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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05:32:13

제임스 밴 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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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대
로버트 아이첼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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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제임스 밴 플리트
제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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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밴 플리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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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General of the Army / Fleet Admiral
육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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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General / Admiral
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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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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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
Lieutenant general / Vice Admiral
육군
중장
레슬리 맥네어 | 존 리드 하지 | 앨버트 웨드마이어 | 매튜 B. 리지웨이 | 사이먼 B. 버크너 | 월튼 워커 | 로버트 리처드슨 | 루시안 트러스콧 | 호이트 반덴버그AAF | 루이스 H. 브레레턴AAF | 존 C. H. 리 | 윌리엄 H. 심슨 | 알렉산더 패치 | 제이콥 데버스 | 프랭크 맥스웰 앤드루스AAF| 로이드 프레덴달 | 밀러드 하먼AAF†| 델로스 에먼스AAF | 월터 베델 스미스 | 리처드 서덜랜드 | 조지 H. 브렛AAF | 트로이 H. 미들턴 | 아이라 이커AAF | 에니스 화이트헤드AAF |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AAF | 존 드위트 | 휴 알로이시우스 드럼 | 해럴드 L. 조지AAF | 바니 M. 자일스AAF | 휴버트 R. 하먼AAF | 토머스 D. 화이트AAF | 네이선 트와이닝AAF | 웨이드 H. 헤이즐립 | 윌리스 D. 크리텐버거 | 제프리 키스 | 에드먼드 B. 그레고리 | 존 K. 캐넌AAF | 오스카 그리스월드 | 벤 리어 | 찰스 P. 홀 | 레이먼드 S. 매클레인 N 전 | 토머스 T. 핸디 | 루시어스 클레이
해군
중장
프랭크 잭 플레처 | 제시 올덴도르프 | 윌리스 리 | 존 매케인 시니어 | 존 H. 타워스 | 줄리안 C. 스미스M| 로이 가이거M | 앨런 H. 터니지M | 드위트 클린턴 램지 | 프레더릭 C. 셔먼 | 찰스 록우드 | 로버트 C. 기펜 | 로버트 곰리 | 루이스 덴펠드 | 찰스 M. 쿠크 주니어 | 아서 L. 브리스톨
소장
Major General / Rear Admiral
육군
소장
제임스 밴 플리트 | 모리스 로즈 | 커티스 르메이AAF | 맥스웰 테일러 | 레슬리 그로브스 | 윌리엄 F. 딘 | 클레어 셰놀트AAF·전 | 랄프 스미스 | 월터 쇼트 | J. 로턴 콜린스 | 로버트 올즈AAF | 리먼 렘니처 | 호바트 R. 게이 | 로스코 B. 우드러프 | 에드윈 F. 하딩 | 스태퍼드 리로이 어윈 | 윌리엄 J. 도너번 | 존 P. 루카스 | 에드윈 D. 패트릭| 클래런스 L. 팅커AAF† | 로버트 아이첼버거 | 찰스 윌로비 | 윌리엄 B. 킨 | 핸퍼드 맥나이더 | 폴 뉴가든 | 프랭크 캐들 마힌 | 폴 J. 뮐러 | 노먼 코타 | 어니스트 N. 하먼 | 찰스 H. 게르하르트 | 앤드루 데이비스 브루스 | 로버트 W. 해즈브룩 | 제임스 로턴 콜린스 | 존 B. 콜터 | 패트릭 헐리 | 프랭크 W. 밀번 | 앨버트 W. 월드론 | 클로비스 E. 바이어스 | 윌리엄 W. 이글스 | 윌리엄 F. 샤프 | 프랭클린 C. 시버트 | 아이작 D. 화이트 | 조지 데커 | 카터 매그루더 | 로버트 B. 매클러 | 클라크 L. 러프너 | 앤서니 맥콜리프 | 레이먼드 바턴 | 로버트 N. 영 | 윌리엄 M. 호그 | 제임스 L. 브래들리 | 클래런스 R. 휴브너 | 윌러드 G. 와이먼 | 루이스 A. 크레이그 | 찰스 H. 콜렛 | 에드워드 H. 브룩스 | 가이 V. 헨리 주니어 | 앨버트 E. 브라운 | 월터 M. 로버트슨 | 새뮤얼 E. 앤더슨 AAF | 도널드 윌슨 AAF | 테리 앨런 | 도일 히키 | 길버트 R. 쿡 | 제임스 E. 채니 | 데이비드 바 | 에드워드 알몬드 | 에드워드 P. 킹 | 조지 M. 파커 | 조지 F. 무어 | 토머스 B. 라킨 | 러셀 P. 하틀 | 프랭크 오드리스콜 헌터 AAF 전 | 헨리 오랜드 | 찰스 W. 라이더 | 아처 L. 러치 | 찰스 L. 볼트 | 알프레드 그루엔터 | 로리스 노스타드 |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 레이 바커 | 에드윈 P. 파커 주니어 | 해리 J. 맬로니 | 찰스 L. 스콧 | 브루스 매그루더 | 올랜도 워드 | 존 밀리킨 | 존 W. 레너드 | 제임스 개러시 오드 | 제이 L. 베네딕트 | 로버트 S. 바이틀러N | 레너드 F. 윙N | 존 달퀴스트 | 프레드 L. 워커 | 어니스트 J. 돌리 | 유진 M. 랜드럼 | 프랭크 메릴 | 오벌 R. 쿡 AAF | 로렌스 S. 커터 AAF | 얼 E. 파트리지 AAF | 휴 존 케이시 | 레이먼드 A. 휠러 | 루이스 A. 픽 | 고든 P. 새빌 AAF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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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장
Brigadier general / Rear admiral (lower half)
육군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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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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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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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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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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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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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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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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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시 미8군 사령관
월튼 워커 매튜 B. 리지웨이 제임스 밴 플리트 맥스웰 테일러 }}}
<colbgcolor=#DF0000><colcolor=#ffffff> 미합중국 제4대 제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James Van Fleet
파일:James A. Van Fleet.png
본명 제임스 앨워드 밴 플리트
James Alward Van Fleet
출생 1892년 3월 19일
뉴저지 코이테스빌
사망 1992년 9월 23일 (향년 100세)
플로리다 포크 시티
재임기간 제4대 제8군 사령관
1951년 4월 14일 ~ 1953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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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F0000><colcolor=#ffffff> 임관 미국육군사관학교
복무 미합중국 육군
1915년 ~ 1953년
최종 계급 대장 (미합중국 육군)
주요 참전 멕시코 국경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그리스 내전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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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4. 퇴역 이후5. 기타

[clearfix]

1. 개요

미국의 군인.

6.25 전쟁 당시 미 육군 제8군 사령관으로 한국군의 현대화와 미국의 원조에 적극적으로 공헌하였다. 퇴역 이후에도 종종 방한했으며 미국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고 평생 한미관계 발전에 헌신하였다.

2. 생애

2.1.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행적

1892년에 뉴저지 주 코이테스빌(Coytesville)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이름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네덜란드계인데 5대조인 얀 아드리안선 판플리트(Jan Adriansen Van Vliet) 대에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민 온 네덜란드인 집안의 후손이다. 밴 플리트(Van Fleet)는 후대에 네덜란드식 판플리트(Van Vliet)를 의미만 살려 영어식으로 바꾼 것이다.[1] 그러다가 점점 가세가 기울어 조부 대에는 오하이오의 빈농으로 전락했다. 부친 윌리엄 밴 플리트(William Van Fleet, 1833~1919)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릴 적에 단신으로 시카고로 출향한 뒤에 각종 막일을 하며 번 돈으로 사업을 벌여 자수성가했지만 1871년 시카고를 잿더미로 만든 시카고 대화재 때 큰 재산 손실을 보면서 위기를 맞았다. 이후 아직 덜 개발되어 있던 플로리다로 건너가 철도 건설사업을 벌였으나 여기서도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 제임스 밴 플리트는 이렇게 사업 실패로 허덕이던 시절에 낳은 막둥이 아들[2]이었다. 그의 출생 직후 아버지 윌리엄은 재기의 꿈을 접고 가족을 이끌고 철도 건설사업으로 친숙해진 플로리다로 이주하여 소소한 말년을 보냈다. 이 때문에 그는 플로리다에서 줄곧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3]

191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1915년에 졸업하였다. 재학 당시에는 미국육군사관학교 미식축구 팀에서 풀백으로 맹활약하기도 했다. 참고로 1915년 졸업 기수는 미국육군사관학교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기수로, 원수 2명(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오마 브래들리), 대장 2명(밴 플리트, 조셉 맥나니)을 포함해 졸업생도 164명 중 59명이 장군이 되어 이른바 별들의 기수라고 불린다. 미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 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퍼싱 장군이 이끄는 미국 유럽 원정군의 일원으로 파병되어 보병대대(제17기관총대대) 대대장을 역임하였다.[4]

전간기에는 미국의 여러 대학의 학군단 단장을 맡았다. 캔자스 주립 농업대학, 사우스다코타 주립대학을 거쳐갔고 플로리다 대학교 학군단을 이끌 당시인 1921~24년에는 플로리다 대학교 미식축구부 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이후에는 파나마 운하를 경비하는 제42 보병연대의 예하 대대장을 지낸 뒤 조지아주 포트 베닝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교관으로 복무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까지 메인주 포트 윌리엄스의 제5보병연대, 제29보병연대의 대대장 등을 역임하며 순탄한 경력을 쌓아갔고 1941년 2월에는 제8보병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비록 이 평화 시기에 두드러진 활약은 없었지만 그는 자신이 부임했던 모든 부대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육군보병학교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기관총 소대를 지휘한 경험 덕분에 최신 화기와 장비로 무장하고 이동할 수 있는 병력의 가능성을 예견하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전간기 육군보병학교 교관 시절에 그의 경력을 두고두고 꼬이게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무렵 육군에는 알코올 의존증으로 골칫거리인 장교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장교의 이름이 밴 플리트와 비슷했다. 문제는 당시 육군보병학교 부사령관 중 한 명이던 조지 마셜이 밴 플리트의 이름만 보고 바로 그 주정뱅이 장교로 오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셜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중용되어 육군 전체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이때 뇌리에 박힌 밴 플리트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밴 플리트 본인의 행적도 마셜의 오해를 굳어지게 한 요인이 되었다. 그는 야외 활동과 야전 지휘에 능숙한 타입이라 미식축구에 열중하다가 정작 본연의 임무를 놓치는 사례가 있었으며 그가 맡았던 고등군사반의 성적도 좋지 않았다. 이 부분은 밴 플리트 스스로도 '나는 누굴 가르치는데는 젬병이다'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하필 이런 사례들은 마셜이 강하게 추진하던 중점 사업들과 맞물렸기 때문에 마셜로선 '그럼 그렇지. 술이나 퍼마시는 놈이니 평소 행적도 그 따위이네.'라는 편견이 단단히 박힌 것이었다.

이 오해는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이후 미 육군이 대대적으로 확장되면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부대가 대거 창설되고 지휘관 수요가 폭증하자 그의 동기, 선후배들은 빠르게 진급하며 높은 보직을 맡기 시작했는데 누구보다도 유능한 지휘관으로 꼽히던 그는 대령 계급, 제8 보병연대 연대장 직위에서 전혀 진급도, 보직 이동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이나 전쟁대학 같은 최고위 지휘관 양성과정 입교도 이뤄지지 못했다. 상급 지휘관들이 밴 플리트를 추천해도 최종 단계에서 마셜이 계속 밴 플리트를 탈락시켰기 때문이었다. 굉장히 억울했지만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결국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전개될 때까지도 3년 넘게 그는 대령 계급의 제8보병연대 연대장이었는데 이때서야 실전에 투입되어 유타 해안에 상륙했다. 여기서도 그는 탁월한 지휘관의 자질을 발휘해 셰르부르 함락 당시 뛰어난 전공을 세웠는데도 여전히 진급은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두고 보다 못한 그의 육사 동기이자 유럽전선 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마셜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왜 밴 플리트가 계속 진급에서 누락되는지를 물었다. 마셜은 밴 플리트가 알콜중독자여서 그렇다고 대답했고 아이젠하워는 깜짝 놀라서 밴 플리트는 술을 안 마신다고 이야기를 해 줬다. 그제서야 마셜은 비로소 자신이 밴 플리트를 다른 장교와 착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이에 동기였던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이미 1941년에 준장 계급을 달고 1944년에는 3성, 4성장군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당장 그의 제8 보병연대의 상급부대였던 제7군단의 군단장 J. 로턴 콜린스 소장[5]은 2년 후배(1917년 졸업)였고 같은 사단(제4 보병사단) 소속인 제12 보병연대 연대장 러셀 리더는 무려 9년 후배(1920년 입학, 1926년 졸업/임관)였다. 물론 사단장 레이먼드 바턴 소장은 5년 선배(1912년 졸업)였으니 꼭 터무니없는 계급과 보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간 밴 플리트가 보여준 능력과 주변의 높은 평가를 감안하면 억울한 이유로 인정을 못 받은 것도 분명하다.

본인의 실수로 유능한 지휘관의 경력을 망쳐 버렸다는 걸 깨달은 마셜은 이후 부랴부랴 기회가 될 때마다 밴 플리트를 진급시켰다. 1944년 8월 1일에 드디어 준장으로 진급하여 제2보병사단의 부사단장을 맡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90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한다. 이어 11월 15일에는 다시 소장으로 진급했다. 벌지 전투 후반부에 그는 후방 부대인 제23군단[6] 군단장으로 잠시 있었으며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17일에는 다시 최전선으로 나와 제3군단장에 부임하였다. 그는 레마겐 교두보에서 미 육군 제1군의 저돌적인 돌파작전의 선봉을 이끌어 이른바 루르 포위전의 한 날개를 완성했다. 이 전투에서 모델 원수의 독일 B집단군의 잔존병력을 분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4월 17일부터는 군단을 이끌고 패튼 장군의 제3군 소속으로 독일 남부를 소탕하는 임무도 성공리에 완수하였다. 제90보병사단과 제3군단 사령관 당시의 활약은 저돌적인 패튼에게도 큰 인상을 주어 그는 밴 플리트가 자신이 거느려본 부하 장군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전선을 시찰하는 패튼을 수행하는 밴 플리트[7]

유럽전선 종전 이후에는 태평양전선에서 일본 상륙(몰락 작전) 준비를 위해 제3군단 사령부를 이끌고 미국 루이지애나로 이동하였지만 원폭 투하로 일본도 이내 항복하자 루이지애나에서 1946년 2월까지 군단장으로 대기하다가 이후 미국 국내에서 전후 정리 작업(전시 편성된 부대의 해체, 재배치 등)을 수행하였다.

2.2. 그리스 내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간의 이념 대립, 즉 냉전이 시작되고 유럽 각지에서 공산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자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많은 유럽 우방국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였다. 그는 1947년 12월 프랑크푸르트의 미 육군 유럽지구 사령부에 부참모장 직을 맡아 나와 있다가 당시 공산화 위협에 시달리던 그리스 왕국의 군사고문단장으로 파견되었다.

당시는 공교롭게도 마셜은 트루먼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영전했고 아이젠하워가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고 있을 때였다. 마셜은 1948년 1월 아이젠하워에게 그리스 군사고문단장 후보를 추천하도록 했다. 이에 아이젠하워는 5명을 추려 보냈는데 그 중 한 명이 밴 플리트였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추천 사유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유일하게 연대장부터 군단장까지 모두 경험해 본 현직 장교[8]이다. 그는 지적인 타입은 분명 아니지만, 직설적이고 단호하며 누구라도 존경하게 만드는 전투이력을 갖고 있다."라고 적었다.[9] 마셜은 추천받은 장군들 가운데 밴 플리트를 낙점하고 2월 5일에 그를 불러들여 이야기를 나눈 뒤 곧장 최대한 빨리 그를 정규 중장으로 진급시켜 그리스로 보내라고 강력히 권고했으며 일사천리로 다음 날인 2월 6일에 육군성은 군사고문단장 인사 발령을 내고 그 다음 날인 2월 7일에 대통령 명의로 중장 진급을 발표했다.

아이젠하워의 추천 의견에도 나오듯이 그는 참모를 역임한 경험도 없고 정치 경험도 없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과감한 성격과 추진력을 발휘하여 막장 상태였던 그리스군의 혼란을 잘 수습해냈다. 시원시원한 강골 무인의 성격이 맞아서인지 당시 그리스군 총사령관이던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장군[10]과도 돈독한 사이였다고 한다. 파파고스는 기병 장교로 발칸 전쟁, 튀르키예 독립 전쟁에 참전했고, 왕당파 정부 하에서 국방장관도 역임하였으며 이미 1940년 나치 독일의 그리스 침공 당시에도 그리스군 육군 총사령관일 정도로 노장군이었다.[11] 신기하게도 파파고스는 영어가 능숙하지 않았고[12] 밴 플리트는 그리스어를 할 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눈빛과 몸짓, 짧은 단어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밴 플리트 장군이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으로 오해했다고 한다.

미국은 그리스 내전에서 밴 플리트를 위시한 250여 명의 군사 고문단과 4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 원조를 퍼부어서 결국 그리스의 공산화를 저지해냈다.[13]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당시 전황상 불가피했던 이유로 실패한 작전 등에 대해서도 그리스군의 무능함을 과하게 책망한 경우가 종종 있어서 나중에 다소 좋지 않은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스 내전은 미군 고문단이 지원한 정부군의 군사작전에 의해 적잖은 민간인 피해가 있었는데 당시 그의 태도가 "게릴라전에서 정부는 적 동조세력으로 의심받고 있는 사람에 관한 한 군인 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람의 권리를 보호할 의무가 없다."였기 때문에 비판받기도 한다.

2.3. 6.25 전쟁의 활약

1950년 8월에 메릴랜드에 주둔 중이던 제2군 사령관을 역임하다가 1951년 4월 14일 매튜 B.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제8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진급이 늦은 편이라 전임자이자 이제 UN군 사령관이 된 리지웨이 장군이 밴 플리트의 웨스트포인트 2기수 후배다. 동기인 아이젠하워는 이미 1944년에 유럽전선 총사령관이었다. 그가 부임한 직후 대한민국 국군 최악의 흑역사 현리 전투가 발생했고 국군 제3군단은 밴 플리트 장군의 손에 해체당했다.

6.25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밴 플리트 장군은 나름의 골칫거리를 안고 있었는데 바로 공산군에게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 있었다는 점이다. 유엔군은 확전을 피하기 위해서 중국소련의 영토는 공격하지 않았는데 정작 공산군의 전쟁 물자는 여기서 생산되고 있었으므로 유엔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는 그리스 군사고문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당시에는 그리스군만 이 문제로 머리를 쥐어뜯었을 뿐 그리스 내전만 종식시키는 것이 임무였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 인민지원군무지막지한 물량공세에 맞서기 위해 밴 플리트 탄약량(Van Fleet Day of Fire)이라는 전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이것은 밴 플리트 포격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둘 다 종군기자들이 이 전술을 목격하고 붙인 명칭이었다.

1951년 4월에 벌어진 중국 인민지원군의 5차 공세 때 전선사수 명령과 함께 그가 택한 방식은 화력제압이었다. 바로 포병의 탄약통제보급율(CSR)을 5배로 늘려 이른바 무제한 사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105mm 포는 300발, 155mm 포는 250발, 203mm 포는 200발, 175mm 포는 250발을 쏘며 중공군의 사상률을 높인 덕분에 중공군의 5차 공세는 빠른 시일 내에 좌절되었고 그 후 중공군이 자랑하는 '보병 산악 기동전'도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만 쓸 수 있을 정도로 제한당했다. 게다가 '밴 플리트 탄약량'에 힘입어 미군은 적이 있거나 이용할 만한 모든 곳을 초토화시켰는데 미군 조종사들이 공중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서는 "더 이상 어떤 생물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한편 그가 미군이 작전 시 규정한 탄약의 사용 한도를 5배나 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 의회의 일부 의원이 그의 전적을 칭찬하기는 커녕 그가 혈세로 만든 탄약을 필요 이상 펑펑 날리고만 있으니 의회에 출석시켜 질의를 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4] 한편 밴 플리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의원들 보고 여기 와서 적군 시체랑 포로들 좀 보라고 해. 오지 않을 거라면 '밴 플리트 탄약량' 같은 말은 꺼내지도 말라고 해!"라고 일갈했으나, 상황이 상황이고 미국도 포탄 가격보다 인명을 중시하는 나라였기에 그가 의회에 출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출처 - 왕수쩡의 《한국전쟁》)

언뜻 보면 군사 부문에 무지한 정치인들이 유능한 장군에게 쓸데없이 태클을 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리 돈이 넘쳐나는 미군이라도 저 정도의 물자를 생산하고 전선까지 운반하는 건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다. 무엇보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국민의 세금이고 그 세금이 어떤 용도로 활용되는지 확인하는 건 의원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만약 밴 플리트가 무능한 똥별이라서 실적 없이 쓸데없이 포탄만 낭비하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군은 2차대전 때 만성적 물량부족에 시달리던 독일, 일본하고만 싸워 봤지 2천만이 전사해도 또 병력이 쏟아지던 소련군이나 인해전술 끝판왕인 중국을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많은 병사를 밀어넣으면서 진격하는 상대를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밴 플리트 장군도 한반도 역사에서 유구한 화력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현장을 볼 일 없는 미국 정치권에서는 혹시 비정상적으로 물자를 낭비하는게 아닌지 의심을 안 할 수 없었다. 밴 플리트가 겪었던 실전과 보고서의 괴리는 이후 미군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사방팔방에 저격수들과 게릴라들이 몇십만 단위로 깔려 있는 전장에 값비싼 FGM-148 재블린 미사일을 고작 기관총 진지나 보병 한두 명을 격파하는 용도로 쓰면서 다시 제기됨에 따라 미군은 화력점 격파 용도로 창고에 있던 M72 LAW를 다시 꺼내야 했다. 결국 재블린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전차의 뚜껑을 효율적으로 따면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아무튼 5차 공세 이후 중공군이 보병을 이용한 기동전을 포기하고 6.25 전쟁 중후반부터 치열하게 벌어졌던 고지전에서 야음을 틈타 공격준비사격축차투입으로 일관하게 된 것도 밴 플리트 장군이 펼친 화력공세의 효과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여간 불리한 머릿수를 그에 상응하는 화력으로 보완해 전황을 유엔군에게 유리하게 이끈 점을 인정받은 밴 플리트는 1951년 7월 31일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여세를 몰아 1951년 중반에 전선을 평양~원산 선까지 밀어붙이고 싶어했으나(맹조의 발톱 작전) 이미 6.25 전쟁이 장기화되는 것을 우려하고 휴전회담에 돌입한 행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그는 제한된 목표에 한해 '전투정찰' 명목으로 유리한 전선 확보를 위한 일련의 작전들을 기획했다. 이 과정에서 양구 해안분지(펀치볼) 일대에서 펀치볼 전투, 가칠봉 전투 등이 전개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소타격 작전계획(Plan Cudgel), 대타격 작전계획(Plan Wrangler), 해시계작전(Operation Sundial) 등을 기획하여 전선을 북으로 더 밀어붙이려고 하였으나 1951년 10월 25일에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유엔군 사령부 명령으로 모두 취소되었다.

그는 이후 대규모 공세가 불가능해지자 한국군의 양적,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데 힘을 기울였는데 한국군의 문제점을 "우수한 장교 인력 및 사단급 이상의 대규모 군사훈련의 부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1951년 10월 경상남도 진해육군사관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한국군의 정예화를 꾀했다.

그는 1953년 1월 29일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의 직위를 맥스웰 테일러 중장[15]에게 이임하고[16] 미국 본토로 돌아왔으며 2달 후인 3월에 전역하여 38년간의 군 생활을 마무리했다.
1953년 2월 21일 전역을 위해 귀국길에 오른 밴 플리트 대장의 모습.[17]

3.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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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퇴역 이후

6.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3월 31일에 군에서 퇴역했다.[18] 당초 퇴역 직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에게 주한미국대사를 맡기려고 하였다. 당시 아이젠하워는 6.25 전쟁을 끝내고자 정전협정을 밀어 붙이고 있었는데 분단 고착화를 이유로 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이승만을 설득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밴 플리트는 아이젠하워와는 육사 동기이고 이승만과도 의기투합한 사이로 양국 대통령 모두와 긴밀한 관계였기 때문에 적임자로 꼽혔던 것이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본인도 정전에 반대하는지라 소신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다며 이를 고사하였다. 굵직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기 때문에 지역 사회에서 플로리다 주지사 출마 제안도 여러 차례 받았으나 본인은 정치에 뜻이 없다며 이 역시 고사하였다. 플로리다에선 목장을 운영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퇴역 후에도 이승만과 밴 플리트의 끈끈한 관계는 지속되었다. 이승만은 얼마나 밴 플리트를 신뢰했는지 1954년 3월 11일에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군을 35~40개 사단으로 증강하고, 동아시아 반공 국가들의 지상군 훈련을 위해 밴 플리트를 다시 파견해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할 정도였다. 당연히 아이젠하워는 난색을 표했지만 대신 극동 지역 우방국에 대한 군사원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특사로 그해 5월에 밴 플리트를 파견하였다.[19] 이때도 밴 플리트는 한국 육군을 기존 20개 사단에서 30개 사단으로 증강할 것을 권고하며 한국측 입장을 최대한 뒷받침해 줬다. 이런 깊은 친분으로 인해 밴 플리트는 이승만 대통령 재임 시절 생일 축하 겸 미국 민간기업과의 사업 중개 등의 목적으로 연 1~2회 꼬박꼬박 한국을 방문했다.
이 시기에 밴 플리트는 울산 정유공장 건설을 위해 미국 측의 석유기업 경영진들과 계속 접촉하여 한국 투자를 권유하기도 했으며 그리스 내전 당시 그리스와 맺은 또 다른 각별한 인연을 매개로 해운과 조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그리스계 사업가들(대표적으로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에게도 한국 조선사업에 투자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워낙 한국의 산업기반이 미약하고 외국인 투자 관련 제도 정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별다른 실적은 내지 못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상은 다르다. 1965년 한미 수뇌회담 이후 미국은 한국에 1억 5천만 달러라는 큰 규모의 차관을 지급하기로 합의하였는데 바로 밴플리트의 노력이 여기에 일조했다.[20]

1960년대 중반 한국의 조선소와 그리스의 선박왕 라비노스를 이어 준 가교가 바로 밴플리트다.

이승만 정부의 제주도 국립목장(송당목장) 개발 사업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이 사업은 변변한 산업이 없던 제주도의 개발과 70만명이 넘던 한국군의 급식 개선을 명분으로 했다. 실제로 당시 한국군은 거대한 규모로 팽창했으나 보급 상황은 영 형편 없어서 각종 부정부패가 끊이지 않던 상황이었다. 밴 플리트는 나름 한국을 돕겠다는 취지로 플로리다에서 우량한 품종의 소를 구입하여 제주도로 보내 대량 사육하자는 계획을 자문하고 미국측 파트너로 직접 참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플로리다 현지 소값은 마리당 100달러 정도지만 한국까지의 운송비가 300~400달러씩이나 들어 경제성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당초 계획에 비해 들여온 소는 소수에 불과했다. 구좌읍 송당리에 마련한 목장 부지도 사유지를 임대료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사용하는 바람에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이승만 하야 이후에는 정부 지원이 끊겨 사업 자체가 표류하게 되고 1963년 1월에 목장은 민간에 불하되고 말았다.#1#2 이러한 사례들을 보면 밴 플리트의 사업 수완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승만과의 우정이 지나친 나머지[21] 4.19 혁명이 일어나자 그 의미를 폄하한 흑역사도 있었는데 그는 4.19 혁명 발생 소식을 듣고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였으며, 한국 국민이 자유에 수반되는 책임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5.16 군사정변에 대해서는 극히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며 재빨리 강력한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집권기에도 밴 플리트는 한국과의 교감을 이어가며 꾸준히 방한하고 지원 활동을 이어갔다.

1964년 8월에는 전사한 아들의 유족인 며느리 이본 클라우드 밴 플리트와 친손자 제임스 밴 플리트 3세를 데리고 내한하여 그해 19주년 광복절 기념식에 함께 참석했다. 1965년 7월 19일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사망하자 그의 유해를 미 의장대 특별기 편으로 옮길 수 있게 주선하고 고국의 땅에 묻힐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
파일:James Van Fleet at Syngman Rhee's Funeral.jpg
1965년 7월 21일, 밴 플리트 장군은 이승만의 유해를 실은 미군 특별기에 동승하여 한국으로 와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하였다. 1965년 7월 23일, 김포공항에 기착한 수송기에서 관을 내리는 운구 행렬 뒷편과 이어지는 추모식 석상.[22]

생전 마지막으로 내한한 것은 1975년 9월로, 이 때 국군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내한하여 김종필 총리 및 역대 육군 참모총장 등 각계 인사들과 만찬을 가졌으며 박정희 대통령도 예방했다.

이처럼 그는 6.25 전쟁 이후 별다른 교류가 없던 다른 미군 장성들과 달리 대한민국의 발전을 돕기 위한 헌신적인 활동을 이어갔다.[23] 퇴역 후 6.25 전쟁 이재민을 위한 재단의 기부금 모금활동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24] 특히 1957년에는 미국 최초의 한국 관련 비영리단체인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여 미국과 한국 사이의 우호 증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플로리다 자택의 집무실 이름을 '한국의 방'이라고 짓기도 하고 평소에도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자주 이야기하며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다고 전해진다. 1988 서울 올림픽에도 꼭 참석하고 싶어했으나 당시 96세의 고령으로 주치의가 장거리 여행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만류하여 뜻을 접었다고 한다.[25][26]

1984년 1월에는 부인 헬렌 무어(Helen Hazel Moore, 1892~1984)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84년 11월에 6.25 전쟁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버지니아 히긴스(Virginia Skinner-Higgins Wells, 1919~1986)와 재혼했으나[27] 1년 반만인 1986년 4월에 다시 사별했다.

1992년 3월 19일에는 폴크 시티의 '자유 공원(Freedom Park)'에서 1000명이 넘는 축하객이 참석[28]한 가운데 100세 생일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조지 H. W. 부시 대통령, 콜린 파월 합참의장의 경축사가 대독되었고 대한민국에서도 한광덕 주미한국대사관 국방무관이 방문하여 노태우 대통령의 축전을 전달하였다.

그는 기력이 점점 쇠약해진 끝에 1992년 9월 23일 자고 있던 중에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버지니아주의 포트 마이어에서 장례식을 치른 뒤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창설자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1995년부터 한미관계의 우호 증진에 기여한 사람에게 제임스 A. 밴 플리트 상을 수여하고 있다.[29]

5. 기타

파일:syngman rhee and van fleet are fishing.jpg 파일:Frederick_Brown_Harris,_Syngman_Rhee_and_Gen._James_Van_Fleet.jpg
1953년, 휴전을 앞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제임스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이 낚시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54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국빈 방문 중 독립 운동 시기 다녔던 파운드리 감리 교회에서 미국 상원 원목 프레드릭 해리스 목사와 한국 육군의 아버지 밴 플리트 장군을 만나고 있는 모습.


[1] Van은 독일어 von과 같은 의미의 귀족 성씨에 붙이는 것이고 플리트(Vliet)은 개천, 수로라는 뜻으로 영어의 플리트(fleet)에 해당된다. 영어의 플리트는 주로 함대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영국에서는 네덜란드처럼 수로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가끔 이름부터가 함대를 밴하라는 뜻이라 해군이 아닌 육군 간 거냔 농담도 돈다.[2] 그의 아버지(1833년생)가 59세, 어머니(1855년생)가 37세에 본 아들이다.[3] 이 때문에 그는 평생 플로리다 사람이라고 자부하고 퇴역 후 여생도 플로리다에서 보냈다.[4] 전시 진급으로 1918년에 임시 중령까지 진급한다. 미 육군은 정규군(Regular Army) 계급이 있고 전시에 확장되는 임시군(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National Army) 계급이 별도로 있다.[5] 1949~53년에 미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여 6.25 전쟁 중에 상황 점검을 위해 내한한 바도 있다.[6] 당시 영국에 주둔했던 군단급 지원부대로 전투부대가 아닌 다수의 전투지원(대공포 및 훈련보충부대)과 병참부대가 편제되었다. 최전선의 환경에 익숙했던 밴 플리트 장군은 잠시 동안의 이 생활에서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군단의 많은 기간장병들이 전상으로 인해 최전선 복무의 불가능함을 이해했다.[7] 이 영상은 미군 제14기갑사단이 독일 모스부르크의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해방시킨 뒤 패튼과 밴 플리트가 1945년 5월 1일에 현장을 순시하는 장면이다. 영상 초반에 지도를 보며 설명하는 장군은 제14기갑사단장 앨버트 C. 스미스 소장이고 제3군단장 밴 플리트는 옆모습만 나온다. 영상 후반에 수용소를 걸을 때 패튼 바로 오른편 뒤에서 수행하는 소장 계급 장군이 밴 플리트이다. (철모의 소장 계급장 위에 제3군단 엠블럼이 있음)[8] 밴 플리트 외에 이런 경력을 가진 인물은 다 퇴역한 상태였다. 단순한 칭찬 같지만 마셜 때문에 억울하게 진급에 물 먹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는 말로도 들린다. 밴 플리트 급의 능력과 연배를 갖춘 인력들은 대부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에 사단장 정도는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9] 상술한 것처럼 아이젠하워가 2차 대전 후반기에 마셜한테 밴 플리트는 술을 안 마신다고 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10] 대장 계급으로 복귀해 1949년 10월에 원수로 진급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리스군에서 원수 계급을 받은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다. 내전 종전 후인 1952~55년에는 수상을 역임했다.[11] 패전 이후에도 그리스에 남아 레지스탕스 운동을 조직하다가 독일의 다하우 수용소에 끌려가 고초를 치르기도 했다.[12] 파파고스는 벨기에 왕립사관학교에 유학한 경력도 있기 때문에 외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는 있었다.[13] 그리스 내전 당시 미군고문단의 임무는 그리스 왕국 정부의 군사작전을 돕는 것이었다.[14]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대대적인 군축의 영향으로 군수물자 생산이 줄었다가 6.25 전쟁이 터지면서 부랴부랴 군수물자 생산을 늘렸지만 군수물자 생산은 아직 정상화 궤도에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 막 쏘다간 당장 물자가 바닥날 판이었다. 의외로 6.25 전쟁은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나름 돈에 쪼들리면서 싸운 전쟁으로, 중공군 개입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전쟁비용으로 인해 만약 미 의회가 예산 증액안(Revenue Act of 1951)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1951년에 예산이 고갈될 상황이었다.[15]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나오는 제101공수사단의 사단장으로 1953년 시점에선 중장 계급이었고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 대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군 합참의장을 지냈다.[16] 자서전의 내용으로는 근속정년이 완료됨에 따라 본래 1953년 1월에 전역할 것으로 예정되어 1952년 후반기에 이임할 것으로 예고되었지만 마무리 준비를 위해 2개월 연기된 것이라 한다. 하지만 현재와 과거의 여러가지 사례로 볼 때 미군/한국군의 중장급 이상 장성들은 복합적인 이유로 군인 인사관련법에 규정된 정년복무에 크게 제한받지는 않으며 조건이 맞으면 40년 이상도 근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단적인 예로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 육군 제6군을 지휘했던 월터 크루거 대장은 독일계 이민자 출신 사병 출신 장성으로 미국-스페인 전쟁 때인 1898년을 시작으로 1900년대에 장교로 임관했고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을 모두 해외파병으로 겪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6년 초에 전역했다(48년 근속).[17] 영상 초반은 여의도공항에서 후임 제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장군의 환송을 받으며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 후반은 중간 기착지인 하네다공항에서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장군의 환영을 받는 모습이다.(British Pathé)[18] 불과 4개월 된 7월에 휴전협정이 맺어졌다.[19] 이외에도 윌프레드 맥닐 미국 국방부 차관보, 윌리엄 워렌 콜롬비아 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등이 동행했다.[20] 1.5억 달러는 현재 한국의 경제규모로 보면 푼돈이지만 물가 상승을 고려해도 당시 한국 산업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큰 돈이었다.[21] 부산정치파동 당시 5월 29일 언커크(UNCURK) 위원들이 이승만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이들에게 전날(28일) 따로 만났던 밴 플리트가 계엄을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며 자신의 행위에 동의하였다고 말했다. 단, 나중에 이 소식을 들은 당사자는 이를 부인했으며 오히려 27일 오후 부산에서 이승만과 상의했었을 당시에는 이 행위로 외부 세계와의 신뢰를 잃게 될 수 있으며 자신이 보기엔 계엄이 필요한 상태는 아니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출처는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족청계의 형성과 몰락을 통해 본 해방8년사) 제5부 제2장 부산정치파동과 족청계의 활동 중.[22] 1분 46초에서 밴 플리트를 확인할 수 있다.[23] 물론 그 이면에는 강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집착한 나머지 민주화 지원에는 무심했던 한계가 있긴 했으나 평생 군인으로 살아 왔고 6.25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그의 이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도 간다.[24] 날짜를 보면 1953년 7월 26일로 휴전 바로 전날이었다. 방송을 보면 홍보물에 아이젠하워 대통령, 밥 호프, 대니 케이, 윌리엄 홀든, 데비 레이놀즈, 월터 피전 등이 출연한 것을 알 수 있다.[25] 이때 밴 플리트는 "군인으로서 어떻게 명령을 어기겠는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26] 이는 하와이로 갔다가 한국에 오려던 이승만이 오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박정희가 못 오게 막았다가 정권이 안정된 후 귀국을 허용했지만 너무 고령이라 비행기를 탈 수 없어서 귀국할 수 없었다.[27] 주한미국대사관, 코리아 소사이어티 등에서도 활동하는 등 한국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교분이 있던 사이였다고 한다.[28] 폴크 시티는 인구가 150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지방 소도시였으니 지역 주민들만큼의 외빈들이 온 셈이다.[29] 2020년에는 방탄소년단이 수상했다. 당시 수상 소감으로 "올해 행사는 6.25 전쟁 70주년을 맞아 의미가 남다르다. 우리는 양국이 함께 겪은 고난의 역사와 수많은 남녀의 희생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했는데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을 도왔고 적국인 중국인들이 "제국주의로부터 조선을 지키려 하던 중공군의 희생을 무시했다."는 적반하장식 반응을 보여 한국 내부는 물론 한국 편에 참전했던 국가들로부터 빈축을 샀다.#[30] 사실 당시에 성적 상위권이었던 생도들은 대부분 공병 병과를 선택했기 때문에 전쟁영웅이 될 기회가 없었다. 실제로 당시 졸업 성적 상위 20명 중 중장으로 진급한 사람은 공병을 선택하지 않았던 헨리 오랜드(Henry Aurand) 한 명뿐이며 그 역시 주로 후방에서 근무했다. 참고로 오랜드 중장은 해안포 병과(coast artillery corps)로 임관했다가 병기 병과(ordnance department)로 전군한 인물이다. 참고로 별들의 기수 이전 웨스트포인트에서 수석으로 졸업했던 상급부대장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도 군 경력 시작은 공병 병과였다.[31] 당시 미국 정부는 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하여 북한 지역으로의 진격을 제한하고 있었다.[32] 트루먼 대통령이 해당 계획을 승인하지 않아 핵무기는 결국 투입되지 않았다.[33] 그가 압록강까지 재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방어적인 성향을 취했던 리지웨지와의 성향과는 확실히 대비된다.[34] 출처: 천금성, '황강에서 북악까지'.[35] 초기에 자신의 아들을 후방으로 옮겨 달라는 제의에 얼마 전 외아들이 전사한 밴 플리트는 탐탁지 않아 했으나 아이젠하워가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슬픈 일이 되겠지만 난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들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국민들이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며 정부에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압력을 가하는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밴 플리트가 수긍하며 즉시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36] 반면 당시 한국군 장성들은 너무 젊어 미군 장성들의 아들 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