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익창 吳益昌 | |
<colbgcolor=#a52a2a><colcolor=#fff> 출생 | 1557년(명종 12년) |
전라도 무장현 (現 전라북도 고창군) | |
사망 | 1643년(인조 21년)(향년 79세) |
본관 | 함양 오씨 |
공훈 | 익사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 |
자 | 격원(格遠) |
호 | 사호(沙湖) |
묘소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성산리 |
부모 | 부친 오인(吳寅)# 모친 전주 이씨 |
배우자 | 함풍 이씨 서산 유씨 |
자녀 | 장남 오전(吳腆)# 차남 오엽(吳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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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익창(吳益昌)은 1557년(명종 12년) 전라도 무장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유원(裕遠), 호는 사호(沙湖)이다. 참판 오치선(吳致善)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진사 오인(吳寅)이다. 1579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2. 생애
1589년 기축옥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신원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1597년 명량 해전 당시 통제사 이순신이 전선 12척만 거느린 것을 본 전라도 연해민들이 피란길에 올랐으나, 이들을 설득하여 피란선을 동원하여 수군의 후방을 지원하였다. 또한, 의복과 군량을 공급하는 한편, 솜이불을 모아 물에 적셔 배에 펼쳐 철환을 막게 하였다.광해군 대 1613년 임해군 역모 사건을 평정한 공로로 익사원종공신(翼社原從功臣) 1등에 참록되었다. 이이첨의 실정에 회의를 품었고, 공조정랑에 있던 오익창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심원동(深源洞)에 기거하며 시를 짓고 교육에 힘썼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이 강화도로 피란하자, 도내에 격문을 보내 식량을 모아 강화도로 운반하였다.
1643년(인조 21년) 심원면에서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3. 저서
문집으로『사호집(沙湖集)』 3권 2책이 있다.[1]4. 사당
1713년(숙종 39년) 전라도 유림의 공의로 죽산사(竹山祠)[2]를 건립하여 배향하였다.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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