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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02:09:54

새천년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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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대한민국 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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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국민회의
(1998.2.25.~2000.1.20.)
새천년민주당
(2000.1.20.~2002.5.6.)
(2003.2.25.~2003.9.29.)
열린우리당
(2004.5.20.~2007.2.28.)
새정치국민회의
(흡수합당)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열린우리당
(개별 합류)
민주국민당
(개별 합류)
민주국민당
(개별 합류)
푸른정치연합
(창당준비위원회)[1]
국민통합21
(개별 합류)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민주당
(당명 변경)
파일:새천년민주당 로고.svg
새천년민주당
<colbgcolor=#f5f5f5,#2d2f34> 한문명 <colbgcolor=#FFF,#1F2023>-千年民主黨
영문명 Millennium Democratic Party
등록 약칭 민주당
창당일 2000년 1월 20일
당명 변경 2005년 5월 6일 (민주당)
해산일 2007년 6월 27일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 합당)
통합한 정당

[[새정치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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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월 20일 흡수 합당)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7 (여의도동)
대표 한화갑 / 4선 (14-17대)
원내대표 이낙연 / 재선 (16·17대)
사무총장 김성순 / 초선 (16대)
정책위의장 김효석 / 재선 (16·17대)
대통령 김대중 / 제15대 (2000.1.20.~2002.5.6.)
노무현 / 제16대 (2003.2.25.~2003.9.29.)
의석 수
9석 / 299석
당 색
청록색 (#00AA7B)
정책 연구소 국가전략연구소
공식 사이트 www.minjoo.or.kr/
2005년 5월 5일 기준
1. 개요2. 역사
2.1. 창당2.2. 제16대 국회의원 선거2.3. 제16대 대통령 선거2.4.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2.5. 분당과 17대 총선 참패2.6.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3. 역대 지도부
3.1. 총재3.2. 대표3.3. 원내대표
4. 출신 대통령5. 역대 선거결과
5.1. 대통령 선거5.2. 국회의원 선거5.3. 전국동시지방선거5.4. 재보궐선거
6. 당가7. 갤러리8. 기타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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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새천년민주당 창당대회.jpg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 복귀를 한 후 1995년에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를 바탕으로, 2000년 1월 20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해 세력을 확대 개편해 창당한 정당이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리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나,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탈당과 친노 세력의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야당이 되었다. 이듬해인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인한 17대 총선에서 크게 패배했다. 이후 2005년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꾸었다.

비법인사단(社團)으로는 자그마치 7년 5개월 7일을 존속하여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세 번째로 오래 존속하였다. 참고로 1위는 11년 1개월의 기록을 보유한 신민당이며, 2위는 10년 6개월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현재 최대야당인 더불어민주당[2], 4위는 7년 4개월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민주한국당[3]. 민주당계 정당의 시조라 할 수 있는 '1955년 민주당'은 5년 7개월의 기록으로 현재 5위이다.

당시 도메인은 'www.minjoo.or.kr'이었다.

2. 역사

민주당계 정당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
(1998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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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 국민의 정부
(1981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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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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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통합민주당 자유선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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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등록취소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
새누리당에 합당
이명박 정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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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창당

새정치국민회의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대비해 그간의 세력부족을 해결하고 원내 안정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1999년 하반기부터 신당 창당을 선언하였다.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4]으로 있던 이만섭 전 의장이 직접 창당준비위원장을 맡고, 기존의 인물들에 더하여 386세대 민주화운동 인사들, 각계의 전문가 출신 인사들, 지역 정계입문자들, 서영훈KBS 사장과 최영희한국여성단체협의회 회장, 김운용 대한체육회 회장 등의 유명인사들에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과 유삼남해군참모총장을 포함한 군인 출신 인사들을 대거 영입했다. 여기에 이미 1998년에 국민신당[5]을 흡수하면서 합류해 있던 이인제에게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기고 충청남도 논산시-금산군 지역구 공천을 주며 충청권 공략을 책임지게 했다. 그만큼 세력 규모에서는 한나라당과 맞먹는 정당이 되었다.[6]

2.2.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은 16대 총선에서 석패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총재를 맡고[7], 국민신당 세력의 이만섭과 이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를 몰아주었으나 남북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일찍 터지면서 되려 정략적이란 반응으로 야당(=보수 한나라당) 표가 결집한 것. 선거 출구조사만 해도 민주당은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봉화-울진 선거구에서 김중권 후보[8]가 19표 차로 낙선하는 등 접전이 벌어진 선거구 11곳 가운데 10곳에서 패하며 115석에 그쳐, 133석의 한나라당에게 제1당을 내줬다. 한나라당은 이로서 여당의 과반을 저지하고 오히려 원내 과반수에서 4석 모자란 거대 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회창의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하게 굳혔다.

따지고보면 경상북도 지역에서 당선인을 낼 뻔 했기도 했고 그 동안 보수 텃밭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던 강원도 의석 9석 중 5석을 획득하였으며 그때까지 민주당계 정당의 불모지였던 충청권에서 8석을 얻는 등 선전하며 전국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는 첫발을 떼었지만, 자유민주연합과의 선거 공조 무산으로 수도권에서만 한나라당에게 20석을 내준것이 패인이었다. 만약 자유민주연합과 선거연대가 성사되었다면, 새천년민주당은 과반에 근접하고, 자민련은 교섭단체를 꾸릴 수 있었다.[9]

계속되는 선거 패배, 더 나아가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레임덕이 심해진다. 그리고 동교동계를 번갈아 선임한 서영훈 - 김중권 - 한광옥의 임명직 대표 체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1년 11월 8일부로 여당 총재직을 사퇴했으며, 동교동계에서도 분열이 일어나서, 이른바 양갑 - 즉 한화갑과 권노갑의 갈등이 불거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권노갑을 위시로 한 동교동계는 이인제를 대권으로 밀었으나, 한화갑은 이른바 국민참여경선을 통해서 천신정으로 대표되는 소장파들과 자신의 입지를 넓히고자 하였다. 물론 권노갑은 한화갑에 비해 전면에 나서지 못했는데, 정치사건으로 감옥에 가면서 원외, 당외의 2선으로 밀러났던 탓이 컸다.[10] 그러나 권노갑이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고 해서 이인제가 위축된 것은 아니었다.[11]

2.3.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 4월 27일 서울 경선에서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최종 후보로 선출된 후 8개월간 민주당은 갈등의 극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노무현이 한나라당이회창에게 앞서나가는 듯 했으나, 한일 월드컵 기간에 치러진 제3회 지방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장담한 수도권과 부산에서 참패를 하면서 노무현의 입지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내 비노 내지는 반노세력은 정몽준과 연합, 단일화를 시도하게 된다. 이는 정몽준과 연대하여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청와대의 의지도 있었으나, 이미 감정적 앙금은 커진 상태였다. 이에 노무현은 당의 움직임에 대해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은 만장일치로 노무현을 후보로 유지시킨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일단락됐다.

그러나 여당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월드컵 4강 신화의 열풍을 타고 대선 유력 후보로 떠오른 정몽준에게 밀리며 노무현은 3위로 주저앉고, 민주당에서는 다시 후보 교체와 노무현 후보 반대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거기에 8.8 재보선까지 민주당이 참패하며 노무현과 민주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바닥을 기어가게 된다. 이 때 안동선 의원이 탈당을 선언하면서 비노계의 탈당이 시작되었다.

9월 정몽준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국민통합21을 창당한 뒤 민주당은 본격적으로 단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11월에는 후보 단일화를 요구하는 후보 단일화 협의회, 일명 후단협으로 불리는 의원들이 민주당을 집단 탈당하기에 이르렀고 노무현 후보 흔들기가 계속된다. 그러자 노무현은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화 작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국민참여운동본부'라는 이름의 대선 캠프를 만들었으며, 11월 25일 여론조사를 통해 노무현이 정몽준을 1.5%차로 이기고 최종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후단협에 참가한 인사 과반수 이상이 다시 결과에 승복하고 원대복귀를 선언하지만 전용학을 시작으로 일부 인사들은 이에 반발하여 아예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는 상황까지 치닫는다.

노무현 후보는 단일화 효과에 따라 이회창을 5% 이상의 격차로 넉넉하게 따돌렸으며 막판 보수표 결집으로 접전까지 왔지만 역전당할 수준까지는 오지 않았다. 비록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위기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순위가 역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며[12], 노무현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48.91%의 득표율로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에 극적으로 당선된다.

2.4. 노무현 전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신당 창당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다만 민주당이 가진 정통성은 그대로 갖고 갈 것입니다. 민주당 정체성을 배반하고 훼손한 일이 없습니다. 정당하게 제시된 노선, 정통성에 근거한 것을 다 계승하고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 2003년 6월 2일,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100일 차 기자회견

2002년 16대 대선에서 노무현이 당선되자 갈등은 잦아드는 듯 했다. 2003년 초순만 해도 이른바 허니문 기간이었다. 구 당권파, 즉 비주류가 대통령에게 소외 받는다고 불만을 표하는 수준이었고, 대통령이 당내 화합을 다독이는 상황에서 당내 인사들을 청와대 만찬에 초청하는 등 봉합의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해 하순에 와서는 당 내 친노 세력과 대통령의 드라이브로 당내 쇄신 논쟁이 점차 불거졌고, 계파 갈등은 점점 심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김대중 정권과 관련된 대북송금 특검이 터지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 세력 중 일부까지 신당 창당에 반대하는 상황까지 생겼다. 대표적인 경우가 추미애 의원과 조순형 의원.

운명의 날은 2003년 9월 4일이었다.[13] 중재파였던 정대철 당 대표[14][15] 등이 합의를 계획했으나, 결국 타결 직전 단계에서 박상천/권노갑 등의 동교동 노장파에서 "이념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고, 당무회의 육탄 저지에 나서면서 합의는 무산되었다.

만약 합의가 성사되었다면 새천년민주당이란 이름은 재창당의 형식으로 명칭이 교체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국민회의에서 새천년민주당으로 넘어간 선례처럼, 무난한 세확장이 가능한 재창당 안이 엎어진 건 2002년 대선 당시 분란의 연장선에서 바라봐야한다. 이미 후보 재신임, 친노와 비노 한번씩 찔러보았던 외부 세력과 재창당 등의 모든 시나리오가 실패로 돌아간 상황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재창당은 결국 의원 공천권의 문제가 되는데, 지분의 문제에서 친노와 비노는 합의가 불가능했다. '공천학살'이란 뒷말이 나올지언정 한 쪽이 온전히 승리하기엔 힘이 부족했던 상황이었다. 당시만 해도 지구당 위원장의 지위가 보장되는 시기였는데, 이들이 자리를 내놓지 않는 상황에서 경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더불어 제2의 '호남맹주'를 노리는 구 동교동계 거물들과 아예 '호남정당'의 이미지를 표백, 제거하려고 하는 친노의 입장이 일치할 리가 없었다.

2003년 9월 21일, 정대철 대표를 포함한 37명의 의원이 '국민참여 통합신당(가칭)'을 구성하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다. 뒤이은 9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도 새천년민주당을 공식 탈당했다. 명분은 국정 운영 전념이었지만, 이미 대통령이 당 내에서 대북송금사건 이후 호남과 동교동계 의원들에게 큰 비판을 받고 있던 실정이어서 선택의 폭은 좁았다. 또한 친노 인사들도 이미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기 위해 선도 탈당한 상황이었기에, 분당은 현실화가 되어가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실 처음엔 100석에 육박하는 여당을 버리고 분당을 하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반대를 하진 않아왔고, 의원들을 중심으로 신당 창당이 궤도에 오르게 되면서 '내 의견만 고집할 수 없다'며 탈당하게 된 것. 열린우리당 입당을 후일로 미룬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훗날 노무현은 자신이 창당한 것이나 다름 없는 열린우리당 역시 탈당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탈당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쫓겨난 것이란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16]

사실 자신이 주류인 당을 탈당하고 신당을 창당하는 행보는 이미 선례가 있었다. 바로 전 대통령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새천년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할 때의 일이다. 주류가 당권을 얻을 수 없거나, 힘겹게 얻더라도 비주류와 함께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고육지책[17]으로서의 공통점이 있다. 다만 국민회의는 15대 총선에서 예상보다 훨씬 적은 의석을 얻었고,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승리했다는 차이가 있다. 반면 대통령 선거의 경우, 국민회의는 최초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열린우리당은 재보궐과 지선에서 참패를 거듭하다가 기어이 대선까지 패하고 만다. 달리 말하면, 열린우리당의 창당 자체가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치적 파행이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야당 분열인 국민회의 창당과 여당 분열인 열린우리당 창당은 그 파괴력에서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18][19]

새천년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이 희대의 배신을 했다며 강력하게 비난 성명을 냈고, 한나라당은 신당으로 빨리 가라며 합류를 재촉했다. 잔류 민주당은 구(舊)주류의 박상천 최고위원이 대표직을 승계하고 뒤이은 11월 전당대회에서 조순형 대표를 선출하면서 재정비에 나섰다.

2.5. 분당과 17대 총선 참패

새천년민주당은 탈당파가 창당한 열린우리당과 기존의 새천년민주당으로 쪼개졌고, 양 세력은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분당 시점(2003년 9월)에는 새천년민주당이 제2당(59석)으로 의석수가 더 많았다.[20] 열린우리당은 개혁국민정당 출신 의원 2명[21]한나라당에서 고작 '독수리 오형제'라는 5명의 의원[22]만 추가 편입했을 뿐, 초유의 제3당 여당이었다.

문제는 대통령의 행보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계속 열린우리당에 우호적인 발언을 했고, 선관위로부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새천년민주당에서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였다. 탄핵 발의는 민주당 조순형 대표 체제에서 주도하고 한나라당이 동조하는 형태로 진행됐으며, 여기에 자민련이 막판에 끼어들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은 국회에서는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으나, 결국 헌재 기각으로 끝났다.

새천년민주당은 탄핵이라는 최악의 수를 둔 대가로 2004년 17대 총선 때는 겨우 9석 의석을 갖는데 그쳤다. 그나마도 비례대표 4석을 포함한 결과.[23] 조순형 전 대표가 험지인 대구에 출마하고, 추미애 비상대책위원장이 삼보일배를 하는 등 반성 행보를 보였지만, 민심은 민주당을 외면했다. 탄핵도 탄핵이지만, 총선 와중에도 공천권을 두고 구주류와 신주류가 선관위까지 가서 서로 싸우며 자기가 공천권 행사하는 게 맞다고 쟁투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으니 9석이나 얻은 게 용할 지경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의 상황은 엉망이었다. 참고로 이 때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 바로 김종인.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새천년민주당 세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지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지만 김 전 대통령은 탄핵을 저지른 그들에게 크게 실망하여 오히려 열린우리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고[24], 결국 호남에서도 처참하게 박살이 났던 것이다.[25]

이 총선 참패로 민주노동당에 의석수를 역전당해 원내 제4당까지 내려오면서, 2005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는 왕년의 여당이었던 당이 기호 4번을 다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26]

후보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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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구 || 후보 || 당시 경력 || 기타 ||
종로구 정흥진 전 종로구청장
중구 김동일 전 중구청장
용산구 성장현 전 용산구청장 [27]
성동구 갑 나종문 전 서울시의원
성동구 을 이상일 전 청와대 행정관
광진구 갑 임동순 전 서울시의원
광진구 을 추미애 현 국회의원 [28]
동대문구 갑 지용호 전 서울시의원
동대문구 을 유덕열 전 동대문구청장 [29]
중랑구 갑 김봉섭 전 태릉선수촌장
중랑구 을 송재덕 전 중랑구의원
성북구 갑 임영화 전 민변 사무차장
성북구 을 박찬희 전 국민일보 정치부 부장
강북구 갑 박겸수 전 서울시의원 [30]
강북구 을 김경재 현 국회의원
도봉구 갑 이경태 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유세 부위원장
도봉구 을 이철용 전 국회의원
노원구 갑 함승희 현 국회의원
노원구 을 임래규 전 산업자원부 차관
노원구 병 이동섭 한국문화정책연구원장 [31]
은평구 갑 황정연 제품안전경영연구원 원장
은평구 을 이성일 전 대한적십자사 서울시 대의원
서대문구 갑 김영호 마산대 겸임교수 [32]
서대문구 을 안완길 전 대한신대 총장
마포구 갑 정형호 세무사
마포구 을 유용화 좋은세상 만들기 공동대표
양천구 갑 안동혁 전 양천구의원
양천구 을 양재호 전 양천구청장
강서구 갑 조재환 현 국회의원
강서구 을 김철근 전 국회정책연구위원
구로구 갑 장성호 배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구로구 을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 불출마
금천구 장성민 현 국회의원
영등포구 갑 김민석 전 국회의원 [33]
영등포구 을 박금자 현 국회의원
동작구 갑 최영수 전 서울시의원 [34]
동작구 을 유용태 현 국회의원
관악구 갑 한거희 전 대통령비서실 국장
관악구 을 유종필 전 서울시의원 [35]
서초구 갑 권승렬 일호기업 대표 불출마
서초구 을 권만성 전 옥스퍼드대 객원 연구원
강남구 갑 전성철 전 청와대 정책기획비서관 불출마
강남구 을 박정일 전 삼성SDS 동경사무소장
송파구 갑 공보길 명지대 교수
송파구 을 박승진 전 서울지검 서부지청 부장검사
송파구 병 김성순 현 국회의원 [36]
강동구 갑 양관수 고려대 객원교수
강동구 을 심재권 현 국회의원 [37]
중구 동구 노문성 전 대통령실 행정관
서구 정오규 전 민족차문화연구원 상임연구원
영도구 이승재 전 영도구의원 불출마
부산진구 을 한기승 부산산악연맹회장 불출마
동래구 조우섭 전 대한무궁화회 부산지부장
남구 갑 도정옥 전 뉴스타운 시민기자
남구 을 유세욱 멕시칸 부산영업본부장 불출마
북구 강서구 갑 박희동 전 민주평통 북구협의회 부회장
북구 강서구 을 윤무헌 전 산정회 대표이사
해운대구 기장군 갑 송관종 전 해운대구의원 불출마
사하구 을 김지만 전 사하발전포럼 회장
금정구 김부돌 전 금정구의원 불출마
수영구 최승호 전 동아대 학생회장 불출마
사상구 한승종 전 명곡문화재단 이사장
중구 남구 장수일 경일대 교수 불출마
동구 갑 이광수 한국유럽경제협의회 대표
동구 을 정두병 대구 새마을연수원 이사장
서구 김진수 전 향토문화복지진흥회 이사
북구 을 최경순 전 영남여성포럼 대표
수성구 갑 조순형 현 국회의원 [38]
수성구 을 김성현 전 민주평통자문위원
달서구 갑 이상목 대한교육문화신문 논설위원
달서구 을 박영린 대구경북포럼 상임고문
달서구 병 서병환 전 대구환경문제연구소 이사장
달성군 곽임규 전자상거래조합 대구경북지부장 불출마
중구 동구 옹진군 원미정 전 인천시의원
남구 갑 정호선 전 국회의원
남구 을 박규홍 전 인하대 총학생회장 불출마
연수구 정종열 전 경기대 교수 불출마
남동구 갑 백종길 전 농어촌문제연구소 소장 불출마
남동구 을 권태오 전 한민족사랑나누기운동 본부회장
부평구 갑 이수영 천안대 교수
부평구 을 조만진 전 대한사격연맹회장
계양구 갑 박상희 현 국회의원
계양구 을 정창교 전 부평백마교회 야학교사
서구 강화군 갑 조한천 현 국회의원
서구 강화군 을 김철하 한국선물결제 대표이사
동구 김대웅 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서구 갑 장홍호 전 대통령실 민정행정관
서구 을 김영진 현 국회의원 [39]
남구 강운태 현 국회의원 [40]
북구 갑 김상현 현 국회의원
북구 을 최경주 전 조선대 총학생회장
광산구 전갑길 현 국회의원 [41]
동구 송유영 변호사
중구 박천일 전 민주평통자문위원
서구 갑 이강철 전 대전시의원
서구 을 송인덕 전 대전일보 경제부 차장
유성구 정상훈 전 유성문화원 부원장
대덕구 강희재 전 한국수자원공사 노조위원장
남구 을 이규정 전 국회의원
수원시 장안구 김태호 전 국회부의장 비서관
수원시 권선구 이대의 전 푸른정치포럼 대표
수원시 팔달구 김필용 중앙국제교류센터 대표
수원시 영통구 김종열 전 수원시의회 의장
성남시 수정구 이윤수 현 국회의원
성남시 중원구 김태식 현 국회부의장
성남시 분당구 갑 김종우 법률소비자연맹 자문위원
성남시 분당구 을 박인수 한국방송통신대 경기지역총학생회장
의정부시 갑 홍남용 전 의정부시장
의정부시 을 김병갑 전 경기도의원
안양시 만안구 강득구 전 경기도의원 불출마
안양시 동안구 갑 최영식 법률소비자연맹 집행위원장
안양시 동안구 을 채호일 전 한국공인노무사회 사무총장
부천시 원미구 갑 안동선 현 국회의원
부천시 원미구 을 이강인 전 부천시의원
부천시 소사구 조영상 변호사
부천시 오정구 김옥현 전 경기도의원
광명시 갑 방호현 전 광명시의원
광명시 을 박정희 전 광주시 북구의원
평택시 갑 이규천 전 평택시의원
평택시 을 이병진 전 평택대 중국학과 교수 [42]
양주시 동두천시 이성수 전 지방정치문화연구소회장
안산시 상록구 갑 김영환 현 국회의원 [43]
안산시 상록구 을 노영철 중소기업발전연구소 대표
안산시 단원구 갑 민영삼 전 서울시의원
안산시 단원구 을 김진관 전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
고양시 덕양구 갑 안형호 전 도시환경연구소 소장
고양시 덕양구 을 이기훈 전 부산매일신문 정치부기자
고양시 일산구 갑 박태우 일산경제연구소장
고양시 일산구 을 조길영 광운대 겸임교수
의왕시 과천시 김원봉 전 경기도의원
구리시 주광덕 전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검사 [44]
남양주시 갑 신낙균 전 국회의원 [45]
남양주시 을 안종목 전 경기도 4-H 지도자 협의회 의장
오산시 임창열 전 경기도지사 사퇴
화성시 노상주 한국 직능단체 연합회 화성시 회장
시흥시 갑 이길호 전 경인매일 논설위원
시흥시 을 박병윤 현 국회의원 불출마
군포시 김선문 전 민화협 사무차장
하남시 강병덕 한중교류개발 대표이사
파주시 남궁준 전 사회문화 연구회 회장
이천시 여주군 이희규 현 국회의원
용인시 갑 류희성 전 한국 BBS중앙연맹 부총재
용인시 을 손남호 용인서북부 시민연대 자문위원
안성시 이병호 전 극동대 겸임교수
김포시 김원길 전 경일매일 논설위원
광주시 이상윤 전 광주시생활체육협의회장
포천시 연천군 김유근 전 포천군 합기도회장
양평군 가평군 한규태 중앙경제신문 논설위원
춘천시 이용범 춘천정치포럼 대표 탈당
원주시 안상현 현 국회의원 불출마
강릉시 선복기 전 강원도의원
동해시 삼척시 전국표 명성종합건설 전무이사 불출마
태백시 영월군 평창군 정선군 황창주 현 국회의원 불출마
속초시 고성군 양양군 송훈석 현 국회의원 [46]
홍천군 횡성군 유재규 현 국회의원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 이용삼 현 국회의원 [47]
청주시 상당구 채영만 전 송면중 교장
청주시 흥덕구 을 홍익표 전 지구당위원장 불출마
제천시 단양군 조두형 전 새천년민주당 정책심의위원
청원군 김기영 지구당위원장 불출마
보은군 옥천군 영동군 김건 전 서울신문사 부국장
천안시 갑 강방식 전 천안소방서 119 구조대장
천안시 을 정재택 전 충남도의원
공주시 연기군 박희부 전 국회의원
보령시 서천군 박익규 충청경제발전연구원장
아산시 이원창 전 충남도의원
서산시 태안군 김형배 충서중국연구소장
홍성군 예산군 신동찬 전 한국정책포럼 이사
당진군 한만석 전 신평고 재단이사
전주시 완산구 갑 이무영 전 경찰청장 [48]
전주시 완산구 을 김완자 전 전북도의원
전주시 덕진구 이상휘 전북대 교수
군산시 엄대우 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익산시 갑 최재승 현 국회의원
익산시 을 이협 현 국회의원
정읍시 윤철상 현 국회의원
남원시 순창군 이용호 전 국무총리실 정책국장 [49]
김제시 완주군 오홍근 전 국정홍보처장
진안군 무주군 장수군 임실군 양영두 전 소충사선문화제전위원회 위원장
고창군 부안군 정균환 현 국회의원
목포시 이상열 전 목포변호사회 회장 당선
여수시 갑 김충조 현 국회의원 [50]
여수시 을 박종옥 전 오람해운 대표이사
순천시 노관규 전 대검중수부검사 [51]
나주시 화순군 배기운 현 국회의원 [52]
광양시 구례군 정철기 현 국회의원
담양시 곡성군 장성군 김효석 현 국회의원 당선
고흥군 보성군 박상천 현 국회의원 [53]
장흥군 영암군 김옥두 현 국회의원
강진군 완도군 황주홍 전 건국대 교수 [54]
해남군 진도군 이정일 현 국회의원 당선
무안군 신안군 한화갑 현 국회의원 당선
함평군 영광군 이낙연 현 국회의원 당선
포항시 북구 신원수 전경북매일대표 불출마
포항시 남구 울릉군 김병구 지구당위원장 탈당
경주시 박판렬 연청경주지구회장
김천시 배영애 전 태봉봉제 대표 불출마
안동시 김윤한 안동문화경제연구소 소장
구미시 갑 김진섭 전 대한일보 기자 불출마
상주시 김종래 불출마
문경시 예천군 함대명 전 문경새재 로타리클럽 회장
경산시 청도군 이상수 전 체신 공무원
영양군 영덕군 봉화군 울진군 조영환 전 주간현대 논설위원
창원시 갑 조재완 불출마
창원시 을 이정혜 전 창원시 청솔회장 불출마
마산시 갑 이상기 전 경남야구협회 부회장 불출마
마산시 을 안성숙 한국여성지도자연합회 경남지부장 불출마
진주시 갑 최충경 경남도지부 조직국장 불출마
진주시 을 이향만 전 현대건설 노조위원장 불출마
진해시 최혁 전 통일원 통일연구소 정책전문위원
통영시 고성군 이영국 전 경남도의원
김해시 갑 오순석 조순형 대표 특보
밀양시 창녕군 하정구 전 창녕문화원 부원장 불출마
거제시 이동명 세일건설 대표 불출마
의령시 함안군 합천군 김영래 전 함안군 축구협회장 불출마
양산시 전덕용 전 개운중 교장
남해군 하동군 남명우 전 푸른하동모임회장
산청군 함양군 거창군 마장수 재거창 호남향우회장 불출마
제주시 북제주군 갑 정대권 전 서울지검검사 불출마
제주시 북제주군 을 홍성제 전 한국공항공사 감사
서귀포시 남제주군 고진부 현 국회의원 불출마
재보궐선거
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성남시 중원구 김강자 전 서울종암경찰서장
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포천시 연천군 이운구 전 경기도의원

2.6.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민주당(2005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민주당(2005년) 로고.svg

제17대 총선 이후 전남권(광주+전남) 지역정당으로 전락해 별볼일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설상가상으로 열린우리당 계열 인사[55]가 대선 당시 사용한 비용처리 문제를 두고 정당 보조금에 가압류까지 걸어버리면서 새천년민주당 지도부가 시위를 하며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만다. 이후 정통성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2005년 5월 6일,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으며 이후 역사는 민주당(2005년) 문서 참조. 다만 흥미로운 건, 새천년민주당보다는 당명 개정 직후의 민주당이 당세가 조금이나마 나았다.

사단(社團)으로서의 새천년민주당-민주당은 2007년 6월 27일 민주당이 열린우리당에서 탈당한 김한길계 의원들(중도개혁통합신당)과 합당해 중도통합민주당으로 신설창당을 하면서 7년 5개월만에 끝났다. 그러나 중도통합민주당은 불과 2개월이 안된 8월 13일, 김한길계의 탈당으로 2개월만에 도로 2007년 민주당으로 돌아간다. 이후 2008년 2월 17일 총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하면서 통합민주당으로 거듭났을 때를 사실상 새천년민주당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창당 만 8년 28일만이었다.

3. 역대 지도부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및 대표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총재와 지명직대표최고위원 병행
<rowcolor=#00aa7b> 초대 총재
김대중
권한대행
한광옥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rowcolor=#00aa7b> 제1·2대 대표
서영훈
제3대 대표
김중권
제4대 대표
한광옥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 선출직대표최고위원
<rowcolor=#00aa7b> 제5대
한화갑
제6대
정대철
제7대
박상천
제8대
조순형
비대위
한화갑
대표
<rowcolor=#00aa7b> 제9·10대
한화갑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부터 4대까지의 대표최고위원은 총재가 임명하는 지명직 대표최고위원이다. 5대부터 8대까지의 대표최고위원은 선출직 대표최고위원이며 그후 대표로 바뀌었다. }}}}}}}}}}}}

3.1. 총재

3.2. 대표


저 중에서 한화갑, 한광옥은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던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 박근혜를 지지하였다.[66] 한편 조순형은 한나라당의 총재였던 이회창과 손을 잡고 자유선진당 소속으로 18대 의원[67]을 지냈으며, 자유선진당이 새누리당에 합당될 무렵에 탈당했다.[68]

3.3. 원내대표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원내대표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word-break: keep-all"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원내총무
초대
박상천
제2대
정균환
제3대
이상수
권한대행
송훈석
제4대
정균환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원내대표
제5대
유용태
제6대
이낙연
}}}}}}}}}}}}}}}

4. 출신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이름 임기 선출 방식 정당
취임일 퇴임일
8 파일:Kim_Dae-jung_presidential_portrait.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김대중
(1924 ~ 2009)
15 1998년 2월 25일 2003년 2월 24일 1997년 대선
직선 40.3%
새정치국민회의 (1998 ~ 00)
새천년민주당 (2000 ~ 02)
무소속 (2002 ~ 03)
9 파일:노무현_대통령.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노무현
(1946 ~ 2009)
16 2003년 2월 25일 2004년 3월 12일
(직무정지)
2002년 대선
직선 48.9%
새천년민주당 (2003)
무소속 (2003 ~ 04)
고건 국무총리가 권한대행 (2004년 3월 12일 ~ 2004년 5월 14일)
2004년 5월 14일 2008년 2월 24일 직무 복귀
(탄핵소추 기각)
무소속 (2004)
열린우리당 (2004 ~ 07)
무소속 (2007 ~ 08)

5. 역대 선거결과

5.1. 대통령 선거

연도 선거명 후보자 득표수 (득표율) 결과
2002년 16대 노무현 12,014,277 (48.91%) 당선

5.2.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2000년 16대 96 / 227 (42.3%) 19 / 46 (41.3%) 115 / 273 (42.1%) 원내 2당
2004년 17대 5 / 243 (2.0%) 4 / 56 9 / 299 (7.1%) 원내 4당

5.3. 전국동시지방선거

연도 선거명 광역단체장 (비율) 기초단체장 (비율) 광역의원 (비율) 기초의원 (비율)
2002년 3회 4/16 (25.0%) 49/232 (21.1%) 143 / 680 (21.0%) [ㄱ]

5.4. 재보궐선거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2000년 1월 0 / 2
2000년 6월 1 / 7 9 / 32 0 / 57[ㄴ]
2000년 10월 0 / 2 2 / 9 0 / 37[ㄴ]
2001년 4월 0 / 7 1 / 6 0 / 14[ㄴ]
2001년 10월 0 / 3
2002년 8월 2 / 13
2002년 12월 0 / 1 0 / 1 0 / 3 0 / 4[ㄴ]
2003년 4월 0 / 3 0 / 2 0 / 4 0 / 23[ㄴ]
2003년 10월 0 / 4 1 / 9 0 / 66[ㄴ]
2004년 6월 1 / 4 1 / 19 2 / 38 0 / 53[ㄴ]
2004년 10월 2 / 5 1 / 7 0 / 35[ㄴ]
2005년 4월 0 / 6 1 / 7 1 / 10 0 / 21[ㄴ]

6. 당가

파일:새천년민주당 당가 악보.jpg

찬란한 새 아침이 이 땅을 비출 때면
희망찬 내일 맑게 열린다 우리 함께 달린다
너와 나 하나 되어 힘차게 나아가자 민주당
새 시대 새 희망 창조하는 민주당
새 시대 열어가는 새천년민주당

화합과 개혁의 정치를 우리가 이뤄나갈 때
밝은 미래와 희망의 나라 우리 앞에 열린다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힘차게 나아가자 민주당
새 시대 새 희망 창조하는 민주당
새 시대 열어가는 새천년민주당

7. 갤러리

파일:16대 총선 전국구 새천년민주당1.jpg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0)
파일:17대 비례 민주당.jpg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선거 포스터 (2004)

8. 기타

8.1. e-민주양

국내 정당 최초로 사이버 캐릭터를 만들어 마스코트로 활용한 정당이다. 자세한 사항은 e-민주양 문서 참조.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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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7.~1951.12.)자유당 (1951.12.~1960.4.)
한국민주당 (1948.7.~1949.2.)
민주국민당 (1949.2.~1949.11.)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장면 내각 민주당 (1960.8.~1961.5.)
박정희 정부 민주공화당 (1963.12.~1979.10.)
유신정우회^[1]^ (1973.3.~1979.10.)
전두환 정부 민주정의당 (1981.1.~1988.2.)
노태우 정부 민주정의당 (1988.2.~1990.1.)민주자유당 (1990.1.~1992.10.)
문민정부 민주자유당 (1993.2.~1995.12.)신한국당 (1995.12.~1997.11.)
국민의 정부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자유민주연합 (1998.2.~2001.9.)
민주국민당 (2001.4.~2001.9.)
참여정부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열린우리당 (2004.5.~2007.2.)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 (2008.2.~2012.2.)새누리당 (2012.2.~2013.2.)
박근혜 정부 새누리당 (2013.2.~2017.2)자유한국당 (2017.2.~2017.3.)
문재인 정부 더불어민주당 (2017.5.~2022.5.)
더불어시민당^[A]^ (2020.3.~2020.5.)
윤석열 정부 국민의힘 (2022.5.~현재)
국민의미래^[A]^ (2024.2.~2024.4.)
[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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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기표 등.[2]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이 2014년 3월 26일에 창당된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현재 당명인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2024년 12월 기준, 9년을 기록하고 있다.[3] 5공 당시 관제 야당.[4] 총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으나 국정 운영에 전념하느라 총재 권한대행으로 전직 국회의장인 이만섭 전 의원(7선)을 세워두었다.[5] 이만섭 전 의장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국민신당으로 가서 이인제 계파와 같이 행동했다.[6] 당초에는 공동 여당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자유민주연합과의 통합도 고려했으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회동 끝에 최종적으로 무산됐다.[7] 이 당시엔 대통령이 총재를 맡는 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통령 겸 여당 총재가 공천에도 직접 관여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를 더 심화시켰다는 평이 많다. 이후 2001년 11월,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이후 총재 자리를 없애버리면서 이 풍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8] 본래 민주정의당 출신이었지만 민주당계 정당으로 합류한 인사이다.[9] 충청은 자유민주연합이, 나머지는 새천년민주당이 담당함을 가정한 단순 득표율 합산. 다만 1998년 지방선거에서 당선인을 낼뻔했다가 선거 공조 무산으로 한나라당에게 당선인을 내준 곳임을 감안해야 하기는 한다.[10] 대선 경선 초기 레이스에서 김근태가 권노갑에게 정치자금 받은 것을 고백하면서 권노갑의 세가 약해졌다는 분석도 있다.[11] 이 때만 해도 이인제는 부동의 여권 차기 대권주자라는 정치 거물로, 이인제가 피닉제라고 평가받게 된 것은 훨씬 후인 2008년의 일이다.[12] 당시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면 출구조사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로는 오전에는 장노년층들이 많이 투표했기 때문에 이회창 후보가 소수점 차이로 노무현을 앞섰지만, 오후에 젊은층들이 몰려오면서 뒤집었다.[13] 이 날의 육탄갈등 도중 난닝구라는 멸칭이 생겼다.[14] 대선 당시에 선대위원장을 맡았다.[15] 사실 정대철은 당 내에서 거물 중진 중 한 사람이었지만, 13대 대선 당시의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인한 대선 패배' 주장과 97년 전당대회 당시 김상현과 연합전선을 펴면서 반 김대중에 가까운 행보를 펼쳤기 때문에 동교동계와는 거리감이 있던 중재파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김상현(1935), 조순형 등 동교동계와 거리를 두며 계파색이 옅은 중진 의원들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사람들이다.[16] 흥미로운 건 열린우리당 붕괴 와중에 창당 주역인 신기남 의원이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창당도 처음엔 반대하지 않았는가'라며 정당의 운명은 자신들이 결정한다는 근거에 이 건을 가져다 썼다는 점이다. # 친노이자 열린우리당 중심의 통합을 주장했던 신기남조차도 열린우리당이 '노무현당'은 아니었다고 토로한 것이다.[17]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싯가로 50억 정도의 가격이던 당사까지 비주류에게 넘기고 당을 떠났다.[18] 집권 여당이 분당하는 선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제2공화국에서 민주당장면 총리가 소속된 신파 중심으로 돌아가자 윤보선 대통령이 소속된 구파가 뛰쳐나가 신민당을 창당한 것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 이후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비박계가 창당한 바른정당,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민주자유당에서 숙청당한 김종필이 만든 자유민주연합,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한국당에서 갈라져 나온 이인제국민신당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내각제 시절의 경우 총리)이 분당의 주체였던 경우는 처음이다.[19] 다만 국민회의 창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은 1987년 13대 대선으로 양김씨가 분열한 이래 갈라져 있던 영호남 민주세력을 다시 한 번 분열시켰다는 점에서는 책임을 면키 어려웠다. 호남 세력인 동교동계가 국민회의로 넘어가자 민주당이기택 등 영남 세력이 이끄는 미니 정당 신세가 됐다가 여당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으로 합당했다. 당시 노무현 등은 한나라당 합류를 거부, '통추'를 조직하여 국민회의로 입당해 영남 민주 세력의 계보를 이어갔지만, 열린우리당 분당으로 이번엔 영남 출신 노무현을 위시한 친노가 열린우리당을 창당함으로써 새천년민주당 호남 세력과 갈라선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재합당하긴 했지만, 동교동계 핵심 인사들은 훗날 2012년의 정통민주당 등을 거쳐 친박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국민회의 창당으로부터 20년, 열린우리당 창당으로부터 13년 뒤에는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영남 세력이 주도적 역할)과 국민의당(호남 세력이 주도)으로 분당해 민주당계 정당은 다시 한 번 분열하였다. 국민의당으로 넘어갔던 인사들이 바른미래당, 민생당 등을 거쳐 대부분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하며 분당이 일단락될 때까지 4년의 세월이 걸렸다. 와중에 민생당 출신 호남 정치인 일부는 진영을 바꾸어 국민의힘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상 1992년 14대 총선, 2000년 16대 총선, 2008년 18대 총선 3회를 제외하고는 13/15/17/19/20/21대까지 총 6번의 총선들이 크든 작든 민주당의 분열로 치러졌는데, 이 가운데 가장 격렬하고 가장 막장으로 치달으며 앙금도 가장 컸던 사건이 바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이였다.[20] 다만 전국구 19석을 제외한 지역구로 한하자면 민주당은 40석으로, 전원이 지역구 의원이었던 열린우리당(47석) 쪽이 조금 더 많았다.[21] 유시민, 김원웅[22] 김부겸, 김영춘, 안영근, 이부영, 이우재.[23] 전남의 새천년계 무소속까지 합쳐도 10석이다.[24] 다만 장남 김홍일은 그대로 새천년민주당에 남아 비례대표 의원에 당선되었다.[25] 이때의 전설 같이 회자된 이야기가 손석희 아나운서와 연관된 "그러면 (탄핵을) 안 하면 될 것 아닙니까?". 문서 참조.[26] 2004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는 기호 3번을 달아야 할 민주노동당이 한 곳도 후보를 내지 않아서 새천년민주당이 대신 3번을 달게 되었다.[27] 이후 용산구청장 당선[28] 이후 국회의원 당선[29] 이후 동대문구청장 당선[30] 이후 강북구청장 당선[31] 이후 국회의원 당선[32] 이후 국회의원 당선[33] 이후 국회의원 당선[34] 이후 서울시의원 당선[35] 이후 관악구청장 당선[36] 이후 국회의원 당선[37] 이후 국회의원 당선[38] 이후 국회의원 당선[39] 이후 국회의원 당선[40] 이후 광주광역시장,국회의원 당선[41] 이후 광산구청장 당선[42] 이후 국회의원 당선[43] 이후 국회의원,충북도지사 당선[44] 이후 국회의원,남양주시장 당선[45] 이후 국회의원 당선[46] 이후 국회의원 당선[47] 이후 국회의원 당선[48] 이후 국회의원 당선[49] 이후 국회의원 당선[50] 이후 국회의원 당선[51] 이후 순천시장 당선[52] 이후 국회의원 당선[53] 이후 국회의원 당선[54] 이후 강진군수,국회의원 당선[55] 김원기 국회의장의 동생이 운영하던 홍보물 업체가 대금 지급이 늦어지자 아예 가압류를 걸어버린 것.[56] 당시 대통령직과 겸임. 2001년 재보궐선거 패배로 사퇴[57] 총재직 폐지[58] 당 총재(김대중 대통령)가 임명. 다만 권위주의 시대처럼 대통령이 직접 여당 총재를 맡는 것이 비민주적이란 여론이 불거지자, 김 대통령은 동교동계 중진이었던 한광옥 대표를 지명하고 즉각 물러났다. 이후 상기 총재 항목에 명시된 것처럼 한광옥 대표는 6개월 간 총재 권한대행의 권한도 함께 갖게 되었다. 정당 민주주의 강화 과정에서의 과도기적 상황이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59]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가면서 당 대표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했으며,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60]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당 대표직 사퇴[61] 한화갑 사퇴로 승계,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해 사퇴[62] 정대철 사퇴로 승계[63] 17대 총선 패배로 사퇴[64] 대표로 추대[65] 2005년 5월 6일, 민주당(2005년)으로 당명 변경[66] 다만 한화갑은 지지만 했을 뿐 실제 입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박근혜 지지를 철회하긴 했다. 한광옥은 한 술 더 떠서 친박계로 변했고, 박근혜의 마지막 대통령 비서실장이 된다. 친박으로 변신한 동교동계로는 잠깐 친노(!)이기도 했던 김경재 의원도 있는데, 자유총연맹 회장을 지내며 극우행보를 이어갔다. 그러나 자기가 젊어서 한 일이 있는지 김대중 대통령 기념 사업을 벌이는 등 희한한 행보를 보였다.[67] 비례대표, 당시 7선[68] 조순형의 경우엔 깨끗한 정치라는 이념에 동조하여 제3지대 신당으로서 자유선진당에 참여한 것이며, 새누리당 합당 직전에 탈당한 것이므로 변절이라고 보긴 어렵다. 다만 2006년 재보궐선거에서 생환하여 2005년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였으나, 돌연 입당한 이인제의 조직에도 밀려 대선 경선에서 중도 사퇴 후 탈당하여 자유선진당으로 간 행보가 괴해 보이는 것은 사실.[ㄱ]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기초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ㄴ]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