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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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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祀
1. 개요2. 유래3. 차례와 제사4. 한국의 제사5. 의의
5.1. 비판
6. 논란7. 폐해8. 음복9. 가문별, 지역별 특색10.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음식11. 제사와 관련된 단어12. 제사상 놓는 법 쉽게 기억하기13. 종교별 입장14.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15. 기타 이야깃거리16. 같이보기

1. 개요

신령이나 죽은 사람의 에게 음식을 바치어 정성을 나타냄 또는 그런 의식.

대한민국에서는 주로 유교적 제례행위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유교식으로는 기본적으로 사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조(,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고,[1] 이게 넘어가면[2] 매안(埋安)이라고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고 원칙적으로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후 5대조 이상의 조상은 개개인의 기일이 아닌 음력 10월에 동시에 기리는 묘사(墓祀)[3]를 지내거나, 큰 공을 세운 조상의 신위는 시대가 지나도 옮겨 그만두지 않고 계속 제사를 지내는 불천위(不遷位) 같은 예외가 추가되었다.[4]

2. 유래

제사의 기원은 토테미즘이나 샤머니즘과 같은 원시신앙에 있다. 자연재해, 질병, 맹수들의 공격 같은 인간집단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재앙을 막기 위해 하늘이나 땅, 강이나 바다, 오래된 나무, 높은 산, 조상 등에 절차를 갖추어 빌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신성에 대하여 지내는 종교 의식은 '제사(祭祀)'로 통칭할 수 있다. 이는 조로아스터교아브라함 계통 종교 같이 인류사 초기에 세계 각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한자 문화권을 바탕으로, 한반도의 지역적 특성이 섞여 형성되었다. 고대 중국 상나라(은나라)의 왕 조갑이 주변 토착신을 배제하고 조갑의 직계 조상만 섬기는 조상신 풍습을 만든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기록을 보면 상족의 조상은 직계인 근조선공과 직계가 아닌 원조선공으로 나뉘는데, 상나라에서 제사는 직계 선조인 근조선공에게만 지냈다. 조갑은 왕의 어령에 반발하는 사람을 막기 위해 "자신의 조상을 숭배하면 농사가 잘 되고 전쟁에서 승리하며 재앙을 막아준다"는 등 만사가 다 잘 돌아간다고 퍼뜨렸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조상 섬기는 문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 제사의 시초다.[5]

상나라주나라에 의해 멸망당하는데, 주나라는 위에서 조갑이 퍼뜨린 풍습을 따라 상나라의 제사방식을 이어받았다. 그뿐만 아니라, 상나라의 전 지도층을 제후로 임명해 상나라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 이어가도록 했다. 이것도 다른 가문의 제사를 끊기게 하면 그 사람에게 제사가 끊어진 조상 귀신들이 재앙을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왕들을 가르치던 공자가 "상나라 제사 문화 띵호와" 하면서 재정비했다.[6][7] 공자는 유교의 대표이니 후대 유학자들이 공자를 떠받들며 제사문화가 쭉 이어지는 건 당연지사. 이후 이 제사 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금까지 뿌리깊게 이어지고 있다.

일반명사로서 제사의 뜻은 이렇지만, 흔히 한국에서 '제사'라고 하면 유교의식에 기반을 둔 '조상 제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8]

이런 수단으로서 행해진 제사는 중, 근세에 이르러 유교와 결합하여 조상숭배의 제도로 고착되었다. 또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면서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정교가 분리된 이후에도 황제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며, 자신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권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다만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의 왕은 하늘에 대해 제사를 지낼 수 없었고, 왕조의 조상신(종묘)과 땅의 신(사직)에는 제사를 지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는 환구단을 지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가정에서는 효의 의미를 가져 가문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종교적 면은 사후세계의 인정을 통한 유교 특유의 간접적 영생법의 의미를 가졌다.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아들딸 상관없이 재산을 공평하게 분배받고 제사의 주체에서도 남녀차별이 없었으나[9] 조선 중기 이후 소중화 의식이 강해지면서, 유교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남[10]이 아버지의 재산 2/3을 받고, 나머지를 다른 아들들이 나누고, 딸은 받지 못하는 인습(因習)이 1990년대까지 유지되기도 했다. [11]

3. 차례와 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명절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하며# 두산백과에 따르면 음력 매달 초하룻날과 보름날, 명절날, 조상 생일 등에 간단히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다.# 따라서 설날추석에 한해서 제사가 아니라 차례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차례도 제사에 포함되는 개념이므로 설날이나 추석에도 제사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반대로 제사를 차례라 부르진 않는데, 명절 등에 지내는 차례는 보통 제주 위로 돌아가신 4대 조상[12]까지 대접하는 제사를 의미하므로, 죽은 사람의 기일에 그 사람만을 위해 지내는 제사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뜻으로는 제사, 차례와 구별하는 뜻으로는 기제사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보면 차례는 명절 제례로 고려시대부터 지낸 것으로 추정되고, 이름 그대로 원래는 를 올리는 다례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고려시대와 차라는 부분을 고려하면, 세시풍습 + 계절제와 불교식 성향이 더해져서 탄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한 조선시대가 되면서 불교식 세시풍습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기 때문에 세시 풍습도 유교식으로 변화해간다. 실제로 조선시대 예법의 기본 취급 받는 주자가례 중 참례와 천신례는 세시의 제사를 다루고 있는데, 이 때 초일에는 술과 차를, 그리고 보름에는 차만을 올렸다. 다만 술 대신 차를 올리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교 냄새가 강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차는 엄청난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에[13]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아무래도 중국에서는 차를 올리지만, 조선은 술이죠"아놔 조상님들 외치면서[14] 차례상에서 차를 빼고 술을 채워넣었다. 이후 명절에 지내는 제사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은,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성향이 강해진 영향으로 보인다.

4. 한국의 제사

5. 의의

핵가족화가 되어버린 현대에는 의의가 매우 퇴색되었다. 일단 보통 미디어 등에서는 제사가 후손들에게 공경심과 효심을 나타내는 의식으로 사회적 소속감, 연대감을 증진하며 가족 간의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하며 특히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초래되는 단절과 공동체 의식의 결핍을 보완하여 현대적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사방으로 나뉘어 살아가는 현대 가족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가족애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리가 제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학계에서는 "현재에도 제사를 올리는 집은 조상에 대한 숭배의 목적이 아닌 친척 형제와의 관계유지와 전통적인 관례와 풍습으로 하는 것이고, 조상신을 모신다는 종교적인 이유는 매우 약해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몇몇 기성세대나 서민층에서는 여전히 '조상신을 모신다'는 관습적 혹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유지되는 면이 가장 크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도 비슷하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사회적 역할은 따로 두고, 예식을 집전하는 사람들은 믿어야 하니까.

그러나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분명하게 "괴력난신을 인정치 아니한다"고 하였고 이 때문에 제사의 본질적인 목적을 고민해서 초기 유교괴력난신에 해당하는 조상신을 모시는 기복신앙이 아닌 제사를 크게 치름으로 가문의 세를 과시하는 목적을 인식해 유교의 범위에 포함시켰다고 봐야 맞다. 단, 공자가 말하는 괴력난신은 모든 종교의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모든 현상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이걸 들어 제사를 비판할 수는 없다. 공자는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비판적이었다. 뭐, 공자 자신도 제자들과 함께 제삿밥 얻어먹는 처지가 되었지만.

실제로도 제사는, 제사의 대상이 되는 이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거나 한 위인일 경우에 한해서만 '불천위'라고 해서 특별히 대를 뛰어넘어 그밑에 후손들에게 지내게 하는 제도가 있다. 일반적으론 사대봉사라 하여 직계 4대 위론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이 제사를 조상에 대한 기복신앙과 차별되게 하는 요소이다.[17] 또한 제사를 지낼 때 가문의 남자들이 모임으로서 가문의 수와 힘을 과시하고, 또 제사상의 차림으로 그 재력을 증명하는 등 가문의 세를 과시하는 모습이 보인다.

다만 이는 농업기반의 집성촌의 존재로 성씨에 연관된 집안사람을 즉각적으로 동원가능한 전근대적 사회에서의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와 6.25 그리고 도시화로 인해 집안의 결속력이 효과적이지 못한 현대에는 상술된 세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주가 아니라 장례와 같이 남아있는 사람들이 먼저 죽은 사람을 추억하고 기리는 이유 혹은 아직까지도 집성촌과 종중단위를 유지하는 큰 집안의 제사를 담당하여 제사를 지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산을 비롯한 재산의 상속과 관련된 재산권 관련 이유, 또는 순수한 기복신앙과 효 문화와 동시에 과거의 영광에 기대서 명예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이유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유지 되고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양반 가문들이나 상류층 가문들은 가문의 정통성, 단합이나 세를 보여주기 위해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18] 이는 삼성 가문의 제사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19/2018111903311.html 그래서 그런지 서민층과는 분위기가 다른 경우도 있다. 심지어 근본을 주장하면서도 제사를 이상하게 지내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에 서민들이 제사 지내는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다.

5.1. 비판

선산의 이권 때문이건 제사의 비용이나 수고로움 때문이건 간에 제사 때문에 싸움이 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제사가 없었다면 헛수고나 헛돈이 들 일이 없으니, 얼굴 붉혀가며 싸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명절이나 기일에 모여서 조상을 기리고 우애와 화목을 다지는 의미만 남겨 놓고, 제사라는 형식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전통의 긍정적 의의를 살리는 길이다.

예컨대 명절을 이용해 가족들끼리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친목을 다질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기껏 쉬는 날 모여서 기름 냄새 맡으면서 음식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만 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다. 제사 때문에 친척들 간에 얼굴을 붉힌다거나 고성이 오가는 경우를 제외해도[19], 제사가 있으면 부부싸움이나 분쟁이 생길 확률이 높다. 이런 현상을 고려하면, 제사를 집안의 화목을 다지는 행사라고 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사회에서, 가정에 경제적 및 노동 부담을 가중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오죽하면 "조상 덕을 못 본 사람들이나 조상 모신답시고 상차리고 절하고 있고, 조상 덕을 본 사람들은 그럴 시간에 해외여행 간다"는 말이 나올까.[20].[21]

그리고 이런 불만은, "믿는 것은 신이지 신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석가탄신일과 성탄절에 절, 교회, 성당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의 사고방식과 일치한다. 젊은 세대에서 무신론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은, 상대의 집안이 제사를 지내느냐만큼이나 상대가 독실하게 종교활동[22]을 하느냐는 파혼과 이혼의 큰 이유를 차지한다.

게다가 무엇보다 경제적 이유로 가족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제사 때문에 한 집에 모이는 일 자체가 줄어가고 있다. 친족 공동체가 모여 친목을 다지는 전통을 유지/계승하고 싶으면, 보다 친족들이 모이고 싶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모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제사는 모이고 싶지 않은 이유로 작용해 오히려 친족이 모이는 것을 방해하기만 한다. 명절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가족이 해마다 늘어나는 것을 떠올려 보자.

6. 논란

제사/논란 참조.

7. 폐해

제사/폐해 참조.

8. 음복

제사를 지낸 뒤에 제사에 쓰인 제주(祭酒)와 제물을 나눠서 먹는 것. 집안에 따라 제상에 올린 나물과 밥을 함께 비벼서 비빔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23]

제물이 평소 먹던 음식보다 맛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음식이 식고 난 뒤에 먹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생선류는 한번 조리되고 나서 식으면 수조육류 특유의 냄새가 나고, 다시 데우면 오히려 냄새가 심해진다. 양념이 안 되다 보니, 양념이 들어갔을 때보다 냄새가 심하다. 음식에 간은 하지만 양념을 하지 않는 이유는, 양념의 매운 맛이나 향이 영혼을 쫓아낸다는 믿음 때문이다. 무당들도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을 행할 때 마늘이나 고춧가루를 사용한다. 물론 무당 이야기 나온 것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근거 따위는 전혀 없다. 실제로 강한 양념을 하지 않는 것은, 양념을 강하게 하는 것이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강한 양념 자체가 제사 풍습이 확립된 다음에 들어왔기 때문[24]. 그 향신료로 귀신을 쫓을 수 있느냐 마느냐는 모든 종교의 바탕인 신과 귀신의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이상 믿음의 문제니 넘어갈 일이다.

거기다가 남아서 냉장고에 넣어 두면 냉장고의 냄새까지 밴다(...) 밀폐용기나 지퍼백에 넣어둔다면 어느 정도는 괜찮지만, 대부분의 집이 비닐봉지에 대충 담아놓는 환경을 생각한다면 지못미.(...)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먹다 버린 것 같은 느낌이나 음식에 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팁을 적자면, 수제 냉동식품처럼 취급하면 된다. 이삼일 안에 먹을 것은 냉장실에 보관하고, 그 후에 먹을 것은 전을 한입거리로 잘라 비닐백에 골고루 소분해 넣어 꽁꽁 얼리면 된다. 집에서 만들었는데 양을 줄여도 전이 남아 골치라면, 손님이 돌아간 다음, 한 번에 소분 냉동해도 된다.
1) 바닥에 신문지를 넓게 깔고, 전바구니와 도마를 놓고, 도마 주변에 롤백 비닐봉지 10~30개를 주머니처럼 입을 벌여 놓는다.
2) 전바구니에서 전을 종류별로 적당한 갯수씩 주머니에 나눠 담는다. 큰 전이면 한입거리로 잘라 나눈다.
3) 롤백 한 봉지에 들어갈 분량은 한 번에 먹을 양. 되도록 프라이팬 하나로 데울 양을 넘지 않는다. 한 봉지에 전 여러 종류가 골고루 들어가도록 한다.
4) 김치냉장고에 꽁꽁 얼린다.
먹기 전날 냉장고 냉장실에서 해동한다. 이게 가장 좋다. 급하면 꺼내 전자레인지에 1차 해동한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조금 두르고 데워 식사나 도시락 반찬으로 사용한다. 즉석냉동식품과 다를 게 없다.

나물류와 탕국은 가능한 재료를 섞어 육개장을 만드는 것도 방법.

그리고, 음복 때에는 제사에 쓰인 인 제주[25]를 제사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한 잔씩 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민짜"들이 공개적으로(…) 술맛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26]물론 이런 데 엄격한 집안에서는 이럴 때도 아이들에게 술을 못 마시게 한다.

그래도 어른들 입장에서 장점을 찾아보자면, 소위 "주도"를 훈육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된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첫 술은 이렇게 순한 술로, 어디 어두침침한 양아치 소굴 말고 이렇게 중인환시리에 환한 자리에서, 적당히 긴장 타면서 배우게 하는 것이 지극히 바람직하다. 처음 술버릇이 평생의 술버릇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지대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명절에 차례나 성묘를 하고 제주로 음복을 하고는 음주운전을 하는 사례도 심심찮게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절날 큰 묘지 주변에선 낮시간에도 음주단속을 하기도 한다. 아무리 소량이라도 술은 술인 만큼 운전할 사람은 제주를 마시지 말자. 단속 이전에 안전 문제다. 조상님들한테 제사 지내러 왔다가 다음 제사부터 조상님들과 같이 제삿밥 먹을 수도 있다

현대 이전에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명절, 잔치와 함께 음식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기회가 음복이기도 하였다. 아래 내용의 '헛제삿밥'의 기원으로 이를 꼽기도 한다.

영혼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의식이다보니 어른들이 "남의 집 젯밥은 함부로 얻어먹으면 안 된다"고 충고하는 경우가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남의 집 젯밥을 먹음은 곧 남의 집 귀신과 한솥밥을 먹은 셈이기 때문이다. 자기 조상님도 아니고, 남의 조상님 귀신과 한솥밥을 먹는다니 껄끄러울 수밖에 없다. 비슷한 이유로 무당들도 제사를 지낸 음식에는 귀신이 붙어 먹으면 부정을 탄다고 하여 일절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본토와 문화가 다른 제주도 토박이 가문들은 예외로 지인의 집 제사에 참석하거나 하는 경우도 허용된다.

그러나 저것은 와전된 감이 있다. 오히려 기독교도같은 서구에서 들어온 종교를 믿는 신자는 타 종교의 세례를 받았다 할 수 있는 제사음식을 꺼릴 수 있지만, 제사를 지내는 집들은 남의 집 제사음식을 먹는 것을 꺼리지 않기도 한다. 왜냐 하면 원래 제사음식을 많이 하는 것은 혈족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동네사람들이 (절은 하지 않았다 해도 남의 집 제사음식을) 나눠먹었기 때문에 생긴 풍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혈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회생활하며 알게 된 사람의 일로 문상가서 얻어먹는 밥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음식이다.

9. 가문별, 지역별 특색

10. 제사상에 올리지 않는 음식

괴력난신을 논하지 않는 유교 가르침에 귀신을 쫓는다느니 근거 없는 이야기다. 문헌적 근거가 있는 게 아니라 민간이나 도교에서 내려오는 풍습이니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아집은 피하는 것이 좋다.

11. 제사와 관련된 단어

제사상에 음식을 놓는 방식을 쉽게 외우기 위한 다양한 단어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은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등과 같은 유교 서적에는 나오지 않는 근거 없는 단어들이고, 80~90년대 언론들이 몇몇 가문들의 상차림을 참고하여 상은 이런 식으로 차려야 한다며 만들어 전파된 단어들이다. 요컨대 꼭 지킬 필요 없다. 막말로 그냥 차리고 싶은대로 차리면 된다. 다만 제사 지내는 집안의 어른들은 이 단어들에 익숙해져서 이 형식을 지키지 않으면 혼을 내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그래도 전형적인 상차림에 없는 메뉴가 점점 늘어나면서, 눈에 확 띄는 몇 가지만 괜찮으면 아무래도 좋다 정도가 되어가고 있다.

동쪽이니 서쪽이니 하는 말이 있지만 신위를 북쪽으로 치고 하기에 동쪽은 신위를 마주보고 오른쪽을, 서쪽은 왼쪽을 말한다.

12. 제사상 놓는 법 쉽게 기억하기

신주를 중심으로 첫 열에 밥, 2번째에 메인요리 (적), 3번째 열에 탕, 4번째 열에 반찬, 마지막 열에 디저트라고 생각하면 쉽다. 우리가 평소 밥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제사 지내는 입장에서는 이걸 거꾸로 보니 (첫열에 디저트) 외우기가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사상 놓는 법이 아니다. 고인이 좋아하던 것으로 차릴 수도 있고 후손들, 특히 어린이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 어린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차려도 무관하다.

13. 종교별 입장

제사/종교별 입장 참조.

14.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경우

단순히 집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38]가 아닌, 말 그대로 특정 이유 때문에 제사만 할 수 없는 경우들이다.
원래 제사를 지낼 때에는 심신이 청정해야 한다 하여 목욕제계를 한다거나, 음식도 비린 것을 먹지 않거나 하는 등 준비과정이 있었다. 제삿날에 남의 집에 문상을 갔거나 집안에 병자가 있거나 하는 경우에는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유교적 예법에서는 심지어 관리가 형벌에 관련된 문서를 처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제사를 앞두고 남에게 벌을 주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심신의 청정'을 깨트리는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5. 기타 이야깃거리

16. 같이보기



[1] 결혼을 일찍 하는 전근대 기준으로, 현실적으로 인간의 수명상 아무리 장수한다 해도 사람이 생전에 만날 수 있는 사실상 최고 한도는 보통 고조부와 고조모라고 할 수 있다.[2] 아버지가 사망해서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으면, 아버지의 고조부는 5대조가 되므로 사대봉사에서 벗어난다.[3] 시향(時享)이라고도 한다.[4] '문중 종가에서는 1년에 제사를 수십번 지낸다'는 속설이 있는데 근거가 바로 이 불천위다. 집안 내력이 오래된 명문가에서는 당연히 불천위 제사를 지낼만한 역사적 인물이 많기 때문.[5] 이때 제사의 제물 중에는 상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족속의 사람도 있다. 즉 인신공양을 한 것인데, 자세한 것은 상나라 문서 참조.[6] 공자는 자신이 전생에 상나라 사람이라는 꿈을 꿨을 정도로 상을 숭상했다. 얼마나 심했냐면 후대 중국 학자들 일부가 "은나라(상나라)는 공자의 이상세계를 투영한 것이지, 실제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었다"고 착각했을 정도로[7] 이런 의심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 -그 당시 공자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상나라의 기록이 남아있었을지는 몰라도- 상나라의 제사는 공자가 극혐하다못해 제사 지내줄 자손이 끊어지리라 저주까지 불사한 인신공양이 "패시브"였기 때문이다.[8] 여러 사람들을 위하여 비는 의식이 아니라, 왕권유지를 위하여 왕가와 민가를 구분짓고, 왕실은 대개 조상에게 왕실을 위하여 복락을 빌었고, 양반들은 또한 각각 나누어져 각각의 조상에게 각자를 위하여 복락을 빌었다.[9] 조선 전기에는 출가외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남녀 구별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셨다. 기혼 남성이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시집간 누나의 집을 방문하는 경우도 많았다.[10] 당연하지만 제사의 주체도 결격사항이 없으면 무조건 장남이 된다.[11] 2017년 12월 29일 현재에도 예전관습이 일부 변형되어 계승되었는데 제사를 주재하는 당사자는 분묘에 속한 1정보 이내의 금양임야와 600평 이내의 묘토인 농지, 족보와 제구의 소유권을 단독으로 상속받을수 있다. 다만 관계상속인 전원의 일치된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그러지 못한 경우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그 청구이유의 상당성을 인정받야야 한다[12]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그렇다고 기제사를 5대조 이상까지 지내는 일도 현대에는 거의 없다. 기제사든 차례든 제주 기준으로 4대까지가 최고다. 시절차례는 몇 대가 되든 밥그릇 국그릇 수저만 더하면 그만이지만.[13] 는 아열대 지역 식물이라 온대기후인 조선에서는 극히 일부지역에서 나는 고급품이었고, 석회수 때문에 맥주를 물 마시듯 마셔야 했던 중세 유럽처럼 차가 필수적이었던 중국과 달리 조선은 석회수가 거의 없이 그냥 자연상태의 물을 바로 마실 수 있는 환경이었으므로 차를 마실 필요가 없었다. 즉, 그 당시 조선은 차의 공급도 수요도 적을 수밖에.[14] 단적으로 율곡 이이가 지은 격몽요결에서는 "차는 중국 풍습이고, 술이 조선 풍습이다"라고 하면서 차를 빼버린다. 그러나 이건 위에 서술된 것처럼 차가 조선에서는 대단히 고급 사치품이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15] 왕건 문서의 청동상 문단 참조.[16] 도교 속 신들과 별의 신, 옥황상제에게 지내는 제사[17] 그리고 불천위도 종가에서나 하는 것이지 전체 국민 중에서 보면 소수다.[18] 현재와 다르게 제사는 과거 군대나 육사에서도 배우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케바케가 좀 있지만 지금도 제사를 지내는 부대가 있다.수기사단이라든지 물론 요즘은 발로 하는 분위기다.[19] 하지만 그렇게 드문 사례는 아니다.[20] 우습게도 민속의 날로 명명되어 하루밖에 안 쉬던 명절이 길어진 게 반드시 설날과 추석에 차례를 지내기 위해 고향에 방문해야 하는 귀성길문제임을 감안하면, 제사 때문에 길어진 명절을 제사를 안 지내고 가족 간의 친목을 위해 소모한다는것은 앞뒤가 바뀐 말이다.[21] 위 주석에 대해 반론하자면, 유럽이나 미국 등 기독교 문화권에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를 현재까지 공휴일로 유지하는 것이 꼭 신앙심을 가지고 예배에 참석하기 때문은 아니지 않는가?[22] 제사 역시 종교활동이다.[23] 제사도 안 지냈으면서 제사와 똑같은 재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으면 이걸 헛제삿밥이라고 하는데, 특히 경북 안동시의 헛제삿밥이 유명하다.[24] 단적으로 고춧가루가 전해진 시기를 보면 왜 오신채에도 이름이 없고, 고춧가루 이야기는 언급도 없는지 알 수 있다.[25] 부재료가 들어가지 않고 주세법상 약주로 분류되는 전통식 청주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정확하게는 곡물을 원료로 사용한 술. 그래서 위스키, 보드카 같은 양주탁주는 되지만, 와인이나 맥주는 절대 안 된다.[26] 민짜들끼리 모여서 그냥 마시는 것보다 어른들과 주도를 배우면서 마시는 게 훨씬 낫다.[27] 그러나 제사는 아들들만 번갈아가며 지내는 게 보편적이다.[28] 사실 한반도에서도 고려 때~조선 초까지는 유교적인 가례문화가 약해서 지금과 많이 달랐다. 딸과 외손자가 제주가 되거나 상속을 받는 게 당시는 특별한 게 아니었다.[29] 본래 제주도는 토질의 특성상 농사를 짓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따라서 쌀밥이 대단히 귀했다. 그래서 이나 보리를 쪄서 반죽해 쌀밥 대신 올렸는데, 현대에는 이것이 빵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다 보니 육지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빵이 잘 팔리는 데 비해 제주도에서는 설날, 추석에 빵이 더 잘 팔린다.[30] 양하(襄荷). 양앳간이라고도 부른다. 꽃부분(정확히는 꽃대)을 따다 무쳐서 나물로 제사상에 올린다. 향이 강하고[31] 제주도에서 생선이라 함은 옥돔을 지칭한다. 물고기 총칭하는 의미로도 쓰인다.[32] 제사를 지내면 향을 피우고 그 향의 냄새가 음식에도 배야 하는데 그게 없으므로 진짜 제사를 지낸 음식이 아니라는 것.[33] 탕이랑 밥을 합쳐도 올라간 제수가 10개가 안 된다.[34] 중국 무속으로부터 유례된 풍습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 무속에서는 복숭아 나무로 만든 목검이나 제기로 귀신을 쫓기 때문이다.[35] 이때 생선의 배가 신위를 바라보게 놓는다. 망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쪽이 먹기 편하니...[36] 각 과일의 의미는 여기 참조[37] 여자가 제사에 아예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자도 남자와 같은 방식(여성의 절하는 자세는 더 힘들다)으로 절해도 무방한 집도 많다. 여자는 의무인 집도 있고 의무가 아닌 집도 있고, 소수가 지금도 여자는 배제하는 듯.[38] 고3, 고시생, 유학생, 운동선수, 해외 파병 중인 군인,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위원 및 관리요원 등.[39] 직계존비속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외출이 허용되나 이마저도 경찰관과 보안요원이 동행하며,[40] 심지어 시험지를 인쇄하는 인쇄공까지도! 이론상으로는 출제위원이나 검토위원은 20대도 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이 40대 이상이며, 관리요원 역시 연령대는 비슷하다.[41] 주로 황해도평안도 계통 실향민들이 여기로 간다. 함경도와 미수복 강원도 계통 실향민들은 통일전망대로 많이 간다.[42] 임하룡 등. 임하룡의 고향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북하리인데 그의 고향은 충주댐 건설 관계로 수몰되었다.[43] 정태춘 등. 정태춘은 고향이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인데 그의 고향은 주한미군 기지 건설 관계로 철거되었다. 그 밖에 리조트, 대학교, 군부대, 산업단지, 관공서, 교도소, 고속철도 및 여타 교통 관련 시설(공항, 고속도로 등) 등을 짓는 과정에서 고향이 철거돼 버린 경우도 실향민이라 할 수 있다.[44]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를 끼고 있는 경우에는 8년까지도 벌어진다. 이는 4로 나누어 떨어지는 경우에는 윤년으로 하되 1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평년,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면 윤년으로 한다는 규칙 때문이다. 이 때문에 xx96년 2월 29일에 제사를 지내고 나면 4년이 지난 xy00년이 400으로 나누어 떨어지는 해가 아닌 이상 xy04년까지 제사를 제 날짜에 못 지낸다![45] 특히 10, 11, 12, 1월에 윤달이 끼면(...)[46] 지금은 당연히 노비부동산이 아니라 돈으로 낸다.[47] "알라 이외에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사도이다"라는 구절이다.[48] 다만 '민속적 관습'이라는 시점에서는 지내도 된다는 일부의 의견이 존재하기도 한다.[49] 개신교 신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 안내문은 교회에서 나누어 준다고.[50] 아예 시작하기 전에 절 안 하는 병사 손 들라고 해서 인원를 파악한 다음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51] 윤5월 17일에 돌아가신 분의 제사를 윤5월이 있는 해에만 지낸다든가 하는 식.[52] 윤8월 14일에 돌아가신 분의 제사를 보통 해에는 평달 8월 14일에 지내다가 윤8월이 돌아오면 제대로 된 날에 제사를 지낸다든가 하는 식.[53] 윤7월 13일에 돌아가신 분의 제사를 음력 8월 초하루에 지낸다든가 하는 식.[54] 2004년 윤2월은 3월 21일~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