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한옥
1. 개요
한옥의 장단점에 관한 문서이다.2. 장점
수천 년간 한반도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건축 양식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에, 분명 한반도 같은 지역에서 확실하게 먹히는 장점들이 상당히 많다. 때문에 한옥의 장점 중에서는 외국(특히 서양)에서 먹히지 않는 장점이 의외로 좀 있다.- 온돌과 들문 등으로 기온차를 극복하고 있다. 온돌의 기원 자체는 길게 보면 선사시대며, 최소한 고구려 시대에는 온돌의 초기 형태가 발견되었지만, 현대적인 형태의 온돌은 이보다 늦은 조선 후기에 일반적으로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 뼈대인 목재가 자정작용을 하여 실내의 습도와 온도, 기온등을 조절해 주어, 쾌적한 주거환경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 기단이 높아 땅으로부터 습기와 동결현상을 피할 수 있다.
- 황토와 짚의 구성이 사람의 건강에 이롭다.
- 목재를 짜 맞추는 방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석조 건물이나 내진 설계가 되지 않은 허술한 철근 슬라브 건물에 비해 지진에 강하다.[1]
- 채광, 통풍 같은 기능상의 이유나 과거 신분제 및 남녀유별, 장유유서 같은 유교 문화의 잔재로 인해 한옥은 방마다 최소 2개 이상의 출입문을 갖는데, 이렇게 많은 출입문은 외부의 침입자를 막는 데는 취약하지만 일단 범죄자가 칩입하거나 화재가 발생할 경우 신속히 대피할 수 있게 한다.[2]
3. 단점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한옥을 극찬하는 일부 호사가들에 의해 과대평가되지만 한옥 역시 분명한 단점이 있다. 특히 재래 방식보다 훨씬 가성비가 월등한 현대식 공법이 이미 도입되어 있음에도 이를 한옥에 적용하는 건 지지부진한데, 이는 이미 아파트가 한국인의 주거 생활에 표준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데다, 전통적인 재래 방식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비판적인 찬사로 인해 한옥 건축에 현대식 공법을 적용하는 걸 이단시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웃인 일본이 19세기 말부터 전통공법에다가 서구에서 들여온 신식기법들을 적용하는데 거부감이 없었던 것과 매우 대조되는 상황이다. 되려 구한말과 일제시대에는 부자나 건축가들을 중심으로 한옥에 외국식 건축기법이나 공간구성을 접목하여 바꾸는데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3], 상당히 아이러니컬한 상황이다.- 목재라는 자원의 특성상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습기에 취약하며 각종 곤충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데 특히 흰개미가 매우 위협적이다. 물론 이는 한옥만의 문제가 아니라 목조 건축물 전반의 공통된 문제이나, 유독 한옥의 경우 뼈대인 목재가 외부로 많이 노출된 형태라서 관리가 두드러지는 편이다.
- 목재 자원에 크게 제약을 받는다.
- 옛날에 지어진 민간 한옥의 기둥, 대들보, 서까래를 보면 가지를 쳐내고 나무 껍질만 벗긴, 굽고 우둘투둘한 목재를 쓴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런 목재는 곧게 제단된 목재보다 치목이 더 어렵고 손이 많이 간다. 그럼에도 이런 목재가 많이 쓰였던 것은 우리 조상들이 특별히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경작지의 확대로 인한 숲의 감소 구들의 보급으로 인한 장작 수요의 폭증, 체계적인 임목이나 숲에 대한 관리 미비로 인해 곧게 자란 나무를 구하기가 어려워서였다.
- 실내공간 확보가 불리하다. 한옥은 지붕의 구조물을 보가 받치고 보에서 분산된 하중을 기둥이 받치는 대량식 구조다. 따라서 실내공간을 확보하려면, 기둥이 더 크고 두꺼워지거나 기둥사이로 하중을 전달하는 보, 대들보, 창방 등이 더 크고 두꺼워야되는데, 앞서 말했듯이 과거 목재자원의 제약 때문에 궁궐이나 절, 관영 건물 등이 아니라면 크고 두껍고 튼튼한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이 때문에 거대건축물이 아닌 민가의 경우 기둥사이도 좁고 실내공간 역시 비좁았다. 구체적으로 기둥과 기둥사이를 한 간이라고 하는데, 조선때의 민가는 영조법식에 따라 영조척으로 8자(2.4m 내외, 영조척의 1척은 30.8~31cm)를 한 간으로 삼아서, 한간의 너비는 약 5.76 ~ 5.8㎡로 1평 반 밖에 되질 않았다. 그런데 이 한 간을 한 방으로 사용했고, 통상 서민들이 사는 민가는 초가 3간을 기본으로 하여 여유가 있다면 4간 반 집에서 머물렀는데[4], 삼간은 17.28㎡, 사간반은 25.92㎡로 평수로는 각각 5.4 평, 7.86 평으로 한 가족이 사는 방3개와 방4개 짜리 집 너비가 오늘날 한 명이 사는 원룸의 너비와 비슷한 것이다. 더욱이 방 중에 하나는 주방이고, 마루도 섞여있다보니 실제 잠을 자는 방은 2개로 너비는 2간에서 2간 반 정도다. 한 간의 방에서는 사람이 눕고 장롱 하나만 들여도 내부 공간이 벌써 다 찬다. 게다가 후술하겠지만 기와집이 아니더라도 지붕 위에 흙을 쌓아 올려 하중이 높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이 한간을 늘리기도 어려웠다.
- 서까래 위에 흙과 기와를 올려 지붕이 무겁기 때문에,[5] 시간이 지나면 기둥과 보에 변형이 생기고 건물의 수명이 줄어든다. 게다가 흙의 수분이 그대로 목재에 스며들어 빨리 썩게된다. 문화재 복원에 참여한 신응수[6], 신영훈[7] 등 다수 전문가들도 지적하는 문제다. 이 역시 일본 고베대지진에서 전통 목조건축의 취약점으로 드러난 바 있다. 기와 대신 나무널을 얹는 너와집[8]이나, 풀을 엮어 올리는 초가집, 굴피나무 껍질을 얹는 굴피집의 경우 무게를 기와집보다는 줄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흙을 올려놓는 점은 똑같으며, 굴피는 유기질이기 때문에 화재에 약하고 수명이 짧아 주기적으로 바꿔야 하며, 공기 중 습도에 따라 팽창하고 수축하여 건조한 겨울에는 단열이 잘 안된다.[9] 초가지붕은 기와지붕보다 평상시에는 가볍지만, 폭우 및 폭설이 쏟아지면 짚이 물기를 흡수하여 더 무거워진다.
- 이러한 단점은 고스란히 기초공사 비용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구조물의 횡하중으로 인한 변화와, 가새를 이용한 기울어짐 예방 및 역할, 원리를 설명하는 영상 |
- 횡하중으로 인한 구조적인 취약점이 있다.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동아시아 전통 목구조는 기둥에 보를 쌓아 만드는 대량식 구조나, 기둥을 매우 좁게 배치한 천두식을 포함, 축부에 대각선 보강재를 거의 쓰지 않는다. 그리고 목재간 연결에 금속을 잘 쓰지 않는데[10][11][12], 이러면 위에서 아래로의 하중에는 강할지 몰라도 좌우에서 힘을 받는 횡하중에서는 취약해진다. 이 때문에 구조물 전체가 철근으로 엮어져 횡화중을 견딜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나 대각선 보강재인 가새가 있는 서구식 팀버프레임건축물들과 비교했을때 지진으로 건물이 좌우로 흔들리면 쉽게 기울어지고, 특히 지붕에 흙을 얹어놓아 무겁기 때문에 붕괴사고로도 쉽게 이어진다. 일본 내부에서는 19세기부터 건축계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였고링크, 실제로 효고현 남부 지진으로 이런 한계가 드러난 바 있으며, 경주지진에서도 드러났다.
- 황토와 짚으로 구성된 벽은, 스티로폼이나 유리섬유보다 단열성능이 떨어진다. 흙벽이 단열의 제 성능을 발휘하려면 두께가 60 cm 이상은 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벽을 감당할 만큼 큰 나무를 수입산이 아닌 국산으로는 구하기가 힘들다. 이만 한 나무는 문화재 복원용으로 지정되었으므로 사실상 개인이 이를 구해 집을 지을 수는 없다. 그나마도 현행 건축법령에 충족하는 단열재는 현대식 단열재에서 제일 좋은 것을 쓴다 하더라도 두께가 최소 140mm 이상은 되어야한다. 기준에 부합할 정도의 단열재를 시공하지 못한다면, 결국 난방비 지출이 커지고, 만약에 난방비용을 줄인다고 가정하면 추위를 견뎌야 하는 문제가 상주한다. 이미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전통건축에도 현대식 단열재를 넣고 냉/난방과 환풍시설을 갖추는 추세이나, 한옥에서는 도입이 늦다.
- 하지만 한옥을 짓고자 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전통 방식대로 황토를 써서 지어야 친환경적이고 몸에 이롭다고 굳게 믿고 있어, 한옥을 짓는 데 현대식 공법, 자재를 쓰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상당하다. 심지어 전통 한옥이 단열에 취약한 줄을 알면서도 "한옥은 숨쉬는 집이니 외풍이 스며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거 아니냐? 적당히 외부와 공기가 통해야 오히려 몸에 좋지 않느냐?"며 단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변호하며, "건강을 생각해서 황토로 짓는 거지, 황토로 지을 거 아니면 아파트 놔두고 뭐 하러 한옥에서 살겠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렇게 적지 않은 한옥 건축주들의 한옥에 대한 교조적인 믿음도 신공법의 적용을 어렵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덧붙이는데, 외풍이 드는 것은 건물 내/외부 온도차가 커서 생기는 것이지 공기가 순환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 시공단가가 비싸다. 어느 건축물이든 마찬가지지만, 한옥은 손이 더 많이 가는데다 시중 인건비 자체가 높고 자재를 아무리 싼 것을 쓰더라도 일반건축물 보다 비싸다. 그러다보니 현대의 한옥은 주로 관용이나 공공용이 많다. 예를 들어 한옥시공비를 계산할 때 골조용 목자재를 계산할 때 대략 폭이 각 3 cm(한치)인 각재(스퀘어)의 개수로 나누어 필요한 목재의 가격을 정한다. 3*3각재의 가격이 수입산이 2천 원[13], 국산이 2천 7백원 꼴이다. 수입산 목재의 가격은 배를 통해 운송하기 때문에 국제유가 상승과 궤를 같이한다. 코로나19 발동전인 2020년 이전기준으로 건축 시 인건비까지 감안하면 실제 수입산으로 지었을때 건축비는 평당 1천 5백만 원이고, 국내산 나무로 지으면 2천만 원에 육박한다. 당장 콘크리트조(R/C)나 경량목구조의 시공비용 평균이 400-500만 원에 수렴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3-4배는 되는 샘. 35평을 짓는데 대략 7억의 건축비와 토지 구입비 그외 각종 부대비용들이 더 필요하다. 그러니 아무리 저렴하게 지어도 기본 10억원의 예산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현금 10억이면, 경기권이나 수도 서울 중에서도 집값이 많이 비싸지 않은 지역에 있는 번듯하고 인테리어가 화려한 고급 아파트에 거주할 수 있다.
- 시공 단가가 비쌀 수밖에 없는 데에는 현재 한옥 하면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기와집이 전근대시대만 해도 고관대작이나 천석꾼, 만석꾼 정도 되는 상류층이 거주하던 고급 주택이었단 점도 있다. 기와집의 지붕재인 기와는 일반 서민들이 지붕재로 흔히 쓰던 볏짚이나 굴피, 너와보다 더 무거웠기에 구조재도 더 굵고 단단하고 무거운 것을 써야 했으며, 이러한 하중을 지탱하고자 기초도 더 탄탄하게 다져야 했던 까닭에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계층이 아니면 지어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 시중 인건비 책정이 터무니 없이 높게 책정되었는데, 소비자 책정값과 실제 지급인건비 간에 차이가 극심한 것도 여기에 한몫을 더하고있다. 유튜브 등을 통해서 한옥목수들의 인터뷰가 많이 밝혀져, 실 지급 인건비에 대한 폭로가 줄을 잇는데, 일부 대목장이나 도편수가 지급인건비를 30-40만 원대에 산정해서 지급받아놓고서는 실제 일하는 목수들에게 13-16만 원 정도를 지급하여 차액을 챙기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다. 유독 한옥목공계가 다른 건설목수에 비해서 이 차이가 극심하다.
-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일제시대~해방직후, 정확하게 미국으로부터 원조물자 대량 공수 전까지는 철근 콘크리트나 조적조에 비해 한옥이 시공비도 저렴하고 공사기간도 짧아서, 새로 지어지는 주거용 건물은 거의 대부분이 한옥이었다. 현재의 단독주지가 주택용토지 분양만하고 건설은 나중에 하는 것에 비해 이 시대 한옥주택단지는 먼저 지어놓고 파는 소위 집장수한옥이 대부분이었다. 현재 한옥거리로 유명한 북촌의 개량한옥단지가 그 시대의 흔적 중 하나이다.[14] 1960년대부터 시작된 고도성장기 정부정책기조에 의한 철근콘크리트조의 대규모 주택단지의 건설, 원활한 대량 주택공급을 위한 아파트 등의 난립으로 한식건축은 관용 및 종교용 건축물 등으로 수요층이 급격히 좁아지고, 고급화된 탓인지 지금의 비싼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3.1. 보완
전통 방식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아래와 같은 방법들을 사용할 경우, 건축주는 건설 기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단열 효율도 크게 얻을 수 있으며 시공자는 편의성을 얻을 수 있다.3.1.1. 목재
종로구 광화문 D타워 1층에 있는 시전행랑 복원터 구조물, 기둥과 보가 전부 글루램이다. |
본래 일본이나 북미/유럽등에서 시도되는 것인데, 한옥에 공학목재를 이용하는 것이다. 자그마한 목재 여러겹을 압착 및 접착시켜 큰 구조물을 만드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목재자원의 한계에 제약을 받을 필요 없이 얼마든지 큰 부재를 '제조'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 큰 기둥이나 보를 만들 때 유용하다.
3.1.2. 지붕
최근에는 지붕에 흙을 올리지 않고 방수포, 방수지를 두르는 건식 시공법을 도입하고 있다. 그와 함께 기존 기와 대신 무게가 훨씬 가벼운 동(銅)기와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월정사나 상원사 같은 강원도 사찰에서 많이 쓰이고 있다.[15]
또한 동기와는 부식 및 산화에 매우 강해 수백 년이 지나도 손상이 적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구리는 탄력성 및 복원성이 매우 우수하여 비와 눈,추위, 더위 등에 의한 파손과 균열에 강하다. 일반 기와를 쓰면 날씨 때문에 기와가 깨져 매년 갈아야 하지만, 동기와를 쓰면 그런 번거로움이 줄어든다. 요즈음에는 좀 더 저렴하게 하려면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강화 플라스틱제도 있다. 이쯤 되면 정통 한옥으로는 안 쳐주지만.
3.1.3. 단열
[16]
최근에는 흙벽과, 흙단열 대신 폴리우레탄 스프레이폼이나, 유리섬유 단열재가 도입되었다.최근에 시공되는 주거용 개량한옥에서 종종 도입되고 있으나, 아직까지 황토 선호가 아직도 많기 때문에 많이 흔한 풍경은 아니다.
3.1.4. 공사비용
"한옥 3D설계, 첨단과 만난 한옥"
공장에서 미리 가공해서 현장에서는 조립만 하는 일본식 프리컷(Pre Cut) 공법이 한옥에도 도입되었다. 비용절감이 확실하기 때문에 상당히 자주 쓰인다. 유튜브 등에서 한옥과 프리컷으로 검색하면 여러 시공업체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한옥 건축시 선택 옵션에 따라 비용을 절감할 수도 있다.
[17] | 저 | 중 | 고 |
배열 형태 | 'ㅡ'자형 | 'ㄱ'자형 | 'ㄷ'자, 'ㅁ'자형 |
지붕 형태 | 맞배지붕 | 우진각지붕 | 팔작지붕 |
처마 형태 | 홑처마 | 겹처마 | |
기둥보 형태 | 납도리 | 굴도리 | 초익공 |
기초 | 독립기초 | 콘크리트 기초(통기초, 줄기초)[18] | |
기단 | 주변 자연석 활용 | 외부 자연석 활용 | 다듬석 활용 |
주춧돌 | 다듬석 | 자연석 | |
목재 | 수입산 제재목[19] | 국내산 제재목 | 국내산 자연목[20] |
기와 | 우레탄, 플라스틱제 기와 | 동제, 금속제 기와 및 전통식 기와[21] | |
층수 | 단층 | 복층[22] | |
난방 방식 | 보일러 난방 | 함실 구들 난방 | 아궁이가 딸린 구들 난방 |
창호 | 외부 전통창호 + 내부 일반창호 | 외부 전통창호 + 내부 전통창호 | 전통양식 시스템창호 |
부엌 | 재래식 입식부엌 | 개량식 입식부엌 | 현대식 부엌 |
벽채 | 스터드 + 그라스울 | 벽돌, 블록 + 아이소핑크 | 전통 흙벽 |
내장재 | 석고보드 | 황토 | |
바닥 | 비닐장판 | 한지장판 | 강화마루 |
그밖에 대형 중장비 출입 가능 여부 및 공사자재 야적, 작업 공간의 확보, 지반 상태 등에 따라 공사 비용이 추가되거나 절감될 수 있다.
4. 오해/낭설
4.1. 2층 주택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2층 가옥이 흔했다. 이는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세종대왕이 침실로 쓰는 2층 이상의 집을 의미하는 침루에 올랐다는 기록도 있으며 심지어 2층에서 잠자다가 세종대왕이 감기에 걸렸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고려시대로 가면 이러한 루가 보편적이었다는 기록이 많다. 2층 건물의 규모를 늘려 찻집이나 술집 등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말~조선전기에만 등장하는 침루(寢樓)와 누방(樓房)기록그런데 소빙하기로 인하여 온돌이 대량으로 보급되고 난 이후에는 난방에 취약하고 온돌설치가 어려운 2층 가옥보다 1층 가옥이 더 선호되어 2층 이상의 가옥들은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애초에 2층으로 만드는 것은 큰 기둥을 써서 바닥 층계만 하나 더 만들거나 아니면 기둥을 둘로 나누고 층계를 만들어서 공간을 나누면 되는 지라 기술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때문에 고궁 내 건축물들 중에는 다층건물을 상당 수 발견할 수 있으며[23], 일부 사찰이나[24] 수원 화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밖의 2층 건물들 사진 링크 경복궁 향원정, 구례 운조루, 남산골 한옥마을, 안동김씨 태장재사 이상루, 용주사 천보루, 의성김씨 서지재사, 그 외 17세기 다층 한옥 관련 포스팅
그리고 누각의 구조는 대부분 바닥에서 들어올려진 형태인데,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 벽만 쌓으면 사실상 2층이다. 또한 법주사 팔상전 등을 보면 기술이 부족해서라는 해석은 근거가 없다. 또한 조선 세종 때의 가사제한령(家舍制限令)에 의해서 법적으로 주택을 장식하거나 크게 짓는 것을 금지함에 따라서 그러한 일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진 측면도 있다. 이는 고려시대의 풍수지리에 따라서 조선 태종 이후 생긴 경향을 세종이 이어받는 것이다.[25] 여러 기록들을 보면 고려~ 조선 전기까지는 2층 살림집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링크
4.2. 크기
고려시대 이후로 거목들의 고갈로 인해 큰 목재가 부족해지어 다른 나라들의 건축물들에 비해 그 크기들이 작은 탓에 시선을 끄는 압도적인 면이 부족하다는 의견도 일부 있다.[26] 하지만 건축물의 단일 크기는 거목 고갈로 계속 작아졌지만 그와 반대로 총 건축면적(建築面積)[27] 자체는 훨씬 더 커졌는데 경복궁의 전체 건축면적[28]은 고구려의 안학궁보다 더 크며 신라의 궁궐인 경주 월성 보다도 훨씬 더 넓고 일본의 교토고쇼[29] 보다는 약 5.7배, 그리고 천황궁인 메이지 궁전(明治宮殿)[30] 보다는 약 8.4배, 이후 새로 만들어진 고쿄[31] 보다는 약 10.2배 이상 더 큰 총 건축면적을 자랑한다.심지어 자금성과 비교해도 그렇게 큰 차이는 안 느껴질 정도이다.[32]
아예 목재를 거의 사용하지 않은 수원화성 또한 그 크기를 보면 굉장히 웅장한 편이다. 보편적으로 인간은 크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쪽이 더 많으므로 최상류층[33]의 가옥이나, 왕궁, 사찰은 그 규모가 커지고 구조가 복잡해졌다.
당장 임진왜란 직후만 해도 미륵전, 팔상전, 각황전 등 양반과 왕실의 지원으로 대규모의 불교 건축물들을 지은 바가 있다. 물론 목재 부족으로 작은 나무를 짜맞추거나 울퉁불퉁한 나무를 그대로 쓴 흔적이 보인다.
참고로 거목 고갈로 인한 건축물의 크기 축소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도 마찬가지로 중국의 사례만 봐도 당나라 시절 대명궁이 수백년 뒤인 명나라 시절 자금성보다 훨씬 더 크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기후와 나무 품종상 한반도에 비해 목재 자원이 상대적으로 풍부했지만 한반도의 겨우 소나무 자체가 빨리 자라는 품종이 아니고 이미 고려시대때 부터 삼림자원 고갈로 거목들이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단일 건축물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더 빨리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단일 건축면적이 고려시대 이후로 작아졌다는것도 오해로 실제로 현재는 사라진 조선의 거대 건축물들을 보면 단일 건축면적이 결코 작은 편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연산군 시절 만들어졌던 서총대 같은 경우 무려 천 명이 앉을 수 있는 최소 수십미터 이상의 크기를 자랑했으며 서총대 1 서총대 2 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진 흥천사의 5층 사리각 또한 굉장히 큰 크기를 자랑했다. 흥천사 사리각 1 흥천사 사리각 2
그외 조선의 왕립사찰인 회암사의 경우도 대웅전 격인 보광전의 크기는 조계사 대웅전이랑 비슷한 정도이고 대표적인 거찰로 일컬어지는 황룡사의 금당이나 미륵사의 강당 또한 단일전각으로서 규모는 교토의 절들에 미치지 못하며 종묘의 정전 또한 렌게오인 산주산겐도보다 길이가 짧고 너비가 좁아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건축물은 산주산겐도로 알려져 있고 없어진 건물들을 따져보아도, 한국사에서 가장 큰 건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안학궁 중궁과 발해 상경성 2궁전도 건축물의 넓이는 히가시혼간지 고에이도보다 작으며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전소된 도다이지 다이부쓰덴은 정면 85.8m에 측면 50.3m로[34] 두 왕궁보다 넓은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라는 의견을 제기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남은 터를 이용해 정확히 측정을 해봤을 때, 안학궁의 중궁 1호 궁전은 정면 길이는 87m에 측면 길이는 27m였으며 이는 당나라(唐)대의 황궁인 대명궁의 정전 함원전(含元殿)의 정면과 측면 길이가 각각 75.9m와 41.3m인 것과 전소된 고대 도다이지 다이부쓰덴의 정면 85.8m, 측면 50.3m에도 결코 크게 뒤지지 않는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나라현 공식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도다이지 건축에 신라 출신 목수가 총감독을, 거대불상은 백제 출신이 디자인했다고 하며, 사자 석상의 경우 송나라 출신이 작업했다고 하므로 이러한 거대건축물들을 건축 할 수 있는 능력이 동시대 한반도에도 분명 존재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위에서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보다 더 크거나 비슷하다고 설명된 교토고쇼 조차 정전인 자신전(紫宸殿)의 크기는 정면 33m 측면 23m로 경복궁 근정전의 크기가 정면 30m에 측면 21m 그리고 경회루가 정면 34.4m에 측면 28.5m인것을 생각해보면 특별히 규모상에서 큰 차이는 보이지 않으며 이렇게 객관적인 크기 비교를 하였을 경우 오히려 한국 건축물들만 유독 규모가 작았다라는 근거는 역으로 희박해진다.
또한 서총대의 경우 그 크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므로 확실히 말할 수가 없지만 《연산군일기》의 "1천 명은 족히 앉을 만하다"와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란 기록만 보더라도 그 크기가 굉장히 컸다는 걸 분명 알 수 있다. 그리고 《중종실록》의 기사에는 이런 구절마저 나온다.
창경궁(昌慶宮) 후원에 높이가 1백여 척이나 되는 누대를 쌓고, 이름을 서총대(瑞葱臺)라 하였다. 그 위에는 1천여 인을 앉힐 만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못을 파고 그 곁에 정자를 지었다.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2번째기사 中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2번째기사 中
서총대를 제외한 조선시대 건물들의 경우 웬만큼 큰 객사 건물도 결국 근정전의 규모를 넘어서는 일은 거의 없었고, 절의 경우 쇠퇴하거나 향교로 개조되는 통에 산으로 들어가며 규모가 작아졌기에 서총대가 굉장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라고 볼 수 있겠지만 애초에 전세계 모든 거대 건축물들은 해당 문화권내에서도 특이하게 큰 규모에 속하는 건축물들이다. 즉, 그런식의 기준을 적용하면 다른 문화권의 거대 건축물들도 모두 평범한 경우들이 아닌 지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역대 한국 건축물들은 단일 건축면적에서도 특별히 작은 규모가 아니었으며 당연하지만 조선시대 건축물들의 경우에도 실제 수치상 단일 건축면적에서 특별히 규모가 작지않았다는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중, 근세에 피라미드 같은 건물을 짓지 못했다고 중, 근세와 르네상스 시대가 퇴보한 시대인게 아니며, 삼국시대 신라의 왕릉이 통일신라의 왕릉보다 더 크다고 해서 삼국시대 신라가 더 찬란하고 위대한 시대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특히 왕궁, 종교, 선전용 건축을 제외하면 건축 기술이 발전하면서 커다란 건축 수요는 점차 줄어들었다.
4.3. 기술과 화려함
왕실 건축 이외의 양반 가옥이나 절, 관청 등등의 건축물들을 보면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들 보다 구조적, 장식적으로 단조롭고 규모도 작은 경우가 많다라는 의견도 일부 있다.사실 한옥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마루식 구조와 온돌식 구조가 합쳐지고, 유교적 사상이 심화되고, 건축 기술, 민간 경제가 더 더욱 발전됨[35][36]에 따라 보다 복잡한 구조의 집들이 지어지는 방식으로 계속 건축 기술들이 꾸준히 발전하게 된다. 특히나 조선시대의 건축 기술의 발전은 수원 화성 같은 당대 동양 기준으로도 고난이도의 거대 건축물 또한 건축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까지 발전하게 되었는데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한반도의 전근대 건축 '기술' 자체는 조선시대에 가장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기술적인 측면과는 별개로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화려함이 의도적으로 많이 소거된것 또한 사실이기는 하다. 이는 같은 조선시대 건축이라도 해인사 대적광전 같은 불교 건축은 그나마 이런 기조에서 자유롭게 복잡한 문양과 화려한 채색을 강조하는 '금단청'을 칠했지만, 유교 사상에서 자유롭지 않은 조선의 임금이 거주하는 궁궐들은 오히려 금단청에 비해 화려함과 복잡함이 덜한 모로단청을 의도적으로 택했다는 사실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그리고 정작 조선 건축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점하는 종묘나 서원은 용도 자체가 유교적 건축물의 대표격으로 장식과 단청을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어 의도된 엄숙함을 보인다. 이를 가칠단청이라고 하며, 단청 중 가장 기초적인 것으로 단색의 특정 안료만 칠해놓은 단청이다. 보통 가칠단청은 다른 단청을 칠하기 전 밑바탕으로 칠하는 용도로 많이 쓰는 단청이라 종묘를 비롯한 극소수 건물 외에는 찾기 힘들다. 종묘 단청
결론적으로 단지 사치를 금하는 이런 유교적인 풍조탓에 미적인 측면 즉, 화려함이 많이 줄어든 모습이 선입견을 불러 일으켰을 뿐 실제 건축 '기술' 그 자체는 조선시대의 건축이 그 이전 시기와 비교해 평면적으로 더 복잡하고, 형태가 더 다양하며, 기술적으로도 더 발전되고 더 정교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단순한 일자형 건축에서 탈피해 ㅁ, ㅂ, ㄱ 형태의 한옥이 보편화 되었던 시기 또한 조선시대였으며 당연하지만 민간의 가옥 또한 조선시대에 더 복잡한 형태와 발달한 기술 그리고 좀 더 큰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보덕암의 경우 아예 구리 기둥으로 기둥을 만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강도를 높이는 것도 있겠지만, 우선 기둥이 너무 길기 때문에 비를 맞아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으로 그 이전 시대에는 이렇게 구리 기둥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사용한 예가 없었다.[37]
사실 이 화려함 또한 조선시대에 무조건 억압을 당한것도 아니었는데 전기 경복궁의 경우 경복궁 내의 상당수의 건축물들이 청자로 만든 기와에 용무늬가 새겨진 석조 기둥들로 건축되었으며 후기에도 강화행궁과 외규장각 전도에 묘사된 용미는 심지어 금칠까지 되어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무조건 배격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4.4. 기와 처마끝 수키와의 회칠
처마끝의 수키와에 회칠을 하는 것을 아귀토(瓦口土)질 이라고한다. 현대식 콘크리트를 바른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는데, 전통적인 회칠마감이다.[38] 이렇게 용마루나 막새 등에 흰 회반죽을 칠하면 단순히 기와를 쌓아 만드는 것보다 바람에 더 강하다는 장점은 있으나 태풍이 한국보다 더 잦은 일본에서 회반죽 안 써도 용마루가 멀쩡한 것을 보면 큰 의미는 없는 듯 하다.
원래 아귀토질은 끝에 있어야 할 막새라는 기와나 치미장식이 없을 때 쓰는 방법인데, 막새 대신 회칠을 하는 경우가 보통 1970~80년대 이후부터 많이 보인다. 최초 무형문화재 대목장이었던 배희한에 의하면 잘 짓는 집은 막새기와를 얹고, 그러지 않은 집은 아귀토질을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39]
막새가 없는 이유를 조선 조정의 제한 때문이라고 보는 의혹도 있으나 확실치 않고, 특별히 그런 경향이 있었는지도 불확실하다. 다만 조선시대 헌종이 창덕궁에 만든 가장 검소한 공간인 낙선재의 경우 단청을 생략하고 막새를 쓰지 않았는바 금전적 이유가 큰 것은 사실이다. 기와를 올리는 것은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인데 가난한 집은 막새를 쓰지 못한다. 막새는 보통 기와의 3배 가격이며 장식성이 더 해질수록 가격은 더더욱 오르기 때문이다. 신라와 고려의 많은 관공서와 사찰 건물들을 발굴할때 막새를 쓰지 않은 건축물이 발굴된 적은 단 한군데도 없다. 더구나 앞서 말한 배희한의 경우 일제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고, 아귀토질도 해방 이후 두드러지게 증가한 경향을 보인다.
4.5. 석조건축의 부재
한국의 역사적 건축물들은 대부분 목조건물인지라 전란으로 불타고 무너지고(안학궁, 미륵사, 황룡사 등), 방치되면 목재가 썩어 붕괴되기 때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이라 근처 중국이나 일본, 베트남 같은 다른 한자문화권의 국가들과 비교해 보자면 관광 자원으로서의 건축 유산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한옥이 나무만 쓰는 게 아니라 뼈대만 나무로 해서 다양한 돌과 여러 흙과 복합재를 섞어 만든 일종의 시멘트를 사용해[40] 축대를 쌓고, 벽은 현대 철근 콘크리트 처럼 井자 형태로 여러 차례 엮은 골조에다 진흙을 발라 만들고 바닥에 온돌과 흙을 깔아 만들었지만, 그래도 대형 석조 건물은 역사적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물론 이점은 목조 건물들 위주인 모든 동북아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기는 하다.
다듬은 돌이나 벽돌로 아치의 원리를 이용해 다리를 짓고 성을 쌓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건축을 보여주지는 못했으며, 이 정도의 석조 활용은 석조가 발달하지 못한 다른 문명에서도 흔히 쓰인다.[41] 게다가 주로 생산되는 돌이 주철보다 경도가 거의 2배인 HS)70~80의 화강암이어서 가공하기 어려워 유럽이나 이집트 같은 정교한 석조건축물을 짓기 힘들었다는 반박이 있으나,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 서양에서도 일찍이 화강암을 다듬어 대형 건축물들을 만들어 왔다.[42]
석조 건축 문화권이라고 나무 던져 주면 목조 건축도 멋지게 만들 수 있다거나 그 반대일 것이라 볼 수는 없다. 각자 발달한 기술이 다를 뿐이다. 다만 서양도 '튜더 건축'의 사례에서 보듯 목조를 이용한 건축에도 석조 건축에 버금가는 상당한 내공이 있었으며(로마네스크 시대엔 아예 지붕을 목조 박공으로 시공했다.) 동아시아와 같은 목조 건축문화를 가진 러시아의 경우에는 '키지 포고스트', '콜로멘스코예 목조 궁전'같은 황룡사 9층 목탑이나 안학궁 중궁보다 규모는 더 작지만 그럼에도 꽤나 큰 목조 건축물들을 건축했으며, 노르웨이 또한 러시아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우르네스 목조 교회를 비롯한 여러 거대 목조 건물들을 건축했었다. 또한 목조건축의 지붕구조에 있어서도 트러스 구조를 먼저 적용한 것은 서양이며,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갖다썼다.
이렇듯 석조 건축 발달의 미약함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등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일 뿐이며, 결국 원인은 동북아 문화권에서 어째서 석조 건축 문화가 나타나지 못했느냐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 점은 결국 환경적인 영향을 살필 수밖에 없는데, 건축물들은 어디까지나 그 지리적 환경에서 최적의 재료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겨울이 매우 추운 한국의 자연 환경에서 석조 건축물들은 당연히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1000년을 지속하는 집을 세울 수는 있다. 그러나 100년후에 누가 살게 될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조화를 이룬 한정한 집에 이를 감싸는 즐겁고 안락한 장소면 충분하다"
계성(명나라 시대 건축가)
계성(명나라 시대 건축가)
위 예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애초에 사실상 모든 게 다 있던 고대 중국 문화권에서 석조 건축법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성 축조, 석상 조각 등이 모두 석조 기술이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들을 기존 건축법과 연결짓기만 하면 얼마든지 석조 건축물을 만들 수는 있었다. 그러나 위 사례에서도 보듯이 굳이 그렇게까지 건물을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비교적 재료 수급도 쉽고 가공이 쉬운 목조 건축이 계속 표준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생활하는 환경 내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보려는 습성이 있다. 여기서 최대한의 이익이란 스스로가 만족하는 수준으로, 문화적 관성에 크게 좌우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목조 건축법만으로 사실상 만족이 가능했기에 그보다 더 큰 노력(석조 건축 기술을 대형 건물 건설에 적용하려면 기존 관습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그만큼 큰 시행착오와 노력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을 요구하는 석조 건축을 굳이 지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서양은 고대 로마 문화권을 중심으로 목조 건축보다는 석조 건축이 문화적 관성으로 자리잡았고, 이 때문에 노력과 만족의 기준이 석조 건축으로 잡혔다.
문화 상대주의에 입각하는 이유, 그리고 문화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인 이유 또한 이 건축 논란과 궤를 같이한다. 어느 지역의 어떤 문화가 타 문화권의 같은 종류의 문화에 비해 발달이 미비하다고 해서 서로의 우열이 나누어지는 게 아니다. 발달이 미비한 지역에서는 그 문화가 발달할 필요성이 애초에 없었을 뿐이다.
이처럼 문화와 기술의 발달은 문명의 태생적 우열 때문이 아니라 1차적으로는 문명별 지리적 · 자연적 환경, 2차적으로는 역사적 동기로 이루어지며, 종합적인 발달, 즉 흔히 말하는 대로 문화 자체가 전체적으로 타 문화권에 비해 발달하는 것은 그러한 각기 다른 문화들의 교류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나타난다. 전근대 시기에는 각 문화권별로 특별히 발달한 분야가 있었을 뿐이고, 건축도 그러한 차이점의 하나일 뿐이다.
4.5.1. 벽돌의 사용
알고 보면 의외로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벽돌의 사용에 관한 기록이 상당히 자주 나오고, 수원화성 이전에 전축성 건설도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벽돌 사용이 많았던 삼국시대에도 벽돌의 사용은 국영 사찰의 장식 벽돌이거나, 일부 성곽과 백제의 남조식 무덤 등의 국가의 지원을 받아 건축되고 관리되는 건물들이었다. 사용 빈도에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현격하게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 시대에 벽돌 사용이 중국처럼 많지 못했던 이유는(1) 조선의 토질상 중국 화북 지역만큼 낮은 온도에도 벽돌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아# 조선 후기 중국식의 벽돌 제작 전용 원추형 가마 도입 전까지 좋은 벽돌 만들기가 힘들었고
(2) 대륙성 기후인 중국 화북 지역보다 습기가 많아 벽돌이 흙에 잘 붙지 않았고 [43][44][45]
(3) 벽돌과 관련된 상공업 발전이 부진해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46]
비록 조선 후기에 들어 중국 건축의 영향과 국가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벽돌이 보급되기는 했지만, 담장이나 기단을 만들 때나 종묘처럼 조선 후기에 등장한 화방 벽을 만들 때 종종 사용되는 정도였지만 이조차도 민간에서는 일정 크기의 자연석들을 수집해 적당히 가공한 후 빈틈을 흙으로 마감하는 수준이었고, 왕실 건축에서나 제한적으로 벽돌을 구워 시공하는 특수제작의 성격을 뗬기에 때문에 벽돌이 사용되었다는 정도의 의의만을 가질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벽돌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관련 기술과 자본이 들어온 개화기~일제 강점기부터였다. 정작 그 때도 콘크리트 벽돌은 비싸서 금액이 어느정도 있는 건축에서나 사용되었고, 미국으로부터 대량원조가 시작된 1950년대 이후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거기서 50년쯤 지나서 고속성장기가 되면 벽돌 양식(조적조)은 외부 마감을 제외하면 무참히 버려지고 철근 콘크리트가 보급된다.
4.6. 한옥은 못, 철물을 일체 쓰지 않는다?
가장 흔한 낭설 중 하나로 한옥은 전통 시대에도 못 등 철물을 많이 써 왔다. 다만 기둥, 인방, 보 같이 무겁고 굵고 두꺼운 자재가 들어가는 부분에는 못을 쓰지 않고 서까래나 마루, 문 같이 가볍고 가늘고 얇은 자재가 들어가는 곳 위주로 못을 썼는데, 대개 못을 쓴 부분은 쓰지 않은 부분에 비해 덜 노출되기 때문에 한옥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만 보고 한옥은 못 하나 쓰지 않는다고 종종 오해하곤 한다. 물론 경량목 구조에 비하면 확실히 못을 덜 쓰긴 한다.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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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당연히 제대로 지은 철근 콘크리트 건물보다는 약하다.[2] 흔히 아파트나 원룸처럼 출입구가 단 한 곳 뿐이면 더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일단 현관이 막혀버리거나 침입자가 현관을 이미 장악해버린 상황이라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3] 출처 : 전남일/손세관/양세화/홍형옥, <한국주거의 사회사>, 돌베개, 2017(4판), 53~66 쪽[4] 출처 : 장기인, <한국건축대계5: 목조>, 보성각, 1993, 56 ~ 63쪽[5] 한옥은 비록 단층으로 짓는다 해도 지붕으로부터 내려오는 하중은 2,3층짜리 목조주택 하중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6] 경복궁 근정전 등 각종 문화재 공사를 맡아온 대목장[7] 파리 고암서방 및 충북 진천 보탑사 등 다양한 문화재 복원에 참여[8] 돌너와집 제외. 해당 항목 참조[9] 사실 단열이 안된다는 건 한국 전통건축의 전체적인 문제라고 봐야 한다. 문과 창이 많아 단열이 힘든 구조이다.[10] [11] 물론 사용하긴 한다. 위 주석 사진의 지붕 상단에 달린 지네모양 금속부착물인 지네철이 대표적인 예. 지네철을 사용하지 않을 때는 건물 외부에 처마를 받치는 보조기둥을 쓰거나, 건물 안쪽에 강다리라는 나무 고정장치를 쓰거나 돌을 끼워 눌러 고정시킨다. 그런데 나머지는 대부분 문에 다는 돌쩌귀나 문고리, 아니면 건축물이 완성된 후 겉에 다는 장식성이 강한 철물 일부 정도다.[12] 그러나 쇠나 철물의 생산이 한정적이고 귀했기 때문에 보통 가난한 민가나 서민들의 집은 쇠나 철물의 이용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었다.[13] 길이는 3.6 m로 규격화되었다.[14] 출처 : 전남일/손세관/양세화/홍형옥, <한국주거의 사회사>, 돌베개, 2017(4판), 134~140쪽[15] 동기와를 썼다 하더라도 반년만 지나면 부식되어 일반기와와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용마루 같은 물이 닿지 않는 곳을 유심히 살펴보면 구리 특유의 붉은 빛이 도니 식별이 가능하다.[16] 출처 http://hi-cell.kr/?attachment_id=632[17] 비용이 높은 것일수록 시공 난이도도 높다.[18] 통기초는 콘크리트 비용이, 줄기초는 유로폼 설치 비용이 더 나온다.[19] 환율 변동에 따라 차이가 있다.[20] 철거된 구옥에서 나온 목재를 활용할 경우에도 그라인더 작업 및 오일스텐 방청 작업이 필요하다.[21] 동제, 금속제 기와는 전통 기와보다 비싸지만 시공 기간이 짧다.[22] 물론 단위 면적당 시공 비용은 단층보다 복층이 좀 더 싸다.[23] 대표적으로 경복궁 팔우정과 향원정, 덕수궁 석어당, 경북의 운조루[24] 법주사 팔상전과 지금은 없어졌지만 황룡사와 미륵사의 9층 목탑은 10층 아파트 높이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25] 고려 충렬왕 때 관후서의 '도선 일기'에 의하면 "땅은 다산(多山)을 양, 희산(稀山)을 음. 옥(屋)은 고루(높은 다락)를 양, 평옥을 음이라 한다. 우리 나라는 원래 산이 많기에 고옥을 지으면 반드시 국운이 쇠퇴를 부른다."고 한다.[26] 그 이전 시대에는 거목들이 부족하지 않았다. 불교와 귀족 문화의 영향으로 금입택ㆍ황룡사ㆍ흥왕사ㆍ안학궁 등 화려하고 장대한 건축도 있었다. 안압지에서는 각종 금동 건축자재들이 출토되기도 했다.[27] 건축물의 수평투영면적. 1층의 바닥면적이 해당된다.[28] 훼손 이전 기준 약 16만 제곱미터다. (출처: 예(禮)로 지은 경복궁, 임석재)[29] 총건평 8482평으로 약 2만8천 제곱미터[30] 총건평 5800평으로 약 1만9천 제곱미터[31] 약 15,643 제곱미터[32] 다만 실 면적에서는 꽤 차이가 있는 게 사진으로 보아도 자금성은 부지(네모) 안에 빼곡히 건물이 들어선 반면 경복궁은 비어있는 녹지가 꽤 많아보인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경복궁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철거 당하면서 소실된 건물터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그런것으로 실제 경복궁은 건축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던 궁궐이었다. 고종 당시 경복궁의 모습 즉, 현재의 경복궁은 경복궁 내의 전각에서 겨우 125동만 복원되어 고종 중건 당시 전각 500여 동의 겨우 25% 수준만 복원된 상황이다. 자세한 사항은 경복궁/역사 문서를 참고.[33] 벌열가문이라 불리던 관직을 독점한 가문들. 북촌에 있던 이들의 저택은 지금 다 사라지고 작은 필지로 나뉘어 근대형 한옥이 들어섰다. 거의 유일하게 남은 윤보선 가옥, 안채 건물 한 쪼가리만 남았음에도 크기가 주변 근대한옥들을 압도하고 중국이나 일본급으로 크고 사치스럽다. 왕족의 잠저였던 운현궁 역시 마찬가지. 운현궁의 사랑채와 대문은 당대 일본인들에게도 찬사를 들었다.[34] 이후 재건된 다이부쓰덴의 크기는 정면이 57.5m, 측면이 50.5m이다.[35] 막상 상업이 발전했다는 식으로 일컫는 고려나 신라보다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더욱 민간 경제(상업, 수공업, 무역)의 발전이 나타났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한국 역사상 최초로 조직적인 상인 조합(유상, 만상, 송상 등), 어음, 계로 대표되는 원시적인 선물, 금융 거래가 태동했으며, 놋그릇[47], 자개, 칠기 등의 생활용품이 시장에 출시돼 대중화되었다.[36] 교역 역시 초기에만 외부적 요인들로 인하여 크게 타격을 받았을 뿐 후기로 갈수록 이전 고려 시대 때 보다 큰 폭으로 늘어나 ‘민간에 의한 무역’이 이전 시기보다 유의미하게 활발해졌다. 인삼을 가공한 상품인 홍삼의 예처럼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주도의 무역 상품이 개발되었고 상평통보 같은 화폐가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또 대중적으로 꾸준히 쓰이던 시기 역시 유학이 확고히 자리 잡은 조선시대 때부터였다. 이전 시기였던 고려는 물물 교환, 현물 화폐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었고, 소수의 귀족들만이 주도하는 제한적인 무역만이 이뤄졌었다.[37] 구리로 감싼 기둥을 중종 6년(1511)에 세웠다는 기록을 보면 그 이전의 건물은 나무기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8] 원론적으로는 회반죽도 콘크리트의 일종이다. 전통회반죽은 석회가루와 물, 고운 흙, 느릅나무 접착제, 잘게 찢은 한지 등을 섞어 만드는데, 석회와 석고가루를 주성분으로 만든 초기 이집트 시멘트와 콘크리트 배합과 비슷하다.[39] 배희한, <이제 이 조선톱에도 녹이 슬었네, 뿌리깊은나무, 1981 p.105[40] 시멘트는 이미 피라미드건축시부터 사용된 유서깊은 건축자재다. 현대건축에 와서야 주류로 쓰여서 그렇지. 우리나라의 경우 몽촌토성을 지을 때 흙과 석회를 60:40비율로 섞어 일종의 고대식 콘크리트를 만드는 증토축성법(蒸土築城法)으로 지어졌다.[41]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도 석조 아치는 쓰인다. 인류의 보편적 지식이지 이것이 뛰어난 석조기술의 증거가 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42] https://www.sciencetimes.co.kr/news/2%EC%B2%9C%EB%85%84-%EA%B2%AC%EB%94%98-%EC%95%84%EC%B9%98%EC%9D%98-%EA%B3%BC%ED%95%99-%EC%88%98%EB%8F%84%EA%B5%90/ 스페인에 남아있는 세고비아 수도교는 2만개의 화강암 블록으로 만들었다.[43] 김왕직 저, 알기 쉬운 한국건축 용어사전 참조.[44] 동아시아에서 벽돌 사용의 본좌인 중국 건축에서도 전축 건축은 대륙성 기후면서 좋은 흙을 구하기 쉬운 화북지역에 특히 집중되며, 습기가 많은 남부로 갈수록 전통 건축에서 벽돌 사용은 감소하고 흙벽이나 목조 건축이 발달하는 모습을 보인다.[45] 그러나 기후 탓만 하기 어려운게 한반도보다 더 습하면 습하지 결코 건조하지 않은 중국 푸젠성, 광둥성, 타이완 섬에서는 벽돌이 다양한 건축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참고1 참고2 더욱 근본적인 원인은 아래에 나오는 상공업의 부진이다.[46] 사치품 중 하나인 비단의 경우, 그 자체가 일종의 대체 화폐 역할도 하였을 뿐 아니라 수요가 일정했기 때문에 공급이 자연스럽게 요구되어 원활한 수요-공급이 이루어졌지만, 벽돌의 경우 건축자재였고, 또한 비교적 높은 단가를 가진 고급 자재였기 때문에 고급 건물의 신축이 일정하게 발생하는 수요가 없이는 벽돌의 공급 역시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조선시대에서 건물은 왕실의 감시와 더불어 검약함을 강조하는 조선의 사상적 제약 때문에 발달이 늦었다.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중인계층이 성장하는 조선 후기 조차도 건축 분야에는 비교적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47] 한국은 전통적으로 ‘그릇’의 용도로 도자기가 아닌 놋그릇을 썼다. 화려한 도자기가 적은 것도 역시 이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