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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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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명 제13대 황제
만력제 | 萬曆帝
파일:990581.jpg
출생 1563년 9월 4일
북경 순천부
(現 베이징시 둥청구)
사망 1620년 8월 18일 (향년 56세)
북경 자금성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능묘 정릉(定陵)
재위기간 명 황태자
1568년 4월 8일 ~ 1572년 7월 19일
(4년)
제13대 황제
1572년 7월 19일 ~ 1620년 8월 18일
(48년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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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성씨 주(朱)
익균(翊鈞)
부모 부황 목종 장황제
모후 자성황태후
형제자매 4남 7녀 중 3남
배우자 효단현황후
자녀 8남 10녀
신장 164㎝[1]
묘호 신종(神宗)
시호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
(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
연호 만력(萬曆, 1573년 ~ 1620년) }}}}}}}}}
1. 개요2. 생애
2.1. 만력중흥(萬曆中興)2.2. 만력태정(萬曆怠政)과 쟁국본(爭國本)2.3. 전방위적인 국가의 붕괴2.4. 만력삼대정2.5. 그 외의 낭비2.6. 말년2.7. 황릉
3. 평가4. 가족 관계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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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萬曆帝半身像御眞.jpg

명나라의 제13대 황제.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였으며 휘는 익균(翊鈞)으로, 제12대 목종 융경제의 3남이었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들 중 가장 오래 재위한 황제였다.[2] 반대로 가장 짧은 기간을 재위한 황제는 다음 황제인 광종 태창제였다.[3]

2. 생애

2.1. 만력중흥(萬曆中興)

파일:external/pic.pimg.tw/22efffdbd9e9750d02a159f09530aa5b.jpg
우측 그림은 면류관이 얼굴을 가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면류관을 돌려서 그린 어진이다.

이 인간이 처음부터 암군은 아니었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만력제는 즉위 초 10여 년 동안 자성황태후 이씨[4]의 후원을 받는 대학사 장거정과 환관 풍보(馮保)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명군의 자질을 드러냈다. 당시 조선의 사신으로 갔던 조헌이 만력제를 보고 '이번 황제는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보인다'며 《사행기》에 칭찬을 써 놓기도 했다. 또한 만력제는 서예에 관심이 많아서 겨우 10세에 1척(尺) 이상이나 되는 큰 글씨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훗날의 만력제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평가이다.

명나라의 통치 체계는 환관 조직과 관료 조직 사이의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풍보와 장거정은 드물게도 장기간에 걸친 연립 내각을 구축하여 국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장거정은 내치에서는 기강 확립, 태만한 관료의 정리 작업, 황하 하류의 치수 사업, 무엇보다 토지·세제 개혁인 일조편법(一條鞭法)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 외치로는 척계광이성량(李成梁)을 요동몽골에 파견하여 북로(北虜)를 막고, 절강·복건·광동의 해안 방어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풍보 또한 환관 조직을 통제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1582년장거정이 죽고 2년 후, 만력제는 돌변하여
"장거정이 언관을 억제하고 황제의 총명을 막았으며, 정권을 농단하고, 황상의 은혜를 저버렸으며, 불충을 도모했다"
는 조칙을 내려 부관참시하고 작위를 박탈한 후 가산을 몰수해 버렸으며, 장거정의 장남은 고문받다가 자결하게 하고, 유족들이 굶어 죽기까지 했는데도[5]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풍보 또한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것이 만력제가 어긋나는 출발점이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일단 장거정과 풍보가 둘 다 표리부동한 인물이었음이 만력제 타락의 계기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장거정은 어린 만력제에게 무척이나 엄격한 스승이었다. 황제의 스승이었던 장거정은 직접 교과서까지 만들어가면서 어린 만력제를 열성적으로, 또는 아동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가르쳤다. 장거정은 만력제에게 어제 학습한 경서나 역사에 관한 내용을 외우도록 시켰는데, 외운 내용이 물 흐르듯이 나오면 칭찬을 했지만 더듬거리거나 잘못 이야기하면 분노하여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갈궜다. 특히 장거정은 재물 축재나 유흥에 극도로 엄격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림 그리는 것조차도 "심취하다가는 송휘종처럼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다", "황제가 그림에만 지나치게 빠지면 조정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심지어는 망국의 참화를 불러온다" 운운하며 자제를 요구했는데 정도가 지나쳐서 폭언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이런 장거정에 대한 어린 만력제의 두려움과 존경심은 대단해서, 장거정이 집을 신축한다고 하자 자신의 용돈에서 1,000냥이나 뽑아서 스승에게 드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반대파가 비난했듯이 장거정은 신하로서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처신이 오만하고 불손해서, 만력제한테는 거의 횡포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특히 명나라전제군주제인 만큼, 장거정의 행동 자체가 황제를 업신여기는 행태였다.

장거정이 귀양길에 척계광이 보내준 관군으로, 자신의 가마를 호위하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척계광도 만력제한테 제대로 밉보였다. 그래서 만력제는 군대를 사적(私的)으로 이용하고, 장거정과 함께 반란을 모의했다는 명목으로 척계광에게 면직 처분을 내렸고[6], 제대로 장거정의 일족을 죽이는 명분으로 삼았다.

사실 전근대의 중국에서 황제의 권위나 권력에 대등하게 보이는 행위를 하는 것은 황제를 능멸하는 행위인 터라 구족을 멸할 대죄 중의 대죄였다. 장거정의 반대파는 장거정이 반역을 했다고 고발했지만 만력제도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평소에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상나라이윤이나 전한곽광과 같은 명신에 비유해 아부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확실히 명신이었지만 자신의 주군이 정치를 게을리한다는 명목으로 주군을 그 자리에서 내쫓은 신하들이었다. 군주인 만력제가 이런 비유를 듣고 웃어 넘겼을 리가 없다.

또한 장거정은 자신의 개혁 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측근을 기용하고, 정적들을 탄압하며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사람들의 불만이 컸는데, 그가 예상치 못하게 사망하자 반대파가 행동에 나서 이들의 모함성 떡밥을 만력제가 물었다는 얘기도 있다. 장거정은 집권 중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황제에게 탈정[7]을 명받고 계속 현직에 머물렀는데, 이는 당시의 성리학 세계에서 매우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8] 장거정의 일파였던 사람조차도 탈정을 취소해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을 정도였는데, 장거정이 탈정 중에 치러진 만력제의 국혼에 화려한 예복을 입고 참석하자 '사람으로서 기본이 되지 않은 불효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무엇보다 스승으로서 숨통이 막히도록 만력제를 다스렸던 장거정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특히 아버지 융경제가 황태자의 사부로 붙여준 장거정과 융경제의 측근 환관이었던 풍보는 만력제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만력제가 9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후에도 매달 3·6·9가 들어가는 날 오전에만 신하들의 상주를 받고 나머지 날은 공부를 시켰다. 거기다가 이들은 자성황태후의 후원을 받았기에 만력제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들에게 기를 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력제가 놀자판을 벌일라 치면 옆에 붙은 환관들이 풍보에게 이를 알렸고, 풍보가 다시 이를 장거정이나 자성황태후에게 고해 자성황태후가 만력제를 불러내서 이를 질책했는데, 만력제로 하여금 <죄기조>(罪己詔)라는 제목으로 반성문을 여러 번 쓰게 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자성황태후가 심하게 화났을 때는
"노왕(潞王)[9]을 황제 시킬 걸 그랬다."
라면서 조상들에게 석고대죄를 하도록 하여 만력제로 하여금 싹싹 빌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만력제는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만력제가 탈선한 것은 이러한 상황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장거정과 자성황태후가 죽고 나서야 만력제는 사춘기를 맞이한 것이다.

하지만 풍보 또한 장거정과 마찬가지로 사적으론 상당히 부패하여 사적인 이익을 많이 챙겼는데, <풍보전>에 의하면 '풍보가 싫어하는 자는 모조리 쫓아냈다'고 할 정도로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 적이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장거정 사후 강서도 어사 이식, 절강도 감찰어사 왕국칙에 의해 탄핵을 당하고 남경으로 유배가게 되었다. 어쨌든 이 사건은 만력제 개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신하들의 능력과 도덕성을 불신하고 정치에 환멸을 느꼈기에 이후로 황제의 업무에서 손을 놓아버렸다는 해석이다.

한편으론 핑계가 아니라 만력제가 진짜 아파서 그랬다는 의견도 있다. 만력제는 누군가의 부축을 받지 않고는 혼자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이었고[10], 등과 다리가 굽은 신병(身病)을 앓아 움직이기를 싫어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한 마디로 비만이나 척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만력제의 유해를 조사한 결과 등이 심하게 굽었음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여기에 아편에 중독되어 무기력증에 걸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또는 어려서 총명함을 보였던 그가 장거정이 죽은 뒤에 급격히 정무를 게을리한 사실을 두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인물을 잃음으로써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만력제가 언제부터 그런 상태였는지 확인할 수가 없고, 문화대혁명홍위병에 의해서 유해가 훼손되어 이쪽으로는 더 이상 연구가 불가능하다.

2.2. 만력태정(萬曆怠政)과 쟁국본(爭國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6%98%8E%E7%A5%9E%E5%AE%97.jpg

여하간 만력제는 이후 병을 핑계 삼아 무려 30여 년 동안 사실상 직무 수행을 거부했다. 이를 만력태정(萬曆怠政)이라고 한다.[11] 명나라의 광활한 영토 전역에서 매일 수천 건씩 쏟아져 올라오는 상소를 방치하고, 그 위에 엎어져서 잤다고 한다. 이를 본 신하들이 모여 땡볕 아래에서 직무 복귀 데모를 벌였으나 황제는 나오거나 대답하지도 않았으며, 신하들은 기다리다가 지쳐 픽픽 쓰러져 나가는 이까지 속출했다. 이에 환관들이 물과 얼음, 얼린 오이라도 주려고 했으나 황제는 방치했다.

만력제와 관료들 사이의 충돌은 특히 후계 문제에서 절정에 달했다. 황제는 활달한 성격의 후궁인 정귀비를 총애했는데, 이 때문에 정귀비 소생인 셋째 아들 주상순(朱常洵)을 황태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맏아들인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늦추면서 기회를 노렸다.[12] 그렇게 무려 19년이나 미루다가 주상락이 성인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황태자에 책봉하니 그때가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였다. 만력제의 어머니였던 자성황태후조차
"황상께서는 맏황자가 20살인데 왜 태자 책봉을 안 하십니까?"
라고 물었는데, 이에 만력제는
"애 엄마가 신분이 미천한 궁녀 출신이라서 모양새가 좀 그렇잖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황제의 친모인 자성황태후도 융경제의 승은을 입은 궁녀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성황태후는
"황상 또한 궁녀의 아들이란 것을 잊지 마십시오."
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만력제의 모후이자 황실의 제일 웃어른인 황태후까지 버럭하자 만력제도 어쩔 수 없이 주상락을 황태자로 책봉해야 했다.

참고로 이 사건은 동쪽의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니, 광해군이 아들 이지를 세자로 책봉하고 나서도 명나라로부터 승인을 늦게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만력제의 장남 주상락을 태자로 지지하는 신하들에게는 만력제에게 꼬투리가 잡힐 여지가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13] 이 일은 광해군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크게 보면 광해군의 성격이 삐뚤어지는데도 영향을 제법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임해군이 평범한 인물이기만 했어도 광해군을 제치고 임금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임해군이 워낙 개또라이 싸이코라서 신하들조차 대놓고 죽이자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나중에 선조가 뒤늦게 맞이한 계비 인목왕후영창대군을 낳으면서 더 문제가 꼬여버렸다.

여튼 이 사건을 국본의 쟁, 쟁국본(爭國本)이라고 한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사실상 두 가지뿐이었다. 황제가 신하들에게 굴복하거나, 아니면 황제가 유혈 사태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거나였다.

그러나 문제는 만력제가 둘 다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만력제는 신하들에 대한 신뢰는 포기했으나, 정작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권을 보유했다고 평해지는 명나라의 황제였던 만큼,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면 못 할 것도 없었겠지만 아예 인간 불신에 빠져버렸는지 대신 선택한 것이 파업이었다.

만약 만력제가 강한 의지로 밀어붙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났겠으나, 애초에 그런 의지를 보여주질 못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진짜 황태자 책봉을 마음대로 하려 했다면 어떤 사건에서든 둘 중 하나를 걸어서 날려 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만력제가 파업한 30년 동안 민란도 많고 혐의를 걸 만한 사건도 많았으나 그런 술책을 부린 적은 없었다. 만력제 자신도 9살 때부터 장거정의 지도 아래 황궁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인물이었기에 성리학 바깥쪽에서 해결책을 찾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료층과 타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리학 사회에서 장자 계승의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은 사회의 근본 질서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만력제가 자신의 고집을 꺾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진짜 인간에 대한 불신에 빠졌는지는 몰라도 황제는 30년 동안이나 그러질 않았다. 명나라 말기의 학자인 하윤이(夏允彛)는
귀비가 총애를 얻은 때로부터, 황상은 점차 만사를 귀찮아 했고 조회에 임하는 것이 드물어졌다.
라고 했다.

어쨌거나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조기에 해결되지 못한채 30년을 끌었는데, 장거정 사후 이를 조정의 공론으로 이끌어갈 뚜렷한 리더 또한 존재하지 않아서 해결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명나라의 '내각대학사'가 이전의 재상과 동등한 권위는 가질 수 없었다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재상에 해당하는 위치였다.

장거정 이후 실권을 잡은 사람은 대학사 신시행(申時行)이라는 인물로 온건파였는데, 대체로 신하들과 황제 사이에서 온건하고 중립적인 방식하에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신시행도 태자 책봉 사건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다른 신하들에게 '겉과 속이 다르다.'는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으며,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권력의 공백 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중종반정이나 탈문의 변처럼 아예 정변을 일으켜 만력제를 끌어내리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것조차도 마땅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비교적 정통성을 갖춘 가까운 황족은 만력제의 동생인 노왕 주익류가 전부였는데, 이 주익류는 사치스럽고 인격에도 결함이 있어 평판이 좋지 않았던 인물이라 만력제 대신 옹립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 또한 주익류의 가계를 제외한 나머지 황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황족은 헌종 성화제의 자손들이었는데, 만력제의 7~8촌 정도[14]되는 먼 황족이라서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에, 주익류 대신 다른 더 먼 황족을 옹립하는 것은 반대 세력이나 여타 황족으로 하여금 반란의 빌미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이후에도 태자의 지위는 확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3남인 주상순은 복왕(福王)에 봉해졌지만 임지인 낙양으로 떠나지 않고 황궁에 남았으며, 정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정귀비 쪽에서 손을 썼는지, 주상락이 머리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15], 1615년 정격안이라는 황태자에 대한 테러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방보와 오성 두 명의 환관과 장차가 죽었다. 참고로 당시 복왕 주상순은 바로 전 해인 만력 42년(1614)에야 낙양으로 떠났다. 관련자들을 처형할 시에 만력제는
"장자를 세우는 건 고금의 법도. 태자를 모해하려는 이는 용서치 않겠다."
라는 말을 남겼다.

기나긴 태업의 사유로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어떤 사유에서든 만인지상이자 지존인 천자의 위에 오른 인물이 업무를 내팽겨쳤다는 것이 실제 역사이며, 이는 고금을 막론하고 그의 사후에 일어난 명나라의 멸망에서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되었다고 지목된다. 그렇게 만력제는 나라에 사르후 전투 같은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개조차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었다.[16]

반면에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닥치지 않고 했다. 이런 막장적인 수전노 정책으로 인해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그의 몸집처럼 불어만 갔으나, 국고는 점점 바닥나게 되었다. 그렇게 황제가 돈만 밝혀대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간신배들이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나 재상에 앉혀 놓고, 자신은 오로지 취미와 재산 증식에만 열성을 보였다.

이때 만력제는 정사를 돌보지 않는 대신 황릉 공사를 하는 것과 보물을 감상하는 것을 즐겼고, 술과 여색까지 밝혀서 막장이 따로 없었다. 이 낙천적이며 놀기 좋아하는 황제는 자금성의 구중궁궐 깊숙한 곳에서 고립된 채 궁녀 10만 명과 환관의 시중을 받으며 상상조차 힘든 차원 속에서 살았다. 특히 만력제는 후궁들과 같이 목욕을 하거나 각종 연회를 여는 것을 즐겼으며, 나비 놀이와 반딧불 놀이를 즐겼다. 또한 연못에 배를 띄우고 배에 부채를 든 궁녀들을 태우고서는 자신이 연못 한 가운데서 나비를 풀어 그 나비가 부채 위에 앉으면 그 궁녀와 그날 밤을 같이 보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정력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었다. 잉어를 죽지 않을 정도로 때리면 눈물을 흘리는데 이 눈물을 받아 먹었으며, 주둥이가 긴 병 속에 고기를 넣고 여우에게 주면 먹지는 못하고 침만 흘리는데 그 여우의 침을 먹었다고 한다.[17] 그리고 정력에 좋다며 산딸기복분자를 밤마다 거의 매일 한 움큼씩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만력제는 단지 노는 것만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사이코패스 기질을 가지고 있어 궁녀들과 내시들을 몽둥이나 가죽 채찍으로 때려 죽이는 것이 취미였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환관들과 궁녀들이 만력제가 자신들을 언제 죽일지 몰라 벌벌 떨었다고 한다. 특히 기분이 나쁘면 환관이나 궁녀들을 불러서 몽둥이로 패 죽이며 즐거워했다. 실제로 명나라의 신하들이 만력제의 즉위부터 1592년까지 죽은 후궁의 숫자를 계산해 본 결과, 재위 20년 동안 내시와 궁녀들 약 1천여 명이 만력제의 가죽 채찍과 몽둥이에 맞아서 죽었다. 따져보면 1주일에 1명 꼴로 궁녀와 환관을 죽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할아버지인 세종 가정제가 궁녀들을 학대하다가 궁녀들에게 암살당할 뻔한 사건(임인궁변)이 있었음에도, 정도가 훨씬 심했던 만력제에게서 암살 미수 사건도, 음모도, 심지어 야사조차도 확인 및 기록된 바가 없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간혹 이에 대해 "만력제는 전근대 인물"이라며 변호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현대 기준으로 중범죄를 저지른 충혜왕연산군이 당대에도 폭군 취급을 받았듯이, 군주에게 조금만 불손하거나 오늘날의 경범죄 정도인 잘못만 해도 사형되는 일이 흔했던 시대였다 한들, 그 시대 관점으로도, 현대의 관점으로 중범죄[18]를 저지른 군주는 비난을 받았고, 따라서 만력제의 만행은 결코 변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전근대도 엄연히 예와 법에 따라 절차를 밟는 시대였다. 오히려 그런 예법은 지금보다 더 깐깐했다. 천명을 거스른 자라고 해서 반정이나 역성혁명으로 권좌가 바뀌었고 역사서에서도 ‘나쁜 군주’라고 기록했다.

2.3. 전방위적인 국가의 붕괴

기강이 해이해지고, 군신이 통하지 않으며, 이익을 쫓는 소인배가 분주히 돌아다니며 서로 다퉜다. 명나라는 실로 만력제 때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명사》(明史)
숭정제를 망국의 군주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 책임은 만력·태창·천계에게 돌아가야 한다.[19] 이들에게는 제사도 지내지 말아야 한다.[20]
청 성조 강희제
여하간 황제가 30년 동안이나 파업을 한 덕분에 중급 이하의 관리들 중에는 황제를 단 한 번이라도 봤던 경험조차 없는 사람이 많았고, 하다하다 재상마저 황제의 얼굴을 까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만력 34년(1607년)에 임용된 재상 이정기(李廷機)가 재상직을 때려칠 때의 상황을 보면, 당시 명나라 중앙부처 9부의 관직 31개 가운데 24개가 공석이었고, 호부와 통정사를 제외하고는 책임자가 없었으며, 도찰원과 대리사는 도장마저 없었다. 이걸 재상이 다 땜빵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할 일은 과다한데 동림당의 견제가 장난이 아니었기에 사표를 썼는데… 문제는 만력제가 사직서조차 처리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정기는 기다리다 지쳐 복건성으로 다시 이사해 절에 묵으면서 사직서를 5년 동안 무려 152번이나 보냈지만 황제는 묵묵부답이었다. 헌편 동림당에선 짜고 치는 고스톱이란 반응까지 나오면서 더욱 모함이 심해졌고, 결국 참다못한 이정기가 그냥 집에 가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원래는 황제를 능멸한 죄로 목이 달아나야 했겠지만 만력제가 잡아오라는 지시조차 하지 않았기에 이정기는 집에서 4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부고는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만력제는 그에게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줬다.

정부가 일을 못하거나 권력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있었어도 직제표 자체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경우는 중국사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물다. 그러나 조정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만력제는 자신의 취미에만 몰두했다. 장엄한 국가 제사 의식을 포함한 행사들은 전부 귀찮은 일들로 간주되어 생략되었고, 도저히 생략할 수 없는 경우에는 관리들에게 떠넘겨 대행하도록 했다. 나라의 정치 기구가 공전되자, 문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최상부로 승진할 희망이 없어졌지만 황제는 이런 생활이 이미 습관이 된 듯했다. 만력제에게는 이런 복잡한 국면을 해결할 의지도, 생각도 없었다.

만력제의 재위기는 특이하게도 현재까지 사형을 유지하고 실행하는 중국에서 유일하게 사형이 사라진 시기였다. 이것도 만력제의 성품이 어질어서가 아니었다. 태조 홍무제 주원장이 닦아놓은 명나라의 시스템은 크고 작은 나랏일 하나하나를 황제가 직접 승인해야 처리할 수 있었는데, 그 황제가 국정을 내팽개친지라 사형 집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21] 그래서 사형을 받아야 할 중범죄자들은 감옥에 들어갔다가 죄가 정해지지 않은 채 20년이 지나면 사면하고 석방하는 《대명률》의 규정으로 도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사형급이 아니라도 재판을 받아야 할 죄수는 있게 마련인데, 이 사람들에 대한 재판도 제대로 열리지 않아 투옥된 죄수들 대다수가 재판도 못 받고 죽어갔다.

거기다 만력제는 사후에 자신이 묻힐 황릉을 건설했는데, 이를 대규모로 하는 바람에 재정을 또다시 무지막지하게 까 먹었다. 그의 송덕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혔다.
짐의 공덕이 너무 크므로 세상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22]
게다가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은 최종적으로 결재할 사람 없이 산더미처럼 밀려, 신하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해져야 했으므로 나라가 겉보기에나 간신히 현상 유지가 되어 보였을 뿐 내부는 점점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치세 말년에는 만력삼대정과 사르후 전투 등의 대삽질로 동북방의 군사 요충지인 요동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상실한 요동 지역은 명나라1644년에 멸망할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만력제가 태업하는 동안 명나라는 겉으로는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30년 동안 어떠한 제도 개선이나 사회 개혁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동안 장거정의 개혁정치, 동림당의 등장, 양명학의 발흥 등 부분적인 개혁 운동이 발생하긴 했으나, 이것도 황제가 받아들여 정치에 포함시킬 때 의미가 있는데 황제 스스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 그저 민간 차원의 운동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일반적으로 군주들이 사치스럽거나 음란해서, 혹은 지나치게 잔인해서 나라를 멸망시킨 것과는 달리 아무것도 안 해서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색다른 점이다. 만력제 본인도 자기가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지 말년에 스스로
짐은 무위의 도로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
라고 드립을 쳤다.

2.4. 만력삼대정

임진왜란 이외에 변경 지방의 이민족들을 억누르기 위하여 병력을 많이 움직였는데, 이 중 큰 전쟁 3가지를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 한다.만력 20년(1592) 영하 지역의 몽골 출신 부총병이었던 발배(푸베이)의 아들인 발승은, 양아들인 발운 등과 세력을 규합하여 영하의 난을 일으켰다. 발배는 몽골 달단의 장수였다. 가정 연간에 달단의 칸이 부친과 형을 죽이자 무리 100명과 함께 영하의 명나라 군영으로 투항했다. 당시 명나라는 북방의 만리장성을 따라 군사 주둔지를 9곳에 설치했는데, 그곳들을 '9진'이라고 했다. 영하에는 몽골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영하진과 고원진 두 곳을 설치했다. 건국 이전부터 몽골은 명나라의 숙적이었다(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수도 대도를 ‘북평’이라 개칭[24]). 영종 정통제가 오이라트에게 맞서다가 토목보에서 참패하고 끌려가 치욕을 당한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었던 명나라 조정은 뜻밖에도 발배가 투항하자 그를 우대했는데, 이이제이의 전법으로 몽골의 세력을 억제할 속셈이었다.

명 조정의 의도대로 발배는 전공을 쌓아 도지휘로 승진했으며, 만력 연간에 이르러서는 유격장군, 부총병 등의 직책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만력 17년(1589)에는 발배의 직책을 아들인 발승은이 세습했다. 이때 발배 부자는 몽골에서 망명한 부족들을 은밀히 규합하여 사병을 양성했고, 명군의 군기가 문란한 것을 보고 반란의 마음을 품었다. 만력 19년(1591) 조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기병 3천 명으로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발배를 시기한 순무 당형과 명나라 관헌들은 발배 휘하의 병사들한테 보급도 제대로 해주지 않은채 오히려 사사건건 방해했다. 결국 피꺼솟한 발배는 만력 20년(1592) 3월 마침내 자신과 의형제를 맺은 한족 출신의 유동양 및 허조 등과 함께 병력 4만 8천 명을 이끌고 순무 당형과 명나라 관헌들을 죽인 후 반란을 일으켰다.

발배는 하투[25]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과 연합하여 영하 지역에 독립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반란군은 하서 지역의 47개 보를 점령하고 황하를 건너 하투 지역으로 진출하여 섬서성 전 지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고변을 접한 만력제는 대신들에게 반란을 진압할 계책을 요구했다. 이때 병부상서 석성은
"황하의 제방을 일시에 터뜨려서 반란군의 핵심 근거지인 영하성 안의 반란군들을 모조리 물고기 밥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라고 주장했다. 영하성은 황하 유역에 있었기 때문에 수공 작전으로 성을 함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사 매국정은
"백전 노장인 이성량을 영하로 보내 반란군을 토벌해야 합니다."
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급사중 왕덕완이 이성량의 복직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너무 부패했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이성량이 거느리던 요동 군대의 막강한 전투력이 절실히 필요한지라, 이성량 대신에 그의 아들 이여송을 총병으로 임명하고 영하로 보냈다. 이에 감숙순무, 엽몽태, 이여송이 이끄는 대군이 영하로 출정했다.

만력 20년(1592) 6윌 위학증의 지휘 아래 매국정, 엽몽태, 이여송 등이 이끄는 명나라의 대군이 영하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영하성의 반란군이 격렬하게 저항하여 위학증은 1개월이 다 지나도록 반란군을 진압하지 못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만력제가 분노하여, 위학증을 파면하고 엽몽태에게 지휘권을 넘기면서 엽몽태로 하여금 수공 작전을 펴도록 했다. 이때 엽몽태는 영하성 주위에 물샐 틈 없는 긴 제방을 쌓고 난 뒤, 황하의 물을 끌어들어 성 안으로 쏟아지도록 했다.

당시 이여송도 하투에서 반란군을 구원하러 온 몽골 기병을 물리쳤다. 영하성 안의 반란군은 양식이 떨어지고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지만, 명군은 쉽게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마침 기름장수 이등이라는 자가 나타나 매국정이 쓴 서찰을 각각 발승은과 유동양, 허조에게 보내 이간질시켜, 발승은이 그 둘을 죽이고 명군에 투항하자 발배는 자살하고 반란은 평정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는데 실패하여[26] 병력 4만 명과 대포 400문을 동원하여 일곱 달이 걸린 후에야 겨우 진압했다.

이 영하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명나라는 200여만 냥을 소진했는데, 은 200만 냥이면 명나라의 6개월 국가 예산에 해당되었다. 참고로 일조편법 도입 이후 어림잡아 파악한 명나라의 1년 국가 예산은 400만 냥이었다. 명나라 자체를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단순 충치였을 때 치과에 빨리 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이가 썩어서 감염되기 직전까지 되자 수술비로 1년 연봉의 반을 날린 것과 같았다.

또한 명나라 서남 지방의 파주[27]에서 묘족의 수장이자 파주선위사였던 양응룡이 반란을 일으켰다.(양응룡의 난) 사실 명나라의 역대 조정은 서남 지방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파주에 선위사를 설치했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선위사의 우두머리인 선위사는 소수민족의 족장을 임명했는데 이는 소수민족을 회유할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파주의 선위사는 지역 족장인 양씨 일족이 대대로 세습했다. 그들이 중앙정부를 대신해서 파주 지역의 통치를 시작한 시기는 당나라 말기까지 올라갔다. 당 대력 5년(770년) 산서성 태원 출신의 양단이 파주에서 할거한 이래 양씨 일족이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에 이르는 29대 800여 년 동안 관직을 세습하여 지역의 패자로 군림했다. 융경 5년(1571)에 양응룡이 부친인 양렬의 관직을 세습했다.

그런데 양응룡은 서남 지방의 명나라 관군들이 군기가 빠지고 전투 경험이 없는 약졸임을 간파하고는 그들을 멸시하며, 언젠가는 스스로 독립하여 서남 지방의 왕으로 군림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양응룡의 저택은 왕궁을 흉내내어 호화롭게 그지없었고, 심지어 수하에 환관을 두어 왕처럼 위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는 걸핏하면 사람을 죽여 위세를 과시했으며 다른 토호들을 억압했다. 나중에는 애첩이 이간질하는 말을 곧이 듣고, 처와 장모를 살해하는 만행까지 저질렸다.

이 때문에 처숙부인 장시조가 양응룡의 만행을 견디다 못해, 명나라 조정에 양응룡이 저지른 행패와 그가 모반을 꾸미고 있는 것을 고변했다. 이에 북경 조정은 양응룡을 체포하기로 결정했고, 만력 27년(1599) 귀주 순무 강동지가 도지휘사 양국주에게 관군 3천여 명을 이끌고 가서 양응룡을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양응룡은 이를 눈치채고는 묘족을 규합하여 반란을 이르켰고, 그를 토벌하러온 양국주의 명군을 삼백략으로 깊숙이 끌어들여 그들을 역공해 전멸시켰다.

양응룡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기강[28]을 공격했다. 유격 장량현이 기강성 사수를 결심했지만 이미 8만여 명이 넘는 반란군을 막기에는 중과부적이었다. 결국 기강은 반란군에게 함락되었고 성안의 관군과 백성들은 모조리 살해당하여 시산혈해를 이루었다. 양응룡의 반란 세력이 14만 명에 달할 정도로 커지자 만력제는 크게 당황했다. 마침 명군이 조선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귀국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양응룡 토벌을 명령했다. 그래서 만력 28년(1600) 호광과 천귀 총독 이화룡의 총지휘 아래 명나라 대군 20만 명이 8개 방면에서 출정했다.

특히 이때 만력제는 군비가 모자란다는 말에 자신의 내탕금을 풀어서까지 군비를 지원해주었으며, 조선에서 전투 경험이 많았던 총병 유정의 군사가 선봉에 서서 반란군을 토벌했다. 유정의 별명이 '유대도'였는데[29] 반란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반란군은 유대도가 나타난다는 소리만 들어도 도망가기 일쑤였다. 명군의 반격으로 참패한 양응룡은 병력 1만 7천 명으로 요새인 누산관[30]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양군이 114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유정의 군사가 양응룡이 저항하던 누산관을 함락하여 반란군을 완전히 제압했다. 양응룡은 애첩 주씨 및 하씨와 함께 자결했고 양응룡의 다른 가족들도 포로가 되어 북경으로 압송된 후 모두 처형되었다. 이로써 양씨 일족의 29대 800년 세습 통치는 종말을 고했고, 파주는 명나라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는 데 실패하여 무려 11년이나 쏟아 부어야 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비용만 해도 은 150만 냥이 들었다.[31]

이렇게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 즉 영하의 난 + 임진왜란 + 정유재란 + 양응룡의 반란 진압에 들어간 돈이 은자 1200만 냥이 넘어갔는데, 당시 명나라의 1년 전체 국가 예산이 은자 400만 냥에 불과했기에 결국 명나라는 재정 적자가 심각해졌다. 특히 만력삼대정 뿐만 아니라 활동이 거세진 여진족몽골족들과 내부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32] 막기 위해서 명나라는 매년 전체 국가 예산의 3분의 2를 국방비에 퍼부어야 했다.

그리하여 재정은 파탄났고, 이로 인해 가뜩이나 약해진 군사력도 더욱 약화되었으며, 결국 장거정이 땜빵해 놓은 북로남왜가 부활해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장거정이 일단은 부패하긴 했어도 일은 멀쩡하게 잘 처리해서, 명나라는 어느 정도 돌아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만력제의 친정 시절에 황제가 태업을 했다. 외부적으로는 북로남왜 및 여러 반란군의 창궐이 문제였고, 내부적으로는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이 판을 쳤기에 명나라의 쇠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4.1. 임진왜란

전쟁을 한동안 하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모든 왜군은 돛을 올려 모두 돌아갔으며, 조선의 난리 또한 평정되었다. 그러나 관백이 조선(東國)을 침범한 이후, 전후(前後)로 7년, 잃은 병사가 수십만, 수백만 석의 군량이 소진되었다. 명나라와 조선은 승산 없는 싸움을 했다.
명사》(明史)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고 일컬어졌는데 마침 곤란을 당했으니 어찌 좌시만 할 것인가. 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 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바로 팔다리와 같은 번방(藩邦)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바로 집뜰에 들어온 도적인 것이니, 그를 저지하고 죄를 주는 것은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신종 만력제의 조서, 《선조실록》 선조 32년(1599) 5월 20일 정묘 4번째 기사
만력제가 황제로서 행한 사실상 유일한 일로 평가받는다. 명나라 입장에서 보면 만력제가 이거라도 한 덕분에 전쟁이 명나라까지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만 지리적으로 조선이 일본과 명나라의 완충지대라 조선에 병력을 파병해야 한다고 석성이 적극적으로 파병을 주장했으니 굳이 만력제가 아니라 다른 황제였어도 명나라는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명나라의 조선 출병을 명나라 멸망의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33], 이후로도 명나라가 50여 년 동안 계속된 것을 보면 예방전쟁의 꽤 성공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276년 동안 지속된 명왕조의 수명을 약 20%(52년) 더 연장시킨(1592년 임진왜란 발발 ~ 1644년 명나라 멸망)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중국 학자는 "명나라 군대가 마지막으로 승리한 전쟁"이라고 평가했다.

전통적인 견해로 30년 휴무만큼이나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만력제의 낭비벽이었다. 사실 만력제가 세금을 많이 거둔 것이 문제인 것은 그 세금을 마구잡이로 써서 낭비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의 낭비가 그냥 낭비도 아닌 것이, 전비 지출에다가 황릉 공사에 자녀들 결혼 비용, 자신의 사치스러운 취미 생활 비용까지 추가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임진왜란이었다. 명나라의 영토가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까지 병력을 보내 도움을 주는 것은 강렬한 조선 보호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천하(동아시아) 정벌이라는 목표를 감안하면 만력제의 판단은 의외로 옳았다. 만력제는 단지 황실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조선 출병을 강행한 것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일본군의 전투력을 봤을 때는 조선에서 싸운 것이 오히려 명나라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오닌의 난 이후 150여 년 동안 지속된 센고쿠 시대 때문에, 대규모 회전에서는 동아시아에서 유례없는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34][35]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원정 직전에 실시한 간토 원정(호조 우지마사 정벌)에 20만 명을 동원할 수 있었는데, 이런 것이 가능했던 나라는 세계에서 명나라와 오스만 제국 정도밖에 없었다.[36]

게다가 히데요시의 궁극적인 목표는 황당하지만 실제로 명나라 정복이었고, 산해관을 넘을 필요도 없이 수군을 동원해 황해를 건너 중국 동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국 내에서의 전쟁이 불가피했다. 거기에 북경은 해안이나 한반도 북부와도 멀지 않았다. 물론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명나라 정복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자국 영토가 전쟁터가 되면 승리해도 본전도 못 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조선이 정복되면 일본군은 조선을 병참 기지로 확보하게 되니 이를 막기 위해 조선에서 싸우는 것이 확실히 명나라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삼켜 대륙을 공격할 병참기지로 확보하는 데 성공한 경우, 중국 대륙에 군사적으로 얼마나 거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지는 멀리 갈 것도 없이 후대의 만주사변중일전쟁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만약 일본이 조선 정복에 성공한 후 명나라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는 만주족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로 동맹을 맺고, 중원을 침공할 경우 임진왜란과는 차원이 다른 대전쟁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명군 참전에 따른 세력 균형은 일본이 전쟁에서 주저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또한 만력제 본인 및 명나라 전체의 위신 문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어쨋든 명나라 입장에서 조선은 가장 관계가 좋고, 비중이 큰 번국이자 우호국이었다. 이런 조선을 지켜줘서 '천조'와 '천자'의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명분상으로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비록 벽제관 전투에서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조선 백성에게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이었으나, 정유재란 때는 파견된 명군의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나 되었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했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만약 명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의 완패로 1593년 이후로는 잠시 남진을 거부하는 등 소극적이었지만,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2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파견해 전선을 유지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물론 일본군에게 많은 패배를 당해 적장을 모두 놓치고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수장당한 일본군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갔지만….(사로병진책 참고)

병력만 파병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 백성들이 수확을 못 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만력제는 명나라의 재정을 털어 곡창 지대인 산둥성을 매입해 조선 백성을 위해 원조했다. 이러한 지원이 없었다면 경신대기근급의 참사가 찾아왔을 가능성이 높다.[37]

이 때문에 관련 야사가 꽤 많다. 만력제가 평범한 수준 이상의 황제였다면 당연한 일을 한 것으로 간주되었겠지만, 평소에 일을 안하고 놀기만 한 인간이다 보니 뒷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의 군담소설인 《임진록》에는 조선 사신의 정성에 감동하고, 꿈에서 《삼국지연의》의 관우가 나와 "선조가 장비의 환생이고, 만력제가 유비의 환생"이라고 말한 바람에 '나는 유비, 선조는 장비'라고 철석같이 믿은 후 군사를 보냈다고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의 관우 신앙이 조선으로 전래되었는데, 이 관우 신앙의 영향이 소설에 반영된 듯하다.

다른 야사는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을 수행하던 조선의 역관 홍순언에 얽힌 설이다. 그가 명나라 관원들의 접대를 받아 연경의 초호화 기방에 갔는데, 거기 접대하러 나온 기녀가 누명을 쓰고 몰락한 명문가의 딸인 것을 알고는 가진 돈을 털어 건네 주고 그냥 나왔다고 한다. 그 기녀는 그 돈으로 기방에서 몸을 빼내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나중에 병부상서였던 석성(石星)의 애첩이 되었다(!). 그때 받은 고마움을 갚기 위해 석성에게 계속 조선에 출병해 달라고 졸랐고, 석성은 애첩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다른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게 파병을 주장했다는 야사다.

그 덕에 만력제는 훗날 청나라의 지배 민족인 만주족의 심각한 지배를 받게 되는 중국인(한족)들에게 분노를 사게 되었는데, 정작 조선에서는 만동묘까지 만들어 칭송받는 위치로 격상되었다. 조선에서는 당파를 막론하고 상당한 추종자들이 생겨났고, 만력제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와 대보단을 숙종 대에 조선 땅에서 세우게 되어 영조, 정조 대에도 제삿밥을 먹게 되었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망국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청 성조 강희제는 역대제왕묘에서 만력제를 제외하기도 했다. 조선의 만동묘는 송시열의 제자들이, 대보단은 국가에서 세운 것이었다. 즉 당시 민간과 정부 할 것 없이 숭명사상과 만력제의 공덕을 기리는 풍조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세도를 부리게 되었는데, 충청북도 괴산군 화양동서원에 있는 만동묘가 바로 명 신종 만력제를 모신 사당으로,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때 폐지되었다가 대원군의 실각 후인 1874년에 복구되었다. 심지어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까지 만력제에 대한 제사가 계속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일본 제국이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파괴하고 제사를 금지하면서 명맥이 끊기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벌어진 상태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여길 여지를 차단하고, 명목상 전통문화의 계승이 독립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비록 괴뢰국이지만 명목상으로나마 청나라의 후신을 표방하는 국가였던 만주국을 세운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조선 지배와 중국 침공을 정당화하는 차원에서 명나라를 비하하고, 청나라를 미화할 필요가 있었다. 한때 한국인들 사이에서 병자호란 당시의 청나라를 미화하는 역사관이 널리 퍼졌던 것도 결국 그런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 컸다.

사실 명나라군도 고의적으로 처음부터 조선 민중에게 민폐를 끼치며 약탈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보급선을 구축한 다음 최대한 민폐를 주지 않고[38] 병사들이 명나라에서처럼 은자를 준비해 현지에서 사다 먹으려고 했다. 특히 물자를 현지에서 구매하면 군수 부담도 줄고, 지역 상권에도 이득이었다.[39]

하지만 당시 조선은 동전이 국제 교역을 했을 때나 쓰였을 뿐, 국내 거래에는 전혀 쓰이지 않아 명나라 군인들은 기껏 준비한 은자로 뭘 사다 먹을 수 없었다는 사정이 있었다.[40] 조선에서 만력제의 제사를 계속 지낸 것을 사대주의라며 비웃기는 하지만, 사료를 살펴보면 (제정신으로 했든, 미쳐서 했든) 만력제의 강한 의지 덕에 조선이 도움을 받은 면도 있음이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서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재조지은이라며 만력제가 좋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당장 임진왜란 한참 뒤인 정조의 치세때 정조 스스로가 이순신을 칭찬하는 내용의 글을 쓰는데도[41] 서두부터 신종 황제께서 나라를 도와 구한 은혜가 크다로 시작하고 있다.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청나라의 보복성 조치를 부를 소지가 다분함에도 이미 망해 없어져 눈치 볼 것 없는 명나라의 황제를 찬양했다는 것은 상당히 흥미롭다. 다만 이와는 별개로 사르후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이 참패하자, 조선인들 중에서는 만력제가 명나라의 국정을 돌보지 않아 명나라군을 약화시킨 것을 귀책 사유 중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42] 또한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선 조정에서, 나라가 망했는데 자결한 신하가 없는 것에 대해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충신들이 떠나갔기 때문이라고 디스하는 기록이 있는데 숭정제는 당시 그리 나쁜 평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임금답지 못한 황제가 신종 만력제이고, 해당 기록은 은근슬쩍 만력제를 디스하는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43]

이뿐만 아니라 18세기 성해응[44]이라는 조선인도 만력 연간의 정치에 대해
"환관들은 진주와 목재를 거두어 들였고, 사방은 광세로 인해 고통을 받았으며, 그의 총애를 받는 후궁 정귀비는 태자를 해치려 했다."
고 하여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임진왜란때 원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력제를 바라보는 조선의 시각이 반드시 긍정 일변도였다고만 볼 수는 없다. 사실 만력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아 명나라를 망친 것은 결과적으로 조선이 섬기던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오히려 조선이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는 참사를 초래했으니, 이에 대해 조선인들 입장에서는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당연히 만력제를 안 좋게 볼 수밖에 없다.

태업으로 자국을 망친 것과는 별개로 만력제가 조선을 좋게 생각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후 광해군 시대에 후금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펴자, 서광계 같은 명나라 관료들은 이런 조선의 간보기 외교를 비난하며, 조선에 황제를 대리하는 감호(監護)를 보내 조선 왕을 지도해야한다고 할 정도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조선 조정에서도 이런 명나라의 분위기를 읽고, 우려했지만,[45] 만력제는 조선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또한 광해군이 명나라의 독촉을 못이겨 후금 토벌전에 원병을 보낸 후, 사르후 전투에서 수천 명의 조선군이 전사하자, 만력제는 전사한 조선군 장병의 유가족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수만냥을 보냈다. 이로 인해 만력제는 중국인들로부터 '고려[46] 황제' 혹은 '고려 천자'라는 비아냥을 들었다.[47][48]

따지고 보면 "왜군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라는 얘기가 나왔던 명나라군의 약탈이 심했던 것도[49], 만력제가 나라를 망친 탓에 군대의 기강이 망가진 탓이었다.[50] 이는 고려시대 카다안의 침입 당시, 지원을 온 원나라군과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당시 지원군의 사랑관이었던 세도칸은 고려와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고, 외국군의 입장에서는 여기저기서 약탈을 하며 전투하는 것이 편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군령이 엄하고 위세가 대단해 세도칸 휘하의 사병들은 고려 백성들을 약탈하지도, 괴롭히며 행패를 부리고 재산을 뺏는 일도 전혀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충렬왕이 원나라 장수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놀자판을 벌이자 "지금 쌀도 없는데 이렇게 놀다가 적하고 싸울 때 군량미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러는 것입니까?"라고 일침을 날릴 정도로 개념인이었다.

이런 약탈은 명나라 말기의 엉망진창인 병참 제도와 연관이 있었는데, 명나라 조정은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유지하기 위한 병참을 돈으로 때운다는 결론을 내리고, 군인들에게 병참 비용을 은으로 제공했다. 그런데 이는 방어전을 수행하는 명나라 본토에서는 매우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조선의 백성 입장에선 은을 받아봤자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었으며, 동등한 가치를 제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엉망인 군기와 합쳐지니 '약탈'이라는 최악의 결과가 나온 것이었다.

2.5. 그 외의 낭비

만력삼대정에 든 전비만큼이나 만력제의 황릉 건설 비용[51]도 엄청났다. 규모가 깊이 67m, 총 면적 1,200㎡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녀들에겐 더 후했다.[52] 황태자와 황자의 책봉비 및 혼인비로 930만 냥, 의복비 등으로 280만 냥, 대략 1200만 냥을 사용했다. 그것도 임진왜란 직후이자 양응룡의 반란이 진압되지도 않은 1599년이었다. 이쯤 되면 만력삼대정은 핑계로 보인다.

다음 황제인 광종 태창제 때의 풍부한 내탕금을 근거로, 만력제의 치세때 재정이 흑자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풍부한 재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세금 증액 때문이었다. 또한 은광에 부여된 광세(鑛稅)의 화로 인한 결과로 소주(蘇州)와 산동의 임청(臨淸) 등지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황제가 일을 안 하니 이런 낭비를 막으려는 어떤 정치적 개혁이나 보완책이 나올 리 없었다.[53] 게다가 장거정부터 시작해서 당대 명나라의 문•무 백관들은 심각하게 부패하여 백성들한테 어떻게든 뜯어먹을 궁리나 했으니 궁중 유지비는 정말 심각할 정도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력제는 광세를 효율적으로 부과하지도 못했다. 광세사들이 궁중에 바친 돈이 대략 300만 냥 정도였는데 그 외 광세사가 600만 냥, 수행원이 900만 냥, 광세사 휘하의 깡패 무리가 1200만 냥을 각각 착복했다고 한다. 농민들이 매년 83% 이상 세금을 더 착취당한 셈이었다. 결국 만력제의 광세는 농부들이 세금을 지불할 능력을 잃게 했을 뿐만 아니라 호부가 징수하는 국가의 조세가 대폭 감소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병력을 풀어 광세사 휘하의 깡패들만 정리했어도 세금이 줄줄 새는 것만큼은 크게 막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렇게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 광세의 폐단은 당대 조선에도 알려져서, 조선인들마저 "광세로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디스하고 산동 어사의 주본을 베껴 조선 조정에 그 심각성을 보고할 정도였다.
이 기고(李旗鼓)가 역관에게 말하기를 '천조의 태감(太監)이 광산 개발과 점세(店稅) 문제로 금주위(金州衛) 지방에 나와서 가혹하게 수탈하며 갖은 못된 짓을 다하므로 저자 백성들이 원망과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행상 달자(行商㺚子)를 사주하여 태감을 꽁꽁 묶어 작은 우리에 가두고 출입하거나 음식도 들게 하지 않아 장차 굶주리고 목말라 죽게 되었으니, 매우 우습다. 일은 이렇게 되었지만 이것이 어찌 당신 나라에까지 미칠 리야 있겠는가.' 했습니다. 중국에서 환관을 보내 재물을 모으는 행위가 정당하지 못한 징수이긴 하지만 저자 백성들이 태감을 묶어놓고 꺼리는 바가 없었으니, 인심과 풍속이 극도로 한심합니다. 연방(椽房)에서 얻은 산동도 어사(山東道御史) 요사인(姚思仁)의 주본 1본을 베껴 올려보냅니다.
요사인의 주본은 다음과 같았다.
광산 개발과 점세(店稅)로 천하가 소란한데 이 일은 종묘사직의 안위와 관계됩니다. 성명께서는 조정의 의논을 널리 채택하시어 빨리 정지령을 내림으로써 인심을 수습하고 국운을 유지하소서.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황상(皇上)께서 등극하신 지 20여 년 동안 백성을 상처난 사람 돌보듯 하시고 백성을 자식처럼 보호하셨으므로 천하가 바야흐로 간절히 태평성대를 바라며 불세출의 임금이라고 칭송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인이 이익을 말하여 성상을 미혹시키면서 처음 광세(礦稅)로 유도한 결과, 기보(畿輔)·산동(山東)·섬서(陜西)로부터 민월(閩越)·광동(廣東)·강서(江西)·절강(浙江)에 이르기까지 거의 다 채굴했고, 점점 극변 요해지인 요동(遼東)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점세(店稅)로 유도한 결과, 천진(天津)·임청(臨靑)으로부터 호구(湖口)·광월(廣粤)까지 세금을 거둬들였으며, 점점 교화가 미치지 않는 면전(湎甸)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산 유곡까지 파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심산 유곡까지 샅샅이 그물을 쳐 놓고 온 천하 대지 위에 함정을 파 놓은 뒤 장사하는 백성들의 골수를 착취하니, 그들은 하소연할 길이 없고, 무신(撫臣)·안신(按臣) 역시 가슴을 치고 분노하면서도 누구 하나 감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비는 그 아들을 보전하지 못하고, 지아비는 그 아내를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고금에 걸쳐 이러한 행동과 이러한 상황을 간직하고도 종묘사직이 오래도록 편안하여 무사한 적이 있었습니까. 온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누차 상주하였어도 성지의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신들은 언관으로 있으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종묘사직이 근심되므로 삼가 국가 안위의 대계를 황상을 위해 극언하겠습니다.

근년 이래로 하늘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하며 재물은 고갈되고 백성은 곤궁한데, 강회(江淮)사이엔 몇 년째 내리 큰물이 지고 양림(梁林)의 사이엔 1,000리 들판이 거북등처럼 갈라졌습니다. 인심이 흉흉하여 모두 난리 일으킬 생각만 하는 판에 광산을 채굴하고 점세를 징수하는가 하면, 거기에 무변(武弁)으로 하여금 사태를 악화시켜 남의 집을 허물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며,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생명을 해치게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장사꾼이 물건을 지고 저자에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경우까지 있으니 도적보다도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전하는 말에 '짐승이 궁하면 달려들고 백성이 궁하면 난리를 일으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될 경우 불령한 천하의 간웅(奸雄)들이 모두 날뛰고 기세를 부려 틈을 타서 일어날 텐데, 기보에서 기병하면 천하의 복심이 위태하고 중원에서 기병하면 천하의 허리가 끊어지고 강회서 기병하면 천하의 인후가 끊길 것이고 강서·절강·민월·광동에서 기병하면 천하의 지체가 부러질 것이니, 순식간에 토붕 와해되고 말 것입니다. 황실 창고에 금은 보화가 하늘에 닿을 만큼 쌓였을지라도 국가의 멸망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그리고 천하는 황상의 천하이고 인민은 황상의 인민입니다. 재물을 황실 창고에 쌓아놓은 뒤에야 황상의 재물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용을 황실 창고에서 가져다 쓴 뒤에야 황상의 비용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역》(周易)에서 사람을 모으는 것을 '재'(財)라 했고, 《대학》(大學)에서는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녹대(鹿臺)에 재물이 모이자 은(殷)나라가 폐허로 되었고, 채장(彩藏)이 채워지자 한(漢)나라의 사직이 위태해졌으며, 경림(瓊林)에 재물이 쌓이자 당(唐)나라가 쇠퇴해졌고, 낙구(洛口)에 곡식이 가득차자 수(隋)나라가 멸망했습니다. 고래로 역대의 군주가 악착같이 재물을 거두어들여 아침 저녁으로 액수를 헤아리면서 산더미같이 쌓아두고 후세 자손을 위해 계획했지만 그 자손은 한 푼도 써보지 못한 채 간웅·도적의 밑천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황상께서는 "사람을 모으는 것이 재물"이라는 《주역》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백성이 흩어진다는 《대학》의 경계를 곰곰히 되새기며, 녹대와 거교(鉅橋)를 전철로 삼고, 경림과 대영(大盈)을 거울로 삼으소서. 그리하여 광산 개발·점세·시박(市舶)을 담당시키기 위해 파견한 여러 중사(中使)들을 전부 소환하시고, 체포되어 치죄된 군수·현령 등을 모두 관대히 용서하시며, 각부(閣部)의 대신을 불러 함께 정무를 보소서. 그리하면 떠났던 천명이 다시 돌아올 것이고, 원망하던 인심이 다시 기뻐할 것이며, 위태로왔던 종묘 사직이 다시 편안해질 것이니, 만세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이 틀림없이 여기에 있게 될 것입니다.
1602년 지병으로 죽을 지경까지 간 만력제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광세를 모두 폐지하고 쫓겨난 이를 모두 복권한다.'는 어명을 내려 문제가 풀리나 싶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쾌차해서 전날 내린 명령을 뒤엎었다. 심지어 황제를 도와 광세를 물리던 환관들도 반발했으나, 거기에 더해 자금성 내의 건청궁과 곤녕궁을 확대하여 중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궁전 건축의 결과, 총 930만 냥이 들었는데 당시 명나라의 2년 예산을 웃도는 금액이었다.

심지어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군비가 모자라 황제 개인 계좌인 내탕금에서 이를 충당하자는 신하들의 의견[54]까지도 거부했다.

2.6. 말년

야사에 따르면 만력 41년(1613년) 9월의 어느 아침에 튼튼한 말을 탄 한 이민족 여인이 만력제의 시야에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광경에 황제는 질식할 것 같았다고 하며, 말발굽 소리는 그의 신경을 밟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말이 뛰어오자 먼지가 일었는데 먼지가 마치 구름처럼 말의 사방을 에워쌌다. 여인은 긴 창을 들고 만력제를 향해서 돌격해 왔다. 만력제가 말을 탄 여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가까이 오자 만력제는 비명을 질렀는데 자신이 용상에 누워 있으며, 이마에는 식은 땀이 엄청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꿈이었던 것이다.

만력제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지만 말년에 들어서 허약해진 몸이 아파왔다. 곁에 있는 환관이 이마의 땀방울을 닦아 주었는데 만력제는 환관에게 대신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대신들이 이렇게 황제를 대면하는 것이 사실인지를 의심할 정도로 황제와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신하들은 줄줄이 들어와서 처음 보는 만력제의 용상 아래에서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그들에게 자기가 꾼 기괴한 꿈을 이야기하자 사관이 이를 옮겨 적었는데, 만력제는 신하들에게 이 꿈의 뜻을 풀이해 달라고 했다.
그대들은 피휘를 할 필요가 없다. 기탄없이 말해 달라.
그러자 관리들은 금방 답을 내놓았는데 그 해석은 이러했다. 꿈 속의 이민족 여자가 말을 타며 창을 들고 있다는 것은 대명(明)의 강산을 빼앗겠다는 뜻이라고 말이다.[55] 그러나 만력제는 그 해몽을 믿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듣고도 계속 놀아 제꼈다. 만력 44년(1616년)에 누르하치가 허투하라에서 칸위에 올랐을 때 만력제가 3년 전의 꿈을 기억해 냈을지는 참 궁금한 사실이다. 자신의 꿈에 나왔던 누르하치가 중국의 동북부에서 나타났지만 만력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미 발생한 사실에 대하여 황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변방의 분란도 그의 식어버린 열정을 되살리지 못했고, 명나라는 결국 망국의 길을 걸었다.

만력 47년(1619년) 9월, 이부상서 조환의 호소에 의해 조정 백관이 문화전 앞에 줄줄이 무릎을 꿇고, 황제가 친히 조회에 참석하여 정사를 논의할 것을 부탁했다. 관료들이 이런 최후의 방식으로 황제에게 항의를 표시한 것이었다. 관리들은 모두 모였으나 오로지 황제만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황제는 자신이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그의 존재를 드러냈고, 침묵으로 권위를 나타냈다. 하루 종일 황상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아서 항의하던 관리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졌다. 그들은 스스로 일어나서 항의를 끝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고 허약한 관리들의 경우, 하루 종일 무릎을 꿇고 있었으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황제와의 힘겨루기에서 관리들이 우위를 점할 수는 없어서 결국 사태는 수습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황제는 대충 때가 된 것을 파악하고는 환관을 보내 문화문에서 자신의 뜻을 낭독하게 했는데 그 내용이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모든 관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조회에 참석하는 문제에 대하여는 그저 두 글자로 답했다. '면담'(免談), 즉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것이었다. 조환은 어이가 없어 만력제에게 상당히 패기있는 글을 올려서 이렇게 물었다.
만일 어느 날 계문(북경 서쪽)이 유린당하고, 철기가 경교(京郊)를 짓밟을 때도 폐하께서는 여전히 깊은 궁궐에서 아무 걱정 없이 베개를 높이 베고서 병을 핑계로 해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고집이 더럽게 센 만력제는 관료들의 압력에도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았으며, 자신을 위해주는 관리들을 귀찮아했다. 그렇게 신나게 나라를 말아먹은 만력제는 병세가 악화되어 병석에 누워 지내는 일이 많아졌고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은 지 48년이 지난 1620년, 8월 18일에 궁궐에서 아주 평안하게 세상을 떠났다.[56] 그는 자신이 친히 설계에 참여한 정릉(定陵)에 묻혔으며, 관은 효단황후와 효정황후, 즉 공비 왕씨 사이에 놓였다. 묘호는 신종이었는데, 이 '신종'이 보통 딱히 내세울 만한 업적이 없거나, 한 일이 없는 군주에게 묘호를 안 주기도 뭐하니, 어쩔 수 없이 붙였던 묘호라는 걸 감안하면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2.7. 황릉

만력제의 매장지인 정릉(定陵)[57]은 만력 12년(1584) 11월부터 만력 18년(1590) 6월까지, 상술했듯 명나라의 2년치 국가예산이던 은 800만 냥을 들여 건설되었고, 이후 30년 동안 비어 있다가 만력제가 붕어한 후 태창 원년(1620) 10월 3일에 주인의 시신이 안장되었다.

1955년 10월 4일에 국무원의 승인을 받은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58]의 주도로 1956년 5월에 발굴을 시작한 후 1958년 7월에 작업이 완료되었다. 1959년 10월 1일에는 정릉에서 출토된 명나라 말기의 유물들을 보관한 '정릉 박물관'이 개관되었고, 발굴 이후 저우언라이, 천이, 쑹칭링 등 중국의 고위 정치가와 호찌민 등 세계의 명사들이 두루 관람했다. 특히 천이는 유물 보전을 위해 6만 원을 따로 기부하는 등 상당한 업적으로 선전되었으나, 저우언라이는 우한이 요청한 성조 영락제의 장릉 발굴에 대해서는 금지하는 등 추가 발굴 사업은 유보시켰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들이닥치면서, 1966년 8월 24일에 만력제, 효정현황후 왕씨, 후비들[59]의 유골이 봉건의 잔재로 규정되었다. 이 귀중한 유물들은 정릉 앞 광장에서 홍위병들에 의해 "봉건 지주 계급의 우두머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인민재판에 회부된 후, 바위로 찍혀 부숴지고 불태워졌다. 이 과정에서 정릉 박물관에 있었던 황제와 황후, 후비들의 초상화, 정릉에서 나온 일부 부장품들, 자료 사진들도 만력제의 시신과 함께 소각되었다.

원래 발굴 의도는 정말 만력제가 아파서 30년 동안 정사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때 그의 한쪽 다리가 짧다는 사실과 키가 164cm 정도였고# 아편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구체적인 질환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유골과 부장품이 모두 불타버렸기에 정확한 진상은 오늘날에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신뢰성 있고 자세한 기록이 발굴되지 않는 이상 진상은 영원히 미궁 속일 것이다. 거기에 만력제의 유골이 파괴된 날에 폭우가 쏟아져서 남아있던 재도 사라졌고, 이 때문에 현재 만력제의 유골은 머리카락 몇 가닥 외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참고 자료 이에 대해 후대의 몇몇 중국인들은 '만력제가 생전에 벌인 악행들에 대한 천벌을 죽은 뒤에야 받았다'는 드립을 치기도 한다.[60]
전술하듯 정릉 내 부장품 일부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파괴되었지만, 발굴이 제대로 진행되었어도 무령왕릉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심각한 훼손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정릉과 같은 대형 무덤을 발굴하여 조사할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정릉 안에 있던 유물들은 놀랍게도 거의 원형대로였지만, 명 황실의 비단은 탈수 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으며, 냉동실 하나 없어서 발굴 직후에 많은 유물들이 복원 불가능한 상태로 훼손되고 말았다. 여기에 결정적인 이유는 발굴에 참여한 연구원들이 반동으로 몰려서 대부분 하방당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발굴대원이었던 조기창은 정릉 발굴 보고서 작성 중인 1959년에 농장으로 하방되어 10년이나 중노동을 해야 했는데 이유는 '독가스를 살포한 죄'였다.

사실 그 독가스란 것이 유물의 부식을 막기 위한 포르말린이었지만, 포르말린의 독한 향에 불쾌해진 공산당원들에겐 그건 알 바가 아니었다. 이런 연유로 정릉의 발굴보고서는 2022년 현재까지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발굴하지 않았다면 땅에 묻힌 채 후대를 기약할 수 있었을 천금 같은 유물과 학술자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당시의 트라우마로 중국 고고학계는 황릉 발굴을 금기시하게 되어서 고도인 섬서성 서안 일대에는 역대 왕조가 남긴 수많은 황릉들이 발굴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소위 환단고기 신봉자라고 불리는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이 엉뚱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3. 평가

명 4대 암군 중에서도 단연 원톱으로 꼽히는 것은 물론이고, 주왕[61], 서주 유왕, 이세황제, 후한 영제, 유송유의부, 유자업, 유욱, 남제소소업, 소보권, 양제, 의종, 북송 휘종, 해릉양왕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군주를 꼽을 때 반드시 후보로 언급되는 군주이다.[62] 한마디로 군주 한 명이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는가를 몸소 보여준 장본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만력제는 암군들 중에도 특이한 축에 든다. 보통 암군으로 꼽히는 이들은 폭정을 저지르고 가렴주구를 일삼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무리수를 두며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잘못된 정책을 펼쳤다.[63] 이런 일반적인 암군들은 어찌되었건 무언가 일을 하다가 그게 잘 안 풀려서 나라를 망쳤는데, 만력제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나라를 망쳤다. 그런 점에서 암군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황제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들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길어 48년에 달했는데, 30년 동안 황제 업무를 거부하는 사상 초유의 일을 벌였다.[64]

만력제가 업무를 거부한 이유가 단순히 나태한 성격이나 꾀병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정신질환이나 정치에 대한 환멸이 원인이라는 추측도 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광기에 휩싸인 홍위병에 의해서 만력제의 유골이 불타버려 현대적인 연구는 불가능하지만, 과거의 연구와 기존의 자료들을 검토하면 만력제는 몸의 윗부분이 눈에 띄게 곱추였고, 왼쪽 발이 약간 짧은 기형이 이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30년 동안 업무 거부를 하며, 타인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 이러한 기형 때문일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게다가 재위 초반 10년은 장거정의 섭정 기간이기도 했으니,[65] 사실상 임진왜란 7년 동안만 일한 셈이었다.[66]

만력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군의 조선 출병에 적극적이었다.[67] 그 덕에 중국에서도 명나라가 망한 후 안 올리던 제삿상한국에서, 그것도 사후 300여 년 뒤인 20세기 초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 틈에 건주여진의 누르하치는 성장했고, 이것이 사르후 전투정묘호란, 병자호란 심지어는 명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비록 조선이 '재조지은'이라고 만동묘를 지으며 제사를 지내주긴 했으나 재조지은과는 별개로 조선 조정 역시 만력제가 암군인 줄은 인지하고[68] 이 점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는데, 당장 《조선왕조실록》에서 천계제는 원망할 수 없으나 만력제가 정사를 돌보지 않은 점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경고하는 기록이 있다.
사리에 어두운 임금은 원망하지 않는 법이니, 천계(天啓) 황제는 원망할 수 없는 임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만력(萬曆) 황제는 초년에 영매하고 호걸스럽던 임금이었는데도 40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신료들을 인접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경계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출처]
이덕일 같은 사람은 서인을 비판하며 무모한 북벌론을 폈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서인과 대립하던 남인이 더 청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폈고, 이런 '숭명반청'정서는 19세기 초까지도 지속되었다.[70] 당장 위의 발언을 한 사람부터가 다름아닌 송준길로, 이덕일이 극도로 증오하던 송시열의 6촌 겸 당여로서 현종의 치세때 서인 산당(山黨)의 영수였다.[71] 결국 만동묘를 지어서 제사까지 지내준 시대에도 정사를 돌보지 않은 만력제의 잘못은 비판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초유의 업무 방치는 곧 명나라의 멸망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분명 만력제는 능력이 있었지만 스스로가 그 기회들을 버린채, 평생 신하들의 말에 귀를 닫으며 놀고 먹는 길을 선택하고, 살다 죽었기에 명•청시대에 더욱 비판받게 되었다.

스승이었던 장거정으로부터의 학대 때문이었는지, 만력제는 그나마 아버지로서는 좋은 인물이었지만,[72] 그가 자식들을 위해 더 사치를 부려 더 많은 세금을 걷고, 결국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는 점에서 암군이었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건 어디까지나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 같은 걸로 봐야 하며, 오히려 훗날의 사르후 전투 등, 청나라의 흥기에 도움을 주어 병자호란의 치욕을 조선이 당하도록 만든 간접적인 원흉이었기에 공1 과9 정도의 암군이라고 판단하면 정확하다.

만력제의 30년 넘는 파업, 즉 만력태정과 멀쩡한 황태자를 폐위하고 주상순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던 쟁국본은 국가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제대로 된 후임 황제를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그나마 숭정제가 극단적인 강경책으로 나라를 살리려고 했으나 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명나라는 비참하게 멸망하고 말았다.[73]

4. 가족 관계

5. 기타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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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 가준 · 황불 · 장열 · 사종 · 증감 · 양경 · 서각 · 이개 · 황가 · 왕홍유 · 총란 · 오세충
186권 「한문등전(韓文等傳)」
한문 · 장부화 · 양수수 · 허진 · 옹태 · 진수(陳壽) · 번형 · 웅수 · 반번 · 호부 · 장태 · 장내 · 왕경(王璟) · 주흠
187권 「하감등전(何鑒等傳)」
하감 · 마중석 · 육완 · 홍종 · 진금(陳金) · 유간 · 주남 · 마호
188권 「유천등전(劉蒨等傳)」
유천 · 여충 · 조우 · 대선 · 육곤 · 장흠(蔣欽) · 주새 · 탕예경 · 허천석 · 장사륭 · 장문명 · 범로 · 장흠(張欽) · 주광 · 석천주
189권 「이문상등전(李文祥等傳)」
이문상 · 손반 · 호관 · 나교 · 엽쇠 · 대관 · 황공 · 육진 · 하양승 · 하준
190권 「양정화등전(楊廷和等傳)」 191권 「모징등전(毛澄等傳)」
양정화 · 양저 · 장면 · 모기 · 정이 모징 · 왕준(汪俊) · 오일붕 · 주희주 · 하맹춘 · 풍희 · 서문화 · 설혜
192권 「양신등전(楊愼等傳)」
양신 · 왕사 · 장충 · 유제 · 안반 · 장한경 · 장원 · 모옥 · 왕시가 · 정본공 · 장왈도 · 양회 · 장찬 · 곽남
193권 「비굉등전(費宏等傳)」
비굉 · 적란 · 이시 · 고정신 · 엄눌 · 이춘방 · 진이근 · 조정길 · 고의
194권 「교우등전(喬宇等傳)」
교우 · 손교 · 임준 · 김헌민 · 진금(秦金) · 조황 · 추문성 · 양재 · 유린 · 장요(蔣瑤) · 왕정상
195권 「왕수인전(王守仁傳)」 196권 「장총등전(張璁等傳)」
왕수인 장총 · 계악 · 방헌부 · 하언
197권 「석서등전(席書等傳)」 198권 「양일청등전(楊一淸等傳)」
석서 · 곽도 · 웅협 · 황종명 · 황관 양일청 · 왕경(王瓊) · 팽택 · 모백온 · 옹만달
199권 「이월등전(李鉞等傳)」
이월 · 왕헌 · 호세녕 · 이승훈 · 왕이기 · 범총 · 왕방서 · 정효
200권 「요막등전(姚鏌等傳)」
요막 · 장정 · 오문정 · 채천우 · 첨영 · 유천화 · 양수례 · 장악 · 곽종고 · 조시춘
201권 「도염등전(陶琰等傳)」
도염 · 왕진(王縝) · 이충사 · 오정거 · 방양영 · 왕광 · 왕월 · 서문 · 장방기 · 한방기 · 주금 · 오악
202권 「요기등전(廖紀等傳)」
요기(廖紀) · 왕시중 · 주기옹 · 당룡 · 왕고(王杲) · 주용 · 문연 · 유인 · 손응규 · 섭표 · 이묵 · 주연 · 가응춘 · 장영명 · 호송 · 조병연
203권 「정악등전(鄭岳等傳)」
정악 · 유옥 · 왕원석 · 구천서 · 당주 · 반진 · 이중 · 구양탁 · 도해 · 반훈 · 여경 · 구양중 · 주상(朱裳) · 진찰 · 손무 · 왕의(王儀) · 증균
204권 「진구주등전(陳九疇等傳)」 205권 「주환등전(朱紈等傳)」
진구주 · 적붕 · 손계로 · 증선 · 정여기 · 양수겸 · 상대절 · 해일귀 · 양선(楊選) 주환 · 장경 · 호종헌 · 조방보 · 이수 · 당순지
206권 「마록등전(馬錄等傳)」
마록 · 정계충 · 장규 · 정일붕 · 당추 · 두란 · 엽응총 · 해일귀 · 육찬 · 소경방 · 유세양 · 위양필
207권 「등계증등전(鄧繼曾等傳)」
등계증 · 주제 · 양언 · 유안 · 설간 · 양명(楊名) · 곽홍화 · 유세룡 · 장선 · 포절 · 사정천 · 왕여령 · 양사충
208권 「장근등전(張芹等傳)」
장근 · 왕응진 · 소명봉 · 제지란 · 원종유 · 허상경 · 고제 · 장교 · 여산 · 위상신 · 여관 · 팽여실 · 정자벽 · 척현 · 유회 · 전미 · 홍원 · 주사겸 · 안경
209권 「양최등전(楊最等傳)」
양최 · 풍은 · 양작 · 주이 · 유괴 · 심속 · 심연 · 양계성 · 양윤승
210권 「상교등전(桑喬等傳)」
상교 · 사유 · 하유백 · 서학시 · 여여진 · 왕종무 · 주면 · 조금 · 오시래 · 장충 · 동전책 · 추응룡 · 임윤
211권 「마영등전(馬永等傳)」 212권 「유대유등전(俞大猷等傳)」
마영 · 양진 · 왕효 · 주상문 · 마방 · 하경 · 심희의 · 석방헌 유대유 · 척계광 · 유현(劉顯) · 이석 · 장원훈
213권 「서개등전(徐階等傳)」 214권 「양박등전(楊博等傳)」
서계 · 고공 · 장거정 양박 · 마림 · 유례건 · 왕정(王廷) · 갈수례 · 근학안
215권 「왕치등전(王治等傳)」
왕치 · 구양일경 · 주홍조 · 첨앙비 · 낙문례 · 정이순 · 진오덕 · 왕문휘 · 유분용
216권 「오산등전(吳山等傳)」
오산 · 육수성 · 구경순 · 전일준 · 황봉상 · 여계등 · 풍기 · 왕도(王圖) · 옹정춘 · 유응추 · 당문헌 · 이등방 · 채의중 · 공내 · 나유의 · 요희맹 · 허사유 · 고석주
217권 「왕가병등전(王家屏等傳)」 218권 「신시행등전(申時行等傳)」 219권 「장사유등전(張四維等傳)」
왕가병 · 진우폐 · 심리 · 우신행 · 이정기 · 오도남 신시행 · 왕석작 · 심일관 · 방종철 · 심확 장사유 · 마자강 · 허국 · 조지고 · 장위 · 주갱
220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1권 「원홍유등전(袁洪愈等傳)」
원홍유 · 왕정첨 · 곽응빙 · 경정향 · 왕초 · 위시양 · 학걸 · 조참로 · 장맹남 · 이정 · 정빈
222권 「만사화등전(萬士和等傳)」
만사화 · 왕지고 · 오백붕 · 유응절 · 왕린 · 필장 · 서화 · 이세달 · 증동형 · 신자수 · 온순 · 조세경 · 이여화
223권 「성응기등전(盛應期等傳)」 224권 「엄청등전(嚴清等傳)」
성응기 · 주형 · 반계순 · 만공 · 오계방 · 왕종목 · 유동성 · 서정명 엄청 · 송훈 · 육광조 · 손농 · 진유년 · 손비양 · 채국진 · 양시교
225권 「장한등전(張瀚等傳)」 226권 「해서등전(海瑞等傳)」
장한 · 왕국광 · 양몽룡 · 양외· 이재(李戴) · 조환 · 정계지 해서 · 구순 · 여곤 · 곽정역
227권 「방상붕등전(龐尚鵬等傳)」
방상붕 · 송의망 · 장악 · 이재(李材) · 육수덕 · 소름 · 가삼근 · 이이 · 주홍모 · 소언 · 손유성 · 사걸 · 곽유현 · 만상춘 · 종화민 · 오달가
228권 「위학증등전(魏學曾等傳)」 229권 「유대등전(劉臺等傳)」
위학증 · 이화룡 유대 · 부응정 · 왕용급 · 오중행 · 조용현 · 애목 · 심사효
230권 「채시정등전(蔡時鼎等傳)」 231권 「고헌성등전(顧憲成等傳)」
채시정 · 만국흠 · 요신 · 탕현조 · 녹중립 · 양순 · 강사창 · 마맹정 · 왕약림 고헌성 · 고윤성 · 전일본 · 우공겸 · 사맹린 · 설부교 · 안희범 · 유원진 · 엽무재
232권 「위윤정등전(魏允貞等傳)」
위윤정 · 왕국 · 여무형 · 이삼재
233권 「강응린등전(姜應麟等傳)」
강응린 · 진등운 · 나대굉 · 이헌가 · 맹양호 · 주유경 · 왕여견 · 왕학증 · 장정관 · 번옥형 · 사정찬 · 양천민 · 하선
234권 「노홍춘등전(盧洪春等傳)」 235권 「왕여훈등전(王汝訓等傳)」
노홍춘 · 이무회 · 이기(李沂) · 낙우인 · 마경륜 · 유강 · 대사형 · 조학정 · 옹헌상 · 서대상 왕여훈 · 여무학 · 장양몽 · 맹일맥 · 하사진 · 왕덕완 · 장윤의 · 추유연
236권 「이식등전(李植等傳)」 237권 「부호례등전(傅好禮等傳)」
이식 · 강동지 · 탕조경 · 김사형 · 왕원한 · 손진기 · 정원천 · 이박 · 하가우 부호례 · 강지례 · 포견첩 · 전대익 · 풍응경 · 오종요 · 오보수 · 화옥
238권 「이성량등전(李成梁等傳)」 239권 「장신등전(張臣等傳)」
이성량 · 마귀 장신 · 동일원 · 두동 · 소여훈 · 달운 · 관충병 · 시국주 · 진백우
240권 「엽향고등전(葉向高等傳)」 241권 「주가모등전(周嘉謨等傳)」
엽향고 · 유일경 · 한광 · 주국조 · 하종언 · 손여유 주가모 · 장문달 · 왕응교 · 왕기(王紀) · 손위 · 종우정 · 진도형
242권 「진방첨등전(陳邦瞻等傳)」
진방첨 · 필강무 · 소근고 · 백유 · 정소 · 적봉충 · 홍문형 · 진백우 · 동응거 · 임재 · 주오필 · 장광전
243권 「조남성등전(趙南星等傳)」 244권 「양련등전(楊漣等傳)」
조남성 · 추원표 · 손신행 · 고반룡 · 풍종오 양련 · 좌광두 · 위대중 · 주조서 · 원화중 · 고대장 · 왕지채
245권 「주기원등전(周起元等傳)」 246권 「만조천등전(滿朝薦等傳)」
주기원 · 요창기 · 주순창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만경 만조천 · 강병담 · 후진양 · 왕윤성
247권 「유정등전(劉綎等傳)」 248권 「매지환등전(梅之煥等傳)」
유정 · 이응상 · 진린 · 등자룡 · 마공영 매지환 · 유책 · 이약성 · 경여기 · 안계조 · 이계정 · 방진유 · 서종치
249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0권 「손승종전(孫承宗傳)」
주섭원 · 이운 · 왕삼선 · 채복일 손승종
251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2권 「양사창등전(楊嗣昌等傳)」
이표 · 유홍훈 · 전용석 · 성기명 · 하여총 · 서광계 · 문진맹 · 장덕경 · 방악공 양사창 · 오성(吳甡)
253권 「왕응웅등전(王應熊等傳)」 254권 「교윤승등전(喬允升等傳)」
왕응웅 · 장지발 · 설국관 · 정국상 · 진연 · 위조덕 교윤승 · 조우변 · 손거상 · 조광 · 진우정 · 정삼준 · 이일선 · 장위
255권 「유종주등전(劉宗周等傳)」 256권 「최경영등전(崔景榮等傳)」
유종주 · 황도주 최경영 · 황극찬 · 필자엄 · 이장경 · 유지봉
257권 「장학명등전(張鶴鳴等傳)」
장학명 · 동한유 · 조언 · 왕흡 · 양정동 · 웅명우 · 장봉익 · 진신갑 · 풍원표
258권 「허예경등전(許譽卿等傳)」
허예경 · 화윤성 · 위정윤 · 모우건 · 오집어 · 장정신 · 황소걸 · 부조우 · 강채 · 웅개원 · 첨이선 · 탕개원 · 성용 · 진룡정
259권 「양호등전(楊鎬等傳)」
양호 · 원응태 · 웅정필 · 원숭환 · 조광변
260권 「양학등전(楊鶴等傳)」
양학 · 진기유 · 웅문찬 · 연국사 · 정계예 · 정숭검 · 소첩춘 · 여응계 · 고두추 · 장임학
261권 「노상승등전(盧象昇等傳)」 262권 「부종룡전(傅宗龍等傳)」
노상승 · 유지륜 · 구민앙 부종룡 · 왕교년 · 양문악 · 손전정
263권 「송일학등전(宋一鶴等傳)」
송일학 · 풍사공 · 임일서 · 채무덕 · 위경원 · 주지풍 · 진사기 · 용문광 · 유가인 · 유지발
264권 「하봉성등전(賀逢聖等傳)」
하봉성 · 남거익 · 주사박 · 여유기 · 왕가정 · 초원부 · 이몽진 · 송사양 · 마희 · 왕도순 · 전시진
265권 「범경문등전(范景文等傳)」
범경문 · 예원로 · 이방화 · 왕가언 · 맹조상 · 시방요 · 능의거
266권 「마세기등전(馬世奇等傳)」
마세기 · 오인징 · 주봉상 · 유이순 · 왕위(汪偉) · 오감래 · 왕장 · 진량모 · 진순덕 · 신가윤 · 성덕 · 허직 · 김현
267권 「마종빙등전(馬從聘等傳)」 268권 「조문조등전(曹文詔等傳)」
마종빙 · 장백경 · 송공 · 범숙태 · 고명형 · 서견 · 녹선계 조문조 · 주우길 · 황득공
269권 「애만년등전(艾萬年等傳)」
애만년 · 이비 · 양구주 · 진우왕 · 후량계 · 장령 · 맹여호 · 호대위 · 손응원 · 강명무 · 우세위 · 후세록 · 유국능
270권 「마세룡등전(馬世龍等傳)」 271권 「하세현등전(賀世賢等傳)」
마세룡 · 하호신 · 심유용 · 장가대 · 노흠 · 진양옥 · 용재전 하세현 · 동중규 · 나일관 · 만계 · 조솔교 · 관유현 · 하가강 · 황룡 · 김일관
272권 「김국봉전(金國鳳等傳)」 273권 「좌양옥등전(左良玉等傳)」
김국봉 · 조변교 · 유조기 좌양옥 · 고걸 · 조관
274권 「사가법등전(史可法等傳)」 275권 「장신언등전(張愼言等傳)」
사가법 · 고홍도 · 강왈광 장신언 · 서석기 · 해학룡 · 고탁 · 좌무제 · 기표가
276권 「주대전등전(朱大典等傳)」
주대전 · 장국유 · 장긍당 · 증앵 · 주계조 · 여황 · 왕서전 · 노진비 · 하개 · 웅여림 · 전숙락 · 심진전
277권 「원계함등전(袁繼鹹等傳)」
원계함 · 김성 · 구조덕 · 심유룡 · 진자룡 · 후동증 · 양문총 · 진잠부 · 심정양 · 임여저 · 정위홍
278권 「양정린등전(楊廷麟等傳)」
양정린 · 만원길 · 곽유경 · 첨조항 · 진태래 · 왕양정 · 증형응 · 게중희 · 진자장 · 장가옥 · 진방언 · 소관생
279권 「여대기등전(呂大器等傳)」
여대기 · 문안지 · 번일형 · 오병 · 왕석곤 · 도윤석 · 엄기항 · 주천린 · 장효기 · 양외지 · 오정육
280권 「하등교등전(何騰蛟等傳)」
하등교 · 구식사
281권 「순리전(循吏傳)」
진관 · 방극근 · 오리 · 요흠 · 고두남 · 여언성 · 사성조 · 오상 · 사자양 · 황신중 · 하승 · 패병이 · 유맹옹 · 만관 · 엽종인 · 왕원 · 적부복 · 이신규 · 손호 · 장종련 · 이기(李驥) · 왕영 · 이상 · 조예 · 조등 · 증천 · 범충 · 주제 · 범희정 · 유강 · 단견 · 용사언 · 정적 · 전탁 · 당간 · 탕소은 · 서구사 · 방숭 · 장순 · 진유학
282·283·284권 「유림전(儒林傳)」
범조간 · 사응방 · 왕극관 · 양인(梁寅) · 조방 · 진모 · 설선 · 호거인 · 채청 · 나흠순 · 조단 · 오여필 · 진진성 · 여남 · 소보 · 양렴 · 유관 · 마리 · 위교 · 주영(周瑛) · 반부 · 최선 · 하당 · 당백원 · 황순요 · 진헌장 · 누량 · 하흠 · 진무열 · 담약수 · 추수익 · 전덕홍 · 왕기(王畿) · 구양덕 · 나홍선 · 오제 · 하정인 · 왕시괴 · 허부원 · 우시희 · 등이찬 · 맹화리 · 내여덕 · 등원석 · 공희학 · 안희혜 · 증질수 · 공문례 · 맹희문 · 중어폐 · 주면 · 정접도 · 정극인 · 장문운 · 소계조 · 주천 · 주서(朱墅)
285·286·287·288권 「문원전(文苑傳)」
양유정 · 호한 · 소백형 · 왕면 · 대량 · 위소 · 장이녕 · 조훈 · 서일기 · 조총겸 · 도종의 · 원개 · 고계 · 왕행 · 손분 · 왕몽 · 임홍 · 왕불 · 심도 · 섭대년 · 유부 · 장필 · 장태 · 정민정 · 나기 · 저권 · 이몽양 · 하경명 · 서정경 · 변공 · 고린 · 정선부 · 육심 · 왕정진 · 이렴 · 문징명 · 황좌 · 가유기 · 왕신중 · 고숙사 · 진속 · 전여성 · 황보효 · 모곤 · 사진 · 이반룡 · 왕세정 · 귀유광 · 이유정 · 서위 · 도륭 · 왕치등 · 구구사 · 당시승 · 초횡 · 황휘 · 진인석 · 동기창 · 원굉도 · 왕유검 · 조학전 · 왕지견 · 애남영 · 장부
289·290·291·292·293·294·295권 「충의전(忠義傳)」
화운 · 왕개 · 손염 · 모로 · 왕강 · 왕의(王禕) · 웅정 · 역소종 · 금팽 · 황보빈 · 장영(張瑛) · 왕정 · 만침 · 주헌 · 양충 · 오경 · 곽은 · 손수 · 허규 · 황굉 · 송이방 · 왕면 · 진문시 · 왕부 · 전순 · 주부 · 손당 · 두괴 · 황천 · 왕덕 · 왕일중 · 소몽양 · 장진덕 · 동진륜 · 공만록 · 관양상 · 서조강 · 희문윤 · 주만년 · 장요(張瑤) · 하천구 · 반종안 · 장전 · 하정괴 · 고방좌 · 최유수 · 정국창 · 당환순 · 이헌명 · 장춘 · 염생두 · 왕조곤 · 손사미 · 교약문 · 장병문 · 언윤소 · 길공가 · 형국새 · 장진수 · 등번석 · 장혼방 · 장윤등 · 장광규 · 이중정 · 방국유 · 하승광 · 방유 · 윤몽오 · 노겸 · 공원상 · 왕신 · 사기언 · 양지인 · 왕국훈 · 여홍업 · 장소등 · 왕도(王燾) · 장가징 · 서상경 · 완지전 · 학경춘 · 장극검 · 서세순 · 무대열 · 전조징 · 성이항 · 안일유 · 반홍 · 진예포 · 유진지 · 이승운 · 관영걸 · 장유세 · 왕세수 · 허영희 · 이정좌 · 노세임 · 유인 · 하섭 · 조흥기 · 하통춘 · 진미 · 심길신 · 노학고 · 진만책 · 허문기 · 곽이중 · 최문영 · 서학안 · 풍로운 · 채도헌 · 장붕익 · 유희조 · 왕손란 · 정양주 · 황세청 · 양훤 · 당시명 · 단복흥 · 간인서 · 사오교 · 도임 · 축만령 · 진빈 · 왕징준 · 정태운 · 하복 · 장나준 · 김육동 · 탕문경 · 허담 · 왕교동 · 장계맹 · 유사두 · 왕여정 · 윤신 · 고기훈 · 장요(張耀) · 미수도 · 경정록 · 석상진 · 서도흥 · 유정표
296·297권 「효의전(孝義傳)」
정렴 · 서윤양 · 전영 · 요비 · 구탁 · 최민 · 주완 · 오홍 · 주후 · 유근(劉謹) · 이덕성 · 심덕사 · 사정가 · 권근 · 조신 · 국상 · 왕준(王俊) · 석내 · 사오상 · 주오 · 정영 · 부즙 · 양성장 · 사용 · 하경 · 왕원(王原) · 황새 · 귀월 · 하린 · 손청 · 유헌 · 용사언 · 유자(兪孜) · 최감 · 당엄 · 구서 · 장균 · 왕재복 · 하자효 · 아기 · 조중화 · 왕세명 · 이문영 · 공금 · 양통조 · 장청아
298권 「은일전(隱逸傳)」
장개복 · 예찬 · 서방 · 양항 · 진회(陳洄) · 양인(楊引) · 오해 · 유민 · 양보 · 손일원 · 심주 · 진계유
299권 「방기전(方伎傳)」
활수 · 갈건손 · 여복 · 예유덕 · 주한경 · 왕리 · 주전(周顚) · 장중 · 장삼봉 · 원공 · 대사공 · 성인 · 황보중화 · 동인 · 오걸 · 능운 · 이시진 · 주술학 · 장정상 ,유연연,
300권 「외척전(外戚傳)」
진공 · 마공 · 여본 · 마전 · 장기(張麒) · 호영(胡榮) · 손충 · 오안 · 전귀 · 왕천 · 주능 · 왕진(王鎭) · 만귀 · 소희 · 하유 · 진만언 · 방예 · 진경행 · 이위 · 왕위(王偉) · 정승헌 · 왕승 · 유문병 · 장국기 · 주규
301·302·303권 「열녀전(列女傳)」
정월아 · 제아 · 정금노 · 노가랑 · 탕혜신 · 묘총 · 만의전 · 왕묘봉 · 당귀매 · 양태노 · 정은아 · 두묘선 · 초낭맹 · 호귀정 · 오길고 · 서아장 · 양옥영 · 우봉랑 · 예미옥 · 고형와 · 항숙미
304·305권 「환관전(宦官傳)」
정화 · 김영 · 왕진(王振) · 조길상 · 회은 · 왕직(汪直) · 양방 · 하정 · 이광 · 장종 · 유근 · 장영(張永) · 곡대용 · 이방 · 풍보 · 장경 · 진증 · 진구 · 왕안 · 위충현 · 왕체건 · 최문승 · 장이헌 · 고기잠 · 왕승은 · 방정화
306권 「엄관전(閹黨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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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권 「영행전(佞倖傳)」
기강 · 문달 · 이매성 · 계요 · 강빈 · 육병 · 소원절 · 도중문 · 단조용 · 공가패 · 호대순 · 전옥 · 왕금 · 고가학 · 성단명 · 주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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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유골 조사 결과 나온 키이다.[2] 다만 48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가장 오래 재위했음에도 9세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에 사망 당시 나이는 57세로 환갑도 넘기지 못해 명나라 황제 중 가장 오래 산 황제는 아니다. 이는 22년 재위하고 환갑을 넘긴 영락제에 대조된다. 참고로 명나라 황제 중 가장 오래 산 황제는 초대 황제인 홍무제로 30년을 재위하고 70세까지 살았다.[3] 남명의 역대 황제들까지 포함해도 그렇다.[4] 밑에서도 언급되는 만력제의 생모로 궁녀 출신이었다.[5] 황제가 구속영장(?)을 발부하기도 전에 환관들이 이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저택에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는 바람에 십수 명이나 굶어 죽었다.[6] 사표도 받아주지 않고 바로 파직했다. 문제는 이때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라서 장수 하나가 아쉬운 마당에 이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심지어 몽골군한테 명군이 깨지는 걸 보다 못한 하남도 어사 부광택이 척계광 좀 다시 불러 달라고 애원했으나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며 거부했고, 부광택의 2개월치 월급을 빼앗았다.[7] 군주가 신하의 3년상을 제하고 벼슬을 계속하게 하는 것.[8] 유교가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명나라에서는 대부분의 신하들이 탈정 명령을 조용히 거부하고 고향에 물러나 3년상을 지냈다. 황제도 신하가 당연히 거절하고 3년상을 지내러 갈 것을 알기에 훌륭한 신하에게 '너는 정말 능력 있는 신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겉보기식 명령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탈정이 만력제 본인의 순수한 뜻이라고 보는 사람은 당시나 지금이나 아무도 없다.[9] 자성황태후의 차남이며, 만력제의 동복동생이었던 주익류(朱翊鏐)를 말한다.[10] 실제로도 초상화를 보면 비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11] 만력제가 병을 이유로 업무를 하지 않았음을 두고 핑계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있는 등 논란이 많다.[12] 예법을 무시한다고 쳐도, 인품이나 재능 면에서 장남인 주상락이 3남인 주상순에 비해서 월등히 유능했다.[13]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한 이지는 광해군의 장남이 아니었다. 명나라의 신료들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 요청을 인정할 경우, 당연히 만력제가 '장남이 아닌 조선 왕자의 세자 책봉은 인정하면서, 왜 내 셋째 아들 주상순의 태자 책봉은 안 돼?'라고 할 게 뻔했다.[14] 효종 홍치제의 후손은 단절되었고, 세종 가정제, 목종 융경제는 다른 형제들이 모두 요절해서 사실상 독자였기 때문에, 주익류의 가계보다 더 먼 황족 중에서 가장 가까운 황족을 발굴하려면 헌종 성화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홍치제와 만력제의 증조부인 주우원을 제외하고 성인으로 성장한 성화제의 아홉 아들 중 6남 익단왕, 7남 형공왕, 13남 영장왕의 후손이 만력 연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는데, 성화제의 후손이면서 만력제와 같은 항렬의 황족은 만력제와 8촌이 되었고, 항렬상 만력제의 숙부 뻘임에도 만력제와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황족은 7촌이 되었다.[15] 하도 어이없는 사건인데다가 황태자가 최대 수혜자였기에 동림당과 태자 측의 자작극이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방종철의 대처 역시 어이없긴 마찬가지이다.[16] 참고로 이 사르후 전투에서는 조선군도 적잖게 죽었던 탓에, 만동묘까지 만들며 만력제에게 제사를 지낸 조선인들마저 "이 무렵 황제는 이미 정무를 살피지 않고 환관(宦官)이 용사(用事)했으므로, 군용(軍用)이 계속되지 못한 데다가 제군이 경솔히 진격하여 패전하자, 유 도독은 스스로 목매어 죽은 터였다(時皇帝已倦勤, 閹豎用事, 軍興不繼, 又諸軍輕進失利, 都督自縊死)."라며, 이런 "만력제의 무책임함이 사르후 전투 패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라고 비판했을 정도였다.[17] 참고로 여우의 침은 호연법(狐涎法)이라 해서 고독의 재료였다. 여우의 군침은 동양에서 상당히 불길하게 여기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정력을 위해 먹었다는 것은…[18] 재미삼아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19] 다른 두 황제와 달리 태창제는 즉위 직후 비어있던 관직을 채우고, 국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거나 군대에 보급품을 챙겨서 보내는 등 일이라는 걸 했고, 이 때문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뛰어난 황제가 왔다"는 반응이 있었을 정도였다. 재위 기간이 고작 1개월도 안 되었기 때문에 거의 저런 조치를 하자마자 죽은 셈이라 딱히 나쁜 짓을 할 시간도 없었다. 쇠퇴기의 군주였다는 이유로 태창제가 나머지 둘과 함께 책임을 추궁받는 것은 억울한 감이 있다. 다만 전제군주제에서는 군주가 바뀌는 것 자체가 정치적인 혼란을 가져오기 쉽고, 바뀌는 사이클이 짧으면 짧을수록 혼란이 가중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오래 사는 것도 군주의 중요한 임무라고 볼 수도 있다. 무난한 군주가 29년 집권하는 것과 유능한 군주가 29일(태창제 즉위기간)마다 갈리는 것, 어느 쪽이 국가가 평화로울까. 일각에서는 태창제가 명 황실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두고, "황제가 암살당할 정도로 황실 관리, 즉 권력의 중추에 있는 인간들을 똑바로 관리하지 못했음을 비판하는 의도가 아니었겠냐"고 해석한다.[20] 위의 황제들은 명말 3대 의안으로 묶여 명나라 멸망의 원인으로 손꼽힌다.[21] 사실 군주가 아무리 신하들에게 자율권을 보장해줘도 사람 죽이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는 사형 판결이 나온 죄인의 판결문을 꼼꼼히 살펴본 후 참작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감형하여, 매년 처형 인원이 100명 이하로 떨어지게 만들었다.[22] 황제에 대한 극도의 칭송, 혹은 황제의 역설적인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식이다. '무자송덕비'라 하여 전례가 종종 있는데, 대표적으로 무주의 측천무후가 이러한 비를 세웠다. 한편 무자송덕비는 명나라의 전통 아닌 전통이기도 했다. 인종 홍희제 이후로 능에 비석을 세우지 않아 당연히 비문도 없었는데, 세종 가정제가 자기 능을 지으면서 오랜만에 비석을 세웠다가 '그럼 이참에 나머지 황제들의 비석도 다 세우라'는 신하들의 상소로 역대 황제들의 비를 전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법도상 황제의 비문은 후대 황제만 지을 수 있었고, 그래서 가정제가 비문을 작성…한 게 아니라 귀찮아서 스킵했다. 그래서 가정제 이전 전대 황제 7명의 비석이 모두 무자비가 되었고, 후대 황제들 중에서도 가정제의 선례를 따라 무자비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만력제의 무자송덕비도 이런 전통을 따른 것이라는 견해다.[23] 播州, 명대의 사천성, 지금의 구이저우성[24] 도시를 격하시킨 것(특별시->일반시). 이후 아들이 형을 쫓아내고 본인 봉지인 북평을 북경으로 개칭한 게 오늘까지 이어진다.[25] 지금의 내몽골 서부와 영하[26] 특히 변방의 요새인 중위(中衛), 광무(廣武), 옥천영(玉泉營), 영주(靈州)가 발배의 반란군에게 함락당했다.[27] 지금의 귀주성 쭌이[28] 지금의 사천성 중경시 남부[29] 무게가 120근이나 되는 크고 무거운 대도(언월도와 비슷한 무기)를 마음대로 휘두른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30] 지금의 귀주성 귀주시[31] 앞에서 언급했듯이 명나라 국가 예산의 37%가 날아간 것이었다.[32] 대부분은 지배층의 착취와 횡포, 그리고 갈수록 무거워지는 세금을 견디지 못해서 일어난 민란이었다. 이런 민란에 농민뿐만 아니라 유랑민과 제때 급여를 받지 못해 탈영한 병사들, 도적 집단까지 가세하여 세력을 갖춘 반란군이 되자, '민란 따위'라고 무시할 수가 없을 지경까지 왔다.[33] 명나라군이 조선에 출병하는 동안, 명나라의 감시망에서 멀어진 누르하치는 만주를 통일하고 있었으니, 사실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본군이 조선을 정복했다면, 다시 명나라를 침공해 들어갔을 것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망상마냥 실제로 명나라 전역을 일본군이 정복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원앙진 전법이 없었던 북방의 명나라군이 제2차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히 깨진 걸 생각해보면 원앙진 전법을 도입한 남병이 지원오기 전까지 명나라군은 일본군에게 그냥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명나라는 회복 불능의 크나큰 피해를 입어 국가의 멸망이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다.[34] 임진왜란 300년 전인 1270년 ~ 1280년의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의 일본군은, 몽골군이나 고려군에 상대가 안 될 정도로 군사 분야의 후진국이었다. 당시에도 일본은 무가(사무라이)가 지배하는 상태이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씨족이 거느린 사병으로 수백-수천 명이 동원된 전투에서 고립되어, 외부의 적과 전혀 싸운 적이 없는 섬나라 육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러나 계속되는 난세의 도래와 신무기인 조총의 도입으로 군소 영주가 몰락하고 대영주만 살아남으면서 수만 명 규모의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이렇게 육전의 실력이 향상된 것이었다.[35] 당시 일본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은 상당히 뛰어났던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투항한 항왜들은 대부분 사무라이보다는 일반 병졸이라고 할 수 있는 아시가루였지만, 이들조차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이었고, 개개인의 전투력이 대단했기 때문에 이후 조선에서도 이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병역에 종사하도록 하여 일종의 외인부대로 운용했다. 왜란이 끝난지 거의 40년이 지난 병자호란 때도 이들이 동원되었는데, 이들이 왜란때 10대였다고 해도 호란 당시라면 50대를 넘었을 텐데도 조선에서는 그 정도로 이들의 전투력을 높이 평가했다.[36] 절대왕정이 확립되지 않은 당시의 유럽 국가들도 이 정도 병력 동원은 불가능했다. 임진왜란보다 조금 뒤에 벌어진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한 합스부르크군(스페인 + 오스트리아)이 30만 명, 그 뒤를 이어 스웨덴군프랑스군이 각각 15만 명 정도를 동원했다.[37] 다만 "선전관 조안방이 보내온 보고서를 보니 '경상 한 도에 왜적과 서로 대치하는 각진의 군졸은 6천~7천 명에 불과하고, 그 중에는 한 장수가 거느리고 있는 군졸이 혹 6~7명인 자도 있으며, 각진에 있는 활도 겨우 100여 장(張)뿐이었다. 이런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강한 왜적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더욱이 군량이 결핍된 지 이미 오래되어 하루에 먹는 양이 한 홉의 죽에 불과하니 매우 한심하다. 본도에는 비록 약간의 비축이 있고, 이웃 도에도 또한 이송하여 온 곡식이 있다고는 하나, 중국군을 공급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 군사들은 구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군량이 부족한데 그마저도 명나라 군대에게만 공급된다는 기록을 보면 군량도 부족한 마당에 명나라에서 보낸 쌀이 조선 백성들의 구휼에 얼마나 쓰였을지는 미지수다. 다만 이 기록은 1593년 6월 경상도의 기록으로, 같은 해 4월 개경에선 이여송 개인이 은 100냥, 곡식 100석으로 구휼하고 있었다.(물론 일개 도시와 한 지방을 동일 선상에 두는 것은 무리가 있다.)[38] 특히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군 사령관 송응창은 휘하 장수들한테 조선인들을 상대로 약탈, 강간, 살인 등을 저지른 병사들은 참수형에 처하라고 지시했다.[39] 실제로 상공업 유통만 제대로 돌아가면 군수물자는 부르는 게 값이었으니 민간과 군 모두 이득을 볼 수 있었다. 당장 유럽의 7년 전쟁에서도 하노버 공국동군연합 관계였던 영국군이 하노버에 주둔하며 많은 민폐를 끼쳤는데 이에 하노버인들이 군납 가격을 몇 배나 부풀려서 보복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16세기의 조선은 구릉지가 많아 조운선을 통한 해상 유통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도로망 정비에는 소극적이었다. (비슷하게 중국도 산지가 많은 남쪽 지방의 경우, 도로보단 수로의 비중이 매우 컸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의 경제 기반은 농업 위주라서 상공업과 물류 유통이 열악했다는 점이 명군의 보급 부족을 심화시켰다.[40] 조선에서는 초기까지 은병이 고액 화폐로 쓰였지만, 은병의 위조가 많다는 이유로 사용이 중단된지 200년 가까이 흐른 상태였다.[41] 정조는 매우 강렬한 이순신 지지자였다. 이순신의 전공을 높게 평가하고 큰 관심을 보이며 이순신의 관직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42] 출처 "이 무렵 황제는 이미 정무를 살피지 않고 환관(宦官)이 용사(用事)했으므로, 군용(軍用)이 계속되지 못한 데다가 제군이 경솔히 진격하여 패전하자, 유 도독은 스스로 목매어 죽은 터였다(時皇帝已倦勤, 閹豎用事, 軍興不繼, 又諸軍輕進失利, 都督自縊死)."- 조증(詔贈) 요동백(遼東伯) 김 장군(金將軍) 묘비(廟碑)[43] 상이 이르기를, "300년을 지켜온 종묘 사직이 일조에 빈 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pa_12208023_002[4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686[45]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2년 1월 18일(#)[46]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는 조선을 부를 때 삼한, 고려, 조선이 모두 통용되었다.[47] 다만 이전의 명나라 황제들이나, 명나라 이후 청나라의 성조 강희제 등도 제후국들 중 유독 조선에 호의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으며, 애초에 사르후 전투 패전의 간접적인 원흉이 만력제 본인이라는 점에서 조선에 수만냥을 보낸 건 그냥 병주고 약주고다.[48] 출처: 《유연당집》[49] 자기 나라 안에서도 다를 게 없어서 "도둑이 얼레빗이면 관군은 참빗"이라는 말이 명나라에서도 유행했다.[50] 다만 만력제 이전 세종 가정제의 시절에도 명나라군은 고작 왜구들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을 정도로 군 기강이 엉망이었지만, 이런 상황을 더 악화시킨 사람은 만력제였다.[51] 800여만 냥. 명나라 국가 예산의 2년분에 해당했다.[52] 본인이 장거정으로부터 거의 학대라고 봐도 무방한 훈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에 반발해서 자녀들에게는 관대했으며 아주 돈을 퍼발랐다.[53] 심지어는 이 생산되지 않는 지방에도 광세를 물렸다.[54] 황제 개인이 가난했으면, 신하들이 이런 의견을 내지도 않는다. 당시 만력제의 개인 재산이 명나라의 국가 예산을 웃돌았다는 사실을 신하들이 인지했기에 이런 의견이 나올 수 있었다.[55] '여진'()에는 여자 '녀'(女)가 들어 있다. 오랑캐 여인이 꿈에 나온 게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56] 그리고 24년이 지난 1644년 꿈의 해몽대로 청나라가 명나라의 강산을 빼앗았다. 공교롭게도 이 해가 만력제 탄생 80주년을 갓 넘긴 시점이었다.[57] 명 13릉에 가면 흔히 지하 궁전이라는 곳을 가는데, 그 지하 궁전이 바로 정릉이다.[58] 훗날 그가 쓴 희곡이 바로 《해서파관》이었다. 그리고 이 희곡은 해서파관 사건으로 비화되어 문화대혁명의 기폭제가 되었고, 우한도 체포되어 옥사했다.[59] 공각황귀비 정씨와 공순황귀비 이씨[60] 중화인민공화국의 흑역사인 문화대혁명에 대해서조차 만력제의 유골을 부순 것만큼은 잘한 일이라고 옹호하는 중국인도 있다.[61] 다만 상나라의 주왕은 다소 논란이 있다.[62] 청나라때 쓰인 정통 역사서인 《명사》에서 조차 명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만력제가 기록되어 있다. 《명사》에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라고 했을 정도였다.[63] 전자에 속하는 사례로는 중국의 주왕, 이세황제, 수양제해릉양왕, 고려의 충혜왕, 조선의 연산군 등을 꼽을 수 있고, 후자에는 로마 제국네로도미티아누스, 조선광해군인조 등이 속한다.[64] 재위 기간 2위는 바로 세종 가정제 주후총이었다. 즉, 무능한 황제 2명이 명나라 276년의 장대한 역사 중에서 1/3인 93년 271일을 해먹었다. 반대로 말하면 명 태조 주원장이나 성조 영락제 주체 등 명나라 건국 초기의 황제들이 정치 체계를 얼마나 잘 짜놓았는지를 알 수 있다. 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이 황제를 잘 세운 덕분에 막장인 사태를 수습하고 제국의 명맥을 이어갔다면, 명나라는 개국 전반기에 국가 체계를 너무나도 잘 만들어놔서 능력이 떨어지는 황제를 끼고도 100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65] 다만 즉위 당시에는 10세에 불과하여 친정에는 무리가 있었다.[66] 참고로 중국 역대 황제들 중 조선에 대해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 황제들은 많았다. 《일성록》(日省錄)의 1781년 4월 18일 기사에 따르면 만력제보다 약 200년 이후의 중국 황제였던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도 조선 사신들한테 융숭한 대접을 해주어 청나라의 민간에서 '고려 황제'로 불렸다#[67] 어차피 명나라 입장에서 봤을 때 지리적으로 조선이 명나라와 일본 사이의 완충지대였기 때문에 조선에 병력을 파병하는 것이 국익이었므로 굳이 만력제가 아니라 다른 유능한 황제였어도 명나라는 조선에 병력을 파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68] 당장 청나라 때, 명나라는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와 천계제 때 망했다고 악평한 기록이 《조선 왕조 실록》에도 나오는데, 어디까지나 청나라에서 그렇게 말했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조선인들이 이를 긍정하는 기록은 없지만 딱히 부정하는 기록도 없는 걸로 보아 조선인들도 어느 정도는 이에 동조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타국인 조선에서조차 청나라가 만력제를 악평했음이 알려질 만큼, 만력제가 중국에서 얼마나 평가가 나빴는지 보여주는 예시이다. "지난 해에 황제가 칙지를 내리기를 '짐이 탕산(湯山)에 행차하여 명나라의 여러 능(陵)에 제사를 지냈는데, 여러 능들이 많이 무너진 것을 보고 개탄했다. 명나라 중엽 이후로 국사가 폐이(廢弛)했고, 말년에는 유구(流寇)가 소요를 일으켜도 지킬 사람이 없어서 무너지게 되었다. 지금 국가가 하나로 통일이 된 지 이미 100여 년이 되었으니, 전 왕조의 능침(陵寢)을 수리해야 겠다. 명나라의 세종(世宗, 가정제)에 대해서는 일찍이 윤전가(尹銓嘉)의 아룀으로 인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으나 다만 명나라가 숭정(崇禎) 때 망하지 않고 만력(萬曆)과 천계(天啓) 때 망했기 때문에 역대의 제왕 사당 안에는 그 위패(位牌)를 없앴지만 능침에는 그냥 제사를 지내었다."[출처] 현종 9년 12월 17일 신사 2번째 기사[70] 지금도 일부 사대부 집안의 후손들이 청나라의 연호 대신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을 쓰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경남 거창의 동계 정온 집안이다.[71]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건, 송준길 사후 숙종 초(경신환국)부터였으며, 노론의 영수로 모신 사람이 송시열이었다.[72] 근데 사실 이마저도 어디까지나 3남 주상순한테나 그랬다는 것이지 태창제한테는 전혀 아니었다.[73] 사실 명장 원숭환을 죽이고, 신하들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루는 등, 숭정제는 나라를 살리는 데는 진심이었지만 그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던 인물이었다.[74] 사실 복왕 주상순은 탐학질이 심했기에 이자성이 그를 생포한 후 백성들 앞에서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라고 묻자 백성들이 하나같이 씹어먹을 기세로 '죽이라.'는 말만 했다. 주상순이 결국 끔살되자 백성들이 매우 기뻐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탐학질이 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75] 물론 이 객성이 실은 동반성의 물질을 흡수한 백색왜성이 일으킨 초신성 폭발이었다는 사실을 현대의 천문학자들이 알아냈지만, 16세기 당시의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으니…[76] 여담으로 해당 구휼미의 경우 청나라 기록에서는 옥처럼 흰 쌀로 구제했다고 나오나, 조선 쪽 기록에서는 먹을 수도 없는 썩은 쌀이었다고 나오는데 강희제의 성격상 먹을 수도 없는 썩은 쌀을 구휼미로 줄 리는 없으니, 청나라에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 쪽 기록이 거짓으로 보인다.[77]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 무리한 은 지출을 요구한 것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채, 중국 대륙 각지의 은을 긁어모으던 광세의 폐단이 조선에도 불똥이 튄 것이었고, 그 원흉이 만력제였으니 설령 본인의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78] 하는 행동은 만력제보다는 정덕제에 가깝다. 황궁에 동물원을 만들거나, 궁궐이 아닌 정원 인근에 천막을 치고 산다거나, 황제 스스로 1인 2역 놀이를 하는 등의 일들은 죄다 정덕제가 하던 행동들이었다.[79] 다만 책에서 의미하는 구심력 - 원심력의 관계와 실제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자세한건 구심력 항목 참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구심력 항목에 적혀있는 원심력 ↔ 구심력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추측된다.[80] 행정학적으로 해석하면 과도한 관료주의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것이 레드 테이프 현상과 무사안일주의로 흘러간 것으로 해석된다.[81] 작중에서는 "무능하다"기보다는 "능력은 있는데 게을러터져서 일을 안 하는" 것으로 묘사했다.[82] 상술한 바와 같이 만력제는 휘하의 신료들이 그 용안을 까먹을 정도였다.[83] 아예 무능한 것은 아니었다. 부패하더라도 관리들의 부패를 전부 꿰뚫고 있었으며, 조선에서 고토인 요동을 할양받기 위해 지속적으로 물밑작업 중이라는 것까지 알아차리고 있어서 요동의 실상을 만력제가 알지 못하도록 숨기고 있었다. 문제는 적어도 본인만큼은 정상이어야 했으나 제일 부패했다는 것이다.[84] 《근육조선》에서 장거정은 이 모략 직후 부친상을 당해서 살아있을 때 몰락하지는 않았지만, 직후 집에서 첩과 관계를 갖기 위해 환약을 먹는데, 이게 수은에 카페인이 들어간 극약인지라 첩과 관계를 맺다가 복상사해버린다. 문제는 이게 성리학이 주류였던 명나라에서는 사실상 탄핵 대상이었다는 것이다.[85] 스페인 선교사가 죽은 것을 계기로 스페인 원정대와 중국 남부 해적들이 연합하여 북상하는 것을 필리핀 열도의 조선 해군이 알고 있었음에도 당시 이 움직임을 포착한 군관 이각이 귀찮다고 묵과해서(일이 끝나고 파직당한다.) 항주가 함락당하고 남경마저 밀리게 되는 걸 명나라의 등자룡과 2부 주인공인 유성룡이 필사적으로 막게 되고, 조선 수군이 항주성부터 다시 치고 들어와서 결국 남경을 지켜내게 된다. 사실 조선 입장에서는 남경을 어떻게든 지켜내야 하는데 조선의 무역 중 대명 무역의 비율이 절반 가까이 되었고, 이 대명 무역의 핵심지가 남경이었기 때문에 남경이 무너지면 어마어마한 무역 적자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걸 본 만력제는 더이상 관리들을 못믿는다고 남경 및 항주의 수호를 조선군에 위임해버리며, 발생한 비용은 자기 승인을 안거치고 남경에서 직접 받아가라는 특혜를 내렸다. 당연히 명나라 신하들은 석고대죄까지 하면서 돌리려 했으나 다시 파업에 들어가버려서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이게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조선에서조차 이게 말이 되냐는 평가가 나왔다.[86] 일본이 1부 경인왜변으로 인해 조선과 명나라에 내준 규슈 지방을 되찾기 위해 규슈 침공을 단행했으나, 성형요새를 기반으로 우주방어에 돌입한 유성룡과 간몬 해협을 뚫고 온 이순신에 의해 실패한다. 이후 만력제는 어차피 관리가 안되는 땅이라 여겨 규슈 지방 중 명나라가 지배하는 영토를 복구한 후, 조선에 넘겨주려 했으나 되레 조선이 일부러 일본에 길을 내줬다라는 신하들의 반대로 인해 결국 해당 지방을 망가진 체로 조선에 양도해버린다. 다만 만력제는 양도하면서 정명가도의 의도가 있었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넌지시 던졌으며, 조선의 국왕 이연은 이를 알아채고, 일본이 조선에 침공하도록 유도했다. 그리하여 조선이 함대를 이끌고, 일본의 외해를 공격하러 나갔을 때(이 또한 조선의 작전이었다.) 원래 역사의 임진왜란처럼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게 된다. 이 덕분에 만력제는 조선이 일본에 길을 내줘서 규슈의 명나라 영토가 일본의 침공을 받았다는 신하들을 기군망상죄로 숙청하고, 그들의 재산을 내탕금으로 흡수할 명분을 얻는다.[87] 일본의 조선 침공 이후 조선은 전쟁 준비 및 전후 복구에 500만냥 규모의 물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만력제는 300만냥의 은자와 700만냥 규모의 물자를 제공한다. 특히 이 물자를 준비할 때 부패한 명나라의 관리들 때문에 규슈에서 개고생한 진린에게 제대로 안하고 빼먹는 녀석은 즉결 숙청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었다.[88] 심지어 자신이 내치려고 했던 황태자 주상락은 독고율이 북경을 점령할 때 도망가지 않고 황태자로서 당당하게 맞서다가 불구가 될 때까지 얻어맞아서 내칠 명분조차 없어졌다. 오히려 주상락을 내쳤다가는 신하들에 의해 강제로 폐위를 당하고 주상락이 황제가 될 상황이었다. 작가의 말로는 아예 만력제가 하지 못하는 것 : 파업이라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89] 명나라와의 일전 직전에 이미 자신을 따라온 병사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배분하고, 만약 자기가 패배하여 필사적으로 잠적한 뒤에는 자신이 주는 자금을 기반으로 세력을 재건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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