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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4 15:49:26

화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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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평경후(博平敬侯)
華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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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敬)
작위 안략향후(安樂鄉侯) → 박평후(博平侯)
최종직위 태위(太尉)
성씨 (華)
(歆)
자어(子魚)
생몰기간 157년 ~ 231년
고향 청주 평원군 고당현(高唐縣)[1]
재임기간 조위의 사도
220년 2월 16일 ~ 226년 12월
조위의 태위
226년 12월 ~ 231년 12월 21일
1. 개요2. 정사3. 연의4. 가족 관계5.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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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로 청주 평원군 고당현 사람이며, 자는 자어(子魚).[2]

2. 정사

고당현은 제(齊) 지역의 이름난 도시로, 그곳의 관리들은 저자나 마을에 놀러다니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화흠은 관리가 되어서는 쉬기 위해 관부를 나오면 집에 돌아가 문을 닫았다고 하며, 의논하는 것에 있어서 공평해 남을 훼손해 상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위략에 따르면 병원, 관녕 등과 유학해 세 사람이 친했는데, 이 세 사람을 당시에 일룡이라 불렀으며 그 중에서 화흠을 용의 머리, 병원을 용의 배, 관녕을 용의 꼬리라 여겼다고 한다.

왕분이라는 사람이 고당현에서 이름이 알려진 도구홍과 자신을 불러 영제를 폐위시킬 것을 상정하자 도구홍이 이에 동참하는 것을 말렸으며, 화흠의 예상대로 왕분의 계획은 실패했다. 효렴에 천거되어 낭중령을 지내다가 질병으로 관직을 떠났으며, 영제가 붕어하자 하진의 부름을 받아 상서령에 임명되었다.

동탁이 장안으로 도망갈 때 지방으로 나와 하규의 현령이 되길 원했지만 질병으로 임지에 가지 못해 남전에서 남양으로 옮겼으며, 당시에 원술이 양성에 있을 때 화흠을 남겼다. 원술에게 동탁을 토벌할 것을 건의했지만 이를 듣지 않자 떠나려고 했지만 마침 천자가 마일제를 보내 관동을 안정시키도록 하면서 마일제가 불러들이자 연으로 임명되었다. 동쪽으로 서주까지 와서 조서를 받아 예장태수에 임명되었으며, 백성들이 감격할 정도로 청정한 정치를 했다고 한다. 화흠 하면 헌제 및 황후 문제로 안 좋은 이미지가 있는데 정사를 탐독하면 이 지점에서 한 번 놀라게 된다.

손책이 강동을 공격하자 손책이 용병에 뛰어난 것을 알았기 때문에 손책을 맞이했으며, 상빈으로 접대를 받았다. 손책 사후에 조조가 불러들이면서 천자에게 상주했는데, 손권은 보내려고 하지 않았지만 손권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공고해야 하므로 자신을 잡아두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설득해 손권이 화흠을 조조에게 보내기로 했다.

화흠의 빈객과 옛 친구 등 천여 명이 전송하면서 예물을 주자 이를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그 물건에 주인의 이름을 썼다가 떠날 때 한 곳에 모아놓고 주인들에게 모두 돌려주었으며, 허도에 도착해 의랑이 되었다가 군사에 참여해 조정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 시중으로 옮겨졌다가 순욱을 대신해 상서령이 되었다가 조조가 손권을 공격할 때 군사로 삼았다.

214년에 복황후가 자신의 아버지 복완에게 사사로이 보낸 편지가 발각되어 복황후와 그 일족(복완은 이미 사망)이 몰살당하는 일이 생긴다. 조만전에는 이때 화흠이 복황후를 끌어내는 장면이 있다.
공(조조)이 화흠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궁으로 들어가 황후를 잡아오게 했다. 황후는 문을 닫고 벽 속에 숨었는데 화흠이 문을 부수고 벽을 열어 황후를 끌어냈다.
이때 황제가 어사대부 치려와 함께 앉아있었는데 황후가 머리가 풀어헤쳐진 채 맨발로 걸어 지나가다 황제의 손을 잡으며 말하길, "다시 살아날 수 없겠습니까?"
황제가 말하길 "나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오."
황제가 치려에게 말하길 "치공,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소!"
마침내 장차 황후를 죽이려 하였고, 복완과 그 종족으로 죽은 이가 수백 명에 이르렀다. - 조만전

화흠전에 단 배송지의 주석을 보면 조비헌제에게 제위를 양위받았을 때 진군과 화흠만큼은 기뻐하지 않는 얼굴을 보였고, 이에 화흠을 사도로 좌천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상서령 진군에게 "짐은 천명에 응하여 선양을 받았소. 제후들 중에 그 기쁨을 소리와 표정에 나타내지 않은 자가 없는데, 상국(화흠)과 공만(진군)은 무슨 이유로 기뻐하지 않은 거요?" 라고 물었고, 이에 진군은 "신과 상국은 이전 한나라의 신하입니다. 마음속으로는 기쁘지만 얼굴에는 도의를 나타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한편으로 폐하께서 내심 저희를 증오하실까 두렵습니다." 라고 대답했고, 조비는 이에 기뻐하며 내심 그를 중히 여겼다고 한다. 이를 보면 한실에 대해서 속으로는 다소 복잡한 감정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이후 위나라가 건국되자 화흠은 어사대부가 되었다. 조비가 왕위를 계승받자 상국에 임명되면서 안략향후에 봉해졌으며,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사도가 되었으며, 평소에 청빈해 봉록이나 하사품을 모두 친척들에게 나눠주면서 양식을 보관하지 않았다. 공경(公卿)의 관리들은 관청 소속의 노비를 하사받았는데, 오직 화흠만이 이들을 내보내 결혼을 시켰다.

황제가 탄식하여
사도(화흠)는 나라의 원로인데, 다른 대관들은 먹는 것을 중히 여기는데 사도는 푸성귀만을 먹으니 할 말이 없소.(화흠의 청렴함을 칭찬한다는 뜻)

위와 같은 조서를 내려 어의(御衣)를 하사하고 화흠의 처자와 집안 사람들에게 새옷을 지어줬다고 한다.

황초 연간에 문제가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자 관녕을 천거했으며, 조예가 즉위하자 박평후에 임명되어 5백 호가 더해져 식읍이 1천 3백호가 되었으며, 태위가 되었다(226년 12월~231년 12월 6일). 주목할 만한 것이, 이때 태위 종요는 태부로 임명되고(태위→태부는 일종의 은퇴 루트) 화흠이 그 뒤를 이어 태위로 임명되는데, 화흠은 군사쪽에는 이렇다할 치적이 없는 사람. 허나 이때는 조인 이후 공석이었던 대사마 직에 조휴가, 대장군 직에 조진이, 그리고 표기대장군에 사마의가 앉게 되어(그리고 진군대장군에 진군) 그 유명한 조휴-조진-사마의 트로이카가 대두한다. 실질적인 군권을 쥔 것은 당연히 이쪽이다.

헌데 이때 참 흐름이 미묘한게, 228년 군부의 한 축인 조휴가 석정 대패의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230년 그 뒤를 이어 대사마가 된 조진이 (화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촉 정벌을 시도했으나 흐지부지 끝났으며 그 이듬해 사망하고 같은 해 12월 6일 화흠이 사망한 것이다. 결국 군부 실권자들이 하나 둘 알아서 실패하고 죽어주는 가운데 홀로 남은 사마의에게 자연히 군권이 집중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사실 화흠은 명예뿐인 태위직을 고사하고 관녕에게 넘기려 했지만 뻣뻣하기로 유명한 관녕은 물론 거절했다.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으며, 태화 연간에 조진을 파견해 촉을 공격하도록 하자 군사를 거둬들였다가 때에 맞게 움직여야 된다고 상소를 올렸다.

231년에 사망했는데, 시호를 경후라고 했다.

세설신어』에는 화흠과 관련하여 황금에 대한 일화, 자식 교육에 대한 일화, 배를 타고 갈 때의 일화가 전해진다. 다만 세설신어의 특성상 저 일화들이 사실이라기 보다는 당대 사람들의 화흠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상징성을 갖는 이야기라고 여기는 게 옳을 것이다.

3. 연의

정사에 인용된 조만전의 내용 그대로 헌제와 황실을 괴롭히는 악인으로 나온다. 복완의 조조 암살 계획이 탄로나자 조조의 명으로 복황후를 끌어내는가 하면 조조가 죽고 나서는 헌제에게 제위를 양보하도록 강요하고 조비를 즉위시킨다.

또한 조비와 그의 형제들 간에 싸움을 일으킨 원흉이기도 하다. 조창을 제외한 조식조웅이 조조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를 묻게 했고, 조웅이 자결한 걸 알면서도 조식을 그냥 죽여 버리는 게 낫다고 간언했다.

조예의 대에는 마속의 계략으로 사마의가 반란 의혹을 받자 사마의를 경계했다는 조조의 유언을 거론하면서 즉시 척살할 것을 주장하고, 이후 반란 혐의가 불확실해지자 병권을 빼앗고 좌천시키라고 진언한다. 그리고 하후무, 조진이 연달아 패배하자 조예에게 친히 출전할 것을 진언한다. 어째 위나라 입장에서도 팀킬에 가까운 짓들을 하고 있다.[5]

연의에서 주로 한실을 핍박하는 모습에 집중해서 아주 악랄한 인물로 등장하지만, 조만전에 분명 복황후를 강제로 끌어내는 장면이 나오는 만큼 연의에서 안 했던 짓을 창작해 폄훼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청렴했고 정치가로서도 명망이 있었는데 찬탈자로서의 부정적 면모만 쭉 조명되었다는 점에서 연의의 피해자라고 할 만하다.

4. 가족 관계

동생 화집(華緝)은 조예의 대에 형의 식읍을 나눠 받고,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처는 등씨(滕氏)[6]이며, 첩으로 낙통의 어머니가 있었는데, 낙통이 8살 때 화흠에게 재가했다.

장남 화표(華表)는 『진서(晉書)』에 본인의 열전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로.

차남 화박(華博)은 세 현의 내사(內史), 3남 화병(華炳)[7]은 시어사(侍御史), 막내아들 화주(華周)는 황문시랑(黃門侍郎)과 상산태수(常山太守)를 역임했다.

5. 기타 창작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화흠/기타 창작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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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現 산둥성 더저우시(지급시) 위청(禹城)시(현급시)[2] 같은 삼국시대 인물 중 주방과 자가 같다.[3] 정반대의 행동으로 두 인물의 차이를 나타내는건 설화에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다. 하지만 발단과 전개는 비슷하지만 결말은 정 반대인 케이스도 있는데, 기묘사화의 주역이었던 남곤조광조가 등장하는 야사다. 둘이 산책을 하던 도중 여인이 지나가자 조광조는 그 모습을 보고 산책하는 도중에도 계속 뒤돌아봤으나 남곤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조광조는 어머니인 여흥 민씨에게 이것을 말하며 자책했으나 여흥 민씨는 오히려 남곤을 냉정하고 무서운 인물로 여겨 조광조에게 남곤을 멀리하라고 했고, 심지어 남곤의 집에서 먼 곳으로 이사까지 했다.[4] 화흠의 손자인 화교(華嶠)가 쓴 보서(譜序)에는 이 일화가 화흠이 하규의 현령으로 있을 때 뜻을 같이한 정태(鄭太) 등 6, 7명과 함께 도피한 것으로 나오며, 도적의 추격이 아니라 태워주기를 요청한 남자가 물에 빠지자 버리고 달아나려는 것에서 화흠이 함께로 가기로 해놓고 버리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면서 화흠이 다시 태운 것으로 나온다.[5] 그런데 사마의를 위시한 사마씨는 결국 권력을 찬탈하여 위를 멸망시켰으니 화흠의 행동은 본의아니게 위나라를 구하려고 한 격이 됐다.[6] 화방(아래 나올 화병의 손녀)의 묘지가 발견되면서 성이 밝혀졌다.[7] 자는 위명(偉明). 배송지가 『삼국지』 「화흠전」에 인용한 화교의 보서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역시 화방의 묘지가 발견되면서 그 존재가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