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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5:15:57

팔라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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كشور شاهنشاهی ایران | Imperial State of I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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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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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나를 심판할 제, 나에게 정의를 행하라 하시리라.
파일:이란 위치.svg
1925년 ~ 1979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카자르 왕조 이란 이슬람 공화국
<colbgcolor=#da0000><colcolor=#fff> 국가 이란 제국 국가
(이란의 샤한샤를 찬양하라)
Sorude Šâhanšâhiye Irân
위치 서아시아
수도 테헤란
정치체제 입헌군주제[1]
군주 명칭 (1925~1935, 1941~1961)
샤한샤(1935~1941, 1961~1979)
역대 군주 레자 샤 팔라비(1925~1941)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1941~1979)
주요 수상 모하마드 모사데크
골람레자 아자리
아미르아바스 호베이다
샤푸르 바크티야르
언어 페르시아어
종교 시아파 이슬람교
민족 페르시아인
주요사건 1921년 페르시아 쿠데타
1925년 건국
1935년 대외 명칭 이란으로 개칭
1963년 백색혁명
1974년 아시안 게임 개최
1979년 이란 혁명 발발 → 군주제 폐지
통화 이란 리알

1. 개요2. 역사
2.1. 왕조의 개창2.2. 팔라비 1세의 통치
2.2.1. 제2차 세계 대전
2.3. 팔라비 2세의 통치
2.3.1. 모사데크 실각2.3.2. 백색혁명2.3.3. 민족주의2.3.4. 외교2.3.5. 왕조의 붕괴
2.4. 황실의 망명과 현황
3. 평가
3.1. 재평가?
4. 황족의 이란 귀국 또는 방문 가능성?
4.1. 현 지도부의 혐오4.2. 사바크 피해자들의 증오4.3. 망명중인 다른 세력의 외면4.4. 다른 나라 몰락 왕가의 예들4.5. 왕족 자신들의 현정권에 대한 적대적 태도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으로 송환된다면4.7. 진짜 귀국이 이뤄질 때의 시나리오
5. 기타6. 역대 군주7. 국가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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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시아어: کشور شاهنشاهی ایران (Kešvar-e Šâhanšâhi-ye Irân)
영어: Imperial State of Iran

페르시아(이란)의 마지막 왕조. 카자르 왕조의 군인이던 레자 칸(레자 샤 팔라비)이 1921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뒤 1925년 왕위에 오르면서 팔라비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 아들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뒤를 이었고, 1979년 2월 11일 이란 혁명으로 퇴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에서는 2000년대 이전까지는 '팔레비'라는 표기법을 사용했었다.

2. 역사

2.1. 왕조의 개창

1878년 출생하여 젊은 나이에 군인이 된 레자 칸은 1921년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테헤란을 점령하고(페르시아 쿠데타), 1919년 체결 된 영국-이란 협정을 무시하며 치외법권을 철폐하는 데 성공한다. 레자 칸은 1924년부터 1925년 이란군 사령관 겸 총리가 된다. 1925년 10월 31일, 레자 칸은 카자르 왕조의 폐지를 의회에서 의결하고 동년 12월 12일 이란 국회가 레자 칸을 왕(샤)으로 추대하였으며, 사흘 뒤인 15일 왕위에 올라 팔라비 왕조를 열었다.[2]

2.2. 팔라비 1세의 통치

왕위에 오른 레자 샤는 국내 개혁에 착수한다. 1926년에는 사법 개혁을 했으며 1927년엔 국립은행의 창설, 1929년에는 징병제를 제정한다. 미국에서 재정고문관을 초빙하여 재정 개혁을 하였고, 교육 개혁을 실시하여 국가 근대화에 노력했다. 이때 현대교육이 도입되어 이란 최초의 현대식 대학교인 테헤란 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차별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여성 해방을 결의하고 1936년에는 히잡 금지령을 내렸다.

대외적으로 국제연맹에 가맹하였으며, 1935년 국호를 '페르시아'에서 '이란 제국'으로 통일[3]하고 국왕(king)으로 번역되던 왕호인 황제(emperor)를 의미하는 샤한샤로 격상하였다. 중앙집권을 추진하며 1938년에는 1927년에 건설을 시작했던 이란 횡단 철도를 완성해서 산업 육성에도 진력했다. 그러나, 국가 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지지를 받았으나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체제였기 때문에 반발을 불러왔다.

2.2.1.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레자 샤는 이란의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군의 통과를 거부하는 한편 국내 독일인을 추방하는 것도 거절했기 때문에 추축국과 협력한다는 의혹을 받았다. 1940년 북아프리카에서 영국과 독일의 교전이 시작되고 이란과 국경을 접한 이라크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반영친독으로 선회하자 영국은 페르시아 만에 면한 송유시설과 중동지역 안보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또한 이란이 소련으로 향하는 렌드리스 물자가 통과하는 기점이어서 철도가 엄청 깔렸던 데다가 이란인들의 반영 폭동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불안해진 영국은 독일이 이란의 유전을 차지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연합국인[4] 소련과 함께 이란에 최후통첩을 날리고 무단으로 이란을 침공하여 이란에 주둔했다(페르시아 침공).

이 페르시아 보급로를 통해 연합군은 500만톤 이상의 대량의 보급 물자를 소련에 공급할 수 있었으며, 1943년 9월 9일 이란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이 되었다. 1943년 11월, 테헤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이 참가한 테헤란 회담이 열렸다.

한편 레자 샤는 침공 직후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팔라비 2세)에게 양위하고 퇴위하였으며, 모리셔스 섬으로 망명했다. 이후 남아프리카 연방[5]요하네스버그로 망명하여 1944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3. 팔라비 2세의 통치

2.3.1. 모사데크 실각

1951년, 모하메드 모사데크 총리는 석유국유화를 추진함과 동시에, 이에 반감을 품은 서방국가들로부터 봉쇄를 당하자 소련에 접근했으며, 이 과정에서 모사데크와 갈등을 겪은 팔라비 2세는 로마로 망명했다. 그러나 CIA와 MI6의 지원(에이잭스 작전)을 받은 근황파 장군들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모사데크 총리는 실각했으며 팔라비 2세는 귀국했다. 이때까지 팔라비 2세는 서방 외교관들로부터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없는' 명목상 국가원수로 여겨졌으나, 아버지 레자 샤가 왕조를 개창한 과정을 보아온 까닭에 그를 둘러싼 자헤디 수상 등 장군들의 반란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허수아비에서 개혁군주로 자리매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3.2. 백색혁명

백색혁명 당시 이란[6]

팔라비 2세는 1957년 창설된 비밀경찰 사바크(SAVAK)를 기반으로 반체제 운동을 단속하며 권위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한편으로는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도모하며, 위대한 문명을 국정철학으로 내세우며 경제성장을 목표로 하는 개발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팔라비 2세는 1963년부터 석유수출하여 획득한 외화미국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백색혁명에 착수한다. 국영기업 민영화, 교육 진흥, 농지개혁과 농촌 개발 등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1962년 10월 6일 지방선거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무슬림에게만 국한한 조항을 철폐하고, 바하이교 신도에게도 시민권을 주려고 했으나, 시아파 보수파 등에서는 비난을 받았고 법률의 철회를 강요받았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주도하에 1963년 대규모 반제정 폭동이 일어났으나 진압당하고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영향력 때문에 추방되었으며, 런던에 가려 했지만 영국 정부에서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라크를 거쳐 프랑스 파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 폭동에 대해 대한민국 언론에서도 "시대착오적인 반동들의 난동"이라고 매우 비난하기도 하였다. # 애초에 시위의 이유가 모스크의 토지 분배 반대와 여성 참정권 반대였었다.

2.3.3. 민족주의

팔라비 2세는 1965년 9월 이란 국회에서 '아리아인의 영광'을 뜻하는 '아리야메헤르(آریامهر)' 칭호를 받았고[7] 동시에 이란 민족 의식을 고취했다. 그동안 '가난한 나라에 황제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양해 오던 샤한샤(샤 중의 샤, 왕중왕 즉 황제) 칭호를 1967년 10월 대관식을 올리면서부터 쓰기 시작했다. 부황 레자 샤도 재위 기간 내내 샤 칭호를 써오다 후반 6년 동안 샤한샤 칭호를 썼다. 뒤를 이은 팔레비 2세는 샤한샤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지 않고 20년 넘게 샤 칭호를 사용하다 다시 샤한샤 칭호로 바꾸었는데, 당시 이란의 군주 칭호가 썩 일관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1925년부터 제국(Imperial State)으로 불리고 있었으며 국제적으로도 황제 폐하(His Imperial Majesty)라는 경칭으로 불리고 있었기에 샤든 샤한샤든 둘 다 황제의 의미였으며 샤한샤 대관식은 철저히 내부 권위 확립용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란은 한국의 우호국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언론에서는 팔레비 2세를 황제보다는 국왕이라는 호칭으로 번역하여 기사를 내오곤 했다. 샤를 국왕으로, 샤한샤를 황제로 해석해왔기에 단지 샤한샤를 칭한 기간보다 샤를 칭한 기간이 더 길어서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황제국 군주인 일본 천황의 경우에는 국민감정으로 인해 천황이나 황제가 아닌 일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 6.25 전쟁 파병국인 에티오피아의 느구서 너거스트(왕중왕) 하일레 셀라시에에게는 일관되게 황제 호칭을 사용하였다. 하일레 셀라시에 방한 기념우표에도 '이디오피아 황제'임이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팔레비 2세가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진행한 샤한샤 대관식은 황제독재권 강화에 이용되었으며 나중에 팔레비가 퇴위하게 되는 나비효과로 이어졌다. 만약 그가 샤한샤를 칭하지 않고 샤에 머무르며 평범한 입헌군주를 지향했더라면 이란 제국은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제국 대부분이 붕괴한 20세기에 굳이 샤한샤를 칭한 것은 팔레비에게 자충수가 되었다. 다른 제국인 에티오피아나 일본은 태초부터 황제로 칭해왔기에 세월이 흐르면서도 큰 잡음이 없었지만, 굳이 20세기에 대관식을 하여 국민의 지탄을 받은 사례는 이란의 팔레비 2세와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1세가 유이했으며 이들 모두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ohammad_Pahlavi_Coronation.jpg
팔라비 2세가 1967년 10월 '샤'에서 '샤한샤'로 스스로를 높이는 대관식에서 찍은 사진.

1971년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유적 페르세폴리스에서 이란 건국 2500년 축하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서는 다수의 국빈이 초청되었으며, 에티오피아 제국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일본 쇼와 덴노의 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이 있었다. 제국 정모 동시에 키루스 2세가 기원전 539년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바빌론 유수에서 유대인 등 여러 민족을 해방하고 각각의 고향에 다시 그들의 성전을 재건했다고 기록된 키루스 원통인장의 복제물을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으로서 국제연합에 증정했다.

샤는 이 행사를 기념하여 수도 테헤란에 샤의 영광을 의미하는 "샤야드 타워"을 건설하고, 남쪽 마을에는 부황 팔라비 1세의 무덤을 건설했다. 샤아드 타워는 혁명 이후 자유라는 뜻에서 따온 아자디 타워로 명칭이 바뀌고, 팔라비 1세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개발살나서[8] 이슬람 신학교가 됐다.

1975년에는 셀주크 왕조가 만든 자라리력(曆)을 대신하여 이란력(曆)을 도입하고, 기원을 이슬람 사회의 히즈라를 대신하여 키루스 2세가 메디아를 멸망시킨 기원전 550년으로 잡았다.

일련의 사업에 투자된 비용이 1억 달러 이상에 달했으므로, 반체제적인 이슬람 율법 학자를 비롯한 여러 세력에게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뭐 그런데 전성기에는 이 양반 개인 자산만 20억 달러가 넘었던 것 같다. 그래도 페르시아 제국 시절을 영광의 시대로 기억하는 여론은 나쁘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를 악마 같은 우상숭배라고 비난하던 호메이니가 신나게 욕처먹고 만다. 오죽하면 호메이니는 "여러분, 저는 낭비와 팔라비 2세의 자기 정권 우상화를 비난한 거지, 위대한 페르시아 시대를 모욕한 게 아닙니다!"라고 변명해야 했다.[9] 1974년에는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였다.

2.3.4. 외교

파일:Photograph_of_the_President_and_Mrs__Truman_with_the_Shah_of_Iran,_in_formal_attire,_during_the_Shah's_visit_to_the____-_NARA_-_200150.jpg
1949년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팔라비 2세

팔라비 2세는 스스로도 영어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친서방 외교를 추진했다. 친서방 정책으로 이란은 친미 국가였고 미국과도 가까운 관계였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에 다른 동맹국에 판매한 적 없는 최첨단 F-14 전투기를 이란 공군에 판매하고, 키드급 구축함과 F-16, F/A-18이 이란에 판매가 확정되었던 상태일 정도로 이란을 최혜국으로 대우하였다.

대한민국과도 관계가 양호했으며, 이로 인해 1977년 테헤란로라는 도로명이 지어졌다.[10] 주변국인 이라크튀르키예, 의외로 사우디아라비아와도 관계가 좋았다고 한다. #

2.3.5. 왕조의 붕괴

이때까지만 해도 개혁군주로서 팔라비 2세의 앞길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11]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 들어 오일 쇼크가 가라앉고 유가가 안정되자 경제적으로 문제가 생겼으며, 또한 오일쇼크로 경제력이 급속히 향상되었으나 석유 수출로 얻은 이득이 소수의 특권층과 부유층들에게 쏠리고 이란의 산업부문은 갑자기 높아진 소비력을 감당하기에 모자라서 물자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발생했으며 또한 물가도 급속히 상승하여 농촌과 중소상인들이 몰락의 길로 걷고 이는 도시 빈곤층의 증가로 이어지며 되려 팔라비 2세에 대한 반발을 늘렸다. 물론 타 걸프왕국들도 소수계층에게 석유수출로 얻은 이익을 독점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럼에도 (외국인 노동자를 제외한) 서민들도 어느 정도 부유하게 먹고 살 정도는 되었는데 이란은 타 걸프만 국가에 비해 인구가 몇 배 이상은 많았기 때문에 아무리 선심성 정책을 내놓는다 한들 그 수준은 타 걸프만 국가들에게 훨씬 못 미쳤다.

결국 이슬람 원리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이 모여서 파업과 시위가 빈발했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에 이미 프랑스 의료진에게서 임파암과 비장암 선고를 받은 팔라비 2세는[12] 건강 문제 때문에 급변하는 시국에 대해 적절한 대응이 어려웠다. 아예 1978년 봄부터는 공식 석상에 나서지도 못할 정도가 건강이 나빠졌으며[13], 헝가리불가리아 등 동유럽 국가 방문 계획도 취소되었다. 암의 진행을 억제하기 위해 프랑스 의료진으로부터 처방한 항암제는 우울감과 사고력 저하를 불러일으켜, 격변기에 대한 상황 대응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결국 1978년 초부터 발생하던 반군주제 시위는 1978년 8월 19일 아바단에서 일어난 렉스 극장 방화사건(Cinema Rex Fire)[14], 9월 8일 검은 금요일 사태로 88명의 사망자가 나와 시위는 더 악화되었다. 팔라비 2세는 골람레자 아자리 장군을 수상에 임명하여 군사정권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는 한편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러 개혁조치를 약속했으나,[15] 시위가 악화되던 와중에 1979년 1월 6일 서방 4개국(미국, 영국, 프랑스, 서독)이 과들루프 합의로 이란 사태 불개입과 팔라비 2세의 퇴진을 종용하여 사실상 팔라비 왕조를 버리기로 결정했다. 결국 1979년 1월 16일 팔라비 2세는 샤푸르 바크티야르를 총리로 임명하여 퇴위를 결정하고, 암 치료를 핑계로 망명하게 된다.

호메이니는 2월 1일에 15년 만에 귀국을 완수하여, 이슬람 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팔라비 2세가 임명한 마지막 총리인 샤푸르 바크티야르는 호메이니와 차기 정부 구성과 정국안정을 위한 협상을 하려고 했지만 호메이니는 어떠한 협상도 거부하고 바크티야르의 무조건적인 사퇴와 정권 이양을 요구하며 바크티야르에게 맞섰다. 이러한 호메이니의 즉각적 사퇴를 수용하지 않았던 바크티야르 내각과, 황실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위대 및 이란 육군 공수부대와 내무부 보안군이 호메이니 지지를 표명한 육군 내부의 반정부세력과 전투를 벌이다가 2월 11일에 제압되었다. 총리와 친위대 대장들이 체포되어 2월 13일 공식적으로 바크티야르 총리가 사임함으로써 완전히 이슬람 혁명 위원회가 이란을 장악하고 이들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이란 혁명은 종료된다.

2.4. 황실의 망명과 현황

팔라비 2세와 그 측근은 망명 직후에는 이집트로 갔는데, 거기서도 별로 환영받지 못해 나가야 했다.[16] 그 뒤 모로코, 바하마, 멕시코 등을 전전했다. 팔라비 2세는 이후 암 치료를 명목으로 파라 황후 등과 미국으로 옮겨갔지만, 미국이 그 입국을 인정한 것에 반발하여 1979년 11월 4일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팔라비의 송환을 요구하는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때문에 12월 5일 미국을 떠나 파나마로 갔으며, 1980년 7월 27일에 다시 이집트의 사다트 정부가 망명을 받아주기로 해서[17] 카이로망명하여 사다트 대통령의 배려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결국 실의 속에서 1980년 3월 지병인 암이 악화되어 암 투병 6년 만에 카이로에서 사망했다.[18]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알-리파이 사원에 대리석으로 꾸며진 묘지가 있다.

마지막 황태자였던 레자 팔라비는 이후 명목상의 이란 샤한샤로 추대되어 미국 메릴랜드 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세 딸을 두고 있어서 레자 팔라비 사후엔 레자 팔라비의 이복 사촌이자 팔라비 2세의 이복 조카인 패트릭 팔라비에게 넘어갈 것이다.

이란 혁명으로 축출되었던 레자 팔라비 황태자 등, 해외로 망명한 팔라비 구 황족들은 이란 국가 평의회(National Council of Iran)라는 망명 단체를 수립하여 '현 이란 신정 체제 정부 타도'와 '군주제 복고'를 주장하고 있다.[19] 하지만 현재 이란 내에서도 현 이슬람 공화국 정부에 대한 지배가 강고한데다가, 현 이란 정부 내의 이슬람주의 정치가와 개혁주의 정치가 모두 팔라비 왕조를 적대한다. 팔라비 왕조 시기 이란과 동맹관계였던 서방 세계 국가들도 1979년 1월 과들루프 합의에 따라 팔라비 왕조를 배신하고 현 이슬람 공화국 정부를 이란의 정식정부로 인정하고 있다. 현재 군주제 복고는 불가능하다는 견해가 많다.[20]

3. 평가

나는 역사 시간에, 샤는 이란의 좌파들을 억누르고 이란의 석유에 미국이 안전하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해 CIA가 세운 열등한 독재자라고, 그는 사치스럽고 변덕스러웠다고 한다. 그의 비밀경찰 SAVAK는 비난받지 않고 고문하고 감시했다고 배웠다. 이것들 중 대부분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1953년, 적어도 CIA가 영향을 끼친 쿠데타에 의해 확실히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독재자였다(그가 선의의 독재자였는지 폭군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하더라도). 하지만 나는 샤와 그의 정부에 대해 모순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샤 통치 시기에 나의 할머니는 참정권을 얻었고, 폭력적인 아편 중독자 남편에게서 이혼할 권리를 얻었다. 나의 친척들은 그의 토지개혁과 산업적 이익을 나누는 프로그램으로부터 혜택을 입었다. 나의 아버지는 샤의 문맹퇴치부대(literacy corps)로부터 읽는 것을 배웠고, 정부가 제공한 음식과 교과서를 받았다.
― 익명인, "Why Iranians are lapping up Shah memorabilia" (2015년 6월 17일 가디언 지)#

팔라비 왕조는 토지개혁, 여성의 참정권 보장, 일부일처제, 문맹 퇴치, 무상 의무교육, 산업 고도화 및 경제발전 등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통해 이란의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다. 외세와 결탁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란 정도 되는 규모의 국가에서 외국과 단절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친서방 노선을 통해 이란은 상당한 이익과 이권을 보장받았다. 물론 석유 분야에 의존한다는 경제적 한계는 있었지만 아무 기반이 없는 개발도상국에게 유용한 자원이 있다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자원조차 없어서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 하는 국가들도 많다.

허나 정권 유지 및 민심 관리에서는 문제가 많았다. 이란은 원래부터 문명국이었고 또한 그동안 펼친 친미, 친서방정책으로 인해 적어도 도시 중상류층 국민들의 사고방식은 고도로 서구화되어 자유주의적이고 다양성을 추구하기에 1970년대 들어 무조건적이며 강압적으로 변해가는 샤의 정치를 영구히 지속할 수는 없었다. 또한 지도층과 달리 일반 국민들은 반서방적 정서가 강하였고, 외부에서도 한창 반서방,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슬람주의가 서로 맞물려서 횡행하는 시절이었다. 심지어 백주대낮에 수상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암살당하는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21] 더군다나 팔라비식 세속주의는 이슬람 교리 특유의 여러 폐단을 보완하는 장점이 있었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서방의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과격한 면이 있었다.[22]

다만 히잡을 자유화시킨 게 아니라 금지시킨 면에선 히잡, 차도르를 강제로 입히는 호메이니, 하메네이와 강제로 벗기는 팔라비나 대동소이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 히잡 금지령(Kashf-e hijab)을 내린 것은 무신론자에 가까웠던 선대 레자 샤(1936년)였고, 팔라비 2세는 히잡을 안 좋게 보았지만 칼같이 금지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960, 70년대 이란의 당대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검은 차도르를 쓴 여성도 꽤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라비 2세는 무조건 강경 일변도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1970년대 말 오일쇼크와 빈부격차, 경제문제가 겹쳐서 국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던 위기상황에서도 내치의 방향을 수정하지 않았다.[23] 팔라비 왕조 말기에는 무력사용을 동반한 강경대응 → 시위대 및 반정부세력의 강경화 → 더 큰 무력사용의 악순환을 형성하며 유혈진압으로 팔라비 왕조의 권력 기반을 흔들었다. 차라리 초강경하게 나선다면 현 이란 신정정부나 천안문 사태나 전간기 때 구 소련이 중앙아시아 지역에게 강제적으로 이슬람 구습을 뿌리 뽑았던 것처럼 확실히 찍어눌렀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하였다.[24] 다만 이 점은 팔라비 2세가 이때 암 발병으로 그렇지 못했다는 반론도 있다.

물론 팔라비 왕조가 추진한 토지개혁으로 소작농의 90%가 자작농이 되었고, 여성 참정권 도입으로 인해 이란 내 소수민족 출신의 여성 국회의원이 배출되는 등의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치적 홍보나 프로파간다를 제대로 하지 못해 지지세력을 제대로 결집하지도 못했다.

팔라비 왕조가 영리하고 힘이 좀 더 있더라면, 또는 몇십 년을 더 유지해 몇백 년 전 유럽이 한 정교분리를 어느 정도 확립했더라면 불안정하더라도 튀르키예, 레바논처럼 근대화되고 세속적인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거나 혹은 오만이나 요르단, 모로코 같은 현존하는 아랍권 군주국들처럼 부의 분배 등 국민들의 민의 문제를 해결하여 내부의 불만 요소들을 어느 정도 잠재워 팔라비 왕조의 권력 기반을 더욱 더 강화했거나,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은 채 점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더라면 몰락하지 않고 군주제를 유지하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일단 사회 면에서는 1960년대의 백색혁명으로 급격한 탈종교화와 서구화를 추진하려 하면서 이슬람 보수 세력들의 반발을 샀고, 황권이 불안한데도 전제군주제로 끌고 가려고 했으며 의회를 제대로 제압도 못했으므로 좌파 세력(투데당 등)와 자유주의 세력을 적으로 돌렸다.[25] 결국 군주제는 혁명으로 전복되었고 이후 이란은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공화정 체제로 새출발하였다.

3.1. 재평가?

군주제를 혁명으로 무너뜨리고 이슬람 공화국이 된 오늘날의 이란도 정치 탄압이나 인권 탄압에서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악랄해서 팔라비 왕조를 비판할 처지가 못 된다. 혁명 초기에는 군주제를 반대하는 여러 정파들 중에서 이슬람 세력이 헤게모니를 쥐려는 상황에서 이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세속주의 세력 등을 탄압하며 정권을 독차지했으며, 이후에도 총칼과 법 등을 통해 반대파를 억누르거나 학살했다. 호메이니 사망 이후에 그나마 완화된 것이 이 정도이다. 거기에 팔라비 왕조 시절과 다르게 이슬람 율법에 따른 신정 정치를 모토로 삼은 탓에 간통죄에 대한 투석형이라든지 동성애에 대한 교수형 등 팔라비 왕조 시절에는 없었던 억압도 생겨났다.[26] 이전부터 있던 명예살인 같은 문제도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다.[27] 거기에 이젠 본격적으로 반서방 행보를 보인 것까지 합쳐져 이란은 많은 면에서 정체되고 상당부분 퇴보했다.

그래도 이들은 혁명 후 4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비교적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이유는 먼저 (그들 나름의) 실용주의를 보인 것인데, 당장 살아남기 위해 이후 외국과의 충돌을 위해서이긴 하지만, 전쟁 수행 및 이후의 군사력 구축을 위해 구 제정 이란군 인사들을 사면했고 그들이 싫어하는 서구의 군사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인들에게서 전쟁수행 자금을 받는 대신 그들을 정치적인 면에서 상당히 풀어주었다. 또한 팔라비 왕조 시절에 추진한 개혁정책 중 필요한 것들은 수용했다. 그 예로 여성의 대학진학 확대와 무기 국산화를 들 수 있다. 특히 이란의 군사력은 팔라비 왕조의 유산을 기반으로 그들 나름대로 노력해서 만든 것의 결과물이다. 팔라비 왕조 시절 구축한 인프라의 힘이 절대적인 분야. 물론 신정 체제가 들어선 이후 그 전에 비해 발전이 정체되었다.

한편 권력을 더 확실히 틀어쥐기 위해 호메이니하메네이와 신정위원회의 권한이 훨씬 우월하고 그들이 윗선에 존재하며[28] 근본주의자 측은 이것과 이슬람 혁명 수비대[29]로 반대파가 득세하더라도 대처할 만한 무력과 권력을 마련해두었다. 혁명 수비대가 반 이슬람세력이 선거에서 이기면 좌시하지 않겠다 나서며 부정선거와 부정선거 의혹이 나오는 등 지지세력이 정권을 잡도록 유도하는 변형되고 기형된 체제지만 공화주의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공화정 체제를 만들었고 정권이 안정된 이후에는 반대파 정치인에게 견제와 훼방을 놓을지언정 체제에 위험이 가지 않으면 어느 정도 눈을 감아주었다. 그러면서 팔라비 왕조 전복 당시 샤를 지지하며 저항한 것이 그저 황실 친위대와 공수부대밖에 없었던 것을 반면교사 삼아 혁명 수비대 같은 것을 통해 군사력을 갖추어 정권 유지의 근간으로 삼았다. 실제로 2019년 11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혁명 수비대와 보안군을 동원해 시위대 200명 이상을 학살하는 등 무력기반이 튼튼하여 더욱 과감하다. 그리고 해외에 망명중이던 샤푸르 바크티야르 전 총리 등 반체제 인사들까지 직접 제거하여 구심점이 될 인물들의 싹을 없앴다.

팔라비 왕조보다 폭압적이면 더 폭압적이지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이슬람 정권이지만 오히려 폭압적으로 반대세력들을 때려잡았기에 정권을 유지 할 수 있었다. 물론 국민들이 원하는 반서방 이슬람주의 정책은 기본 밑바탕에 깔고 간다. 1999년과 2009년, 2011년에 이란 내에서도 세 차례 있었으나 대부분 진압, 토벌되었다. 여러 경제 제재를 받음에도 이란에서 의미 있는 반정부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정권을 잡고 있는 종교근본주의자들이 많은 이란 국민들을 폭압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정 체제도 팔레비 왕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부패한 편이다. 아예 고위층 자녀들은 보란 듯이 해외에서 세속주의를 누리고 있다.[30]

그렇기에 2014년 다에시가 떠오르자 중동에서 비교적 혼란이 적고 안정되어 있었으므로 이라크에 간섭할 수 있었다. 미국이 이란 체제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무너뜨리려고는 하지만, 이라크 전쟁이라는 부시 행정부 최악의 실책으로 미국의 중동 지역에 대한 대규모 간섭은 이제 어려워졌고, 사우디아라비아파키스탄은 일단 친미 정부이지만 알카에다탈레반, IS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 단체들의 탄생에 알게 모르게 기여했기 때문에, 미국도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고 이란을 국제사회의 파트너로 인정하며 대 IS 전선에 동참(사실상 묵인)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핵 협상도 거의 타결되었는 줄 알았는데, 미국 제45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핵 협상도 최악이라면서 파기하고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를 부활하여 강화, "미국, 이스라엘, 아랍" vs "이란" 구도가 첨예해졌다.

이렇게 되자 오히려 이란이 시아파 벨트인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에 깊숙히 개입했던 것이 독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서방이 부활시킨 각종 경제 제재와 유가 하락으로 경제는 극악으로 추락했고 빈곤과 실업이 심각한데 저 국가들에 과도한 개입을 하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31] 반정부 시위도 이란에서 2017-2018 이란 시위를 시작으로 잊을 만하면 터지고 있으며, 급기야 2019년 11월에는 시위대 수백 명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이에 연금중인 (신정 체제 내) 개혁파 지도자 무사비는 1978년의 팔라비 왕조 몰락의 기폭제가 된 '검은 금요일'을 상기시키며 하메네이가 쫓겨난 팔라비 황제와 같은 짓을 했다고 비난했다.[32] 2019년 12월, 혁명수비대 간부 자바니는 이번 학살이 하메네이의 명령이었으며,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시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거듭 말했다.

2010년대 후반 이후의 시위에서 주목할 점은 2009년의 '녹색 운동' 시위 때의 이슬람 체제 내 온건 개혁이 아니라 이슬람 신정 체제 자체를 거부하는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독재자에게 죽음을!" "하메네이에게 죽음을!" 같은 구호가 대표적. 그리고 시위 구호 중에 "레자 샤, 신께서 당신의 영혼을 보호하길!" "오오 이란의 샤여, 이란으로 돌아오라!" 같은 것도 관찰되고 있다. 이에 대해 2017-2018 이란 시위 당시 이란 현 정권에 우호적인 러시아의 관영 매체 스푸트니크는 지역 전문가의 말을 인용해, "이란 8,100만 인구 중에 이슬람 혁명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2/3를 차지하는데[33], 그런 사람들이 샤의 이름을 외친다는 사실이 놀라우며, '사람들이 그저 이란인이던' 세속주의적인 이란으로 시계를 되돌리고 싶은 열망"이며, "이 시위는 단지 테헤란의 밀레니얼 세대뿐 아니라 마슈하드, 이스파한, 콤(같은 지방도시)에서도 있었다"고 보도하였다.[34]

이란 사법 당국도 2019년 11월 유혈시위의 배후가 "반(反)이란주의자, 미국이 후원하는 테러단체, 분리주의자들"과 함께 (혁명 이후 그렇게 솎아 낼 대로 솎아 냈는데, 아마도 근 40년 만에 처음으로) "근황파"를 지목했다.#

그러므로 현재에도 팔라비 왕조에 대한 평가는 이란 내에서조차 현재진행형이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 내부에서도 혁명으로 몰아낸 군주제를 복고할 수 없다며 팔라비 왕조의 복고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은데 백색 혁명을 보면 알겠지만 현 이란이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가 된 데에는 팔라비 왕조의 책임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이나 서방 강대국들이 이란을 침공하거나 이란 내부에서 현 신정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주도로 반군과 정부군 간의 대규모 수준의 내전이 발발하여 현 이란 정부가 붕괴되거나 몰락한다고 해도 현재 생존 중인 팔라비 황족들이 군주제 복고와 같은 결실을 이룰 가능성도 낮은 것도 사실이다. 현재 이란의 정권을 쥐고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을 비롯해 좌익 및 우익 등 모든 공화주의 세력 등 모든 이란의 정파 세력들을 막론하고, 이란 자국민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사람들마다 엇갈릴 정도로 인기가 낮고 적개심과 반감이 심한데다, 청교도 혁명과 론놀의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됐다가 이후 왕정이 복귀되었던 영국의 스튜어트 왕가나 캄보디아의 노로돔 왕가처럼 왕정복고를 통한 정국 주도권에 대한 재장악은커녕 자국민들의 불만과 반발이 폭발하여 혁명이 일어나 군주제가 전복당했던 이란 현대사의 특수성을 감안해도 당연히 어불성설이고,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같은 서방국가들 역시 새 이란 정부를 세우기 위해 팔라비 왕조의 복고를 추진한다 해도 그간 팔라비 왕조 시대 당시 팔라비 왕조의 만행들을 눈감아주며 후원했다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권력을 잃고 몰락했던 과거를 감안해도 정치적 이득은 커녕 이란 내부에서 일어날 반발과 저항을 걱정해야 될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차라리 팔라비 왕조의 복고 대신 이란 혁명 시기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과 합세하여 혁명을 주도했다 팔라비 왕조의 축출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에 의해 정국 주도권을 잃고 숙청당해 밀려나간 이란 인민 무자헤딘기구나 자유운동당이나 이란 통일공화당, 자유전선당처럼 서방에 망명 중이거나 지하 세력으로 활동하며 현 이란 신정 정부와 대립하고 있는 좌익/공화주의 성향의 야권 반체제 세력들과 현재 이란 정권 내의 보수파들의 견제에 밀려 정치권의 상층부에 진입하지 못 하여 불만이 가득한 개혁주의 성향의 이란 정치인들의 주도로 공화제를 기반으로 하는 새 정권이 수립될 가능성이 더 높다.

4. 황족의 이란 귀국 또는 방문 가능성?

4.1. 현 지도부의 혐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된 이후 이란에서 축출되어 미국, 유럽 등 서방 국가들에서 망명 중인 구 팔라비 황족들(팔라비 2세의 부인인 파라 팔라비 황후와 그들의 자녀인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와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이 서방 국가에서의 해외 망명을 접고 이란 정부 측과의 협상을 통해서 돌아가거나 또는 이란 정부의 사면령이나 귀국해도 된다는 결정이 내려져 귀국 허가를 받아 이란으로 귀국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실제로도 이탈리아, 그리스, 러시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조지아, 몬테네그로, 아프가니스탄, 튀르키예, 루마니아, 대한민국 등과 같이 군주제가 내부 정변이나 민심상실, 외침을 받아 폐지되거나 몰락하면서 군주나 왕(황)족 일가들이 국외로 축출당하다시피하여 해외 망명 살이를 했던 다른 나라들도, 후일 전 군주나 왕(황)족들이 해당 국가의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받거나 또는 정부와의 협상을 통해서 귀국하거나, 모국을 방문한 사례가 있었다. 그래서 이란의 팔라비 황족도 이란 정부로부터 방문 초청 또는 귀국을 허가받거나 또는 현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이란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이란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전제조건을 내세워(또는 이란 정부에서 중앙 정치 권력에 팔라비 일가들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귀국 조건을 내세우거나) 이란 정부와 협상하여 귀국 또는 일시 방문이라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팔라비 2세의 장남인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란의 군주제 복고가 불가능하다면 군주제 복위 주장을 포기하고,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정치체제가 바뀐 후 국외 추방됐다가 모국으로 귀국해 돌아왔던 다른 나라의 전 국왕이나 왕족들처럼 이란으로 돌아와 남은 여생을 자신이 태어났던 이란에서 보내며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현 이란의 최고 종교지도자(라흐바르)인 알리 하메네이 등 이란의 정치가들과 이란군, 이슬람 혁명 수비대 등 군부의 주요 인사들 상당수는 팔라비 황족들을 무척 싫어하거나 아예 증오나 혐오하는 수준을 넘어서 당장 직접가서 때려죽이거나 기관총 총탄 여러발 퍼붓어 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사망했지만 하메네이의 전임이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1900/1902~1989) 전 최고 지도자 또한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현재의 이슬람 공화국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팔라비 2세 황제와 라이벌 수준으로 처절하게 대립했으며, 이란 혁명 이후 이란의 1세대 정치인들 중 온건파에 속해있던 악바르 하셰미 라프산자니(1934~2017) 전 대통령과 호세인 알리 몬타제리(1922~2009) 전 최고 성직자[35] 역시 호메이니와 하메네이만큼은 아니었어도 이들 역시 이란 혁명 당시 팔라비 왕조와 대립했던 당사자였기에 생전 내내 팔라비 황족들을 싫어했다.

게다가 현재 이란의 지도층 인사들 대부분은 팔라비 황족들이 이란으로 돌아올 경우 죄인으로 검거해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들을 내뱉고 있는데, 특히 알리 하메네이 최고 지도자는 팔라비 2세의 자녀들인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와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 미망인인 파라 팔라비 전 황후조차도 아버지와 부군이 저지른 범죄 행위까지 책임을 함께 물어 강경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이란 정계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의 보수 원칙파와 세속/이슬람 온건주의 성향의 개혁파 등 이란의 양대 정파 세력들이 서로 이를 갈며 싸우거나 대립하는 상황에서도 원칙파와 개혁파 모두 입장이 가장 일치하는 사안이 바로 팔라비 구 황족들에 대한 증오와 반감일 정도로[36] 이란 정계에서 팔라비 왕조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상상을 초월한다. 그리고 실제 현 이란 정계의 지배층들 대부분이 팔라비 왕조 치하에서 반 군주정 투쟁을 펼쳐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통해 왕조를 무너뜨리고 집권하거나 혁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라[37][38] 더더욱 증오감은 심하다.[39] 최악의 경우 귀국 불러들여놓고 도착하자마자 잡아다 사형 내지는 암살하여 타살한 구 황족들의 사체를 아무도 모르는 사막 오지 같은 곳에 암매장하거나, 설혹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의식해 죽이지는 않더래도 귀국한 팔라비 황족들의 인권이나 의사 따위를 무시하며 교도소에 집어넣거나 가택연금으로 수감, 감금시키며 탄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노릇이다.[40] 그리고 혁명으로 국외로 도주, 망명중이었던 팔라비 황가 사람들도 귀국하지 못하고 타지에서 여럿 사망했는데 팔라비 2세 황제는 이미 1980년에 암으로 사망했고, 망명중이던 팔라비 2세의 자녀들인 레일라 팔라비 공주와 알리 레자 팔라비 황자 역시 약물중독과 총기 자살로 미국과 영국에서 사망했다.

4.2. 사바크 피해자들의 증오

그리고 현 이란 정부의 상층 세력들 뿐만 아니라 이란 국내에서도 팔라비 왕조 시절이었던 1960, 70년대 당시 비밀경찰 사바크(SAVAK)에 의해 고문, 감금 등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 및 후손, 생존 피해자들도 여럿 존재하는데 이들 역시 팔라비 구 황가들을 적대, 증오하고 있다.[41] 여하튼 현재 이란의 실정이 이런데 과연 이란의 현 정부가 팔라비 황족들의 이란 귀국을 허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귀국은 커녕 개인자격의 방문조차도 허용할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하다. 당장에 위의 상기된 문제들로 인해서 아예 귀국 자체가 결렬되거나 실현되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 뿐만 아니라 1979년 이란 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되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 수립 초기 국외로 도피 중이던 팔라비 2세 전 이란 국왕을 비롯한 구 황가 사람들 전원에게 혁명 후 수립된 이란 정부가 궐석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선고했는데, 문제는 이란 정부와 사법부에서 1979년 이란 혁명 당시 국외로 도피한 팔라비 구 왕가 사람들에게 선고된 이 사형 판결을 취소하거나 폐기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사실상 이란 정부가 이 사형판결을 무기삼아 팔라비 왕가의 이란 귀국을 사실상 원천봉쇄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슷한 이유로 팔라비 황족들 뿐만 아니라 이란 혁명 당시 미국, 캐나다 등 해외로 도주, 망명했던 팔라비 왕조 시대 당시 이란의 전직 고위급 인사들 상당수도 이란 혁명 직후 궐석재판에서 받은 이란 정부의 사형판결이 취소되지 않아 이란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4.3. 망명중인 다른 세력의 외면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무너지고 성립된 이슬람 신정체제의 이란 현 정부에 반대하는 미국, 유럽, 캐나다, 호주 등 서방권에 망명중인 이란의 반 이슬람 신정 체제 망명 세력들도 팔라비 황족들에 대해 우군이 되거나 지원해주기는 커녕 적대하거나 외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인데 물론 세속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이란의 반체제 세력들중 이란 국가 평의회 같이 팔라비 왕조의 복고와 이란 귀국을 주장하는 친군주제 성향의 망명 단체들도 있긴 하지만 외려 이란 민중당이나 통일공화당 같은 군주제를 반대하는 사회주의 및 공화주의 성향의 반정부 단체들과 망명 정당들의 세력이 더 크다. 쉽게 말해 공화국을 주장하는 공화주의 세력과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귀를 주장하는 근황파 세력들로 양분되어 있으면서 공화주의 세력이 더 강력하다고 보면 된다.

게다가 이들 공화주의 성향의 망명 세속주의 세력들은 이슬람 신정체제의 현 이란 정권도 적대하지만 팔라비 황족들도 만악의 근원이라며 똑같이 미워하는데 이 망명 단체들 모두 이란이 더 이상 '팔라비 왕조의 사유지로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면서 현 이란 신정체제가 붕괴되고 이란의 새 정권이 수립된다면 팔라비 황족들과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근황파 단체 세력을 무조건 배제해서라도 총리나 대통령이 수반인 이란 공화국을 건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팔라비 구 황족들의 이란 귀국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란이 현재 이슬람 신정체제가 무너지고 새 정권으로 바뀐 뒤에도 팔라비 황족의 이란 귀국을 불허하거나, 팔라비 황족의 귀국 여부에 대해 찬반 국민투표를 실시해서 이란 국민들의 의사에 따라 귀국 여부를 결정 짓던지, 입국을 허용하더래도 별도로 비자를 발급받고서라도 일반인 신분으로 이란에 와야 한다는 냉정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42]

또한 현재 이란의 신정 체제에 반대하는 이란의 야권 세력들 대부분이 동부의 발루치스탄, 서부의 쿠제스탄, 서북부의 이란령 아제르바이잔, 쿠르디스탄 같은 소수 민족 분리주의 세력, 과거 인민 무자헤딘 같은 좌파 계열, 이란 혁명 이후 망명 커뮤니티가 서구식 교육을 받으며 형성한 자유주의 성향의 이란 외 반정부 단체, 바하이 교도 등 자잘하고 성향이 전혀 다른 단체들이 서로간의 교류나 협력도 딱히 없이 이합집산하고 있는 상황이며, 이 와중에서 옛 팔라비 왕조의 지분은 애초에 자잘한 야권 세력 중에서 딱히 주도적인 것도 아니고, 이란 신정체제라는 거대한 적대 세력을 두고도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이 제각기 달라 자기들끼리 단합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망명 이란 야권 세력들이 가장 이를 가는 대상은 현재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 정권인지라, 이미 혁명으로 축출당해 정치적 권력을 잃고 몰락한 팔라비 구 왕가와 이를 지지하는 친군주제 성향의 망명단체들은 그저 단순한 걸림돌 내지는 과거의 적대 세력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무리들로 여기고 있다.

4.4. 다른 나라 몰락 왕가의 예들

또한 과거 군주제였다가 군주제가 몰락하고 왕족들이 국외추방되었다가 다시 옛 왕족들의 귀국이 허용된 여타 국가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구 왕가에 대한 추방령을 내려 구 왕가 인사들 대부분이 해외로 추방되었지만 군주정이 폐지된지 50년이 지난 후인 1990년대에 들면서 '우리나라 구 왕실도 로마 제국 멸망 이래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국가로 통일시킨 역사의 주역'인데 너무 가혹하게 대하는 거 아니냐며 구 왕실 일가들을 지금이라도 용서하고 귀국시키자는 주장들이 나오고 힘을 얻게 되면서, 1997년에 이탈리아를 방문해도 좋다는 정부의 허가가 떨어져 구 왕실 인사들의 이탈리아 방문이 이뤄졌고, 더 나아가서 2002년에 완전한 귀국 정착이 허가되어 망명 중이던 구 왕가의 직계 일족들 대부분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군주제 폐지 이후 제정된 이탈리아 공화국 헌법에 사보이아 구 왕가에 대한 입국을 금지하는 조항까지 있었는데 구 왕가에 대한 귀국을 허가하고 현 정권과 구 왕가 세력들이 화해하는 과정에서 공화제 수립 후 새로 제정된 자국 헌법에 들어있었던 이 조항까지 헌법 수정을 통해서 완전히 삭제했다.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 발칸반도 국가들과 러시아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집권한 공산당 정권과 군부 독재 정권이 몰락하고, 구 유고슬라비아, 구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 구 왕족 일가들의 귀국이 이뤄졌으며, 이란의 이웃국가인 아프가니스탄도 1973년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고 이후에 쿠데타와 내전, 소련의 침공 등 정치적 혼란을 겪다가 2001년 하순 탈레반 정권이 미국의 침공으로 축출되고 북부동맹 등 비탈레반계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나서야 유럽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무함마드 자히르 샤 전 국왕 등 구 왕실 일가들의 귀국이 실현될 수 있었다.[43] 그리고 그 아프가니스탄도 2021년 현 아프간 정부가 내전으로 무너지고, 탈레반이 다시 재차 정권을 장악한 현 상황에서 이란 신정체제보다 더 잔악하리만치 이슬람 극단주의 통치를 펼치고 있는 탈레반조차 귀국한 아프간 구 왕족들을 죽이거나 다시 해외로 추방하지 않고 어느 정도 예우를 하고 있다.[44] 조지아와 한국 역시 각각 1991년 소련 해체와 1945년 8.15 광복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가 종식되면서 해외를 떠돌다시피했던 구 바그라티온 왕조와 대한제국 황족들의 귀국이 이뤄졌다.[45]

튀르키예 역시 오스만 왕조가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전환된 이후에 군주제 폐지와 공화정 수립을 주도하여 집권했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튀르키예 전 대통령, 이스메트 이뇌뉘 튀르키예 전 대통령 등 공화정의 1세대와 2세대 세력들이 죽거나 사라지고 집권세대들이 교체되면서 왕(황)족들의 귀국이나 모국 방문이 허용되었다.[46] 그리고 위의 열거된 나라들 역시 왕조가 민심을 잃고 몰락하는 등 이들 국가에서도 구 왕조 시절이 비난을 받지만 최소 이들 나라의 옛 왕조들은 국가 발전과 부국강병, 근대화와 같은 긍정적인 평가와 시대에 따라서 국가 전성기를 이끌었던 업적들이 존재하며, 군주제가 망하고 공화정이 들어선지 기간이 많이 흘러 구 왕조에 대한 국민들과 정치권의 증오와 적개심이 희석되고, 구 왕조 일가들의 입국 금지를 유지해야 할 명분과 동기마져 희미해졌기에 군주제 폐지로 해외 추방당한 왕(황)족들의 귀국이 실현될 수 있었다. 그리고 튀르키예는 셀주크나 돌궐, 오스만 같은 옛 튀르크계 왕조에서 국가적 정통성을 찾고 있는지라 오스만 왕조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일부 있어도 이란의 팔라비 왕조나 혹은 그 이전의 카자르 왕조사파비 왕조처럼 튀르키예 국내에서의 평가와 대접이 크게 나쁘지 않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들어선 현재 튀르키예 공화국 체제 하에서도 오스만 왕조에 대한 국민들의 거론이나 학계의 역사학 연구도 자유로운 편이고, 무흐테셈 유즈이을이나 찰르쿠수 등등 오스만 제국 시대를 다룬 사극 드라마와 영화들도 많이 제작되고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전 튀르키예 대통령을 국부로 섬기면서도 케말이 무너뜨린 오스만 왕조 역시 자랑스러운 모국 역사의 일부이자 현 튀르키예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의 유산을 계승했다고 여기고 있다.[47]

그러나 이란은 군주제 폐지 이후 정권을 장악한 구 공산당/군부 독재 정권 세력들이 몰락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현 정부가 들어선 동유럽 및 그리스나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를 수립하여 정권을 잡은 공화국의 제1세대와 2세대 세력들과 군주국의 시기를 경험했던 이전 세대들이 대거 죽거나 사라지고 이후에 완전히 공화제가 안착된 튀르키예,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의 경우와 달리 군주제가 폐지되고 현 체제가 들어선지 겨우 40년도 채 되지 않으며, 이란 혁명으로 군주제 전복을 주도한 집권층의 1세대, 2세대 세력들이 현재까지도 정치적 주도권을 잡고 있는데다[48] 팔라비 왕조 시대때 태어났거나 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기성 세대들이 아직까지도 자국 사회의 주류로 남아있어 사정이 다른 편이다. 물론 이란 혁명 이후에 정계로 진출한 신진 정치인들도 여럿 있긴 하지만, 이들도 혁명 세대 출신의 지배층들에 비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이란 현 정부의 노선과 반대되는 행동이나 의견을 대놓고 표출하지 못 하고 있다.[49] 비록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로 바뀌었음에도 오스만 제국을 소위 국가승계한 것을 공식적으로 어느 정도 인정하는 튀르키예와 달리 이란은 현재의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팔라비 왕조의 승계국인 것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란 내에서도 팔라비 왕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나 언급을 하는 것조차도 철저하게 탄압하고 있는데, 그나마 이란의 이웃나라이자 앙숙인 이라크는 1958년 군주제 폐지 이후 국외추방되어 영국 등 해외에 망명 중인 구 하심 왕가 인사들의 이라크 귀국이나 방문을 허용하자는 주장을 펼쳐도 법적 처벌을 하지 않는 것과 달리,[50][51] 이란은 팔라비 왕조에 대한 군주제 복고 주장은 둘째치고 망명 중인 구 황가 사람들에 대한 이란 귀국이나 방문을 허용하자는 주장이나 의견을 일반 국민이나 지식인들이 공개적으로 말하거나 인터넷 상에서 공개적으로 댓글을 작성하면 국가 반체제/반혁명 혐의로 처벌하거나 자국내 인터넷 사이트에서 댓글을 작성한 인물의 아이디 계정을 추적하여 강퇴에 사이트 재가입을 금지시켜버릴 정도로 사회적으로 철저히 매장시킨다. 한마디로 입, 손가락 함부로 놀리면 망한다. 이러한 배경 때문인지 이란 내에서도 팔라비 왕조에 대한 정치권이나 역사 학계 차원에서의 공식적인 재평가나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기다 심지어는 단순히 망명중인 팔라비 구 왕족들에 대한 용서나 화해, 귀국 허용 같은 주장이나 언급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란 국민이 팔라비 왕조 시절의 이란 국기나 팔라비 왕족들의 사진을 갖고 있거나 사용하는 것조차도 금지, 처벌할 정도라고 한다.

4.5. 왕족 자신들의 현정권에 대한 적대적 태도

게다가 팔라비 왕조는 이란 혁명으로 왕조가 몰락하고 국외로 축출된 이후에도 미국 등 망명국에서 이란의 현 정부를 비판해오는 발언들을 지속하고, 망명 반정부 단체를 결성하여 군주제 복고와 현 정부 체제 타도를 주장하는 등, 현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에게 반대하고 적대하는 태도를 줄곧 보여왔기에 이란 정부의 입장에서도 마냥 구 황실 일가들을 용서하고, 귀국을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 또한 존재한다.[52] 하다못해 이란의 이웃국가인 튀르키예의 오스만 왕조 일가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케말 전 대통령에 의해 해외로 추방되어 해외에서 망명살이를 할 당시에도 군주제 복고를 주장하거나 튀르키예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망명지에서 하지 않으며, 오스만 가문에 대한 튀르키예 정부의 입국 금지 조처가 폐지될 때까지 조용히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으로 송환된다면

설사 망명 중인 팔라비 구 황가들을 사면하고 귀국을 허락하여 다시 이란 국민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해도 현 이란 정부의 고위층들 입장에서는 팔라비 일가의 이란 귀국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치적인 실익도 전무한데다[53] 귀국을 허용해줄 경우, 혁명 후 들어선 현재 신정 체제의 이슬람 근본주의 통치에 질려버린 이란 국민들과 지하 왕당파 반체제 세력들 사이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팔라비 왕조 시대를 그리워하며 귀국해 돌아온 팔라비 일가들이 정치적 구심점이 되어 정권 기반을 위협할 수 있는 후환 내지는 위험 요소로 발전할 수도 있는데다,[54] 팔라비 왕조의 독재 정치로 인한 트라우마가 현재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는 이란 현지 국민들의 정서에 정치적 반감을 더욱 키울 수도 있는 위험한 사안으로도 발전될 수 있기 때문에 안 그래도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현 정권이 수립된 이후에도 팔라비 왕조를 적대하며 혁명을 일으켰던 혁명의 주도 세력들이 정권을 쥐고 있다 못해 내정이 아직까지도 불안정한 현재 이란 상황에서 귀국을 쉽게 허락해주기도 어렵다. 차라리 이란 혁명 당시 팔라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쟁취한 이란의 현 권력층 인사들이 대거 죽거나 도태되고,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정이 망한 이후에 태어나 비교적 책임 소재 자체가 없는 1980년대, 1990년대 때 태어난 출생자들로 세대 교차가 이뤄지거나 아예 지금 현재 이슬람 신정체제 정권이 망하고 민주주의 국가가 된다면 그나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마져도 실현 가능할지는 불확실한 상황이다.[55]

비록 결과적으로 왕정 폐지 이후 이슬람 신정체제의 등장을 초래했지만 이란 혁명은 이란 국민들에게 있어서 이란 역사에서 1,400년 동안 이어져 온 군주제 체제를 쓰러트리고 이란 역사의 흐름을 바꾼 거대한 대사건이자 담론이다. 그런데 그 혁명으로 쫓아낸 그 팔라비 구 황족들에 대해 이란 정부가 팔라비 왕조의 사치와 폭정의 경험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란 국민들의 정서를 무시하고 혁명 당시 국외로 망명, 도주한 팔라비 구 왕족들에게 내려졌던 사형 판결을 취하, 용서하고 면죄부를 내려 귀국을 허락해준다면 그 결정을 내리거나 지지/찬성한 이란의 최고 지도자와 대통령, 나머지 정치인들도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현지의 지지층들마져 등을 돌려 정치적으로 큰 타격이 입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현재의 이란 정부가 입장을 바꾸고, 해외 망명 중인 팔라비 황족들에게 이란에 가도 좋다고 귀국이나 방문을 대폭 허가한다 해도 팔라비 구 황족 일가들이 망명 중이거나 과거 팔라비 왕조 시절 이란과 외교적으로 친밀했던 미국, 캐나다, 유럽 등 여러 서방권 국가들이 팔라비 구 황가의 이란 귀국을 정치/외교적으로 반대하거나, 저지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56] 귀국하여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이와는 별도로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정권이 바뀐 후에 귀국 시 처벌이나 입국 금지를 주장하다가 입장을 바꾸고 팔라비 황족들에게 이란으로 와도 좋다고 손짓하는 이란 정부의 의도 역시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령 이란 정부에서 귀국을 허용해놓고 막상 도착 후 뒷통수를 때리고 정치범으로 체포해 사형시켜 죽이거나 감옥에 투옥시킬 가능성도 높기 때문에 이란 정부 측에서 귀국을 허가한다 해도 망명 중인 팔라비 일가 사람들이 이란 귀국을 거부하며 죽을때까지 서방국가에 남거나, 또는 자신들의 신변 안전 보장을 귀국의 전제 조건으로 요구하며 이란 정부에게 대항할 가능성도 존재한다.[57]

게다가 팔라비 구 황실 일가에 대한 완전한 신변 안전 보장과 정치적 사면, 기타 여러가지 문제들이 해결, 성사되어서 구 황실 일가 전원이 이란으로 귀국한다 해도 귀국 후에도 팔라비 구 황가에 대한 이란 국민들의 부정적인 평가와 시선이 누그러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당장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개헌하면서 국왕 움베르토 2세를 위시한 사보이아 왕실 일가들을 국외로 추방시켜 구 왕가가 수십년 동안 국외에서 스위스, 포르투갈, 미국 등 여타 서방권 국가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2002년 망명 중이던 구 사보이아 왕가의 귀국을 허용해주었던 이탈리아에서도 구 왕가에 대한 이탈리아 국내의 평가와 시선은 여전히 부정적이며 일부 구 왕실 가문 출신 인사들의 과거사를 부정하는 여러 언행과 각종 비행 등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란계 미국인이나 이란계 캐나다인 등 서방권 국가들에서 살고 있는 해외 이란계 이민자들의 경우, 이란 현 정부가 팔라비 구 황족의 귀국을 허락해 팔라비 구 황가와 이란 현 정부 간의 정치적 화해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소수이고, 대부분은 팔라비 구 황가의 이란 귀국 문제에 대해서 현재 이란에 돌아가는 것은 위험하다 못해 시기상조라고 귀국을 결사 반대하거나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 서방 등 해외에서 망명중인 팔라비 구 황가의 사람들 중에서 혁명으로 망명 후 미국이나 서방 국가에서 태어난 사람들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만약 팔라비 구 황가의 이란 귀국이 실현된다면 이들도 이란에 올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4.7. 진짜 귀국이 이뤄질 때의 시나리오

물론 현실적으로 귀국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팔라비 왕가들에 대한 이란 정부 측의 신변안전 보장과 정치적 사면이 실현되거나 또는 이란 사회 내부에서 팔라비 왕조 시기를 경험했던 이란의 구 세대층들이 전부 사망하거나, 팔라비 왕가의 귀국 움직임에 대해 반발하지 않는 대신 인정하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폐지 이후(1979 ~ 현재)에 태어난 신 세대들로 완전히 교체되는 등 이란으로 귀국 할 수 있는 환경이나 여건이 조성되어 귀국이 이뤄진다고 치면[58] 시나리오는 아래와 같다.

5. 기타

6.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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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국가

1933년부터 70년대까지는 '이란의 샤한샤를 찬양하라'였지만 1979년부터 '오, 이란이여(ای ایران, Ey Iran)'를 임시 국가로 사용했다. 후자는 이란 혁명 후에도 금지곡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란의 샤한샤를 찬양하라'의 한국어 가사


'오, 이란이여'의 한국어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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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날 요르단이나 쿠웨이트, 모로코 같은 중동의 군주국들처럼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웠다.[2] 본래 튀르키예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처럼 공화국을 개창하려고 했지만, 국내 보수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 영국의 반대로 왕국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엔 본인과 아들의 2대 종신직 통치였을 뿐, 결과적으론 그의 아들 대에 그의 초창기 뜻대로 공화국이 되긴 했다. 본인들을 주적으로 적대한 자들이 세운 공화국이어서 그렇지...[3] 사실 사산 왕조 때부터 국호는 이란이었지만 서방에서는 '페르시아'로 통용되고 있었다.[4] 영국은 괴뢰국인 이라크 왕국에 군대를 주둔시켜 군정통치하고 있었고 인도 제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는데 두 지역 다 이란의 좌우로 국경을 맡대고 있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남하정책으로 이란의 세력권이던 캅카스 지역과 중앙아시아 칸국들을 전부 뺏어먹고 카스피 해를 사이에 두고 북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즉 그야말로 이란은 포위된 형국이었다.[5]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된 것은 1961년이다.[6] 1970년대 이란이다. 동시대 미국과 유럽 등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을 알 수 있다.[7] 원정팀의 무덤이라는 테헤란의 아자디 경기장의 원래 이름도 아리아메르 경기장이었다.[8] 다만 팔라비 1세의 유해는 훼손되지 않고 이집트 카이로로 보내졌다. 하지만 2018년에 팔라비 1세로 추정되는 유해가 이란에서 발굴되어 논란이 되었다. 현재는 다시 매장하였다고 한다.[9] 이미 죽은 호메이니의 본심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이슬람 근본주의자였음을 생각하면 이슬람 전파 이전 페르시아 제국을 부정적으로 봤을 개연성은 크다. 그의 입장에서 아케메네스조나 사산조 등 이슬람제국 이전의 이란 왕조들은 이슬람교의 숙적이었던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던 이교도들의 불경한 나라나 다름없다. 이집트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역시 비슷하게 이교도(이집트 종교)들의 우상숭배 유산인 피라미드와 각종 건축물들을 파괴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워낙 이것들에 엮인 관광수입이 많기에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10] 이 테헤란로는 2년 뒤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몰락한 후에도 개명되지 않고 지켜지고 있다. 사실 반서방적인 이란 신정 정부의 성격 때문에 개명을 고려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신정 정부 치하 이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그냥 놔두었다.[11] 1972년 오일쇼크 직전 당시 이란의 1인당 국민소득은 570달러였는데 혁명직전인 1977년 당시 이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315달러로 약 4.2배 가량 늘어났다. 동시기 한국은 1970년 270달러, 1975년 800달러 선이었고 1980년대 중반에 가서야 2,000달러 중반대를 달성하게 된다.[12] 임파암과 비장암 외에 이란 혁명으로 축출당하고 1980년 사망하기 직전에 간암까지 앓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쯤되면 1980년 사망할 때까지 6년이나 버틴 게 기적이라 볼 수 있으며 이란 혁명으로 본인이 축출된 것에 대한 정신적 충격과 상실감이 건강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13] 이 즈음 되면 아내 파라 팔라비나 장남 레자 팔라비 황태자를 섭정으로 세웠어야 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팔레비 2세가 1974년 암 진단을 받고 시위가 격화된 1978년 9월 이전에 죽었다면 시위대의 일부는 새로운 샤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철수했을 가능성도 있다.[14] 최소 420명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팔라비 왕조의 비밀경찰 사바크(SAVAK)의 짓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시위가 확대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방화범의 정체는 이슬람주의자 또는 사바크라는 설이 있으며, 범인의 정체는 혁명 후에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범인 미상(Unknown)으로 표기한다). 만화 페르세폴리스에서도 이 사건을 잠시 언급한다.[15] 당시 팔라비 2세는 민주적 다당제 선거 실시와 황제의 권력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로의 개헌, 언론 자유 허용, 정치범 사면, 사바크 해체, 국내 실업자들에 대한 일자리 창출 등 각종 개혁안을 발표했지만 대다수의 이란 국민들과 근황파를 제외한 나머지 이란 내 정파 세력들은 군주제 자체의 폐지를 주장하며 민심 자체가 돌아선 것을 알 수 있다.[16] 이집트의 마지막 왕이던 파루크 1세는 여동생 파우지아 시린이 바로 팔라비 1세의 첫 번째 아내였기에 왕위에서 쫓겨난 파루크 1세는 이란으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팔라비 2세가 입국을 거절해서 갈 수 없었다.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하자 파루크 1세는 "그놈이라고 언제나 그 황위를 유지할지 아느냐?"라고 분노했는데 그가 죽고 15년도 안 되어 그 말이 이뤄졌다. 그리고 팔라비 2세가 죽어서 묻힌 곳이 바로 파루크 1세와 똑같은 이집트 카이로의 알-리파이 모스크다.[17] 애초에 이집트는 이란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도 아니고 나라 자체가 세속주의긴 해도 엄연히 인구 다수가 수니파인데다 사다트 본인도 수니파여서 시아파 근본주의자들이 새운 이란 신정부랑 어차피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기에 이란 신정부와 호메이니가 팔레비의 국내 송환을 요구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다트도 팔레비 2세가 죽고 1년만에 암살.[18] 이후 이집트 병원에서 비장암 제거 수술을 받았지만, 췌장과 우측 다리에서 농양 증세가 악화되어 즉사했다.#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 20권'에는 중앙아메리카 국가인 파나마에서 암으로 죽었다고 잘못 기재되어 있다.[19] 다만 군주제 복고의 경우 레자 팔라비 본인이 이란 국민의 결정에 맡기겠다며 공화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전향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20] 현재 미국과 서방권이 현 이란과 외교적으로 대립하는 것과 별개로 공식적으로 현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를 이란의 정식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있다.[21] 1951년 알리 라즈마라(1901 ~ 1951), 1965년 하산 알리 만수르(1923 ~ 1965).[22] 당장 세속화된 이슬람 국가인 튀르키예와 튀니지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되 이슬람에 특혜를 준다던가 때로는 이슬람의 권리를 뺏기도 하는 등 당근과 채찍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세속주의 정책을 점진적으로 진행했다. 덕분에 과격한 혁명없이 안정적으로 세속주의 풍습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 분배가 전 국민들에게 돌아갔던 튀르키예와 튀니지와 달리 이란 팔라비 왕조의 세속화 정책은 팔라비 황실과 그 밑의 권신 세력들만이 부와 이익을 사실상 독점하며 빈익빈 부익부가 극심하였다. 물론 빈익빈 부익부야 어느 나라에든 있는 현상이고 특히 경제 고도성장기가 되면 그런 경향이 심해지지만 팔라비 왕조 시절엔 그걸 감안해도 좀 심한 편이었다.[23] 정책에 대한 단순한 불만에서 군주제 폐지를 주장하기까지 시위가 격화될 대로 격화되고 나서야 1978년 말에 군주의 권리 축소, 사바크 폐지, 자유화 등을 하겠다고 했으나 이미 늦을 대로 늦었다.[24] 물론 이렇게 되었다면 전세계적인 규탄을 받았을 것이고 아무리 친한 미국이라도 이건 눈 감아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25] 사실 이들은 이슬람 신학자들과 같이 이란 혁명을 주동한 수많은 세력들 중 하나여서 훗날 이란 현 신정체제와의 갈등으로 이들 역시 해외 망명 중인 상태이긴 하지만 이란 현 신정체제가 무너진 다음에 이란이 공화정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팔라비 왕조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보인다.[26] 근본주의자들이 내세운 샤리아7세기 시대를 반영한 법인데 시대가 한참 지난 현대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난 변화 같은 것은 무시하고 이것을 적용하겠다는 것. 시대상에 맞게 종교 개혁 좀 하자고 하면 튀르키예 같은 세속국가가 아닌 이상 신성모독이라고 들고 일어나서 함부로 개혁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이것은 해석 범위가 매우 넓어 악용될 소지가 많다.[27] http://www.landinfo.no/asset/960/1/960_1.pdf http://www.justice.gc.ca/eng/rp-pr/cj-jp/fv-vf/hk-ch/p3.html http://en.wikipedia.org/wiki/Honor_killing http://www.centerforinquiry.net/isis/islamic_viewpoints/the_lethal_combination_of_tribalism_islam_cultural_relativism http://www.islam-watch.org/SyedKamranMirza/honor_killing.htm[28] 이란은 이맘 밑에 3부가 존재한다. 즉, 이맘의 의중이 대통령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의미. 이 때문에 세습만 안 할 뿐 말이 공화정이지 전제군주제라는 평을 받는다.[29] 나치 친위대와 비슷하게도 기존 군부를 믿지 못해서 집권세력을 수호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사병이라고 볼 수 있다.[30] 당장 호메이니의 증손자인 아흐마드 호메이니만 봐도 그렇다. 1997년생으로 인스타 헤비 유저인데 축구경기장 구경 사진도 찍고 여러모로 세속화된 사진들을 많이 찍는다.[31] 실제로 반정부 시위 구호도 "No Gaza, No Lebanon!" 등, 외국 개입 반대 구호가 많다. 그리고 피개입국인 이라크에서도 시아파들을 중심으로 2019년에 반이란 시위가 폭발했다.[32] 무사비와는 달리, 이번 사건을 '1978년'이 아니라 팔라비 왕조가 반정부 봉기를 유혈진압하며 호메이니를 쫓아냈던 '1963년'과 비교하는 시각도 있다. 호메이니가 샤에 본격적으로 반감을 갖게 된 게 이 시기다.[33] 이란이 2020년대 이전까지는 출산율도 높고 평균수명도 짧았어서 불과 40여년 밖에 안 되었어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2020년대 한국에선 중위 연령이 50대로, 1971년생이 인구 비중에서 가장 많다.[34] 물론 이런 구호가 아직 시위의 주류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신정 독재 하에서 최악의 경우 사형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저런 구호를 내지를 정도로 체제에 대한 시위자들의 환멸이 대단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반정부 시위 때마다 정권은 친정부 시위자들을 내세워 맞불을 놓는데, 참가자들의 사진을 보면 대부분 소위 '혁명 세대'인 중노년층이 많았는데, 반면 청년층과 빈곤층, 여성이 신정 체제를 싫어하며 ## 반정부 시위의 주축이었다. 겉으로는 최고령도자의 두리에 반미이슬람 원리주의로 일심단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청년 실업률이 30%에 육박하는데 이란판 핵심계층의 2, 3세들인 아그하자데(Aghazade)의 호화 사치 과시에 대한 젊은이들의 박탈감이 장난이 아니다.[35] 본래 몬타제리는 1980년대 중반에 호메이니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호메이니와 사이가 가까웠으나 말년의 호메이니와 대립하고, 호메이니 사후 차기 최고 지도자 자리를 하메네이에게 빼앗기면서 하메네이와 적대관계가 된다.[36] 귀국 후 '정치범으로 처벌하거나', 또는 '망명중인 팔라비 황족들이 전부 타국에서 사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입국을 불허/금지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용서나 사면은 없다', '귀국 허용을 내건 팔라비 구 황실과의 정치적 협상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37] 호메이니 사망 후에 하메네이가 최고 종교지도자 라흐바르가 되고, 대통령도 여러 번의 대선을 통해서 라프산자니, 하타미, 아마디네자드, 로하니 등등 정권 지도부의 인사들이 여러번 바뀌긴 했지만, 이는 사실상 호메이니와 함께 혁명을 지지, 주도하여 팔라비 군주제 체제를 무너뜨리고 이란의 정권을 차지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의 권력 나눠먹기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라프산자니와 하타미, 로하니는 이슬람 근본주의자였으면서도 중도, 개혁주의적인 면모도 존재했다.[38] 이란 혁명 이후에 정계로 들어온 몆몆 정치인들도 있지만 이들은 혁명으로 집권한 지배층들에 비해 높은 고위직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39] 이란 혁명 이전 팔라비 왕조 체제에서 복무했던 정치인과 고위각료들도 있었지만, 이들 거의 대부분은 혁명 직후에 집권한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에 의해서 사형 또는 숙청당했거나, 중앙 정치 권력에서 축출되고 낮은 중하위급 공무원들로 강등당하면서 대부분이 정치적으로 몰락해버렸다.[40] 실제 이란은 여성이나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인권탄압이 굉장히 심한 나라이다.[41] 게다가 이들은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 등 팔라비 2세 전 왕의 자녀들이 팔라비 왕조가 저지른 인권 유린과 탄압 등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인정하거나 사과해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타협 불가 입장도 보이고 있다.[42] 심지어 이들은 이란 혁명 당시 팔라비 왕조에 반대하는 반정부 운동을 주도했다가 혁명 이후 들어선 이슬람 신정체제에 의해 탄압받고 미국과 유럽,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서방세계 국가들로 망명을 떠난 역사가 있다.[43] 자히르 샤 전 아프가니스탄 국왕은 부정부패와 강압적 독재통치와 같은 실정들을 벌이다 혁명으로 축출당한 이란의 팔라비 2세와 다르게 국왕 재임기간 동안 통치 능력도 나쁘지 않았고, 몰락 과정도 외유 중 쿠데타로 축출당했기에 아프가니스탄 국민들 사이에서도 동정어린 평가를 받는다.[44] 심지어 그 탈레반 내에서도 자히르 샤 전 왕이 다스리던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며 자히르 샤 전 왕을 존경하는 간부들도 있었다고 한다.[45] 한국의 경우 1960년대 박정희 정권 당시 덕혜옹주 등을 위시한 대한제국 구 황족들에 대한 귀국이 허용되었다.[46]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현 튀르키예 공화국 체제가 들어선지 근 50년 동안 해외 망명중인 오스만 왕조 일가들의 입국 금지 조치를 지속했다.[47] 그러나 정작 무스타파 케말 전 튀르키예 대통령은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정체성을 모조리 부정하는 정책을 견지했다. 자세한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문서 참조.[48] 이란 혁명 후 이라크의 침공으로 벌어진 이란-이라크 전쟁과 같은 혼란을 겪긴 했지만 오히려 이 전쟁을 통해서 이란의 혁명 세력들은 정권 기반을 더욱 공고화해버렸다.[49] 거기에다 결정적으로 불가리아와 이탈리아, 아프가니스탄, 한국, 루마니아, 그리스 등은 구 왕가들이 귀국할 당시 귀국을 승인, 허가했던 지도부 세력들이 구 왕가 사람들에게 적대적이진 않았고, 상술한 것처럼 왕정을 없애거나 구 왕가에게 적대적이었던 기존의 정치 지도자들(예: 이승만 전 대한민국 대통령, 모하마드 다우드 칸 전 아프가니스탄 대통령, 토도르 지프코프 전 불가리아 공산당 서기장,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 알치데 데 가스페리 전 이탈리아 총리 등)이 대거 몰락하거나 사망하는 등 현실 정치 권력에서도 영향력을 잃고 도태되어버렸지만, 이란은 현 최고 종교지도자인 알리 하메네이를 비롯해서 이란 혁명 당시 팔라비 왕조의 전복과 폐지를 주도한 혁명 주도 세력과 그 후손들이 지금 현재까지도 정권을 쥐고 있고, 무엇보다 이들 대부분은 이란 혁명 전까지 팔라비 왕가와 대립했거나 그 정치적인 영향을 받고 자란 이해당사자들이다.[50] 이란 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된 이후에 집권한 현 체제가 지금까지 건제한 이란과는 달리 이라크는 왕정 폐지 후 쿠데타와 전쟁, 내분 등을 겪으며 정권이 여러번 뒤엎어지고 바뀌었기에 구 왕가의 귀국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편이다. 실제로도 일부 하심 구 왕가의 방계 출신 인사들이 후세인 정권 축출 후 국회의원 후보자로 선거에 출마한 일도 있었다.[51] 압둘 카림 카심 전 이라크 총리는 1958년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파이살 2세 전 국왕 등 직계 왕족들이나 협력했던 고위층들은 사형시켜 죽였지만 권력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왕위 승계 가능성이 낮은 구 왕가의 방계 출신 일족들은 그런데로 처벌하지 않고 이라크 국민으로 살려두었다.[52] 이 때문에 팔라비 왕조의 군주제 복고를 주장하는 해외 망명 반정부 단체에 대한 해산을 귀국의 조건으로 내걸 가능성도 있다.[53] 특히 이란 혁명 당시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로서 팔라비 왕가들과 대립하여 왕정을 축출하고, 집권한 현 이란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팔라비 구 왕가 사람들은 다시 받아들인다는 건 정치적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54] 실제로도 이슬람 신정체제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그나마 세속적이었던 팔라비 왕정 시대가 더 그립다고 하소연하는 이란 국민들도 있기는 있다.[55] 설사 이란 혁명 후에 태어난 세대들로 현 이란 정부의 수뇌부들이 대거 교체되거나 현재 집권 중인 이슬람 신정 체제가 망하고 이란이 민주화되어 정권이 바뀐다고 해도 이란 귀국이 허락될 수 있을진 불분명하다. 더군다나 현재 살아남아있는 장남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와 딸 파라나즈 팔라비 전 공주 등 팔라비 2세 전 이란 국왕의 직계 자녀들조차도 이미 60~70대 노령기로 접어드는 상황인데다 이란 내에서 팔라비 왕가에 대한 귀국 결정이 떨어지거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도 전에 미국이나 유럽 등 망명국에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56] 특히 팔라비 구 왕가 사람들중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가 현재 망명중인 미국의 경우 물리적으로라도 팔라비 구 왕가가 국외 망명을 접고 이란으로 귀국하려고 할 시 이란 행 여객기에 타려는 것을 저지할 가능성이 높다.[57] 마냥 귀국해도 좋다는 결정을 대놓고 수용하거나 그 말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귀국하기 전에 구 왕가의 신변안전 보장을 귀국의 조건으로 요구할 가능성 역시 높다. 거기다가 이란은 왕정폐지가 된지 수십년이 지나서야 구 왕족 일가들의 귀국이 허용되었고, 왕정 폐지 이후 그 중간에 기존 정부나 인적 세대들이 바뀌었던 구대륙 지역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왕정이 폐지되고 현재 정부가 성립된지 사반세기가 채 되지 않은 나라이다. 당연히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란 정부를 마냥 믿을 수 없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58] 물론 팔라비 왕조의 왕정 폐지 이후에 태어난 이란의 신 세대층들이 이란 정계의 전면에 등장하거나 정치적 권력을 쥔다고 해도 팔라비 왕가의 이란 귀국을 허용할지는 의문이다.[59] 실제 현재 이란의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팔라비 구 왕가가 이란으로 귀국할 시 우려하는 사안이 바로 이것이다.[60] 네팔의 샤 왕조는 마지막 국왕이던 갸넨드라의 폭정으로 민심마져 잃고 왕정이 폐지당했지만, 통일국가로서의 네팔을 건국, 형성하는데 구 왕가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폭정을 일삼다 왕위를 잃고 폐위당한 갸넨드라를 제외하면 비렌드라 등 이전 역대 국왕들에 대한 자국민과 현재 정치권 인사들의 평가도 나쁘지 않다. 불가리아의 작센 코부르크 고타 왕조도 비록 독일계 출신의 왕조인데다 발칸 전쟁과 양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영토들을 주변국가들한테 잃는 실책을 저질렀지만, 아예 정부/학계 차원에서의 재평가 논의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고, 이란 현지에서 평가도 극렬하게 엇갈리고 있는 이란 팔라비 왕조와는 달리 불가리아 현지에서도 연구와 재평가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61] 당장에 네팔의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 당도 폐지된 왕정의 복고를 주장하고 있지만, 원내 4당 정도의 지위만 차지하고 있는 데다 네팔 국내의 소수 근왕파 지지자들을 제외하면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으며, 불가리아의 시메온2세 국민운동연합 당도 시메온 2세 전 왕이 불가리아의 총리직을 역임하다 물러난 이후로는 정치적으로 아무 영향력 없는 군소 야당으로 전락한 상태이다.[62] 아예 군주제 폐지 이후에 팔라비 왕조 시대의 팔라비 구 황족들이 살았거나 개인재산으로 활용하던 구 황궁과 별궁들의 대부분을 모두 박물관들로 개조했다.[63] 실제로는 독일에서는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려는 슈타지의 술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시 총을 쏜 경찰이 서독 경찰에 위장잠입한 슈타지 요원인 것이 통일 후에 밝혀졌기 때문. 물론 문제의 경찰이 슈타지 요원이었다는 점과 대학생 사살 사이의 연관성이 발견되지 않았고 문제의 경찰은 사건에 대해 함구한 채 2014년 사망했다.[64] 참고로 보카사 1세의 엽기적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초호화 대관식도 당시 기준으로 2200만 달러(2022년 기준으로 약 1,200억 원) 정도 들어갔다.[65] 팔라비 2세가 망명간 이후에도 그가 임명한 바크티야르 내각 자체는 한동안 유지되었다. 결국 바크티야르 정권이 무너진 것이 2월 11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