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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티토-스탈린 결렬, 유고슬라비아 전쟁(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 |||||
외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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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쟁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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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전쟁 Yugoslav Wars | |
기간 | |
1991년 3월 31일 ~ 2001년 11월 12일 | |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1991년 6월 27일 ~ 1991년 7월 7일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1991년 3월 31일 ~ 1995년 11월 12일 보스니아 전쟁 1992년 4월 6일 ~ 1995년 12월 14일 코소보 전쟁 1998년 2월 28일 ~ 1999년 6월 11일 프레셰보 계곡 전쟁 1999년 6월 12일 ~ 2001년 6월 1일 북마케도니아 반란[1] 2001년 1월 22일 ~ 2001년 11월 12일 | |
장소 |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북마케도니아 | |
원인 | |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후 민족주의의 대두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대립 세르비아 내부에서 일어난 통나무 혁명 대알바니아주의와 알바니아 민족주의 | |
결과 | |
독립 세력의 승리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코소보를 둘러싼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갈등 발생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해체 | |
영향 | |
신 유고 연방으로 재편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1992.4)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스릅스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1992~1995) [[틀:깃발| ]][[틀:깃발|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1992.4~)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서부 보스니아 자치주(1993~1995) [[틀:깃발| ]][[틀:깃발| ]][[세르비아 의용방위군| ]](1992~1996) | [[슬로베니아| ]][[틀:국기| ]][[틀:국기| ]] [[크로아티아| ]][[틀:국기| ]][[틀:국기| ]]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1992~199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1992, 1994~1995) [[틀:깃발| ]][[틀:깃발| ]][[북대서양 조약 기구| ]](1995, 1999) [[코소바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코소보 해방군| ]](1998~1999) 프레셰보 메드베자 부야노바츠 해방군(1999-2001) [[알바니아| ]][[틀:국기| ]][[틀:국기| ]] 알바니아 국민군 마케도니아 민족해방군 |
[[북마케도니아| ]][[틀:국기| ]][[틀:국기| ]][2](2001) | |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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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 보리스 트라지코프스키|
피해 규모 | |
13~14만 명 사망 난민 600만 명 발생 |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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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별 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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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1990년대 내내 일어난 이 전쟁으로 유고슬라비아는 서서히 해체되었다.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단순 전쟁이 아닌 내전으로 규정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내전은 일반 전쟁과 달리 단일 국가의 내부에서 정치권력을 탈취하기 위해서 싸우는 무력투쟁을 말한다. 하지만 전쟁 당사국이 완전히 별개의 국민국가로 찢어지고,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도 '유고슬라브인'이라는 단일민족 정체성이 희박했기에[3] 내전으로 정의할 수 없다. 위키백과의 "Yugoslav Wars(한국어판: 유고슬라비아 전쟁)"라는 표제어가 대표적인 사례다.
일각에서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벌어진 코소보 전쟁을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는 역사학자도 있다. 이들의 이론에 의하면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1999년이 아닌 1995년의 보스니아 전쟁을 끝으로 1995년 12월에 종전했다고 하나, 아직 역사학계에서는 비주류이다. 이와 비슷한 이론으로는 1991년 3월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을 근거로 1991년 3월을 전쟁 개전 시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2. 역사적 배경
2.1. 중세
2.1.1. 남슬라브족의 정착 및 교회의 분열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원래 고대 로마 시대에는 일리리아라고 불렸다. 게르만족이 서유럽으로 이동한 이후 움직이기 시작한 슬라브족은 7세기에 이 일대를 다스리던 동로마 제국이 랑고바르드 왕국, 사산 왕조, 아바르 칸국, 이슬람 제국 등 외부 세력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정신없는 사이 일리리아에 눌러앉았다. 슬라브족은 계속 동로마와 연합 또는 침략을 반복해 가며 세력을 확장했고, 원래의 일리리아계 로마인들은 동화하거나 쫓겨나서 이곳은 완전히 슬라브족의 차지가 되었다.이곳에 정착한 슬라브족은 남슬라브족이다.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의 서슬라브족이나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동슬라브족과는 구별되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중세에 기독교는 가톨릭-정교회로 갈라지게 되었고, 이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의 서쪽은 가톨릭,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의 동쪽은 정교회의 영역이 되면서 남슬라브족의 종교도 동서에 따라 정교회와 가톨릭으로 갈라졌다.
2.1.2. 오스만 제국의 지배: 기독교-이슬람교 갈등
이후 14세기부터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시작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한 지역 전체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사실 민족적 갈등의 뿌리는 오스만 제국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고, 가톨릭-정교회가 갈라진 동서방 기독교 분열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오스만 이전의 가톨릭-정교회 갈등은 크지 않았던데 반해 오스만 제국 시절 때 종교적 갈등이 고착화되었고, 오스만이 이런 종교적 갈등을 이용하여 이교도 피지배계층인 남슬라브족을 교묘하게 분리 지배했다. 여기에 남슬라브족 일부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이들은 이슬람교가 우선인 오스만 제국 내에서 우대를 받고 경제적, 정치적 우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민족 갈등을 더더욱 부채질하는 원인이 되었다.오스만 시절 이 지역의 민족 갈등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크로아티아인이나 보슈냐크인이나 세르비아인이나 서로의 종교 축일에 서로를 방문해 축하하며 함께 축제음식을 나누고 각 민족간의 통혼도 매우 활발했다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발칸 지역에서는 종교에 대해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 교회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로아티아 여성이 이슬람으로 (형식적으로) 개종하고 남편이 이교도라는 이유로 이슬람 법정을 찾아가 이혼판결을 받아내는 사례를 비롯해, 오스만 제국이 비무슬림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거부하기 위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무슬림이다!"라며 관리들을 쫓아냈다. 그러자 "그렇다면 당신들은 무슬림이니 군대를 가라!"라며 다시 징집관을 보내오자 "우리는 기독교인이다! 니들 행정문서 잘못된 거 아니냐?"하고 거부하는 알바니아 마을 이야기도 그렇고 민족주의 대두 이전의 이 지역 사람들은 가톨릭과 정교회와 이슬람을 필요에 따라 나름대로 잘 써먹고 있었다.
정교회의 성인인 성 일리아스 아르두니스(Άγιος Ηλίας ο Αρδούνης)의 일화가 전해지는데, 젊은 시절에는 세금 좀 덜 내겠다는 요량으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으로 (형식적으로) 개종했다가, 아토스산을 여행하고 나서 그곳에서 신성한 체험을 하고 수도생활을 8년 동안 하고 고향인 칼라마타로 돌아온 그에게 시장에서 한 튀르크 군인이, "이보게 무스타파(일리아스의 무슬림 이름), 자네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다 왔는가?"라고 묻자, "나는 더이상 무슬림 무스타파가 아니라 정교인 일리아스라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도시의 관리들이 그를 배교혐의로 고발해 화형에 처했는데 화형대의 불길에도 불구하고 전혀 몸이 타지 않아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고, 죽은 일리아스의 몸이 밤이 되도록 밝게 빛나는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깜짝 놀라 이슬람에서 다시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당시엔 워낙 이슬람인 척 하는 기독교인이 너무 많아서 신성시된 경우다.
위의 일화에서 보듯이 편의에 따라 종교를 갖는 이야기도 있지만, 결국 화형으로 끝나는 것에서 보듯이 종교갈등이나 반목이 없는 것은 아니었고 이교도에 대한 정책도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오스만 제국은 정복한 지역에 대해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이슬람 우대 정책을 펼치고 그에 따라 편의를 위해 이전에 이 지역에서 이단교파인 보고밀파를 믿던 남슬라브인과 알바니아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급속히 이슬람으로 갈아탄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리고 지배 민족인 튀르크인은 본진 아나톨리아와 수도 코스탄티니예 근방인 그리스와 불가리아 일대에서 주로 살았지 유고슬라비아 일대까지 대거 이주하지는 않았고, 오스만 제국의 행정력은 튀르크인보다는 무슬림으로 개종한 남슬라브족을 통해서 투사되었다. 그리하여 오스만은 이이제이로 남슬라브족을 지배했고, 지배자 오스만에 민족적 반감은 이후 남슬라브족 이슬람교도들을 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스만 치하에서 기존에 있었던 정교회-가톨릭 갈등이 증폭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이슬람교 갈등이 생겨난 것이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는 제국 내 백성들을 각자 믿는 종교에 따라 공동체(Millet)을 형성하게 하고, 토착 종교를 기반으로 통치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애매한 구분만 존재했던 이 지역에 가톨릭 지역, 정교회 지역, 이슬람 지역 등으로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지역의 슬라브족은 대체로 정교회-가톨릭-이슬람의 신앙에 따라 민족도 갈려서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인,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인,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종교를 제외하면 언어나 혈통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2.1.3.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배: 다민족 국가
크로아티아는 1102년 헝가리 왕국 국왕 칼만이 크로아티아 왕국 국왕으로 인정받은 이래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이루었고, 슬로베니아는 14세기 중반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오스트리아 공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4]1526년 모하치 전투로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자 러요시 2세의 처남이자 매부였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3국에서 각각 국왕으로 선출되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모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헝가리와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슬라보니아 일대, 에르데이 공국을 회복하여 헝가리 왕국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도중 터졌던 라코치 페렌츠 2세의 봉기 이후 헝가리인을 경계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루마니아인 농노가 다수 거주하던 에르데이 공국을 기존처럼 헝가리 왕국에 병합시키지 않고 독일인(오스트리아인) 총독을 보내 통치하였으며 황폐화된 헝가리 남부에 다수의 슬라브인을 이주시켜 군정 지대[5]로 활용하며 헝가리인을 견제하였다. 나폴레옹 전쟁을 거쳐 빈 회의를 통해 달마티아 지역까지 얻은 오스트리아 제국은 크로아티아 전역까지 회복하였으나 민족주의 촉발로 인한 1848년 혁명과 헝가리 독립 운동으로 해체 직전까지 몰렸고, 러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위기를 수습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신 절대주의를 추구하며 반동 정책을 고수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연달은 패전으로 다시 위기에 몰렸고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에서 2번째로 인구가 많은 헝가리인과의 대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형성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300여 년 만에 주권을 찾은 헝가리인은 크로아티아인을 포함한 세르비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우크라이나인, 루신인 등 소수민족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여 헝가리화하려 시도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무마로 크로아티아인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이라는 자치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다른 민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의 약화로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루마니아 왕국과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 왕국이 수립되면서 헝가리 치하에서 탄압받은 루마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2.2. 19세기 ~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19세기에 등장한 범슬라브주의는 피지배 상태에 처한 남슬라브인을 각성시키고 새로운 슬라브 민족 공동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동기를 부여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모든 남슬라브인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범슬라브주의는 러시아 제국을 중심으로 그 사상이 발전되어 정교회와 키릴 문자 이외의 다른 슬라브 하위문화를 부정하는, 러시아 동화주의의 성격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정교회를 믿던 세르비아인은 범슬라브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발칸반도에서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우군으로 성장하였다.한편 가톨릭이 주류 종교인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크로아티아인은 이미 합스부르크 왕조 치하에서 충분한 자치를 누리고 있었고, 슬로베니아인은 크로아티아처럼 국가 단위 정치체제를 형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유지하는데 별 무리 없이 잘 살고 있었다. 이들은 오히려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갖은 탄압을 당하는 폴란드인의 사례를 예로 들며 러시아가 주도하는 범슬라브주의의 확산을 경계하였다. 이후 이들의 주장은 19세기의 급격한 국제 정세 속에서 슬라브인이 고유의 문화를 유지하면서 존속할 방법은 합스부르크 왕조라는 든든한 배경 아래에서 자기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오스트로슬라브주의(Austroslavismus)로 확장되었다. 본래 오스트로슬라브주의는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를 비롯한 보헤미아 왕국의 체코인 주도하에서 형성되었으며 그래서 체코인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다.[6]
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는 합스부르크 왕조에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동시에, 헝가리 왕국의 헝가리인처럼 동등한 주권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지닌 양면적인 성격의 정치 사상이였다. 제국의 남슬라브인은 보헤미아 왕국의 체코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폴란드인과 연대하여 정치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오스트리아라는 체제 안에서는 당연히 지배민족인 독일계 오스트리아인과, 대타협 이후 제국 내부에서 상당한 수준의 입지를 가지게 된 헝가리인의 견제에 의해 이들의 정치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고, 제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같은, 제국 정계의 주류와는 거리가 있던 사람들에게만 받아들여지는 정도로 그쳤다.[7]
전체적인 구도로 정리하자면, 19세기 발칸의 슬라브족 문제는 크로아티아를 소유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세르비아를 영향력 하에 둔 러시아 제국, 보스니아를 소유한 오스만 제국의 삼파전 구도로 진행되다가 러시아-튀르크 전쟁과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상실하고, 산 스테파노 조약의 대안으로 선택된 베를린 회의를 통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8]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일대일 구도로 전환되었다.
발칸 문제로 인하여 크림 전쟁이후 내리막길을 걷던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이는 머지않아 제1차 세계 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당시 국제적 긴장 상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발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작금(昨今)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야.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거야.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지.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이 그 폭발을 일으킬 거야.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 발언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현실이 되었다.-오토 폰 비스마르크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전체적으로는 강대국들의 이념인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립하에서 남슬라브 민족 분파들의 종교 갈등은 수면 하로 수그러들었다.
2.3. 제1, 2차 세계대전기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발칸반도의 남슬라브족은 통일된 국가주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 독립한 세르비아 왕국과 몬테네그로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산하 국가였던 크로아티아인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 달마티아 왕국, 슬로베니아인의 크라인 공국, 보슈냐크인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유럽 영토였던 마케도니아가 여기에 해당되었다.세르비아인 주도로 남슬라브 민족주의가 시작되었다는 통념과 달리 남슬라브 민족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는 운동은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 크로아티아인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헝가리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것에 위협을 느낀 크로아티아인은 1835년부터 일리리아 운동(Ilirski pokret)을 펼쳐 크로아티아 민족 부흥(Hrvatski narodni preporod)을 이끌었고 여기에는 슬로베니아인, 세르비아인 등 남슬라브 민족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내용이 있어 실제로 세르보크로아트어의 개념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 위기에 몰리자 크로아티아인 역시 독립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문제는 크로아티아 단독으로 독립 국가를 수립한다면 이웃한 이탈리아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 전쟁 당시 얻지 못한 이탈리아인 거주 지역인 이스트리아 반도와 달마티아를 노릴 것이 자명하여 단독으로 이탈리아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긴 크로아티아인은 슬로베니아인과 연대하여 세르비아인이라는 차악을 선택했고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국이 수립되었다.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은 몬테네그로도 합병하면서 1929년 국호를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오랜 외세의 지배를 거치면서 서로 다른 종교와 역사적 배경을 가지게 된 발칸의 남슬라브족들은 이질적인 다른 민족으로 분화된 지 오래였다. 복잡한 다민족 국가답게 타 민족과 종교 집단 간의 대립,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 대립, 민주주의와 파시즘의 충돌이 매번 지속되어 사회 혼란이 심화되었다. 특히 세르비아는 대 세르비아(Велика Србија)를 주장하기는 했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 세르비아인의 관심 지역은 북마케도니아였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기의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합류에 대해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대 세르비아 주의는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을 합쳐야 한다는 범슬라브주의로 대체되었고 단순히 생존을 위해 합류한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이 주도하는 남슬라브 국가를 만들겠다는 세르비아인의 동상이몽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불러왔다.
이에 알렉산다르 1세 당시 유고슬라비아 국왕은 계엄령을 선포해 입헌군주제에서 전제군주제로 전환하고 타민족의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강압적 독재 정치를 시도하여 유고슬라비아의 혼란을 잠재우려 했으나, 결국 1934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우스타샤와 결탁한 불가리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한편 이러한 혼란 속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결국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불가리아 왕국, 그리고 그들의 하수인들인 크로아티아 우스타샤의 협공을 받아 국왕 페타르 2세를 비롯한 왕실 인사들이 영국으로 달아나고 추축국에게 점령당하면서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 여러 괴뢰국으로 쪼개져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독일군과 나치의 하수인들이었던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에 항거하는 체트니크, 파르티잔 등의 무장 게릴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 중 요시프 브로즈 티토, 밀로반 질라스 등 공산계 인사들이 이끄는 파르티잔이 강력한 주도권을 잡아 세를 불려 결국 소련의 도움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1944년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킴과 동시에 이듬해인 1945년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2.4.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집권
전쟁이 끝나자 유고의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파르티잔은 군주제 폐지와 망명 중인 페타르 2세 국왕의 군주 지위 박탈 등을 선언하고, 같은 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즉 유고슬라비아 연방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 그리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연방의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선출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공산 독재 국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그러나 티토는 유고의 공산화 과정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소련과 갈등을 빚었고, 결국 1948년 소련의 독재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유고의 코민포름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며 공산권에서 축출했다. 코민포름에서의 축출 이후 티토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체제 건설에 집중했는데,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으로 대표되는 냉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 중립, 비동맹을 표방한 것이 대표적이다. 외교적으로 인도, 이집트, 인도네시아 등 제3세계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는 등 이 시기 유고는 티토의 지도하에 자주적인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티토는 1953년에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티토는 복잡한 민족과 종교들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적으로 통치해,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에서 잘 사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공산, 자본 진영 어느 한쪽의 눈치도 안 보고 공산권의 맹주였던 소련의 MiG-21 전투기, 프랑스의 아에로스파시알 가젤 경공격 헬리콥터 같은 최신예 무기들을 사오고 외교적으로도 안정되는 등 큰 번영기를 누렸다. 문화산업도 크게 발달하여 락밴드나 아이돌도 많이 배출했고 올림픽, 월드컵과 같은 다양한 국제 대회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가진 문제들(인종, 지역별 빈부 격차, 종교)이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다. 티토 생전에는 티토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리더십으로 이 문제가 수면아래에 있었지만, 그 시절에도 간간히 민족주의자들이 티토의 형제애와 일치 정측에 불만을 표출하다가 감옥에 가거나 벌금형에 처해지는 필화사건이 여러번 있었고, 결국 티토 사후 이후에 이 문제들이 터지기 시작한다.
3. 연방의 붕괴
유고슬라비아 변화(1989~91) |
3.1. 전쟁의 발단 -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의 연방 탈퇴
티토의 장례식 |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는 6개 공화국의 대표들이 위원회를 구성하여 각 공화국 출신들이 임기 1년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집단 지도 체제로 개헌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들면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도브리카 코시치 등 세르비아계 출신 정치인들의 공작 아래 집단 지도체제는 유명무실화된 채 세르비아의 연방 내 권력 독점과 중앙 집권화로 흘러갔고, 결국 연방내 구성국들 중 국력이 가장 강성했던 세르비아는 연방 내 다른 공화국들을 차별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1991년 크로아티아 대표인 스테판 메시치가 연방의 다음 대통령을 맡았지만 연방의 실권은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이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쥐고 있었기에 그냥 바지사장에 불과했다.[9][10]
그러나 새 정부의 경제 정책은 오일쇼크로 인한 성장저하와 1982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인한 외채 폭증으로 일어난 경기침체, 그리고 물가 상승에 무기력했다. 그나마 외채 문제는 제3세계의 지도국이라는 타이틀 덕택에 상당부분 탕감을 받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200억 달러가 넘는 외채를 끌어안고 있었으며 매년 2배가 넘는 물가상승과 10% 이상의 실업률을 기록하며 경제성장이 정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외채 위기는 또한 1950~70년대 당시에 드러나지 않았던 경제의 지역별 불균형 발전문제를 쟁점화했다.[11] 그리고 이전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던 티토 격하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고 지식인들은 물론 각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민족주의를 내세워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거나 민족주의자들이 지도자로 등극하게 되면서 1980년대 후반부터 각 공화국 간의 갈등으로 정치적인 혼란을 겪기 시작했다.
물론 매년 수백만 명 가량의 해외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유고슬라비아 곳곳으로 놀러와 휴양을 즐기거나 올림픽을 열거나 전쟁 시작 1년 전인 1990년에는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를 개최하는 등 겉보기에는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민족주의와 지역이기주의로 점점 분열되어 가고 있었고, TV방송과 신문을 비롯한 매스미디어도 민족주의자들의 차지가 되는 바람에 상대 공화국과 자치주에 경제위기의 책임을 몰면서 국론분열에 일조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동유럽의 공산 독재 정권이 연쇄적으로 붕괴되기 시작하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유고슬라비아도 대세에 따라 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가 슬로베니아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탈퇴로 붕괴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분열에 의한 붕괴는 민족 간의 갈등 해소에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는데 우선 당시에 막 세르비아 공산당 서기장 및 세르비아 대통령으로 집권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부터가 시대상을 이용해서 코소보와 몬테네그로, 보이보디나 공산당 서기장 자리를 친 밀로셰비치 인사로 채웠으며 이에 대응하여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민족주의 열풍이 강화되었다. 이후 1990년 12월 23일의 선거에서 각 공화국은 민족주의를 앞세운 정당들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중심으로 각 구성국은 지역 경찰력으로 위장한 군 병력 창설 및 독자적 외교 행보를 하면서 연방정부의 대표성은 급속히 무너져 갔다. 즉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91년 6월 25일에 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각각 슬로베니아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선포하며 연방에서 탈퇴하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 연방 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을 격렬하게 비난하였고, 이에 따라 세르비아 주도의 연방정부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진압하기 위해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병력을 파견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전쟁 상태로 돌입했다.
3.2. 1990년 통나무 혁명
통나무 혁명(Balvan revolucija / Балван револуција)은 1990년 9월 29일부터 10월 25일까지 벌어진 세르비아인들의 대 크로아티아 분리주의 봉기를 말한다. 현재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시작을 사실상 이 사건으로 보는 추세이다.1990년 4월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민주 선거가 치러지고 민족주의 정당이 압승하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들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의 차별을 피해서 1990년 중반에 크로아티아 내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크닌스카크라이나(Kninska Krajina) 지방으로 몰려들었고, 1990년 8월이 되자 크로아티아 영토의 1/3에 해당하는 크닌스카크라이나(이하 크라이나) 지방에서는 세르비아인 인구 비중이 70%를 넘어서며 절대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은 다 합쳐 봐야 40만 명 정도로, 500만 명이 넘은 크로아티아인 전체의 8%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크닌스카크라이나 내에도 약 10만여 명의 크로아티아인이 남아있었다.
그 상황에서 1990년 8월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공화국[12] 대통령은 크로아티아 공화국 헌법을 제정하면서 세르비아인을 소수민족으로 규정[13]하고 "크로아티아 정부에 충성 맹세를 하지 않을 경우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공무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누가 봐도 투지만의 세르비아인 소수민족 규정은 크라이나 지방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세르비아인을 겨냥한 조치들임이 명백해 보였다.
1990년 8월 크닌스카크라이나 지방의 중심지 크닌[14]의 시장으로 뽑힌 밀란 바비치[15]는 크로아티아 헌법의 부당성을 역설하며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인들에게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크로아티아로부터 떨어져나와 독자적인 길을 가자"고 봉기를 촉구하였다. 밀란 바비치는 크라이나 지방에 세르비아 크라이나 자치주, 즉 SAO 크라이나 성립을 선포하였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크라이나의 봉기를 비난하며 경찰력(군병력)을 동원해 진압할 것을 천명하였고,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투지만이 세르비아인에 대한 탄압을 가할 경우 개입하겠다고 경고하였다.
SAO 크라이나 형성을 위해 세르비아인들이 "비폭력적인 수단" 중 선택한 방법이 바로 통나무였다. 당시 세르비아인들은 무장이 거의 없었기에 크닌 일대에서 일단 먼저 통나무를 깔아서 크로아티아와의 국경선을 만들려고 했다. 크로아티아군(당시 크로아티아 자치경찰)이 크닌 일대에 통나무를 쌓는 세르비아인을 제지하려 하자 세르비아인들은 거세게 반발했고, 1990년 10월 1일 크닌에서 벌어진 세르비아인들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경찰이 실탄을 발포하면서 통나무 혁명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했다. 세르비아계 방송(RTS)이나 세르비아인 신문에서는 이 사태를 대서특필하였다.
1990년 10월 4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밀란 바비치 크닌 시장을 통해 크라이나 지방의 세르비아인들에게 총기를 지급하기 시작하면서 비폭력 투쟁은 유혈사태로 번졌고, 크닌 일대에서 벌어진 유혈사태는 곧 크라이나 지방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0월 25일 크로아티아 경찰이 크라이나 내에서 세르비아인 진압을 포기하면서 크로아티아-크라이나 통나무 국경선은 정말로 국경선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통나무 혁명 사건이라고 한다. 크로아티아인들은 현대사 최악의 치욕이라고 느낀다고 한다.
이후 1991년 6월 25일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을 탈퇴하자 통나무 혁명을 통해 사실상 분리가 되어버린 크라이나 지방은 크로아티아에서의 분리독립을 선언하였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아 1991년 3월 파크라츠 충돌이 벌어져 크라이나 지방처럼 크로아티아에서 독립을 선언한 SAO(세르비아 자치주) 서슬라보니아, SAO 동슬라보니아(부코바르 일대)와 통합, 1991년 12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건국하게 된다.
1995년 8월 8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을 크로아티아가 멸망시킬 때까지 이 일대에서 살던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오히려 역으로 차별받거나 제노사이드를 당하고, 아예 크로아티아 본국으로 추방되기도 했다.
4. 전쟁
유고슬라비아 전쟁 관련 사진자료 | |
열흘 간에 걸친 교전 끝에 슬로베니아에서 철수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소속 T-55 전차, 1991년 7월 7일 | '폭풍 작전' 당시 아드리아 해 해변에서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군에게 포격을 가하는 크로아티아군, 1995년 8월 5일 |
로주나돌리나의 유고슬라비아-이탈리아 국경 초소에서 유고슬라비아군의 T-55 전차가 슬로베니아군의 대전차 미사일에 반파된 모습. | 포격으로 불타오르는 스트라둔의 두브로브니크 성벽 |
부코바르 전투로 인해 잔해로 덮인 부코바르의 모습 |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막사를 점령한 크로아티아군의 T-55 전차 |
4.1.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열흘 전쟁)
자세한 내용은 슬로베니아 독립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4.2.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자세한 내용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4.3. 보스니아 전쟁
자세한 내용은 보스니아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1992년 4월 6일 ~ 1995년 12월 14일
연방의 일부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보스니아가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을 선언하자 보스니아 내의 세르비아인들이 역으로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하고 세르비아를 끌어들이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역시 세르비아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크로아티아를 끌어들임으로써 전쟁이 격화되었다. 세 민족과 두 나라, 미국과 나토, 러시아가 모두 참전한 국제전이기도 했다.
5.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또 다른 불씨 - 코소보 전쟁
자세한 내용은 코소보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1998년 2월 28일 ~ 1999년 6월 11일
코소보 또한 유고슬라비아 해체의 초기부터 코소바 공화국이라는 독립국을 선언하고 코소보 해방군이라는 민병대가 유고슬라비아군과 교전하였으나 자력으로 유고슬라비아군을 몰아내는데에 실패한다.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코소보에서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학살을 자행하자 NATO의 개입으로 확전된 전쟁이다.
6. 프레셰보 계곡의 반란
코소보에 인접한 프레셰보 계곡 지도#프레셰보&메드베자&부야노바츠의 알바니아계가 코소보의 사실상 독립을 보고 고무돼서 일으킨 대규모 군사충돌이었다. 1999년 ~ 2001년까지 이어졌으나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이 진압했다. 프레셰보의 잔존세력은 코소보나 북마케도니아로 피신해서 마케도니아 반란에 연루되었다.
7. 2001년 마케도니아 반란
2001년 1월 22일 ~ 11월 12일2001년 마케도니아 반란 또는 코소보-마케도니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1998년-1999년 코소보 전쟁 과정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 연방 대통령의 알바니아인 학살로 인해 코소보 거주 알바니아인 중 36만 여명이 북마케도니아(당시 마케도니아)에 난민으로 정착해 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는 나라 사정이 열악해서 전 국민의 20%에 달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16]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 당연히 북마케도니아에 살고 있는 알바니아 난민들은 생활이 열악해져갔고, 북마케도니아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다.
코소보 전쟁이 마무리되어 코소보가 사실상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하자, 코소보는 북마케도니아 북부 지역에 살고 있는 알바니아인들까지 규합하여 영토를 늘리려 했다. 그래서 1999년부터 북마케도니아 내부에서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 간 충돌이 커졌고, 알바니아인들은 이참에 아예 분리주의를 꿈꾸게 된다.
그래서 1999년 11월 북마케도니아 거주 알바니아인들은 민족해방군(National Liberation Army)이라는 이름의 단체를 설립하고 2001년 1월 22일 알바니아인 난민 거주지역을 코소보와 합병하겠다며 전쟁을 일으켰다. 알바니아와 코소보는 당연히 이를 지원했고, 북마케도니아 내부에서 테러와 게릴라전을 병행하면서 북마케도니아 정부군을 괴롭혔다.
북마케도니아 정부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처럼 뭘 테러했다고 인종 전체를 홀로코스트시켜버리는 미친 놈들은 아니었기에 대처가 지지부진했고, 알바니아인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이 하는 차별을 구실로 점점 더 세력을 불렸다. 그래서 2001년 내내 북마케도니아 일대에서는 정부군과 코소보 민족해방군 간 전투가 지속됐고 사상자도 급격히 늘어났다. 2001년 7월이 되자 코소보(알바니아) 민족해방군은 마케도니아 영토의 15%를 차지하는 거대 세력이 되어버렸고, 북마케도니아 정부군 만으로는 이들을 진압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2001년 7월 26일 수도 스코페 일대[17]를 알바니아 민족해방군이 포격하는 사태가 빚어지면서 이 사태가 국제사회의 이슈로 급부상하고 말았다.
결국 마케도니아 정부는 2001년 8월 NATO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NATO는 마케도니아 사태에 개입하여 무력 사용을 자제시키고 협상장에 민족해방군, 알바니아 정부, 마케도니아 정부를 배석시켰다. NATO는 알바니아한테 북마케도니아 거주 알바니아인들을 알바니아가 수용할 것을 압박했다. 그러나 알바니아 역시 나라에 여력이 없었기에 수용을 거부하여 협상이 길어졌고, 결국 교전이 재개되었다.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가 터지자 상황이 반전되었다. 알바니아(코소보) 민족해방군은 자신들이 9.11 테러 응징 과정에서 찍혀서[18] 조지 워커 부시가 이끄는 미국에게 얻어맞을까봐 고개를 먼저 숙이게 됐다. 결국 2001년 10월 알바니아는 36만 명의 마케도니아 거주 알바니아인 중 25만 명을 코소보 본국 송환과 나누는 조건으로 난민을 인수할 것에 동의했고, 나머지 11만 명은 북마케도니아에 잔류키로 했다. 대신 잔류 알바니아인에게는 마케도니아 국적을 부여하고, 마케도니아 정치권에 진출할 수 있게 이익을 보장하는 것으로 타협이 났다.
이런 합의가 도출되자 서서히 코소보 민족해방군이 무장을 해제했고, 11월 12일 공식적인 종전이 발효되어 마케도니아 사태도 끝을 맺었다.
그러나 2021년 지금도 북마케도니아 내부에 거주하는 알바니아인들 중에는 분리주의를 꿈꾸는 세력이 상당수 남아 있다.
8. 후일담 - 끝나지 않은 전쟁
국제전으로 번진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의 전쟁사적 의의가 있다면, '공군만으로 승리한 전쟁'이라는 점일 것이다. 물론, 미국과 NATO의 압도적인 힘에도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고, 앞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외교적 압박이 동원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정치 외교적 압박은 여느 전쟁에서도 늘 있는 문제라 공군만으로 승리했다는 표현에 크게 무리는 없다. 다만 풍선 위장 등을 사용한 세르비아는 항복 후 '모두 파괴되었다고 보고된' 전차 수백대를 끌고 후퇴하며 충격을 안겨주었다. 잘 위장, 엄폐된 목표에 대해서 공군의 무력함을 알려주는 사례다.그리고 새로운 정밀탄약 JDAM의 등장 역시 의미가 있다.
베트남 전쟁 중반에 등장해 1990년대 초반 걸프 전쟁에서 꽃을 피운 LGB(레이저 유도탄)는 중동 전선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LGB의 유도 레이저가 악천후, 연기, 습도 등에 상당히 취약해서 날씨가 나쁘거나 연기 등이 심한 지역에서는 유도 성능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것이다. 결국 미군은 관성 항법 장치와 위성 항법 장치(GPS)를 한데 묶은 유도장치로 탄약을 목표로 조종하는 JDAM을 개발해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했다. 최초의 실전 투입인 코소보 사태에서는 B-2 폭격기만이 이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보편화되어 JDAM이 없는 미군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새로운 기술적 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NATO군을 속인 유고슬라비아군의 기만전술 및 장비은폐술의 향상도 의의가 있다. 고가의 유도장비를 허접한 구조물로 속여낸 기만-은폐술은 지금도 여러 나라에서 더욱 발전했고, 북한도 코소보 사태 종전 후 현지에 무관을 파견해 정보를 습득했다고 한다. 참호 파놨다가 무진장 얻어맞은 걸프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또한 '지상군의 아웃소싱' 경향이 드러난 것도 이 전쟁이 최초였다. 미국 등 서방국들은 공군과 같은 첨단 장비 위주로 작전을 수행하고, 지상군은 가급적 쓸만한 무장세력을 앞세우는 방식으로 1999년 코소보에서는 코소보 해방군(10,000 ~ 20,000명 참전, 1,700~4,000명 사망)이, 2001년 아프간전에서는 북부동맹,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는 쿠르드 민병대, 2011년 리비아 내전에서는 리비아 반군이 그 역할을 했다. 첨단 전쟁 앞에서 지상군의 역할이 상당히 반감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전쟁은 지상군이 목표를 점령해야 끝나기 때문에 지상군이 전혀 없이는 전쟁이 불가능한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다만 폭격 기술의 발달과는 별도로 공군의 한계 또한 명확히 드러나게 한 전쟁이기도 하다.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두 사례 모두 공군의 대대적인 투입하에 거둔 승리인 것은 맞지만 그 세부사항을 보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 세력이 정치적 압박을 무기로 세르비아에게 전쟁을 포기하도록 만든 것에 가까웠다. 만일 세르비아가 이 모든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무작정 전쟁을 지속하기로 결의했다면 NATO 공군이 정말 효과적으로 세르비아군을 쓸어버릴 수 있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다.
실제로 NATO에서 공습을 선전한 것과는 달리 세르비아군의 중장비와 병력은 상당수가 무사히 고국으로 되돌아갔으며, 객관적인 지표로 보았을 때 NATO에서 직접 정예 지상 병력을 투입하지 않고서 공군만으로 세르비아군을 멈추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더군다나 세르비아가 동원한 것은 본격적인 정규군도 아니고 대다수가 세르비아 계열 민병대 등의 비정규군이었다는 점에서 점수가 더욱 깎일 수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공습은 지상군과 연계했을 때 최적의 효과를 내는 것이지 공군 단독으로 공습을 시행한다면 공포효과 이상의 것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결과도 될 수 있다.
물론 NATO군이 공습을 못했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고, 공군의 어쩔 수 없는 물리적인 한계로 일어난 일이었다. 가격대비 화력이 매우 좋은 육군과는 달리 공군은 한 소티당 들어가는 돈이 화력에 비해 정말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육군의 경우 목표지점에 자주포 한 대만 동원한다면 그 자주포를 이동시키는데 드는 기름값만 제하고서 수십 발의 휴행탄을 모조리 쏟아부어 박살을 낼 수 있지만, 공군의 경우에는 자주포탄 두세 개 정도 화력을 지닌 폭탄을 두어 개 떨구는 데 상당한 양의 고급 항공유가 소모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복귀 후에는 부단한 고급 정비를 필요로 한다. 전투기란 건 그냥 띄우는 것만으로도 항공유 수천만원이 날아가고, 수십 분 비행하는 데도 그만큼 들어간다. 북한이 괜히 전투기 못띄우는 게 아니다.
단독작전에서의 현대 공군의 한계를 최초로 체감해 본 것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이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겠다.
한편 코소보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전쟁의 두 핵심 당사자들과 그 정당들이 정권을 상실했다. 우선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은 1990년대 후반에 경기침체로 반감이 커지며 지지율이 떨어지던 상황에서 1999년 지병인 암으로 세상을 떴고, 이듬해인 2000년 대선과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참패하여 사회민주당에게 정권을 내주었고, 밀로셰비치도 장기화된 경제난으로 지지율이 떨어진 상태에서 치러진 200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인 코슈투니차가 결선투표 없이 과반수 득표를 확보한 선거결과를 조작해서, 결선투표를 진행하려하자 반발한 야당 지지자들이 시위를 일으켜고, 세르비아 당국에서도 시위진압을 거부하자 결국 밀로셰비치는 선거패배를 인정하고 추한 모습으로 하야했다. 이렇게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간의 극한갈등은 세르비아 사회당과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의 정권상실로 일단 수면아래로 가라앉았고,[19] 이후로 연방 붕괴 과정에서 세르비아와 함께 연방에 잔류하기를 결심했던 몬테네그로는 애초에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할 때 드러났듯 코소보의 독립 요구로 촉발된 코소보 전쟁의 영향으로 독립을 요구했다. 반면 세르비아는 2003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에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연방'으로 바꾸고, 국방, 외교를 제외한 모든 정치적 주도권을 몬테네그로에게 양보하는 등 몬테네그로의 이탈을 저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결국 몬테네그로는 2006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강행했다. 당시 몬테네그로가 세르비아로부터 분리독립을 결정한 당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국가대표팀이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 참가하고 있었고, 이들은 사전통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결국 2006년 월드컵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의 마지막 월드컵이 되었다.
또한 제3세계의 리더로 활동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깔아둔 예비군 인프라가 부정적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수만 명과 대결했을 정도로 탄탄한 예비군-민병대 자원은 독립 전쟁에서도 기능을 발휘했던 것이다.
국제적으로 보면 유고슬라비아 전쟁은 90년대 유일 초강대국이 된 미국이 맞닥뜨린 걸프전에 이은 두 번째 시험대였다. 미국의 빌 클린턴 행정부는 이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세계의 경찰"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만방에 드러냈지만, 내실이 크지 않은 성과와 여러 망신살로 반전 세력 등에게 '전쟁광'이란 비판과 국내 입지 약화도 면치 못했다. 이 전쟁은 대통령 권한에 의해 행정부 단독으로 치러진 것이었고, 당시 공화당이 우세였던 미국 의회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의회의 동의가 필수적인 지상군 투입이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오늘날 시리아 내전에서도 드러나듯 이런 문제는 정당 성향보다는 의원 개개인의 의견에 따라 갈리는 측면이 있지만, 미 상하원의 다수 의원들은 전쟁, 그것도 행정부 독단으로 치러지는 전쟁에 우호적이지 못하다.
클린턴의 개입은 뒤에 벌어지는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비하면 세르비아의 전쟁 범죄 등의 나름의 근거가 있었지만, 상대방의 전쟁범죄를 근거로 이쪽에서의 참전과 살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 초강대국이 다른 나라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은 패권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은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는 먼나라 이야기가 아닌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상황에 직결되는 문제다. 1994년 북핵문제만 해도 클린턴 행정부가 공군 폭격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전례가 있다. 당시 한국은 군대의 현대화가 제대로 안 된 상태였고 북한은 반대로 전투력이 상당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었기에 전쟁이 발발했다면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경제적인 손실도 상당했을 것이다. 미국이 북폭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이다.
2013년 시리아 사태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커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번에도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즉각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미국 내의 반대 여론은 정말 개입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라'는 일종의 '경고등' 같은 것"이란 것이란 주장으로, 요약하면 개입할 때 국내여론 걱정으로 개입하지 못하면 나중에 여론이 반대로 흘렀을 때 대통령만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 경제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결국 불개입으로 결론났다.
반대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무차별 공습과 국지전을 수행할 러시아군을 파병하고 군사장비를 지원하여 시리아 반군과 ISIS들을 토벌하며 시리아 내전을 정부군의 우세로 이끌어 튀르키예와 시리아 사이의 불화를 이용하면서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의 튀르키예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등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다시 장악하게 된다. 이것은 미국이 중동 통제를 못하게 된 오바마 대통령의 외교적 실책이 되었고,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에게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9. 전쟁범죄
8년에 걸쳐 진행된 이 전쟁은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붕괴로 이끌었다. 특히 탈냉전 과정에서 나름대로 평화적,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해체되거나 구성국들이 분리 독립된 소련이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20] 유고슬라비아는 폭력적인 전쟁과 인종 청소와 같은 잔혹한 방식으로 찢어졌다.하지만 유고슬라비아는 체코슬로바키아처럼 평화적으로 구성국들을 해체, 분리 독립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따로따로 살던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유고는 세르비아는 물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지에서 세르비아인들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고 세르비아 본국의 세르비아인들과는 별도로 오래 전부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살아오면서 주민들 대다수가 토착화된 상태였다. 오죽하면 크로아티아 본토와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거주지에 가로막혀 세르비아 본토와 월경지처럼 분리된 세르비아계 거주지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헌데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살던 세르비아계 중에는 본국인 세르비아를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다음으로 엄청나게 증오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전쟁 당시 전쟁을 피해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세르비아로 피난 온 사람들을 세르비아 정부에서 배려하기는커녕 2등 시민, 하층민 취급하며 홀대하고 차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 참여나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계 이웃을 죽이기를 거부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반역자나 스파이, 배신자, 매국노로 몰고 보슈냐크계 주민들과 함께 약탈, 강간, 학살하였다.
이 전쟁기간 동안 수많은 인권유린과 유혈학살 등 참혹한 파괴 행위가 자행되었고, 전쟁 전 서로 친구, 이웃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전쟁이 터지자 민족, 국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무기를 맞대고 서로 죽여대는 참극이 벌어지며 긴 시간 동안 연방 구성국들의 분열과 갈등을 촉진시켰다.
더욱이 연방 해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등지에 거주하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이 저지른 학살과 전쟁범죄로 인해 세르비아는 전쟁범죄국가, 폭력살인국가라는 국제적인 불명예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크로아티아도 전쟁 중에 학살 및 각종 인권 유린을 저지른 바 있다.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아예 크로아티아계를 활용해 침략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나마 전쟁에서 가해 행위를 거의 못했던(...) 보슈냐크인들도 일부 군인들이 보복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24] 현재 국제사회가 이 세 나라의 당시 군부 책임자들을 모두 처벌하는 이유가 다 있는 셈. 그리고 그 평화적으로 연방에서 독립했던 마케도니아와 몬테네그로도 연방에서 분리독립하기 이전 유고슬라비아 전쟁 초반기에 크로아티아 전쟁 당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에 속해있던 일부 마케도니아계와 몬테네그로계 인민군 장교/병사들이 세르비아계 출신 장병들과 함께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에 대한 학살 등 전쟁범죄를 직간접적으로 저지르기도 했다.
10. 전범 체포와 판결
미국 국무부가 2000년에 배포한 전범 지명수배 전단. 위에서부터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
1993년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가 설립되었다. 대표적인 '인종청소'의 전범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997년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정권을 재장악하는데 성공했으나 2000년 민중 봉기로 물러났으며 체포되어 네덜란드 헤이그로 신병인도되어 재판을 받다가 2006년 옥사하였다.[25] 하지만 2008년 이 재판소에서 45명의 세르비아인, 12명의 크로아티아인 및 4명의 보슈냐크인이 보스니아에서의 전범 재판으로 기소되는 등, 전쟁 범죄 처벌과 전쟁 재차 발발 가능성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마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생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될 것이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며,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법정 최고형이기 때문이다.
왼쪽의 변장한 카라지치, 오른쪽의 변장하지 않은 카라지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와 같은 혐의로 기소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지도자이자 전범인 라도반 카라지치 박사는 전쟁이 끝나자 재빨리 모습을 감춘 채 베오그라드에서 '드라간 다비치'라는 가명을 쓰며 대체의학 전문가로 평범하게 살아 갔다. 흰색 턱수염을 잔뜩 기르고 강연을 하기도 하고 잡지에 글도 기고했다. 그는 스스로를 영적 탐험가라 칭하며 자신의 웹 사이트에 심리학 및 에너지 분야 연구자라는 소개글을 올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지명수배 사진이 떡하니 붙어있는 마을 선술집에도 자주 드나들며 악기를 연주하며 술집 손님들을 위해 노래를 선사하기도 했지만, 결국 인터폴에 의해 2008년에 체포되었고 재판을 받고 있다.
스레브레니차를 비롯한 보스니아 전쟁에서 학살의 주도자였던 라트코 믈라디치 장군은 전쟁이 끝난 후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군 사령관 자리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세르비아군 기지 내에 있는 작은 주택에서 부인과 함께 살았다. 이 주택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공격에 대비하여 지은 안전가옥이였다. 전 유고슬라비아 국제전범재판에서 대량학살, 대량학살 공모 및 인간을 상대로 한 범죄 혐의가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교적 개방된 공간에서 염소까지 기르며 살아 갔다. 참고로 믈라디치는 자신이 기르던 염소들에 과거 보스니아에 주둔했던 UN 평화유지군 사령관의 이름을 붙여주고 키웠다(...). 그러다가 2001년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체포되어 네덜란드 헤이그 재판장에 서게 되자 자취를 감추었으나 결국 도주 16년 만인 2011년에 체포되었다.
다른 전범들의 경우 체포되거나 안 잡히기도 했는데 우선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전쟁에서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이끌고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에 대한 학살을 주도했던 고란 하지치와 밀란 루키치의 경우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르비아와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는데 우선 밀란 루키치의 경우 2005년에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었고, 하지치는 세르비아 국내에서 7년간 도피생활한 끝에 2011년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근교에서 세르비아 경찰에게 체포되어 유고전범국제재판소에 신병이 인계되었다. 한편 전쟁 초창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을 지휘하며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서 전쟁을 지휘했던 벨리코 카디예비치 전 유고슬라비아 국방장관은 크로아티아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민간인 지역 공습 등 인민군이 일으킨 전쟁범죄를 주도한 인물로 지목되어 유고슬라비아전범재판소(ICTY)의 용의자 명단에 올랐는데 1999년 코소보 전쟁 종전 이후에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 푸틴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러시아 망명생활을 이어가다 법적 처벌을 받지도 않은 채 2014년 노환으로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26] 한편 이들과는 정 반대편에 있었던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은 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전쟁 종결 이후인 1999년과 2003년에 각각 지병인 위암과 심장병으로 일찍이 사망하여 전범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한편 전쟁에서 전범 혐의로 재판을 받던 사람이 법원에서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에 크로아티아군 사령관이었던 슬로보단 프랄략(72세)이 2017년 11월 29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자 갑자기 일어나더니 “난 전범이 아니다. 선고를 거부한다.”라고 외치면서 독약을 마시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재판부가 프랄략을 황급히 병원으로 이송시켰으나 결국 사망했다.
세르비아 마피아 출신으로 보스니아 전쟁 당시 잔혹한 학살을 했던 젤리코 라즈나토비치도 있으며 2000년 경 암살 당했다. 또한 알바니아 마피아 및 지역 산적들과 짜고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범 행위를 많이 저지른 하심 사치도 있다. 하심 사치는 코소보가 사실상 독립한 후 초대 총리와 5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러나 EU 차원에서 계속된 전범조사로 인해 2020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11. 결과
이 전쟁으로 유고슬라비아는 결성 61년 만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등 총 6개의 국가들로 해체되었다. 그리고 2008년 2월에는 세르비아에 속해 있던 코소보마저도 세르비아 측의 반발을 무릅쓰고 독립했다. 그런데 다른 구유고권 국가들과 달리 코소보는 국가승인에 대한 입장이 각 나라들마다 달라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일단 세르비아는 다른 국가들의 경우 독립 인정은 가능해도 코소보 독립만큼은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27]연방 소속 국가들이 피비린내나는 전쟁을 통해 연쇄적으로 분리독립하자 연방의 주도국이던 세르비아는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시절 누렸던 발칸의 맹주국 지위를 그리스에게 넘기고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편 이 전쟁으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한 나라들은 제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경우 순조롭게 경제가 발전하여 선진국에 진입하였고 EU에도 무난하게 가입하였다. 하지만 연방 해체 과정에서 민족 간 전쟁으로 커다란 참상을 입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전쟁 없이 평화적으로 연방에서 탈퇴, 독립했지만 국가 운영을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영토와 적은 인구를 지닌 내륙의 소국이 되어버린 몬테네그로와 북마케도니아,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 선포 이후, 국제사회에서도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나라와 인정하지 않는 나라로 나뉘어져 국제연합(UN)에도 가입하지 못하고 있는 코소보 등지에서는 국내 민족 갈등과 분열, 불안정한 국가 안보, 부실한 소득분배, 높은 실업률, 미숙한 민주주의 정치와 정치/사회적으로 만연한 부정부패 등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
한편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1980년대와 1991년 이전까지만 해도 서방의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티토 사망 이후의 유고슬라비아가 민족/지역 간 갈등으로 불안정하긴 해도 각 연방내 소속국가들이 조금씩 권력 지분을 양보하고, 연방 소속국의 자치권을 크게 확대하면서까지 국가의 통합을 유지하지 않겠냐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으나, 티토 사후 유고슬라비아의 정치가 세르비아의 연방내 권력독점과 또다시 발흥한 민족주의로 인해 사실상의 중앙집권화로 변질되면서 이로 인해 다른 연방내 소속국들의 반발과 분리독립 움직임으로 전쟁이 일어나 유고 연방이 5, 6개의 소국들로 분열/해체되면서 이 의견은 사장되고 말았다.[28] 일반적으로 유럽이 가지고 있는 민족주의에 대한 위험한 인식을 유럽 내에서 마지막까지 확인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거기다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 등 각 타 구 유고권 국가들 내에서 거주하던 세르비아인들도 조상대대로 살던 곳에서 추방당하는 실향민이 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범죄로 인하여 세르비아는 유럽 및 서방권과의 통합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 전쟁으로 유고 연방이 사분오열되어 해체되면서 연방 내의 산업에도 타격을 입혔다. 가령 총기류와 자동차를 만들던 자스타바는 민수용차 부문이 전 연방에 퍼져 있던 협력업체들을 잃고 품질관리에도 악영향을 받은 것은 물론 코소보 전쟁으로 폭격당하면서 공장이 파괴되어 회복되지 못한 채 2008년에 피아트로 매각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문화산업 면에서도 유고슬라비아를 찬양하는 가사가 든 가요들을 불렀던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등 구 유고권 국가들의 가수들도 연방이 붕괴되고 각기 연방에 속해있던 자신의 모국들이 분열되면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 동안 유고 연방이 존속했을 때에는 유고슬라비아를 찬양하는 식의 노래들이 들어간 LP나 카세트 테이프 등 노래 앨범 등으로 발표했는데 1991년 이후 전쟁을 겪으며 유고 연방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자 이 지역 나라의 가수들의 커리어에도 심각한 지장이 생겨버렸다. 그래서인지 1980년대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들어간 노래를 불렀던 구 유고권 국가들의 가수들은 연방이 해체되고 자신들이 속한 나라들의 국민이 된 이후에는 다른 예전 발표곡들은 라이브나 콘서트 공연 등으로 부르면서 유고슬라비아가 들어간 자신의 곡들은 가수 인생 최악의 흑역사로 여기며 자신의 콘서트 공연에서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12. 관련 대중매체
12.1. 영화
- 언더그라운드 (Underground, 1995)
- 프리티 빌리지, 프리티 플레임 (Pretty Village, Pretty Flame, 1996): 놀랍게도 세르비아에서 만든 영화다. 그것도 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인 스릅스카 공화국에서, 단순 Remove Kebab 같은 내용이 아닌 세르비아인 시각으로 본 영화이다.
- 웰컴 투 사라예보 (Welcome To Sarajevo, 1997)
- 피스메이커 (The Peacemaker, 1997)
- 더블 스나이퍼 (Shot Through The Heart, 1998)
- 세이비어 (Savior, 1998)
- 해리슨의 꽃 (Harrison's Flowers, 2000)
- 노 맨스 랜드 (No Man's Land, 2001) : 포스터에 낚이지 말자. 국내에서 개봉될 때 코미디 영화로 속였다.
- 에너미 라인스 (Behind Enemy Lines, 2001)
- 10분 동안에 (10 Minutes, 2002)
- 비상 전투 구역 (Guerreros, 2002)
- 그르바비차 (Grbavica: The Land Of My Dreams, 2005)
- 헌팅 파티 (The Hunting Party , 2007)
- 피와 꿀의 땅에서 (In The Land Of Blood And Honey, 2011)
- 레니게이드 (Renegades, 2017)
- 크리스 더 스위스 (Chris the Swiss, 2018)
- 쿠오바디스, 아이다 (Quo Vadis, Aida?, 2021)
12.2. 서적
- 안녕 요정
-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 네 이웃을 사랑하라
- 발칸의 음모
12.3. 만화
- 안전지대 고라즈데
- 편의점 DMZ
12.4. 게임
- Falcon 4.0: AF의 발칸반도 전장이 코소보 전쟁을 다루었다.
- This War of Mine: 보스니아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증언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 Grand Theft Auto IV: 주인공인 니코 벨릭을 포함한 몇몇 등장인물이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참전자라는 설정이다.
- 테일즈 오브 리버스: 판타지 배경 게임이지만 공식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공식 컴플리트 가이드에 따르면 각본을 담당한 히라마츠 마사키가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 여행을 갔고 그 때 경험에 기반해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내용도 종족 간의 차별과 갈등을 주 소재로 삼고 있다.
- 홍콩 97: 주인공 친이 사망했을 때 나오는 사진이 유고슬라비아 전쟁 사망자의 사진을 그대로 쓴 것이다.
[1] 북마케도니아의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 전쟁이 아닌 북마케도니아 서부의 알바니아계의 반란이다.[2] 세르비아와 같은 편은 아니고, 마케도니아 반란 당시 코소보, 알바니아 반군과 싸웠다. 당시에는 마케도니아 공화국(또는 구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으며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바꾼 것은 2019년이다.[3] 유고슬라비아 건국 이래 70년 가까이 된 1981년에도 전체 인구의 고작 5.4%만이 유고슬라브인을 자칭했다. '유고슬라브인'이라는 민족 관념 자체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4] 원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가 보헤미아 왕국 국왕 오타카르 2세를 무찌르고 오스트리아 공국,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케른텐 공국, 크라인 변경백국을 회수했는데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를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넘겨주었고 케른텐과 크라인은 후손들이 단절되면 반환하는 조건으로 자신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티롤 백작 마인하르트 2세에게 양도했다. 그리고 마인하르트 2세의 후손들이 1338년을 끝으로 단절되면서 당시 오스트리아 공작이었던 루돌프 4세가 회수했고 1356년 크라인 변경백국을 크라인 공국으로 격상시켰다.[5] 이 지역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 보이보디나 자치주이다.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헝가리인이 적은 헝가리 영토였는데 오스만 제국 지배를 거치며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으로 자리매김했다.[6] 사실 체코인은 합스부르크 왕조를 절대 좋게 보지 않았지만 보헤미아 왕국이 독립해 나가봐야 프로이센 왕국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 제국의 범슬라브주의 사이에서 새우 등 터질 신세로 전락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차악을 선택한 것에 가까웠다.[7]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생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일명 삼중제국을 지지하거나 대 오스트리아 합중국을 구상할 정도로 제국의 존속에 슬라브인의 입지 향상이 필요불가결하다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었고, 사라예보 사건도 이러한 목적을 지니고 보스니아에 접근하다가 최후를 맞은 사례이다. 그렇기에 일각에서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페르디난트가 황제가 되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켰다면 오스트리아 제국의 멸망이 몇 십년 정도는 멀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8] 명목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 속했으나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것은 오스트리아 제국이었다.[9] 그 해에 크로아티아가 연방을 탈퇴하면서 메시치도 사임했다. 이후 메시치는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라뇨 투지만이 대통령 재임 중 암으로 병사하자 크로아티아의 제2대 대통령도 역임했다.[10] 티토의 노력에도 정치, 군인, 경찰, 공무원 등 사회의 각 분야에 세르비아계가 요직을 상당수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에 경제에선 슬로베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가 세르비아계보다 우위에 있었다. 정치 기득권층인 세르비아계와 경제 기득권층인 크로아티아계가 서로 대립하게 될 건 자명했다.[11] 1세계와 가장 가까이 위치한 슬로베니아는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헝가리가 바로 근처에 있다는 점을 잘 활용해 1990년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9107달러로 포르투갈을 뛰어넘어 선진국에 준하는 경제력을 자랑했던 반면에, 북마케도니아는 2354달러에 그쳐 1인당 국민소득이 1/4을 조금 넘는 수준에 그 격차도 4배에 가까웠다.[12]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90년 6월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꿔달고 1991년 6월 25일 유고 연방을 탈퇴했기에 당시까지는 크로아티아가 유고 연방 소속이었다.[13] 명목상이긴 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전쟁 내내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 마케도니아인, 보슈냐크인을 소수민족으로 두지 않고 "적어도 법적으로는" 평등하게 대해주었다. 물론 현실은 평등하게 죽여버렸지만.[14] 이후 크로아티아에서 독립을 선언했던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15] 원래는 치과의사로, 크닌 옆에 있는 작은 마을 출신이다. 1990년 세르비아 민주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인이 되었고, 이후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1991년~1992년)과 크라이나 외무장관(1993년~1995년). 마지막 총리(1995년)를 지냈다. 이후 바비치는 크라이나 내 크로아티아인들한테 학살을 지시했다는 혐의로 유고 전범으로 기소, 재판을 받아 13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심 와중에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16] 난민만 36만 명이었다. 마케도니아에는 이전부터 알바니아인들이 상당수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뺀 수치. 2021년 현재 마케도니아 거주 알바니아인들은 약 40만 명이다. 이전부터 북마케도니아에 알바니아인들이 20만 명 이상 거주했기 때문.[17] 북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는 코소보와의 접경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18] 마침 알바니아인들도 무슬림이었다.[19] 다만 2000년대 후반 이래로 세르비아 사회당은 연정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정권에 참여하고 있고, 크로아티아 민주연합도 2000년대 중반에 세를 어느정도 회복해서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과 함께 양대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정권에 복귀했다해도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나 인적자원의 손실이 위낙에 컸기때문에 1990년대만큼의 막장성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둘다 인구감소로 골머리를 앓는 나라이기도 하고.[20] 물론 마케도니아나 몬테네그로 같이 평화적으로 분리독립한 나라도 있었지만.[21] 예를 들어 1991년 9월 즈음만 해도 보슈냐크인 민족주의 지도자인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의 독립에 다소 소극적이었으며 보스니아 영내의 인민군 활동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10월 들어 입장을 뒤바꾼 것.[22]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될 때부터 암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대충 마무리된 1997년부터 암 말기가 되어서 손을 쓰지 못했다.[23] 1992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휴전 협정을 맺고 밀로셰비치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해줬는데 조건이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에 대한 크로아티아의 전쟁행위 금지였다. 투지만은 휴전협정을 어기고 지속적으로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군사 도발을 감행하고, 결국 1995년 섬광 작전(Operacija Bljesak) 및 폭풍 작전(Operacija Oluja)으로 크라이나를 최종 멸망시켰다.[24] 심지어 이들은 전쟁 당시 세르비아계가 일방적으로 학살하였다는 등의 여론조작까지 펼쳤다.[25] 본래 세르비아는 밀로셰비치 전 대통령을 헤이그의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로 보내 처벌하지 않고 세르비아 국내에서 재판, 처벌할 것을 미국과 서방 국가들에게 제안했었지만 코소보 전쟁에 무력 개입을 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강대국들과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로부터 전쟁 피해를 입었던 보스니아 등 옛 연방에서 분리독립한 주변국가들이 격렬하게 반대하거나 부정적 입장을 피력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26] 카디예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연방 군부 인사들 중 온건파로 분류되어 있었지만(실제로도 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유엔과 유럽연합의 휴전 중재안을 수용하기도 하고 슬로베니아 전쟁 발발 초기에는 슬로베니아에 대한 무력 진압 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등 다소 실용적인 면모도 보였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수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던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27] 실제로 세르비아에선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는 상주 대사관이 각각 있는데 코소보만은 대사관이 없다. 하지만, 실제 세르비아가 주장하는 역사적 정당성과는 달리 정작 민족과 종교는 세르비아계가 고작 10%뿐이라 지배할 근거가 가장 취약한 지역이었다.[28] 세르비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당시 세르비아가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기에 일어난 전쟁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때부터 세르비아계의 권력독점은 심했으며 티토의 노력에도 유고슬라비아의 정재계과 군인, 경찰,공 무원 등 각 분야의 요직을 대부분 차지하는 등 오히려 세르비아가 타 계통들이 갖고 있던 자치권마저도 박탈하는 등 공개적으로 타 계통을 차별하면서 발생한 점도 없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