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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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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 책봉 초대 주체 정난의 변, 황제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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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제3대 황제
영락제 | 永樂帝
파일:영락제 어진.jpg
출생 1360년 5월 2일
금릉
(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즉위 1402년 7월 17일
남경 응천부 황궁 봉천전
(現 장쑤성 난징시 쉬안우구)
사망 1424년 8월 12일 (향년 64세)
유목천 진중
(現 내몽골자치구 시린궈러맹 둬룬현)
능묘 장릉(長陵)
재위기간 명 연왕
1370년 5월 2일 ~ 1402년 7월 17일
제3대 황제
1402년 7월 17일 ~ 1424년 8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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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성씨 주(朱)
체(棣)
부모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효자고황후[1]
형제자매 26남 16녀 중 4남
배우자 인효문황후
자녀 4남 5녀
작호 연왕(燕王)
묘호 태종(太宗) → 성조(成祖)[2]
시호
1424년 추증 [ 펼치기 · 접기 ]
체천홍도고명광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體天弘道高明廣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1538년 추증 [ 펼치기 · 접기 ]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
(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
연호 영락(永樂, 1403년 ~ 1424년) }}}}}}}}}

1. 개요2. 생애
2.1. 연왕 시절2.2. 정난의 변2.3. 내정면에서의 업적2.4. 대외 분야의 업적
3. 평가4. 조선과의 관계5. 가족
5.1. 조상5.2. 아내5.3. 자녀
5.3.1. 황자5.3.2. 공주
6. 여담7. 대중매체에서
7.1. 드라마
7.1.1. 정화하서양(국내명: 정화의 대항해, 2009)7.1.2. 납첩기3(2016)7.1.3. 대명풍화(2019)7.1.4. 산하월명(2022)7.1.5. 상식(2022)7.1.6. 금의야행(2024)7.1.7. 용의 눈물7.1.8. 육룡이 나르샤
7.2. 만화7.3. 게임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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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明太宗.jpg

중국 명나라의 제3대 황제.

묘호는 처음에는 태종(太宗), 나중에는 성조(成祖)였으며, 시호는 계천홍도고명조운성무신공순인지효문황제(啓天弘道高明肇運聖武神功純仁至孝文皇帝)였다.

(諱, 이름)는 체(棣)로, 태조 주원장의 4남이었으며 북변을 수비하는 연왕(燕王)에 봉해졌으나, 조카인 건문제가 즉위한 후 정난의 변을 일으켜 수도인 남경을 함락하고 조카의 자리를 빼앗아 황제에 즉위했다.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정복군주이자 명나라의 전성기인 영락성세를 연 황제였지만 자신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신료들에 대한 지나치게 불필요하고 잔혹한 숙청(임오순난)때문에 비판도 많이 받는 인물이다. 또한 환관들을 이용한 측근 정치가 과도했다는 비판도 있다. 한편, 부황 홍무제의 정책 중 상당수를 뒤집었기 때문에 영락제의 치세를 일종의 명나라 제2의 건국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2. 생애

2.1. 연왕 시절

어린 시절에는 남경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다가 1370년 11세 때 연왕(燕王)에 봉해져 지금의 북경 일대의 제후가 되었으며, 19살 무렵부터 명장 서달을 따라 몽골 원정에 종군하면서 남경과 북경을 왕래했다. 그러다 완전히 순천부(베이징)에 정착한 게 1380년, 21세 때였으며 이 시기부터 임지의 내정과 군사 업무를 담당했다. 연왕부는 명 왕조의 최북변에 해당해 북원의 잔당 세력들이 준동하고 하북으로 이주한 몽골인들과 유목민들, 원 왕조 출신의 인사들과 호족들이 많아 험지나 마찬가지였으나, 주체는 이들을 잘 통제하고 북원의 침공을 막아냈다.[3]

어린 시절부터 종군한 영향으로 인해 주체는 무골로 성장했고, 성품도 대단히 호방했으며 목표 의식이 뚜렷했다. 주체의 능력과 실적에 주목한 주원장은 내심 주체를 후계자로 생각했었지만, 장자 우선 원칙에 따라 장남인 주표를 황태자로 삼았다. 이후, 주표가 요절하자 그의 아들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삼았다. [4][5] 그래도 속마음은 어땠을지 모를지언정 이 시절에는 큰형 주표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주체가 딴마음을 품고 있으니 조심하라고 누군가가 주표에게 고했으나, 주표의 반응은
"그는 평소에 내게 공손하고, 나도 그에게 나쁜 감정이 없소. 그러니 걱정마시오."
였다. 주표가 만약 조금이라도 주체를 견제하거나 의심이 약간이라도 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로, 적어도 형제 사이의 우애는 좋았던 것으로 생각된다.[6]

그러나 장자 계승 원칙 운운하며 어쩔 수 없이 장자인 주표를 후계자로 세웠다는 이야기는 3차에 걸쳐 정치적 이유로 개수된 홍무 실록의 내용과 지금까지 전해지는 야사들이 뒤섞인 낭설이다. 주표가 황태자로 봉해진 것은 13살이고, 그보다 5살 연하인 주체는 그때 8살이었다. 무골도 아니고 성격은 어린 아이였으며 목표가 뭔지 모르는 나이였다. 홍무제가 주체를 후계자로 생각할만한 요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홍무제는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장자를 태자로 정하고 차남 이하의 서자들을 번왕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13살이던 황태자를 중서령으로 임명해 국정을 총괄하는 권한을 일부 이양하려 했을 정도로 주표를 확실한 후계자로 정했다. 이때 신료들의 반대로 황태자가 중서령을 겸직한다는 조치가 실패로 돌아가지만, 홍무제는 지속적으로 황태자의 권위와 힘을 높여 주었다. 성인이 된 뒤, 황태자는 국정 전반을 맡아 처리하고 중요한 문서들을 검토해 부황에게 상주했다. 연왕이 고작 순천부와 그 일대만 쥐고 있을 때, 황태자는 제국 전체를 호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체는 이미 11세에 번왕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운명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태자가 요절했을 때는 그나마도 원손이 있었고 종법에서 황태자 사후에 계승자를 정할 때는 황태자의 후손, 또는 황태자 다음 세대의 혈족에게 계승하는 것을 우선했다. 게다가 조정의 관료들과 왕공대신들이 장자 계승의 원칙과 종법을 지지했기 때문에 하찮은 번왕 따위는 후계자로 거론될 자격조차 없었다.

2.2. 정난의 변

1398년, 홍무제가 붕어하고, 건문제가 즉위했다. 번왕들을 잠재적 위험으로 인식한 건문제와 그 측근들은 삭번 정책을 실시해 번왕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다섯 번왕을 제거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주체는 순천부에서 거병해 건문제에 맞섰다. 비록 주체의 전력은 건문제에 비해 훨씬 열세였으나, 주체 본인의 기량과 건문제의 우유부단함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여러 차례의 위기를 이겨낸 정난군은 조정군의 방위를 뚫고 파죽지세로 남경까지 몰아쳤고 건문제는 궁에 불을 지른 후 행방불명되었다.

중국의 많은 황제들 중 영락제만의 특이점은 "일신의 무용과 관련한 기록이 유난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기록들이 야사나 설화가 아니라 명나라 정사에 기록이 되어 있다. 이는 정난의 변 시기에 총사령관인 연왕 본인이 직접 돌격하거나 탈출해야 하는 등 위급한 상황이 많았던 점과 찬탈자이기 때문에 확실한 성과를 남겨 인정받아야 한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정난의 변 때, 연왕은
"스스로 난전에서 말을 갈아타고, 화살이 떨어지면 직접 칼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싸웠다."
는 기록이 있으며, 총사령관임에도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격전 중에 앞장서서 전투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영락제의 군사적 능력과 무용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을 것이다.[7]

2.3. 내정면에서의 업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90px-Yongle_Emperor.png
장릉 능은전에 있는 영락제 동상.[8]

우선 정치적으로는 수도를 남경에서 자신의 세력 기반인 북경으로 옮겼다. 남경의 조정과 강남 세력들이 자신에게 적대적인데다 몽골과의 충돌이 이어지는 상황이었기에 영락제는 천도를 단행하고 새로운 궁성을 축조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금성이며 영락제의 천도 이후, 북경은 지금까지도 중국의 정치적 중심지이다.

문화 사업에도 힘을 쏟아 《영락대전》으로 대표되는 많은 학술 서적을 편찬해 치적으로 내세웠으며 황제 독재권을 강화하기 위해 번왕 제도를 폐지하고 전국에 어사를 파견해 관료들을 감찰했다. 영락제는 농업 발달에도 힘써서 수리 사업을 추진하고 경항대운하를 개수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한 군사 분야에도 힘을 써서 화포를 개량하고 기존의 사석포에서 포탄으로의 전환을 마쳤다.

또한, 영락제는 명 · 청 양대 왕조에서 유지한 내각제의 기틀을 쌓았다. 대중적으로는 홍무제가 황제 혼자 과중한 업무를 처리하는 제도를 만들고, 이에 피로감을 느낀 영락제가 내각 제도를 시행해 황제의 업무를 조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명의 내각은 홍무제가 사보관과 전각 대학사 제도를 운용한 것이 시초이며 여기서 영락제는 부황이 업무 보조와 자문용으로 기관을 운용한 것을 넘어서서 전각 대학사를 내각으로 개편하고 상당한 권한과 직위를 부여해 황제의 과중한 업무 부담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였다.

2.4. 대외 분야의 업적

내정에서도 성과를 올린 영락제이지만, 대외 분야의 업적은 정말 화려하다. 연왕 시절부터 전장을 누빈 무인이었던 만큼, 영락제는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쳤다. 1410년에 친정을 해 고비 사막을 넘은 뒤부터 재위 기간 동안 무려 5차에 걸쳐 총 50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몽골 초원에 원정을 나갔다. [9]

역대 중국 황제들 중에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초원으로 친정한 황제는 북위의 세조 태무제,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 세 명뿐이다. 그나마도 태무제는 선비족 탁발부, 강희제는 만주족 출신으로 몽골 초원이 익숙한 유목민과 수렵민들인 반면, 영락제는 한인 출신으로 막북 친정을 감행한 유일한 황제이다.[10]

하지만 막북 친정은 여러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영락제는 영락 8년에서 22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대군을 이끌고 막북에 출정했다. 그 중 네 차례가 달단[11]과 올량합(우량카이)을 대상으로 삼았고, 한 차례는 와자[12]를 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친정은 타타르, 올량합, 오이라트 원정의 규모가 비교적 큰 편이고, 그 작전 지역은 알난하(몽골 악눈하) · 홀란홀실온(몽골 오란파탁 이남) · 활란해자(내몽골 호륜호)와 굴렬인하(내몽골의 도하 지류인 귀류하) 등지로 나누어져 있다. 이후 두 차례의 친정은 모두 몽골의 아룩타이(Aruqtai)나 오이라트의 마흐무드(Mahmud)가 곧바로 도주하는 바람에 교전을 하지 못하고 귀환하게 되었다.

영락제는 막대한 병력과 거액의 군비를 들여 15년 동안 다섯 차례나 친정을 했다. 이 친정으로 몽골 부족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달단과 와자의 위협을 제거하는 효과가 있었으나, 5차에 걸친 장기 간의 친정으로 인력, 물자, 재정이 소진되고 인종 · 선종 양대의 정치에도 후유증을 남겼다.

무엇보다 원정에 대한 노력과 투여된 재정을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얻은 성과는 별로 없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몽골 부족들 중 어느 부족도 확실히 격파하거나 명나라의 영향권 내에 편입시키지 못했고, 영락제가 붕어하고 불과 25년 뒤에 중국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패전 중 하나인 토목의 변을 당하게 되어 예방 효과도 거의 없었다. 과거 전한의 세종 무황제 역시 흉노 원정에 엄청난 물자와 인력을 소비했지만 그만큼 보람이 있어 중국은 5호 16국시대 때까지 흉노의 위협에서 수백년 동안 안전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13] 더욱이 영락제가 최후의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목천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친정의 목적이 몽골 부족을 제압하는 데 있었다고 한다면,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북방 민족에게 조종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다섯 차례의 친정 가운데 실제 전투가 일어난 것은 영락 8년의 제1차 원정과 12년의 제2차 원정뿐으로, 제3차 이후는 거의 직접적인 전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즉, 수십만 명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그저 사막을 행군하며 막대한 보급물자를 소비하는데 그쳤으니 영락제의 친정이 있었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는 정도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영락제의 외정과 정치적 의의

이외에도 영락제는 베트남을 영토화시키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하여 호 왕조 베트남을 정복하기도 했으며, 명나라 해안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구를 엄중히 단속하기 위해 조선의 태종[14]과 협력하여 대마도 정벌[15]을 추진했다. 또한 왜구 관리를 위해 일본무로마치 막부와 협력하기도 했다. 특히 혜종 건문제 시절 일본 국왕에 봉한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일본 국왕으로 봉하고 감합무역을 실시했으며, 요시미츠가 죽자 그에게 '공헌'이라는 시호를 내려주기도 했다. 베트남 정복도 성공적인 외정이라 하기엔 여러모로 미묘한데, 일단 중국의 역대 베트남 지배 기간만 봐도 1차 베트남 지배는 약 150년, 2차 베트남 지배는 약 500년, 3차 베트남 지배는 약 330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영락제가 이룬 4차 베트남 지배는 현지 저항군에 의해 꼴랑 20년만에 종료되었다.

그러나 그 많은 외정 중에서도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정화의 대원정이다.[16] 1405년에 제1차 함대가 파견된 이후, 1433년 선덕제의 치세때까지 무려 7회나 대함대를 파견하면서 동남아시아, 인도양, 심지어 동아프리카케냐 해안까지 명나라의 함대가 진출해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치고 많은 나라의 조공을 받았다.[17] 하지만 막대한 인력과 돈을 들였음에도 식민지를 얻거나 신문물을 도입하거나 무역이 크게 증대된다던가 하는 구체적인 성과는 없었으며, 때문에 선종 선덕제 재위 시기의 항해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해상 원정은 없었고 이후 명나라는 아예 해금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내정과 외정 양면으로 명나라를 대제국으로 끌어올린 인물로 영락제의 치세는 영락성세(永樂盛世)라고 불리며, 후임 군주들인 인종 홍희제와 선종 선덕제의 인선지치(仁宣之治)와 더불어 명나라의 최전성기로 불린다. 이런 일세의 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424년 제5차 몽골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병을 얻었고[18] 결국 진중에서 향년 64세로 죽음을 맞았다. 영락제가 붕어하자 국정의 혼란을 우려한 신하들은 마치 황제가 살아 있는 것처럼 식사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홍희제가 워낙 순한 나머지 영락제의 죽음이 홍희제의 동생들에게 알려지면[19] 국정에 혼란이 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영락제 본인의 원정은 아니지만, 서쪽 티무르 제국의 영웅 티무르 바를라스가 영락제가 다스리던 명나라 침공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20] 다만 티무르가 명나라로 진군해 오던 도중 오트라르에서 죽어 무산되었다. 이걸로 인해 당대 최강대국의 정복군주였던 둘의 싸움이 꽤 큰 떡밥으로 남았다.

3. 평가

혈족과의 권력 다툼과 그 끝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북경[21]으로 천도해 국가의 기틀을 잡았고, 정화의 대원정을 통해 해양으로 진출하여 명나라의 국력을 과시했으며 몽골, 오이라트 등 북쪽으로 몸소 친정하여 북방을 억제했고, 남쪽으로는 대월[22]을 점령하여 명나라의 영토로 만드는 등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펼쳤다. 이처럼 여러 업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실책을 범했다. 황권 강화를 위한 잦은 원정과 대규모 사업은 국력을 깎아 먹고 민심을 잃게 했으며, 지나치게 잔혹한 숙청을 자행한 것 또한 민심 이반에 영향을 주었다. 게다가 환관을 중용한 것은 훗날 여러 폐단을 불러와 국운을 약화시켰다.

여러모로 조선세조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반란을 일으켜 조카를 폐위하고 즉위한 부분은 거의 판박이다.[23] 환관 세력을 키워 나라의 국운을 약화시킨 것도 세조가 계유정난의 공신들을 지나치게 우대해서 공신들의 전횡이 심각해진 것과 닮았다.

대체로 훌륭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만, 실책을 많이 저질러 비판점이 많이 존재한다.

영락제의 반건문제파 대숙청임오순난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지나치게 잔혹하고 과도했다. 일례로 영락제가 자신이 숙청한 정적들의 딸들을 강제로 기방에 보냈고, 그녀들이 남자들에게 겁탈을 당해 임신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웃으면서
"어린 것들이 크면 좋은 돈벌이가 되겠구나."
라고 말할 만큼 냉혹한 인물이었다.[24] [25]

특히 방효유 일족에 대한 처형은(물론 이게 사실이었다는 전제하에서)[26] 악명이 높다. 방효유 본인이 대놓고
연적찬위
(燕敵簒位)[27]
라는 글을 썼기에 처형은 불가피했지만, 직계 가족과 친척, 친분이 있는 사람들까지 잡아서 방효유 앞에서 차례대로 죽인 것은 과도한 학살이라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거역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연좌하는 일이 흔했지만, 반역이 아니면 당사자만 처벌하는 게 보통이었고, 가족은 기껏해야 추방만 했으며, 반역을 했어도 영락제 수준으로 마구잡이로 잡아죽이는 경우만큼은 거의 없었다. 이로 인해 명나라에 충언하는 사람이 잘 나오지 않게 되었고, 그 대가는 이후 명나라와 주씨 황족들이 치르게 되었다.[28]

다만 영락제가 방효유의 10족을 멸살했다는 이 일화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방효유를 처형한 것까지는 역사적 사실이 맞지만, 그 가족까지 몰살시켰다는 것은 과장이라는 것이다. 10족 멸살에 대한 일화는 청나라 초기, 장가화(張嘉和)가 쓴 《황명통기직해》(皇明通紀直解)라는 사찬사서에 보이는 정도이고, 정작 명나라의 정사인 《명사》 <방효유전>과 《명실록》, 《작중지》(酌中志) 등 명나라 관련 사료에서는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위 단락에서 서술하듯이, 역적의 죄는 직계 가족에게만 연좌하고, 그 가족도 성인 남성만 사형하며 여성과 아동은 노비로 삼는 것에 그쳤고, 방효유의 사촌동생이 타지에서 군역을 수행하느라 살아남았다는 일을 봐도 방효유의 일족이 모조리 절멸되었다는 야사의 기록과는 상충된다. 당장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도 죽이는 판인데 군역을 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봐 준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겠는가?

특히 《명사》는 명 왕조의 공식 역사, 즉 정사인 동시에 명 왕조를 멸망시킨 청 왕조에서 편찬한 사서다. 대놓고 반역을 모의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른 죄로 한 사람의 일족이 몰살당한 흑역사가 있었다면 어떻게든 전 왕조의 흠결을 드러낼 필요성이 있었던 청 왕조에서 당연히 놓칠 리 없다. 때문에 오늘날에는 영락제가 방효유의 10족을 멸족시켰다는 이야기를 부정한다.[29]

또한 영락제의 대외 원정은 황권 강화에는 영향을 주었지만, 국익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고 국가 재정만 악화시켰다는 주장도 많다. 5차에 걸친 몽골 원정과 거기서 나온 지출은 국가 재정과 인민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강북은 창출해내는 재화와 소유한 용역을 원정으로 소모했고, 강남(중국)은 막대한 부를 원정군에게 수송하느라 진이 빠졌다.

정화의 대원정은 당 · 송 · 원대까지 이어지다가 원말 명초의 혼란 및 해금령으로 중단된 동남아시아 무역을 재건하고 명나라의 대외적인 위상을 드높였으나, 경제적인 이익보다는 정치적인 이익을 중시하는 조공 무역에 천착해 손해가 상당했다. 영락제는 해금령을 완화하고, 후한 하사품을 내려주는 것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인도 각국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민간 무역의 활성화보다는 각국 사절단들을 대접해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는데 관심이 많아서 무역 적자가 많았다.

영락제 이후의 황제들이 하사품의 감액, 교역품에 대한 면세 조치 중단, 사절단의 규모 축소와 같은 조치를 취하자, 영락제가 구축한 조공 무역은 쇠퇴 일로를 겪었다. 게다가 영토를 넓히거나 새로운 작물이나 기술을 확보한다던가 무역량을 크게 증대시켜 재정을 풍족하게 했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실익은 아예 없었다. 이후, 명나라의 무역은 해금령의 통제를 피해서 이뤄지는 민간 무역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대외 원정은 북경의 안보를 확보하고 명나라의 위상과 영락제 자신의 위엄을 신장시켰다. 영락제는 이이제이와 대규모 원정, 국경 개척 등의 조치를 통해 초원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장하고, 만주에는 위소들을 설치해 여진족의 부족들을 통제했다. 하지만, 막대한 국력을 소모했음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몽골의 세력 약화와 각 부족의 분열 현상을 오래 유지시키지 못했다.

특히나, 동몽골의 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서몽골(오이라트)의 수령들에게 왕호를 내리고 군사 연맹을 맺는 등 많은 지원을 해준 것은 오이라트의 에센 타이시가 초원의 패권을 잡고, 명나라를 압박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지며 결국 막대한 재화와 병력을 쏟아부어 5차례나 원정을 한 보람도 크게 없이 얼마 안간 중국사 최대의 굴욕 중 하나라는 토목의 변을 당하게 된다. 북방 유목민을 굴복시키지 못했고, 심지어 예방전쟁으로서의 효과도 미미했다.

흔히 명나라의 최전성기라 불리는 영락제의 치세였지만, 국초의 명나라는 원대 말기의 대혼란을 재건하는 중이어서 사회 · 경제적으로 전성기라고 할 수 없었다. 기근과 흉년,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일어났고, 잦은 원정으로 인한 징병과 전쟁세 징수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폭동과 반란까지 터졌다.[30]

영락제는 농민들의 폭동과 반란에 철권으로 답했다. 반란 진압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고 징병과 징수는 계속되었다. .[31] 즉, 영락제 시대의 발전된 것처럼 보인 모습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의 심화는 정통 연간에 토목의 변이 일어나는 계기로 지적받는다.

또한 황제 독재권의 강화를 위하여 태조 홍무제의 환관 중용 기조를 이어받은 것에서 더 나아가 환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들을 준 것은 후대에 환관들이 발호하는 원인이 되었다.

명 태조 홍무제가 원대 환관들의 전횡을 반면교사해 환관들을 통제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홍무제는 환관들의 권한과 숫자를 대폭 축소하고 품계도 낮추었으며, 가혹한 규율을 적용했다. 또한 교육 수준까지 제한해 환관이 글자를 알지 못하게 했다. 홍무제의 환관 통제는 정말 강력하여 《명태조 보훈》에는 정사에 대해 말했다는 이유로 천자를 오래 모신 환관이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으며, 글을 아는 환관들을 내치거나 죽였다는 출처 불명의 일화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홍무제의 환관 통제는 치세의 전기에 해당하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홍무제 본인이 자신의 조치를 뒤엎고 환관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환관들에 대한 통제를 대폭 강화한 전기에도 환관들을 외교관에 임명해 해외 각국에 파견한 일이 자주 있었다. 애초에 의심이 많아 심복들조차 믿지 못해 금의위 같은 첩보 기관까지 운영한 홍무제에게, 자연스럽게 황제의 충복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관은 좋은 수족이었고, 이렇게나 좋은 수족을 쓰지 않는 것은 낭비였다.[32][33]

홍무제가 환관들을 다시 중용하는 시기는 그가 정력적으로 숙청을 벌이던 시기였다. 즉, 홍무제의 환관 기용은 무수히 많은 관료와 지휘관들을 숙청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수족이 되어줄 만한 가장 적절한 세력이 환관이었다는 이유로 이뤄진 일이었다. 홍무 연간의 후기가 되면, 환관들은 외교 뿐만 아니라 감찰, 감군, 교역, 징세, 정보 수집 등 다양한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하며 환관의 숫자와 조직의 규모도 대폭 확장된다. 정사에 대해 발언했다는 이유로 충직한 환관을 내쳤던 홍무제가 후기에 와서는 환관의 숫자를 줄일 것을 진언한 관료에게 화를 내며 처벌하고 있었다.

《명사》의 편찬자들은 명나라에서 환관이 처음 기용된 것도, 전횡을 일으킨 것도 영락제가 시작이라고 서술했지만, 홍무제의 실록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음이 드러난다. 명대 환관의 발호는 홍무제가 원인을 제공했지만, 청나라는 모종의 이유로 영락제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따라서 건문제 때까지 환관들이 황제의 수발을 드는 잡일꾼에 불과했다는 설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역사 왜곡이며 청산해야 할 적폐이다. 문제는, 영락제가 부족한 세력 기반을 벌충하고 반대 세력을 통제, 탄압, 감시하기 위해서 환관들의 권한을 대폭 신장시킨 것이다. 정난의 변 이후, 대규모 숙청인 임오순난을 진행했음에도 강남(중국) 지주들로부터 확실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기반이 불안정했던 영락제는 신뢰하기 힘든 관료들을 감시하고, 국정을 운영하는데 환관들을 기용했다. 환관이 군을 감독하는 것을 뛰어 넘어 지휘권을 행사하고, 주요 도시에 상주하며 각종 업무를 수행하거나 관료들을 감독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영락제는 건문제 축출과 정적들의 감시와 제거, 군부와 관료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환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동창이라는 비밀경찰 제도를 활용했다. 첩보기관인 금의위가 있었지만, 동창은 황제가 직접 지휘하는 데다가 황제의 수족인 환관들이 운영을 했기에 금의위보다 통제와 운영이 훨씬 편리했다. 환관들이 명나라의 멸망 때까지 권력을 전횡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주었고, 실제로 명나라는 후한 및 당나라와 함께 환관들의 전횡이 가장 심했던 왕조 중 하나였는데, 명나라의 멸망에 일조한 유근, 왕진, 위충현 등은 모두 환관 출신이었다.

명대 환관의 발호는 명나라의 멸망 원인으로 지적될 정도로 폐해가 심각했다. 다만, 환관의 권력은 황제의 권력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환관들은 언제든 제거당할 수 있었다. 환관들의 전횡은 황제라는 배경을 믿고 날뛴 것이었고, 때로는 황제의 명을 받고 그의 욕망을 대신 채워 주다가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일정한 선을 넘으면, 이들은 즉시 황제에게 숙청당했다. 유근은 횡포가 도를 넘자, 정덕제에게 제거당했고 위충현도 숭정제에게 죽임을 당했다. 황제는 모든 비판과 인민의 분노를 환관에게 몰아 주고 본인은 환관에게 속았지만, 결국 간신을 쳐내어 국정을 바로 세웠다는 면죄부와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수족이 되어줄 다른 환관을 찾았다.

명나라의 환관들은 자국에서만 욕심을 채우는 걸로는 부족했는지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으로 가서 은을 내놓으라며 깽판을 쳤고,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환관이라면 이를 갈았다.[34]

또한 명나라의 수도가 북경으로 옮겨진 점도 비판이 있다. 수도를 북경으로 천도한 이유야 당연히 찬탈자이기 때문에 불만세력이 많이 숨어있는 남경보다는 영락제 본인의 본거지인 북경으로 세력을 옮기는 편이 '그에게는' 훨씬 더 나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에게 적극적인 대외 원정을 자주 했던 영락제의 입장에서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에도 북경이 남경보다 훨씬 나은 곳이었다. 그러나 북경의 수도로서의 지정학적 위치는 유목민계 정복 왕조 입장에선 훌륭하지만 한족 왕조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영락제 못지않게 북방 유목민에게 공세적이었던 당태종이나 한무제 등도 북경을 수도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북경이 수도가 된 역사는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유목 민족들이 세운 정복왕조일 때였고, 한족 왕조는 단 한번도 수도로 삼지 않았다가 명나라가 최초의 사례가 된 것이었다. 현대 대한민국만 봐도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인 국력인데도 수도가 국경에 가깝다는 것이 지속적으로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되는데, 당시 명나라 역시 최전방에 수도를 두는 것 자체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중국이 강력해서 유목세력들에게 계속 공세를 퍼붓는 입장이라면 몰라도 중국이 쇠약해질 때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북방의 몽골족만주족 등이 세력을 떨치면서 명나라는 수도가 적군의 근거지와 너무 가까워서 무방비로 노출되고 공격받는 사태가 자주 벌어지게 되었다.[35][36] 그렇다고 이런 안보상의 단점을 무마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입지가 좋은 것도 아니고 또한 행정적 입지가 좋은 것도 아니다. 냉정히 말해 한족 왕조 입장에서 북경이 다른 대도시를 제치고 수도가 되어야할 큰 이유는 없으며, 그저 찬탈자라서 기존 정치 세력이 버티고 있는 난징이 부담스러웠다는 영락제 개인의 업보가 작용한 것이었다. 물론 유목민에게 공세를 퍼붓기에 좋은 위치라는 장점이 있긴한데, 이조차도 상술되었듯 장기적이고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유목민이 수도를 쉽게 약탈하는 사태를 허용하였다.

한마디로 훗날 명나라의 멸망을 부른 무능한 황제들의 막장 행태로 대표되는 국가 막장 테크의 씨앗들이 이미 영락제 시절부터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즉, 영락제는 명나라세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세조와는 매우 유사한 점이 많았었는데 집권 과정은 물론이고 서로의 손자인 선덕제성종이 명군이며 증손자인 정통제연산군이 암군이었다.[37]

군사적 업적이 많고, 국가 체제를 완성시켰다는 점까지 보면 거의 도플갱어 수준이다. 그나마 조선의 세조보다는 나은 점이 있는데 일단 영락제의 외정 업적은 중국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크다.[38][39] 또한 영락제는 환관에게 힘을 실어주었을망정 세조처럼 자신의 정치력만 믿고 유력한 공신들을 방조하지는 않았다.[40] 물론 집권 과정의 부당함과 무자비함, 저지른 실책은 세조랑 닮고 스케일에서는 더 심해서 욕을 먹는다.

몽골 원정과 베트남 정복 때문에 몽골과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극악무도한 침략자로 여겨진다.

4. 조선과의 관계

성조 영락제의 치세는 조선태종[41](1400년 ~ 1418년) 시대와 거의 겹치며 세종(1418년 ~ 1450년)의 재위 초반과 겹친다. 영락제는 태종과 직접 만난 적도 있었다. 태종이 왕자 시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연왕으로 있었던 영락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조선에 돌아와서 태종은 "연왕은 왕에만 머무를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태종이 간파한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태종도 정변으로 즉위했고 영락제 본인도 정변으로 즉위해서 그랬는지, 태종을 완전한 조선 국왕으로 인정해 준 것도 영락제였다.[42]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 둘은 참 궁합이 잘 맞았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는 태종이 직접 영락제에게 보낼 말을 골랐는데 사람들이 보기엔 그저 평범해보이는 말을 골라서 바치라고 하니 영문을 모른채 영락제 앞에 보냈더니, 영락제가 매우 기뻐하면서 조선 왕이 최고의 명마를 바쳤다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조선의 여자들이 상냥하고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황엄)을 여러 차례 보내 공녀(貢女)를 차출하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선인 후궁을 원한 것은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아무튼 명나라로 건너간 공녀들은 각각 첩지를 받아 후궁이 되었다. 즉 현인비 권씨[43], 미인 여씨[44], 강혜장숙여비 한씨[45], 순비 임씨, 소의 이씨, 미인 최씨, 정비, 송비, 황비였다. 그중 한 명인 권씨가 현인비로 봉해졌고, 한확의 누나인 한씨는 여비로 봉해져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다. 이 중 현인비 권씨는 상당히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당시 영락제의 황후였던 서씨가 죽고 없어서 후궁의 관할을 조선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권씨에게 맡기기도 했다.

그러나 권씨는 얼마 안 되어 병사했는데, 독살로 밝혀지자 한바탕 난리가 난 끝에 같이 조선에서 온 강비 여씨[46]가 범인으로 몰려 고문 끝에 사망했다. 헌데 나중에 실은 한족 출신인 장비 여씨가 독살범이고, 그 죄를 미인 여씨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장비 여씨가 다른 궁녀인 어씨와 공모한 것도 모자라 함께 환관과 간통까지 했다는 사실도 드러나서 격노한 영락제가 폭발하여[47], 관련자 2,800여 명이 죽었다. 여기에 얽힌 조선인 후궁 황씨와 이씨는 참형되었고, 임씨와 정씨는 고문을 못 견뎌 결국 자살했다.(어여의 난) 관련자를 처형하던 도중 어떤 이가 이왕 죽는 거 이판사판 격으로 영락제에게 일갈했는데, 그 내용이 "네 양기가 쇠해서 환관간통을 한 것인데 누굴 혼내냐?!"는 엄청난 독설이었다. 이야기의 출처는 엉뚱하게도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17일 무오 2번째 기사로, 같이 갔던 공녀가 용케도 살아남아 영락제 사후 조선으로 귀환해 증언한 것이었다. 이 일화는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다.[48]

한편 여비 한씨의 경우, 같이 갔던 황하신의 딸 황씨가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대국을 우습게 본 거냐?!"고 노발대발하는 영락제를 한씨가 "여염의 일을 국왕이 어떻게 알았겠습니까?"라고 말렸다.[49] 그 말에 감동한 영락제가 황씨에 대한 처벌을 그녀에게 맡기자 한씨는 황씨의 뺨을 때리는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 이 한씨는 영락제 사후 불과 24세의 나이로 궁인 30명과 함께 순장당하고 말았다. 죽기 전 한씨는 유언으로 공녀로서 같이 왔던 자신의 유모인 김흑(金黑)을 조선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인종 홍희제에게 부탁했다. 홍희제는 이를 들어주려 했으나 궁녀들이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 이야기를 조선에 알릴 수 있다며 반대해서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김흑은 이후 홍희제에게 '공인'(恭人)이란 작호를 받고 태황태후를 모시는 일을 하다가 세종 17년에 홍희제의 황후 장씨가 김흑을 비롯한 공녀들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위에 언급한 독살 사건을 증언한 공녀가 이 김흑이었다.

넘어간 조선 여인들이 하나같이 고초를 겪어 조선에서 말이 많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태종이 겉으로라도 명나라에 대해 저자세로 나온 대가로 조선에 엄청난 무역 특혜를 제공했다.[50]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내리는데, 태종은 이를 철저히 이용해 실리를 챙겼다. 본래 명나라는 조선과 베트남, 시암(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류큐 왕국과는 2년에 1회 조공 무역을 했다. 그런데 아직 몽골 세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태종 이방원이 친명 노선을 천명하자 명나라 측이 1년에 3회씩이나 조공 무역을 허용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이후 명나라는 손해가 컸는지 수시로 조공 무역을 줄이자는 얘기를 꺼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했다.[51] 태종이 명나라에 호의적인 정권이기도 했지만 태종이나 영락제나 모두 머리가 비상한 명군들이었고, 무엇이 두 나라 관계에 도움이 되는것인지 알았기 때문에 조•명 관계는 정도전이 버티고 있고 매우 꼬장꼬장했던 태조 이성계의 치세에 비해 매우 우호적으로 변했다.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 즉 성조 영락제)이 친히 대해 봤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했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했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수도인 금릉(남경)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그리고 태종과는 위의 일화처럼 연왕 시절 개인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고, 태종이 정도전을 숙청하면서 조•명 관계가 개선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친분과 정치적인 이해를 같이 한다는 점도 꽤나 작용했을 것이다. 여하튼 두 나라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1644년 명나라의 멸망까지 지속되어서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음에도 지속적으로 명나라를 찾는 목소리가 많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태종은 영토만큼은 지킨다는 방침을 세워 재위 내내 이 방침을 고수했다. 명나라가 조선의 동북 지역에까지 살고 있었던 여진족을 직할로 통치하겠다는 소식을 듣자 태종은 즉시 관련 역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명나라의 주장을 반박했으며, 심지어는 마지막에 "폐하 아버지께서도 이건 인정하신 거니까 태클 걸지 마셈."이라는 말까지 덧붙여 결국 동북 지역 여진족을 계속 조선이 관리하라는 말을 받아냈다. 물론 입만 살진 않고 유사시를 대비하여 북방 경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그저 저자세로만 나가지는 않은 것이다. 이러한 방침은 영락제의 치세를 살았던 세종대왕 대에도 더욱 강력한 대여진 정책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런 태종도 영락제가 베트남을 정복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대의 예를 게을리하다간 조선도 베트남처럼 명나라에게 침공의 빌미를 줄 수 있다고 말하며, 100여 명이 넘는 문신들을 모아놓고 영락제의 베트남 정벌을 축하함을 주제로 글을 쓰게 한 후, 태종이 직접 심사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태종은 신료들이 영락제가 침공하면 대적할 자가 없다고 두려워하자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반박하며 명나라의 침공에 대비해 외교적인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며,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주장하면서 명군과의 전쟁에 철저히 대비하기도 했다.

실제로 태종은 여진족 관련 문제로 영락제의 명나라와 충돌한 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 사이에 대립이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인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했다. 그러나 그 곳의 여진족들은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하며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해 강력한 압력을 행사했고, 결국 힘이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의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의 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000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했으며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병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했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함께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태종은 자신의 상국인 명나라 황제를 속이기로 작정했고, 태종의 계책은 성공해서 외교적인 문제로까지는 비화되지 않았다.

한편 태종은 양녕대군을 영락제의 딸과 혼인시키기 위해 조선에 단골 사신으로 오던 황엄에게 타전하여 좋은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이후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흐지부지되었다. 실제로 명 황실과의 통혼이 성사되었다면 양녕대군의 폐위는 어렵게 되어 양녕대군이 조선의 제4대 왕으로 즉위했을 가능성이 크며, 세종의 치세 또한 존재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영락제가 고려 시대에 세워진 거대 사찰인 흥왕사의 금탑을 탐내어 사신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자, 조선에서 논쟁 끝에 결국 주었다는 이야기가 한국 인터넷상에 떠돌아다니는데, 정작《조선왕조실록》이나[52]명사》 <조선열전>에서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라 신빙성이 의심된다.

5. 가족

5.1. 조상

5.2. 아내

5.3. 자녀

5.3.1. 황자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비고
1남 황태자(皇太子) 주고치 1378년 1425년 훗날의 제4대 황제 홍희제
2남 한왕(漢王) 주고후 1380년 1426년 반란을 일으킨 죄로 봉국 폐지
3남 조간왕(趙簡王) 주고수 1383년 1431년
4남 황자 주고희 1392년 요절함.

5.3.2. 공주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비고
1녀 영안공주 주옥영 1377년 1417년
2녀 영평공주 1379년 1444년
3녀 안성공주 1384년 1443년
4녀 함녕공주 1385년 1440년
5녀 상녕공주 1387년 1408년

6. 여담

7. 대중매체에서

7.1. 드라마

7.1.1. 정화하서양(국내명: 정화의 대항해, 2009)

전반부의 진 주인공 급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정화의 영원한 주군이자 절대권력과 부를 지닌 스폰서로 등장한다. 황제 즉위 후 엄청난 재정을 사용하여 지속적으로 정화를 믿고 아끼면서 지원한다. 그러나 홍무제의 유지[62]와 대항해 정책을 반대하는 보수 관료 세력과 타협하면서 싸우고 아들들의 권력 투쟁과 문헌 편찬, 전국 각지의 천재지변, 티무르의 준동, 대운하 보수, 베이징 건설, 자금성 건설, 장성 축조, 황릉 건설, 몽골 원정[63], 정화의 항해 비용, 항해 때 팔아야할 물건 구입, 외국 사신의 선물 비용, 부선장[64]의 "정화의 모함" 등을 해결하느라 고생, 고생하며 자금성과 베이징 공역이 끝나고 항해를 멈추고 민간에게 맡기고 해외에서 자체적으로 오게 하려하자 정화가 겁을 먹으나[65] 머잖아 정화가 프랑스, 이탈리아 사람을 데려오는데 극진히 대접하지만 대화를 하면서 중국와 달리 유럽해상 진출적극적이면서도 무력적이고 욕심이 없으면서 무기성능이 뛰어난 것도 있는 등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경계하고 내심 항해에 대해 생각을 하다 결국 몽골 원정길에 죽는 그날까지 지속적으로 정화와 대항해를 지원한다.

배우는 마오쩌둥 전문 배우로 유명한 원로 배우 당국강이 맡았다. 제갈량이나 옹정제를 연기하던 40대의 젊은 시절이 아닌 50대 중후반의 적지 않은 나이로 맡은 배역임에도 30대 후반부터 장 ~ 노년기의 모습까지 소화하며 어항의 금붕어를 생으로 뜯어 먹는 등 광기 어린 열연과 수많은 액션씬을 선보였다. 특히 정난의 변 전후로는 역사적 고증을 살리려면 연출이 조금만 엇나가도 어린 조카 건문제만 불쌍해보이기 일쑤임에도 성깔 화끈하지만 감정 기복도 심한 아직 덜 다듬어진 간웅이 완전체로 진화해나가는 과정을 묘사하는데, 가히 중국 드라마의 숱한 역적(...)들 중 손꼽히는 카리스마를 선보인다. 정난의 변 전후 줄거리는 그야말로 공훈 배우 당국강의 연기력이 폭발하는 호연의 연속인데, 이런 주체의 강렬한 캐릭터 때문에 꿋꿋하게 살아남는 잡초 같은 서사를 부여받은 주인공 정화의 존재감이 흐려진다는 지적이 잠시 나왔을 정도였다.

7.1.2. 납첩기3(2016)

조연으로 등장한다. 건문제의 장남 주문규(화간태자)를 잡아온 주인공을 치하했고 정화를 도와 해외로 가서 건문제를 찾을 것을 명령했다.

7.1.3. 대명풍화(2019)

중국의 베테랑 배우인 왕학기(왕쉐치)가[66] 맡아 열연했으며 남자 주인공인 선덕제의 할아버지로 등장한다. 조카의 황위를 빼앗은 것에 죄책감이 심해 홍무제에게 꾸중을 듣는 악몽을 자주 꾼다. 무인 출신답게 호전적인 성격의 황제로 정치보다는 군대와 전쟁을 매우 좋아한다. 특히 작중에서 용포보다는 갑주를 입는것을 좋아하며 직접 전쟁에 나서는 일이 많으며 문관보다는 무관을 더 우대해주어 무관들에게 신망을 받는다. 하지만 이로 인해 황태자에게만 국정을 맡기고 아예 소홀히 하고 있으며 그가 벌이는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는데도 전쟁을 좋아하고 계속 나서는터라 황태자와 신하들이 우려한다.

가족과 관련되어서 자식들 때문에 속을 썩이는데, 인자한 성격의 장남을 아끼나 장남은 병약하고 차남은 포악한 성격의 깡패에다 삼남은 야심만만해서 차남과 삼남이 황위를 찬탈할까봐 우려한다. 특히 차남인 주고후의 능력은 인정하나 그가 걸핏하면 폭력을 일삼아 문제를 일으키고 다니다보니 속을 썩는다. 그러던 도중 손자인 주첨기가 뛰어난 능력을 보이자 장남이 오래 살지 못하더라도 손자가 잘해낼것이라 믿고 손자를 아끼며 곁에 두고 제왕학을 가르키며 사실상 후계자로 삼는다. 몽골군이 대규모로 침공했을때 50만의 원정군을 이끌고 가서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나 이미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된 상황이라서 나중에가면 영락제도 후사를 결정해야하는데 역사와 다르게 황태자는 오래 못살것이니 원정을 나가있는 차남을 황제로 정하며 밀지를 몰래 써서 양사기에게 전한다.[67] 임종 때는 주첨기를 부르며 "황태자와 왕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다. 사후 황태자의 꿈에서 등장하는데, 황태자에게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은 전쟁을 벌여 너와 신하들,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며 사과하고 "네가 평화로운 나라를 만들어라."는 말을 남기며 말을 타고 사라진다.

7.1.4. 산하월명(2022)

배우 풍소봉이 주체 역을 맡았다. 아역일 때부터 똑똑하고 활발하며 고집이 있다. 금의위 수장으로서 많은 탐관과 원의 첩자들을 제거했다. 친왕 중 무예와 용병술이 제일 뛰어나서 군사적 요지인 북평을 맡게 된다. 천도를 한다면 북평으로 해야 국경을 오랑캐로부터 쉽게 지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장남이 무예를 못하니 차남을 세자로 해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아내의 만류로 그 생각은 접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거뒀고 장군들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받게 된다. 건문제가 삭번을 추진하며 번왕들을 죽이자 연왕은 살아남기 위해 미친 척을 하고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건문제는 연왕을 직접 제거할 대의명분이 없어서 연왕의 수하들을 범죄자로 몰아 연왕의 손발을 묶어버릴 생각이었는데, 참지 못한 연왕이 결국 800명의 군사로 "간신 처단과 선황의 명령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거병했다. 그동안 무패전승의 장군이었으나 동창 전투에서 패하고 장옥도 잃어서 슬퍼했다. 행군할 때 "공자, 맹자의 고향에 폐를 끼쳐선 안 된다."며 우회했다. 남경을 점령하고 제태, 황자징, 방효유, 연자녕 등의 간신과 일가족을 모두 처형했다.

7.1.5. 상식(2022)

삼국지에서 관우를 맡았던 우영광이 영락제를 맡았다. 1화부터 영락 20년이라 영락제 분량이 적다. 승마도 못할 정도로 뚱뚱한 태자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다. 엄청난 무예를 지닌 태손에 대해서는 매우 흡족해한다.

7.1.6. 금의야행(2024)

영락제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번왕은 선황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다라는 어명을 도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건문이 숙부들을 죽이려 하자 숙부 비간을 죽인 주왕처럼 되지 말라고 간언했다. 북평에 돌아간 후 동생 오왕의 자살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고 시장에서 실성한 것처럼 연기를 하며 뒤로는 거병을 준비했다. 유능한 충신을 단순히 공이 너무 많다고 죽여놓고 신하들 앞에서 공신이 도적들에게 살해당했다며 눈물을 흘리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7.1.7. 용의 눈물

배우 강만희가 배역을 맡았다. 잠깐 등장해서 양녕대군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상기한 십족의 에피소드가 나온다.

7.1.8. 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 후반부에 등장한다. 배우 문종원이 연기했다. 이땐 황제 등극했을 때는 아니고 연왕일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이방원을 만나는 역할로 나온다. 대사를 한국어로 하는데, 드라마 편의상 한국어로 처리한게 아니라 작중 유모고려 출신이어서 조선말을 할 줄 안다는 설정을 붙였다.[68] 다만 첫 등장 당시에는 명나라 말로 말하고, 이방원의 조선말은 하륜이 통역해주다가 사실 연왕이 조선말을 할 수 있었기에 조선말로 대화하는 것으로 연출된다. 그래서인지 조선말을 쓰는 건 대부분 이방원과 대화할 때이다. 마지막 등장은 조선으로 돌아가는 이방원을 배웅할 때인데, 이때 서로의 무운을 빌어줬다. 이후 조선에선 주요 세력들이 다 주원장 사망 이후 연왕이 반란을 일으킬거라며 조선에도 큰 정치적 풍랑이 일 것임을 예견하며, 이후 실제 명과 조선 모두 쿠테타군이 승리하면서 영락제도 옥좌에 오르게 된다.

7.2. 만화

무협지에 가장 많이 배경으로 쓰이는 시간대가 바로 영락제 때이며 영락제 자신도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곤 한다. 보통 무공이 강하고 매우 호전적이며 유능한 군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인지 한백무림서에서는 영락제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한백무림서에서 무림의 균형은 사패, 팔황, 구파와 황실이 지키는데 이 황실의 수장이 바로 영락제. 한백 무림서의 핵심 인물인 진천의 장인이기도 하고 무당마검에선 친정을 하여 챠이와 맞대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7.2.1. 꼴(만화)

허영만에서는 황제가 되기 전에는 풍채가별로였는데 크고 아름다운 수염을 기른 후부터는 관상이 바뀌어 저 초상화처럼 상당히 후덕하고 호방해졌다고 한다.

7.3. 게임

7.3.1. 징기스칸 시리즈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4에서 명나라 본명인 주체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정치 83, 전투치는 무려 96, 지모 86이고 특기로 농업, 건설, 문화, 외교, 기동, 돌격, 공성 복병, 병과 적성은 보병 A, 궁병 A, 기병 S, 수군 C로 동아시아 문화권 최강의 먼치킨이다. 혈연 무장이라는 메리트가 있어서 병사를 더 많이 이끌 수 있으니 가히 야전에서는 적수가 없다. 특히 등장 시점에서 연령 11세[69]라 10대 초반부터 세계정복에 나설 수 있다. 명을 컴퓨터에게 맡겨놓으면 시간이 지난 후 정난의 변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걸 보고 나면 이름이 본명인 '주체'에서 '영락제'로 개명된다.

7.3.2.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전작들에선 어째서인지 평범 이하의 스탯을 받았지만, 평가가 일신된 Europa Universalis IV에서의 시대상 등장하지는 않으나 영락제는 군주 능력치 5 6 6으로, 최고 능력치가 6 6 6임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보통 도합 능력치가 14를 넘어야 최고급 군주라고 불러주는데, 명나라에서는 14를 넘는 군주가 영락제와 6 4 6인 홍무제뿐이다. 동시기 왕조인 조선은 유일하게 4대 군주가 6 5 5로 이 기준을 만족한다.

7.3.3.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페이스북 판인 Assassin's Creed: Discover Your Legacy에서는 성전기사단의 일원으로 등장. 방효유와 리 통의 부모를 비롯한 암살단 용의자들을 잡아다 모조리 처형[70]하지만 결국은 1424년 리 통에게 암살당한다.

7.3.4. 도미네이션즈

영락제의 꽃병이 유물로 등장한다.

7.3.5. 문명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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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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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권 「곽자흥등전(郭子興等傳)」 123권 「진우량등전(陳友諒等傳)」 124권 「확곽첩목아등전(擴廓帖木兒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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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권 「서달등전(徐達等傳)」 126권 「이문충등전(李文忠等傳)」 127권 「이선장등전(李善長等傳)」
서달 · 상우춘 이문충 · 등유 · 탕화 · 목영 이선장 · 왕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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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권 「양홍등전(楊洪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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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신 · 팽소 · 주경(周經) · 경유 · 예악 · 민규 · 대산
184권 「주홍모등전(周洪謨等傳)」
주홍모 · 양수진 · 장원정 · 부한 · 장승 · 완성 · 부규 · 유춘 · 오엄 · 고청 · 유서
185권 「이민등전(李敏等傳)」
이민 · 가준 · 황불 · 장열 · 사종 · 증감 · 양경 · 서각 · 이개 · 황가 · 왕홍유 · 총란 · 오세충
186권 「한문등전(韓文等傳)」
한문 · 장부화 · 양수수 · 허진 · 옹태 · 진수(陳壽) · 번형 · 웅수 · 반번 · 호부 · 장태 · 장내 · 왕경(王璟) · 주흠
187권 「하감등전(何鑒等傳)」
하감 · 마중석 · 육완 · 홍종 · 진금(陳金) · 유간 · 주남 · 마호
188권 「유천등전(劉蒨等傳)」
유천 · 여충 · 조우 · 대선 · 육곤 · 장흠(蔣欽) · 주새 · 탕예경 · 허천석 · 장사륭 · 장문명 · 범로 · 장흠(張欽) · 주광 · 석천주
189권 「이문상등전(李文祥等傳)」
이문상 · 손반 · 호관 · 나교 · 엽쇠 · 대관 · 황공 · 육진 · 하양승 · 하준
190권 「양정화등전(楊廷和等傳)」 191권 「모징등전(毛澄等傳)」
양정화 · 양저 · 장면 · 모기 · 정이 모징 · 왕준(汪俊) · 오일붕 · 주희주 · 하맹춘 · 풍희 · 서문화 · 설혜
192권 「양신등전(楊愼等傳)」
양신 · 왕사 · 장충 · 유제 · 안반 · 장한경 · 장원 · 모옥 · 왕시가 · 정본공 · 장왈도 · 양회 · 장찬 · 곽남
193권 「비굉등전(費宏等傳)」
비굉 · 적란 · 이시 · 고정신 · 엄눌 · 이춘방 · 진이근 · 조정길 · 고의
194권 「교우등전(喬宇等傳)」
교우 · 손교 · 임준 · 김헌민 · 진금(秦金) · 조황 · 추문성 · 양재 · 유린 · 장요(蔣瑤) · 왕정상
195권 「왕수인전(王守仁傳)」 196권 「장총등전(張璁等傳)」
왕수인 장총 · 계악 · 방헌부 · 하언
197권 「석서등전(席書等傳)」 198권 「양일청등전(楊一淸等傳)」
석서 · 곽도 · 웅협 · 황종명 · 황관 양일청 · 왕경(王瓊) · 팽택 · 모백온 · 옹만달
199권 「이월등전(李鉞等傳)」
이월 · 왕헌 · 호세녕 · 이승훈 · 왕이기 · 범총 · 왕방서 · 정효
200권 「요막등전(姚鏌等傳)」
요막 · 장정 · 오문정 · 채천우 · 첨영 · 유천화 · 양수례 · 장악 · 곽종고 · 조시춘
201권 「도염등전(陶琰等傳)」
도염 · 왕진(王縝) · 이충사 · 오정거 · 방양영 · 왕광 · 왕월 · 서문 · 장방기 · 한방기 · 주금 · 오악
202권 「요기등전(廖紀等傳)」
요기(廖紀) · 왕시중 · 주기옹 · 당룡 · 왕고(王杲) · 주용 · 문연 · 유인 · 손응규 · 섭표 · 이묵 · 주연 · 가응춘 · 장영명 · 호송 · 조병연
203권 「정악등전(鄭岳等傳)」
정악 · 유옥 · 왕원석 · 구천서 · 당주 · 반진 · 이중 · 구양탁 · 도해 · 반훈 · 여경 · 구양중 · 주상(朱裳) · 진찰 · 손무 · 왕의(王儀) · 증균
204권 「진구주등전(陳九疇等傳)」 205권 「주환등전(朱紈等傳)」
진구주 · 적붕 · 손계로 · 증선 · 정여기 · 양수겸 · 상대절 · 해일귀 · 양선(楊選) 주환 · 장경 · 호종헌 · 조방보 · 이수 · 당순지
206권 「마록등전(馬錄等傳)」
마록 · 정계충 · 장규 · 정일붕 · 당추 · 두란 · 엽응총 · 해일귀 · 육찬 · 소경방 · 유세양 · 위양필
207권 「등계증등전(鄧繼曾等傳)」
등계증 · 주제 · 양언 · 유안 · 설간 · 양명(楊名) · 곽홍화 · 유세룡 · 장선 · 포절 · 사정천 · 왕여령 · 양사충
208권 「장근등전(張芹等傳)」
장근 · 왕응진 · 소명봉 · 제지란 · 원종유 · 허상경 · 고제 · 장교 · 여산 · 위상신 · 여관 · 팽여실 · 정자벽 · 척현 · 유회 · 전미 · 홍원 · 주사겸 · 안경
209권 「양최등전(楊最等傳)」
양최 · 풍은 · 양작 · 주이 · 유괴 · 심속 · 심연 · 양계성 · 양윤승
210권 「상교등전(桑喬等傳)」
상교 · 사유 · 하유백 · 서학시 · 여여진 · 왕종무 · 주면 · 조금 · 오시래 · 장충 · 동전책 · 추응룡 · 임윤
211권 「마영등전(馬永等傳)」 212권 「유대유등전(俞大猷等傳)」
마영 · 양진 · 왕효 · 주상문 · 마방 · 하경 · 심희의 · 석방헌 유대유 · 척계광 · 유현(劉顯) · 이석 · 장원훈
213권 「서개등전(徐階等傳)」 214권 「양박등전(楊博等傳)」
서계 · 고공 · 장거정 양박 · 마림 · 유례건 · 왕정(王廷) · 갈수례 · 근학안
215권 「왕치등전(王治等傳)」
왕치 · 구양일경 · 주홍조 · 첨앙비 · 낙문례 · 정이순 · 진오덕 · 왕문휘 · 유분용
216권 「오산등전(吳山等傳)」
오산 · 육수성 · 구경순 · 전일준 · 황봉상 · 여계등 · 풍기 · 왕도(王圖) · 옹정춘 · 유응추 · 당문헌 · 이등방 · 채의중 · 공내 · 나유의 · 요희맹 · 허사유 · 고석주
217권 「왕가병등전(王家屏等傳)」 218권 「신시행등전(申時行等傳)」 219권 「장사유등전(張四維等傳)」
왕가병 · 진우폐 · 심리 · 우신행 · 이정기 · 오도남 신시행 · 왕석작 · 심일관 · 방종철 · 심확 장사유 · 마자강 · 허국 · 조지고 · 장위 · 주갱
220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1권 「원홍유등전(袁洪愈等傳)」
원홍유 · 왕정첨 · 곽응빙 · 경정향 · 왕초 · 위시양 · 학걸 · 조참로 · 장맹남 · 이정 · 정빈
222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3권 「성응기등전(盛應期等傳)」 224권 「엄청등전(嚴清等傳)」
성응기 · 주형 · 반계순 · 만공 · 오계방 · 왕종목 · 유동성 · 서정명 엄청 · 송훈 · 육광조 · 손농 · 진유년 · 손비양 · 채국진 · 양시교
225권 「장한등전(張瀚等傳)」 226권 「해서등전(海瑞等傳)」
장한 · 왕국광 · 양몽룡 · 양외· 이재(李戴) · 조환 · 정계지 해서 · 구순 · 여곤 · 곽정역
227권 「방상붕등전(龐尚鵬等傳)」
방상붕 · 송의망 · 장악 · 이재(李材) · 육수덕 · 소름 · 가삼근 · 이이 · 주홍모 · 소언 · 손유성 · 사걸 · 곽유현 · 만상춘 · 종화민 · 오달가
228권 「위학증등전(魏學曾等傳)」 229권 「유대등전(劉臺等傳)」
위학증 · 이화룡 유대 · 부응정 · 왕용급 · 오중행 · 조용현 · 애목 · 심사효
230권 「채시정등전(蔡時鼎等傳)」 231권 「고헌성등전(顧憲成等傳)」
채시정 · 만국흠 · 요신 · 탕현조 · 녹중립 · 양순 · 강사창 · 마맹정 · 왕약림 고헌성 · 고윤성 · 전일본 · 우공겸 · 사맹린 · 설부교 · 안희범 · 유원진 · 엽무재
232권 「위윤정등전(魏允貞等傳)」
위윤정 · 왕국 · 여무형 · 이삼재
233권 「강응린등전(姜應麟等傳)」
강응린 · 진등운 · 나대굉 · 이헌가 · 맹양호 · 주유경 · 왕여견 · 왕학증 · 장정관 · 번옥형 · 사정찬 · 양천민 · 하선
234권 「노홍춘등전(盧洪春等傳)」 235권 「왕여훈등전(王汝訓等傳)」
노홍춘 · 이무회 · 이기(李沂) · 낙우인 · 마경륜 · 유강 · 대사형 · 조학정 · 옹헌상 · 서대상 왕여훈 · 여무학 · 장양몽 · 맹일맥 · 하사진 · 왕덕완 · 장윤의 · 추유연
236권 「이식등전(李植等傳)」 237권 「부호례등전(傅好禮等傳)」
이식 · 강동지 · 탕조경 · 김사형 · 왕원한 · 손진기 · 정원천 · 이박 · 하가우 부호례 · 강지례 · 포견첩 · 전대익 · 풍응경 · 오종요 · 오보수 · 화옥
238권 「이성량등전(李成梁等傳)」 239권 「장신등전(張臣等傳)」
이성량 · 마귀 장신 · 동일원 · 두동 · 소여훈 · 달운 · 관충병 · 시국주 · 진백우
240권 「엽향고등전(葉向高等傳)」 241권 「주가모등전(周嘉謨等傳)」
엽향고 · 유일경 · 한광 · 주국조 · 하종언 · 손여유 주가모 · 장문달 · 왕응교 · 왕기(王紀) · 손위 · 종우정 · 진도형
242권 「진방첨등전(陳邦瞻等傳)」
진방첨 · 필강무 · 소근고 · 백유 · 정소 · 적봉충 · 홍문형 · 진백우 · 동응거 · 임재 · 주오필 · 장광전
243권 「조남성등전(趙南星等傳)」 244권 「양련등전(楊漣等傳)」
조남성 · 추원표 · 손신행 · 고반룡 · 풍종오 양련 · 좌광두 · 위대중 · 주조서 · 원화중 · 고대장 · 왕지채
245권 「주기원등전(周起元等傳)」 246권 「만조천등전(滿朝薦等傳)」
주기원 · 요창기 · 주순창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만경 만조천 · 강병담 · 후진양 · 왕윤성
247권 「유정등전(劉綎等傳)」 248권 「매지환등전(梅之煥等傳)」
유정 · 이응상 · 진린 · 등자룡 · 마공영 매지환 · 유책 · 이약성 · 경여기 · 안계조 · 이계정 · 방진유 · 서종치
249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0권 「손승종전(孫承宗傳)」
주섭원 · 이운 · 왕삼선 · 채복일 손승종
251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2권 「양사창등전(楊嗣昌等傳)」
이표 · 유홍훈 · 전용석 · 성기명 · 하여총 · 서광계 · 문진맹 · 장덕경 · 방악공 양사창 · 오성(吳甡)
253권 「왕응웅등전(王應熊等傳)」 254권 「교윤승등전(喬允升等傳)」
왕응웅 · 장지발 · 설국관 · 정국상 · 진연 · 위조덕 교윤승 · 조우변 · 손거상 · 조광 · 진우정 · 정삼준 · 이일선 · 장위
255권 「유종주등전(劉宗周等傳)」 256권 「최경영등전(崔景榮等傳)」
유종주 · 황도주 최경영 · 황극찬 · 필자엄 · 이장경 · 유지봉
257권 「장학명등전(張鶴鳴等傳)」
장학명 · 동한유 · 조언 · 왕흡 · 양정동 · 웅명우 · 장봉익 · 진신갑 · 풍원표
258권 「허예경등전(許譽卿等傳)」
허예경 · 화윤성 · 위정윤 · 모우건 · 오집어 · 장정신 · 황소걸 · 부조우 · 강채 · 웅개원 · 첨이선 · 탕개원 · 성용 · 진룡정
259권 「양호등전(楊鎬等傳)」
양호 · 원응태 · 웅정필 · 원숭환 · 조광변
260권 「양학등전(楊鶴等傳)」
양학 · 진기유 · 웅문찬 · 연국사 · 정계예 · 정숭검 · 소첩춘 · 여응계 · 고두추 · 장임학
261권 「노상승등전(盧象昇等傳)」 262권 「부종룡전(傅宗龍等傳)」
노상승 · 유지륜 · 구민앙 부종룡 · 왕교년 · 양문악 · 손전정
263권 「송일학등전(宋一鶴等傳)」
송일학 · 풍사공 · 임일서 · 채무덕 · 위경원 · 주지풍 · 진사기 · 용문광 · 유가인 · 유지발
264권 「하봉성등전(賀逢聖等傳)」
하봉성 · 남거익 · 주사박 · 여유기 · 왕가정 · 초원부 · 이몽진 · 송사양 · 마희 · 왕도순 · 전시진
265권 「범경문등전(范景文等傳)」
범경문 · 예원로 · 이방화 · 왕가언 · 맹조상 · 시방요 · 능의거
266권 「마세기등전(馬世奇等傳)」
마세기 · 오인징 · 주봉상 · 유이순 · 왕위(汪偉) · 오감래 · 왕장 · 진량모 · 진순덕 · 신가윤 · 성덕 · 허직 · 김현
267권 「마종빙등전(馬從聘等傳)」 268권 「조문조등전(曹文詔等傳)」
마종빙 · 장백경 · 송공 · 범숙태 · 고명형 · 서견 · 녹선계 조문조 · 주우길 · 황득공
269권 「애만년등전(艾萬年等傳)」
애만년 · 이비 · 양구주 · 진우왕 · 후량계 · 장령 · 맹여호 · 호대위 · 손응원 · 강명무 · 우세위 · 후세록 · 유국능
270권 「마세룡등전(馬世龍等傳)」 271권 「하세현등전(賀世賢等傳)」
마세룡 · 하호신 · 심유용 · 장가대 · 노흠 · 진양옥 · 용재전 하세현 · 동중규 · 나일관 · 만계 · 조솔교 · 관유현 · 하가강 · 황룡 · 김일관
272권 「김국봉전(金國鳳等傳)」 273권 「좌양옥등전(左良玉等傳)」
김국봉 · 조변교 · 유조기 좌양옥 · 고걸 · 조관
274권 「사가법등전(史可法等傳)」 275권 「장신언등전(張愼言等傳)」
사가법 · 고홍도 · 강왈광 장신언 · 서석기 · 해학룡 · 고탁 · 좌무제 · 기표가
276권 「주대전등전(朱大典等傳)」
주대전 · 장국유 · 장긍당 · 증앵 · 주계조 · 여황 · 왕서전 · 노진비 · 하개 · 웅여림 · 전숙락 · 심진전
277권 「원계함등전(袁繼鹹等傳)」
원계함 · 김성 · 구조덕 · 심유룡 · 진자룡 · 후동증 · 양문총 · 진잠부 · 심정양 · 임여저 · 정위홍
278권 「양정린등전(楊廷麟等傳)」
양정린 · 만원길 · 곽유경 · 첨조항 · 진태래 · 왕양정 · 증형응 · 게중희 · 진자장 · 장가옥 · 진방언 · 소관생
279권 「여대기등전(呂大器等傳)」
여대기 · 문안지 · 번일형 · 오병 · 왕석곤 · 도윤석 · 엄기항 · 주천린 · 장효기 · 양외지 · 오정육
280권 「하등교등전(何騰蛟等傳)」
하등교 · 구식사
281권 「순리전(循吏傳)」
진관 · 방극근 · 오리 · 요흠 · 고두남 · 여언성 · 사성조 · 오상 · 사자양 · 황신중 · 하승 · 패병이 · 유맹옹 · 만관 · 엽종인 · 왕원 · 적부복 · 이신규 · 손호 · 장종련 · 이기(李驥) · 왕영 · 이상 · 조예 · 조등 · 증천 · 범충 · 주제 · 범희정 · 유강 · 단견 · 용사언 · 정적 · 전탁 · 당간 · 탕소은 · 서구사 · 방숭 · 장순 · 진유학
282·283·284권 「유림전(儒林傳)」
범조간 · 사응방 · 왕극관 · 양인(梁寅) · 조방 · 진모 · 설선 · 호거인 · 채청 · 나흠순 · 조단 · 오여필 · 진진성 · 여남 · 소보 · 양렴 · 유관 · 마리 · 위교 · 주영(周瑛) · 반부 · 최선 · 하당 · 당백원 · 황순요 · 진헌장 · 누량 · 하흠 · 진무열 · 담약수 · 추수익 · 전덕홍 · 왕기(王畿) · 구양덕 · 나홍선 · 오제 · 하정인 · 왕시괴 · 허부원 · 우시희 · 등이찬 · 맹화리 · 내여덕 · 등원석 · 공희학 · 안희혜 · 증질수 · 공문례 · 맹희문 · 중어폐 · 주면 · 정접도 · 정극인 · 장문운 · 소계조 · 주천 · 주서(朱墅)
285·286·287·288권 「문원전(文苑傳)」
양유정 · 호한 · 소백형 · 왕면 · 대량 · 위소 · 장이녕 · 조훈 · 서일기 · 조총겸 · 도종의 · 원개 · 고계 · 왕행 · 손분 · 왕몽 · 임홍 · 왕불 · 심도 · 섭대년 · 유부 · 장필 · 장태 · 정민정 · 나기 · 저권 · 이몽양 · 하경명 · 서정경 · 변공 · 고린 · 정선부 · 육심 · 왕정진 · 이렴 · 문징명 · 황좌 · 가유기 · 왕신중 · 고숙사 · 진속 · 전여성 · 황보효 · 모곤 · 사진 · 이반룡 · 왕세정 · 귀유광 · 이유정 · 서위 · 도륭 · 왕치등 · 구구사 · 당시승 · 초횡 · 황휘 · 진인석 · 동기창 · 원굉도 · 왕유검 · 조학전 · 왕지견 · 애남영 · 장부
289·290·291·292·293·294·295권 「충의전(忠義傳)」
화운 · 왕개 · 손염 · 모로 · 왕강 · 왕의(王禕) · 웅정 · 역소종 · 금팽 · 황보빈 · 장영(張瑛) · 왕정 · 만침 · 주헌 · 양충 · 오경 · 곽은 · 손수 · 허규 · 황굉 · 송이방 · 왕면 · 진문시 · 왕부 · 전순 · 주부 · 손당 · 두괴 · 황천 · 왕덕 · 왕일중 · 소몽양 · 장진덕 · 동진륜 · 공만록 · 관양상 · 서조강 · 희문윤 · 주만년 · 장요(張瑤) · 하천구 · 반종안 · 장전 · 하정괴 · 고방좌 · 최유수 · 정국창 · 당환순 · 이헌명 · 장춘 · 염생두 · 왕조곤 · 손사미 · 교약문 · 장병문 · 언윤소 · 길공가 · 형국새 · 장진수 · 등번석 · 장혼방 · 장윤등 · 장광규 · 이중정 · 방국유 · 하승광 · 방유 · 윤몽오 · 노겸 · 공원상 · 왕신 · 사기언 · 양지인 · 왕국훈 · 여홍업 · 장소등 · 왕도(王燾) · 장가징 · 서상경 · 완지전 · 학경춘 · 장극검 · 서세순 · 무대열 · 전조징 · 성이항 · 안일유 · 반홍 · 진예포 · 유진지 · 이승운 · 관영걸 · 장유세 · 왕세수 · 허영희 · 이정좌 · 노세임 · 유인 · 하섭 · 조흥기 · 하통춘 · 진미 · 심길신 · 노학고 · 진만책 · 허문기 · 곽이중 · 최문영 · 서학안 · 풍로운 · 채도헌 · 장붕익 · 유희조 · 왕손란 · 정양주 · 황세청 · 양훤 · 당시명 · 단복흥 · 간인서 · 사오교 · 도임 · 축만령 · 진빈 · 왕징준 · 정태운 · 하복 · 장나준 · 김육동 · 탕문경 · 허담 · 왕교동 · 장계맹 · 유사두 · 왕여정 · 윤신 · 고기훈 · 장요(張耀) · 미수도 · 경정록 · 석상진 · 서도흥 · 유정표
296·297권 「효의전(孝義傳)」
정렴 · 서윤양 · 전영 · 요비 · 구탁 · 최민 · 주완 · 오홍 · 주후 · 유근(劉謹) · 이덕성 · 심덕사 · 사정가 · 권근 · 조신 · 국상 · 왕준(王俊) · 석내 · 사오상 · 주오 · 정영 · 부즙 · 양성장 · 사용 · 하경 · 왕원(王原) · 황새 · 귀월 · 하린 · 손청 · 유헌 · 용사언 · 유자(兪孜) · 최감 · 당엄 · 구서 · 장균 · 왕재복 · 하자효 · 아기 · 조중화 · 왕세명 · 이문영 · 공금 · 양통조 · 장청아
298권 「은일전(隱逸傳)」
장개복 · 예찬 · 서방 · 양항 · 진회(陳洄) · 양인(楊引) · 오해 · 유민 · 양보 · 손일원 · 심주 · 진계유
299권 「방기전(方伎傳)」
활수 · 갈건손 · 여복 · 예유덕 · 주한경 · 왕리 · 주전(周顚) · 장중 · 장삼봉 · 원공 · 대사공 · 성인 · 황보중화 · 동인 · 오걸 · 능운 · 이시진 · 주술학 · 장정상 ,유연연,
300권 「외척전(外戚傳)」
진공 · 마공 · 여본 · 마전 · 장기(張麒) · 호영(胡榮) · 손충 · 오안 · 전귀 · 왕천 · 주능 · 왕진(王鎭) · 만귀 · 소희 · 하유 · 진만언 · 방예 · 진경행 · 이위 · 왕위(王偉) · 정승헌 · 왕승 · 유문병 · 장국기 · 주규
301·302·303권 「열녀전(列女傳)」
정월아 · 제아 · 정금노 · 노가랑 · 탕혜신 · 묘총 · 만의전 · 왕묘봉 · 당귀매 · 양태노 · 정은아 · 두묘선 · 초낭맹 · 호귀정 · 오길고 · 서아장 · 양옥영 · 우봉랑 · 예미옥 · 고형와 · 항숙미
304·305권 「환관전(宦官傳)」
정화 · 김영 · 왕진(王振) · 조길상 · 회은 · 왕직(汪直) · 양방 · 하정 · 이광 · 장종 · 유근 · 장영(張永) · 곡대용 · 이방 · 풍보 · 장경 · 진증 · 진구 · 왕안 · 위충현 · 왕체건 · 최문승 · 장이헌 · 고기잠 · 왕승은 · 방정화
306권 「엄관전(閹黨傳)」
초방 · 장채 · 고병겸 · 최정수 · 유지선 · 조흠정 · 왕소휘 · 곽유화 · 염명태 · 가계춘 · 전이경
307권 「영행전(佞倖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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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실록》에는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라고 되어 있지만, 당대에도 누가 생모인지 이미 논란거리였다. 1644년 명나라의 멸망 이전까지 논의가 터부시되었다가 이후 논의되기 시작했는데, 효자고황후 마씨가 맞다는 설, 달비(達妃)라는 설, 공비(碽妃)라는 설, 원 혜종의 비인 옹기라트씨라는 설, 마찬가지로 원 혜종의 비인 옹비(甕妃)라는 설, 원 혜종의 다른 비인 고려비(高麗妃)라는 설 등 다양하다. 이 세 사람은 원래 원 혜종의 비였다가 홍무제가 취한 사람들인데, 이 때문에 영락제가 원 혜종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적모, 즉 법적으로는 효자고황후 마씨가 어머니임이 확실하다.[2] 원래 묘호태종(太宗)이었으나, 제11대 세종 가정제 시대에 들어 묘호가 성조(成祖)로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영락제 재위기간에 대해 기록한 《명실록》의 제목은 그대로 《태종실록》으로 되어 있다. 다만 강건성세청나라가 편찬한 《명사》에는 재추존 후의 묘호인 <성조본기>로 올라가 있다.[3] 명나라개국공신으로 가장 공적이 높은 서달상우춘에게도 패배를 안긴 몽골군을 상대로 선전했다. 그래서 홍무제가 "북방에 연왕이 있으니 짐이 편안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4]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삼는 대신 주체를 황태자로 삼을 경우, 주체의 두 형이 반발하여 내분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5] 연(燕)은 춘추시대부터 오늘날의 허베이성 및 랴오닝성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을 부르는 이름이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연나라에서 비롯되어 남북조시대 당시 미천왕 시절부터 광개토대왕까지 고구려와 다투었던 선비 모용부의 전연후연의 국호이기도 했다. 《삼국지연의》에서 장비가 "연인(燕人) 장비가 왔다!" 하고 언급하는 부분이 이 지역을 의미한다.[6] 그 수양대군도 문종 생전에는 서로 사이 좋은 형제였고, 임금이 된 이후에서조차 형 문종에 대해서는 꽤 존경심이 어린 태도로 언급하는 장면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영락제와 의문태자도 비슷한 관계였던 걸로 생각된다.[7] 다만 사서라는 것은 사관이 입시하여 직접 듣고 기록한 사초에 바탕하여 작성되는 것이 기본인데, 영락제는 사관이 전혀 입시하지 못하는 내밀한 공간이나 전장에서 이뤄진 이야기들이 버젓이 정사에 실린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걸러낼 필요가 있다.[8] 참고로 이 동상은 사실 20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 이유는 원본이었던 석상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파괴되어 후에 금속으로 복원했기 때문이다.[9] 이만한 병력을 다른 지역도 아니고, 보급이 곤란한 사막과 초원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명의 국력과 행정력이 뒷받침해주기에 가능한 것이었다.[10] 황제가 초원으로 친정을 나간 사례 중에는 한 고조 유방흉노를 제압하기 위해 친정한 사례가 있지만, 백등산 포위전에서 대패하고 간신히 화친하여 귀환했다. 이밖에도 당 태종 이세민의 북벌이 있으나, 당 태종의 친정은 고비 사막이 아닌 내몽골돌궐족과 요동만주고구려를 향한 친정이었다.[11] 타타르, 이는 멸칭이었다. 주로 칭기즈 칸의 후예인 동몽골의 북원을 일컬었다.[12] 오이라트, 서몽골의 오이라트 4부 연합을 일컬었다. 동몽골 북원의 숙적이었다.[13] 물론 흉노가 완전히 근절된건 아니어서 한 무제 이후로도 계속 약탈과 교전이 있었다. 하지만 토목의 변처럼 나라가 휘청거릴 정도의 대규모 위협은 다시는 가하지 못했다.[14] 당대는 세종대왕의 재임 시절이었으나 태종 이방원이 실권을 쥔 채 아들 세종 위에 상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15] 그 유명한 이종무 장군의 제3차 대마도 정벌이다.[16] 전근대 시절 중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항해로 많은 재정이 소모되었다.[17] 이 원정이 왜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가설이 거론된다. 일반적으로 영락제가 재위 내내 공들인 중화제국 중심의 세계 질서 건설의 일환으로 여겨지지만 심지어는 "행방불명된 건문제를 수색하기 위한 항해였다."는 설도 있는 등 그 동기는 여전히 불분명하다.[18] 영락제 본인이 워낙 업무를 일 중독 수준으로 과로를 했고, 이로 인해 병을 얻게 된다.[19] 특히 한왕 주고후는 가장 영락제를 닮은 아들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뒤는... 선덕제 문서 참고.[20] 티무르 제국의 역사서인《승전기》에는 영락제가 "너 나한테 조공 7년이나 밀렸네? 죽고 싶어?"라고 어그로를 끌자 티무르는 "ㅇㅇ 그 밀린 7년치 내가 직접 갖고 갈테니 딱 기다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21] 오늘날의 베이징시.[22] 오늘날의 베트남.[23] 다만 이런 비교에 대해 영락제가 억울할 점은 별다른 견제가 없었음에도 반란을 일으킨 세조와 달리, 영락제는 조정에서 삭번 정책을 추진하여 반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 몰렸다는 점이다. 다른 번왕들이 쫓겨나거나, 죽는 모습을 보고 다음 차례가 자신이었기에 들고 일어난 거지, 황제가 되고 싶어 반란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궁지에 몰린 가 죽을 위기에 처해서 고양이를 물었는데 죽이는데 성공했던 것.[24] - 출처: 《중국인은 한국인보다 무엇이 부족한가》/ 장홍지에 지음/ 정광훈 번역/ 북폴리오. 다만, 이는 야사이기에 인용할 때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25] 홍무 연간에 일어난 호람의 옥 때 숙청당한 이들에 대해서는 동정론과 더불어 회서 공신 세력의 전횡도 지적받는 반면, 정난의 변 이후 희생당한 건문제파 관료들에 대해서는 동정론이 압도적이었다.[26] 정난의 변 문서 중 임오순난 부분 참조.[27] 영락제가 군주라는 것을 부정한 수준이 아니라 영락제 면전에서 조서를 쓰기 싫다며 붓과 종이를 내던졌고, 억지로 쓸 때 "연나라 도적 놈이 제위를 찬탈했다."고 쓴 것이다. 대놓고 모욕하는 것은 물론 역쿠데타선동한 셈인데, 이 정도면 영락제가 아니라 어느 사람 좋은 군주라고 해도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28] 다만 이는 후대 황제들의 책임도 있다. 방효유가 참살당한 뒤에도 충언하는 신하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영종 정통제가 오이라트군에게 사로잡히는 초유의 사태에서 총대를 매고 새 황제인 대종 경태제를 옹립하여 수도 북경을 굳건히 지킨 우겸, 황제의 연호를 언어유희삼아 세종 가정제에게 직언한 해서, 만주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명장 원숭환충신은 있었다. 문제는 영락제 못지않게 후대 황제들도 충신에 대한 대우가 박했다는 것이다. 우겸은 결국 멋대로 새 황제를 옹립했다는 이유로 정통제, 즉 천순제에 의해 처형당했고, 해서는 가정제의 미움을 사 쫓겨났으며 원숭환은 의심이 폭발한 의종 숭정제에 의해 처형당했다. 게다가 가정제, 만력제, 천계제 같은 암군들의 통치는 100여년 동안 명나라의 국력을 약화시켰다.[29]명희종실록》 권22에 영락제에 의해 방효유의 10족이 주멸되었다는 언급이 있긴 한데, 이것도 영락제 당대도 아니고 거의 200년이나 지난 뒤의 기록으로, 과장이나 왜곡이 첨부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30] 세금과 징병을 견디지 못하고 도주하여 유랑민이 되거나, 처자식을 파는 사례가 빈번했다.[31] 영락제의 말년에 일어난 반란들 중 가장 큰 민란은 산동 지방의 농민 수만 명이 가담한 당새아의 난이었다. 당새아의 반란군은 산동 지방 전체를 휩쓸었고, 진압군까지 격퇴했을 정도였다. 당새아의 난은 대규모 진압군을 재파병한 끝에 진압했으며, 진압 과정에서 명군 사상자와 반란군으로 몰려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간인 사망자가 다수 발생했다.[32] 《조선왕조실록》을 살펴 보면, 조선 태조 5년에 사신으로 온 환관 왕예(王禮)가 행패를 부려 접빈관을 폭행하는 일도 있었으며 왕예 외에도 수십 명의 환관들이 조선에 찾아왔다.[33] 금의위는 홍무 15년에 금위군을 개편해 만든 기관이다. 동창과의 차이라면, 외신(일반 관료)인 무관이나 종친이 우두머리였다는 것이다. 금의위는 동창과 협력해 업무를 수행하거나, 권한과 업무 영역이 겹쳐 마찰을 빚기도 했다. 금의위에 대한 일화로, 어느 관리가 지인들을 불러 연회를 주최한 후 다음날 홍무제를 만났는데 홍무제는 어제 무슨 일을 했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관리는 누구를 불러 언제부터 언제까지 무슨 음식을 먹었다는 등 아주 자세하게 말했고 홍무제는 거기에 자네는 참 정직하구만! 하고 만족하면서 그 관리 앞에 뭔가를 내밀었다. 그건 바로 어제 연회가 그대로 그려져 있던 그림이었다. 이 관리는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금의위는 홍무 20년에 홍무제가 폐지했다가 영락제가 다시 되살리고, 동창까지 추가했다.[34] 물론 그러면서도 조선은 명나라 환관들을 잘 대접했다. 이유야 한 번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간 황제에게 참소할테니까. 그리고 이 환관들이 악질적으로 조선을 뜯어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조선 출신 환관 윤봉처럼 뜯을 때는 뜯더라도 조선의 요청을 받아들여 금과 은의 조공을 중지시키는데 도와주는 식으로 도와준 경우도 없지는 않다.[35] 나중에 토목의 변경술의 변에서 북경이 오이라트군과 튀메드군에게 공격당하고, 말기에 청나라군이 북경을 공격하면서 영락제의 북경 천도가 큰 실책이 되었음이 드러난다. 이후로도 명말청초가 되고 요동 일대가 청나라에 넘어가면서 또 한번 수도의 취약함이 드러나는데 결국 숭정제의 죽음과 오삼계의 투항, 그리고 청나라의 북경 입성으로 명나라는 완전히 망하는 길로 접어든다. 물론 이는 다른 이유도 작용하긴 했지만. 이뿐 아니라 더 후대의 서양열강의 공격에서도 북경이 보하이만과 가까워 유목민 뿐 아니라 해양세력의 공격에도 취약하다는 것이 새로 드러나며 일제와의 전쟁에서도 또또 증명되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지금 현재까지도 미국과의 파워게임에 있어서 북경이 해안가 및 한반도와 너무 가깝다는 것은 여전히 중국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미국에게 있어서 한반도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땅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항상 나오는게 북경을 타격하기 좋은 '불침항모'라는 것이다. 영락제의 북경 천도는 유목민을 상대로도, 서양열강을 상대로도, 일제를 상대로도, 미국을 상대로도 계속해서 수백년에 걸쳐서 중국의 안보에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다.[36] 애초에 이 북경 일대는 오대십국시대에서 송나라 시기까지 연운 16주라 하여 중국과 이민족 지역의 경계면에 있는 변방 지역으로, 송나라가 국방에서 힘을 못 쓴 이유가 만리장성과 가깝고 지형적으로도 방어에 좋은 이 땅을 놓쳤기 때문이었는데 영락제는 거기를 수도로 삼은 것이다. 남한으로 치면 파주시동두천시 같은 곳을 수도로 삼은 것이고, 북한으로 치면 신의주시의주군 같은 곳을 수도로 삼은 것이다. 물론 북경도 수도였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니나 그것도 먼 옛날의 일이었고 통일제국의 수도였던 적은 없었다.[37] 그래도 정통제는 2번째 집권했던 천순제 때는 선정을 펼치며 원나라부터 내려오던 악습을 없애는 등 연산군과 비교할 정도까지는 아니다.[38] 실제로 영락제 이후 명나라는 더이상 주변국들에게 패권을 행사하거나 정복 전쟁을 하지 못하고, 영토 유지에만 매달리게 되었다.[39] 그러나 상술되었듯 몽골원정은 몽골을 굴복시켜 명나라 세력권에 넣지도 못했고 심지어 예방전쟁의 성과조차 없었다. 정화의 원정 역시 영토,경제,기술,자원 어느 면에서 따져봐도 아무런 구체적 성과가 없었다. 오죽 실익이 없으면 정화의 원정이 이뤄낸 성과라고 적혀있는게 고작 '중화의 위용을 드높였다'라는 것 뿐인데 이조차도 틀린 말인게 당시 정화 함대가 거쳐간 인도양과 동아프리카 여러 소국이나 부족들을 조공책봉 세계관에 편입시킨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기존에 이미 조공책봉 질서에 있던 조선 같은 나라에서 역시 중화는 대단해 새삼 충성충성 이런 반응을 보인것조차 아니다.[40] 세조는 구성군남이 등 신공신을 양성해 기존 공신들을 견제하려 했지만, 이들 모두 세조 사후에 기존 공신 세력에 밀려 몰락하는 등 세조의 정난공신 견제책은 실패로 끝났다.[41] 우연의 일치인지 영락제의 묘호도 원래는 태종이었다.[42] 태조 이성계홍무제 주원장이 살아 있었을 때는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정도전이 주도한 진법 훈련이나 조선을 경계했던 주원장의 움직임이 맞물린 탓이었다. 이 탓에 주원장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승인하고 국교는 통해야 했기 때문에 태조 이성계를 책봉은 했지만, 외교적으로 굴복을 유도하기 위해 임명장과 공식 인장에 해당하는 고명이나 책인은 지급하지 않았다.[43] 사후 공헌현비 권씨로 추존[44] 사후 첩여 여씨로 추존[45] 한영정의 딸로서, 인수대비의 아버지인 한확의 첫째 누이이니 인수대비에게는 고모가 된다. 흔히 생전의 첩지를 따라 여비 한씨로 부른다.[46] 미인 여씨. 이후 첩여 여씨로 추존.[47] 사실 처음에 영락제는 이 사실을 알고도 그냥 덮고 넘어가려 했지만, 여 장비와 궁녀 어씨가 영락제에게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해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해버렸고 이 때문에 분노하게 되었다.[48] 다만 여기에서는 "여 강비가 황후를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독살을 당한 권씨는 황후가 아니었으므로 고증오류이다.[49] 황씨가 공비로 뽑혀 명나라로 갈 때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긴 채 이동 중 약을 써서 유산하고 핏덩이를 몰래 내다버리는 데까지 성공했는데 나중에 이걸 또 들키는 바람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50] "황제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중국에 술이나 과일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길이 하도 멀다 하시고, 생견(生絹) 300필과 안팎 옷감 30필, 양 1,000마리를 하사하시어, 술과 과일 값으로 하라 하시었으니, 이상의 물건들을 왕이 받으시고, 왕의 나라에 있는 것으로 잔치를 차리게 하시오."하고, 사신이 먼저 태평관으로 돌아가니, 병조참판 이명덕과 지신사(知申事) 원숙(元肅)을 보내어, 채백(綵帛) 15필, 채견(綵絹) 15필, 생견 300필, 양 8마리, 거위 16마리, 《음즐서》(陰騭書) 1,000권을 받아 오게 했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da_10108017_001[51] 조공에 관한 오해에 대해서는, 조공에 대한 답례로 황제국이 회사(回賜)를 내리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오해다. 이것은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받은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을 내리는 것이, 상국으로서 체면을 차리는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공을 하면 할수록 명나라의 무역 적자는 늘어나고, 반대로 조선의 무역 흑자는 늘어났던 것이다. 관련 내용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옆의 링크를 참조 바람.#[52] 만약 조선에서 논쟁 끝에 흥왕사의 금탑을 영락제한테 보냈다면 그 논쟁의 장면이 《조선왕조실록》에 있어야 하는데, 흥왕사나 금탑으로 검색을 하면 영락제 시절인《태종실록》과《세종실록》에서는 전혀 관련 내용조차 나오지 않는다.[53] 이곳에 묻히지 못한 세 황제는 홍무제, 건문제, 경태제이다. 홍무제의 경우 생전에 난징에 능을 조성해두었기 때문에 그곳에 안장되었고, 건문제는 실종되어서 능이 없다. 마지막 경태제는 탈문의 변으로 폐위된 후 친왕의 신분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에 친왕 자격으로 별도의 장소에 묻혔다. 추존황제인 명예종 주우원의 능도 이곳에 없는데, 주우원은 생전에 거주했던 봉지 근처인 후베이 성 징먼 시에 안장된 것을 황제 추존 후에도 이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우원의 능은 후베이 성에 따로 있다.[54] 이유는 이 기린과, 황제가 나라를 잘 다스려야 나온다는 성수인 기린의 음이 같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처음에 정화가 기린을 데려왔다고 하자 영락제가 "그럴 리 없다."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55] 친족의 4대와 외족의 3대, 그리고 처족의 2대.[56] 훗날의 영락제.[57] "연나라의 역적이 제위를 찬탈하다."[58] 현(現) 광시성 허츠시 이저우구[59] "오늘날의 베이징[60] 고려비 한씨는 칭호에서도 알 수 있지만 고려 출신의 인물이며, 공녀로 추정된다. 15황자 요간왕(遼簡王) 주식과 14황녀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았다. 영락제와 요간왕은 사이에 17년이나 차이가 있으니 영락제의 생모인 확률은 낮을 것이다.[61] 옹기라트씨, 옹비, 고려비 한씨의 경우 원래 원나라 혜종의 후궁이었던 것을 홍무제가 취한 사람들이라 더 나아가서 영락제가 원 혜종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62] 해상 무역 금지.[63] 5차례나 수십만을 동원하여 원정을 하였으나 대륙유목민족의 특성상 여의치 않으면 사막 너머나 시베리아로 도망치면 그만이라서 위협적인 측면을 제외하면 실익은 크지 않았다.[64] 작중에서 정난의 변 때, 영락제 편을 들고 이후 항해하면서 한족 해적과 같이 정화를 죽여 함대를 장악하려고 했고 조난 당할 때 "정화 제독은 죽었다. 내가 관할한다."고 하다 정화가 살아 돌아오자 그대로 항복하는 등 지속적으로 찌질하게 하극상을 하다 죽는다.[65] 원래는 대항해를 준비할 때 현실적이면서 보수꼴통 관료와 (보수꼴통도 있었으나 "천재지변"과 "영락제의 여러 사업" 그리고 "내란"으로 명나라의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홍무제의 유지로 항해의 감독자를 뽑는데 어려움이 있자 주군을 도우려고 환관의 특징(남성이 아닌 것)을 이용하여 대항해의 제독이 되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탐험과 교류, 상업을 좋아하게 되고 의남매의 아이와 같이 탐험을 할 정도로 열심히 하였는데 시간이 지나 북경과 자금성 공역이 끝나자 새 궁궐을 태자와 관료들과 정화와 같이 둘러보면서 영락제가 "이제는 항해를 그만두고 스스로 찾아오게 하는 게 어떨까?"라고 말하자 태자와 관료들은 입 찢어질 정도로 정말로 좋아하고 정화는 반대로 무서워 하는 것이다.[66] 1946년생으로 중국의 유명한 배우이자 감독이다.[67] 하지만 양사기는 이 사실을 주첨기에게 전하였고 차후 선덕제가 되는 주첨기는 이 사실을 숨기며 아버지인 주고후를 명 4대 황제로 옹립한다. 이후 주고치의 행적을 보면 그가 황제가 되었다면 주인공 일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았을 듯 하다.[68] 당연하지만 실제 영락제는 조선말을 할 줄 몰랐다. 연왕 시절 이민족 토벌전을 담당했으니만큼 북방 이민족 언어와 고려-조선말을 하나도 모르는 선까진 아니었을 수는 있지만.[69] 이 게임에서 왕족은 8세부터 장수로 사용할 수 있다.[70] 정황상 위의 정난의 변으로 추정. 참고로 여기서 방효유는 명나라 암살단의 그랜드 마스터라는 설정으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