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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위르겐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 |
출생 | 1929년 6월 18일 ([age(1929-06-18)]세) |
바이마르 공화국 뒤셀도르프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철학자, 교수 |
학파 | 대륙철학, 비판 이론, 신실용주의 |
학력 | 괴팅겐 대학교 취리히 대학교 본 대학교 (철학 / 박사) (1954년) 마르부르크 대학교 (하빌리타치온) (1961년) |
경력 | 마르부르크 대학교 교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교수 · 명예교수[1] 막스 플랑크 과학기술세계 생활조건 연구소 |
배우자 | 우테 베셀후프트(1930년생, 1955년 결혼 ~ 현재) |
자녀 | 장남 틸만 하버마스(1956년 5월 17일생) 장녀 레베카 하버마스(1959년 7월 3일 ~ 2023년 12월 21일) 차녀 유디트 하버마스(1967년생)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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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판 이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프랑크푸르트학파 2세대의 대표 주자로,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공론장(Öffentlichkeit, Public sphere)과 의사소통의 합리성(Kommunikative Rationalität, Communicative rationality)의 사상가로 유명하다.2. 생애
1929년 6월 18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하버마스의 이론적 활동영역은 실로 다양하고 따라서 영향받은 지적 조류도 거대하다. 우선 선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인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문제의식을 상당 부분 계승했으며, 그 과정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마르크스와 베버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했다.후기 저서에 이르러서는 영미권의 학설을 폭넓게 차용했으며, 그 내용을 보면 미드와 파슨스의 사회학, 비트겐슈타인, 오스틴과 설의 언어철학, 포퍼의 인식론, 피아제와 콜버그의 인지발달심리학 등 부지기수다.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법철학과 정치철학을 전개할 때는 롤스의 정의론과 하트와 드워킨 등의 영미 법철학을 비중 있게 다루기도 하고, 롤스의 『정치적 자유주의』가 출간되고 나서는 미국 학술지에서 논쟁을 주고받기도 하는 등 활동 영역 또한 넓다.
관심 분야와 활동 영역이 넓다 보니 서구 지성사의 획을 그은 논쟁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0년대 실증주의 논쟁, 1970년대 전후 철학적 해석학 논쟁,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근대성(modernity) 논쟁, 1990년대 초반 존 롤스와의 정치적 자유주의 논쟁 등 강산이 바뀔 때마다 굵직한 논쟁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명료히 하고 상대편의 비판을 생산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고 평가된다. 덧붙여 니클라스 루만과의 체계이론 논쟁, 독일 역사가 논쟁 등에도 참가했다.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와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는 철학에서 전통적인 이성 개념이 자연과 타자에 대해 폭력과 착취를 가하는 힘일 뿐이라고 생각하여 극히 부정적으로 보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이성이 단순히 그러한 도구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성이 가진 긍정적인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였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주제로 하여 비판적 사회이론, 담론윤리학, 법철학, 민주주의 이론과 정치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나갔다.
하버마스의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대한 상호이해는 해석학과도 연관되는데 스승인 가다머와의 논쟁에서 많은 부분을 수용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 출신이었고 그 대학에서 일하길 원했지만 스승격인 아도르노가 하버마스를 학교에 받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가다머는 하버마스 같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이 대학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그를 데려와 교수로 임용하고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이후 하버마스는 가다머와 학문적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 가다머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다만 이는 학문적 대립에 의한 건설적인 논쟁일 뿐으로 하버마스는 늘 가다머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하버마스는 자신의 70세 기념논문집에서 힘든 시기에 도움을 준 가다머에게 감사함을 표하기도 했다.
현대 철학과 사회학 및 커뮤니케이션 이론 등의 최고 거장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해당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저서는 읽어볼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대부분의 저작들이 워낙 다양한 이론과 학설들을 치밀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문체 또한 대학 보고서 쓰듯이 딱딱하고 건조하다 보니 정독하는 데에는 상당한 인내심과 노력이 요구된다. 실제로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역자 서문에 보면, "하버마스는 마치 성실한 대학원생처럼 글을 쓴다."고 나와 있는데, 칭찬인지 욕인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주요 저서로는 『공론장의 구조변동』, 『의사소통행위이론』, 『사실성과 타당성』 등이 있다. 의사소통행위이론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이곳을 참고 바람. 하버마스의 전반적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네이버캐스트 참고.
3. 사상
하버마스는 막스 베버가 도구목적성으로 파악했던 합리성 개념을 2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생존에 필요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기술적 합리성'이고, 다른 하나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서 우리의 의견을 개선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2] 기술적 합리성은 근대 경제와 정치에 있어서 '체계'를 발달시켰고 여기서 과학기술적 지배의 확대라는 형태로 진보가 이루어져 왔다.[3] 그러나 이러한 합리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근대에 이르러, '생활세계'에 있어서도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발달하여 물음을 주제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어 당사자들 간의 이성적 합의를 추구하게 되었다. 즉, 우리가 개방적이면서 사안에 적합한 토론을 토대로 자유로운 합의에 도달한다면 그것은 규범적으로도 우리 사회의 올바른 답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규범적 문제에 대해 상호간의 합의를 이끌어낼 보편타당한 답[4]이 존재하며 우리는 원칙적으로 이성의 논변적 대화를 통해 그러한 답에 도달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하버마스의 이러한 주장은 상대주의와 독단주의, 둘 다를 겨냥한 것이다. 그는 생활세계에 있어서, 상호 모순되는 상대주의적 형이상학적 답변들을 배제하며, 그렇다고 자유롭고 이성적인 주체가 혼자서 독단적인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도 보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는 우리의 관점이 가능한 여러 관점 중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기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즉, 논의의 주제에 대한 상이한 논변들의 장단점을 서로 비교하기 위해서라도 이론적으로나 규범적으로나 다원주의적 이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많은 다른 사람들이 꼭 필요한 것이다.(간주관적 특징) 또한 다양한 시점에 우리가 옳다고 받아들인 특정 견해들은 나중에 가서 틀린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특정 주장이나 입장이 아니라 '절차 그 자체'가 바로 최종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알아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절차적 특징)
따라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많은 주관들 사이에서 서로 공통된 합의를 그 답으로 인정하는 상호주관적[5] 특징과 '절차 그 자체'가 바로 최종 근거가 되는 절차적 특징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런 간주관적이고 절차적인 토론에서 우리가 논리적 주장을 펼치는 것이 가능해지려면, 몇 가지 필수적인 기본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진지한 논의의 참여자로서 우리는 논변들을 이해하고 "보다 나은 논변의 힘"에 기꺼이 승복할 줄 알아야만 한다. 나아가 우리는 서로를 이성적이지만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해야 한다. 즉 논변을 듣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이지만 그럼에도 오류를 범할 수 있기에 상대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는 존재인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상호 인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답변에 제한을 가해야 되며, 논변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보편 타당한 논리여야 한다.
결국 하버마스에게서 진리란, "논변의 이해와 합리적인 토론을 할 수 있는 이성적 사람들 사이의 상호 주관적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합의에 의해 이끌어진 '상호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답은 결코 '절대적 진리'라고 볼 수 없다는 점에서, 하버마스를 계몽[6]의 전승자라고 부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상호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벌이는 충분한 논변을 이해하는 데에 이성이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 논변과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게끔 하는 (토론의) 절차 그 자체에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그는 계몽의 충실한 전승자라 할 수 있다.[7]
3.1. 공론장의 구조변동
1961년에 하버마스가 교수취임논문(하빌리타치온)으로 저술한 책. 2001년 나남출판서에서 완역했다. 독일은 박사학위를 따도 바로 교수가 되는 게 아니라 교수취임논문이라는 박사논문 급 논문을 또 써야 자격이 주어지는데, 이 때의 논문이다. 공론장(public sphere)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책으로 현대의 고전 취급을 받는다. 이 책의 요지를 간단하게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7~18세기 경 서유럽(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부르주아 공론장이 발달했는데, 이 공론장은 어느 정도 자본을 갖춰 여유가 있고 문화와 예술을 논하면서 정치 시사문제에 관해 적극적으로 토론하던 부르주아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은 당시 왕이나 의회의 시책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것은 당시 신문의 발달에 힘입어 여론(public opinion)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서구 근대가 가진 비판적 합리성의 잠재력을 도출하고자 하며, 이것이 근대 민주주의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19세기 후반 이후 공론장은 '구조변동'하는데,하버마스는 그 원인으로 국가의 사적 영역으로의 개입 확대, 대중매체와 대중문화의 확산, 의회와 정당 정치의 변질을 들고 있다. 일련의 변동과정을 겪으면서 공론장, 특히 정치적 공론장은 그 본연의 비판적 합리성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다는 게 하버마스의 진단이다. 하버마스는 서구 근대를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과 달리, 양면성이 있다고 본다. 즉 서구 근대의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을 동시에 보고자 하며, 부정적인 점을 최소화하고 긍정적인 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래서 『공론장의 구조변동』의 핵심 문제의식도 "그래서 공론장의 몰락"이 아니라 "그래서 공론장의 비판적 합리성의 잠재력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을까?"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초기 저작인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그러한 비전이 체계적으로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공론장 등 서구 근대의 합리성에 대한 체계적인 비전은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사실성과 타당성』 등 후기 저서에서 만나볼 수 있다.
3.2. 의사소통행위이론
『의사소통행위이론』은 분량도 방대할 뿐더러 하버마스가 참고하고 있는 이론과 학자의 개수도 크고 아름다워서 이론을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핵심적인 얼개만 잡아본다면, 이 책은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를 통한 비판이론의 쇄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원래 막스 베버와 그에 영향을 받은 프랑크푸르트학파 1세대들은 근대화 과정을 '목적합리성의 확대' 또는 '도구적 합리성의 확대'로 파악했다. 목적합리성이나 도구적 합리성은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공통적으로 주관과 대상을 설정하고 주관이 대상에 대해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을 합리성의 내용으로 본다. 베버가 근대 사회의 특징으로 관료제의 확대를 든 것도 이러한 합리성 개념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런데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러한 합리성 개념 및 근대화 이론은 근대성을 마냥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는 이론적 귀결을 가져온다. 하버마스가 '의식철학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르는 주관과 대상의 구도에서 주관의 행위는 단 두 가지, 인식과 조작에만 제한된다. 주관은 자기 자신을 제외하면 모두 대상으로 취급해 버리므로 다른 인간을 대할 때조차도 그 사람을 '인식'하고 '조작 및 통제'하는 구도만이 그려진다. 하버마스는 이런 합리성 개념이 너무 협소하다고 비판하면서, 단순히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보고 인식 및 조작하는 것과는 달리 주관과 주관이 상호 대등하게 의사소통하는 합리성 개념이 있음을 역설한다. 이것이 바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사회가 근대화된다는 것은 단지 목적합리성이나 도구적 합리성이 확대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그와 동시에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확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사회의 근대화=효율성 ↑+합리적 의사소통 ↑인데 베버 등은 효율성만 논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근대화를 온전히 파악하려면 합리적 의사소통의 확대 과정을 사회학적으로 중요한 범주로 간주해야 한다는 '언어적 전회'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2단계 사회이론(2중사회론)으로 이어진다. 하버마스에게 근대의 합리화 과정은 투 트랙으로 진행된다. 체계(system)의 차원에서는 목적합리성이 확대된다. 생활세계(lifeworld)의 차원에서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확대된다. 체계의 영역은 국가의 행정체계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계로 나누어지며, 각각 권력과 화폐라는 매체로 운행된다. 생활세계의 영역은 문화, 사회, 인격의 세 구성요소로 이루어지며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가질 수 있는 의사소통행위로 재생산된다. 특히 생활세계에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확대되는 것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합리화'라고 부르는데,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종교나 형이상학에 의존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따라야 했던 규범과 지식들에 대해 점점 의사소통행위에 의한 합리적 정당화를 요구하는 정도가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진전되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체계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체계가 처음 등장할 때는 합리화된 생활세계의 제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체계는 복잡해지고 생활세계에서 자립화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데, 체계가 복잡해지고 생활세계가 합리화되는 투 트랙의 근대화가 균형 있게 이루어졌다면 사회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선진국에서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지 않는가? 하버마스는 합리성의 투 트랙 중에서 '생활세계'가 합리화되는 정도와 '체계'가 복잡해지는 정도가 서로 불균형하여 체계의 효율성에 근거한 명령이 생활세계의 고유 영역을 침범함으로써 '생활세계의 식민지화'가 발생한다고 결론내린다. 체계의 논리가 자신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 생활세계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기 때문에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므로, 체계의 논리가 자기 영역 안에만 머물도록 체계를 통제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것을 통제해야 하는지는 후속작 『사실성과 타당성』에서 자세히 다뤄지게 된다.
3.3. 사실성과 타당성
1992년에 나온 『사실성과 타당성』은 주로 법철학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의사소통행위이론』에서 분석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 문제를 해결할 비전을 나름대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비전이란 바로 법에서 출발한다. 원래 체계는 합리화된 생활세계의 제도들에 의존한다. 그런데 법치주의 국가에서 제도는 법제화되어 시행된다. 예를 들어 시장경제는 민법이나 상법, 공정거래법 등에 따라 운행되고, 행정영역 역시 행정법 등의 법률에 의거해 행정업무가 처리된다. 또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은 국민의 여론을 모은 의회에서 의결의 형태를 거쳐 제정된다. 하버마스는 이 대목에서 자꾸 생활세계로 침투하려는 체계를 통제하기 위한 유일하고도 효과적인 수단은 법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체계영역이 법에 의해 운행되고 규제되고 있으며, 그 법은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여 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하버마스는 국민들의 여론을 수렴하는 역할로 공론장과 시민사회를 강조한다. 비판적 합리성을 갖고 있는 공론장과 활기찬 시민사회가 다양한 여론을 표출시키고 결집시키면 제도화된 정치기구인 의회 등에서 이를 실정법으로 제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을 '민주적 절차'라고 할 수 있으며, 하버마스가 말하는 절차주의적 법 패러다임도 이와 관련있는 것이다. 공론장과 시민사회를 강조한다고 해서 의회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데, 결국 실효성 있는 실정법으로 제정하는 역할은 의회가 담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한 없이 자유롭게 다양한 목소리를 수용하고 표출시키는 장소는 의회보다는 공론장과 시민사회일 것이다. 따라서 '공론장과 시민사회' 대 '의회'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이다. 공론장과 시민사회에서 여론을 표출시키는 과정이나 의회에서 실정법을 제정하는 과정은 모두 비판에 열려 있고 자유롭고 합리적인 토론이 가능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에, 하버마스의 민주주의 이론은 숙의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로 이어진다.
3.4.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
마르크스적 사회비판을 가했던 프랑크푸르트 학파 1세대와는 다르게,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이론』 등에서 복지국가가 심화된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계급운동이 더이상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지 않으며, 생태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반핵운동 등 신(新)사회운동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하버마스는 이러한 신 사회운동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절대적인 것으로 강요'하는 폭력적인 행태를 드러낼 때에, 이에 대해서 좌파 파시즘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경계했으므로, 어느 한 쪽에 편향되었다기보다는 자기만의 객관적인 기준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옳다.어쨌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를 노동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것으로 여겼고, 그로 인해 과연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은 해방적 사상가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주의적 해방 사상가인가" 참조) 사실상 계급투쟁은 의미를 잃었고, 프롤레타리아의 절대적 궁핍화 가설은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어느 때보다 풍족하다는 비판을 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전통 마르크스주의와는 결별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비단 하버마스에 국한되지 않고 상당수의 비평가들의 견해이고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도 절대적 궁핍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이 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하버마스의 경우는 워낙 다양한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부분. 사실 가깝기는 베버와 다렌도르프로 이어지는 해석과 갈등론 부분과 훨씬 가까운 면이 있다.
이러한 의문에 하버마스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고유의 효율성 논리로 돌아가는 체계영역으로, 국가사회주의가 이를 함부로 대체하려고 해서는 혹독한 실패를 경험할 수밖에 없음을 소련 붕괴 등 현실사회주의의 패배가 입증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달리 하버마스는 "일단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고 나면 민주화를 더욱 진전하는 것뿐,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전복하려는 시도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일축한다. 이처럼 사실상 구미에서만큼은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일단 인정하고 보기 때문에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슬라보예 지젝 같은 소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하버마스의 이론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4. 한국에 대해
한상진 교수와의 2013년 인터뷰에서, 하버마스는 한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전후에 경제성장과 규범적 발전이 같이 이뤄진 유일한 나라입니다.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가치를 다른 어느 것과도 거래할 수 없다는 규범의식이 널리 정착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에 관해 내가 틀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요한 결실입니다. 일본도 비슷하지만 자기확신에 찬 우익이 강합니다. 반대로 한국은 지식정보 혁명과 함께 새로운 미디어가 이끄는 역동적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있어요. 역사에 대한 자기성찰이 가장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이 만일 북한에 있다면 어떻게든 북한을 정당화하려고 하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요. 한국은 자기를 신뢰하는 나라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모습입니다.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려는 힘이 여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반목과 대립의 심층심리를 넘는 새로운 사유의 실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용기 있게 20세기 정치를 청산하는 새로운 선택을 제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는 이런 미래지향적 요구가 강합니다. 더하여 유교의 공공성은 국가의 경계 안에 가둘 수 없는 보편적 가치를 내장하고 있습니다." [8]그러나 한상진이, "한국은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자기주장만 앞세우는 일방적인 논쟁만 있을 뿐 자유롭게 토론하는 공론장이 없다"고 말하자, 하버마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공론장이 제 기능을 하려면 무엇보다 교육받은 공중이 필요합니다. 민주 시민 양성을 위한 사회 교육을 정규 교육 과정에서 강화해야 합니다. 아울러 오류의 개연성을 의식하는 독특한 시민 문화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순진하게 과학을 믿는 것, 당연시 된 이념이나 선호를 따라가는 것은 피해야 할 두 가지 태도지요. 과학은 오류 검증의 태도 안에 살아 있는 것이지 최종 판단이 아닙니다. 과대하게 일반화된 과학의 주장을 시민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공론장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재산이나 직위, 소유가 아니라 논쟁이지요. 좋은 논쟁을 위해서는 주제가 분명해야 하고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어야 하며 찬성과 반대의 입장이 자유롭게 교환되어야 합니다." [9]
이어서 한상진이 한국의 정치와 미디어에 대해서 묻자, 하버마스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 사회 정당의 주된 기능은 시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토대는 시민사회에 있어요. 국민의 건강과 보건 체계를 일신하는 것, 생활 정치의 질을 높이는 것 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의 목표를 잊고 오로지 권력만을 위해 싸우는 것은 정당이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비하시키는 것입니다. 나라를 이끄는 선진 시스템이 아니라 하류 시스템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미디어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지적하겠습니다. 하나는 미디어가 터무니없이 이념적, 감정적 양극화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주로 정치 소재를 다루는 민영방송은 극단적으로 이념화되어 사회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이들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제치고 오로지 정치적 목적으로 쟁점을 정치화시킵니다. 다른 하나는 오락, 스포츠 같은 프로그램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미디어가 상업화된다는 점입니다. 영국의 BBC 같은 공영방송조차 정치적 의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프로그램이 줄고 있어요. 미국에 비해 독일은 미디어의 정치 뉴스 기능이 강한 편이었으나 현재는 많이 줄었습니다. 가장 최악의 상태는 정부가 개입해 공영방송을 통제하는 것이지요. 이런 사태를 제도적으로 막으려면 미디어 부문의 독립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부나 사주로부터 미디어의 편집권은 독립되어야 합니다." [10]
5. 논쟁
5.1. 독일 과거사 논쟁
1980년대 독일 역사학계에 파장을 일으킨 논쟁으로 역사학자인 에른스트 놀테와의 논쟁이 있다. 1986년 놀테는 ‘사라지지 않을 과거’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는 이 글에서 볼셰비키 혁명의 폭력성을 ‘아시아적 범죄행위’로 규정하고, 아우슈비츠가 상징하는 유대인 학살 또한 이와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그는 이전까지 역사 속에 존재했던 여러 범죄들과 유대인 학살 문제를 동일시 하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표방했다. 더 나아가 놀테는 나치즘이 대두한 배경이 볼셰비즘에서 기인하며, 나치는 볼세비키를 방어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에 가깝다고 주장했다.이에 대해 하버마스는 놀테와 같은 해석을 '독일 현대사 서술에서의 자기변호적 경향‘이라고 주장했고, 나치의 부정적인 면들을 '아시아적' 형태로 치부하는 서구 중심주의라고 비판했다.
5.2. 송두율 논쟁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과 한때 김철수라는 간첩 혐의를 받은 송두율[11]의 스승이라는 점 때문에 국내의 보수단체에서는 송두율과 함께 묶어서 별로 좋게 보지 않고 있는 듯하다. 한편 대학가에서도 그런 관점에서 총학생회 등에서 관련 여름 커리큘럼을 밀어주기도 했다. 하버마스는 송두율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헤겔, 마르크스, 베버의 아시아관은 제국주의적이라는 내용의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를 맡았던 사람이다. 하버마스는 송두율 사태 당시 한국 정부에 탄원서를 보냈다. 당시 굳이 귀국하겠다는 제자에게 '국가보안법'을 거론하며 '그런 야만적인 나라에 왜 돌아가냐 그냥 여기서 나랑 연구하자'고 했다고 한다. 송두율의 간첩혐의에 대해서는 2008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당시 중앙일보에서는 하버마스가 서구중심주의에 경도되어 한국의 실정을 모르고 송두율 구속을 규탄한다고 비난을 한 바 있다. 이것을 가지고 일각에서는 하버마스 = 마르크스주의자로 오해하거나, 매체들이 그렇게 규정해 비난했다고 말하지만, "하버마스는 한국의 실정을 모르는 서구 학자"라고 비판했다면 그것은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비약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이런 경우에 사용하는 "한국의 실정"이란 말은 하버마스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가의 보도'다. 다른 나라를 예로 들면 "중국/터키/이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서구 학자, 매체의 비판에 대답해 해당국 주요 매체의 사설에서 "서구중심주의에 경도되어 중국/터키/이란의 실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하는 것과 비슷하다. 가깝게는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던 박노자 교수도 종종 "당신은 한국의 실정을 모른다"는 반응을 얻은 적 있다.
일단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긴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환원론과 교조주의를 비판하며 소련을 좋지 않게 보는 등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구세대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당연히, 교조주의 중에서도 지독한 교조주의에 구시대 스탈린주의의 북한판 변종인 주체사상과 그 사상을 숭배하는 북한 같은 나라에 호의적일 리가 없다. 애초에 프랑크푸르트 학파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게다가 하버마스는 그러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온건하고 우익적, 보수적인 스탠스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12].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버마스는 유럽의 지식인치고는 미국에 상당히 호의적이며, 미국에서도 하버마스의 이론은 꽤나 인기가 있다. 또한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인도적 개입'을 옹호함으로써 좌익에게 비난을 받은 전적도 있다. 그래서 그의 발언은 송 교수 자신을 도우려는 말이었다고 보면 되고, 그에 대해 우리 정부와 보수매체들은 세계적인 학자가 한국 정부의 행위를 비판한 것이 되어서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심지어 보수우파의 입장에서 송두율을 강하게 비판한 박광작 교수도 위르겐 하버마스는 북한 체제의 옹호자가 아님은 자명하다고 말한 바 있다. #
6. 저서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공공의 영역의 구조적 변화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 <colbgcolor=#fff,#1f2023> 1962년 |
Theory and Practice | 1963년 |
On the Logic of the Social Sciences | 1967년 |
Toward a Rational Society | |
Technology and Science as Ideology | 1968년 |
Knowledge and Human Interests | 1971년 |
Legitimation Crisis | 1975년 |
Communication and the Evolution of Society | 1976년 |
On the Pragmatics of Social Interaction | |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 1981년 |
Moral Consciousness and Communicative Action | 1983년 |
Philosophical-Political Profiles | |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 1985년 |
The New Conservatism | |
The New Obscurity: The Crisis of the Welfare State | 1986년 |
Postmetaphysical Thinking | 1988년 |
Justification and Application | 1991년 |
Between Facts and Norms: Contributions to a Discourse Theory of Law and Democracy | 1992년 |
On the Pragmatics of Communication | |
The Inclusion of the Other | 1996년 |
A Berlin Republic [13] | 1997년 |
The Postnational Constellation | 1998년 |
Religion and Rationality: Essays on Reason, God, and Modernity | |
Truth and Justification | |
The Future of Human Nature | 2003년 |
Old Europe, New Europe, Core Europe | 2005년 |
The Divided West | 2006년 |
The Dialectics of Secularization | 2007년 |
Between Naturalism and Religion: Philosophical Essays | 2008년 |
Europe. The Faltering Project | 2009년 |
The Crisis of the European Union | 2012년 |
This Too a History of Philosophy | 2019년 |
7. 관련 영상
7.1. 강의 영상
[navertv(497707)][navertv(498020)]
7.2. 인터뷰 영상
8. 여담
-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특이한 입모양이 특징이다. 선천적 구순열 때문에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입모양 때문에 발음이 부정확하며 알아듣기가 매우 힘들다. 일종의 언어장애에서 비롯된 의사소통의 어려움이 후기에 그가 의사소통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 구글 학술검색에서 하버마스의 논문 인용횟수만 검색해 봐도 인용횟수 네자리수는 기본이고 『공론장의 구조변동』은 무려 만 단위를 넘어버렸다. 철학계와 사회학계에서도 하버마스의 위상은 이미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석학 중 하나로 공인되고 있으며, 심지어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학문적 성과를 내는 것을 멈춘 것도 아니다. 2019년에 1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철학사책을 출판했다.
- 하버마스는 1996년 4월27일에 한국을 방한한 적이 있다. 무려 15박 16일에 달하는 일정 동안 거의 쉬지않고 계속해서 세미나, 토론회, 강연회, 기자회견 등을 가졌다.# 그리고 언론연구원 주최 기자간담회에서 "정보를 선택, 조정하는 매스미디어 자체가 이미 하나의 권력이며 따라서 편집권과 경영권을 분리해 이 권력을 간접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위 편집진 선임문제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며 사주가 편집진 결정에 되도록 간여하지 않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서구의 68년 상황과 한국의 90년대가 비슷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 “서구의 68년 상황과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굳이 (백지에서 새로 시작하듯) 서구의 이념 논쟁에서 모델을 찾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새로운 이념틀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서, "순수성을 지향하는 불교와 공동체 지향적인 유교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현대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을 잊지 않았다.#
또한 서울대입구역 근처 설렁탕집에서 설렁탕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 1953년 24세의 하버마스는 나치에 대한 태도를 바꾸는 문제와 관련해 하이데거가 했던 이야기가 의심스럽다며 그 이유를 제시했다. 하버마스는 공식적으로 하이데거를 공격하면서 1935년 『형이상학입문』에서 사용한 국가사회주의의 "내적인 진리와 위대함"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설명하라고 요구했다. 하이데거는 마르쿠제에게 국가사회주의의 승인은 1년 전에 중단되었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하이데거는 이 강연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 어떤 해설도 붙이지 않은 채 1953년에 재출간하도록 허락했단 말인가? 하버마스는 『자연주의와 종교 사이에서』에서 "정말 혐오스러운 것은 나치의 철학자가 전쟁 후 8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누구도 입에 올리려고 하지 않는 집단 범죄의 결과에 대한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부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썼다.[14]
- 하버마스는 정상적인 학창시절 대신 군대조직에서 매우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던 '대공부대 세대'로서, 십대시절 히틀러를 보호하는 일을 했다. 15세의 하버마스는 동시대 대부분 소년들처럼 히틀러소년대(Hitler Youth)의 구성원이었다. 참전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전시봉사를 면제 받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던 하버마스는 동맹국의 공습에 대항한 후방군의 작전에 대공부대 방어를 위해 동원되어 서부전선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나중에 지역의 한 신학교 교장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나치의 '수동적 동조자'로 묘사했고 소년시절엔 아버지의 생각을 따랐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과정과 나치의 수용소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그와 가족이 누린 평온한 만족감을 떨쳐내었다. "어느 순간 우리가 정치적 범죄의 체계에서 살아왔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15]
- 전쟁 후 하버마스는 본대학에 등록했고 이후 괴팅겐과 취리히에서 철학공부를 했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그는 하이데거를 연구했다. 따라서 하이데거에게 쓴 그의 편지에는 상징적 울림이 있었다. 젊은 지식인이 연장자이자 멘토였던 철학자에게 침묵 속에 숨지 말고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체제를 어떻게 찬양하게 되었는지 설명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새로운 독일세대는 이전 세대에게 앞으로 나서서 그들이 저질렀을 죄를 해명하고 회개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16]
- 1958년 5월에 28세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정치적 시위에 참여했다. 연방공화국의 하원은 그 해 3월 독일의 군대가 나토(NATO)의 원자폭탄무기로 무장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연방공화국의 군대는 1955년부터 존재했고 출발부터 핵무기보유와 관련한 난감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원자핵 과학자들로 구성된 '괴팅겐 18인'이라는 이름의 한 시위단체는 당시 고려 대상인 무기 중 하나가 히로시마 원자폭탄 정도의 파괴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독일에 그런 무기를 들여올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특히 핵무기를 갖고 있던 군대의 위험에 대해 일부 독일 지식인들 사이에서 거세지고 있던 반감을 공유하지 않았다. 실제로 연구소의 젊은 회원들은 화를 냈다. 민주주의적 태도에 따라 군대지원자를 선발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독일국방부의 연구를 이들이 거리낌 없이 수용했기 때문이다. 하버마스는 4반세기 동안 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해온 호르크하이머가 특히 연방공화국과 지나치게 친밀한 동맹을 맺고 있는 점을 걱정했다. "그의 공적인 행동이나 연구소를 위한 정책으로 보건대 비판이론 전통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회주의적 순응성을 드러내고 있다. 어쨌든 자신이 이 비판이론의 전통을 대표하고 있지 않은가." 하버마스는 한 학생잡지에 「소요는 시민의 첫 번째 의무」라는 헤드라인을 담은 글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스승인 아도르노의 진술을 불러내어 현대철학의 임무는 "저항 속에 그 생명의 핏줄을 얻는다"고 쓴다. 하버마스는 시위대가 "우리의 이름을 대변하면서 지배하려 드는 정치가들"에 대항하고 있으며, 핵무기로 무장할 군대에 관해서 국민투표를 하자고 요구했다.[17]
- 1957년 하버마스는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철학적 논쟁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에서 그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유물론적 민주주의로, 자유민주주의를 사회민주주의로 발전시키자"고 요구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요구가 하버마스의 독창적인 표현이 아닐 것이라고 호르크하이머는 의심했다. 호르크하이머는 하버마스가 논문에서 애초에 표현한 혁명의 요구를 아도르노가 다듬어서 연구소의 체면을 조금이라도 지키려고 위에 인용된 표현으로 대체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만일 그렇다면 이 편집된 원고는 연구소가 오랫동안 고수해온 이솝 우화적 언어와 같은 궤를 이룬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안심할 수 없었다. 어떤 독자라도 이 글에 담긴 혁명의 요구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어떻게 자유주의적 제도에 의해 부르주아사회의 족쇄에 묶여 있는 국민이 폭력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소위 정치적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H(하버마스)는 이 사회가 변혁을 위해 '충분히 숙성한 상태 그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호르크하이머는 아도르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사회변혁을 인정하는 발언을 연구소의 연구보고서에 실을 수는 없다네. 연구소는 이 족쇄를 채우는 사회가 주는 공공기금으로 운영되고 있으니까." 확실히 그렇다. 격한 혁명의 요구는 연구소가 독일국방부로부터 연구계약을 따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호르크하이머는 하버마스를 쫓아내려 했다. 그는 아도르노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매우 영리한 핑계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하버마스는 부르주아 공적영역에 대한 박사 후 연구논문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르크하이머는 그에게 3년 정도 걸릴 다른 연구를 먼저 하라고 요구했다. 화가 난 하버마스는 사임하고 마르부르크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 법학자인 볼프강 아벤드로스의 지도하에 논문을 마치러 떠난다.[18]
- 아도르노가 설득해서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서, 1964년 호르크하이머의 은퇴 이후 연구소의 철학과 사회학 교수직을 넘겨받았다.
- 1963년 『아도르노 기념논문집』에서 하버마스는 포퍼가 과학과 사회과학연구의 본성을 규정하는 데 있어, 특히 사회적 불안정이 증가하고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지적 순진함을 보였다고 비난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변증법적' 비판이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보다 우월함을 주장했다. 그의 비난은 포퍼의 제자들을 자극해서 아도르노의 제자들을 비합리주의자이고 전체주의자라고 비난하게 만들었다.
- 1967년 6월 하노버에서 학생운동 지도자였던 루디 두치케와 한스-위르겐 크랄을 상대로 《대학과 민주주의: 저항의 조건과 조직》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면서 연단에 선 하버마스는 학생들의 급진적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지만, 그들의 방법은 문제삼았다. 그는 두치케가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혁명을 꾀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내 견해로는 그는 1948년 유토피아 사회주의라 불렸던 주의(主意)론적 이데올로기를 재현하고 있지만 오늘날의 상황은 좌파파시즘이라고 불러야 한다." [19]
- 그는 1971년에 프랑크푸르트를 떠나서 스탄베르크에 있는 《과학 기술의 세계에서 살아갈 조건을 연구하는 막스플랑크연구소》라는 멋들어진 이름을 단 곳의 공동대표가 된다. 스탄베르크는 뮌헨 근처의 작은 호숫가 마을이다. 하버마스는 이 과학기술 세계에서 1955년에 결혼한 부인 우테와 함께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다. 하버마스 부부는 이곳에서 3명의 아이를 길렀다.[20]
- 하버마스는 『계몽의 변증법』을 청년시절에 읽었을 때 즉시 몰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이 책에 담긴 내재적 비판이 지나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와 근대국가의 등장으로 자기보존에 관심을 가진 주체들과 자체운용체계들에 적합한 목적론적 합리성의 제한된 지평 속으로 일체의 정당하고 유효한 질문들을 통합시키려는 경향이 확장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 지점에서 시도했던 수사학적 도약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목적론적 합리성의 명령들은 최근 생산한 제품들 ㅡ 현대과학, 정의와 도덕성의 보편주의적 개념들, 자율적인 예술 ㅡ 에 이성이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과학에는 도구적 이성의 동원 이상 무엇인가가 있고, 예술은 문화산업 이상의 무엇이 있다. 헌법적 정부를 비롯해서 법과 도덕성의 보편주의적 토대들은 그저 비난 받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버마스에게 계몽은 '건전한 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은 이 핵을 가볍게 처리하고 지나가버렸다. " 『계몽의 변증법』은 객관적 폭력으로 변한 목적론적 합리성의 신화로부터 도피할 어떤 전망도 제시해주지 않았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에게도 똑같은 주장을 했다. 만일 그들이 주장하듯이 모든 진실이 상대적이라면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조차도 상대적인 것이 아닌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1세대에게 이 총체적 망상체계는 오직 선진산업사회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도래를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었다. 하버마스는 이런 시각을 거부했다. 대신에 현존 체계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18세기 공공영역이라는 개념을 이 체계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저항하기 위해서 부활시킬 수 있었다. 도덕적 주체의 성숙함, 자기통제와 자율성 등 칸트가 칭송했던 자질들이 후기 자본주의라는 이 망상의 총제적 체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시대에 실현될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었다.[21]
-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버마스의 관심권에 들지 못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저항적 목소리를 침묵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론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체제적 변형태로서 하버마스가 근대성의 기획이라고 간주했던 것에 담긴 비판적 힘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성의 기획 없이는, 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구적 자본주의에 무방비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다. 둘째, 하버마스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경멸했다. 루디 두치케의 정치(하버마스가 좌파파시즘이라고 불렀던 것)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합리주의와 허무주의를 희롱하는 듯이 보였고, 따라서 나치시대를 상기시켰다.[22]
- 하버마스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공공영역으로 작동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은 고도로 파편화된 의사소통 회로의 반정부적인 전파를 풀어놓습니다. 이 전파는 부정기적으로 겹칩니다. 물론 무제한적인 의사소통의 자발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성격은 권위주의적 체제에서는 전복적 효과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웹 그 자체가 어떤 공공영역을 생산해내진 않습니다. 그 구조는 전문가들이 검토하고 걸러내 온 주제와 발언들에 관해서 동시에 의견을 형성하는 시민들로 구성된 분산된 공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23]
- 하버마스가 독일 언론에 공적인 참여를 했던 일 중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역사가들의 논쟁》에 개입해서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 토론했던 것이다. 이 논쟁은 1986년부터 4년간 격렬하게 이어졌다. 독일 역사가 에른스트 놀테는 "아우슈비츠는 무엇보다 러시아혁명의 발발과 그 파괴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다. 소위 제3제국 동안 일어난 유대인 집단살인은 러시아혁명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왜곡된 복사본이지 원초적 행위이거나 고유한 원본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놀테는 러시아의 수용소군도가 아우슈비츠보다 먼저 생겼고 독일은 볼셰비키의 위험에 직면해서 '합리적으로' 나치즘으로 선회한 것이라고 추론했다. 히틀러가 몰락한 뒤 40년이 흐른 뒤 놀테와 그 외 우파역사가들이 제3제국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로부터 독일의 책임을 면제받기 위해서 애쓰고 있다는 것을 하버마스는 알아챘다. 설상가상 하버마스가 상대했던 역사가들의 일부는 서독의 수상 헬멋 콜의 기독민주당정부와 연결이 되어 있던 지식인이었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에 대한 이들의 수정주의적 설명은 하버마스에게는 정치적 목표를 위해 학술적 역사를 오용한 것으로 보였다. 이들의 목적은 필시 국내적으로 콜의 인기를 받쳐주고 서독이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지고 이스라엘에게 지불해 온 배상금의 중단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논쟁 상대들이 독일 역사를 정상화시켜서 놀테가 "사라지려 하지 않는 과거"라고 불렀던 것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한다고 묘사했다. 하버마스는 이들이 나치즘은 독일역사에서 소규모의 범죄 집단이 벌인 역사적 위반에 불과하다고 암시함으로써 독일 국가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시도한다고 주장했다. "아우슈비츠를 예외가 아닌 것으로 만들려는" 이런 시도를 공격하는 일련의 논문들을 쓰면서 하버마스는 "독일에 사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의무 ㅡ 비록 아무도 더 이상 느끼지 못하지만 ㅡ 는 독일의 손으로 살해했던 이들의 고통을 왜곡 없이, 또 지적인 형태로 기억해주고 그 기억을 계속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썼다.[24]
- 《역사 논쟁》에서 특히 그의 화를 돋운 것은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이었다. 그는 독일민족주의를 용인할 수 없었다. 민족주의는 하버마스에게 욕지기나게 했지만, 특히 독일민족주의는 최악이었다. 그는 민족국가, 특히 인종적 통일성에 기초한 국가의 배타성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정서적, 감정적, 감성적 결속을 통해 연대하고 있어서 의사소통적 이성에는 열려 있지 못한 상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의사소통적 이성은 국가를 제재할 수 있기 때문에 공공영역이나 시민사회의 성장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하버마스가 '체제'라고 부르는 것, 그 중에서도 특히 국가행정의 작용을 윤활하게 해주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민족주의는 민족 구성원인 시민들에게 지적인 도구와 사회적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국가권력에 대한 비판적 감시를 담당하도록 준비시키기보다는 단일한 정치공동체의 소속감을 부여한다. 더군다나 민족주의적 감정은 항상 정치적 엘리트들에 의해서 쉽게 조작된다. 히틀러가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감정의 조작이었고 하버마스가 역사의 반복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그가 쓴 글에서 하버마스는 담론 이전의 민족주의가 2차 세계대전 이래 독일의 발전과정에서 자신이 좋아했던 것을 훼손시켰다고 했다. 그는 연방공화국이 자신이 '제헌적 애국주의'라고 부른 것을 위해서 민족주의를 거부했던 사실에 일종의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연방공화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제헌적 애국주의란 다른 무엇보다도 영원히 파시즘을 극복해가면서 정의로운 정치질서를 구축하고 상당히 자유로운 정치적 문화에 닻을 내리도록 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1990년 『혁명 따라잡기』에 썼다. 그의 희망은 제헌적 애국주의가 민족주의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제헌적 애국주의는 배타적이지 않았고 선이라는 단일한 개념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제헌적 애국주의는 국가의 자유롭고 공정한 작동방식에 대한 자부심의 표현이고 번창해가는 공공영역이나 시민사회가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정치체제 속에서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25]
- 제헌적 애국주의는 대학교수보다는 시민들에게 덜 고무적이다. 세속적 이성은 '취약한 동기'라는 문제를 겪어왔다. 이 이성은 시민들이 덕을 실천하도록 이끌지 못했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그저 세속적 이성을 폐기 처분할 것이 아니라, "근대성의 인식적 성취"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관용, 평등, 개인적 자유와 자유로운 사유, 사해동포주의와 과학적 진보 등은 근대성이 성취한 것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공적 생활에 있어서 종교가 담당하는 역할을 재고한다. 그러나 종교가 시민들에게 그러한 역할이 될 수 있으려면, 종교측에서는 '자연적' 이성의 권위를 제도화된 과학의 오류 가능한 결과들과 법과 도덕성에서 보편화된 평등주의의 기본원칙들로서 수용해야만 한다. 역으로 세속적 이성은 그 자체로 신앙의 진실에 관련된 판관노릇을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종교가 바뀔 준비가 된다면 종교의 영향력으로 시민들에게 제헌적 애국주의를 효과적으로 퍼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톨릭교회가 그의 계획에 포섭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6]
[1] "Jürgen Habermas", loc.gov[2]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실천적 합리성'이라고 부른다.[3] '기술적 합리성'은 막스 베버의 도구목적성 합리성과 동일한 것이다.[4] 여기서 '보편타당한 답'이 '절대적 진리'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다고 '상대적인 진리'기 때문에 우리가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답은 합의에 의해 확정되어 모두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호 주관적 보편성'이다.[5] 여기서, 간은 '사이 간(間)'을 말하는 것으로 주관들 사이에서 서로 공통되는 것을 말한다. 즉, "상호 주관적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6]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들은 개인의 이성으로 절대적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7] 하버마스는 계몽을 비판하는데 왜 이성(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추종하는가에 대한 매우 간략한 요약.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이렇게 보면 된다. 하버마스는 절대적 진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몽을 비판했지만,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이성'의 힘을 '믿으며', 그런 맥락에서 '계몽의 전승자'라고 '평가'받는다. 라고 생각하면 된다.[8] 한상진 『하버마스와의 대화』 중민출판사, 2022, p.187~188[9] 한상진 『하버마스와의 대화』 중민출판사, 2022, p.191~192[10] 한상진 『하버마스와의 대화』 중민출판사, 2022, p.192~193[11] 독일(당시 서독) 유학 중이었던 1970년대에 유신 체제 반대 운동을 하다가 한국 입국이 거부당했고, 그대로 독일에 남아 법학 교수가 되었다. 이후 2000년대 초반에 자진해서 한국에 귀국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황장엽에 의해 북한 노동당에서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09년 경 법원은 이에 대해 황장엽의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현재 독일과 포르투갈을 오가면서 거주 중이다.[12] 물론,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온건한 인물이라는 뜻이지, 이 사람이 진짜로 보수주의자라는 얘기는 아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소속 학자들은 전반적으로 온건파든 강경파든 간에 전원 좌파 성향을 띄었다.[13] collection of interviews with Habermas[14]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81[15]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82[16]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382[17]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17~420[18]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20~421[19]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481[20]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04[21]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13~514[22]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14[23]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20[24]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22[25]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23~525[26] 스튜어트 제프리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삶과 죽음』 강수영 옮김, 도서출판 인간사랑, p.534~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