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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0:52:10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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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
大明 | Mi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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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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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0년대의 명나라
1368. 1. 23. ~ 1644. 4. 24.
(276년 3개월 2일)
[1]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오나라#s-1.6|
]]
남명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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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년 주원장 세력의 독립
1363년 파양호 대전
1368년 칭제건원(건국)
1382년 천하통일
1399 ~ 1402년 정난의 변
1421년 베이징 천도
1449년 토목보의 변
1457년 탈문의 변
1550년 경술의 변
1571년 융경의 화의
1573 ~ 1582년 장거정의 개혁 시작
1581년 일조편법 시행
1619년 사르후 전투
1622년 서홍유, 백련교도 봉기
1623년 위충현 실권 장악
1627년 농민 반란 확산 / 위충현 실각
1636년 청 건국 / 이자성, 틈왕 자칭
1644년 멸망
1662년 남명 멸망
}}}}}}}}}
지리
<colcolor=#800000> 위치 <colbgcolor=#fff,#191919>중국, 베트남 북부[2]
수도 남경 응천부 (1368 - 1421)
북경 순천부 (1421 - 1644)
면적 9,970,000km² (1422년 기준)
6,500,000km² (1450년 기준)[3]
인문 환경
인구
(추산)
6,500만명 (1393년)
1억 2,500만명 (1500년경)
1억 6,000만명 (1600년경) 출처
민족 한족, 묘족, 장족, 바이족, 후이족, 몽골족, 여진족, 둥족, 그 외의 피지배층 민족
언어 근고한어, 한문, 오어 등등의 방언
문자 한자
종교 유교(성리학) (국교), 티베트 불교, 대승 불교, 도교(무당파), 이슬람교, 경교, 백련교
정치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皇帝)(천자)
주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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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홍무제 주원장 ,(1368~1398),
3대 영락제 주체 ,(1402~1424),
5대 선덕제 주첨기 ,(1425~1435),
6대 정통제 주기진 ,(1435~1449),,(1457~1464),
9대 홍치제 주우탱 ,(1487~1505),
11대 가정제 주후총 ,(1521~1567),
13대 만력제 주익균 ,(1572~1620),
16대 숭정제 주유검 , (1627~1644),
국성 강서 주씨()
기타
통화 홍무통보(洪武通寶), 대명통행보초(大明通行寶鈔)[4]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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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건국2.2. 초기
2.2.1. 홍무제의 통치2.2.2. 영락제의 통치2.2.3. 홍희제선덕제: 인선지치
2.3. 중기2.4. 후기
2.4.1. 장거정의 개혁2.4.2. 만력제: 황제의 30년 파업2.4.3. 명말 3대 의안2.4.4. 천계제: 환관 위충현의 횡포2.4.5. 숭정제: 명나라의 멸망
3. 정치
3.1. 내각3.2. 육부3.3. 감찰 기관3.4. 기타 기관들
4. 행정구역5. 군대6. 행정과 조세7. 경제와 대외 교역
7.1. 명나라의 경제발전에 대한 비판적 시선
8. 종교9. 외교10. 문화
10.1. 철학10.2. 사서10.3. 문학10.4. 예술10.5. 복식10.6. 과학기술
11. 왕사12. 여담13.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명나라(明나라)는 중국의 통일 왕조이다. 1368년 주원장이 건국한 한족 최후의 통일 왕조이다. 또한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강남 지역에서 출발하여 통일 왕조를 세운 국가이기도 하다.

정식 국호대명(大明)[10]이며, 국성을 따서 주명(朱明)이라고도 한다. 건국 초기의 수도는 난징 이었으나 영락제베이징으로 천도하였다.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1368년부터 1644년까지 276년간 존속했다.[11]

다소 특이하게도 국가의 근거가 된 땅의 이름이 아닌 이름을 국호로 정했다. 이는 태조 주원장이 믿었던 백련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것으로, 백련교에서는 흑암(黑暗)이 물러가고 광명(光明)이 올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흑암인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라 하여 명이라는 국호를 쓴 것이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 왕조를 건국하면, 건국자가 기존에 하사받거나 불리던 작위가 고스란히 황제로 격상되면서, 그와 동시에, 작위에 설정되어 있는 봉지가 왕조의 국호 그 자체로 격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12] 주원장은 황제가 되기 전 오왕(吳王)이었음에도 이를 쓰지는 않았다. 오(吳)라는 글자에 강남을 가리키는 지역색이 너무 강하게 들어 있어서 중국 전체를 포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건국 초기에는 만리장성 이남의 중원내몽골 남쪽 일부, 만주 일부에 이르는 지역까지 장악하였다.[13] 또 15세기 중엽까지 대대적인 원정을 통해 국가의 위세를 떨쳤다. 조선, 류큐 왕국, 대월 등이 사대의 예를 취하였으며,[14] 일본무로마치 막부 초기부터 명나라에 조공하기 시작했다.

농민에 의해 건국되고 농민에 의해 멸망한 나라이기도 하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주원장이 몽골 제국원나라북쪽으로 몰아내어 건국되었으나, 만주족청나라가 남하 침략하여 나라가 어려워지고 폭정으로 농민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역시 가난한 농부였던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 북경이 함락되고 황제인 숭정제가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이후 최후까지 저항하던 남명과 타이완의 세력마저 청나라에게 항복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2. 역사

2.1. 건국

파일:1280px-A_Seated_Portrait_of_Ming_Emperor_Taizu.jpg 파일:Red_Turban-1.png
명 태조 주원장 원말명초의 세력도
몽골 제국 초창기에는 뛰어난 행정가 야율초재가 제정한 세수를 활용한 덕에 그 항목이 명확하고 세금도 일정 금액 하로 제한됐다. 원나라 초창기만 해도 쿠빌라이 칸이 발행한 중통초와 지원초 등 교초도 상당히 오랫동안 정상적으로 유통될 정도로 경제가 안정됐다. 그러나 원나라가 점차 쇠락하기 시작하며 몽골 귀족들의 부정부패가 극심해졌고, 돈이 절실해진 원 조정은 세율 인상과 동시에 지정교초(至正交鈔)를 대량으로 발행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경제혼란과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1351년에는 황하의 제방을 쌓는다고 인근 10만 명의 농민들을 강제로 징집했는데, 이미 농민들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공사현장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은 데다가 배급량마저 줄자 당장이라도 폭동을 일으킬 흉흉한 분위기가 일어났다. 이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결국 원나라에 대항하는 홍건적의 난이 터지고야 만다.

혜종 11년인 1351년 9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중국 전역에서 홍건적과 백련교 세력, 군벌들이 득세했고 개중 곽자흥은 반란군을 모아 안후이성 펑양현 일대를 함락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주원장이었다. 펑양현 출신인 주원장은 가난한 농민으로 태어났지만 곧 곽자흥 세력에 가담해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는 등 곽자흥 세력의 2인자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세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주원장은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펑양현을 떠나 1356년 집경, 즉 현재의 난징을 점령했다. 주원장은 집경을 응천부(應天府)로 개칭한 뒤 일대를 평정해 거점을 마련하는 데에 성공했다.

주원장은 이 당시까지만 해도 적은 영토와 쪼들리는 식량 때문에 다른 군벌 세력들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주승(朱升)의 '성벽을 높게 쌓고, 곡물을 널리 모으며 천천히 군왕의 자리에 오르라'라는 조언을 받아들여 꾸준하게 힘을 쌓아나갔다. 수 년간의 노력 끝에 주원장의 세력은 급속하게 성장했다. 1360년에 주원장은 난징 북서쪽 용만(龍灣)에서 또다른 홍건적 지도자이자 최대 라이벌인 진우량과 전투를 벌여 승리, 진우량의 군대는 큰 타격을 입고 구주로 도망갔다. 1363년에는 결전 파양호 전투에서 또다시 진우량에게 대승을 거둔 뒤 4년 뒤인 1367년 오왕(吳王)으로 칭왕 후 즉위했다.

주원장은 1367년 연달아 또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을 공격해 본거지인 평강을 함락해 장사성 세력을 소멸시켜버렸고, 동시에 저장성 해안에서 군벌 방국진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모든 경쟁자들을 제거한 주원장은 1368년 정월, 응천부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300년 역사 명나라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주원장은 그해 여름 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공격해 함락했고, 1371년 쓰촨성명옥진을, 1381년에 윈난성양왕을 쓰러뜨렸다. 1388년에는 북쪽으로 쫒겨난 북원[15]마저도 공격하며 세를 과시했다. 마침내 한족이 몽골족을 몰아내고 다시 천하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2.2. 초기

2.2.1. 홍무제의 통치

명나라 건국 직후 홍무제 주원장은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하고 사회경제 생산력을 회복하며 원나라가 남긴 불합리한 관행들을 혁파, 부패관료들을 벌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 1368년부터 1398년까지 약 30년에 이르는 홍무제의 집권기를 '홍무지치(洪武之治)'라고 한다. 명군이었던 주원장이 온 힘을 쏟아 국력 신장에 신경쓴 덕에 경제는 급속도로 회복되었고 국력은 크게 성장해 명나라 역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 주원장은 세금 및 노동력 징수와 지방 방비를 위해 호적과 토지대장을 대대적으로 재편찬했고, 동시에 이갑제라는 향촌 제도를 설치해 백성들에게 효과적인 징세 및 노역을 부과했다.

정치적으로도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원나라의 최고기관이던 중서성이 폐지됐고 재상의 권한이 6부로 쪼개졌다. 6부를 책임지는 상서들이 황제를 직접 보좌해 황명을 받들었다. 더이상 황제 아래 독자적으로 막대한 권한을 휘두르던 재상직은 다시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원장의 확고한 뜻이었다. 이로써 진나라 이래로 내려오던 재상직이 폐지되고 황권이 크게 강화됐다. 동시에 6부에서부터 저 지방 향촌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 모든 관료들을 대상으로 탐관오리 색출 작업을 진행해 60냥이 넘는 은을 횡령한 관리들은 모조리 죽였다. 부패에 연루된 관료들은 출신고하를 가리지 않고 죄다 잡혀가 죽임을 당했다. 주원장은 백성들이 부패관료를 조정에 고발하는 것까지 허용하며 명나라 내의 부정부패를 뿌리뽑아버리고자 들었다. 백성들의 탄원은 국법으로 보호받았고 관리가 탄원을 접수했음에도 묵살한 경우에도 관리를 처벌했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건국하면서 수많은 공신들을 임명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의심이 많던 성격인 주원장은 공신들마저 의심했다. 막대한 권력을 가진 공신들이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제뜻대로 놀거나 반역의 의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 재상이자 공신 호유용은 주원장의 총애를 등에 업고 막대한 뇌물을 받거나 황제에게 올라가는 상주문을 제멋대로 검열하고 주원장을 업신여기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주원장은 자신이 죽으면 이 공신 세력들이 당을 만들어 황제를 멋대로 좌지우지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 결과 주원장은 호람의 옥(胡藍黨獄)을 일으켜 거의 모든 공신들을 숙청해버렸다. 1375년 요영충이 숙청된 것을 시작으로 주양조, 이문충 등이 연달아 죽임을 당했다. 1380년에는 마침내 호유용의 옥을 일으켜 호유용을 숙청한 뒤 어사대부 진녕과 어사중승 도절도 함께 처형했다. 1390년에는 최대 공신이던 이선장마저 호유용과 결탁했다는 혐의로 그와 그의 가족 70명을 처형했다. 총 30,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잡혀갔고 죽은 사람이 15,000명이 넘었다. 마지막으로는 대장군 남옥도 모반 혐의로 숙청하면서 호유용의 옥에 숙청되지 않은 공신들마저 죄다 쓸어버렸다. 공인의 옥과 곽환의 옥까지 포함하면 홍무제가 죽을 때까지 목숨을 부지한 공신은 탕화, 경병문, 곽영 이 3명 뿐이었고 이들조차도 끝까지 황제를 두려워하며 납작 엎드려 살아야했다.

2.2.2. 영락제의 통치

파일:정화의 항해로.png 파일:영락제 어진.jpg
정화의 대원정 영락제
홍무제 재위시절 황태자인 주표가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손자인 주윤문이 황태손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는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표외에 다른 아들들은 번왕으로 임명하여 약간의 병사를 주고 마치 지방 제후처럼 역할을 주고 있었다. 개중 몽골에 대한 국경 방어 임무를 맡긴 북부의 번왕들이 가장 권력이 강했는데, 개중에서도 연왕 주체의 세력이 으뜸이었다. 홍무제는 이들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해 필요할 시 탐관오리들을 체포,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황제의 칙령을 받아 난을 평정한다는 '정난(靖難)'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동시에 번왕들이 난립하는 것을 막기위해 후임 황제가 번왕들을 숙청하는 삭번(削藩)도 가능토록 만들었다.

홍무제가 죽자 2대 황제에 오른 손자 건문제는 제태, 황자징 등 신하들의 요청에 따라 삼촌인 번왕들을 숙청하려 들었다. 그렇게 주왕, 대왕, 제왕, 상왕이 평민으로 폐위되거나 사형당했다. 가장 강력한 군사를 지니고 있어 다음으로 숙청당할 것이 뻔했던 연왕 주체는, 연왕 휘하 정예병들이 하나하나 다른 곳으로 이송되어 떨어져나가 숙청이 눈앞으로 다가온 것을 직감하자 먼저 선수를 쳐 황제의 눈을 흐리는 간신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주체의 군대가 황궁을 점령하자 건문제는 화재 속에 자취를 감추었고, 연왕 주체는 스스로 명나라의 3대 황제에 즉위했다. 이 주체가 바로 명나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락제다.

영락제는 즉위 직후부터 활발한 대외정책을 펼쳤다. 제일 먼저 베트남호 왕조를 공격해 명나라의 일개 지방으로 합병한 뒤 교지를 세워 통치했다. 또한 미래의 위협을 없애기 위해 15년간 5번이나 북쪽의 몽골로 직접 쳐들어갔다. 영락제는 타타르 몽골을 견제하기 위해 오이라트에 3명의 왕을 책봉했고 반대로 오이라트가 득세하자 타타르가 오이라트를 치게 놔두어 누구도 지배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영락제는 우량카이족과 복여위(福餘衛), 태녕위(泰寧衛), 타안위(朵顏衛) 등 3위에 자치권을 부여했으나 이 몽골3위가 남하해 만리장성 이남에서 목축하는 것은 금지했다. 영락제는 북방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1406년, 1422년에 우량카이족을 공격했고 동북쪽의 여진족을 방비하기 위해 해서여진과 건주여진 일대에 초소를 설치하고 환관 이시하를 파견해 변경을 안정시켰다. 흑룡강 남쪽의 야인여진을 막기위해 1409년에 누르간도지휘사사를 세워 명나라의 동쪽 국경을 확장했으며, 심지어 저멀리 사할린 섬까지 진출해 그 곳의 추장에게 명나라의 관직을 내리기까지 했다.

영락제는 환관 정화를 시켜 정화의 대원정을 벌였다. 중국 역사상 전례없는 규모로 거대한 원정을 벌이며 심지어 저멀리 아프리카의 뿔 일대까지 진출해 조공을 받았으며, 이같은 항해는 영락제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명나라는 이 정화의 대원정 덕분에 명나라의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서쪽의 티무르 제국을 견제할 수 있었다.

국내적으로는 영락대전을 반포했다. 3년 만에 완성된 영락대전은 총 본문 22,877권, 목록 60권인 것을 1책 당 2권으로 묶어 10,095책으로 엮어냈다. 7,000만 단어에 총 글자수는 무려 3억 7,000만 자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을 자랑했다. 이 영락대전을 뛰어넘을만큼 거대한 장서는 훗날 건륭제가 만든 사고전서 밖에 없는 수준이다.[16] 워낙 방대해 명 황제들 중에서도 오직 홍치제가정제 밖에 읽어본 사람이 없었다고. 특이하게도 영락제는 이 영락대전을 복사해 보관하지 않고 오직 1부만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영락대전은 그렇게 1410년 완성됐다. 뿐만 아니라 1405년부터 베이핑을 베이징으로 개명한 뒤 국자감을 건립해 천도할 뜻을 세웠고,[17] 1421년 공식적으로 도읍을 옮겨 천도했다. 현대 중국의 상징인 자금성이 세워진 것도 이때. 이 당시 명나라가 국력이 절정에 달했기에 영락제의 통치기를 '영락성세(永樂盛世)'라고 부른다.

2.2.3. 홍희제선덕제: 인선지치

파일:홍희제 어진.jpg 파일:선덕제 어진.jpg
홍희제 선덕제
명나라의 찬란한 전성기를 이끌었던 영락제가 죽자 그의 아들 주고치가 제4대 황제 홍희제로 즉위했다. 홍희제는 선천적으로 병약했던데다가 황제의 살인적인 업무를 견디지 못하고 1년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짧은 치세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양사기, 양영, 양부 이렇게 3양(三楊)이라 불리는 명신들을 뽑아 정무를 보좌토록 했으며 백성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하여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던 정화의 대원정을 중지했다. 홍희제는 또한 경제 생산을 장려했고 감옥의 투옥 기간을 줄여주는 등 애민정신을 지닌 관대한 군주였던데다가 검소한 성품을 지니기까지 했다. 능숙한 유교 정치를 펼쳤던 홍희제였으나 결국 즉위 1년 만인 1425년 5월에 사망, 제위는 그의 아들 선덕제에게 넘어갔다.

홍희제 사후 그의 장남 주첨기가 선덕제로 제위에 올랐다. 기본적으로 홍희제의 국정노선을 따랐던 선덕제는 10년 간 재위하며 명나라를 부흥시킨 명군이었다. 3양인 양사기, 양영, 양부를 중용해 계속 썼으며 황무지 개간, 농업 지원, 조세 감면 등 현명하고 어진 정치를 베풀었다. 성격도 검소하여 황궁을 사치스럽게 꾸미지 않았고 지나친 진상도 싫어했다. 선덕 연간에 중국의 경작지와 농업 생산력은 원나라 시절의 2배로 증가했다. 게다가 어사 제도를 강화해 탐관오리 색출에 앞장서는가 하면 우량카이족을 물리쳐 외치도 평화롭게 만들었다.

할아버지 영락제와는 달리 내치에 집중해 굳이 전쟁을 일으키지도 않았기에 전쟁에 끌려가 죽는 백성들도 많지 않았다. 그야말로 태평성대. 선덕제의 통치기는 명나라가 60년 만에 맞이한 완전한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다. 사람들은 홍희제선덕제의 약 11년간 통치기를 문경지치에 빗대어 '인선지치(仁宣之治)'라고 불렀다.[18]

2.3. 중기

2.3.1. 정통제: 토목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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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통천순제 어진.jpg 파일:external/s3-eu-west-1.amazonaws.com/B001673.jpg
정통제[19] 토목의 변
선덕제가 즉위 10년 만에 사망하자 9세의 주기진이 정통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성군이던 아버지와 달리 정통제는 황제의 자질이 부족했다. 그는 환관 왕진을 중용했고 환관들이 황제의 총애를 업고 국사에 개입하며 환관들의 국정농단이 심해졌다. 왕진은 본디 교관 출신으로 환관으로 입궁해 황태자 시절부터 정통제를 섬겼는데, 정통제가 제위에 오른 뒤 그를 더욱 신임해 국정을 아예 왕진에게 맡겨버린 수준으로 놔두고 놀기만을 즐겼던 것이다. 그나마 왕진의 횡포를 억제하던 황태후와 삼양 대신들마저 죽자 거칠 것이 없어진 왕진은 더욱 강압적으로 변했다. 그는 환관의 정치 개입을 경계하라 적은 홍무제의 철판을 떼냈고, 아첨꾼들은 그를 옹부(翁父)라 불렀다. 왕진은 7년 동안이나 국정을 뜻대로 휘둘렀고 60개가 넘는 금은보화 창고를 세울 정도로 막대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그러나 왕진이 제멋대로 명나라를 휘두르는 동안, 북쪽 몽골의 오이라트는 날로 강해지며 국경 지대에서 점점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오이라트의 지도자 에센 타이시가 1449년 변방을 침략하자 왕진은 즉시 정통제를 대동하고 50만 명의 대군을 데리고 친정에 나섰다. 그러나 군대가 베이징을 떠난 이후 군량이 제대로 조달되지 않으며 명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그와중에 정작 왕진은 무리하게 출격시킨 호위부대가 작살난 꼴을 보자 겁에 질려 철수를 건의, 그와중에 자기 고향이 군대에게 짓밟히지 않도록 토목보로 황제를 데리고 피신한다. 오이라트군이 토목보를 포위, 결국 황제가 사로잡히고 50명 이상의 공경대신이 목숨을 잃었으며 왕진조차 목숨을 잃었다.[20] 이 황제가 야만족에게 사로잡힌 역대급 치욕을 토목의 변이라고 부르며 명나라가 홍무제 이래 80년 만에 본격적인 쇠락세를 타는 기점으로 본다.

황제가 사로잡혔다는 역대급 소식이 베이징에 전해지자 명 조정은 충격에 휩싸였다. 일부 신하들은 수도를 다시 난징으로 옮겨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병부시랑 우겸이 남쪽으로 도망간 송나라의 꼴을 생각해보라고 설득하며 겨우 진정됐다. 신하들은 정통제의 남동생 주기옥을 새 황제 경태제로 옹립, 병부시랑 우겸을 병부상서로 임명한 뒤[21] 베이징 방비에 온 힘을 쏟았다. 베이징을 버리지 않기로 결정한 우겸은 베이징, 허난, 산둥 등 가용한 모든 곳에서 병사들을 끌어왔다. 1449년 10월 에센 타이시가 베이징으로 쳐들어와 덕승문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결국 베이징의 우주방어를 뚫지 못하고 돌아가야만 했다. 우겸은 정통제를 사로잡은 오이라트와 그 어떠한 타협도 거절한 채 오이라트가 제풀에 지쳐서 돌아갈 때까지 끝까지 전투를 벌였고 결국 오이라트는 베이징 점령을 포기하고 다시 장성 이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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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문의 변이 일어난 자금성 동화문
이미 새 황제를 옹립한 명나라를 아무리 협박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자, 에센 타이시는 일부러 명나라 내부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 포로로 잡은 정통제를 1450년 8월 무조건 석방했다. 당연히 제위를 차지하고 있던 경태제는 꺼림칙할 수 밖에 없었다. 경태제는 정통제를 남궁에 유폐한 뒤 정통제의 아들이었던 주견심을 황태자에서 폐위하고 자기 아들 주견제를 새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나 얼마 뒤 주견제가 병사하자 다른 아들이 없던 경태제는 주견심을 황태자로 재책봉하기를 거부한 채 버티고 있었는데, 1457년 경태제마저 병에 걸려 거동이 불편해지자 숨죽이고 살던 정통제가 반란을 일으켜 경태제를 몰아내고 황제위를 다시 차지한다.[22] 이 사태를 바로 탈문의 변이라고 부른다. 정통제는 연호를 '천순'으로 바꾸어 천순제로 복위, 우겸을 살해하는 등 실책을 저지르기는 하였으나[23] 고생한 뒤 철이 들었던지 복위 후에는 그럭저럭 양호한 정치를 펴나갔다.

복귀한 천순제는 1457년부터 1464년까지 약 7년 정도 명나라를 다스렸다. 전반적으로 천순제의 치세는 딱히 큰 일이 없었던 양호한 시대였다. 천순제는 나름 성실하게 국사를 돌봤고 명신 이현의 보좌로 국정은 원활하게 돌아갔다. 천순제는 검소하게 사는 편이었으며 특히 홍무제 시절부터 내려오던 순장 제도도 몽골의 관습이라 보아 엄격히 철폐해버렸다. 그는 서유정과 석정 등 간신들을 숙청했고, 이현의 천거를 받아 왕횡, 연부, 정신, 요기, 이병, 최공, 경구주, 헌예, 이소 등 뛰어난 인재들을 계속 중용했다.

북방 이민족 문제에서도 큰 실책 없이 항상 관용적이고 유화적인 정책을 펴나가며 북방을 안정시켰다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24] 그러나 천순제가 제아무리 성실해 국정에 임한다 하더라도 이미 토목의 변으로 절단난 명나라의 위상을 다시 회복시키기는 어려웠고,[25] 명나라는 후일 정덕제만력제를 거치면서 완전히 망해가기 시작한다.

2.3.2. 성화제홍치제: 중흥기

파일:Portrait_assis_de_l'empereur_Ming_Xianzong.jpg 파일:Hongzhi1.jpg
성화제 홍치제
1464년 천순제가 사망하자 그 아들인 황태자 주견심이 성화제로 즉위했다. 성화제는 명나라 황제들 중에서는 나름 명군 재능이 있던 황제였다. 천순제 복위 당시 살해당한 우겸의 신원을 회복시켜주었고 재위 초창기에는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었다. 성화제는 어릴 적부터 소심해 말을 더듬고 내성적이었던 탓에 대신들을 직접 만나 조회하는 일은 드물었다.

성화제의 치세 동안 큰 변란이나 재해는 없어서 그런대로 평화로운 시대를 영위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성화제가 재위 중후반기부터 도에 빠져서 헛짓거리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 황제는 도술사들에게 고위 관직을 내리거나 그들이 국정에 간섭하는 것을 방관했다. 게다가 황제는 자기보다 19살이나 많은 만귀비를 총애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만귀비가 키운 환관 왕직과 양방이 국정을 농단하며 나라는 어지러워졌다.

왕직, 양방 등 환관들이 주도하는 첩보기관 서창은 폭주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그와중에 성화제는 황제가 직접 관리를 임명, 유임하는 방식으로 관의 인사 제도를 바꾸어 황권 강화를 노렸는데, 이렇게 되자 오히려 황제가 모든 관리들을 일일히 다 확인해 임명할 수 없었으므로 대신 환관들이 그 빈 틈을 노리고 뇌물을 받아챙겨먹고선 황제에게는 결재만 올리는 식이 되어버렸다. 명나라 관료들은 점점 부패에 빠져들었다.[26] 환관 왕직은 성화제의 총애를 믿고선 오만하게 행동했고, 서창은 곧 폐지되었으나 왕직은 여전히 건재했다. 게다가 왕직은 황족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황족들이 소유한 장원제도 황장(皇莊)을 도입, 황족들이 마구잡이로 토지를 확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성화제 시대는 전반적으로 총애받는 후궁, 외척, 아첨꾼, 도술사, 환관들 따위가 득세해 파벌을 이루고 싸우던 혼란의 시기였다.

1488년에는 성화제의 아들 홍치제가 즉위했다. 홍치제는 어릴 적부터 궁중 암투 때문에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즉위하자마자 아버지가 남긴 적폐를 청산하고 혼란스러운 나라를 수습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성화제 시절에 임명된 온갖 환관, 간신과 승려, 도술사들을 쫒아내 처벌하거나 귀양보냈다. 또한 신하들을 중요시 여겨 여러 충신들을 등용했고 경연을 열어 언로를 넓혔다. 게다가 기존 환관들이 황제를 대신해 국정을 처리하던 관례를 혁파하고 직접 만기친람하며 하루에도 2번이나 부지런히 조정을 방문했다.

홍치제가 환관을 엄격히 통제한 덕에 금의위동창은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도 검소한 편이라 사치를 배격하고 세금을 많이 걷지 않았으며, 평생 황후 효강경황후 빼면 다른 후궁이나 첩을 들이지도 않았다. 홍치제의 노력으로 정통제 이래로 흔들리던 명나라는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맞았다. 이 1487년부터 1505년까지 18년 남짓 되는 기간을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고 부른다.

2.3.3. 정덕제가정제: 혼란기

파일:Ming_Wuzong.jpg 파일:Jiajing.jpg
정덕제 가정제
중흥을 이룩한 홍치제는 재위 18년 만인 1505년 5월 세상을 떠났다. 이 이후부터 명나라는 쭉 쇠락세를 타게 되는데, 그 이유는 홍치제를 이어 즉위한 그 아들 정덕제가 그야말로 호부견자였기 때문이다. 15세의 나이로 즉위한 정덕제는 천성적으로 총명한 편이었으나 방탕한데다가 여색, 말, 사냥견에 빠져서 국정을 내팽개쳐버리고 말았다. 정덕제는 유근, 위빈, 곡대용, 구취, 장영, 마영성, 고풍, 나상 등 전 동궁에서 근무하던 환관들의 무리인 8호에게 막대한 권한을 몰아줬다. 8호는 황제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온갖 행패를 저질렀다.

특히 개중 유근은 권력을 독점하고 저에게 뇌물을 바치는 딸랑이들을 대거 조정에 입시시켜버렸고, 정덕제의 오락 요구를 충족시키려 명나라판 아방궁인 표방을 만드는 등 사치스러운 행각을 계속했다. 유근이 독보적으로 잘나가자 이를 시기한 나머지 7호와 대신들의 탄핵으로 결국 능지형에 처해졌지만 황제는 정신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이제 정녕과 강빈을 총애하기 시작했고[27] 권력은 정녕이 장악한 금의위로 옮겨갔다.

게다가 정덕제는 시대를 앞서간 부캐놀이에 빠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금성을 떠나 여행하는 것을 더 쉽게 만들기 위해 주수'(朱壽)라는 제2의 이름을 붙인 다음 스스로에게 대장군의 직위를 내리는 기이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는 스스로 주수인 척 활동하며 대장군의 이름으로 황제인 본인에게 글을 올리거나, 상찬까지 하는 등 혼자놀기의 정수를 보이는 기행을 계속했다. 황제가 이런 꼴을 하고 있으니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안화왕 주진번의 난, 유육유칠의 난, 영왕 주신호가 일으킨 영왕의 난,등이 연달아 터졌다.

물론 아직 명나라가 완전히 쇠한 것은 아니었고, 정덕제가 후일의 암군들에 비해서는 나름 능력이 있었던 황제라 모두 평정됐다. 양명학의 창시자이자 심학의 대성자로 불리는 왕수인이 활동한 것도 바로 이 정덕제 시대. 그러나 정덕제는 재위 15년 차인 1520년, 영왕을 직접 붙잡아 오다가[28] 남직례 청강포 물에 빠져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했다.

정덕제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어버린 탓에 홍치제의 직계 혈통은 끊겨버렸다. 그래서 대신 홍치제의 이복동생 흥헌왕 주우원의 차남인 주후총이 가정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가정제는 즉위 직후부터 명나라판 예송논쟁, 대례의 의에 휘말린다. 정덕제의 직계가 아닌 가정제였기에 가정제의 아버지인 흥헌왕 주우원을 어떻게 처우해야할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내각수보 양정화나 예부상서 수징 등은 흥헌왕을 황숙부(皇叔父)로, 홍치제를 양아버지로 모셔서 '황고'(皇考)[29]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가정제는 부모를 바꿀 수 없다며 흥헌왕을 황고, 홍치제를 황백부라 불러야한다고 주장했다.[30]

결국 가정제의 똥고집 끝에 황제의 입장이 관철됐다. 흥헌왕은 예종으로 추존됐고 태묘 옆에 사당을 지어졌으며 황제실록을 편찬하기까지 했다. 이 대례의 의로 숙청이 일어나 180여 명이 매를 맞았고 개중 17명이 죽었다. 게다가 가정제는 도교와 선술사들에게 심취해 도사 소원절을 베이징으로 데려와 예부상서직을 내리거나[31] 1534년부터는 국정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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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남왜 경술의 변[32]
가정제는 도술과 도교 신앙에 심취해 온갖 기행을 저지른 것으로 유명한데, 선약을 빚는답시고 궁녀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해 죽어나간 궁녀가 200명이 넘어갔다. 참다못한 궁녀들이 1542년 10월 건청궁에서 황제를 목졸라 살해하려 들었지만 실패했다. 충격을 받은 황제는 그 이후로 서원의 영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다시는 자금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틈을 타 재상 엄숭이 국정을 놓아버린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독차지, 아들 엄세번과 함께 권신 정치를 휘두르며 나라를 어지럽혔다. 일부 대신들이 계속 엄숭을 비리와 붕당으로 탄핵했지만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 엄숭은 그렇게 20년 동안 나라를 말아먹었다. 가정제 말년에 재상 서계가 1562년 조정대신들을 모아 엄숭을 탄핵, 결국 엄숭은 스스로 사직한 뒤 낙향했다. 1565년에는 아들 엄세번이 왜구와 결탁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2년 후에는 엄숭도 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엄씨 부자가 명나라에 끼친 해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정제 시대에 명나라는 북로남왜, 즉 북쪽으로는 타타르가 쳐들어오고 남쪽으로는 왜구가 공격해오는 난국에 시달렸다. 북쪽의 타타르족들은 명나라가 정신을 못차리고 있음을 깨닫고선 허타오 일대를 공격해 점령했다. 1550년에는 몽골의 알탄 칸다퉁을 침공했고, 다퉁시에서 뜯어낸 자금으로 베이징을 포위해 교외를 약탈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다. 가정제는 무역 재개와 세폐 지급을 대가로 알탄 칸을 물러나게 했지만 명나라군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고야 말았다. 게다가 해금령으로 바다가 막히자 왜구와 중국 해적들이 연안에서 밀수를 벌였는데, 이과정에서 산둥, 저장, 복건, 광둥성 등을 공격해 약탈하며 남쪽 해안 지방도 흉흉했다. 주환, 장경 등 장수들은 조정의 간섭으로 왜구 진압에 실패했다. 그러다가 병부상서 호종헌이 책략을 써 남쪽의 해적왕 왕직을 잡아들이고 척계광 등이 해안가에서 왜구 척결에 큰 공을 세우며 겨우 조금이나마 진정된다.[33]

가정제 시절에는 자연재해도 그치지 않았다. 특히 가정 34년인 1556년 1월 23일, 산서성, 섬서성, 허난성 등지에서 동시에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산서성, 섬서성, 허난성, 간쑤성 등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명나라 영토의 절반 이상이 이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저멀리 땅끝 푸젠성광둥성, 광시성에서까지 지진이 느껴졌다고. 이 지진으로 일어난 화재, 익사, 건물 붕괴, 기근으로 사망한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아 기록에 남은 것만 사망자가 83만 명이 넘는다. 심지어 당시 명나라 인구의 1%가 이 지진으로 죽었을 것이라는 추정까지 있다. 여진도 계속돼 6개월에 3~5회 정도씩 3년간 지속되었으며 5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잠잠해졌다. 명나라는 구호를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만 했고 때문에 국고는 2년 연속 적자였다. 이를 가정대지진(嘉靖大地震)이라 하며 단연 중국 역사상 최악의 지진들 중 하나로 꼽힌다.

1566년 가정제가 즉위 45년만에 건청궁에서 세상을 떠나자 유일한 후계자 주재후가 융경제로 즉위했다. 명군의 자질이 있던 융경제는 고공, 서계, 장거정, 해서 등 저명한 명신들을 신하로 삼았고 북로남왜로 흔들리던 명나라의 대외 상황도 어느 정도 바로잡으면서 안정적인 국정을 운영했다. 특히 융경제는 몽골의 알탄 칸에게 조공무역을 열어줌으로써 북방의 안정을 챙겼고, 남쪽으로는 해금령을 해제한 뒤 국외 무역을 허가해 왜구들의 득세를 줄이고 밀수를 줄이는 데에 성공했다. 이 업적 덕에 융경제의 재위기를 융경신정(隆慶新政)이라 부른다. 융경제는 나름 능력있는 황제였으나 여색을 지나치게 밝힌 탓에 6년 만에 몸이 쇠하여 1572년 사망하고야 만다. 이 이후 즉위한 황제가 그 악명높은 만력제다.

2.4. 후기

2.4.1. 장거정의 개혁

파일:張居正-清晰版.jpg 파일:990581.jpg 파일:China_Ming_1580.jpg
장거정 만력제 1580년의 명나라
1572년 융경제가 뇌졸중으로 급사하자 9세의 어린 주익균이 만력제로 즉위했다. 아직 황제가 어린 탓에 태후와 융경제의 대신들이 대신 섭정을 맡았다. 그러나 고공은 태후가 총애하던 환관 풍보와의 불화로 해임당했고 대신 풍보와 친했던 장거정이 홀로 실권을 거머쥐게 된다. 장거정은 10년 간 재상을 지내며 수많은 개혁 정책들을 펼쳤다. 전국의 황무지를 개간해 옥토로 만들었고 지방의 향신세력들을 견제했으며 조세와 역을 개혁, 일조편법을 실시해 농민들의 부담을 경감해주었다. 장거정의 이러한 개혁 덕분에 1393년 홍무제 시절 명나라의 경작지 면적은 3,660,777헥타르에 불과했고 홍치제 시절인 1502년에는 4,228,000헥타르였으나 장거정의 개혁으로 만력 9년인 1581년에는 경작지 면적이 무려 7,013,976헥타르에 이르렀다.

대외적으로는 군사 전법을 개선하고 남서부의 폭동을 진압했다. 명장이던 척계광은 베이징 동쪽의 요지인 계주를 방비했고 랴오둥 반도의 이성량은 북동부의 여진족들을 진정시켰으며 왕숭고, 방봉기 등은 북쪽의 타타르를 효과적으로 다루었다. 장거정은 쓰촨의 유현, 광둥과 광시의 은정무, 능운익, 저장의 장가윤 등 능력있는 지방관들을 신임했고 명나라는 오랜만에 안정을 되찾았다. 관리 반계순을 시켜 황하를 치수하고 저수지를 세워 홍수를 막는 업적도 남겼으며, 부패한 관료들을 엄히 처벌한 뒤[34] 국정을 다잡았다. 이렇게 장거정이 섭정을 펼쳤던 10년 동안은 매우 평화로운 시기였는데 이를 만력중흥(萬曆中興)이라고 한다.

만력 5년인 1577년 겨울에는 장거정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예법대로라면 당연히 삼년상을 치르러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야 했으나 사직해 권력을 내려놓으면 당장에 탄핵될 것을 우려한 장거정은 사직하기를 거부했다.[35]장거정의 반대자들은 대번에 일어나 싸움을 벌였다. 결국 황제와 태후가 장거정의 편을 들어주며 장거정은 실각하지 않았으나 이는 그에게 큰 흠을 남는다. 그러나 장거정은 개혁을 펼치며 수많은 정적들을 만들었고 본인 스스로도 뇌물을 받고 아들을 한림원에 입학시키는 등 부패한 면이 많은 인물이었다. 결국 1582년 병으로 사망하자 장거정은 사후 즉각 작위가 박탈당했고 그 문중 역시 작살나고야 만다.[36]

2.4.2. 만력제: 황제의 30년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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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경입필도 속 만력제의 모습
능력있던 재상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본격적으로 막나가기 시작했다. 만력제는 곧 정사를 아예 내팽겨친 채로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황제의 30년 파업을 감행했다. 만력제는 누구를 황태자로 삼을지를 두고 벌어진 논란 국본지쟁(國本之爭) 이후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렸다. 만력제의 지나칠 정도로 기나긴 재위 기간 내내 명나라는 국내적으로는 동림당과 반 동림당 세력, 그리고 위충현을 비롯한 환관 세력들의 정치 농단, 국본지쟁, 만력제의 정무 유기 등 온갖 심각한 위협에 시달렸고 대외적으로는 영하의 역, 임진왜란, 양응룡의 난 등 만력 3대정이 터졌다. 명나라가 만력 3대정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선 휘청거리는 동안 북쪽에서는 여진족의 후금이 점점 강성해졌다. 만력제의 재위는 명나라가 이견없이 완연한 쇠퇴기에 접어든 기점으로 평가받는다.

국본지쟁은 명나라 중기부터 후기까지 지속된 논쟁으로, 장남 주상락과 총애하는 후궁 정귀비의 아들 주상순 중 누구를 황태자 삼을지를 두고 일어난 후계자 다툼이었다. 정귀비를 각별히 아끼던 만력제는 주상순을 황태자로 앉히고 싶어해 장남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며 조정의 근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정 전체가 반으로 쪼개져 주상락과 주상순 파벌로 나뉘었고, 결국 황제의 친모 자성황태후가 개입해 일갈한 후에야 1601년 주상락이 황태자로 책봉됐다. 주상순은 대신 복왕(福王)으로 임명되었으나 임지로 떠나지 않고 베이징에 계속 머물며 기회만을 노리다가, 결국 정격안[37]이 일어나 정귀비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로워지고난 이후에야 베이징을 떠났다.

만력제는 국본지쟁에서 신하들에게 밀리자 조정에 극도의 불만을 품었다. 만력제는 1587년부터 아예 조정에 나가지 않고 정말 극도로 시급한 사건들만 처리, 다른 업무들은 죄다 태업하는(...) 치졸한 방식으로 복수를 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1589년 새해부터는 신년 조하마저도 빼먹어버렸다. 1588년 즈음부터 황제는 조정은 물론이고 그 어떠한 공식 행사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깊숙한 궁궐 내에만 머물며 정사를 내팽겨친 채 여색과 술에 빠져 방탕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살았다. 어찌나 정도가 심했으면 중급 이하의 관리들은 황제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못한 자들이 수두룩했고 재상마저 황제의 얼굴을 까먹을 정도였다고.

그와중에 건축욕과 사치욕이 상당했던 만력제는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실시하며 안그래도 어려운 백성들의 등골을 뽑아먹었다. 만력제는 21세가 되었을 때부터 본인의 능을 짓기 시작했다. 1589년 대리사의 좌평사가 상소를 올려 만력제가 술과 여색, 사치에 중독되었다고 신랄하게 비난했으나 황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사치스런 행각 때문에 돈이 쪼들리자 만력제는 전국으로 환관들을 광산과 세수 감독으로 보내 돈을 뜯어오게 하였으나, 대부분의 환관들은 제 부정축재에만 신경쓰며 온갖 허위명목으로 백성들의 돈을 갈취하기 일쑤였다. 방비를 책임지던 이성량조차도 갈수록 부패에 빠져 군사 정보를 허위로 기재하거나 군공을 속이고 요동 지역의 군벌이 될 조짐을 보였다. 게다가 누르하치 등 일부 지도자들을 지원하며 훗날 청나라가 성장할 발판을 만들어준 실책을 저지르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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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경입필도 속 갑옷을 입은 만력제의 모습
만력제가 아예 정사를 가져다 버린 수준이었기에 명나라 조정 직제에조차 공석인 자리가 넘쳐났다. 만력 30년인 1602년, 명나라에서는 상서 3명, 시랑 10명, 순무 3명, 포정사와 안찰사 66명, 지현 25명이 공석이라는 말도 안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조정을 총괄해야할 황제는 위에서 탱자탱자 놀고 있었고 아래에서는 황제의 공백을 틈타 수백명의 관료들이 파벌을 이루어 싸워댔다. 명나라 조정은 완전히 개점휴업 상태였다. 동림당, 선당, 곤당, 제당, 절당 등 수많은 파벌들이 난립했으나 그 싸움 주제는 정사가 아니라 자리다툼이었다. 명사(明史)에는 대놓고 만력제 시기부터 명나라가 망하기 시작했다고 적었고 실제로도 만력제가 명나라의 멸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동림당과 반동림당과의 권력 다툼은 명나라 정계에 극도의 혼란을 가져왔다. 정부의 혼란으로 중하급 관료들이 정치적으로 배제되자 이들은 환관들이 득세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고 정치개혁과 땅에 떨어진 도덕과 기강을 바로잡자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고헌성이 파직 후 동림서원의 이름을 따 당을 조직했고, 손롱, 이세달, 조남성 등이 경찰을 장악하고선 비동림당 인사와 파벌들을 쫒아내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조정 내 동림당의 세력이 점점 커져나가자 제당, 초당, 절당 등 반동림당 세력들도 함께 자라났다. 이들은 제초절당이라 스스로를 이름짓고 모든 현안에서 동림당과 충돌했는데, 이로 인해 당파싸움이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확대되고야 말았다. 게다가 환관 위충현을 필두로 한 환관 세력 '엄당'은 만력제와 천계제 시절 내내 득세하는 바람에 환관들에게 집중 견제당한 동림당은 탄압받았다가 숭정제 시절에 가서야 목소리를 겨우 낼 수 있었다.

외적으로는 만력 3대정이 일어났다. 만력 3대정이란 몽골인 발배가 일으킨 '영하의 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 묘족 양응룡이 일으킨 양응룡의 난을 일컫는다. 영하의 역은 1592년, 임진왜란도 1592년, 양응룡의 난은 1597년 이렇게 3개의 전쟁 모두 동시에 일어나며 명나라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영하의 역은 1592년 10월 마귀이여송이 진압했고, 임진왜란도 조명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양응룡의 난도 1600년에 진압됐다. 만력 3대정은 모두 명나라의 승리로 끝났으나 8년 간 은 1,160만 냥 이상을 쏟아부으면서 국고 고갈과 재정 파탄을 불러왔다. 명나라의 재정이 휘청거리는 틈을 타 누르하치가 칠대한을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2년 후에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을 격파하며 엄청난 위기를 초래한다.

2.4.3. 명말 3대 의안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명말 3대 의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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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말 3대 의안이란 명나라 말기에 연달아 터진 3개의 의심스러운 사건으로, '명말삼안'이라고도 부른다. 정격안, 홍환안, 이궁안을 한데 부르는 말로, 그 자체로는 엄청나게 치명적인 일은 아니었으나 명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고 명말 중국의 혼란을 극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3개의 의안 모두가 만력제 때 벌어진 제위 계승 분쟁이 그 근본적인 원인으로 만력제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터져나온 3대 의안들 때문에 조정 내 당파싸움이 한층 더 치열해졌고, 결과적으로는 명나라가 처참하게 몰락하는 씨앗을 제공한다.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은 1615년 일어난 정격안이다. 1615년 5월 장차(張差)라는 남자가 몽둥이를 들고 황태자 주상락이 거주하는 자경궁에 난입한 사건으로, 수문환관을 한 명 다치게 한 뒤 체포당했다. 혹독한 심문 끝에 범인의 입에서 정귀비가 연루되어 있다는 실토가 나왔다. 황태자 주상락을 죽인 다음 황제에게 총애받는 후궁 정귀비의 아들 주상순을 새 황태자로 옹립하려 했다는 것. 결국 이 사건으로 장차 등 연관자들이 처형당했고, 정귀비는 제 아들을 황태자로 세울 계획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만력제가 이 사건으로 황태자에게 힘을 실어주자 반대로 황태자 주상락의 입지는 확고히 굳어졌다.[38]

1620년, 만력제가 기나긴 48년 간의 재위 끝에 사망하자 황태자 주상락이 태창제로 즉위했다. 태창제는 즉위하자마자 후금의 침략을 방어하던 요동 국경 병사들에게 100만 냥의 은을 지급하고 명장 웅정필을 재기용하며 사르후 전투 이후 명나라가 처해있던 곤경을 완화했다. 또한 세금을 걷기위해 전국에 파견하던 광세사를 중지하고 동림당원들을 기용해 황권을 강화했다. 한편 정귀비는 태창제에게 8명의 미인들을 후궁으로 바쳤는데, 태창제가 지나치게 여색을 밝히는 바람에[39] 병석에 누웠고 병필태감 최문승이 바친 약을 먹은 뒤 더욱 병세가 악화됐다.[40] 거기다 홍려사승 이가작이 신선의 술법으로 만든 붉은 단약을 먹고선 다음날인 1620년 9월 1일 새벽 5시에 급사했는데, 이것을 바로 2번째 의안인 홍환안이다.[41]

태창제가 급사하자 어린 황제 천계제 주유교가 16살의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태창제가 황태자 시절부터 총애하던 후궁 이선시가 건청궁을 장악하고선 환관 위충현과 함께 천계제를 꼭두각시 삼고선 나라를 휘두르려 들었다. 이선시는 국사를 자기가 직접 처리할 의지를 보이며 수렴청정을 시도했는데, 당연히 신하들은 당장 이선시가 건청궁에서 나가 인수전으로 이궁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견디다못한 이선시가 건청궁에서 쫒겨나 인수전으로 이궁하는데, 거처를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인수전에 불이 나 이선시는 겨우 죽다살아난다. 이 것이 바로 이궁안이다.[42] 안그래도 혼란스러운 정국에 이런 사안이 3번이나 일어나자 명나라 정계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2.4.4. 천계제: 환관 위충현의 횡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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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제 위충현
천계제 주유교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어서 대신 자신을 키워준 유모 객씨에게 특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이 객씨는 환관 위충현과 한 패가 되어 나라를 본격적으로 말아먹어버린다. 위충현은 가난한 비렁뱅이 출신으로 도박빚을 감당못하자 스스로 거세한 뒤 환관으로 입궁한 인물로, 입궁하면서 이름을 이진충으로 바꾸었다. 위충현은 사람들을 꾀고 입발린 소리하는 데에 천부적인 능력이 있었다. 결국 황제와 가까운 유모 객씨와 접근하는 데에 성공하며 권력을 거머쥐었고, 황제에게 옛 성씨와 이름인 위충현을 되돌려받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다.

천계제가 즉위한 직후에는 동림당 인사들을 꽤나 많이 기용했다. 결국 동림당과 반동림당 세력의 정치싸움이 치열해졌는데 정작 천계제는 정치에 관심을 잃고 국사를 놓아버렸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위충현이었다. 위충현은 자기를 따르는 세력을 모아 '엄당'을 조직했다. 1624년부터 엄당이 조정을 장악, 위충현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고 그의 추종자들이 중앙과 지방을 전부 장악했다. 심지어 1627년 그의 조카 위량경이 황제를 대신해 태묘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자신을 모시는 사당을 전국에 세우고 자신더러 구천세, 구천구백세라 부르라고 명하기까지 했다.[43][44] 게다가 반대파였던 동림당을 가혹하게 탄압해 '동림당점장록'을 만들고선 명단에 오른 인물들을 죄다 숙청했다. 1625년에는 황제를 꼬드겨 전국의 서원들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고 수많은 동림당 명사들을 감옥에 처넣거나 죽여버렸다.

천계 6년인 1626년 5월 30일에는 수도 베이징 남서쪽 공부(工部) 소속 왕공창의 화약고서 거대한 폭발 사고가 일어나 2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평화기에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사건이었으나 문제는 이 시대의 명나라는 환관들이 권력을 독점한 망하기 직전의 썩어빠진 상태였다는 것. 당연히 전국으로 소문이 퍼져나가며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다. 천계제 연간에 일어난 모든 인재와 자연재해를 합쳐도 이만한 참사는 없었기에 황제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죄기조(罪己詔)[45]를 반포하고 금 1만 냥을 구호에 써야할 정도였다. 천계제는 같은 해 뱃놀이를 하다가 물에 빠졌고, 시름시름하다가 1년 뒤인 1627년 사망했다.[46] 그 뒤를 이은 천계제의 동생이 바로 명나라 최후의 황제 숭정제다.

2.4.5. 숭정제: 명나라의 멸망

숭정제가 즉위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 살아있는 관리의 공적을 기리는 생사당을 더이상 짓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객씨 일가를 황궁 밖으로 쫒아냈으며, 힘을 기르다가[47] 위충현마저 고향 펑양현으로 낙향시켜버린 다음 금의위를 보내 체포하라 명령했다. 충격받은 위충현은 목매달아 자살했고 격노한 숭정제는 그의 시체를 끌고와 효수했다. 위충현과 붙어먹던 객씨 역시 완이국에 붙들려와 몽둥이로 맞아죽었으며 위충현을 따르던 엄당 세력은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이로써 환관의 국정농단은 끝났으나 조정의 분쟁은 끝나지 않았고, 이에 염증을 느낀 숭정제는 다시 관리들의 고삐를 죄기 위해 황제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환관들을 재기용하고야 만다.

숭정제 최대의 골칫거리는 바로 후금이었다. 후금은 명장 원숭환에 번번히 가로막히자 아예 산해관을 우회해 만리장성을 넘어 바로 베이징을 공격하는 방법을 쓰기 시작했다. 1629년 홍타이지가 이끄는 후금 군대가 베이징을 포위했고 원숭환이 군대를 끌고와 겨우 물리쳤을 정도. 그러나 1630년 숭정제가 고질적인 의심병에 반간계가 더해진 탓에 원숭환을 죽여버리는 초대형 실책을 저지르며 요동의 정세는 날로 악화됐다. 명 최후의 명장이라 불리는 원숭환이 죽고 난 이후 명나라는 청군에 패전을 거듭했다.

홍타이지는 몽골로 원정하여 링단 칸에게서 원나라의 옥새를 뺏어온 다음, 1636년 성경에서 칭제한 뒤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었다. 청나라는 1629년부터 1643년까지 6차례 원정을 벌여 직예성, 산동성 등 화북을 약탈했다. 이미 직예성은 수년 간의 기근과 전염병으로 고사 직전이었고 요녕성도 함락 직전으로 몰아갔다. 청나라군은 명군을 수차례 격파하며 1640년에는 진저우시를 공격해 승리, 1641년 송산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고 같은 해에 홍승주가 투항함으로써 영원성을 제외한 랴오둥 반도 전체를 장악하는 데에 성공한다. 명군은 패퇴해 최후의 관문인 산해관에 틀어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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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제의 자살 숭정제
명청교체기에 도래한 소빙하기 때문에 식량위기가 일어났고 전국적인 기근이 터졌다. 그러나 당장 나라가 망할 판인 조정은 오히려 군비 지출을 위해 요급을 추가 부과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1627년 섬서성 징성현에서 첫 민란을 일으켰고 이는 전국적인 민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란군 수장 왕가윤이 이끈 군대가 섬서-산서 경계에서 전투를 벌였고, 왕가윤은 1630년 죽었으나 그 휘하 왕자용, 고영상, 이자성, 장헌충 등이 연달아 농민반란을 이어갔다. 1636년에는 고영상이 죽고 이자성이 그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했다. 1641년 이자성은 뤄양을 점령해 주상순을 죽인 뒤 11월에는 시안까지 진출했다.[48] 이자성이 관중에서 총독 손전정의 군대를 궤멸시킴으로써 북중국의 명 주력은 아예 소멸해버렸다.[49] 한편 남쪽에서는 장헌충이 득세했다. 후난성에서 발호한 장헌충은 쓰촨성까지 먹어치운 뒤 '대서국'을 건국, 황제를 자칭했다.[50]

1644년 1월 이자성은 마침내 시안에서 '대순'을 세우고 황제로 즉위했다. 이자성은 화북 일대가 피폐해진 틈을 파고들어 손쉽게 영토를 늘려나갔다. 이자성군은 3월 다퉁시, 장자커우시, 거용관을 모조리 장악하고 17일에는 베이징에까지 다다랐다. 공성 끝에 3월 18일 이자성군이 베이징 외성을 점령했고[51] 오삼계가 5만 대군을 이끌고 베이징을 구원하러 왔지만 제 시간을 맞추는 데 실패했다. 결국 1644년 4월 25일 새벽, 숭정제가 자금성 북쪽 경산에서 목매달아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건국 276년 만에 멸망하게 된다.[52]

그러나 베이징을 정복한 이자성은 명나라 관리들을 학살하고 수도를 약탈하며 민심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산해관에 주둔한 오삼계에 대응하는 데에도 실패하여, 오삼계는 산해관의 문을 열어 청나라입관시키고야 만다. 입관 이후 명청교체기 동안 이어진 중국 대륙 정복 전쟁에서 이자성-장헌충 반란 세력과 남명 정권은 연달아 패배하고[53] 청나라는 천하를 통일하였다. 남명의 영력제가 살해당하면서 주씨의 후손은 끊겼고,[54] 청나라에 투항했던 옛 명나라 장군 출신 번왕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삼번의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마지막으로 타이완 섬동녕 왕국(명정시기)도 펑후해전(澎湖海戰)에서 청나라한테 대패하여 괴멸적인 피해를 입으면서 명나라의 잔존 세력은 그렇게 청에게 굴복해 완전히 멸망했다. 그러나 남아있던 명나라 유민 가운데 일부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 아래 청나라 시대 내내 비밀결사의 형태로 남기도 했다.[55]

3.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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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대 자금성 태화전의 모습[56]
명나라의 정치는 황제 절대주의가 핵심이다. 황제에게 모든 권한이 유례없는 수준으로 집중되었고 황제가 곧 권력의 핵심이었다. 명나라 초기에는 원나라의 정치 체제를 이어받아 중서성을 두고 좌우로 승상을 하나씩 두었다. 이선장이 좌승상, 서달이 우승상으로 임명되어 중서성을 맡았다. 이때 중서성은 6부를 통솔했으나 비서실장 격에 해당하는 중서령은 설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새로 좌승상이 된 호유용이 1380년 역모를 계획했다가 적발된 '호유용의 역' 이후로 재상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두려워한 홍무제에 의해 중서성이 폐지되고 6부로 실권이 쪼개졌다. 중서성의 관리들은 모두 보직해임됐고 중서사인들만 남았다.[57]

특히 명나라 초기 홍무제 때는 '공포정치'라는 말이 어울릴만큼 잔혹한 유혈 학살과 고문으로 유명했다. 명나라 초기에는 고문이 흔하디흔한 일이었고 홍무제는 권력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오죽했으면 대신들이 언제 죽을지 몰라 매일 조정에 나가기 전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귀가할 때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고 몰래 자축할 정도였다. 홍무제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1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채찍질, 가죽 벗기기, 가택 몰수, 대량 학살의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관리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언제든 목숨이 파리처럼 날아갈 수 있었다. 심지어 황제의 벼슬 권유를 거절하고 낙향해도 감히 황제의 뜻을 거스른 것으로 죽어 마땅한 죄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

명나라 정치는 최정점에 있는 황제 아래에 내각과 6부가 있었다. 내각은 황제에게 조언을 하는 실질적인 최고기관이었고, 6부는 황제 직속으로 황제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도구였다. 황제 직속의 비밀경찰이자 첩보기관 동창서창, 금의위가 철저하게 이중삼중으로 관리들을 감시했고 형부, 대리시, 감찰원 이렇게 3사가 관료들을 감찰하며 사법부의 역할을 했다. 그 외에도 삼사, 한림원, 환관아문 등이 존재해 황제 아래 서로를 견제했다. 그러나 명나라 말기로 갈수록 환관의 권력이 강해져 무능하고 유약한 황제들을 뒷배삼아 권력을 농단했다.

3.1.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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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 회의가 열리던 자금성 문연각 내각 관료들의 모습[58]
홍무 13년 1380년 호유용의 역 때문에 진나라 이래로 1,600여년 동안 이어져내려온 재상직은 완전히 폐지됐다. 6부는 더이상 재상이 통솔하는 것이 아닌 황제 직속으로 개편됐다. 재상권과 황제권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황권은 중국 사상 최고 수준으로 강화됐고 황제의 독재 아래 군권, 행정권, 감찰권이 분리되었다.[59] 그러나 황제가 모든 것을 처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처음에는 4명의 유학자들을 불러 보조토록 했는데, 주나라의 관직에서 이름을 따와 춘, 하, 추, 동관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관리들은 학문은 뛰어날지 몰라도 행정경험이 일천한 수준이라 결국 홍무 15년에 이들을 해임하고 송나라를 본떠 내각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내각이 그저 황제의 고문에 불과해 비서나 참모 정도에 그쳤다. 각종 상소문 등 전국에서 올라온 주장(奏章)에 대한 비답(批答)은 전적으로 최종 결정권자인 황제의 권한이었다. 그러나 선덕제홍희제를 거치며 태자교육을 맡은 태사의 영향력이 강해졌고, 동궁삼사(东宫三师)의 권한과 함께 내각의 목소리도 커졌다. 특히 선덕제는 모든 현안에 있어 스승 양사기의 의견을 구했다. 이부상서와 호부상서의 의견도 듣기는 했지만 황제를 직접 뵙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던 양사기와 내각 인사들에 비하면 훨씬 발언권이 낮았다. 이후 내각의 권한은 날로 커져 명나라 중기에는 하언이나 엄숭이 내각을 도맡아 실질적인 재상으로 활동했다. 내각을 이끄는 내각대학사들은 재상의 이름만 갖고 있지 않았을 뿐 6부를 장악해 사실상 재상의 권한을 휘둘렀다.[60]

내각의 최고 관직인 내각대학사는 주로 학문이 뛰어난 대학자나 궁중의 대신들이 맡았다. 초기에는 황제의 명령을 기록하는 일만을 맡아서 '전지당필(傳旨當筆)'이라 불렸다. 게다가 과거의 재상직에 비해 품계도 한참 낮아 고작 정5품에 불과했다. 그러나 선덕제 연간에 양사기, 양영, 양부 등 내각 인사들이 황제의 총애를 얻자 내각은 표의(票擬)의 형태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되었다. 상소에 내각의 의견을 첨부해 올려보내면, 이렇게 올라온 의견은 황제가 비주(批朱)[61]를 덧붙여 다시 내려보냈다. 그러나 선덕제는 동시에 사례감의 환관들에게 내각이 올려보낸 상주문을 다시 정리하는 탑표(搭票)할 권한을 부여하는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다.[62] 때문에 내각과 황제 사이의 소통은 전적으로 환관들에게 달려있었고 장거정이나 풍보 등 내각대학사들마저 환관들의 눈치를 봐야할 판이었다. 이는 명나라에서 유난히 환관들이 국정농단을 벌인 원인이기도 했다.

3.2. 육부

명나라에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 이렇게 육부(六部)가 있었다. 명나라는 초기에 각 부마다 상서 1명과 상서를 보좌할 시랑 1명씩을 두었으나, 호유용의 역 이후로 중서성을 폐지하고 육부를 황제 직속으로 승격하며 상서 1명, 시랑 2명으로 조직을 확대개편했다. 6개의 부들 중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와 제사와 외교를 담당하는 예부가 가장 중요했다. 또한 재정과 토지, 인구를 책임지는 호부가 가장 업무가 많아 규모가 거대했다.[63] 전쟁을 담당하는 병부, 사법과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형부, 공공 공사와 토목을 담당하는 공부는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뒤떨어졌다.

각 부에는 최고 우두머리인 상서(尚書)가 있었고, 좌우에 시랑(侍郎)을 하나씩 총 2명을 두었다. 그 아래에는 청사사(清吏司)를 두었으며 청사사 아래에 낭중(郎中) 1명, 원외랑(員外郎) 1명, 주사(主事) 1명 씩을 임명했다. 호부처럼 업무가 많은 경우 주사직을 더 추가하곤 했다. 각 부처의 명칭과 관장 분야는 아래와 같다.
<colcolor=#800000> 명나라의 6부
<colbgcolor=#F0E68C> 이부(吏部) 전국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부처. 관료들의 임명, 봉훈, 고과를 책임졌다. 아래에 문선청사사, 험봉청사사, 계공청사사, 고공청사사를 두었다. 인사권을 장악한 덕에 가장 강력한 부처이기도 했다.
호부(戶部) 호구, 토지, 녹봉 등 재정을 담당하는 부처. 가장 번잡하고 업무량이 넘쳐나는 부서였다. 초창기에 고작 5개의 하위 부서 밖에 없었던지라 1390년에 과도한 업무를 줄이기위해 12개의 청사사를 설치했다. 선덕제 연간에는 1개를 더 늘려 총 13개의 청사사가 존재했다.
예부(禮部) 관혼상제 및 과거시험을 담당하는 부처. 4개의 청사사로 이뤄져 있었다. 의례청사사는 가례, 군례, 과거 등을 주관했고 사제청사사는 천문, 국장과 묘휘를 주관했고 주객청사사는 해외 사신들의 의례와 조공, 정선청사사는 주최 연회, 음식 준비, 술 및 음식을 관리했다.
병부(兵部) 나라의 군대를 담당하는 부처. 국경을 책임지며 무관들의 선발 및 시상을 주관했다. 4개의 청사사로 이루어져 무선청사사는 장교 및 부사관의 선발 및 승진을, 직방청사사는 지도, 군제, 변방 수비, 훈련과 원정을, 거가청사사는 의장대, 황실 경비, 우편 및 동물들을, 무고청사사는 군 등록 및 무기를 관리했다.
형부(刑部) 국법을 집행하고 범죄인의 심의를 담당하는 부처. 호부와 마찬가지로 청사사의 숫자가 많았다.
공부(工部) 국가의 토목공사와 인프라를 담당하는 부처. 사업과 건설을 담당하는 영선청사사, 수확과 경작을 담당하는 우형청사사, 노동자들의 봉급을 계산하는 수부사, 작물 경작, 연료 공급 등을 관할하는 둔전사가 있었다. 보원국과 추분국 등이 공부를 보좌했다.

3.3. 감찰 기관

명나라의 관리 사찰은 지독한 수준이었다. 명태조 주원장금의위를 설립했고 영락제동창을, 성화제서창을 만들어 관리들을 겹겹으로 감시했다. 이들을 합쳐 창위(廠衛)라 불렀으며 환관들이 통제했다. 정덕제 때는 내행창까지 또 만들었다. 홍무 15년에 창설된 금의위는 황제 직속 친위대이자 비밀경찰로 누구든지 체포, 심문이 가능했다. 영락 18년에 창설된 정보기관 동창은 영락제가 정치적 반대세력들을 감시, 숙청하기 위한 환관 조직으로 금의위를 견제했다. 동창은 엄청난 정보망으로 얻어낸 기밀들로 지위가 낮은 용의자들은 임의로 심문가능했고 높은 용의자들도 황제의 허락을 받아 심문할 수 있는 막강한 조직이었다. 환관 서열 2위인 병필태감이 직접 지휘했으며 금의위조차도 능가하는 엄청난 권력을 자랑했다.[64]

관리들을 끊임없이 의심했던 홍무제답게 육부를 감시할 기관도 따로 만들어놓았다. 과(科)라고 하여 6부의 감찰을 맡은 하급감찰기관으로, 각각 이과, 호과, 예과, 병과, 형과, 공과 이렇게 6개의 과로 나뉘어 맡은 부의 문서를 검토했다. 과는 각 부의 정책을 승인하지 않을 권한이 있었고, 품계상으로는 낮았으나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 권한을 인정받아 실제로는 권한이 꽤나 컸다.

또한 5개의 시를 만들었는데 개중 이미 확정난 판결을 재검토하는 역할을 맡은 대리시(大理寺)는 형부와 도찰원과 함께 '삼법사(三法司)'라 불리며 명나라의 대법원 역할을 했다. 대리시는 판관이 판결을 내린 사건을 다시 하급 관청으로 내려보내거나 상급 관청으로 올려보내 재판결을 요구할 수 있었기에 그 권한이 매우 컸다.[65] 대리시의 수장은 대리시경(大理寺卿)이라 부르며 9개의 주요 관직을 일컫는 구경(九卿) 중 하나일 정도였다. 반면 나머지 4개 사들은 대리시에 비하면 중요도가 확연히 뒤떨어졌다. 태창시(太常寺)는 제사를 담당했고 태복시(太僕寺)는 말을 다루었으며 광록시(光祿寺)는 황실의 생일잔치를 주관했고 홍려시(鴻臚寺)는 조회 의례와 외국 사신 접대를 맡았다.

명나라는 원나라의 감찰제도를 그대로 계승해 관리를 감찰하고 풍기를 단속하는 어사대 제도를 만들고 어사대부를 좌우에 하나씩 두었다. 그러나 홍무 13년에 어사대를 폐지했고, 2년 뒤에 어사대를 대신할 도찰원을 설립했다. 도찰원 소속의 순안감찰어사들이 전국을 순회하며 지방관들의 부정을 감시했기에 관리들 입장에서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각 성(省)들마다 3~5명의 순안감찰어사들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순안감찰어사들의 본부는 어디까지나 경사 베이징이었고, 그래서 지방에 장기적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베이징에서 인장을 가지고 나갔다가 일이 다시 끝나면 인장을 갖고 돌아오는 식이었다. 명나라 말기에 순안감찰어사들은 총 13개 그룹으로 나뉘어 그 수가 110명으로 규모가 늘어났다.

3.4. 기타 기관들

파일:서현경환적도01.png
파일:서현경환적도02.png
서현경환적도(徐顯卿宦跡圖)[66]에 등장한 만력제의 모습
태사, 태부, 태보 이 3개 관직을 삼사라고 하여 태사는 황제의 스승, 태부와 태보는 황태자의 스승으로서 그럴듯한 명예직이었으나 어디까지나 허울 뿐이었고 명나라 삼사에게 실권은 없었다. 실제로 황태자를 가르치는 기관은 첨사부(詹事府)였다. 첨사부는 2개의 방, 1개의 국, 1개의 청으로 구성되어 동궁의 사무를 담당했다. 그 외에 황실의 의료를 도맡은 태의원(太醫院)이 있어 생약고(生藥庫)와 혜민약국(惠民藥局)과 함께 황궁 전용 병원 역할을 했다. 한림원은 황제의 칙령을 다듬거나 역사 편찬, 기밀문서 등 각종 학문에 관련된 업무를 맡은 엘리트 집단으로 과거 시험을 통과한 명사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조정 내에도 영향력이 상당했고 특히 내각대학사를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육부에 소속되지 않은 사(司)들이 여럿 존재했는데 대표적으로 통정사(通政司)나 행인사(行人司)가 있었다. 통정사는 문서를 전달하는 부처로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나 황제가 발표하는 칙령을 총괄했다. 행인사는 지방정부에 칙령을 발행, 전달하고 해외에 특사를 보내거나 파견하는 일을 맡았다.

그 외에도 국자감, 흠천감, 상림원감 등이 존재했다. 국자감은 명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쉽게 말해 명나라판 성균관이었다. 1382년 홍무제가 베이징에 하나, 1403년 영락제가 난징에 하나 세움으로써 전국에 2개의 국자감이 있었다. 제주 1인, 사업 1인, 감승 1인, 박사 5인, 조교 15인, 학정 10인, 학록 7인, 전부 1인, 전적 1인, 전찬 2인으로 구성되어 명나라의 최고학부이자 인재 양성의 산실로 기능했다. 흠천감은 별과 천문의 관찰을 맡았고 상림원감은 황제의 어화원, 황실원림, 황실 소유의 농장이나 밭 따위를 맡아 관리했다.

환관아문은 말그대로 환관들의 조직이었다. 12감, 4사, 8국으로 이루어져 총 24아문이라고 불렀는데, 개중 12감(監)이 주요한 업무를 담당하고 품계도 4사와 8국에 비해 더 높았다. 12감은 사례감, 내관감, 어용감, 사설감, 어마감, 신궁감, 상선감, 상보감, 인수감, 작전감, 상의감, 도지감으로 이뤄져 있었고 각 감의 우두머리를 '태감'이라 불렀다. 이들 태감은 후일 장인태감(掌印太監), 병필태감(秉筆太監), 수당태감(隨堂太監), 제독태감(提督太監) 등으로 서열을 나눴다. 개중 가장 중요한 사례감을 총괄하는 장인태감이 서열 1위였으며 동창을 거머쥐고 황제 대신 공문서를 처리한 병필태감이 서열 2위, 제독태감은 환관들의 형벌과 의례를 관장했다. 그 외에 석신사, 종고사, 보조사, 혼당사 이렇게 4개의 사(司)와 병장국, 완의국, 은작국, 건모국, 침공국, 내직염국, 주작면국, 사원국 등 8국(局)이 있었다. 그 외에 궁녀들이 소속된 6국인 상궁국, 상의국, 상복국, 상식국, 상침국, 상공국이 있었고 각 국마다 4개의 사가 있었다.

4. 행정구역

명나라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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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북직례 남직예
승선포정사사
섬서등처승선포정사사 산서등처승선포정사사 산동등처승선포정사사 하남등처승선포정사사
절강등처승선포정사사 강서등처승선포정사사 호광등처승선포정사사 사천등처승선포정사사
광동등처승선포정사사 광서등처승선포정사사 복건등처승선포정사사 운남등처승선포정사사
귀주등처승선포정사사
폐지된 행정구역
평연승선포정사사 교지등처승선포정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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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명나라 행정구역.jpg
명나라의 행정구역
명나라는 건국 직후에 원나라의 행중서성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행정, 사법, 군사를 모두 한 사람이 독점면 위험하다고 깨닫고 지방 권력을 3개로 쪼개 민정을 담당하는 승선포정사사(使, 포정사로 약칭), 사법을 담당하는 제형안찰사사(使, 안찰사로 약칭), 군사를 담당하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도사로 약칭)로 나누고 이를 삼사(三司)로 하였다. 원나라 시절 행성 이름을 강남행성을 직례로 고치고 단지 지역 구분으로만 사용[67]했다.[68]

또한 홍무제는 행성(行省) 아래에 있던 도(道) 또는 로(路)부(府)로 개편하고, 기존 부를 주(州)로 강등하고 산주(散州; 을 안 관할하는 주)를 현으로 강등해 부 - 주 - 현 3단 체계로 개편했다. 이후 도(道)는 단순히 승선포정사사가 보내는 분수(分守)○○도(道)와 제형안찰사사가 보내는 분순(分巡)○○도(道)가 담당하는 구역 및 경로를 이르게 되었다. 동시에 변경 지역에 군정기구인 위(衛), 천호/백호소(所)를 두었다. 고려후기에 단행한 요동 정벌과 이에 반발해 일어난 위화도 회군 발단이 된 철령위(, 마지막으로 현 요령성 철령시(鐵嶺市)에 소재)도 이 위소다. 현과 위, 소 아래에 향촌제이갑제를 시행했다.

북평(北平)-북평부(北平府), 보정부(保定府), 하간부(河間府), 진정부(真定府), 순덕부(順德府), 광평부(廣平府), 대명부(大名府) 관할-이 정난의 변 직전에 평연(平燕)으로 개칭되고 북평부가 산동으로 잠시 이관됐다가 이후에 북직례가 되었고 기존 직례-경사(京師)남경(南京)응천부(應天府), 중도(中都)봉양부(鳳陽府), 소주부(蘇州府), 송강부(松江府), 상주부(常州府), 진강부(鎮江府), 회안부(淮安府), 양주부(揚州府), 여주부(廬州府), 안경부(安慶府), 태평부(太平府), 지주부(池州府), 영국부(寧國府), 휘주부(徽州府), 서주(徐州), 저주(滁州), 화주(和州), 광덕주(廣德州) 14부 4직례주 관할-는 남직례가 되었고, 북평부가 순천부(順天府)로 개칭되며 산동에서 북직례로 편입되었다.

대월 전 레 왕조점령하고 교지로 바꿨다. 점령 20년차에 후 레 왕조로 독립하며 교지가 사라졌다.

사천(四川) 일부인 귀양부(貴陽府) 등을 떼어 귀주(貴州)을 둔 뒤로 더이상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없이 일부 주, 현을 철폐하거나 신설하고 주를 직례주(直隷州)로 개편했고, 명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200년 넘게 북직례, 남직예(현 강소성안휘성), 산서, 산동, 하남, 섬서, 절강, 강서, 호광(현 호북성호남성), 사천, 복건, 광동, 광서, 운남, 귀주, '양직 13성' 밑에 부 - 주 - 현인 지방행정체계 및 군정 기구인 위, 소를 쭉 사용했다. 명나라 멸망 직전인 1640년에 명나라에 총 162개 부, 255개 주, 1,173개 현이 존재했다.

5.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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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행정과 조세

명은 원으로 인해 타격을 받은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이상을 구축해 회복하려고 했고 상당한 성과[69]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70] 자급자족 농민 질서의 회복을 추구한 것은 농민 반란을 주도하며 성장한 명 태조 주원장의 출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때문에 문제도 있었다. 예컨대 '장성'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성벽이 제일 길다는 남경성을 쌓을 때에도 현장에 공장을 세워서 벽돌을 생산하는 대신 일정 지역의 마을에서 벽돌을 십시일반으로 제공하게 했다. 벽돌을 만드는 일을 맡은 가구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그 벽돌을 남경까지 운반하는 부역을 맡게 된 가구에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쾌락의 혼돈」(티모시 브룩 저)에 따르면 전근대 시기에 이렇게 전국적으로 통일된 행정 집행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었다고 평가한다.

행정 제도로는 소박한 농촌 공동체의 이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서 나온 '이갑제' 를 실시했는데, 주원장은 이러한 이갑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고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과 조세대장/호적인 부역황책(賦役黃冊)을 통해 농촌공동체를 자세히 조사하면서 전 지역에 균질적인 농촌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갑제는 기본적으로 '이장', '이노인' 등의 유력 계층을 포괄하면서 성립되었기에 빈부격차를 결국 인정한 것이었고, 이갑제는 얼마 못가 한계를 드러냈다.[71] 주원장 자신도 말년에 이갑제로 이루어진 농촌 내에서도 상당한 빈부격차가 있는 것을 인정했다. 중요한 건 주원장 시기, 즉 명이 건국된 직후에도 실효성이 바라던 만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주원장 시기의 이갑제는 최소한 상당히 정확도 높은 인구 조사 제도로서 기능했던 것은 사실이며, 이갑제를 통한 최초의 인구 조사는 실제 인구와 10여 %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건 전근대 시기의 인구 조사로써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달한 것이다. 일반적인 인구 사학자들은 중국사에서 믿을만한 인구 통계가 명 초 1393년 인구 조사를 시작으로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72]

홍무제는 관에서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걷어서 다시 군인에게 봉급을 주는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서 각 농민이 할당된 군인에게 직접 쌀을 전달하는 제도를 시행했다. 이는 부대를 다른 곳으로 재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상당히 복잡해지는 상황이였으며[73] 결국 이것도 명 중기 이후에 병사들에게 은을 월급으로 주고 알아서 곡식을 사먹게 하는 형태로 변화한다.[74] 이러한 조치는 은근히 상업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었고 약탈보다는 낫지만 현지 조달의 또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결국 보급 문제는 임진왜란이나 청나라와의 전쟁, 심지어는 농민군과의 전쟁에서도 여러 차례 명군의 발목을 잡는다.

어쨌든 중기 이후 명은 수입을 판단하고 거기에 맞춰 지출을 결정하는 양입제출이 아니라 지출을 결정하고 거기에 맞춰 세금을 거둬들이는 양출제입에 가까운 국가 운용을 했으며, 이는 토목의 변 이후 높아진 방위 부담을 고려하면 어쩔수 없어 보이긴 하나 또한 재정 운용의 방만함과 높은 세율을 낳았다. 정부가 알아서 지출을 조절해야 하는데 지출이 늘면 늘었지 조절은 안 됐다.

물론 명 조정이 노는 것만은 아니었고, 꾸준히 조세 구조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강남에서 쌀을 걷어서 위로 올라오는 사이 발생하는 부정 부패를 막기 위해 조세가 서서히 은납화된 것도 그러했고, 지나치게 과중해지는 잡역도 서서히 은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방식으로 대체해 나갔다. 법제적으로도 이갑제 하의 갑을 묶어 행정을 재정비하고 재산에 따라 세금을 거두게 하는 균요법, 조세의 단계를 나누어 차등적으로 세금을 거두는 십단법, 호의 등급에 따라 세금을 달리 거두자는 문은과 정은 제도, 세금을 지세와 인두세로 통합하자는 일조편법 등이 지역별로 시행되어 나갔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조세가 서서히 은납화되어 나갔다는 것이고, 둘째로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지역별로 다양한 개혁책이 나타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제 이갑제를 벗어났던 지역의 행정 단위를 나름대로 탄력적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지방관들의 노력과 여기에 자발적인 사회 지배 계층들과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다. 이는 외적의 침입과 잦은 반란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신사들이 일조했다. 이때 두각을 보인 인물이 십가패법과 남가향약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의 자치 집단이자 방위 집단을 구축하려 했던 왕수인, 즉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이었다. 16세기 초 이러한 노력들이 결실을 맺으면서, 명 후기에는 중국 전역에 향촌이 재건되었고 이를 명 정부에서도 행정 단위로 활용하게 된다. 따라서 명 말기에는 이갑제를 보갑제가 대체하는 모습도 보였다.

전국에서 다양하게 진행되던 조세의 개혁은 명재상이던 장거정이 대대적인 토지 조사와 통합적인 일조편법을 진행하면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조사를 기획, 실현하자 지주층과 황족, 관리층을 비롯한 특권 계층에서 엄청난 반발을 나타냈고 장거정은 수많은 정적들의 공격 끝에 사후 모든 명예를 몰수당하게 되는것은 명나라가 목표로 했던 '농촌 공동체'의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를 잘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장거정이 살아있을 때도 몇몇 사람들이 '당신은 부국 강병만을 신경쓸 뿐 성현의 도에는 신경쓰지 않으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며 매도한 바 있고, 이에 장거정은 칭찬이 지나치십니다라고 받았다고 한다.

7. 경제와 대외 교역

파일:external/www.transpacificproject.com/ZhengHe-1.jpg

명대에는 전통적인 식량 생산의 농업에서 탈피하여 상품 작물의 재배가 활발했는데 이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분업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런 원료를 싸게 사서 직공들에게 비싸게 팔고 가공물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아 차익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송, 원 대에 개방적으로 세계 곳곳의 기술들을 받아들이던 모습과 대비되어 15세기 ~ 17세기에 중국이 유럽에 따라잡히고 형세가 역전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는 이 시기에 서유럽이 급작스레 등장한 아메리카와 대항해시대에 활발한 대외 원정을 통해 급격히 발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대의 중국 경제가 황제까지도 대외 무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여했던 남송 대까지와는 달리 내수에 중점을 두고 폐쇄적인 사회를 지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교역의 문을 닫은 것은 아니어서 정화가 대선단을 이끌고 아프리카 원정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탐험가들에게 국가의 지원이 들어가는 방식이었으므로 실패해도 그렇게까지 큰 손해는 아니었고 성공하면 그때 가서 투자를 늘려 이익을 보면 되는 일이었던 반면 명나라는 영락제가 황위를 탈취한 상황에서 주변 우호국들을 늘려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정치적 이유로 시작한 원정이었기에 정치적 성과는 거두었을지라도 비용 대비 경제적 성과는 매우 나빴기에 영락제를 인정하고 살아남은 신하들 입장에서는 '당신 황제인 건 알겠으니까 돈낭비 좀 그만하십쇼'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황제가 정화의 원정기를 읽어보려고 하자 홀랑 불태워버리고는 소실되었다고 보고했고, 채근담 같은 서적에서는 이러한 기록말소를 미담처럼 기록해놓을 정도로 대외교류에 부정적이었다. 이를 해상 세력에 대한 견제나 유교적 이상주의에 바탕을 둔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농촌 사회'를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해석하기도 한다.

결국 영락제와 정화가 사라진 이후 해상 진출에 대한 원동력이 없어진 중국에게 바다는 그냥 바다일 뿐이었고, 왜구가 골치를 썩이는 시대가 되자 쿨하게 "해금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화둥 지방, 특히 푸젠 성은 바다에 면해 있으면서도 산악 지역이 많은 특성상 질 좋은 목재가 많이 생산되어 어업, 해운업이 매우 융성했기에 해금령은 치명적이었고, 이 때문에 푸젠 성 주민들은 밀무역에 종사하면 양반이고 후기 왜구에 가담하거나 아예 본인들끼리 왜구인 척 하는 가왜(假倭)로 조직화되어 중국 해안을 노략질하게 되었다.

명나라의 왜구 토벌이 종결된 1567년, 포르투갈이 명 지방 정부에 불만을 품고 마카오를 폐쇄하자 상인들이 반발하며 들고 일어나자 제한적으로 푸젠 성 장저우에서의 무역을 허가했으나 명나라 상인들은 그러한 제한을 무시하고 급속히 사무역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한 번 물꼬가 트이자 곧 동남 해안 지역 전체가 개항되어 융경 개관과 만력 중흥 등 명조 중후기의 잠시동안의 번영과 일조편법의 전국 확대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세계를 배회하던 은이 중국에 도착하면 마치 여기가 자연의 중심이라는 듯이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 Gomes solis, "은에 대해서 논함(Arbitrio sobre la plata)", 1621

전근대에서 공식 무역은 조공 무역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명 조정은 공식적인 무역으로는 조공 무역 외에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민간 무역, 비공식적인 무역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간동안 방관하는 상태였다. 가끔씩 해안선을 비워버리는 폐쇄령이 내려지기도 했지만(특히 북로남왜의 화 시기에) 일시적인 일에 그쳤다. 뭣보다도 그러면 세금이 안 들어오니까. 그래서 1509년 조공국에 한정해서나마 광저우만큼은 다시 개항한 적도 있었다.

명의 대외 무역은 민간 무역의 영역에서 상당히 활발했으며 특히 은 본위 경제를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한 중기 이후의 명은 대외 무역이 활발하여 전세계의 은을 긁어 모았다. 연구에 따르면 멕시코(누에바에스파냐)의 아카풀코 → 필리핀 → 명으로 이어지는 무역 루트를 통해 유입된 은은 아메리카 전체 은 산출량의 절반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 중기 이후 15세기부터 금, 은이 다시 화폐로 유통될 수 있었는데 일단 황폐해진 토지가 정리되고 평화가 지속되면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외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은의 수입이 증가했다. 민간에서 유통되는 은의 양이 늘어나면서 세금을 은으로 걷기 시작하였고 중앙에서 꾸준한 회수를 통해 주도적으로 화폐 경제를 운영할 수 있을 만큼 은을 확보할 수 있었다. 즉 잠재 역량을 깨우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던 것이지 명나라의 경제가 침체되었다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세수를 통해서 비교해 보면 명대의 경제력이 송대를 따라잡지 못했고 강남 지역만을 확보했던 남송 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치 상으로는 따라잡지 못했다'는 말에 불과하다. 송대에는 아직 화폐 경제가 완성되지 못해서 화폐상의 경제력과 실제 경제력에 거품이 끼어있었고, 도량형의 단위도 더 작았기 때문이다. 결국 송대에 경제가 융성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명, 청을 능가했다는 주장은 허구다.

비슷한 예로 북송의 동전 발행량이 명, 청대보다 많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단지 동의 가격이 올라갔기 때문이다.[75] 마찬가지로 송대의 경제력이 전세계의 50%였다는 계산도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과장된 감이 있다고 한다.

명나라의 전 시기인 몽골 진출 초기와 원 제국 초기, 그리고 말기에 엄청난 난세로 인해 인구가 급감하고 경제가 쇠퇴한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몽골 진출 극초기의 학살[76], 그리고 원나라의 가혹하고 무능한 통치와 극심한 인종 차별,[77] 그리고 결정적으로 전염병[78]의 발병으로 인해 중국의 인구는 많게는 30 ~ 40%가 감소했으며, 특히 북중국 지역은 4천만을 바라보던 인구가 1천 5백만 이하로 감소해 버렸다. 사실 경제에 관해서는 원대 대부분 중상주의적 정책과 항저우와 대도(베이징)를 잇는 대운하, 그리고 원의 국내 상업로와 국제 무역선의 연결을 통한 수공업 생산과 판매와 톈산 남북로를 통한 내륙의 상업로등의 이유로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했다.[79] 애초에 몽골 제국의 업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역전 설치와 도로 정비 등을 통한 동서 문물 교류 촉진'이다. 원이 말기에 유목민 지배층의 낭비와 엄청난 군사비로 인한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교초를 대량으로 발행하여 지폐 가치가 폭락하게 한 것을 제외하면[80], 원의 경제는 대체적으로 대호황이었다. 즉 말기를 제외하고는 원의 경제엔 문제가 없었고, 항주 같은 곳은 이전보다 더 잘 나갔다. 명 초기에 자급자족의 경제 정책을 선택한 원인은 단지 교초 대량발행으로 인해 화폐 경제가 무너져 버린 탓이다.

중국에서도 자생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의 관점에서 보면 명 후기의 경제적 발전 양상은 매우 주목받는 시기이기도 하다.[81]

하지만 고대 중국부터 당나라 대까지 중국의 중심이었던 관중 지방은 생산력이 계속 감소하여, 다른 지역으로부터 식량을 조달받는 상황이 된다. 게다가 명나라 말기에 황제와 환관들의 부패로 관중 지방이 식량을 제대로 조달하지 못하게 되자 지역민들의 반발심은 커져 갔고, 결국 이자성의 난이 관중 지방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전 시대에 비해 양쯔강 중류 지역에 대한 개발이 많았는데, 이런 과정에서 현대의 호북성호남성에 해당하는 호광성[82]은 엄청난 곡창 지대로 발전해 湖廣熟 天下足(호광숙 천하족)이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원대 부터 명대 초기까지 호광성은 그간 전란에 휘말리면서 내지 변방에 해당할 정도로 피폐한 지역이었으나, 명 중기부터 정부 차원에서 호광성에 대한 개발을 장려하는 것으로 바뀐다.

7.1. 명나라의 경제발전에 대한 비판적 시선

사실 명의 경제발전은 유럽인이 연 대항해시대와 신대륙 경략으로 신대륙산 금은귀금속과 신대륙산 작물 유입과 동방무역이 원인이라는 시각이 있다.

상시 만성적인 귀금속 부족에 허덕여서 시장에 화폐공급량이 지나치게 부족했던 전대 왕조의 환경은 상공업 발달에 심각한 족쇄로 다가왔다. 교초 지폐로 화폐경제를 보조하긴 했으나, 교초의 신용을 보장할 중앙정부의 무능으로 원말 교초하이퍼인플레 동아시아판 대공황으로 물물교환 경제로의 퇴화등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어디까지나 유럽덕인 신대륙산 금은귀금속의 유입으로 은화가 보급되었고,이로인해 세수를 은자로 통일하는 일조편법이 가능해 농민들은 세금에 바칠 은자를 얻기위해 환금성 작물을 키우거나, 부업으로 수공업에 뛰어들거나, 적어도 주곡작물을 시장에 내다파는등의 행동으로 인해 급속도로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여기에 대항해시대로 해외 무역시장이 활짝 열린것과 신대륙의 은을 수입하기위해서라도 도자기등 수출용 공업이 크게 발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가져왔다.

이미 중원은 수나라시기 내륙 수계 운하망을 통일했고, 오대십국-송 사이에 갑문 시스템을 완성시켰기에, 이미 북송기 1억이 넘는 중원의 시장을 하나로 묶어서 각각이 대국규모인 성(省 행정구역. 송나라시기엔 로路)간 무역만으로도 수공업공장인 민간주도 매뉴팩쳐의 시장수요와 물류망과 여유노동인력을 충족했고 분명히 도입압력이 충분했었으나, 은화 통화량 부족때문에 꺾여 버렸고, 내륙수계 교역규모가 일정이상 커지질 못했다.

더군다나 명나라의 일조편법처럼 조세를 은자로 통일함은 생각하기 힘든 기발한 제도이거나, 기득권층의 저항으로 도입이 힘든것이거나 한것이 아니다. 원역사 일조편법의 기득권 저항은 미등록 토지를 장부에 올리고 세금을 거두는것에 저항이 있었지, 조세를 은자만으로 거두는것은 세금을 내는 입장에선 징세가 일원화되고 곡물이나 비단등 현물납부의 세금 가치가 시장과 괴리된 모순이 사라지고 합리적으로 변해서 납세의 부담이 줄어든다. 반대로 징세하는 입장에선 세운비용이 확 감소하고, 행정과 예산관리의 효율이 크게 증가해 마찬가지로 이득이다. 소작농부터 자영농,대토지 지주,공인,상인,관료,군주 모두 이익이 되고 도입필요성을 절실히 공감하는데도, 단순히 금속화폐 통화량 부족 때문에 역대 왕조가 도입하고 싶어도 못한것이다.

명나라기 민간주도 매뉴팩쳐와 국제무역에 버금가는 내륙수운 성내 무역 물동량은 이미 북송때 모든 조건이 마련되었음에도 금속 화폐의 통화량 부족이 발목을 잡아 못 이뤄진것이다.

또 명나라의 발전에, 유럽을 통해서 들어온 신대륙 작물인 고구마 도입으로, 푸젠성과 광둥성, 광시성, 윈난성등 산투성이 남쪽 지역이 급속도로 개간되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로 인한 남중국해 무역 활황과 더불어서 미개척지에 가깝던 위 지역의 농업과 상공업이 골고루 발달해서, 중원의 새로운 경제중심지가 된다.[83][84]

여기까지 유럽이란 외부요소로 이뤄진 성장이고, 명나라 내적인 요인인 화북 목화 플랜테이션과 면직물을 필두로 한 장강삼각주 도시화, 그리고 호광지역 곡창 개발에 대해서 살펴보자.

목화 플랜테이션은 산업의 근본적인 성격으로 환금성이 좋으나,토질을 심각하게 황폐화시키고 또 조면기 개발전엔 자유의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노동강도가 필요하기에, 필연적으로 지역 주민들을 노예로 예속시키거나 노예에 준하는 인신구속으로 돌아가기에 해당 지역은 목화생산외의 모든요소둘, 사회경제산업의 구조가 심각한 타격을 입힌다.

목화원료를 공급받은 장강삼각주 지역은 모직물 산업으로 커다란 산업발달이 일어나고 번영의 극치를 누렸겠으나, 정작 원료 생산지엔 암적인 요소밖에 안된다.[85][86] 원명청대의 중국의 남북경제격차가 강남의 개발과 소빙기로 인한 북중국의 한랭화만이 아니라, 강남을 위한 원료 공급지로 희생되었던 지분도 크다.

그리고 흔히 이뤄지던 호광지역 개발방식이, 장강지류들을 둑으로 막고 뭍으로 드러난 강바닥을 개간하는 식으로. 당연히 수계를 건드리는 일은 소련의 중앙아시아 개간처럼 극심한 환경교란을 가져다주고 역설적으로 장강 하구 지역의 농업에 커다란 타격을 가져다주었다. 장강 삼각주의 인구밀집과 도시화로 인한것도 있지만 위의 요소까지 더해서 삼각주가 곡창지대에서 식량수입지방으로 변했다.

즉 명나라의 내제적인 발전요인을 보면 사실 장단점이 극명하고, 근대산업화를 받아들이기 유리한 사회구조랑 역행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8.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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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지화사 여래전에 안치된 불상[87]
명나라의 종교는 불교도교였다. 홍무제부터 선덕제까지 명 초기의 명군들은 불교와 도교를 보호했지만, 동시에 사찰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경계하여 어느 정도의 선을 그었다. 그러나 명나라 중기 들어서는 종교에 대한 제한이 점점 풀어졌고, 정덕제가정제 등이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면서 종교계가 정사에까지 관여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러다가 명나라 말기의 황제들은 무능하긴 했어도 정덕제나 가정제처럼 종교에 푹 빠져살지는 않았기 때문에 불교와 도교를 방임하지 않고 다시 종교 견제 정책을 복구했다.

원나라 말기 티베트 불교가 황실에 깊이 침투해 나라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원나라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세운 홍무제는 불교가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베이징에 승려들을 관리하는 승사아문과 승록사를 설치해 중국 천하의 불교계를 모두 관장토록 했다. 각 부, 주, 현에는 승강, 승정, 승회 등의 사를 두어 지방 불교계에까지 조정의 입김이 미치도록 만들었다. 또한 전국의 사찰들을 선(禪)·강(講)·교(敎)의 세 종류로 나누어 각각 본업에 충실토록 엄격히 구분했으며 입도첩 제도를 만들어 출가하는 승려의 수를 나라에서 통제했다.[88] 그러나 불교의 세는 여전히 압도적이었고, 티베트 불교인도의 밀교가 중국 각지에 깊숙히 퍼져나간 것 역시 이 명나라 시기이다.

명나라에서 가장 흥성했던 종교 중 하나가 바로 도교였다. 홍무제와 영락제 모두 도교 신자였으며 홍무제는 직접 도덕경에 주석을 달기까지 했다. 홍무제부터 선덕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황제들은 도교의 정일도(正一道)를 크게 존중했으며 정통제경태제 시절부터는 과도하게 도교를 지원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가정제 시기에는 황제가 아예 도교에 미쳐버린 탓에 궁궐에 도교 사찰을 거대하게 설치하고선 황제 본인과 부모에게 도호를 올렸으며 청사(青詞)[89]를 잘쓰는 관리에게 큰 상을 내릴 정도였다. 명 조정은 수도 베이징에 도전사(道篆司)와 도정감(道教實)을 두어 도교 술사들을 통제했다.

명나라는 이슬람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편이었다. 예를 들어 명 태조 주원장은 백자찬(百字贊)에서 선지자 무함마드를 '지귀한 성인'으로 기리기까지 했다. 명나라는 난징의 정각사, 시안의 청수사 등 이슬람 모스크들을 전국에 여럿 건설했으며 무슬림들도 관리로 등용하곤 했다. 이슬람은 명나라 시절 계속 중국에 퍼져나가며 중소도시와 향 단위까지 서서히 스며들었다. 명나라 중기까지 전국 1급 행정단위와 2급 행정단위의 대부분, 3급 행정단위의 절반에 이미 이슬람이 전파되어 있었다. 이렇게 명나라 중기까지 이슬람은 활발히 포교를 이어갔으나 해금령이 떨어지자 해외와의 교역이 중단되며 이슬람의 전파도 속도가 급격히 축소되었다.

가톨릭은 본디 포르투갈인들이 거주하는 마카오에서 시작되었다. 1562년 마카오 가톨릭 교회에는 600명의 가톨릭 교인들이 있었다. 예수회의 설립자 중 하나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일본에서의 선교를 마치고 중국에서 선교할 계획을 세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광둥 상천도에서 사망했다. 이 죽음은 서양 가톨릭계에 중국 선교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교단들이 선교사들을 파견해 중국에 포교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선교사 알레산드로 발리냐노는 선교사들이 먼저 중국 문화에 맞추어야 하고 중국인 사제들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정책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문화를 수용하며 가톨릭 전파가 한층 쉬워졌고, 마테오 리치만력제의 총애를 얻으며 베이징에서 관원들에게 세례를 주는 데까지도 성공했다.[90] 천계제 시절인 1627년 명나라에는 총 1만 3천 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존재했다.

9. 외교

명나라의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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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무 연간에 제작된 대명혼일도(大明混一圖)
해외 오랑캐의 나라들 중, 중국에 우환이 될 국가가 있으면 토벌하지 않을 수 없고, 중국에 위협이 아니라면 자주 군사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옛사람의 말에 의하면, 땅의 넓이는 장기적인 계책이 아니며, 백성의 노고는 역란의 근원이 된다고 하였는데... 야만인들의 땅은 공급하기에 부족하고, 그 백성들은 명령에도 부족하며, 헛된 명성만 사모하고, 나라에 해로움을 끼쳤으니 역사에 기록되어 후세에 비웃음을 산다. 짐은 오랑캐 소국들로 산을 막고 바다를 건너, 그들을 한구석에 가두어 놓았다. 저 오랑캐들이 중국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짐은 절대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서북의 호융은 세대에 걸친 중국의 환난이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홍무제
원나라의 요양성 평장 유익은 원나라를 배신하고 요동을 명나라에 귀부했다. 명나라는 요동위를 창설해 요동을 관리했고, 1385년에는 나하추가 명에 귀순하면서 여진족들이 모두 명나라에 복속됐다. 영락제는 1409년 만주 북동부 일대를 관리하기 위해 누르간도지휘사사를 세웠고, 1411년 산하에 184개의 위와 20여 개의 소를 두었다.[91] 그렇게 여진은 명에 형식적인 충성을 바쳤지만 완전히 복속되지는 않은 채 투닥거리는 사이로 남았다가, 1583년 건주좌위지휘사인 건주여진의 기오창가탁시가 명군 때문에 의도치 않게 목숨을 잃었고, 결국 탁시의 아들이던 누르하치가 명에 대한 뼈깊은 원한을 품고선 전 여진족을 통일한 뒤, 1616년에 후금을 세워 독립을 선포했다.

명나라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죽인 것을 절대 잊지 않은 누르하치는 1618년 칠대한을 반포하고 푸순을 함락했다. 요동경략 양호가 대군을 이끌고 후금 군대를 공격했으나 되려 사르후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대패하고야 말았다. 명군은 전사자 4만 5천 명, 2만 마리의 말과 노새를 잃었다. 명나라는 결국 공세에서 수세로 밀려났고 명장 웅정필을 파견해 요동을 굳게 지켰다. 웅정필이 화포와 무기를 강화하고 요동 일대를 철통같이 수비하자 한동안 후금은 요동을 크게 침략하지 못했다.

그러나 천계제가 즉위하자마자 웅정필을 파면하고 대신 원응태를 요동 책임자로 앉혔다. 원응태는 관료로서는 나름 유능했을지 몰라도 군사적 재능은 영 꽝이었다. 원응태는 웅정필이 요동에 틀어박혀 수비만 하던 것에서 벗어나 후금을 공격하려 들었다. 그러나 1621년 심양이 함락되고 원응태가 목을 매 자살하자, 천계제는 다시 웅정필을 등용했다. 1622년 광녕이 함락되자 손승종이 요동독사로 임명되어 요동을 틀어막은 덕에 다시 후금은 한동안 접근하지 못했다. 그러나 천계 5년 손승종이 해임되고 환관 고제가 요동으로 파견, 요서 방어선까지 모조리 포기하고 산해관 안쪽으로 후퇴한다는 어이없는 결정을 내리자 원숭환이 이에 반발, 영원성에서 영원성 전투를 치러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후금의 6만 대군을 무찌르는 대승을 거두며 명은 다시 한숨돌리게 된다.[92]

그러나 1629년에 홍타이지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몽골로 우회해 베이징을 공략했다. 원숭환은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돌아와 성공적으로 방어했지만, 숭정제의 고질적인 의심병과 홍타이지의 반간계 때문에 억울하게 능지형에 처해져 목숨을 잃었다.[93] 얼마 후 홍타이지는 심양에서 칭제하고 국호를 청나라로 바꾸었다. 청군은 만리장성을 뚫고 직예, 산동 등 화북 일대를 무려 5차례나 침략했다. 당시 직예와 산동, 요녕은 이미 기근과 전염병, 전란으로 황폐해져 청나라의 침략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1642년 진저우가 함락되어 명군은 산해관까지 밀려났고, 이 이후부터는 청나라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티베트는 중국 학계와 해외 학계가 가장 크게 갈리는 부분 중 하나다. 중국 학계는 정치적 이유로 명나라가 티베트까지 지배했다고 주장하는 반면[94] 해외 학계는 명나라가 티베트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명나라는 홍무 2년 1369년에 처음 토번에 조서를 보냈고, 티베트를 지배하던 파그모드루파 왕조의 승속을 책봉하여 벼슬을 하사했다. 1370년 서달이 정서 전투에서 코케테무르를 격파한 뒤, 같은 해에 타감행도지휘사사(朵甘行都指揮使司)를, 1373년에는 오사장행도지휘사사(烏思藏行都指揮使司)를 설치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실질적으로 티베트에 행정력을 행사하지 못했고,[95] 명나라와 티베트는 조공 책봉 관계를 맺었으나 어디까지나 형식적일 뿐이었다. 가정제 이후 티베트와 명나라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붕괴된다.

조선은 가장 대표적인 조공국이었다. 고려 시절인 1370년 명 태조가 금인과 고문을 보내고 공민왕을 국왕으로 인정한 것으로 외교 관계를 시작했다. 1374년에는 공민왕이 죽고 점차 고려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으나 괴팍한 홍무제는 이성계를 국왕으로 책봉도 해주지 않았고 되려 표전을 문제삼아 2차례나 조선을 협박, 조선이 진지하게 요동 정벌을 검토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정종을 1398년 책봉했고, 1401년 태종도 책봉하며 관계가 좋아졌다. 1403년 영락제가 즉위하며 조선과의 관계는 완전히 안정적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조선은 명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다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자 만력제가 원군을 보내 구원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1627년 홍타이지가 조선을 공격해 강제로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으면서 양국 사이의 관계는 단절됐다.

홍무제 시절부터 왜구 문제는 명나라의 골치를 썩힌 문제였다. 당시 일본은 남북조시대로 갈라져 있어서 자국의 왜구들을 통제할 여력도 없었다. 홍무제는 고다이고 덴노의 아들 가네요시 친왕에 사람을 보내 화친하려 하였으나 제 코가 석자였던 일본 조정에게 거부당했다. 영락제 대에야 아시카가 요시미츠를 일본국왕으로 책봉하고 감합무역을 하는 등 제대로 된 교류가 시작됐다. 명목상으로는 막부가 무역을 관장했으나 실제로는 오우치 가문과 호소카와 가문이 갈라먹는 형태였다. 명나라는 감합무역으로 거의 경제적 이득을 보지 못했고 대신 무역을 통해 해안 안정을 꾀했다. 그러다가 가정제 시절 들어 명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며 감합무역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영파의 난이 터지며 아예 중단됐다. 무역길이 막히자 다시 일본 해적들이 들끓었고, 융경제 시절에야 다시 개인 차원의 사무역이 재개됐다.

한편 북쪽으로 쫒겨난 원나라북원을 세워 명나라를 어지럽혔으나, 곧 몰락하여 타타르, 오이라트 등의 민족으로 분화되어 '북로'라고 불렸다.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천도한 뒤 9진을 세우고 위소제와 만리장성을 이용해 방비를 탄탄히 했다. 그러나 정통제 때 오이라트가 남하해 토목의 변을 일으켰고 성화제 때는 허타오가 침략당했으며 가정제 시기에는 몽골이 8일 동안 베이징 교외를 불태우는 경술의 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571년 융경제 때 황제가 장거정의 반대를 꺾고 알탄 칸을 순의왕으로 봉하고 무역을 허가해주었다. 그 덕에 수 십년간 명나라와 몽골 국경은 평화를 유지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특히 베트남과의 관계가 깊었는데, 영락제는 베트남을 아예 자기 땅으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할 정도였다. 물론 극심한 반발로 1427년 포기하고 후 레 왕조가 들어서긴 했지만, 명나라는 여전히 후 레 왕조의 국왕들을 책봉했고[96] 안남국왕, 안남도통사 등의 칭호를 연달아 내렸다. 그 외에도 류큐 왕국, 시암, 참파, 자바 등이 차례로 조공을 바쳤다. 정화의 대원정으로 수많은 동남아 국가들은 물론 저멀리 소말리아모가디슈, 케냐의 말린디까지 항해했을 정도였다. 정화의 원정으로 수많은 사신들이 정화 함대의 배를 타고선 명나라를 방문했는데, 영락 17년 5번째 항해 때에는 17개 국가의 사절들이 정화와 함께 배를 타고 돌아와 베이징을 방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믈라카 술탄국, 술루 술탄국, 브루나이 술탄국, 필리핀의 술탄국의 사절들도 연달아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고.

아직 저멀리 유럽과는 무역을 할 뿐 본격적인 관계를 트지 않았다. 그나마 포르투갈네덜란드와 인연이 좀 있었다. 1517년 정덕제 때 포르투갈인들이 함선을 이끌고 광저우에 찾아왔으나 명나라 관리들이 상륙을 허가하지 않았다. 4년 뒤인 1521년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포르투갈과 충돌해 둔문해전, 타마오 해전에서 명나라가 연달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끊임없이 무역을 요구했고, 1553년에는 마카오에 화물을 건조시켜야 한다는 핑계로 상륙해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거점화하려 시도했다. 딱히 손해라고 생각되지 않았기에 명나라는 이를 그대로 눈감아주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1601년 마카오를 찾아와 통상을 요구했고 1604년에는 푸젠성 펑후현을 5개월간 무력 점거하며 시위까지 벌였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추방당했다.

10. 문화

10.1.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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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철학사상으로는 육구연[97]의 '심학'을 계승한 왕수인의 사상 양명학이 등장했다. 양명학은 '치양지(致良知)'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고, 또한 사람의 주체적 지위를 인정하여 사람의 능동성을 학설의 중심으로 삼았다. 왕수인의 제자 왕간은 사람의 주체성을 더욱 강조해 신분고하를 가리지않고 모두가 성인군자가 될 수 있다는 서민중심적 격물설을 제안했다. 이지(李贽)는 인간의 도덕적 관념이 일상생활 속 욕구에서 비롯되며 인간의 적나라한 마음인 동심을 바탕으로 해야한다고 주장, 인욕의 가치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학의 전래와 함께 과학 정신과 실학풍조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명나라 말기 북방 이민족들의 침략과 혼란스러운 정세 탓에 왕부지, 황종희, 고염무 등과 같은 현실적, 실용적인 사상을 더욱 강조하는 학자들이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명나라 말기 서원의 융성은 관학의 위상에 충격을 주었다. 동림서원에서 강의하던 고헌성(顾憲成)과 고반룡(高攀龍) 등 많은 지식인들이 서원의 강학을 기회로 삼아 어지러운 국정을 비판하였고, 동림서원을 권력파와 대립하는 중심지로 만들면서 동림당쟁(東林黨争)을 일으켰다. 당시 학자들도 절 주변의 공터를 빌려서 토론하는 '강회'를 열어 새로운 사상적 가치와 인생관을 제창하였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를 명말청초의 3대 유학자라 부른다. 고염무는 '경학즉리학'을 주장하며 성리학실학으로 대체하고 육경의 본뜻을 직접 연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염무는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 즉 천하가 흥하고 망하는 데에는 일개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강론하며 저서로는 《일지록》, 《음학오서》 등을 남겼다. '중국 계몽의 아버지'로 불리는 황종희는 '명유학안' '송원학안'을 저술해 중국 학술사의 선조격 되는 인물이다. 그는 양명학을 보호하고 성리학을 배척하였으며, 성의와 신독설을 주창하여 절동학파(浙東學派)를 창립했다. 왕부지는 실제 행동이 지식의 기초라는 점을 강조하며, 역사 발전이 규칙성을 갖는다는 것을 '이치상성(理勢相成)'이라고 보았다. 왕부지의 사상은 후일 선산학으로 발전하여 후대에 『선산유서』으로 편찬되기도 했다.

백성을 천하의 주인으로 삼는 사상은 명말 청초에도 유행했다. 특히 명나라 말기 혼란스러운 암군들 아래에서 고통받는 민초들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본 유학자 황종희와 고염무, 왕부지 등도 이 관점을 옹호했다. 특히 황종희가 지은 《명이대방록》은 중국의 전제 군주정 자체를 공격하여 천하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백성이며 황제는 일개 손님일 뿐이라는 혁명적인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점은 청나라 말기 혁명가들의 추앙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황종희의 사상을 근대 민주주의 사상에 근접하다고 여겼으며,[98] 일부 서양 학자들은 황종희를 "중국 자유주의의 선구자"라고 부를 정도다.

10.2. 사서

명나라 초기에는 관리가 사서를 많이 썼고, 그 후로는 사적으로 편찬된 사서들이 많았다. 나라에서 편찬한 관수사적(官修史籍)으로는 정사류(正史類)로는 송렴(宋濂)이 편집한 《원사(元史)》 21권이 있는데, 수찬기간이 비교적 짧아 24사(史)[99] 중 가장 엉성한 편이기는 하지만 원나라 역사의 중요한 자료를 간직하고 있어 중국사학적으로 가치가 크다. 명실록의 경우 건문제경태제 시기를 기록한 2제의 부록은 곡휘가 많지만 그래도 상주, 관보 등의 자료를 많이 인용하여 명나라의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간직하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회전(會典)[100]류로는 정덕제의 『대명회전』과 만력제의 『대명회전』이 있다.

명나라 중기 이후 황제들이 태만하게 정무에 임하고 아예 내팽겨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더이상 관리들이 아닌 개인 사적 차원에서 역사서를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러한 풍조는 가정제 때부터 시작되어 만력제 때 그 절정을 찍었다. 명대의 사찬 서적은 대부분 명나라의 역사에 집중됐다. 기전체로는 정효의 《오학편》, 하교원의 《명산장》, 등원석의 《황명서》, 이지의 《속장서》, 윤수형의 《명사도》 등이 있으며, 편년체로는 설응기의 《헌장록》, 황광승의 《소대전칙》, 진건의 《황명종신록》과 《황명통기집요》, 담천의《국각》, 기사본말체로는 고대의 《굉유록》, 잡사류로는 왕세정의 《감산당별집》, 주국정의 《황명사개》, 전제류로는 서학집의 《국조전회》, 손승택의 《춘명몽여록》, 필기류로는 엽성의 《수동일기》, 왕기의 《우포잡기》, 하량준의 《사우재총설》, 사조제의 《오잡조》, 심덕부의 《만력야획집》 등이 있다. 명대 이전의 왕조들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졌는데, 예를 들면 장부의 《통감기사본말》에 대한 평론, 왕부의 《독통감론》, 풍기와 진방첨의 《송사기사본말》, 진방첨의 《원사기사본말》 등이 대표적이다.

명나라 시절에는 모두 2,892종의 지방서가 편찬되었는데 이는 송나라와 원나라 때 편찬된 지방서들을 모두 합친 것의 5배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명나라 지방서의 유형은 전국상을 반영하는 '통일지', 각 성의 발전 연혁을 반영하는 '총지'와 '통지', 각 행정 구역의 '부지', '주지', 심지어 '리지'까지 편찬하는 등 대단히 세세했다. 대표적인 총지로는 《원세계통지》와 《대명일통지》가 있으며, 명나라 강역의 전모를 기술하고 있다.

지도학적으로 보자면 나홍선의 '광여도'가 원나라 주사본의 '여지도'를 저본으로 하여 명나라 13개의 도와 변방 9개의 진, 수로와 조운 등을 표시한 지도로서 제작되었다. 마테오 리치는 베이징에서 중국의 여러 지방들의 모습을 담은 지도들과 함께 곤여만국전도를 제작했다. 구조우의 '독사방여기요'는 고대부터 명나라 때까지의 지리 연혁 따위를 정리한 서적으로 고증이 상세하고 확실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홍조는 전국을 돌며 윈난성, 구이저우성, 쓰촨성 등 10여 성의 지리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서하객유기(徐夏客遊記)를 남겼다.

10.3.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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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101] 금병매[102]
명나라의 는 초기에 고계,양기,장우,서분 이렇게 오중사걸(吳中四杰)의 시가 비교적 유명했으며, 유기, 송렴은 산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영락제 시절부터 황제의 성덕을 칭송하고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대각체(臺閣體)가 문학의 주류가 되는 바람에 시문학계의 자유로운 활기가 떨어지고야 말았다. 그러자 정통제 때 이동양(李東陽)과 전칠자[103] 문인들은 문학적 복고를 제창하며 '문장은 진한시대를 배우고 시는 당나라를 배워야한다'며 기존의 누습을 씻어버릴 것을 주장하고 대각체를 반대했다. 가정제 재위 중반기에는 전칠자를 잇는 후칠자[104]가 등장해 복고주의, 의고주의적인 시풍을 계속 이어가며 당나라 시절의 격조를 되살리는 복고파의 대표 주자로서 명나라 시문단을 주도했다.

한편 왕신중(王慎中), 귀유광(貴有光) 등 당송파는 전후칠자의 복고주의가 지나치게 수사와 격식에 얽매이는 것을 비판하며, 진한 시대의 산문을 따를 것이 아니라 당송팔대가의 작품을 본받아야 한다며 글을 명도(明道)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력제 때 등장한 문학 학파 중 하나였던 공안파(公安派)[105]의 원종도 등은 전후칠자의 지나친 과거 모방에 반발해 "독서성령(獨書性靈)으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며 인위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고 신선하고 독창적인 시상을 중시했다. 공안파 이후 등장한 종성, 담원춘으로 대표되는 경릉파 역시 공안파를 뒤따라 진시(眞詩)와 성령(性靈)을 중시했다. 경릉파는 공안파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지만, 경릉파는 공안파와 달리 옛사람들에게 배우는 데 중점을 더 두는 차이가 있었다.

명대의 가장 유명한 소설은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금병매》, 《삼언양박》 등이 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중국의 첫 장편역사소설위촉오 삼국의 군사적, 정치적 충돌을 다루었는데, 수 백명에 달하는 정치인, 군사, 외교가의 이미지를 선명하고 개성적으로 부각해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시내암의 수호전은 북송을 배경으로 주인공 송강을 포함한 서른여섯 명의 화본과 잡극을 소재로 각기 다른 성격의 충의로운 캐릭터들을 만들어 중국 영웅전설 창작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승은의 《서유기》는 삼장법사,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네 사람이 서천으로 불경을 구하러 떠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기괴하고 기이한 세계를 창조해냈다. 난릉소생의 '금병매'는 반금련·이병아·방춘매 세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 만력제의 탐음(贪陰)을 비판한다. 금병매의 경우 책 안에 염정적인 묘사가 다수 있긴 하지만, 또한 그 문학적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고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원말명초에 잡극이 점차 쇠퇴하자 남극[106]은 북곡의 가락과 원 잡극을 혼합하여 전설을 형성하였다. 가정제 후기부터 만력제 초창기까지 '보검기', '완사기', '명봉기' 이렇게 3편의 전설적인 작품들이 등장한다. 명대 연극의 집대성자는 탕현조로 대표작 임천사몽(臨川四夢)[107]을 남겼다. 홍치, 가정 연간에 잡극의 창작이 크게 발전하여 그 제재가 다양해지고 연극에 들어간 사상도 깊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서위의 잡극 '사성원', '가대소' 등은 그 분위기가 쾌활하고 독창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10.4.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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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승잉어도 강각원조도
홍무제에서 성화제 대에 이르기까지 심도(沈度)로 대표되는 대각체 서예가들의 수는 많았지만, 이들의 서풍은 대부분 평범하고 제 맛이 없이 독창적이지 못했다. 때문에 홍치제부터 융경제에 이르기까지 오문파(吳門派)의 축윤명·문정명 등이 복고(復古)를 주장하며 전조의 악습을 일신하고자 했는데, 이때의 유명한 각첩으로는 문정명의 《정운관첩(停雲館帖)》, 화하의 《진상재첩》, 오정의 《여청재첩》 등이 있다. 만력제부터 숭정제 연간에는 태주학파와 이지의 사상이 당시의 서예에 영향을 미쳐 원나라 이래 다시 중국 서예계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동치창의 서예는 간결하고 빈틈없는 것을 추구하여 이를 따르는 새 서파를 개창, 명말 청초에 정통파로 발전했다. 왕탁의 행초는 다루기 힘들고 거친 것으로 유명했기에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 서예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홍무제와 영락제 시기까지 명나라의 회화는 대부분 원나라의 화풍을 따랐다. 선덕제와 홍치제 때 절강과 복건에서 남송의 궁정 화풍을 계승한 화가가 잇달아 입궁했는데, 덕분에 이때 명나라 궁정화의 대부분은 남송의 궁정화풍에서 따온 것이다. 인물화로는 상희의 「명선종행락도」, 사환의 「권원아집도」 등이, 산수화로는 이재의 「금고승잉어도」, 왕거의 「강각원조도」 등이 있다. 정덕제부터 쑤저우 지역에서 심주와 문정명이 이끄는 오문파(吳門派)가 등장해 산수화를 주로 그렸으며, 대부분 강남의 풍경과 문인들의 생활을 묘사한 작품들을 주로 남겼다. 오문파는 당시 신사층과 거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인기를 끌었다. 만력제와 숭정제 때에는 회화에 많은 혁신이 있었다. 서위는 화조도에 특출나 대사의화조화법을 완성했고 진홍수 등은 변형인화법을 창시했다. 동기창은 회화에서 '사기(士气)'를 중시하고 중국 회화를 남종화와 북종화로 구분하며[108] 송강파를 창시하였다.

명나라 시대는 오랜 만에 안정된 통일 국가를 이룸으로써 거대한 건축물들이 대거 지어졌던 시대다. 난징과 베이징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건축 대작이었다. 난징 응천부의 성벽은 홍무 2년에 건립되어 홍무 19년에 완성되었으며, 둘레 66리, 보통 폭 10-18m, 높이 12-15m의 세계에서 가장 긴 성벽이다. 또한 정사각형으로 배치하던 기존의 틀을 뛰어넘어 지리에 맞추어 모양을 변형했다. 황성은 동쪽에, 시가지와 주거지는 남쪽에, 병영은 서북쪽에 배치하는 등 유연한 구성을 보여주었다. 홍무 23년부터는 난징에 외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주변 120리에 16개 문을 달고 우화대와 종산을 모두 포함하는 거대한 성벽을 둘렀다. 반면 베이징 성벽은 비교적 반듯한 편으로 황권지상주의의 사상을 구현했다. 궁궐 건축도 역대 황조들 중 웅장한 편으로 자금성을 지었고, 천단, 태묘, 사직단, 공묘 등도 모두 매우 거대하게 세워놨다. 황제가 묻힌 명십삼릉은 그 공정이 방대하여 역대 최대 규모였으며, 명나라 때 변방을 방어하기 위해 재건된 만리장성은 아직까지도 남아있을 정도로 유명한 대작으로 손꼽힌다.

명나라의 등불놀이는 영락 7년인 1409년에 시작되었다. 이 해 정월 초 열흘에 영락황제가 조서를 내려 "상원절에는 군민이 등불을 켜고 술을 마시는 것을 즐거이 하며, 다섯 성의 병마는 밤에 행군하는 것을 금한다"[109]라는 칙령을 내린 것이 시작이었다. 특히 천순 8년(1464) 전후로 시작된 반촌등회는 광건재가 명나라 최고 유학자였던 진백사(陳白沙)를 만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되어, 매 정월 13일날마다 등불 축제를 거행하여 무려 500여 년 넘는 시간동안 이어져 내려와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0.5.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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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는 중국을 정복한 후 중원의 복식을 몽골식으로 바꾸었는데, 머리는 몽골식 상투를 땋고 옷에는 주름을 넣었으며 좁은 소매에다가 허리에도 주름을 땋게 했다. 여성의 경우 짧은 소매에 치마를 입혔다. 그러나 원나라가 쫒겨나고 명나라가 들어섰고 홍무제는 즉위하지마자 당나라의 의관제도를 부활시켰다. 신사층들은 머리 위로 상투를 땋았으며, 관리들은 오사모와 원령포, 허리에 띠를 매고 검은 장화를 신으면서 원나라의 제도를 모두 없애버렸던 것이다. 홍무제는 이 과정에서 원단, 스타일, 치수, 색상의 4가지 측면까지 구체적인 의복 제도를 엄격히 규정해서 상류층과 하류층을 복장만 보고서도 구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명나라 초기에는 이러한 의관제도가 엄격하게 시행됐다. 정통제 때 누가 가죽 장화를 신고 황궁 금지에 들어가는 일이 터지자 금의위에게 명령을 내려 '길에서 잠적하고 있다가 가죽 장화를 신고 있는 자들은 수 백명이든 죄다 체포해 옥에 넣으라'는 명령을 내리며 평민들의 가죽 장화 착용을 금지할 정도로 엄격했다. 그러나 성화제와 홍치제 연간에 사회경제의 발전과 함께 방직기술의 개량과 더불어 명나라 정부의 관리가 느슨해지자 명나라의 복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복식 양식이 개량되고, 일반 평민들이 입는 원단들이 점점 화려해졌으며, 아무도 관청의 의복 규제 법령을 준수하지 않았던 것이다.

명나라 중후기의 복식은 명나라 초에 확립된 의관 제도를 깨뜨렸다, 예를 들어 명나라의 초창기 관리 복식에는 비단옷이 없었지만, 성화·홍치 이후에는 관리들이 비단옷을 입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관리들은 당연히 용을 관복에 쓸 수 없어서 비단뱀을 대신 넣었다. 그런데 비단뱀은 뿔도 없고 발도 없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 관리들이 입던 것은 대부분 용 모양이었고, 실제로도 용포나 다를 바가 없었다. 때문에 학자 장한이 "오늘날 남자는 비단옷을 입고 여자는 금구슬을 장식하는데 모두 교만하고 국가의 금기를 넘어섰다'라고 개탄할 정도였다. 특히 만력제 때부터 명 말기 들어서는 복식의 화려함을 추구하여 도시 복식의 양식이 유행따라 자주 바뀌었다. 수많은 이상한 옷들이 유행을 타고 등장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옷 요괴'라고 부를 정도로 괴상한 옷들도 나왔다고.[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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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의 무덤에서 출토된 12장 곤복[111] 12장 곤복을 입은 만력제
황제와 황태자는 일상복으로 익선관을 쓴 뒤,[112] 앞뒤와 어깨에 금룡을 수놓은 직령 혹은 단령 용포를 걸친 다음 옥대를 차고 가죽 장화를 신었다. 용포는 상당히 쓰임새가 많았다. 황제가 입는 누런 황룡포에는 용, 꿩무늬 적문(翟紋) 및 12가지 문장[113]을 수놓았다.[114] 이 옷을 12개의 용보와 12장 무늬가 들어갔다하여 '12단용 12장 곤복', 줄여서 12장 곤복이라 부른다.[115] 큰 의례를 지낼 때나 어진을 그릴 때가 아닌 평시에는 12장 곤복을 걸치지 않고 대신 4단 용포나 상대적으로 간소한 옷을 입었는데, 이마저도 어깨와 가슴에 구름처럼 문양을 낸 운견(雲肩), 팔쪽에 기다란 통수(通袖), 용포 아랫단에 가로로 길게 만든 스란(膝襴)에 용 무늬를 더하여 굉장히 다채로웠다.[116]

홍무제는 즉위 직후 관복을 당나라의 관제로 되돌리라고 명령했다. 명나라 문무관원들은 중요한 행사 때 입는 조복과 제사를 지낼 때 입는 제복,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공복, 평상시 집무 중에 입는 상복 등을 입었다. 명나라 관리들의 조복은 '기린포'라고도 부르며 큰 옷깃과 직령, 헐렁하게 늘어진 소매, 허리 아래 앞자락에 주름이 접혀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슴과 등에는 흉배를 붙였으며 어깨부터 소매까지, 그리고 허리 아래 스란에도 자수로 무늬를 넣었다. 또한 좌우 옆구리에 각각 한줄씩 넓은 가장자리를 꿰매어 만든 사각형의 옷자락 '피(襬)'를 넣기도 했다. 관복의 색으로도 품계를 구분해서, 붉은색이 가장 품계가 높았으며 그 다음으로 푸른색, 초록색 순서였다.[117]

관리들은 가슴과 등에 새긴 흉배로 품계를 구분했다. 문관들의 흉배에는 새를 수놓았고 무관들의 흉배에는 동물을 수놓았다. 문관의 경우, 1품은 학, 2품은 금계, 3품은 공작, 4품은 기러기, 5품은 백계, 6품은 백로, 7품은 계칙, 8품은 꾀꼬리, 9품은 메추라기를 흉배에 넣었다. 무관의 경우 1품과 2품은 사자, 3품과 4품은 호랑이, 5품은 용맹, 6품과 7품은 표범, 8품은 코뿔소, 9품은 해마를 새겼다. 공작과 후작, 백작과 부마는 기린과 백택을 흉배에 넣었고 어사들은 해치를 넣었다. 정덕 13년에는 군신들에게 붉은 비단과 비단실을 하사했는데, 1품은 투우, 2품은 날치, 3품은 비단뱀, 4품과 5품은 기린, 6품과 7품은 호랑이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림원의 학사들은 품계가 정해지지 않았으나 최소 5품 이상은 되야했다. 기린이 수놓은 관복은 4품과 5품 뿐만 아니라 금의위나 호위병 등도 착용이 가능했다. 전형적인 단령 외에도 금의위의 비어복(飛魚服)과 같은 옷들도 있었다.

10.6. 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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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계와 대화를 나누는 마테오 리치
홍무제는 개인적으로 천문 역법을 매우 중시하여, 재위 기간 동안 여러 곳의 천문 관측대를 건설하고 많은 천문 기구를 제조하였으며, 대량의 천문과 점성술 서적[118]을 편찬하였다. 홍무 17년에는 내각박사 원통의 주도로 역법인 《대통력법통궤》를 편수했다. '대통력법통궤'는 수시력[119]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역법으로, 일식월식을 측정하는 알고리즘이 약간 향상됐다. 융경 3년인 1569년에는 대통력 역법을 중판하면서 대통력의 오차가 커졌다. 시간이 지나며 날로 역법의 오차가 커지자 민간 차원에서 이를 보완하려는 시도들이 여럿 등장했다. 그러나 역법에 보수적이었던 명나라에서 역법을 함부로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120] 명나라의 또다른 공식 역법이던 회력법도 있었는데 당시 학자들은 이 둘을 통합해 더 나은 역법을 쓰려고 했지만 역시나 실패했다.

송나라 대에 극적인 과학적,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던 것에 반해 명나라 때는 서양세계에 비해 그 발전 속도가 확연히 느렸다. 명나라 후기 들어 그나마 유럽과의 접촉으로 발전된 과학기술들이 유입되었다. 아담 샬망원경을 다룬 중국의 첫 논문인 원경설(遠鏡說)을 집필했고 1634년에는 숭정제가 예수회 선교사 요한 슈렉이 남기고 간 망원경을 입수했다. 지동설은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거부한 탓에 바로 유입되지는 못했지만, 폴란드 선교사 미하우 보임, 아담 샬 등을 통해 요하네스 케플러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사상도 조금씩 중국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121]

수학 측면에서는 퇴보했다. 이때부터 중국 전통 수학은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의 수학 성과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선대의 수학 저작도 잇달아 전해지지 않았다. 명나라 말기에 기하원본이 번역되기 전까지 명나라에는 대략 70여 종의 수학 저서가 있었다. 유명한 수학서로는 오경의 《구장상주비류산법대전》, 왕문소의 《고금산학보감》, 서심로의 《반주산법》, 가상천의 《수학통궤》 등이 있다. 명말에 마테오 리치서광계와 함께 기하원본을,[122] 이지조와 함께 '동문산지'를 차례로 번역하여 중국 수학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주판이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역시 이 명나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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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에서 일하는 사람들[123] 정화의 세계지도[124]
농업적인 면에서는 명나라 때 농기구들이 여럿 개선되고 체계적인 농업의 기본 틀이 잡혔다. 농업사상이 발전하여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물자에 따라 농사를 달리 지어야 한다는 3안의 원칙을 확립됐다. 시비 및 토양 개선 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여러 농서들이 출간되기도 했는데 서광계의 농정전서는 농사 짓는 법,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밭을 정리하는 법, 기근에 대비하는 법 등을 소개하고 이전의 농업 노하우들을 집대성해놓았다. 위씨 형제의 원형요마우타경전집(元亨療馬牛駝經全集)은 말, 소, 낙타의 사육 방법에 대해 논해 기초적인 수의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명나라는 화기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왕조였다. 초창기부터 화기를 연구해 독창적인 디자인이나 발명을 해나갔고, 후기로 갈수록 기술이 발전된 유럽의 대포나 화기를 수입해 사용했다. 1403년에는 유기와 초옥이 화룡경(火龍經)을 집필해 당대 화약을 사용해 만들수 있는 온갖 무기들, 폭탄, 불화살, 꽁무니에 날개가 달린 로켓, 용머리처럼 생겨서 수많은 작은 로켓들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부스터를 사용한 다단 로켓, 로켓 런처, 지뢰,[125] 기뢰, 화창, 핸드 캐넌, 캐넌을 다 소개했다.

의학의 경우 이시진의 본초강목이 가장 유명하며 16세기 이전의 약리학을 요약하고 374종의 새로운 약물을 추가해 총 1,892종의 약재를 다루었다. 오유성의 '역병론'은 '악기설'을 발전시켜 병인, 증상, 진단, 치료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중국 전통의학을 발전시켰고, 인두법 역시 명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칫솔을 발명한 것도 15세기 명나라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딱딱한 돼지 털을 나무에 박아서 칫솔처럼 사용해 구강 청결을 유지했다고.

원나라 칸발리크의 황궁에는 분사구에서 공이 이리저리 구르며 춤추는 분수, 스스로 움직이는 호랑이 모형, 향수를 뿜어내는 용머리 장치, 고대의 기술로 제작한 시계 등이 있었으나[126] 홍무제는 이를 몽골 통치의 타락이라고 보고 죄다 파괴해버렸다. 중국을 방문한 선교사들, 예를 들어 마테오 리치나 니콜라스 트리고는 톱니바퀴가 들어간 시계, 물시계, 모래시계[127] 등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으나 16세기 유럽의 시계가 이미 훨씬 중국의 시계보다 정확하다는 평가를 남겼다. 그나마 그래도 동양에서는 가장 뛰어난 시계 기술을 가지고 있는 편이었는데, 마치 유럽식 시계처럼 고정된 다이얼에 시침이 돌아가는 모습의 시계도 있었다. 이 시계는 모래의 흐름으로 작동했고 훗날 4번째 톱니바퀴를 추가, 기어의 비율을 바꾸고 오리피스 구멍을 넓혀 모래가 너무 자주 막힌다는 장점을 보완했다.

11. 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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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담

13. 대중매체에서



[1] 주원장이 오왕(吳王)으로 자처한 기간까지 따지면 1364년을 명나라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남명의 존속 기간까지 합치면 1662년에 멸망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기간을 포함한다면 298년이 된다.[2] 1407년 - 1428년 교지포정사사[3] Taagepera, Rein (1997), "Expansion and Contraction Patterns of Large Polities: Context for Russia",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41 (3): 475–504. #[4] 1375년부터 발행한 지폐[5] 진먼 현, 마쭈 열도[6] 난칸, 장신포[7] 아루나찰프라데시 동부[8] 교지. 1407년 복속, 1428년 상실.[9] 이 역시 일부 지역이 교지에 해당. 1407년 복속, 1428년 상실.[10] '대명제국'이 아니다. 전근대의 중원에 있는 왕조들은 정식 국호에 '제국'을 넣은 적이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제국'이라는 표현이 아닌 '천자국', '상국' 등의 표현을 썼다. 동아시아에서 '제국'이라는 표현이 지금과 같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일본 제국, 중화제국, 대한제국과 같이 근대 이후의 일이다. 1915년 이전 문헌에는 중화제국이란 단어는 전혀 등장하지 않으며 중화제국이라는 신조어를 말하면 아무도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현재 중화제국은 1915년도 건국한 중화제국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가끔 과도한 찬양 수단으로 과거 국가들을 중화제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일이며 한나라, 당나라, 명나라도 자신들을 중화제국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명나라를 언급할 때는 '명' 혹은 '대명'이라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많고, '대명국'이라는 표현은 아주 가끔 등장하며 '대명제국'과 같은 정체불명의 조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국체(國體)를 국명에 표현하는 것은 유럽적인 전통이다. Kingdom of England(잉글랜드 왕국)이라든지 Herzogtum Lëtzebuerg(룩셈부르크 공국)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칭했다. 이런 전통이 19세기 이후 서구 문명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에 밀려들면서 전파된 것이고 그 결과로 나온 명칭이 앞에 언급된 일본 제국이니 대한제국이니 하는 명칭이며 현재 한국의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 역시 이 점에선 같다.[11] 명나라의 존속 기간은 한국사고려 공민왕 ~ 조선 인조(남명 포함 시 현종까지) 시기에 해당한다.[12] 예를 들어 한태조 유방은 한왕(漢王)이었고, 위태조 조조와 진태조 사마소는 각각 위왕(魏王), 진왕(晉王)이었다.[13] 단, 만주의 경우 명이 대부분의 기간 동안 랴오둥 반도 일대만을 직접 지배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이를 중심으로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이었다.[14] 이 경우 중국과의 조공으로 얻게 되는 정치적, 군사적 안정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현대 들어선 '조공 무역'에 주목한 시각도 부각되고 있다. 단, 사신 접대비나 조선 초(태종~세종) 공녀 문제, 임진왜란 이후 재조지은으로 인한 관계 변질 같은 문제 등은 감안해야 한다.[15] 원 최후의 황제 혜종은 대도를 버리고 몽골 고원으로 도망쳐 북원을 세웠다.[16] 물론 사고전서는 그 총 3,503부 79,337권에 달해 영락대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장대하다.[17] 영락제가 하루아침에 베이징으로 천도한 것은 아니었다. 1405년 이래로 10년간 꾸준히 수도로 쓰기위해 개축작업을 거쳤고, 1416년에 공식적으로 천도할 뜻을 공표했으며 1420년에 베이징 황성 건설을 완공해 1421년에 최종적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다.[18] 다만 선덕제라고 해서 완전무결한 황제는 아니었다. 선덕제는 환관을 교육시키는 내서당을 설립해 환관들이 득세하게 될 기반을 마련했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으며, 귀뚜라미 싸움을 좋아해 전국으로 귀뚜라미를 찾으라고 환관들을 파견해 환관들의 횡포가 심했다.[19] 황제들의 어진을 보면 정통제 시절부터 갑자기 화려한 장식이 많아진 것을 볼 수 있다. 토목의 변으로 황제의 권위가 크게 떨어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일부러 곤룡포를 화려하게 만들었다.[20] 다만 왕진이 목숨을 잃은 것은 오이라트군이 죽인 것이 아니라 왕진이 제 권력을 위해 황제의 피신을 방해하자 분노한 명나라 대장군 번충이 왕진을 철퇴로 때려죽인 것이다.[21] 기존의 병부상서 광야는 이미 토목보에서 사망한 상태였다.[22] 부도어사 서유정이 야밤에 군대를 이끌고 정통제가 감금된 남궁으로 들어가 그를 풀어준 뒤 성문을 점령하고 제위를 회복시켰다.[23] 실제로 천순제는 우겸이 청렴결백한 관리였음을 깨닫고 후에 우겸을 제거한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24] 토목의 변을 일으킨 에센 타이시가 내분으로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살해당했다는 것도 명나라 입장에서는 큰 호재였다.[25] 사실 명은 영락제 이후 식민지인 베트남에서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하여 베트남이 독립하고 토목의 변에서도 몽골에게 패하여 수도가 외적의 침공을 받는것에서부터 군사력이 약해졌음이 제대로 드러났다. 그러다보니 명은 영락제 이후로는 더는 주변국에 대한 패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국토를 방어하는 노선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26] 이렇게 뇌물을 받아챙긴 관리들이 해임된 것은 후임 홍치제에 들어서야였다.[27] 전녕은 환관 출신 아첨꾼, 강빈은 변방 장수 출신으로 황제의 눈에 들어 막대한 전횡을 저질렀다. 동성애 관계였다는 말도 있다.[28] 이 것도 웃긴 것이, 이미 영왕의 난은 왕수인이 진압했으나 정덕제가 직접 잡았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부캐 주수의 신분으로 출정해 영왕을 풀어줬다 잡는 쑈를 벌인 것이었다.[29] '고'(考)는 망부(亡父), 즉 '돌아가신 아버지'라는 의미였다[30] 이는 별거 아닌 것 같아보여도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정덕제가 아니라 흥헌왕의 뒤를 가정제가 이었다고 하면, 적장자를 우선으로 하는 정통 라인이 아니라 방계도 제위를 이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즉 황실의 방계라도 힘만 있으면 영락제처럼 찬탈해서 황제가 되든가, 아니면 나중에 이런 상황이 또 발생할 경우 누구라도 황실의 계승을 주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31] 소원절이 죽자 또다른 도사 도중문을 총애했다.[32] 몽골군이 1550년 경술의 변 당시 만리장성의 주요 관문들 중 하나인 거용관을 공격하는 모습이다.[33] 이 외에도 포르투갈인들이 가정 36년부터 슬슬 마카오로 이주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마카오가 포르투갈령으로 넘어간 것은 아니었고, 명나라 말기까지도 마카오는 여전히 광둥성 향산현 관아 관할로 남아있었다.[34] 사실 장거정도 그렇게 썩 청렴한 관리는 아니었다.[35] 원래 재상급 인사쯤 되면 탈정기복(奪情起復)이라 하여 재상이 사직하고 낙향해도 황제가 다시 불러와 재상이 못이기는 척 삼년상을 그만두고 정계로 복귀하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장거정은 그 고작 몇 개월의 공백이 두려워 탈정기복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36] 전반적으로 능력은 뛰어난 명재상이었으나 하필이면 만력제를 제대로 교육하는 데에 실패해 명나라를 망쳐놓은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도 있다. 지나치게 만력제를 엄격히 교육한 탓에 만력제가 장거정 사후 스승의 부패했던 민낯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비뚤어져 장거정이 했던 개혁 정책의 반대로만 했기 때문이다.[37] 황태자 주상락의 처소에 괴인이 난입해 태감을 몽둥이로 후려팬 사건. 정귀비와 주상순이 배후라는 의심을 받았다.[38] 그래서 이 사건을 황태자 주상락의 계획 아닐까하는 의혹도 있다. 상식적으로 사람 한 명이 황태자궁에 난입해 황태자를 죽인다는 계획도 너무 허술할 뿐만 아니라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인물은 황태자이기 때문.[39] 태창제는 10년 넘게 아버지 만력제로부터 제대로된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랐고, 항상 권력의 위협에 시달렸다. 태창제가 즉위할 때부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여서 그만큼 색에 탐닉했다는 말도 있다.[40] 하루에 설사를 34차례나 할 정도로 심각했다고.[41] 최문승은 정귀비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평소 태창제를 시기하던 정귀비가 최문승을 시켜 황제를 독살했다는 의심이 퍼졌다. 그러나 이들의 의혹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최문승은 난징으로, 이가작은 변경으로 보내지는 선에서 끝났다. 또한 정귀비 일파였던 재상 방종철 역시 의혹에서 빠져나가는 데에 성공하며 홍환안은 미궁에 싸인 채 끝났다.[42] 이 사건의 배후로 또 지목받은 정귀비는 결국 자결했다. 그러나 이선시는 훗날 환관 위충현이 득세할 때 다시 권력을 잡고선 나라를 좌지우지하며 말아먹었다.[43] 황제를 찬양할 때 10,000세, 제후국의 국왕을 찬양할 때 1,000세라고 한다. 위충현은 자신을 황제 바로 아래인 구천세, 구천구백세라 부르라고 시키며 제 위세를 과시했던 것.[44] 환관들은 위충현이 공자에 비하고 위충현의 아버지는 공자의 부친인 숙량흘에 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5] 군주가 잘못했을 때 군주를 직접 처벌할 수는 없었기에 군주가 스스로 잘못을 빌어야하는데, 이를 자신의 죄를 밝히는 '죄기조'라고 한다. 자신의 죄를 자책한다는 뜻의 '책기조'나 자신의 죄를 반성한다는 뜻의 '수성조'라고도 부른다.[46] 참고로 위충현은 제 권세를 놓기 싫어 필사적으로 태아 상태였던 천계제의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려 시도했지만 지나친 무리수였던지라 결국 실패했다.[47] 위충현 세력이 워낙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단번에 위충현을 쳐내려고 시도했다가는 위충현이 아니라 오히려 황제가 목숨이 날아갈 위험이 컸다.[48] 이를 이자성의 난이라고 한다.[49] 정예군이 청나라(후금)와의 결전에서 전멸한 상태에서 변경 수비대만으로 북방을 막고 있던 명나라는 농민의 대병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나마 남아있던 지방군마저 모두 반란군에게 패배하면서 더는 반란군을 막을수 없었다.[50] 북중국의 이자성과 남중국의 장헌충은 둘다 명나라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었으나 결코 협력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경쟁 관계였다.[51] 황제의 최측근이라는 환관들은 오히려 이자성군을 맞이하겠다고 성문을 앞장서 열어줬다.[52] 수많은 공경대신들과 수 백명의 환관들, 300명이 넘는 궁녀들이 함께 따라 자살했다. 700명이 넘는 유림과 그 가족들이 함께 목숨을 끊었고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전투 중 사망했다.[53] 이자성은 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자 4월 29일 자금성 무영전에서 허겁지겁 황제 즉위식을 열었으나 곧 궁궐을 불태우고 도망쳤다.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거한 기간은 41일 밖에 되지 않았다.[54] 나중에 대왕 주계의 12대 손인 주지련이 옹정제 시기에 벼슬을 받고 명나라 제사를 잇게 되었다.[55] 많은 명 유민들이 전쟁을 피해 외국이나 동남아시아로 이민 가기도 했다. 이들은 현지와 많이 동화됐지만, 초창기 동남아 화교의 기원이 된다.[56] 1590년대 명나라 관료 서현경의 인생을 그린 작품 서현경환적도(徐顯卿宦跡圖)에 등장하는 그림이다.[57] 中書舍人. 중국의 관직으로 황제를 보좌해 궁을 관리하고 재정을 책임졌다. 당나라 때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명대에는 실권이 내각으로 넘어가고 중서성이 해체되며 실권을 잃었다.[58] 명나라 홍치 13년인 1503년 그려진 갑신십동년도(甲申十同年圖). 10명의 친한 관리들을 그려놨는데 위의 사진은 개중 3명을 따로 찍은 것이다. 왼쪽부터 각각 내각대학사 이동양, 병부상서 유대하, 남경 공부상서 진청이다.[59] 다만 후기로 갈수록 감찰권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나라가 혼란스러워졌다.[60] 그러나 내각은 명나라 내내 국법에 명시된 공식 기관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으로는 황제를 보좌하는 임시 기관일 뿐으로, 내각의 관리들은 내각이 아닌 다른 곳에 관직을 두고 있었다. 내각은 자금성 문연각에 모여 회의를 열었는데 이때문에 당시 문연각은 곧 내각과 동의어였다.[61] 황제는 올라온 문서들에 붉은 글씨로 본인의 의견을 친히 덧붙여서 다시 내려보냈다. 이를 '비주'라고 부른다.[62] 즉 사례감의 병필태감은 내각대학사의 상주문에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하거나 첨부해서 황제에게 올려보낼 수 있었다. 결국 황제는 환관들의 벽에 가려 내각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 못했고, 위충현 때는 내각의 표의 자체가 올라가지 않았다고 한다.[63] 이 3개 부를 합쳐서 상삼부(上三部)라고 불렀다.[64] 서창은 성화제 때 만들어졌고 1482년 이후 사라졌다. 나중에 정덕제가 서창을 부활시키고 내행창을 만들어 환관 유근에게 맡겼으나 유근이 숙청되자 서창과 내행창 모두 다시 폐지되고 동창만 남았다.[65] 사형판결을 앞둔 사람이면 황제에게 직접 올려보냈다.[66] 1590년대 명나라의 관료였던 서현경의 벼슬 인생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 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67]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萬壽堂刊本))
《明史》(명사#)
[68] 다만 민간에서 계속 행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현대에 위키백과 등에서 대월 후 레 왕조의 승선(承宣)과 비슷하게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라 한다.[69] 식량 생산량 증가와 인구 증가[70] '추정' 인 이유는 아래의 이유로 인구 파악이 미비했기 때문이다.[71] 원래의 목적이 세수입을 확보하는 호구 통제 제도였다. 전근대 시기에 호구 조사 하는 이유가 뭘지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72] 조선만 하더라도 파악 호구수가 실제 인구의 최소 40%가 넘는 격차가 있을 것으로 본다. 국가가 교회를 통해서 세례자 명단만 확보하면 아주 정밀도 높은 인구 조사가 완료되던(실제로 스웨덴, 프랑스 등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유럽과는 상황이 다르다. 거긴 태어나면 기본적으로 유아 세례를 받고 죽으면 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르며 그 명단이 교회에 올라가니까. 세금을 내야 하지만 종교 문제가 걸려 있으니 농부들은 세금 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옛날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라 믿을만한 통계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행정력이 마비되는 시점이 현대에 비해 빈번했는데 그러면 행정 방식이 미흡한 국가에서는 인구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게 줄기도 했다.[73] 이때 보급로는 재조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74] 어떤 의미에서 이 제도는 동로마 제국프로니아 제도나 한국 역사의 과전법과 유사하다. 전근대(특히 중세) 기준으로 비용 대비 가장 효율적으로 군사력을 양성하는 방법은 영토를 분봉해주고 그 영토를 기반으로 군사력을 육성하게 하는 봉건제적 방법이었지만, 이 경우 군사력+세력기반까지 갖추고 효율적으로 양성된 그 군사력이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중앙정부가 세금을 수취하여 직접 봉급을 주게 되면 그만큼 군대에 대한 통제력은 높아지지만 전근대의 기술적 한계 때문에 수취-지금 과정에서 폐단이라고까지 할만한 막대한 비효율이 발생하는 것. 따라서 전근대 기준으로 중앙집권을 지향했던 국가들에서는 이 둘의 절충안으로 군인들에게 일정 범위의 농민들에 대한 수취권 제공하여 봉급은 효율적으로 주되 해당 농민들에 대한 지배력은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75] 명은 심각한 구리 인플레이션을 겪던 국가였다. 이건 청대도 마찬가지였고, 조선을 통해 혹은 직접적으로 일본과 교역을 트고 윈난 지방의 개토귀류를 통해 동광을 확보하면서 조금 나아졌다. 그러나 일본이 교호 개혁으로 동 수출을 금지했을 때 동전 값이 등귀하고 동전에 아연을 더 섞어서 동전이 물러졌다고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면도 있었다.[76] 이 학살은 오고타이 칸 시절에 끝난다. 북중국을 완전히 정복했기 때문에 정세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고, 쿠빌라이도 북중국 통치를 잘했다. 이렇게 통치를 잘 해서 얻은 세력으로 아리크부카의 난을 진압할 수 있었다. 남송의 경우도 쿠빌라이 칸이 친중적이어서 전과 같은 학살은 없었다. 그래서 학살로 인한 인구 감소는 생각보다 적었다. 오히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77] 북중국의 경우 쿠빌라이가 다스리는 시기 이후로는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등 이 원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고(쿠빌라이 칸 항목 참조), 그 후에도 중국 전체로 보더라도 이 원인으론 인구 감소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가령, 원나라의 인구는 대부분이 한족(몽골과 색목인 층의 수는 약 200만 ~ 300만인데 비해 한족의 수는 일단 한인의 수는 약 1,000만, 남인의 수는 약 6,000만, 합쳐서 약 7,000만 정도. 한인이 아무리 발해인, 거란, 여진 등을 포함한다 해도 원나라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이었다.)인데도 계속 늘고 있었다. 1290년에 약 77,000,000, 1293년에 약 79,816,000, 1330년에 약 83,873,000, 1350년에 약 87,147,000, 명나라의 인구는 1393년에 약 65,000,000. 영문 위키 참조.[78] 흑사병의 피해가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고 흑사병으로 죽은 인구수는 중국이 유럽보다 더 많았다. 약 3300만명이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흑사병 항목 참조.[79] 두산 백과 '원의 사회 경제' 참고.[80]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참고.[81] 중국 학자들 가운데 이미 송대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고, 명대나 청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중국본토 뿐 아니라 홍콩대학 소속 학자들이나 대만 학자들도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무조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 홍콩대학과 대만 국립정치대학은 서양에서 중국사 사료를 연구할때 가장 많이 자문을 구하는 학교들이다. 홍콩대학은 영국 식민지 시절 설립되어 영어가 쓰이며, 중공 입김에서 자유로웠다. 그래서 중국본토와 달리 보다 정치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학문탐구가 가능해 서양 학계에서 적극적으로 자문을 구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공의 국가주의'에서 자유롭다는 것이지 '중화 민족주의'로부터도 자유롭지는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82] 삼국지에서의 형주 지방, 청나라의 옹정제 시기 호북, 호남성으로 각각 분리된다.[83] 남중국의 경제력이 북중국의 경제력을 능가한 송나라 시기에서조차 푸젠-광둥-광시-윈난지방은 평야가 매우 빈약한 산간투성이의 볼모지여서, 광저우-취언저우-푸저우등 일부 해안 시박사 물류도시를 제외하곤 인구밀도가 거의 없던등 중원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이였다. 송나라-명나라시기 인구밀도 자료#[84] 송기 푸젠성의 경우 취안저우-푸저우-샤먼등의 해안 도시가 워낙 크게 발달해서 부양할 배후지 계곡 지방이 개간되어 중원 평균 이상의 경제력을 지녔으나, 광둥부터는 주강 삼각주 지방조차도 송나라기준 아담한 중소도시 규모인데다가, 주강 삼각주 해안지방을 제외한 광둥-광시 양광지방은 말 그대로 송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고 인구가 희박하던 지역이였다.[85] 카리브연안의 설탕과 목화 고무등의 플랜테이션으로 인해 토질이 황폐화되고, 흑인노예 노동자를 소모품으로 시체를 내다버리는등, 생산지에선 영 좋지못했지만 생산품을 이송해 가공하는 유럽은 커다란 번영과 발전을 가져다주었다.[86] 이러한 산업이 이뤄지던 카리브 군도와 브라질 동북부는 황폐화된 토질과 막장으로 고정된 사회경제산업구조로 세계 최빈 지역이다. 미 남부조차도 현대 경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목화노예경제는 남부의 경제에 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이익이 된 적이 없다고 하고, 21세기 선벨트 개발이전까진 풍족한 토지와 풍부한 천연자원과 온난한 기후, 물류에 이로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이였다.[87] 베이징에서 명나라 시대의 목조 건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찰로 유명하다. 1444년 지어져 전형적인 명대 사찰 건축 형식을 하고 있다.[88] 특히 도교를 유난히 좋아하던 가정제는 선대 정덕제가 불교를 지나치게 가까이 한 탓에 나라가 피폐해졌다는 핑계를 대며 불경을 불사르는 등 '가정멸불'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정제는 반대로 도교에 미친 듯이 심취했기에 딱히 정덕제보다 나은 군주는 아니었다.[89] 도교에서 상제에게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축문.[90] 1616년에 남경교안이 일어나며 잠시간 가톨릭 포교가 중단되는 일이 있긴 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91] 그러나 실제로 누르간도지휘사사는 거의 명나라의 영향력이 닿지 않았고, 명나라의 영향력이 미치는 실질적인 범위는 요동 반도에 그쳤다.[92]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에 큰 충격을 얻어 상심하여 죽었다.[93] 처첩, 자녀, 형제 등은 2천 리를 유배당했고 나머지는 죄를 묻지 않았다.[94] 그래서 중국에서 만든 명나라 지도를 보면 하나같이 티베트 전체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95] 중국 학자들은 명 조정이 티베트의 정권 교체를 승인했다던가, 티베트 불교의 각 종파들에게 관직을 하사했음으로 티베트가 명나라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까규파의 지도자 하리마를 대보법왕으로 책봉, 겔룩파의 사카무니를 대국사로, 이어 선덕제 때는 대자법왕으로 추대했다. 샤카파는 대승법왕의 칭호를 내렸다. 여기에 찬선왕, 호교왕, 보교왕, 명교왕을 추가로 임명해 3법왕 5교왕 체제를 구축했다는 것이다.[96] 속국이라 보기엔 아닌 것이 후 레 왕조의 성종이 광서와 운남을 침공했지만 명나라는 그저 국경 방비만 강화할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을 정도였다.[97] 남송의 유학자, 사상가. 주자학을 성립한 주자(주희)와 동시대를 살며 유학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98] 다만 황종희의 사상은 현대 민주주의와는 엄연히 다르며 엘리트주의적인 요소가 대단히 강하다. 황종희는 신사 계급이 나라를 주도해야한다고 믿었고 민간 강학을 금하여 제대로 '교육받은' 엘리트 유학자 계층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99]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부터 청나라 건륭제의 명에 의해 편찬된 명사까지 중국의 역대 왕조에서 공인된 정사 24권을 총칭한다.[100] 명나라의 제도와 행정 법규를 기록한 법전이다[101] 명나라 궁내부에서 제작한 서유기 그림책. 현재 일본 도호쿠대학과 중국 베이징대학에 나뉘어 보관되어 있는데, 도호쿠 대학에 소장된 것만이 일부 공개되어있고 베이징대학에 소장된 것은 아예 열람이 불가능하다.[102] 청나라 시절에 그려진 금병매 소설의 삽화 일부.[103] 명나라 연간의 문인 이몽양(李夢陽)·하경명(何景明)·서정경(徐禎卿)·변공(邊貢)·강해(康海)·왕구사(王九思)·왕정상(王廷相)의 일곱 사람의 총칭. 후에 이반룡(李攀龍) 등 일곱 명의 후계자가 나왔으므로 이들과 구별하여 `전칠자'라 부른다. 온아(溫雅)와 평담(平淡)을 존중하는 당시의 대각체 문학에 반대, 웅건(雄健)한 작품을 강조했다.[104] 가정 연간(嘉靖年間)에 활약한 일곱 문인. 이반룡, 왕세정, 사진(謝榛), 종신(宗臣), 양유예(梁有譽), 서중행(徐中行), 오국륜(吳國倫)을 이른다.[105] 학파의 탄생지가 후베이성 공안현이었기에 공안파라는 이름이 붙었다.[106] 원나라 시절 중국 남부 저장성 원저우시에서 탄생한 연극 형식. 중국 최초의 완전한 극 형식으로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동시기 북쪽의 북곡과 대비해 '남극'이라 불렀다.[107] 남가기' '한단몽' '자채기' '모란정' 이 4개의 작품을 합쳐서 임천사몽이라 부른다.[108] 남종화는 동양화의 한 분파로 북종화에 대비되는 화파이다. 명나라 말기 동기창이 당나라 선불교의 남·북 분파에 빗대어 화가의 영감과 내적 진리의 추구를 중요시하는 문인 사대부화를 남종화로 부르면서 정착된 개념이다.[109] 명 태종실록 87권의 기록이다.[110] "어제 내가 도시에 갔는데 돌아올 적에 내가 눈물이 가득이었다. 책읽는 선비들 모두가 여자 옷을 걸쳤지 않은가!"라는 탄식까지 나올 정도였다.[111] 만력제의 정릉에서는 황색 곤복 1개, 홍색 곤복 4개가 출토됐고 만력제의 시신은 홍색 곤복을 입고 있었다. 위의 사진은 개중 황색 곤복을 복제한 것이며, 만력제가 입고 있던 해당 곤복은 홍위병의 난동으로 유실되는 바람에 복제되지 못했다.[112] 명 황제의 익선관은 여의주를 희롱하는 쌍금룡 장식이 붙어있거나, 아예 금사로 짜서 휘황찬란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조선의 익선관처럼 아무 장식 없는 익선관을 쓰기도 했다.[113] 일(日), 월(月), 성신(星晨, 별자리), 용(龍), 산(山), 화(火), 화충(華蟲, 꿩), 종이(宗彛, 동물이 그려진 옛 술잔), 조(藻, 해초), 분미(粉米, 쌀알), 보(黼, 왕권을 상징하는 도끼), 불(黻, '己'자 2개를 서로 반대로 하여 왕권을 상징하는 문양)[114] 명나라 용포에 그려진 용은 소머리, 뱀 몸처럼 몸통처럼 몸, 사슴 뿔처럼 뿔처럼 뿔처럼 눈처럼 새우 눈처럼 사자 코처럼 코, 당나귀 부리와 같은 입, 고양이 귀와 같은 귀, 매 발톱과 같은 발톱, 물고기 꼬리와 같은 꼬리 등 다양한 동물의 특성들을 세심하게 표현해 이전 왕조들의 용 도안보다 더 사실적으로 묘사됐다는 특징이 있다. 용 도안의 모습도 기존의 전통적인 행룡, 운룡 외에 단룡, 정룡, 좌룡, 승룡, 강룡 등 새로운 도안들이 생겨나 다양해졌다.[115] 이 황금빛의 12장 곤복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낼 때에도 입는 등 기존의 검은색 곤복을 상당 부분 대체했다.[116] 꼭 황제라고 황금빛 옷, 혹은 12장 장포만 입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황제도 붉은색, 청색, 녹색 등 다양한 색의 용포를 걸쳤으며 실제로 만력제의 무덤에서도 12장 곤복보다 4단 용포, 8단 용포 등이 훨씬 많이 발견되었다.[117] 공작, 후작, 백작과 부마, 그리고 1품부터 4품까지의 최고위 관리들은 붉은색 관복을 입었다. 5품부터 7품은 푸른색 관복을 입었고 8품과 9품, 그 아래 최하급 관리들은 초록색 관복을 입었다.[118] 《선택 역서》, 《대명청류 천문분야》 등이 대표적이다.[119]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1270년 만든 역법으로 그레고리력과 필적하는 수준의 정확도를 자랑했다.[120] 심지어 홍치제의 6대손인 황족 주재육이 1595년 역법을 고치자고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한편 주재육은 유럽과 동시기에 평균율을 창안하고 음악 이론을 발전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121] 중국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중국에 과학을 전해줄 때 끝까지 천동설을 놓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궁중에서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말했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의 학설을 주장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185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개신교 선교사들처럼 지동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122] 북송 수학자 심괄이나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삼각법의 기초를 연구하긴 했지만 한동안 연구가 침체되어 있다가 마테오 리치와 서광계의 기하원본이 보급되고 나서야 다시 빛을 본다. 이렇게 중국의 연구가 잊혀있다가 다시 서양의 도움으로 빛을 본 것이 상당히 많은데, 예를 들어 야전 제분소인 '필드밀(field mill)'도 중국에서 발명되었으나 실전되어 유럽이 다시 전해주었다.[123] 괴철로에 철광석을 제련해 연철을 만드는 공정을 소개하고 있다.[124] 실제 정화가 만든 세계 지도로 위쪽은 인도, 오른쪽 위는 스리랑카, 아래쪽은 동아프리카다.[125] 특히 이 지뢰는 핀을 이용해 하중이 가해지면 금속 지룃쇠를 튕겨 퓨즈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126] 공부상서 소훈이 당시 원나라 황궁의 모습을 상세히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안에 있던 갖가지 기계 장치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127] 선교사들은 모래가 마치 물처럼 바퀴를 돌렸다고 기록했다.[128] 중국은 겉으로는 중화사상에 입각, 다민족국가임을 강조하며 요금원청도 모두 위대한 중국의 역사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칭기즈 칸도 세계정복을 이룩한 위대한 중화민족이라며 내몽골에 가짜무덤을 세워놓는 막북공정까지 하고 있다. 당연히 몽골에서는 이를 극도로 증오하고 있다.) 실제로는 요금원청을 발전없이 파괴만 했느니 뭐니 하며 깎아내리고 한당송명을 치켜세우는 등 속마음은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시진핑 정권의 중국 소수민족 탄압도 그런 한족 민족주의 성향이 제대로 폭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장 이 명나라 문서와 청나라 문서에도 이러한 한족사관의 영향을 받아 '명나라까진 화기 제조기술이 매우 뛰어났었는데 청나라 들어서며 서양에 밀리게 됐다'는 식의 편파적 서술이 보인다. 청나라가 화기의 연구 등을 금지시키거나 게을리한 건 사실이지만 이미 명나라 시절부터 서양에서 들어온 화기가 기존의 명나라 화기를 밀어내고 제식병기 자리를 차지했으며, 자연과학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이 기존의 한족 천문학자들을 밀어내고 고위직을 차지했으며 오랫동안 믿어온 혼천설을 대체하는 지구 구형론을 전파하는 등의 현상이 있었으므로 '청나라 때문에 서양에 밀리게 됐다'는 건 반만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만약 청나라가 이민족 정복왕조가 아니라 한족 왕조였어도 이런 평가를 했을까?[129] 근대 서양의 충격이 있은 뒤 중국이 유럽보다 뒤떨어지게 된 원인이 언제였냐는 질문에서 나왔다. 기존의 입장은 명나라 시기에 서양에 역전되었다는 관점이 우세했으나 최근 이것을 부정하는 연구가 속속 등장하면서 기존 관점이 흔들리고 있다.[130] 반대로 청나라는 명나라마냥 답이 없는 암군들이 많은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자체의 한계 탓에 명나라보다도 외세에 더욱 밀려 중국에 도움이 안 됐다는 부정적 재평가가 많아지고 있다. 다만 이 또한 한족우월주의 관점에서 지나치게 이민족 왕조인 청을 깎아내린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실제로 서양과의 자연과학/기술적 격차가 벌어지는 건 이미 청 건국 이전인 명나라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이 점을 감안해도 청나라 말기의 상황이 명나라 말기보다도 더욱 답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으며 결정적으로 쇄국 정책과 건륭제 시기에 있었던 지나친 문자의 옥으로 인한 폐해가 결과적으로 중국을 엄청나게 퇴보시켰기 때문에, 서구 열강의 청나라 침입과 관련하여 청나라를 무조건 옹호하고 동정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과연 청나라 말기가 명나라 말기보다 더 심각하고 답이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청나라가 추태를 보여주며 망한 건 사실이다만(애초에 망할 땐 어느 나라든 추하지만) 명나라 역시 만주족이 중원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철벽처럼 만주족을 막아내던 자국의 명장 원숭환을 알아서 처형했고 그렇다고 또 다른 별다른 의미있는 개혁을 보여준 것도 아니며 결국 농민반란에 의해 알아서 멸망했고 만주족은 반쯤은 주워먹는 수준으로 중원의 새 주인이 되어 한족들을 핍박하고 학살한다. 이 허무하기 짝이 없는 멸망이 과연 청나라보다 우월하고 멋있는 멸망인가? 차라리 명나라와 청나라의 멸망이 각각 다른 면에서 허무하기 짝이 없다고 보는 게 나을 것이다.[131] 이만한 병력을 다른 지역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는 사막과 초원지대로 보내자면 수십만 대군의 병참은 오로지 공격측인 명나라 측에서 담당하여야 한다. 이런식의 원정은 영락제 시절 전성기 명나라의 국력과 행정망이 뒷받침 해주기에 가능한 것이었다.[132] 물론 영락제 시절에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토목의 변을 시작으로 점점 국력이 약해지더니 1550년의 경술의 변에서 몽골군에게 싸우지도 못한채 국토가 유린당했고 척계광원앙진 전법을 고안하기전까지는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하는 굴욕을 겪은 적도 있다. 심지어 말기에는 국력에서 매우 열세인 청나라에게 수차례 참패하고 국토까지 유린당했고 나중에는 반란군조차 진압하지 못해 나라가 반란군에게 망하고 만다.[133] 주원장 다음을 기준으로
1세손 3황제 주체(棣) 木 변 항렬
2세손 2황제 주윤문(允炆), 4황제 주고치(高熾) 高 항렬에 火 변 항렬, 주윤문은 당시 황세손이라 맏 윤을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3세손 5황제 주첨기(瞻基) 瞻 항렬에 土 변 항렬
4세손 6황제 주기진(祁鎭), 7황제 주기옥(祁鈺) 祁 항렬에 金 변 항렬
5세손 8황제 주견심(見深) 見 항렬에 水에 해당하는 삼수 변 항렬
6세손 9황제 주우탱(祐樘) 祐 항렬에 목
7세손 10황제 주후조(厚照), 11황제 주후총(厚熜)
8세손 12황제 주재후(載垕) 載 항렬에 土 변 항렬
9세손 13황제 주익균(翊鈞) 18황제 주율건(聿鍵) 翊 항렬에 金 변 항렬, 주율건은 방계로 聿 자를 썼지만 金 항렬이 들어간다.
10세손 14황제 주상락(常洛) 常 항렬에 水 항렬
11세손 15황제 주유교(由校) 16황제 주유검(由檢) 17황제 주유숭(由崧) 19황제 주유랑(由榔) 由 항렬에 木 변 항렬이다.
12세손 주유검의 아들인 주자랑(慈烺) 慈 항렬에 火 변 항렬.
황실이라 그런지, 상당히 엄하게 항렬자를 채용한 왕조다.
[134] 다만 이는 어쩔 수 없었다. 명나라가 멸망한지 200년 넘어서 제대로 된 가계를 찾기도 어렵고 그나마 명나라 황족의 후예라는 이들은 이왕삼각에 따라 청나라 작위를 받고 살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 때에는 민주주의, 공화주의 등 다른 이념들이 밀려들어와 굳이 복명을 외칠 이유가 없었다.[135] 청나라가 명나라보다 국력에서 강했다고는 하지만, 청나라 시기 중국의 지배자는 엄연히 만주족이었고 한족은 2등 국민 신세였다. 심지어 만주족 팔기군의 일개 병사가 한 도시를 다스리는 시장을 일방적으로 구타한 사건도 있었는데 그 병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던 사례도 있었다. 왜냐하면 만주족 병사한테 얻어맞은 시장은 피지배민족인 한족이었기 때문이었다.[136] 주로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를 몰아내는 명나라의 시조 주원장이나, 원나라의 잔존 세력 몽골오이라트를 쳐부수러 북쪽으로 원정을 떠나는 명나라의 3번째인 영락제가 무협소설에 단골로 등장하는 슈퍼 스타들이다.[137] 이민족인 만주족에 맞서 한족의 나라를 지키려는 충의지사들이 주요 등장인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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