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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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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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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대 비서실장 (1948~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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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장관 (1948~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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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대한민국 제3대 전·후반기·4대 전반기 국회의장
이기붕
李起鵬 | Lee Ki-poong
파일:이기붕 전 국회의장.jpg
출생 1897년 1월 22일[1]
충청북도 청주군 청천면 후평리
(現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
사망 1960년 4월 28일 (향년 6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무대
(現 청와대 구본관 터)
본관 전주 이씨[2]
만송(晚松)
재임기간 초대 경무대 비서실장
1948년 4월 15일 ~ 1948년 10월
제3대 서울특별자유시장
1949년 6월 6일 ~ 1949년 8월 14일
제4대 서울특별시장
1949년 8월 15일 ~ 1951년 5월 7일
제3대 국방부장관
1951년 5월 7일 ~ 1952년 3월 29일
제3대 전반기 국회의장
1954년 6월 9일 ~ 1956년 6월 8일
제3대 후반기 국회의장
1956년 6월 9일 ~ 1958년 6월 30일
제4대 전반기 국회의장
1958년 6월 7일 ~ 1960년 4월 28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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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80009><colcolor=#CFA547> 부모 아버지 이낙의, 어머니 송정현
배우자 박마리아
자녀 딸 이강희[3]
아들 이강석, 이강욱
양자 이강복[4]
친인척 6촌형 이기룡[5]
학력 보성학교 (졸업 / 6회)
연희전문학교 (중퇴)
데이버 대학교 (철학 / 학사)
종교 유교 (성리학)기독교 (개신교, 감리회)[6]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3, 4
경력 제3·4대 국회의장
서울특별시장
국방부장관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광복 이전2.3. 광복 이후2.4. 정치 활동2.5. 3.15 부정선거2.6. 사망2.7. 사후
3. 평가4. 소속 정당5. 선거 이력6. 대중매체에서7. 여담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으로 제3-4대 서울특별시장, 제3대 국방부장관이자 제3·4대 전반기 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정부의 2인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정작 부통령 직책을 역임한 적은 없다.다만 3.15 부정선거 당시 부통령으로 당선이 되었다.이기붕을 따르며 계승한 정치 세력을 '이기붕계'라 한다.

2. 생애

2.1. 초년기

충청북도 청주군 청천면 후평리의 몰락한 양반가 집안에서 남매 중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7대손이었으나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13대조에서 끝이 났고 그 뒤 자손들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전성군(全城君) 이대(李薱)는 그의 12대조였다. 그의 증조부 이회정(李會正)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흥선대원군의 수하에서 활약하여 판의금부사[7]와 예조판서에까지 올랐으나 임오군란 직후 흥선대원군이 잠시 정권을 잡았을 때 흥선대원군의 명을 어기지 않고 명성황후의 국상을 반포하였다. 이 때문에 흥선대원군이 중국으로 끌려간 이후 탄핵을 받고 민씨 정권에 의해 흥선대원군의 당여[8]라고 하여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후 그의 가계는 몰락하여 어렵게 지냈고 그의 회고에 의하면 '할아버지도 20세에 사망하고 아버지마저 오래 산다는게 3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9]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7세였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과부인 홀어머니[10] 밑에서 어렵게 성장했으며 가난한 환경에서 끼니를 때우지 못하였고 밥을 굶기를 예사로 하여 몸이 병약하였다 한다. 그가 소학교에 다닐 때는 며칠 안있어 죽을 아이를 무엇하러 학교에 보내나 하고 손가락질하는 동리 어른들이 있었다고 하며 소학교에 다닐 때는 노래를 잘 불러서 여기저기 뽑혀다니기도 했다.

2.2. 광복 이전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 아이오와 주의 데이버 대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다. 호텔 일, 농장 일, 접시닦이 일 등을 하면서 어렵게 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신민회 집회에서 밀양 박씨 박명삼(朴明三)의 딸[11] 박마리아를 만나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의 귀국으로 약혼이 취소되었지만 1935년 이기붕이 귀국하면서 다시 재회하여 결혼했다. 귀국 후 이기붕은 중추원 참의 최남이 경영하던 종로 국일관 지배인을 지냈다.[12] 당시 아내 박마리아가 현재의 이화여자대학교인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였기 때문에 여학교 교수 남편이 요정을 운영한다고 말이 많았고 기사화도 되었다.

또한 이 무렵 2남 1녀 (이강희, 이강석, 이강욱) 을 두었으며 다방 <종로>를 경영하기도 했고 건축청부업사무소 등 잡다한 일을 거쳐 일제 말기에는 허정과 함께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빛을 보지 못한 채 8.15 광복을 맞았다.
파일:external/shindonga.donga.com/201308220500002_1.jpg
이기붕 일가.

제1공화국의 이기붕 일가. 왼쪽부터 장남 이강석, 이기붕, 박마리아, 차남 이강욱. 이강석과 이강욱 위에 이강희(李康姬, 1935.12.19~1949.5.31)[13]라는 이름의 딸이 있었지만 이화여중 2학년 때 사망해서 사진에는 없다.

2.3. 광복 이후

파일:Birthday_of_Syngman_Rhee_with_Francesca_Donner.png
1946년 3월 26일, 이승만 생일을 맞아 돈암장에서 측근들과 함께 기념 촬영한 이승만 부부. 사진 왼쪽 넥타이를 매고 서있는 사람이 이기붕이다.

이렇게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던 사람이었는데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의 개인 비서가 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무엇보다 그의 아내 박마리아가 출세와 명예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이승만 주변에 붙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 특히 영부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당시 여성 정치인 임영신과 불화가 있었던 틈을 탔다. 임영신이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이 강해서 돈암장을 들락날락거리자 임영신과 이승만이 불륜 관계라고 소문났는데 해외에 있었던 프란체스카의 귀에 들어가서 급히 귀국하고 임영신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시켰다.

프란체스카를 만나기 전 이승만은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유학 중이던 임영신에게 한때 청혼했었지만 거절당했다. 보통 국외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독립운동가들이 귀국시에 처를 버리고 오는 일이 많아서 임영신이 돈암장에 들락거린게 문제가 되었던 것. 박마리아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프란체스카 여사와 친분을 다져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로나 별 볼 일 없었던 남편을 정계에 들이는데 성공했다.

2.4. 정치 활동

덕분에 이기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초대 경무대비서실장을 거쳐 1949년 6월 6일부터 1951년 5월 8일까지 제3·4대 서울특별시장을 지냈는데 사실 서울특별시장으로 재직하던 때의 이기붕은 청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한강 다리를 끊고 후퇴를 할 때는 "서울특별시장이 된 책임으로 남겠다." 라고 주장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만약에 여기서 책임을 지고 서울에 남았다가 조선인민군에 항전하다 죽었다면 친일도 심하진 않았기에 오늘날 역사 교과서에서는 당연히 좌우익을 막론하고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간신배가 아니라 역사에 길이남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면서 순국한 업적을 세운 정치인으로 실렸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나마 지나가는 말로 시민들에게 사과한 사실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이승만보다 나은 점도 있을지도 모른다.[14] 이후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사임한 신성모의 후임으로 제3대 국방부장관에 취임하여 2인자로 등극했고, 1951년 5월 7일부터 1952년 3월 29일까지 역임했다. 국방장관 시절까지만 해도 상당히 유능하고 주변의 평도 좋았다. 국민방위군 사건의 주동자들을 공개 처형하는 강수까지 두면서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었고 하지만 이때 이승만에게 미운털이 박히는 걸 걱정하게 된건지 이후론 지나치게 눈치를 보며 정치 깡패 이정재를 영입하고 사사오입 개헌에 앞장서는 등 무리수가 많아지기 시작한다.

자기 아들 이강석을 후사가 없었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다졌다. 당시 법에는 장자는 다른 집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이걸 어기고 양자로 입적시켰다고 한다. 더군다나 양녕대군파인 이승만과 효령대군파인 이기붕간의 관계는 문중에서도 곤란한 데가 있었으며,[15] 세간에서는 아들을 팔아 출세한다고 까였다. 물론 이기붕 자신으로서도 장남인 이강석이 이승만의 양자가 되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기에 둘째는 안 되겠냐고 했다가 이승만이 이강석 아니면 싫다고 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장남을 보내지 않고 차남을 양자로 보내는게 당연한 것인데[16] 자신의 대를 이을 장남을 보냈으니 당연히 권력에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 당선 후 진짜 왕족인 이청을 양자로 삼으려다가 어디 "양녕대군의 방계가 왕족을 양자로 들인단 말인가?" 라는 논리로 차인 후 겉으로는 이청의 입적이 '왕정복고'를 연상시켜 이승만 스스로 거부한다는 형식으로 뒤만 겨우 수습해 둔 터였다.

하지만 잘 나가던 이기붕에게도 시련이 있었으니 바로 1956년 정, 부통령 선거. 이기붕은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장면에게 밀려 미끄러지고 말았다. 낙선한 이유는 당시 국민들이 자유당 정부에 염증을 느껴서 그런 것도 있으나 이기붕의 스펙이 장면보다 떨어진 것도 컸다. 당시 정계에서 리더로 인정 받으려면 유학가서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하고 영어에도 능통해야 한다는 분위기였는데 민주당 신파 리더인 장면은 법학박사를 취득한 데 반해, 이기붕은 마누라가 구축한 인맥으로 출세했을 뿐 유학까지 다녀왔음에도 박사 하나도 못 딸 정도로 스펙이 형편 없었다. 결국 낙선해서 50일이나 결석할 정도로 울화통이 터져 아예 누워버렸고, 김두한 등 야당의원들에 의해 중환자, 산송장, 병든 닭이라는 소리까지 듣고말았다.[17]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조차 승리를 장담 못할 상황이었으나 민주당 후보였던 신익희가 유세 도중 급사하는 바람에 무난히 당선된 것이었다. 신익희에 비해 훨씬 인지도가 낮았던 대통령 후보 조봉암조차 대통령 선거에서 30%가 넘는 지지율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 후 이기붕은 장면을 제거해야겠다면서 장면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1958년 자유당의 돌격대로서 온갖 궂은 일은 도맡아 하던 정치 깡패 이정재가 고향인 이천군에서 민의원에 출마하려고 하자 이정재의 출마를 포기시키고[18] 자신이 이천에서 출마했는데, 이 과정에서 야당 후보도 사퇴함으로서 무투표 당선이 되었다.

2.5. 3.15 부정선거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에 출마했으나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겠다고 3.15 부정선거라는 최악의 사건을 터뜨린다. 이번에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2달여를 앞두고 급사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의 재선은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당시 나이로 무려 86세였던지라 대통령 임기를 끝까지 마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19][20] 부통령은 대통령직 승계가 예약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고 부통령 자리에 당선되기 위해 부정선거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것.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나자 4월 22일 국무회의에서는 이기붕을 사퇴시키기로 합의했으며 국방장관 김정렬, 법무장관 홍진기에게 소식을 전하도록 했다. 4월 19일 성난 군중이 서대문의 저택으로 몰려온 것을 본 이기붕은 겁을 먹고 그들의 눈을 피해[21] 경기도 포천시대한민국 육군 제6군단 사령부[22]로 가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이미 스스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식사도 못해서 미군이 준 주스로 연명했으며 대화도 박마리아가 옆에서 말을 알아듣게 설명해줘야 겨우 했다고 한다. 이미 1957년부터 이기붕은 각부신경통과 협심증을 앓고 있어서 미국 월터리드 육군 병원 등 여러 병원들을 돌아다녔지만 점점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 무렵의 이기붕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혼자서는 화장실도 가지 못하는 중증 장애인 상태라 휠체어를 타야 했고 집 밖으로 나갈 때는 휠체어 밑에 간이 대소변기를 달고 다녔다. 4월 25일 오후 6시에 자택 뒷문으로 빠져나와 육군 6군단으로 피신할 때에도 대소변을 보기 위한 변기와 신경통을 앓는 다리를 덮을 담요를 챙길 정도였고 앉은 자세로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사실상 이기붕은 부통령 역할을 거의 할 수가 없었고 부통령 역할은 그의 아내인 박마리아가 대리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와 절친한 사이였고 권력욕이 강해서 사실상 비선 실세나 다름없었다. 김정렬 장관의 연락을 받고 서대문의 집으로 돌아간 이기붕은 김정렬 장관으로부터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기붕은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잠시 후에 난 그럴 재목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잘되었다는 말을 했다. 김정렬 장관은 중앙청으로 가서 이기붕의 사퇴 수락 소식을 전했고 한갑수를 시켜 사퇴 성명을 쓰기 시작했다. MBC 드라마 <제2공화국>에 의하면 자유당 선거대책위원장 한희석은 이 한갑수의 사퇴 성명 초안을 눈물 짜는 소리가 너무 장황하다고 얘기했다. 이는 처음에 사퇴 성명을 쓰게 할 때 국민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최대한 감명깊게 쓰라는 주문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한편 이기붕은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에게 부통령 당선자 자리에서 사퇴를 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고 김정렬 국방장관이 설득하고 나서야 겨우 동의했다. 하지만 다음날의 신문 기사에는 이기붕 사퇴가 아니라 이기붕 '사퇴 고려'라는 기사가 실렸다. 국무위원들은 김정렬 장관에게 항의했고 확인 결과 자유당 강경파들의 반발로 사퇴 성명서가 사퇴 고려 성명서로 후퇴한 것이 드러났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충수였다. 국민들은 이 '사퇴 고려'를 시간을 벌려는 얄팍한 수작으로 평가했고 계엄령 선포후 잠시 수면아래로 가라앉았던 국민들의 분노에 다시 불을 당겨버린 꼴이었다.

여론이 들끓자 다음날에 이기붕은 직접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의사를 발표했지만 결국 4월 25일에 이기붕의 집은 파괴되었고 시민들은 가구들을 가져나와 불태웠으며, 이기붕은 다시 6군단 사령부로 달아났다가 경무대 별관 36호실로 옮겼다. 그리고 다음 날인 4월 26일에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했고 다음 날인 4월 27일에 결국 하야함으로써 이기붕의 마지막 방패막이었던 이승만 정부는 붕괴되고 말았다.

2.6. 사망

결국 4.19 혁명이 일어난 지 9일째되던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20분 경무대 비서동 36호실에서 당시 육군 소위였던 장남 이강석에 의해 이기붕을 포함한 가족들은 모조리 권총으로 살해되었고 이강석도 자살했다.[23] 향년 63세. 참으로 비참한 최후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날 아침 미국 대사 맥카나기는 이기붕 내외의 망명 신청이 수락되었다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달한 상태였다.

이강석이 어떤 심정으로 일을 저질렀는 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으며 가족들 전부가 같이 죽기로 합의하고 죽은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기붕과 박마리아는 일전에 사는게 힘들다고 자살 기도를 여러 번 했다고 하며 그로 인해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하고 이미 자살한 상태에서 이강석이 권총 두 자루를 준비하여 머리와 가슴에 각각 대고 쏘았다는 것이 현재까지 유력하다. 훗날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강석의 시신에는 머리와 가슴에 총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자루의 총만 사용할 경우 실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실 종종 있는 일이다. 이강석의 사인이 타살이라는 루머가 퍼진 이유는 뜬금없게도 도조 히데키 때문이다. 이유는 도조 히데키가 가슴에 권총을 겨누고 쐈는데, 자살이 실패한 것. 사실 도조 히데키는 콜트 22 같은 소구경 권총을 사용했기 때문에 자살 실패 가능성이 너무나도 높았고, 이 때문에 자살할 의도로 가슴을 쏜 게 아니라 쇼였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소구경 권총 때문에 자살이 실패한 것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고 가슴에 총을 쐈다가 죽지 못한 것이 주목을 받아 "가슴을 쏘면 자살에 실패한다."는 속설이 퍼지고 이에 더해 "이강석이 가슴에 총을 맞았기 때문에 타살"이라는 말이 퍼지면서 타살론이 제기된 것이다.

2.7. 사후

이기붕과 가족들의 시신은 이후 수습해서 1960년 4월 30일 수도육군병원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장례식에는 이승만 내외와 허정내각 인사, 여야 국회의원들이 참석했으며 장지는 망우리 공동묘지였다. 1970년대까지는 이기붕의 비서 등 지인들이 망우리에서 추모 활동을 벌인 것이 확인되며, 1976년 경에 경기도 고양시파주시의 경계에 있는 명봉산 자락의 한 사설묘지로 이장했다.

이기붕의 가문인 효령대군파 종중에서 가끔 제례를 지내지만 묘지 관리비도 내지 않아서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2008년경부터 미국에서 이기붕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한 여성이 거액의 관리비를 보내서 석축도 새로 만들었지만 이마저도 몇년 후 끊겼다.

3. 평가

한국 근현대사를 통틀어 사실상 좌우를 불문하고 좋은 평가를 일절 찾아볼 수가 없는 몇 안되는 인물로, 진영에 관계없이 좋아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기붕은 오직 자신의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3.15 부정선거 당시 이승만의 재선이 확실한 상황이라 이기붕이 삽질만 하지 않았어도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면서 아쉬워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물론, 당시 이승만의 나이와 건강상태 등을 고려했을 때 임기를 무사히 마치고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한민국 대통령이 임기 중에 죽는 것이니 전국적으로 시위대가 들고 일어나서 강제로 하야해서 타국으로 망명했다가 끝내 귀국을 거절당한 채 씁쓸한 최후를 맞는 것 보다는 나았을 것이다.[24]

다만, 이 사람이 딱 한 가지 잘 한 게 있다면 바로 국민방위군 사건을 효율적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관련자 김윤근 일당을 제대로 사법처리하지 않았다면 조선 말의 임오군란에 준하는 사건이 터져 6.25 전쟁 중인 대한민국에 큰 타격을 안겨줬을 지도 모른다. 이기붕은 김윤근 일당이 군납비리를 저질러서 국가를 지키려고 한 국민방위군들을 모두 굶겨죽이고 얼어죽게 만든 죄상들을 낱낱이 밝혀내고 죄에 맞는 합당한 처벌인 사형을 선고했으며, 김윤근은 공개총살형 당한다. 과오가 너무 많은 이기붕이지만, 최소한 이것 단 하나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공으로만 덮는다는 것이 턱도 없을 만큼 이기붕이 저지른 과오와 악행이 너무 큰데다 3.15 부정선거처럼 본인이 의도치 않게 이승만의 몰락을 불러일으킨 당사자 중 한 명이라 덮어질 리가 없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1951 - 1960 창당
정계 입문
사망

5.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580009><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cfa547><rowbgcolor=#580009>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0[25]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12,923 (58.63%) 당선 (1위) 초선[26]
1956 제4대 부통령 선거 대한민국 3,805,502 (44.03%) 낙선 (2위)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13[27] 무투표 당선 당선 (1위) 재선[28][29]
1960 제5대 부통령 선거 대한민국 8,337,059 (79.19%) 당선 (1위) [30]

6. 대중매체에서

6.1. 영화

6.2. 뮤지컬

6.3. 드라마

7. 여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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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 이익흥 사퇴 (1960.5.31.)
* 포천 윤성순 사퇴 (1960.7.1.)
* 양주 을 강성태 사퇴 (196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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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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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896년 12월 20일. 80년대 인명사전에는 이 음력대로 1896년생으로 나오곤 했다.[2] 효령대군파 17대손, 시조 41세손 '起'자 항렬.[3] 李康姬, 1935 ~1949.[4] 李康福, 이기붕의 7촌 조카로 이기붕 사후 양자로 입적되었다.[5] 李起龍, 한성외국어학교의 영어 교수였다. 이기붕의 사촌형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족보를 보면 6촌형이다.[6] 감리회 권사였다고 한다. 참고로 감리회는 남성도 권사가 될 수 있다.[7] 判義禁府事. 종1품.[8] 黨與. 한편이 되는 무리.[9] 《선원속보(璿源續譜)》에 의하면 조부 이석우(李錫宇)는 계축년(癸丑; 1853년)에 태어나 신사년(辛巳; 1881년)에 사망했다. 아버지 이낙의(李洛儀)는 병자년(丙子; 1876년)에 태어났다가 1904년에 사망했으니 28세에 사망한 것이 된다.[10] 교리(校理)를 지낸 은진 송씨 송규원(宋圭元)의 딸로 을해년(乙亥; 1875년)에 태어났다.[11] 출처 사진. 파일:이기붕 족보.png.[12]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수동에 있는 국일관이다. 개점 당시부터 현재까지 존속되어 온 상호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지금은 주인도 바뀌고 용도도 달라져 일반 상가 건물로 쓰인다.[13] 족보에서도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14] 이승만 본인은 가장 먼저 피난을 떠났다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도 결코 서울 시민들한테 사과하지 않았으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다른 국회의원들이 서울 시민들 보기가 미안해서 사과를 하라고 요구해도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덕이 없어서 이런 일을 겪게 했다고 해야 한단 말이냐? 나는 사과 못한다. 사과하려면 당신들이나 해라!" 라고 화를 냈다.[15]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전통적으로 양자는 본인보다 한 항렬 낮은 항렬에 해당하는 친척을 들여야 하는데, 이강석은 효령대군의 18대손이라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승만보다 두 항렬이 낮았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족보가 꼬였다는 얘기가 나왔다. 바로 아랫항렬의 친척을 양자로 들이는 예법에 따르면 이강석이 아니라 차라리 이기붕이 직접 이승만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이 예법에 맞다. 실제로 이기붕은 항렬로 보나 나이로 보나 이승만의 아들뻘이다. 물론 이기붕도 이강석처럼 장남이라 법을 어기고 양자로 들어간다는 건 이 경우에도 변함이 없다. 다만 장남이 양자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예법상의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법률상의 문제인데, 전통적으로 장남은 다른 사람의 양자로 보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장남을 양자로 보낸 경우도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16] 물론, 오늘날 기준으로도 어림도 없는 일이긴 하다.[17] 그런데 이건 단순한 악담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말이었다. 실제로 이기붕은 허약한 체질이었고 1950년대 중반부터 건강이 매우 나빠져서 아래에 서술한 것처럼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대소변도 제대로 못볼 만큼 거의 중증 장애인 수준이었다.[18] 흔히 서울에서 자유당 지지율이 바닥이라 당선이 어려워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돌지만, 정작 이기붕의 원래 선거구인 서대문 을에서는 자유당 후보인 최규남이 과반으로 당선 된 점을 미루어 볼 때, 자유당 내에서 이정재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튼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하려는 이정재를 구속시키겠다는 위협으로 출마를 포기하게 한다.[19] 의학기술의 발달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당시 기준으로 이승만보다 오래 산 국가원수를 따져보면 고구려 장수왕까지 가야 한다.[20] 참고로 이승만은 1965년에 사망했기 때문에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지 않았어도 이기붕이 대통령이 될 일은 없었다(...). 물론 대통령직에 수반되는 스트레스로 수명이 줄었을 수는 있다.[21] 이때 이기붕의 저택 냉장고에서 수박을 발견한 군중들은 더욱 거세게 들고 일어났다는 소문이 있다. 일반인들은 제철 과일도 먹기 힘든 시대인데 수박을 4월에 구해서 시원하게 두고 먹는다는 건 당시로서는 상당한 사치이기 때문이다.[22] 이때 6군단 사령관이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혁명 지지 시위 동원에 반대하다 ‘반혁명 장성 1호’로 체포되어 강제 예편당한 강영훈이었다.[23] 다만 일가족 전원이 사망한지라 이기붕 일가의 합의를 봐서 다같이 죽기로 한 건지(동반자살) 이기붕 일가는 죽을 생각이 없었는데 이강석이 일가족을 죽이고 자살한 건지(살해 후 자살)는 알 수 없다.[24] 결과론적으로 이승만이 1965년 사망했기 때문에 1960년 4선에 성공했어도 임기를 무사히 끝마쳤을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다.[25] 서대문 을[26] 전·후반기 국회의장[27] 이천군[28] 전반기 국회의장[29] 1960.4.28 사망[30] 당선인의 사망으로 인한 재선거 결정[31] 병약했던 모습이 부각되었으며 항상 느긋한 모습을 유지하지만, 박마리아가 지나치게 나서면 "계집년이 너무 나선다."라면서 다그치는 권위주의적인 모습도 보인다. 조병옥과는 사석에서 친구처럼 말놓고 지내며, 서로 내각책임제 막후 협상을 벌이는 모습도 연출되었다. 걷기조차 계속 힘들어하는 모습에 이강석이 "아버지, 정치 그만 둬, 정치를 뭐하려고 해, 죽으려고 해?"라고 따지는 모습에 "알았어, 안 할게. 응?"하면서 너털웃음을 짓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3.15 의거가 발생했을 때에는 상황 파악을 못 한 채, 기자들 앞에서 "총은 쏘라고 준 거지, 가지고 놀라고 준게 아니다."라는 실제로 했던 발언을 그대로 묘했다. 결국 4.19 혁명이 발발하자, 앓아 누운 상태에서 업혀서 제6군단으로 피신하고, 그 와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깔끔하게 사퇴를 하지 않고 사퇴 고려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하 민중의 분노를 극대화시켰다. 이승만이 하야 결심을 하자, 6군단에서도 나와 경무대로 갔고, 결국 이강석에 의해 가족이 집단 자살한다.[35] 이기붕 일가의 죽음이 곽영주에 의한 것이라는 가설 자체는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이기붕을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 곽영주가 이기붕 일가가 경무대로 왔다는 말을 듣고, "이것들 차라리 집단 자살해줬으면 좋겠네..."라는 식으로 한마디 내뱉는 것으로 표현하였다.[32]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승만 역. 최불암 이후 이승만 배역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최불암이 MBC 외의 다른 방송사 출연을 꺼렸고, 정작 MBC에서는 이승만이 나오는 작품을 자주 만들지 않게 된 탓에 권성덕의 캐스팅이 대폭 늘어난 것이다.[33] 1998년 SBS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동일 배역을 맡았다.[34] 창군 직후라 장성들 나이가 젊을 때라서 이종찬은 당시 30대였다. 물론 30대가 미혼이면 당대 기준으로는 노총각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