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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2:53:27

문소황후 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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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
삼국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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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 문제의 정후
문소황후 | 文昭皇后
출생 182년 1월 26일[1]
후한 기주 중산군 무극현
(現 허베이성 스자좡시 우지현)
사망 221년 8월 4일 (향년 39세)
조위 기주 위군
(現 허베이성 한단시)
능묘 조양릉(朝陽陵)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성씨 견(甄)
부모 부친 안성경후 견일
(安城敬侯 甄逸, ? ~ 184)
모친 안희군 장씨
(安喜君 張氏, ? ~ ?)
형제자매 3남 5녀 중 5녀
배우자 유주자사 원희 (초혼 및 사별)
고조 문황제 (재혼 및 별거)
자녀
1남 1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조예(曹叡, 205 ~ 239)
장녀 - 동향공주(東鄕公主, 205 이후 ~ 217 이후)
작호 -부인(夫人)-
시호 문소황후(文昭皇后)
}}}}}}}}} ||
1. 개요2. 이름 논란3. 정사 삼국지
3.1. 초기 생애3.2. 원가 휘하에서3.3. 조조 휘하에서3.4. 사망
3.4.1.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설들
4. 삼국지연의5. 기타
5.1. 부인(夫人)이라는 칭호5.2. 위략의 기록에 대하여5.3. 작품
6. 무덤7. 미디어 믹스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이자 기주 중산군 무극현 사람으로 원희, 조비의 본처. 조비와의 사이에서 조예동향공주를 낳은 절세미인.

2. 이름 논란

그녀의 성씨인 甄을 진으로 읽어야 하는지 견으로 읽어야 하는지 의견이 엇갈린다.

견으로 읽어야 한다는 측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진으로 읽어야 한다는 측의 논거는 다음과 같다.
현재 나무위키에서 문소황후는 견씨, 진씨 둘 다 표기되고 있고 문소황후의 일족들은 견씨로 표기되어 있다.

3. 정사 삼국지

3.1. 초기 생애

《위서》에 따르면 견일상산의 장씨에게 장가들어, 3남 5녀를 얻었다. 장남인 견예는 빨리 죽었고, 차남인 견엄은 효렴에 천거되어 대중군연과 곡양의 장(長)이 되었고, 삼남인 견요도 효렴에 천거되었다. 장녀는 견강, 차녀는 견탈, 삼녀는 견도, 사녀는 견영, 오녀는 훗날 문소황후가 되는 견씨이다. 그런데 남매 중에서 견씨만 정확한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밀()[5] 다른 설에는 낙(洛)이라고 하는데 둘 모두 확실한 것은 아니다.[6][7]

그녀는 한나라 태보(太保) 견감(甄邯)의 후예로 집안은 대대로 2천석을 지낸 중산국의 손꼽히는 명문이었고 아버지 견일은 상채의 현령이었다. 불행히도 아버지 견일은 견씨가 3살 때 죽었지만 문소황후의 집안은 부유했기 때문에 그녀는 딱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겪지 않은 것 같다.

《위서》에 따르면 견씨의 어머니는 항상 잠을 들 때마다 어떤 사람이 옥의(玉衣)를 들고 있다가 자신을 덮어주는 것을 보고 모두들 괴이하게 여겼다. 아버지 견일이 견씨가 3살 때 죽어서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왔는데, 이들도 기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관상보는 사람인 유량(劉良)이 찾아와 견씨와 그 자매들을 보았는데, 견씨를 가리키면서 "이 아이는 말도 못할 만큼 귀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위서》에 따르면 견씨는 어려서부터 다 자랄 때까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견씨가 8살 때, 말타는 기술을 자랑하는 자가 문 밖에 있어서, 가족들 모두들 옥상에 올라가 그것을 구경했는데, 오로지 견씨만은 구경하지 않았다.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더니, 견씨가 "그것은 여인들이 볼만한 것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또한 견씨가 9살 때, 독서를 좋아하여 글자를 볼 때마다 그 뜻을 다 알았다. 그리고 여러번 오빠들의 필기구를 빌렸다. 오빠들이 견씨에게 "넌 여자들이 하는 놀이를 해야 하는 것인데 왜 독서를 하는 것이냐? 여박사라도 되어보겠다는 것이냐"고 핀잔을 주자 견씨는 옛날의 현명한 여자들은 과거의 일을 배워 자신을 훈계했다며 옛 일을 알기 위해 문자를 알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후 천하에 전란이 일어나고 기근까지 겹치자 곤궁해진 백성들은 모두 금, 은, 구슬, 옥 등의 보물을 팔았다. 그 당시 부유했던 견씨의 집에는 저장된 곡식이 많아서 보물을 많이 사들였다. 당시 10살 남짓했던 견씨는 어머니에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친지들과 이웃 사람들에게 곡물을 나누어 주어 은혜를 베풀라고 말했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은 옳은 말이라고 여기고 곧바로 그녀의 말에 따랐다.

위략》에 의하면 견씨가 14살 때, 오빠 견엄이 죽었다. 견씨가 어머니에게 과부가 된 올케를 친자매와 다름없게 처우할 것을 부탁하자 견씨의 어머니는 이를 받아들였다.

여러 일화를 종합적으로 보면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고 윗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소신을 당당히 주장하는 곧은 성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3.2. 원가 휘하에서

이후 원소는 차남 원희를 견씨와 혼인시켰다. 하지만 원희가 유주자사로 부임하자 견씨는 원희를 따라 임지로 가지 않고 에 남아 시부모인 원소 부처를 봉양했기에 실제적인 결혼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희 쪽에서 가끔 인사차 업에 왔을 가능성은 있지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유주에 머물렀기 때문. 이 관계는 짧아도 5년에서 길면 8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후 원소가 죽자 막내 아들인 원상이 후계자가 되었으나, 조조204년업성을 함락시키면서 기주를 평정했다. 당시 견씨는 시어머니 유부인과 함께 업성에 남아있는 상태였다. 조비가 업성에 남아있던 견씨의 미모를 보고 그녀를 좋아하자 조조는 조비를 위해 둘을 결혼시켰다. <문소견황후전>의 주석에 그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이 두 가지가 있다.
업성이 함락되자 조비가 곧바로 원소의 집으로 들어가서 보았더니 두 여자가 황당(皇堂) 위에 앉아있었다. 문소황후는 두려워서 머리를 시어머니 유부인의 무릎 위에 묻고 있었고 원소의 부인 유부인은 양 손을 스스로 포박하고 있었다. 조비가 말했다. "유부인께서는 어찌 이와 같이 하십니까? 명하셔서 신부께 머리를 들라고 하십시오." 유부인은 그 말에 따라 문소황후에게 얼굴을 들라고 했다. 조비가 그녀의 미색이 뛰어난 것을 보고 감탄했다. 조조가 조비의 마음을 알고 마침내 그의 부인으로 맞이하게 했는데, 문소황후는 몇 년 동안 총애를 독차지했다.
위략
조조가 업성을 공략했을 때, 조비가 먼저 원상의 관부로 들어가서 보았더니, 어떤 부인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때 묻은 얼굴로 눈물을 흘리면서 원소의 부인 유씨의 뒤에 서 있었다. 조비는 물어본 뒤 원희의 부인임을 알고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고 소매로 얼굴을 닦으라 했는데, 용모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다. 조비가 가고난 뒤 유씨가 견씨에게 “너는 다시는 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조비는 마침내 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견씨는 아들을 낳았다.

3.3. 조조 휘하에서

조비에서 견씨와 결혼하였다. 《세설신어》혹닉편에 따르면 위나라의 견황후는 지혜롭고 용모가 아름다웠는데 본래 원희의 처가 되어 매우 사랑받고 있었다. 업성을 도륙한 조조가 즉시 그녀를 데려오게 했으나 이미 아들 조비가 데려갔다는 말을 듣고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 건 다 조비 그 녀석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탄식했다. 《감견기(感甄記)》에 따르면 시동생 조식은 견일의 여식인 형수 견씨를 사모하고 있었는데 조조의 명령에 의해 조비와 결혼하자 슬퍼서 식음을 전폐하고 낙신부라는 긴 시를 지었을 정도. 《세설신어》와 《감견기》 모두 정사가 아닌 야사이지만 삼부자 모두에게 사랑 받았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흥미롭다.

견씨는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며 조예동향공주를 출산했다. 조예와 동향공주의 출생년도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조예의 경우 사망년도는 나와 있지만 동향공주는 그마저도 알 수 없다. 조예는 견씨의 첫 남편인 원희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비가 조조의 허락 아래 원희의 부인이었던 견씨를 빼앗아 강제로 자신의 처로 삼자 공융은 조조에게 보낸 편지에서 "무왕주왕을 정벌한 후에 달기를 주공에게 주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조조가 원소를 정벌한 후에 문소황후를 조비에게 준 것을 다른 인물들에 비유하여 조롱하는 말이었는데 세간의 비난을 두려워하던 조조는 공융이 워낙 박식했기 때문에 자기를 비웃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공융이 경전을 인용해 자신을 두둔한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을 찾아봐도 그런 고사를 찾지 못했기에 나중에 공융을 만났을 때 그 이야기를 어떤 책에서 발췌했냐고 물어봤는데 공융은 "지금의 일을 살펴보니 과거에도 당연히 그랬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제서야 조조는 공융이 자신의 행동을 비꼬았다는 것을 알았다. 공융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조조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208년 8월 조조는 공융을 불효했다는 핑계로 죽이고 삼족을 멸한다.

《위서》에 따르면 견씨는 조비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오히려 다른 조비의 후궁들이 총애를 받도록 응원했고 조비에게 많은 측실을 두어 후계자를 많이 낳으라고 권했다. 나중에 조비는 후궁 임씨(任氏)가 자신의 성질을 여러번 건드리자 쫓아내려고 했다. 견씨는 자신이 총애 받는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데 임씨가 쫓겨나면 사람들은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울면서 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비는 임씨를 쫓아냈다.

《위서》에 따르면 211년 10월, 조조가 관중(關中)으로 마초와 싸우러 갔을 때 변씨도 따라가서 맹진(孟津)에 머물렀다. 조비와 견씨는 이때 업성에 있었다. 변씨는 병에 걸린 상태였는데 문소황후는 시어머니 변씨를 걱정하여 하루종일 울었다. 주변의 신하들이 변씨가 낫고 있다며 견씨를 달랬지만 견씨는 시어머니가 집에서도 항상 아팠는데 밖에서 병이 나을리가 있냐며 믿지 않았다. 나중에 병이 나았다는 변씨의 편지를 받고서야 견씨의 마음이 풀어졌다. 212년 5월, 군대가 업성으로 되돌아 오고 견씨는 변씨를 만나러 갔는데 시어머니 변씨의 장막이 보이자 견씨는 이미 기뻐서 울었고 주변 사람들은 그에 감동했다. 변씨도 견씨의 효심에 감동하여 함께 울었다. 변씨는 "견씨는 진짜 효행인 신부겠지요" 하면서 그녀의 효행을 칭찬했다.

《전략》에 따르면 태자 조비가 여러 유생들을 불러 연회를 벌이다가 즐거워서 부인 견씨에게 나와 절을 하게 했다. 모두 엎드렸으나 유정만은 홀로 평소대로 쳐다봤다. 조조가 이를 듣고 유정을 불경죄로 잡아들인 뒤, 죽이려고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그만두고 돌을 가는 일을 하게 했다. 하지만 이후 유정이 돌에 자신을 비유해 변호하자 조조는 크게 웃으며 사면시켜주었다고 한다.[8] 이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내용이 후대의 소설에서도 보인다. 청나라 때 포송령이 지은 소설 요재지이를 보면 견씨가 뜬금없이 유정의 후손 유중감을 찾아온다. 링크

《위서》에 따르면 216년, 조조가 손권공격하러 출병하자 견씨의 시어머니 변씨, 남편 조비, 아들 조예, 딸 동향공주 등은 모두 조조를 따라갔지만, 견씨는 병 때문에 업에 남았다. 다음해 217년 9월 귀환했을 때, 변씨를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은 견씨의 안색이 좋은 것을 보고 "2명의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는데, 전보다 더 안색이 좋은 것은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견씨는 "제 아이들이 어머님(변씨)과 함께 가고 있는데, 나에게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니 견씨의 총명함이 이와 같았다.[9]

기록을 살펴보면 원가 휘하에서나 조조 휘하에서나 고부 간의 갈등은 거의 없었고 두 시어머니를 효심으로 봉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번째 시어머니 변씨의 경우 후대의 일화를 보면 상당한 인격자로 알려져 있어 자신을 약탈한 남자들인 조조 집안 남자들과 살기가 버거웠을 그녀 입장에서 의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조비가 조홍을 사적인 원한으로 죽이려고 했을 때 변씨가 뜬금없이 새 며느리인 곽여왕을 황후에서 쫓아내겠다고 협박하는 장면은 여러한 친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3.4. 사망

자치통감》과 《한진춘추》에 따르면 조비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헌제의 두 딸과 곽여왕 등을 빈비로 들여 총애하였는데 에 남아있던 견씨는 이로 인해 갈수록 실의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곽여왕이 이를 조비에게 참소하자 조비는 대노하여 221년 6월에 사자를 보내 그녀에게 죽도록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견씨가 주살된 근본 원인은 곽여왕이 총애를 받아서에 있다고 여겨진다.

곽여왕의 참소로 인해 죽은 견씨는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도 받을 수 없었으며 초빈할 때는 저승에서도 알아보지 못하라는 의미로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덮고 쌀겨로 입을 막게 했다. 이후 조비는 마침내 곽여왕을 황후로 세우고 조예를 기르게 했다.

《감견기(感甄記)》에 따르면 조비가 조식을 조정으로 불렀는데 문소황후는 이미 곽여왕의 참소로 죽은 뒤였다. 평소 견씨를 사모했던 조식의 생각을 안 조비는 견씨가 쓰던 비단 베개를 조식에게 주었다. 낙수(洛水) 근처에서 조식이 베개를 베고 잠들었는데 꿈에 견씨가 나와 조식에 대해 사모의 뜻을 전했다. 잠에서 깬 조식은 희비의 생각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감견부(感甄賦)》를 지었다. 이후 조예가 이 시를 보고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서 《낙신부(洛神賦)》라고 개명했다. 하지만 진위는 불분명하다.

위략》에 따르면 조비는 처음에는 조예를 싫어해서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했다. 위말전에 의하면 어느 날 조비가 조예와 함께 사냥을 나가게 되었는데, 어미 사슴이 새끼 사슴과 함께 튀어나오자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쏜 후 조예에게 새끼를 마저 쏘라고 했다. 이에 조예는 자신과 어머니의 사정에 비유하여 "폐하께서는 어미를 쏘셨습니다. 어찌 차마 그 자식까지 쏠 수 있겠습니까."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그 말에 마음이 움직인 조비는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조예를 기특하게 여겨 태자로 세우기로 결심했다.

아들 조예가 황제로 즉위하자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그 영지로 세상을 계몽했다는 뜻으로 문소황후(文昭皇后)라는 시호를 올렸다.

227년 4월, 처음으로 선조의 영묘를 세우려고 땅을 파다가 옥새를 얻었는데, 인문(印文)에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천자는 자애로운 모친을 숭앙하고 그리워한다.’ 조예는 이 글씨를 보고 얼굴을 고치며 태뢰의 제의로써 종묘에 제사지냈다. 또 조예는 꿈 속에서 견씨를 본 후에 외가들의 친하고 소원하고 높고 낮음에 따라 차이와 등급을 두었으며, 각기 차별을 두어 임용했고 막대한 하사품을 주었으며 견상을 호분중랑장에 임명했다. 이후 이들의 가계는 대대로 이어져서 후의 팔왕의 난 즈음에도 난을 피해서 혈맥을 유지했다. 이 달, 견씨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조예는 시복(緦服)을 만들어서 외할머니의 상례(喪禮)에 직접 참여했고, 모든 관료들도 배석했다.

230년 11월, 견씨의 옛날 능은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작게 건축되었으므로, 견상을 보내 태위를 겸임하여 부절을 갖고 업성에 가서 토지신에게 보고하도록 했으며 12월에 견씨를 조양릉(朝陽陵)에 다시 묻었다. 견상은 귀환하여 산기상시로 승진하였다. 견상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견창으로 후사를 잇게 했다.

위략》에 따르면 조예가 견씨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슬퍼하자 곽여왕은 우려하다 갑자기 죽었다. 이부인은 처음으로 조예에게 곽여왕이 문소황후를 참소했으며 죽을 때는 대렴도 받지 못하고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다고 말했다. 이를 들은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장례식을 문소황후의 장례식과 똑같이 치르도록 했다.

《한진춘추》에 따르면 황제 조예가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는, 속으로 항상 원한을 품고, 자주 울며 견씨가 죽을 때의 상황을 새어머니인 곽여왕에게 물었다. 곽여왕이 말하길 "선제께서 친히 죽이신 건데, 어찌하여 나에게 책문하는 것이냐? 또한 너는 사람의 자식이 되어, 죽은 부친을 원수로 삼고 추궁하며, 전 모친을 위해 그 뒤의 모친을 능멸하고 죽일 수 있느냐?" 조예는 분노하여 그녀를 핍박하여 죽이고는, 칙서로 곽여왕의 초빈을 견씨가 죽을 때 받은 초빈과 똑같이 치르게 하였다.

237년 여름에 담당관리가 칠묘(七廟)의 제도를 의논하여 정했다. 겨울에 또 상주를 올려 견씨의 영묘를 수도에 세워 대대로 공물을 바쳐 제사지내고, 음악을 연주하고 시조의 묘와 똑같이 예우하여 훼손되지 않는 법전으로 영원히 빛나게 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조예는 칠묘 건립에 관한 상주문을 모두 금책에 새겨 금속 상자에 보관하도록 했다.[10]

조예는 외가(外家)의 일을 끊임없이 생각했다. 경초 말, 견창은 아직 어렸지만, 사성교위로 삼고 산기상시의 자리를 주었으며, 또한 대저택을 특별히 지어주고, 수레를 타고 직접 찾았다. 또 그 집의 뒤뜰에 견상의 어머니를 위해서 묘를 지었고, 그 지역을 위양리(渭陽里)라고 이름하여 견상의 어머니를 추모했다.

3.4.1. 죽음에 대한 여러가지 설들

220년 정월, 조비가 왕위에 즉위했다. 그 해 6월, 조비는 남방 정벌에 나섰으나 견씨는 따라가지 않고 업성에 남았다. 이것이 견씨가 죽기 전의 마지막 기록이고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는데 관련 기록들을 모두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220년 10월, 조비는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산양공이 된 헌제는 두 딸을 조비에게 시집보내 조비의 비빈이 되게 했으며, 곽여왕 등도 모두 총애를 받았다. 문소황후는 갈수록 실의에 빠져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조비는 대노하여 221년 6월에 사자를 보내 그녀에게 죽도록 하였다. 죽은 후에는 업에 매장하였다.
정사 문소견황후전
2. 명제(조예)가 즉위하고 나서 문소황후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음을 추모하고 슬퍼하자 태후(곽여왕)는 우려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문소황후가 죽을 때, 조예를 이부인에게 맡겼다. 곽여왕이 죽자, 이부인은 처음으로 문소황후가 참소에 의한 화를 만났고, 시신을 관에 넣는 의식인 대렴을 받지 못했으며,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얼굴을 덮었음을 설명하니 조예는 슬퍼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며 곽여왕의 빈장을 모두 문소황후의 고사와 똑같이 하라고 명령했다.
위략
3.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곽여왕(곽귀빈)을 총애하니 문소황후(견부인)는 업에 남아있어 알현할 수 없게 되고 실의에 빠져서 원망하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곽여왕이 이를 가지고 참소하자 황제가 크게 노하였다. 6월 28일 사자를 보내 문소황후에게 죽음을 내렸다.
자치통감
4. 유사(담당관리)가 장추궁(황후)을 세우는 것을 아뢰니, 문제(조비)가 새서로 황후(문소황후)를 맞이하려 하여, 이르게 하나, 문소황후가 상표하길 “첩이 듣기론 선대의 흥함에서, 국가에 제사를 오래도록 지낼 수 있었던 까닭은, 복을 후사에 물려줬기 때문이라, 후비로 인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사람을 살피고 가려서, 내교를 일으켰습니다. 가령 즉위 초에는, 참으로 마땅히 어질고 정숙한 이가 오르게 하여, 육궁을 다스려야 합니다. 첩이 어리석고 고루함을 스스로 반성하니, 자성의 일을 감내하지 못하고, 병까지 앓았기에, 감히 변변치 못한 뜻을 지키는 바입니다.” 새서가 3번 이르나 문소황후는 3번 사양했고, 글도 더욱 간절했다. 당시 한더위라, 조비는 추량을 기다렸다가 다시 문소황후를 영접하길 원했다. 때마침 문소황후가 병환으로 위독하더니, 여름 6월 정묘일에, 업에서 죽었다. 조비가 애통해하며 탄식했고, 황후의 새수를 책증하였다.
위서

첫 번째 기록인 《정사 삼국지》의 내용은 조비가 견씨를 버려두고 다른 첩들을 총애하였고 이를 견씨가 원망하자 사사했다는 것이다. 즉 정사의 기록을 따를 경우 견씨의 죽음은 조비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고 이 과정에 개입한 다른 인물은 없다.

하지만 《위서》와 《자치통감》의 기록을 보면 견씨는 에서 죽었고 조비는 이 때 낙양에 있었다. 따라서 견씨가 조비를 원망했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알려주지 않으면 조비는 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소황후의 죽음은 정사의 내용과 달리 조비가 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개입했지만 정사는 그것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견씨를 모함했는지가 문제가 되는데 두 번째 기록인 《위략》에 따르면 곽여왕은 견씨를 참소(거짓으로 남을 헐뜯는 말)하였다. 따라서 견씨가 원망하는 말을 하자 곽여왕이 이것을 가지고 모함을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는 세 번째 기록인 자치통감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편 《삼국지집해》의 편저자 노필은 견씨가 죽은 이유에 대해 또 다른 가설을 들었다. <명제기>에 따르면 조예는 죽을 때 36세라고 나와있고 이 기록이 맞다면 조예는 조비의 아들이 아니다. 노필은 이에 대해 진수가 조예의 나이를 왜곡하였고 그 이유는 조예가 견씨의 첫번째 남편인 원희의 아들임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조비가 견씨를 사사한 것과 조예를 홀대한 것을 들었다. 즉 이 가설에 따르면 조비가 견씨를 죽인 이유는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예가 원희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딱히 신빙성이 없다. 다만 조비가 견씨를 죽인 이유가 조예의 출생과 관련이 있는 것이 맞다면, 그 이유는 조예가 자신의 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진수가 조예의 나이를 왜곡한 것은 조예가 조비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실제로 존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런 소문이 생전에도 있었다면 그 때문에 견씨가 희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1]

네 번째 기록인 왕침의 《위서》는 위나라 용비어천가 성향이 있는데, 위서에는 견씨의 엄친딸스러운 일화가 한결같이 소개되고 있고, 마지막에도 위와 같이 견씨가 병으로 죽자 조비가 애통해하며 탄식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사 또한 위나라를 정통으로 보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조비가 견씨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죽였다고 거짓으로 기록할 리는 없다. 따라서 조비가 견씨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곽말약 등은 조식이 견씨를 연모하여 지었다는 《낙신부》와 관련된 설화를 적극 채용하여 조식이 견씨를 연모한 것이 견씨가 죽은 원인이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왕침의 기록에 대해 주석으로 이를 인용한 배송지는 왕침이 위나라 왕조를 보기 좋게 꾸미려고 구라를 친게 저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까며[12] 해당 기사 이외에도 변씨와 견씨를 필두로 위나라 후비들의 선행으로 적힌 것들이 모두 진실을 말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평했다. 또 진수가 이러한 것들을 적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했다.

다만 왕침이 죽음같이 민감한 부분에 대해서 구라를 쳤다고 해서 그가 적은 다른 내용까지 구라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리고 왕침이 구라를 쳤기 때문에 그가 쓴 다른 내용도 못 믿겠다면 위서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위서 자체는 문제삼지 않고 하필 그 중에서 후비들의 선행만 못 믿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이다. 왕침은 거짓말쟁이인데 남자에 대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여자에 대해서만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또 진수가 적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도 억지다. 아래 기타 내용에서 나오겠지만 진수는 견씨의 작위를 낮추는 조서도 적지 않았고 조모의 죽음같이 민감한 부분도 자세한 정황은 숨겼다. 즉 진수가 어떤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것이 거짓이라 믿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진실이라 믿었음에도 고의로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많다는 것이다.

<주선전>에 따르면 조비는 푸른 기운이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이어지는 꿈을 꾸고 주선에게 해몽을 부탁한다. 주선은 이를 듣고 대답했다.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여자가 원통하게 죽을 것입니다." 이 때가 조비가 견씨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을 때로 이 말을 듣고 조비는 후회하며 사자를 보내 말리게 했지만 이미 그녀는 자결한 뒤였다.

4. 삼국지연의

옥 같은 피부에 꽃 같은 얼굴(玉肌花貌)을 가진 미인으로 묘사된다. 조비가 견씨를 취한 일은 《위략》의 묘사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조비가 황제가 된 후 장도와 공모한 곽여왕의 계략으로 죽는다.

5. 기타

5.1. 부인(夫人)이라는 칭호

조비가 왕에 오른 이후 견씨가 어떤 작위를 받았는지 진수는 명시적인 책봉 기록을 쓰지 않았다. 《정사 삼국지》 <문제기>에 견씨의 죽음을 기록하며 부인(夫人) 견씨라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이 부인이 조조가 왕후 바로 아래에 둔 작위로서의 부인인지 작위가 없는 처첩을 일컫는 부인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삼국지집해 무제기의 내용에 따르면 왕침은 《위록》이라는 책[13]에 견씨의 작위를 낮추는 조서를 외람되게 썼다는 구절이 있다. 그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이 행위에 대해 곽연년은 왕침은 위에 불충하였기에 견씨의 작위가 낮추어지자 이 조서를 외람되게 써서 조씨의 추악함을 드러내려 했다고 설명했다.[14]

어쨌든 조비가 견씨의 작위를 낮추었다는 것은 반대로 문소황후가 처음에는 작위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진수가 책봉 기록을 숨겼기 때문에 그 작위가 무엇이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견씨가 처음부터 작위가 없었다는 견해는 엉터리라는 것.

5.2. 위략의 기록에 대하여

곽여왕이 견씨를 참소했다는 《위략》의 기록에 대한 반론도 있다.

조예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견씨가 죽을 당시 조예의 나이는 17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7살이 된 조예가 어떻게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모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예가 즉위할 당시 조정 대신들조차 조예의 풍채를 잘 몰랐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뜻은 조예는 사람들과의 교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전혀 만나지 않고 책만 읽었던 조예가 조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조예가 이미 장성한 나이었더라도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편 곽여왕이 죽고 1년 후에 곽여왕의 일족들이 조예에게 대우를 받은 기록을 근거로 곽여왕이 견씨를 참소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장수는 조조의 맏아들, 조카, 휘하 장수를 죽인 원수임에도 조조는 장수의 일족은커녕 장수에게도 보복하지 않고 잘 대우했다.[15] 조조가 장수를 대우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장수가 조앙을 죽이지 않았다고 해석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조예가 곽여왕이 죽은 후 죄없는 그 일족을 대우했다는 것이 곽여왕이 견씨를 참소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것을 조예의 관대함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

한편 <문덕곽황후전>에 따르면 곽여왕은 장례제도에 따라 수양릉의 서쪽에 매장되었다. 곽여왕이 조비의 무덤인 수양릉의 서쪽에 매장되었으므로 조예는 곽여왕에게 악감정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16]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장례제도란 조비가 정한 장례제도를 의미한다. 문제기에 의하면 조비는 장례제도를 정하며 황후부터 귀인 이하 비까지 자신과 함께 묻히지 않고 모두 윤수 서쪽에 매장하겠다고 하였다. 즉 문제기의 내용에 따르면, 곽여왕이 매장된 곳은 조예가 정한 것이 아니라 조비가 정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조비 스스로 곽여왕과 함께 매장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곽여왕이 묻힐 곳은 조예가 정한 것이 아니라 조비가 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위치를 가지고 조예가 악감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지는 것 자체가 신기한 발상이다. 하지만 조예가 곽여왕에게 악감정이 있었다면 아버지와 계모가 함께 묻히는 것은 막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조예는 황제이기 때문에 조비가 정해놓은 위치를 멋대로 바꿀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곽여왕이 조비와 함께 묻혔다면 조예가 곽여왕에게 악감정이 없었다는 견해가 맞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정사의 기록에 따르면 조비가 곽여왕과 함께 매장되었다는 추론은 불가능하다. 조비 스스로 그것을 거부했다. 그러므로 장례제도에 따라 수양릉의 서쪽에 매장되었다는 것은 조비와 함께 묻혔다는 것이 아니라 윤수 서쪽에 매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윤수 서쪽에는 곽여왕 혼자 매장된 것도 아니고 귀인 이하 비까지 모두 묻혔을 것이다. 조예가 곽여왕에게 악감정이 있다면 조비와 함께 묻히는 것은 막았을 수도 있겠지만 윤수 서쪽에 다른 후궁들과 묻히는 것까지 막을 이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위의 견해는 조비가 장례제도를 정하며 곽여왕과 함께 묻히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수양릉의 서쪽에 묻혔다는 기록을 둘이 함께 묻힌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나온 틀린 추론이다. 그러므로 곽여왕이 조비와 함께 묻혔으므로 조예가 곽여왕에게 악감정이 없었다는 추측은 성립하지가 않는다. 둘이 함께 묻혔다는 전제부터가 엉터리다.

한편 부인 견씨라는 표현에서 부인은 작위가 없는 처첩을 뜻하며 견씨는 조비에게 작위를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곽여왕이 질투할 이유가 없다는 논지의 주장도 있다.[17] 하지만 부인이라는 칭호 부분에서 이미 견씨는 조비로부터 작위를 받았음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그 작위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를 떠나서 견씨가 조비에게 작위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추측은 모두 엉터리다. 반대로 견씨를 질투한 곽여왕의 참소 때문에 견씨의 작위가 낮춰졌을 가능성이 높다.

5.3. 작품

유년 시절의 견씨의 기록을 보면 다 자랄 때까지 놀기를 싫어했고 독서에 매진했다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볼 때 상당한 재녀였고 악부 짓기를 즐겨한 것으로 보이나 현재 전하는 작품은 《당상행》이라는 시 한 편뿐이다. 죽기 직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며 곽여왕 및 그 일파에게 참소를 당해 조비는 낙양으로 가버리고 자신은 업성에 남아있는 상황에 대한 억울함과 조비의 사랑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시로 보인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슬프고 처량하다.

6. 무덤

현재 허베이성 임장현에 견씨의 두 번째 무덤인 조양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있고 그녀의 무덤인 것처럼 조성을 해 놓았다. 하지만 이 무덤도 조조묘와 마찬가지로 견씨의 무덤이 아니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견씨의 첫 번째 무덤은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작게 건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발굴된 무덤이 위치한 곳이 수위가 높아 수재에 취약한 곳이라 학자들은 이 무덤을 두 번째가 아닌 첫 번째 무덤으로 생각하는 듯.

한편 이 무덤은 조조묘와 가까이 있다. 이 때문에 현지에서는 조조묘와 함께 이 무덤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다만 둘은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이지 조조의 황후는 아니다. 따라서 조조와 견씨의 무덤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청나라 때 《창덕부지(彰德府志)》라는 기록에 의하면 조조묘와 견씨의 무덤은 함께 위치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조조가 견씨를 취하려 했다는 《세설신어》의 내용을 보고 조조를 폄하할 목적으로 만든 가짜 기록이라는 견해도 존재한다.

따라서 견씨의 두 번째 무덤인 조양릉은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낙양에 있는 조비의 무덤인 수양릉의 배릉(陪陵)이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 근거로 수양과 조양은 뜻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장소도 같은 곳일 것이라는 점, 즉위하고 이장을 바로하지 않고 4년을 기다린 것은 조비의 장례제도를 의식한 것이라는 점[18], 묘를 이장한 책임자가 지위가 낮은 사람이었다는 점[19], 곽여왕의 무덤 위치[20] 등을 들었다. 이 주장의 진위 여부 역시 추가적인 발굴이 있어야만 알 수 있을 듯.

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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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비보다 5살, 조식보다는 10살 많다. 손권과 동갑.[2] 한국사에서도 역사에 등장하는 견(甄)씨, 가령 견훤을 '진훤'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학자 이도학, 이이화 등이 대표적이며 그들의 저서에선 일관적으로 진훤이라 쓰고 있다. 다만 현대 한국에서는 견으로 읽는 입장이 더 우세하고, 견미리 등 현대 한국인 견씨들도 견 발음을 사용하고 있다.[3] 표준중국어 발음은 전.[4] 지(之)+인(人)으로 [ㅈ+인=진]이므로[5] 宓은 우리말로 '복' 혹은 '밀'로 읽을 수 있는데 '복'으로 읽는 경우는 성씨로 쓰이는 경우이다. 중국어권 인물의 이름인 경우에는 '밀'로 읽는게 올바르다. 같은 예가 촉한의 관료 진밀(秦宓)이며, 왜 복이 아니라 이름을 밀로 읽는지는 진밀 항목을 참고하라.[6] 이름을 밀 혹은 낙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낙수의 여신을 찬양하는 내용인 조식의 낙신부가 사실 견씨를 사모하는 마음을 담은 작품이라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으로, 낙(洛)은 낙수 낙(락), 밀(宓)은 낙수의 여신 '복비'의 복이다. 낙신부와 문소황후의 관련성을 추측하다보니 문소황후의 이름이 낙신부와 발음이나 뜻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서 나온 가설로 신빙성 자체는 낮다. 아무튼 중화권 매체에서는 대체로 이 설을 차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문소황후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견밀이나 견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7] 낙신부 항목에서 알수 있듯, 원래 낙신부는 조식이 문소황후를 보고 그 아름다움에 감탄한 시(감견부)였으며, 조예가 어머니의 명예를 위해 나중에 복비로 고쳤다는 해석이 주류다. 따라서 복비에서 따온 것이므로 견밀이 아니라 견복이 맞다는 관점은 인과관계상 설득력이 낮다.[8] 처음에 조조가 유정을 죽이려고 한 것은 그만큼 견씨를 약탈한 일에 대한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의미다.[9] 아이들과 떨어져 있었음에도 조조 집안 사람들이 모두 원정을 나가자 오히려 안색이 좋아진 것은 그만큼 조조 집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녹록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는 없으니 시어머니를 띄워주는 대답을 한 것으로 보인다.[10] 영묘는 시대가 변하고 관계가 멀어지면 헐리는 것이 상례이다. 단지 특별한 인물은 왕조의 지속적인 보존이 된다. 예를 들면, 주나라의 칠묘에는 후직(后稷)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의 묘가 헐리지 않았고, 현존하는 왕의 아버지로부터 4대 묘를 세우고, 왕이 바뀌면 먼 선조의 묘를 헐고, 전왕(前王)의 묘를 세운다. 주나라에서는 이 칠묘 이외에 특별히 강원(姜嫄)의 묘가 세워졌다. 따라서 주나라에서는 후직, 문왕, 무왕, 강원의 묘가 영원히 헐리지 않는 묘이다. 위나라에서는 시조인 조조, 조비, 조예와 견씨의 영묘가 영원히 헐리지 않는 묘가 된 것이다. 강원은 후직의 어머니이므로 위나라에서는 조조의 어머니에 해당하지만, 위나라는 견씨의 묘를 특별히 세웠다.[1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조예 문서의 원희의 자식? 부분을 참조.[12] 진수 역시 견씨의 죽음에 대해 숨기고 쓰지 않은 것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배송지의 의견에 따르면 그것은 춘추의 의에 합당한 서술이었다. 그런데 왕침은 조비가 견씨를 죽이지 않았다고 완전히 사실관계를 왜곡해버렸기 때문에 진수와 비교하며 왕침을 깐 것이다.[13] 왕침이 쓴 《위서》와는 다른 책이다.[14] 왕침이 조서를 조작했다고 비판한 것이 아니라 조서를 실은 행위 자체를 비판한 것이다.[15] 그러나 조비는 잔치를 열면 매번 장수를 초대해 "우리 형을 죽여놓고 뭔 낯으로 뻔뻔하게 아버지에게 녹봉을 받아먹느냐?"고 면박을 줬다. 또한 장수 사후로부터 12년 가량 후 위풍이 난을 일으켰을 때 장수의 아들 장천은 자식과 함께 연좌죄로 같이 참살당해 장수의 대가 끊겼다. 이게 꽤나 석연치 않은지라 조조가 정말로 보복할 마음이 없었는지 확신은 할 수 없다. 앞의 주석에 대해 추가하자면, 장수에게 면박을 준 조비의 행위가 조조의 의중과 똑같다고 볼 수는 없다. 또 장수가 죽은 지 12년 후에 장천이 죽었는데, 이를 장수에 대한 보복으로 보기도 힘들다. 게다가 조조가 보복의 의도가 있었는데도 12년이나 참았다고 본다면, 자신의 감정만으로 일족들에게 복수하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만 증명해주는 셈이 된다. 조조가 장수의 일족에게 12년 후에야 겨우 보복했다고 본다면, 조예 역시 보복의 마음이 있었지만 쉽게 그럴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16] 다만 이 견해는 위의 두 가지와는 달리 위키에만 있었던 신빙성이 떨어지는 견해임을 밝혀둔다.[17] 이 역시 위키에만 있었던 신빙성이 떨어지는 견해다.[18] 조비는 장례제도를 정하며 자신의 부인과 함께 묻히지 않은 순임금의 고사를 따라 황후부터 귀인 이하 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신과 함께 묻히지 않고 골짜기 하나의 거리를 두고 윤수 서쪽에 매장하겠다고 하였다. 조비가 누구와도 같이 묻히지 않겠다고 정했기 때문에 조예가 견씨의 무덤을 이장해서 조비와 함께 묻는 것은 조비의 장례제도를 위반하는 것이다.[19] 책임자는 견씨 일족이었는데 지위가 낮다는 것은 비밀스레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논리다.[20] 조비 스스로 곽여왕과 함께 묻히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곽여왕은 윤수 서쪽(수양릉의 서쪽)에 묻혔을 것인데 어쨌든 수양릉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조예가 문소황후는 아예 조비와 같은 곳에 묻어서 생모가 더 우월함을 드러내려 했다는 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