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혼분식 장려 운동(混粉食奬勵運動)은 1960~70년대 대한민국에서 시행한 정책으로, 식사에서 주식인 쌀의 소비량을 줄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혼식(混食)은 쌀 이외의 여러 잡곡을 섞어먹는 것, 분식(粉食)은 밀가루 음식을 뜻한다.
2. 배경
이 정책이 펼쳐진 이유는 크게 2가지가 있다.- 1. 주식인 쌀 생산량의 부족
베이비붐 등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으나 쌀의 생산량은 이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였고, 이는 쌀 부족 현상 및 쌀값 상승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에서는 토지 개간 및 간척, 신 품종 개량 및 농법 개선 등을 시행했지만 이는 중장기적인 대책이라서 단기적인 부족 현상을 해결하긴 힘들었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쌀 소비를 줄이는 방안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미국에서 밀가루나 옥수수를 대량 원조하였기에 그것들을 이용했다.
- 2. 당시 박정희 정부의 경제 계획
당시 정부는 수출 주도 산업화와 저임금 정책을 폈다. 저임금을 통해 수출 상품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선 노동자들이 저임금으로도 생활이 가능해야 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쌀값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따라서 쌀 소비를 줄여서 쌀값을 낮추고 이를 통해 저임금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했다.
이것저것 다 따져봐도 결국 쌀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정부는 비교적 공급량이 많던 보리를 비롯한 잡곡, 그리고 미국의 지원으로 많이 풀려있던 밀을 쌀의 대안으로 국민들에게 제시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군사정권답게 이 과정에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강압적인 방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혼분식 소비 증가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3. 혼분식 "강요" 운동
혼분식 장려 운동은 '장려'였지만 실제로는 강제적인 방법이 다수 동원되었기에 혼분식 강요 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3.1. 식당의 쌀 음식 판매 제한
1969년부터 1977년까지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오전 11시~오후 5시)에는 쌀로 만든 음식을 판매할 수 없었는데, 이 날을 쌀이 없는 날인 무미일(無米日)이라고 불렀다. 쌀 대신 밀가루로 만든 국수나 수제비 등의 음식을 판매해야만 했었으며, 또한 설렁탕 등의 음식에는 일정 비율의 밀가루 국수를 사용하도록 강제했는데, 일부 식당에서 설렁탕이나 돼지국밥을 시키면 국수를 같이 내어주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흔적이다.당시 사복을 입은 단속요원이 무미일 지침을 위반하는 식당에 대해 불시에 단속하였으며, 무미일 지침을 위반한 식당에 대해서는 최단 1개월에서 최장 6개월 동안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무미일을 위반한 가게를 신고한 사람에게는 5,000원이라는 거액의 포상금까지 주어졌다. 1968년에는 짜장면 1그릇이 50원, 풀빵 같은건 5원도 안하던 시절이니 현재 가치로 거의 500만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이 무미일은 당시 신품종 벼였던 통일미의 보급으로 쌀 자급이 이뤄지자 1977년 말에 폐지되었다.
식당에서 볼 수 있는 규격화된 공깃밥도 이 시기에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도입한 것이다. 이만기가 씨름 선수 시절 원래 공깃밥을 2~3공기만 먹으면 될 양을 이때부터 공기 규격을 줄이는 바람에 최대 9공기까지도 먹어봤다고 회고했다.
3.2. 학생들의 도시락 단속
지침을 내려서 학생들의 도시락에 일정 비율 이상의 잡곡을 쓰도록 단속하였다. 그 당시 학생들의 도시락 검사를 해서 순수 백미밥이 담긴 도시락이 걸리면 교사가 그 학생을 혼내는 건 물론, 도덕이나 태도 점수 감점 등의 불이익을 주고, 심지어 체벌까지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검사를 나눠 담당하는 반장이나 부반장의 경우, 쌀이 없는 완전 보리밥으로 타의 모범을 보이라는 말을 듣는 것도 흔한 경우였다.그래서 일종의 꼼수로 아이에게 쌀밥을 먹이고 싶었던 부모들은 위에는 꽁보리밥, 밑에는 쌀밥을 까는 2층 밥을 싸줬고, 교사들도 이를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엄격한 교사들은 밥을 뒤집어 보게 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지금보다 훨씬 권위주의적이고 폭력에 무감각한 시대인만큼 쌀밥을 싸왔다고 그 자리에서 손찌검을 날리거나 법봉으로 묵사발을 만드는 일이 정말 많았다고 한다.[1]
일부 국민학교에서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간헐적으로 도시락 검사를 했다. 점수에 반영하지는 않았으나 잡곡밥을 싸오면 교사의 칭찬을 받았지만, 흰 쌀밥을 싸오면 야단을 맞았다.
3.3. 쌀을 이용한 술 제조 금지
가정에서 쌀을 이용한 술의 제조를 전면 금지시켰다. 막걸리나 증류식 소주가 좋은 예이다. 대신 쌀을 쓰지 않고 고구마나 카사바 등으로 만든 희석식 소주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막걸리 등의 다른 술도 밀가루와 같이 쌀을 사용하지 않는 제조법으로 바뀌었다. 아예 곡주 대신 과일주를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최초의 국산 포도주 마주앙이다.
3.4. 홍보활동
혼/분식의 이점을 주장하는 홍보활동도 펼쳤는데, 정부가 정책적 차원에서 잡곡 및 분식의 영양분이 쌀과 비교해서 우수하다는 점을 홍보했다."흰쌀 편식은 체질의 산성화를 초래하고 대뇌 변질증을 일으켜 판단력이 흐려지고 지능이 저하될 우려가 높다."라는 해괴한 주장까지 무리할 정도로 강조하였다. 이건 1975년 국민학교 실과 교사용 지도에 버젓이 나와 있는 내용이다.[2]
심지어 당시 TV에 방송되던 상업 광고에도 국책 관련 자막이 표시될 때 그 자막 패턴 중 하나로 혼분식 권장 메세지가 삽입되기도 하였으며, 대부분 식품 관련 광고에서 출력되었다고 한다.
4. 결과
이 장려 운동의 효과로 쌀 소비량이 줄면서 쌀 가격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또한 밀가루 소비량이 크게 증가하면서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라면, 식빵, 튀김 등과 같은 분식이 쌀밥과 함께 식생활의 주류를 차지하였다.[3]1970년대, 통일벼의 개발로 쌀이 넘쳐나면서 혼분식 장려도 사라졌다. 이후에는 혼분식은 개개인의 취향으로 자리잡았다. 분식 장려 정책은 그 이전까지 쌀밥과 채소 위주의 식생활에만 익숙했던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식생활의 서구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근거: 조선일보 2015-07-09 "도시락에 잡곡 안 섞으면 야단 맞던 시절… 혼분식 장려, 한국인 입맛까지 바꿔"
1980년대 후반부터는 서구화된 식습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쌀 소비량이 줄어 들었다. 농어촌 인구는 1960년대 말부터 지속적으로 감소세에 있고 특히 1990년대에는 농어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10% 아래로 떨어지며 말 그대로 노인들과 외국인들만 가득한 곳이 되어버렸지만 농업기술의 발전과 지구온난화 현상으로 생산성 자체는 증가했기 때문에 농어촌 인구의 감소에도 재고량이 엄청나지게 된 것이다. 사실 수출을 하려고 해도 훨씬 인건비가 값싼 중국과 인도라는 최종보스가 있고, 태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2기작이 된다는 점을 이용해 해외로 쌀을 대량수출하고 있기 때문에 가격경쟁력에서 비교가 되지 못해서 수출이 여의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일본도 쌀소비량이 감소하자, 해외로 쌀 수출을 도모하려고 했지만 수요 자체가 인디카에 몰려있는데다가 가격도 비쌌기 때문에 별로 신통치 않았다.
설렁탕이나 돼지국밥 가게에서 업체에 따라 국그릇에 당면이나 소면을 같이 내어주는 것도 혼분식 장려 운동의 흔적이다.
당시 쌀을 이용한 술 제조가 전면 금지되면서 각 가정에서 만드는 술은 물론 전통주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으며, 희석식 소주의 보급으로 술맛은 안 보고 그냥 취하는 음주 문화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쳤다. 전통주를 빚는 관련 업종 종사자들은 전통주 사업에 가장 큰 지장을 준 일을 꼽으라면 바로 박정희 정부 시절인 1965년에 시행된 양곡관리법을 언급한다. 쌀로 술을 빚거나 팔지 못하게 하는 양곡관리법이 각 시골마다 강하게 시행되면서 공무원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술을 빚은 항아리를 보면 죄다 깨뜨리거나 빼앗아가는 식으로 탄압을 하다 보니 전통주 산업의 맥 자체가 끊어져 버렸고 문민정부 이후에야 전통주를 복원하고 있다. 그나마 안동소주 정도가 살아남았는데, 이는 외국 지도자들과의 만남에서 내세울 전통주가 하나쯤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5. 영양학적 관점에서 본 혼분식 운동
분식은 그렇다치고 혼식은 확실히 식생활에 꽤 좋긴 하다. 저 당시 강조하던 것처럼 쌀밥만 먹는다고 몸에 해로울 정도인 건 아니지만, 콩, 보리, 조 등 기타 잡곡들을 넣어 지은 밥을 주로 먹는 게 건강에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하다. 실제로 60~70년대 한국 경제사정에서 어정쩡하게 백미만 먹었다간 각기병 때문에 의료비가 낭비되었을 상황이었다. 각기병은 한번 걸리면 합성 티아민+합병증으로 인해 치료비가 많이 깨진다. 어디까지나 식품 선택에 대한 자유를 침해했다는 점이 문제. 선진국으로 들어선 이후의 한국은 그때와는 반대로 혼식이 훨씬 비싸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생각하여보면 당연한 것으로 당시에는 백미를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서 백미의 수요가 높았으니 백미가 잡곡보다 가격이 비쌌다. 게다가 백미를 만들 때는 도정 과정까지 들어가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웰빙 열풍에 따라 잡곡의 수요가 높아지니 잡곡이 백미보다 더 비싸진 것이다.21세기 기준에서 백미밥 자체는, 지양해야 할 정도로 나쁜 건 아니다. '몸에 덜 좋은' 것과 '몸에 나쁜' 것은 엄연히 차이가 있다. 현대에도 '백미만 먹는 것은 성인병의 지름길'로 인식하는 사례가 있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백미만, 자주 먹을 때의 이야기다. 백미 그 자체가 일종의 정제당이라 당뇨병의 원인이 되기는 하고 인디카 쌀에 비해 한국에서 인기가 좋은 자포니카 쌀이 이런 위험이 더 크긴 하나, 우리가 식사를 할 때엔 밥과 반찬을 같이 먹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완이 된다. 밥을 먹을 때 밥보다 반찬을 많이 먹고 적당히 신경 써서 종종 잡곡밥을 먹어주는 것 정도로 충분하니 굳이 백미밥을 배척할 필요는 없다. 더 자세한 건 백미 문서로.
세계 최고의 장수 국가인 일본의 경우 혼식 문화가 아예 없다. 참고로 일본은 한국 다음가는 당뇨병 환자의 비율이 높은 나라다. 하지만 당뇨를 앓는 사람들도 소식을 할 지언정 대체로 백미밥을 먹는다. 물론 일본도 과거에는 보리밥이나 콩밥을 먹었고 극심한 흉년으로 기근이 발생했을 때에는 풀뿌리, 나무뿌리를 벗겨먹었기도 했지만, 경제력의 발달이 한국보다 빨랐기 때문에 혼식 문화가 사라진 것이다. 물론 무기토로라고 참마를 갈아넣은 보리밥은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드물게 먹는 별미 취급. 예상대로 후술하는 것처럼 각기병 사례가 1970년대에도 한국보다 빈번했다. 원문 소스를 보면 전형적인 일본식 인스턴트 식품의 편식 부작용으로 보인다. 저 시기의 일본 인스턴트 식품은 지금의 햄버거 같은 걸 생각하면 안되고, 백미에 후리카케를 뿌려먹는 수준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백미밥만 먹은 것으로 봐야 한다.[4]
위에 서술한 것처럼 60~70년대 당시에도 각기병의 위험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정부의 홍보가 잘 먹혔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백미 말고 반찬을 영양적으로 균형있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국가는 아니었고, 반찬이 부실한 상태에서 백미만 먹으면 위험하다는 사실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 고기 반찬을 먹기엔 가난했고, 감자나 보리같은 걸 먹으면 딱 정부의 의도와 일치했다. 실제로 각기병이 가장 유행하던 일본이나 동남아의 상황을 보면 서민들도 백미를 접하긴 쉬웠으나 반찬이 부실한 어정쩡한 상황이었다. 60년대에는 동남아시아도 각기병이 자주 발생하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