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776년 | 1777년 | 1779년 | 1781년 | |
조지 워싱턴 |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 소장 앤서니 웨인 | 사령관 헨리 리 3세 | 준장 대니얼 모건 | |
1781년 | 1787년 | 1800년 | 1805년 | 1813년 | |
소장 너새니얼 그린 | 존 폴 존스 |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 |
1813년 | 1814년 | ||||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 대령 제임스 로렌스 |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 |
1814년 | 1814년, 1848년 | 1814년 | |||
대령 루이스 워링턴 |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 소장 제이콥 브라운 | 소장 윈필드 스콧 |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 |
1814년 | 1815년 | 1816년 | |||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 소장 알렉산더 마콤 | 소장 앤드루 잭슨 | 대령 찰스 스튜어트 | 대령 제임스 비들 | |
1818년 | 1835년 | 1846년, 1847년, 1848년 | 1847년 | 1854년 | |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 대령 조지 크로간 | 소장 재커리 테일러 |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 중령 덩컨 잉그함 | |
1858년 | 1863년 | 1864년 | 1866년 | 1867년 | |
프레더릭 로즈 |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 |
1867년 | 1871년 | 1873년 | 1874년, 1904년 | 1883년 | |
조지 피바디 | 조지 F. 로빈슨 |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 존 혼 주니어 | 존 폭스 슬레이터 | |
1888년 | 1890년 | 1900년 | 1902년 | 1909년 | |
조셉 프랜시스 |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 중위 프랭크 H. 뉴컴 |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 라이트 형제 | |
1912년 | 1914년 | 1915년 | 1928년 | ||
선장 아서 로스트론 | 폴 H. 크라이봄 그 외 |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 찰스 린드버그 |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 |
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6년 | ||
토머스 에디슨 |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 소령 월터 리드 |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 링컨 엘즈워스 | |
1936년 | 1938년 | 1939년 | 1940년 | ||
조지 M. 코핸 |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 하워드 휴즈 | 목사 프랜시스 퀸 | 윌리엄 시넛 | |
1942년 | 1945년 | 1946년 | |||
롤런드 바우처 |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 준장 빌리 미첼 | |
1949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8년 | |
앨번 W. 바클리 | 어빙 벌린 | 조너스 소크 박사 |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 준장 하이먼 리코버 |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
로버트 고다드 | 로버트 프로스트 |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 밥 호프 | 샘 레이번 | |
1962년 | 1968년 | 1969년 | 1973년 | 1977년 | |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 월트 디즈니 | 윈스턴 처칠 | 로베르토 클레멘테 | 매리언 앤더슨 | |
1978년 | 1979년 | ||||
중장 아이라 이커 | 로버트 F. 케네디 | 존 웨인 |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 휴버트 험프리 | |
1979년 | 1980년 | 1982년 | |||
미국 적십자사 | 케네스 테일러 |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 베아트릭스 여왕 | 대장 하이먼 리코버 | |
1982년 | 1983년 | ||||
프레드 워링 | 조 루이스 | 루이스 라머 | 레오 라이언 | 대니 토머스 | |
1984년 | 1985년 | ||||
해리 S. 트루먼 | 레이디 버드 존슨 | 엘리 비젤 | 로이 윌킨스 |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 |
1986년 | 1987년 | 1988년 | |||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 해리 차핀 | 에런 코플런드 | 메리 래스커 | 제시 오언스 | |
1988년 | 1990년 | 1991년 | |||
앤드루 와이어스 | 로런스 록펠러 |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 대장 콜린 파월 | |
1994년 | 1996년 | 1997년 | |||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 프랭크 시나트라 | 마더 테레사 | 바르톨로메오스 1세 | |
1998년 | 1999년 | ||||
넬슨 만델라 | 리틀록 9인 |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 로자 파크스 | 시어도어 헤스버그 | |
2000년 | |||||
존 오코너 | 찰스 M. 슐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 나바호족 코드 토커 | |
2002년 | 2003년 | ||||
대장 휴 셸턴 | 토니 블레어 | 재키 로빈슨 | 도러시 하이트 박사 |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 |
2004년 | 2006년 | ||||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 터스키기 에어맨 | 달라이 라마 14세 | 바이런 넬슨 | 노먼 볼로그 박사 | |
2007년 | 2008년 | ||||
마이클 데바키 박사 | 아웅 산 수 치 |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 |
2009년 | 2010년 | ||||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 아널드 파머 | 무함마드 유누스 |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 |
2011년 | 2012년 | 2013년 | |||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 9.11 테러 참사 사망자 | 라울 발렌베리 |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 제1 특수임무단 | |
2014년 | |||||
둘리틀 특공대 멤버 | 미국의 공군 에이스 |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 시몬 페레스 | 모뉴먼츠 맨 |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제65 보병연대 | 잭 니클라우스 | 셀마 몽고메리 행진 |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 OSS | |
2017년 | 2018년 | ||||
밥 돌 | 래리 도비 |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 안와르 사다트 | |
2019년 | |||||
스티브 글리슨 | 캐서린 존슨 | 크리스틴 다든 | 도로시 본 | 메리 잭슨 | |
2019년 | 2020년 | 2021년 | |||
무명의 수여자들 | 그렉 르몬드 |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 | 제369 보병연대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 |
2022년 | 2023년 | ||||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 제6888 중앙우편대대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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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1b><colcolor=#fff> 1928년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수상자 로알 아문센 Roald Amundsen | |
본명 | 로알 엥겔브렉트 그라브닝 아문센 Roald Engelbregt Gravning Amundsen |
출생 | 1872년 7월 16일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외스트폴 주 보르게 | |
실종[1] | 1928년 6월 18일 (당시 55세) |
바렌츠 해 | |
국적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 [[노르웨이|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탐험가, 모험가 |
수상 | 허바드 메달 (1907) 프란츠 요제프 훈장 (1907) 찰스 P. 데일리 메달 (1912) 베가 메달 (1913) 의회 명예 황금 훈장 (1928) |
서명 |
[clearfix]
1. 개요
승리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행운이라 부른다. 패배는 미리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 찾아오며, 사람들은 이를 불운이라 부른다.[2]
노르웨이의 탐험가. 지구의 두 극점을 모두 최초로 정복한 사람이다. 인류 최초로 북서항로를 개척하고,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으며, 최초로 북극점 상공 비행에 성공했다.[3][4]
2. 생애
2.1. 조상
1668년 닐스 미켈쇤은 부유한 지주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농부였지만 부업으로 어부 일을 하다가 익사하였다. 하지만 그의 후손들은 계속 배를 타게 되었다. 그로부터 4대가 지난 18세기 후반, 아문 올센이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서 "아문센"이라는 가문이 생겨났다.[5] 아문센 가문의 자손들은 선장, 선박 제작자, 그리고 해운업자로서 활약하였다.아문센의 증조부 크누트 아문센은 조선소를 운영했다. 그는 일이 별로 없을 때는 영국제 쇄빙기와 벌초기를 모방하여 제작하였다. 로알 아문센의 아버지 옌스 아문센은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노예 시장에 관여했다가, 노예들이 탈출을 시도했을 때 얼굴에 도끼를 맞기도 했다. 아문센의 어머니는 사미족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설도 있는 상당히 와일드한 여성으로, 위에서 말한 옌스 아문센의 얼굴 상처를 직접 꿰매기도 했다고 한다.
2.2. 어린 시절
1872년 7월 16일, 오슬로 피오르드 초입인 보르게 지역의 톰타에 있는 오두막에서 태어났다. 로알 아문센은 옌스 아문센의 막내아들이었다. 막내 아문센은 어릴 때부터 세 명의 형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았고, 가족 소유의 조선소에서 인부 및 선원들과 친하게 지냈다. 어린 시절에 로알 아문센은 수공업자가 되고 싶어 해서 일터를 마치 본인의 집처럼 자주 드나들었으며, 조선소 인부 중 하나인 늙은이 올센에게 수공업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올센은 아문센에게 머리와 손 중에서는 머리가 더 쓸모 있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손과 머리를 다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고 한다. 아문센의 가족은 훗날 오늘날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로 이주하였고, 아문센의 아버지는 정치에 입문하여 왕실 관리가 되었다. 아문센은 9세에 김나지움으로 진학했으나, 평소 공부에는 흥미가 없는 성격이었는지라 학교 생활에는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14살 때이던 1886년, 영국과 노르웨이 사이의 바다를 항해하던 부친이 숨졌다. 로알의 형들은 집을 떠나 독립하여 각각 상인과 선원으로 일을 하였고, 로알은 모친과 단 둘이 지냈다. 1887년, 영국 해군 존 프랭클린 경의 탐험 보고를 손에 넣고 탐험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프랭클린 제독은 캐나다의 빙해 연안을 연구했고, 세 번째 북서 항로 횡단을 시도하다가 사망한 인물이다. 아문센은 그의 기록을 보고 "참 요상도 하지. 그와 그의 대원들이 참아내야만 했던 고통을 묘사해놓은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 나를 사로잡아 버리다니."라고 회상했다. 프랭클린 제독의 일대기는 15살 소년 아문센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일대기를 읽었을 때, 내가 느낀 열광적인 흥분은 나의 생애에 말할 수 없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제독에 대한 존경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의 계획에 부족함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1889년에 그린란드를 탐험하고 돌아온 노르웨이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Fridtjof Nansen)이 귀향하는 것을 보았다. 아문센은 평생 동안 난센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다. 1890년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오슬로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아문센의 어머니가 평소에 그가 의사가 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탐험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본격적으로 탐험가의 길에 들어선 것은 모친이 세상을 떠난 이후이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탐험가는 상당히 위험한 직업이라서 거기에 진출하기를 평소에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3년에,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폐렴으로 사망하면서 아문센은 의학 공부를 중도에 포기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탐험가로 본격적으로 진로를 잡아놨다. 물론 비록 배우다 말기는 했지만 이때 얻은 의학 지식은 그의 탐험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스무살이 되자 아문센은 노르웨이 해군에 수병으로 입대했는데, 아문센의 징병신체검사를 맡았던 해군 군의관은 어릴 적부터 꾸준히 스키와 축구로 단련된 아문센의 신체적 강인함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다른 장교들을 불러서 구경하게 했을 정도였는데, 너무 감탄한 나머지 이들은 아문센이 근시라는 것은 간과하고 합격 처리해 버렸다.[6] 그리고 아문센은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수병장으로 제대했다. 아문센은 해군 시절에 1891년에서 1892년까지 미합중국 해군의 로버트 피어리 제독과 함께 북그린란드를 횡단했던 에이빈 아스트루프의 강연을 듣고 크게 감명받기도 했다.
2.3. 청년기
1894년에 아문센은 바다표범 포획선 막달레나 호에 고용되었다. 그 뒤에는 발보르그 호에서 항해사 시험에 합격했다. 선원 생활을 하면서도 탐험 의욕을 유지하면서 노르웨이의 고지대인 하르당에르비다 고원을 가로지르는 스키 투어에 참가했다. 하지만 스키 투어를 하던 중에 침낭에 든 채로 밤새 내린 눈에 묻혀 죽을 뻔했다가 구출되고, 목표 지점을 100미터 남겨두고 눈이 많이 쏟아져서 온 길을 되돌아가는 삽질을 하기도 했다. 이때 며칠간 실종될 정도로 고생했기 때문에 엉성한 준비를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1896년까지 발보르그 호, 레온 호, 훌라 호, 얀센 호, 론 호를 거치면서 선원 경험을 쌓았다.1895년에 조타수 시험에 합격하였고, 병역 의무를 마쳤다. 이 무렵에도 아문센은 계속 탐험에 미쳐 있었다. 물개잡이배 '야손 호'를 타고 항해하고 있을 때, 야손 호가 영국령 그림스비에 도착하자 동료들은 선원을 위한 유흥 장소로 달려갔지만, 아문센은 항해 중 북서 항로에 관해 의견을 나누며 친분을 쌓은 선장과 함께 개인 도서관과 국립 도서관을 돌면서 북서 항로에 관한 고문서들을 모으고 정리했을 정도였다.
아문센과 야손 호 선장은 레오폴드 맥클린톡 제독의 보고문과 존 프랭클린 경을 찾기 위한 그의 수색 과정에 관한 자료들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아문센은 이 자료들로부터 북서 항로는 지금까지 탐험가들이 선택했던 것보다 더 남쪽에 위치한 루트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1897년에 항법과 당시 해상 공용어였던 프랑스어 수업을 받았다.
2.4. 벨지카 호 탐험
벨기에의 남극 원정대(1897 ~ 1899)에 합류했다가 돌아올 때 오슬로에서 찍힌 사진 |
하지만 남극해가 얼어붙는 바람에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때 탐험대는 굶주림과 괴혈병으로 몰살당할 뻔했다. 아문센은 선의[7]인 미국인 프레드릭 앨버트 쿡(1865~1940)과 상의해 펭귄과 바다표범을 잡아 식량으로 삼아서 위기를 넘겼다.[8] 이때 대장인 드 게를라슈는 물개 고기와 펭귄 고기를 먹는 것에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걸 금지하고 있었기에 하마터면 이들 모두가 괴혈병으로 죽을 뻔했지만, 게를라슈도 결국 괴혈병으로 쓰러져서 침실을 떠나지 못할 지경이 되자 선원들은 아문센과 쿡 박사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아문센은 기회가 오자마자 벨지카 호를 떠나 우편선을 타고 귀향해버렸다. 그리고 아문센은 아드리안 드 게를라슈의 무능함에 너무나 질린 나머지, 그 뒤로 평생 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게를라슈에 대해 첨언하자면, 그래도 벨기에에선 아문센 못지 않은 탐험가랍시고 온갖 찬양을 받았고, 그 결과 남극 벨기에 기지에 게를라슈 기지, 캐나다 북동쪽에 게를라슈 섬이라든지 온갖 탐험지나 지명에 그 이름이 들어가 있다. 물론, 국제적으로 아문센과 견주자면 무명이었지만... 게를라슈는 이후 그린란드나 남극 탐험에 나섰으나 여전히 펭귄이나 여러 고기에 대한 거부감을 남에게 강요하는 등 온갖 논란을 일으켜 1909년 그린란드 탐사 이후 극지방 탐험 일을 은퇴해야 했고, 자신의 탐험대 항해사이던 아문센이 세계 곳곳에 이름을 알릴 때 모든 탐험 활동을 접고 결혼해 아들을 낳아 책이나 쓰며 조용히 살다가 갔다.
게를라슈의 아들인 가스통 드 게를라슈(Gaston de Gerlache, 1919~2006)는 아버지가 남극 탐험을 망쳤다는 오명을 씻고자 딱 60년이 지난 1957년에 벨지카 호가 갔던 곳을 벨기에 탐험대를 이끌고 탐험했다. 그리고 남극기지를 세웠으나 도중에 수송기가 추락하여 하마터면 아버지 때보다 더 나쁜 상황에서 승무원들과 같이 조난당해 죽을 뻔했다. 그러다가 근처 소련 기지에서 보내준 항공기가 이들을 발견하여 겨우 구조될 수 있었고 이 와중에 무모한 일정을 잡았다는 비난을 받아 이후로 아버지와 같이 일찌감치 탐사대장을 그만두고 돌아와 책이나 쓰며 연구활동이나 하고 살아야 했다. 그나마, 이들 탐사대 일부가 남극에서 발견한 2,400미터짜리 산에 Mount Gaston de Gerlache, 즉 가스통 드 게를라슈 산이라는 이름을 지어줘서 남극에 그 이름이 영원히 남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으니 아주 실패한 인생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벨기에 측 찬양으로 이름이 지어진 섬이나 기지 이름이 있으니. 결국 아버지와 아들 모두 벨기에나 알아주지 해외에선 무명이다.
2.5. 선장이 되다
1900년에 아문센은 선장 면허를 취득했고, 6개월 동안 독일에 머물며 함부르크에서는 게오르그 폰 노이마이어 교수에게 자기학[9]를 공부했으며, 빌헬름스하펜과 포츠담에서는 각각 뵈르겐 교수와 슈미트 교수에게 기상학 관련 지식을 배웠다. 이렇게 끝없이 배우고 익힌 지식 덕분에 아문센은 팀 내에 또 다른 전문가를 영입하지 않고도 기상 자료와 지자기 자료를 전문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아문센 본인은 자서전에서 '어떠한 경우든 한번 해상으로 출범했다고 하면 탐험대는 이미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의 리더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후에도 그는 비행기를 사용하게 되면 직접 비행기 조종을 배우는 등 최대한 지도자를 나누지 않고 하나로 통일해서 하려고 노력했다.[10]1901년에 청어잡이 배였던 이외아 호를 구입했다. 이외아 호는 29년이 된 배로, 아문센 자신과 나이가 같았다. 5개월간 바다표범 사냥을 하면서 최초로 배를 지휘하였다. 1902년에는 다시 독일로 가서 빌헬름스하펜, 함부르크, 포츠담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2.6. 북서항로 정복
1903년 6월에서 1906년 10월까지, 아문센은 자신의 탐험대를 이끌고 북서항로 탐험에 나선다. 이외아 호에 여섯 명의 탐험대가 이번 탐험에 나섰다. 6월 16일 아침, 사실 아문센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채권자가 찾아와서 24시간 안에 찾아오지 않으면 배를 저당 잡고 사기죄로 감옥에 넣어 버리겠다고 위협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여섯 명의 동료들과 상의한 아문센은 그 날 자정에 오슬로를 출발해 버렸다.이 항로는 북대서양에서 캐나다 북부를 거쳐 알래스카에 이르는 항로인데, 워낙 항해하기 어려워서 존 프랭클린 탐험대를 비롯한 많은 탐험대가 실패를 맛보았다. 그러나 아문센은 극지방에 사는 원주민들에게 극지방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등의 철저한 준비를 통해 난관을 극복하였고, 마침내 북서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사실 아문센 이전에 다름 아닌 프리드쇼프 난센이 1890년대부터 이누이트들에게 생활방식을 배워 북극 탐험을 했던 적이 있는데 공교롭게도 노르웨이인 난센과 영국인 어니스트 섀클턴의 탐험과정을 아문센과 스콧이 따라하게 된다. 다만 난센과 섀클턴은 서로 경쟁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은 아문센의 북서항로 정복에 대단히 불쾌해 했고, 북서항로를 개척한 사람에게 주기로 했던 상금도 아문센이 아닌 존 프랭클린 수색대에게 줘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문센이 프랭클린을 잠깐이나마 존경했다는 걸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11] 하지만 북서항로 정복 후 아문센은 강연을 통해 많은 돈을 벌었고, 채권자들에게 졌던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다.
2.7. 남극점을 향하다
1908년의 로알 아문센 |
하지만 1909년, 그가 탐험에 착수하기도 전에 미국의 피어리 제독이 먼저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당시에는 보도되었다.[12] 이 소식을 들은 아문센은 엄청 분노했다. 어느 정도로 분노했냐면 남극점 탐험을 하고 쓴 책인 《남극》에서조차 '어릴 적부터 북극점 탐험을 꿈꿔왔던 내가 정반대 방향에 있는 곳에서 영광을 얻었지만 세상 누가 이런 정반대 방향의 꿈을 이룬 것을 더 좋아할까?' 라면서 애석하게 여기기도 했을 만큼이다.
이처럼 어릴 적부터 노르웨이에서 남극보다 더 가까운 북극점을 가장 먼저 가보고 싶어하던 그였기에 더더욱 분노했고 기왕이면 피어리가 거기서 확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막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정작 아문센의 사후,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사람 역시 아문센 본인이라는 설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는데 그 자신은 이를 모르고 죽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13]
또 1909년 아문센은 남극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노르웨이 변호사 레이프 카르스트베르의 부인인 시그리 카르스트베르를 알게 되어, 그녀와 내연의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남극에 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관계를 정리했다. 9월 15일에는 남극 정복을 위한 훈련을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담배를 끊었고 정복이 완수될 때까지 한 대도 피우지 않았다. 여간 저런 사정 때문에 할 수 없이 아문센은 계획을 변경하여 남극으로 배를 돌렸고, 같은 곳을 목표로 삼았던 영국 해군 장교인 로버트 스콧 대령과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세계 최강인 영국과 반대로 1905년 독립한 약소국이자 유럽 최빈국이었던 노르웨이의 자존심 대결로 이어졌다.
2.7.1. vs 로버트 스콧
자세한 내용은 로알 아문센 vs 로버트 스콧 문서 참고하십시오.2.7.2. 로버트 피어리
해당 항목으로.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갔다고 알려져 있으나 후일 그는 북극점에 40 km 떨어진 곳까지밖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고, 결국 북극점 또한 훗날 아문센에게 최초로 정복된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정확히는 상술했듯 이름 없는 어느 이누이트족이 가장 먼저 왔다 갔고, 기록으로 처음 남긴 것이 아문센이다.2.7.3. 대인군자 아문센
피어리와 달리, 아문센은 남극점에서 경도 및 방위각을 꼼꼼하게 측정하여 증거로 내놓아 일절 논란이 없었다. 도착한 후 하루 동안 경도 및 방위각을 측정했고, 처음 도달했다고 생각한 남극점이 사실 남쪽 9 km 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이동해 남극점 캠프 폴하임(Polheim)을 설치했을 정도였다. 게다가 스콧이 남극점 부근에 도착했을 때, 이미 남극점 부근에 이르러 아문센 탐험대가 지나간 흔적을 발견하고는 "최악의 사태다. 노르웨이인들이 이미 우리를 앞질러 남극점에 도착했다. 우리도 내일 남극점에 도착한 후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일기에 기록했고, 심지어는 아문센이 스콧에게 보낸 '우리가 먼저 남극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기록한 편지까지 가져가면서 제대로 증인 노릇도 해주었기에 논란이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문센은 이렇듯 본인의 라이벌 덕분에 오히려 본인의 업적을 확실하게 인증하게 되었다.게다가 거친 성격이네 뭐네 영국이 주로 언플로 씹던 아문센은 극지방 현지인들을 잘 대해주었고 그들을 이용해 돈 벌어먹는 짓을 저지른 적이 없다.[14]
게다가 아문센은 개인적으로 사냥을 즐기지도 않았고 동물은 자연 상태 그대로 살아있는 것이 더 아름답다고 여겼다. 남극점 탐험 도중 햇빛이 강렬한 오전에 푹 쉴 때, 할 게 없어서 지루해진 탐험대원들이 사냥에 재미붙여서 필요 이상으로 동물들을 잡아대자[15] 필요 없이 동물을 잡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던 걸 봐도 자연이나 동물에 대하는거에 있어서 이견의 여지가 없는 대인군자였다.[16] 물론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긴 했지만 이건 뭐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2.7.4. 곰썰매?
1907년 아문센이 아직 북극점을 목표로 하고 있었을 때 그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로 비행기도 아니고 순록도 아니고 개도 아닌, 북극곰이 끄는 썰매로 북극점까지 도달하는 것! 필요한 곰은 총 21마리로 예상했다.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아문센은 독일의 유명 동물 거래상이던 칼 하켄베크의 도움으로 북극곰을 얻었다. 선행 조달한 이 곰들은 노르웨이에서 선행 훈련을 받고 9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썰매 끄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조련사가 북극행을 거부하는 바람에 아문센은 곰썰매 계획을 포기하고 이전에 사용했던 개썰매를 다시 이용하기로 한다.
사실 이 계획이 좌초되었으니 망정이지 이 계획이 진행되어 곰썰매로 가다가 자칫 곰의 야생성이 일어난다든가 혹은 만약, 북극 탐험에서 곰썰매가 성공했다면 남극에 갈 때도 곰썰매를 이용했을 수도 있으며, 그렇게 남극에도 곰썰매를 끌고 갔다가 실패한다면 아무 좋은 꼴은 못 봤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총과 작살과 칼을 가지고 다녔기에 당하기만 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곰의 난폭함을 보자면 아마 대원들을 대다수 잃었을 것이다.[17] 공교롭게도 훗날 에든버러 동물원에 닐스 올라브의 선조가 되는 펭귄들을 기증하는데, 그 동물원은 자유 폴란드군과 같이 영국에서 말년을 지내게 된 보이텍도 지내게 되어, 로알 아문센이 천수를 누렸다면, 보이텍으로 북극점 정복이란 망상이 다시 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출처
2.7.5. 남극점 정복
1910년 6월 2일,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와 모드 왕비가 프람 호를 방문하였다. 1910년 8월 9일, 아문센은 프람 호에 19명의 승무원을 싣고 남극으로 출발했다. 처음에는 목적지를 북극이라고 하였고, 선원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9월 6~9일, 마데이라 제도에 정박하였을 때 아문센은 승무원들에게 자신들의 목표가 남극임을 알렸다. 프레스트루드와 얄마르 요한센이 뒤처졌고, 쇠약해진 프레스트루드는 요한센의 보살핌 덕분에 간신히 베이스 캠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한센은 베이스 캠프로 돌아온 뒤에 공개적으로 아문센을 비난하고 나섰다.
이 상황이 지휘권에 좋지 않다고 판단한 아문센은, 요한센을 본대에서 하차시키기로 마음먹고 요한센을 프레스트루드의 지휘 아래 두어서 '킹 에드워드 7세 랜드'를 탐험하게 했다. 나이도, 경험도 적고, 군대 계급도 소위였던 프레스트루드는 중대장이었던 요한센보다 낮았다. 요한센은 아문센에게 절교당했고 고립되었다.
1911년 1월 14일, 15,938해리의 항해 끝에 프람 호는 발퓌시 만에 도착했다. 개 110마리와 9명의 대원이 육지에 남았다.
2월 14일, 남위 80도에 최초의 비축물 저장 기지를 구축했다.
2월 22일, 다른 비축물 저장 기지를 위해서 출발했다.
3월 3일, 남위 81도에 비축물 기지 구축.
3월 8일, 남위 82도에 비축물 기지 구축.
이로써 남위 80~82도에 1.5톤 이상의 비축물을 저장했다.
4월 21일부터 기지에 틀어박혔으며, 아문센 일행은 4개월 동안 해를 거의 보지 못했다. 평균 기온은 영하 38도, 최저 기온은 영하 60도에 육박했다.
8월 24일에야 다시 해가 떴다.
9월 8일~16일, 아문센은 8명의 대원, 7대의 썰매로 남극으로 출발하였으나, 눈보라가 불어닥쳐 돌아오고 만다.
10월 20일, 5명의 대원, 4대의 썰매, 그리고 48마리의 개와 함께 남극으로 출발했다.
12월 8일, 섀클턴이 세웠던 남위 88도 23분에 도달했다.
12월 14일 15시 무렵, 아문센 일행은 남극점(남위 90도)에 도착했다.
12월 18일 귀향을 위해 출발했다.
1912년 1월 26일, 99일의 기간 동안 1,400마일의 행군을 한 끝에 아문센 일행은 새벽 4시경 무사히 남극 기지 프람하임에 도착했다.
2월 3일, 호주 태즈매니아 주 호바트를 목적지로 하여 프람 호가 출발했다.
3월 7일, 프람 호는 호주의 호바트에 도착하였다. 사이가 나빠졌던 요한센은 여기서 프람 호를 떠나 다른 루트로 노르웨이로 돌아갔다.
2.7.6. 결과
아문센은 1911년 12월 14일에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했고, 단 한 명의 대원도 잃지 않고 생환했다.그러나 스콧은 한 달 뒤인 1912년 1월 18일에야 남극점에 도착했고, 거기서 아문센이 남기고 간 노르웨이의 국기와 편지를 보았다. 기진맥진한 스콧 탐험대는 무거운 발을 끌며 귀로에 올랐지만, 이들은 모두 사망했다. 추위와 식량부족에 시달리며, 길까지 잃고 눈속을 걷다가 차례차례 죽어간 것이다.
아문센과 스콧의 승부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았는데, 거기에는 대해서 로알 아문센 vs 로버트 스콧 문서를 참고할 것.
2.8. 북동항로 탐험
1912년, 아문센은 남극의 발견 과정을 "남극 발견"이라는 저서로 집필하였고, 이 원고는 남극에서 돌아온 직후에 출판되었다. 돌아온 아문센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처음에 북극으로 간다고 했다가 남극으로 목표를 바꾼 것쯤은 난센이나 노르웨이 국회나 국왕이나 그 밖의 여러 후원자들에게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어니스트 섀클턴을 제외한 영국인들은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영국을 방문한 아문센을 철저하게 냉대하고 조롱했다.[18]
1913년, 아문센은 미국, 캐나다, 유럽에서 강연을 가졌다. 1914년 여름에는 노르웨이 최초로 민간인 조종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자격증을 따면서 아문센은 이륙하자마자 10~20미터의 고도에서 땅으로 추락하는 엄청난 착륙 사고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별로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면서 잔해에서 기어나왔고, 얼마되지 않아 곧바로 비행기를 탔다고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아문센은 자신이 독일에서 받았던 모든 훈장을 반납하였다. 그리고 군용물자 수송 선박의 선주로 일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전쟁은 탐험가로서 아문센의 인생에는 큰 방해가 되었지만, 대신 1915년에 해운업자로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2.9. 북동항로
1918년, 아문센은 직접 설계도를 그리고 자비를 들여서 건조한 마우드 호[19]를 타고 북극 탐험에 나섰다. 하지만 이 탐험은 성과가 좋지 않았는데, 아문센은 추락 사고로 어깨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 그 일주일 뒤에는 어미 북극곰 한 마리에게 습격당해 쓰러졌으나 데리고 다니던 개가 아문센을 구해주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이때 입은 어깨 부상이 상당히 심각해서 3년 뒤에 시애틀에서 진단을 했을 때는 팔을 못쓰게 될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고, 몇 달 동안 재활 훈련을 받기도 했다.게다가 항해 도중에 스웨덴제 파라핀 램프의 결함으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손 풍로를 이용해서 기름을 가스로 전환시켜 관측 공간의 조명과 난방을 동시에 담당하는 이 램프는 결함 때문에 독한 가스를 내뿜고 있었고, 관측 공간에는 환기에 필수적인 창문도 없었다. 가스 중독으로 죽기 직전에 살아난 아문센은 심장에 통증을 느끼지 않고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달이 걸릴 지경이었다.
1920년 7월 27일에는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지휘가 불가능해졌으며 도저히 북극에 도달할 수 없었다. 1922년 2월에 아문센은 북동항로만 항해하고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팀 동료조차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 탐험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1922년에는 런던에서 한 심장 전문의에게 오래 살고 싶으면 탐험을 그만두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9달 뒤인 1922년 11월, 아문센은 개썰매를 끌고 알래스카 횡단에 나서 눈 속에서 하루 50마일을 달려 총 800마일을 행군했다.
2.10. 북극을 날다
1923년경 51세의 아문센[20][21] |
1924년 여름에 아문센은 호콘 H. 함메르와 공동으로 사업을 한 것이 화근이 되어 파산하고 만다. 시애틀에 사는 호콘 H. 함메르라는 덴마크인은 아문센의 전권을 위임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문센 몰래 아문센 이름으로 방대한 규모의 채무 계약을 하였고 이 때문에 파산을 당하고 만다. 언론에서는 웨인라이트에서 한 비행 시도를 비판하였고, 빚 때문에 20년 넘게 그에게 책자를 조달해주었던 형 레온과도 갈라서고 만다.
1924년 가을, 아문센은 다행히도 꼭 그를 후원하고 싶다고 찾아온 미국인 링컨 엘즈워스와 만나서 그의 후원을 받게 된다. 1925년 5월 21일, 아문센과 링컨 엘즈워스, 팀원들은 두 대의 도르니에 Do J 비행정(기체번호: N24, N25)로 북극을 향해 비행했다. 그러나 두 기체 모두 북위 87도 44분에 비상 착륙하였고,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지만 N24 기체는 착륙 과정에서 손상을 입어 현장에 유기되었고 남은 여섯 명의 남자들은 3주 넘게 500톤의 얼음과 눈을 치워서 임시 활주로를 만든 다음 길이 17미터가 넘고 중량이 3.3톤에 달하는 N25 기체를 180도 돌려 이륙 준비를 마친 다음 7월 5일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유럽 본국에서는 한달 넘게 탐험대의 소식이 끊기면서 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전원 살아 돌아왔으니 축제 분위기였다고.
1926년 봄, 아문센은 미국을 횡단하면서 N24와 N25를 이용한 탐험 시도에 대해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이때, 옛날 벨지카 호에서 아문센과 함께 탐험했던 프레드릭 앨버트 쿡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하게 되어 있었는데, 경영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형을 받아 감옥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문센은 캔자스 시티를 지나다가 쿡이 가까운 포트 리븐워스 국립교도소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자, 옛 동료 쿡을 위해서 시간을 내서 교도소를 방문하여 그를 면회하였다. 아문센은 그의 통찰력 덕분에 벨지카 호에서 목숨을 건졌다고 여겨서 지금까지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아문센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초대 강연이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
2.11. 북극 횡단 비행
아문센은 비행기보다는 저렴한 편이었던 비행선을 준비하기로 한다. 1926년 이탈리아의 비행선 제조기술자인 움베르토 노빌레 육군 대령과 함께 노르게 1호라고 이름 붙인 비행선으로 북극 비행에 도전했다. 원래는 이탈리아 측이 그냥 제공한다는 조건을 붙였으나, 이탈리아의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국기만 붙이고 가야지 비행선을 제공한다는 요구를 했다. 이에 밥맛 떨어진 아문센이 노르웨이 측에 하소연하자 국왕 하콘 7세는 기꺼이 비행선 구입가인 7만 5천 달러를 내줘 비행선을 아예 구매했다.1926년 5월 11일에서 14일까지, 아문센은 노르게 호를 타고 스피츠베르겐에서 알래스카까지 비행하였다. 1926년 5월 12일에는 북극점에 도달한 후 그대로 하늘을 가로질러 북극 횡단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노르게 호가 출발하기도 전에 리처드 버드가 이미 비행기를 타고 북극점 상공을 비행했다고 공식 발표해놓은 상태였다. 노르게 호의 비행을 준비하던 아문센은 이에 대해 실망을 금치 못했지만, 오히려 버드를 축하하고 북극점 상공 두 번째 비행에 도전해서 성공했다. 버드가 돌아온 직후부터 버드가 정말로 북극 상공에 도달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 것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대인군자다운 행동이라고 할 만했다.
버드의 비행이 의심을 받은 것은 북극까지의 거리를 고려할 때 버드의 비행에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아서 과연 그 시간 내에 북극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가능한지에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회의론자들은 버드가 공중에서 적당히 빙빙 돌며 시간을 때우다가 돌아왔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버드는 바람이 도와준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돌아왔다고 반박했다. 이 논쟁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며, 1998년에 버드가 비행 당시에 남긴 기록이 출판되면서 다시 불이 붙었다. 이 기록을 보면 버드가 제자리에서 빙빙 돈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북극을 향해서 날아간 것이 분명하며, 북극점에 도달했을 때의 환호 등이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적당히 빙빙 돌다가 돌아왔다는 주장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록은 동시에 회의론자들의 강력한 안줏감이 되었는데, 버드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에 뒷바람이 불어서 버드의 비행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기상 악화로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다가 다시 마음을 바꿔서 북극점 쪽으로 날아가는 등의 일이 있었던 점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버드가 북극점에서 위치를 계산한 부분은 인위적으로 지워져 있는데, 이는 버드가 사기를 쳤거나 나중에 착오를 알아차리고 삭제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 따라서 버드와 아문센 중 누가 최초의 북극점 상공 비행자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으며, 리처드 버드가 공식 보고서에 제출한 육분의 기록과 실제 일지에 적은 육분의 기록이 불일치한다는 것도 밝혀지면서 버드의 주장이 신빙성을 크게 잃은데다가 일지에 기록된 상황으로는 버드가 그 시간에 북극점에 갔다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노르게 호의 비행 쪽이 인간 최초의 북극점 상공 비행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또한 피어리와 버드의 주장도 모두 거짓으로 판명됨에 따라 현재는 최초의 북극점 도달자도 로얄 아문센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해졌다. 공교롭게도 피어리와 버드 둘 다 미국인이라 미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결과가 된 셈이다.
하지만 이것과는 별개로 아문센은 동행했던 노빌레와 당시 엄청난 갈등을 빚으며 원수 지간이 되고 말았다. 아문센의 주장에 따르면 노빌레는 이탈리아군 장교인 자신의 신분을 내세우면서 협의를 거부하기 일쑤였고, 이탈리아인, 노르웨이인 하는 식으로 차별을 했다고 한다. 아문센은 이후 1927년에는 우라니엔보르그에 칩거하면서 자서전 "탐험가로서 나의 삶"을 집필했는데, 어찌나 노빌레에게 신경을 썼던지 이 책에서는 자서전 전체의 ⅓ 이상을 노빌레와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데 할애하기도 했다.
2.12. 최후
1928년 5월, 노빌레는 자신이 제작에 참여한 이탈리아 호라는 비행선을 타고 북극점으로 갔다가 조난당했다. 북극 통과 비행은 마쳤으나 북위 81도 선상에서 이탈리아 호가 추락하여 조난당해버린 것이다.당시 노빌레는 아문센이란 이름에 가려진 것에 불만을 품고[23] 아문센이 없더라도 나홀로 대장으로서 얼마든지 북극점에 간다고 하여 무리하게 계획을 추진했다. 이를 본 무솔리니는 아무래도 너무 성급해하는 것 같으니 일단 보류하라고 요청했지만 노빌레는 이를 묵살하고 출발했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분노하여 그가 조난당하자 자업자득이라며 아예 모른 척했다.
1928년 5월 25일, 한 환영파티에서 아문센은 노빌레가 비행선 "이탈리아 호"와 함께 추락했다는 사실과 생존자들이 보내온 최초의 조난 신호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노빌레가 보낸 조난 신호를 보고, 영국과 미국, 노르웨이, 소련까지도 노빌레를 구조하려고 하였다. 약 300척에 달하는 배와 비행기가 실종된 이탈리아 호의 승무원들을 찾는 데 총동원되었다.
무솔리니도 태도를 바꾼다. 노르웨이 측이 이탈리아와 합동으로 구조대를 보내기로 하지만 무솔리니는 노빌레가 아문센에게 구원받는 건 불쾌해 할 테니 그를 빼버리지 않으면 같이 못 간다라는 억지 요구를 하여[24] 라르센이 대신 노르웨이-이탈리아 합동구조대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아문센은 이번에는 자신이 성급하게 일을 서두르면서 결국 자신이 죽게 되었다. 프랑스 측에서 뒤늦게 라탐 47(Latham 47) 비행정을 제공하자, 프랑스 팀 구조대장으로 나서서 구호품을 두둑히 비행기에 싣고 노르웨이 트롬쇠를 떠나 기꺼이 북극점으로 갔지만 문제가 심각했다.
조종석이 노출된 복엽기 라탐 47형 비행정은 추위에 약해서 극지방 비행은 무모했다. 게다가 사흘 내내 비행기 조종사들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피로와 악천후에 시달리며 비행해야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스콧의 최후처럼 아문센도 이런 무모한 준비를 하면서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1928년 6월 18일 오후 4시쯤, 바렌츠 해에서 그가 탄 비행기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아문센은 돌아오지 않았다.
노빌레는 나중에 구조되었지만, 아문센은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25][26] 위대한 탐험가의 실로 허무한 최후였던 것이다.
과거 남극점 정복 경쟁에서 패해 아문센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영국에서는 그의 죽음을 접하고는 사망 축하 파티까지 연 바람에 여러 국가에서 비난을 받았다. 반대로 노르웨이에서는 국왕이 대리인을 보내 자국의 영웅이자 위대한 탐험가였던 아문센을 추모하며 국장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
1928년 8월 30일, 쿠에르 연안 항해용 소형 동력선인 브로드 호가 투쉬보그에 못 미친 지점에서 라탕 기의 활주 부품 조각을 발견하고, 1928년 10월 13일 레이프 호가 라탕 기의 연료통을 발견했다. 그것이 아문센의 마지막 흔적으로,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아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아문센은 아무래도 첨단 비행기 조종이나 그쪽에 대해선 무지해서 그런지 개썰매 같은 탐험 때와 달리 준비를 철저하게 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27] 또는 스콧과 관련된 트라우마 때문에 서둘렀다는 설도 있다. 아문센은 스콧의 죽음에 부채의식을 느끼고 있었고[28], 이 때문에 노빌레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구조 비행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가 아니라도 기본적으로 조난이라는 상황은 시시각각 생명이 위협당하는 상황이고, 노빌레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아문센으로서는 알 수 없었으므로 최대한 서둘러 구조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1928년 6월 23일, 노빌레는 원래 25명이었던 팀원 중 단 6명과 함께 스웨덴 출신의 조종사 룬드보리와 쉬베리에게 구출되었다. 7월 12일에는 나머지 이탈리아 출신 생존자들이 소련 해군의 쇄빙선에 구출되었다.
살아 돌아왔지만 노빌레의 말년 역시 평탄하지 못했다. 아문센을 시기해 무모하게 준비도 제대로 안하고 성급하게 출발했다가 아문센을 죽게 했다는[29] 비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자기 명령을 무시하고 가 있던 그를 무솔리니는 재판까지 세워두며 모욕을 주었다. 거기다 수사 과정에서 노빌레의 실수로 비행선이 추락했고, 노빌레가 구조를 받을 당시에 자신의 팀을 사고 장소에 그대로 남겨두었다는 것이 밝혀져서 군인으로서 비겁자라는 오명까지 드러나 더욱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더불어 육군에서도 불명예 전역당했기에 연금도 전혀 받을 수 없었고 이탈리아의 수치라는 이탈리아 언론 보도까지 나오면서 아내에게 이혼당하고 친척들에게도 외면받았다. 노빌레는 1931년에 소련으로 가서 스탈린의 요구대로 비행선을 만들며 살아갔다. 그러다가 1939년에 미국으로 가서 살았는데 그냥 조용하게 숨듯이 살았다. 그리고 무솔리니가 몰락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조국 이탈리아로 돌아왔지만 조용하게 살았고 1970년대 언론이 인터뷰를 하러 찾아오자 화를 내면서 아무 말도 할 게 없다고 내쫓았다.
그렇게 살다가 극소수 지인들이 보는 자리에서 아문센이 죽은 지 딱 50년 지나, 1978년 93세 장수를 누리며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온갖 욕을 다 얻어먹으면서 아내에 친척까지 죄다 그와 인간관계를 끊어버리고, 돈도 제대로 못 벌고 심지어 그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국가 망신을 줬다고 대못이 박힌 채로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야 했으니, 그다지 반갑지는 않은 장수였을 것이다.
3. 역사적 평가
남극 탐험 과정에서 영국 해군 대령인 로버트 스콧과 경쟁관계에 있었고, 이 당시의 이야기(아문센 vs 스콧)가 널리 회자되며 스콧과 비교되어 역사적 평가대상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보통 2등이 1등에게 가려져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은데, 이 사람은 반대로 2등에 가려졌던 1등이라는 평가가 있다. 당시 초강대국이던 영국이 자국의 명예를 위해 패자인 스콧을 낭만적인 탐험가로 포장을 하며 더 크게 띄웠고 승자인 아문센 뒤에 스콧의 이름을 억지로 덧붙이면서 아문센-스콧이란 이름으로 남극 여기저기에 이름을 지었을 정도로 로버트 스콧에게 가려진 비운의 인물이라는 것.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반론도 있다. 왜냐하면, 아문센은 자신의 활동 시절에도 남극점 정복을 비롯한 탐험가로서의 업적으로 충분히 많은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았고, 그의 업적이 생전에 묻히거나 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아문센의 라이벌이었던 로버트 스콧이 자기 모국의 국력 덕분에 과분할 정도로 고평가되었지만, 영국의 영원한 앙숙 프랑스가 가만 있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아문센이 스콧을 이겼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하여 그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덕분에 남극점의 최초 정복자가 아문센이라는 사실은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유럽 본토에서는 영국의 정신승리에 기반한 역사왜곡이 별로 먹혀들지 않았다. 영국의 과장된 주장을 제외하면 아문센의 업적과 명성, 그리고 그 지위는 확고하다. 스콧이 유명한 것도 엄밀히 말하면 아문센에게 묻어갔기 때문에 유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30]
스콧이 너무 잘 알려진 거지 아문센의 업적은 예나 지금이나 딱히 묻혔던 적은 없다. 단지 세월에 따라 부침이 좀 있었을 뿐이다. 그저 과거에는 스콧의 비극적이고 극적인 최후, 남극 연구 등에 초점이 맞춰져서 탐험에만 신경썼던(그래서 별로 극적이지 않았던)[31] 아문센이 세간의 관심을 덜 받았으나, 이후 아문센의 합리성과 철저한 준비성, 그리고 이를 통한 대원들의 안전한 귀환 성공이 높이 평가받게 된 것이다.
스콧이 미숙한 계획, 탐험 방식으로 인해 자신과 전 대원이 귀환하지 못하는 참사가 발생했음에도 과학적 탐구에 집중했다든지, 동료들을 아꼈다든지 하는 점으로 부각되어 알려졌던 반면에, 오로지 남극점 정복밖에 목적이 없었다면서 아문센은 비하되었다. 그러나 스콧의 어리석음으로 자신과 휘하 대원들 모두가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엄연히 사실이었고, 이후 합리주의가 대두되며, 실용적으로 따지자는 움직임이 일면서 뒤늦게나마 아문센의 위대함이 다시금 인정받게 된 것이다.
여기에 실제로 스콧이 과학적 탐구를 한 것은 사실이고 이것이 남극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아문센 vs 스콧 문서에서 나오듯 남극점 정복에 집중해야 할 처지에 이것저것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져서 오히려 탐험의 목적이 뭔지 정확하게 잡히지 못한 독이 되었다. 더욱이 가뜩이나 수송이 개판인 마당에 스콧은 여러 광물 등을 수집해서 가져가는 일까지 벌였다. 과학 탐구가 그렇게 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남극점 정복한 후에 다시 와서 해도 될 것을 굳이 한번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심지어 1920년대까지 영국은 학교에서 스콧이 남극의 발견자라고 가르쳤으며 아문센의 이름은 한 마디도 올리지 않고 완벽하게 무시했다. 이걸 영국에서 공부하던 한 노르웨이인 학생이 발견하게 되었고, 결국 아문센과 노르웨이에까지 알려졌다. 이후 영국은 세계적으로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결국 잘못을 인정하고 교과서 내용을 사실대로 바꿔야 했다. 오히려 아문센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할 영국 탐험가는 어니스트 섀클턴으로 그는 비록 남극 정복에 실패했지만, 그는 마치 신이 사람을 일부러 죽이기 위해 만든 듯한 환경을 뚫고 팀원 및 밀입한 인원까지 전원 무사귀환시킨 것[32]에 아문센은 그에게 찬사를 보냈고 섀클턴 또한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문센을 옹호한 영국인이었다.
로버트 피어리의 북극점 정복이 허위로 밝혀지고, 버드의 탐험도 의심받으면서 아문센이 북극점을 정복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렇게 아문센은 평생의 한이었던 북극점 정복을 사후에나마 인정받았고, 양극점 최초 정복이라는 불멸의 업적을 달성한 탐험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남극 탐험 라이벌이었던 스콧의 평가가 현대에 와서 여러 이유로 인해 낮아지고, 로버트 피어리의 인종차별적 언행과 여러 만행들이 알려지며 역사적 평가가 추락한 반면 아문센은 오히려 세월이 흐른 다음 더욱 고평가를 받게 되었다.
4. 이야깃거리
킹 윌리암스 섬의 조우 헤이븐(Gjøa Haven)에 아문센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혼혈 이누이트들이 나타났다. 아문센의 북서항로 탐험 때 만든 아이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Y-DNA 분석 결과 부계가 아문센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문센이 아닌 함께 간 대원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33]모든 이누이트는 아니지만 일부 이누이트 사회에서는 손님이 찾아오면 극진한 대접과 더불어 아내를 들여보내기도 하는데 이 과정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보인다. 좁은 공동체 사회에서 근친상간을 막기 위해 외부의 혈통을 들여오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보면 생각보다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아문센에게 애인은 있었으나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은 없었고 가족도 형님들과 어머니 외가와 아버지 친가의 일부 친척 밖에 없었다.
아문센이 스콧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자기한테 있다는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았으며(그러나 아문센 본인은 스콧을 많이 배려해줬는데 정작 스콧이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죄책감이 뒷날 아문센이 조난을 당해 사망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영국에서는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으로 아문센을 헐뜯었는데, 이게 우습게도 아직도 아문센이 개를 잡아먹은 것이 문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어니스트 섀클턴 항목에도 나온 책 인듀어런스를 쓴 내셔널 지오그래픽 기자인 캐롤라인 알렉산더는 2011년 9월호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에서 작게나마 아문센에게도 개를 잡아먹었던 문제가 있다라고 쓰고 있다.[34] 물론 이는 일방적인 인신공격, 헐뜯기에 지나지 않는다. 100년 전의 장비와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요즘의 시각으로 단정하기 때문이다.
탐험대 대장으로서는 훌륭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유머도 있는 인물이었지만, 대중 앞에 나서는 것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강연 활동으로 돈을 벌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는 강연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강연을 돌면서도 자신이 강연하는 기계가 된 것 같다며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노르웨이 해군의 이지스 호위함인 프리드요프 난센급 2번함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따 로알 아문센함이라 명명되었다.
아문센이 실종된 후 아문센과 악연이 있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베니토 무솔리니는 비록 노르웨이를 침공하지 못했지만 결국 동맹 파트너인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에 의해서 1940년 4월 점령당하게 되면서 무솔리니의 입장에서는 대리 복수를 해 준 셈이 되는 것이다.
5. 관련 링크
- 아문센 두산백과
- 아문센 영어 위키피디아
- 아문센 노르웨이어 보크몰 위키피디아
- 아문센과 스콧 내셔널 지오그래픽
- 2016년 12월 14일 구글 두들로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 105주년을 기념하는 로고가 걸렸다. 해당 두들 페이지
[1] 사실상 사망.[2] 원문: Victory awaits him who has everything in order, luck some people call it. Defeat is certain for him who has neglected to take necessary precautions in time; this is called bad luck.[3] 다만 중장년층 이상은 아직도 아문센이 남극점 최초 도달로만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이전 세대는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최초로 도달했다고 알려진 시절에 정보를 접했기 때문이다.[4] 정확히 말하면 북극점 최초 도달도 옳지 않다. 북극에 살던 이누이트들이 이미 그곳을 지났었기 때문. 물론 원주민이 아닌 외지인으로서는 최초 도달이 맞긴 하다.[5] 북유럽에서 성씨가 대중화된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당히 늦었다. 아문 올센의 후예들이 비로소 '아문의 아들'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토르의 본명이 '토르 오딘슨'인 것과 마찬가지다.[6] 아문센은 탐험 준비의 일환으로 입대하기를 원했으나, 본인의 심한 근시 문제 때문에 탈락할까봐 걱정했다.[7] 선박에 배속되어 선원과 승객의 건강을 책임지는 의사[8] 신선한 날고기를 먹어 비타민을 섭취하는 것도 괴혈병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 육식동물이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도 날고기에 있는 비타민 덕분이고, 범선시대에 괴혈병에 걸린 선원들이 쥐를 잡아먹어 괴혈병이 호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9] 자석의 성질, 자장(磁場)및 지구의 자기(지자기, 地磁氣)이론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가리킨다. 이러한 지구의 자기를 통해 나침반을 사용할 수 있다.[10] 지도자의 이원화는 자칫하면 그룹의 분열을 촉발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이 때문에 실패한 케이스는 수두룩하다. 나폴레옹이 괜히 잘난 장군 둘이 지휘하는 것보다 못난 장군 하나가 지휘하는 게 더 낫다고 한 게 아니다.[11] 이건 약과다 이후의 아문센이 남극점을 정복하는 등의 행보에 제대로 열폭한 영국은 어떻게든 아문센을 깎아내리지 못해서 안달이었고 후술하겠지만 그가 죽자 기념 파티를 열 정도로 엄청난 추태를 보였다.[12] 피어리의 북극점 정복에 대해 의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그로부터 80여 년이 지난 1990년대부터이다. 이전에는 피어리의 행적에 의문을 제기해도 흔히 있는 음모론처럼 치부되어, 세간으로부터 큰 관심을 받지 않았다.[13] 피어리의 일지를 조사한 결과 피어리는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현재 업계의 공식적인 입장이다. 현재는 피어리의 최초 북극점 도달 뉴스를 냈던 신문사조차 이를 취소했을 정도.[14] 1903년에 이누이트들과 웃으며 찍은 사진을 봐도, 그들의 옷을 입고, 이글루를 만들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찍은 사진들과 남긴 기록들을 보면 피어리란 인물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아문센에게는 엄청난 모욕임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로버트 피어리라는 작자가 저지른 짓거리들에 대해서는 문서 참고.[15] 그냥 넘어가지만 잘 생각해보면 남극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탐험을 하는 사람들이 생존본능을 느끼는것이 아닌 할게 없어서 심심함을 느낀다는 것부터가 아문센의 탐험대는 매우 철저히 준비를 해뒀고 여유가 있었다는 증거다.[16] 지금이라면 당연한 소리였겠지만 제국주의가 판칠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인권보호나 동물보호, 동물학대에 대한 개념이 옅었기에 뭐만하면 잡아다가 전시해놓거나 박제 해놓는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대상이었다. 그런 시대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가치관을 가졌다는거부터가 아문센이 훌륭한 인성을 지녔다는 증거.[17] 그리고 곰은 애초에 사람에게 길들여진 역사가 별로 없다. 개는 오랫동안 인간들과 지내서 길들여지기라도 했지만 곰은 인간에 비해 엄청 크고, 먹는 양도 장난 아닐 뿐더러 개를 능가할 정도로 사납고 그저 손바닥으로 사람 얼굴을 치기만 해도 뼈를 아작낼 정도로 힘도 강하다. 거기다 조련사가 북극행을 거부한 것도 생각을 많이 해서 안 간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사실 곰과 같은 덩치 큰 육식동물들은 위험해서 조련사들조차도 목숨걸고 조련하는 생물이다. 앞서 말했듯이 곰의 야생성이 깨어나 사람을 공격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조련사라도 도망쳐야 하고 신고해 사살해야 할 정도다. 거기다 곰을 데려온다고 해도 개썰매를 이용한 것보다 그다지 효과가 좋지 않다. 개는 무게가 가벼워서 얼음판을 뛴다 한들 깨질 염려는 없지만 곰의 그 무지막지한 체중은 가다가 얼음판이 깨져서 곰이 물에 빠질 수도 있다. 거기다 식량을 인간과 똑같이 먹는다는 것은 개나 곰이나 동일하지만, 곰은 개에 비해서 하루에 먹는 양도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훈련 면에서도 개는 그동안 인류가 키워온 역사가 있어서 극지방 탐험에 필요한 훈련만 해도 되지만, 곰은 그런 역사가 별로 없어서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야하니 비용적인 면이나 탐험 면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다. 아문센에게 있어서 조련사의 북극행 동참 거부는 다행이었다.[18] 북서항로 정복 때부터 계속된 영국인들의 냉대와 모욕에 분개한 아문센은 영국 방문을 안 하려고 했으나, 영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 노르웨이 국왕의 어명이 내려오자 갈 수밖에 없었다.[19] 앞에서 프람 호에 방문했던 노르웨이 왕비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20] 1870년대생이라는 점과, 혹독한 극지방 탐험으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지 겨우 50이 막 지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노안이다. 극지방의 상대적으로 희박한 오존층을 뚫고 내려온 뒤 얼음에 쉴새없이 반사된 강한 자외선 탓도 있었을 것이다.[21] 이누이트들과 친하게 지내서 그런지 이누이트 추장을 닮았다. 후술하겠지만, 아문센은 이누이트의 혈통이라는 설도 있다.[22] 3대를 준비할 예정이었는데, 한 대당 8만 5천 달러라는 말에 기겁했다고 한다. 지금의 값어치보다 더 엄청난 거액이었기 때문이다.[23] 사실 당연한 게 노빌레는 비행선 노르게 호의 선장이자 탐험대의 일개 대원에 불과했다(사실 그보다는 고용된 선장이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그러나 탐험대장은 누가 뭐래도 아문센이었고 모든 것이 아문센의 계획과 지휘 하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빌레는 노르게 호를 이탈리아에서 만들었다는 이유로 자기 권한을 넘어서 탐험에 간섭하려 드는 등 지나친 월권행위를 해댔다.[24] 사실 무솔리니도 아문센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위에 나온 노르게 1호 때의 일이 컸다.[25] 앞서 아문센/스콧 논쟁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아문센/노빌레 논쟁에서도 똑같이 벌어졌다. 즉 스콧을 버린 비열한 아문센에 대한 영국에서의 이미지가 반대로 아문센을 버린 비열한 노빌레에 대한 노르웨이에서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 것. 숀 코너리가 아문센 역으로, 피터 핀치가 노빌레 역으로 분한 영국-이탈리아-소련 합작 영화 '레드 텐트'는 바로 이런 이미지에 관련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26] 물론 아문센은 그 어느 쪽이든 전혀 책임이 없었다. 스콧이 죽은 건 오로지 그 자신의 탓이며 반대로 아문센은 노빌레를 구하려다 죽었다.[27] 그가 남극점 정복 당시엔 철저한 준비로 인해 매우 수월하게 탐험을 하며 대원 모두의 안위까지 보장하며 귀환했다는 걸 고려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28] 아문센은 스콧의 죽음에 대해 알았을때 "난 스콧을 그 끔찍한 죽음으로 부터 구할수 만 있었다면 모든 영광과 돈을 포기했을거다."라는 말을 하며 안타까워 했다.[29] 아문센과 노빌레의 분쟁에서 아문센에게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진짜 문제는 노빌레였다. 노빌레는 자신이 노르게 호의 선장임을 내세워 항상 아문센의 결정에 간섭하려 했다. 하지만 베테랑 중의 베테랑 탐험가였던 아문센과 젊은 노빌레 간의 차이는 매우 컸다. 무엇보다도 선장인 노빌레가 탐험대장인 아문센의 일에 간섭하는 건 아무래도 월권행위에 가까웠다. 아문센의 사망 역시 원인은 노빌레를 구하기 위함이었다.[30] 본질적으로 스콧이 유명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문센과 경쟁을 벌였고, 둘의 경쟁이 상당히 극적인 양상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탐험 역사에서 두 세력이 같은 목표를 놓고 동시에 경쟁했던 일은 매우 드물다.[31] 아문센은 준비가 굉장히 철저했고 남극에 대한 연구도 잘 되어 있었다. 때문에 스콧과의 경쟁으로 인한 조급증 때문에 생긴 실패 한 번 외에는 탐험 도중 문제랄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32] 조난된 엘리펀트 섬에 일부 인원을 남기고 소수의 인원과 조각배에 몸을 싣어 남극해를 뚫고 갔을 때, 엘리펀트 섬에 남은 부대장 프랭크 와일드 또한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단, 인듀어런스 호 내에서 쥐를 잡을 고양이인 피치 여사는 남극에서 조난당했을 때 고통스럽게 아사, 동사로 죽는 걸 볼 수 없어서 섀클턴이 직접 안락사시켰다.[33] 아문센은 섬 내의 이누이트들과 친밀하게 지내며 극지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법을 배웠으며, 이는 북극 탐사를 무사히 완수하는 데에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34] 출처 아문센과 스콧의 결정적 차이점은 그러한 세부적 사항이 아니었으며, 스콧의 비전문적인 전략이 원정을 실패로 몰아넣은 원인이었다 후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