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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 게오르기 말렌코프 | 제3대 | 니키타 흐루쇼프 | |
제4대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 제5대 | 유리 안드로포프 | |
제6대 | 콘스탄틴 체르넨코 | 제7대 | 미하일 고르바초프 | }}}}}}}}}}}} |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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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3대 서기장 | |||
소비에트 연방 제4·7대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Бре́жнев | Leonid Brezhnev | |||
본명 |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 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Leonid Ilyich Brezhnev | ||
출생 | 1906년 12월 19일 | ||
러시아 제국 예카테리노슬라프현 카멘스코예 (現 우크라이나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카미얀스케) | |||
사망 | 1982년 11월 10일 (향년 75세)[1]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주 오딘초보구 자레치예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주 오딘초보 지구 자레치예)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재임기간 | 제3대 서기장 | ||
1964년 10월 14일 ~ 1982년 11월 10일 | |||
제4대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 |||
1960년 5월 7일 ~ 1964년 7월 15일 | |||
제7대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 | |||
1977년 6월 16일 ~ 1982년 11월 10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아버지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브레즈네바[2] | |
형제자매 | 남동생 야코프,[3] 여동생 베라[4] | ||
배우자 | 빅토리야 페트로브나 브레즈네바[5] | ||
자녀 | 아들 유리 레오니도비치 브레즈네프 딸 갈리나 레오니도브나 브레즈네바 | ||
학력 | 드네프로제르진스크 금속 연구소[6] | ||
종교 | 국가 무신론[7] | ||
신장 | 176cm | ||
소속 정당 | [[소련 공산당|]] | ||
주요 서훈 | 소비에트 연방 영웅 (4회) 사회주의노력영웅 레닌훈장 (8회) 10월 혁명 훈장 (2회) 적기훈장 (2회) 적성훈장 | ||
복무 | 노농적군 | ||
1941년 ~ 1946년 | |||
소비에트 지상군 | |||
1946년 | |||
최종 계급 | 중장 (제2차 세계 대전) 원수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독소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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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정치인.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소비에트 연방 제4대 최고지도자를 지냈으며,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을 지냈다. 1964년에 전임자 니키타 흐루쇼프를 축출해낸 이래로 1982년 죽을 때까지 18년간 집권했다.[9]
전임자 흐루쇼프는 대내적으로는 급진적인 개혁, 대외적으로는 모험주의적인 대미 강경 노선을 펼친 반면, 브레즈네프는 체제 개혁은 보류했지만, 시끄러운 '열전'보다는 평화를 선호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는 전임자가 그랬듯이 미소 간의 핵 전력 격차를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핵 전력 격차 문제를 해결하고 소련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재임 기간 내내 군비 투자를 대폭 늘렸다.
그의 집권기에 국민 생활은 계속 개선되었다.[10] 흐루쇼프의 벼랑 끝 전술을 반대하고 데탕트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려 많은 노력을 한 결과, 흐루쇼프 시절보다 전쟁의 위협이 줄어드는 등,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다. 본인이 주도해 흐루쇼프를 축출했으면서도 흐루쇼프의 체제 완화 조치를 상당 부분 유지했기 때문에 일부 정치학자들은 브레즈네프 시기를 "흐루쇼프 없는 흐루쇼프 체제"라고 부른다.[11][12]
다만, 어두운 면도 있었다. 스탈린 사후부터 준비한 리베르만 - 코시긴 개혁이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부작용이 심각해 중단되었으며 60년대 초반 연간 5% 이상의 고성장을 거듭하던 소련 경제의 성장이 점차 낮아지고 있음에도 좋은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70년대 후반의 저성장(평균 2%)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는 1980년대 소련 경제 붕괴의 단초가 되었다. 이밖에도 소련 체제의 모순과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조짐을 방관하여 연방 해체의 싹을 키웠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국방 예산을 대폭 늘려 소련 경제에 큰 부담을 주고 군부의 비대화를 야기했다.[13]
그래도 러시아 내에서는 브레즈네프에 대한 평가가 꽤 높은 편이다. 스탈린 시대의 공포 정치도, 연방 해체 시기의 아비규환도 없이 비교적 평온한 시기였던 데다가 유가 급등으로 벌어들인 풍부한 오일 머니로 다양한 기호품과 사치품을 소련 인민들에게 제공하고, 생필품과 소비재의 공급도 이전 시기에 비해 늘어났기 때문이다.[14]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자세한 내용은 레오니트 브레즈네프/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관계
4.1. 미국 정상과의 관계
틈만나면 존 F. 케네디를 얕잡아보던 니키타 흐루쇼프와 달리 브레즈네프는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전까지 미국 정상과의 관계는 원만했다.- 린든 B. 존슨 - 서구와 계속 갈등을 빚던 니키타 흐루쇼프를 축출한 브레즈네프와 초기에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브레즈네프는 미국을 두고 '야만적인 침략자'라고 맹비난했고 양국 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 그럼에도 미소 양국간의 여러 가지 협력과 교류는 계속되었고 존슨은 직접 브레즈네프와 만나진 않았지만 알렉세이 코시긴 수상과 여러 번 회담을 하며 의견을 공유했다. #
- 리처드 닉슨 - 데탕트 시대를 연 주역으로 둘 사이의 관계는 화기애애했다. 사실 둘다 장발까지 해대는 불온한(?) 대학생들을 찍어 눌러야될 대상으로 보면서 직, 간접적으로 68운동을 종식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전략무기제한협정으로 양측의 군비를 통제한 데 이어서 여러 번의 정상회담을 통해 미소 양국간 경제-문화적 교류도 이전보다 향상되었다. 서비스 차원에서 브레즈네프를 직접 에어포스 원에 태우고 그랜드 캐니언을 구경시켜주기도 했다. 이러한 두 사람의 친분은 제4차 중동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고 세계 주요 여론은 드디어 냉전이 종식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 하지만 미국에서 워터게이트라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면서 데탕트 또한 닉슨과 같이 비판을 받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닉슨의 사임 몇 달 전부터는 비밀 외교의 서신이 점점 초현실적인 성격을 띠어갔다. 이는 고립된 닉슨이 폭풍우 몰아치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바다에서 브레즈네프와의 우정을 평온한 섬으로 여긴 것이었다. 이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브레즈네프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이용하여 정치적 목표를 이루려 하지 않았으며, 마지막까지 닉슨을 지지한 유일한 외국 지도자가 되었다. 서로 사인 잘 하고 있나 감시하는 개그를 선보이는 두 정상들
- 제럴드 포드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국내외 데탕트에 대한 지지가 사라지자 미국 지도부는 소련에게 모욕을 주며 미-소 무역법안을 스스로 폐기하게 만들며, 블라디보스토크 전략무기제한협정[15]의 조인도 거부하며, 데탕트에 비협조적으로 변했다. 그래도 워터게이트 사건의 훨씬 전부터 진행되던 1975년, 역사적인 헬싱키 협정에 브레즈네프가 간신히[16] 서명할 수는 있었고 아폴로-소유즈 테스트 프로젝트를 비롯한 우주 분야에서의 협력은 개시되었다.
- 지미 카터 - 양측과의 정상회담과 교류는 지속되고 있었으나 지미 카터는 소련을 불신하고 있었고 데탕트 체제는 점점 균열을 보이고 있었다.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이 결렬되더니 결국 1979년 12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벌여지면서 데탕트 체제는 붕괴되고 카터는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하고 곡물 금수 조치를 취하며 소련에 대한 압박 정책을 취했다. 카터는 재임 기간만 하더라도 공화당 인사들한테 유약한 지도자로 비난받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MX 미사일과 같은 적극적인 군비증강 프로젝트를 착실히 준비해 소련을 군사력으로 압도하려고 준비하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 로널드 레이건 - 브레즈네프 생애 말기에 레이건이 당선되었기에 큰 접점은 없었으나 레이건은 집권 초기 부터 대소련 강경주의를 선포했고 1981년,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치하 폴란드의 계엄령과 노조탄압을 돕는 소련에 대한 추가 경제제재를 취하며 악화 일로를 걸었다. 브레즈네프도 개인적으로 입만 열면 소련을 비난해대는 레이건을 혐오했고, 미국의 다음 대통령은 좀 더 친소적인 인물이 당선되기를 기다렸다. 레이건은 브레즈네프에게 추가적인 군비 통제 협정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응답하지 않았다.
4.2. 김일성과의 관계
북한과 단독 수교국이었던 특성상 여러 번 정상회담을 가지며 우호관계를 다져나갔지만, 이는 겉치레였고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소련 지도부는 김일성을 극단적으로 혐오했다. 기본적으로 북한은 제2세계가 아니라 제3세계국가로 행동했고, 소련이나 동유럽과 우호관계는 유지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제3세계권 [17]과 공조를 하면서 중소 양국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면서 양국으로부터 많은 것을 원조만 받았으며 중소 양국도 북한을 상대하는 것을 까다롭게 여겼다. 1970년대에 북한은 친중외교를 펼쳤고, 브레즈네프는 데탕트 체제를 통해 미국과의 긴장완화에 주력했는데 북한은 이에 아랑곳 없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EC-121 격추 사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등로 미국과 긴장을 고조시켰기 때문에 소련은 북한을 외교적 골치거리로 여겼다.[18] 다만 1970년대 말 지미 카터가 집권하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것을 검토하자, 북한측도 미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군사도발을 자제하여 1970년대 말부터는 데탕트를 추구하는 소련과의 관계가 좋아지기 시작한다.이에 맞춰 1970년대 말부터 중미관계가 좋아지면서, 다시 북한과 중국의 사이가 소원해졌고, 이를 틈타 브레즈네프의 말기에는 북한과 소련은 사이가 좋아진다. 이때 북한은 소련의 최신예기인 MiG-29를 도입 약속을 받아내며 1987년 결국 도입되어 한국 공군은 긴장하였다.
5. 여담
- 소련군 역사상 최고령 원수다. (69세 진급)
- 브레즈네프는 다른 공산당 고위층처럼 화려한 다차(러시아식 별장)를 여러 개 소유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유머로 평생 시골에서 살던 자기 어머니를 불러 다차를 구경시켜주자 어머니는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 좋구나, 레오니트.”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들이 오면 이건 다 어떻게 될까?”[19]
- 브레즈네프는 뜨거운 맨 투 맨, 마우스 투 마우스, '입술' 키스로도 유명하다.[20] 이 키스는 원래 전통적인 러시아의 인사법이다. 1960년대 러시아에서 영화나 사극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할리우드 영화인 닥터 지바고에서도 지바고(오마 샤리프)와 이복형 예프그라프(알렉 기네스)가 처음 상봉할 때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런 풍습이 공산권으로 들어가서 동지들끼리의 우애의 상징이 되었는데 정작 러시아에서는 이런 식의 인사와 동성애를 결부하지 않았다. 미국 같이 게이에 대한 터부가 강했고 남자들끼리의 육체적 접촉(손잡기, 포옹)이 금기시되는 나라에서는 굉장히 괴악하게 봤다고 한다.[21] 위 사진에서 연출된 뜨거운 키스는 1979년 동독 창건 30주년 기념으로 방독했을 때 에리히 호네커와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을 모사한 그림이 베를린 장벽의 잔존 구간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남겨져 있다. # 참고로 브레즈네프의 키스 장면이 공산주의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에서 한 것만 부각되어서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79년 오스트리아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과 만났을 때도 한 적이 있다.# 물론 브레즈네프만 한 것은 아니고 브레즈네프의 전임자인 스탈린, 흐루쇼프도[22] 키스를 했으며, 브레즈네프의 후임자들도 했는데, 고르바초프와 호네커의 키스도 꽤 유명하다.
- 메모광으로 자신의 정치활동부터 사적인 일까지 모두 3권 분량의 개인수첩에 기록해 두었다. 덕분에 학자들이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연구하기 쉬웠다고 한다. 단 브레즈네프는 배운 것이 별로 없어서 그가 쓴 글은 문장구조가 기이해서 알아보기가 어려우며 완벽한 문장은 거의 없고 매우 단편적인 단어들과 비문들만 가득하다. 가령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으로 쓴 첫 메모에는 1965-1929=36이라고 적혀 있는데, 역사학자들도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내는 데에 gg를 쳤다. 소련의 장군 겸 역사학자인 드미트리 볼코고노프(Dmitri Volkogonov 1928~1995)는 문법의 기초적인 이해도 없던 사람이라고 브레즈네프를 매우 혹평했다.[23] 그리고 생각보다 일기장에 별 내용이 없는데 그가 후계자로 내세운 수슬로프가 죽은 날 일기에도 별 다른 얘기가 없다.
- 훗날 그의 후임 서기장들 중 하나가 되는 고르바초프와는 사진을 통해 처음 대면하게 되는데, 청년 공산주의자 대표로 고르바초프가 유력하게 천거되었지만 “이 친구 청년치곤 머리숱이 너무 적구먼”하고 반려시킨 일화도 있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살 시도도 있었다. 미국 CIA에 의해 일어났다던가 하는 스토리는 아니고 어떤 반체제 성향의 시민에 의해 벌어진 사건이다. 범인인 빅토르 일리닌은 소련 각지를 여행하면서 소련 TV에서 보여주는 소련의 모습과 현실의 소련 간의 괴리감에 상당히 분노하던 시민이었는데 지하자원 판매대금으로 모든 인민들에게 추가적인 봉급을 주자는 자신의 제안을 담은 편지를 크렘린에 내보냈다가 아무런 답장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주장이 주목을 얻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암살 시도를 했던 것이었다. 이때 브레즈네프의 자동차는 항상 있던 대열이 아니라 후방에 있어서 운좋게도 브레즈네프는 살았지만 우주비행사 2명이 다치고 운전수 1명이 죽었다. 이 차에는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같은 '최초' 타이틀을 보유한 영웅들도 타고 있었지만 둘은 무사했다. 결국 브레즈네프 암살은 실패했고 빅토르 일리닌은 체포되었다. 빅토르 일리닌은 재판에서 과거 정신병 경력으로 인해 정신병으로 감형되어[24] 정신병원에 장기간 수감되었다. 그 이후 브레즈네프가 죽고 9년 뒤에야 풀려났고 이후로는 소규모 아파트 1채와 연금을 받았으며, 평범한 소시민으로 아직도 살고 있다. 또한 일리닌은 감금된 정신병원에서 충분히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고 말한다. 이 일이 알려지게 된 것은 냉전이 끝나고 나서였으며 냉전 도중에는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이 사건은 스탈린 이후 소련에서 거물급 인사를 향해 벌어진 유일무이한 암살(시도)사건으로 손꼽힌다.
-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답게 겉으로는 종교에 냉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심 정교회 신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설도 있다. 지미 카터 대통령과 핵무기 감축 건으로 회담하던 중 카터가 브레즈네프에게 발언을 요청하였다. 문제는 브레즈네프는 원고 없이는 발언하지 않는데, 브레즈네프가 그날 준비한 원고는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축사에 대한 화답 뿐이었다. 이에 브레즈네프는 카터의 어깨 위에 손을 얹더니 "만약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신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거요!"라고 했다.[25] 다들 가만히 있자 자신도 당황했고, 그로미코가 웃기려는 듯이 "예, 저 위에 있는 신이 우리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네요"라는 말을 꺼냈다. 물론 단순한 관용구였을 수도 있으나 평생 정교회 신앙을 유지했던 브레즈네프가 신실한 개신교 신자인 카터를 설득하기 위한 말이었을수도 있다. 브레즈네프의 주치의의 증언에 의하면 유년기에 정교회를 믿는 가정에서 자란 브레즈네프는 평생 정교회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며 1982년 건강이 악화되자 정교회에 의지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당시 모스크바 총대주교 키릴과 친분도 있었고 이에 따라 정교회에 대한 탄압 정책을 완화하기도 하였다.[26]
-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체격이 정말 엄청나게 크다.
-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자동차광이었다. 서독 방문시 빌리 브란트에게 BMW 자동차를 선물받은 이후 자동차에 맛이 들렸는지 서방제 고급 승용차를 특히 좋아해서 메르세데스-벤츠, 닛산 자동차를 구매하기도 했다.[27] 게다가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리처드 닉슨과의 정상회담 당시 링컨 컨티넨탈을 선물받고선 매우 흡족해하더니 닉슨을 태운 채로 다짜고짜 독단적으로 주행을 해버리는 기행을 벌여 미소 양국의 보좌관들이 심히 당혹스러워하기도 했다. 그 덕에 닉슨은 30분이나 핵가방에서 멀리 떨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여졌다.[28] 참고로 브레즈네프의 이 돌발적 행동은 단순히 그가 차에 환장해서가 아니라, 브레즈네프의 약물 중독 때문이기도 했다. 닉슨을 만나기 직전에 브레즈네프는 약물을 복용한 상태였는데 이 때문에 뇌에서 아드레날린 분비가 촉구되어 돌발적으로 마구 밟아버린 것이다.
- 자동차 외에도 양복을 좋아하여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주석으로 취임한 뒤에는 서유럽의 나라들을 순방할 때부터 고급 양복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져 권력을 잡고 나서는 고급 양복과 서방의 자동차 수집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만 보면 브레즈네프가 개인의 허영에만 몰두한 것 같긴 하지만, 그의 시대에 소련은 피아트와 합작해 새로운 자동차 기종을 개발하고 자가용 보급을 늘렸으며 가전 제품의 개발과 보급, 육류와 유제품 공급에도 신경 썼다. 또한 집권 초기의 브레즈네프는 수 년 동안 코시긴 같은 거물 정치인과 테크노크라트들을 서방 각국에 파견해 정부나 기업들과 의류, 섬유 산업 기술 이전, 기계 구입 계약을 체결했으며 서방 패션쇼에 방문하여 최신 유행하는 의복들에 대한 정보와 서방의 의류 유행을 파악해 소련의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제공했다. 소련 수뇌부들의 패션 감각이 보수적인 편이라 의상 제작에 있어 규제나 검열을 많이 적용해 창의성이 넘치는 소련 패션 디자이너들의 발목을 많이 잡고 소련 인민들이 멋지고 개성적인 의복에 갖는 욕구를 잘 해결해주지 못한 문제가 있지만, 나름대로 신경은 많이 썼던 것이으며 그래서 고급 양복과 자동차에 대한 브레즈네프의 취향을 이유로 일신의 영달만 추구한 독재자들과 비교하며 그를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다.
- 여자를 상당히 밝혔는데, 외국 순방 때 아내 빅토리야를 데리고 가지 않는 이유도 마누라 대신에 애인들을 거느리고 나가고 싶어서였다. 캠프 데이비드 방문 때도 전용기 승무원을 애인으로 대동하고 다니면서 심지어 닉슨 대통령에게 수차례 소개도 시켜주었다. 통역관에게 아내를 대동하고 외국에 가는 것은 으리으리한 성에 석탄을 싣고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적도 있다. 나중에 자신이 좋아했던 브란트가 엽색 스캔들로 사임하게 되자 이를 보고받은 브레즈네프는 분기탱천했는데, 사내가 계집질하는 것은 당연한데 겨우 그딴걸로 시비를 걸어서 몰아내는게 어딨냐는 이유였다. 그리고 브란트의 엽색행각이 사진에 찍혔다는 보고에는 만약 사내답게 사진이 찍혔으면 남성성을 증명해준 파파라치에게 돈을 후하게 쳐줘야 하면서 자신이라면 결코 그딴 일로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이렇게 여자를 밝히는 브레즈네프의 성격은 의외로 서방 지도자들에게 그가 엄숙한 공산주의 정치가가 아니라 인간적인 지도자로 다가오게 해서 빌리 브란트나 조르주 퐁피두와 꽤 죽이 잘 맞았고, 닉슨은 브레즈네프의 애인 승무원에게 서기장 동무 좀 잘 모시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1973년에 그에게 배치된 개인 간호사 니나 알렉산드로브나 코로뱌코바는 브레즈네프에게 의학적 봉사 뿐만 아니라 이도 닦아주고 맛사지도 해주고 말동무도 해주고, 무엇보다 브레즈네프가 원할 때마다 각종 약물을 공급하면서 브레즈네프 말기에 막강한 비선실세로 자리잡았는데, 1975년에 새로 임명된 브레즈네프의 주치의 미하일 코사료프는 코로뱌코바가 가진 권력을 보고 경악할 정도였다. 참고로 코로뱌코바는 유부녀로, 브레즈네프는 자신이 총애하는 간호사를 위해 그녀의 남편을 KGB 간부로 고속승진시켜주었다.
- 손자 안드레이 브레즈네프는 크림 반도에서 살고 있었는데 소련 붕괴 이후로 여러 정치활동을 했지만 죄다 군소정당이라 그리 큰 이름을 남기지는 못했으며 2018년 57살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 개그물로 패러디된 모습이며 배우의 외모도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 이 사람도 인간 관악기를 피하지 못했다.
어느 날 브레즈네프는 크렘린의 주치의를 찾아가서 수술을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 내용이 범상치 않았다.
"의사 동무, 오늘은 가슴 확대 수술을 해주시오."
주치의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브레즈네프 동지,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전환 수술이라도 바라시는 것인가요?"
"새 훈장이 나왔는데 훈장을 달 자리가 없어서 그렇소!"
"의사 동무, 오늘은 가슴 확대 수술을 해주시오."
주치의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브레즈네프 동지,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전환 수술이라도 바라시는 것인가요?"
"새 훈장이 나왔는데 훈장을 달 자리가 없어서 그렇소!"
"제기랄! 저 브레즈네프 낯짝 좀 그만 보고 싶군. 악어한테나 잡아먹혀라!"
"이봐 라비노비치[29], 악어한테 불쌍한 소리 하지 말라고. 브레즈네프를 잡아먹으면 2주 동안 똥으로 훈장을 싸지 않겠나?"
"이봐 라비노비치[29], 악어한테 불쌍한 소리 하지 말라고. 브레즈네프를 잡아먹으면 2주 동안 똥으로 훈장을 싸지 않겠나?"
1969년 1월, 모스크바의 크렘린 성벽 인근에서 브레즈네프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 빅토르 일리닌은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30]
"그나저나 당신이 군인이였다니, 다행히 암살에 실패한 게 더 신기할 따름이군."
"내가 권총을 빼들자마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덤벼들었소."
"과연 인민들이 우리 지도자의 생명을 구했구먼!"
"그게 아니고, 모두 자기가 쏘겠다며 권총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실패한 거란 말이오..."
"그나저나 당신이 군인이였다니, 다행히 암살에 실패한 게 더 신기할 따름이군."
"내가 권총을 빼들자마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덤벼들었소."
"과연 인민들이 우리 지도자의 생명을 구했구먼!"
"그게 아니고, 모두 자기가 쏘겠다며 권총을 달라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실패한 거란 말이오..."
- 더 자세한 내용은 공산주의 유머/소련/정치와 행정 참조. 이렇듯 브레즈네프 재임 후기 이후로는 침체되는 경제와 80년대 소련을 괴롭힌 아프간전의 단초를 마련했다는 점으로 인해서 소련 대중들에 있어서 노쇠하고 무능한 지도자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 오늘날 러시아 등지에서는 소련 해체 이후 혼란기로 인해 브레즈네프를 그리워하는 여론도 있지만,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1960년대와 1970년대를 보낸 40대 이상 중장년 세대들에게 해당된다. 현재 러시아의 2,30대들은 최소한 브레즈네프 시대로부터 시간이 지난 1980년대 중후반이나 소련 붕괴 (1991년) 이후 태어난 세대가 대다수이기 때문에, 청년 세대 입장에서 브레즈네프는 역사 시간 때 배우거나 과거 시대의 인물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 흐루쇼프 집권 시절 흐루쇼프는 1980년이 되면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로 돌입한다고 호언장담을 했었지만 1970년대 중반에 가면 소련 고위층이나 인민들이나 이 약속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980년에 공산주의는 오지 않지만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은 온다고 자조적인 조롱을 했다고 한다.
- 눈썹이 두껍기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송승헌도 부럽지 않다는 개드립도 있었다.
- 아들 관계로는 유리 브레즈네프가 있는데 공금 횡령 문제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었다.
5.1. 자동차 수집
미국을 방문한 브레즈네프에게 청색 링컨 컨티넨탈을 선물했다. 그는 자동차 수집가답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바로 나를 조수석에 태우려 하자 내 경호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스크바의 한 내리막길을 브레이크도 없이 달렸다. 속도를 줄여달라는 내 요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리막길 끝부분에선 급브레이크로 커브를 돌더니 차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도 났다. 브레즈네프가 좋은 차라고 칭찬하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운전 실력이 좋다고 맞받아쳤다.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
상당히 많은 자동차를 보유했다. 고위 정치인 시절에도 기사 없이 본인이 운전하는 걸 즐겼다. 과속과 난폭운전으로 동승한 리처드 닉슨을 포함한 외국 정치인들까지 목숨을 위태롭게 한 적도 있다.
- 쉐보레 벨 에어 (1955년식): 니키타 흐루쇼프가 선물했다. 이후 브레즈네프는 딸 갈리나에게 줬다.
- 오펠 카피텐 L (1960년식): 갈리나의 남편이 선물했다.
- 크라이슬러 300 논 레터 시리즈 (1966년식): 북오세티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살던 예졔프 무하르베크 이스마일로비치가 막심 고리키 중앙영화스튜디오에서 구입 후 선물했다.
-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 (1968년식):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가 선물했다.
- 메르세데스-벤츠 600 풀만 리무진 (1969년식): 빌리 브란트가 선물했다. 역사상 단 2대만 존재했던 6도어형을 받았다.[31]
- 메르세데스-벤츠 500 SL (19??년식): 독일 여행 당시 선물받았다.
- 캐딜락 플리트우드 (1971년식): 리처드 닉슨이 선물했다.
- 캐딜락 엘도라도 (1972년식): 리처드 닉슨에게 요청한 지 3일 만에 제작돼 미국 공군 수송기로 인도받았다.
- 링컨 컨티넨탈 (1973년식): 리처드 닉슨에게 요청 후 구입했다. 브레즈네프의 경호원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던 차량이었다고 한다.
- 닛산 프레지던트 (1973년식): 2번째로 생산된 차량을 선물받았다. 리처드 닉슨과 헨리 키신저를 태워주기도 했다.
- 롤스로이스 실버 섀도우 (1968년식): 미국의 사업가 아먼드 해머[32]가 선물했다.
- 롤스로이스 실버 섀도우 (1974년식):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선물했는데, 타보기도 전에 운송 도중 교통사고로 파괴됐다. 일부만 복원 후 라트비아의 리가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됐다.
- 롤스로이스 실버 레이스 II (1979년식): 사냥을 떠날 때 자주 탔다고 한다.
- 시트로엥 SM (1971년식): 조르주 퐁피두가 선물했는데, 시끄럽고 비좁았다고 불평했다.[33]
- GAZ-13 (1965년식)
- GAZ-14 (1976년식): 70번째 생일 선물로 받았다. 이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폐차됐다.
- GAZ-3102 (1982년식): 대조국전쟁 승전 기념으로 선물받았다. 이것이 브레즈네프가 받은 최후의 자동차 선물이다.
- GAZ-24-95 (1974년식): 사냥을 떠날 때 자주 탔다고 한다. 이후 모스크바의 올드 카 박물관에 전시됐다.
- ZiL-115 (19??년식):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폐차됐다. 좌석만 모스크바의 로마코프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됐다.
- ZiL-4105 (19??년식)
이와 같은 자동차 수집은 정치인으로서나 공산주의자로서나 치명적인 약점으로 될 수 있었지만, 과거 소련 지도자들의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와는 대비되었다. 그 결과 이런 브레즈네프의 태도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 친밀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어서 데탕트 외교와는 잘 맞물려 돌아갔다.
일부 차량은 본인이 아닌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유였다. 이외에도 재규어, 포르쉐 차량을 수집했다고 한다.
6. 대중매체에서
1970년대 말 1980년대 초기 미국의 반공극에서 소련의 높으신 분 내지는 최종 보스격으로 자주 출연했다. 아예 브레즈네프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경우보다는 주로 브레즈네프 비슷한 높으신 분이 악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 1980년대 미국에서 리처드 닉슨 시대를 다룬 인기 정치 드라마에 나온 브레즈네프는 의외로 그의 이미지를 잘 구현했다고 한다. 느글느글하게 닉슨 행정부를 조종하려고 하는 암흑보스의 이미지가 잘 나왔다는 평.- 그때 그 사람들 - 김재규 역을 맡은 백윤식이 박정희의 죽음을 감추자는 이유로 "쏘오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죽었을 때 일주일이나 비밀로 감추었어요."를 서두로 박정희의 죽음을 보안에 부치자고 주장하는데 오류다.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아직 살아있었고 크렘린은 브레즈네프의 사망을 사망 하루 만인 1982년 11월 11일에 발표했다. 그런데 전두환 회고록 초판에도 이 내용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있는 것을 봐서는 당시 브레즈네프 얘기가 어떻게서든 나오긴 나왔던 모양.
- 닉슨 -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로, 소련 국가를 배경 음악으로 닉슨과 회담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오랜 친구 마냥 마오쩌둥을 미치광이에 비유하는 등 뒷담화를 하면서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다가, 닉슨의 보좌관이 워터게이트 청문회와 관련한 급보을 가져오면서 이야기가 중단된다. 닉슨과 보좌관이 창가쪽으로 물러나 대책을 숙의하는 동안 브레즈네프도 자신의 보좌관으로부터 같은 내용의 보고를 들으면서 "한 때는 세계를 호령하던 사람이 안됐어" 라고 말한다.
- 메탈기어 솔리드 3 - 볼긴 대령과 GRU는 브레즈네프 파벌로 등장한다.
- 브레즈네프: 2005년 - 러시아 채널1에서 방영한 4부작 TV영화다. 말년의 브레즈네프가 병마로 시름하면서 젊은시절부터 말년에 이르는 기간을 회고하면서 그 내용대로 전개되는 방식의 시대극으로 세르게이 사쿠로프가 브레즈네프를 연기했는데 연기력이 우수한 것은 물론이고 싱크로율이 매우 좋은 것이 특징. 그러나 브레즈네프 유족, 전직 소련 공산당 정치인들은 브레즈네프는 그렇게까지 무기력하지 않았으며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먼 스토리를 짰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 세기의 매치에서 바비 피셔와 보리스 스파스키의 매치 중에 스파스키가 승점을 따냈단 보고를 받고 기뻐하면서 빈티지 와인을 땄다고. 이 소식을 소련 관계자들이 스파스키에게 알려주면서 그에게 꼭 이기라고 압박한다.
- 스탈린이 죽었다! - 제럴드 레프코프스키가 배역을 맡았다. 베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주코프가 신호를 주자 회의실에서 스위치를 설치하고 화장실에서 스위치를 동작시키면 불이 들어오는 전구를 설치한다. 이후 주코프와 함께 행동을 한다. 이후 자막상으로 흐루쇼프가 브레즈네프에게 실각당했다는 자막이 뜨고 뒤에서 흐루쇼프의 뒤를 내려다 본다.
- 스파이 하드 - 레슬리 닐슨 주연의 패러디 영화로, 여기에 나오는 미친 장군 레슬리 렝코가 완벽하게 브레즈네프의 이미지를 채용했다. 그의 이미지를 채용한 렝코 장군은 21세기인 지금 나왔다면 유족의 항의를 받을 정도의 캐릭터이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 - 알렉산더 로마노프의 모티브다.
-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콜드 워 - 인트로와 컷신에서 자주 모습을 보인다. 콜옵 시리즈 통합 세계관에선 여러모로 마음 고생이 심할 것으로 보이는데, 현실 역사에서도 본인이 겨우 밀어낸 소련 매파들이 더 위험한 놈들로 대체된 것은 물론이고, 그 놈들이 서방에 대한 증오를 키워주겠다고 1세계 요원으로 위장해서 자국인 소련에 핵을 터뜨리는 바람에 골이 아프다 못해 깨지게 생겼다. 본작부터 좀비 모드가 정사에 속하게 되면서[34], 자국 내의 좀비 사태까지 수습해야 함은 덤이다.
- 토이 스토리 3 - 랏소 베어: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의 알렉산더 로마노프와 함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생각되며 외모나 분위기 등도 상당히 흡사한 편이다. 성향은 스탈린에 가깝지만 말이다.[35]
- Command: Modern Air / Naval Operations - 실시간 밀리터리 워게임이며, 1975년에 3차 세계 대전이 벌여진 가상 역사를 다룬 스탠드얼론 확장팩 Command: Northern Inferno에서 당연히 최종 보스 격 인물로 등장한다. 나토 해군과의 해상 분쟁을 틈을 타 노르웨이에 대한 침공을 감행하고 아이슬란드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전쟁 후반기에 나토군의 반격으로 노르웨이 점령 지역과 아이슬란드를 상실하고 소련 해군도 박살이 나[36] 수세에 몰리자 핵전쟁 대비 태세를 갖추며 미국을 위협한다. 그러던 와중에 호텔급 탄도미사일 잠수함이 우발적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해 뉴욕과 보스턴을 박살내고 당황한 브레즈네프는 급히 에어 포스 원에 탑승한 미국 대통령에게 핫라인으로 전화를 걸어 자기는 핵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해명한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미국과 핵전쟁이 벌여졌기에 지하벙커로 피신했을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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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인은 급성 심장 발작.[2] 혼전성은 '마잘로바(Мазалова)'.[3] 1912–1993.[4] 1910–1997.[5] 혼전성은 '데니소바(Денисова)'.[6] 지금의 드니프로 주립기술대학교.[7] 아니라는 설도 있다. 여담 항목 참고.[8] 1978년 본인에게 셀프 수여했으나 사후 1989년에 박탈됐다.[9]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겉으로는 장기집권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온화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정치국의 집단지도체제를 본의아니게 이끌었다.[10] 196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는 소련의 전성기로 기억된다.[11] 냉전 시기에는 그가 흐루쇼프의 여러 체제 완화 조치를 스탈린 시대로 되돌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연방 해체 이후에 기밀 문서가 대거 공개된 뒤부터 브레즈네프 체제에서도 흐루쇼프의 개혁 조치들이 그다지 변화하지 않고 지속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당시 지도부들은 스탈린 치하에서 동료들이 숙청되어 감옥에 보내지거나 처형당하는 살얼음판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히 그 시절로 돌려놓는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불어 그 숙청으로 인해 붉은 군대가 엉망이 되면서 독소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12] 또한 미국은 1970년대 초,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던 중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고려로 함구한 반면, 소련에 대해서는 비난을 가했다. 이 때문에 브레즈네프 시절의 인권 탄압이 흐루쇼프 때보다 더 강해진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으나,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13] 안 그래도 정치국은 쿠바 미사일 위기의 트라우마에서 못 벗어났는데, 서방에 유화적으로 보였던 브레즈네프가 군비를 감축시킬까봐 군부는 막대한 군비 증강을 요구했다.[14] 러시아인들 입장에서 체르노빌 사건은 소련 해체 이후의 혼란상에 비하면 그다지 큰 것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당장에 레드 마피아가 90년대를 기점으로 급성장한 이유가, 사회적 혼란과 국가의 통제력 상실, 급격한 체제 혼란 등의 문제가 야기한 경제 붕괴, 다양한 경제 범죄, 국가 재산 횡령 등으로 큰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15] 이 협정에서 브레즈네프는 2번이나 쓰러졌다. 첫 번째 쓰러졌을 때 주치의들은 회담을 연기할 것을 권고했지만 강행하기로 했으며, 치열하고 힘든 협정을 마치자 두 번째로 쓰러졌다. 이로 인해 브레즈네프는 몇 주 동안 회복을 못했으며 건강도 크게 악화되었다. 그나마 이후 다시 일어나 업무에 복귀하긴 했지만 1975년 이후에 촬영된 사진들을 보면 이전에 비해 확실히 나이가 들고 건강도 나빠진 것을 알 수 있다.[16] 건강이 크게 악화돼서 거의 혼수상태로 최종 의정서에 서명했다.[17] 대표적으로 이집트가 있다. 이집트는 1980년대이래 친미외교를 펴지만 김일성 생존 당시에는 제4차 중동전쟁에서 원조해준 북한과의 의리를 지키고자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김일성 생전에는 한국과 수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었고, 실제로 김일성이 사망한 이듬해인 1995년에야 대한민국과 수교했다. (그 이전까지는 영사급 외교관계를 유지했다.)[18] 이 때 미국과 외교관계가 악화되었던 남한의 박정희는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검토했고 소련 측도 이를 긍정적으로 화답한 적이 있었다. 미국만 믿을 수 없었던 당시 유신 정부와 북한을 신뢰할 수 없게 된 소련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관에 부딪히며 지연되었고 결국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으로 소련과 한국의 관계는 다시 냉각되어서 무산되었다.[19] 해당 유머는 브레즈네프 버전 이외에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이오시프 스탈린 버전도 있다.[20] 우측의 인물은 에리히 호네커[21] 농구선수 찰스 바클리가 당했던 뽀뽀처럼 미국에도 존재는 한다. 다만 구세대의 주책맞은 행동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뿐이다.[22] 특히 흐루쇼프는 마오쩌둥을 만나서도 키스했는데 중국엔 그런 문화가 없었으므로 마오쩌둥은 대단히 불쾌해했다.[23] 볼코고노프는 보리스 옐친의 보좌진을 하던 사람으로, 그가 펴낸 소련 역사서는 옐친 측의 시각이 담긴 역사관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다만 볼코고노프도 어느날 갑자기 반공주의자로 돌변한 것은 아니고 반스탈린주의자에서 반레닌주의자로 변해 소련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단계적 전향을 거쳤다. 어쨌든 러시아 혁명과 소련 수립 자체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품고 소련에 대해 매우 신랄하게 혹평한 사람이긴 하지만, 스탈린이 독소전쟁 승리에 산업화 등을 통해 크게 기여했으며 경험을 통해 전쟁 후반에 어느 정도 전략적 식견을 가지고 도움을 주었다고 인정하는 등 소련 체제에 대한 부분적인 고평가를 남겼기 때문에 정말로 소련을 근본적으로 증오하던 사람들에겐 어줍잖은 회색분자라고 욕을 먹었다. 일단 소련 기밀문서고를 바탕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많이 알린 것 자체는 학계적으로 성과라고 평가된다.[24] 사실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도 정신병으로 인한 감형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 시절 폴란드의 악명 높은 연쇄살인마 루치안 스타니아크(Lucian Staniak)의 경우, 정신병자로 분류되어 사형대에 오르는 대신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다만 정신이 온전한 시민이 브레즈네프를 쐈다면 체제에 대한 불만이 무르익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므로 의도적으로 정신병자 판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25] 카터 대통령의 구순 기념 회고록에 나오는 내용이다.[26]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무신론자인 척을 하고 몰래 신앙심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덕에 소련 해체후 정교회가 다시 활성화되는데 도움이 되었다.[27] 다른 사회주의 지도자들인 김일성, 카다르, 차우셰스쿠, 호네커도 자동차광으로 수십대의 서방제 자동차를 보유했다고 한다.[28] 30분이면 소련의 ICBM과 SLBM이 미본토에 도달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만한 시간동안 미국의 국가원수가 보복 핵공격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태에 놓였던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다행히도 우발적 에피소드로 끝났다.[29] 랍비(rabbi)를 러시아 이름처럼 바꾼 이름인데, '이반 라비노비치' 등의 이름으로 러시아의 우화 및 농담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 유대인을 상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30] 실제 있었던 일이며, 범인의 이름도 실제로 빅토르 일리닌으로, 군인 출신이었던 것 또한 동일하다. 다만, 후술하는 심문 내용은 창작이다.[31] 나머지 1대는 일본에 판매됐다.[32] 배우 아미 해머의 증조부.[33] 이 차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네덜란드에 사는 한 수집가에게 재판매되었다.[34] 그 이전까지의 좀비 모드는 캠페인, 멀티와는 별개의 세계관이거나 평행 세계였다.[35] 브레즈네프가 18년 간 장기집권했고 소련의 전성기를 이끈 지도자이기 때문에 과격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가 있어서 그렇지 브레즈네프 본인은 매우 신사적이고 신중한 스타일이였고 정치적인 탄압이나 과도한 대립정책도 지양하는 스타일이였다. 사실 랏소 베어의 성격 자체는 브레즈네프 보다는 전임자인 니키타 흐루쇼프에 가깝다.[36] 미국도 항모전단들을 손실하는 등 피해가 컸지만 소련 해군은 함대가 궤멸된 수준의 피해를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