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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타구치 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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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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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나가 교지

<colbgcolor=#b0313f><colcolor=#fff> 제2대 제15군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牟田口廉也 | Mutaguchi Renya
[1]
파일:무타구치 렌야.jpg
출생 1888년 10월 7일
사가현
사망 1966년 8월 2일 (향년 77세)
도쿄도 쵸후시
묘소 타마레이엔(多磨霊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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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학력 육군대학교 (29기)
군사 경력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2기)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10년 12월 ~ 1945년 9월
최종 계급 중장
최종 보직 제15군사령관
주요 보직 지나주둔 보병제1연대장
제4군참모장
육군여과사관학교장
제18사단장
참전 러시아 내전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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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 활동2.2. 중일전쟁2.3. 싱가포르 전투2.4. 임팔 작전
2.4.1. 관련 일화
2.5. 전쟁 이후
3. 전쟁 범죄 의혹4. 어록5. 창작물에서의 묘사6. 여담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군장성. 최종 계급은 중장.

이른바 일본군 삼대오물 중 한 사람으로 한국에서도 도미나가 교지,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무능한 일본군 장성으로 가장 자주 거론된다.

중일전쟁의 도화선인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며, 이어진 군부의 폭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에서는 영국군영연방군을 상대로 임팔 작전을 무리하게 진행시켰다가 실패한 것도 모자라 그 책임이 부하들이 못 했다는 식으로 떠넘기기까지 한 인물이다.[2]

이 어마어마한 삽질은 결국 일본 제국의 패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어떤 인물도 단신으로 일본 제국에 이 정도의 피해를 입히진 못했고, 이 때문에 일본 제국을 찬양하고 전범들을 미화하는 일본 넷 우익들에게조차도 삼대오물이라 불리며 비난받고 있고 한국에서는 이 인물을 어둠독립운동가 혹은 한국광복군이 심은 스파이 등으로 부르면서 비아냥 섞인 찬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3]

워낙 대형사고들을 많이 일으켜서 묻힌 경향이 있지만, 중일전쟁을 일으킨 당사자 중 한 명이니, 난징 대학살 등의 중일전쟁 당시 일본의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는 사람이지만, 이 점으로 비판받는 경우는 잘 없다. 그 뒤에 벌어지는 중일전쟁의 여러 전쟁범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음이 고려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너무 무능해서 자신이 벌인 전쟁을 자신이 전선에서 말아먹었다 보니, 그것만 강조되어 오히려 범죄가 희석됐다고도 볼 수 있다.

2. 생애

삼대오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가 저지른 만행은 현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한 사보타주 아니냐며 경탄할 만한 자폭삽질이었다.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능함이 일본군을 파멸로 몰고 갔기에 조롱받았다. 시작은 다름아닌 중일전쟁 이전에서부터였다.

2.1. 초기 활동

파일:무타구치 렌야_대위.png
위관급 장교 시절의 무타구치
무타구치 렌야는 1888년 10월 7일에 태어났다. 본래 성씨는 후쿠지(福地)로, 이후 외가 쪽 친척인 무타구치 씨 집안에 양자로 입양되어서 무타구치 렌야가 되었다. 22세가 되던 해인 191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17년 29세의 나이로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시베리아 침공에 참전했고 이후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갔다. 소좌 계급일 때 캄차카 반도페트로파블롭스크에 잠입하여 홀로 정탐 활동을 벌였다. 이후 엘리트 군인으로서 승진을 거듭하며 경력을 쌓게 된다. 어차피 그 들어가기 힘든 육대를 졸업한 만큼, 아무리 실무에서 무능해도 출세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그가 출세와는 별개로 육군 내 파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신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이후 그의 일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2.2. 중일전쟁

의외로 임팔 작전에 비해 유명하지 않은 부분이지만, 단신으로 중일전쟁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백만대군이 넘는 인력을 전투불능으로 만든 인물이다.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던 노구교 사건 당시 무타구치 렌야는 대좌로서 연대장 직책에 있었는데, 당시 의문의 총성 몇 발이 난 후 일본군 병사 하나가 갑자기 잠깐 동안 사라지자 이를 국민혁명군의 소행이라고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단정하고는 자신의 연대에 국민혁명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당연하지만 이는 불법 전투 개시였다.

워낙 뜬금없는 공격 명령이라 휘하 대대장 이치키 기요나오 소좌가 "정말 공격해도 됩니까?"라고 되물었을 정도였다. 무타구치는 "정말 해버려도 좋단 말이야!"라면서 재차 공격을 명령했고, 이것이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당시 장성이 아니라 고작 연대장 직책의 대좌(대령)였으며, 공격 명령에 대해 육군성이나 참모본부에서 어떠한 허가도 받지 않았음에도 그는 기어코 전쟁을 시작해버렸다. 즉, 전쟁 수뇌부인 장관급 장성들도 아닌 일개 연대장이 국가 간의 전쟁이라는 국제 문제를 단독으로 일으킨 것이다.

그러다가 기자들이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취재하러 오자, 무타구치는 전선에는 나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피 묻은 붕대를 팔에 감고는 "국민혁명군의 도발을 내가 격퇴하는 중이다."라고 언론플레이를 했다.

한편 당시 총리대신 코노에 후미마로는 이렇게 무타구치가 멋대로 행한 개전에 대해서 처음에는 확전 반대를 주장하면서 사태를 외교적으로 수습하려는 듯 하였으나, 고작 며칠 만에 입장을 바꿔 현지 일본군 증강을 허가하였고 결국 화북전역으로 이행을 묵인해 버렸다.

이후 무타구치는 불법 전투 개시로 총살 당해도 모자랄 판국에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4군 참모장을 거쳐 1939년 육군유년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 불법 전투 개시는 당시 일본군에 만연하던 결과만 좋으면 그만아니냐? 라는 생각과 총사퇴가 명절행사가 돼서 관동군을 통제불가능한 내각 등이 버무려진 결과이기도 하다. 정상적인 내각과 군부였다면 외교적으로 끝냈을 일이, 백만 명이 넘는 일본군이 중국에 묶여 돈 먹는 하마로 변하는 대악수가 되었다.[4]

2.3. 싱가포르 전투

파일:renya.12.png
18사단장 시절의 무타구치 렌야. 가운데 인물이 렌야이다.
1940년엔 중장으로 진급했고 야마시타 도모유키 휘하의 18사단[5] 사단장으로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했다. 여기서 무타구치는 수류탄 파편에 맞아 왼쪽 어깨를 다쳤다. 이 부상을 입은 이유가 꽤나 걸작인데, 부대에서 술 잔치 벌이다 갑자기 날아온 포격을 피하려고 도망갈 때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해서 숨으려다가 다친 것이라고. 어쨌거나 무타구치는 지휘관으로서 부대를 끝까지 지휘하여 야마시타가 직접 문안 편지와 포도주를 보내주기도 했다.

1941년 12월, 무타구치 렌야는 지트라 전투의 사단장으로 참여하였고 영국군은 55일만에 무너지게 됐는데, 여기에서 일본군은 영국군의 보급품을 뺏어먹으며[6] 진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렌야의 머릿속엔 '영국군은 약하고 보급품은 뺏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박혔다. 그리고 18사단은 싱가포르 함락 뒤 필리핀의 바탄 반도에 갔으며, 1942년 4월에는 버마 전선으로 다시 왔다. 1943년 3월에는 제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이때 대본영의 인도 진공 계획을 "밀림과 산악에서는 작전 수행이 어렵다"며 격렬히 반대했고, 도조 히데키는 "냉철한 판단"이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이때는 버마 함락의 후유증으로 인도 국경 쪽 영국군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라서 오히려 이때의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일본군 육군과 해군의 사이가 나빴지만 1943년 당시엔 일본 해군이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제해권은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일본군의 바다를 통한 육해군의 보급과 수송력의 실상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시궁창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1944년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랬던 그가 버마를 지키는 제15군의 사령관 자리에 오르고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이 버마를 공격하자, 생각을 바꿔서자신이 인도 진공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조지프 스틸웰이 버마 탈환 노래를 부르며 병력을 모아 인도 제국군, 영국군이 전열을 정비했던 상태에서 말이다.

2.4. 임팔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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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문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영국군은 약하니, 반드시 퇴각할 거요. 보급에 대한 우려는 착각이라 할 수 있소.
NHK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도큐먼트 태평양전쟁 제4부, 책임 없는 전장 버마, 임팔》
이 시리즈는 원래 NHK 스페셜 중 특별기획의 일환으로, 1989~91년 냉전이 붕괴되며 각종 자료가 쏟아지자 그를 바탕으로 제작, 1993년에 방영한 것이다. 당시 총제작지휘를 맡았던 야마모토 하지메(山本 肇, 1940~2006) CP는 상당히 개념찬 인물로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무능과 반성 없는 일본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나마 1~3부를 제작하고 몇 달의 텀을 둔 후 4~6부를 제작, 총 6부작으로 완결지었다. 그런데 1, 3, 6부는 NHK 제작 다큐가 아니고[7] 2, 4, 5, 7부만 NHK판이다.[8] 야마모토 CP는 이후 1994년 NHK 시즈오카국장으로 영전되었다.[9] NHK를 퇴직한 후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교재로 반전 강연 활동을 했다.

임팔 작전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 인도 제국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한다. 지형이고 적군 상태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개인이 휴대할 만한 최대량의 물자만 감안해서 15일짜리 작전이라고 휘하 부대에 지시하고는, 실제 작전 기간은 3달이 넘어갔다. 그리고 이 작전을 승인한 도조 히데키도 다른 전장의 전황이 나빠서 정권을 유지하러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아직 있다. 작전 최종 인가를 자기 집 목욕탕에서 했다는 점이 웃기다. 이 때문에 임팔 작전의 결재는 '목욕탕 결재'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마주칠 때 병력의 절반 이상이 영양 부족과 피로로 전투가 힘들었지만 그 뒤로도 보급을 제대로 안 했다. 임팔 작전에서 굶어 죽어가는 일본군들의 모습을 알려면 《여명의 눈동자》에서 먹을 게 없어서 풀뿌리를 씹고, 독충인 노래기를 잡고, 까지 산 채로 먹는 장면을 보자. 그게 바로 임팔 작전의 현실이다. 휘하 부대장이 계속 철수를 요구하고 부하들이 전장에서 뜻 없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알면서도 진격하라며 계속 독촉하고선 무타구치 자신은 초조했다. 작전 실패가 확실해서 상황을 파악하러 온 버마 사령관 가와베가 무타구치를 찾아왔지만 둘 다 아무 말도 못했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 까닭이 참 어처구니없었다.
가와베: 무타구치 중장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무타구치: 나는 가와베 장군의 참된 심중은 작전 지속에 대한 나의 생각을 떠보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장군에게 실토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먼지투성이인 내 풍모를 보고 장군이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랐다.

가와베: 나는 랑군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귀기 어린 빗속에서 일선을 지키는 장병들, 특히 파렐 전선에서 악수를 나눈 인도 국민군 장병들의 모습이 역력히 떠올랐다. 만일 냉정하게 이 전황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미 이때 작전 중지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나의 생각 이외에 보다 더 큰 성격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무타구치: 저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후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
체면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며 후퇴하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끝내 말을 못했다는 부분이 핵심. 다테마에, 눈치껏 알아차리기를 중시하는 일본인 특유의 간접적 의사 소통의 문제를 매우 잘 보여주었다. 문제는 병사들의 목숨이 실시간으로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그저 장군 개인의 체면 때문에 서로 말도 제대로 안 하고 알아맞히기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술을 미군 헌병이 듣자 빵 터져서 5분이나 웃어댔다고 한다.

끝내 전투는 참다 참다 피골이 상접한 채 자신들의 비관적인 처지를 노래하는 부하들의 꼴을 보고 있던 휘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독단으로 후퇴를 결정할 때까지 이어졌다. 이것이 일본 육군 창설 이래 일어난 항명 사건 1호다. 심지어 이 항명은 당시 일본 군법상으로도 정당했다. 내 휘하 부대가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상급부대에서 아무 대책도 없이 계속 현 위치를 고수하라고만 명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퇴 결정을 내렸을 때 사토의 부하들이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바로 이 사토 중장이 무타구치를 만나러 왔을 때, 무타구치는 자결해 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사토 중장을 보기 부끄러웠는지 숨어버리는 추태를 부렸다. 이에 크게 분노한 사토는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 하고 이를 갈며 칼을 갖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당시 31사단장 사토 중장이 얼마나 열 받았는지는, 그가 무타구치의 15군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절절히 알 수 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가는 중대요인이 되고 있음. 눈 앞의 본 사단의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이 되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이러한 전문이 계속 날아오자 무타구치의 참모들이 사토 중장을 달래러 찾아왔는데, 오히려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냐. 바로 너희 제15군이란 말이다!"라고 외치며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 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만큼 화가 났었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머저리 집단 셋이 있다. 제15군과 버마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10] 이런 머저리들을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대본영은 무타구치의 주장에 따라 사토 중장에게 심신상실이라는 진단을 내려 불기소로 끝낸 다음 연금했다. 평소의 일본군이라면 저런 때에는 아무리 장군이라도 불명예 제대, 군법회의, 심하면 할복이다. 그런데 저렇게 약한 조치로 끝난 까닭도 웃기는데 군법회의가 열리면[11] 사토의 사단장 임명에 관여한[12] 군 중추부 내의 인물들도 왜 문제가 있는 인물을 사단장이 되게 했는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여튼 사토에 대한 일본군 높으신 분들의 평가는 '임팔 작전의 실패를 가져온 원흉'이었지만 사토의 부하들 평가는 당연히 정반대였다.

반대로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 철수 이전에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 편입이라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뿐더러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되는 걸로 끝났다.

임팔 전투의 실패로 인한 후폭풍은 생각보다 컸는데, 이 패배로 인해 임팔- 벵골 전선은 통째로 무너지고 다음해인 1945년 3월에는 아웅 산이 이끄는 버마국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버마 전역을 탈환할 수 있었다. 또한 임팔에서 일본군 병력은 전체 정원의 80%가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태평양 전쟁 전체에서 중국 전선을 제외하고 이 임팔 전투보다 일본 육군의 피해가 더 큰 사례는 필리핀 탈환전오키나와 전투 뿐이다. 그나마도 필리핀과 오키나와는 일본 본토를 공략할 수 있는 거점 지역 혹은 일본의 본토란 중요성 때문에 일본과 미국 모두 단단히 준비해서 격전이 벌어진 곳이였던 반면, 여기는 말 그대로 일본군이 자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이 전투가 얼마나 졸전이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봐도 무방하다.

2.4.1. 관련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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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전쟁 이후

파일:singaporein1946-3.jpg 파일:mutaguchii.png
1946년 싱가포르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무타구치 중장
전후의
무타구치 렌야
일본 본토에서 패전을 맞이하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 A급(평화에 대한 죄, crimes against peace)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다른 A급 전범들 대부분이 전범 재판을 거쳐 사형 등을 받았으나 이 사람은 A급 전범으로 기소가 되었으면서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불기소 되었다.[13]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는 불기소되었지만 숙칭 대학살[14] 사건 등의 의혹으로 싱가포르로 호송되어 싱가포르에서 열린 B, C급 전범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2년간,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를 수감하던 싱가포르 창기 감옥에서 감방 생활을 하긴 했지만 1948년 혐의 불충분으로 석방되고 일본에 귀국했다. 싱가포르 군사재판은 영국이 주도했으며 싱가포르 외에도 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관한 재판이었다. 2년간 131회의 재판이 열렸으며 400명 넘는 전범 기소자 중 유죄율은 89%였으며[15] 교수형 및 총살형 판결만 100명이 넘어 전범에 관대한 재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타구치가 석방되었다는 것은 최소한 그가 명백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에선 희화의 극대화를 위해서인지 그가 끝까지 불기소처분을 받아 아예 무혐의로 풀려났다거나[16], 오히려 훈장을 받았다느니 하는 루머들이 돌아다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불기소 처분된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별도의 전범 재판을 통해[17] 2년간 감방 생활을 하긴 하였다. 다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고, 감방 생활 동안 대접이 매우 좋았던 건 사실이라고. 돌아올 때는 살이 더 쪄서 왔다고 한다.
파일:http-%2F%2Fwww6.plala.or.jp%2Fguti%2Fcemetery%2FPHOTO%2FM%2Fmutaguchi_r1.jpg
일본에 돌아와서는 패전 책임 때문에 기도 못 펴고 살며 조용히 보냈다. 그러다 1962년 위에서 언급된 영국 육군 바커 중령과의 에피소드 이후 별안간 목소리를 내면서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으나 주변 사람들의 잘못으로 실패하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6년 77세로 사망했는데, 죽은 뒤에는 일본 도쿄의 공동묘지인 타마레이엔(多磨霊園)에 묻혔다. 참고로 이곳은 일본의 다른 유명한 명장인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함께 묻혀있다.[18]

사실 이런 무능한 인물이 중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무 능력보다는 학연, 인맥으로 진급을 비롯한 모든 것을 결정하던 일본군 특유의 파벌주의 덕이었다. 무타구치는 당시 군부를 이끌던 우두머리였던 도조 히데키와 같은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 파벌이었기 때문이다.

3. 전쟁 범죄 의혹

알렉산드라 야전병원에서의 환자 학살 논란이 있다.

이 사건은 1942년 4월 무타구치가 말레이 방면을 공략하던 18사단장이었을 때 벌어진 일이다. 18사단은 영국군의 야전병원을 점령하고, 소수의 포로만 남기고 환자 및 스태프를 학살했는데 다음날 현장을 방문한 무타구치가 생존한 영국군 고위장교 포로에게 사과했다는 것이다.

직접 학살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도 이런 학살이 벌어지면 감독 부실의 책임을 물어 처형된 예가 많다. 당시 무타구치의 상관이었던 야마시타 대장이 나중에 부하들을 다스리지 못한 죄[19]로 전범이 되어 처형된 것과는 달리, 무타구치의 경우에는 당시 영국군이 알렉산드라 야전병원을 방어 거점으로 삼아 일본군에 저항했던 까닭에 기소하기에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과 함께 증인을 찾기 위해 무타구치의 사진을 영국에 보냈으나 1년이 넘도록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던 점이 고려되어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당시 생존자 증언 중에는 무타구치가 학살극 다음 날 직접 병원을 방문하여 전쟁범죄 현장을 확인하고 주모자들을 총살시킨 뒤 돌아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무타구치 본인은 학살극 일체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학살극 후에 보고를 받고 주동자들을 처벌했으나, 본인에게 가해질 처벌이 두려워서 아예 몰랐다고 주장한 것이 된다. 하지만 생존자에게 사과하고 주동자들을 처벌하는 것도 본인이 인지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니 학살을 몰랐다는 무타구치의 주장은 설득력이 낮다. 이 반응은 학살 의혹이 있는 대다수의 추축국 장병들이 전후에 자신들의 혐의에 대해 보인 반응과 같다.

4.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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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군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중장

그 유명한 임팔 작전 등으로 자국군을 패전으로 몰고 간 어리석은 인물. 파벌과 인맥으로 카스트 제도 같은 계급을 결정하는 일본군 지휘관답게 수많은 실패에도 끝까지 책임은 안 지고 꾸준히 요직에 남았으며, 전후에도 떵떵거리며 살지는 못했어도 별다른 곤란함 없이 잘 살다 갔다. 아무튼 장군이란 작자가 군사 교리와 병법의 기본조차 모르며, 본인만의 고집스러운 신념으로 군대를 뒤흔드는 발언들을 상당히 많이 했다.

적의 것을 빼앗아 쓰는 노획을 통한 보급은 고대 ~ 중세 시대인 산업화 이전의 전쟁에서나 먹히는 전략이다. 심지어 그 시대에서조차 노획은 어디까지나 당시 교통 수단으로는 보급로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한계 때문에 이루어진 거지 군대의 보급을 대체하는 수단이 되지는 못했다.[20]

시대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의 어느 장수든 보급 완비는 군대의 기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 적군의 모든 병력들이 도망친다면 전리품을 많이 얻을 수 있겠지만, 패배한다고 한들 적군도 그렇게 가만히 둘 이유가 없다.[21] 청야전술이 왜 발달했는지를 생각해보자. 만약 전황이 불리해 보인다면 바로 청야전술을 펼치기만 해도 적군이 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전투 중에 죽은 적군 병사의 시체에서 보급하는 방법 뿐이다.

현지에서 징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수는 없다. 징발이나 약탈이 가능한 물자는 인구에 따라 한계가 있고,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부작용으로 현지 물정을 잘 아는 게릴라 등이 양산되거나 적에게 협력하는 수가 있어 최대한 피해야 하는 수단이다.[22]

프랑스의 정복 군주 나폴레옹"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군대의 보급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인물이다.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병력의 보급 문제를 해결하고 빠른 행군을 위해 공모전을 열었는데 여기서 채택된 발명품이 바로 병조림이며, 이것을 영국에서 개량하여 만든 것이 바로 지금의 통조림이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보급 문제를 상당히 신경 썼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청야전술로 인해 기껏 모스크바까지 쳐들어 왔음에도 러시아의 혹한과 보급품 고갈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했다는 점에서 보급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23]

인류가 벌인 전쟁 중에는 압도적인 상황에서 보급로를 지키지 못해 전세가 뒤집힌 전쟁이 매우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바로 살수대첩이다. 물론 한니발 바르카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보급로의 유무와 무관하게 강력한 회전으로 결착을 내던 사령관들도 있었으나, 저들도 현지 조달이건 약탈이건 간에 일단 보급은 최대한 끊기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24]

심지어 한니발은 본국 카르타고로부터 지속적인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지 조달을 전제로 이탈리아 원정을 실행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무기나 부품, 탄약 등 '민수용품으로 대체할 수 없는 보급 수요'의 비중이 근현대보다 훨씬 낮던 <산업화 이전, 고대의 전쟁 환경>이었고, 한니발의 원정 무대인 이탈리아는 '당시로써는 높은 인구 밀도와 개발 진척도'로 한니발이 거느린 병력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잉여 물자의 확보가 용이한 지역이었으며, 이런 물자를 조달하는 방법 역시 단순히 '뺏으면 된다'가 아니라 당시의 이탈리아 정세와 로마 연합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이용하여 로마에 반감을 가진 이들[25]에게 그 대안으로써의 자신을 어필하여 로마 지지 세력으로부터 이탈시켜 자신을 지지하게 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철저한 전략적 구상 하에 2차 포에니 전쟁 초기 로마군을 연이어 비참할 정도로 처발라대던 실적까지 보여주고서도 결국 보급 역량의 부족으로 로마에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고 전략적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카이사르 역시 갈리아 전쟁기 당시 베르킨게토릭스의 청야전술에 당해 패퇴 직전까지 몰리던 게 베르킨게토릭스의 오판으로 일어난 회전에서 로마군이 대역전을 벌이고, 이후 일어난 알레시아 전투마저 승리함으로써 승기를 굳힌 어찌 보면 매우 운이 좋았던 케이스이다. 갈리아 전쟁 당시 카이사르는 꾸준히 주변 동맹국, 동맹 갈리아 부족으로부터 요청을 가장한 협박으로 보급품을 취했다. 당연히 본국인 로마에서도 보급품을 받았다. 그리고 저 카이사르도 보급로 무시하고 생각 없이 포위전 치렀다가 제대로 홍역을 치른 전투가 바로 내전기의 디라키움 공방전. 물론 이쪽은 숫적 열세 등 다소 복합적인 상황이 있는 전투지만 폼페이우스의 보급로 차단 등으로 카이사르군이 고전을 치렀기도 했기 때문에 아예 무관하진 않다.[26]

그리고 결국 디라키움에선 실패했으나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승리하여 최종 승리자가 된 것이다. 즉, 카이사르는 어디까지나 상대 측의 실수와 이를 캐치한 카이사르의 능력으로 카이사르의 장기인 회전에 상대가 응해줘서 이를 이용해 상대를 박살내서 상대적으로 보급과 무관한 명장이라는 인식이 커진 것일 뿐, 그 명장인 카이사르조차 보급을 등한시하다 크게 말릴 뻔한 전적이 있었다는 소리다. 게다가 카이사르가 이런 식의 허리띠 졸라매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이끄는 병사들이 장장 10년 이상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그야말로 동서고금 지중해 세계 최강의 정예병으로 평가 받는 카이사르 군단의 역전의 용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미 갈리아에서 청야전술에 그 고생을 하면서도 부대가 와해되거나 탈영병이 생기지도 않을 만큼 엄청난 사기와 감투 정신, 그리고 자급자족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디라키움에서 한두 달 배 곯는 건 이들에게는 일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이를 조롱하는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게 자기들이 식량으로 쓰던 구근을 마구잡이로 집어던져 응수할 정도였다. 급여 문제로 폭동 직전까지 갔다가도 연단에 오른 카이사르가 "제대를 허락한다. 시민 여러분들은 이제부터 안전한 후방에 대기하다가 전역하면 된다. 급여와 퇴직금은 정상적으로 지불하겠다. 그간 고생 많았다."는 짤막한 연설을 하자 곧바로 바짓가랑이 붙잡고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다시 싸우게 해주십시오!" 하고 매달릴 만큼 지휘관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심도 엄청났다. 이는 다시 말해 이 정도의 사기, 감투 정신, 전투 경험, 조직력, 충성심이 있는 군대여야만 보급이 없이도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카이사르도 자신의 병사들이 아직 미숙하던 갈리아 전쟁 초기에는 보급을 경시한 초강경 공세 작전을 펼친 적이 없으며, 항상 장병들이 잘 먹고 잘 쉴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게다가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적지(敵地) 탈환을 통한 현지 조달에 회의적인 상황이다. 산업화, 특히 부품 규격에서 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게 그 원인. 적군에게서 무장을 노획해도 정작 탄약을 적군에게서 뺏어오지 않는 한 결국 탄약이 고갈되어 기껏 노획한 무장이 무용지물이 되므로[27], 보급품을 전장에서 조달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할 때 독일 국방군 연료 수급 상황으로는 작전 실행을 거의 못하지만 "간단히 풀 수 있다. 연합군 거 탈취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결코 바보가 아니었기에 퇴각할 때 독일군이 노획,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후송하거나 파괴했다. 이는 정말 당연한 상식이었다.

보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작전을 시도했던 경우는 물론 역사에서 많았으나[28], 대체로 이러한 기동전의 목적은 보급을 희생하는 도박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작전이 성공할 시 얻는 메리트가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한니발의 로마 침공 역시 성공 시엔 오랜 숙적인 로마를 점령하고 지중해 패권을 카르타고가 로마에게서 뺏어올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투도 갈리아 전투 성공으로 인한 개선식 및 이를 이용한 정치권력 확대 등의 메리트가 있고, 병자호란 역시 청측이 승리할 경우 적국인 명나라의 동맹이자 배후에서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조선을 복속시킬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다. 하지만 임팔 작전의 경우 성공한다고 한들 얻는 거라곤 이미 어느 정도 확정된 동남아시아의 안전이 조금 더 증가하는 수준과 추후 인도 진공에 유리한 교두보 확보가 전부인 반면 실패 시엔 기껏 점령한 동남아 자원지대가 모조리 적에게 넘어가는, 리턴에 비해 리스크가 너무나도 큰 작전이었다.

무엇보다 적군도 아군과 판단이 같다면, 이기든 지든 간에 그날 그 전투는 끝장이다.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
「貴様等のこのざまは何だ。それでも帝国陸軍か! こういうのを魂の抜け殻と言うのだ」と怒鳴り散らしていた。それでも兵達は動こうと。
네놈(키사마)들의 이 꼴은 뭐냐? 그러고도 제국육군인가! 이런 걸 영혼이 빠져나간 껍데기라고 하는 거다.
1944년 8월, 참모들을 데리고 전선 시찰 중이던 무타구치가 임팔 작전에서 돌아온 부상병들을 향해. 제31사단 제58연대 생존자였던 우치야마 이치로(内山一郎) 상병의 증언 중.
무타구치 : 貴様は病気を口実に後に下がった。自分の部下をどうしたのか。病気は何だ。

소좌 : 負傷とマラリアと下痢であります。

무타구치 : そんなものは病気じゃない。貴様のような大隊長が居るから負けるんだ。この大馬鹿者。
무타구치 : 네놈(키사마)은 병을 핑계로 후퇴했다. 부하들은 어떻게 했냐? 병명이 뭐냐?

소좌 : 부상과 말라리아이질입니다.

무타구치 : (지팡이로 소좌를 계속 때리면서) 그런 걸 병이라고 할 수 없다. 네놈같은 대대장이 있으니까 싸움에 지는 거야, 이 띨띨한 새끼야![29]
제31사단 제58연대 생존자였던 우치야마 이치로(内山一郎) 상병의 증언 중.
諸君、佐藤烈兵団長は、軍命に背きコヒマ方面の戦線を放棄した。食う物がないから戦争は出来んと言って勝手に退りよった。これが皇軍か。皇軍は食う物がなくても戦い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兵器がない、やれ弾丸がない、食う物がないなどは戦いを放棄する理由にならぬ。弾丸がなかったら銃剣があるじゃないか。銃剣がなくなれば、腕でいくんじゃ。腕もなくなったら足で蹴れ。足もやられたら口で噛みついて行け。日本男子には大和魂があるということを忘れちゃいかん。日本は神州である。神々が守って下さる…
제군, 사토 군단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 방면의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따위는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안 된다. 탄환이 없다면 총검이 있잖은가. 총검이 없다면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맨손도 쓸 수 없다면 발로 걷어차라. 발도 쓸 수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 남자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
1944년 7월 10일, 자신이 만든 제단 앞에서 장교들을 집결한 후 임팔 작전의 훈시 중. 후루카와 사토시 저, 『은밀한 세계(葉隠の世界)』- 304 ~ 305p.

그야말로 똥군기 찬양의 극치이다. 직접 전투를 행하는 입장에서야 각오를 다지기 위해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보급을 책임져야 할 관리자의 입장에서 저 따위로 말하는 것은 단지 무책임한 직무유기일 뿐이다.

전쟁 영화 등을 보면 후퇴 금지 명령 아래 장비 부족에도 무조건 특정 지점을 사수하지만, 현실은 가상과 달리 그렇지 않다. 대다수 군대의 사령부 지침은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물자가 떨어지면 인력 낭비를 막기 위해 후퇴해서 보급을 주고 재투입한다. 즉, 후퇴 금지란 어디까지나 무절제한 적전 도주를 금지하는 거지 전략 - 전술상 후퇴가 필요하거나 사수가 필요하지 않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전쟁 영화 등에서 나오는 경우는 상당수가 특정 지점에 고립되어 보급과 후퇴가 불가능한 상황 또는 그 지역 자체가 적에게 넘어가면 전략적으로 큰 문제가 생기는 극단적인 곳들만 보여줘서 그런 오해와 혼동을 초래한다. 아무래도 극적인 연출이 필요하기도 하고 말이다.

게다가 식량과 무기의 보급이 완전히 끊겨 전투력이 발휘되지 않고 증원조차 불가능한 전멸 상황이라면, 일단 후퇴해 보급을 받으며 재편성을 해서 전투 효율을 높이고 공격을 다시 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다. 작전상 후퇴도 훌륭한 전술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두자. 근데 후퇴는 무조건 금지이니... 그걸 뿌리부터 뒤흔드는 발언이다.

영화 같은 가상이면 인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인력이 가장 중요한데, 애초에 무기는 어떤 사람이 쓰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그 분야를 전공한데다 전장에서 살아남아서 경험을 축적하고 숙련도를 키운 베테랑이 무기를 쓰는 것과, 그 분야를 전공한 적도 전혀 없고 전장에 나간 경험도 없거나 숙련도가 없거나 실력이 형편없는 아마추어가 쓰는 것은 당연히 큰 차이가 난다. 그 옛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소수 정예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인력을 허비하면 인력이 모자라 아무리 탄탄하고 강력한 무기라도 한순간에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그러니 전장에서는 할 수 있으면 보병들을 최대한 살리는 게 도리다.

그리고 저기서 마지막 문구의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라는 부분. 이 부분 역시 문제가 있는데, 일본이 전파 탐신에 대해 그토록 소극적이던 이유 역시 이 논리가 내포되어 있다. 당장 전파 탐신을 게을리 했다가 무슨 사태가 터질지는 대본영에서 직접 임팔을 먹으려고 작전을 처음 계획한, 그리고 무타구치가 반대했던 1942년에 이미 나와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인력이 남아있으면 상황에 따라 잃었던 지역을 다시 탈환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몽땅 죽어 쓸려나갔다면 인원이 모자라 공백이 생겨 지켜야 할 곳들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적에게 밀려나가게 된다.[30] 물론 임팔 전투에서 대패한 여파로 인해 당연히 이러한 공백들이 생겨 일본군은 완전히 밀려났다.
식량은 자동차 대신 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일명 '칭기즈 칸 작전'. 그런데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했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기만 한 데다가 원래 장거리 이동을 잘 안 하는 종들이라 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31]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 가거나,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추락하거나,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물자와 식량이 함께 날아가 실제로 무사히 온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으로 쪼그라들 뿐이었다. 게다가 지쳐서 쓰러진 가축의 짐은 어거지로 하급 병사들에게 다 떠넘겨 짊어지게 하고 험난한 정글을 행군하도록 강요해서 부상이나 탈진 등의 비전투 손실을 야기했다. 더욱 후덜덜한 것은 병사들이 최소 40kg가 넘는 무게를 견디다 못해 몰래 조금씩 짐들을 정글에 버리는 통에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과 무기들이 더욱 빠르게 줄어드는 결과까지 야기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만약 가축들이 무사히 살아남더라도 전시 상황에서 살아있는 동물을 도축하고 조리해서 식량으로 쓰는 과정도 절대 쉽지 않다. 군대에서 괜히 보존식과 간편식 개발에 매달리는 게 아니다.

더욱이 수송 수단으로 쓸 가축들의 사료를 마련하는 방안에 대해 질문을 받자 "초식동물들이니까 걍 풀 뜯어먹으면 장땡이지 뭐가 걱정이야?"라고까지 했다. 그렇지만 군용 이나 들은 절대로 무타구치의 말대로 길가에 난 아무 풀이나 막 뜯어먹게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제대로 된 건초 사료를 먹이는 게 정상이다.[32] 만에 하나 재수 좋게 길가에 마침 말에게 먹이기 좋은 풀이 있다고 쳐도 눈에 보이는 풀이란 풀의 씨를 싹 말려도 수송용 가축이 쓰는 막대한 칼로리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소를 직접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소에게 풀을 뜯기려면 적당한 초지에 데려가서 마음껏 먹도록 몇 시간씩 두거나, 새벽부터 푹 끓인 쇠죽을 먹여서 건초를 쉽게 소화하고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저 사람 밥 먹듯이 하루 삼시세끼 20 ~ 30분 동안 생풀만 줄창 뜯어먹게 하면 그냥 아사한다. 물론 소화기관 등의 차이로 같지는 않겠지만,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생쌀이나 보리을 익히지도 않은 상태로 그냥 먹도록 하는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정말 생풀을 먹여서 배를 채워주려면 뜯어먹는 시간에다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거진 소가 깨어 있는 시간 전체하고 맞먹을 정도로 상당히 딜레이가 길다. 하지만 1분 1초가 급해 죽겠는 전장에서 쉴새 없이 짐을 날라야 할 소나 말들에게 하루종일 풀만 계속 뜯어먹게 놔둘 시간은 부족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풀을 말린 후 먹기 좋게 잘게 썰어 운반과 보관이 쉽게 장방형으로 뭉쳐 놓거나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보리나 콩 등의 곡물을 사용했다. 삼국지초한지 같은 고대 전쟁 소설에 자주 언급되는 마초(馬草)[33]가 군량과 함께 중요한 보급품으로 종종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현대전으로 비교하면 차량 운용에 필요한 기름이나 마찬가지다. 기병의 군마는 물론이고 기병이 없어도 군량을 운송하려면 말이 끄는 수레를 써야 하므로 성 안에 틀어박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일이 없는 수성전이 아닌 이상 당연히 마초는 필수품이다.

결국 무타구치는 전근대 시절의 장군들보다 무식했던 셈이다. 이런 지식 수준으로는 보급 분대장을 맡겨도 실패했을 것인데, 이런 자가 작전을 입안하고 모든 책임을 쥐고 있었으니 전멸은 시간문제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인 나치 독일을 비롯한 다른 추축국은 야전에서 연료를 아끼려고[34] 로 많은 물자를 보급한 반면 기계화를 잘 했고 무엇보다도 자원이 넘쳐나고 지프차가 썩어났던 미국은 험지에선 말도 썼지만, 거의 차량으로 보급품을 날라댔다. 추축국은 당연히 미국의 효율성을 못 따라갔다. 통에 든 가솔린만 먹고 움직이는 빠르고 센 자동차와 달리 가축은 기계가 아닌데다 환경 변화에 취약하고 유지 및 보수가 힘든데다 운반량도 적다. 더구나 절대로 길가의 아무 풀이나 막 먹일 수도 없기 때문에 같은 거리를 가는데 훨씬 많은 부피와 무게의 사료가 필요했고, 이는 후방에서 무기나 필수품에다 많은 양의 사료까지 덤으로 보내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보내야 할 사료의 양이 늘어나면 사료 자체를 실어나르기 위한 가축이 추가되고, 다시 추가된 가축을 위한 사료가 또 추가되는 식으로 수송대의 규모를 여러 번 재계산해야 하는데, 이러다 보면 처음보다 당연히 데려가야 할 가축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진다. 경우가 다르지만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아무리 작은 전투라고 하더라도 병력이 수천 명 이상이 나온 이유이고, 신라선덕여왕을 급습하기 위해 백제에서 꾸려서 보낸 작은 규모의 기습군이 500명이나 되었던 것도 다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사료 문제도 전혀 감안하지 않고 오로지 가축으로만 수송대를 편성했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35][36]

다만 처음부터 소와 말로 보급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상부에 요청한 보급 지원 증강이 거절 당하자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인데... 솔직히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런 작전도 짜지 않았을 것이다.[37]

그리고 그 칭기즈 칸의 작전도 상황과 맞지 않은 게, 칭키즈 칸 같은 경우 오랫동안 유목 생활로 기마를 매우 능숙하게 다루면서 기동력으로 넓은 들판에서 빠른 속도로 적을 제압하고 나라를 정복하는 전술을 구상했고, 말의 피와 젖을 먹으면서 살아오는 등 말은 필수 이동 수단이자 가축이기 때문에 보급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문제는 임팔 작전 무대가 정글이라는 것이며, 당연히 이런 상황이라면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보급은 확실히 할 필요가 있는데, 저런 엉터리 방법으로는 버틸 리가 없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제1차 세계 대전프랑스군에서도 '전쟁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같은 발언이 나온 적이 있었다. 1911년에 프랑스페르디낭 포슈는 "비행기는 단지 장난감에 불과하며 군사적 가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이는 비행기가 아직 군사적으로 쓰이지도 않았으며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미숙했던 시절에 나왔던 이야기이다.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을 한 해가 1903년이고, 프랑스에 처음으로 동력비행기 공장이 세워진 해가 1908년으로 고작 3년 전의 이야기였다. 이 당시는 '공군'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몇몇 열강들이 하나둘씩 항공대를 창설하기 시작한 상태였으니 회의적인 입장이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38] 게다가 그렇게 말한 말한 포슈 본인도 1차 세계대전 때 항공기의 위력을 경험하고 항공 정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생각을 완전히 고쳤다. 그 당시 비행기는 그야말로 신생아 수준에 속도도 심하게 느려터져서 병사들이 총으로 쏴서 격추시키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이는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항공산업이 발전하고 항공기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진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일례로 영국군은 그 '써먹을 데 없는 항공기'로 일본군이 포위한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들을 쏟아부어 포위 상황에서도 계속 버텼다.[39] 가끔 운 좋게 일부가 일본군 쪽으로 떨어지면 일본군들은 이것들을 '처칠 급여'라고 부르며 생명줄로 여겼다. 연합국 전투기들도 마냥 놀고만 있던 게 아니라서 최전선 병사들의 요청에 따라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일본군 진지와 벙커, 참호를 공격하고 큰 피해를 야기했다. 추가로 항공 보급이나 근접화력지원 말고도 네이팜이나 소이탄 같은 걸 끼얹어서 정글을 통째로 태우는 활용법도 있었지만, 네이팜이 실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한 건 1944년 일본군을 상대로 티니안 전투서 7월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일단 임팔에서는 논외로 한다.

이래놓곤 일선 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일본 인종을 바꿔버리는 말을 했다.
ビルマにあって、周囲の山々はこれだけ青々としている。日本人はもともと草食動物なのである。これだけ青い山を周囲に抱えながら、食料に困るなどというのは、ありえないことだ。
버마에서는 주변 산들이 이처럼 푸르다. 일본인은 원래부터 초식동물이다. 이렇게나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1944년 2월, 임팔 작전을 입안하면서 보급 문제를 거론하는 참모들에게. 태평양 전쟁 - 일본의 패인 4(太平洋戦争 日本の敗因4) 147p
이 초식동물 발언은 무타구치의 여러 해괴한 어록들 중에서도 그 임팩트가 상당히 강렬한 탓인지 무타구치 렌야와 임팔 작전을 설명할 때에 거의 반드시 인용되곤 한다.

일본1000년 넘게 육식을 금지한 황당한 역사가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도 있지만, 이 양반이 만일 사병 출신 장성이었다면 저런 역사 때문에 긴가민가해줄 텐데 정말 어이없게도 이 인간은 고등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진급 코스를 밟아 온 정식 육사 출신이다. 혈통이나 신분이나 인맥만으로 갑자기 고위직을 덥석 차지한 낙하산 인사도 절대로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외부 보급에서 답이 없으니 옛 자국인의 특성을 날조하여 정신승리를 하는 모습인 것이다.

그들이 진군한 정글은 녹색 사막이라 불릴 만큼 열악한 곳이다. 비가 너무 자주 와서 토양의 영양분은 다 씻겨나가버리는 데다 습기 때문에 각종 부패균과 곰팡이가 우글거리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억세고 단단하며 항균성(독성)이 있는 식물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 무엇보다 생태계 전체로 봤을 때 인간이 섭취 가능한 식용 식물[40]은 손에 꼽아서 풀을 뜯어먹을래도 태반이 먹을 수가 없는 것들이어서 생으로는 절대로 먹을 수가 없다.

게다가 정글은 수분과 열량의 소모가 크게 증가하는 곳이라 더욱 잘 먹고 체력을 유지할 필요성이 높은 지역이라 고기를 먹어도 모자랄 판인데, 풀만 먹으라고 하는 건 이미 전쟁을 포기해버린 수준이다. 심지어 이들은 일반인도 아닌 군인이다. 군인은 전투력 유지를 위해 여러 장구류를 휴대하고 다니고 강도 높은 훈련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소모되는 열량이 매우 높아서 충분하게 보충해야 한다. 성인을 기준으로 일반적인 현대인의 하루 권장 섭취 열량은 2,000 ~ 2,400kcal 정도이지만, 육체노동자나 작전 중인 군인은 4,000 ~ 7,000kcal 정도까지 소모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컨디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식사량이 배로 증가하는 것이다. 그 옛날 나폴레옹이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고 말한 것과 현대 대한민국 국군짬밥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먹도록 '명령'으로 강제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시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억지로라도 먹이려 드는 이유가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이다.

그리고 상기한 대로 가축도 마찬가지지만, 독초나 못 먹는 풀들이 무성한 정글에서 조리도 안 하고 함부로 이것저것 날로 뜯어먹었다간 독버섯 같은 것에 부대 단위로 중독될 수도 있고, 최하 수십에서 수백 명 이상이 한순간에 골로 가버리는 수가 있어서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사단 수준의 인원이면 최소 몇천 단위인데 그 숫자가 뜯어먹기 안전한 식물이 충분할 리도 없다.

그 결과로 당시 일본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각종 독초를 뜯어먹고 부대 전체가 쓰러졌다던지, 그나마 먹을 수 있는 , 도마뱀, , 원숭이 등 각종 동물은 물론 벌레까지 잡아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는 증언들이 매우 많다. 물론 저런 것들을 몇 마리 잡아도 식량 부족과 굶주림이 쉽사리 해결될 리가 없으니 결국 부대 체계가 무너지고 각종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일본군의 피해는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해 온[41] 일본군의 영양실조는 놀라울 만큼 심했다. 개중에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기 일보직전인 자도 있었다. 먹을 것을 던져 주자 몹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마치 열흘이고 한달이고 아무것도 못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나무뿌리나 벌레를 잡아먹으면서 연명했다고 한다.[42]
장인중(張仁仲)[43]

결국 일본군은 둘러싸여 퇴로도 보급도 끊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있는 식량마저 다 바닥나고, 그나마도 얼마 없는 벌레나 풀뿌리만 겨우 뜯어먹으면서 굶으며 아사하거나 급기야는 동료의 시체에도 손을 댈 만큼 상태가 막장이 되고 말았다. 상식적이라면 이러한 제정신이 아니게 된 상태에서 뭘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최후의 방법으로 둔전이라도 시도할 수도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종자로 쓸 씨앗도 없었고 충분한 시간과 여유, 알맞은 날씨, 작물을 키울 공간도 없는 상태에서 둔전이 가능할 리가 없다.[44] 더구나 임팔 같은 험한 곳에서 둔전을 하려면 일단 정글을 불태워 화전을 해서 넓은 공간을 만든 후에나 벼농사 등이 가능한데,[45] 연합군 정찰기들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과 넓은 지역이 불태워져 밭으로 변한 걸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고, 발견한 후에는 일본군이 식량을 자급하려 일하면서 작물을 관리하는 걸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으니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방침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인지 작전의 계획 단계부터 상급 부대 참모장이 미친듯이 디스했고, 더욱이 삼간사우로 악명 높은 사나다 조이치로 대본영 작전과장조차도 처음 작전 계획을 봤을 때부터 "작전 계획이 엉망진창이다!"라고 무타구치가 작전 계획안을 처음 올렸을 때부터 태클을 걸어왔을 뿐 아니라, 심지어 "정 보급이 안 되면 해군의 협조라도 얻어야 한다."라면서 최후까지 태클을 걸었다. 당시 사정을 모르면 '타군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무리한 작전'이라는 그냥저냥 상식적인 발언으로 들릴 수 있는데, 저 당시의 일본 육군과 해군은 지금의 한국과 일본 만큼이나 사이가 흉악하게 나빴다. 어느 정도였냐면 육군은 해군한테 손 벌리기 싫어서 자체적인 잠수정을 개발해서 따로 배치할 정도였다.

즉, 말이 좋아 육군과 해군이지, 실상은 사이 나쁜 군벌이 2개가 존재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조이치로의 '(일본군) 해군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는 발언을 현대의 대한민국의 상황으로 치환하면 '일본 자위대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는 수준의 폭탄발언인 셈이다. 게다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 게 사나다 조이치로는 무타구치 렌야의 육군대학 10년 후배였다. 파벌과 연공 서열을 아주 심하게 따지는 일본군에서 '후배란 놈'이 '10년 선배'에게 '당장 강제 전역 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수준의 발언을 대놓고 마구 쏟아낸 것'이다. 사나다 조이치로 같은 무능한 인간조차도 이런 발언까지 해가며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임팔 작전의 골자가 처음부터 얼마나 심각하게 문제투성이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유언마저도 상당히 충격적인데...
[ruby(私, ruby=わたし)]は[ruby(悪, ruby=わる)]くない、[ruby(部下, ruby=ぶか)]が[ruby(悪, ruby=わる)]い。
나는 잘못이 없다. 부하가 잘못이다.

5. 창작물에서의 묘사

5.1. 대체역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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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7. 같이 보기



[1] '무구치 렌야'가 맞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무구치 렌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일본어의 た 소리가 원체 기식이 약해서 '다'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편, 비슷한 발음을 활용한 말장난으로 '헛소리'라는 뜻인 무다구치(無駄口)라는 뜻으로 해석해 경멸적인 별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2] 이러한 주장을 부하의 장례식 때 말했다가 유족들한테 먼지나게 맞았다.[3] 가끔 무타구치 렌야라고 하지 않고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어 모전구렴야 혹은 렴야 모전구 선생(센세)로도 불린다.[4] 체급이 더 큰 미국을 공격하는 궁극적인 이유도 중일전 승리가 목표임을 생각하면 어 찌보면 모든 일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다.[5] 상하이 전투의 폭탄 3용사가 속해 있던 사단이기도 하다.[6] 당시 일본군은 이를 "처칠 레이션"(Churchill ration, チャーチルレーション)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다. 훗날 임팔 작전 당시 비참한 상태가 되어 영국군이 투하한 보금품을 훔쳐오던 시절에도 영국 측 보급품을 이렇게 불렀다.[7] 1, 3, 6부는 '결정판 다큐멘터리 태평양전쟁사' 시리즈로, 1990년에 일본 콜롬비아 회사에서 카와노 야스히코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다.[8] 각각 2부, 4부, 5부, 6부다. 나머지 1부와 3부는 유튜브에 따로 올라와 있다. 1부, 3부.[9] 일본에서 샐러리맨의 좌천영전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정말 큰 잘못을 하지 않으면 종신 고용과 연공 서열이 보장되는 일본 특성상 어지간히 무능해서는 일정 기간 이상 지나면 무조건 진급을 시켜주는데, 강등이나 진급 제한은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 없다. 따라서 진급은 시켜야겠는데 아무리 일을 시켜봐도 도저히 쓸 데가 없거나 정말 쫓아내고 싶어 미치겠으면 진급은 시키되 한직으로 보내서 우회적으로 이제 너는 회사에 필요하지 않으니 알아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든가, 그럴 자신이 없으면 조용히 지내다가 명퇴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다만 보통은 조금 주목도가 낮은 부서에 진급 시켜 보내는 식이기 때문에 이 정도 처사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재벌그룹 회장의 비서실장이던 사람이 어느 날 지방의 조그만 생산공장 사장으로 임명된 셈이다. 명목상으로는 비서에서 한 생산공장의 사장으로 올라간 영전이지만, 그룹 회장의 비서실을 통째로 관리하며 회장의 모든 권력 행사를 꿰뚫고 또 마음만 먹으면 이를 얼마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핵심 요직에서 하루아침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지방 한직으로 밀려난 것. 물론 필요 없는 직원은 일본에서도 한직으로 보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정도로 철저한 좌천은 아무리 미워도 오랜 기간 회사에 열정페이로 봉사한 사람의 경력만은 존중해 주는 게 원칙인 일본에서 정말 쫓아내고 싶어서 미치기 직전에는 할 수 없는 처사이다.[10] 나중에는 대본영까지 들어가 총 넷이 되었다.[11] 사토 고토쿠는 군법회의에 회부될 시 임팔 작전과 관련된 인물들과 군부를 규탄하려 했다고 한다.[12] 왜 이런 표현을 썼냐면 일단 임명 자체는 형식적으로나마 덴노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3] A급 전범의 경우는 보통 전쟁을 일으킨 소위 개전(開戰)의 죄가 있는 자들에게 기소되는 죄명이다. 아주 정확한 분류인 게, 이 인간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행동대장격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소가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목이 달아나지 않고 다른 재판 중 수감으로 2년 정도만 살다 나온 것도 아주 관대한 처벌이며, 한편으로 이 자가 그 외의 전쟁 범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이야기도 되는 셈이다.[14] 1942년 일본군이 싱가포르의 중국인 화교들을 대규모로 학살한 사건. 츠지 마사노부가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 중 하나다.[15] 출처는 싱가포르 전쟁 범죄 재판 웹 포털 참고[16] 무타구치의 상관이었던 가와베 마사카즈가 실제로 불기소 후 완전히 석방되었던 것이 와전되었을 수 있다.[17] 그것도 군복 계급장, 서훈 등 부착물은 탈거륵 안 했다. 아주 많이 봐준 것이다.[18] 원래 이곳은 일본의 유명 인사들이 많이 묻혀있는 공동묘지로 유명해서 안내도에 누가 어느 구역에 묻혀있는지 상세하게 적혀있을 정도지만(조선총독을 역임한 우가키 가즈시게, 사이토 마코토,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와 그 협력자인 오자키 호츠미가 묻혀있다.) 이 사람의 경우 워낙 악명 높은 오물이라 그런지 안내도에 일절 적혀있지 않아 무덤을 찾기 쉬운 편은 아니다. 그리고 공동묘지 자체도 워낙 방대해서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져있는데 무다구치는 에도가와 란포와 같은 26구역에 묻혀있다.[19] 다만 야마시타는 이 사건이 아니라 필리핀 마닐라학살극이 문제가 되어 처형되었다. 이때 사망한 필리핀인들이 수만 명에 이르기 때문에 누구든 책임은 져야 했다.[20] 이런 보급 노획은 현대전에서도 여러 사례가 있으며, 그 중 대표격인 게 탈레반이 아프간군과 미군에게서 보급품을 탈탈 털어내어 정규 육군과 공군을 창설한 사건이다. 문제는 얘네들이 탈레반 같은 준군사조직이 아니라 엄연한 한 나라의 군대라는 점이다.[21] 대표적으로 임진왜란이 그랬다. 전쟁 초반, 왜군은 평화에 찌들어있던 조선군을 깨부수고 각 읍성에 쌓여있던 조세, 환곡미를 보곤 자기 영지보다 더 많은 군량을 얻여서 본토의 보급은 필요없다고 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태세를 정비한 조선군이 반격을 시작하고 점령지를 잃기 시작하자 왜군도 아사하기 시작한다.[22] 현대에는 인공위성의 발명으로 전장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인공위성도 없었던 옛날의 가장 효율적인 현지 정보 습득 수단은 현지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에게 상황을 보고 받는 것이었다. 즉, 손수 발로 뛰는 것. 인공위성이 떠다니는 현대에도 아직 유효한 수단이다.[23] 병조림을 만들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썼음에도 당대 프랑스군은 가장 약탈이 심각한 군대로 악명이 높았다. 프랑스군이 한 번 휩쓸고 간 자리는 멀쩡하게 서 있는 집이 단 한 채도 없었다고 한다. 집을 뜯어다 자신들의 숙영지를 짓는 데에 썼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프랑스는 점령지에서 민심을 빠르게 잃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군이 국민개병제를 바탕으로 대육군(Grande Armée)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이전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의 전력을 주변 국가보다 한 시대 먼저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국토와 인구에서 징병을 통해 확보한 거대한 규모의 육군 전력이 당대 서유럽 최강국이던 프랑스의 국력(특히 군사력) 기반이었지만, 그 거대한 규모만큼 보급 부담도 거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병조림과 같은 신기술 개발까지 추진하면서도 그걸로 다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은 잔인하긴 하지만 현지 약탈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24] 사실 한니발이나 카이사르는 주로 적지에서 자기 편을 만들어둬서 보급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이들이 배신하지 않는 한 보급 부족에 시달릴 일은 없었다. 다만 한니발 같은 경우에도 결국은 로마군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전략에 따라 히스파니아를 시작으로 보급선을 전부 차단하자 결국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도 갈리아에서 배신을 당하는 바람에 보급이 부족해진 적은 있지만, 다행히 적들이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바람에 이를 격파하고 갈리아 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다.[25]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국가 시민들이나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부족 등이 있다.[26] 실제로 폼페이우스가 잘 수비하다가 공세를 취한 이유도 곧 수확철이 다가와 카이사르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상황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27] 자동소총을 기준으로 보통 끽해야 병사 한 명 당 4~5개 탄창 분량을 휴대하는 게 고작이다. 탄약고 등 탄약을 보급하는 시설을 손에 넣는다면 해결될 거 같지만, 그만한 시설을 점령하려 해도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그리고 이걸 모두 만족해봤자 탄종 호환이 안 되면 말짱 도루묵이다. 당장 서방세계의 주력 탄종은 5.56mm이나 구 소련계 주력 탄종이 7.62mm로 전혀 호환이 안 된다. 게임이야 어디까지나 게임적 허용으로 넘어가지만 현실에선 얄짤없다.[28] 대표적인 게 상술한 한니발의 로마 진공, 카이사르의 갈리아 진공, 그리고 청나라조선 침공인 병자호란 등이 있다.[29] 둘 다 탈수와 고열 등으로 활동 능력이 극으로 떨어지는 무서운 병이다. 21세기 현재에도 위험한 병으로 분류되어 병원에서 집중적으로 치료하느라 애를 쓴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얼척이 없는 발언.[30] 마오쩌둥도 "땅을 버리고 사람을 구하면 다시 탈환할 수 있지만, 사람을 버리고 땅을 구하면 둘 다 잃는다."고 했다.[31] 인간은 다른 포유류들에 비해 단순 근력은 비교 자체가 미안할 정도로 후달리지만, 달리고 걸을 때의 지구력 하나만큼은 최상급이다. 수만 ~ 수십만 년 전의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사냥 기술이 바로 사냥감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쫓아가기였다. 소나 말은 인간에 비해 장거리 이동에는 상대적으로 체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32] 인간이 사육하는 가축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에게 길들여지면서 이제는 인류의 손을 타지 않으면 야생에서 스스로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질되어 야생에 풀어놓고 아무거나 막 먹게 하면 탈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애초에 야생동물들도 절대 아무 풀이나 다 먹지 않는다. 식물들이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먹히지 않기 위해 최대한 구성 성분을 복잡하게 분화시킨다. 한 종이 섭취할 수 있는 식물의 수는 절대 많지 않고, 그것도 원래부터 서식하고 있는 지역 한정이다. 심지어 정글이라면 독성이 강한 식물도 훨씬 많을 텐데, 만일 독초라도 잘못 먹으면 소화불량과 양분 부족과 정신 이상으로 얼마 못 가 꼴까닥 죽는 건 시간문제다.[33] 말에게 먹일 풀 사료를 말한다. 보통 식량과 묶어서 '양초(糧草)'라고 한다.[34] 사실 연료 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생산력이었다. 그 공업화로 잘 나가던 소련이나 기술력으로 자랑하던 나치 독일, 정예병사를 자처하는 영국군마저 차량화를 완전히 못 했고, 종전까지 완벽하게 행군을 자동차 등의 차륜으로 대체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하물며 자원도 없는 섬나라 일본이 이런 무모한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현주소에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단적으로 대변해 준다. 아니 심지어 그 일본은 자기네 물주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그나마 남아 있던 자기들의 자원줄을 스스로 끊어놓기까지 했다.[35] 2차 고수전쟁에서 수양제는 치중대 60만 명을 운영했지만 한 사람이 나를 수 있는 식량은 겨우 1.5석에 불과했는데, 이것조차 길고 험한 보급로 때문에 보급대 자신들의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은 자신들 몫의 식량을 일일이 들고 행군해야 했는데, 이 무게가 30 ~ 50kg이었다. 식량을 끝까지 들고 가지도 못하고 그냥 땅에 매장시켜 버린 병사도 속출했고, 식량마저 바닥을 드러낸 후에는 먹지를 못한 통에 기운도 다 빠져서 전투를 할 힘도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연합군은 쾌속 진격을 했지만, 하필 전선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보급 트럭이 전선 근처에 갈 때쯤에는 이미 실은 유류들이 모두 소진돼버린 뒤였다. 분명히 노르망디에는 미 본토에서 실어온 석유가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최전선에는 석유가 없어 진격이 둔화되어 버렸다.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는 안트베르펀 항구를 사용해 보급선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전략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두고두고 삽질로 까이는 마켓 가든 작전이다.[36] 몽골 제국이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평소에 유목 생활을 통해 말의 생태에 익숙했을 뿐더러 유목민 생활 방식으로 인해 보르츠라는 지금도 쓰이는 방식으로 장기 보존과 무게 및 부피 축소가 가능한 휴대식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르츠는 가죽 자루 하나를 꽉 채우면 병사 10명이 보름치 먹을 식량이 될 정도로 뛰어난 휴대성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일본은 전투식량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대부분 생쌀만 짊어지고 갔다는 것이다. 그나마 건빵이나 군량 같은 휴대식량도 챙겼으나, 이것들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무거운 미곡을 통으로 짊어지고 가게 되었으니 기동력을 살린 전법은 더더욱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37] 보급 지원 증강을 거절 당한 이유도 이 작전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즉, 현실성이 없다고 지원을 거절 당하니까 더 현실성이 없는 대책을 내놓은 거다.[38] 사실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게 저 때의 비행기의 성능은 상당히 처참해서 대전 초기엔 그냥 정찰용으로만 활용했고, 또한 속력도 심하게 느려서 대공 사격이라도 당하면 끔살 확정이였다. 그 이후에 기관총을 달아 공중전에 이용하기도 했으나, 고장이 너무 잦아 전투하다 말고 지급 받은 망치로 기관총을 수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 당시 공군에게는 기관총 수리용 망치 하나와 자결용 권총 한 정을 쥐여줬을 정도로 항공기의 전략적 가치가 미미했던 때였다.[39] 제일 소소한 보급품인 담배만 하더라도 전투 기간 내내 30만 이 보급될 정도였다고.[40] 현재 인류가 섭취 가능한 식품들의 절대 다수는 인류가 오랜 세월 동안 품종 개량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서 인류가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개량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은 원래는 독성이 있는 붉은색 작물이었고, 옥수수는 다 자라봐야 성인 새끼손가락 수준밖에 안 자라는 몹쓸 작물이었지만, 오랜 개량 끝에 지금의 독성 성분 없는 흰쌀과 성인 팔뚝만한 옥수수가 탄생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야생종은 아예 먹을 부분 자체가 없다. 아무리 조밥을 즐겨 먹는 사람이라도 차마 강아지풀이나 토끼풀을 먹을 생각은 아예 못할 것이다. 일례로 길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많이 먹는 수산물은 길들여지지 않아서 아직도 독극물(예: 복어독, 제철이 아닌 등), 기생충(예: 민물고기, 자연산 연어, 생태 등) 등의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41] 참고로 일본군은 앞뒤 사정 따지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항복과 포로 자체를 대역죄로 여겼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항복했다. 아무리 일본군이라도 굶어 죽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 하다.[42] 게다가 이 사람은 중위였고, 당연히 인육도 먹었다. 결국 분이 안 풀렸는지 전쟁이 끝나고 무타구치의 장례식에 찾아가서 깽판도 실컷 부렸다.[43] 중국 중앙일보의 종군기자로서, 무타구치가 있었던 임팔 전투에 있었다.[44] 파푸아뉴기니 지역의 라바울 같은 경우는 둔전에 성공했지만, 여기는 미군이 일부러 우회를 위한 섬 건너뛰기 작전의 일환으로 고립 상태의 적이 둔전을 하며 체력을 낭비하도록 방치한 경우이다. 농사 지으러 가는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라고 미군 조종사들에게 지령이 내려졌고 (단, 쌓아둔 수확물이나 창고, 식량을 수송 중인 트럭들은 마음껏 공격하게 했다.), 나중에 일본 항공기가 라바울에 전무한 상태에선 신참 조종사들을 라바울 위로 날아다니게 하며 실전 훈련까지 시켰다. 사실 라바울은 병력 8만 명에 유능한 지휘관 이마무라 히토시가 있어 방비가 철저했기에 미국 입장에서도 탈환하기엔 부담스럽긴 했다. 전후 미국 조사단도 라바울을 건너뛴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평했다.[45] 태우지 않으면 이미 훨씬 생명력이 강한 온갖 식물들이 점거한 채라 곡식이 잘 자랄 리가 없다. 토양 자체도 식물에 필요한 영양소 등이 이미 빠져나가버렸으므로 식물을 태워서라도 비료를 주지 않으면 농사는 불가능하다.[46] 전문가가 아니어도 전쟁사를 대강 읽어본 적만 있어도 실수로 보급을 안했다는 얘기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알 것이다. 적의 보급을 끊으면 전쟁에서 이기기 때문에 그걸 끊으려는 시도를 전쟁 때마다 항상 해왔다는 걸 역사가 증명하기 때문이다.[47] 1940~2001.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 솔은(1983)'에서 김좌진 연기.[48] 정조가 장수하고 조선이 개화에 성공하여 제국주의가 만연한 세계에서도 대한제국이 꿋꿋히 살아가고 있다는 평행세계 설정이다.[49] 그러나 무타구치 렌야는 적어도 자국 민간인들을 학살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원균은 왜군에 잡혔던 조선인 포로까지 죽여서 자신의 공적을 부풀리고자 했고, 이를 이순신이나 다른 장수들이 말리기도 했다.[50] 이 소설에서는 소련의 도움으로 남북이 분할되지 않고 미국아시아 방면 정보 수집과 소련-미국간 완충지대로서 친소 중립국으로서 독립했다.[51] 남일본으로 수출할 무기를 만들기 위해 공장이 풀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52] 실제로 '그리하여 대한독립군 무다구치 렌야가 공산 비적 김일성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는 문장이 나온다. 이 소설이 원래 작가가 무슨 마약을 했나 궁금해질 정도로 정신 나간 전개가 튀어나오는 걸로 유명하다.[53] 작중에서는 한국적인 이름인 모렴야로 나온다.[54] 원 역사에서의 행보를 생각하면 그냥 개그이지만 근육조선 세계관에선 근육을 키우는게 부모님에 대한 효도인만큼, 질병이나 노화 등 피치못할 사정이 아닌 고의로 근손실을 일으키는 행위는 죄악시하기에 무타구치의 발언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발언이다.[55] 러시아 제국 황제가 된 주인공이 전범재판을 참관하면서 무타구치를 보고 피식 웃었다고 언급되었다.[56] 사실 더 진격해봐야 일거리만 더 늘어날 뿐이니 더 이상 진격하기 싫어서 보급 부족을 핑계로 점령지에 눌러앉으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부하들의 생활에서도 사소한 문제만 생겨도 바로 고치려고 들던 것은 사실 '병사들이 이러이러하니 못 간다! 부대가 이 꼬라지인데 퍽이나 승전을 하겠구만!'이라며 진격을 거부하고 눌러앉을 핑계거리를 찾던 것이지만, 워낙 꼼꼼하게 상태를 살핀(그래야 윗선에 댈 핑계거리가 늘어나니까)것과 더불어서 부대의 총지휘관인 렌야 본인이 휘하 부대 검열을 적극적으로 한 덕분에 내리갈굼이 두려웠던 아랫단계 장교들이 군기를 잡으면서 부조리와 위생상태가 얼떨결에 해결되었고 이것 덕분에 부하들의 상태에 신경 쓰는 덕장으로 오해받게 된 것(...). 학살자는 아니어도, 그렇다고 인권에 눈을 뜬 것도 아닌데도 포로들의 대표들을 자주 만나면서 불편한 것이 없나 물어보며 챙겨주던 것도 같은 이유지만, 비이성적인 태평양 전선의 실태를 다른 부대에서 들어봐서 아는 포로들이었기에 포로 신분임에도 본인들을까지 챙겨주는 그의 모습에 모두 한 마음으로 감동해버려서 "진정한 군인이며 적이지만 존중해야 한다."라고 연합군에게 항변하며 적극적으로 증언을 하면서 연합군이 "태평양에서 인육을 먹던 것들이 왜 여기선 이렇게 문명인스러운거야?"라며 당황했다.[57] 원래는 수갑을 채워서 전범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병들이나 함께 지낸 연합군 포로들이나 한 마음 한 뜻으로 외치는 진정한 군인에게 수갑을 채우려던 것이 부끄러워진 연합군 장교들은 그를 전범으로써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연합군과의 전투중에 항복한 장군의 신분으로써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게 한다고 했다.[58] 현실의 나치즘주체사상에서 지도자 원리를 강화하고 인종차별을 줄인 사상이라고 이해하면 편하다.[59] 황도파는 천황이야말로 영도자라고 주장했지만 렌야는 민족혁명주의에 따르면 능력주의에 따라 집권해야 하기에 천황이 아니라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누가 맡아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했다가 찍혔다.[60]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합중국으로 개편되면서 바뀐 국명이다.[61] 렌야 본인의 능력은 둘째치고 정치 파트너로 같은 삼대오물 중 한 명인 스기야마 하지메를 끌어들인 시점에서 이미 망할 조짐이 보였다.[62] 원 역사에서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긴 했지만 31사단 자체는 퇴각하여 부대 자체가 증발한 수준까진 가지않았었다.[63]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을 개전하여 간접적으로 일본군의 백만대군이 넘는 군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듦, 임팔작전으로 8만명을 직접적으로 전투불능으로 만듦[64] 한동안은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모전 구렴야' 선생이라고 적혀져 있었는데 원래 ‘모전구’가 성이고 ‘렴야’가 이름인지라 ‘모전구 렴야’라고 쓰는 것이 맞겠지만 동아시아 특유의 ‘아호+성명’ 작명법을 의식한 듯 요상하게 띄어쓰기가 되어 있다.[65] 심지어 그 아래에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한국 광복군 비밀 요원 이라고 써있다.[66] 1번부터 5번까지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 이시이 시로, 무타구치 렌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연기한 김규철이다.[67] 건국훈장 대통령장은 대수장이기 때문에 어깨에 걸친 것으로 합성하는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