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군사독재(軍事獨裁, Military dictatorship)는 본래 군정이 아닌 국가에서 쿠데타를 통해 군부 세력이 행정부나 입법부를 장악한 형태의 독재이다.대한민국의 경우 정부 수립 이후 역사적으로 크게 두 차례의 군부가 존재했기 때문에 제3공화국 ~ 제4공화국의 박정희 정권을 군부 내지는 유신정권(4공), 제4공화국 ~ 제5공화국의 전두환 정권을 신군부 내지는 5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 문서는 민주정에 대비되는 독재 체제로서 근현대의 군사 독재를 다룬다.[1] 중남미에서도 20세기에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 독재가 횡행하여 스페인어로 훈타라는 단어에 아예 군사정권이라는 뜻이 추가되었다.[2]
2. 발생 원인
2.1. 사회의식
많은 사회 구성원이 공화주의, 민주주의를 받아들일만큼 계몽되지 못한 경우, 당장 사회적 강제력을 가진 군부가 정권을 잡는다. 이집트 등 아프리카의 많은 군사독재 정권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상적인 국가가 모종의 사태로 일반인들의 정부를 구성하지 못 할 정도로 무너진다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강제력과 무력을 지니고 있는 군부가 정권을 잡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현대에는 국가 체제가 그 정도 수준까지 무너지는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기에 이런 사례는 별로 없다.또는 사회적으로 엘리트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는 군사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 배운 군인들이 그나마 통치에 적합한 엘리트 중 하나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제3세계에서는 군인들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것에 대해서 지금처럼 부정적이지 않았다.
1952년 이집트에서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군부 세력이 아랍민족주의를 내걸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60년대까지 수십여 개 후진국에서 군사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대부분 반(反) 외세, 민족주의 성향으로 대중들에게 초기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3]
제1세계 한국에서도 1961년 5.16 군사정변이 터졌을 때, 장준하 같은 상당수의 지식인들도 처음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고, 일부는 박정희가 만든 민주공화당에 참여하기도 했다. 4.19 혁명 중 이승만과 면담한 학생 대표들이 "2년 정도 군정을 해서 북한의 침입에 대응하고, 사회 안정을 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2.2. 국제정세
후진국의 자원 상황이 강대국의 이권과 이어지는 경우, CIA 같은 강대국 첩보기관들은 해당 국가에 반란 세력을 준동시키고 국가문제를 터뜨려서 정권의 혼란을 유도한다. 정권이 약해지면 그 자리를 강대국의 입김을 받은 군부가 치고 올라온다. 중동, 남미, 개발도상국의 몇몇 군사독재 정권이 여기에 들어간다.북한과 국경을 마주한 대한민국, 중국에 맞서는 대만의 경우처럼 이웃에 명확한 적대 세력이 위치한 경우에도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쉽다. 전쟁의 우려가 높은 사회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의 암묵적 동의 하에 징병제가 시행되는 것처럼, 군사독재 정권 역시 이런 암묵적 동의 혹은 필요악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민주정권 하에 통제되는 군대가 가장 효율적인 군사력을 지닐 수 있지만, 달리 말하면 선진적인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은 이상 이러한 조건을 가지기 어려우므로 차선으로 군사정권이 들어서 전쟁 위협에 대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군사정권은 대개 방어를 위한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독재 정권 역시 장기화될 경우 극도로 권위주의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개인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완전한 민주정만큼 향상되기 힘들어지고, 전체적인 사회가 경직화되어 인권 탄압 위험에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4] 상식과는 다르게 이런 군사독재 정권의 군사력은 빛 좋은 개살구인 경우가 많은데, 가장 큰 이유는 군사독재의 군은 경찰과 역할을 함께 맡아서 훈련도가 떨어지기 때문으로, 군사독재 국가의 실전기록은 처참하기 이를 데가 없다.
3. 한국의 군사독재
대한상이용사회의 5.16 지지행렬 |
한국의 대략적인 군사정권 시절 역사에 대한 내용은 대한민국 군사정권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의 권위주의 정부 집권 기간은 6.25 전쟁 기간 및 제1공화국 말기[5], 1972년 제4공화국 성립부터 1987년 6월 항쟁 기간까지 합쳐 약 18년 정도로 여겨지고 있지만 실제로 군사정권이 시작된 것은 5.16 군사정변을 통해 제2공화국이 무너진 1961년부터이다. 1960년대~70년대 초반의 경우, 직접 선거를 통해 군인 출신의 인물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것이기에 해당 기간을 독재로 치지 않고 비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으며[6] 이 경우 10월 유신 이후 6.29 선언 이전(1972~1987)까지의 15년간을 실질적인 군사독재로 여긴다.
박정희 정부는 우선 2년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거친 뒤 대통령 직선제를 채택했고 정부 출범 이후에는 경제개발에 전력투구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가시적인 경제개발의 성과로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실제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직접 선거 방식의 제5대 대통령 선거을 진행했고, 여기서 박정희가 승리, 대통령에 취임하는 절차를 밟음으로써 당대 집권의 명분은 충분한 것으로 여겨졌다. 박정희 정부는 1969년 3선 개헌으로 임기를 연장하는 등의 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지만, 1970년대 초까지는 보통 비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정도다. 물론 당시에도 군인 출신의 박정희가 정부수반이었고 상술한 것처럼 비자유민주주의 체제 역시 권위주의의 일종으로 분류되므로 군사독재로 칭하는 것이 아주 틀린 표현은 아니다.
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 |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며 유신정권이 붕괴하게 되고 10.26 사건 이후 한국 국민들은 유신헌법의 폐지와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군사정권의 종식을 기대했다.[7] 최규하 대통령도 12월 8일 비상조치 9호를 해제해 그간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락하며 이에 화답하였다.
1979년 12월 12일(제4공화국) 중앙청 |
신군부는 이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본보기로 진압하여 정통성 문제를 일축하였다. 그러나 야당과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식을 줄 몰랐고 결국 1987년 전국적인 6월 항쟁과 함께 미국의 압박까지 들어오자[8]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였다.[9]
김대중의 사면복권, 각종 자유화 조치 등을 시행하면서 제도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되었고 이를 통해 겉으로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던 한국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게 되었다.
3.1. 대한민국 군사독재의 잔영
전두환 전 대통령 영정에 거수경례하는 육사 총동창회 인원 |
군사독재를 한국의 압축 성장과 연관지어 옹호하는 경우도 많다. 요컨대 군사정권이 국민의 자유를 억압했으나 동시에 강력한 통치는 고속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단 대한민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 시절 경제가 성장한 국가의 국민들은 해당 통치 시기에 대한 향수를 느끼곤 한다. 해석에 따라 크게 견해가 갈리지만 언제나 상당한 논란을 남기는 대목이다.[10][11]
4. 기능
군사 독재 정권은 결여된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여러 사회적 문제 요소에 무력을 동원한다. 구(舊) 집권층과 반대 세력, 범죄조직 등이 그 표적으로, 이로 인해 일시적인 사회 안정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 체제의 억압성과 이질성으로 장기적으로 존속하기는 어렵다.물론 군사 독재 정권의 새로운 집권자들이 새 기득권으로 변하고 군사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 역시 반대파로 몰려 숙청당하며 수많은 인권 탄압이 발생한다. 또한 외세 침략, 민족 분쟁 같이 국가 존속에 위해가 되는 상황이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통해 억제된다. 같은 맥락에서 일부 사례지만 저돌적인 리더십을 이용하여 경제 발전을 꾀하기도 한다.
-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위시한 군사정권 시절 아르헨티나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집권기 칠레
- 네윈, 탄 쉐 시절과 2021년 2월 1일 이후의 버마(= 미얀마)
그러나 위에서 서술했듯이 한 인사나 한 집단의 단독 집권이 장기화되면, 자연스레 투명한 국가 운영이 불가능해진다. 부정부패가 늘어나고, 오직 무력에 의해 모든 정책이 수립되면 국가 존속에 위기가 온다.
4.1. 군정
전쟁을 통해 전승국 군대가 패전국이나 그 식민지를 점령하고 그 지역에 정부(군정청)를 세우는 경우. 대한민국에서 군정이라는 단어는 군정청, 군정기라는 용어와 함께 이를 이른다.-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한국 이남의 미군정.
- 소비에트 민정청: 한국 이북의 소련군정.
- 연합군 점령하 독일: 독일의 군정.
-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군정.
- 연합군 점령하 일본: 일본의 군정.
-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오키나와의 미군정.
- 연합군 점령하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군정.
- 소련 통치기 만주: 만주의 소련군정.
- 미국 통치기 쿠바: 쿠바의 미군정.
- 미국 통치기 필리핀: 미국 통치기의 초반은 군정으로 통치하였고 이후 민정으로 전환하였다.
- 이라크 연합국 과도 행정처: 이라크의 미군정.
- 군정청(나치 독일)
5. 계급
쿠데타를 일으킬 경우 상당한 병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군사독재정권을 일으킨 자들은 장성급 장교인 경우가 많다. 당장 한국만 해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와 전두환 모두 당시 계급이 소장이었다. 여기서 더 올라가 군단장 이상이 되면 병력이 굉장히 흩어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사단장급에서 가장 병력을 운용하기가 쉽기 때문으로 추정된다.다만 호르헤 비델라는 육군 중장 신분으로, 민 아웅 흘라잉은 육군 대장 신분으로 각각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이 둘의 군사반란은 측근을 최대한 활용한 박정희나 전두환과는 달리 자신의 실병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실병의 중요성은 사례들을 비교해봐도 보이는데 쿠데타 당시 소장이었다 해도 박정희는 2군 부사령관이란 실병력도 실권도 없는 자리,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으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권력은 강하나 실전투병력은 많지 않은 자리였다. 이들이 쿠데타에 성공한 건 실병력을 거느린 영관급에서 준장, 소장급 장교들의 보스격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큰데 전두환의 경우는 되려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를 휘하에 두고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이 이런게 가능했던 이유는 전두환은 박정희를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것에 비해 유학성, 차규헌, 황영시는 계급은 높아도 박정희와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계급이 높을 필요도 없고 영관급 장교나 위관급 장교, 심지어는 부사관이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 경우도 있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대령때 쿠데타를 일으켰고 더 이상 진급을 하지 않아 대령이 통치자를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을 정도였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는 대위 때,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쿠바의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중사로서 1933년 9월 지지자를 모아 쿠데타를 일으키고 마차도 정권을 무너트렸는데 이를 중사들의 반란이라고 부른다.
6. 군국주의와의 차이점
군국주의는 사실상 대외침략, 팽창주의를 전제로 한 군사 독재 정권에 붙이는 경향이 강하다. 따라서 추축국과 다에시 등은 군국주의라고 할 수는 있지만 정반대로 4~5공 시절 대한민국처럼 (명목상) 외부 세력에 대한 방어를 강조하는 군사정권은 군국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이론적으로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만으로 군사 독재 정권이라 하는 거지 어떤 정치 체제를 선택하는지는 군부 마음이기 때문에 비록 군국주의스러운 기조가 사회에 어느 정도 자리잡기는 하겠지만 군사 독재 정권이라고 반드시 군국주의를 택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군사 독재 정권과 군국주의는 그 개념이 일치하지만은 않는다.
7. 군사독재 목록
볼드체는 현재 군사독재 국가이다.7.1. 아시아
7.1.1. 동아시아
대한민국 제4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취임 |
- 한국의 군사정권
중화민국(대만) 장징궈 총통 집권기 |
일본 제국 군부독재의 시작 5.15 사건 |
7.1.2. 동남아시아
시민 진압을 위해 투입되는 미얀마군 |
인도네시아 좌익 대학살 |
2014년 태국 군부 쿠데타 |
7.1.3. 남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전복시킨 탈레반 |
- 파키스탄의 군사정권
- 아유브 칸 정권
- 야히아 칸 정권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정권
- 페르베즈 무샤라프 정권
7.1.4. 서아시아
7.2. 유럽
7.2.1. 남유럽
- 고대 로마의 군사정권
- 로마 공화국의 군사정권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정권
- 1차 삼두정치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정권
- 2차 삼두정치
- 로마 제국의 원수정[31]
스페인 내전 |
- 그리스 군사정권
-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정권
- 디미트리오스 이오아니디스 정권
7.2.2. 서유럽
7.2.3. 동유럽
피우수트스키와 휘하 군부 세력 |
- 폴란드의 군사정권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집권기의 폴란드 제2공화국
-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집권기의 폴란드 인민 공화국
7.3. 아메리카
시민을 공격하는 브라질 쿠데타 군인 (1964년) |
아르헨티나 군부의 좌익 탄압 |
-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 집권기의 파라과이
-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
- 그레고리오 알바레스 치하의 우루과이
- 중남미 대부분의 국가에 들어섰던 독재정권들[38]
7.4. 아프리카
2013년 이집트 쿠데타 |
- 무아마르 알 카다피 집권기의 리비아[42]
-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집권기의 에티오피아
- 기니 군사정권
- 말리 군사정권
- 부르키나파소 군사정권
- 니제르 군사정권
- 가봉 군사정권
7.5. 오세아니아
- 피지의 군사정권
- 1987년 피지 쿠데타 정권 (시티베니 람부카 1기 정권)
- 2006년 피지 쿠데타 정권 (프랭크 바이니마라마 정권)
8. 관련 문서
9. 장르 작품의 군사독재
군정 참조.[1] 전근대의 군정은 군정 문서 참고.[2] Junta Militar의 준말. 공교롭게도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 역시 전간기 스페인 내전으로 수립된 군사정권이었다.[3] 대표적인 인물이 지금은 최악의 독재자로 평가되는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이다.[4] 혼합형 체제(hybrid regime, 외형적인 민주정에 권위주의가 결합한 체제)만 되어도 개인이 자유롭게 살기는 매우 힘들어진다.[5] 당시에는 6.25 전쟁으로 인하여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설 수조차 없었다.[6] 비자유민주주의도 민주주의로 평가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관점으로 보면 이 시기는 완전한 독재는 아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정부가 구성되는 2020년대의 헝가리, 싱가포르, 방글라데시, 튀르키예가 사실상 독재국가라는 평가를 받듯 이 체제는 현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다.[7] 이러한 당대 대한민국 사회의 분위기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바람인 프라하의 봄에서 차용한 서울의 봄으로 표현하기도 한다.[8] 6월 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려 했으나 제임스 릴리 당시 주한미국대사가 청와대로 찾아와 '계엄령을 선포할 경우 한미동맹의 심각한 타격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본국의 경고장을 전달했다. 마침 과거 박정희 정권 말기때 한미관계가 악화된 적이 있어서 전두환도 손을 쓰지 못했다.[9] 해당 시기 전두환은 이미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려고 마음먹은 상태였으나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머뭇거리자 노태우를 압박하기 위해 계엄령 선포를 거론했다는 설도 있다. 대표적으로 MBC의 제5공화국 드라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10]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는 대통령 재임 이후 아르헨티나의 빈곤률을 4%에서 38% 수치로 증가시켰고 아르헨티나의 산업 기반을 붕괴시켰다.[11] 군사독재를 비롯한 독재 정권은 독재 하에서만 실현이 가능한 강경 정책이나 도둑정치를 추구하기에 경제 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존재한다. 경제 발전은 국가 내부 사정과 외부 사정이 모두 발전에 유리하게 전제되어야 한다.[12] 다만 강조는 원래 문신이라는 설도 있다. 의외로 강조 자체가 출신이 불분명하다. 강조가 무신이라면 최초의 무신정권을 세운 인물이 되지만 문신이라면 권신은 성립해도 무신정권은 아닌게 된다. 일단 최초의 무신정권을 세운 인물들은 아래에 있는 김훈과 최질로 보고 있다.[13] 김훈 최질의 난을 일으켜서 약 4개월간 무신정권을 세웠다. 강조가 무신이 아니라면 최초의 무신정권을 세운 인물들이 된다.[14]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집권하여 군이 국가를 통치하였고, 이후 1392년에 왕씨의 고려왕조를 역성혁명으로 멸망시키고 이씨가 다스리는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개창했다.[15]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포함.[16] 노태우 정부는 해당되지 않는다. 노태우 대통령 본인이 군부의 수뇌부였긴 했으나 국민투표(직선제)로 정당하게 당선되어 민주적 절차를 거쳤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의 경우 5대 대선, 6대 대선, 7대 대선 3회간은 국민투표로 당선되긴 했으나 7대 대선은 금권선거(부정선거)가 있었고 8대 대선과 9대 대선에서 간선제로 당선되는 방식으로 독재를 했다.[17] 십상시의 난으로 인해 단명했다.[18] 고려의 무신정권처럼 수도 교토에서 권력을 행사했으나 지방세력인 겐지한테 져서 멸망당했다.[19] 중앙정부인 헤이케를 타도했으며, 중심지를 교토에서 지방이자 근거지인 가마쿠라로 옮겼다.[20] 명목상으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입헌군주제 국가였으나 1930년대, 특히 5.15 사건 이후 군부가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침략전쟁을 주도하는 군국주의 국가였으며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 또한 현역 군인이었다.[21] 네 윈부터 시작해서 탄 슈웨까지는 뚜렷한 비전이 없는 이상한 경제정책과 극도의 폐쇄주의, 점성술에 의거한 화폐개혁 등으로 미얀마를 망쳐놨으며 민주화와 물가 안정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승려들, 소수민족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2021년 2월에 또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5년간 유지된 민선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독재를 시작해 많은 미얀마 자국민들을 학살하는 등 폭정을 이어오고 있다.[22] 태국 입헌군주제의 시작부터가 1932년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라서 쁠랙 피분송크람, 사릿 타나랏 등 여러 군사독재자들이 집권했다. 1992년에 민주화가 이뤄진 후 장기간 문민내각이 이어지며 군사정권이 과거의 유물이 되는 듯 했으나, 2006년 쿠데타로 인해 탁신 친나왓 내각이 붕괴되며 다시 군사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민정 이양을 통해 다시 문민내각으로 복귀하는 듯 했으나, 2014년 쿠데타로 인해 잉락 친나왓 내각이 붕괴되면서 또다시 군사정권이 수립되었고, 그때 취임한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총리로 집권하였다. 그리고 또 현재는 세타 타위신이 총리로 집권하면서 17년 만에 문민내각으로 복귀하였다.[23] 11.1 쿠데타 이후 계속 군인 출신 대통령만 나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는 건국 때부터 1963년까지는 오히려 군 경력이 전혀 없는 관료 출신 독립운동가가 독재자로 등극해 군인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군사독재와는 정 반대의 나라였다.[24] 현재의 아프가니스탄은 무장단체인 탈레반이 정부를 접수하여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25] 맘루크라는 노예병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립한 왕조.[26] 의외로 사담 후세인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출신이라서 문민독재에 해당한다.[27] 형이 사망한 후 동생이 권력을 승계했다.[28] 바샤르 알 아사드는 계급만 원수인 문민이다.[29]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군사독재자였다.[30] 통일 이전부터 북예멘의 군사독재자로 군림했다.[31] 원수정 시대의 황제들은 공화정의 전통을 존중하는 척 하기 위해 라틴어로 군주를 뜻하는 렉스를 칭하지 않고, 로마군 최고사령관을 뜻하는 임페라토르와 원로원의 1인자를 뜻하는 프린켑스를 칭하며 통치했다. 그래서 원수정 시대의 로마는 완전한 군주제라기 보다는, 세습이 가능한 군사독재에 가까웠다.[32] 올리버 크롬웰이 잉글랜드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집권했다.[33] 집정정부의 수장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1804년에 황제로 즉위하여 공화국의 독재자가 아닌 군주가 되었다.[34] 카를 되니츠 제독이 국가대통령으로써 당시 독일을 이끌었으나 이미 베를린조차 연합국에게 넘어간 상황이라 얼마되지도 않은 영역에 고작 며칠동안만 실권을 행사했다. 보통 군정에선 육군 측 장군이 독재자로 집권하는데 플렌스부르크 정부에선 특이하게도 해군 제독이 독재자로 집권했다.[35]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라는 해괴한 칭호를 갖고 통치했다. 다만 헝가리는 1922년 이래로 헝가리 통일당의 일당 독재가 자행됐고 총리들도 문민 출신이라 군부가 권력을 줬다고 보긴 힘들다.[36] 과거사 진상 규명 시도를 통해 이웃나라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의 군부정권과 다를 바가 없는 살육과 탄압을 자행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37] 여타 중남미 군사정권들과는 달리 좌익 성향이었다.[38]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아이티, 파나마 등등 이들 국가엔 독립 후 극도의 정치적 혼란으로 수 차례나 군인 대통령이 등극했었다.[39] 인도의 노예 왕조처럼 맘루크라는 노예병들의 쿠데타로 수립된 왕조며, 여러 차례의 쿠데타로 정권이 교체되었다.[40] 1952년부터 시작되어 2012-2013년만 빼면 쭉 군사정권이었다.[41] 과거 엘시시는 이집트 육군 소속의 5성 장교였으며, 2013년에 쿠데타를 주도하여 민선으로 선출된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을 축출한 이후, 자신이 직접 대선에 나가기 위해 이집트군에서 전역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독점한 셈이였으며, 집권이후 이집트의 군인과 경찰의 공권을 대폭 강화하며 반정부 시위를 잔혹하게 진합하고 각종 언론을 검열하고 있다.[42] 그 전에는 왕정이었다.[43] 우아리 부메디엔의 쿠데타 이후 부테플리카에 이르기까지 알제리를 사회주의로 통치하며 이슬람주의 세력을 탄압했다. 이슬람 무장세력 또한 이에 대한 반발로 게릴라를 결성하여 무력항쟁과 테러를 벌였다.[44] 비아프라 전쟁 당시의 야쿠부 고원이 대표적이다.[45] 이 인간이 끝나자마자 소말리아는 전국 각지에서 실사판 북두의 권이 연출되게 된다.[46] 가파르 니메이리부터 오마르 알 바시르까지 이어졌고 바시르를 축출한 이후에도 쿠데타가 발생했다.[47] 이드리스 데비와 그의 아들인 마하마트 데비 이트노.[48] 모부투 세세 세코부터 투치족 출신인 카빌라 부자까지.[49] 프랑수아 보지제가 셀레카 반군에게 축출당한 이후 혼란이 격화되었고 그 결과 세계 파탄국가 3위에 랭크되었다. 참고로 1, 2위는 남수단과 소말리아.[50] 새뮤얼 케니언 도부터 시작해서 찰스 테일러까지 이르며 이들은 자국에서의 만행도 모자라 인접국 시에라리온의 내전에도 개입하였다.[51] 아버지 냐싱베 예아데마에게 아들인 포르 냐싱베가 세습했다.[52] 일개 중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후 더이상 권좌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되자 국고를 몽땅 가지고 외국으로 도주해버렸다.[53] 이 인간의 집권 시절 우간다는 말그대로 생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