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이상 저온/사례
하위 문서: 이상 저온/대한민국/2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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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읽기 전에3. 목록
3.1. 15세기 이전3.2. 16세기3.3. 17세기3.4. 18세기3.5. 19세기
3.5.1. 1800~1870년대
3.6. 20세기3.7. 21세기3.5.1.1. 1851년(철종 2년)3.5.1.2. 1852년(철종 3년)3.5.1.3. 1860년(철종 11년)3.5.1.4. 1864년(고종 1년)3.5.1.5. 1877년(고종 14년)
3.5.2. 1880년대3.5.2.1. 1881년(고종 18년)3.5.2.2. 1882년(고종 19년)3.5.2.3. 1883년(고종 20년)3.5.2.4. 1884년(고종 21년)3.5.2.5. 1885년(고종 22년)3.5.2.6. 1888년(고종 25년)
3.5.3. 1890년대1. 개요
한반도에 찾아온 이상 저온을 시기별로 나열한 문서이다.- 볼드체는 평년과의 차이가 큰 경우
- 파란색 볼드체는 평균 기온 편차가 기록적으로 큰 경우
- 서울 월평균기온, 월평균 최고기온, 월평균 최저기온 표는 링크 참고.
2. 읽기 전에
아래의 사례는 봄~가을에 기온이 낮게 나타난 경우에 대해 다루며, 겨울(12~2월)의 이상 저온에 대한 내용은 간략하게만 서술하고 자세한 내용은 한파/대한민국, 한파/사례 문서들을 참조하면 된다. 또한 전국 평균 기온은 본격적인 전국 기상 관측이 시작된 1973년 이후를 기준으로 통계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021년 3월까지는 대체적으로 1981~2010년까지 30년간의 평균 기온을 기반으로 서술된 내용이 많으니, 1980년대 이전의 평균 기온은 1981~2010년 평균 기온에 비해 다소 낮으며 이상 저온의 강도가 더욱 강하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는 것이 좋다.본 문서에서는 19세기의 기후를 서술할 때 한수당연구원 블로그[1]의 글을 자료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 글을 보면 블로그 주인의 약력이 있으니 후술할 자료들은 신빙성이 높은 편이다.[2]
3. 목록
3.1. 15세기 이전
- 190년(고국천왕 12년) - 음력 9월에 수도 국내성에 눈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3]
- 808년(애장왕 10년) - 음력 8월 15일 (양력 9월 13일)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삼국유사[4])
- 818년(헌덕왕 원년) - 음력 3월 14일 (양력 4월 26일)에 눈이 내렸다고 한다.
- 839년(문성왕 원년) - 음력 5월 19일 (양력 7월 9일)에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 915년(신덕왕 4년) - 3월에 서리가 2번이나 내렸다고 한다.
- 1394년(태조 2년)
- 1398년(태조 6년) -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상 저온이 오랫동안 이어진 정황이 담겨 있다. 이상 고온/사례 문서에 적혀 있듯, 전년도 12월과 이해 1월에는 얼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따뜻한 것으로 보였지만, 3월 상순부터 상황이 반전된 듯한 기록들이 몇 개 있다. 그 외에도 가뭄이 아주 심했는지, 3~6월 기록 내내 가뭄이 있다는 언급이 끊임없이 나온다.
- 1405년(태종 5년)
- 1406년(태종 6년) - 양력 4월 하순~5월 상순에 꽤 넓은 지역에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들이 존재하고, 심지어 현재의 북한 강원도 지역에는 눈까지 왔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날짜는 양력 기준이다.
- 1415년(태종 15년)
- 1417년(태종 17년) - 이해는 유독 쌀쌀하거나 서리가 내렸다는 언급이 많다. 첫 기록부터가 '나무에 꽃조차 피지 않았다'라는 언급이 있어서 첫 기록 이전에도 기상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당시 임금이 5월에 서리가 내리기는 처음이라는 언급까지 했을 정도로 이상 저온의 기간이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 1419년(세종 1년) - 이해에는 직접적으로 추웠다고 명시된 기록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
3.2. 16세기
- 1505년(연산군 11년)
3.3. 17세기
17세기는 소빙하기가 절정에 달해 연도가 네 자릿수로 바뀐 이후로 평균 기온과 최저 기온이 가장 낮았던 시기로 추정되며[25] 이에 관련된 기록들이 아주 많다. 아래 나열된 기록들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이 출처이다.- 1650년(효종 1년)
- 1655년(효종 6년) - 이해는 소빙하기를 통틀어 역사상 최대의 강력한 한파가 찾아온 시기로, 조선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현대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엄청난 이상 저온이 기승을 부렸다. 아래의 기록들을 참조하면 1655년 한 해 동안에는 소빙하기가 아니라 정말로 빙하기에 준하는 비정상적인 추위가 이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며, 이 외에도 전 지구적으로 매우 초기록적인 이상 저온이 계속되어 사실상 서기 1년 이후 지난 2,000여 년의 모든 해를 통틀어 가장 추운 해일 가능성도 존재한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한파/사례 문서 참조.
- 4월 - 음력 3월 3일(양력 4월 9일), 강원도 강릉, 양양, 삼척 앞바다가 사흘 동안이나 얼어붙은 사건이 조선 조정에 보고되었다.[28][29] 음력 3월 5일(양력 4월 11일)에는 서울에서 눈이 쌓였다고 한다.[30]
- 6월 - 음력 5월 3일(양력 6월 6일)에 제주(濟州)에서 큰 눈이 내려 국마(國馬) 900여 필이 얼어죽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충청도에서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음력 5월 25일에는 신하들이 "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고 더위와 추위가 바뀌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상소문을 올렸다.[31]
- 8월 - 음력 7월 22일(양력 8월 23일), 경상도에 눈과 우박이 내렸다.
- 1656년(효종 7년)
- 1659년(효종 10년)
- 3~5월 - 전국 각지에서 강설을 비롯한 이상 저온이 관측되었다. 경기도 광주에서 눈이 내리거나 함경도에서 많은 눈이 내렸으며[34], 한성에서도 눈이 관측되었다.[35] 4월에 들어 한성에서 태백이 유독 자주 나타났고 다시 한 번 눈이 내린 것도 모자라[36](양력 4월 16일)자 기록], 다음 날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37] 이후 경기도 광주에서 또 한 번 눈이 내렸고[38], 충홍도, 전남도, 강원도에서도 눈이 관측되기도 했으며[39], 한성에서 우박도 관측되었다.[40] 게다가 윤3월 10일(양력 4월 30일)에는 두 눈을 의심할 만한 기록이 등장한다. 강원도 삼척에 바닷물이 얼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양력 날짜상 5월을 단 하루 앞둔 시기다. 위의 1655년마저도 4월 상순에 동해가 얼어붙었는데, 이해는 5월을 하루 앞두고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시대를 고려해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추위이다. 윤3월 말에는 평안도 강계 등지에서 눈과 우박이 내리기도 했다.[41] 한편 한성에서 또다시 눈이 관측되었는데, 그 색깔이 송화가루처럼 노랬다고 한다.[42] 이러한 일련의 이상 기후 현상으로 인해 많은 지역에서 흉년으로 고통받았고, 조정 신하들이 병이나 자책성 사퇴를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는 등 조정 내부도 어수선해졌으며, 결정적으로 이 이상 기후가 나타나고 얼마 뒤에는 국왕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했기에 이 사이에 기후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않아, 이 이상 기후가 얼마나 오래 갔는지는 불명이다.
- 1662년(현종 3년)
- 1670년(현종 11년)
- 1671년(현종 12년) - 경신대기근이 발생한 해이다. 이해에는 조선에서 위의 1654~1655년에 버금가는 이상 저온과 한파가 찾아온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이해 추위에 관한 기록들 중 아래의 대목이 눈에 띈다.
기근의 참혹이 올해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굶주림과 추위가 몸에 절박하므로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집에 조금이라도 양식이 있는 자는 곧 겁탈의 우환을 당하고 몸에 베옷 한 벌이라도 걸친 자도 또한 강도의 화를 당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무덤을 파서 관을 뻐개고 고장(藁葬)을 파내어 염의를 훔치기도 합니다.
- 1672년(현종 13년)
- 1675년(숙종 1년)
- 1686년(숙종 12년)
- 9월 - 음력 8월 25일(양력 10월 12일)에 조선왕조실록에 작성된 기록에 의하면, 진주 등의 고을에 이달 초 7일(양력 9월 24일)에 눈이 내려 제비와 참새가 얼어 죽었고[48], 영해(寧海)[49] 등 다섯 고을에는 (같은 날에) 바다가 넘쳐서 바닷가의 어민들의 집이 여러 채 떠내려갔으며, 서리와 눈, 바람과 비의 재앙으로 각종 곡식들이 모조리 손상을 입어 온 도의 백성들이 떼지어 울부짖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 10월 - 음력 9월 9일(양력 10월 25일), 제주도에서 기르는 2,890마리의 소와 말이 얼어죽었다고 한다. 한겨울에도 따뜻한 기후를 자랑하는 제주도에서 10월임에도 가축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보면, 웬만한 한겨울 이상 급의 강도로 시기에 걸맞지 않은 비정상적인 한파가 온 것으로 보인다.
- 1695년(숙종 21년)
- 8~10월 - 음력 7월 7일(양력 8월 16일)에 경상남도 진주에서 3촌 가량의 눈이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는 35℃가 넘어가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인 8월에 따뜻한 남부 지방인 진주에서 폭설이 내렸다는 이야기인데, 매우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음력 7월 21일(양력 8월 30일), 평안도 강계 지방에 눈과 서리가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고[50][51] 게다가 양력으로 10월 중순부터 전국적으로 서리가 계속 발생했다고 하니 이해 이상 저온이 매우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심한 이상 저온의 여파로, 이해에는 을병대기근이 발생하였다.
3.4. 18세기
- 1708년(숙종 34년)
- 1709년(숙종 35년)
- 4월 - 전년도에 이어 양력 4월에 이상 저온이 묘사되었으며, 이번에는 아예 날마다 큰 눈이 내리고 추위가 살을 에는 느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53] 현대보다 평균 기온이 낮았다는 일제강점기 시절에도 4월에 며칠 연속 눈이 내리거나[54] 추위가 살을 에는 듯하다는 묘사도 전무했다시피 한 것을 감안할 때, 당시 소빙하기의 위력을 느낄 수 있는 기록 중 하나. 일단 지금까지 알려진 서울의 4월 역대 최저 기온[55]보다 낮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덧붙여 이해 겨울 역시 소빙하기에서 매우 기록적인 한파가 찾아왔는데 자세한 내용은 한파/사례 문서 참조.
- 1780년(정조 4년)
- 1784년(정조 8년)
- 1796년(정조 20년)
- 4~5월 - 이해에는 양력 4~5월에 이상 저온이 묘사되어 있다. 국왕 정조가 "봄이 이미 저물어 가는데도 날씨가 아직껏 차서 꽃 소식이 막연하니 사관이 충분히 기록할 만한 일이다\"라고 하자 당시 우의정 윤시동이 "정월의 추위는 천하가 다 같다고 하니, 꽃이 필 기운이 전혀 없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으나 아침에 북악산을 보니 또 눈(雪)빛이 있었습니다\"라고 발언하고 정조도 "눈 또한 제 철이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63][64] 그리고 이 이상 저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지, "올봄은 기후가 어긋나서 추위가 겨울이나 다름없고, 봄내 꽃이 없어 상도가 매우 어긋났다\"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한다.[65][66][67]
3.5. 19세기
3.5.1. 1800~1870년대
3.5.1.1. 1851년(철종 2년)
- 10월 - 역시 조선 시대이므로 정확한 기온 관측은 없으나, 이해 10월에 190.0mm에 달하는 월 강수량을 기록. 같은 시기 상하이의 10월 평균 기온이 15.8℃[68][69]에 불과했던 것과 무언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황상 잦은 비로 인한 일사 차단이 원인이었던 듯. 아니면 폭우 이후에 찬 공기가 심했을 수도 있다. 일단 한기의 주요 루트인 베이징의 월평균 기온이 11.5℃[70]였던 것을 보면, 강수 이후 급격한 한기 남하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5.1.2. 1852년(철종 3년)
- 3월 - 당시 상하이의 월평균 기온이 6.9℃, 베이징의 월평균 기온이 2.8℃. 둘 다 당시 기준으로 평년 기온보다 1~2℃ 가량 낮았고, 북서쪽에서 내려오는 찬 공기가 베이징은 물론이고 상하이까지 도달했던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 역시 3월에 상당히 쌀쌀했을 것으로 추정.[71]
3.5.1.3. 1860년(철종 11년)
- 3~5월 - 베이징의 3월 평균 기온이 1.3℃, 상하이의 평균 기온이 6.4℃. 당대 평년보다 2~3℃ 낮았고, 상하이까지 한기의 영향으로 월평균 기온이 낮았던 것을 볼 때 서울 역시 베이징과 거의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4월에 잠시 주춤했던[72] 한기는 5월에 다시 심해진 것으로 추정되어, 베이징의 5월 평균 기온이 17.5℃로 역대 최하위이고[73] 상하이 역시 17.2℃[74]3.7℃나 낮다.]에 그쳐 북방 남방을 가리지 않고 이상 저온이 심했는데, 서울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았을 것이라고 막연하게만 추측될 뿐이다.
- 10~11월 - 베이징의 10~11월 평균 기온이 각각 11.2℃[75]와 1.6℃[76], 상하이는 각각 16.7℃[77]와 10.3℃.[78] 그럭저럭 평년을 유지하던 9월과 달리, 10월부터 기온이 급강하하고 11월에 가속화되어, 12월부터는 그대로 한파로 발전하고 연이어 1861년 2월까지 강력한 한파가 불어닥친 것으로 추정된다.[79] 한반도도 거의 국룰 수준으로 한파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80]
3.5.1.4. 1864년(고종 1년)
- 3월 - 소빙하기가 끝나가는 19세기 중후반~현대 기간 중에서 가장 추웠던 3월로 의심되는 시기이다. 그 증거로 이 당시 상하이의 3월 평균 기온이 4.7℃[81]로 역대 최하위이다. 일반적으로 상하이는 서울이 3월에 월평균 기온 0℃를 기록할 때 5~6℃를 기록할 정도로 따뜻한 곳이다.[82] 그런 상하이가 3월임에도 5℃ 이하[83]로 기록되었으니, 그 윗 지역들, 특히 서울은 절대 이상 저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84] 상술했듯 서울의 3월이 0℃ 정도이면 상하이는 5~6℃ 정도이니, 1864년 3월의 서울은 월평균 기온마저 영하를 기록했을 것이며, 심하면 -1℃ 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서울(당시 한성)이 이 시기부터 기온 관측을 했다면, 역대급 이상 고온을 보인 2023년 3월과 비교할 때 3월 최고/최저 격차가 10℃를 넘었을 것이다.[85]
3.5.1.5. 1877년(고종 14년)
- 10월 - 베이징의 10월 평균 기온이 11.5℃, 상하이의 10월 평균 기온이 16.3℃. 1991~2020년 기준 2~3.5℃ 정도 낮은 월평균 기온이고, 특히 중국의 다른 남부 지역에서는 10월 4일에 눈이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10월 이상 저온으로는 순위권에 드는 것으로 추정된다.[86] 서울 역시 높아봐야 월평균 기온이 12℃를 턱걸이할 것이고, 11℃대로도 추정된다.[87][88] 이뿐만 아니라, 10월 31일에는 도쿄에서 -0.5℃까지 급락하여 기상 관측 시작 2년 만에 유일하게 영하의 기온으로 남게 되었는데, 한기가 일본에만 집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89] 만약 서울에도 한기가 내려왔다면, 기온 차가 6~8℃ 정도 벌어지는 두 지역의 기온 특징상 10월 하순에 -6~-7℃를 기록했다는 셈이 된다.[90]-5.1℃(1942년 10월 24일)이고, 10월 하순 후반으로 범위를 좁혀도 -3.0℃(1931년 10월 28일)이다. 1878~1906년 10월 사이에 지금 남아있는 이 기록들을 깨는 이상 저온들이 더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단순 비교로 치면 2~4℃ 이상 낮은 대기록이다.]
3.5.2. 1880년대
이 시기 무렵(1870년대 중반~1880년대)부터 한반도의 과거 날씨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는 비공식 관측 자료가 존재한다.[91] 아래 1886년까지 서술된 내용은 당시 일별 기상 관측을 한 지역들 중 서울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일본 나가사키 지방의 기온을 대조한 것이다. 5월부터 9월까지는 서울과 차이가 크지 않으나 11월 중순~2월은 서울과 12~17℃ 정도의 차이가 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1887년부터는 인천의 해관기상관측자료를 참고하여 더욱 정확한 기온으로 서술하였다.3.5.2.1. 1881년(고종 18년)
3.5.2.2. 1882년(고종 19년)
이 해는 1월 하순에 강력한 남풍으로 인한 고온 정황이 보여 1월은 약 -2~-3도 사이로 평균기온이 현대 평년과 비슷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6월 상순에 역대 최강의 이상 저온이 발생했다. 그리고 12월도 매우 추운 편에 속했다.- 6월 상순 - 나가사키의 6월 6일 최저기온이 8.9 ℃, 2위인 1893년 6월 1일 10.8 ℃를 아득히 밑도는 유일한 한 자릿수 기온이다. 6월과 여름은 서울과 나가사키 차이가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6월은 통상적으로 3~4도 정도 차이가 난다.[92] 따라서 서울은 6월임에도 불구하고 최저 6~7 ℃, 혹은 그에 준하는 압도적인 저온을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서울 6월 역대 최저기온인 1981년 6월의 8.8 ℃ 보다는 낮았을 것이다.
- 12월 중순~하순 - 서울에서 1897년 12월 등과 함께 월평균기온 -3 ℃ 후반, -4 ℃ 초중반 사이가 강력히 의심되는 해이다. 상순도 저온이기는 했으나 시대에 비하면 비교적 그 강도가 덜한 반면 중순과 하순에는 1935년을 연상시키게 매우 추웠다. 12월 14일에 나가사키가 -2.2 ℃를 기록하고 29일에는 -3.6 ℃로 한겨울을 알리는 극심한 추위를 보여 극점을 기록했다.[93] 기온 양상을 보면 1884년, 1917년, 1944년 12월처럼 월평균기온이 극심히 낮았을 가능성은 낮지만, 당대 12월에 비해 매우 추운 해임은 확실하다.
3.5.2.3. 1883년(고종 20년)
다음 해 보다는 좀 덜 할 가능성이 있지만 이 해도 크라카타우 화산 분화로 인해 매우 낮은 연평균 기온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9월 하순에 이상 저온이 매우 심각했다.- 3월 하순~4월 상순 - 89년 후인 1972년 3월~4월 상순 이상 저온의 조상격으로, 일본에서 그나마 한반도와 가까운 나가사키부터 한반도와 거리가 먼 도쿄에까지 이 시기에 갑작스런 이상 저온이 관측되었다. 그 따뜻하다는 도쿄에서 4월 1일 오전에 -3.1℃까지 떨어질 만큼 한기가 강했으며, 나가사키도 갑자기 기온이 훅 떨어졌다. 그렇다면 한반도 전체에도 1972년 3~4월 급[94]으로 강한 한기가 내려왔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때는 서울의 기온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만한 인천의 해관기상관측자료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 9월 하순 - 나가사키의 최저 기온이 무려 3일이나 11도대를 기록. 이는 최저기온이 평균적으로 가장 빨리 떨어졌다는 1912년 9월의 극값 12.9 ℃를 가볍게 능가한다. 서울 3.2 ℃의 역대 9월 최저기온을 기록한 1928년도 당시에 12.5 ℃를 기록했음을 생각하면 서울은 9월 하순임에도 불구하고 0~3 ℃ 가까이 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게다가 하루도 아니고 무려 3일이었기 때문에 강력한 한기가 자리했다는 것이 거의 명백해진다. 여러모로 다음 해 11월 월말 한파와 비슷한 편차를 보였을 것이다.
- 11월 - 다음 해보다는 아니지만, 이해 역시 11월이 다소 낮아 한수당연구원 블로그에 의하면 서울 월평균 기온이 4.6℃를 기록했다고 한다. 동시기 나가사키의 기온을 대조해 봤을 때 최저 기온 분포가 2002년 11월과 유사하거나 살짝 높은 것을 알 수 있는데, 2002년 11월에 서울이 월평균 기온 4.0℃를 기록했으니 이해 11월도 4℃대 초중반, 한기 축의 방향에 따라 낮으면 3℃대 후반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블로그의 평균과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듯하다. 미국의 천문학자이자 외교관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95]이 남긴 당시의 날씨 상황은 아래와 같다. 다만 구체적으로 서울의 어느 지역인지는 불명.
3.5.2.4. 1884년(고종 21년)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이상 저온 중에 가장 비정상도가 큰 해 중 하나이다. 3 ~ 5월, 9월은 이상 저온이 심하지 않았고 8월 상순은 당시 치고 조금 더운 편이었으나, 중하순에는 저온이 매우 심했다. 10~12월의 압도적인 이상 저온 및 한파가 가장 기록적이고[96] 1월도 추운 편이었으며, 2월, 6월에도 강한 이상 저온이 발생했다. 이같은 극한 이상 저온의 원인은 1883년의 크라카타우 화산 분화로 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이 기상 관측이 조금이라도 빨랐다면 1947년 이상으로 상당히 낮은 연평균 기온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월 - 전반적으로 추운 편이었다. 나가사키의 기온 흐름으로는, 1월 11일에 -2.9℃, 이후 한파가 지속되다가 1월 21일에 -4.1℃로 크게 떨어졌다. 당시 한기의 축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흐름으로 봤을 때, 1월 상순에 춥다가 잠시 따뜻해졌고, 1월 10일을 기점으로 중순이 상당히 추웠으며, 1월 21일에 최저 기온 극값을 세우고 하순에 급격히 따뜻해졌다가 다시 낮아진 양상이다.[97] 한수당연구원 블로그의 기록에 의하면 1884년 1월 인천의 월평균 기온이 -4.5℃였다고 하는데, 해당 블로그의 월평균 기온이 실제보다 다소 높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월평균 기온은 -5℃ 정도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통해 서울의 월평균 기온은 -5.5℃에서 더 낮으면 -6℃ 이하로 기록적이지는 못해도 제법 낮았을 것은 자명해보인다.
- 2월 - 나가사키의 최저 기온 분포를 볼 때, 1월 하순에 다시 시작한 한파가 풀리지 않았으며 2월 8일에 -2.7℃, 조금 올라가나 싶더니 2월 11일 -4.8℃, 2월 12일 -4.4℃로 이틀 연속 -4℃를 밑돌았다. 후술할 유사 사례인 1895년 2월 21일이 나가사키 -4.6℃, 인천 -16.0℃를 기록했음을 생각하면 이것보다 심한 한파가 2월 중순 초입에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1월과 다르게 한파가 풀리지 않았고 그대로 이어져서 2월 26일에 다시 -2.1℃를 기록하는데, 1991년 2월 25일에 -2.3℃를 기록한 것을 보면 이와 유사한 한파가 겨울 막바지에 온 듯하다. 월 내내 뚜렷한 이상 고온 없이 상당히 낮아 2월 평균 기온은 순위권으로 낮았을 듯하다. 한수당연구원 블로그에는 인천의 월평균 기온이 -2.2℃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5~-3℃일 가능성이 높으며, 서울도 인천과 비슷하거나 혹은 -3℃ 미만을 기록했을 것으로 보인다.
- 6월 상순 - 6월 1일 나가사키의 최저 기온 11.0℃로 역대 최저 2위. 아무리 서울 - 나가사키 간의 기온 차이가 적은 여름철이라고는 하지만 11.0℃까지 떨어진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고, 이를 미루어 짐작해보면 서울은 7~9℃대로 1981년의 기록을 깼을 가능성도 있다.[98]
- 10월 - 10월 7일 나가사키의 최저 기온 11.6℃, 이는 서울 0.1℃(10월 10일)로 가장 빠르게 영하에 근접한 1911년 10월의 11.3℃와 맞먹는 기록이다. 그리고 10월 16일에 다시 급락해 7.9℃를 기록하였고[99] 또한 10월 26일에 5.1℃로 매우 크게 낮았다. 실제로 10월 26일의 최저 기온 극값은 1942년보다도 낮은 값이며 1941년 10월 28일과 같고 오로지 1970년 10월 31일만이 이보다 낮다. 1970년은 0.5℃로 영하에 미치지는 못했으나 이 값이 1942년보다 낮고 1941년 10월 27일에 서울이 -1.6℃를 기록한 것을 보면 영하권은 거의 확정이고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아 열섬 현상이 없어 -1℃보다 더 떨어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인천 월평균기온 13.0°C. 한수당연구원 블로그에 기재된 기온이 실제보다 높음을 감안하면 실제론 12.3~12.5°C. 서울로 대입하면 11도대 중후반이다.[100]
- 11~12월 - 말이 필요없는 충격적인 초겨울 한파로, 11월은 그 압도적으로 낮은 1912년 11월보다도 훨씬 압도적으로 낮았을 가능성이 크며, 12월은 1944년 12월의 심화판으로 지속성이 큰 한파였음을 보여준다. 나가사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하이 등지에서도 이해 11~12월이 아예 압도적으로 낮은 것을 보아 1850년 11월과 함께 19세기~현재까지 최악으로 추웠던 11월이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파/대한민국/19세기 문서 참조. 일단 11월 하순에 한기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해보자면,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는 11월 26일에 -12.1℃를 기록했고, 삿포로에서는 11월 27일에 -15.5℃를 기록했는데, 이는 해당 지역들의 기록 중 유일하게 11월에 압도적으로 낮은 기온이다. 당연히 이보다 낮기는 커녕 비슷한 기록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 11월 하순부터 상상을 넘어서는 한파가 덮친 1891년, 1892년 11월보다도 더한 수준이다. 그 외에도 1884년 당시 관측이 시행되었던 일본 지역들은 전부 1884년 11월 하순에 영하를 기록하지 않은 지역이 없으며, 11월 역대 월평균 기온 중에 가장 낮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를 보아 서울에 -12℃ 이하의 추위가 찾아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한파의 지속성 또한 무지막지하게 길었던[101] 것으로 보인다. 한강 역시 11월에 결빙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수당연구원 블로그에 따르면 인천지역 11월 평균기온은 1.7°C, 12월은 -3.5°C이다. 실제로는 11월은 1~1.2°C 정도 12월은 -4 ~ 4.2°C 정도로 추정되는데 서울로 대입하면 각각 0도대 초반, 영하 5도대 초중반으로 추정된다.[102]
3.5.2.5. 1885년(고종 22년)
1885년은 비공식 자료이기는 하나, 한반도 기상학의 역사를 다루는 한수당연구원 블로그에 따르면 이해 한반도는 8월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이상 저온이 길게 이어져서 결국 역대 순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낮은 연평균 기온이 나왔다고 한다.- 부산 기준으로[103] 겨울에서 초봄인 1~3월은 각각 1.4℃, 1.9℃[104], 6.0℃[105]로 기록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평년보다 상당히 낮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이후, 4월의 이상 저온은 더욱 맹렬해져 4월 평균 기온 10.8℃를 기록한다. 이는 최악의 4월 이상 저온으로 유명한 1931년 4월의 11.2℃보다도 낮은 수치이다. 공식 기상 관측 이래 1885년 4월보다 4월 평균 기온이 낮았던 해는 1936년 4월(10.5℃)이 유일하다.[106] 기온은 늦봄인 5월이 되어서도 쉽게 오르지 못해 역대 최저 9위인 월평균 기온 15.6℃에 머물렀다. 결국 봄 전체(3~5월) 평균 기온이 10.8℃로 산출되어 1917년 봄과 함께 역대 2번째로 추운 봄[107]이 되었다. 여름이 되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심화되었는데, 6월 평균 기온도 19.2℃로 평년보다 상당히 낮게 출발한 부산은 7월에 이상 저온이 극에 달하여 월평균 기온이 21.7℃에 머무는 이상 저온이 이어진다. 해당 수치는 이상 저온으로 유명한 1980년, 1993년, 2020년 7월보다도 낮다! 기록으로서는 역대 최저 6위에 해당하는 값이다.[108] 그나마 다행인 점은 8월에 들어 평년 기온을 되찾아 25.5℃를 기록했다. 6~7월 내내 이상 저온이 심했지만 8월 덕분에 여름 전체 평균 기온이 22.1℃로 산출, 기록적으로 낮지는 않았지만 당시 치고도 분명히 낮은 편이었다. 9월과 10월은 각각 21.3℃, 16.5℃로 평년과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11월이 되자 이상 저온은 다시 심화되어 월평균 기온 8.8℃를 기록, 11월 평균 기온 역대 최저 8위에 해당하는 추운 늦가을을 보내게 된다. 12월은 3.8℃로 평년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해서 1885년 부산의 연평균 기온은 12.7℃로, 만약 이것이 공식 기록이라면 1917년, 1936년, 1947년 다음으로 역대 최저 4위에 해당하는 값이 나오게 된다.[109][110]
3.5.2.6. 1888년(고종 25년)
- 4월 상순, 5월 상순, 9월 상순 - 특이하게도 한 달 내내 매우 낮은 기온이 지속되는 경우는 없었지만 산발적으로 심각한 이상 저온이 발생했던 해였다. 우선 4월 상순의 기록을 보면, 4월 2일 인천의 최저 기온이 -1.8℃를 기록하고 낮 최고 기온도 5.3℃에 머무는 등 기록적으로 추웠다. 5월 상순에는 인천 최저 기온이 5월 2일 5.8℃, 5월 3일 6.9℃, 5월 4일 6.2℃, 5월 5일 4.3℃까지 떨어지는 추운 날씨가 이어졌다. 한편, 폭염/사례 문서에서 볼 수 있듯 1888년 여름은 엄청나게 더웠는데 9월 상순에는 갑작스레 쌀쌀해져 인천의 최저 기온이 9월 6일 13.9℃, 9월 8일 13.8℃, 9월 9일 14.1℃를 기록하는 등, 공식 기록이라면 9월 상순 최저 기온 역대 3~4위 안에 드는 쌀쌀한 날씨가 하루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고종실록에 의하면 양력 9월 24일 서울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다만 4월과 5월이 월평균 기온이 당시 기준으로 평년보다 꽤 높았던 것으로 보아하니 중하순은 전반적으로 강한 고온이었던 모양이다.
3.5.3. 1890년대
일 최저기온과 최고기온은 인천, 부산의 해관기상관측자료를, 월 평균기온은 한수당연구원 블로그 자료를 참고했다. 해관자료의 일 최저기온과 최고기온을 통해 추정한 월 평균기온은 한수당연구원에 기록된 월 평균기온보다 05~0.7℃ 정도 낮다고 생각되며 이를 통해 인천과 부산의 월 평균기온을, 인천과 서울의 기온 차이를 계산해 서울의 일최저기온, 일최고기온, 월평균기온을 추정하였다.
1890년대도 1910년대 처럼 봄철 저온현상이 잦았다.[111]
3.5.3.1. 1891년(고종 28년)
- 7~8월 - 이 블로그의 글 내용 중, '여름철 기온에는 민감하지 않다가'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울 국립도서관에 있는 책에 의하면 1891년 7~8월 모두 월평균 기온이 22.8℃였다고 한다. 한수당연구원 기준 인천의 7~8월 평균기온은 23.2℃, 23.8℃(실질 22.5℃, 23.1℃)였다. 물론 이 당시는 아직 한반도에서 공식 기상 관측이 진행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비공식 기록이다. 그리고 미칠듯이 쌀쌀했던 그 해 여름철이 지나고, 11~12월이 되자 미칠듯이 추운 날씨가 찾아온다. 한파/대한민국/19세기 문서 참조.
- 11월 27일 - 인천 일 최저기온 -10.3 ℃, 서울(비공식) 일 최저기온 -13.5℃. 이는 공식 기록이었으면 인천은 11월 역대 최저 3위, 서울은 11월 역대 최저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3.5.3.2. 1892년(고종 29년)
3월 이상 저온이 매우 심했던 해이다. 서울과 인천의 3월 평균기온이 0℃ 내외로 1936년, 1957년 3월과 비슷하다. 기온 양상도 1957년 3월과 매우 비슷하다.[112]- 3~5월 - 이해는 겨울도 꽤나 춥더니 봄이 되자 내내 이상 저온이 이어졌다. 비공식적으로 인천의 3월 평균 기온 0.5℃, 4월 평균 기온 9.5℃, 5월 평균 기온 14.9℃를 기록했다.[113] 이는 1915년 3월과 같으며 역대 최저 5위이다. 이보다 낮은 3월 평균 기온을 기록했던 해는 1916년(0.2℃), 1936년(-0.1℃), 1957년(0.0℃), 1970년(0.1℃) 뿐이다. 기상자료개방포털 해관기상관측자료를 보면 인천은 1892년 3월 한 달 중 25일 동안이나 일 최저 기온이 영하권으로 도배되었을 정도로 꽃샘추위가 심했다. 이는 역대급 이상 저온을 보였던 1916년 3월, 1970년 3월과 비슷한 수치이다. 특히 3월 14일에도 -9.0℃를 기록하는 등 3월 중순 치고는 기록적인 추위가 찾아온 것도 특징. 부산의 경우도 3월 추위가 심해서 월평균 기온 5.6℃로 1915년, 1917년, 1933년 3월과 함께 역대 최저 6위에 해당하는 이상 저온을 보였다. 4월이 되어도 쌀쌀한 날씨는 이어져서 4월 1일 인천의 최저 기온이 -0.5℃를 기록하고 4월 23일 전까지 아침 최저 기온이 10℃ 이상으로 오르지 못했다. 5월에 들어서는 오히려 이상 저온이 심해져서 인천 기준 최저 기온이 5월 2일과 5월 3일 5.6℃[114], 5월 12일 8.4℃, 5월 17일 9.5℃, 5월 20일 8.4℃, 5월 21일 7.0℃ 등 지속적으로 낮은 기온을 기록했다. 특히 5월 21일의 최저 기온 7.0℃는 인천의 역대 공식 5월 하순 최저 기온인 1908년 5월 21일의 8.0℃를 아득히 밑도는 역대급 기록이다. 이상 저온은 6월에 들어서면서 다행히 조금씩 사라졌다.
3.5.3.3. 1893년(고종 30년)
역대급 라니냐가 발생해서 저온 현상에 영향을 받은 해이다.- 1월 - 인천 월 평균기온 -5.5°C[115] 일 최저기온 1월 1일 -14.2°C, 1월 14일 -13.6°C, 1월 15~16일 -13.0°C, 1월 17일 -14.5°C, 1월 23~24일 -12.8°C이며 일 최저기온이 -10°C 이하인 날이 17일에 달했다. 또한 최고기온도 1월 14일 -9.2°C, 1월 16일 -9.3°C였다. 다만 1월 8일~10일에는 이상 고온이 찾아와서 최저 기온이 영상이었다.
- 2월 - 인천 월 평균기온 -3.5°C[116] 특히 2월 중순에 엄청난 한파가 찾아와서 2월 11일 -12.6°C, 2월 12일 -15.5°C, 2월 13일 -13.5°C, 2월 14일 -13.2°C, 2월 17일 -14.5°C를 기록했다. 다만 2월 17일에는 기온이 큰 폭으로 올라 낮에는 5.8°C를 기록해 일교차가 20°C 이상 벌어졌고 1893년 2월 최고기온 극값을 기록했다.
- 5~6월 - 인천의 월평균 기온이 5월 14.7℃, 6월 18.9℃였다. 특히 5월 말부터 한기 남하로 인한 여파로 5월 27일 인천해관에서 최저 9.0℃, 31일 8.8℃를 관측하였다. 이를 볼때 서울에는 최소 6~7℃까지 내려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뜬금없이 당시 정식 관측 중이던 서일본 지역이 그 여파가 더 강했는데, 6월 1일 후쿠오카에서 4.3℃[117]의 기온이 관측되었고, 히로시마에서도 같은날 6.6℃로 잡혔으며, 나가사키에선 10.8℃[118]로 잡혔다. 번외로 도쿄에선 10.3℃에 불과했다.
3.5.3.4. 1895년(고종 32년)
- 3월 - 1894년 여름이 더워서 이 영향으로 12월까지 따뜻했으나[119] 1895년 1~2월에 극심한 한파가 이어진 영향이 남아있던 것인지 봄에도 이상 저온의 형태로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인천의 3월 최저 기온이 한 달 중 무려 21일 동안이나 영하로 도배되어 있다. 이는 최악의 3월 이상 저온을 보인 1936년 3월의 26일, 1916년 3월의 25일, 1970년 3월의 25일보다 약간 적은 수치이다. 4월에는 저온은 누그러져서 평년이거나 약간 높았지만(한수당연구원 기준 인천 10.8°C, 실제로는 10.1도 정도로 보인다. 서울은 11°C 전후로 추정.[120]) 뚜렷한 고온은 없다 보니 4월 27일까지는 하루도 최저 기온이 10℃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121] 월평균 기온은 한수당연구원 블로그 기준 3.1℃이며 이 자료가 상대적으로 높게 기록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면 3월은 2℃대 중반, 서울로 대입할 시 3월은 3℃ 된다.[122] 그러나 부산은 결측되었다.
- 9월 - 9월 상순에도 뜬금없는 초이상 저온이 있었다. 인천은 1895년 9월 8일 최저 기온이 12.0℃까지 떨어졌다. 이는 1904년에 시작된 인천의 공식 기상 관측 사상 9월 상순 역대 최저 기온인 1932년 9월 6일의 13.1℃보다도 무려 1℃ 이상이나 낮은 값이다![125] 그 다음 날인 9월 9~10일에도 각각 14.5℃를 기록하는 등 이상 저온은 며칠 더 이어졌다. 인천의 9월 평균 기온 역시 19°C대 후반에 그쳤다.[126]
3.5.3.5. 1897년(고종 34년, 광무 원년)
- 4월 - 비공식이지만 평년보다 높았던 1894 ~ 1986년 4월을 뒤로하고 인천의 4월 평균 기온이 9.3℃, 부산의 4월 평균 기온이 12.2℃이다.[127] 아마도 공식 기록이었으면 1931년과 1936년, 2010년에 맞먹는, 어쩌면 1936년보다 더 낮을 수도 있는 순위권으로 추운 4월이었을 듯한 역대급 초이상 저온을 보였다. 이해 겨울에도 유난히 심한 혹한이 기승을 부리며 추웠는데 아마 연초의 강한 한파가 봄까지 이상 저온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정도냐면 인천은 1897년 4월 한 달 내내 단 하루도 최저 기온이 두 자릿수는 커녕 9℃ 이상조차 올라가지 못했다. 한 달 중 가장 높은 최저 기온이 4월 13일의 8.5℃에 불과했다(...). 참고로 20세기에서 가장 심각한 4월 이상 저온을 보였던 1931년 4월, 1936년 4월조차 1931년 4월 27일(10.2℃), 1936년 4월 21일(10.2℃) 등 10℃를 넘은 날이 하루는 존재한다. 서울의 경우도 21세기 이상 저온이 심했던 2011년, 2020년조차 한 달 중 하루는 10℃를 넘었다. 게다가 1897년 4월 21일에 최저 기온이 2.5℃까지 하락했는데 이것이 공식 기온에 포함된다면 기존의 공식 4월 하순 역대 최저 기온인 1905년 4월 22일의 3.0℃를 뛰어넘는 인천의 4월 하순 역대 최저 기온이 된다. 인천은 5월 4일이 되어서야 아침 최저 기온이 10.0℃를 기록하며 최저 기온이 두 자릿수인 날이 드디어 나타났다.[128]
3.5.3.6. 1898년(고종 35년, 광무 2년)
기온 양상이 1916년과 매우 비슷하게 1~2월(특히 1월)은 고온 현상이 심했으나 3~7월에는 저온 현상이 심했다. 1,3,7,8월은 1916년과 비슷하고 2,5월은 1916년보다 살짝 높고 4,6월은 1916년보다 살짝 낮았으나 전반적으로 대동소이했다.- 3월 - 1898년 1~2월은 현대 기준으로도 이상 고온에 속할 정도로 따뜻한 겨울이었으나(자세한 내용은 이상 고온/사례 문서 참조), 3월에 들어선 이후 완전히 기세가 뒤바뀌어 봄과 초여름 내내 멈추지 않고 이상 저온이 심각했다. 3월부터 살펴보면, 인천은 1898년 3월 2일 -10.0℃를 기록했다. 1월과 2월에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10℃의 날씨가 3월이 되어서야 뜬금없이 나타난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추위는 계속되어 3월 10일에도 -7.0℃를 기록하는 등 3월 내내 전반적으로 매우 추웠다.[129][130]
- 4월 - 4월에도 작년 4월을 뺨치는 초이상 저온이 지속되었는데, 작년과 비슷하게 인천은 한 달 내내 아침 최저 기온이 하루도 10℃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했다. 인천의 월 평균기온 9.4°C, 최저기온 평균 4.7°C로 지난해와 비슷했다.
- 5월 일부 - 5월 5일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11.0℃를 기록하며 두 자릿수로 오른다. 5월에는 이상 저온의 강도가 조금 덜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상당히 추웠으며, 5월 18일에 6.5℃를 기록하고 5월 23~28일까지 10~11℃ 사이의 다소 쌀쌀한 날씨가 이어졌다.
- 6월 - 6월의 기록이 가장 충격적인데, 인천의 아침 최저 기온이 6월 8일 7.5℃를 기록하더니 6월 9일에는 7.0℃까지 떨어졌다. 심지어 6월 9일에는 낮 최고 기온조차 17.8℃에 머물렀다. 이는 인천 지역의 1904년 공식 기상 관측 이래 6월 역대 최저 기온인 1921년 6월 2일의 8.7℃를 가뿐하게 밑도는 기록이다. 상순만 그런 것이 아니라 6월 중하순 내내 쌀쌀한 날씨가 이어져서 6월 15일에도 10.5℃를 기록하고 6월 26일과 6월 27일에 11.0℃를 기록한다. 즉 6월은 한 달 내내 기존의 공식 역대 최저 기온 기록을 깨거나[131] 비슷한 추운 날씨가 지속된 것인데 이 정도면 사실상 여름의 실종이라고 표현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 7월 일부 - 7월에도 최저 기온이 높은 날들이 있어서 월 전체가 이상 저온이라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한낮에 시원한 날씨가 이어져 한 달 내내 최고 기온이 29.4℃에 머무는 등 7월임에도 한낮 더위가 아예 사라진 날씨를 보였다. 8월도 잦은 강수 기록으로 인해 한 달 전체에서 낮 최고 기온이 고작 33.6℃에 불과했다.[132] 다만 8월의 최저 기온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관계로 인천에서 최저 기온 20℃ 이하를 기록한 날은 하루도 없었다.
- 가을철 일부 - 9월은 9월 13~14일이 최고 20℃/최저 14~15℃ 정도로 조금 낮았지만 나머지는 거의 그맘때 기온이어서 크게 이상 저온이 아니었다. 하지만 10월이 되자마자 갑자기 기온이 급강하하는데, 10월 2일 인천의 최저 기온이 7.0℃를 기록했다. 전날인 10월 1일 최고 기온도 17.2℃였던 것을 보면 한기가 갑자기 남하한 모양이다. 이후 10월 상순부터 최저 기온이 점점 한 자릿수를 기록하는 등 이상 저온이 약하게 이어졌다. 10월 중순에는 그맘때 기온이었지만 하순에도 그 기온을 유지하며 평년보다 높았으나 이후 10월 26일부터 급락하여 최저 기온 한 자릿수에 꽤 쌀쌀한 날씨가 이어지며 약한 이상 저온을 보였다. 이후 11월까지 이상 저온은 딱히 없다가 11월 27~28일에 최저 기온이 낮아지며 11월 27일 최고 기온 0.0℃, 11월 28일에는 최저 기온 -6.0℃를 기록했다. 하지만 12월에는 날씨가 곧바로 풀려 동짓날 반짝 한파(-9.0℃)를 제외하고는 따뜻한 편에 속했다.
3.5.3.7. 1899년(고종 36년, 광무 3년)
전반적으로 따뜻한 해였지만, 7~8월이 그리 덥지 않았으며 10월에는 유의미한 저온을 보였다.
- 10월 - 한수당연구원 기준 인천 월 평균기온 12.9℃, 특히 일 최저기온 평균은 8.15°C로 역대 최저 4위이다. 10월 16일에 2.0°C까지 떨어지고 낮에도 8.9°C에 불과해 1999년 10월 16일, 2021년 10월 17일과 비슷한 수준의 초이상 저온이 찾아왔다. 블로그에 기재된 기온이 실제보다 0.5~0.7°C 높은것을 감안하면 월평균 기온이 당시 기준으로 2도 정도 낮은 편이다.
3.6. 20세기[133]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대한민국/20세기 문서 참고하십시오.3.7. 21세기
자세한 내용은 이상 저온/대한민국/21세기 문서 참고하십시오.[1] 본명 한상복, 1940~2023.[2] 다만 해당 블로그에 기재된 월평균 기온의 경우 산출 방식이 현대와 달라서 현대의 방식으로 계산된 월평균 기온보다 0.5~1℃ 정도 높게 적혀있는데,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당시에는 오전 9시, 오후 3시, 오후 9시로 일 3회 측정에 대한 평균치가 바로 일평균 기온을 산출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에는 오전 3시, 오전 6시, 오전 9시, 오후 12시, 오후 3시, 오후 6시, 오후 9시, 오전 0시로 일 8회에 걸쳐 측정된 시간대별 기온을 합산하여 일평균 기온을 산출해낸다. 하루 중 기온이 대체적으로 가장 낮은 시간은 늦은 밤~새벽 사이인 오전 0~9시 사이인데, 19세기 일평균 기온 산출 과정에서는 오전 0~9시 사이(0시, 3시, 6시)를 모두 빼먹었으니 당연히 현대와 같은 산출 방식보다는 수학적으로 높게 산출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따라 월평균 기온도 실제보다 다소 높게 계산될 수밖에 없는 방식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3] 원문에는 서울로 번역되었는데, 고구려의 서울이므로 당시 수도였던 국내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곳의 현 위치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일대. 북한 만포시와 바로 마주볼만큼 북한에서 아주 가까운 곳이다.[4] 이하 신라 왕들의 기록 모두 삼국유사에 기록된 것이다.[5] 서리가 나무나 풀 등의 물체에 들러붙어서 얼어붙은 것[6] 이 시기에는 현대라도 기상학적 가을이 시작되고 북쪽에서 찬 바람이 내려와 더운 기운이 식어서 쌀쌀해진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나, 여전히 나뭇잎이 많고 물이 어는 현상은 당연히 어림도 없는 시기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얼음이 얼었다는 기록이 튀어나왔으니,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10월을 넘어가기도 전에 얼음이 보였다는 것일까? 참고로 기상 관측 사상 9월 하순에 가장 낮은 최저 기온을 기록한 1928년 9월 26일의 경우, 서울 최저 기온이 3.2℃로 당시조차도 얼음이 얼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연실색할 상황이다.[7] 실내의 공기 중 수증기가 승화하여 유리창에 얼어붙어 만들어지는 서리[8] 현재의 대전과 충청남도 공주, 논산에 걸쳐 있는 산이다.[9] 물론 이 당시가 정말 여름인데도 가을과 같은 날씨를 보였다는 것인지 단순히 비유적 표현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한여름에 날씨가 평년보다 상당히 시원했다는 막연한 추측만 가능할 뿐.[10] 現 서울[11] 現 충청남도 금산[12] 現 함경남도 영흥[13] 現 대구광역시 군위[14] 現 충청북도 옥천[15] 現 북한 강원도 이천[16] 現 북한 강원도 안변[17] 現 북한 강원도 법동[18] 現 강원도 고성. 현재 간성이 있던 지역은 남한 고성과 북한 고성으로 나뉘어져 있다.[19] 現 강원도 고성 현내면[20] 現 경상북도 영주[21] 아예 닷새 동안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22] 죄수를 어느 한 곳에 계속 두게 하는 형벌이라고 한다.[23] 그리고 이해 11월에는 다른 의미로 해괴한 기록이 있으니, 음력 9월 30일(양력 11월 8일)에 살구나무에 꽃이 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24] 1505년 2월 22일(양력 4월 6일)자 기록[25] 서울특별시/기후 문서에 작성된 서울의 일별 역대 최저 기온 극값을 확인해보면 상반기는 4월 20일까지 영하로 뒤덮여 있는데, 만약 17세기로 범위를 넓힌다면 이 영하의 기온이 4월 20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4월 전체를 뒤덮는 것은 물론 5월까지 영하로 뒤덮일 것으로 의심되며, 강원도나 충청도, 경상도 내륙 지역으로 눈을 돌리면 7~8월에도 영하로 추정되는 기온이 기록되었을 수도 있다. 그만큼 두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매우 추웠던 시기.[26] 現 경기도 양주[27] 現 북한 강원도 통천[28] 이 기록이 믿기지 않을 사람들을 위해 적자면, 당시에는 '기군망상죄'라는 죄목이 있어서 어떤 일을 거짓으로 보고해서 왕을 속인 것이 들통나면 국왕의 진노를 사서 몸과 목이 분리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따라서 제정신인 신하라면 거짓 보고를 올리기란 꿈도 못 꿀 상황. 게다가 이 결빙 사건이 사실인지 해당 지역에 사람을 보내 확인했다고 하고, 이후로 거짓이었다는 말도 없는 것을 볼 때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29] 동해는 최대 수심이 3,600m에 달할 정도로 깊어서, 겨울에 한파가 찾아와도 서해보다 수온이 높다. 따라서 강릉처럼 동해안에 접한 지역이 -25℃ 이하로 내려갈 정도의 초강력 한파가 몰아지치 않는 이상, 동해는 결빙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해에는 1월도 아닌 4월에 동해가 결빙되었다고 하니, 4월에 강릉의 최저 기온이 과연 몇 ℃까지 내려갔을까? 게다가 4월이 이 정도였다면, 1월에는 최저 기온이 얼마나 내려갔을지 가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4월에 동해 앞바다가 사흘이나 얼어붙었다는 기록을 참조하면, 이해 1월에는 강릉 -30℃ 이하, 서울 -35℃ 이하의 비현실적인 한파가 찾아왔을 가능성도 존재한다!!![30] 사실 4월에 눈이 내린 경우는 현대에도 간혹 있는 일이지만, 4월 중순에 서울에서 눈이 쌓인 사례로는 거의 없는 기록이며 후술할 1911년의 사례가 있다. 당시 17세기임을 감안하면 그리 놀랍지는 않으나, 앞의 각주에 설명한대로 4월에 동해가 얼어붙을 정도의 한파였고 서울에서는 적설까지 기록되었다.[31] 양력 6월 28일자 기록.[32] 現 광주광역시[33] 현대에는 2010년 4월 14일에 광주에서 눈이 내려 당일 치러질 예정이었던 야구 경기가 취소되었다고 한다. 17세기에는 이러한 늦장 이상 저온이 한 달 뒤에도 나타날 정도였던걸로 보인다. 이때 당시 광주의 최고기온이 9.6℃에 불과했고 서울도 6.4℃에 불과했기에, 단순하게 대입한다면 5월 5일에 광주 최고기온이 9.6℃, 서울이 6.4℃에 불과한 셈이 된다. 이미 이 정도만 해도 1917년 5월 초순의 저온보다 더 심각한 셈.[34] 두 기록 모두 1659년 3월 5일(양력 3월 27일)자 기록이다.[35] 1659년 3월 8일(양력 3월 30일)자 기록[36] 1659년 [[3월 25일][37] 1659년 3월 26일(양력 4월 17일)자 기록[38] 1659년 3월 29일(양력 4월 20일)자 기록[39] 1659년 윤3월 2일(양력 4월 22일)자 기록[40] 1659년 윤3월 4일(양력 4월 24일)자 기록[41] 1659년 윤3월 29일(양력 5월 19일)자 기록[42] 1659년 4월 2일(양력 5월 22일)자 기록[43] 現 평안북도 초산[44] 現 충청북도 단양 영춘면 일대이다.[45] 現 전라북도 남원 운봉읍 일대이다.[46] 함경도 경성(現 함경북도 경성)은 개마고원 등 북한의 추위로 유명한 지역들에 비하면 많이 온화한 기후를 가지는 지역이다.[47]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서북 지역에 있었던 군으로, 현재의 영주 풍기읍, 봉현면, 안정면과 예천 은풍면, 효자면이 속한 지역이다.[48] 이 지역이 상당한 일교차를 자랑하는 지역이기에 9월 하순에 눈이 내리고 새들이 얼어죽었다면 영하가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1969년 기상 관측 시작 이래로 9월 하순에서 가장 낮은 기온은 6.2℃.[49] 現 경상북도 영덕[50] 현대 강계의 8월 평균 기온은 서울의 9월 날씨와 거의 일치한다. 서울에서 9월 하순에 눈이 날리고 서리가 발생한 것과도 비슷한 사례이다.[51] 물론 진주는 내륙이라 현대에도 일교차가 무지막지하게 커서 최저 기온은 꽤 낮은 경우가 많다. 2021년에는 10월 18일에 영하를 기록했을 정도다. 그러니 하루 중 가장 기온이 낮을 시간인 밤과 새벽에 눈에 내렸다고 하면 그나마 아귀가 들어맞을 것으로 보인지만, 그렇다 쳐도 강원도 산간도 아니고 8월에 따뜻한 경상남도 지역에서 적설이 쌓일 정도의 눈이 내렸다.[52] 1708년 3월 22일(양력 4월 12일)자 기록[53] 1709년 2월 26일(양력 4월 5일)자 기록[54] 물론 4월에 적설이 기록될 정도로 눈이 내렸다는 기록은 있으나, 며칠 연속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55] 1972년 4월 1일 -4.3℃[56] 1743년 3월 29일(양력 4월 23일)자 기록[57] 기록에도 이렇게 적혀 있다.[58] 1780년 10월 27일(양력 11월 23일)자 기록[59] 그 뒤에도 해를 넘긴 1781년 겨울은 2월 하순에도 한겨울 추위처럼 추웠다고 언급될 정도였다. 공교롭게 100년 뒤인 1880년에도 11월부터 추위가 시작되고 1881년 3월까지 추위가 풀리지 않았다고 하며, 200년 뒤인 1980년에는 11월에는 이상 고온이었지만 12월에 추위가 시작되었고 역시 1981년 2월 하순~3월 상순까지 추웠다.[60] 1783년 12월 7일(양력 12월 30일)자 기록. 국왕 정조가 직접 "작금의 날씨가 갑자기 독하게 추워졌다\"라고 언급한다. 작금이라는 표현을 보아 하루~이틀 전부터 날씨가 크게 뒤바뀐 듯.[61] 1784년 2월 27일(양력 3월 18일)자 기록[62] 200년 뒤인 1984년 3월에도 때늦은 추위로 인해 서울 월평균 기온이 2.5℃에 그쳤고, 마지막으로 3월 평균 기온 2℃대를 기록하였다.[63] 1796년 3월 12일(양력 4월 19일)자 기록[64] 되짚어보자면 4월 중순이 다 지나가도록 꽃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여기서 이미 벚꽃이 제일 늦게 피었다는 1936년 4월보다도 더 심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는 평년 기준으로 개나리와 진달래라도 3월 하순~4월 상순에 피니... 괜히 사관이 기록할 만한 일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신하가 하는 말이 "원래 이 시기가 자주 추운데 꽃이 안 피는게 이상한 일은 아니죠\"라고 대답하기까지 한다. 이어서 "북악산을 보니깐 새하얀 눈빛도 나던데요?\"라고 하자 "그래도 이 시기까지 눈 내리는 건 정상이 아니지"라고 하는 격이다.[65] 1796년 3월 26일(양력 5월 3일)자 기록[66] 공교롭게 200년 뒤인 1996년 4월에도 하순 일부를 빼고는 전부 이상 고온이 전멸하다시피 하여 월평균 기온이 10.2℃에 불과하였다. 물론 1996년 4월이 1796년 4월보다 월평균 기온이 낮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만약 1796년 4월 기온이 1996년과 같았다면 당시로써는 평년 수준인 것이다.[67] 이로부터 몇 개월 뒤인 10월에는 월 강수량이 126mm, 11월 98mm, 12월 47mm로 시기에 걸맞지 않은 폭우가 내린 것으로 추정되어 1796년 한 해는 상당히 특이한 양상을 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8] 1871~1900년 당시 10월 평균 기온은 18.1℃이며, 1991~2020년 기준으로는 19.7℃이다.[69] 현대의 서울로 치면 다소 이상 고온이지만 상하이는 북위 31°에 해양성 기후라 기온도 높고 늦게 식으니 이 정도면 매우 심한 이상 저온이다.[70] 1991~2020년 기준으로 2℃ 정도 낮다.[71] 그리고 베이징, 상하이 쪽을 보면 1~2월도 한파가 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남겨진 기록으로 보면 이후 등장할 1~2월 한파와 3월 이상 저온을 동시에 띈 해들의 조상격이다.[72] 3월과 5월에 비하면 양반인 수준일 뿐, 4월도 그렇게 높다고 보기 힘들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4월 평균 기온이 각각 13.3℃와 14.1℃로, 19세기 후반 4월 평년과는 거의 비슷하나, 1991~2020년 기준으로는 1~2℃ 가량 낮다.[73] 1991~2020년 5월 평년 기준으로 3.8℃나 낮다. 그러나 1863년 5월 상하이의 월평균 기온이 고작 16.9℃(1991~2020년 기준 평년보다 4.0℃나 낮음)에 그쳐 역대 최하위였는데, 이때 베이징은 결측 상태인지라 1860년 5월이 진짜 역대 최하위인지는 불명.[74] 상하이의 1991~2020년 5월 평년 기준[75] 1991~2020년 기준 2.6℃ 낮다.[76] 1991~2020년 기준 3.6℃ 정도 낮다.[77] 1991~2020년 기준 3℃ 가량 낮다.[78] 1991~2020년 기준 3.6℃ 정도 낮다.[79] 1877년 10월~1878년 2월과 같은 유형이라 생각하면 된다. 차이점은 1861년 1월은 베이징의 월평균 기온이 역대 최하위이고, 1878년 1월은 상하이의 월평균 기온이 역대 최하위다.[80] 덧붙여 1860년 여름은 베이징, 상하이 둘 다 그렇게 덥지도 않았기에 한반도도 마찬가지로 여름이 그리 덥지 않았을 것이므로, 한파의 기세가 상당한 1월(베이징과 상하이의 월평균 기온을 보면 서울은 대략 -6~-7℃로 추정)과 그렇게 따뜻할 것 같지 않은 2월, 상술했듯이 추운 봄철, 덥지도 않은 여름철, 급격히 추워지는 가을철까지 사계절 모두 골고루 이어진 이상 저온 때문에 1860년의 연평균 기온은 심각하게 낮았을 것으로 추정되기까지 한다. 결국 이해에 이상 저온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달은 6월과 9월밖에 없었다.[81] 이 정도는 서울로 쳐도 이상 저온에 속한다. 그러나 당시 기준로 보면 다소 높기는 하다.[82] 예시로, 1892년 3월 서울이 0℃대 초반(추정)일 때 상하이는 5.8℃였고, 1898년 3월 서울이 0℃대 후반(추정)일 때 상하이는 6.7℃였으며, 1936년 3월 서울이 -0.3℃일 때 상하이는 6.1℃였고, 1970년 3월 서울이 0.4℃일 때 상하이는 6.2℃였다.[83] 현대 상하이는 3월의 월평균 기온 평년값이 9℃대이며 1월에 평년 수준이거나 조금 낮으면 월평균 기온 4℃대가 기록되기도 한다. 서울로 치면 1월 평균 기온 -2~-3℃에 대응된다. 이는 다시 말해, 1월 수준의 월평균 기온이 3월에 기록된 셈이다.[84] 아쉽게도 동시대에 상하이와 함께 기상 관측이 시행되었던 베이징은 결측으로 인해 1864년의 기록이 공백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동시기 베이징의 월평균 기온은 정확하게 알 수 없다.[85] 그리고, 1864년 1월과 2월도 한파가 무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도 상하이의 월평균 기온이 1월에 1.1℃, 2월에 2.3℃를 기록했는데, 서울로 치면 1월은 -7~-8℃, 2월은 -5~-6℃에 대응된다. 따라서 상하이의 공식 기온 자료에 근거해 보면 1864년 서울은 월평균 기온이 1월 -7~-8℃, 2월 -5~-6℃, 3월 0~-1℃라는 미친 기온을 기록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정도면 어지간한 일제강점기의 한파와 이상 저온마저도 울고 갈 수준이며, 특히 2월과 3월의 월평균 기온은 공식적인 기상 관측 이래 역대 최저치보다 약간 더 낮을 가능성도 높아보인다.[86] 이날의 이상 저온은 꽤나 범위가 넓어서 서울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같은 날 일본 도쿄에서 뜬금없이 최저 기온이 8.4℃까지 내려갔기 때문. 참고로 현대 도쿄 사람들은 10월 중순에 최저 기온이 9℃로 떨어져도 춥다는 반응을 내보인 적이 있는데, 그때가 다름 아닌 2021년 10월 중순이었다.[87] 재미있게도 100년 뒤인 1977년 10월은 10월 평균 기온이 16.7℃로, 역대 3위에 드는 이상 고온을 기록하였다.[88] 그 뒤로도 한기가 멈추지 않고 남하해 11월, 12월, 이듬해인 1878년 1월, 2월 모두 강추위가 기록되는 진풍경이 계속되었다. 특히 1877~1878년 겨울은 한반도는 비교적 덜했지만 중국(특히 남부 지역)의 한파가 매우 기록적이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한파/사례 문서 참조. 10월은 그저 전조 현상에 불과했던 것이다.[89] 1877년 10월 하순에 도쿄에서 한기 남하가 이루어진 증거가 남아있으나, 한반도 날씨의 간접적인 증언을 해줄 나가사키는 당시 기상 관측이 시행되지 않았다. 주변 지역들인 가고시마 등은 아예 전쟁이 막 끝난 터라 분위기가 뒤숭숭하기도 했고. 그나마 도쿄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하코다테(1872년 시작)와 삿포로(1876년 시작)조차 1877년 당시의 기록이 아예 없으며, 네무로, 히로시마 등은 1879년에 시작했으니, 남은 기록이라곤 도쿄 뿐이다.[90] 1907년 10월 기상 관측 이후로 가장 낮은 기온이[91] 개화기 시기에는 2010년대 이후에 맞먹는 폭염도 있었지만 그만큼 한파도 매우 강했던 시기이다. 다만 서울만 비공식 관측이 이루어졌던 1887~1890년은 이상 고온이 심했다.[92] 1921년 6월 상순에 서울이 8~9 ℃를 연일 기록하였는데, 당시 나가사키 극값은 12.3 ℃.[93] 원래 나가사키에서 1월에 -4 ℃ 이하를 기록하면 서울은 최소 -16 ℃에 최대 -21 ℃ 정도로 강력한 추위에 속한다. 그런데 이 해는 12월에 -4 ℃에 준하는 기온을 기록했으니 12월 치고는 매우 추운 한파였을 듯하다.[94] 4월 1일 서울에서 최저 기온 -4.3℃, 최고 기온 5.5℃, 일평균 기온 0.0℃라는 한겨울급 이상 저온이 있었다.[95] 조선에서는 '노월(魯越)'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두음 법칙을 빼면 '로월'이 되어 본명과 상당히 비슷해진다.[96] 후술하겠지만 공식 기상 관측 이후 가을철 이상 저온 현상이 가장 심했다는 1912년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정말 유래없는 초강력 이상 저온이었다.[97] 최소 -17~-18℃ 이하의 강한 한파가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나가사키의 -4.1℃는 상당히 큰 한파로, 2016년 1월 24일(다만 이해는 유달리 제주도를 비롯한 남부 지방이 매우 기록적인 한파였다), 1917년 1월 8일 등이 그렇다. 이 두 한파 당시에 서울이 각각 최저 기온 -18.0℃, -20.4℃를 기록했음을 감안하면 서울도 1884년 1월에 한기 축의 중심이 아니었어도 최소 -16℃ 이하의 최저 기온을 기록했을 듯하다.[98] 1921년 6월 상순에 나가사키 12.3℃, 서울 8~9℃대의 한 자릿수 기온이 연일 관측된 것을 보면 이해 6월도 한 자릿수까지 내려간 것은 거의 자명해 보인다. 사실 이것보다 더 압도적인 이상 저온이 1882년에 있기는 하다.[99] 이미 나가사키에서 10월 한 자릿수라는 것 자체가 초강력 한파가 있었음을 보이는데, 10월 중순에 최악으로 추웠던 1924년, 1956년의 10월 20일의 나가사키 기온이 11℃대였음을 볼 때, 서울은 -3~-4℃ 이하의 경악스러운 수치를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서울이 1.3℃를 기록한 최근 사례인 2021년 10월 17일의 나가사키 기온(10월 18일 극점)은 12.6℃였다.[100] 1911년, 1926년, 1934년, 1947년과 엇비슷한 수준이다.[101] 11월 말에 내려온 한기가 12월 초순에 더 쎄지면서 계속 이어지다 물러난 정황도 있다. 이때 12월 초순에 기록됐을 최저기온이 어림잡아 -14℃~-16℃선이다. 최근 2022년 12월 초순의 한기 남하로 인해 사람들이 버티기 힘들어했는데, 1884년 11말12초는 이것과 비교도 안 되게 춥고 길었다. 한마디로 이 시절은 원래 강력한 한기+아직 추위에 덜 적응됨+강력한 바람-+패딩이 없음- 이 3박자에 의해 체감온도를 한없이 급감시켰을 것은 덤.[102] 11월은 한마디로 공식 최저인 1912년 보다도 크게 낮은것이다.[103] 해당 블로그에서는 부산 뿐만 아니라 1884~1903년간의 인천과 원산의 기록도 있으나, 1885년은 결측인 것인지 혹은 데이터가 유실된 것인지 아쉽게도 자료가 없다. 그리고 1887~1890년은 서울은 비공식 자료가 있지만 다른 지역들은 모두 결측되었다. 또한 해당 블로그의 자료는 실제 측정값보다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어서 적혀있는 기온보다 더 낮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기 바란다.[104] 역대 최저 13위[105] 역대 최저 11위[106] 다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해당 블로그의 월평균 기온이 해관기상관측자료를 통해 본 실제 기온보다 높게 나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로는 1936년 4월보다 약간 더 낮았을 가능성도 있다.[107] 1위는 1936년 봄으로 10.1℃였다. 여담으로 21세기에서 가장 추운 봄은 2010년이다.[108] 이보다 7월 평균 기온이 낮았던 해는 1931년, 1941년, 1954년, 1974년, 2003년 밖에 없다.[109] 게다가 저 블로그에 기재된 평균 기온이 실제보다 다소 높은 것을 감안하면 부산도 12.7℃가 아니라 12℃대 초반일 수도 있다.[110] 여담으로 1885년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옆 나라 일본에서도 이상 저온이 이어진 해였다. 일본은 대한민국보다도 이른 1875년부터 공식 기상 관측을 시작해서 이 당시인 19세기의 기온이 공식 자료로 남아있는데, 일본 기상청의 도쿄 1875~2020년 월평균 기온 자료를 보면 당시 일본은 한반도보다 이상 저온이 훨씬 심해서 1885년 연평균 기온이 13.1℃로 역대 최저 2위를 기록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역대 최저 1위가 바로 전년도인 1884년의 12.9℃이다. 즉 일본은 1884~1885년까지 2년 연속으로 부동의 연평균 기온 역대 최저 1, 2위 기록을 갈아치우는 엄청난 이상 저온이 계속된 것이다. 서울의 경우 연평균 기온 13℃ 정도는 평년보다 높은 것이지만, 대한민국보다 훨씬 온화해서 연평균 기온이 16.3℃인 도쿄 기준으로는 엄청난 이상 저온이다. 도쿄에서 21세기인 현대 기준으로 지난 20년간 가장 낮았던 연평균 기온인 2017년의 15.8℃와 비교해보면, 이 당시인 19세기에 얼마나 이상 저온이 심각했을지 체감이 될 것이다. 이를 서울로 대입하자면 연평균 기온이 12.5℃인 서울이 각각 9.1℃와 9.3℃라는 역대급 이상 저온을 기록한 셈. 1907년 서울 공식 기상 관측 이래 1년 전체가 이상 저온으로 점철되어 연평균 기온 최저 1위를 기록한 1947년이 9.6℃인데 이보다도 더 낮다는 뜻이다. 그런데 비교적 따뜻했다는 다른 지역들도 1884~1885년에 저 정도였다면 서울은 진짜로 연평균 기온 9.1~9.3℃를 찍었을 것 같다. 만약 더욱 심각하면 8℃대 후반으로 굴러떨어졌을 수도.[111] 차이점이라면 1910년대와 달리 봄철 고온현상도 잦았다.[112] 그러나 1957년은 4월 극초반까지 강한 저온이 이어지다가 이후로 대체로 포근한 날씨를 보였다는점에서 차이가 있다.[113] 다만 저 월평균 기온 기록 자체가 원래의 값보다 높게 측정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한파/대한민국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해관기상관측자료의 기온 자료를 통해 월평균 기온이 -7℃ 이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1900년 1월이 -6.1℃로 표시되어 있는 등의 예시가 있다. 따라서 실제로는 저 블로그에 적힌 수치보다 더 낮아 아마도 3월은 1936년이나 1970년 수준, 4월은 1915년, 1956년, 2013년 수준, 5월은 1908년, 1956년 수준이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즉 -0.1℃, 8.8℃, 14.2℃ 정도로 예측되며, 이를 서울로 대입할 경우 3월은 0℃대 초반, 4월은 9℃대 중후반, 5월은 15℃ 전후로 예측된다.[114] 공식 최저 기온이라고 가정하면 5월 상순 역대 최저 기온 4위에 해당하는 값이다.[115] 일 최저기온 평균 -8.5°C, 일 최고기온 평균 -1.7°C[116] 일 최저기온 평균 -8.0°C, 일 최고기온 평균 1.6°C[117] 참고로 1890년부터 2023년까지 집계된 6월 1일의 최저평균이 15.5℃이다. 7월과 9.5℃나 차이난다.[118] 참고로 이때 인천은 최저 13℃였다. 나가사키가 기온이 낮다 하여 서울인천이 무조건 그보다 낮다라는 전제에 의문이 드는 기록. 다만 여름철이면 그럴 수 있다.[119] 1939년, 1994년과 비슷했다.[120] 이렇게 되면 1924년,1945년,1955년,2020년과 비슷하다.[121] 대체로 평년수준의 날씨만 꾸준히 이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인천은 봄철에 기온이 서울보다는 낮음을 감안해야 한다.[122] 그렇지만 시대를 감안하면 2020,2022년 10월, 2019년 4월처럼 조금 낮은 정도에 그친다.[123] 한수당연구원 블로그가 실제보다 약간 높은값이 나오는걸 감안하여 실제론 14~14.2°C 이다.[124] 역시 한수당연구원 블로그가 실제보다 수치가 약간높게 나오는걸 감안하여 실제로 6월은 19°C 전후, 7월은 22.8 ~ 23°C[125] 차이점이라면 1932년은 7~8월 상순이 굉장히 더웠지만, 1895년 여름은 더운 시기가 있기는 했지만 심하게 덥지는 않았다는 것이다.[126] 한수당연구원 블로그에는 20.4°C 라고 나와있지만 실제는 약간 더 낮음을 감안해야 한다.[127] 이 자료도 한수당연구원 블로그가 출처인데, 앞서 언급했듯이 해당 블로그는 기상자료개방포털 해관기상관측자료에 기록된 기온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기록된 경향이 있다. 따라서 1897년 4월 평균 기온도 실제로는 이보다 낮아서 인천은 8℃대 중후반, 부산은 11℃대 중반을 나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맞다면 4월의 경우 서울이 인천보다 1℃ 정도 높으니 서울 역시 9℃대로 추정되는 상당히 낮은 기록이다. 1915년, 1944년, 1956년, 2010년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천의 일 최저기온 평균은 5.0°C이다.[128] 다만 이것도 당시에는 기온을 어림해서 0.5℃ 단위로 표기했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다. 오차 범위가 9.8~10.2℃ 사이이므로, 정확한 기온은 10.0℃보다 약간 낮을 수도 있다. 오차 범위를 고려해도 확실하게 100% 확률로 10℃를 넘는 날이 처음 등장한 것은 5월 6일 12.0℃를 기록하면서부터였다.[129] 이 사이트에 들어가서 1981~2010년 평균 값으로 1898년 3월을 확인해보면 시베리아 부분이 온통 보라색으로 칠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서울은 -2~-4℃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쳐진 모양인데, 공식 기상 관측 사상 가장 낮은 3월 평균을 기록한 1936년 3월만큼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1890년대가 1930년대보다 평년 기온이 높았는지는 미지수이므로 딱 잘라서 확언하기 어렵다. 한반도가 엄청난 이상 저온에 시달리며 세계 기준으로도 역대급 한파가 찾아온 1893년 1월이 1위이고 2월은 3위를 차지했다.[130] 이를 보아 서울은 1898년 1~3월은 1916년 1~3월과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1월은 0℃ 전후, 2월은 -0℃대 사이로 평년보다 크게 높았으나(실제로 위 사이트에 들어가서 검색하면 1981~2010년 기준 1월은 평년보다 높고, 2월은 살짝 낮다), 3월도 평년보다 한참 낮은 0.5~1℃ 내외로 추정된다. 다만 6년 전인 1892년보다는 조금 높다. 어쨌든 봄이 빨라지는 현대와는 정반대로 겨울이 길어졌다고 밖에 부를 수 없을 지경.[131] 공식 기상 관측 이래 6월 역대 최저 기온을 상순, 중순, 하순별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6월 상순: 1921년 6월 2일 8.7℃
6월 중순: 1926년 6월 15일 10.5℃
6월 하순: 1956년 6월 27일 12.4℃
1898년 6월은 혼자서 상순, 중순, 하순 모두 저 기록들을 가볍게 깨거나 비슷한 날씨가 있었으니, 당시 6월 이상 저온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132] 게다가 저 33.6℃ 기록도 반짝 더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기록된 날짜가 8월 29일이다. 8월 상순도 아니고 더위가 많이 풀릴 하순에 이 정도의 기온을 기록했다는 것은 정반대의 의미로 기록적이라고 할 수 있다.[133] 1900년은 20세기가 아니지만, 19세기에 넣으면 1900년대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더욱 부자연스러우니 20세기 문서에 정리하였다.
6월 상순: 1921년 6월 2일 8.7℃
6월 중순: 1926년 6월 15일 10.5℃
6월 하순: 1956년 6월 27일 12.4℃
1898년 6월은 혼자서 상순, 중순, 하순 모두 저 기록들을 가볍게 깨거나 비슷한 날씨가 있었으니, 당시 6월 이상 저온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132] 게다가 저 33.6℃ 기록도 반짝 더위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기록된 날짜가 8월 29일이다. 8월 상순도 아니고 더위가 많이 풀릴 하순에 이 정도의 기온을 기록했다는 것은 정반대의 의미로 기록적이라고 할 수 있다.[133] 1900년은 20세기가 아니지만, 19세기에 넣으면 1900년대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더욱 부자연스러우니 20세기 문서에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