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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 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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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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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순흥 안씨 종문.svg
順興 安氏
순흥 안씨
}}}
관향 <colbgcolor=#fff,#191919>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시조 안자미(安子美)
중시조 안향(安珦)
파조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
집성촌 평안남도 안주군 신안주면
평안북도 용천군 내중면 수정리, 남송리, 외하면 송흥리 철산군 길성면 모봉리
정주군 갈산면 서당동
선천군 신부면 사달리
삭주군 내면 광성동
정주군 고읍면 송음리
박천군 가남면 어의동
태천군 서면 청계동
구성군 노동면 내양동, 청룡리, 동산면 양지리, 서산면 금풍리
벽동군 운면 초동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잠병리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충청남도 계룡시 엄사면 유동리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신음리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일원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 일원
황해도 연백군 화성면 송천리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광천리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단곡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전라남도 나주시 용산리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도장리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정지2리
경상남도 합천군 율곡면 낙민1리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개곡리
경상북도 상주시 공검면 중소리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이천리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인구 520,384명(2015년)
링크 순흥안씨대종회

1. 개요2. 연혁과 역사3. 여담4. 집성촌5. 유명인물
5.1. 25세 이전5.2. 26세손5.3. 27세손5.4. 28세손5.5. 29세손5.6. 30세손5.7. 31세손5.8. 32세손5.9. 33세손5.10. 항렬 불명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segye.com/20140311004106_0.jpg
[1]
순흥 안씨는 경상북도 영주시 소백산 기슭의 순흥면에 본관을 둔 안씨를 말한다. 순흥이라는 지명은 조선 초기 설치된 순흥도호부(順興都護府)에서 유래되었다. 대체로 순흥을 위시로 한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전라북도, 충청북도, 강원도, 황해도 등에 거주한다.

시조는 안자미()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로 각각 1파, 2파, 3파로 이어지게된다.

2. 연혁과 역사

고려 신종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역임하고 신호위상호군(神虎衛 護軍)에 추봉된 안자미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순흥 안씨와 관련된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경상도 영주 순흥 지역의 토착 가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순흥 안씨는 시조의 증손인 안향 이후 크게 번성했다. 안향은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 한 뒤, 교서랑(校書郞)과 감찰어사(監察御史), 상주판관(尙州判官)을 비롯한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고, 충렬왕 복위 때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가 되어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고 후진 양성에 진력하여 유학의 학풍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문하에서 백이정과 우탁을 비롯한 훌륭한 유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으로 이어졌다. 또 이색의 문하에서 권근(權近)이 나와 조선조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태두로 추앙되고 있으며, 장단의 임강서원(臨江書院)과 순흥의 소수서원, 곡성군의 회헌영당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장단 대덕산에 있고, 경기도 부곡에 안자묘가 있다.

안향의 아들 안우기는 찬성을 지냈고, 손자 안목은 정당문학을 지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안침, 안당과 안위, 안현, 안상 3형제가 유명하다.

파일:external/www.segye.com/20140311004108_0.jpg [2]

안침은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전라도 관찰사와 한성부윤, 대사헌, 경상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지돈령부사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5형제도 모두 현달하였다.

안당은 성종 때 친시문과에 급제한 뒤 중종 때 형조·공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나, 1521년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할 때 사사(賜死)되었다. 안위는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경국대전을 찬수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냈다. 또 안현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명종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안상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선조 때 거문고, 비파, 장고의 악보를 망라하여 금합자보를 발간하였다. 교서공파에서는 고려 말의 명신 안축, 안보, 안즙의 3형제가 유명하다.

안축은 충숙왕 때 원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전법판서가 되고, 충목왕 때 첨의찬성사, 춘추관감사가 되어 충렬, 충선, 충숙왕조의 실록을 편찬하였다. 안보는 공민왕 때 정당문학, 안즙은 대제학을 지냈는데, 3형제 중 안축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안축의 아들 안종원(安宗源)은 조선 개국 후 삼사영사(三司領事)에 오르고, 안종원의 아들 안경공은 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집현전 대제학이 되었다. 안경공의 아들 안순과 손자 안숭선, 안숭효도 명신으로 유명하며, 안숭선의 현손으로 안자유, 안명세 등이 뛰어났다.

하지만 순흥 안씨 집안에 멸문지화가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종 복위와 관련된 정축지변이 대표적이다. 또 기묘사화에 이은 신사무옥에서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이 처형당했으며, 을사사화 때는 안명세가 참화를 당했다. 또한 안중근, 안명근 사건으로 일제가 순흥 안씨 집안에 가한 탄압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가장 큰 화는 단종 복위 사건과 관련된 정축지변인데, 당시 순흥에 유배되어 왔던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 영월에 유배되어 있는 단종과 연계하여 복위를 꾀하려다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단종과 금성대군이 죽임을 당하고, 순흥도호부에 세거하고 있던 700명에 달하는 순흥 안씨가 멸문지화를 당하여 전국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순흥안씨대종회 홈페이지

3. 여담

지금은 많이 잊힌 이야기이긴 하지만 남평 문씨(南平 文氏)와의 혼인을 꺼렸다. 옛날 문씨 청년이 중국에 유학을 하러 가는 길에 순흥 안씨를 만나서 길동무 삼아 같이 가게 되었는데, 두 청년이 너무나 죽이 잘 맞았던지 의형제를 맺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형제니 한 집안과 같다!'라고 하여 후손들의 배우자 후보 가문을 하나 지워버린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혹시나 이런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참고.

안향의 증손으로 알려진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하는 (신)죽산 안씨가 있는데, 순흥안씨대종회 측에서는 '죽성군파'로 부르며 세계에 포함시켜 놓았다. 순흥안씨대종회에서 발간한 순흥안씨대감에도 (신)죽산안씨 출신 인물들과 관련된 내용이 있고, (신)죽산안씨 출신들의 인터넷 족보도 지원하고 있으며, 1994년 발간된 (신)죽산안씨 족보를 기반으로 등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순흥안씨 기준 세수는 (신)죽산안씨 세수에서 +6 된다. 한편 (신)죽산안씨 문중은 안중근 의사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전라남도 장흥군에 안중근 의사를 모시는 사당 해동사를 세우기도 했다.

4. 집성촌

5. 유명인물

피끝마을의 사연 때문에 순흥 안씨는 밑에 후술된 안당과 안위 정도를 제외하면 조선조의 유명 인물은 거의 손꼽히다시피 할 정도로 잘 보이지가 않는다. 그만큼 조선 시대때 얼마나 몰락했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 하지만 밑에 후술한 인물들을 보면 알겠지만 근현대에 많은 위인 및 유명인들을 배출해냈다. 밑에 나올 안중근 계열은 김구와 관련 있는데, 그 김구가 김질김자점의 방계 후손이란 점은 은근 혈압 오르기는 참 좋다라는 것도 생각하기 쉽다.

참고로 이전 판까지만 해도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도 순흥 안씨라면서 이상한 논지의 문장이 적혀 있었는데, 창빈은 안산 안씨이다. 참고로 안산 안씨는 그 세계가 분명하지 않아, 순흥 안씨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창빈 안씨 묘 탐방기

김구의 생애를 보면 유독 순흥 안씨 가문과 인연이 많았다. 안중근은 집안이 독립운동에 관여했기에 ○근 자 돌림은 안중근과 같은 항렬이요, ○생 항렬은 안중근의 아들 항렬이다.

5.1. 25세 이전

5.2. 26세손

5.3. 27세손

5.4. 28세손

5.5. 29세손

5.6. 30세손

5.7. 31세손

5.8. 32세손


5.9. 33세손

5.10. 항렬 불명


[1] 순흥 안씨 추원단 경북 영주 순흥면에 있는 순흥안씨 추원단의 모습이다. 정축지변 당시 순흥도호부에 거주하던 순흥안씨가 멸문지화를 당해 뿔뿔이 흩어졌다가 숙종 때 이르러 복권이 된 후 시조의 묘를 찾아 추원단을 세우게 되었다.[2] 안향 영정 풍기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국보 111호인 회헌 안향 영정. 안향 사후에 주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려졌다고 한다.[3] 순흥안씨 양공공파에 속한 안희정 前충남지사의 친척인 300여세대의 순흥안씨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4] 마마무 화사의 가족들이 이쪽에 살고 있다.[5] 6.25 전쟁때 미국 공군의 오폭으로 어린이 16명을 포함 주민 51명이 희생되었다.[6] 1899년 4월 18일 정읍 동학농민혁명 기해봉기가 시작된 곳.[7] 순흥안씨 양공공파(부재학공파) 일원들만 살던 마을이었으나, 산업화 이후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은 일부 제외 대부분 외지인들이 거주하고 있다.[8] 순흥안씨 찬성공파의 집성촌이었다.[9] 순흥안씨 찬성공파의 집성촌이었다.[10] 안중근 일가는 무력독립투쟁 노선이고 안창호는 교육을 통한 민중계몽-독립 지향자라 우연히 만날 수는 있어도 독립활동을 같이 한 적은 없다.[11] 원래 이름은 ○鎬(쇠북 호) 자 항렬을 따라 '安昌'였다가 浩(넓을 호) 자로 개명한 것이다.[12] 양공공파는 부제학공파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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