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레몽 아롱 Raymond Aron | |
본명 | 레몽 클로드 페르디낭 아롱 Raymond Claude Ferdinand Aron |
출생 | 1905년 3월 14일 |
프랑스 파리 6구 | |
사망 | 1983년 10월 17일 (향년 78세) |
프랑스 파리 4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학자, 저널리스트 |
분야 | 사회학, 정치학 |
성향 | 프랑스식 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
학력 |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대학교 (Dr ès 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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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수하는 아롱과 사르트르(1979). 둘은 서로의 사상을 비판하는 관계였다 |
프랑스의 사회학자[1], 정치학자, 저널리스트.
장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지적 적수(intellectual opponent)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지식인의 아편(The Opium of the Intellectuals, L'Opium des intellectuels,1955)", "사회학적 사고의 단계들"[2]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레이몽 아롱과 레몽 아롱이 혼용되는 상황이지만 외래어 표기법을 준수한 표기는 레몽 아롱이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좌파의 대표는 사르트르, 중도우파의 대표는 아롱을 들 수 있다.[3] 두 사람은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입학 동기이자 친하게 지낸 교우였기도 하다. 교원 자격 고사도 아롱이 수석 졸업하였으며, 사르트르는 그해 시험에 떨어졌으나 다음 해에 수석 졸업하였다. 사르트르는 주로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에서, 아롱은 주로 우파 일간지 르 피가로에서 자신의 논설을 폈다.
2. 생애
레몽 아롱은 장폴 사르트르와 같이 1905년에 태어났다. 그리고 사르트르와 동일하게[4] 1924년에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두 사람 다 철학을 선택했다. 1930년대에는 두 사람 다 독일에 머무르면서 철학을 연구했다.[5]1939년부터 그들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사르트르가 프랑스 파리에 머무를 때, 아롱은 샤를 드골 장군을 따라 영국 런던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6] 런던에서 아롱은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라는 잡지의 편집장(주필)이 되었다. 1945년, 사르트르와 아롱은 ‘현대(Les Temps modernes)’라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둘은 곧 결별한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마르크스주의가 압도하는 시기였고, 사르트르 또한 이에 열광하여 광신적인 골수 극좌파가 되지만 아롱은 이에 동화되지 않고 주변인으로 남아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였다. 특히 1947년에는 일간지인 ‘르 피가로'[7]의 논설위원이 되어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참여하였다. 아롱은 카를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대한 연구 후 펴낸 논문 중의 하나가 ‘역사철학 서론(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histoire)’ (1938)이다. 정통한 논객으로서 그는 소련을 철저하게 비판하였고 1948년에는 '대분열'(Le Grand schisme)이라는 책에서 그는 전 세계가 미국의 자본진영과 소련의 사회진영으로 크게 둘로 나뉘게 되면서 소위 냉전이 도래하자 이 냉전의 쟁점들에 대해 큰 통찰력 있는 해석을 보였고 스탈린 치하 소련의 모순된 모습을 서술하였다.
아롱은 1955년 ‘지식인의 아편’(L'Opium des Intellectuels)이라는 저작에서 도출해낸 분석을 통해 공산주의를 ‘세속화된 종교(religion séculière)’로 정의하였다. 또한 공산주의는 지식인들 중에서도 자격지심(mauvaise conscience)이 있는 지식인을 잘 ‘유혹(séduction)’한다고 하였다.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책의 제목은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La religion est l'opium du peuple.)’라는 문구를 대놓고 변형시켜 인용한 것이다. 전후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심한 비판을 가하는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저지른 억압,학살,비관용에 대해서는 방어에 급급하다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아롱은 ‘증거들(Preuves)’이라는 잡지에 특히 정성을 쏟았는데 이 잡지는 미국에 의해 운영되는 ‘문화적 자유를 위한 회의(le Congrès pour la liberté de la culture)[8](1950)’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다. 이 ‘증거들’이라는 잡지는 당대의 모든 전체주의(totalitarisme)[9]에 반대하면서 리버럴한 사상의 부흥을 위한 플랫폼을 자처하였다. 이 잡지의 이론적 분석들은 동유럽 현장취재 기사들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당시 소련 영향권 하의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국가들의 실제 상황들에 대한 ‘증거들’을 취재하여 보이면서 풀어나가는 관점을 견지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 잡지 '증거들(Preuves)'는 공산주의를 정면에서 반대해오던 기조를 벗어나 당시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프랑스 내에서 대두되기 시작하던 소비사회(la société de consommation)로의 변화에 대한 이슈를 평하는, 좀 더 이론적인 기사를 쓰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55년에 소르본 대학 교수로 임명(논란이 없진 않았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좌파들에 의해 악마처럼 묘사되는 바람에 이 때 이후부터 60년대 말까지 아롱의 지지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프랑스 최고권위의 교육기관이자 연구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Collège de France)의 교수로 임명되면서 그의 메시지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마르크스주의가 파열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새로운 젊은 세대의 지식인들에 의해 아롱의 분석들이 높이 재평가받게 되었다. 사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주류 프랑스 지식인 사회는 오랫동안 자유주의 전통에 대해 혐오해왔다. 자유주의는 봉건귀족 및 전제왕정에 대항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사상적 무기가 되어 근대 이후 서구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잡았는데 특히 그중에서도 경제적 자유주의(자본주의의 바탕이 되는 이념)에 대항하여 등장한 이념인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전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주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탈린 소련 등 공산주의 정권들의 정의롭지 못한 면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소위 "반전체주의[10]운동(Anti-Totalitarian Movement)"이 일어난 뒤부터 이러한 분위기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인생 말년에 이르러 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아롱의 말년의 이러한 대접 변화는 그의 사상적 파워에서 온 면도 있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더 이상 젊은 신진 지식인들을 사로잡지 못하게 된 면이 더 큰 원인이라 하겠다. 프랑스의 지식인층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게 된 변화는 전세계적으로도 변화를 초래하였다. 즉, 제3세계의 학자, 학생, 지도자들로 하여금 영미권 정치사상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대안을 찾기위해 더 이상 예전과 같이 프랑스를 주목하진 않게된 면이 있다. 아롱의 저서와 사상은 국제관계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사이의 균형된 시각과 통찰력을 갖추기위해 여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1983년, 아롱은 자신의 친구인 철학자 베르트랑 드 주브넬(Bertrand de Jouvenel)[11]을 위해, 프랑스를 파시즘의 요람으로 지목한 이스라엘 역사학자 제에브 스테른헬(Zeev Sternhell, 1935-2020)의 일련의 서적과 관련된 명예훼손 소송에서 증언을 해주기위해 파리 법정에 참석하였고 스테른헬의 저서를 가장 비역사적인 저서라고 진술을 마친 후 법정 계단에서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32년 데카드 드 퐁티니(Décades de Pontigny)라는 10일간의 지식인들 초청세미나에서 만난 2살 연하의 쉬잔 고숑(Suzanne Gauchon)(1907-1998)과 1933년에 결혼, 슬하에 딸 셋을 두었다. 딸 중 한 명인 도미니크 아롱(Dominique Aron)은 사회학자이자 현직 정치인이다.
3. 저서
- 역사철학 서론(Introduction à la philosophie de l'histoire)(1938)
- 대분열(Le Grand schisme)(1948)
- Le spectateur engagé(1981)
- 회고록(Memoirs)(1983)
4. 평가
(전략) 실제에 있어서 그들 생전의 영향력이나 명성은 결코 50대 50이 아니었다. 철학서 《존재와 무》, 소설 《구토》로 2차 대전 직후 프랑스에 실존주의를 대대적으로 유행시킨 실존 철학자, 평론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로 참여 문학의 새로운 장르를 열었고 소설과 희곡에서 두루 성공을 거둔 작가, 그리고 군중 데모, 항의 시위, 공개장 서명 등에 빠지지 않고 모습을 나타냈던 극좌파 투사로서의 사르트르는 정말로 전후 30년간 프랑스 지식계의 교황이었다.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나 이념의 분쟁 속에서 모든 사안에 대해 사람들은 오늘 사르트르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에 비하면 레몽 아롱의 명성은 보잘것없었다. 명성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치욕스러운 보수파의 상징이었다. (중략) 평생 온건하고 상대주의적인 논조를 유지했던 레몽 아롱은 프랑스의 지식 사회에서 완전히 따돌림을 받았다. 1955년 소르본 대학에 교수로 들어갈 때는 그가 우익 인사이며 우익 신문인 피가로의 논설위원이라는 이유로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에 부딪치기도 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레몽 아롱은 마르크시즘이 세계를 해석하는 절대적 인식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기본 사상을 깔고서, 전후 프랑스가 상당한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었고, 생활 수준이 신장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은 축소되었고, 교육 제도도 민주화되었다고 생각하며 과연 좌익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그런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정치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니며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덜 바람직한 것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정치를 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소련에 대해서는 강제 수용소, 전체주의, 팽창주의를 경계했고, 이와 같은 오류가 스탈린의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라 이미 공산주의의 이론 속에 배태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반공주의자는 개다."[15]라고 말하는가 하면 '비앙쿠르(르노 자동차 공장이 있던 파리 교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의식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소련의 수용소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68년 5월 혁명 때는 비앙쿠르로 달려가 공장 노동자들을 앞에 놓고 선동연설을 하기도 했다.
결국 사르트르와 레몽 아롱의 포폄이 갈린 것은 마르크시즘이라는 유행 사조를 채택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전후 30여 년간 프랑스는 내각이 수시로 바뀌던 불안한 제 4공화국과 드골의 강력한 지도 체제 등을 경험하며 계속해서 부르주아 우익 세력이 정권을 담당했지만 지식층의 헤게모니는 마르크시즘 진영이 잡고 있었다. 레몽 아롱이 당했듯, 추악한 보수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그 누구도 자신이 우익임을 표방하지 못했다. 카뮈나 메를로-퐁티가 그랬듯이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반공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주류 사상을 거스르기는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1975년을 전후해서 5월 혁명 때 고등학생ㆍ대학생이던 세대가 갑자기 마르크시즘의 한계와 소련의 죄악을 깨닫고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인권 문제를 들고 나와 소련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레몽 아롱이었다. 그들은 마르크시즘이 진보의 사상을 독점한 데 대해 반기를 들었으며, 우익과 좌익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레몽 아롱이 옳았으며, 사르트르는 틀렸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레몽 아롱 개인으로 보면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후략)
- 박정자 상명대 명예 교수[16]
전후 프랑스는 좌파사상이 유행이고 대세였기에 당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사르트르와 함께 틀리는 것이 아롱과 같이 옳은 것 보다 낫다.(Plutôt avoir tort avec Sartre que raison avec Aron.)", "아롱과 함께 침울함 속에서 옳은 것보다 거침없고 활기차고 열성적인 사르트르와 함께 잘못되는 것이 더 쉽다. (Plus facile d'avoir tort avec Sartre qui "trucule, exubère et effervesce" que d'avoir raison dans la morosité avec Aron)"[17] 하지만 21세기 들어 아롱의 복권과 사르트르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른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 좌파의 위기로부터 기인했다. 사람들은 총체적 혁명보다는 분자적 혁명을 주장했다. 소련은 몰락했고, 공산주의 지식인들은 길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동안 배척해 왔던 아롱을 되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그는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가? 레몽 아롱은 마르크시즘이 세계를 해석하는 절대적 인식 도구가 될 수 없다는 기본 사상을 깔고서, 전후 프랑스가 상당한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었고, 생활 수준이 신장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은 축소되었고, 교육 제도도 민주화되었다고 생각하며 과연 좌익이 정권을 잡았을 때도 그런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지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정치란 선과 악의 투쟁이 아니며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덜 바람직한 것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 그리고 정치를 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소련에 대해서는 강제 수용소, 전체주의, 팽창주의를 경계했고, 이와 같은 오류가 스탈린의 개인적인 잘못이 아니라 이미 공산주의의 이론 속에 배태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반공주의자는 개다."[15]라고 말하는가 하면 '비앙쿠르(르노 자동차 공장이 있던 파리 교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다시 말해서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의식을 약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소련의 수용소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68년 5월 혁명 때는 비앙쿠르로 달려가 공장 노동자들을 앞에 놓고 선동연설을 하기도 했다.
결국 사르트르와 레몽 아롱의 포폄이 갈린 것은 마르크시즘이라는 유행 사조를 채택했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전후 30여 년간 프랑스는 내각이 수시로 바뀌던 불안한 제 4공화국과 드골의 강력한 지도 체제 등을 경험하며 계속해서 부르주아 우익 세력이 정권을 담당했지만 지식층의 헤게모니는 마르크시즘 진영이 잡고 있었다. 레몽 아롱이 당했듯, 추악한 보수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 그 누구도 자신이 우익임을 표방하지 못했다. 카뮈나 메를로-퐁티가 그랬듯이 지식인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면서도 그렇다고 반공주의자가 되기를 원치 않았다. 한 시대, 한 사회의 주류 사상을 거스르기는 이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1975년을 전후해서 5월 혁명 때 고등학생ㆍ대학생이던 세대가 갑자기 마르크시즘의 한계와 소련의 죄악을 깨닫고 인류의 영원한 주제인 인권 문제를 들고 나와 소련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레몽 아롱이었다. 그들은 마르크시즘이 진보의 사상을 독점한 데 대해 반기를 들었으며, 우익과 좌익의 참모습이 무엇인가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은 "레몽 아롱이 옳았으며, 사르트르는 틀렸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레몽 아롱 개인으로 보면 참으로 억울하기 짝이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후략)
- 박정자 상명대 명예 교수[16]
내가 특히 부인할 수 없는 점은 계급에 대한 소속감의 부재가 부르주아지 아이들의 특징이라는 점입니다. 지배적 계급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특정 세계 내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읽어보면 아론의 발언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설명하는 것뿐인데 자신이 사회학을 쓰고 있다고 상상하는 특권층의 순진한 고백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그를 한 번만 만났고 즉시 그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맹목적으로 소련을 지지하는 동안 그가 반공주의자이었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의 제정신을 칭찬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됐습니다! 그는 노동계급을 증오했기 때문에 반공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르주아 기득권층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옹호자로서 노동계급의 염원이나 정치적 활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자신을 내세워 방어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펜은 고용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권력자들을 위해 봉사하는 군인이었습니다. 1968년 5월에 사르트르가 그를 모욕한 것은 수천 번 옳았습니다. 아롱은 욕을 먹은 것 그 이상이었습니다. 항상 '정통'을 지지하고 '상식'에 의존하며 이단과 비판적 사고의 반대에서 '자명한'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선호하는 정중한 학문적 '토론'의 관습을 감히 깨뜨린 사르트르의 위대함에 경의를 표합시다.[18]
디디에 에리봉[19] 『랭스로 되돌아가다』 中..
최근에는 급속하게 올라갔던 아롱의 평가가 차츰 내려오는 추세이긴 하다. 이를 반영하여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책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아롱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바 있다.디디에 에리봉[19] 『랭스로 되돌아가다』 中..
5. 오해
5.1.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레몽 아롱이 『지식인의 아편』에서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 정직한 좌파는 머리가 나쁘고, 머리가 좋은 좌파는 정직하지 않다. 모순투성이인 사회주의 본질을 모른다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알고도 추종한다면 거짓말쟁이다."
이라는 말을 했다는 오해가 한국에서 널리 퍼져 있고 심지어 한국의 언론에서조차 『지식인의 아편』에서 해당 말을 했다고 인용하는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레몽 아롱이 한 말이 아니다.『지식인의 아편』을 다 살펴보더라도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을 찾아 볼 수 없다. 또한,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있는 위 이미지에 나오는 인용문 "Le choix en politique n'est pas entre le bien et le mal, mais entre le préférable et le détestable"의 번역도 "정치에서의 선택이란 선과 악 중에 고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바람직한 것과 좀 덜 바람직한 것 중에 고르는 것이다."[20]는 말로, 좌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의 뜻은 자유주의자라면 자기 생각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물론 이들도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고 필요하다면 힘을 동원해서라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설득해서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설사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는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해서 누구를 적으로 돌리고 누구를 친구로 삼는 것이 아니라, 대안들 중에서 더 나은 타협안을 현실적으로 선택할 것이라는 말이다. 아롱이 사르트르를 그토록 비판하면서도 그와 평생 친구로 지냈던 것도 이런 생각에 근거해서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진 아롱이 "정직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절대로 좌파가 될 수 없다"라는 진영논리식 발언은 아롱의 철학과도 맞지 않을 뿐더러 근거도 없다.[21]
아롱은 좌우파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오른쪽에 있든 왼쪽에 있든 우리는 항상 편마비 상태이다. (Qu'on soit de droite ou qu'on soit de gauche, on est toujours hémiplégique.)"[22] 또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다. 잊는 능력 없이 합리적인 정치는 없다. (L’ennemi d’hier est l’ami d’aujourd’hui. Il n’y a pas de politique raisonnable sans capacité d’oubli.)"[23]
무엇보다도 해당 어록은 한국에서만 언급되며, 한국에서도 최초로 언급되는 것이 2018년 한국경제 기사#이고, 그 이전에는 이런 말이 없었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김태철 논설위원이 이후 다량의 기사 표절로 사퇴를 한 사람[24]이라는 점(기사 윤리 부재), 해당 어록이 다른 나라 언어로는 비슷한 것도 검색되지 않는다는 점, 아롱의 신념과 동떨어진 발언이라는 점, 해당 출처(『지식인의 아편』)에서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 언급이라는 점 등등으로 알 수 있듯이, 해당 어록은 아롱이 한 말이 아니다.
6. 기타
- 파리의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유대인이다.
- 아롱은 소위 68혁명이라고 불리는 1968년 5월 학생운동을 "비이성적"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를 두고 당시 학생세력들로부터 수구반동(reactionary)이라며 비난을 받았다. 아롱은 비록 그 자신이 드골 정권의 정책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들어선 정권이며 현 정권이 근본적인 자유를 침해하지는 않았다고 보았다. 구체적 컨텐츠 없이 마오쩌둥과 체 게바라, 호찌민을 외치며 폭력을 쓰는, 과거의 생 쥐스트, 로베스피에르, 레닌과 같은 자들의 역할이 대두되는 양상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과거 토크빌의 역할에 비유하였다.
- 아롱이 반공산주의를 주장했다고 해서 자본주의에 대해 좋은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유에 관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돈이 왕이다. 돈의 매개가 인간을 소외하는 것을 막으로써, 우리는 사람 사이의 직접적이고 진정한 접촉을 재개해야 한다."[25] 또한 "기업의 이익이나 적자는 대부분 직원에게 달려 있지 않다. (사장에게 달려 있다는 뜻)"[26]
- 아롱의 반공적 태도 덕에 그는 미국과 많은 접촉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하버드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방문교수로 초빙되었고, 포드, 록펠러 재단들로부터 풍성한 연구자금을 얻어올 수 있었다.
- 아롱은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막스 베버의 사상을 들여오고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사상을 재부흥케 하는 데 힘썼다.
- 영국 일간지 타임스의 자매 주간지인 The Times Literary Supplement에서 펴낸 '2차세계대전 이후 가장 영향력있는 책들'TLS The Hundred Most Influential Books Since the Second World War 리스트 안에 두 권의 책이 올라가 있는 학자들은 매우 드문데 그 중 한 명이 아롱이다. '지식인의 아편(1955)'과 '회고록(Memoirs)(1983)'이 목록에 올라가 있다.
- 독립적인 자유주의자였기에 우파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다. 1957년에는 알제리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가 포기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알제리 전쟁 중 알제리의 독립을 위한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동료이자 적수인 사르트르와 견해를 같이 한 몇 안 되는 사안이었다.
- 아롱은 1977년 방한 후, 르 피가로 지에 한국여행기를 3차 연재하면서 한국의 경제 발전을 호평했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 정부의 유신 독재 정치와, 자유, 인권 문제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다며 지식인들은 아롱에 실망해하고 비난하였다. 이런 비난에 대하여 당시 한국인 주불 특파원이 아롱에게 코멘트를 요청했다. 아롱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경제 발전을 호평한 것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임을 확실히 하기 위해 한 말이다. 개인소득 5천달러가 넘으면 민주화는 분명히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아롱은 오히려 “다수의 한국 지식인들이 군부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어 실망했다.”고 지적하고 경제 수준이 필연적으로 민주시대를 부른다고 역설했다. 관련기사
- 1980년 3월 인터뷰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해 비관적인 견해를 밝혔다. 당시 국제언론이 서울의 학생시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서울의 봄”을 거론했었다.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세 정치 지도자가 슬기를 발휘하면 “서울의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적 전망이었다. 아롱은 “서울의 봄”이 올 것이라는 국제언론의 보도를 부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아직 가깝지 않다. ‘서울의 봄’은 아직 멀리 있다.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학생들은 민주주의가 쉽게 올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림도 없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면 '서울의 봄'이 당장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주화 투쟁의 지식인-시민-민중 등의 피를 부르는 투쟁으로, 민주주의 나무에 많은 ‘피의 꽃’을 피워야 올 수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공부해보라. 민주화의 꽃나무가 시민의 피로 얼마나 많은 꽃을 피워야 민주주의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롱의 예언은 완전히 적중했다. 그 해 5월에 5.17 내란이 일어났고, 다음 날 신군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이후 7년 동안이나 전두환의 신군부 독재가 이어지다가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나고 나서야 비로소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지금의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탄생하였다. 관련기사
- 영국과 미국의 권위 있는 언론매체들이 선정한 2005년 ‘세계 100대 지식인’ 명단에 레몽 아롱이 올라가 있다. 특히 영국 역사학자 토니 주트가 쓴 '지식인의 책임(The Burden of Responsibility: Blum, Camus, Aron, and the French Twentieth Century)'(토니 주트 저, 김상우 번역, 오월의봄, 2012)이라는 책에서 토니 주트는 레옹 블룸,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1905~1983)이라는 20세기 프랑스 지식인 세 명의 생애와 정치적 활동을 다뤘다. 책 내용을 극도로 요약한다면, 20세기 ‘이념 과잉의 프랑스’에서 이 셋이야말로 (지나치게 편향되지 않은)참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1] 철학자라기 보다는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사르트르의 철학을 비판했다. 마르크스를 비판한 『역사철학서론』(역시 사회학의 관점에서 마르크스 철학을 비판)을 짓기도 하고, 자유주의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아롱은 따로 자신만의 철학 체계를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다.[2] 한국에서는 "사회사상의 흐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있다.[3] 다만 아롱도 일반적인 우파나 보수주의자라기 보다는 독립적인 리버럴리스트에 가까웠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4] 또한 폴 니장, 조르주 캉길렘 역시 같은 교우였다.[5] 당시 먼저 독일에 가서 에드문트 후설의 현상학을 공부하던 아롱은 사르트르에게 같이 공부하기를 권했고 사르트르도 역시 독일로 건너가게 된다.[6] 1940년 6월, 마지노선만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을 피해 다른 국경으로 침략한 나치 독일이 전쟁 6주 만에 파리를 점령해오자 프랑스의 1차세계대전 영웅인 필리프 페탱은 휴전파의 중심에 섰다. 지금 더 이상의 전투는 의미가 없다 여기고 나치독일과 휴전을 맺고 프랑스 남부 도시 비시를 중심으로한 친독일성향의 프랑스를 세운다. 이를 비시 프랑스라 부른다. 반면 페탱의 부관이었던 드골 장군은 항전파에 섰고 영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세우니 이를 자유 프랑스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공산주의자, 좌파들은 드골을 권위적인 보수우익이라 여겼기에 그를 따라 자유 프랑스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아롱은 2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공군으로 참전하였고 패전 후 런던으로 갔다.[7] 아롱은 1947년부터 시작하여 말년인 1977년까지 꾸준히 르 피가로에 영향력있는 칼럼들을 썼다. 이후에는 주간지인 렉스프레스(L'experss)지에서 컬럼을 썼다.[8] 전 세계 여러곳에 반공을 목표로 Congress for Cultural Freedom,CCF이 설치되었는데 애초부터 미 CIA를 통해 재정지원이 들어갔음이 1966년에 공개되었다.[9] 개인의 모든 활동은 민족, 국가와 같은 전체 존립과 발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이념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해야 함을 주장하는 정치 사상 및 체제. 극단적 민족주의, 파시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북한의 주체사상 등을 들 수 있다.[10] 전체주의란 히틀러의 나치즘, 스탈린의 공산주의, 파시즘, 일본군국주의, 북한의 주체사상, 민족주의 등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억압하는 일체의 사상이다. 하이에크는 우익도 좌익도 언뜻 반대로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전체주의라고 하였다.[11]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초기 멤버 중 한 명[12] '지식인의 아편'(안병국 역 삼육출판사 간) 한국어판이 2019년 까지도 출판되었지만 1960년에 번역된 후 한 번도 재개정이 없었고 옛말투에 수많은 오타와 비문이 난무하여 원저의 의미를 제대로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13] 2022년 박정자 교수의 제자인 변광배 교수의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간되었다. #[14] 프랑스 대혁명 발발 후 국민공회에서 혁명 급진파인 자코뱅파들이 의장석 기준 왼쪽에 모여 앉았다는데서 유래된 용어.[15] 당시 빅토르 크랍첸코(Виктор Кравченко)는 전후 최초의 소련 공산당원 망명자로서 소련의 강제 수용소의 실상과 1930년대 우크라이나에서 최대 1,300만명이 아사한 홀로도모르를 폭로했다. 그서나 좌파 지식인들은 이렇게 폭로된 소련의 추악한 면을 보고서도 공산주의, 사회주의, 진보 이념을 의도적인 목적으로 훼손하려는 이리 떼(wolf pack)라며 비난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공산당 당수인 자크 뒤클로가 체포되기도 했다. 그래서 사르트르도 같은 맥락에서 "모든 반공주의자는 개다."이라고 한 것이다. 덧붙여 알제리 전쟁을 두고 알베르 카뮈와 대립하다가 절교한 것도 이 무렵이다.[16] 박정자 교수는 좌파성향의 프랑스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 등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인물이나, 2010년 전후로 우파 유튜버에 나오기도 하는 등 우파경향으로 기울면서 레몽 아롱 등을 번역하고 있다. 가족 중 박정자 교수 딸은 조선일보 기자를 하고 있다.[17] 프랑스 전기작가인 장 다니엘의 La Blessure(1992) 중[18] What strikes me as particularly undeniable is that the absence of the feeling of belonging to a class is characteristic of children of the bourgeoisie. People in a dominant class position do not notice that they are positioned, situated, within a specific world. Read in this light, Aron’s remark can be seen for what it is, the naive confession offered by a person of privilege who imagines he is writing sociology when all he is doing is describing his own social status. (...) People have praised his lucidity because he was anticommunist while others still blindly supported the Soviet Union. But this is wrong! He was anticommunist because of his hatred of the working class, and he set himself up as the political and ideological defender of the bourgeois establishment, defending against anything having to do with the aspirations or the political activities of the working class. Basically, his pen was for hire: he was a soldier in the service of those in power helping them to maintain their power. Sartre was right a thousand times over to insult him in May 1968. Aron had more than earned it. Let us salute the greatness of Sartre for daring to break with the conventions of polite academic “discussion”—which always works in favor of “orthodoxy,” and its reliance on “common sense” and what seems “self-evident” in its opposition to heterodoxy and to critical thought. (Didier Eribon, 『Returning to Reims』)[19]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1953년 파리 교외 랭스의 노동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리베라시옹』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문예기자로 이력을 시작해 부르디외, 푸코, 뒤메질 등을 인터뷰했다. 지식인, 동성애자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노동 계급의 ‘탈주자’라고 느꼈던 에리봉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자신과 가족의 계급적 과거를 탐사해나가는 회고록 『랭스로 되돌아가다』 발표한다. 이는 계급과 다른 정체성들이 교차되고 갈등을 빚는 모습을 예리하게 보여주고 프랑스 지성계의 뿌리 깊은 계급성을 파헤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식 장을 넘어 일반 독자층에게까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에리봉은 대학에서 강의하며 프랑스 지성사, 게이·레즈비언 문제와 퀴어 이론 등에 관심을 갖고 저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 아미앵 대학의 철학·인문학·사회과학 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20] 생전 인터뷰에서 한 말[21] 해당 글은 프랑스어로 바꾸어 구글링 하더라도 비슷한 말조차 찾아볼 수 없다. 영문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만 해당 글 『지식인의 아편』에서 한 말로 검색된다. 하지만 실제로 『지식인의 아편』에는 해당 글이 나오지 않는다.[22] Raymond Aron 『Essai sur les libertés』[23] Raymond Aron 「Paix et guerre entre les nations」[24] 김태철 논설위원은 2020.03.25 뉴스를 끝으로 더 이상 뉴스를 생산하지 않는데, # 공교롭게도 2020.04.09에 김 모 한국경제 논설위원이 기사 표절 의혹으로 사퇴했다는 뉴스가 나왔다.#1, #2 그런데 다음에서 특정 키워드로 검색시 동일한 기사의 요약 화면에서 사퇴한 사람이 김태철 논설위원이라고 뜬다.
[25] Dans l'économie capitaliste, l'argent est roi : l'homme ne reprendra contact direct et authentique avec l'homme qu'en supprimant la médiation aliénante de l'argent. (Raymond Aron 『Essai sur les libertés』 )[26] Profits ou déficits des entreprises, pour l'essentiel, ne dépendent pas des salariés. (Raymond Aron 『Aron et De Gaulle』)[27] 관련 내용을 다룬 국내 발간 책으로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글 유기환, 변광배, 장프랑수아 시리넬리, 정명환,민음사,2004)>이 있다.#
[25] Dans l'économie capitaliste, l'argent est roi : l'homme ne reprendra contact direct et authentique avec l'homme qu'en supprimant la médiation aliénante de l'argent. (Raymond Aron 『Essai sur les libertés』 )[26] Profits ou déficits des entreprises, pour l'essentiel, ne dépendent pas des salariés. (Raymond Aron 『Aron et De Gaulle』)[27] 관련 내용을 다룬 국내 발간 책으로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글 유기환, 변광배, 장프랑수아 시리넬리, 정명환,민음사,2004)>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