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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토리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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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raetoriani.png
1차 다키아 전쟁에서의 프라이토리아니

1. 개요2. 역사
2.1. 기원2.2. 창설2.3. 모병 방식과 지원자들의 출신2.4. 임무2.5. 정치군인2.6. 전장에서의 역할2.7. 쇠락 및 폐지와 그 이후
3. 편제와 규모4. 예니체리의 대선배?5. 유명한 근위대장들6.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로마 제국 황제의 호위부대 겸 직할 중앙군으로, 흔히 로마 근위대라고 불린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가 폐지할 때까지 존속한 제국의 엘리트 부대로, 정치세력화 되어서 반국가범죄 수사와 반역자 색출 및 즉결처형에 황제 옹립까지 주도하게 되었다.

다만 용어 자체는 공화정 시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활동할 때부터 로마군 장군들의 직속 호위부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영어로는 프레토리언 가드(Praetorian Guard)라고 부른다.

여기서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는 프라이토리아누스(Praetorianus)의 복수형이다. 즉 '프라이토리아누스들'이라고 부르는 셈이다.

2. 역사

2.1. 기원

'프라이토리아니'(Praetoriani)는 원래 공화정 시절 국가 비상사태시 군단지휘권을 받은 법무관(Praetor)의 호위부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원래 군단지휘권은 집정관만이 가지며 집정관은 자국군이 아닌 동맹국 군대에서 차출된 호위부대의 호위를 받았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를 공식적인 황제 직속의 무력집단으로 편제하기 전에도 로마의 이름난 장군들은 특별히 선발한 병사들 내지는 신임하는 정예부대를 이러한 직속부대로 활용하곤 했는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자신의 친위대라고 거명하고, 게르만 족장 아리오비스투스와의 회담에 호위대로 대동했던 최정예 10군단 에퀴스트리스[1]가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2.2. 창설

오랜 내전을 끝내고 로마의 절대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본국 이탈리아에서 자신이 직접 제어할 수 있는 직속 무력집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에 9개 대대로 편제되는 친위부대를 최초로 편성했는데, 초기에 각 대대의 병력은 500명 정도였지만 이내 2배에 달하는 1천 명으로 증강되었다. 여기에 각 대대별로 기병이 약 30기 정도 배속되어 1만 명이 조금 못 되는 규모였다. 구성원은 모두 로마 내지는 이탈리아 출신이었다. 즉, 본국 출신들로만 구성된 엘리트 부대를 지향했던 셈이다.

비록 이렇게 친위부대를 편성하기는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일단 카이사르 이래로 사실상 빈사 상태에 빠져있던 공화정을 부활시켰다는 형식을 취하면서 권력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괜히 국경방어선이 없는 본국 수도에 군대를 박아놓고 전제적인 군사독재를 한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명칭도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프라이토리아니라고 지어서 이건 본국에 필요한 최소한의 치안과 방어를 보장하는 '법무'집행단일 뿐이라는 식으로 나왔다. 때문에 창설 초기에 근위대는 3분의 1에 해당되는 3개 대대 1500명에서 3천 명 정도가 로마 시내에 상주했고, 나머지는 로마 근교에 배치되었다. 임무 또한 황제의 궁전과 주요 시설들을 순찰하거나 요인들을 경호하는 데 그쳤다.

2.3. 모병 방식과 지원자들의 출신

황제와 그 가족들의 개인적 안전을 책임지고 있던 로마군의 엘리트 부대, 본국을 방어하고 행정,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한 행정부 역할을 한 황제 직속 조직이라는 특성상 모병과 지원자 선별 모두 특별하기로 유명했다. 부대원 선별은 오늘날 모병 지원제, 공채 모집처럼 지원자를 받기 위한 모병 공고를 각 도시와 마을 회관에 붙이고, 홍보를 거쳐 신청을 받은 다음 시험을 거쳐 선별했다.

아우구스투스부터 티베리우스 시대까지의 프라이토리아니 모병 지역은 본국 이탈리아에 국한했다. 굳이 추가 선발해도 속주 내 퇴역병 건설 도시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지원자를 받고 선별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시대동안 부대원들은 대부분 라티움, 움부리아, 에트루리아, 옛 라틴동맹시들이 많았는데 초반에 많은 수를 차지한 쪽은 에트루리아 지방이었다. 이는 프라이토리아니가 본국 이탈리아 출신 로마인 중 북이탈리아 출신들이 많았던 로마군과 구성부터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다가 다음 황제인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시대가 되면서 포강 유역의 키살피나 갈리아 지역까지 포함돼 오늘날 이탈리아 반도 전체로 확대되었다. 라티움, 캄파니아 출신 비율이 줄었던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지역이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아우구스투스와 대 드루수스의 직계인 두 황제의 지지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아래에서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은 약 87~90%가 평균적으로 본국 이탈리아 출신으로, 10~13% 정도는 이탈리아 외부 지역에 국한돼 모병 공고를 하고 지원자를 선별해 받았다. 물론, 네 황제의 해, 다섯 황제의 해 같이 내란이 벌어진 경우에는 황제를 따른 로마군 병사들로 충원돼 구성원 중 핵심 장교들은 속주 출신 로마인들이 차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1세기, 2세기까지 프라이토리아니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과 속주 중 퇴역병 정착 식민도시 출신들로 구성됐다. 즉, 라틴 혈통의 로마 제국 원류 시민권자들이 대부분 입대했는데,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전까지 로마시민권자 중 선별된 이들만 로마군 정규병이 된 것을 생각하면 출신은 게르마니아, 판노니아 출신이라고 해도 그 조상은 거의 이탈리아인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3세기 초가 되면서 바뀌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흔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대대적인 프라이토리아니 개혁 때문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반절만 맞는다. 왜냐하면 다섯 황제의 해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집권까지의 기간을 제외하면 프라이토리아니는 세베루스 왕조 성립 이후에도 군인황제시대 중 3세기 중반 직업군인, 기병대장 출신 황제들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탈리아와 식민도시, 각 로마군 하급장교, 황제와 황후와의 연줄로 들어온 속주 유력자 자녀들로 구성됐기 때문이다.[2]

아우구스투스부터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까지 프라이토리아니 모병에 응한 로마청년들은 대부분 기사계급이나 평민들이 많았다. 정치군인, 친위부대 성격으로 아는 경우가 많으나, 관료이면서도 정보원 역할도 해서 세베루스 왕조 시대가 되면 인기가 더 늘었다. 백인대장, 대대장에 진급해 로마 상류사회 진입을 노리는 농촌, 어촌 청년들에게는 합격 후 연줄만 잡으면 후대까지 나은 삶이 보장됐고, 월급 외 부수입도 좋았으니 인기가 없음이 이상했다.

본국 이탈리아 내에서 가장 많은 지원자, 합격자 비율을 차지한 동네는 에트루리아와 키살피나 갈리아 지방이었다. 이 지역은 프라이토리아니가 쇠락과 폐지를 거칠 때까지 늘 지원자가 많았다. 이는 이 분야를 연구한 학자들조차 통계를 내고 인정할 정도이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수도권인 로마와 라티움 출신들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부유하기로 이름난 이탈리아 제2 인구밀도를 자랑한 캄파니아 지방 출신들과 합쳐도 평균적으로 10~13% 전후였다. 헌데 에트루리아, 키살피나 갈리아 지역은 구성원이 각각 10%, 28%를 기본적으로 깔고 갔다. 많을 때에는 두 지역은 30~40%를 상회할 정도였다고. 이유는 이 지방의 성격이다. 두 지역은 이탈리아에서도 이름난 농촌+어촌이 결합된 동네로 기름진 토지가 펼쳐진 곡창지역이면서도 인구밀도가 높고 공화정 시대부터 퇴역병 후손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런 이유 외에도 두 지역이 예로부터 곡창 지역임에도 한두 다리를 건너면 거의 황실이나 친(親) 황제파들과 연결고리가 있어 기준에 부합하는 인재들이 몰렸다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가령,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는 카이사르 가문과 연합한 오래된 노빌레스 가문과 아그리파, 마이케나스 등의 에트루리아 출신들이 있어 이들의 고향 후배들을 유혹했고,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에는 안토니누스 가문과 안니우스 가문이 에트루리아와 깊게 연관된 까닭에 야심 있고 똑똑한 농촌 청년들에게 프라이토리아니는 굉장히 매력적인 직장이었다.

이중 오늘날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에밀리아 일대인 키살피나 갈리아 지방은 에트루리아 지방과 비교해 약간의 지역 특수성을 이유로 지원률이 부대 해체까지 높기로 유명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전쟁, 티베리우스의 판노니아 안정화 작업을 거치면서 갈리아인, 게르만족 출신 속주민들이 라틴시민권, 로마시민권을 얻고자 이곳에 정착해, 그들의 2세, 3세들이 이탈리아 로마인이 되어 그 지원빈도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대가 흐를수록 프라이토리아니 내 이탈리아 출신들은 키살피나 갈리아가 고향인 이들이 많았다고. 허나 3세기 중반 갈리에누스 시대 후반부터 변화가 생기면서 이탈리아 출신들은 줄어들었다.

3세기부터 이렇게 된 이유는, 내란으로 집권한 황제가 등장하거나, 전선을 돌아다니며 군경력을 쌓은 황제들이 등장하면서 황제들이 이탈리아 출신보다는 군대 경력이 있는 로마군 출신이나 자기 부하들에게 우선적으로 모병 공고를 하거나, 특별채용해 보직전환시켰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제가 전선에 나가 싸우면서 부대원들이 전투병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신병 충원보다 이 편이 황제에게 더 편하기도 하니 어떤 이유로 이렇게 구성이 변하게 됐는가는 짐작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갈리에누스 치세기부터 프라이토리아니는 서방 지역과 동방 지역 로마인들이 지원하고, 서방지역에서 60%를, 동방 지역에서 40%가 선별돼 충원되는 구조로 바뀐다.

2.4. 임무

창설 이래 프라이토리아니의 역할은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이후, 크게 4가지가 부여돼 수행됐다.

이 네 가지 업무는 안정적으로 세습 체제를 유지한 왕조들의 황제와, 내란을 통해 집권했다가 몰락한 황제들이 프라이토리아니를 활용한 이유였다. 프라이토리아니는 그 존재만으로도 그들의 권위이며, 원로원과 총독을 견제한 무기였던 것은 이 네 가지 임무가 결정적이었다. 이중 첫번째, 두번째 임무를 제외한 세번째, 네번째 임무는 반역자, 원로원 의원, 총독을 기소하고 수사하고 구금하는 것에 기반해 원로원 의원, 총독들을 반역법, 간통죄, 모독죄로 기소 후 제거하는 황제의 원로원 통제 수단이 됐고, 두 임무는 고도로 훈련된 장교, 병사들이 담당해 전문성이 대단했다.

그렇지만 이런 임무가 주된 업무였다고 해도,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 직속 사법기구+행정부에 가까웠다는 것이 학자들의 중론이다. 왜냐하면 역대 근위대장 중 티베리우스 시대의 세야누스마크로, 네로 시대의 티겔리누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의 티투스 등과 같은 케이스들조차 공안통치를 하면서도 행정 결정과 명령에서는 현대의 행정부처럼 관료업무를 함께 수행했기 때문이다.

2.5. 정치군인

이 조직이 로마인들에게 가면을 벗고 등장한 것은 제위가 아우구스투스에서 티베리우스로 넘어간 서기 14년이었다. 로마는 공화정 이래 원로원 내 명예직 프린켑스 직의 부자 승계가 없었다. 따라서 타키투스의 언급처럼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를 위해 미리 프라이토리아니를 티베리우스가 살고 있던 사저를 둘러싸고 지키도록 명령하고, 프라이토리아니가 명령을 그대로 따른 모습은 분명히 이례적이었다. 이때, 이를 본 원로원 인사들은 프라이토리아니가 무방비가 될 이탈리아와 로마를 방어하기 위한 군대가 아님을 제대로 깨달았다. '새로운 공화정 체제'와 공화국 수호를 외치면서 제정의 기반을 착실히 쌓아나가던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로마가 형식적인 공화국일 뿐 제국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던 것이다.

헌데 이것으로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근위대장 루키우스 스트라보가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어 근위대장과 대대장들이 무장한 프라이토리아니 병력과 함께 현직 집정관 두 명을 찾아와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주종 관계 형식에 따라 충성서약을 강요했다. 이어 그들은 정식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죽음을 선포하면서, 원로원에게 묵념과 추모를 하도록 명령하고 이를 철저히 감독했다. 즉, 프라이토리아니의 충성과 원로원 통제를 시작으로, 우리가 로마 제정이라고 하는 로마 제국의 첫 세습이 시작됐던 것이다.

프라이토리아니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아우구스투스 장례식에 참석해 공화정기 일반 병사들과 다른 태도를 취하며 참석자들을 놀랍게 했다. 술라, 카이사르 장례식때의 베테랑 퇴역병, 현역병들의 전례와 달리 이날 프라이토리아니는 새로운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에게 절대 충성을 다짐하고, 계급에 따라 도열해 자신들이 황제와 황제 가문을 절대적으로 따르겠다고 재차 밝혔다. 이것으로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 제정을 상징하는 집단이며, 로마 제국 황제 승계에 있어 상징과 같은 부대임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로마 제국 최고 권력자의 직속부대이자 제국의 본국인 이탈리아 내 유일한 무력집단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특권에 프라이토리아니가 속된 말로 맛을 들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성은 냉혈한이었고 차가운 얼음 같았음에도 표면상으로는 늘 온건한 지도자 이미지로 치세 대부분을 일관했던 아우구스투스는 통치기간 내내 프라이토리아니를 정치도구로 활용하는 경향을 최대한 억제했다. 한편 티베리우스는 모든 로마인들에게 능력을 인정받았고 한 사람으로 본다면 훌륭한 황제였다. 하지만 즉위 이전부터 비정하고 이성적인데다 지나치게 솔직하면서 상대방의 호의도 아부로 생각할 정도로 낯을 많이 가리고 차가운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원로원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즉위 이후에는 상호 간의 불만과 갈등으로 원로원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러다가 후계자들인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연이어 요절하고, 황실 내에서는 친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를 비롯한 여자 황족들과 계속 트러블이 생기면서 결국 인내심마저 바닥이 났다. 카프리 섬에서 은둔 통치를 시작한 티베리우스 황제는 세야누스가 이끄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원로원과 잠재적 정적들을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했고, 세야누스의 지휘하에서 프라이토리아니는 '법무집행'이라는 미명 아래 정적 색출과 제거와 같은, 마치 안기부나 국가보위성 같은 비밀경찰의 역할을 하게 되어버렸다. 로마 시에 근위대가 상주하는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근위대 기지)를 건설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1만 명에 가까운 황제 직속군이 눈에 띄는 형태로 로마 시내를 활보하는 상황에서 원로원을 비롯한 황제 주위의 정치세력들이 느꼈을 위압감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티베리우스의 정책은 황제 자신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게도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왔다. 세야누스의 음모로, 황실은 티베리우스 본인과 그의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인 가이우스(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1세 외에는 모두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숙청되어 버렸다. 결국 세야누스가 제위를 노리고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면서 티베리우스는 마크로를 새로운 근위대장으로 내세우고 소방대와 프라이토리아니를 모두 포섭해 세야누스를 숙청했다.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마크로가 반역죄를 이유로 로마를 한바탕 뒤집어 엎으면서 공포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가이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티베리우스와 같이 사는 동안,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마크로와 동맹 관계를 맺고 그와 프라이토리아니의 도움 아래 후계자로 입지를 굳힌다. 이런 이유로 티베리우스 사후, 그는 사촌동생과의 공동즉위임에도 불구하고 마크로와 프라이토리아니의 도움을 받아 단독 제위계승을 하게 됐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즉위 후 그는 티베리우스 시대 후반부터 위세를 떨친 마크로와 그 세력을 반역죄로 숙청하고, 끊임없이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동은 당시 프린키파투스 체제가 완벽하게 정착되지 않은 과도기라는 점, 프린켑스와 원로원 사이의 끝없는 갈등과 상호견제 등과 엮여 좋게 평가받지 못했다. 설상가상 그는 황제권 강화를 위해 황제개인우상화와 같은, 최소 3~4세기 로마 황제와 비슷한 권력개편 시도를 한 데다, 티베리우스가 남겨준 유증금을 일찍 소비한 것이 반대파에게 "흥청망청 돈만 쓴다"고 비난받으면서 민심까지 악화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카이레아, 루푸스와 그를 따르는 20명도 안 되는 프라이토리아니 내 일부는 언제라도 자신들을 숙청할 수 있는 칼리굴라 황제를 배신했다. 그리하여 서기 41년 1월 로마 역사상 최초로 프라이토리아니가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비무장의 현직 황제를 암살하고 그 일가까지 멸족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3] 이때 카이레아를 필두로 한 프라이토리아니 20명 안팎은 칼리굴라 황제 암살 전에 자기들 입맛에 맞게 휘두를수 있다고 판단된 클라우디우스 1세를 미리 방에 가둔 뒤 황제를 암살하고 그를 옹립했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디우스 1세는 프린키파투스 체제 유지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존속, 시해된 조카의 명예회복 등을 고려해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에 도착한 직후, 로마 황제 중 최초로 충성 명목의 하사금을 약속해 지지를 얻는다.[4] 다행히 프라이토리아니 대부분을 사실상 통제, 장악 중인 칼리굴라의 또 다른 근위대장 클레멘스가 딴 마음을 먹지 않고, 9개 대대를 결집시켜 클라우디우스를 인질삼아 끌고 온 황제 암살범들을 체포 후 수감한 덕분에 더 이상의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클라우디우스는 클레멘스를 중심으로 한 프라이토리아니에게 확실한 충성을 받아낸 직후, 카이레아 등 암살범 20명을 인도받아 처형하거나 자결케 했다.

칼리굴라 암살 사건과 클라우디우스 즉위가 있던 41년 1월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큰 교훈을 안겨준 사건으로 재차 인식됐다.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황권에 프라이토리아니가 간섭하는 정도가 갈수록 커졌고, 세야누스나 마크로 같은 악랄한 인사가 아니더라도 프라이토리아니 자체가 가진 힘을 재차 깨달았다. 하지만 41년 이후에도 클라우디우스의 즉위와 충성하사금은 아직까지 선례만 남겼을 뿐, 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의 명에 따라 로마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거나 감시하는 연이은 사건을 일으키진 않았다. 그러다가 네로 시대는 티베리우스 시대 이후 정치 개입을 시작한 프라이토리아니를 황제가 악랄하게 활용하고 이용하는 무기로 일상화되었다. 이런 모습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급사하고 세네카아그리피나가 근위대장 부루스와 연합해 네로친위 쿠데타로 옹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전임자의 친아들이 있었고, 어린 정통 후계자의 징검다리로 예정되지 않았던 네로를 앞세운 율리아 아그리피나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의 도움이 있었기에 궁정 쿠데타에 성공했다. 이후 그녀는 부루스, 세네카와 함께 네로를 카스트라 프라이토리아로 데리고 간 뒤 하사금을 지불한 전임자의 선례를 활용해, 병영으로 찾아가 충성에 대한 보너스를 지급했다. 그리고 이는 황제 암살과 원수정 체제 존속 문제로 벌어진 보너스 지급처럼 엄청 특수한 경우가 아닌 터라 이후 황제들이 해야 할 전통처럼 되었다.[5]

네로는 아내, 어머니, 고모 등을 제거하는 데 프라이토리아니를 활용했고, 그들을 이용해 끝없는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근위대장 부루스의 죽음과 세네카의 정계 은퇴 이후, 함량 미달 수준의 티겔리누스, 가이우스 님피디우스 사비누스[6] 같은 인사들에게 네로가 프라이토리아니를 맡기면서 시작을 알렸다. 특히, 부루스의 후임으로 프라이토리아니를 장악한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입맛대로 프라이토리아니를 비밀경찰 조직으로 대놓고 활용하면서 비밀공작까지 벌였다. 따라서 티겔리누스 체제 이후, 프라이토리아니 주도 아래 죄 없는 방계 황족들과 원로원 의원, 장군, 속주 총독, 부자, 유명 시인과 명사들에게 죄를 덮어 씌워지고 그들은 숙청했다.

그러다가 네로가 몰락하고 네 황제의 해라고 불린 내전이 벌어졌다. 그런데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가 연이어 등장한 이 당시, 네로 몰락에 결정타를 날리고 네로를 자살케 한 집단은 프라이토리아니었다. 이를 주도한 인사는 피소 음모 사건 이후, 티겔리누스의 파트너 근위대장에 임명된 님피디우스 사비우스였는데, 그는 네로와 티겔리누스를 모두 배신하고 갈바 편에 붙었다. 따라서 원로원이 네로에게 '국가의 적' 선언을 할 당시, 네로와 티겔리누스는 힘 한 번 못 쓰고 제대로 당하게 되는데, 이때 황제로 선언된 갈바는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충성 보너스를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네로는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자살하였다. 그러나 네로를 실각시킨 갈바는 로마로 돌아온 뒤 "난 전임자처럼 돈으로 충성을 사지 않겠다." 하면서 연례행사처럼 지급된 충성 보너스를 지급하지 않았고, 갈바 등극의 1등 공신이지만 토사구팽 당한 오토가 프라이토리아니의 지지 아래 갈바를 몰락시켰다.

하지만 오토 역시 게르마니아 병력을 이끌고 황제를 자처한 비텔리우스에게 몰락했고 내전의 최종 승리는 베스파시아누스가 등장하며 끝났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가장 믿을 수 있는 황태자 티투스를 근위대장에 앉혀 근위대의 통제권을 회복하였다. 이후 플라비우스 왕조오현제 시대라고 불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까지는 황제들이 워낙 유능했거나, 아니면 근위대 자체가 쉴새없이 전선에서 활약해야 했기 때문에 이런 정치군인적 모습이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네르바 황제 시절,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죽음에 의혹을 품은 프라이토리아니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어 네르바를 연금하고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범들을 독단적으로 참살한 사건이 있었다.[7]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사후 콤모두스 시대까지 정치군인 모습을 지양한 프라이토리아니는 콤모두스의 후임인 페르티낙스 암살에 근위대장이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황제들 대부분의 죽음과 등극에 프라이토리아니가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가 된다. 친위세력이라고는 하는데, 오히려 그 '친위세력' 때문에 제명에 못 죽은 황제가 그렇지 않은 황제보다 많을 정도니 말 다한 셈.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를 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로마로 진군해 무력으로 정식황제로 승인받은 직후, 이탈리아 출신들로 구성된 프라이토리아니를 굴복시킨 다음 기존 부대를 해산시키고 아예 판노니아 출신의 부하들로 부대 전체를 대거 교체해버렸다. 그러나 이 조치 역시 측근세력으로의 물갈이라는 미봉책에 불과했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근위대장의 권한과 권력은 오히려 더 강화되면서 황제의 최측근이 근위대장 자리를 계속 차지했다.

카라칼라는 현직 근위대장인 장인 플라우티아누스를 205년 직접 죽였다. 프라이토리아니를 이끈 근위대장 마크리누스는 217년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이 카라칼라 황제를 암살했을 때 여기에 간접적으로 개입하고 그들의 추대로 즉위하기도 했다. 또 엘라가발루스가 근위대를 이용해 사촌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제거하려고 하다가 프라이토리아니가 자체 판단 아래 도리어 명령을 내린 황제를 살해하고 그 시체를 하수구에 버리는 일이 터지는 등 세베루스 왕조 존속 내내 지속됐다. 그리고 이런 흐름은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235년부터 일상화되었다. 3세기 황제들 중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 갈리에누스 등은 프라이토리아니 또는 근위대장 손에 목숨을 잃었고. 내전이 벌어질 때마다 근위대장과 프라이토리아니는 새 황제 선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2.6. 전장에서의 역할

하지만 어쨌든 프라이토리아니의 본분은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로마군 최고사령관이기도 했던 황제를 호위하는 엘리트 부대였던 만큼, 이들은 전장에서도 적지 않게 활약했다.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황제가 직접 전선에 나간 적이 거의 없어 별다른 활동 기록이 없지만, 그의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파르티아아르메니아와의 외교문제 해결을 위해 고문단을 편성해서 파견될 당시 여러 명의 백인대장과 세야누스 등 젊고 유능한 군인들을 따라 보냈던 것을 볼때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호위부대의 역할을 담당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 직후, 티베리우스가 판노니아 일대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던 군단들을 선무하기 위해 정부 대표로 아들 소 드루수스를 보낼 당시, 프라이토리아니 2개 대대와 게르만 기병들이 드루수스를 호위했다.

이런 흐름은 티베리우스 이후 칼리굴라 시대부터 달라지는데, 기록에는 정확히 나와있지 않지만 학자들에 따르면 칼리굴라의 갈리아 출정과 클라우디우스 1세의 브리타니아 원정에는 황제가 장기간 이탈리아 밖으로 떠난 만큼 프라이토리아니 역시 동행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이때도 전장에서 직접 활약했는지는 불확실한데 오토 황제가 직접 출전했던 베드리아쿰 전투나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황제가 전선에 나설 경우 프라이토리아니는 로마군의 최정예 전력으로 활약했고, 그 지휘관인 근위대장들 또한 전선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도미티아누스 시절 다키아 족과의 전쟁에서 근위대장 푸스쿠스가 지휘를 맡았다가 전사하는 등, 프라이토리아니가 겪은 손실 또한 만만찮았던 듯하다.

이른바 '3세기의 위기'로 불리는 정치적 격변기에도,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를 암살하고 새 황제를 옹립하는 데에도 열심이었지만, 대개의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들과 근위대장들은 황제를 따라 광대한 전선을 누비며 꾸준히 활약했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 황제때는 근위대장이 황제와 함께 페르시아를 상대로 야전사령관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근위대장까지 에데사에서 포로가 됐고 포로 생활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다만 프라이토리아니들이 제대로 구르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전선의 군단병들은 항시 전시인 자신들과 달리 로마에서 편히 지내면서 월급도 더 받는다면서 미워했다고 한다.

한편 전장은 아니지만 폼페이로 유명한 서기 79년 베수비오스 화산 분화 당시 프라이토리아니가 피난민 구호를 위해 투입되었을 것이란 증거가 나왔다. 2021년, 연구자들이 1980년대 헤르쿨라네움 근방의 해변에서 배의 잔해와 함께 발견된 300여 명의 병사들 중 한 유골이 고위 장교의 것이거나 어쩌면 프라이토리아니의 것이었을 수도 있다고 결론내렸다. 같이 발견된 주화들이 프라이토리아니의 월급 액수와 일치하고 각종 호화로운 장비를 걸치고 있었으며, 타원형 방패가 이들의 제식 장비였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한 것.# 당시 이탈리아 본토의 로마군 정규 병력은 프라이토리아니가 유일하므로 급한 대로 이들을 투입하였고, 저 유골의 당사자 및 병사들은 피난민 구호 작업 와중에 분화에 휩쓸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2.7. 쇠락 및 폐지와 그 이후

그러나 제국군의 최정예 엘리트 부대라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등장하며 쇠락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프라이토리아니의 여러 정예 기간병들을 빼내서 요비아니(제우스)와 헤르쿨리아니(헤라클레스)라는 황제 호위부대를 새로 편성했기에 프라이토리아니의 위상과 규모 그리고 전투력은 크게 떨어졌다.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소위 4두 정치[8]를 실시하면서 황제들이 각 전선 근처에 상주하게 되었고, 그 전선들에 배치된 군대를 직속부대로 거느리자, 이탈리아와 로마 방위가 주된 임무가 된 프라이토리아니는 황제 직속부대라는 존재가치와 제국 최고의 정예부대라는 명성을 잃었다.

수많은 황제를 갈아치우거나 살해해온 프라이토리아니의 마지막 정치적 행동은, 서기 306년에 막센티우스 황제를 옹립하고 발레리우스 세베루스 황제를 폐위시킨 것이었다. 당시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계속되고 있던 발레리우스 세베루스의 프라이토리아니 해체 작업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후 6년간 프라이토리아니는 막센티우스 황제 치세하에서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고 로마로 입성하면서 그 또한 실패로 돌아갔다.[9]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에 있던 근위대 기지를 철거하고 프라이토리아니를 폐지했다. 다만 살아남은 프라이토리아니들의 경우 비록 그에게 적대하긴 했지만 끝까지 용감하게 싸운 모습엔 크게 감동하여 목숨만은 살려 주었고, 게르마니아 방면 국경으로 이동 배치해서 현지 리미타네이로서 먹고 살게 해 주었다. 이들은 이후 그 지역에서 크게 용맹을 과시했다고 한다. 한편 어찌어찌 남은 일부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새로 창설한 근위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의 주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은 있으나, 리미타네이로 활약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는 것과 달리 분명한 근거는 없어 혹시 그랬을지 모른다는 정도 추측만 할 뿐이다.

한편 'Praefectus Praetorio'[10]라는 칭호는 여전히 존속했지만, 무관적 성격은 신설한 Magister Peditum(보병) / Equitum(기병) / Miletum(통합)[11]에게 넘어감으로써 완전히 사라져 지방관의 성격을 일정 부분 갖게 되었다. 즉 'Praefectus Praetorio(Praetorian Prefect)'는 같은 용어라도 제정 초기와 후기 때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적어도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보다 분명하게는 콘스탄티누스 1세 이후로는 '근위대장'으로 번역하거나 이해하면 절대 안 되며, 대강 '최상위 지방장관' 정도로 인식하면 된다. 다만 중앙직과 지방직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현대와는 달리 저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으며, 직위의 유래 자체가 로마 시의 근위대장이라는 중앙직이었기 때문에 순수한 의미의 지방관은 아니고 중앙 정계에도 힘을 발휘하는 자리였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영역에 포함하고 있는 동방 대관구의 프라이펙투스들은 총리 내지는 수석 각료(first minister)로서, Praetorian prefecture of the East|동로마 전체에서 넘버 2였다고 한다.

반면 이탈리아 대관구의 프라이펙투스들은 마기스테르 밀리툼(군 총사령관)에 밀려서[12] 동방의 프라이펙투스만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숙군 작업 등으로 동로마에서는 일종의 문민통제가 잘 유지된 반면, 서로마에서는 문민통제가 거의 유명무실해지고 스스로가 군 지휘능력을 갖추고 친정했던 마요리아누스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5세기 서로마사 내내 마기스테르 밀리툼이 어렸거나 문민 원로원 의원 출신인 탓에 군 지휘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세로 자리매김했었기 때문이다.

한편 위와 같이 전통적인 근위대였던 프라이토리아니가 해체되었고 그 수장이었던 프라이펙투스의 성격이 변했다고 해서 근위대가 없어진 건 전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스콜라이 팔라티나이(Scholae Palatinae)를 새로운 근위대로 창설했고, 레오 1세가 또 다시 새로 창설한 부대가 엑스쿠비토레스(Excubitores)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서 레오 1세까지는 100여년 밖에(?) 안 됐는데 왜 또 새 부대를 창설했는지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이유는 테오도시우스 왕조와의 연이 전혀 없이, 당시 군부의 실권자 아스파르에 의해서 그의 부하 장수였던 레오 1세가 옹립되어서 기반이 약했고,[13] 그래서 동로마 군부 내 게르만 세력이, 테오도시우스 왕조 시절에 비해 제어를 받지 않아 지나치게 강해졌던 것에 대한 조치로서, 비(非) 게르만계 로마 본국인으로만 구성된 새 근위대를 창설했던 것이었다.

향후 사위이자 로마 국내에서는 매우 오지였던 이사우리아의 부족장 제노가 황제가 되고 나서는 동향인 이사우리아인 위주로 엑스쿠비토레스를 거의 채웠었던 적도 있었다. 이사우리아는 전술했듯이 아주 오지라서, 200여년 전의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과 이에 따른 민족/종족 구분의 약화에도 불구하고 예외적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의 취급은 반쯤 이민족 취급이라서, 선황 레오 1세의 창설 취지였던 '비(非) 게르만계 로마 본국인만의 부대'라는 점에 있어서 이사우리아인으로 근위대를 채웠던 것은 거의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로 여겨지는 수준이었다. 다른 외국 전공서적에서도 이사우리아인은 타 종족집단에 비해 동로마 지역에서 일종의 소수민족 비슷하게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한다.[14]

이후 아스파르와 일가에 대한 숙청으로 게르만 세력이 군부에서 정리되었고, 이사우리아인도 황제의 출신 종족(?)으로서 제노 시절 기득권을 누리다가, 온전한 로마 본토인이었던[15] 아나스타시우스 1세 들어서 기득권을 뺏긴 나머지 반란을 일으켰다가[16] 제압됨으로써[17], 이민족의 영향이 사라졌고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가 복원되었다. 이 점은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명군으로 평가받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 문민통제가 복원되었다는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직접 본인이 군사령관으로서 친정했던 적이 전혀 없고, 장군들에게만 대외 원정을 맡기면서, 지휘관 교체와 경질을 마음대로 했는데도, 반란 등의 문제가 터지지 않았다는 점으로 방증된다.

그렇다고 스콜라이 팔라티나이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엑스쿠비토레스의 창설 후 콘스탄티노플의 귀족 자제들이 친목질하는 의장대(parade-ground display troops)로 변하여 실질 전투력은 사라졌다. [18] 그래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 부대도 원정에 나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운을 뗐다가 귀족 자제들이 충공깽 멘붕에 빠져서 결국 단념하고서는, 도리어 편제된 정원 외의 순전히 매관매직용 추가 TO(supernumerary)를 만드는 방식으로 기존의 매관매직 관행을 아예 제도화시켜서 국가재정에 보탰다.[19] 그러나 이슬람 제국의 맹공과 불가리아의 강습으로 나라가 양면전선으로 풍전등화 상태가 되자 콘스탄티누스 5세가 전격적으로 실질 전투 능력을 발휘하도록 실질적 훈련도 하고 실전에도 나가도록 지시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편한 부대 생활 전통은 사라졌다. 한편 엑스쿠비토레스는 실질 전투력을 계속 유지하다가, 1081년 노르만인과의 디라키움 전투 때 스콜라이 팔라티나이와 함께 전멸하면서 부대 자체가 통째로 증발했다.

3. 편제와 규모

최초 창설 당시 프라이토리아니는 보병 9개 대대와 각 대대에 약 30기 정도로 편성되는 소규모의 기병대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각 대대 병력은 초기에는 500명, 이후 대부분의 기간 중에는 1천 명으로 편성되었지만, 때로는 1500명까지 증강될 때도 있었다.

대대의 숫자도 부침을 반복해서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서기 47년에는 12개 대대까지 증강된 적이 있었고, 비텔리우스 황제는 아예 16개 대대까지 증강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 사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즉위하면서 프리아토리아니는 다시 9개 대대로 감축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프라이토리아니 보병은 로마 내지는 이탈리아 반도 출신으로 충당하는 것이 대체적인 관례였지만, 비텔리우스 시절에는 황제 자신이 신임하던 라인 강 전선의 군단에서 병사들을 끌어와 새로운 프라이토리아니를 편성한 적이 있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아예 프라이토리아니를 판노니아 군단에서 선발한 정예병으로 물갈이해버린 적이 있다. 사실 세베루스의 경우는 이전 프라이토리아니의 부대 깃발을 모독하는 공식 행사까지 로마에서 버젓이 거행하여 모욕감을 느낀 그 전 프라이토리아니 대원 일부가 자살할 정도였고, 해당 부대원들은 전원 강제 제대당해서 세베루스 이후의 프라이토리아니는 그전 프라이토리아니와는 직제에서든 인원에서든 전혀 연결 고리가 없다.[20]

다만 의외로, 세베루스 당시의 프라이토리아니는 세베루스가 군단장으로 있던 게르마니아 군단 출신 군인들로 구성되었으나 이후로는 이탈리아 본국 출신들이 점점 많아지더니 결국, 적어도 '3세기의 위기' 중엔 다시 이탈리아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로 회귀했다. 의도적으로 한 조치는 아니었고, 부대가 로마에 주둔하다보니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젊은이들을 뽑아 채우는 것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4두 정치 말기 막센티우스 황제 시절의 프라이토리아니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인들의 부대가 되었다.

기병 전력은 황제 경호 기병대(Equites singulares Augusti)로 따로 분류되었는데 기병은 양성 자체가 어려우니만큼 딱히 출신 지역을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트라야누스 황제는 각지의 이민족들로부터 특별히 선발한 정예기병 720기로 근위기병대를 크게 증강했고,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에는 약 1천 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이를 다시 2천 기까지 증강했으며, 이 부대의 지휘관은 통상 9개 대대로 편제되는 프라이토리아니의 10번째 대대장, 즉 대대장 대우를 받았다.

황제 직속부대인만큼 대우도 특별했다. 봉급도 일반 군단병보다 많이 받았고, 정기적으로 보너스도 받았으며, 복무기간도 짧았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는 군의 최고 행사라고 할 수 있는 개선식도 정식 개선식은 황제가 독점하게 되면서, 이들은 의장대 역할도 수행해야 했으니, 장비나 복장도 화려했다. 여담이지만 영화에서는 1950년대 헐리우드 기독교 대작 사극 영화에서부터 검은색 '로리카 세그멘타타' 갑옷을 입고, 검은 망토를 두르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일종의 클리셰로 작용했으며, 2000년대 작품인 《글래디에이터》, 2014년 작.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도 이 클리셰가 유지되었다. 검은색 갑옷 클리셰를 나치 독일의 슈츠슈타펠이 입었던 검은 제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1867년에 그려진 그림에도 프라이토리아니가 검은색 갑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나름 역사가 오래된 클리셰다. 그러나 이 그림에 묘사된 것은 검은 갑옷이 아니라, 로마식 사슬갑옷을 묘사한 것에 가깝다. 《쿠오바디스》 이래 할리우드 사극에서 이들이 검은 복장을 하는 것을 나치에 대한 은유로 보는 것은 오해가 아니라 상당수의 학자들이 지적하는 바다(Cyrino 2005).

실제로는 수도 로마에서 황제를 경호하는 업무 중에는 토가 차림의 평상복으로 근무했다. 요즘 경호원들이 정장 차림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토가가 일반 평상복이 아니라 로마인의 정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확한 비유다. 토가 자체는 활동성이 좋은 옷이 아니지만 눈에 띄지 않게 칼을 차기에는 아주 편리한 복장이기도 하다. 수도권이나 대도시 부대에서 장병들이 전투복이 아니라 근무복을 입는 것과도 비슷하다. 갑주는 훈련과 전투시에만 착용했다. 최근에 발매된 '라이즈 선 오브 로마'라는 성인용 액션게임에서는 군단병과 비슷하지만 보라색 갑주에 동방 제국처럼 얼굴가리개를 내린 투구를 쓴 근위병들이 등장한다. 실제로 보면 군단병보다는 더 멋있다. 토탈워 시리즈에도 갑주가 다른 로마군 유닛보다 더 멋있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보여준 검은색 갑옷과 아티카식 투구를 쓰고 있는 로마 근위병과 비교해보면 어느 쪽이 더 악의 근위대(?) 같은지 쉽게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근위병의 급여나 병영여건이 좋았던 대신 그만큼 정예부대로서의 체면이 있으니 훈련은 더 극심했다고 하는데, 국경 지대에 상주하기 때문에 분위기는 오히려 조금 자유로웠던 일선 군단과 달리, 화려한 로마 시가지를 곁에 두고 있었던 만큼 전투력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더 엄격한 군율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도 연봉이 675데나리우스로 도미티아누스 치세에도 300데나리우스에 불과했던 군단병보다 두 배 이상 많았고 전투가 별로 없어 오히려 각종 유지비로 빠져나가는 돈이 별로 없어 만기전역시 거액을 들고 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지원자가 엄청나게 많았다고 한다.

4. 예니체리의 대선배?

평시에는 황제 최측근 의장대로, 그리고 전시에는 황제를 따라 전장에서 활약하다가 권력 맛을 본 후로는 오히려 자신들이 황제를 폐위하거나 옹립하는 등의 깽판을 치고 정국을 주무르며 국가 전체를 몰락시키가다 결국 황제의 반격으로 몰락, 해체되어 사라진 모습이 마치 오스만 제국예니체리와 흡사하다. 때문에 간혹 인터넷에서는 프라이토리아니를 예니체리의 대선배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으며 예니체리가 창설될 때에도 프라이토리아니를 참고로 하거나 어느 정도 의식한 게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론을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일단 이 둘은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다. 먼저 프라이토리아니와는 달리 예니체리는 데브시르메(Devshirme)라는 고유의 모집 및 교육 과정을 거쳐 선발되었으며, 예니체리가 무슬림이 아니라 2등 신민 취급이었던 '짐미'(Dhimmi), 즉 비(非) 무슬림 가운데 선발된 점을 봤을 때 프라이토리아니보다 보조병(Auxilia)에 훨씬 가깝다. 또 예니체리 군단장은 로마 제국의 근위대장만큼 중시되지 못했다.[21] 그 밖에 예니체리는 평시에 소방관 겸 경찰관 역할까지도 수행했으며[22], 지방 총독들의 권한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 대도시들에도 주둔했다는 점도 다르다. 즉 예니체리는 이래저래 프라이토리아니와 다르며, 오히려 맘루크와 유사한 면이 훨씬 많다.[23]

기본적인 작동 원리를 보면 예니체리나 맘루크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사실상 2등 시민인) 비(非) 무슬림(짐미)이나 노예와 같이 스스로는 정치세력화할 기반이 없고, 다른 유력자들과의 연계도 없는 이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군사조직이었다. 즉 군주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다른 정치적 유력자'와의 연계가 없기에 고용주인 자신에게만 충실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육성하여 친위대로 활용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프라이토리아니는 본국 이탈리아나 로마 시 출신으로 편성된 특성상 스스로 로마 제국 내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다. 클리엔텔라 관계를 생각하면 본국 출신 병사들 중 거물 정치인과 연줄이 있는 이들이 섞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즉 예니체리의 경우 조직이 오랫동안 유지되다 보니 중앙 정계 내에서 조직 자체의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고, 황제들은 이러한 위험성을 충분히 경계하지 않았거나 아예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능했다[24]. 이러다 보니 결국에는 정치적 영향력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을 갖게 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반면 프라이토리아니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인 특성상 창설자인 아우구스투스 사후, 2대 티베리우스 시기부터 정치적 영향력을 빠르게 확보해 나가기 시작하여 친위대장이 황제의 비서 내지 재상의 역할을 차지하는 등 사실상 처음부터 정치색을 배제하지 않은 (또는 배제하지 못한) 조직이었다. 비텔리우스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절에 황제 자신이 즉위 전에 지휘하던 외지 군단병 출신으로 근위대를 물갈이해 버린 것 역시 기존 근위대가 가진 정치적 영향력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들이 호위해야 할 대상을 오히려 위협한 면모는 막장 테크를 타는 근위대라면 왕왕 찾아볼 수 있는 일로, 프라이토리아니와 예니체리 외에 러시아의 스트렐치나 이슬람권의 맘루크도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면만으로 비교를 하려 든다면 스트렐치와 맘루크도 프라이토리아니와 관련이 있다고 해야 한다.

5. 유명한 근위대장들

제대로 임무를 수행한 야전사령관 출신의 충성스러운 근위대장들이나 파피니아누스, 울피아누스, 율리우스 파울루스와 같은 법학자 출신의 유능한 근위대장들도 있었지만, 대개의 근위대장들은 황제의 최측근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대중들에게 유명한 근위대장들은 대부분 악인, 간신이나 권신으로 악명을 떨친 이들이 많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위에 언급했듯이 근위대장들은 정치군인으로 변질하기 매우 쉽고, 이렇게 정치군인이 된 자가 얌전하고 청렴할 리는 만무하기 때문.

5.1.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5.2. 플라비우스 왕조

5.3.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5.4. 세베루스 왕조

5.5. 군인황제시대

6. 대중 매체에서

문명 4에서 로마 문명의 고유 유닛으로 등장한다. 고유 유닛이라는 시스템이 처음 등장한 문명 3부터 최신작인 문명 6에 이르기까지 모두 레기온이 나왔는데, 본작만 예외. 검사를 대체하는데, 도시를 공격할 때 전투력 보너스를 받지 못하고 생산 비용이 증가했지만 전투력이 올라갔다. 중세 시대 유닛인 철퇴병과 맞먹는 전투력을 자랑하며, 궁수 쯤은 우습게 썰어버릴 수 있고 검사가 당해내지 못하는 코끼리나 석궁병도 아차 하는 사이 영정 사진을 띄울 수 있다. 다만 생산 비용이 높다는 점이 발목을 잡아 도끼병이나 기마궁병을 다수 뽑으면 충분히 상대해낼 수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즉 효과적으로 쓰려면 프라이토리아니만 냅다 뽑아서 몰려가기보다는 창병과 도끼병과 섞는 게 좋다.

휴먼카인드에서 로마 문화의 상징 유닛으로 등장한다.

로마: 토탈 워토탈 워: 로마2에서 로마의 유닛으로 등장한다. 근위대인 만큼 당연히 최고티어의 유닛이며 그 위력도 발군이다. 로마 토탈 워에서는 자력으로 거대도시를 올리면 뜨는 군제개혁 이벤트 이후 뽑을 수 있으며 근위병과 근위 기병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전자는 보병으로서의 능력치는 최상위지만 2턴이라는 모집시간으로 인해 어반 코호트에게 자리를 내주지만 후자는 로마 최고티어 기병이라 한 번 뽑으면 계속 함께할 수 있다.

토탈 워: 로마2에서는 3티어 병영에서 생산되는데 능력치는 4티어라 주력 군단에 박아놓으면 엄청난 위력을 선보인다. 이런 유닛이 4티어 군사 연구로 더 강력한 프레토리안 근위대가 된다. 역시 프레토리안 기병도 존재하는데 4티어 건물에서 나오는 로마 최고의 기병이다. 그외의 캠페인에선 아우구스투스 캠페인의 로마 4돌이가 모두 뽑을 수 있으며 분열된 제국에서는 아우렐리아누스의 로마의 고유 유닛으로 나온다. 다만 분제에서는 상위병종으로 요비아니와 헤르쿨리아니가 등장하고 기병도 카타프락토이와 에퀴테스 스쿠타리가 등장하다보니 그캠에서의 최강자 자리를 지키진 못했다.[34]

[1] '승마 군단'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이다. 카이사르는 게르만 족장 아리오비스투스와의 회담에 임하면서 제10군단 병사들에게 말을 태워 호위대로 편성했는데, 이때 병사들은 카이사르가 자신들을 친위대로 여기겠다더니 한술 더 떠 자기들을 에퀴테스(로마의 기사계급으로, 원래는 '말을 타는 사람'을 의미함.)로 만들었다며 농담을 던졌다.[2] 이런 이유로 필리푸스 아라부스와 같은 비(非) 라틴혈통 로마인들도 프라이토리아니 장교 자리를 차지해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3] 칼리굴라는 암살되기 전 자신을 쳐내려고 한 2명의 집정관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하고, 프라이토리아니에 영향이 컸던 마크로 등을 계속 숙청했음에도 암살 위험을 계속 받던 상황이었다.[4] 클라우디우스 이전인,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역시 황제가 된 뒤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에게 돈을 보너스 개념으로 하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프라이토리아니가 가진 정치적 권력과 본국 내 유일한 무력집단으로서 이들은 황제에게 매우 중요한 무기이자 최측근이기 때문이다.[5] 클라우디우스 1세 즉위 당시의 보너스 지급은 칼리굴라 암살과 원로원의 공화정 복구선언이 벌어진 상황, 그리고 원로원이 카이사르 가문의 멸문을 논의하면서 혼란해진 상황 수습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새 황제로 옹립된 클라우디우스 1세가 사태 수습을 위해 지급한 보너스였다. 하지만 네로를 앞세운 소 아그리피나와 세네카, 부루스는 자신들의 정권 획득과 공개된 유언장 무시를 위해 프라이토리아니를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충성 맹세 보너스를 지급한 것이었다.[6] 님피디우스 사비누스는 네로가 몰락한 직후 숨었다가 원로원 편에 붙었고, 이후 뜬금없이 "내가 칼리굴라의 사생아다!"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면서 황제를 참칭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기에 별 호응 없이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7] 네르바가 트라야누스를 후계자로 삼은 것도 근위대의 강요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8] '테트라키아(Tetrarchia)'라고 부른다.[9] 다만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전사하고 다른 아군들이 전부 도주하는 상황에서도 프라이토리아니는 위치를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자비를 베풀 정도로 강한 인상을 주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자들과 그 부하들에게 잔인하기로 악명 높았는데, 그런 그가 완전히 이긴 전투에서 이렇게 강하게 저항해서 아군에게 크게 손해를 입힌 적군을 용서해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10] 영어로는 Praetorian Prefect.[11] 테오도시우스 1세 이후.[12] 좁게는 이탈리아 관구나 대관구, 넓게는 서로마 전역의 마기스테르 밀리툼은 5세기 서로마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가 없는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리키메르 등이다.[13] 아스파르는 현대의 오스트리아 출신의 게르만 부족장으로 귀화 1세대라서, 스스로 황제가 될 수 없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미국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어서, 캘리포니아 지사를 지내고 나서 충분히 도전해 볼 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혔던 것과 유사하다.[14] 'Two Romes'라는 책의 401p에 'After 400, there were hardly any enclaves of ethnic separatism in the lands that would become Byzantium, and even those (e.g., the Isaurians) did not hold out for long. Certainly there were no ethnic “Greeks” left.'라는 대목이 있다. 대강 번역하면, 400년 이후 동로마 권역에서는 자기들끼리 특구를 이뤄서 살던 소수민족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었던 이사우리아인 같은 종족들도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종족적인 "그리스인"들은 확실히 남아 있지 않았다.[15] 부계 직계를 통해서는 아니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이복형제를 통해서 콘스탄티우스 1세의 7대손이었다.[16] 영어위키 항목[17] 이외에도 아나스타시우스 1세 때에는 반란이 여럿 있었는데, 로마 본토인이었던 점은 좋았지만, 나이가 많았고, 아나스타시우스 1세 본인이 군 지휘능력을 갖추지 않은 순수 문관 출신이었으며, 결정적으로 단성론자였던 점이 반란의 빌미가 되었다.[18] 영어 위키백과Scholae Palatinae 문서 중, 'they degenerated to parade-ground display troops: as it became possible to buy an appointment into the ranks of the scholae, and the social status and benefits this entailed, the units were increasingly filled with by the capital's well-connected young nobility.'[19] 마찬가지로 영어 위키백과의 Scholae Palatinae 문서 중, 'Emperor Justinian is said to have caused panic amongst their members by proposing that they be sent on an expedition. Justinian also raised four "supernumerary" scholae of 2,000 men purely in order to raise money from the sale of the appointments. It seems that this increase was reverted by the same emperor later.'[20] 세베루스 이전 자신의 군단병들로 프라이토리아니를 구성했던 비텔리우스때도 부대원들을 강제 전역 시켰는데 이후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도나우 군단병들이 들이닥치자 이들은 즉각 베스파시아누스편에 섰고 자신들을 자리를 대체한 라인 군단 출신 프라이토리아니를 살육했다.[21] 굳이 연관성을 찾는다면 오스만 황제의 기병 근위대였던 카프쿨루 시파히(Kapikulu Sipahi)가 프라이토리아니에 더 가깝다. 시파히 제도를 완성한 메흐메트 2세는 '제국 내에 영지를 가진 투르크인 지주들' 가운데에서만 선발토록 했는데 이는 로마 시민들만이 프라이토리아니로 선발되는 것과 유사하며, 카프쿨루 시파히 부대 가운데 하나인 '실라타르'(Silahtar)의 대장은 황제의 무술 스승이자 황제가 친정에 나설 때 그의 무구를 준비하는 역할도 담당했지만 황제와 재상 사이의 소통이 원활한지 살피는 일도 했다는 점에서 원칙상 예니체리 군단장보다 정치적인 역할이 더 컸다.[22] 프라이토리아니 휘하에도 소방관 겸 경찰관 역할을 하는 비길레스라는 부대가 있긴 했다. 원래는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별개의 부대였지만 3세기쯤 편입된다.[23] 피지배층을 데려와 훈련한 다음 군사로 만든다는 점, 군주의 친위대라는 점, 나중에는 호위를 해야 할 상대에게 검을 겨눴다는 점 등이 비슷하다. 특히 상술한 데브시르메 제도는 맘루크를 훈련하는 제도에서 따왔다는 설이 유력하다.[24] 예니체리가 황제의 뜻을 거스른 사례는 적어도 바예지드 2세 때부터 나타나는데, 바예지드가 은근히 총애하여 다음 황제로 앉히려 했던 아메드 황자에게 반대하여 셀림 1세를 옹립하는 데 참여한 것이다. 그리고 쉴레이만 1세 때부터는 봉급이 적은 것에 불만을 품은 시위가 종종 일어났으며, 그 뒤를 이어 셀림 2세를 시작으로 무능한 황제들이 줄줄이 대를 잇다 보니 예니체리가 갈수록 제멋대로 구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25] 칼리굴라의 아버지이자 클라우디우스의 형.[26] 암살 직전 칼리굴라는 "나는 살아있다"를 외치며 노예들과 함께 저항했는데, 이를 들은 게르만 친위대가 "황제를 보호하라"라고 외치며 합류해 황제를 살해한 카이레아 부하들과 가담된 것으로 추정된 원로원 의원, 관료 몇 명을 죽였다고 한다.[27] 불명예스럽게 처형된건데, 카이레아에게 가족법이 적용된 이유는 그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도움 아래 출세한 클리엔테스이기 때문이다.[28] 포파이아 사비나와의 사이에서 같은 이름의 아들을 얻었다.[29] 심지어 자신과 함께 프라이토리아니를 통솔한 공동 근위대장 루푸스까지 체포해 고문 후 처형시켰다.[30] 오늘날의 북아프리카[31] 공화정 말 레피두스에게 시민권을 받은 북아프리카인의 후손이므로 같은 속주 출신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달리 이탈리아 혈통 로마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같은 속주 출신인 세베루스가 콤모두스 시대때 승진하는 것에 힘을 실어줬다고 한다.[32] 화형, 교수형, 십자가형 등을 소개하고 있는 고대 서양의 대표적인 형법서이다.[33] 테오도시우스 2세,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공동 발표한 로마법에도 로마 역사상 가장 권위있고 위대한 법학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됐다.[34] 사실 고증상으론 적합하지 않은 것이, 요비아니와 헤르쿨리아니는 아우렐리아누스 사후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가 돼서야 등장한 근위대이다. 즉, 이 시기면 아직 프라이토리아니만 존재하며 프라이토리아니가 최종 티어가 되는 것이 맞지만 그캠과의 차이를 두기 위해 이들을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