도(征明嚮導))고 주장했는데, 문서 전달 도중 이걸 본 당대 쓰시마의 도주인 소 요시토시는 조선측이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해 자기 나름대로 문장을 순화해서 통신사를 파견할 것이며, 명에 들어가는 길을 빌려 달라(가도입명(假途入明))고 문서 조작을 가했지만[102] 길을 빌려달라는 것도 조선 측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수위여서 이를 묵살했다. 조선은 일본의 부하가 아니었으니까.

강항의 간양록에 따르면 처음에 조선 사신이 일본에 들어와서 히데요시가 조선 사신에게 보내는 답서에 자신이 명을 칠 것이라는 말을 분명히 적어넣게 하자 주위에서 “일단은 좋은 말만 써서 보내고 저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쳐들어가자”고 했는데, 히데요시는 “그러면 자고 있는 사람의 목을 치는 것과 뭐가 다르냐? 미리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써서 보내 주고 상대방이 미리 준비 다 한 뒤에 승부를 내야지.”라며 자신이 군사를 일으킬 계획이라는 것을 그대로 써넣게 했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 사람 허의후(許宜後)가 사츠마(薩摩)로 표류해 와서 약장수로 살다가 일본이 명을 공격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는 것을 본국에 알리려다 이웃에 살던 명나라 사람에게 고발당했고, 고발을 접수한 아사노 나가마사(淺野長政)[103]를 통해 히데요시의 귀에까지 소식이 들어갔다. 허의후는 교토로 압송되어 히데요시 앞에 왔고, 허의후가 우리 기밀을 누설했으니 삶아 죽여야 한다는 부하들에게 히데요시는 “저 사람은 명나라 사람인데 명나라를 위하여 우리 비밀을 명나라에 알리는 게 이치상 당연하지. 더구나 남이 생각지도 않은 틈을 노리는 건 내 본뜻이 아니다. 명나라에게도 전쟁을 대비하게 한들 좀 어떤가.”라며 허의후에게 죄를 묻지 않고 도리어 허의후를 밀고한 사람에게 “같은 명나라 사람이 명나라 사람을 밀고하다니 너야말로 추악한 놈이다”라고 욕했다고 한다.[104]

결과적으로 해당 노력들은 모조리 헛수고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4.4. 임진왜란의 시작과 진행

마침내 1592년 고니시 유키나가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으로 하고 우키타 히데이에를 총대장으로 하여 16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공하는 것으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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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쪽에서도 전쟁에 대비해 여러 조치를 취했지만 규모를 오판한 데다(아무리 많아도 1만~2만 정도로 여겼다) 전쟁 경험이 없고 기강이 해이해진 상황이라 개전 초기에는 동래성, 경주성, 영천성 등 경상도 지역의 모든 성읍들을 잃고, 전쟁에서 깨지게 된다. 일본 측의 압도적인 무력에 조선이 연패를 거듭하여 평양 또는 함경도까지 일본군의 진격을 허용했다. 그러나 너무 빨리 진격하는 과정에서 주 진격로에 있는 성읍들만 점령한지라 조선군이 다시 재집결/반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보급선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 해상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대활약과 각지에서 의병 등을 흡수하며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군의 전방위적 반격이 개시되었다. 거기다 악명 높은 1592년의 겨울을 나면서 수많은 비전투 손실이 발생하였고, 여기에 명나라의 원군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전황이 확실히 불리해진다. 결국 침공군 중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개전 1년만에 증발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일본군은 본국에 대기 중이던 예비대를 급히 투입하고 남해안을 요새화하여 버티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전쟁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나라와 일본은 강화 협상을 시작한다.

4.5. 엇갈린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명나라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써 국면을 해결하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본인 특유의 허세블러핑이 섞인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블러핑이 섞였다곤 해도 히데요시가 제시한 요구 조건은 일부를 제외하면 명과 조선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송응창이 내세웠던 명의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105]

그러나 일본의 요구조건들은 조선과 명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후궁으로 삼는다.
  2.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임해군, 순화군)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이 조항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명나라 황녀 문제: 화번공주라 하여 역대 중국 왕조에서 황녀를 외국의 지배자와 공식 혼인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든 선례는 분명 많았다. 따라서 만약 히데요시가 천황의 정비 혹은 실권자인 본인의 정실 부인으로 황녀를 맞이하겠다고 주장했다면 명나라로선 조금이나마 고려할 가치가 있었다. 또한 화번공주도 진짜 공주만 보내는 게 아니고 대충 종실의 여자를, 심하면 그냥 궁녀 하나를 적당하게 공주처럼 꾸며서 보낼 수 있었으며 실제 선례도 많았다. 그랬기에 정 공주를 보내기 싫다면 이런 방법이라도 쓸 수 있었다. 조선의 경우에도 태종명나라의 황녀를 며느리로 맞아들여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명나라 사신에 의향을 전했고, 명나라 사신 또한 '경사스러운 일'이라며 기뻐했지만, 양국 간의 내부 사정으로 이뤄지지 못한 사례가 있다.[106] 하지만 정식 황후도 아니고 겨우 후궁으로 취급하겠다는 건, 명나라 입장에서 오랑캐에게 황녀를 으로 내준다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어처구니 없이 무례한 요구였다. 설령 대등한 관계였다고 해도 후궁으로 황녀를 내준다는 건 패전을 인정하라는 수준의 국가 모독이다. 사실 이 부분만으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상식이 부족한 인물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2. 무역 증서제 부활 및 각서 교환: 무역 증서제란 감합 무역이라 부르는 것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행했던 일로 이 배는 일본에서 명나라랑 무역하기 위해 온 배라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명나라에서 작성해 반쪽은 일본에 주고 반쪽은 명나라가 갖고 있다가 배가 오면 증서를 맞춰 맞으면 일본에서 온 배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전국 시대에 다이묘들이 너나없이 명나라랑 교역하려고 하자 폐지되었다. 즉 이 두 조항은 일본과 명나라의 공식 관계 수립 및 교역의 정상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실제로도 에도 막부가 열린 뒤 중국은 일본과 다시 무역을 재개하게 된다. 이 또한 명나라 측에서 이전부터 '공식 무역은 허용할 수 없다'라며 거부 의사를 밝히긴 했었다. 물론 협상에 따라 부분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긴 하나, 다른 조항들이 워낙 무리수가 심해서 명나라로선 이 역시 수용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3. 조선 4도의 할양: 항목 중에도 제일 황당한 조건이며, 조선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조건.[107] 명나라가 강화 협상 당시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이었다. 즉 일본이 조선에서 철수하면 다른 조치 없이 넘어가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유정 등의 사례들처럼 명나라군이 일본군에게 뇌물을 받고 명나라군이 일본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어 명나라군이 일본군을 통과시켜 주는 등 명나라군과 일본군이 서로 내통한 사례들이 여러 건 있긴 하나 이러한 사례들조차도 이미 일본군이 조선에서 조용히 나간다고 해서 명나라군이 일본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어 명나라군이 일본군을 통과시켜 준 것이지, 명나라가 조선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다. 설령 명나라가 이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극히 일부도 아닌 국토 절반을 요구하는데 조선이 들어줄 리 만무하다. 히데요시가 주장한 4도 할양은 사실상 일본군이 그 시점에서 점령한 경상도를 비롯한 조선 남부 지역 4도(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 경기도 또는 강원도)를 내놓으라는 뜻이다. 쓸모없는 황무지로만 가득 찬 변방 지역이라고 해도 조선 측에서 수용할 리가 없는데, 이 지역은 조선에서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가장 많은 핵심 지역이다. 이런 조건은 사실상 패전국의 저항 역량이 완전히 소멸됐을 때나 수락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조건이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의 임진왜란은 일본이 패전은 아니었어도 한창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되어 왜성에서 농성전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히데요시가 전황을 제대로 읽고는 있었는지조차 의심되는 대목.
    명나라에서조차 이건 받아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고, 명군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피해도 큰데 그냥 조선이 알아서 하라고 하자 vs 우리가 영토를 다 찾아주고 난 뒤에 철군하자'는 쪽으로 일찍 후퇴하냐 아니면 같이 싸워 이긴 뒤에 후퇴하냐가 요점이었지, '영토를 넘기느냐 마느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히데요시로서는 대륙 정벌의 망상은 좌절되어도 최소한 조선 절반이라도 건지려고 내건 조건이었겠으나 국가 간의 협상에서 들어줄 일 없는 과욕이었다. 그리고 사실 저 하4도의 곡창 중핵인 전라도는 조선에서도 방어를 중시해서 일본이 가장 진입하기 어려워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영토를 받아낸다고 해도 제대로 경영할 능력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문명국임을 자처했던 조선인들이 야만인이라 멸시했던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리 절대 없었을 것이며, 당시 일본은 센코쿠 시대 직후 자국의 통일조차도 엉성하게 되었고, 조선왕조를 멸망시키지도 못한 상태였다. 조선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우르트메르의 십자군처럼 바다 건너 수백만의 적대적인 피지배민 속에서 고립된 영지였다. 결국 얼마 못 가 조선 점령지에서 쫓겨났을 것이다. 설령 만에 하나 정말로 일이 잘 풀린다고 해도 결국은 조선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도요토미가 있는 본국에 반기를 일으킬 것이 뻔했다. 어차피 바다 건너에 있는 도요토미의 명령이 조선땅에 와 있는 다이묘한테 먹힐 리도 없을 테니.
  4. 왕자의 석방 및 볼모 송환: 임진왜란 이전의 한국사에서 일반 신하도 아니고 왕자를 다른 나라에 볼모로 보낸 것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실성 마립간이 복호와 미사흔을 일본에 보낸 것과, 고려여몽전쟁 및 이후의 원 간섭기 시절 왕자를 보낸 사례 정도가 있다. 그나마 전자는 인질을 빌미로 선왕의 아들들을 숙청하려는 의도였고, 후자는 고려가 원나라에 항복하고 살기 위해 보낸 것이다. 즉, 조선이 일본에게 고개를 숙이고 굴복하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조선 측에선 받아들일 수 없었다.
  5.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 이는 2가지 문제가 있다. 먼저 '권신'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해석해야 하는데 히데요시는 선조도 군주가 아니라 자신처럼 '천황'의 아래에서 실권을 가진 신하라고 여겼다. 이는 선조를 왕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도 조선의 국체를 훼손하는 일이다.[108] 또한 조선을 침공한 책임은 엄연히 일본에 있었는데, 이 책임은 전혀 대가를 치르지 않고 오히려 조선에게 신의를 강요하는 주장은 조선 입장에선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조건들을 외교를 전담하던 오선승(五禪僧, 외교 담당 승려)을 통해 강화사로 위장한 송응창 부하인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물었으나 당연하게도 '이대로 전할 수 없고, 특히 명나라 황녀를 보내라는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무엇으로 증거를 삼을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순의왕(順義王, 알탄 칸)의 예가[109] 있다. 증거는 필요 없으니 조건을 삭제해달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명나라 공주천황의 결혼, 조선 왕자의 인질이라는 조건이 아니면 4개 도를 반환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하며, 일본과 명나라의 관계가 끊긴 지 오래이기에 조선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조선이 시간만 끌고 속이기에 징벌하게 되었다. 이제 명나라 사절이 왔으니 사절이 우리의 요구 조건을 잘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사용재와 서일관은 히데요시의 요구조건을 그대로 보고하는 대신 ‘히데요시는 자신을 일본 국왕으로 임명하여 무역을 부활시켜 줄 것을 요구한다’고 허위 보고한다. 이에 명나라 조정은 강화 조건으로 히데요시의 항표문을 요구했고 강화사 파견에 대한 답례사 겸 가짜 항표문을 가지고 있었던 유키나가의 심복 나이토 죠안(內藤如安, 코니시 죠안)이 만력제를 배알하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을 만나 책봉할 무장의 명단도 함께 제출하였다.[110]

이에 명나라 조정은 이전의 조건과 더불어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석성은 일본에게 다음의 3가지를 요구한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으로 임명은 하지만 무역은 요구하지 말 것.
3. (일본이) 명나라의 번속국이 됐으므로 (같은 번속국인) 조선과 화해하고 침략하지 말 것.

이후 명나라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지만 일본군의 완전 철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였고, 고니시로부터 이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새로운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 조건을 살펴보면 히데요시는 이미 자신이 일본 국왕에 책봉됨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서를 지참하는 것, 무역을 하게 될 경우 금인으로 증거를 삼고자 하였다.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111]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나머지 4개 도만 갖겠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 소 중 10개 소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나라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나라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으로 돌아와 부산 지역에 있던 일본군의 군영 2/3를 불태웠지만 여전히 책봉 정사 이종성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거부하였고, 책봉사의 일정이 지체되는 것을 다시 보고하러 가게 되었다. 이 때 정사 이종성이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고 더이상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진 책봉사절은 책봉 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에 심유경이 부사가 되어 일본으로 출발한다. 조선 측에서는 황신을 정사로 삼아 사절단을 보낸다.[112] 심유경은 정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히데요시를 만나는데, 심유경의 행렬에는 구경꾼들에게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알리는 팻말이 있었다고 프로이스가 기록하고 있다. 이후 책봉식에서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일본국왕에 책봉되었다.[113] 다이묘들 또한 각기 서열에 따른 명나라 관직에 임명되었다. 이때 책봉문, 금인, 관면을 수령했는데 현재까지 남아 오사카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이 장면을 기록한 대표적인 1차 사료들이 일본의 승려 겐소의 선재고, 유럽의 선교사 프로이스의 기록, 조선 사절의 정사 황신의 일본왕환일기, 조선왕조실록이다. 다이묘들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었다고 공통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왕환일기와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한 기록들에서는 히데요시도 명나라의 관복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일본 측의 기록인 선재고에 의하면 태합 히데요시는 기쁨에 들떠서 금인을 받고 관복을 입고 만세를 삼창했다고 씌어있다.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모두 일본 의식으로 히데요시와 책사는 다다미에 앉아서 양자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하였다. 출석자는 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筑前(마에다 토시이에), 越後(우에스기 카게카츠), 中納(우키타 히데이에), 金吾殿(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毛利(모리 데루모토)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 국토에서 최대의 국주들이었다. 주연 후에 관백은 영예있는 서책, 즉 커다란 황금 서판인 금인을 수리하고, 이것을 머리로 추대하고, 이때 관면(冠冕)도 수령했기 때문에 이것을 착용하기 해서 별실로 갔다"고 기록되었다.

조선 측 기록은 2가지이다. 조선 사신단의 정사인 황신은 일본왕환일기에서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았고 다이묘 40명도 관대를 착용하고 수직(授職)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선조가 자세한 내용을 묻자 "봉작례가 행해졌으며, 관백이 뜰에 서서 오배삼고두의 예를 행하고 경건한 태도로 내려주는 의복을 받았으며, 그의 신하 40여명이 모두 차등 있게 황제의 하사품을 받았다"고 앞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말한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덕수의 보고에는 책봉장에 있었던 왕귀가 이야기한 것을 황신과 같이 들었다고 하는데 황신과 다르게 '봉왕(封王)할 때에 적장(賊將) 40여 인은 다 당복(唐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나, 관백만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았습니다'[114]라고 보고한다. 그러나 우준민이 '역관(譯官)·군관(軍官) 등이 다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어떤지 모릅니다'라고 첨언하는 등 실제 보지 못했던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115]

책봉 이후 이전부터 불쾌함을 표시했던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은 문제와 함께 조선이 사죄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격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여기에 명나라 사절이 철군 문제를 거론하자 불쾌감을 드러내며 "천조가 사신을 보내어 자신을 책봉하니 내가 우선 참겠으나 조선과는 결코 화친할 수 없고 전쟁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이에 명나라 사절들은 자리를 파했고, 며칠 후 히데요시는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전쟁을 재개한다.[116]
1.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나라에 전하지 않았음
2.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음
3. 조선이 명나라와 일본을 이간질하였음

한마디로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자기만 일방적으로 철군을 하면 손해라는 입장이었다. 결국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명나라의 강화 책임자였던 심유경은 강화 실패의 책임과 감히 황제를 속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된다.

4.6. 결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잠재적인 국력을 오판하고, 당대의 강대국인 명나라의 의지를 읽지 못했으며, 자기 군대의 능력조차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전쟁이 장기화 될 경우의 대책도 세우지 않고 침략을 감행했다.

200년간의 평화 때문에 조선의 군역은 문란했지만 당시 일본(1800만 가량 추정)과 조선(1300만 가량 추정)은 인구수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이 오랜 전국시대로 사망률이 높아 인구수가 격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 일본은 봉건제라서 인구가 많아도 실제 동원 병력은 총 인구수에 비해 많이 적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달리 조선은 명나라와 더불어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제군주제관료제로 중앙집권화를 이룬 나라로 중앙부터 지방의 관리들은 모조리 조정의 임명 하에 파견되어 다스릴 정도였다. 이러한 시스템 덕분에 타 나라보다 총력전에서 최대한 역량을 쥐어짜낼 수 있었고, 전란이 일어나자 순식간에 17만의 대군을 징집하는 등[117] 그 잠재성을 입증했다.[118]

명나라는 요동 지방의 안보 문제와 동쪽에서 외래세력이 자기 나라로 쳐들어올 때 완충지역으로 조선의 존재는 필수불가결이었다. 조선군이 여진족에게 그렇게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것은 조선의 예방전쟁 뿐만 아니라 명나라 입장에서도 저들은 귀찮은 존재였기에 동맹국의 손을 빌어 해결하려는 명나라의 의사도 작용했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이유가 자기들 치려는 데 교점지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반드시 살려내야만 했다. 또한 가장 관계가 좋은 번국이자 우호 국가인 조선을 지원하고 '천조'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명나라 입장에서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거기다 일본군이 히데요시 본인이 생각했던 것처럼 압도적인 건 아니었다. 희대의 영웅이었던 이순신의 활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수군 전력은 한반도의 리아스식 해안 지형과 안 맞았으며 대형 군함은 부족했고 견고함과 화력이 밀렸다. 거기다 육군도 초반에는 전술적 식견과 조총 운용 능력으로 앞섰지만 조선군이 백병전에 익숙해지고 조직도 개편하면서 별 차이가 없게 됐다.[119] 특히 일본은 대규모 기병대를 양성할 여건이 되지 않아 조선과 명나라의 기병대를 상대하는 데 매우 애를 먹었다. 조선은 기마민족인 여진족을 상대했고[120] 명나라도 유명한 기마민족인 몽골과 숱한 전투를 치른 정예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전쟁 막판 양측의 전투 양상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바뀌게 되는데, 명군이 활약한 게 크지만 조선군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흔히들 알고 있는 조선군의 졸전은 거의 다 초창기고 나중에는 사정상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졸전 기록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1591년에는 전쟁에 부정적이었고 겸손과 검소를 요구하는 다인인 센 리큐를 할복시키고,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잔인한 숙청 등을 들어 당시 히데요시는 지적 능력이 현저히 쇠퇴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많다.

특히 히데요시가 주인공이며 그의 업적이나 출세가도를 소재로 한 소설에서 이런 경향이 현저하다. 히데요시의 업적만 조명하려고 비판점이나 실책들을 통생략해 버리는 경우도 흔한 편.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서는 시종일관 부정적인 관점에서 서술되며,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노망나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가 쓸쓸하게 죽었다는 단 한 줄로 끝내 버린다.

1996년에 방영되었던 NHK 대하드라마 <히데요시>에선 아예 히데요시가 본격적으로 막장 행보를 보이기 전에 드라마를 서둘러 끝내 버렸다. 히데요시 전문 배우로 인식될 만큼 유명해진 히데요시역 배우 타케나카 나오토는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연기하고 싶었다"며 이것을 아쉬워했는데, 2014년의 <군사 칸베에>에 출연하면서 이 소원을 이룬다. 반대로 히데요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그의 단점을 비판하는 창작물에서는 이 임진왜란을 '일본에게도 불필요했던 전쟁'이라고 간략하게나마 꼭 언급한다.

2020년에 출시되어, 현재 2021년에 최신 문화작품으로 히데요시를 다뤘다고 볼 수 있는 인왕 2에서도 히데요시가 이야기의 주역으로 나오는데. 임진왜란이나 도요토미 히데쓰구 등에게 저지른 악행은 그냥 요괴가 들린 히데요시의 행적으로 퉁쳐버렸다.

그래서 현재도 일본인들은 도요토미를 언급할 때 이러이러한 업적과 실책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임진왜란을 특별히 신경쓰지는 않는다. 오히려 임진왜란을 노망난 히데요시가 사고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일본에서는 흑역사 취급되어 매체로 다루지 않으려 들며, 다뤄질 때는 히데요시가 정신 나가 일으킨 쓸데없는 뻘짓마냥 표현한다. 물론 이걸 미화하는 정치꾼들이나 왜곡 세력들이 있기는 하나, 임진왜란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

조선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 조선인들을 비무장 민간인까지 가리지 않고 학살하여 귀와 코를 잘라서 본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린 주범이다. 임진왜란 때는 펼쳤으나, 그 와중에도 일본군의 노략질과 일본군이 잔혹하여 동래성과 부산진, 경주성, 진주성, 기타 조선의 여러 성읍에서 일어난 일본군과의 전투와 양민학살로 죽어나간 군민만 수천에 달한다. 문제는 이건 통제를 못해서 그런 거라고 쳐도, 정유재란 때는 아예 히데요시 본인이 학살을 지시했다. 센고쿠 시대 일본의 전쟁 풍토 자체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은 스스로 안과 밖에서 강적에게 두들겨맞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선을 먼저 공략해서 개전 초반기에 학살과 노략질을 일삼고 정발, 송상현, 윤흥신, 신립 등의 장수들과 그 휘하 병력들은 물론, 그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죄다 학살해 악명을 얻었다. 사실 동래성 전투가 임진왜란 최초 전투라 할 법 하다고 볼 때, 끝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전부 죽여도 상관 없었던 일본의 관습을 적용하는 바람에 조선백성 전부의 반발과 조선의 무장과 병사들의 복수심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해버렸다.

그러나 조선 침공기간 내내 일본 내부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조선에서는 이순신, 권율, 곽재우, 권응수, 송희립, 김완 같은 조선의 장수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거나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하였고 피말리는 전쟁 와중에 본인도 사망했다. 더군다나 조선 침공으로 인해 전쟁 말기에 자신의 세력이 약해져 결국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일본의 지배권 역시 정적(政敵)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참패해 강탈당해야만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임진왜란은 철저하고 완벽하게 백해무익한 짓거리였다.

이로 인해 명-조선-일본 3국 모두 질서개편이 이뤄졌는데 명나라만력제의 무능으로 망해가던 와중에 전쟁 통에 성장하는 만주족을 제어하는 것도 실패하여 완전히 무너졌다. 조선은 만주족의 청나라에게 뼈아픈 굴욕을 당했으며, 일본은 도요토미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세운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안 한 이들이 제일 큰 이득을 본 셈.[121][122]

정치와 어느 정도의 충성심으로 1인자의 자리에 올라간 히데요시가 어째서 이러한 뻘짓을 해버렸는지, 일본 학계에서의 해석도 분분하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으로 어설프게 전쟁부터 시작해버렸다. 일본 국내 정세에는 어느정도 신경썼을지언정, 일본을 안정시켰다기엔 거리가 먼 편인 히데요시가 일본을 제쳐두고 조선땅부터 꼴깍해보려던 심리는 가늠이 안된다. 어짜면 젊어서 오다 노부나가가 서역까지 진출하겠다는 얘기를 들었을때 노부나가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신이 이루어서 그를 뛰어넘고 싶어했던 오만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성격의 아이러니가 존재하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은 싸움을 못하면서도 싸우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천하인이 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싸움을 걸었으며 나중에는 이게 도가 지나쳐서 임진왜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아무튼 임진왜란에선 이순신 등의 활약으로 조선 정복의 꿈이 당장은 깨졌고 본인도 세상을 떠났지만, 그로부터 300년 정도가 흐른 뒤 결국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본인이 그토록 갈망하던 조선 정복이 그렇게 이루어졌다.[123]

5. 후계자 문제와 죽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부 기록에 나오는 젊은 시절의 아들딸을 제외하면 자식이 오랫동안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 기록에 나오는 자들도 잠깐 나오다 만 것을 볼 때 일찍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자식이 없어서 양자를 여럿 들이는데, 누나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츠구와 처남의 아들로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일족 중에서 긁어모은 자들이었다. 이외에 정치적인 이유로 들인 양자도 여럿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로 유키 가에 보낸 유키 히데야스,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 등이 있었다.

50대의 나이에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의 딸인 요도도노도요토미 츠루마츠를 낳지만[124] 츠루마츠는 어린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나이가 50대 후반이라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을 거라 여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여동생의 아들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선정하는데, 요도도노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삼으려 한다.

그 때문에 방해물이 되어버린 히데츠구는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딸과 히데요리를 혼약시키는 등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국 1595년에 히데요시는 모반을 이유로 히데츠구를 고야산으로 추방한 뒤 할복을 명하고 히데츠구 일가를 처형하였다. 이 때 어린 처자식까지 공개 처형한 이런 잔인한 처사 때문에[125] 히데요시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민중들의 평이 크게 저하되고 후일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죽고 손자 도요토미 쿠니마츠가 붙들려 처참한 죽음을 맞자 민중들 사이에서는 이게 모두 인과응보라는 내용의 풍자 노래가 유행했다고 한다.

후계자로 선정되지 않았던 양자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되었고 혈연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 유키 히데야스는 유키의 양자가 되었으며, 우키타 히데이에는 히데요시가 그냥 놔둬서 도요토미씨()를 계속 이었다. 임의로 우키타 히데이에라 표현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기록에서 "풍신수길의 아들 풍신수가"라 나오는 점을 보면 도요토미 히데이에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도요토미 츠루마츠도요토미 히데요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생전부터 요도도노가 외간남자 사이에서 생긴 아들이라는 의혹이 있었고 후대에는 거의 정설이 되어버린 걸 생각할 때(에도 시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불쌍하다.

전국 최고의 출세아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갖고 있으나, 이는 역으로 보자면 다른 유력 다이묘나 무장들과는 달리 그 지지 기반이 탄탄치 않음을 의미한다.[126] 말년의 히데요시는 도요토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안배를 하는데 그 핵심은 오대로(五大老)오봉행(五封行)으로, 지방의 유력 다이묘인 오대로와 도요토미 가(家)의 가신인 오봉행의 합의로 어린 히데요리를 보좌한다는 구상이었다. 또한 각 다이묘에게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 맹세를 받고, 4살에 불과했던 히데요리를 원복시키는 등 도요토미 정권의 유지를 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매독설, 위암설(임진왜란에 의한 스트레스 화병), (심유경에 의한) 독살설 등이 있다.[127] 또 다른 설로는 호랑이 기생충설이 있다. 1592년 일본군이 조선에서 큰 호랑이 한마리를 잡아 히데요시에게 진상했는데, 히데요시가 매우 기뻐하며 덴노에게 가져가 자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일본군 장수들이 경쟁적으로 조선 호랑이를 잡아 히데요시에게 진상하기 시작했다. 호랑이 가죽은 물론이고 뼈, 머리고기, 간, 담, 쓸개 등 장기도 소금에 절여 보냈고 히데요시는 몸보신을 위해 생으로도 먹었는데 이로 인해 기생충 감염을 겪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128]

1598년에 히데요시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었고[129], 결국 후시미 성에서 이에야스를 비롯한 오대로의 앞에서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견을 거듭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오대로와 오봉행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히데요시의 죽음을 한동안 극비로 부친 채 군의 철수를 명령한다. 이렇게 임진왜란도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일본군의 조선에서의 패퇴나 다름없는 철수로 종결된다.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사세구가 유명한데 그 내용이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의 영화여, 꿈 속의 꿈이로다.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매독, 결핵, 이질, 위암 등 여러 설이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독살로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제는 이 독살설의 주역이 명나라의 강화 사신으로 온 심유경과 조선인 소년 양부하라는 것. 이 이야기의 원전은 숙종조 문신 염헌 임상원의 개인문집 <염헌집>에 실려있다. 임상원은 직접 90세 고령의 양부하를 만나 히데요시의 죽음에 대해 들은 얘기를 채록했고, 후대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정조대에 <국조인물고> 등에도 약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대체로 염헌이 정리한 독살설이 수록돼있다.
양부하[130]는 어린 나이에 동래에서 살다가 왜군이 부사 송상현을 죽이고 동래성을 함락시키는 와중에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이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그 직후 포로로 끌려간 양부하는 하루 만에 간단한 일본어 회화를 구사해 총명함을 인정받아 히데요시의 시동으로 보내졌고 지근거리에서 수발을 들었다. 몇 년후 강화 교섭으로 건너온 심유경을 만났고 그와 히데요시 독살을 모의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이와 같다.

처음 히데요시는 사신들을 엄중히 가두고 감시하는 등 일종의 길들이기를 시전했고, 사신들의 하소연에 만나주는 척 응했다. 심유경은 히데요시와 대면하면서 이상한 환약을 자꾸 섭취했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계속 약을 집어 삼키는 심유경의 행동에 히데요시는 궁금하게 여겼다. 이윽고 히데요시의 질문에 심유경이 대답하길 대륙과 열도의 풍토가 맞지 않아 몸이 허해졌는데 그 허해진 기운을 보충해주는 아주 좋은 강장제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의심해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자꾸 권하는 심유경의 권유에 결국 약을 들이삼켰다. 그런데 얼마 후 히데요시는 몸에 기운이 솟는 것을 느끼게 되고 심유경에게 약을 받아 그 후로도 자주 약을 섭취하는데…….

이것이 사실 심유경이 진정 의도한 바였다. 그 약은 사실 복용한 사람을 점점 말라 죽이는 비소 계열 독약으로 심유경은 객사로 오자마자 바로 해독약으로 응급처치를 해서 아무 탈이 없었으나 이를 모르고 해독제 없이 복용한 히데요시는 그 탓에 점점 말라가고 기운이 빠져 사경을 헤메여 백약이 무효인 채 얼마 안가 비명횡사했다.

다만 이야기의 출처가 정식 사서가 아닌 개인이 기록한 야사이며 현재도 히데요시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으므로 단순히 조선과 일본 소수 측에만 돌던 가설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6.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

사후 교토 동산의 아미타봉에 묻혔고, 일본에서는 드물게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격화하여 신사에 신으로서 봉안되었다. 신명은 도요쿠니 다이묘진(豐國大明神). 보통 신사에서 신격화된 인간, 즉 히토가미(人神)을 받들 때는, 해당 사람이 원한을 품고 죽어 세상에 해를 끼친다고 판단할 때, 그 원혼을 달래고자 지었다. 그러므로 평안하게 죽은 당대의 권력자를 신으로 모시는 것은 신토의 논리로 볼 때 무척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살아서는 권력자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죽어서는 신으로 받들린다니 그것 참 매력적인 일이기도 하고, 동상을 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기억을, 그리고 그 후예들을 단결시키는 상징이 되는 등 허영심과 실익을 겸한 효과가 매우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러한 상징을 노려 자기가 죽은 뒤 신사를 세우도록 미리 유언을 남겼다.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미즈노오 천황의 칙허를 얻어, 도요쿠니 다이묘우진의 신호는 박탈되었고, 신사 자체도 폐기됐다. 이제 신이 아니게 된 히데요시는 '국태원준산운용대거사(国泰院俊山雲龍大居士)'라는 불교의 계명을 받았다. 이에 맞추어, 히데요시의 영혼은 대불전 뒤쪽 남동쪽에 세워진 오륜석탑(현 도요쿠니 신사 보물관 뒤쪽)으로 옮겨졌다. 히데요시의 유체 자체는, 사당과 함께 아미타가봉 산 꼭대기에 남겨졌다.[131]

포로로 끌려가 있던 유학자 강항은 히데요시를 기리는 탑에다가 '그렇게 기세등등하게 남의 나라를 침략해 놓고 죽어 버렸으니 앞으로 내부 분열이 진탕 일어날 텐데 이런 화려한 건물이나 성채가 다 무슨 소용이냐?' 라는 낙서를 해서 강항과 학문적 교류를 했던 후지와라 세이카가 급히 그 낙서를 떼었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는 각지의 다이묘와 혼인 관계를 맺는 등 히데요시가 사전에 정한 법도를 무시하지만, 마에다 토시이에의 생전에는 어떻게든 오대로-오봉행 체제가 작동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할 수 있었으나 그 기간은 결국 1년 남짓에 불과 했다. 토시이에 사후 도요토미 가신 내부의 무단파와 문치파의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이시다 미츠나리가 실각하면서 오대로-오봉행 체제는 와해된다.

사실 이것은 이시다 미츠나리의 잘못인데 완벽하게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 일 없었던 것을 괜히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인 가라샤를 납치하는 바람에 가라샤가 죽었고[132] 그게 이유가 되어 오봉행에서 짤리고 만다.[133] 미츠나리는 이에야스를 물리치기 위해 거병하지만 이에야스는 몰래 연락하고 있던 무단파의 지지를 얻어내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를 비롯한 문치파를 격파하고, 논공행상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를 해체, 도요토미 가문을 65만 석의 다이묘로 전락시키고 에도 막부를 연다.

1615년 호코지 종명 사건을 빌미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을 공격, 두 번의 오사카 전투로 도요토미 가문은 멸망한다.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살했으며 손자 쿠니마츠는 숨어 있다가 결국 사로잡혔다. 쿠니마츠는 당시 불과 7세에 불과했으나, 도요토미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교토로 끌려와 살해당했고,[134] 결국 히데요시의 대는 완전히 끊겼다. 히데요리의 서녀였던 나아히메는 센히메와 가이히메의 조명을 받아 목숨을 건졌지만 그대로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쪽 혈통도 단절되었다.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 이후 제일 먼저 한 일들은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는 일들이었다.[135] 히데요시에게 추증된 신호는 이에야스의 건의에 의해 고미즈노오 덴노에 의해 영구 박탈되었으며[136], 히데요시를 위해 세워진 토요쿠니 신사를 폐쇄하고 인근 사찰에 신사 건물을 시주했으며[137] 히데요시의 묘도 아미타가봉 산 꼭대기에 남겨지게 된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대정봉환 이후, 덴노를 앞세운 신정부와 도막파들에 의해 도쿠가와 가문과 에도 막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두되고 존황양이 사상이 커짐에 따라 막부를 세우는 대신 관백직에 오른 히데요시를 재평가해 신호가 재추증되었으며 토요쿠니 신사와 그의 묘도 재건되어 크게 꾸며졌다.

사실 도요토미 가의 멸망 과정을 보면 이시다 미쓰나리의 삽질 못지않게 히데요시 본인이 저지른 삽질도 컸다. 후계 구도를 확실하게 다지기 위함이지만 히데츠구에 대한 지나치게 가혹한 처분은 다이묘들에게 광역 어그로를 시전했다. 차라리 히데츠구만 죽였다면 모를까 그 계실, 측실들과 때론 그 아버지들까지 죽였는데, 문제는 이 계실과 측실들은 히데요시 자신의 가신들의 딸들이었고 히데요시를 섬기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아있던 유력 다이묘들의 친족까지 덩달아 처벌받아 이들의 분노를 초래했다.

문제는 그렇다고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도요토미가에 대한 충성심이 한순간에 사라졌냐면 그건 아니다. 히데요시의 잔혹한 숙청이 신망을 많이 잃게 만들기는 했어도 그 세키가하라 전투마저 명목상으로는 도요토미 가의 내전일 정도로 아직도 옛 가신들의 충성심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심지어 이후에도 가토 기요마사 같이 끝까지 히데요리를 배려한 다이묘도 있었을 정도였는데, 그러니까 중간만 했다면 도요토미 가는 생명연장을 이루거나 잘 되면 생명연장 정도가 아니라 히데요리가 장성해서 아버지인 히데요시를 완벽하게 이어받거나 그게 불가능해도 적어도 막부 말기에 도쿠가와 가문이 세력을 어느 정도나마 보전한 것처럼 기본적인 정도는 지켰을 수도 있었겠지만 히데요시의 삽질은 이시다의 병크와 함께 많은 이들이 도쿠가와에게 붙는 결과를 만들어냈고 그 끝은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1] 당시 일본에선 아시가루는 말이 좋아 무사이지(전국시대에는 하급 보병단 역할) 하졸이며, 사실상 농민 출신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다.[2] 히데요시는 그런 어머니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여동생 다음으로 인질로 보냈다. 효자인 히데요시는 이 일로 평생 어머니에게 미안해 했다고 한다. 사실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어머니를 인질로 보낸 이유는 천하를 거의 먹어치운 자기가 전투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던 이에야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관대한 내가 너를 감싸려고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너는 어째서 내게 항복을 하지 않으냐? 그러니 좋은 말로 할 때 항복해라."라는 경고였다.[3] 당대 일본의 다이묘들이 자신들의 가문을 겐지(源)나 헤이지(平)의 일원으로 칭했기 때문에 그 표현이 조선으로 유입된 것이다. 일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원가강(源家康)으로 불렸는데, 실제로 도쿠가와 가문은 대외 공식 문서에 미나모토를 자칭하였다. 이는 당대 일본에서 꽤나 중요한 것이었는데, 단순히 어느 집안에 속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 가문에 따라 수여받을 수 있는 직책 또한 정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에 이를 조선식 성/씨 개념으로 오인했던 것. 자세한 것은 쇼군 문서로.[4] 사실 그렇기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도 부하한테 배신 안 당하고 살아있었다면 관백을 안하고 쇼군을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게 정설이다. 물론 텐카진의 절대권력이니 할 수 있긴 하겠으나, 관백은 황실 내에서도 명분문제가 심각한 자리인데다가, 헤이지는 이미 있는 가문이자 관백을 안한지 오래됐기 때문에, 하려면 억지로 히데요시처럼 천황한테 새 가문을 받던지 했어야 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처럼 하류층 출신도 아니고 다이묘 집안인데 딱히 쇼군 자리를 포기하고 간파쿠를 할 메리트가 없다.[5] 이때 얻은 이부(異父)동생이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여동생 아사히히메. 이에 대해 이설도 있지만, 아무튼 히데나가는 그의 영지였던 야마토국의 이름을 따서 야마토 다이나곤이라 불리며 형의 충실한 동반자요 심복으로 활약한 인물로 그의 이른 죽음이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는 설까지 있는 거물, 그리고 아사히히메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정략결혼을 하여 스루가 마님이라 불렸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6]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배배신, 즉 가신의 가신의 가신이었다.[7] 버전에 따라서는 깔고 앉아 있었다고 나오기도 한다.[8] 정말로 지었다고 한다면 현대 공법으로도 불가능하므로 제대로 된 성일 리는 없고, 목책을 세워두고 로마군식 숙영지 정도로 꾸며뒀을 가능성이 높다.[9] 62대 무라카미텐노의 7대손인 미나모토노 스에후사(源季房)의 아들 아카마쓰 히데노리(赤松秀則)을 시조로 하는 가문. 무로마치바쿠후의 창건에 힘쓴 가문이지만 가키쓰의 난을 일으킨 대가로 멸문당하기도 했다.[10] 아카마쓰 히데노리의 5대손인 아카마쓰 노리무라(赤松則村)의 4대손 마츠바라 사다모토(松原貞基)를 시조로 하는 가문. 흔히 무라카미겐지 아카마쓰시류 마쓰바라씨(村上源氏赤松氏流松原氏)라고 불린다.[11] 아카마쓰 노리무라의 증손자 벳쇼 아츠미쓰(別所敦光)를 시조로 하는 가문. 이렇게 1579년까지 멸망했던 가문 중 아카마쓰·마쓰바라·벳쇼의 세 가문은 같은 혈족에서 갈라져 나온 가문이다.[12] 훗날 히데요시의 군사가 되는 구로다 요시타카가 고데라 가문의 가신이었다.[13] 사실 성이라 하기에도 뭐한 뼈대만 세우고 외형만 그럴싸하게 한건데, 그걸 본 적장이 일하는 속도를 보아 엄청난 대군일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도망갔다는 일화가 점점 부풀려져서 정말로 하루만에 해냈다는 식으로 뻥튀기가 되었다고 한다.[14] 성내 약탈을 금지해 달라는 성주 무네하루의 요청도 받아들였다.[15] 노부나가의 횡사 소식을 들었을 때도 당장 눈 앞에 모리의 군이 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그대로 교전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회군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이것은 그대로 전투를 계속하면 분명히 마에다나 시바타가 아케치 미츠히데를 토벌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꿰어찰 것이 분명했고 그렇다고 군을 돌리면 당장에 모리가 등 뒤에서 달려들어서 히데요시를 캐발살 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노부나가에 심취해 있던 히데요시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이때 히데요시에게 회군을 진언한 것이 바로 귀모(鬼謀)라고도 불리는 구로다 요시타카였다. 일설에 따르자면 이 때 구로다는 "마침 잘 되었군요. 이걸로 히데요시님에게 천하의 길이 열렸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몹시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까지 떨어트릴 정도였고 구로다의 말에 따르기는 했지만 그 지략을 몹시 두려워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구로다의 제안에 따라서 한 신속한 회군은 일본사에 남는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16] 고대 로마군이 잘 정비된 가도에서 강행군을 해야 이것과 근접한 숫자가 나온다. 도로 사정도 별로 좋지 않던 당대 일본의 형편과 당시의 기후를 감안하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할 정도의 피로와 피해를 무릅쓴 강행군인 셈이다. 츠츠이 야스타카가 이것을 소재로 <야마자키>라는 단편 소설을 썼는데, 초반에는 진지하게 상황 묘사를 하는 듯 하더니 히데요시가 갑자기 전화기를 꺼내 들고 신칸센을 예약, 신칸센과 전세 차량을 이용해 이동한다. 이에 황당해하는 가신에게 히데요시가 '설명 따윈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백미다.[17] 사극 <공명의 갈림길>에서도 퇴각하는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길에 늘어서 있던 주민들이 건네는 주먹밥을 말 위에서 곧바로 받아 먹으면서 진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신들과 같은 농민 출신의 히데요시가 미츠히데를 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와 같은 농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가 이제 천하를 잡으러 간다. 우리와 같은 농민의 시대가 열린다!"며 축하하러 나온 백성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18] 우츠미로 발음하는데, 노부타카가 죽은 곳의 지명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과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의 아버지였던 요시토모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은 곳이기도 한데, 이를 빗댄 구절이다.[19] 이때 히데요시의 관직이 지쿠젠노카미였으므로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羽柴 筑前守 秀吉)고 불렀다.[20] 근위부의 차관급.[21] 태정관의 차관급, 조선도승지에 상당. 단, 권관이므로 정원 외.[22] 과거 일본의 성씨는 씨와 성 두 개가 별개였는데, 본래 는 혈통을 나타내는 것이고 성은 작위와 관직을 나타내는 기능을 하였다. 이 때 를 이름에 쓴 경우 혈족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격조사 노(の)를 붙여서 읽는다. 즉 엄밀하게 따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올바른 표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성씨에 대한 역사 문서로.[23] 이는 일단 다이묘 출신이기라도 한 만큼 혈통을 갖다 붙이기도 쉬웠던 오다 노부나가도쿠가와 이에야스와는 달리 출신이 비천한 아시가루 출신의 히데요시가 자신의 성씨를 '원평등귤'로 날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식으로 생각되기도 한다.[24] 역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자리는 반석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원래 미천한 신분이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경쟁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멀쩡히 살아있었으니 말이다. 거의 모든 라이벌들을 굴복시키고 도쿠가와도 사실상 오다의 신하뻘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점과 비교해볼 때 라이벌을 쳐서 물리치지 못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위는 아무래도 오다만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분가의 분가의 분가라서 그런 것도 있고. (원래 오다 가는 분가의 분가이다. 정확히는 시바 씨의 가신인 오다 가의 분가.)[25] 사실 일본 역사는 대부분 쇼군이 정권을 잡았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특별히 천황을 다른 정권보다 무시하려드는 이상한 선택을 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관백을 택한 히데요시가 특이한 사례였지만, 도쿠가와 가문을 정상적인 권력자로 인정하면 유신의 당위가 작아지고, 비정상적인 권력자로 만들면 유신의 당위가 커지기 때문에, 메이지 세력에게 이런 역사왜곡은 당연했던 것이었다.[26] 이 신분 덕분에 관백이 될 수 있었다. 양자로 들어가는 데 실패했으면 관백조차 얻을 수 없었다. 사실 쇼군이 될 수 있는 혈통의 양자로 들어가서 인정을 받으면 쇼군도 될 수 있었겠지만 그 혈통을 가진 사무라이들이 당연히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27] 다만 농민과 무사를 완전히 분리하지는 않은 것 같다.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대규모 병력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28] 전국시대 기독교로 개종한 일본인들이 절이나 신사를 우상숭배라 하여 때려부수는가 하면, 일본인들을 포르투갈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을 했었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일본인 50만 명이 포르투갈 상인들한테 노예로 팔려 동남아와 인도 등지로 끌려갔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히데요시나 그 이후에 집권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기독교가 일본에 크나큰 해가 된다고 간주하여 기독교 금지령을 내려 서양인 선교사들을 모두 내쫓고 일본인 기독교도들한테 기독교를 버리라고 강요하며 이를 거부하면 필리핀 같은 해외로 추방하거나 모두 죽여버렸다.[29] 야사나 민간설화에서는 히데요시가 오이치를 짝사랑했다는 설이 많고, 오이치의 딸 중 그녀를 가장 많이 닮은 딸이 요도도노라고 한다.[30] 도쿠가와, 모리, 쵸소카베, 호소카와, 시마즈, 구키 등등등[31] 우에스기 가문을 비롯해 사나다 가문 등이 주축이었다.[32] 겉으로는 이에야스의 영지를 곱절로 늘려주면서 겉으로는 이에야스를 영전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면을 보면 정반대였다. 간토 평야는 곡창지대가 많아 고쿠타카, 즉 행정구역 내 쌀 생산력이 높은 지역이었지만 간토평야 영주민들의 반항적인 기질로 잇키, 즉 민중 봉기도 많이 일어나던 지역이였고 히데요시는 이를 빌미로 숙청하기도 했기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의도를 알아차렸고 영전이라 불만을 표하며 거부할 명분이 너무 부족해서 어쩔수 없이 받아들였다. 즉,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간토로 보내 잇키에게 시달리며 서서히 힘을 스스로 갉아먹거나 여차하면 숙청한다는 의도였다. 그러나 히데요시의 이 선택은 도쿠가와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나머지 최악의 오판이 되었다. 이에야스는 곧바로 치수 정비 및 영주민들을 달래며 민심을 사며 잇키를 완전히 잠재웠다. 후일 조선과의 전쟁 당시에는 히데요시가 연일 이에야스에게 참여하라는 서신을 보냈지만 이에야스는 '관백전하, 저도 그러고는 싶은데 저 여기 온지 2년 밖에 안되었고 호조 정벌로 인해 아직 수복 중이라 지금 제가 병력을 이끌고 영지를 비우면 잇키가 발생할 가능성이 너무 농후해서 안 될거 같아요 ㅎㅎ'라는 명분으로 거절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좀 시간이 흐르고서 참여하라기에는 이에야스가 너무 커버려서 불가능했다.[33] 이 때 너무 슬퍼한 나머지 자기 상투를 칼로 잘라 버렸을 정도라고 하며, 또한 히데나가오 츠루마츠의 같은 해 사망이라는 충격으로 히데요시가 잔혹하고 의심 많은 성격으로 변했다는 관점도 있다.[34] 물론 프로이스의 평가는 프로이스 선교사의 기독교적인 감성이나 그의 이해관계를 감안해서 분석해야 한다. 가령 프로이스는 불교 행세를 하던 무신론자인 오다 노부나가를 냉소적으로 보고 오토모 소린처럼 인간성 면에서 여러 비판이 제기되는 사람을 마구 칭찬하기도 했는데, 오토모 소린이 포르투갈인들을 보호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이었다. 네네의 경우는 선교사 등 이방인들의 이런저런 부탁을 잘 들어주고 신변을 돌보아 줬기 때문에 칭찬한 것. 반대로 히데요시의 경우는 기독교를 반대하고 탄압하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실제보다 지나치게 폄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히데요시는 평민 출신인데 당시에는 평민들은 육식을 하기가 힘들어 키가 작았으며 그 때는 요즘처럼 겉모습이 비장애인들과 조금 다른 육손을 성형수술로써 바로잡던 시절도 아니었다.[35] 발리냐노(1539~1606) 입장에서는 관백의 정치적인 태도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1587년의 첫 추방령은 더 큰 광풍에 대한 경고로 보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포르투갈 상인들의 행동도 선교사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의 아시아 거점지인 마카오와 일본을 오가며 비단과 무기 등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싣고 갔다가 은, 수공예품과 향신료를 싣고 왔는데 거기에는 일본인 노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백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승리의 카드인 포르투갈인들과의 무역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들과의 무역을 위해서는 신부들이 일본에 있어야 했는데 일본인들은 신부들이 없으면 포르투갈 상인들과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36] 기독교인 다이묘들의 경우 자신의 영지 내에 있는 신사사찰우상숭배라는 이유로 헐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37] 정확하게는 히데요시 자신에 대한 반대파.[38]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Augustinus).[39] 세례명은 돈 프로타시오(Don Protasio).[40] 세례명은 유스토(Justus).[41] 세례명은 돈 프란체스코(Don Francisco).[42] 세례명은 돈 바르톨로메오(Dom Bartolomeu).[43] 세례명은 레온(Leon) 또는 레오(Leo).[44] 시코쿠의 토사 이치죠 씨의 당주인 이치죠 카네사다도 기독교인이 되어 돈 파울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하리마의 쿠로다 요시타카도 돈 시메온(Don Simeon)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기독교인이었다.[45] 오토모 소린 같은 경우는 아예 불랑기포(포르투갈을 뜻하는 불랑기와 포를 더한 합성어)의 제조 기술까지 자체 보유하고 있었다.[46] 예수회 소속 초대 일본 준관구장이다.[47] 가스파르 코엘료는 이미 이 시점으로부터 1년 전인 덴쇼 13년(1585년) 규슈의 키리시탄 다이묘들과 이들을 앞세운 일본에서의 기독교 전도 활동을 지원하고자 루손(필리핀)에 일본으로의 함대 파견을 요청하고 있었다.[48] 아자이 나가마사의 누나인 쿄고쿠 마리아에게 세례성사를 준 사람이다. 호소카와 가라샤가 죽은 뒤에 그 유해를 수습해 사카이의 크리스찬 묘지에 매장한 것도 그다.[49] 중국 정복이라고는 하지만 그 길이 어디를 거치는가를 생각해 보면 예수회 선교사들은 히데요시의 명나라 공격에 찬동한 시점에서 조선에 대한 침략까지도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50] 심지어 그걸 팔아먹는 인간도 일본인 즉 기리시탄 다이묘들이었다.[51] 바테렌 추방령을 내리기 전날에 가스파르 코엘류에게 보내 힐문한 내용에 "왜 함부로 소나 말을 식용이라고 도축해 먹느냐"라고 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 시점의 일본은 불교 등의 영향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고 고기를 먹는 이들을 매우 천하게 보았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고기를 먹으면 몸이 더러워진다는 부정적인 인식도 있었고, 그래서 메이지 유신 시대에 정부가 소고기를 먹으라고 권장하자 이에 반발하여 궁궐을 습격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물론 그런 인식과 별개로 먹을 사람은 다 먹었지만.[52] 실제로 히데요시와 가까운 시대인 17세기 초반 유럽에서 아시아까지 건너온 범선들은 대부분 군함 수준으로 잘 무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본 해적이나 무장 선박들이 서양의 범선들을 공격했다가 오히려 훨씬 강력한 서양 범선들의 화력에 박살이 나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53] 히데요시가 아니어도 현대에도 종교 권력이 반정부 세력과 결탁해서 반정부 세력에 도움이 되고 그들의 언행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전근대야 히에이산에서 노부나가가 했던 것처럼 그냥 쓸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현대에는 엄연히 법률에 종교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다 보니 종교를 내세운 반정부 집단이 패악질을 저지를 경우 그걸 정부가 나서서 어떻게 해 보려고 했다가는 '정부가 종교를 탄압한다'고 여론전을 벌이니 더 까다로운 골칫거리가 된다.[54]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일본 내에서 막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여서 막부에 맞서 반기를 들었던 사건인 시마바라의 난도 하라 성에서 농성하던 기리시탄 및 반막부 세력들이 로마 가톨릭에 자신들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예수회와의 연이 깊던 포르투갈의 지원이 올 때까지 농성하려고 했었다. 막상 포르투갈군의 일본 상륙이 저지되었고, 막부도 가톨릭과는 거리가 먼 또 하나의 서양 세력인 네덜란드 상관의 원조를 얻어서 난을 진압해 버렸다.[55] 규슈가 중앙 권력에 대해 강렬한 독립성을 드러내는 것은 이미 일본 역사 초기에도 그랬고, 메이지 유신 초기 기존 지배세력인 사족들의 반정부 봉기가 가장 기승을 부렸던 곳이 규슈였다. 대표적인 것이 세이난 전쟁. 이 경우는 아예 메이지 유신에 참여한 원훈이 봉기의 수장이었으니 마냥 '규슈 독립'을 목전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56] 센고쿠 시대의 대표적인 키워드가 하극상이다. 어느 나라 어느 정권이나 그 권력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지만 일본의 경우는 특히 더했고, 애초에 다이묘도 아니고 최하층 농민으로 시작해 맨주먹으로 기어올라 신분도 가계도 내세울 것이 없었던 히데요시가 좀 별나게 굴었기는 하지만 하극상 자체에 대한 경계심은 일본의 다이묘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속성 같은 것이었다.[57] 오다 노부나가에게 모잠비크 출신의 노예로 '흑인 사무라이'로 유명한 야스케를 소개한 인물이다.[58] 출처: 윤재필 《16세기 예수회의 일본선교 연구》(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대학원) 및 조용준 《메이지유신이 조선에 묻다》[59] 32권짜리 소설 <대망>은 이 설을 채택하였다. 임진왜란 자체는 1~2페이지 밖에 안나오지만 츠루마츠의 죽음과 이에 대한 히데요시에 대한 충격은 한권에 걸쳐 나온다.[60] 단순히 일본을 자기가 차지하면 '경제적으로' 오랫동안 교류가 끊어진 대륙에 진출할 생각이었을 수도 있다. 현대에도 경제적인 의미로 외국과 새로운 교역을 하면 진출이라 표현한다. 현재는 임진왜란 이전의 약 100년 동안 일본 전역을 피바다로 만들었던 전국시대를 거의 평정해놓고서 또 대륙으로, 그것도 경제적 진출이 아닌 군사적 침략시 그런 피들을 다시 보게 될 것을 누구보다 잘 알만한 오다 노부나가가 굳이 그런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으며 침략은 히데요시가 혼자 고안했다는 것이 유력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사실 당시 명과의 조공무역은 막대한 이익을 가져왔기 때문에 막부에서는 다이묘 개개인이 조공무역을 하는 것을 금지했을 정도였는데 이제 전국시대를 통일하게 되면 오다 노부나가는 쇼군가가 됨으로써 명과의 무역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사실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력으로 일본 통일을 이룩했으므로 맘에 안 드는 놈은 숙청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만 히데요시의 경우 혈통도 평민인 데다가 애당초 노부나가의 패권을 가로채고 이에야스를 군사력으로 굴복시키지도 못 했으니 그게 불가능해서 결국은 외국 침략에 눈을 돌렸을 수도 있다.[61] 히데요시 본인은 일단 족보 세탁 이후에도 자신이 원래는 천한 신분 출신이라는 걸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알만한 사람 다 아는 거 숨겨봐야 부질없다고 생각했던 모양. 일본의 무변돌문서라는 문헌에는 히데요시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목상 앞에서 “당신은 천황가의 먼 후손이고 조부가 간토 땅에 터를 닦았기에 당신이 유형인 신분으로 거병했을 때도 간토의 수많은 무사들이 당신을 따라 일어났지만, 나는 미천한 신분으로 맨주먹으로 시작해 이만큼까지 왔으니 내가 당신보다 더 뛰어나다”고 했다고 하며, 조선의 강항이 쓴 간양록에는 명나라에 일본의 전쟁 계획을 알린 명나라 절강 성 출신 약장수 허의후를 용서하면서 “예로부터 제왕(帝王)은 모두 초야(草野)에서 일어났으니 명나라에 내 근본이 천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해로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나온다.[62] 본래 필리핀에스파냐가 아시아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식민지로 만든 곳으로 20세기 초에 미국에게 빼앗긴 곳이라, 사실 에스파냐 식민지였던 시절이 더 길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스페인 식민지 시절 역사를 많이 배운다. 또한 영어와 필리핀어(타갈로그어)를 쓰는 나라임에도 이름은 필리핀어식이 아니라면 스페인어식으로 짓는다. 영어식(영국인이나 미국인 스타일) 이름이 의외로 많지 않다. 단지 영어식 이름과 스페인어식 이름이 애매하게 겹치는 경우들(주로 멕시코계 미국인, 쿠바계 미국인 등 라틴아메리카계 미국인들)을 본 외국인들이 미국식 이름이라고 착각할 뿐이다.[63] 류큐는 오래전부터 일본에게 시달린 것이 많아서 적대관계였고, 태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기에게 복속해서 명나라를 치라고 계속 협박하자 열받아서 명나라에게 같이 일본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누르하치야 뭐 임진왜란 원병 파병을 계기로 조선에서 뭔가 한몫 챙겨보려는 꿍꿍이였고.[64] 청나라 말기의 북경은 제2차 아편전쟁으로 한 번 초토화되었고 이후 서구 열강의 의화단 운동 진압으로 또 다시 초토화되었는데, 양쪽 모두 청나라가 멸망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청나라 초기에 있었던 청나라의 북경 입관이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과는 대조적이다.[65] 후금도 만주에서만 놀았을 뿐, 산해관 안쪽으로는 거의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나마 만리장성을 삥 돌아서 한번 명을 침략한 적은 있었지만 이 역시 침략이라기보다는 약탈 정도였고 실제 명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보급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자 오삼계를 협박 겸 설득해서 산해관을 열게 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명나라는 내부의 모순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던 거지 후금(청)의 침략으로 무너졌던 건 아니다.[66] 세조 시기가 조선 역사상 조선군이 가장 강했던 시기다. 다만 조선군이 약해지는 원인을 제공한 인물들 중 1명도 세조였다.[67] 이는 히데요시 이후 권세를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역시 히데요시가 죽었다고 바로 권력을 잡은 게 아니라 10년에 걸쳐서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등의 진통을 겪으며 얻어낸거다. 도요토미와는 달리 그 가문의 역사를 들춰보면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도 이렇다는 걸 감안하면 나름의 근거는 된다.[68] 그랬다간 오히려 대부분의 다이묘가 반발하면서 다시 내전이 터질 것이 뻔하다.[69] 도요토미 가문 또한 직계와 방계, 친위 가문들이 전국 영지의 4분의 1 정도를 차지함으로써 다른 다이묘들에 비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도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70] 규슈, 시코쿠를 합친 면적과 비슷하다. 또한 농업 위주인 당시 기준으로 하삼도는 시코쿠 따위와는 비교가 불허할 정도로 생산력이 좋았으며, 도시화로 인해 농지가 많이 줄어든 현대 대한민국 기준으로도 하삼도의 농업생산력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후대의 일본 제국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에도 그렇게 조선 땅을 계속 자국 영토로 남게 하려고 발악을 한 이유로는 유라시아 대륙으로의 진출이 가장 크긴 하지만 하삼도의 농업생산력도 한 몫 했다. 하지만 이미 일본 제국의 광기에 역시 독이 바싹 오른데다 베르사유 조약의 전례를 맛본 연합국은 상큼하게 씹어버리고 일본 제국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71] 가마쿠라 막부타이라 호조씨가 아니라 전국 시대후호조씨다.[72] 애당초 일본은 생각보다 굉장히 큰 나라이다. 규슈 남단 사쓰마 번에서 교토까지의 거리만 해도 벌써 우리나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두만강 까지의 거리를 넘어선다. 관동을 정벌하는데 굳이 규슈의 다이묘들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평시에 고쿠다카 100석 당 1명을 군사로 동원하고, 전시에는 30~40석 당 1명을 동원한다는 전제로 계산을 해 보면, 이미 히데요시의 시대에는 일본 전역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이 50만을 상회하게 된다. 호죠씨 정벌에 2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미 동원하고도 더 동원하지 않은 것은 보급 능력상의 한계를 고려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73] 우키타 히데이에는 준양자, 히데아키는 양자였다가 파양했다.[74] 전국시대 이전부터 관동의 무사들은 독립적인 성격이 강했다. 미카와, 토토우미, 스루가 3국을 차지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증봉해서 호죠씨의 옛 영지로 보낸 것을 겉으로는 승진으로 보나 사실상 견제로 보는 이유가 그것이다. 관동에 기반이 없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원래부터 자유분방한 관동 무사들을 통솔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75] 예시로 도쿠가와는 석고가 250만석에 달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의 도요토미 가문의 석고가 230만석이었음을 감안하면 이건 거대해도 그냥 거대한 게 아니다.[76] 후호죠 가문의 옛 영지로 이봉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존 관동의 중심지였던 오다와라 대신 시나가와 하류의 도쿄만에 있는 에도로 본거지를 옮겨 에도를 간척하고 대도시로 조성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77] 여기에 후호죠 씨는 이 지역에서 4대에 걸쳐 자리를 잡고 있었고 또 전국시대에서 손꼽히는 선정을 펼쳐서 새 주인인 도쿠가와를 탐탁찮아 했기에 이 역시도 도쿠가와에겐 골칫거리였다.[78]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도 몽골이 일본을 침공했을 때 논공행상을 하는데 줄 상이 없었기에 그랬던 측면이 있다. 싸움에서 이기긴 했는데 방어전 성공일 뿐 정복전에서의 승리가 아니라서 줄 보상이 없었던 것이다.[79] 다만 이는 결국 패착이 되었는데 저런 식으로 노부카츠 같은 인물을 쳐낼 수 있었지만 반대로 이에야스 같은 이를 확실히 쳐내지 못해서 후일 도요토미 가문이 망하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이에야스를 후호죠 씨가 다스리던 간토로 보낸 것은 확실한 견제수단으로선 좋았는데 저기서 도쿠가와가 성공적으로 안착해버렸고 이걸 또 쳐낼 명분도 없고 전쟁에도 바쁘니 견제를 제대로 못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확실히 쳐냈으면 후환이 없었겠지만 좀 어설프게 뒷처리가 되고 그걸 또 수습을 못하다 보니 패착이 되고 말았다. 사실 히데요시의 생각으로는 이에야스를 관동으로 보낸 것 자체가 이에야스를 쳐낸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며, 설마 이에야스가 관동을 짧은 시간 안에 석권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사실 그 이전에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쳐낼 능력도 없었다.[80] 예시로 도쿠가와를 간토로 전봉시키고 원래 도쿠가와의 영지를 자기가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걸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반대로 도쿠가와는 자기에게 영 맞지 않는 지역인데도 제 영지를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히데요시 사후 구 도쿠가와 영지였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우미는 이에야스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즉, 이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실질적인 석고는 공식적인 것보다 훨씬 컸다.[81]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수준은 못 되고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급은 되는 정도다.[82] 일각에서 미천한 신분 때문에 정이대장군 직에 오르지 못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나 오히려 관백과 태정대신 직이야말로 쇼군보다 훨씬 권위있는 자리다. 반대로 관백직을 손에 넣었기 때문에 쇼군에 별 미련이 없었던 쪽에 가깝다. 도쿠가와 쇼군들 중에서도 생전에 태정대신직에 취임한 쇼군은 셋 뿐이다.[83] 에도 시대 하타모토의 경우, 1천석이 넘으면 특별대우를 받았다. 칠본창은 그 이상의 고쿠다카를 가지고 있었다.[84] 오우치(大內), 교고쿠(京極) 등 주고쿠에 위치한 다이묘들은 조선 조정에 공물이나 사신을 보내며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오우치를 멸망시키고 주고쿠의 패자가 된 모리 가문은 조선과의 무역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견선 규모가 너무 적은 한편, 조선 정부도 대마도주를 선호하였으며, 센고쿠 시대의 무력 충돌이 심해지는 상황이라 깔끔히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85] 천황은 본래 신토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했던 샤머니즘 성향이 강했던 직위였다. 예전, 아베 신조가 일본의 우경화를 경고하는 아키히토 상황에게 들어가서 기도나 하라고 비꼬았던 건, 역사적으로 보면 천황의 실질적인 위치를 나타내는 조롱인 셈이다.[86] 국화와 칼에서 언급되다시피,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에게 모든 계층, 신분들에게 세뇌되듯이 강요되었던 사상은 '자신에게 적절한 자리 찾아가기'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각자 자신의 본분을 다하라는 말이지만, 그 본질은 일본의 지독한 신분제도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층민은 결코 상류계층이 될 수 없으며, 하층민은 어떻게 하더라도 태생의 혈통과 신분을 벗어나선 안되고 그 자리에서 머무르며, 그 뿌리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노골적일 정도로 혈통과 신분을 중요시했던 사상이었다.[87]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성을 도쿠가와로 바꾸기 전에 있었던 원래 가문명.[88] 겐페이토키츠, 미나모토(겐지), 타이라, 후지와라, 타치바나로 구성되는 일본 4대 본성을 의미하는 말. 일본 무가사회 최정점에 위치하는 성씨이기에, 센고쿠 시대 다이묘들은 자신이 이들의 후손이라며 사칭하곤 했다.[89] 내대신, 관백, 태정대신을 모두 거부한 오다 노부나가도 이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90] 정작 이를 성공시킨 이는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 그는 자신의 권위와 힘을 바탕으로 대부분의 다이묘를 정리했고 자신과 가까운 이들에게만 영지를 주었으며 껄끄러운 이들은 벽지로 치워 버렸다. 물론 완전히 정리하는 건 불가능해서 막부 말에 가면 이들이 들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긴 하지만 애시당초 당대 일본의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그 누가 막부를 열었더라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 나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91] 니와 나가히데, 마에다 토시이에 등. 특히 토시이에는 히데요시의 큰 힘이 되어주었으며, 이에야스도 토시이에의 눈치를 보았다.[92]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쿠로다 칸베에 등.[93] 우키타 히데이에 등.[94] 에도 막부 역시 쇼군이 직접 약 300~400만 석 규모를, 그 외에 하타모토 등 쇼군 친위세력이 또 300~400만 석의 영지를 거느려 다른 다이묘들을 압도하는 식으로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킨 바 있다. 이러한 모습은 중국의 군국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95] 같은 성을 가진 일가친척을 생각하면 된다.[96] 그런데 히데요시 생전에는 이게 먹혔지만 히데요시 사후에는 정말로 도쿠가와 가가 도요토미 가보다 석고에서 우위였던 점이 그대로 군사력으로 발휘된다. 이때쯤에는 명목뿐이었던 석고도 도쿠가와 가가 간토의 영지를 결국 안정시킨 데다가 과거의 영지였던 미카와 일대 또한 영향력이 고스란히 남았던 것으로 인해 실질적인 힘으로써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반면, 말년 히데요시의 삽질 때문에 생전 히데요시가 배분한 석고가 도요토미 가문의 힘으로 응집되지 못하게 되었다.(대표적으로 임진왜란과 양자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처형 등) 이 또한 어찌보면 미래를 보지 못한 히데요시의 패착이라고 할 수 있다.[97] 마에다 토시이에는 '카가 100만석의 시조'로 유명하지만, 실제로 토시이에의 석고는 83만석이었다. 아들인 마에다 토시나가 대에 120만 석을 찍는다. 이후 카가 번 3대 번주가 지번을 만들고 분할 상속하며 카가 번은 약 100만 석이 되었다. 카가 100만석의 시조는 여기서 나온 별명이다.[98] 실제로 이에야스에게는 유능한 후다이 가신들이 많았는데, 도쿠가와 사천왕 중, 이이 나오마사를 제외한 나머지 세 명 모두 후다이 가신이다. 이이 나오마사도 후다이 가신만 아닐 뿐, 이에야스를 25년이나 섬겼다.[99] 4성에 달하는 고위장성이 고작 1~2개 연대급 병력만을 주둔시킨 건 현대 기준으로 봐도 요식행위다.[100] 만약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승리했다면 서군의 실질적 리더였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을 살육하는 일에 동참한 것 때문에 조일관계 개선이 (실제 역사보다 오랫동안 이어진) 도요토미 정권이나 (도요토미 정권과 도쿠가와 가문을 모두 몰락시키고 들어선) 이시다 정권이 19세기에 멸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101]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이 도요토미 츠루마츠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형이다.[102] 쓰시마는 농사가 되지 않아서 거리상 가까운 조선 땅에서 식량공급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조선과 전쟁이 일어나면 식량공급은 당연히 끊어지고 그렇다고 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기 땅으로 식량을 줄리도 없기 때문. 예상대로 쓰시마는 임진왜란정유재란의 7년 동안 식량공급의 중단으로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선과 전후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주작질을 해 가면서 관계 개선을 해내는데 성공해 겨우 이전 신세로 돌아올 수 있었다.[103] 강항의 간양록에는 아사노 단죠(浅野弾正, 천야탄정)로 되어 있는데, 나가마사의 관위가 종5위하 단죠쇼히쓰(弾正少弼, 탄정소필)였다.[104]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간양록의 이 일화를 적으면서 “히데요시는 정작 조선을 침략하려고 하면서도 조선에 거짓말은 안 했는데 김성일은 조선의 대신이면서도 그걸 공갈이라고 속였으니 소견이 좁았다”고 까고, 히데요시에 대해 “이놈이 만약에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정말 뭔가 크게 한가닥하고도 남았을 놈이다. 하여튼 그놈의 인물이나 역량이 보통 인간들하고는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던 건 맞다.”고 평가했다.[105] 참고로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훗날 조·일 국교가 회복되면서 이 전쟁에 불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것도 내막을 보면 이에야스가 마냥 평화주의적인 성격이라 사과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저지른 전쟁을 왜 조선 간 적도 없는 내가 사죄하는가'라는 반응이었고, 결국 두 나라 사이에 놓인 대마도주가 두 나라의 국서를 위조함으로써 조선에게는 '일본이 사죄했다', 일본에게는 '조선이 일본의 국교 회복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리고 두 나라는 대마도주의 농간을 알았지만 현실적으로 더 이상 문제삼고 싶지 않있기 때문에 문제삼지 않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대마도주의 행각은 명백히 외교적 사기와 다름없지만 조일관계가 회복되어야 먹고 살 길이 트이는 대마도의 현실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106] 그리고 태종도 이후에는 명나라의 황녀를 며느리로 맞는 것이 안 좋다 여겼는지 얼른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는다. 그리고 그때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행실의 문제로 폐세자 되었고 당연히 세자빈도 지위가 박탈당한다(이혼을 한 건 아니다). 이후 새로운 세자가 된 충녕대군의 사돈이던 심온이 태종의 외척 견제책의 일환으로 숙청된 걸 생각하면 양녕이 폐세자된 게 김한로에겐 전화위복이 되긴 했지만.[107] 애초에 선조 본인부터가 적에게 항복 혹은 휴전을 하자고 간언하는 사람이 있으면 닥치고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말했다. 다만 명나라 사신과 황제가 그래도 협상은 해보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은 것뿐이다.[108] 오히려 히데요시의 경우 공식 직함인 관백 & 태정대신은 조선으로 치면 영의정~좌의정, 높게 쳐봐야 군 정도의 지위이다. 조선의 입장에선 고작 왕 아래 일개 신하 주제에 상대국 국왕을 있지도 않는 존재의 신하 취급하고 있으니, 그 자체로 충분히 모욕이었다.[109] 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북로남왜 중 북로인 몽골족의 족장()이었다. 명나라와 화의를 맺는 과정에서 황녀를 시집 보내지 않았다.[110] 명나라 조정에서 파악한 다이묘의 서열대로 초기 명단이 작성되지만 일본 측이 정정을 요청하여 수정 후 제출되었다.[111] 다이묘로 삼는다고 했다.[112] 이 일을 기록한 책이 '일본왕환일기'이다. 히데요시가 조선 사절단의 접견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조선 사절들은 명나라 관리들에게 책봉장의 상황을 전해들을 수 밖에 없었다.[113] 명나라에서 순의왕의 예를 따라 '순화왕(順化王)'으로 왕호를 정하려 했으나 전통적으로 일본의 지배자에게 책봉하던 '일본 국왕'으로 최종 결정되었다.[114] 아마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는 이야기를 못 들었던 듯싶다.[115] KBS 팩션 사극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이등체강된 조선 왕과 똑같이 친왕의 붉은 곤룡포익선관을 착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른 논문에서는 이등체강되어 친왕 대우인 조선 왕과 다르게 삼등체강된 군왕의 대우로 책봉하고 관인이 내려졌다고 한다.[116] 임진왜란과 강화교섭-쓰시마번과 고니시 유키나가를 중심으로, 임진왜란기의 강화교섭과 加藤淸正, 임진왜란기 일ㆍ명 강화교섭의 파탄에 관한 一考察 사명당(松雲大師)ㆍ加藤淸正 간의 회담을 중심으로[117] 당장에 용인 전투에서만 해도 5만 명을 끌어모았다. 질도 나쁘고 지휘권도 엉망이라 패배하기는 했어도 적군이 급속도로 밀려오는 상황에서 5만명이 그렇게 금방 모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118] 다만 조선은 전쟁 초기 정예병들이 너무 많이 죽었고 군사 체계의 문제점으로 인해 참패를 당하며 야전 주도권을 잃어 전쟁이 오래 갔는데, 이 야전 주도권은 명나라의 도움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육전은 명나라에 맡기고 명군에 협력할 2만 정도의 군대만 유지하면서 나머지 병력은 전후 복구를 위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 가량, 정유재란 때 파견된 명군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119]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은 150도 안 되었지만, 조선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5정도였다고 쓰여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 때조차 일본군 평균 신체는 조선인에 못 미쳤다. 숙련도가 어느정도 갖춰지면 덩치는 싸움에서 매우 유용한 무기가 된다.[120] 신립이 바로 조선 건국이래 최대 침공인 니탕개의 난에서 기마병이 중심인 여진족을 기마병으로 맞서 승리했다.[121] 아이러니하게도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들어섰으며 정신적으로 도요토미 정권의 팽창주의를 계승한 일본 제국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만주족의 청나라를 간접적으로 멸망시킨 셈이 되었다.[122] 물론 일본 제국이 그렇다고 한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건 아니어서 한족이 세운 중화민국과 내내 중일전쟁이라는 전선에서 지지부진하게 끝나다가 만주 작전으로 주력군을 상실해 도리어 일본 제국명나라의 후손인 중화민국을 비롯한 연합군 진영에 의해 멸망했다.[123] 그렇다고 일본 제국은 조선을 영원히 지배한 것은 아니었고 애초에 현 시점에서 보면 공식적으로는 진작에 멸망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쪽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수뇌부들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들을 정복하려는 망상을 가지고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을 도발해 결국 태평양 중요 거점들을 다 날려먹고 나중에는 원자폭탄으로 조선 지배는 35년만에 종지부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국명도 일본 제국에서 일본국으로 바뀜에 따라 일본 제국 자체도 이미 멸망한 나라가 되었다.[124] 조선 통신사 앞에서 무례를 범했다 나오는 아이가 츠루마츠.[125] 뿐만 아니라 그렇게 죽이고도 뭐가 못마땅한지 이들의 시체를 묻은 무덤을 축생총이라 하였는데 직역하면 '짐승 무덤'이다. 문제는 이렇게 죽은 이들 중 '처'는 정략혼에 의한 유력 다이묘의 친족이라 이들은 이로 인한 불만을 후일 이에야스쪽에 붙어버리는 것으로 풀었고 그 외 이 일에 연루되어 죽은 자들은 엉뚱하게도 정적이 아니라 그나마 도요토미를 오래 섬겨온 가신들이었다.[126] 당장은 힘으로 누르고 있는 이에야스만 하더라도 미카와에서 누대에 걸친 충성스런 가신단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히데요시는 자신의 일부 친척이나 측근을 육성하기도 하고, 타 가문의 어린 인물을 어거지로 자신의 가문에 편입시키기도 했지만 대부분 별 효과가 없었고, 세키가하라 전투로 결국 멸족되고 만다. 사실 이는 애초부터 몇대에 걸쳐서 다이묘 노릇이라도 하던 도쿠가와 가(家)와 갑자기 떠오른 도요토미 가(家)의 짬밥 차이이긴 하지만...[127] 다만 히데요시는 죽었을 때의 나이가 62세인지라 평균 수명이 짦은 당시로서는 장수한 편이다. 즉 애초에 죽어도 이상할 건 없는 나이에 죽은 것이다. 현대로 치면 80대에 사망한 것과도 비슷하다.[128] 실제 야생동물의 간은 기생충이 많은 장기이다. 기르는 가축도 일례로 소의 생간 같은 경우 한국에서는 영양분이 많다며 요즘도 먹는 사람들이 있지만 현재 일본에서는 익히지 않은 소의 생간은 기생충 감염 때문에 식용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 경우 기생충은 개회충(Toxocara canis)으로 사람의 눈이나 뇌로 올라가서 산란하고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129]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에서 도망쳐 돌아온 사람에 의하면 7월 초에 관백(히데요시)이 사냥을 하다가 더위를 먹고는 측근에게 "소자(小子)를 세우도록 하라"는 말을 전한 기록이 있다. 선조 31년(1598년) 9월 8일(양력 10월 7일) 경인 3번째 기사.[130] 남원 양씨로 히데요시 사후 모리 테루모토 휘하에 있었다가 35세의 나이로 조선인 백여 명을 데리고 조선에 귀환 후 95세까지 장수했다. 참고로 이 이야기는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 등에도 나와서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별개로 양부하는 오랜 일본 생활로 히데요시 전후의 일본 사정을 꿰차고 있어서 강항의 간양록처럼 당시 일본이 이랬다 정도로만 알아두자.[131] 메이지 유신 시대 히데요시를 조정을 중시한 천황숭배 사상의 선구자로 재평가하면서 재건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물론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중 진심으로 천황을 숭배하고 조정을 중시한 인물은 하나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에게 조정은 자기들의 명분과 벼슬을 얹어주는 존재 그 초과도 미만도 아니었던 것.[132] 가톨릭 신도라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기에 가신의 손을 빌렸다. 이 일로 인해 다다오키가 미츠나리를 적대하게 되어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다다오키는 그 누구보다도 먼저 동군에 합류한다.[133] 사실 이것도 죽을 수도 있던 걸 이에야스 덕에 산 대신 오봉행에서 짤리는 것으로 끝난 거다.[134] 히데요리에게 친손녀 센히메도 시집보낸 이에야스가 (센히메의 아들은 아니라 하나)어린 쿠니마츠에게 이런 짓을 한 것은 잔인한 처사라고 할 수 있는데, 하필 히데요시가 조카 히데츠구의 일가를 몰살한 것이 이보다 몇 배는 잔인한 처사여서 별로 욕먹지는 않았다.[135] 조선과의 교류 재개를 위하기도 했고, 자신의 가문을 확장시키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고, 히데요시 집권기간 동안 그를 견제/압박했던 히데요시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에서 기인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이에야스가 이런 일을 할 당위성은 많이 있었다. 특히 도요토미 가는 히데요시 사후에도 여전히 천하인의 가문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므로 얼른 히데요시의 흔적을 지우지 않으면 다시 한번 오사카 전투를 치러야 할 지도 몰랐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136] 천황은 신토의 수장이므로 신호를 추증하고 박탈하는 권한은 쇼군의 통제를 거의 받지 않았다. 히데요시에 대한 천황과 교토 귀족들의 시선의 속내는 좋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 히데요시가 고요제이 덴노에게 출정을 알렸을 때 고요제이 덴노가 그것을 극구 반대하며 무모함을 비난하는 글이 남아있으며,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미천했던 자가 하루아침에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마음대로 고셋케의 최고 가문 코노에 가의 양자로 들어갔는데 혈통과 고귀함의 자부심이 높던 귀족들이 그를 좋아했을 리 만무하다. 사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 그에게 신호를 추증한 것도 고요제이 덴노이지만 히데요시가 죽었을 당시에는 도요토미 가문이 건재했기 때문에 그도 도요토미 가문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의 아들 고미즈노오 덴노가 히데요시의 신호를 박탈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137] 히데요시는 불교의 폐해와 부패가 심하다고 보아 불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신토를 중시했기 때문에 승려들은 그를 싫어했다. 이에야스가 이 행동을 했던 것은 불교를 탄압했던 히데요시를 격하하고 불교계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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