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당시 피에 누아르들의 분포 지도. | |
검은색 : 지역 인구 30% 이상 진한 파랑색 : 10-30% 파랑색 : 5-10% 연한 파랑색 : 2-5% 흰색 : 2% 미만[1] | |
피에 누아르들의 비공식 국기 | 알제리 독립 이후 프랑스 내 피에 누아르 관련 기관들에서 쓰이는 문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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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ied-Noir피에 누아르는 프랑스 식민지배기에 알제리에 정착하여 살던 유럽계 백인들을 일컫는 단어인데, 넓게는 프랑스의 지배에 협력하면서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받았던 세파르딤 유대인들도 포함된다.
주로 프랑스계, 이탈리아계, 그리고 스페인계였지만 알제리에선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식민지배 초기에는 이들은 알제리인[2] 혹은 정착자 (colonist)를 의미하는 'colons'라고도 불렸다.
주로 알제리 북부 해안가와 알제, 오랑, 콩스탕틴과 같은 주요 도시들에 거주하였고 알제리 독립 이전이자 알제리 전쟁 중이던 1959년에는 알제리 인구의 13%, 약 140만 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전세계에 약 320만 명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알제리 독립 후 프랑스 외에도 여러 지역과 나라들로 퍼졌으며, 프랑스에서의 통계는 사람의 인종과 출신지와 같은 정보 수집을 금하기 때문에 확실한 수치는 없다. 프랑스 외에는 스페인, 이탈리아로도 많이 갔고, 일부는 영국, 미국, 캐나다 등 영어권으로 가기도 했다.
2. 어원
피에 누아르는 프랑스어로 '검은 발'이라는 뜻이다.피에 누아르라는 명칭의 정확한 어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개요 문단에서 서술된 대로 피에 누아르라는 단어 자체는 19세기 후반부터 사용되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1901년 프랑스어 사전 Le Robert에는 이 단어가 알제리 거주 백인들이 아닌 석탄실에서 맨발로 일하던 항해사들을 지칭하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이 단어가 알제리의 유럽계 백인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은 20세기부터로 추정된다.
우선 널리 퍼진 설로는 알제리에 파견된 프랑스군의 검은색 부츠에서 왔다는 설과, 알제리 개간을 하던 프랑스인들이 신던 검은 작업용 신발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3. 역사
3.1. 초기 정착사
알제리의 유럽인 정착사는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침공과 함께 시작되었다.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알제리 북부의 환경이 프랑스 남부의 환경과 매우 유사한 것을 느낀 프랑스 당국은 알제리를 제2의 프랑스로 만들려고 했다. 알제리 북부는 프랑스 남부와 같이 겨울에 춥지도 여름에 매우 덥지도 않은 지중해성 기후였고, 적당한 강수량 덕분에 토질도 매우 비옥했기 때문에 매우 구미가 당기는 땅이라,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강력한 프랑스화 정책을 실시했고, 그러한 의미에서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유럽인들의 알제리 이주를 장려했다. 당시 유럽은 산업 혁명으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했고 여러 국적의 유럽의 하류층은 새로운 기회를 떠나 미국, 남미, 그리고 알제리와 같은 기회의 땅을 찾아 이주하였다. 피에 누아르들은 토착 알제리인들을 내륙으로 밀어내고 사막에 물을 끌어들여 개간을 통해 포도, 올리브 등을 재배하여 본국에 수출했다. 이러한 정착 정책이 정점을 찍은 1926년에는 알제리 내 피에 누아르의 비율이 15.2%를 점하기도 하였다.3.2. 알제리 전쟁
하지만 지속적으로 차별대우를 당하고 땅을 빼앗겨 내륙으로 밀려나던 알제리 토착민들은 결국 폭발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무력한 모습을 보인 프랑스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다.2차 대전 전승기념일(VE day)에 일어난 알제리인들의 시위에서 시위대와 당국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시위대, 피에 누아르, 경찰 모두에서 사상자가 발생하는 세티프 구엘마 학살 사건이 일어나자 알제리인들의 분노는 치솟았는데 이를 잠재우려고 주어진 알제리인의 자치의회도 부정선거와 게리맨더링으로 점철되어 피에 누아르가 대다수의 의석들을 휩쓸었고 결국 알제리인들의 분노는 폭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외에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에서 쫓겨난 프랑스가 무력한 모습을 보인 것을 본 이들은 자신들도 프랑스를 몰아내고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고, 결국 독립을 선포하여 이를 막고자 하는 프랑스에 대항해 알제리 전쟁을 일으켰다.
상당수의 피에 누아르는 이때 민병대를 조직하여 프랑스군과 함께 싸웠고, 알제리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비롯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이에 대한 복수로 토착 알제리인들과 FLN은 피에 누아르에게 보복하면서수렁에 빠졌다. 피에 누아르 약 수백명이 학살된 오랑 학살은 지금까지도 프랑스 극우와 알제리 사이의 키배의 소재가 되고 있다.
프랑스 극우들은 이 사건에 대해 이를 갈며 알제리에 사과를 요구하지만, 알제리는 훨씬 더 많은 프랑스와 피에 누아르들의 알제리인 학살들을 무시하는 프랑스가 자신들에게 사과를 요구한다며 반론한다. 오늘날 프랑스 정부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오랑 학살에 프랑스군이 개입하여 막을 수 있었음에도 막지 않고 이를 외면했다. 피에 누아르 몇몇이 빠져나와 도움을 요청할 때도 무시했고 항의하다가 흥분하여 덤비는 피에 누아르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3.3. 알제리 독립 이후
지속된 전쟁에 염증을 느낀 프랑스인들과 4공화국 좌파 정치인들은 전쟁에 반대했으나 프랑스군 지도부는 전쟁을 지지했다. 프랑스군 지도부는 전쟁에 회의적인 정부에 공공연히 압력을 가했고 갈팡질팡하던 4공화국은 스스로 붕괴했다.정권을 잡은 샤를 드골은 알제리 전쟁을 지속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그 역시 전쟁에 회의감을 느끼고 알제리와의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군부 인사들은 분노해 드골을 몰아낼 음모를 꾸몄지만 폭망하고[3] 이때부터 프랑스 군부는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이로써 알제리는 독립했고 피에 누아르들은 세파르딤들과 함께 알제리를 떠났는데 인당 가방 하나어치의 물건들 외에는 가지고 떠날 수 없었고, 프랑스 정부가 예상한 것보다 3배 이상이나 많은 피난민들이 프랑스로 몰려들어 정부의 대응도 부실했다. 결국 본토로 이주한 피에 누아르들은 대부분 정착한 도시들에서 본토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류층을 이루었다. 피에 누아르들이 다 떠난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재산을 보전하며 남아 있을 수는 있었지만(1962년 기준 20만명) 이들도 산업 국유화와 알제리 내전 등을 거치면서 알제리를 떠나거나 고령으로 사망함에 따라 수가 줄어들어 현재 알제리에 살고 있는 프랑스인은 수만명 내외에 그친다.
빈민층이 가난과 차별에 좌절한 나머지 프랑스의 범죄조직인 밀리유에 가담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피에 누아르들은 대부분 프로방스 지역에 정착했는데, 이들은 알제리 전쟁이 자신의 삶을 파괴했다고 생각해 극우 정당 국민연합의 든든한 지지 세력이 되어 현재도 프로방스 지역에서 극우 정당의 지지율이 가장 높게 나온다.[4]
세월이 지나 알제리에서 피에 누아르가 돌아와 사는 것을 받아준다고 했지만, 알제리에 남겨둔 땅이나 재산을 돌려달라는 요구는 무시하고 있다.
4. 정체성
피에 누아르들의 비공식 국가 "Le Chant des Africains"민족의 모태가 되는 영토를 잃고 그 지역에 더 이상 거주하지 않는 데다 뿔뿔이 흩어진 지금은 강한 정체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들의 알제리 거주 기간도 100년 언저리로 길다면 길지만 그렇다고 강한 정체성을 형성할 만큼 길지는 않았기 때문에, 알제리에서 쫓겨나기 전부터 강한 정체성이 존재했다고 보긴 힘들다. 또한 자신을 피에 누아르라고 하는 이들의 수도 계속 줄어드는 만큼 미래는 어둡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백인의 영역이 된 호주와 뉴질랜드도 있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원주민의 인구가 적어서 영국인들이 지배민족이 되었으며, 알제리는 피에 누아르들이 인구가 많았다고 한들 알제리 전체 인구의 1/6 남짓을 차지하는 데 그쳐 아랍인들보다 수가 크게 적었고 인구증가율도 프랑스 본토인들보다는 높았지만 아랍인들보다 낮은 수준이라 1950년대 기준으로 알제리 총 인구의 10%로 줄어들었다. 다만 알제리 실향 이후에도 독일의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에서 온 독일인들과 히키아게샤처럼 실향민들의 모임들과 단체들이 존재한다.
5. 유명 피에 누아르
- 루이 알튀세르
- 알베르 카뮈
- 이브 생 로랑
- 장뤼크 멜랑숑
- 자크 랑시에르
- 조르주 볼린스키
- 알랭 바디우
- 베르나르 앙리 레비
- 앙리꼬 마시아스
- 에드몽 주오
- 에릭 제무르: 본인은 프랑스 몽트뢰유 태생이지만, 부모님은 알제리에서 거주했던 세파르딤 유대인이었다.
6. 관련 문서
- 세파르딤
- 실향민
-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
- 알제리 전쟁
- 프랑스령 알제리
- 프랑스-알제리 관계
- 프랑스-튀니지 관계: 알제리와 마찬가지로 튀니지가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시절에 이주했으며 알제리 전쟁 이후 알제리를 떠난 피에 누아르들의 일부도 받아주었다.
- 히키아게샤
- 잔류 러시아인
[1] 이는 프랑스 정부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알제리를 다른 식민지와 달리 본토의 일부로 삼으려고 했으므로, 많은 프랑스인들의 이주를 장려했기 때문이다.[2] 토착 알제리인들은 아랍인(Arabes), 무어인(Mauresque, 모레스크), 마그레브인(Moukère, 무케르)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3] 이때 드골을 몰아낼 계획을 세운 극우 성향 군인들의 조직이 비밀군사조직(OAS)인데, OAS의 작전에 픽션을 넣어 가공한 소설이 유명한 추리소설 자칼의 날이다.[4] 쿠바계 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마이애미가 점차 보수화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