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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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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경주김씨중앙종친회
경주김씨대종친회

1. 개요2. 역사3. 경주 김씨 종기4. 다른 본관과의 관계5. 분파6. 항렬자7. 인물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틀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수도였던 경상북도 경주시본관으로 하는 한국성씨. 삼국시대남북국시대에 존재했던 국가인 신라태봉의 왕성이다.[2]

2. 역사

경주 김씨의 시조는 신라의 추존왕 김알지이다. '김(金)'이라는 성씨는 그가 제4대 탈해 이사금 시절에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설화적 성격이 짙으므로 많은 학자들로부터 신뢰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신 실제로 김씨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는 첫 국왕은 제24대 진흥왕이다.[3] 한편 최초의 김씨 국왕은 제13대 미추 이사금이며, 제17대 내물 마립간 때에 김씨 왕조 지배의 기틀이 잡혔다.

신라인들은 (경주) 김씨의 시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로 여겼으며, 이는 《삼국사기》와 <김인문 묘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라고사(新羅古事)에 금궤(金櫃)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 신라인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後孫)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소호(少皥)는 ▨허(▨墟)하여 별빛을 나누고 시퍼런 바다를 뛰어 넘었으며, 금천(金天)은 …태조(太祖) 한왕(漢王)은 천년의 ▨을 열고, ▨성(▨聖)은 백곡(百谷)의 ▨에 임하셨다.
<김인문묘비>
또한 태조 성한왕이라는 인물이 <김인문묘비>와 <문무왕릉비>, <흥덕대왕비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며, 투후 김일제도 김씨 성과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학계에서는 태조 성한을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 김세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소수설로 최초의 김씨 임금인 미추 이사금을 지칭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신라가 경순왕을 끝으로 멸망하자 경주 김씨는 고려의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왕실과 달리 일반적인 귀족은 족보를 알 수 없었으며, 경주 김씨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서 후손들의 소목이 잊혔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병역 면제 등의 혜택을 타내기 위해 경순왕의 후손들에 대한 위조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순왕/가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경주 김씨 종기

파일:경주 김씨 종기.jpg

4. 다른 본관과의 관계

천년간 신라의 수도로 기능했던 월성은 이후 경주의 별칭으로 쓰였기 때문에[4], 경주 김씨는 월성 김씨(月城 金氏)라고 불리기도 하며 경주 김씨 인물의 본관이 가족관계등록부상에는 월성(月城)으로 나올 수 있다.[5] 월성 김씨는 경주 김씨와 같은 씨족으로 대우받으며 시조와 왕릉에 제사도 같이 올린다.[6] 이 때문에 합법적으로 동성동본결혼할 수 있었으며, 종친회와 가깝지 않는 이상 욕먹을 리도 없었다.

경주 김씨계에서 분적된 성씨로는 김녕 김씨(후 김해 김씨), 안동 김씨[7], 광산 김씨[8], 상산 김씨, 수원 김씨, 청도 김씨, 원주 김씨, 전주 김씨[9], 안동 권씨[10], 수성 최씨[11] 등이 있다. 이 성씨들의 인구를 다 합하면 약 600만 명이 넘는다. 또 경순왕고려에 항복 후 맞아들인 고려 태조의 딸들인 낙랑공주 왕씨 등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로는 경주 김씨 외에도 의성 김씨, 후 강릉 김씨, 언양 김씨, 삼척 김씨 등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본관을 바꾸어 분적한 가문 중에서 일부 후손들은 분적한 본관이 아닌 원래의 경주를 본관으로 칭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는 다음이 있다.
  1. 전주 김씨 ↔ 경주 김씨 평장사공파: 파조 김봉모(金鳳毛)[12]
    • 경주 김씨 월성부원군파(月城府院君派): 정안왕후의 아버지, 즉 정종(조선)의 장인 김천서(金天瑞)[13]
    • 경주 김씨 충선공파(忠宣公派): 김경손의 3남 김혼(金琿)[14]
      • 경주 김씨 병판공파(兵判公派): 김남보(金南寶)[15]
      • 경주 김씨 판삼사사공파(判三司事公派): 김남분(金南賁)
  2. 김녕 김씨

5. 분파

고려 말과 조선 시대로 접어들며 신라 김씨 일부 후손들이 신라 대보공 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경주(慶州)를 본관으로 하여 분파했으며, 대표적 파조들은 다음과 같다.
이 중 태사공파의 상촌공파가 가장 번창하였고, 그 다음은 장군공파의 계림군파, 영분공파의 수은공파 순이다. 돌림자 가운데 '학'이나 '관' 자가 들어가면 거의 다 계림군파고, '택' 자가 들어가면 상촌공파다.

6. 항렬자

다음은 각 분파의 항렬자를 표로 나타낸 것이다. 세(世)는 파조를 1세로 하여 계산한다. 분파가 워낙 많아서 통일된 대동항렬자는 없으며, 같은 분파더라도 문헌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항렬자가 이름에 쓰이는 위치는 앞 또는 뒤를 번갈아가며 쓰거나 아예 한쪽으로 고정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경주 김씨의 항렬자는 이 규칙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잦다.

7. 인물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한 이래 왕족이었던 경주 김씨들은 고려문벌귀족으로서 대우받았으며[30], 조선 시대에도 노론 벽파에 드는 등 신라 멸망 이후에도 몇백 년간 권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후에 세도정치를 시작하는 신 안동 김씨에게 축출당하기도 했다. 이 시대의 유명한 인물로는 정순왕후 김씨, 추사 김정희김홍집을 들 수 있다.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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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해 김씨, 밀양 박씨, 전주 이씨 다음으로 인구가 많으며, 김씨 중에서는 2위이다.[2] 다만, 궁예가 신라의 왕족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궁예 문서 참조.[3] 진흥왕 이전에는 김씨 가문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진흥왕 이전에도 혈족의 계보는 계속 이어져 왔지만, '김'(金)이라는 한자를 이름 앞에 붙이는 '성'으로서 사용한 것은 이때에 처음으로 검증된다는 것이다. 한자 사용이 유행하면서 한자 성씨를 쓴 것은 김씨뿐만 아니라 다른 성씨들도 마찬가지이다.[4] 다만, 경주 지역에 과거 월성군이라는 별도의 정치체가 34년간 있었다.[5] 이는 경주 이씨도 마찬가지이다.[6] 이렇게 같은 가문이 다른 이름으로 분리된 것은 일제시절 호적의 영향이 크며 그 호적을 그대로 물려받은 현재의 문제이기도 하다.[7] 구 안동 김씨는 경주 김씨계에서 분적되었다. 신 안동 김씨 역시 시조 김선평이 효공왕의 아들이라 주장한다.[8] 시조 '김흥광'이 신라 45대왕인 신무왕의 삼남이라 기록되어 있다.[9] 북한 김일성의 본관이다.[10] 시조인 권행(權倖)이 권씨 성을 사성받기 이전에 경주 김씨였다. 김알지의 29~30대손[11] 구 안동 김씨의 시조 김방경의 동생인 김현경(金玄慶)의 손자 김영규(金永奎)를 시조로 한다.[12] 고려 평장사 정평공. 본인의 묘지명에 따르면 경순왕의 후예이다. 김봉모의 아들로 전하는 인물은 김태서(金台瑞)가 유일한데, 이 김태서는 다름아닌 전주 김씨의 시조이다. 그런데 김태서의 후손들 중에서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 '경주 김씨'로 기록된 인물들이 여럿 있다.[13] 김인경의 6대손 중에도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 있으나, 가계와 연대가 서로 전혀 다르다. 이쪽 김천서의 후손들은 현풍 김씨로 분적하였다.[14] 1239~1311. 계림군.[15] 김혼 — 장남 김자흥(子興) — 차남 김상보(上珤) — 차남 김정윤(正潤) — 장남 김남보(南寶). 《고려사》에는 최충헌에게 피살당한 김남보가 기록되어 있고 일부 족보에서는 이 김남보를 병판공파 파조와 동일시하고 있으나, 두 김남보의 연대 차이는 무려 200년에 이르기에 동일인으로 볼 수 없다. 한편 김자흥의 차남 김상보를 김인경(金仁鏡, ?~1235)의 둘째 손자로 기록한 족보들이 많으나 이는 잘못으로, 김봉모 문서에 관련 내용이 있다.[16] 경순왕의 4남이라는 김은열(金殷說)의 14대손으로, 김녕 김씨의 시조인 김시흥의 8대손이 된다. 김녕 김씨 충의공파와 족보 시비가 존재한다. 1980년대에 경주 김씨 백촌공파 중종(피고)이 김녕 김씨 충의공파(원고)의 인물을 족보에서 고의로 누락한 것과 종중 소식지에서 김녕 김씨 충의공파가 김문기의 후손을 사칭한다고 비난한 것에 대하여 손해배상 소송이 있었는데, 경주 김씨 백촌공파(피고)가 패소하였다.[17] 김시흥의 8대손. 김녕 김씨 충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18] 고려 초 삼한벽상공신 내사령.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경순왕의 후예라 한다.[19] 17세 김서라고 하는 곳도 있다.[20] 족보 기준. <김은열 묘지명>에는 2세라고 되어 있다.[21] 고려 말 판도판서. 판도판서공파보에서는 대안군파 12세라고 한다.[22] 고려 예종 때 검교태자태사. 족보에서는 대안군파 6세라고 한다. 9세손이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이며, 추사 김정희를 포함한 18~19세기 조선 후기 경주 김씨 인물들이 속한 선대 계파로, 판도판서공파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경순왕의 후손이라고 증명할 사료가 없어서 대보공 김알지의 먼 후손이라고 칭하고 있다. 덧붙여서 헌강왕의 후손이라는 설도 존재한다.[23] 이들은 한편으로 김순웅 장군을 원시조로 모시고 있다. 다만, 김지우 묘지석이 등장하면서 현재는 김순웅이 아니라 김신웅이 옳으며 이들이 원성왕의 후예라는 것이 밝혀 졌다. 족보조작이 많았던 18세기 말에 나온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순왕의 후예라고 하였으나 당시는 김은열 묘지석이 등장한 후 김씨 문중의 일부 사람들이 서로 자기들의 계대를 경순왕 후손으로 주장하였고 이는 후에 계대가 맞지 않는 모순을 낳았다. 1980년도에는 계림군파 족보에 이름을 바꾸며 입적하게 된 사람이 후에 계림군파 족보를 이용해 장군공파를 만들고 이후 김순웅이 경순왕의 첫째 손자라고 주장하기 위해 일제시대에 출간된 역사학자도 위보라고 하는 『신라삼성연원보』에 의거하여 태자파로 변경하고 김순웅을 마의태자의 아들로 바꾸면서 다른 신라계 김씨와 충돌을 야기했다. '《신라삼성연원보》를 통해 보는 가짜 족보의 실상'이라는 기사를 쓴 김정현 역사전문가는 이 책을 성이 없던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도 나도 족보를 꾸미며 만들던 일제시대의 위보로 판단했다. 출처 다만 이미 조선 초부터 상민들까지 성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 후기에 천민들의 면천도 활발히 이루어 졌으므로 일제 때 와서야 성씨를 갖게 되었다는 주장은 오류가 있다. 따라서 적당히 걸러들으면 된다. 그러나 계림군파와 태자파 간의 소송에서 태자파가 승소하였는데, 이에 대해 신라김씨연합대종원 김진광 부총재도 “당시 법원이 역사적 진실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 셈인데, 그렇더라도 족보는 역사에 근거해 기술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태자파의 주장에 역사근거가 없음을 주장했다. 출처 계림군파 최초의 족보는 1772년에 나왔으며, 이때부터 계림군파의 원시조는 고려시대 김순웅 장군으로 기록해 왔다.[24] 고려 인종 때의 명신이자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김위영의 손자이다. 족보에선 김위영이 경순왕의 후손이라 하나, 김위영은 사실 경순왕과 동시대 인물이다. 후대 사람들이 족보를 만들면서, 경순왕 후손으로써 혜택을 누리기 위해 억지로 동시대의 두 인물을 조상과 후손의 관계로 연결한 것.[25] 15세기 초반인 태종~세종 대에 활동하였다. 목사(牧使).[26] 고려 말 판서 역임.[27]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28] 항렬자 출처: 『경주 김씨 판도판서공파 대동보』 (2013), 109쪽[29] 김맹성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계림군파 종친회 측에서는 희경공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에 희경공파 종친회에서 법원에 소송을 걸었지만, 대법원에 가서도 원고의 소송이 기각되면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희경공파 종친회 측에서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2019년에 족보를 발간하기도 했으며, 2017년 간행된 『경주 김씨 태자파 대동보』에는 김맹성의 후손들이 전체 족보의 맨 앞이 아닌 맨 끝(14권)에 별도로 입보되어 있다. 다만 같은 태자파가 7년 전인 2010년에 발간한 『경주 김씨 태자파 창시 대동보』에는 실려있지 않다.[30] 대표적으로 고려 중기의 학자이자 삼국사기 편찬을 주도한 김부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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