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8대 황제 비텔리우스 Vitellius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Aulus Vitellius Germanicus |
출생 | 15년 9월 24일 |
로마 제국 로마 | |
사망 | 69년 12월 20일 (향년 54세) |
로마 제국 로마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69년 4월 16일 ~ 69년 12월 20일 (247일) | |
전임자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후임자 | 베스파시아누스 |
부모 | 아버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어머니: 섹스틸리아 |
배우자 | 페트로니아, 갈레리아 푼다나 |
자녀 |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페트로니아누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 비텔리아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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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로마 제국의 제8대 황제. 네로가 실각한 뒤, 시작된 내전 당시 즉위한 황제 중 한 명이다.경쟁자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베스파시아누스와 달리 5대 황제 네로를 많이 존경하고, 그의 정책을 모방한 것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즉위 전까지의 삶
이탈리아 로마 출생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던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베테리스(大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 그의 아내 섹스틸리아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텔리우스의 아버지는 티베리우스의 신임 아래 집정관을 지냈고, 시리아 속주 총독을 역임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모친 섹스틸리아는 명문가 출신으로 마르쿠스 섹스틸리우스의 딸이었다.부친 大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 대해 더 살펴보면 그는 상당히 뛰어난 개인적 역량을 가지고 이를 십분 발휘해 원로원 귀족에 편입된 능력자였다. 그는 어디에서 온 것인지 확실치 않은 이탈리아의 기사계급 출신이었는데, 자신의 재능만으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아우구스투스 일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았다. 그는 이때 단순히 정치, 행정력을 인정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주사위놀이 실력과, 전차 경기 등의 지식과 분석 능력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텔리우스의 부친은 티베리우스 시대부터 클라우디우스 시대까지 세 황제의 조력자로 활동했다. 이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상속자, 조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종손인 게르마니쿠스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최측근이었다. 또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에게도 상당히 총애를 받아 황제의 친구이자 조력자로 인정받고 중용됐다고 한다. 아울러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4대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가 별볼 일 없던 시절부터 가장 친한 친구였고, 제위 계승 서열이 일찌감치 밀려났던 클라우디우스를 여러 부분에서 많이 도와줬다. 그래서 클라우디우스는 즉위 후 비텔리우스의 부친을 신뢰했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역시 황제가 정치적 이유로 자신의 조카인 소 아그리피나와 재혼하려고 할 때 근친혼으로 이야기가 많던 결혼을 통과되게끔 만들었다.
이런 배경 탓에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파 귀족 자제로 태어났고, 권력가 자제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미소년들로 구성된 티베리우스 황제 소년 군단에 선정되는 영예를 얻었고, 카프레이아 별궁에서 황제를 접견하고 황실 남자황족들과 함께 거주하며 교육받는 영광도 얻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 티베리우스는 은둔생활과 원격통치 등으로 여론이 최악인데다 하필 돌고 있던 소문도 죄다 "늙은 황제가 별궁 안에서 음탕한 짓을 한다"는 내용이 많았다. 아울러 비텔리우스는 다른 소년들과 달리 아첨꾼이었고 부도덕한 모습도 보인 탓에, 로마로 돌아온 이후 창남(스핀트리아)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일찍이 19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의 딸인 페트로니아와 결혼해 37년경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페트로니아누스를 낳았다. 일설에 따르면, 비텔리우스 페트로니아누스는 한쪽 눈이 선천적으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두 부부는 얼마 후 이혼했고, 페트로니아누스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렀다. 53년경 페트로니아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페트로니아누스가 전 남편의 집에서 나오는 조건으로 유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비텔리우스는 페트로니아누스를 내보내줬지만, 페트로니아누스는 곧 사망했고 그 유산은 비텔리우스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 때문에 그가 아들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수에토니우스는 페트로니아누스가 아버지를 죽이려 했다가 그런 마음을 먹은 걸 후회해 스스로 독을 삼켜 죽었다고 주장했다.
50년경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가이우스 갈레리우스의 딸 갈레리아 푼다나와 결혼했다. 비텔리우스의 장인 갈레리우스는 티베리우스 시대 당시 16년도부터 23년까지 이집트 장관이기도 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직계혈육 게르마니쿠스가 19년 황제의 허가 없이 이집트를 방문할 당시의 이집트 장관이었고, 세네카가 자신의 아내, 아이들과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할 당시 이를 도운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로마 귀환 중 난파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부모와 처가 모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 아래 잘나간 만큼, 비텔리우스 역시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시대까지 승승장구했다. 특히, 비텔리우스의 연이은 성공에 크게 기여한 것은 소년 시절부터 카프레이아 별궁으로 건너가서, 교육도 받고 인맥도 쌓은 것과 열렬한 아첨꾼 다운 아부 기술이었다. 그래서 그는 네로 시대에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냈는데, 비텔리우스는 아부꾼임에도 네로를 진짜 존경하고 사랑한 팬이었다. 따라서 네로는 자신을 존경하고 모든 행사에 앞장서 따라다니면서 자신의 공연에 진심으로 빠져든 그를 신뢰했다. 그러다가 네로가 몰락했는데, 비텔리우스는 별 탈 없이 잘 지내다가 갈바에게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는 전임자와 달리 호탕하고 플레이보이 기질이 강한데다 엄청난 부자라서 얼마 안 가 부하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었다고 한다.
2.2. 황제 즉위와 몰락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저지 게르마니아) 속주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비텔리우스는 엄격한 규율을 유연하게 다루고 성격이 워낙 좋은 덕에 인망을 얻었는데, 69년 초 갈바에게 불만을 품은 라인 강 군단병들[1]에 의해 쾰른에서 황제로 추대되는 대박이 터졌다. 그리고 천운이 따랐는지 몰라도 갈리아, 브리타니아, 라이티아 주둔 군단들에게도 지지선언을 받으면서 반 갈바 운동의 새로운 황제로 세력을 모았다.그러나 기대와 달리 비텔리우스는 황제감이 아니었고, 네로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했을 뿐 네로보다도 훨씬 못한 위인이었다.
부하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니나노하며 느긋하게 뒤따르면서 열매만 따먹는 전형적인 윗분의 행태를 보이며, "갈바 타도"를 외쳤다. 하지만 로마 여행길 동안 그는 환락과 축제, 술파티에 몸을 맡겼고, 수행원들과 병사들 역시 비텔리우스와 함께 무질서함 속에서 진군했다. 여기에 더해 그는 갈리아에 남아 있다가 부하 장군 발렌스와 카이키나가 크레모나 전투에서 오토를 운좋게 이긴 직후에야 이동했다. 도중에 루그두눔에서 아내와 자녀들과 대면한 뒤 8살된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에게 지휘관이 착용하는 망토를 씌우고 게르마니쿠스 칭호를 내리며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비텔리우스는 6월 말경에야 로마에 수행원들과 함께 개선하며 입성했는데, 사실 오토가 자살한 다음날 원로원의 추대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상태라서 많이 늦게 귀환했다. 그러나 내전의 상처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더 벌리고 소금을 뿌리는 행태를 보인다. 오토를 따랐던 도나우 군단[2] 병사들을 용서하기는커녕, 도나우 군단의 백인대장들을 처형하고 병사들을 크레모나 시의 원형경기장 공사에 강제 투입시키는 어이없는 짓을 했다.[3] 심지어 자신 휘하 군단이 도나우 군단을 이긴 지역을 시찰하고 했던 말이 더 가관이었다.
"적의 피는 냄새도 향기롭구나."
비텔리우스, 같은 로마군과의 전투 현장을 둘러보며
비텔리우스, 같은 로마군과의 전투 현장을 둘러보며
당연하지만 이 적들은 도나우 군단. 문제는 이들이 비텔리우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곤 하나 이 자들도 같은 로마인이자 로마군이었기에 상당히 문제가 큰 발언이었다. 따라서 내전 수습에는 평상시보다 더 고난이도의 정치력을 발휘해도 모자랄 판에 이 말이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 당연히 비텔리우스와 크레모나 시민들에 대한 도나우 군단의 분노는 깊어졌다.
비텔리우스는 수도 로마에 돌아와서 오토의 형 살비우스 티티아누스를 사면시켜 주고, 오토 측 인사들에게도 보복하지 않았다는 점을 빼곤 계속해서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로마에 와서 근위대를 해고하고 자신의 라인 강 군단 병사들로 근위대를 새로 꾸렸다. 하지만 이는 본국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근위대 전체를 반발하게 만들어 적으로 돌리는 행동이었고, 뒷수습도 말끔하지 못해 해고된 근위대 병사들과 그 가족들을 적으로 돌리고 만다.[4]
이후 비텔리우스는 대놓고 네로를 찬양하고 그를 존경한다고 말하면서, 네로의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책을 계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건 “로마의 돼지”라고 불리는 별명답게 자신의 유일한 취미인 폭식에 탐닉[5]하며 국정을 돌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본래부터 느긋하고 게으른데다 성격 역시 좋은 집안 출신답지 않게 방종한 사람인터라, 로마 귀환 후 한 일이라곤 각 귀족 가문들의 희귀하고 맛난 레시피로 만든 고급 요리 탐닉에만 치중했다. 또 그는 자신의 어머니 섹스틸리아에게 불효를 저지르고[6], 내전 당시부터 위의 향기 발언처럼 잔인하고 생각없는 말을 대놓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비텔리우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해 증오심에 불타던 도나우 군단이 시리아 속주 총독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무키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면서 비텔리우스는 단명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무키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황제에 오르는 대신 유대반란 진압군의 총사령관인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비텔리우스 타도를 선언하면서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다. 무키아누스는 로마로 진격했고, 이 소식을 들은 도나우 군단이 군단장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프리무스의 지휘하에 무키아누스에 앞서서 이탈리아로 쳐들어가 베드리아쿰에서 비텔리우스가 보낸 진압군과 다시 전투를 벌였다. 이번에는 도나우 군단이 승리했고 비텔리우스편의 총사령관이었던 카이키나마저 도나우 군단에 사로잡히면서 비텔리우스의 운명은 결정되고 말았다.[7]
2.3. 최후
비텔리우스는 진압군이 패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고는 의욕을 잃고 그저 먹는 일만 하다가 12월 16일 포로 로마노에서 퇴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황궁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 날 원로원이 비텔리우스의 퇴위 선언을 받아들여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궁지에 몰린 비텔리우스의 패잔병들이 베스파시아누스의 형인 로마 시 장관 사비누스를 살해하고 카피톨리노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을 불태우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이것을 막지도 않은 채 무기력하게 먹는 일만 하며 시간을 때웠다. 오히려 전직 아프리카 총독이자 원로원 의원이었던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가 혼자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도나우 군단에 맞서 최후까지 분전하지만 그 역시 중과부적으로 패하면서 항복하고 만다.69년 12월 20일, 비텔리우스는 아내 소유의 캄파니아 내 고급 저택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운 뒤 더럽고 낡아빠진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는 어리석은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문지기로 위장해 탈출하려고 한 계획이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로마 탈출 대신 황궁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황궁에 돌아왔을 때, 이미 노예와 관료들이 모두 탈출하고 도망간 탓에 황궁 안은 텅 빈 상태였다. 이렇게 텅빈 황궁 안에 홀로 남은 비텔리우스는 매수를 위한 목적인지 몰라도 돈을 챙겨 허리띠 안에 넣고 다시 탈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로마를 점령한 베스파시아누스의 도나우 군단 병사들이 황궁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실패한다. 이에 비텔리우스는 병사들을 피하여 황궁 안의 숙소로 쓰이던 방 한 곳에 숨었다. 이때 그는 침대 매트리스와 집기로 자신이 숨은 방을 막고 걸어 잠그며 필사의 몸부림을 쳤는데, 그 행동은 무척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시내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비텔리우스(Georges Rochegrosse, 1883)
로마 점령 전부터 복수심에 불탄 병사들은 황궁을 샅샅이 수색했고 비텔리우스는 곧 발견되었다. 황제는 어떤 사람보다 비참하게 병사들에게 끌려나왔다. 어느 정도로 비참했나면 체포 당시 그는 병사들에게 짐승 다루듯 끌려 나왔고, 입은 옷은 거의 찢겨져 반절 이상 벗겨진 상태였다. 이후 반나체로 로마 시내로 끌려간 비텔리우스는 분노한 시민들과 도나우 군단 병사들에게 포로 로마노에서 갖은 모욕과 고문을 당한 뒤 그 자리에서 참수형을 선고받아 목이 잘린다. 사후 시체는 티베르 강에 던져졌으며 머리는 장대에 꽂혀 퍼레이드 행렬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비텔리우스의 8살된 아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 게르마니쿠스와 동생 역시 같은 날 살해되었다.[8]
비텔리우스의 아내 갈레리아 푼다나와 딸 비텔리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졌다. 비텔리아는 아버지의 부관이자 벨가이 속주 총독을 맡았던 데키무스 발레리우스 아시아티쿠스와 결혼했다.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집정관으로 지명된 발레리우스가 임기를 수행하기 직전에 사망한 뒤, 비텔리아는 베스파시아누스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남자와 재혼하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제공한 집에서 유복하게 살았다. 프랑스의 계보학자이자 역사가 크리스티안 세티파니 등 일부 역사가들은 비텔리아의 재혼 상대는 88년 보결 집정관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모계 조상인[9] 리보 루필리우스 프루기라고 추정한다.
3. 성격과 사생활
비텔리우스는 식충이로 널리 알려졌고, 탐욕과 부도덕함, 그리고 양성애적 사생활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데 이것은 악의적인 소문이 아니라 진짜였기 때문에, 당대 사람들은 당연히 그를 최악으로 생각했다.먼저 그는 한 연회에서 생선 2천마리, 새 7천 마리를 요리 재료로 사용할 정도로 사치를 부렸고, 식탐과 식욕이 엄청났다. 그래서 몇 달동안 그가 연회 비용으로 소비한 금액만 무려 9억 세스테르티우스였다!! 이는 대략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로마 제국 일년 세입이 평균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 티베리우스가 남긴 말도 안 되는 유증금이 2억 7천만 세스테르티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가 즉위 후 유언 집행과 '빵과 서커스', 부모와 죽은 두 형을 위한 추모식 등으로 8개월간 써먹은 금액이 약 2억 세스테르티우스인 것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미친 소비였는데, 더 대단한(?) 사실은 로마에 있는 동안 본인과 측근들의 유흥만을 위해 쓴 음식값과 파티금액이 이 정도였다.[10] 즉, 빵과 서커스라는 인기영합을 위해 쓴 돈도 아닌데, 나라 일년치 세입 이상을 먹고 즐기는데 써댔다는 이야기이며, 비텔리우스의 재위기간이 11개월이고, 로마에 머문 기간이 8개월이 살짝 넘는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칼리굴라가 8개여월간 쓴 유증금보다 더 썼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런 소비와 식탐 외에도 비텔리우스는 자신을 말리는 어머니를 때리는 패륜도 저질렀다고 하며, 젊은 시절부터 배우와 전차기수를 무척 좋아하고, 그들에게 빠져 여럿을 후원했다. 또 로마에서 유명하다는 해방노예 출신의 남창 아시아티쿠스와 동성애 행각을 가졌고, 배우나 다른 이들과 부적절한 관계도 여럿 맺었다. 아버지 대 비텔리우스가 뛰어난 정치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문자 그대로의 호부견자이다.
4. 평가
69년에 단명한 세 황제 중 제일 무능한 인간으로 공인될 정도로 당대부터 평가가 최악이다. 아니,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중 이 사람과 동급 소리를 듣는 최악의 황제는 엘라가발루스 밖에 없다는 평이 적절할 정도로 최악이다. 즉, 로마 원로원에게 "네로+도미티아누스를 합친 것 같은 황제"라고 비난받은 콤모두스보다 최악으로 평가받는 엘라가발루스와 동급 수준의 암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사람의 재위기간이 네로, 콤모두스, 엘라가발루스보다 짧고, 후대의 카라칼라 같이 제 기분에 따라 정적과 죄없는 사람들을 마구잡이 인간사냥을 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가 단기간 동안 먹고 노는데 쓴 돈은 최악이었다. 그는 즉위 직후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의 유언장, 원로원 결정으로 예정된 대규모 공공건축물 건설을 재개하고, 티베리우스가 중지시킨 건물을 개보수함과 동시에, 어머니, 두 형, 고모부 정식 장례 수행, 즉위 후 민심 확보 차원에서 개최한 빵과 서커스 제공, 국가 기념일 축제로 8개월 동안 2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쓴 칼리굴라와 달리, 문자 그대로 놀고 먹는 비용으로 9억 세스테르티우스를 소비하고, 네로 명예회복 비용으로 추가 비용을 더 지출했다.거기다가 유대 전쟁 조기종식이 자신의 황제 자리를 굳히고 제국 전체의 혼란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필수임을 잘 알고 전쟁수행과 파르티아 방면 방어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의 병력만 동원한 베스파시아누스에 비해, 황제 자리를 먹겠다고 라인 강 전선의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하다시피 한 데다가 무리한 징병까지 감행해 게르만 부족들의 반감을 사 바타비아 반란의 원인을 스스로 제공하기까지 했다. 이후 로마에 입성한 베스파시아누스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생깨나 해야 했으니 비텔리우스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뒷일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조국방위를 내팽개친 황제라는 평가를 들어도 싸다.
따라서 황제들을 까는 걸로 유명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공정성을 유지하려 했던 타키투스조차 비텔리우스는 도저히 업적을 찾을 수가 없었는지, '무가치한 인간' 이라고 그를 표현했다. 이는 타키투스와 동시대 로마인들도 비슷해, 그들은 비텔리우스라는 사내를 가리켜 '자기 실력이 아니라,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 있던 덕분에 운 좋게 오르지 않아야 할 자리까지 오른 인간' 이라고 신랄하게 그를 비난했다. 오토가 뭘 할 시간도 갖지 못하고 죽었고, 갈바 또한 황제로써는 문제가 많았으나 비텔리우스 수준은 절대 아니었고 또 황제 이전에는 평가가 굉장히 좋았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네로의 사치로 인해 제국은 재정과 민생이 거의 파탄지경인데 해결은 커녕 여기에 돈을 펑펑 써대기까지 했으니, 네로가 박살낸 국고 적자를 더 키워, 다음 황제에게는 빚 폭탄을 떠넘긴 꼴이 됐다.
이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되었을때, "짠돌이", "인색한 구두쇠" 같은 욕을 먹어감에도 속주세를 대폭 인상하고, 이탈리아와 로마 공중화장실에 오줌세 같은 잡다한 세금까지 신설했다. 다만 그래도 이 시기에도 돈을 대책없이 찍으면 안된다는 상식은 있었는지 베스파시아누스는 세금을 늘릴지언정 화폐 평가절하는 하지 않았다.
그의 비극은 격에 맞지 않는 황제의 자리에 욕심을 부린 탓일지도 모른다. 황제 자리에 관심이 있어도 오를 생각도 없다가, 이곳 저곳에서 황제를 자처하는 상황에서 옹립된 모양새였다고 해도, 그가 황제 자리에 욕심을 내면서 비극이 시작됐으니 남 탓으로 돌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죽기 직전, 자신을 조롱하며 모욕하는 군단 병사들을 향해 "내가 그래도 한때는 너희의 황제였다."라고 일갈하면서, 반성조차 하지 않고 끝까지 억울함만 호소했다(...). 때문에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비텔리우스가 생전에 보여준 그나마 황제다웠던 유일한 모습이라고 조롱한다[11].
어쨌든 그의 죽음으로 로마의 내전은 일단락을 짓고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황제의 자리가 넘어간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참마대성 데몬베인에 등장하는 안티 크로스 중 한 명인 베스파시아누스의 소환수 중 하나로 등장한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몸통이 시커메지면서 거기에서 얼굴이 나타나는 형식. 갈바가 근접전 용도로, 오토가 원거리전 용도로 사용된 것이 작중에서 확인된 것과 달리 이 비텔리우스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다. 일단 이 얼굴에서 불을 뿜을 수 있다. 다만 베스파시아누스 자신의 부활이나, 사이크라노쉬의 결계 마술을 사용할 때 필요한 것은 확실.재미있는 것은 그 소환수의 나머지 둘의 이름이 전임 황제들인 갈바와 오토라는 것이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산해진미를 논하는 문단에서 등장한다. 로마인들의 식습관을 논하며 비텔리우스는 매우 사치하여 무려 공작의 혀를 먹었다는 이야기 나온다.
[1] 라팍스 제21군단, 알라우다이 제5군단[2] 아디우트릭스 제1군단, 게미나 제13군단[3] 대대장급 이상이라면 애초에 신분이 다른 사람이 많기 때문에 죽여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백인대장은 거의 대다수가 고참병으로 밑에서 올라간 자들이었다. 또한 전장에서 지휘를 하면서 같은 대열에 서서 군단병들과 같은 사선에서 목숨을 내놓아야 했기 때문에 동료들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군단병을 노역에 투입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국의 유지를 위한 가도 건설 등 사회간접자본 구축에만 투입할 수 있었고, 형식적으로는 나라를 위해 군단 장병들이 전쟁이나 훈련이 없고 휴식도 충분히 취한 뒤 다른 방식으로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어서 노예처럼 작업을 강요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특히 원형경기장은 기본적으로 검투사들이 생사무관 결투를 하거나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였기 때문에 사회간접자본으로 별 가치가 없다는 건 당대에도 상식이었고, 돈을 들여서 짓거나 개인이 기부하면 노예를 동원했다. 그런데 이걸 군단병들에게 지으라고 강요했다는 건 한 마디로 이들을 노예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크레모나 주민들의 구타와 모욕을 막아야 할 비텔리우스 휘하 군단병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옆에서 놀고 있었으니 그들의 분노는 더 커졌다. 당연히 이때 공사를 강요당한 군단병들은 훗날 크레모나 주민들은 물론이고, 비텔리우스파 포로들까지 마구 학살하는 것으로 복수를 한다.[4] 이들은 베스파시아누스의 판노니아 군단에 가담하여 로마 시가전때 자신들이 머물렀던 근위대 주둔지를 공격하여 자신들을 대체한 라인 강 군단 병사들을 살육하였다.[5] 로마 귀족들이 배가 부르면 음식을 강제로 토하고 다시 먹는다는 유래의 원조가 다름아닌 이 사람이다.[6] 폭식만 일삼으며 국정을 돌보지 않는 걸 보다못한 어머니가 제발 국정 좀 돌보라고 간언을 했지만, 오히려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7] 전술한대로 크레모나 주민들과 라인 강 군단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던 도나우 군단은 무려 공성전을 벌여 크레모나를 함락시키고 도망친 라인 강 군단 병사들과 크레모나의 같은 로마 시민들을 약탈하고 학살하였다. 이 잔인함에 로마는 큰 충격을 받았고 전의를 상실한 비텔리우스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려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더 어이없는 것은 로마 시민들은 이 학살의 충격을 오히려 유흥으로 삼았는데 로마 시가전 당시 시민들은 라인 강 군단병과 도나우 강 군단병들 간의 전투를 마치 검투사 시합처럼 취급하고 창녀들을 곁에 끼고 술을 마시며 결투에서 패배한 병사들 끌어내 죽이도록 강요하는 추태를 보였다.[8] 동생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계속 저항했으나 결국 무키아누스가 보낸 베스파시아누스 파 군대에 패하여 붙잡혔다. 그래도 몸값을 협상하여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무키아누스의 지시로 참수되었다고 한다(...).[9]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친할머니인 루필리아 파우스티나의 아버지였다.[10] 비텔리우스가 제위에 오른 뒤 이탈리아까지 오는 몇 달간 비슷하게 연회로 써먹은 돈까지 합친다면 그 금액은 갑절이 된다는 이야기도 된다.[11] 출처: 김경현 차전환 역 「타키투스의 역사」, 2011년,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