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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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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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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의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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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둔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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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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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보 전투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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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박호 전투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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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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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경성 전투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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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성 전투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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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자령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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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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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장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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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항산 전투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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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 전투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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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자유 인도 임시정부 국기.svg 자유 인도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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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 전투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mphalgurkhas.jpg
날짜 1944년 3월 8일 ~ 7월 3일
장소 영국령 인도 마니푸르, 나갈랜드
원인 일본의 인도 침략을 위한 교두보 확보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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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인도 임시정부|]][[틀:국기|]][[틀:국기|]]
지원국

[[대한민국 임시정부|]][[틀:국기|]][[틀:국기|]][1]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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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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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구치 렌야|]]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깃발 명칭
]][[찬드라 보스|]]
병력
35,000명92,000명
피해
12,603명 사상54,879명 사상
결과
영국의 승리, 버마 전선 붕괴

1. 개요2. 발단3. 초기 상황
3.1. 무타구치 렌야의 등장3.2. 무타구치 렌야의 주장3.3. 각지의 반대, 그러나 파벌로 승인된 계획3.4. 찬드라 보스도조 히데키
3.4.1. 일본 극우사관에서의 평가
3.5.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작전3.6. 목욕탕 결재
4. 연합군의 전투 준비
4.1. 반격 준비4.2. 후콩 전투(Myitkyina battle)4.3. 메릴의 약탈자들(Merrill's Marauders)
5. 우호작전(ウ号作戰)
5.1. 조공: 하호작전(ハ号作戰)5.2. 우호 작전 개시5.3. 강태공 영국군의 낚시질과 낚인 일본군의 오판5.4. 반성 전보5.5. 비센푸르(Bishenpur) 전투5.6. 코히마 점령과 테니스 코트의 전투
6. 참패
6.1. 공격 중단6.2. 연합군의 반격6.3. 제31사단장, 항명 선언6.4. 항명의 충격6.5. 작전 중지와 백골가도
7. 작전 결과8. 기타
8.1. 무타구치 렌야의 각종 일화8.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전8.3. 현대 일본에서의 임팔 작전의 의미
9. 참고 동영상10. 창작물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4년 3월 15일부터 7월 1일까지 버마인도 국경 지대에서 벌어진 전투.

명칭은 국경선 인도 측의 도시 임팔에서 유래했다. 보통 일본군의 작전 명칭 작명은 대부분 카타카나 글자만 하나 붙여서 ○호 작전이라고 한다. 따라서 일본군에서 붙인 작전명은 '우호 작전(ウ号作戦)'이고 Battle of Imphal의 번역상 '임팔 전투'로 기재하는 게 정상이지만 한국에서는 이 둘을 섞어 '임팔 작전'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고, 드물게 '임펄 작전'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2][3] 본 작전의 주목표는 임팔이었고, 코히마는 임팔 점령을 지원하기 위한 조공에 가까워서 임팔 전투라 부른 경우가 많지만, 코히마에서도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점에 주목해 '임팔-코히마 전투'라고 부르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4]

작전의 준비기간이 긴 편이었으며, 또한 내부 준비만 다진게 아니라 그동안 영국군의 행군방향과 공격시기 등 여러 정보를 면밀히 포착해 허를 찌르는 기동전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괜찮은 작전이었다.[5] 문제는 탁상행정에서부터 이 한계가 벌써 드러났다는 것이다.

임팔의 중요성과 영국군의 허를 찌르는 전략에 대해선 나름 정확했을지 모르나 그 외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전장에 도달하기 위한 경로, 그 동안의 보급, 포위 이후 적의 반격에 대한 대비나 만에 하나 작전 실패를 대비한 퇴로 확보 등등이 모조리 갖춰지지 않아 반쪽짜리라 보기도 힘들 정도로 처참한 작전이었다. 이는 직전 일본군이 영국군에게 연전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던 만큼, 영국군을 지나치게 얕잡아보고 그들의 반격을 일절 고려하지 않은 것이 패전의 1차적인 원인일 터이다.

"일본인은 초식 동물이니 길가의 풀 뜯으며 전진하면 문제없다."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긴 무타구치 렌야가 특히 유명하지만, 사실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내각과 협조하여 국가의 발전을 위한 대승적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군과 자기 파벌의 체면과 승진에만 신경 쓴 일본군부의 행적 자체가 임팔 작전을 초래한 가장 큰 내적 원인이라 하겠다. 무타구치는 이런 일본군의 분위기에서 배양된 무능한 군인의 한 가지 표본이다.

전쟁은 보급과 같은 전략단계를 도외시하고 단기결전으로 전세를 뒤집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그러한 방침은 무모한 도박이 될 수밖에 없는지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2. 발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ohima.jpg

임팔은 인도 북동부 아삼 지방에 위치한 곳으로, 연합군의 중국행 보급로의 시작지점이라는 전략적 요지였고, 그렇기에 일본은 이곳을 공략하면 중국 국민혁명군을 압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찬드라 보스가 이끄는 인도 독립군과 결탁하면서 이 침략을 토대로 인도를 독립시켜 추축국 파벌로 포섭하거나, 하다못해 인도를 연합군에서 탈퇴시키는 것만 하더라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본입장에선 상당한 시간을 벌 수 있게 된다. 인도의 독립을 막는게 인도 제국군이 아니라 영국군의 비중이 높은 만큼 영국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사실상 중국의 압박과 인도의 독립, 인도의 연합군 탈퇴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1942년 8월 과달카날 전투가 시작된 시점부터 이미 임팔을 공략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방위체계가 부실한 데다 현지 사령관들이 반대하여 일단 공략 작전은 중지되었으나 상술한 전략적 이점을 포기하지 못한 수뇌부는 전략 연구를 멈추지 않고 언젠가 작전을 시행할 수 있을때를 대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안가 일본군이 버마 지역 방위부터 굳히기로 할 즈음 영국 육군 오드 윈게이트 장군(Orde Charles Wingate, 1903~1944)[6]이 이끄는 공수부대가 버마 서북부에서 게릴라 작전을 시작하고 연합군 정찰 부대 또한 이 인근을 수색하는등 수상한 징후를 보이자 일본군 수뇌부는 이를 대대적인 공세를 위한 준비라 시작하고 해당 방면의 군대를 대대적으로 재편성하며 버마 방면 사령관으로는 육군 중장 가와베 마사카즈(河辺正三)를, 그 휘하로는 제15군[7]과 제55사단, 그리고 직할 부대를 배치하며 마지막으로 제15군 사령관에 문제의 무타구치 렌야가 임명되었다.

3. 초기 상황

3.1. 무타구치 렌야의 등장

사령관에 임명되기 이전 무타구치는 사단장 시절 대본영이 계획한 인도진공작전인 21호 작전을 무모하다고 반대했던 적이 있었다.[8][9] 근데 정작 본인이 지역 사령관이 되자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며 아삼이나 벵골에서 장렬히 죽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다시피 했다고 한다.[10]

사실 무타구치와 육군파의 이런 행보는 단지 눈앞의 승전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무타구치는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원흉이며, 제15군 상급부대인 버마 방면군의 사령관인 육군대장 가와베 마사카즈는 자신이 속한 계파가 정쟁에서 대패해 본인도 중국으로 좌천된 상태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무타구치를 막을 수 있음에도 오히려 이를 지지했고 정황상 같은 계파인 카와베도 이를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은 역시 일본군의 전매특허인 파벌주의의 폐해로 이 '실책'을 만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단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이미 전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버마 북부에 영국군 게릴라 부대가 출몰하자 이를 역전의 기회로 보고 생각을 바꾸었다. 당연히 이 게릴라들은 걸어서가 아니라 비행기로 공수된 병력이었지만 무타구치는 임팔 작전을 강행했다.

그리고 이 작전에 대한 반대의견이 나오자 자신의 작전에 칭기즈 칸이 했던 '약탈 보급'의 방식을 취할 것이라 하며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3.2. 무타구치 렌야의 주장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적의 보급품을 빼앗아 아군에게 유리하게 활용하는 것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진 유구한 전쟁사가 증명하듯 정석 중 정석이었다. 하지만 오로지 이것만으로 보급을 운용하라는 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애초에 적 보급 약탈의 달인이었던 고구려나 노획을 밥 먹듯이 성공시키던 몽골군조차도 농사나 목축으로 보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준비 없이는 전쟁을 무턱대고 개시하지 않았다. 특히 현대식 군대, 3개 사단에 이르는 정규군이라면 더더욱 말이 안 되고 무모한 행위다.

이론상 적의 숫자가 훨씬 많고, 이를 보급품과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이 확실하게 구축한 뒤 보급품을 온전히 탈취한다면 모를까 현실적으로는 일어나기 힘든 상황이다. 특히 보급품은 어지간히 군기가 박살나지 않은 이상 주요 물자인 만큼 엄중히 지키고 철저히 관리하기 때문에 차라리 적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없애면 없앴지 상대가 약탈하게 냅두는 경우는 적다. 그래서 적병이 많으면 온전한 노획이 힘들어지고 반대로 적병의 수가 적다면 설사 노획에 성공하더라도 아군을 유지시킬 만한 물자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남방지역에 파견된 일본군이 전쟁 초기 싱가포르 전투에서 단시간에 승리하여 운 좋게 많은 물자의 노획에 성공한 적은 있었으나, 그로 인하여 노획과 왕성한 전투 의욕만 있다면 보급은 해결할 수 있다는 허황된 믿음이 무타구치를 비롯한 많은 고급지휘관들에게 생겼다. 결국 임팔전투에서 노획만 염두에 두고 보급을 무시하게 되어 큰 악영향을 끼쳤다.

심지어 냉병기 위주로 흘러가 줍기만 하면 써먹는 게 가능했던 중근대 전쟁까지와 달리 현대는 식량이라면 모를까 탄약 등 호환성이 요구되는 물자는 쓰기가 까다로웠으며, 특히 일본군의 무기체계자국 내 병기들 간 호환성조차 의심되는 수준이라 줘봤자, 상대의 손해만 만들 뿐 그를 아군의 이득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지는 못한다. 그나마 식량을 구한다 해봤자 상술한 대로 기약 없는 약탈에만 의존하면 항상 필요한 양 이상을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식량이 금세 고갈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적군이 "식량하고 탄약 다 맘껏 가져가십쇼." 하며 순순히 넘겨줄 만큼 호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것도 아니다. 애초에 동남아시아 어딘가에 있는 조그마난 어중이떠중이 변두리 섬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하의 대영제국군과 영국 제 1의 식민지군인 인도군과 벌이는 교전이었다. 차라리 난전 중이라면 모를까 후방에 있는 보급 지역에는 이미 패할 듯하다 싶으면 후퇴하면서 챙기거나 챙기지 못한 보급품들은 적들이 사용도 못 하게 일찌감치 손을 써버릴 가능성이 높다. 당장 과거 청야전술만 봐도 알 수 있는 사례인데, 대부분의 군대의 약탈은 추가 보급에 의의를 뒀지 그것만으로 뭔가를 해보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11]

그리고 군사물자에는 식량과 탄약, 무기 뿐만 아니라 세신도구나 의류, 그 외 자질구레한 각종 생활용품들도 포함되는데, 설령 약탈에 성공했다 해도 해당 지역에 보관된 물자가 비누, 군화, 면도칼 이런 것만 있다면 제대로 써먹기도 힘들다. 면도칼과 철모로 싸우고 군화와 비누를 씹어먹으며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상적인 작전은 절대 불가능하다. 게다가 적군이 사용하는 피복이나 텐트 같은 물건들은 아군 오사의 가능성과 국제법 위반 문제로 야전에서는 아군이 사용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적이 벌어져서 작전에 필요한 물자를 모조리 얻는다고 해도 대규모 공격군에게 보급하려면 실셈하고, 정비하고, 운반하고, 배급하는 일련의 과정들을 모두 거쳐야 하는데, 그러는 동안 적은 더욱 철저한 방어계획을 수립할 것이 당연지사고, 심하면 아예 역습에 나설 수도 있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와 소, 말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했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기만 한 데다가 원래 종자들이 장거리 이동을 잘 안 하는 종들이라 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이동하는 곳은 전쟁터인데, 전쟁터는 시끄러운 소리가 많이 나는 곳이라 사람이고 동물이고 스트레스를 상당히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땅이다. 더불어서 원래 가축을 식량으로 이용하는 신속한 기동전은 평지에서나 가능한 전술로, 정글과 고산에서는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무다구치의 징기스칸 전법은 이론만 그럴 듯한 전형적인 탁상공론으로, 국경을 지나자 가축들은 친드윈 강을 건너다가 익사하고, 아라칸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추락사하고,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심지어 사료 문제가 거론될 때 '이것(가축)들은 초식동물이니 길가의 풀을 먹여 사료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글쎄올시다' 소리가 나올 게 뻔한 실언이었다. 군부대의 보급과 같은 대규모 수송에 동물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길가의 풀'은 조속히 고갈되는 데다 독초 등을 잘못 뜯어먹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결국 마초 역시 보급해야 한다는 점은 이미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군이 경험한 사실이며, 멀게는 삼국지갈리아 원정기 등에도 마초 보급을 따로 준비하는 대목이 나온다.

소나 말, 등이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초식동물이긴 하지만, 단순히 방목만 해서는 영양 효율이 영 좋지 않아진다. 순수하게 풀만 뜯어먹고 배를 채우게 하려면 거의 하루 종일 풀밭에 풀어놓고 풀을 뜯게 해야 하므로 필요한 목초지의 넓이도 상상 이상으로 넓다. 실제 역사에서 목동들이 아침이면 소때나 말떼, 양떼를 몰고 풀밭에 나가서 풀을 뜯게 하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귀가하는 것이나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는 유목민들이 허구한 날 좋은 목초지를 빼앗기 위해 다른 부족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그만큼 가축들을 배부르게 먹이려면 넓고 질 좋은 풀밭과 안전하고 긴 시간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다.

수많은 나라의 농민들은 귀리보리, 같은 각종 곡물을 소와 말에게 사료로 제공했으며, 우리 조상들은 아예 곡식과 건초를 함께 넣어 푹 끓인 여물(소죽)을 쑤어 먹였다. 풀보다 훨씬 영양 효율이 높은 곡식을 소화흡수율이 높아지도록 익혀서 먹여야 일을 시킬 수 있기에 그렇게 고된 일을 한 것이다. 그것도 부족해 순무나 당근 같은 가축들이 좋아하는 채소도 먹여가며 체력을 보충시켰다.

물론 전장에서 우마를 먹이기 위한 건초를 '충분히' 준비한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장군들도 건초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고, 어떤 전쟁이든 보급이란 항상 빡빡하고 모자랐기 때문에 길가의 풀로 어떻게든 대체 가능한 건초는 가장 먼저 포기되는 후순위 보급품에 가까웠던 것이다.[12] 실제로 2차대전의 일본 및 독일군 역시 건초 보급은 후순위로 밀었으며, 많은 경우 현지민의 건초를 '징발'하거나 '목초지에서 풀뜯게 하는' 것으로 건초 보급을 대체했으니 길가의 풀을 뜯게 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틀린 건 아니었다.
첫째, 만주 병사 1만 명, 한족 병사 3만 명이 출병하면 말 10만 필이 필요하지만 이를 조달하기가 어렵고 둘째, 열 달 동안 병사 4만 명과 말 10만 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양식은 쌀 42만 석에 이르지만 윈난성에서 나는 식량은 불과 35만 석에 지나지 않는다. 셋째, 내지로부터 변경까지 지형이 험해서 행군이 어렵다. 넷째, 보급선을 유지하려면 인부 3명이 쌀 1석씩 운반한다고 해도 엄청난 인원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미얀마는 중국와 물이나 기후가 달라서 정복하기 어렵다. 이제까지 전쟁으로 인한 전사자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많았던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청나라 건륭 33년(1768) 미얀마와 전쟁하는 와중에 상서참찬대신 서혁덕, 운귀총독 악녕이 청 조정에 올린 상소문. 미얀마 일대에서 군사 작전을 하기 어려운 5가지 이유를 설명하였다. 해당 지역에서 보급과 기후 문제가 심각함을 알 수 있다.

임팔 전역과 같은 정글은 잘 관리된 목초지와는 다르다. 정글은 '녹색 사막'이라 불릴 정도로 인간들뿐 아니라 가축들도 열악하고 살기 힘든 곳이다. 말이나 소한테 절대로 먹여서는 안 되는 독초가 널리고 널렸고, 가축에게 질병을 옮길 수도 있는 벌레가 득실거린다. 열대기후의 열기와 습기 역시 가축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데, 이런 곳은 목초지처럼 가축을 몰아넣고 방목하기에는 좋지 않은 환경이다.

더군다나 일반 목초지처럼 넓고 아늑한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행군 도중에 다수의 말과 소를 몰아넣을 공간조차 마땅치 않다. 만약 부피가 크고 무거운 마초를 따로 준비한다면, 그 마초를 실을 소와 말을 더 동원해야 하므로 당연히 보급 관리하기가 더더욱 힘들다. 마초를 수송하는 소와 말을 먹일 마초를 준비하면 실을 것이 더 늘어나니 소와 말을 추가해야 하고, 다시 추가한 소와 말을 위한 마초를 준비하면 실을 마초가 늘어났으니 다시 소와 말을 또 추가하고, 이렇게 계산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서 소와 말을 더 추가하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결과적으로 준비해야 할 소와 말과 마초가 생각했던 것보다 3~4배 정도 불어난다.

다 자란 소 1마리에게 필요한 하루 건초의 양은 약 10kg이다.[13] 임팔 작전을 위해 동원된 말과 노새만 1만 2천 마리, 소가 3만 마리이니 하루에 건초를 약 420톤 준비해야 한다. 임팔작전의 주요 기간인 1944년 3월 초부터 5월 초까지 말이다. 그리고 60일간 작전을 위해서는 건초를 무려 2만 5천 톤, 중간에 잡아먹음을 감안해도 대충 건초 1만 5천 톤을 수송해야 한다. 이것은 정상적인 건초(수분 함유량 12% 이하)를 일상생활할 때 이야기로, 만일 탄약운송 같은 중노동을 했다면 당연히 훨씬 더 많이 먹어야 한다. 추가로 건초는 중량 문제 말고도 부피가 엄청나기 때문에 실제 수송은 더 힘들다.

그러니 트럭으로 보급을 하기 힘들다고 대신 소를 통해 수송한다는 전제부터가 넌센스였다. 거기에 정글이라 습하고 더운데다 스콜 등의 열대성 소나기도 상당히 잦으니 기껏 준비한 건초들이 한순간에 축축해져서 상하기도 쉽다. 가축을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알겠지만, 비에 젖어 상한 풀을 먹이면 곧바로 식중독과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 최악에는 전염병이 돌아 가축이 집단폐사할 수도 있다. 수송 도중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가축이 죽어나가서 장비와 식량, 건초를 실을 우마가 줄어들면 추가 수송 부담은 자연히 병사들에게 결국 돌아오므로 전투력 감소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숲 때문에 항공 정찰로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기에 효과적으로 폭격하기도 힘든 환경이므로 이 말이 맞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자 무타구치를 포함한 일본군이 얼마나 보급을 경시했는지 알 수 있는 소리다. 정글은 병참 계획을 세우기 굉장히 어렵지만, 차량 자산의 운영도 어려운 특성상 보병의 전투력을 유지하기 위한 병참의 필요성이 상당히 높은 적대적인 환경이다. 이래서 항공기로 물자를 보급하는 것은 상당히 좋은 수단이였고, 영국군은 항공 보급으로 물자를 공급했으며 제5인도 보병사단을 아라킨에서 임팔 전선으로 공수시키는 등 항공기를 잘 써먹었다. 이런 결과 당시 굶주린 일본 육군들까지 그 항공물자가 한시바삐 자기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학수고대했고, 만약 운 좋게 손에 넣으면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다.

척박한 정글에서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가축수송 보급보다는 연료가 적어서 자주 비행 못 한다 하더라도 항공기로 보급해야 쓸데없는 노동력 낭비도 줄이기에 좋다.[14] 분명히 이 점을 지적하거나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이 점이 개선되는 일은 임팔 작전이 일본군의 패배로 끝나는 그 순간까지 없었다. 이 작전을 구상, 결심, 실행한 윗선들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생각없고 무능하고 한심한 작자들인지 알 수 있는 부분.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개)고생한다는 격언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뭐라고? 그딴 걱정은 하지 마. 적을 만나면 총구를 하늘에 대고 3발만 쏘아 보라고. 그러면 자동으로 항복하게 되어 있어.

15군 사령부 작전회의에서 '보급이 원활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염려하는 의견을 제시한 15군 보급참모 우스이에게 농담이랍시고 한 소리다. 무타구치가 적 영국군을 얼마나 터무니없이 얕보고 방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15]

그럼에도 이 숱한 망언들조차도 바로 밑에 써놓은 망언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아래와 같이 답하길...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16]

식량이 부족해서 곤란에 처할 것이라는 보급부대 참모들의 조언에 대해 사령부는 또 기가 차는 방법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것은 정글에 나 있는 식물을 식량으로 채집해서 먹으라는 것이었다. 사령부는 식물학자들을 동원하여 빈랑 나무, 고사리 등등 미얀마 정글 일대의 식용식물들을 정리해 도감으로 만들어 침공부대에 나누어 주었다. 즉, 다시 말해 보급을 해주기는 커녕 여기 먹을 수 있는 식물 목록이 있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현지에서 식량을 보급하라는 뜻이다. 한 술 더 떠서 '일본인은 주로 채식을 하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지면 초근목피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또는 '일본군은 원래 초식동물인 고로 주위를 둘러보면 풀이 이토록 많으니 먹을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당시의 참전했던 군인들 중 한 명은 풀을 가리키면서 "식량이 사방에 널리고 널렸는데 뭐가 걱정이야? 풀을 뜯어먹으면서 전진하면 될 것을..."이라고 말했다는 증언도 남겼다. 결국 정글에서 풀 뜯어먹으라는 골자는 동일하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식량이 다 고갈되자 주변의 식물을 아무거나 막 집어먹다가 전멸한 사례는 흔하다. 게다가 정글은 사람들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녹색 사막'이라고 부를 정도로[17] 생산력과 인구부양능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지역인데, 사람이 먹을 만하거나 음식이 될 만한 열매를 많이 내는 식물은 적지만 독성을 띤 식물은 많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현재 인류가 식용하는 동식물들의 야생종은 사람은 도저히 섭취하기가 어렵다. 아시아 인류의 주식 만 해도 처음부터 흰 쌀이 자라서 섭취한 게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의도적으로 품종을 개량했거나 우연히 발생한 식용에 유리한 변종을 보존 및 개선하여 지금에 이른 거다. 그러니 인류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 그대로인 동식물은 절대로 함부로 섭취해서는 안 된다. 즉, 채식 위주라고 해도 결국은 인류의 손을 탄 식물성 식품을 기반으로 한 채식, 그것도 토끼풀이나 잔디 같은 말 그대로 풀이 아닌 탄수화물 비율이 높은 곡식 위주이므로 들판에서 자란 야생식물까지 막 먹을 수는 없다.

게다가 식물에는 흔히 독이 있다. 많은 식물은 벌레나 초식동물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알칼리계 독성물질을 합성하는 방향으로 진화하였다. 현미에도 약한 독성성분이 들어 있다. 단지 식용식물의 독은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거나 오히려 이득이 되도록 진화시킨 경우라 문제가 안 될 뿐. 특히 종족의 유지에 필수적인 씨와 씨를 보호하는 기관에 독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다. 즉, 풀이라고 아무거나 뜯어 먹으면 죽거나 탈난다. 대표적 예가 버섯인데, 독버섯일수록 '날 좀 먹어줘요' 식으로 크고 예쁘게 자라지만[18] 이에 혹해서 먹는 순간 큰일 또는 사망하는 건 순식간이다.

식물에서 눈을 돌려 벌레나 작은 동물을 사냥한다고 쳐도 그걸로 1만 병력 이상의 식량이 될 리가 있겠는가? 저런 것만 먹으면 몸이 버틸 수가 없다. 그 베어 그릴스도 구조받을 때까지 살아남는 시간을 연장하려고 벌레를 먹는다.[19]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로 벌레나 쥐, 뱀, 개구리, 도마뱀 따위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그나마 민간인이라면 모를까 이들의 직업은 군인이다. 군인들은 전투상황 내지 전투 준비에 필요한 훈련 등의 이유로 평소에 어마어마한 열량을 소모한다. 과체중자가 군복무 시절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극초기에 찍었거나 땡보직이 아닌 한 대부분은 체형이 평범하게 잘 변하는데, 그만큼 열량을 미친듯이 소모하여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살이 알아서 빠지기 때문이다. 특히 훈련병 때는 위에 구멍난 것 마냥 원 없이 짬밥을 퍼먹어도 살이 나도 모르게 빠지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20] 하다못해 예비군 훈련만 받아도 살은 빠져서 온다.

따라서 군인에게 요구되는 섭취 열량도 그에 상응하는 고열량이다. 실제로 병영 식단은 1일 약 3천 kcal를 조금 넘는 기준으로 짜인다. 전투식량들을 보면 알겠지만, 평시에 먹기엔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잉 열량을 자랑하는데, 실전 상황에서는 그걸 퍼먹고도 열량이 부족해질 정도로 격렬하게 소모한다.

이렇게 급양이 군대의 기본 중의 기본인데, 이 양반은 보급의 개념도 모르고, 거기에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니 군인들이 잘 버티고 싸우는 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나 마찬가지다. 괜히 나폴레옹이 "군대는 배가 불러야 움직인다."라는 명언을 남긴 게 아니다.[21] 더구나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정글에서는 전투력 유지와 생존을 위해 잘 먹고 체력을 보존하는 게 필수인데, 풀만 뜯어 먹으라는 것은 이미 그 시점에서 전투력을 상실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본인도 솔선수범해서 그렇게 생활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올시다. 추가로 약탈 보급을 할 거라며 예로 들었던 칭기즈 칸도 식량은 말린 고기 보르츠와 유제품 아롤 등의 전통 보존식으로 철저히 준비해 놨을 정도로 보급에 철저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무타구치 렌야의 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라는 말은 비단 군대에서만이 아니라 이제까지 인류가 상대해온 적들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그리고 어쩌면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도 이기지 못할 대자연을 적으로 돌리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결과적으로 이런 보급상 누수 때문에 무다구치의 예하 사단들은 목표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진맥진 상태에 이르렀고, 부족한 식량은 고스란히 일대에 얼마 안 되는 현지인들의 촌락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22]로 이어졌다.

임팔 작전은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했다. 게다가 무타구치가 제시한 작전 기한은 불과 15일밖에 안 되는데, 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서 인도의 북부 아삼까지 보름 만에 갈 수 있을 리 없지만 보병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이 15일치이기 때문에 작전 기한을 15일로 잡은 것이었다. 이렇듯 보급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

3.3. 각지의 반대, 그러나 파벌로 승인된 계획

물론 일본군에 무타구치 수준으로 눈 뜬 장님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15군 참모장으로 육군 소장 오바타 노부요시(小畑信良)가 부임했는데, 그는 20년 넘게 병참 업무만 담당해온 인물이었다. 오바타 소장은 '1만 5천 톤에 달하는 물자를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자 현지조사로 진격로를 면밀하게 검토한 뒤 '자동차도 모자란 판국에 비만 오면 못 쓰게 되는 도로, 다리도 없는 친드윈강,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보급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불가능하다.'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무타구치는 도리어 "나약한 소리"라면서 무시하고 오바타를 전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부임 1달 만에 해임했다. 오바타 노부요시는 이 이후 관동군으로 전보되었고, 패전 후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귀국해서 1976년에 향년 79세로 세상을 떠났다.[23]

15군 산하의 33사단장 육군중장 야나기타 겐조(柳田元三)와 31사단장 육군중장 사토 고토쿠도 들고 일어났지만, 역시 무시당했고 오바타 참모장의 해임 이후에 반대여론은 사그라들었다.

이 작전을 검토하기 위해서 랑군에 모인 상급부대 참모들도 신나게 디스해대기는 마찬가지였다.
버마 방면군 나카 에이타로(中永太郞) 참모장[24]: 후방에서 보급이 어렵지 않도록 3개 사단의 배치를 재고해야 한다.
남방군 이나다 마사즈미(稻田正純) 참모장: 보급계획을 도외시한 이 작전구상은 실패할 위험성이 높다.
대본영 사나다 조이치로(眞田穰一郞) 작전과장: 작전구상이 엉망진창이다.[25]
사실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한 게 이때는 바야흐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미군의 전면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드는커녕 본진 막기에도 급급한 상황.

그러나 이 모든 부정적인 의견들을 씹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요인이 있었느니, 단기결전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도조 히데키의 입맛에는 딱 맞는 계획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대본영은 8월에 준비 명령을 내렸고, 이나다 참모장이 계속 반대하자 10월에 갑자기 해고했다. 이 해고는 육군성 차관 도미나가 교지의 작품이었다.

무타구치는 작전을 위해 직속상관 카와베를 이렇게 설득했다.
각하와 저에게는 이 전쟁의 근원이 된 지나 사변을 일으켰다는 책임이 있습니다.[26] 그러니 이 작전을 성공시켜 국가에 면목이 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작전 구상을 두고 열린 회의에서 남방군 총참모부장 아야베 키츠주(綾部橘樹)에게 이렇게 말했다.
군문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영국군은 약하오. 반드시 퇴각할 거요. 보급에 대한 우려는 착각이라 할 수 있소.

이 말을 듣고 참모장 나카가 "이 작전 구상은 너무나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되오. 재고의 여지는 없소이까?"라고 물었지만 무타구치는 "당신은 실전 경험이 없어서 지레 겁을 먹는 모양이지만, 이렇게까지 준비를 철저하게 한 싸움은 일찍이 없었소이다. 천장절(天長節: 4월 29일)[27]까지는 임팔도, 코히마도 반드시 점령해 보이겠소."라고 자신했다. 그 말을 듣고 나카는 말을 아꼈다.

이때 남방군의 보급을 담당하던 이마오카 유타카(今岡豐) 군수참모가 다시 제동을 걸었다. "말씀하신 대로만 진행된다면야 어떻게든 될 것 같소. 하지만 사단이 적에게 발목을 잡힌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오." 그러자 이번에는 작전참모 키노시타가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하며 나섰고 결국 모두가 "아, 그렇습니까?" 하고 말한 뒤 더 이상 반론하기를 포기했다.

결국 총참모부장 아야베는 계획의 인가를 상급부대에 요청했는데 노구교 사건 때도 무타구치의 직속 상관이었던 버마 방면군 사령관 카와베는 아래와 같은 헛소리를 하면서 통과시켰다.
예전부터 무타구치 군이 공들여 계획한 작전이다. 꼭 인가해주고 싶다.

카와베가 이 작전 계획을 인가해준 이유는 무타구치와 카와베가 노구교 사건 이전부터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카와베 자신은 정을 생각해 '절친이 고생해서 만든 작전이니 기 한 번 북돋아주자.'는 심경으로 통과시켜 준 것이겠지만, 이는 대규모 전력 상실과 그로 인한 남방 전선 붕괴를 초래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예정된 셈이던 일본 제국의 패망 시기만 더 앞당긴 꼴이었다. 카와베가 생각이 똑바로 박힌 절친이었다면 무타구치가 이 계획에 힘을 쏟음을 알았다면 현실을 일깨우며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이를 두고 버마 방면군 작전참모인 육군소장 카타쿠라 타다시(片倉衷)는 '우리 군사령관은 개인감정에 치우치는 바람에 무타구치의 행동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남방군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28]도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아니면 본인 파벌의 입지와 위상을 높이겠다는 의도인지는 몰라도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말해선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이를 통과시켰다.
이 작전을 성공시켜서 교착상태의 전국을 타개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작전안과 쓰레기 사이의 무언가가 각종 결재 단계를 통과하자 이 작전 계획을 보고 "작전구상이 엉망진창이다."라면서 처음부터 제동을 건 대본영 참모장 사나다 조이치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동을 걸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 반대다.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도로 건설을 위한 기간 1년이 필요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해로수송을 위한 해군의 협조라도 있어야 한다.

만일 일본군이 아닌 타국의 군대라면 "육군 독자적으론 어렵고 해군과 같은 타군의 협조가 따로 필요할 정도로 무리한 작전이다."와 같은 상식적인 비판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에서 육군과 해군간 사이가 어떠했는지를 고려하면, 육군 장성에게 해군의 협조를 받으라고 권하는 진언은 받아들여지긴커녕 되레 찍혀서 모가지를 당하지나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사나다 조이치로는 무타구치 렌야의 육군대학 후배였다.[29] 파벌과 연공서열을 엄청나게 따지는 구 일본군에서 감히 '후배'가 '선배'에게 이런 수준으로 항의했음은 보통 일이 아니다. 더욱이 사나다는 삼간사우로 악명 높았던 인물. 그런 사람이 '선배님의 이 말 같지도 않은 작전을 진행하고 싶다면 저 빌어먹을 해군 놈들의 손까지 빌려야 한단 말입니다!' 하는 요지로 군복을 벗을 각오까지 하고 결사반대한 셈이다.

그러나 이 결사적인 반대도 삼대오물로 유명한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가 오로지 파벌만 생각하고 최종승인을 해버리며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
데라우치 씨 부탁이니 통과시켜주게.

그리고 히로히토는 그렇게 올라간 보고서를 읽은 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질문하였다.
이게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한 작전인가?

사실 히로히토는 어린 시절 가쿠슈인에 입학했을 때부터 군사교육을 받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도 졸업했던 만큼 군대에 대해 아주 문외한은 아니었다.[30]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보다 식견이 낫다는 정도고, 사관학교는 물론 육군대학에서까지 교육을 받은 뒤 수십 년에 걸친 실전경험을 쌓은 직업군인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던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러니까 몇 년 동안 그저 이론으로만 군사교육을 받았던 아마추어가 수십 년 동안 실전을 거친 고급 장교들보다 더욱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3.4. 찬드라 보스도조 히데키

한편 임팔 작전은 정치적인 면도 있었다. 자유 인도 임시정부[31]수상 찬드라 보스도조 히데키에게 '만일 당신네 일본군이 인도를 공격하면 나는 인도인을 선동해 영국군을 몰아내고 친일 인도 정부를 세우겠다.'고 약속한 것이 있었다. 어찌 보면 도조를 비롯한 일본 군부가 가장 전략적으로 기대했던 요소였을 것으로, 일단 인도 독립세력 측으로부터 물자 지원은 물론이고 인도에 대한 영향력까지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미 앞서 아웅 산이 이끄는 독립세력과 연합하여 영국군을 몰아낸 버마와 동일한 전략 선상에서 본 듯 하다.

찬드라 보스의 행적을 보면 찬드라 보스는 어디까지나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논리로 당시 영국과 전쟁 중인 일본의 힘이라도 빌려서 인도 독립에 투신한 거지 일본의 침략전쟁과 학살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열강의 반열에 오른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도 일본의 조선과 중국 침략을 비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핀란드겨울전쟁 당시에 자국을 침략한 소련과 싸우기 위해 나치 독일과 손잡은 바 있다. 이 결정은 당시 핀란드 대통령이었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내렸고, 이 결정을 통해 나라를 구했기에 핀란드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만네르헤임이 단지 나치와 손잡은 이유만으로 비난받을 수 있을까? 보스가 일본의 침략전쟁과 학살에 반대했듯 만네르헤임도 나치 독일이 저질러댄 만행만큼은 철저히 반대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땐 추축국의 편에 선 것은 사실이며, 인도 국민군이 자신들의 조국을 침공하는 작전에서 희생된 사실을 피할 수는 없다. 또한 아무리 이이제이의 측면에서 일본 제국과 손잡았다 해도 일본 제국이 같은 아시아인들에게 저지른 만행들을 보면 영국과 맞먹거나 혹은 그 이상이었기 때문에 커다란 오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 산은 처음에는 지배자 영국에 맞서 일본의 지원을 받아 독립군을 양성했으나, 일본의 가혹한 통치를 보고 오히려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올 것만 같아 영국과의 협상 끝에 협력, 그리고 전후 미얀마의 독립을 약속 받는다. 그럼 이쯤에서 '인도 역시 미얀마처럼 영국과 협상하여 독립을 약속 받고 영국을 지원하면 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실제로 인도는 1차 대전에서 영국을 지원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인도에게 주어진 건 부분적인 자치 뿐이었다. 힌두 극우 암살단을 색출하기 위한 로울라트 법을 제정당했으며, 이후 자치 의회 구성과 선거권 확대 등 혜택이 주어졌지만 막상 독립에 대해서는 영국 정부가 계속 난색을 표했다.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상황에서 나치주의자들이 기승을 부릴 수 있었다.

도조 히데키도 당시 다른 전장의 전황이 악화되어 정권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정권 유지를 위해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그 때 찬드라 보스가 부릴 수 있는 '인도 국민군' 병력은 실은 일본 군부가 결성한 것으로, 주로 말레이시아버마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인도군 출신 4만 3천 명이었다. 그러나 임팔 작전에 참여했다가 굶어 죽거나 몰살당한 후 버마 방위를 위해 일본에게 이용당하는데 지친 그들은 결국 자원 부족과 열악한 지원에 대한 사기 저하가 겹쳐서 모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거나 영국군에게 항복하고 만다.

전후 찬드라 보스의 인도 국민군 장병들이 전범/반역자 재판을 받을 때 그 변호를 담당한 사람은 다름 아닌 20년 간 변호사 영업을 쉬고 있던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32] 재판 당시 인도의 여론은 '비록 방향은 잘못되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인도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이라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네루 자신은 임팔 작전 당시 영국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또한 네루는 인도 국민군 출신들이 절대 새로 건국된 인도 군대에 입대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3.4.1. 일본 극우사관에서의 평가

이러한 정황 때문에 인도의 독립을 도운 의로운 전투로 평가한다.[33]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 시기, 1943년 11월 5일과 6일 사이에 열린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찬드라 보스는 연설에서 "아시아, 아프리카의 모든 민족의 해방은 이 전쟁에 있어 일본과 그 동맹국이 승리와 성공을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일본 여러분의 이름은 새로운 동아시아를 만드는 분들로서만 아니라 '신세계의 건설자'로서도 역사에 새겨질 겁니다."라고 말했다. 비록 일본은 전투에서는 패했지만 귀축영미에 당당하게 맞서 아시아는 더 이상 백인 침략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용기를 불러 일으켜 독립을 이끈 계기가 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열심히 퍼뜨리는 중이다.

물론 인도, 베트남, 알제리, 이집트, 아이티[34], 필리핀, 에티오피아 등 전세계의 피식민국가들은 수백년 전부터 민족 정부, 주권 정부를 세워 보겠다며 열강에게 피터지게 저항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2차 대전 이후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한 사실에 이 작전을 끼워 맞춘 것에 가깝다. 애초에 저딴 말을 하면서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 행한 범죄들을 생각해 본다면 실로 어불성설이다.

더군다나 투입된 사단들둥 상당수가 인도 사단이었다. 즉 애초에 동양인들끼리 싸웠기에 백인에 맞써 어쩌구 저쩌구 자체도 아예 안맞는 소리다.

3.5.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작전

대본영은 임팔 작전의 결행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제15군에게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훈령을 내린 뒤 회의만 거듭했다.

시간이 흘러서 9월 중순, 현지에서는 준비 명령에 따라 사단별 담당 구역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작전 계획을 세웠다. 동부 정면에 제18사단을 배치하여 연합군의 진출을 막도록 하고 제33사단, 제15사단, 제31사단 등 3개 사단으로 임팔을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곧 일본군 특유의 보급 문제가 서류 단계부터 머리를 들이밀었다.

원래 15군은 병참부대 증강안도 함께 대본영에 제출했었다. 처음 계획안에서는 트럭을 보유한 자동차 중대 160개, 말들을 이용하는 치중병(輜重兵: 보급수송병) 중대 60개, 그리고 5개 공병 연대였으나 버마 방면군을 통과하면서 90개, 40개, 3개로 줄었고 다시 남방군을 거치면서는 26개, 14개, 2개로 더더욱 줄더니 드디어(?) 대본영에 제출될 때는 18개, 12개, 0개가 되었다. 이유는 임팔만 점령하면 모두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는 남방작전 때의 싱가포르 전투처럼 대량의 물자를 노획하는 행운이 또 오리라고 여긴 것이나 다름없다. 공병을 두고 오면 수리는 누가 하고 뒤처리는 누가 하는지는 고사하고, 수비전부터가 무리이다. 물론 파괴된 도시는 그 자체로 방어력을 발휘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등 시가전이 벌어졌던 모든 전투들이 건물의 잔해가 얼마나 놀라운 방어력을 발휘하는지 증명했다. 그러나 아무리 건물 잔해가 시가전에 유용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보급과 병력 이동을 하려면 최소한의 정리는 되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잔해로 요새화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역할은 오로지 공병의 것이다.

또 보급을 담당할 자동차 중대와 치중병 중대를 아무 생각도 없이 저렇게 줄여버리면, 부대가 처음에 가지고 간 보급품이 다 떨어진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하란 말인가? 공중보급도 못 해주면서[35] 공병도 없는 마당에, 도대체 무슨 수로 정글을 뚫고 병력 수만 명에게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보급해준단 말인가? 단 하나의 변수도 없이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는 낙관을 기정사실로 전제한 셈이었다. 만약 정글에서 전투하는 대군이 보급을 제대로 못 받는다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무타구치를 제외한)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다.

제15사단 주력은 선박이 부족하여 중국 난징에 남아있던 병력 수송이 늦어졌다. 그리하여 병력은 육로를 개척하며 버마로 향하는 가운데 야마우치 사단장과 참모장만 버마에 도착했다. 문제는 이 사단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의 주력이 되었다는 것.

3.6. 목욕탕 결재

이 와중에 현지군은 작전을 빨리 결정해 달라며 남방총군 작전참모처장 아야베 소장을 도쿄로 보내 작전 실행을 촉구하기로 하였다. 끈질긴 설득에 대본영에 넘어가 작전 결정을 하고 12월 31일에 육군성 군사과장 니시우라 스스무(西浦進) 대좌가 도조 히데키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마침 도조는 목욕 중이었다.

그때 도조가 물은 것이 유명한 6개 조항이다.
1. 보급 문제는 해결 가능한가?
2. 현실성 있는 작전인가?
3. 증원 병력이 더 필요할 일이 생기겠는가?
4. 버마 방어에 공백이 생기겠는가?
5. 상대의 공중-지상 입체 공격을 막을 수 있는가?
6. 해상으로 연합군이 밀려왔을 때 막을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들 모두 기본적으로 전략과 전술을 익혔다면 당연하게도 나와야 하였으나[36], 니시우라 대좌는 우물쭈물대면서 도조의 질문에 명쾌한 답조차 하지 못했다. 사실 정답은 3, 4번은 '예', 1, 2, 5, 6번은 '아니요.'였으니 어쩌겠냐만은. 그런 꼴을 본 도조는 이런 것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면서 무슨 결재를 요구하냐면서 버럭 호통을 쳤고, 그제서야 니시우라 대좌는 발등에 불이 떨어져 여기저기 연락을 넣었다. 그렇게 한참 연락을 넣고 나서야 "확인해 보니 질문하신 것 모두 문제 없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도조는 그 꼴을 한심스러워하면서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결재해줬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태평양 전쟁에서 지적하듯이, 도조가 물어본 내용은 상급자로서는 당연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저런 사항은 도조가 물어보거나 육군성 군사과장이 다시 알아볼 게 아니라, 도조가 물어볼 필요조차 없게 무타구치 본인이 사전에 준비하고 정리해서 도조에게 보고를 올리고 도조가 승인하는 것이 순서에 맞는다. 마치 초밥집에서 요리사가 펄펄 뛰는 활어를 도살도 안 하고 접시에 올려 내 놓으니 손님과 웨이터가 식탁에서 너덜너덜하게 포 떠서 먹은 격이다. 저런 준비도 없이 기안을 올린 무타구치나 이걸 알고서도 사인해 준 도조나 똑같은 사람들이다.

도조 히데키가 상급자로서 정상적으로 행동했다면, 대좌 하나에게 구두로 문제 없다는 답변을 듣고 결재해주어서는 안 되었다. 6개 항목 전부를 서면으로 보고할 것을 요구하고 보고서를 제출받을 때까지 결재를 보류한 뒤, 제출된 보고서를 대본영과 육군성, 참모본부의 참모들과 검토해 문제 없다는 결론이 나온 뒤에 결재했어야 했다.

4. 연합군의 전투 준비

4.1. 반격 준비

연합군이 갑자기 정신을 놓고 일본군과 세트로 미친 짓을 했다면 성공 가능성은 있었을지 모른다. 당시 남방 전선을 담당하던 연합군에는 희대의 트롤러 조지프 스틸웰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도 미국인이 초식동물이라고 하는 정도는 아니었고, 일본군과 달리 다른 장군들이 그의 바보짓을 보고만 있지도 않았다.

서부의 정면에는 조지 기포드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보병 3개 사단기갑 1개 사단, 오드 윙게이트 장군의 친디트 부대, 북부에는 조지프 스틸웰 장군의 미군, 중국 국민혁명군 X군 3개 사단, 동부에는 웨이리황 장군의 중국 국민혁명군 14개 사단이 배치되어 3방면으로 포위 태세를 갖추었고, 클레어 셰놀트가 지휘하는 중국 국민혁명군을 지원하는 미국 육군항공대인 제14항공대, 소위 플라잉 타이거즈[37]를 비롯한 유력한 공군 부대도 공격 준비를 마쳤다.

특히 충칭으로 보낼 군수물자 수송로인 레도 공로(Ledo Road)와 버마 공로(Burma Road)를 건설하고자 알래스카 공로 2500 km를 8개월 만에 완성한 알로 스미스 공병대가 파견되었다. 레도 공로는 인도의 레도에서 윈난성의 성도 쿤밍에 이르는 길이 1079 km에 달하는 군용 도로이며, 동북 인도의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연료를 운반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버마 공로는 미얀마 라시오에서 쿤밍까지 이어지는 길이 1154 km짜리 군용 도로로, 역시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건설되었다.

연료와 군수물자를 비행기로 굳이 수송하려면 충분히 수송이 가능했다. 하지만 비행기로 수송하는 연료량이 수송을 위해 소모하는 연료량과 비슷했고, 게다가 해당 항공 루트는 험난한 지형 탓에 사고로 인한 비전투 손실이 너무 컸다. 오죽하면 추락한 항공기 잔해로 항로를 가늠할 수 있다는 루머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험프 넘기'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 수송 작전에 참여한 부대는 전투 비행과 똑같은 영예가 주어졌으며, 수송 비행을 무사히 마치면 항공기의 노즈 아트에 폭격 임무와 동일하게 표시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수송이 어려웠으니 육상 도로가 꼭 필요했던 것.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do_Burma_Roads_Assam-Burma-China.gif

파일:external/www.thisworldrocks.com/BurmaRoad_MyanmarBus.jpg

버마 공로를 상징하는 유명한 '24 커브'. 정말 크고 아름다운 도로다. 정확히는 레도 공로에 연결된 중국 구이저우성 칭룽현에 있는 도로 사진이다.# 위성지도로 보면 지도에 표시된 길과 많이 어긋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중국은 안보상의 이유로 지도 데이터를 정확하게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위성 지도가 실제와 다르게 어긋난 곳이 꽤 많다.

연합군은 레도 공로를 '도쿄로 가는 길'이라 불렀으며 이 도로가 일본군 점령지를 가로질렀기 때문에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는' 작전을 펼쳐야 했다.

또한 스틸웰 장군은 태평양 방면의 해상공세에 호응하여 반격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중국군 90개 사단을 미국식 장비로 개편하는 작업도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임팔 작전을 준비하면서 그 결행을 망설이고 있던 1943년 9월 말, 연합군의 선봉부대는 어느새 후콩 계곡의 북쪽에 나타나 계곡 일대를 정찰 중이던 일본군 1개 중대와 마주쳤다.

4.2. 후콩 전투(Myitkyina battle)

후콩 계곡(Hukawng Valley)은 인도 국경을 따라 펼쳐진 동서 30~70 km에 남북으로 200 km나 뻗은 대정글지대로, 우기에는 수많은 하천으로 급류가 흘러 도처가 연못으로 변해버리는 곳이다. 협곡은 온갖 부패물에서 나오는 독기와 코브라를 비롯한 독사, 도마뱀, 독거미, 전갈, 거머리들이 들끓으며, 주변의 산지에는 표범이나 호랑이가 득실거렸다. 원주민들도 '맹수 때문에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1943년 10월 30일, 일본군이 계곡에서 마주친 것은 중국군 제38사단의 정찰부대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무타구치는 즉시 제18사단 예하 제56연대를 급파하여 중국군 제38사단을 포위하려 했다. 1개 사단 병력을 1개 연대 병력으로 포위하려 한 것이다.

문제는 인도에 주둔했던 중국군은 쑨리런 장군이 이끄는 X군(X Force)[38], 즉 미제 무기로 빵빵하게 무장하고 미군 교관들에게 훈련받았던 당시 중화민국 육군의 최정예부대였다는 점이다.[39] 당연히 그간 중국에서 순전히 먹을 것이 없어 대규모 군사작전이 불가능하여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역에서만 하는 지역적인 방어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고 1달에 총알 3발씩 지급받고, 먹을 거리가 없어 영양실조 때문에 제대로 싸울 수 없던 본토의 중국군[40]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그리고 쪽수도 중국군이 훨씬 더 많았다. 여기에 기갑전력이나 공중전력도 우세했고 특히 전의가 충만하여 일본군을 매우 놀라게 했다. 일본군 제56연대는 밀림의 중국군을 포위하여 압박해 들어갔으나 중국군은 전차와 중화기로 원통 진지(Admin Box)를 구축하여 공중보급을 받으면서 방어하고 있었다. 이 원형 진지는 영국이 고안해낸 전법으로서 종래와 같이 방어진의 일각에 구멍을 뚫고 돌입하여 분단한다는 전법은 먹히질 않았다. 특유의 반자이 돌격을 감행해 보았지만 결과는 뻔했다.

결국 후퇴한 일본군은 역시나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기관지인 중앙일보의 종군기자로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장런중(張仁仲)은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해온 일본군의 영양실조는 놀라울 정도로 심했다. 개중에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기 직전인 자도 있었다. 먹을 것을 던져주니 몹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10일이고 1개월이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나무 뿌리나 벌레를 잡아 먹으며 연명했다고 한다.

결국 제18사단은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1]

4.3. 메릴의 약탈자들(Merrill's Marauders)

2월 19일, 프랭크 메릴(Frank Merrill) 준장이 지휘하는 미군 제 5307 혼성연대 2,900명이 전선에 도착했다. 이 메릴 부대는 영국군친디트 부대에 자극을 받아 미국이 편성한 부대로 게릴라 훈련부대와 과달카날, 뉴기니의 실전부대와 미 본토에서의 지원병으로 편성된 특수부대였다. 카빈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바주카 등으로 무장한 이 부대는 버마 당나귀 700필에 군수물자를 싣고 현지에 도착했다.

스틸웰 장군은 그들을 반기며 자기 휘하의 부대와 합류시켜 마인칸 공격을 명했고, 일본군 제18사단이 3월 5일을 기해 마인칸에서 철수하였으나, 메릴 부대가 퇴각로를 차단하여 일본군은 340명의 환자를 등에 업고 정글 속을 굶주림과 말라리아에 시달리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 '메릴의 약탈자'의 전훈을 살려 유명한 그린베레가 탄생했다.

물론 메릴의 약탈자 부대들도 전사자 272명 외에 열대 질병으로 980명 이상이 죽거나 후방으로 후송되었는데, 후송자 중에는 지휘관 프랭크 준장도 있었다.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몇 번씩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나야 했다고 한다.

5. 우호작전(ウ号作戰)

5.1. 조공: 하호작전(ハ号作戰)

일종의 조공으로 버마 남부에서 1944년 2월에 실시한 작전을 하호작전(ハ号作戦)이라 한다.[42]

이것도 역시 보급 부족으로 박살났다. 게다가 애초에 해당 방면은 한쪽이 바다고 다른 한쪽이 험준한 지형인지라 방어하는 쪽이 일방적으로 유리한 곳이었으므로 결국 조공의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하호 작전을 앞두고 신통하게도 94식 산포가 영국군의 허리케인 전투기를 격추하는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하호 작전 준비를 위해 여념이 없는 55 산포 연대의 진지를 향해 방심한 채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허리케인의 총격에 1개 소대가 영거리 사격으로 대응하여 박살을 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은 즉각 버마 방면군에 보고되었고, 지휘부는 임기응변의 훌륭한 사례로 전군에 전파하며 적 항공기 내습 시 가능한 모든 화기를 사용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 명령에 따라 공습시 모든 화기를 쏟아부은 부대는 자기 위치를 적에게 광고한 꼴이라 반격을 받아 전투불능이 되어버렸다.

원래 당시 근거리 대공화망은 20mm 이상의 연사력 좋은 기관포, 아니면 하다못해 대구경 기관총이나 보병용 소구경 기관총이라도 여러 정 묶어서 구성하는 게 정석적인 방법이었고, 일본군도 일반적인 상황에선 그 방식을 충실하게 따랐다.[43] 위의 일화는 정말 기적적인 특수사례 하나를 접하고, 사령부 수준에서 이러한 기적을 더 기대하면서 하위 모든 제대에 따라해보라고 지시할 정도로 모든 게 열악했던 작전 당시 일본군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5.2. 우호 작전 개시

친디트 부대의 공격으로 일본군 후방이 어지러운 가운데 우호작전(ウ号作戰)이 개시되었다. 아무튼 무타구치는 이런 구상을 하달했다.
<colcolor=#333>1. 제31사단은 남쪽에서 재빨리 국경을 돌파하여 북진, 연합군을 견제하면서 임팔로 향한다.
2. 그동안 제15사단과 제33사단은 기습적으로 친드윈강을 도하, 국경으로 향한다.
3. 견제당하고 있는 연합군의 허를 찔러 제15사단은 직선으로 임팔 동북부에 진출, 연합군을 포위한다.
4. 제31사단은 북진하여 코히마를 점령, 북쪽에서 임팔로 향하는 연합군 증원부대를 저지한다.
5. 코히마의 저지 작전에 성공하면 제 31사단의 일부를 임팔의 주전장으로 돌린다.
6. 이 공략 작전은 20일 이내(!)에 끝내기로 하고 전체의 작전 개시일은 3월 15일로 하되 그 중 제33사단의 행동 개시일은 3월 8일로 한다.

지도상으로는 그럴 듯해 보인다. 대정글을 통과해 코히마를 급습하여 영국군의 증원을 차단하고 신속하게 임팔을 공격한다는 계획은 말 그대로 현란한 보병기동을 보여주는 작전으로,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영국은 일본군의 양동작전에 걸려 코히마를 빼앗기고, 임팔까지 포위섬멸당할 위기에 놓였을 것이다.

문제는 맨 윗 문단에서부터 언급했듯 보급과 전력유지였다. 이 임팔 작전의 기한은 병사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식량에 맞춰서 작전 기한을 정한 것인데, 당시 병사들에게 분배된 짐은 소총탄 240발, 수류탄 6발, 그리고 20일 간의 식량, 조미료까지 총 40 kg의 군장을 짊어지고 이 신속한 기동전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최소한의 무장만 하고 가도 버거운 기동을 이토록 과중한 짐을 짊어지고 하라는 것은 병사들 입장에서 말 그대로 지옥이 다름 없다. 현대전 들어와서 병참이 작전의 중요 요소를 넘어 작전의 한계나 성패를 좌우하는 수준인데, 현대전에 걸맞게 보급수준에 맞춰서 작전목표를 정하는 것도 아니고 미군처럼 작전목표에 맞춰서 보급을 해주는 것도 아니라 보급이 안 될 걸 알면서도 작전목표는 무리한 수준으로 정해놓고 알아서 실행하라는 전근대식 개념으로 회귀한 것이다. 옛날 군대는 변수가 워낙 많다보니 요행이라도 기대할 수 있지, 2차 대전 시점에서 그런 게 될 리가 있나. 일본군 내부에서도 보급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국 조직 전체적으로는 보급이라는 개념이 무시당했으니 몇몇 사람이 말을 꺼낸 정도로 일본군의 멍청함이 덮어지지는 않는다.

당연히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친드윈강을 건너면서 각 사단은 사단이 데리고 있던 보급품 운송용 동물의 약 3분의 1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아라칸 산맥[44]으로 접어들자 병들어 죽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고, 총성이나 포성에 놀라 도망가고 하면서, 동물의 손실 수는 계속 늘어났다. 결국 제31사단의 경우 친드윈 강 도하 이전에는 125마리가 있었지만, 21일 후 코히마에 도착했을 때는 겨우 5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도착한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뿐이었다. 더구나 병사들이 짊어진 무게가 일본인들의 평균 체격 기준으로 벅찬 40kg에 육박한지라[45] 정글에 몰래 무거운 장비를 조금씩 버렸는데, 문제는 이 버려진 물건들 중 화력지원을 담당할 산포나 중화기의 부품이나 포탄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것. 저걸 다 가졌어도 빈약한 화력의 일본군은, 약간이나마 갖고 있던 중화기조차 포기한 꼴이다.[46]

이 임팔 작전에 참가한 3개 사단 중 가장 약체로 평가되는 것은 제15사단이었다. 태국에서 도로건설 작업을 하다가 미얀마까지 자력으로 행군해 온 데다가 중화기를 비롯한 각종 화기도 부실하여 야포라곤 31식 산포 18문을 보유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사단 전체가 작전에 투입된 것이 아니어서 임팔 작전에 나선 사단장이 자기 사단의 병력을 전부 장악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작전 개시 직전에 사단의 중추인 작전주임참모와 보병연대장이 서로 보직을 맞바꾸는 괴상한 인사이동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무타구치의 질타와 독촉에 못 이겨 무리한 돌진을 강행, 3월 28일 임팔의 북면에 가까스로 도달했다. 이는 코히마와 임팔 사이를 차단하고 연합군 보급에 큰 위협을 가하는 것이었다.

5.3. 강태공 영국군의 낚시질과 낚인 일본군의 오판

영국 제14군 사령관 윌리엄 슬림 중장은 즉시 대비책을 마련했다. 슬림 중장은 우선 아캡 방면에 있는 제15인도군단 중에서 제5, 제7인도사단을 빼내어 임팔과 디마푸르에 파견하는 동시에 제33인도군단에서도 제2사단과 제50인도전차여단을 증파하는가 하면 제14군의 예비대 인도전차사단도 이 지역에 투입했다. 그리고 현지의 제4군단에게도 임팔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제4군단 예하의 제17인도사단은 이미 일본군에게 퇴로가 끊겼고 제23인도사단도 우크룰 남쪽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이어 제23인도사단은 암호문서 등을 소각한 뒤 그 일부가 탈출에 성공했으나 일본군 제33사단의 사사하라 연대와 대치중인 제17인도사단은 좀처럼 퇴로를 발견할 수 없었다. 제17인도사단은 개전 초부터 일본군 제33사단과 맞서 싸워왔으며 지난 2년 동안에는 무려 30회 이상이나 교전한 경험 많은 베테랑 부대였기에 동남아시아연합군 최고사령관 해군 대장 마운트배튼 경[47]도 부대의 탈출을 독려하려고 했다.

이때 제4군단장인 제프리 스쿤스 중장은 이 사단을 철수시키고자 기발한 구상을 하였다. 제23인도사단 중 1개 연대만을 철수시킨 후, 나머지 병력으로 제17인도사단의 구원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3월 14일, 토이톰 고지의 어느 산허리에 진을 치고 있던 해당 연대 철수 지시가 내리자 연대는 수많은 트럭과 전차를 이끌고 임팔로의 철수를 시작했고, 바로 그 철수 행렬이 산허리를 거의 통과하고 있을 때 일본군 정찰부대가 그것을 발견했다. 정찰부대가 이 사실을 곧 연대 본부에 보고하자, 연대장 사쿠마 대좌는 제33사단장 야나기타 중장에게 "영인군이 총퇴각했다"고 보고했다.

그 말에 사단 사령부는 전선 근처까지 이동했는데, 철수했다던 제17인도사단은 철수는커녕 압도적인 포화를 퍼붓고 있었다. 많은 전차가 전차포로 일본군의 최일선 진지를 쑥밭으로 만드는가 하면, 날아드는 보고는 '영인군의 증원부대가 계속해서 전선에 도착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3월 23일 밤, 야나기타 중장은 사사하라 연대로부터 문제의 전보를 받았다.
본 연대는 암호서류를 소각하고 군기를 파기한 후 전원 옥쇄의 각오로 분투하고 있음.

이 전보를 보고 야나기타 사단장은 '연대 전멸이구나!'라고 생각해 철수를 명령했지만 사실은 '죽을 때까지 싸워보겠다.'는 의미였다. 그 덕에 영국군은 무사히 철수했다.

5.4. 반성 전보

인도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자 무타구치는 길길이 날뛰었고, 27일에는 야나기타 중장으로부터 후일 '반성전보'라고 불리는 전보까지 받았다.
본 사단은 군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함. 그러나 다른 사단 방면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근본대책을 강구해주시기 바람.

①본 사단 방면의 정보는 거의 대부분이 비보이며 금후의 작전은 극히 곤란할 것이 예상됨. 따라서 20일 만에 임팔을 공략한다는 것은 절망적 상태임. 우기의 도래와 보급의 곤란은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

②아군의 편성과 장비는 극히 열세에 있고 적군과 비교한 종합적 전력이 불충분하므로 헛되이 인명을 소모할 뿐이라고 판단됨. 이제 임팔 공략은 불가능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고 있으며 설령 그 공략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금후의 방어는 어려울 것임.[48]

③미토키나 방면에 적의 공정부대가 투하된 것은 거의 진공 상태에 이르고 있는 미얀마 본토를 위태롭게 할 것임.
야나기타 장군의 전보는 사실상 작전 중지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전보였지만, 무타구치는 이를 무시하고 야나기타에게 감정이 그대로 실린 명령문을 보냈다. 이 전문을 받고 야나기타 중장도 감정적으로 거부의 답문을 보냈다. 야나기타의 답문을 받고 무타구치는 분노하여 다시 전진을 명했다. 야나기타도 지지 않고 자기 주장을 고집하는 답문을 보냈다. 작전 이전부터 무타구치는 자기 의견을 따르지 않는 사단장들을 무시했고 심지어 도상훈련 때는 사단장 없이 참모들로만 훈련을 했다.

결국 명령을 받은 대로 전진을 계속했지만, 그는 부대를 3대로 나누어 선대가 먼저 목적지를 정찰하고 중대가 따라가고 후대는 선대와 중대가 떠난 뒤 얼마동안 남아서 후방을 살피는 안전 위주의 전진이었고 결국 4월 22일, 무타구치는 격노하여 직접 제33사단을 찾아 사령부에 뛰어들어 참모들의 눈 앞에서 일반 사병을 대하는 식의 거친 말투로 야나기타 중장을 몰아붙였다. 선임 장교가 후임 장교를 갈구는 일 자체는 흔하지만 갈굴 때는 부하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해야만 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후임 장교의 리더십이 큰 타격을 받으며 지휘를 제대로 할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장교를 갈구는 짓은 금기사항이다.

결국 분노가 폭발한 무타구치는 야나기타 중장을 해임시키고 그 후임으로 자신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인물인 다나카 중장을 제33사단장으로 앉히기로 결정했고 이런 사태가 전개되자 버마 방면군 사령관 카와베 마사카즈 중장은 난처해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사단장을 교체하는 이런 일이 있어도 되는가? 하지만 전선 사령관인 무타구치의 의견을 중시하기로 하고 5월 15일자로 야나기타 중장을 해임하고 다나카 중장을 후임자로 임명했다. 그리고 제15사단 야마우치 사단장 역시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시바다 중장을 임명했다. 야마우치 중장이 해임된 이유가 표면상으로는 폐병을 앓아서였지만, 실제로는 무타구치의 작전에 은근히 반대했다는 것이었다.[49]

5.5. 비센푸르(Bishenpur) 전투

가까스로 33사단은 임팔 평야의 입구까지 도달했지만[50] 비센푸르 요새에 부딪친 제33사단은 우선 남아있는 소형 전차를 앞세워 요새를 돌파하고자 했으나 영국군의 포화 앞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신임 다나카 중장은 남아있는 화력을 모두 집중하여 요새를 격파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제33사단의 포병 화력은 불과 150 mm 유탄포와 100 mm 캐논포 몇 문이 고작이었고 그것도 영국군의 포화 앞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으며 심지어 반자이 돌격으로 이불 속에 수류탄 여러 개를 싸서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공격을 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고, 마침내 비센푸르 요새의 언덕을 일본군의 시체로 메워 그것을 엄폐물로 삼아 진지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러일전쟁 당시의 노기 마레스케의 전법, 즉 203고지의 재현이 시작됐던 것이다. 결사대가 모집되어 자살 돌격을 감행했지만 비센푸르의 방어선은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았다. 6월로 접어들자 포탄이 바닥나고 병사들은 굶주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영국군의 병력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었다. 보급 물자를 실은 수송기가 영국군 진지의 상공에 대편대를 이루어 왕래하는 모습이 일본군의 눈에도 띄었다.

결국 다나카 중장은 긴급지원을 요청했으나, 대본영은 이런 전보로 답신했다.
전투기 24대를 미얀마 전선에 파견할 것임. 단, 열흘간만 사용 후 즉시 원대로 복귀시키도록 할 것.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전투기 24대는 본격적으로 공중전 몇번 치르고나면 얼마 남지도 않을 전력에 불과하다. 이런 수준의 지원을 지원이랍시고 시간 제한까지 주면서 준다는 것 자체가 대규모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항공전력을 배제하고 싸워왔다는 소리다.[51] 물론 독일 공군이 독소전에서 전투기 400대 전후만으로 소련 공군을 탈탈 털어먹기는 했지만, 독일 공군은 최소한 소련 공군에 비해서 질적으로는 압도했기에 가능했다. 또한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어서 소련 공군이 압도적인 숫적 우세를 바탕으로 제공권 싸움을 해볼 만한 수준은 되었다.[52] 반면 일본 항공전력은 질적으로 열세인데다가 연합군의 비행기는 3천 대가 넘어갔다.[53]

5.6. 코히마 점령과 테니스 코트의 전투

그런 와중에 임팔 작전의 최우익을 담당한 제31사단의 임무는 단 2가지였다. 하나는 코히마 점령, 또 하나는 임팔로의 증원군 저지였다. 이 코히마는 인도 아삼주의 수도 디마푸르과 친스키아 방면에서 오는 도로가 합쳐져 임팔로 향하는 요지이다. 따라서 코히마를 점령하는 것은 임팔로의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사토 고토쿠 중장이 이끄는 제31사단이 친드윈 강을 건넌 날은 3월 15일이었다. 여기에서 좌익 돌진대인 제31보병단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이 지휘하는 제58연대로 구성된 '미야자키 지대'가 병력 4천 명으로 코히마를 향해 본대와 나뉘어 돌진했다. 미야자키 부대가 아라칸 산맥으로 접어들었을 때 미야자키 소장은 병사들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기상천외한 발상을 해냈으니 그것이 바로 염불이었다. 인도로 가는 원정길이니 염불을 외며 산을 올라가라는 그의 명령에 일본군은 염불을 외며 아라칸 산맥을 넘었다.

미야자키 부대가 코히마 외곽에 도달한 날은 4월 5일이었다. 여기서 휴식한 미야자키 부대는 6일 새벽 4시 반에 코히마를 기습하였고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자신들의 계산보다 2주일이나 빨리 일본군이 나타난 것에 당황하여 코히마에서 부근 고지로 급히 철수했다. 이때 미야자키 연대장은 부하들의 총을 몽땅 버리게 한 다음 노획한 영국군 무기를 장비시켰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아주 현명한 조치였다. 사실상 아리사카 제식소총의 탄약 보급은 끊긴 상태로 상대가 흘린 보급물자를 주워다 싸우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탄약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D_003483_tennis_court_at_Kohima.jpg

이 때 테니스 코트의 전투가 일어났다. 테니스장 양 끝에 서로 참호를 파고 서로 총격전을 벌이고 수류탄 던지기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임팔 전투에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제대로 싸웠다고 할 만한 전투였기 때문이다. 즉, 이 외의 전투는 전부 일방적인 학살이나 자멸이었다.

결국 압도적인 영국군의 화력에 부대는 밀려버렸고, 공방전 열흘 만에 일본군은 절반으로 줄었고 식량도 다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일본군은 이제 영국군의 수송기가 뿌리는 보급 낙하산이 하루빨리 자기네들 쪽으로 떨어지기만을 기다려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보급이 사실상 사라진 일본군은 이것을 '처칠 급여'라고 불렀을 정도다. 그러나 처칠 급여의 양 자체가 사단급의 인원에게 충분하지 않았고, 또한 연합군도 바보가 아니라서 눈에 불을 켜고 보급품을 주우려는 일본군을 필사적으로 찾아다녔으며, 아예 적당한 위치에 떨어진 보급품 주변에 숨어 기다리며 저격 등으로 인간낚시를 시도하는 경우들도 많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보급품이 모자라니 저런 상황이 예상되더라도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주워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며, 심지어 저격이 들어오는 와중에 처음부터 일정 숫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러시안 룰렛처럼 마치 여러 명이 동시에 달려나가 주워와야 하기도 했다.

더욱 불쌍한 것은 병사들을 갈아넣어가며 처칠 급여를 어찌어찌 확보한다 해도 식량, 탄약, 무기, 의료품이 아닌 연합군 모자나 피복, 텐트 등이 상자 안에 가득해서 일본군 병사들이 좌절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는 거다.[54][55] 더구나 일본군 병사 상당수가 저학력이거니와 일본 정부가 귀축영미를 주장하며 외국어 교육을 금지한 것 때문에 영어를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 많아 라벨을 읽어보고 선별해 주워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56] 물론 설혹 읽을 수 있었더라도 총알이 빗발치는 혼란스런 마당에 선별할 시간이 있었을 리가 없다.

결국 굶주림과 백병전으로 미야자키 부대는 전멸해버린 중대만 셋이나 있었다. 미야자키 부대의 병력은 5월이 되자 원래의 4분의 1로 감소한 형편이었고, 사토 사단장은 미야자키 부대에게 자살 돌격을 전격 금지하고 방어 태세로 들어라가고 명령했다.

6. 참패

6.1. 공격 중단

전선 보급로는 완전히 막혀버렸고 제5비행사단장 다조에 중장에게는 사토 고토쿠 중장으로부터 애처로운 전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탄약 1발, 쌀 1톨도 없이 적의 식량을 탈취하여 전투를 계속 중. 이제 최후의 기대를 공중수송에 걸고 있을 뿐임.

이어서 제15사단장인 야마우치 마사후미 중장이 병을 얻어 지휘를 못하자 지휘권을 이양받은 시바타 중장의 전보도 날아들었다.
이제 본 사단은 호우와 진흙탕 속에서 굶주림과 질병 때문에 전투력을 상실하고 있음. 제1선 부대로 하여금 이런 지경에 빠지게 한 것은 실로 제15군과 무타구치의 무능이 그 원인임.

4월 28일, 무타구치는 랑군에서 파견된 방면군 군수참모 우시로 소좌 앞에서 마침내 임팔 작전이 진행 불가능하다고 시인하고야 말았다. 이윽고 우기가 닥쳤으나 제15군 예하 병력에게 총탄 한 발, 쌀 한 톨마저 보급할 수 없었다.

4월 29일, 쇼와 덴노의 생일(천장절)이었다. 무타구치가 임팔과 코히마를 점령하고야 말겠다고 호언장담한 날이었다.

4월 30일, 우시로 소좌는 랑군으로 돌아가자마자 전선시찰을 목적으로 대본영에서 파견한 스기다 참모에게 임팔 전선의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임팔 전선이 가망없음을 보고한 후 5월 말까지 작전을 계속하되 그 뒤에도 전황에 변화가 없다면 작전을 중지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카와베 등 방면군 사령부의 막료들이 말한 임팔 전선의 승리 가능성과는 반대되는 의견인지라 스기다는 우시로에게 자세한 현지상황을 듣고 나서야 그의 말을 믿고 대본영에 보고했다.

그러나 이 보고를 듣고 현지로 파견된 방면군의 주임참모와 남방총군의 작전주임참모는 작전수행 가능이란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즉, 무타구치는 속으로는 임팔 작전이 성공할지 자신조차도 부정적으로 판단했지만, 상급부대 앞에서 허세를 부렸던 것이다.

6.2. 연합군의 반격

일본군이 이런 곤란에 허우적거릴 때 스장군이 지휘하는 중국군 제38사단과 제20사단은 천천히 카마인에서 모가운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선발대인 제5307연대는 5월 17일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티나 비행장을 탈환했다. 이와중에 윙게이트 장군이 비행기 사고로 전사했지만 친디트 부대는 전의를 잃지 않았고 제14여단을 증원하여 육상으로 남하하는 제16여단과 호응하여 철로 폭파와 함께 핀봉 부근의 일본군 군수품 창고를 불살랐다. 일본군의 혼란을 확인한 마운트배튼 제독은 5월 11일, 제14군 사령관 슬림 중장에게 일본군 제15군에 대한 총공격을 명했다.

이때 일본군들은 이런 노래를 불러댔다.
1절: 낮에는 비행기 밤에는 박격포,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 아래로
육탄공격대는 오늘도 나가는가,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아아 코히마[57]

2절: 비 내리는 아라칸을 끝도 없이, 어깨에 들것 메고 방황하지만
굶주린 배를 채워줄 보급이 없어, 오늘도 끼니를 찾아 이동한다네

(후렴구) 이거 정말 고생이에요.

일본 본토에서 도조는 5월 17일, 쇼와 덴노에게 "작전진행은 순조로우므로 불굴의 정신을 다하여 건투에 임하겠나이다."라고 적힌 보고를 올렸다.

이미 4월 말에서 5월 중순에 걸쳐 남방전선을 시찰하고 돌아온 하타 히코사부로 참모장이 '임팔 작전의 미래는 극히 곤란해 보인다.'는 시찰 보고를 올렸지만, 도조는 이 보고를 듣자마자 '나약한 생각'이라며 버럭 화를 냈다. 일본 본토에 화려하게 전해졌던 작전 초기의 성과는 전황의 악화로 정권이 오늘내일하던 도조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고, 임팔 작전의 성공 여부에 도조의 정치 생명이 달렸으므로 하타가 시사한 작전 중지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6.3. 제31사단장, 항명 선언

뼈만 남은 부하들이 굶어 죽어가면서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는 참상을 본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은 결국 폭발, 제15군에 식량보급을 요청하는 전보를 치고 곧이어 이번 작전의 잘못을 낱낱이 열거하고 즉시 작전중지를 요구하는 전보를 쳤다. 이 전문에는 사토의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제15군의 답신에는 보급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이 단지 공격을 계속하라는 명령만 있을 뿐이었다.
보급을 이유로 철수를 요청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음. 무슨 일이 있어도 현 위치를 사수할 것. 임팔 점령 후, 본 군은 반드시 귀 사단이 코히마를 점령한 노고를 보상해줄 것임.

당시 31사단의 상황은 무기와 식량이 없어서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즉 무타구치는 31사단에게 전차와 항공기를 몰아오는 영미군을 맨몸으로 막으라고 한 것이었다. 이 정신 나간 전보에 사토 중장은 다음과 같이 답신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 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 가는 중대 요인이 되고 있음. 눈앞의 본 사단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으로 화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이렇게 전문이 계속 오가자 15군 참모들이 5월 28일 사토 중장을 달래기 위해 찾아왔지만 오히려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느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야. 바로 너희들 제15군이란 말이다!" 하고 길길이 날뛰면서 규탄하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 결국 사토 사단장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 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질러 버린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머저리 집단 3개가 있다. 제15군과 미얀마 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58] 이런 머저리들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5월 31일 밤, 영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고 코히마를 지키고 있던 마지막 부대가 최후를 알리는 고별 무전을 보내오자 사토는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먼저 '부상병 1500여 명을 후송하라.'고 명한 뒤, 좌익부대장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소장에게 그나마 멀쩡한 병력 600명을 맡겨 후퇴 엄호를 명하고, 6월 3일 사단 내 각급 간부를 소집하여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때 미야자키 소장은 전혀 일본군스럽지 않은 작전을 통해 31사단을 무사히 탈출시켰고 엄호부대도 탈출에 성공했다.

그렇게 제31사단의 독단 퇴각이 시작되었다. 제31보병사단의 중앙돌파부대인 제138연대장인 토리카이 츠네오 대좌는 코히마 방면에서 철수할 당시 피로로 인해 무거운 소총을 버리는 병사 뿐만 아니라 군복 단추까지 뜯어 무게를 줄이려던 병사들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그나마 31사단이 다른 사단보다 순탄하게 후퇴함은, 31사단이 전진할 때 주민들을 약탈하지 않고 교섭을 통해 정당한 방법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물자를 입수한 덕이었다. 그 때문에 31사단이 패퇴할 때도 원주민들은 그들을 가엾게 여겨 약간의 식량을 제공해주거나 휴식처도 내주었지만, 다른 사단들은 진군 과정에서 원주민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획득했기 때문에 철수 과정에서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습격을 받기도 했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퇴각이었던 것이다.

이 사토 고토쿠의 독단 퇴각은 옛 일본군 역사에서 항명 1호 사건으로 꼽힌다. 사토 고토쿠가 얼마나 극적인 결단을 내렸는지 잘 알 수 있다.

6.4. 항명의 충격

31사단 병사들에겐 사토 고토쿠의 퇴각 결정이 희소식이었지만, 무타구치에겐 날벼락이었다.

6월 6일, 버마 사령관 카와베 마사카즈가 무타구치를 찾아왔지만 둘 다 아무 말도 못했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59] 그 이유가 뭐였는고 하니…
카와베: 무타구치 중장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무타구치: 나는 카와베 장군의 참된 심중은 작전 지속에 대한 나의 생각을 떠보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장군에게 실토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먼지투성이인 내 풍모를 보고 장군이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랐다.

카와베: 나는 랑군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귀기 어린 빗속에서 일선을 지키고 있는 장병들, 특히 파렐 전선에서 악수를 나눈 인도 국민군 장병들의 모습이 역력히 떠올랐다. 만일 냉정하게 이 전황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미 이때 작전 중지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나의 생각 이외에보다 더 큰 성격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카와베: 이 작전은 내 시야를 벗어나 뭔가 커다란 의미가 있다. 이 작전에는 일본과 인도 양국의 운명이 걸려있다. 찬드라 보스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즉, 병사들이 실시간으로 사상당하는 와중에도 지휘부에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지 실토하길 꺼리며 그저 무언으로 상부가 이를 지레짐작해주길 바라며 시간을 허비한 것이다. 사실 그의 이런 알아맞추기 경력은 과거 할힌골 전투 당시 전선 시찰 중인 대본영의 장군 앞에서 알랑한 자존심 하나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다 결국 아무 말도 못했기에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허비되는 동안 사토 고토쿠 휘하의 31사단은 후퇴지에도 식량과 탄약이 없자 분노를 곱씹으며 계속 후퇴했다. 급기야 사토 중장은 무타구치 사령관을 만나겠다며 사령부로 향하지만 정작 무타구치는 자결하라며 단도만 남겨놓고 숨어버리는 추태를 부렸고, 사토 중장은 이를 갈며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며 그 칼을 들고 나갔다.

결국 6월 20일, 무타구치는 사토를 해임했지만 사토 중장에게는 이미 각오하던 바였거니와, 오히려 군사재판이 열리면 제15군과 무타구치의 잘못을 낱낱이 규탄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무타구치는 사토의 입을 막기 위해 상부에 정신병에 걸렸다고 허위보고해 그를 연금시켜 버렸다. 이 외에도 당시 일본의 관료제도의 구조상 사토 중장의 지위를 정식으로 처분하기가 어렵단 이유도 있었다.[60]

사토는 1959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단으로 철수한 불명예스러운 군인'이자 '임팔 작전 패배의 원인'이라며[61] 높으신 분들로부터 비난받았지만, 31사단의 부하들은 그가 자신들을 살렸다며 감사의 뜻으로 추모비를 바쳤다. 그리고 현재 그 항명 행위는 오히려 비난받을 짓이 아닌 부하들을 살린 올바른 행동으로 호평받는다.

전후 무타구치는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진술했다.
저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타구치를 심문하던 미군 군사경찰은 이 어이없는 말을 듣고는 빵 터져서 5분이나 웃어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내용은 언론에 그대로 공개돼 엄청난 비웃음을 샀다.[62]

6.5. 작전 중지와 백골가도

5월 말. 임팔 북부를 공략하던 일본군 제15사단도 병사들이 인근 마을을 약탈(할 수 있던 일본군 부대는 차라리 운이 좋았을 정도)하거나 보급품을 자체 조달하기 위해서 진지를 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리고 6월 22일 33인도군단이 포위망을 뚫고 임팔의 제4군단과 상봉함으로서 일본군의 우호작전은 사실상 끝이 났다.

무타구치 중장은 이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일본군 제33사단에 보충병 1개 연대를 보강시켜 인도군 제17사단 지역을 돌파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일본군 제15사단과 야마모토 부대도 더 이상 공격을 펼칠 능력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았다.

6월 말, 마침내 무타구치는 작전 중지를 결정하고 그 뜻을 방면군에 올렸다. 그러나 방면군은 이런 소극적인 의견을 접할 줄은 몰랐으며 오히려 제15군에 계속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 이유가 정말 가관인데, 무타구치가 절망과 죄책감에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 카와베 방면군 사령관이 일부러 공격 명령을 내려 무타구치의 기분을 맞춰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타구치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부대가 움직이지도 않는 사태에 직면한 상황에서 작전 중지 외에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없었다. 방면군은 마닐라에 주둔하고 있던 남방군에 고급 참모를 파견하여 작전 중지의 의향을 전달했다. 7월 2일, 마침내 남방군은 임팔 작전의 중지를 방면군에 명령하게 된다. 결국 작전 개시 4개월이 지난 7월 3일 우호 작전을 중지하고 투입했던 부대를 모두 철수시켰다.[63] 가져갈 수 없는 무기와 장비는 모두 버렸으며, 심지어 움직일 수 없는 중상자와 병자들도 버리고 철수를 시작했다. 하지만 거동이 가능한들 상당수가 굶주림과 말라리아와 이질성 장염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상태라 철수는 더딜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수풀과 공중에서 날아드는 영국군의 일방적인 공격에 당하거나, 정글에 우글거리는 호랑이와 표범의 먹잇감이 되거나, 몇몇은 절망 속에 총칼이나 수류탄 등으로 자살하고, 심지어 홀로 낙오되거나 죽어가는 병사들을 상대로 식인까지 암암리에 자행되는 등[64] 사실상 무질서한 패주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영국군의 기동병력이 추격할수록 그만큼 더 많은 전사자와 아사자, 병사자의 시체들을 마주했는데, 열대 우림의 습하고 더운 기후와 파리 떼 때문에 이들의 시체는 사흘만 지나도 피부가 다 썩고 파먹혀서 육탈(肉脫)[65]이 된 상태였다. 게다가 코를 찌르는 악취까지 더해져, 영국군전염병 창궐을 우려하여 추격을 멈춘 뒤 생사를 불문하고 석유를 끼얹어 길가에 널부러진 일본군들을 소각처리했다. 한편 패주중인 일본군들 역시 하얀 뼈가 드러난 동료들의 시체들을 마주하고 '백골가도(白骨街道)' 또는 '야스쿠니 가도(靖國街道)'라고 불렀다. 전사자의 이름은 모두 야스쿠니 신사의 영새부에 남으니까 죽어서 야스쿠니로 가는 길이라는 뜻이다.[66]

7. 작전 결과

보급 문제와 무타구치 렌야의 막장 마인드가 아니었으면 이겼을 수도 있는 전투[67]를 결국 일본군의 참패로 끝을 맺었고, 이로 인해 연합군의 버마 인근에서의 작전은 예상보다 6개월 정도 일찍 끝났다.

일본군 15군 예하 사단들은 전사자 3만 2천 명, 병사/아사 2만 명, 부상자 2만 3천 명으로 무려 80%를 넘는 사상자를 내 말 그대로 궤멸됐다. 보통 군사학적으론 사상자가 전체 병력 중 20~30%면 전투 불능, 즉 전멸로 판정이 되기에 80% 정도면 진짜 전멸이 아니라 궤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한편 연합군의 피해는 사상자 17,500명 정도로 일본군에 비해 1/4 정도에 그쳤다. 물론 이 병력도 전체 병력 중 50% 정도이기에 막대한 피해이긴 하지만, 적어도 일본군처럼 80% 정도가 사상하진 않았으니 연합군의 승리라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 중에서 진짜로 전사한 사람들은 훨씬 적고, 대부분은 전투 중 부상당하거나 질병으로 전투불능 상태가 됐다.[68]

태평양 전쟁 전체에서 중국 전선을 제외하고 이 임팔 전투보다 일본 육군의 피해가 더 큰 사례는 필리핀 탈환전오키나와 전투 뿐이다. 그나마도 필리핀과 오키나와는 일본군 본토를 공략할 수 있는 거점 지역 혹은 일본의 본토란 중요성 때문에 일본과 미국 모두 단단히 준비해서 격전이 벌어진 곳이였던 반면, 여기는 말 그대로 일본군이 자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이 전투가 얼마나 졸전이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봐도 무방하다.

임팔 작전이 실패하자 그 전까진 호각지세였던 일본군의 버마-벵갈 전선은 붕괴했고, 1945년 3월에는 아웅 산 장군이 이끄는 버마국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시 버마를 맡았던 스틸웰 장군도, 무타구치만큼은 아니지만 전투 태세도 갖추지 못한 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일관하며 일본군을 얕잡아보고 무리한 공세를 추진하다가, 1941년에 버마를 날려버리고 걸어서 버마 국경을 넘어 달아나는 추태를 저지른, 무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스틸웰은 이 치욕을 씻겠다고 중국군 예비대 수십만을 멋대로 차출해와서 기회를 엿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임팔 전쟁이 시작되자 버마 탈환 노래를 불러대던 그 오만한 근성을 못 버리고 버마의 일본군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며 공격했는데, 실제로 버마의 일본군은 스틸웰 주장의 3~5배에 달했다. 하지만 때를 맞춰 무타구치가 자폭해준 덕분에 그는 역사에서 까일 거리를 겨우 하나 줄였다.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철수 이전에 퇴각로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에 편입되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되는 선에서 끝났다. 그의 상관들 또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징계를 받지 않았는데, 한술 더 떠 스기야마 하지메는 육군대신이 되었고, 직속상관 가와베 마사카즈는 대장으로 진급했다.

사토 중장은 군법회의에 회부될 시 무타구치와 그 일당의 추태를 낱낱이 까발릴 작정이었으나 정작 대본영에서는 사토 중장에게 판단력상실이라는 진단을 내려 불기소로 처분하고 예편시켰다. 이 와중에 병을 얻어 후송된 야마우치 마사후미 15사단장은 임종하기 전 이렇게 말했다.
공격할 탄환도 없고 지금은 호우와 진흙 속에서 병과 기아에 전투력을 상실했다. 제1선부대가 처한 이런 현실은 군과 무타구치의 무능 탓이다.

종합하자면 임팔 작전이 참패로 끝나 버마-뱅갈전선의 일본 육군 전반을 상실했음에도 실질적으로 지도층은 개선의지를 느끼지 못했다.이는 제15군, 버마방면군 등 상부조직과 군 장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결과적으로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임팔 작전의 실패 책임과 소재를 육군 상부가 스스로 감추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 결과 이 이후 일본 육군은 위신은 보전하는 대신 필리핀 탈환전부터 오키나와 전투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에 배치된 일본 육군 전체가 산산조각 나면서 괴멸당하고 말았다.

독일벌지 전투(아르덴 대공세) 역시 보급을 약탈로 때우려다가 참패했지만, 여기서 문제가 된 보급품은 석유였을 뿐 식량은 멀쩡하게 보급이 되었다. 하물며 임팔 작전은 석유는 물론이고 식량까지도 보급을 안 해줬는데 아르덴처럼 반이라도 성공할 리가.

8. 기타

8.1. 무타구치 렌야의 각종 일화

8.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전

한국 독립운동의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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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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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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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 군대인 한국광복군 대원 9명이 미얀마 전선에 투입되었을 때 영국군과 함께 바로 이 임팔 전투 당시 활동하였다고 한다. 주로 심리전을 전담했으며, 포로의 심문이나 통역, 일본어 번역, 선전물 제작 등을 맡아 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 최봉진, 김상준, 나동국, 박영진, 송철, 김성호, 이동수. 부대의 명칭은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功作隊)'이다. 명칭의 뜻은 '인도 - 버마 전선의 공작부대'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영국 육군 중 ~ 대위 계급을 부여받고 피복 또한 영국 육군 장교와 동일한 것을 착용했다. 인면전구공작대 역시 이러한 대우에 걸맞은 활약상을 보여줬는데,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는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여 4개월간 교육 후 1944년 3월 임팔 전선에 투입되었고, 1944년 5월, 포위된 줄 알고 현지에서 죽을 각오로 싸우려던 영국 육군 17사단에게 포위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문응국 대원이 감청을 통해 알아내어 통보해, 퇴각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전력을 보전케 하는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인면전구공작대 파견 대원들은 기본적으로 영어일본어 모두 구사할 수 있었으며, 적진 교란방송, 일본군 포로심문, 문건 번역 등 심리전에 투입되었다.

임팔 - 코히마 전역에 파견된 IFBU(영국 특수작전집행부 산하 인도지구 전지선전대) 소령 알프레드 트루트웨인 소령의 기록에는 광복군 대원들이 일본어 전단 작성뿐만 아니라 노래에도 해박하여 일본군의 향수병을 자극할 노래를 골라 틀었다 한다. #

실제로 일본 육군 15사단 소속 조선인 군속들이 선무공작방송을 듣고 단체로 투항하거나, 육군 소대장(소위) 1명이 소대원들 일부와 함께 항복하러 오는 일도 있었다. 이들은 또한 일본 육군의 소총 사거리 내에서 직접 선무 방송을 하는 등, 최전방에서 다른 영국군들과 함께 발로 뛰었다.

이후 영국군은 루이 마운트배튼 제독이 직접 이들을 치하할 만큼 호평하며 지속적으로 충칭의 임시정부에 인원 증파를 요청하였으며, 중화민국 정부에 의해 불허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을 임시정부 차원에서 1945년 3월 파견하려 했지만, 중화민국 정부가 거부하여 이 제안은 무산되었다. 남은 공작대원들은 1945년 5월, 연합군의 랑군 탈환전에 종사하였으며 1945년 9월 10일, 전원 충칭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영국군은 이들이 종전 이후에도 업무를 맡아주길 희망할 정도로 인면공작대를 끝까지 신뢰했다.

임팔 작전에서 무다구치 렌야의 삽질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한국의 역사밀리터리 마니아 팬덤 사이에선 이 인면전구공작대와 연결해서 반농담 삼아 아예 렌야를 '일본군 내에서 교란 작전을 편 인면전구공작대 소속 스파이'로 설정하는 드립도 유행했고, 심지어 광복군 일원이라는 드립도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팔 작전 후 버마 전선의 전면적 붕괴를 막기 위해 44년 6월 증파된 일본군 49사단은 조선 경성부(용산)에서 불과 5개월 전인 44년 1월 신편된 사단으로 이런 사유로 사단 정원 1만 7천명 중 20%인 약 3400명은 조선인 군인/군속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49사단은 이후 벌어지는 버마 전역에서 차츰 소모되어 친드윈강 인근에서 전멸하게 된다. 자칭 작전의 신이자 버마 전선을 말아먹은데 기여한 츠지 마사노부의 회고록에 49사단의 조선인 병사에 대한 언급으로 외모나 전투 시 동작 등 평소에는 전혀 구분이 안 되지만 부상당해서 야전병원에서 고통으로 "아이고!" 라고 하면 비로소 조선인인 걸 알게 된다는 군의관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선에 선 광복군들과 반대편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조선인 병사들과 일본군 위안부들의 복잡한 심경과 고뇌가 우리 민족에게 있어 버마 전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8.3. 현대 일본에서의 임팔 작전의 의미

여기까지 읽었으면 임팔 작전이 얼마나 무모하고 한심한 작전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사국인 일본에서도 물론 마찬가지인데 그런 관점에서 현대 일본에서는 비군사적인 분야에서도 '무모하거나 불필요한 계획을 어거지로 실행하는 것' 혹은 '완전히 망한 계획'등을 임팔 작전으로 비유한다. 인터넷 은어 정도가 아니라 기성 언론에서도 쓰는 표현이다. 다음은 몇 가지 예시 기사.

「헤이세이의 30년」, 일본은행의 잃어버린 영광=불운 연속의 끝에 임팔 화
[내각 개조 · 당의 새로운 임원 인사] 이나다 도모미의 복권과 임팔 작전
처음부터 “임팔” & 졸속한 이민론=정치 주도하의 관료의 존재 방식

9. 참고 동영상


영상에서 무타구치의 대사를 맡은 성우의 목소리(다큐멘터리 영상 20분 2초부터~)가 쓸데없이 진지해서 더욱 큰 웃음을 주는 게 사실. 꽤 유익한 영상이니 한번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이하의 항목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스탭롤 성우 명단을 보면 3대 호카게 사루토비 히루젠 역을 담당한 원로 베테랑 성우 시바타 히데카츠가 있다. 사토 고토쿠역.지옥소녀의 거미역과 목소리가 같다. 이외에도 미야우치 코헤이, 사카 오사무, 야다 코지등 거물급 성우들이 참여했다.

이 시리즈는 원래 NHK 스페셜 중 특별기획의 일환으로, 1989~91년 냉전이 붕괴되며 각종 자료가 쏟아지자 그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 총제작지휘를 맡았던 야마모토 히로시 CP는 상당히 개념찬 인물로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무능을 신랄하게 깠다. 그나마 1~3부를 제작하고 몇 달의 텀을 둔 후 4~6부를 제작, 총 6부작으로 완결지었다.

그런데 1, 3, 6부는 NHK판이 아니고 2, 4, 5, 7부는 NHK판이다. 야마모토 CP는 이후 1994년 NHK 시즈오카 국장으로 영전되었는데, 일본에서 샐러리맨의 좌천은 영전의 형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NHK를 퇴직한 후에는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교재로 반전 강연활동 등을 벌이고 있다. 웹하드 등에 돌아다니는 1, 3, 6편은 일본 극우 단체가 지원하는 업체에서 제작한 것으로 타이틀 화면에 '결정판'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들이 제작한 각각의 타이틀은 1편 '만주사변, 중일전쟁, 진주만공격' 3편 '남방작전, 두리틀 편대 공습' 6편 '루손섬 반격작전, 이오지마 전투' 이고 NHK가 제작한 타이틀은 1편 '대일본제국의 아킬레스건' 3편 '마리아나 해전 - 일렉트로닉스가 전쟁을 제압한다' 6편 '일억 총옥쇄의 길'로 총 6부작이다.
[navertv(43935629)]
[다큐] 전율의 기록 - 임팔작전 (HD완전판)

2017년 12월 10일 NHK에서 방영된 <전율의 기록-임팔 완전판>. 위의 야마모토 히로시의 다큐멘터리 이후 거의 30여년만에 만들어진 임팔작전 다큐멘터리다. 이전까지 인도와 미얀마 국경 지대는 전쟁 후 오랫동안 미지의 땅이었지만, 다큐에서 NHK팀이 양국 정부와 오랜 협상 끝에 현지 취재를 허락받았다. 직접 미얀마에서 인도 임팔까지 작전지역을 로케이션해 해당지역의 소수민족 목격자들을 직접 인터뷰했고, 당시 전투에 참여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극소수 생존장병들도 인터뷰했다.

인터뷰를 한 사람 중에는 무타구치 렌야의 손자도 있다![74] 그 외에 전사자 1만 4천여 명의 명부를 입수해 지도에 작전일자에 따라 전사자의 위치 등을 표시하고, 영국이 전후 임팔 작전에 관여한 전 계통의 인물들을 심문한 기밀문서도 입수하기도 했다.

이 다큐멘터리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당시 무타구치 렌야의 부관이었던 사이토 히로쿠니(齋藤博圀, 인터뷰 당시 96세) 전 소위인데, 이 사람은 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이유로 무타구치에게 버림받고 혼자 힘으로 친드윈강까지 왔다가 결국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겨우 생존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압권.
일본의 병사들이 이만큼 죽으면 (진지를) 얻을 수 있다, 당시 일본군 상층부가 애석하게도 (군대의) 병정들에 대한 생각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되었습니다.
이 인터뷰를 한 사이토는 2017년 당시 무려 96세였다. 70년이나 지났지만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이 말을 하면서 울컥하여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다.



2015년 NHK에서 방영된 <잊을 수 없는 전쟁의 참극: 죽음의 시베리아 포로수용소, 임팔 전투>에서 임팔작전에 참여했던 병사들의 실제증언을 들을 수 있다. 해당 영상은 패전 후 시베리와 강제노역(요시다 사다지)과 임팔작전(오츠키 쇼지로)로 구성되는데 임팔작전 부분은 10분 16초부터 감상할 것
손에 부상을 입은 사람은 이렇게 손을 올려서 기뻐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습니다.
정신력을 강조했던 사령관 무타구치와 대조적으로, 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부상을 입었으면 고통스러워해야 정상인데, 후방으로 후송될 수 있다고 기뻐한 것이다.

과거 태평양전쟁 영상물에서 비춰지는 그 모습은 용감한 병사 혹은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심으로 채워져 있었다. 반면이 영상은 왜곡된 정신력 만능주의가 허상이었음을 시사하고 국가 지도층이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음을 증명한다.





군문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2021년 밀리터리 전문가 이세환의 유튜브 채널에서 다룬 임팔작전 영상. 그간 국방TV 등지에서 임팔 전투를 다룰 때마다 무타구치 렌야가 빙의한 신내린 개그 연기를 여러 차례 보여주었던 허준을 게스트로 초청하였다. 이세환과 허준 각자 토크멘터리 전쟁사, 뉴스멘터리 전쟁과 사람, 역전다방 등의 프로그램에서 태평양 전쟁을 여러 차례 다뤄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간의 방송에서 다룬 임팔 전투의 총집편 같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10. 창작물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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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광복군 소속 인면전구공작대 9명이 영국군 휘하에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2] 2013년 4월 9일 기준 구글 검색시 임팔 작전은 4390건, 임팔 전투는 2250건이다.[3] 1970년대 연재된 소설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임팔 작전이라고 서술됐다.[4] *[5] 실제로 작전 자체는 은근 맞아떨어져서 코히마를 지키던 영국군은 밀림을 뚫고 나온 일본군 2개 사단의 공세를 보고 당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론 이 일본군은 너무 지나친 강행군으로 지쳐 도착만 했지 전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코히마 주둔군의 반격에 처참하게 궤멸되고 패퇴해야했다.[6] 영국군미 해병대 레이더스에서 모티브를 얻어 조직한 제 77 인도보병여단이자 인도 제국군 병사들, 영국군, 네팔 구르카 용병으로 이루어진 정글 유격전 부대인 친디트 부대(친테 부대)를 창설한 사람이다.[7] 사령부는 미얀마 삔우린(Pyin U Lwin)에 위치했다. "메묘" 또는 "메이묘"라고도 불린다[8] 결과론이지만, 현대 시점에서 보자면 차라리 1942년 때 바로 결행하는게 그나마 일본군의 승산이 높을 때였다. 당시 영국군은 동남아 전선이 붕괴되며 잔존 부대만 간신히 영국령 인도로 퇴각한 뒤 패잔병들을 수습하며 전열을 가다듬던 시기라 인도의 방위력이 수습을 끝마친 임팔 작전 시기보단 낮을때였다. 물론 전쟁은 기본적으로 수비쪽이 유리한데다가 임팔의 험지가 어디가는건 아니니 개고생하긴 하겠지만, 상술했듯 그런 악재를 고려해도 지금보단 훨씬 나았다.[9] 이 때 일본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의 당초 생각은 반대였지만, 계속되는 패전으로 악화되는 여론 전환을 위해 일부러 승인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0] 다만 뻔뻔하게 말 바꾼 수준은 아니고, 감히 상부의 명령을 거슬렀다고 자책은 많이 했다고 하는데 후대의 군사사학자들에겐 '초급 장교나 할 법한 생각'이라고 오히려 까인다. 사실 장성급 장교쯤 되면 안전이 확보된 후방에서 전체적인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 맞는 전술을 수립해서 지시해야 도움이 된다.[11] 청야전술이 먹힌 사례는 적군을 해당 작전 지역에 적군의 예상 시간 이상으로 붙들어 놓을 수 있을 때였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보려는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청야전술은 시전한 쪽도 상당한 피해를 입는 전략이기 때문에 무적의 전술이 결코 아니다.[12] 추위로 인한 동사와 함께 전시에 동원된 군마나 가축들이 픽픽 쓰러져 죽어가는 원인이기도 했다.[13] 마른 건초가 아니라 방목해서 풀을 뜯어 먹는 경우에 소는 하루에 체중의 10% ~ 14%를 먹어야 한다. 풀의 수분 함유량에 따라 섭취량이 달라지는데, 보통 풀 무게의 5분의 1 정도를 섭취한다. 600kg 정도인 평범한 소라면 최소 하루에 풀 60kg을 먹고 12kg을 섭취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이런 경우 하루 종일 풀만 줄창 뜯어먹는다. 소가 1천 마리라고 가정하면 그 지역의 풀 60톤이 하루 만에 사라진다. 유목민들이 목초지를 찾아 계속 이동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고, 유목민들이 소보다 적게 먹는 말과 양을 주로 키우는 이유이기도 하다.[14] 수송용으로 쓰이는 종인 노새를 일반 보급에 운용하는 데에도 전용 마초 수송 등 애로사항이 넘친다. 일본군은 사전에 마초 준비도 제대로 안 한 데다 노새 같은 장거리 이동에 특화된 종자도 아닌 일반 가축들을 갖다 썼으니 먹이는 금방 동이 났다. 그 탓에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로 노역을 해왔던 가축들은 너도나도 지쳐서 객사했고, 필요한 가축은 현지 조달로 때우려고 했기 때문에 수송 가축의 수는 충당되지 않았다. 당연히 죽은 가축이 수송하던 분량의 보급품은 다른 가축에 추가로 지우거나 병사들이 대신 옮겼다. 후술할 내용의 이유로 병사들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자 무게를 줄이기 위해 보급품을 조금씩 버리면서 갔고 보급되는 물자량은 가면 갈수록 계속 바닥을 드러냈다. 게다가 여긴 정글이다. 습기가 많으니 물가나 작은 뻘도 많고, 나무 천지라 이런 길은 노새한테도 힘든 마당에 적지에서 약탈한 일반 가축을 수송 보냈으니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15] 이 말은 겨울전쟁 당시 소련의 몰로토프 인민위원장이 핀란드를 얕보면서 한 말과 비슷한데, 이 전쟁에서 소련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체급이 10분의 1도 안 되는 핀란드군을 상대로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다. 핀란드 사상자보다 소련군 사상자가 3배 가까이나 될 정도로 핀란드를 가볍게 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16] 일본아스카 시대 후반 무렵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전국민에게 육식금지령이라는 황당한 어명을 서기 675년부터 시행해서 메이지유신 직전까지 천 년이 넘게 시행하던 나라이다.[17] 정글은 동식물 자체의 밀집도는 높지만 특정 종의 밀집도는 생각보다 굉장히 낮다. 그러다 보니 특정 종류만 먹는 생물체는 생존하기 어렵고 특정 개체가 대량으로 불어나는 경우도 드물다. 이런 곳에 사람 수만 명이 풍족하고 맛나고 만족스럽게 먹을 괜찮은 식량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18] 독버섯/종류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누가 봐도 식용이 가능할 것 같은 안전해 보이는 모습이거나 아예 식용/약용 버섯과 구분이 안 되는 버섯들이 태반이다. 오죽하면 버섯 전문가들도 버섯은 무조건 마트나 채소가게에서 사먹으라고 말할 정도다. 가게에서 파는 버섯은 버섯 농장에서 식용 균사체만 골라서 재배하기 때문에 여기에 독버섯이 섞일 가능성은 아예 없다시피 하다.[19] 베어 그릴스가 내내 단백질 등의 영양소를 언급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쟁이 아닌 개인의 생존에서의 영양소이고, 전문적인 지식마저 없다면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는 위험한 지름길이다. 실제로 베어 그릴스 역시 주운 버섯 등은 정말 먹을 수 있는 게 확실한 품종이 아닌 이상 입에 대지도 않으며, 그렇게 조심을 해도 정글에서 물 잘못 마셨다가 엄청난 배탈이 나는 식으로 개고생을 한다.[20]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 여군특집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급식 장면에서 귀요미 먹방이 아닌 고봉밥 수준으로 퍼담고는 이것도 위꼴 수준의 리얼 먹방을 보여주며 싹 비우는 것에서 나타난다. 물론 <진짜 사나이>가 방송적 재미, 그리고 군대 미화를 목적으로 실제 군복무보다는 난이도가 하향 조정된 상태임에도 진짜 배고파서 마구마구 퍼먹을 정도로 배고파지는 곳이 바로 군대이다.[21] 나폴레옹 본인도 러시아 원정에 보급으로 당한 적 있지만 이건 러시아가 후퇴하면서 나폴레옹이 자연스레 전진하며 보급선이 길어진 상황에서 러시아군청야전술 덕에 현지 조달마저 봉쇄당해 당한 것이였다. 아니, 나폴레옹은 병참장관에게 충분한 식량과 건초, 그리고 이를 나를 마차를 준비하라고 하였고, 여기에 1만 2천 프랑, 한화로 1억이 넘는 거액의 상금까지 걸면서 최초로 병조림이라는 괜찮은 보존 기술을 얻어낸 덕에 현지 조달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이전 전역에 비해 훨씬 방대한 보급체계를 갖췄음에도 이랬다. 이렇게 준비를 잘 해도 당할 수 있는 마당에 일본군은 치중병은 병사가 아니라며 노래나 부르며 비전투원을 홀대하고 병참을 무시하는 풍조가 임팔 전투의 자업자득으로 이어졌다.[22] 단, 사토 고토쿠 휘하의 31사단은 예외였다. 31사단은 애초에 현지인들과 교섭을 해서 물자를 조달하는 방식을 선택했기에 후퇴할 때도 다른 부대들과 달리 동정하는 현지인들이 많아서 다른 15군 휘하 사단들이 현지인들로부터 무자비한 보복을 받을 때도 오히려 현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23] 다만 얼마 후(제2차 괌 전투) 이 사람의 친형이며 31군 사령관인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 31군 사령관이 마리아나 전역에서 일본군 특유의 무모함으로 '군 사령관 옥쇄'라는 비극을 맞았다. 태평양전쟁의 군 사령관으로서는 거의 첫 사례였다.[24] 오바타 노부요시가 보급 전문가라면 이 사람은 수송부대 쪽에서 나름 짬밥이 굵은 사람이었다. 보급과 수송의 최고 전문가들을 참모라고 두고도 그 사람들 의견은 죄다 씹고 저 쪽에서 최악의 작전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25] 이 사람은 무려 일본군의 삼간사우 중에서 어리석은 4명인 사우에 들어가는 인간이다. 그 어리석다고 평가받는 자가 작전 구상이 엉망이라고 까는 것에서 임팔 작전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 작전이었는지를 대변해 준다. 그리고 사나다는 나중에 이 발언을 능가하는 희대의 명언을 다시 하게 된다.[26] 사실 저 지나 사변은 애초에 무타구치 렌야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에 가깝다. 노구교 사건 참조.[27] 황제의 생일을 가리키는 중국식 한자용어로, 천장지구(天長地久)란 사자성어에서 따와 '황제께서 하늘과 땅처럼 오래 사시길 바란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과거 일본에서는 천황의 생일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양력으로) 메이지 시절에는 11월 3일, 다이쇼 시절에는 8월 31일, 쇼와 시절에는 4월 29일이었다.[28] 1879-1946. 초대 조선총독이자 무단통치로 악명 높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아들이다.[29] 무타구치는 1917년에, 사나다는 1927년에 졸업했다.[30] 심지어 참호전을 배울 때는 교사들이 궁궐 내에 기관총을 비치한 참호를 파려고 했을 정도였다.[31] 싱가포르 점령 직후 일본이 세운 일종의 괴뢰 집단.[32] 인도의 초대 수상이자 국부 맞다.[33]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태평양 전쟁에도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34] 심지어 아이티는 당시 최강의 열강으로 꼽히던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치러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도 한참 전이던 19세기 초에 독립에 성공했다. 아이티의 아프리카계 주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학살하고 아프리카에서 더 순종적인 노예들을 데려 오겠다고 히히덕거리고 아이티 독립군 지도자 투섕에게 협상을 제안해놓고 손님 자격으로 온 투섕을 투옥하는 등 비열한 짓거리만 골라서 하고도 패배한 프랑스는 말 그대로 대굴욕을 당했다. 하지만 독립 이후 아이티는 한동안 프랑스의 요구로 프랑스에게 돈을 내느라 경제가 파탄났고, 게다가 독재까지 발생하며 현재 아메리카 최빈국으로 추락하고 말았다.[35] 상술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조차도 독일군은 공중보급이라도 해주려 했다. 하지만 독일 공군이 무슨 수를 써도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독일 6군에게 필요한 만큼의 물자는 절대로 가져다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임팔 작전의 일본군은 임팔만 점령하면 모두 해결 이라는 안일한 생각만 하고 육로로든 항공으로든 가져다 줄 생각도 보급해 줄 방법도 아예 없었다.[36] 사실 군인으로서 기본적인 능력을 갖췄다면 이런 질문들을 윗사람이 묻기 전에 보고할 때 보고서에 그 대답들이 일치감치 나와있어야 한다. 그만큼 작전진행이 치밀하지 못하고 막무가내로 나갔던 것이다.[37] 단, 잔류의사를 밝힌 일부 인력 외에는 대부분 자대 복귀를 하여 당시에는 이름만 같을 뿐 용병이었던 이전 부대와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38] 그나마 이 인간이 무타구치 렌야급이었다면 다행이지만, 일본군에게는 불행하게도 '극동의 롬멜'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중국군에서 손꼽는 명장이었다.[39]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 상당수의 손실을 입었지만 기간부대 자체가 군사위원회 직속전략예비대였으며, 인도 방면으로 후퇴 후 재정비를 거쳐 각 사단에 미군에 준하는 중장비와 함께 창군 초기만 하더라도 X군 직속부대로 3개 포병연대, 1개 수송연대, 2개 공병연대, 2개 화학연대, 1개 기마치중연대, 1개 특무대대, 1개 통신대대, 1개 전차 훈련소 등이 배속되었다.[40] 중국군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략자들을 상대로 자신의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처절하게 저항했다. 스틸웰의 중상모략이나 국공내전 이후 나온 중화인민공화국의 혁명사관의 영향을 받아 당시 중국군을 당나라 군대로 폄하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나 개차반이었다면 진즉에 무너졌을 것이다.[41] 이쯤 되면 물자를 불태우면서 퇴각하며 수원지에 독만 풀어도 상대방을 기아와 질병으로 전멸시킬 수 있다.[42] 미국 쪽에선 Battle of the Admin Box, Battle of Ngakyedauk, Battle of Sinzweya로 부름,[43] 당시 일본 육군에 편제된 소구경 대공화기는 13.2mm 기관총이나 20mm 기관포도 얼마든지 있었다.[44] 버마와 인도 국경에 있는 산맥으로, 산맥 서쪽에 임팔이 있다. 평균 높이가 2천 m가 넘는 산들이 끝도 없이 있어, 도강에 성공한 일본군은 자동차나 대포를 분해해서 들고 갔다고 한다.[45] 상황을 따지면 체격 조건이 훨씬 좋은 미군 특수부대라도 버거운 수준이다. 현재 대한민국 육군의 동계 FM 완전군장이 약 40 kg 정도 되는데, 40 km 야간행군을 경험해 본 군필자들은 알겠지만, 가라로 이것저것 빼고 가볍게 만든 군장을 메고 해도 일반 병사들은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게 급속행군이다. 그런데 이걸 당시 체격도 훨씬 떨어지던 일본의 일반 병사들이, 심지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길도 없는 순수한 야생 정글을 해치고 강 도하까지 해야 했으니, 그냥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46] 이 문제는 이전에 과달카날에서도 있었던 문제였다. 그곳에서도 병사들에게 중화기를 분해 후 정글을 뚫고 운반하게 했다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즉 이전에 반면교사로 삼을 사례가 있었지만 너무나 일본군답게도 실패로부터 하나도 배우지 못한 것이다.[47] 1970년대에 IRA의 폭탄 테러로 왕실 요트와 함께 폭사한 그 사람 맞다. 필립 공의 외삼촌이다.[48] 작전이 성공한다고 해도 그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49] 야마우치 중장은 병세가 악화되어 44년 8월에 사망했다. *[50] 거리로 치자면 임팔에서 16km 지점까지 다다른 것이다. 이 정도면 진짜 정신력 타령만 하지 않고 보급만 신경 썼다면, 임팔을 점령하고도 남았다는 것이다.[51] 연합 공군의 질적, 수적 우세를 감안하면 저 24기를 정말 지원했단들 다시 원대에 돌려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52] 소련 공군의 질적인 측면은 서방 연합군이 전투기로는 못 쓸 물건이라고 악평했던 P-39 에어라코브라를 제공전투기라고 열심히 굴렸을 만큼 참담한 수준이었다. 물론 이 에어라코브라는 독소전의 저고도 화력전이라는 전장환경에서는 매우 좋은 전투기라서 많은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소련제 항공기는 냉정히 말해서 무전기 좋은 제로센 수준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소련의 가용 항공전력은 독일 공군의 가용 전력의 거의 20배에 달했다.[53] 당시 일본군의 중국-동남아 공중전력은 실로 참담한 수준이라서 이미 1940년대 후반에는 중국군에게조차 공중전력에서 압도적 열세에 놓여 있었다. 중국군 50만 명이 전사, 부상, 실종당한 대륙타통작전에서조차 제공권은 중국군이 쥐고 있었다.[54] 적성 군복을 그대로 입었다간 아군 오사 가능성이 높아진다.[55] 이는 1991년 - 1992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묘사된다.[56] 당시 일본 학제상 외국어 교육을 받으려면 최소 중졸은 되어야 했다. 문제는 일본군의 중추는 농촌 출신의 소졸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에 물들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은 도시 출신, 상공업 종사자, 금수저, 중산층, 고학력자를 선호하지 않았다.[57] 인도와 미얀마 국경에 위치한 도시.[58] 나중에는 '대본영'을 추가해 '머저리 집단 4곳이 이런 참극을 빚었다.'고 말했다.[59] 더 웃긴건 무타구치를 만난 카와베는 둘이서 표정 놀이 하고나서 획가닥 갔다고 한다.[60] 당시 일본 관료들은 크게 친임관,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등 4종류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육군에서 사단장 쯤 되면 칙임관에 해당되고, 칙임관부터는 천황이 친히 임명하는 관직이었다. 따라서 군부가 칙임관을 멋대로 처리해 버리면 천황의 임명권을 무시하는 빼박 하극상이 된다.[61] 사실 임팔 작전 패배의 진짜 원인은 무타구치 렌야다. 애초에 이 작전이 구상되던 초기인 1942년 당시에 했으면 성공할 수도 있었음에도 반대했다가 1944년이 다 되어서야 뒤늦게 밀어붙힌 장본인이 바로 무타구치 렌야 본인이었다.[62] 이로 인해 무타구치는 전범 재판에 올라갔어도 A급 전범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63] 카와베에 따르면 작전 중지를 생각하기 시작한 지 2개월이 지난 후였다고 한다.[64] 아래 '전율의 기록 임팔작전' 참고.[65] 시신의 살점이 모두 없어져 백골이 드러난 상태. 한국에서 시신을 땅에 묻으면 7년에서 15년 정도는 지나야 육탈이 된다.[66] 이게 빈말이 아닌 것이 당시 일본군/군가 중 하나인 도키노사쿠라, 즉 동기의 벚꽃이 이 내용이다.[67]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실제로 보급이 없었음에도 임팔까지 불과 16km 지점까지 진격했기 때문이다. 진짜 보급과 무타구치 렌야의 막장 마인드만 아녔으면 임팔 점령도 가능했을 수도 있다.[68] The London Gazette(1951)의 "Operations in Burma and North East India 16th November 1943 to 22nd June 1944"에 따르면 임팔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12,500명 중 사망자는 2,269명이였다. 이는 코히마 전투 등에서 발생한 사상자는 포함되지 않은 통계이다.[69] 짐승에게 최소한의 보급품만 지워서 진격하는 전법은 과거 많이 사용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특수임무에 가까운 급습과 후발대로 오는 치중대와의 연계를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정석이다. 유목 제국으로 말과 소 등의 가축이 차고 넘치던 몽골 제국과 일본 제국의 상황은 같을 수가 없을뿐더러, 더구나 이 때는 빠른 기동력을 살린 진격이 불가능한 전장 상황이었다. 심지어 자기가 예시로 든 칭기즈 칸마저 보급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지라 최대한 열량이 많으면서 부피도 적은 비상식량을 대량으로 비축하고, 역시 양곡을 비롯한 식량 수송도 철저하게 준비했다. 운반책인 가축들을 잡아먹는 전략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였다. 이렇게 잡아먹는 것을 공식적으로 전략안에 설정한 경우는 고구려를 침공한 당태종의 사례인데, 그 역시 마냥 막무가내로 이런 방법을 제시한 게 아니라 고구려의 청야전술과 수상수송 차단 전술에 대한 대비책으로 먼저 소와 말, 양 등을 대량으로 확보한 후에 빠르게 진격하여 일단 거점과 진격로를 확보하여 본국의 치중대를 기다리는 와중에 갖고 있던 식량과 여분의 가축을 소비하자는 논리였다. 역시 치중대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썼다. 이렇듯 어떠한 경우라도 보급책 확보는 필수적인 것으로, 대책없이 운송수단을 식량으로 써버리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에 불과하다.[70] 물론 군의 사기(정신력)는 중요하지만, 사기를 높이고 싶으면 적절한 보급을 통해 군이 언제나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어야 한다. 괜히 손자병법을 비롯한 모든 병법서에서 보급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는 게 아니다. 이 작자는 자기는 장교로서 기본적인 임무도 대충 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게만 무한한 정신력을 강요했기 때문에 이 사단이 일어났다.[71] 아삼 인근 메갈라야 주의 체라푼지란 마을은 1년 동안 비가 22,987 mm나 내리는 기록을 세웠다.[72] 당연히 영국군이던 바커 중령이 일본군의 보급이나 현황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미지의 적군의 위험성에 대해 더 높게 평가했을 공산이 크다. 당시 현장 지휘관들은 모두 진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학자들도 그 판단이 옳다고 판단한다.[73] 실제로 전후에 자신을 못살게 굴었던 선임이나 장교, 부사관을 찾아가서 가족들까지 죄다 두들겨패고 복수하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무타구치 정도면 원한을 품은 사람이 만 단위였을 텐데 용케도 한번도 보복당하지 않은 셈. 관련하여 산산조각 난 신에 묘사가 되어 있다.[74] 손자의 인터뷰에 의하면, 무타구치 렌야의 아들은 반전성향이었고 아버지에게도 부정적이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아버지와 관련된 유품이나 문건은 역사적인 물건은 남겨놔야 한다'는 취지에 따라 고스란히 남겨뒀다고 한다.[75] 물론 보급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전혀 사소한 실수로 취급할 수 없다는 건 잘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