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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KDLP에서 넘어옴

''' 2008.5.30. ~ 201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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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진보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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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5]
<colcolor=#e70> 영문 명칭 <colbgcolor=#fff,#010101>Korean Democratic Labor Party (KDLP)[6]
표어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
창당일 2000년 1월 30일[A]
해산일 2011년 12월 13일 (통합진보당으로 신설합당)
당 색 주황색 (#EE7700)
정치적 스펙트럼 좌익
정책 연구소 진보정치연구소
국제 조직

,(옵저버),
당원 수 110,593명 (진보신당 분당 직전 / 2008년 1월)
대표 이정희 / 초선 (18대)
의원단대표 권영길 / 재선 (17-18대)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문래동2가 25-1
종도빌딩 1, 2층
의석 수 10석 / 299석 (17대 국회 초)
6석 / 295석 (17대 국회 말)
5석 / 300석 (18대 국회)

1. 개요2. 특징3. 지지 기반4. 당의 역사
4.1. 국민승리21 (1997~1999)4.2. 민주노동당의 성장(2000~2004)4.3.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분당(2004~2008)4.4. 분당 이후의 민주노동당(2008~2011)
4.4.1. 2008년 진보신당 분당 이후4.4.2. 2010년 이정희 지도부4.4.3. 2011년
5. 당내 계파6. 당내 갈등
6.1. 자주파와 평등파의 갈등6.2. 2006년 일심회 사건6.3. '종북' 논란이 제기된 배경과 구체적 설명6.4. 다함께의 상근노조 미인정 논란
7. 관련 노래
7.1. 평등, 통일의 새 세상을 향하여(당가)7.2. 민주노동당 진군가
8. 역대 지도부
8.1. 1기 대표단8.2. 2기 대표단8.3. 3기 대표단8.4. 4기 대표단8.5. 5기 대표단8.6. 6기 대표단
9. 역대 선거 결과
9.1. 재보궐선거
10. 여담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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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jbd3.jpg
파일:17대민노당.jpg
2000년 1월 30일에 창당해 2011년 12월 5일 해산된 대한민국진보정당. 1997년에 '민중 후보' 권영길15대 대선 출마를 앞두고 세워진 진보정당 '건설국민승리21'을 전신으로 하고 있다.

2. 특징

당 강령 등에서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모두 비판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킨다는 점을 미뤄보아 민주적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평가된다.[8][9] 민주노동당 이후에 탄생한 제도권 진보정당의 강령들은 거의 모두 이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기반으로 조금씩 변화시켜서 만들어져 있다.

역대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중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정당으로 진보정당 역사의 리즈시절로 평가받는다. 당원 충성도가 당시 거대 정당들과 비할 바 없이 높았으며, 민주노총전농, 각종 사회운동을 기반으로 한 지역조직 역시 탄탄한 정당이었다. 민주화 이래 창당되었던 진보정당 중 지속적으로 평균 지지율 10% 이상을 차지한 거대 정당은 민주노동당뿐이다.[10] 2004년 17대 총선에선 13%의 비례정당 득표율을 얻었는데, 이는 2020년대 현재에도 진보정당 역대 최대 비례득표율이다.

민주노동당에서 분당하여 4년간 병존했던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의 법적 후신인 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 탈당파들이 세운 진보정의당은 물론, 2020년대 현재 진보정당을 자임하는 정의당, 진보당, 노동당이 모두 민주노동당의 실질적 후신이다.[11]

3. 지지 기반

주요 지지 지역으로 영남 지역 울산광역시, 창원시 등 동남권 공업지대의 공업도시에 지지기반이 두터웠다. 주요 지지층으로 대단위 산업 단지 노동자 및 대학생, 40대 이하 고학력 사무직, 호남 지역 농민의 지지를 받았으며, 민주노총, 전농의 배타적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이를 제외한 비조직 노동자[12]와 농민의 지지도 상당히 받았다.

또한 영남은 민주당을, 호남은 한나라당을 찍지 않는 지역주의 현실에 힘입어 영호남 각 지역에서 제1야당 포지션을 차지하기도 했다. 마치 간단한 빈집털이처럼 읽히지만, 사실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몰표 성향이 심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하는 양당 중 한 당을 밀어내고 제1야당 역할을 한다는 것은 어느정도의 조직력, 득표력이 갖춰져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민주노동당은 창당 당시 자금은 물론 거점 지역을 제외하면 지역 조직이랄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영호남에서 단순히 고만고만한 여러 군소정당 중 하나가 아니라, 울산/창원/거제 등지에서는 한나라당과 1:1 승부가 가능한 지역 제1야당이었고, 호남(특히 광주, 순천)에서는 2010년대가 되면 비민주당 단일화로 과반에 가까운 득표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영남 한나라당/호남 민주당 일색의 지역의회에서 소수나마 의석을 배출하여 단체장, 의정을 견제한 것도 풀뿌리 민주주의의 좋은 사례가 되었다.

민주노동당의 지역조직력이 최정점에 달한 시점의 상황은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문서에 좀더 상세히 분석되어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4. 당의 역사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문민정부 ~ 이명박 정부
(1993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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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 이전
건설국민승리21 청년진보당 녹색평화당 민주사회당
민주당에서 분당 민주노동당 사회당 한국사회민주당
희망사회당 녹색사회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한국사회당 정당등록취소
사회당
새진보통합연대 진보신당 진보신당에 합당 초록당사람들 사회민주주의연대
시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 녹색당 청년당
민주통합당으로 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진보신당연대회의 정당등록취소
이명박 정부 이후 }}}}}}}}}

4.1. 국민승리21 (1997~1999)

1996년 노동법 날치기[13] 통과 이후,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정치영역에서 노동을 대표하는 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997년 3월 27일의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자 정당건설을 결의하게 된다. 그리고 NL계열 운동의 전국조직인 전국연합, 꾸준히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해온PD 성향의 진보정치연합과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논의를 하게 된다. 8월 18일 '국민승리21 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추진위원회에서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을 추대하여 10월 26일 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결정했다.

그러나 국민승리21이라는 정당명과,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선거구호를 사용하는 바람에 PD 계열로부터는 비판받고, 김대중비판적 지지해오던 NL 계열의 전국연합은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데다(당시 선거 막판 김대중과 이회창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김대중 비판적 지지 활동가측의 압박을 받은 전국연합 지도부가 권영길 후보 지지를 조직적으로 철회했다)[14], 중도진보 성향의 유권자들 중 대다수가 사표 방지 차원에서 김대중 지지로 쏠리는 바람에 결국 15대 대선 결과 1.2%를 득표하는데 그쳤다.

4.2. 민주노동당의 성장(2000~2004)

비록 대선에서는 유의미한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진보정당 창당 준비 세력은 2000년 권영길을 대표로 민주노동당을 창당한다. 목표는 2000년 예정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원내 진입이었다. 그러나 가장 공을 들였던 울산 북구 선거구에서 NL계 울산연합이 자파 세력을 후보로 내세우기 위해 기습적인 경선을 벌여 유력 후보였던 이상범 후보가 경선에서 패배하고, 경선에서 승리해 본선에 진출한 울산연합계 최용규 후보는 간발의 차로 패배했다. 거기에다가 남북정상회담 발표로 영남권에서 역풍이 불면서 명색이 대선후보였던 권영길도 창원에서 낙선하는 등, 조직력이 완비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면서 원내 진입에 실패하고 만다.

뿐만아니라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하거나 유효총투표수의 2% 이상을 얻지 못하는 정당을 등록 취소 시키는 당시 정당법 규정에 따라 정당등록을 취소당하기도 했다.[15][16] 다행히 민주노동당은 흩어지지 않았고, 2000년 5월 25일 민주노동당을 다시 재등록했다.[17][18]

2002년 6월 13일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49명의 후보를 내어 22명을 당선시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헌법재판소에서 비례대표를 지역구 투표의 합으로 결정하는 방식에 대하여 위헌결정을 함에 따라 1인 2표제가 도입되면서 민주노동당에게 숨통이 트였다. 선거 결과 지역구에서는 2곳의 기초단체장과 2명의 광역의원만 배출했지만, 정당별 비례대표에서 8%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자유민주연합을 제치고 일약 3당으로 도약, 정당보조금까지 수령하게 되었다. 진보 성향의 기초의원, 구청장의 당선으로 자신감을 얻었다.

연이어 열린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앞서 8%의 비례 득표를 바탕으로 대선 후보 토론회 참가를 요구했고, 결국 소송 끝에 참여가 허가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당 후보였던 권영길은 노무현, 이회창이라는 거대 양당의 후보들에 밀리지 않으면서 당의 인지도를 끌어 올리는데 성공했다. 토론회 과정에서 그 유명한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는 유행어가 될 정도였고[19], 진보적인 공약을 토대로 지지율을 끌어올리면서 조봉암 이후 처음으로 100만표 득표 진보 후보가 되는가 싶었지만, 대선 직전 정몽준의 지지철회 여파로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이어지면서 아깝게 100만표에는 미치지 못하는 957,148표로 대선을 마무리했다.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입은 확실시되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으로 인한 역풍은 민주노동당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았다. 총선에서 처음 도입한 1인 2표제는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이 비례 표에서만은 사표 방지를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투표할 수 있게 만들어 줬다. 총선이 끝나고 지역구 2석, 비례 8석으로 총 10석을 얻으면서 원내 진입 성공을 넘어 일약 제3당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막판 정당별 비례대표 득표 최종 집계 결과 토론회에서 신선한 비유를 선보인 노회찬이 당선되고, 9선 관록의 김종필이 낙선하는 장면은 한국 정치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음을 알려주는 장면이었다.

원내에 입성한 전 민주노총 위원장 단병호가 개원식에서 노동자를 대변하는 의원이 하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외교관이 미래의 집권 정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과감하게 당의 외교안보정책에 힘을 보태기 위해 사직하는 장면 등, 2004년 총선 직후에는 분명 미래가 밝아보였다.

4.3.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분당(2004~2008)

사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 위기라고 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비록 조승수 의원이 애매한 선거법 위반 판결로 의원직을 잃고 이어진 재보궐선거에서 의원직 사수에 실패했지만,[20] 그래도 점차 규모를 키우며 나름대로 잘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속은 조금씩 곪아들어가고 있었는데, 바로 진보 진영의 해묵은 갈등인 NL계열, 소위 자주파에 의한 내부 갈등이었다. NL 계열은 원래 진보정당 운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21] 예상과 달리 민주노동당이 성장세를 보이자, 군자산의 약속 이후 본격적으로 입당하기 시작했다. 자주파는 조직력로는 절대 밀리지 않던지라 각급 당직을 접수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위장전입을 비롯한 내부 분란도 나타났다. 그리고 이들을 견제할 수 있던 기존 정치인들은 하필이면 당직/의원직 겸직 금지 조항에 따라 당권에서 멀어진 상태였다. 17대 총선이 끝난 뒤 3년간, 당내 패권은 자주파 계열에게 급격하게 기울었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여당 열린우리당의 몰락으로 귀결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노동당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믿었던 울산 지역에서도 기초단체장을 내지 못하는 등, 분명 광역의원 15명(지역구 5명, 비례 10명), 기초의원 66명으로 만족하기에는 분명 아쉬운 결과였다. 하지만 비례 정당 득표에서는 당시 3당이었던 민주당보다 앞선 결과(12%)를 내는 지역도 있었기 때문에 아주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총선 당시의 13% 지지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2006년 말 시작 된 열린우리당의 해체기에 좀 더 유연하게 대응만 했다면, 열린우리당 지지층 중 진보 성향의 사람들을 대거 끌어올 수 있었고, 당내 정파 간 불균형도 해소될 수 있었다.[22]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내 경선에서는 결선 투표까지 간 끝에 심상정을 제치고 권영길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권 후보가 진보 정당 운동의 상징이었던 15~16대 대선과 달리, 17대 대선 당내 경선에서 권영길은 자주파의 후보로 인식되었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본인들의 독자후보를 내는 것이 당시 자주파들의 바램이었으나, 진보진영의 명망가는 전부 평등파(PD계열)에 가까웠다. 당시 유력후보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중에 자주파는 없었던 것. 자주파가 아무리 조직력이 뛰어나더라도 자파의 대표정치인인 김창현이나 그 아래급 후보로 이들을 경선에서 누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다보니 자주파에서는 저 세 후보 중 그나마 가장 본인들과 가깝고 정파색이 옅던 권영길[23]에게 접근, 조직적 지원을 매개로 경선과 본선에서 자주파 진영을 대변하여 선거를 치러줄 것을 부탁한 것이었다.

비 자주파 성향 당원들이 이런 전개를 방관하지만은 않았다. 1차 경선 당시부터 당원게시판, 진보누리 등 진보성향 커뮤니티에서 치열한 논쟁이 일었으나, 초대 민주노총 위원장이자 대선 2회 출마 경력이 있는 권영길의 명망에 자주파의 조직력이 합세되자 이를 막기는 어려웠다. 1차에서는 과반에 소폭 미달했으나, 심상정과 붙은 결선투표[24]에서 53:47로 심상정을 누르고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것이다.

이후 권영길 캠프의 대선 제1공약은 자주파의 숙원 과제인 코리아연방으로 정해진다. 당시 국민적인 관심 거리였던 경제 문제(부동산 폭등, 양극화 등)와는 상관없는 이 구호로 인해,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표도 얻지 못하면서 권영길 후보는 2002년 대선에서 얻은 3.9%보다도 못한 3.0%라는 득표율(5위)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17대 대선의 선거 구도 상 이명박의 당선이 확실시되던 상황에서, 역대 민주당계 정당 최약체 대선후보(...) 정동영대통합민주신당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된 후보, 제대로 된 정책으로 대선에 임했다면 10%, 아니 정동영을 넘어 진보정당 운동 사상 최초 2위 득표도 충분히 노려볼만 했다.[25] 그러나 오히려 민주노동당이 구태의연,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면서 여당에 실망한 개혁성향의 표는 외려 문국현이 상당수 가져갔고, 무소속으로 나온 이회창 후보가 3위를 기록했다. 민주노동당 당원 입장에서는 잘 할 수 있는 선거를 석패도 아니고 참패를 당한 셈이었다.

선출 과정도 이랬는데 자주파 색깔 뚜렷한 선거로 결과도 참담했으니, 당시 비 자주파 당원, 지지자들의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2008년 2월 3일 당대회의 토론.[26][27][28]

그리고 일심회 사건에서 드러난 종북 문제, 자주파의 패권주의 문제, 당내 경선의 대리 투표 등 여러 문제를 둘러싼 자주파(NL)-평등파(PD)의 해묵은 갈등이 폭발했고, 2008년 2월 3일 당대회에서 심상정이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자, 당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 잔류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4.4. 분당 이후의 민주노동당(2008~2011)

4.4.1. 2008년 진보신당 분당 이후

당내 자주파를 비판하며 평등파가 빠져나가 진보신당을 창당하면서 남은 세력들은 북한과 통일운동에 유화적인 NL 자주파가 중심이 되었다.

이후 정파간 대립을 수습하기 위해 여기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농민운동 출신의 강기갑 의원[29]을 대표로 선출하였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망에 대하여 "MB 정권에 책임을 묻고 사과하지 않으면 국민적 저항을 부를 것"이라는 성명을 낸 바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며칠 후에 일어난 북한 핵실험에 대해 '북한핵은 북한의 행동 방식 '이라고 밝혀 비난을 받기도 했다.

4.4.2. 2010년 이정희 지도부

이명박 정부가 중반기로 접어들어 피로도가 높아지던 시점에 열린 2010년 지방선거는 "보편적 복지"를 고리삼아 민주-진보진영이 대대적인 야권연대를 시도한 선거였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당과의 연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많은 선전을 했는데, 특히 인천에서는 광역단체장 후보가 사퇴하는 대신 단일후보로 내세운 기초단체장을 두 명이나 당선시키는 파란을 일으켰다. 성공적인 지방선거 이후 2010년 7월 이정희 의원이 대표로 새로 선출되면서 "유연한 진보"를 주장하며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정희 대표가 대표 취임식날 입은 파란색 복장[30]이 상징성이 있다는 평도.

7월 말의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은평구 을에서는 민주당과 연대하면서 광주 남구에서는 "야4당" 단일후보로 민주당과 경쟁했다. 광주의 결과는 절반의 성공. 40%를 넘는 엄청난 득표를 얻었다만 당선엔 실패했다. 그리고 민주당의 은평을 재보궐 패배를 더 암담하게 만들어주었다.

대외적으로는 반값등록금 시위에 당대표 이정희의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화제가 되었다. 비록 민노당의 경기동부연합이 주도하는 한대련이 주도한 시위라곤 하지만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참여한 정당이 민노당이란 것에서 이슈가 되었다.

말기에는 진보신당과의 '진보대통합'이 이야기되었으며, 여기에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같은 진보신당 계열의 핵심인물을 중심으로 '통합'논의가 나오고 있어 명실공히 민주노동당은 좋든 싫든 진보대통합의 중심정당이 되었다.

4.4.3. 2011년

2011년 1월 27일 오후 성남시 판교 주민센터에서 민주노동당 소속 이숙정 시의원이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로 여직원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 의원은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었다가 여직원 이모씨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지 못하자 직접 주민센터를 찾아가 이씨의 머리채를 잡는 등 행패를 부리며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의원은 곧바로 주민센터에 찾아와 신고 있던 구두를 바닥에 벗어던진 후 서류뭉치를 집어던지고 여직원에게 무릎을 꿇으라며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주민센터의 CCTV 영상엔 빨간색 모자를 눌러쓴 이 의원의 행패가 고스란히 담겼다고. 여직원 가족들은 이 의원을 폭행 혐의로 경찰에 신고하였다.#이에 대하여 민주노동당은 이정희 대표가 직접 트위터에 사과를 하였고 이숙정 의원에 대한 징계절차에 들어갔으나... 이숙정 의원이 탈당해 버리는 바람에 닭쫓던 개 꼴이 되고 말았다.

4월 재보선에서는 순천에서 민주당과의 후보단일화로 김선동 후보를 당선시켜 6번째 국회의원을 탄생시켰다.# 4월 재보선이 워낙 화제거리가 많아 상대적으로 묻혀버렸다곤 하지만 여러번 무소속에도 이기지 못했던 군소정당의 설움을 겪어온 민주노동당으로썬 후보단일화의 위력과 함께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울산광역시에서도 성과를 거두어 동구청장 선거에서 김종훈 후보가 한나라당과 무소속 이갑용 후보[31]를 꺾고 당선되었다.

5월 말부터는 진보신당과의 '진보대통합'문제가 당내 이슈가 되었다. 향후 진보정당의 미래에 있어 가장 큰 변수가 될 수 있는 사항이라 이슈가 되기 충분하였고 5월 27일 1차적으로 협상이 결렬되었다.# 하지만 6월 1일 새벽까지 계속된 재논의 끝에 '진보대통합'합의안이 통과되었다.# 물론 이 합의안을 놓고 내외부적으로 논란이 많았다. 진보신당 내의 논란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민주노동당도 당내 논란이 있었으나 진보신당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야4당"으로 공조하던 국민참여당이 가세했다. 특히 이정희 의원이 국민참여당 유시민 후보와 <미래의 진보> 공동출간 소식이 들려오면서 나름 당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으나 소수였다.

6월 18, 19일에는 킨텍스에서 정책 당대회를 실시했다. 여기서 주요쟁점이었던 진보대통합 합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사회주의' 강령이 '진보된 민주주의'로 대체 되었다.[32] 이번 정책 당대회에는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가 참여하여 축하발언을 하였는데, 특히 조승수 대표는 지난 분당과정에서의 자신에 행보에 대해서 사과를 취지로 한 연설을 하였다. 이로써 진보대통합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6월 22일에는 권영길 의원이 지난 대선과정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 진보대통합이 성사되면 다음 총선에서 불출마를 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젠 정말로 공은 진보신당에게 간 셈이다. 그러나 26일 진보신당 임시 당대회에서 진보대통합안은 2/3에 미치지 못하여 부결되었다. 이로인해 진보신당은 통합파와 통합 반대파가 갈라져버렸고, 당의 주축이었던 노회찬/심상정/조승수 전현직 대표와 상당수 당원이 탈당해 새진보통합연대를 구축했다.

결국 2011년 12월에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탈당파들을 주축으로 통합 진보정당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당 규모를 고려해 민노당이 50%, 국민참여당이 30%, 진보신당 탈당파가 20%의 지분을 가지기로 했고, 대표는 이정희, 유시민, 노회찬이 공동으로 맡기로 하였다. 통합진보정당은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등이 주도하는 민주당계 통합 정당과는 연대는 하더라도 통합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선을 명확히 그어 일부에서 기대했던 야권 대통합은 무산되었다.

이로서 민주노동당은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 출범과 함께 창당 11년 만에 소멸하게 되었다.

5. 당내 계파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아이콘.svg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svg 의 계파(정파)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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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자주파 중립 평등파
전국연합
이용대
김창현
김선동
오병윤
범 자주파
권영길1
이정희
강기갑
문성현1
다함께
최일붕
김인식
정성진
범평등파
노회찬
주대환
박용진
조승수
중앙파 출신
심상정
김석준
노옥희
단병호
현장파 출신
이갑용
1 평등파 출신이나 당내 선거에서 자주파의 지지를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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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내에서는 반미, 자주, 통일 등 한반도 국제외교적 담론을 중시하는 자주파와 노동 문제와 복지국가 등 경제 담론을 중시하는 평등파의 양대 계파가 있었다.

평등파는 심상정, 노회찬 등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명망가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의 슬로건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정파 내부 분위기는 다소 개인주의적이었고 각종 당내 선거 때마다 단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33] 반면 자주파는 인지도 높은 정치인들은 적었지만, 특유의 끈끈한 단합력과 주민과의 공동사업을 중시하는 전통으로 지역활동을 벌이는데 능수능란했다. 특히 "풀뿌리 기반"을 넓히는데 있어 평등파에 비해 더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른바 공중전의 평등파, 지상전의 자주파로 요약될 수 있다. 때문에 2004년 이후 점차 지역조직에서부터 자주파가 평등파를 압도했고, 2008년 평등파가 집단 탈당해 진보신당을 결성하며 민주노동당내 정파갈등은 종결된다.

평등파 내에서는 급진성향 좌파였던 민주노총 현장파 출신이 일부 있었고, 자주파에는 충북도당과 강원도당에서 활동하던 중부지역당 출신의 주체사상파가 일부 있었으나 두 정파 모두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34] 이중 강원도당은 코리아연대를 결성해 현재 민중민주당으로 빠져나갔고, 충북도당은 주권연대 및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등으로 승계되어 2020년까지 진보당에 잔류했다가 당내 투쟁에서 전국연합에게 패배한 후 국민주권당이라는 독자 정당을 창당해 이탈했다.[35] 특이한 정파로는 이념적으로는 평등파에 가깝지만 막상 정치적 행동은 언제나 자주파와 함께했던 국제사회주의파(IS)가 있었다.

2002년~2008년 사이 민주노동당 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했던 의견그룹(정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6. 당내 갈등

6.1. 자주파와 평등파의 갈등

민주노동당의 소위 종북[39] 논란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분당되는 원인인 '당권 헤게모니 다툼'과 무관하지 않다. 90년대는 PD계열이 독자 진보정당 창당에 주도적이었고, NL은 김대중 후보와 민주당계열에 비판적 지지를 했는데[40] 김대중 후보 당선 후 NL계열도 본격적으로 실질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야겠다는 판단 아래 진보정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창당초기 먼저 결합한 울산연합경기동부연합[41]이 있었고, 2001년 군자산의 약속 이후 NL 계열 전체의 본격적인 민주노동당 입당이 시작되었고 점점 지역 조직을 차지해간다.

그렇게 2004년 노동계와 평등파(PD)가 대거 의원직에 당선되었지만, 그 직후의 당직자 선거에서 자주파(NL)가 강력한 조직력[42]을 바탕으로 당직 다수를 차지하며 당권을 쥐게 된다. 자주파 내부에도 지역연합별 계파 경쟁은 존재했는데, 특정 계파(이를테면 경기동부연합)가 특정 지부를 차지하려고 하면 타 계파가 이를 막기 위해 평등파나 다함께 등 성향이 다른 정파와 손을 잡는 일도 '가끔씩'은 있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경기동부연합-광주전남연합[43]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되며 2006년 당직자 선거에선 결국 경기동부연합계가 당권을 차지하게 된다.

6.2. 2006년 일심회 사건

2006년 10월 검찰은 전직 민주노동당 중앙위원 이정훈 등 5명을 당국의 인가를 받지 않고 북한 공작원 등과 접촉한 혐의로 체포하였다. 조사결과 이들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남한 내부의 정치 동향 및 민주노동당 내부 주요 인사에 대한 인적사항 및 성향 분석 등이 포함된 보고서를 북한에 제출하는 사실상의 간첩 행위를 하고 있었고, 특히 장민호(마이클 장)는 밀입북하여 조선로동당 가입 및 충성서약을 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 '민노당 내부 주요 인사에 대한 인적사항 및 성향 분석'이란 게 매우 엉터리였다. 작성한 사람이 자기 편인 자주파의 성향은 비교적 정확하게 작성하였으나, 상대 정파인 평등파 인사들에 대해서는 조사를 제대로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엉터리로 분류를 한 것이다. [44] 문제는 이 문서를 작성자가 평양의 조선로동당에 넘겼다는 거다. 이 때문에 당내 자주파의 '국가보안법에 의한 탄압'이라는 주장에 격렬히 반발했던 당내 평등파는 "이 사건은 국보법으로 인한 탄압이 아니라, 당내 개인정보를 조선로동당에 유출한 개인정보 침해 사건이자 당내 기밀 정보 누설 사건"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자주파가 우위였던 당 중앙은 이에 대해 이 사건이 국가보안법에 의한 탄압이라고 규정하였다. 후일 위키리크스에서 공개된 미국 외교전문에 따르면 당시 노무현 정부에 의해 이 사건이 실제보다 축소 수사되었으며 일심회 간첩행위 적발에 관여한 국정원장이 청와대의 압력에 의해 사퇴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실제로는 수사된 것보다 더 크고 광범위한 간첩행위가 존재했을 개연성이 있는 셈이었다.

민주노동당은 2008년 2월 당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의 주도하에 사건에 연루된 당내 인사에 대한 제명안을 제출했으나, 당내 다수파인 자주파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평등파가 대거 탈당해 진보신당으로 합류한다.

6.3. '종북' 논란이 제기된 배경과 구체적 설명

원래 '종북'이라는 단어는 당내외 좌파쪽에서 친북과 구분하여 만들어내 사용한 단어였다. 기존의 친북은 독재시절부터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하는 사람들 싸잡아 빨갱이로 매도하는 단어였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주체사상을 학습, 자신들의 철학으로 삼은 운동권 일부 세력을 따로 구분해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친북이라나 단어가 범주도 다르고 목적도 불순하므로, 실제로 북한 정권을 추종하고 주체사상을 자신들의 철학으로 삼은 운동권 세력을 가리켜 만든 단어였던 것. 물론 초창기에는 운동권 내부 논쟁에서만 나오던 단어였다.[45] 그런데 자주파들의 북한의 연이은 도발에 대한 옹호가 각종 논란을 불러오면서 이 '종북'이란 단어가 점차 수면으로 올라오게 되며 보수 진영이 진보 진영과 민주당계 진영을 비난하는 용도로 쓰이게 된다.

2009년 11월 9일 일어난 대청해전에 대한 성명서 내용에서는 북한을 비판하는 내용은 없이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노선 변경만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0년에는 좌초 논란이 불거진 천안함과 관련해서 민주노동당은 각종 논평을 발표했다. #
그해 10월에는 북한의 김정은 3대세습을 '북한이 알아서 결정해야할 문제'라 하여 또 다시 보수 세력의 비난을 받았으며, 민노당 울산시당에서는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던 경향신문에 대해서 북한 사회의 특이성과 똘레랑스를 제대로 보이지 못했다면서 경향신문의 절독을 선포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정희 대표가 한 발언이 진중권 등 일부 PD계열 지식인들에게 비난받기도 했다.

같은해 가을 연평도 포격전에 이르러서는 이정희 대표가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이명박 정권은 똑똑히 봐야 한다'라는 말은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 이후 최대 규모로 이루어진 한미훈련이나 (이건 이전부터 쭉 반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정기적인 사격훈련에 대해서도 '전쟁도발' 위험을 이야기하며 반대하였다. #

2011년에 들어서도 '북한인권법'에 대해 '북한을 자극한다'면서 반대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자 진중권은 5월 27일 진보대통합 합의안이 난항을 겪는 것을 기회 삼아 민주노동당에게 '종북을 못버리는 사이비 종교집단'이라는 말까지 쓰면서 극심한 비난을 쏟아냈다. 2011년 말 김정일의 사망으로 서울대에서 김정일 분향소를 설치하려던 학생이 민주노동당 당원에 한대련 소속인걸로 밝혀지면서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6.4. 다함께의 상근노조 미인정 논란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을 기반으로 창당한, 노동자 계급 정당을 표방했지만[46] 2007년 1월 6일 설립된 상근자 노조에 대해 '당직자가 노동자냐'[47], '상조회가 있는데 노조가 필요하냐', '다른 시민단체나 노조 내부에 상근자 노조가 있냐',[48] '보수 세력에 빌미를 주는 것 아니냐'[49]는 식의 당내 반발이 있기도 했다.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자다'라는 노동계의 당연한 명제가 민주노동당에서 당내 반발에 직면했던 이유는 당내의 정파 구도 알력과 관련이 있었다, 상근자 노조를 추진했던 쪽은 PD계열, 즉 좌파 세력이었다. 그런데 당시 민노당 정파 구도에서 PD계열과 대척점에 있던 일부 NL 당권파가 상근자 노동조합이 지도부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 생각하고 처음부터 상근자 노동조합에 대해 온갖 방해 공작을 폈다.

또한 당시 민노당에는 반전과 반자본 운동을 모토로 활동하는 '다함께'[50]라는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경기동부 등과는 달리 당 밖에서는 정치적으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가 없어서 민노당에 '반전 운동'을 지렛대삼아 대거 입당하여 강남, 서초, 중랑 등 몇 군데 지역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함께 역시 당내 PD세력들과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51]일부 NL 당권파과 다함께가 합작하여[52] 상근자 노동조합을 시도 때도 없이 공격했다. 일부 NL 당권파계열이 일제 시대 일본 순사라면 다함께는 '조선인 형사' 역할을 맡아 상근자 노동조합을 공격하는 행동대 역할을 맡았다. 앞서 서술한 '당직자가 노동자냐'라는 주장은 바로 이 '다함께'가 했던 얘기다.[53] 그런데 이들 논리라면 당시 민노당이 합법화를 지원하고 있던 '전국공무원노동조합'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같은 이유로 '전교조도 인정하면 안되지만 다함께는 끝까지 상근자 노동조합을 공격했다. 다함께의 패악질과 분파주의, 종파주의는 매우 악명이 높아서 '민노당을 숙주 삼아 기생하는 기생충'이라는 우스갯소리 아닌 우스갯소리까지 있었을 정도다. 다함께의 악행은 해당 문서 참조.

이후 2007년 8월경부터 상근자들에 대한 임금이 체불되면서[54] 노조가 당 지도부와 교섭을 시도했으나 지도부가 교섭을 거부하면서 '당 지도부와 악덕 기업가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55] 당 조직국장이라는 사람의 인식이 이러했다. 그런데 이 서초지역위원회 조직국장은 바로 '다함께' 소속이었다. 그래서 정파의 이해를 상식보다 더 우선시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당시에 '노동자의 적은 자본가인데 민노당에는 자본가가 없으니, 전세계의 자본가와 자본가를 등에 업은 남한 정부에 따져라'라는 얘기가 있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2008년 2월 3일, 심상정 비대위의 혁신안이 당 대회에서 부결되자 당내 PD계열은 민노당을 집단 탈당하기 시작했고, 상근자 노동조합의 노조원들도 대부분 사직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근자 노동조합은 노조원들의 체불 임금과 퇴직금을 온전히 받을 수 있도록 지도부와 협상을 마무리한 후 2008년 3월 경에 해산했다.

7. 관련 노래

7.1. 평등, 통일의 새 세상을 향하여(당가)


민주노동당 당가인 평등, 통일의 새 세상을 향하여(김문영 작사, 박향미 작곡)[56]

곡이 처음 만들어질 때는 제목이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향하여 였으나 NL계열 취향이 반영되어 변경되었다. 당가를 정하는 과정에서도 정파간 힘겨루기가 있었다고 한다. # 희망찬 분위기의 음악도 좋고, 가사도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면서도 당내 모든 정파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도 당가로서는 최고라고 꼽는 경우도 있으며, 민주노동당이 사라진 이후로도 진보 진영과 학생 운동권에서 명곡으로 회자되는 곡이다.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
자유로운 민중의 나라 노동자 해방을 위해

오늘의 절망을 넘어 희망의 역사를 열어라
아아 민주노동당이여 이제는 전진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회가 평등하게
노동이 아름답게 민중이 주인되게

평등과 통일의 길에 어떠한 시련도 마다 않겠다
아아 민주노동당이여 이제는 전진이다

7.2. 민주노동당 진군가


이 노래는 위 노래와 달리 NL 취향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노래이다. 민주노동당의 초기 강령이 표방하고 있는 '민주, 평등, 해방'의 기치를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진 노래이다.
얼마나 갈망했던가 얼마나 기다렸던가
일하는 자 주인되는 평등의 세상을

무엇이 두려웠던가 무엇이 부족했던가
노동자로 농민으로 소외받은 민중의 힘

이제 우리 민주노동당 세상을 바꿀 무기가 있다
이제 우리 민주노동당 세상을 가꿀 지혜가 있다

민중과 함께 앞으로 민주노동당과 함께 앞으로
가자 민주 평등 해방의 새 세상을 향하여

8. 역대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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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권영길
제3대
김혜경
직무대행
천영세
비대위
권영길
제4대
문성현
비대위
심상정
직무대행·비대위
천영세
제5대
강기갑
제6대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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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1기 대표단

2000년 1월 30일 ~ 2002년 3월 15일

2000년 1월 29일 창당대의원대회를 통해 대표 권영길, 사무총장 천영세, 부대표 노회찬, 박순보, 양경규를 선출했다.[57]

2000년 3월 12일 임시 당대회를 통해 이문옥을 부대표로 선출했다.[58]

2000년 6월 11일 제3차 임시 당대회를 통해 김혜경최순영을 여성부대표로 선출했다.[59]

2001년 2월 25일 김태일 민주노총 부위원장을 부대표로 선출했다.[60]

8.2. 2기 대표단

2002년 3월 16일 ~ 2004년 6월 6일

2002년 3월 16일 민주노동당 정기 당대회를 통해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했다. 대표에 권영길, 사무총장에 노회찬, 부대표에 최순영, 김태일, 김혜경, 천영세.[61]

2003년 3월 1일 정기 당대회를 통해 김형탁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부대표로 선출되었다.[62]

8.3. 3기 대표단

2004년 6월 6일 ~ 2005년 10월 31일

당대표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김혜경 10,702 64.4% 1위 당선
정윤광 4,116 24.75% 2위 낙선
김용환 1,469 8.83% 3위 낙선

사무총장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김창현 57% 1위 당선
김기수 6,825 41.04% 2위 낙선

정책위의장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이용대 6,686 40.21% 1위 결선 진출
주대환 4,882 29.36% 2위 결선 진출
허영구 4,098 24.64% 3위 낙선
성두현 990 4.15% 4위 낙선

정책위의장 결선 투표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주대환 7,342 51.4% 1위 당선
이용대 6,557 45.9% 2위 낙선

최고위원 일반 명부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최규엽 43.4% 1위 당선
김종철 37.9% 2위 당선
이영희 35.3% 3위 당선
김성진 35.3% 4위 낙선
김형탁 25.7% 5위 낙선
이부영 15.5% 6위 낙선
신보연 13.3% 7위 낙선
박창완 12.8% 8위 낙선
양연수 11.7% 9위 낙선
민동원 11.1% 10위 낙선
차봉천 10.5% 11위 낙선
김해근 9.8% 12위 낙선
남만진 7.6% 13위 낙선

최고위원 여성 명부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김미희 57.8% 1위 당선
이정미 51.3% 2위 당선
유선희 50.2% 3위 당선
박인숙 46.5% 4위 당선
김은주 31.6% 5위 낙선
홍승하 31.3% 6위 낙선
정현정 30.5% 7위 낙선
박승희 22.8% 8위 낙선
김혜련 20.5% 9위 낙선
황혜로 19.7% 10위 낙선
김진선 16.8% 11위 낙선

최고위원 직종별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찬성율 순위 결과 비고
이용식 84.7% - 당선 노동 부문, 찬반 투표
하연호 87.4% - 당선 농민 부문, 찬반 투표


3기 대표단 선거는 2004년 6월 2일~6월 5일에 치러졌다. 정책위의장 결선 투표는 2004년 6월 12일~16일에 치러졌다.

3기 대표단은 2005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기 위해 2005년 10월 31일 동반 사퇴했다. 사퇴 이후 천영세 권한대행 체제를 거쳐 권영길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매일노동뉴스 기사[63], 오마이뉴스 기사[64], 참세상 기사[65], 정영태의 책 '파벌'(이매진, 2011) 146p에 근거함.

8.4. 4기 대표단

2006년 1월 25일 ~ 2007년 12월 30일

대표최고위원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문성현 47.58% 1위 결선 진출
조승수 44.79% 2위 결선 진출
주대환 7.62% 3위 낙선

대표최고위원 결선 투표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문성현 53.6% 1위 당선
조승수 46.4% 2위 낙선

사무총장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김선동 17,123 52.20% 1위 당선
이용길 47.80% 2위 낙선

정책위의장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이용대 16,609 50.87% 1위 당선
윤영상 10,534 32.27% 2위 낙선
김인식 16.86% 3위 낙선

최고위원 일반 명부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김성진 27.13% 1위 당선
김기수 24.35% 2위 당선
이해삼 21.10% 3위 당선
김광수 14.43% 4위 낙선
김정진 13.00% 5위 낙선

최고위원 여성 명부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심재옥 31.62% 1위 당선
박인숙 30.86% 2위 당선
김은진 24.01% 3위 당선
홍승하 13.51% 4위 당선

최고위원 직종별 선거 결과
이름 득표수 찬성율 순위 결과 비고
이영희 - 낙선 노동 부문, 찬반 투표, 투표율 미달로 낙선[66]
강병기 96.37% - 당선 농민 부문, 찬반 투표


4기 대표단 선거는 2006년 1월 20일~24일에 치러졌다. 결선 투표는 2006년 2월 6일~10일에 치러졌다.

4기 대표단은 제17대 대통령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기 위해 2007년 12월 30일 동반 사퇴했다. 사퇴 이후 심상정 혁신위원회 체제를 거쳐 천영세 권한대행, 천영세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상의 내용은 한겨레의 기사[67], 프레시안 기사[68], 정영태의 책 '파벌'(이매진, 2011) 146p에 근거함.

8.5. 5기 대표단

2008년 7월 21일 ~ 2010년 7월 15일

이상의 내용은 연합뉴스 기사, 폴리뉴스 기사, 레디앙 기사, SBS 기사에 근거함.

8.6. 6기 대표단

2010년 7월 16일 ~ 2011년 12월 13일

최고위원 선거 결과
기호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이정희 5,082 31% 1위 당선 당대표 선거 진출
장원섭 2,600 15.8% 2위 당선 당대표 선거 진출
김성진 2,083 % 3위 당선
정성희 1,812 % 4위 당선

여성명부 최고위원 선거 결과
기호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최은민 % 당선
이영순 % 당선
우위영 % 당선

농민부문 최고위원 선거 결과
기호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윤근순 % 당선

당대표 선거 결과
기호 이름 득표수 득표율 순위 결과 비고
이정희 15,968 89.4% - 당선 투표율 51.19%
장원섭 - - - - 사퇴


이상의 내용은 헤럴드 경제, 폴리뉴스, 세계일보, 뉴시스, 미디어오늘, 레디앙(1), 레디앙(2)에 근거함.

9. 역대 선거 결과

파일:17대 비례 민노당.jpg
제17대 총선 민노당 비례대표 선거포스터

9.1. 재보궐선거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2000년 6월 0 / 7 0 / 32 0 / 57[A]
2000년 10월 0 / 2 0 / 9 0 / 37[A]
2001년 4월 0 / 7 0 / 6 0 / 14[A]
2001년 10월 0 / 3
2002년 8월 0 / 13
2002년 12월 0 / 1 0 / 1 0 / 3 0 / 4[A]
2003년 4월 0 / 3 0 / 2 0 / 4 0 / 23[A]
2003년 10월 0 / 4 0 / 9 0 / 66[A]
2004년 6월 0 / 4 0 / 19 1 / 38 0 / 53[A]
2004년 10월 0 / 5 0 / 7 0 / 35[A]
2005년 4월 0 / 6 0 / 7 0 / 10 0 / 21[A]
2005년 10월 0 / 4
2006년 7월 0 / 4
2006년 10월 0 / 2 0 / 4 0 / 1 0 / 2
2007년 4월 0 / 3 0 / 6 0 / 6 0 / 38
2007년 12월 0 / 13 0 / 12 0 / 25
2008년 6월 0 / 9 1 / 29 0 / 14
2008년 10월 0 / 2 0 / 3 1 / 9
2009년 4월 0 / 5 0 / 1 1 / 3 1 / 5
2009년 10월 0 / 5
2010년 7월 0 / 5
2010년 10월 0 / 2 0 / 1 0 / 3
2011년 4월 1 / 3 0 / 1 1 / 6 1 / 5 1 / 23
2011년 10월 0 / 1 0 / 11 0 / 11 1 / 19

10. 여담

도메인 주소가 http://www.kdlp.org였다.[78] KLDP.org와 도메인 주소가 유사해 해당 사이트 이용자들이 실수로 민노당 홈페이지에 접속하게 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민노당 홈페이지 관리 담당자가 KLDP와 협의해서 잘못 접속하는 이용자들을 위해 메인 페이지에 배너를 다는 것을 검토한 적이 있었으나 실제로 배너가 달리지는 않았다.

2004년 제17대 국회가 출범한 뒤 이전까지 쓰던 원내총무가 아닌 ‘의원단 대표’ 라는 명칭을 썼다.[79]

2006년에는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김일성 생가인 만경대고향집을 방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기사 민노당 지도부가 만경대를 방문했던 2006년 10월 말은 북한이 1차 핵실험을 시행한지 한 달도 채 안됐던 시기였던지라 남북관계가 급속적으로 냉각되어 가던 시기였으며, 무엇보다 방북일정은 물론 방북설명에서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고, 조선중앙TV를 통해 민노당의 만경대 방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게 되면서 그 파장은 컸다. 파장이 커지자 민노당은 한나라당 박근혜 前 대표와 김형오 원내대표, 열린우리당 정동영 前 의장도 만경대를 방문했었다며 괜한 트집을 잡고 있다고 반박했다.

당명 변경이 잦은 한국 정치사에서 당명을 꽤나 오래 유지한 당인데, 2020년대 기준으로 보면 민주공화당, 한나라당, 국제녹색당 다음으로 오래 당명을 유지한 정당이다.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유명인들이 과거 민주노동당을 지지했거나 당원으로 가입했던 바 있는데, 대표적으로 박찬욱, 문소리, 봉준호, 류승완, 홍석천 등이 있다. 2006년에는 예술인 531명이 민주노동당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 이들은 후에 진보신당을 지지했다.

사교육계의 유명 강사인 정병호, 임정환 등도 한때 당원이었다. 정병호의 경우 당내 정파였던 다함께, 현 노동자연대 소속으로 당직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사실 초창기 사교육 시장의 주요 인사들[80] 중에서는 80~90년대 초반 운동권 출신이 매우 많은 편이다.

10.1. 마스코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캐치(민주노동당)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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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둘러보기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파일:1px 투명.svg제17대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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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창당 직후에 진행된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득표율 미달로 인해 해산되었다. 이후 다시 신규 창당 과정을 거쳐 2000년 5월 24일에 재창당되었고, 기존 민주노동당 정당 구성원이 다시 입당하여 개별 합류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이전의 민주노동당과 이후의 민주노동당은 사실상 같은 정당이지만, 해체 후 신규 창당한 정당이므로 정당법상 공식적으로는 별개의 정당이다.[1] [3] 이용휘 등.[4] PD파[5] 언론 등에서 "민노당"이라고 언급하지만 민주노동당 스스로는 약칭을 규정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과거 04년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에게 "'민노당'이란 표현을 쓰지 말아달라"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대개 정당 이름에 자주 붙는 이름인 "민주"를 생략하면 (민주공화당의 예처럼) "노동당"이 되건만 그렇게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6] 한국어 당명은 그냥 DLP로 표기하는 게 맞는 '민주노동당'이었지만, 홈페이지 주소부터 공식 행사에서까지 대부분의 경우 'Korean'을 앞에 붙여 KDLP로 표기했다.[A] 정당법상으로는 창당 직후에 치른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득표율 미달로 인해 해산되었다가 2000년 5월 24일에 재창당된 것으로 되어있다. 참고 이것 때문에 선거 이후 소송을 내기도 했었다. 이 규정은 2014년 초에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한편, 인천지방법원 2014. 6. 30. 선고 2011고합572에서는 민주노동당을 1.30.에 창당하여 5.24. 등록한 정당으로 보았다.[8] 민주노동당 강령 전문 중 - "민주노동당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편, 인류의 오랜 지혜와 다양한 진보적 사회운동의 성과를 수용함으로써 인류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해방 공동체를 구현할 것이다."[9] 다만 시사평론가 김수민은 당시 민주노동당의 정책실장이었던 이재영의 글을 토대로 이 구절이 국가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중도를 표방한 것이 아닌 양자가 여성, 생태, 직접민주주의 등의 문제를 등한시했던 것을 극복하고자 함이라고 분석했다.#[10] 민주노동당 10년 4월 통계 13.3%. 통합진보당은 창당 직후 10% 중후반대까지 찍었지만 이후 쭉 미끄러졌다. 정의당은 노회찬 의원의 사망 이후 10% 후반의 높은 지지율을 보이다가 2019년 이후 하락하였다.[11] 대단히 의미심장한 에피소드가 있다. 진보신당이 2012년 19대 총선에서 득표율 2%에 미달한 1%대 득표율을 받아 당시 정당법에 따라 해산되었을 때, 진보신당의 당직자들은 이미 사라진 민주노동당 당가를 부르며 슬픔을 위로했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진보신당에 잔류한 당직자들은 오히려 국민승리21로 거슬러가는 진보정당 운동에 몸을 바친 사람이 많았고, 민주노동당이 정파 패권 속에 변질되었다고 판단하여 진보신당 창당(일종의 재창당)에 앞장서 끝까지 잔류했던 경우가 많았다. 상대 정파의 당으로 전락한 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에 몸 담을 수 없었던 현실에도 불구, 민주노동당이라는 정당을 통해서 진보정치의 뜻을 실현시키려고 했던 추억과 애환이 섞인 에피소드라고 볼 수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 이후 정의당으로 합류하게 된다.[12] 이는 비정규직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 층을 의미한다.[13] 이때 국가보안법도 같이 개정되었다.[14] 전국연합 상임의장 이창복은 그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여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15] 출처 기사[16] 그래도 전체 득표수는 원외정당 중에서 가장 높은 1.2%를 기록했다. 이는 당시 원내정당이었던 희망의한국신당보다도 더 높은 수치였다.[17] 사회당(1998년)이나 녹색당(대한민국)이 정당등록 취소 이후 당명을 바꿔서 재등록 했던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갸우뚱하겠으나, 정당등록이 취소된 정당의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은 2002년 3월에 생겼다. 출처[18] 현재는 2%를 얻지 못한 정당을 등록 취소시키는 규정과 등록이 취소된 정당명을 재사용할 수 없게 하는 규정 모두 위헌 판정을 받고 사라졌다.[19] 당시 MBC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위 3명을 패러디한 토론을 내보냈는데, 이회창은 박명수가, 노무현은 배칠수가, 그리고 권영길은 김학도가 맡았다. 김학도의 성대모사는 권영길과 진짜 흡사해서 나중에 권영길이 당 홍보에 도움을 줬다고 직접 프로에 나오기도 했다.[20] 이 판결은 보수 진보 가리지 않고 탄원서를 써 주기도 했다. 당장 그 원조 강경 보수로 유명한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이 탄원에 참여했을 정도였다.[21] NL계열의 대중노선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전국연합이 명목상으로는 국민승리21 시절부터 진보정당운동을 지지하고는 있었으나, 실제로 민주노동당 초기부터 참여한 건 경기동부연합, 울산연합 정도였다.[22] 물론 낙관적 문제일 뿐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심지어 진보신당 창당 후에도, 정의당(진보정의당) 재창당 뒤에도 '촛불당원'과 기존 당원의 성향 차이는 두고두고 분란 요소였다.[23] 노동운동 국민파로 구분되는 인물로, 자주파 평등파와 모두 가까웠다.[24] 셋 중 조직이 가장 취약한 노회찬이 1차에서 24.6%를 득표하며 낙마했다. 권영길은 그렇다치고 심상정도 당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최대주주였던 금속연맹 사무처장 출신이었기에, 권영길의 과반을 가까스로 저지(49.6)%하고 심상정 후보(26.1%)와 비슷한 득표를 한 것은 상당한 성과였다. 다만 이 경선은 노회찬 의원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 경선이었다.[25] 실제로 영국 노동당이 이런 과정을 거쳐 분열된 영국 자유당을 대체하며 양당 구도의 한 축으로 입지를 굳혔다.[26] 민주노총의 기관지인 '노동과세계'에서 2월 3일 당대회 회의록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다만 분량이 길다보니 축약된 부분도 다소 있고 오탈자도 어느 정도 존재한다. [취재기록 전문공개]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27] 심상정은 2월 3일의 당대회를 이렇게 회상했다. "대회장을 가로질러 가면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최고위원을 지낸 이정미였다. 당대회 부의장으로서 대의원대회 진행을 앞두고 있었다. 한동안 먼발치로 보이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는데, 그는 무대 한쪽에서 울고 있었다. 그는 '자주파'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나는 그 울음의 의미를 이해했다. 예감했던 대로 민주노동당 임시 당대회는 끝내 당 혁신을 거부했다." 위 문장의 출처는 책 '당당한 아름다움'(심상정 지음, 도서출판 레디앙) 204p[28] 10분 57초부터 파릇파릇한 시절의 박용진이 나온다. 그 후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2024년 공천에서 탈락한 것을 보면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29] 강기갑은 학생운동 출신이 아니기에 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 시작된 NL-PD 분류에서 아예 벗어나 있는 인물이다. 정세 인식을 두고 보면 전농은 자주파에 속하기는 한다.[30] 당시 파랑색은 한나라당의 상징색이었다.[31] 전직 동구청장 출신으로 진보세력 독자후보를 천명하며 무소속으로 출마[32] 사회주의 강령은 진보신당, 사회당에도 없었다. "자본주의 극복"이라는 표현을 사용.[33] 대표적으로 2007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전진 그룹 내에는 심상정, 노회찬, 권영길 지지 세력이 모두 존재했다.[34] 대중적인 이미지와 달리 민주노동당 내 자주파 주류 세력은 자주파 내에서는 비주체사상파로 구분되는 혁신계열이였다.[35] 충북동지회 F-35 도입 반대 건이 이들과 강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 진보당 당원들 사이에서 거의 정설처럼 돌아다닌다. 이 정파는 진보당 내에서 과도한 김정은 개인숭배와 문재인, 이재명, 조국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로 인해 거의 모든 당원들에게 비난받았다.[36] 전국학생행진의 기원인 대장정 등지의 출신자가 많았다.[37] NL 세력이 과거 민혁당 시절에 지역 이름을 본떠 연합이라고 붙인걸 본떠 사실상 다함께가 NL 조직이라는 뜻으로 부른 멸칭이다. 왜 런던이냐면, 이 정파의 본부가 영국 런던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수장이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망명하며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민중민주당도 진보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파리연합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도 한다.[38] 소련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평가가 갈리지만 최소한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은 하는 암묵의 룰이 있는데, 다함께는 아예 레닌 사후의 소련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간주하고 20세기에 존재한 모든 사회주의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평가하며 어그로를 끌어 트로츠키주의 조직부터 스탈린주의 조직까지 모든 맑스주의 조직으로부터 비판받았다.[39] 'NL=종북'으로 퉁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NL계 인사들 중에서도 북한에 대한 시선은 한가지로 딱 잘라 설명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 북에 비판적인 인물들도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40] 김대중은 1980년대에 미국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한 뒤, 미국으로 망명을 갔고 이후 1985년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을 때에도 미국 저명인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덕분에 당선되고 나서도 강한 친미적 정책을 취했고, 정작 한총련은 여전히 이적단체로 내버려두는 등 선을 긋는 입장을 취했다.[41] 물론 당시 NL내에서는 소수파였지만, 성남이나 울산에선 영향력이 있었다.[42] 평소에 내부에서 대립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잘 뭉치는 자주파와는 달리 평등파는 잘 뭉쳐지지 않다보니 조직력이 약해서 득표에서 다수를 차지하고도 당직에서 대거 밀려났다는 후문이 있다.[43] 원래 광주전남연합인천연합과 연계가 있었지만 인천연합의 영향력이 점차 쇠퇴하게 되면서 경기동부연합과 연대한다.[44] 그나마 정확하게 분류된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는데 당시 중앙당 총무였던 모 씨와, 중앙당의 서버 엔지니어 겸 인터넷 온라인 투표 담당자였던 모 씨. 그나마 이 사람은 중도로 분류된 게 다행이었다. 만약 특정 정파로 분류되었다면 이 사람이 실무를 맡았던 당내 당직 및 공직선거의 공정성이 심각하게 의심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도 이 사람은 NL과 PD 어느 쪽에서도 편파적이라는 비난은 듣지 않았다.[45] 3회 지방선거 당시 사회당의 서울시장 후보 원용수가 토론회에서 처음 '종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6] 아이러니하게도 주요 정당 중 가장 먼저 당직자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곳은 1997년 노조가 만들어진 한나라당이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정당 중 가장 늦게 당직자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47] 이 논리면 공무원노조나 전교조도 인정하면 안된다.[48] 답을 한다면 있다. 당시 이런 의문들이 많았는지 아예 FAQ의 형태로 답변들이 만들어졌었는데, 노조 안의 노조의 예시로 든 것이 지하철노조상근자노조, 한국노총직원노조 등이었다.[49] 이 논리를 주장한 쪽은 NL계열이었다. 그런데 정작 '보수 세력에 빌미를 주는 사건'인 일심회 사건을 저지른 주범은 바로 NL계열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50]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한국 지부로, 현재에는 '노동자연대'라는 이름으로 명칭을 변경[51] NL의 세력이 큰 한국 운동권에서는 같은 좌파로 묶이는 경우가 많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사상적 근간을 두는 PD와 트로츠키주의에서 파생된 토니 클리프의 사상에 근간을 두는 IST는 사상적으로 크게 다르다. 또한 이 당시 '전진' 등 PD 정파와 다함께의 대립은 이념, 사상의 문제뿐 아니라 다함께 활동가들이 지역 조직을 장악하고자 곳곳에서 패악질을 부렸던 것에 큰 이유가 있다.[52] 중국 현대사의 국공합작만큼 어색한 합작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53] 당시 다함께의 리더였던 김인식과 김어진이 공식 석상에서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54] 중앙당이 이 때 체불되었지만, 지역 조직은 그 전부터 임금이 불규칙하게 지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임금이 나오는 날짜도 일정하지 않았고 액수도 일정하지 않았다. 상근자 노동조합은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도부의 반대로 해결이 되지 않았다.[55] 여기서 당시 민노당 당헌을 보도록 하자. '다섯째, 노동 기본권을 보장한다. 노동자의 권익과 노동조합 활동을 억압하는 악법들을 폐지하고 생산현장의 부당 노동 행위와 각종 억압을 없애고 자유로운 노동조합 활동과 단체 행동의 자유를 완전하게 보장한다'[56] 민주노동당 창당 1주년 기념음반에 처음 수록된 곡으로, 음반에는 '민주노동당 찬가'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57] 출처 http://nodong.org/statement/95900[58] 출처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241949[59]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10361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3[60] 출처 http://www.hani.co.kr/arti/legacy/legacy_general/L386914.html[61] 출처[62] 출처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195874.html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503[63] 민주노동당, 대표-김혜경, 사무총장-김창현, 민주노동당 정책위 의장 주대환 당선, 정책위 의장 결선투표 12일부터[64] 민주노동당 지도부 전원 사퇴[65] 김혜경 대표, "씩씩한 언니들의 정당으로"[66] 민노당 당직선거 당시에 민주노총이 지도부 선거를 치르던 관계로 후보 추천을 하지 못했다. 민주노총의 새로운 지도부에게 추천을 받아 8월 25일 노동 부문만 따로 선거를 치렀으나 투표율이 49.63%가 나왔다. 50%를 넘기지 못해 선출 실패.[67] 민노, 이용대 정책위의장, 민주노동당 대표경선 새달 6~10일 결선 투표[68] '심상정 비대위' 출범 무산…분당 전주곡[A]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A] [A] [A] [A] [A] [A] [A] [A] [78] 현재 독일어로 된 비트코인 관련 사이트로 바뀌었다.[79] 당시 한나라당열린우리당, 자유민주연합은 원내대표로 명칭을 바꿨다.[80] 대표적으로 한석원, 김찬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