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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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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화인물(1998-2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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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훈장 무궁화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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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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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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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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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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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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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 초대 회장
유일한
柳一韓[1]|New Ilhan
[2]
파일:external/jmagazine.joins.com/org_29171735.jpg
출생 1895년 1월 15일[3]
평안도 평양부 (現 평양시)
사망 1971년 3월 11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 세브란스병원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1)
묘소 서울특별시 구로구 경인로 8 (항동 1-7) 유한공업고등학교
본관 진주 류씨 토류계[4]
신체 170.2cm
학력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 /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MBA)
스탠퍼드 대학교 로스쿨 (J.D.)
가족 아버지 류기연 (柳基淵, 1861~1934)[5]
어머니 김확실 (金確實, 1873년~1958년)[6]
누나 유선형
남동생 유중한[7], 유명한, 유동한[8], 유특한
여동생 유선한[9], 유신한[10], 유순한[11]
배우자 호미리 (胡美利, 1896~?)[12]
딸 유재라 (柳載羅, 1929~1991)[13]
장남 유일선 (柳逸善, 1935년생)[14]
손녀 유은영 (柳恩令, 1962년생)[15]
종교 개신교[16]
천여(天汝)
경력 유한양행 설립자
서훈 동탑산업훈장 수훈
국민훈장 모란장 수훈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대학 시절2.3. 청년 사업가2.4. 유한양행 설립2.5. 독립운동, 군인으로의 삶2.6. 광복 후
3. 가계도
3.1. 형제 관계
4. 유산5. 기타
5.1. 공익, 신용, 정직5.2. 기업 경영5.3. 사회 사업5.4. 세금
6. 어록7. 여담8. 연표9. 상훈10. 관련 자료

[clearfix]

1. 개요

한국에 와서 보니까 참 제일 불쌍한 것이 한국 청년들이에요. 왜인가 하니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변변치 못하고, 또 고등학교라든지 그런 데 가면 비용이 많아서 머리는 좋긴 해도 여유가 없어서 못 가는 사람도 많고...[17]
생전 육성 인터뷰

대한제국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시기의 기업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 사업가이자 유한양행의 창업주이다.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한평생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을 한 데다 전 재산을 그대로 사회에 환원하였기에 한국에서 모범적인 기업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표하는 인물 중 가장 상징적이다.[18]

2. 생애



1895년 1월 15일 평안도 평양부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시기 유년기에 미국 유학을 떠나 자립하면서 미시간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식품사업가가 되었으며, 귀국한 후 제약업을 선택하고 1926년 서울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하여 직접 차를 몰고[19] 홍보와 보급에 나서는 등 식민지 조선의 전국 각처에 의약품과 생활용품 등을 공급하는 데 헌신했다.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하고 후생복지시설을 세우는[20] 등 회사의 임직원에게도 복지를 챙겨주었다. 또한 조선의 독립운동에도 힘써 맹호군 창설을 주도하고 냅코 작전에 직접 참여하는 등 재미한인사회에서 여러 활동을 했다. 일찍이 식민지 시기에 만주, 중국, 대만, 일본 등 해외 시장까지 진출했으며 광복 후에도 계속 기업을 운영하면서 윤리 경영과 모범 납세, 국익 우선, 정경유착 사절을 원칙으로 삼았고, 전쟁을 거친 기업을 재건하는 수고를 겪기도 했다. 이후 이승만, 박정희 시기 정치 자금 미납에 대한 보복조치로 세무 조사를 받았으나 탈세 내역이 발견되지 않아서 박정희로부터는 되려 훈장을 받기도 했다. 산업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유한공업고등학교유한대학교를 설립하거나 보건장학회, 연세대학교를 비롯한 각종 공익재단에 여러 차례 기부를 하는 등 사회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말년에 회사 경영권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일임했으며, 1971년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사회와 교육에 기증했다.

이 때문에 일제 및 독재 정권과의 결탁, 정경유착, 노동자 탄압, 탈세, 부정 축재 등의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의 대한민국 기업인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위인(偉人)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21] 가족 경영이라는 것이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으며 대기업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 등도 당연하다는 듯 거의 대부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한국의 상황이지만 가족 경영 자체에 대해 매우 나쁘게 보는 이들에게는 이 부분마저도 좋은 평가를 받는 기업인이다.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 석사, 스탠포드 로스쿨 법학 박사라는 화려한 학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22] 말년에 연세대학교에서도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래서 가장 자주 불리는 호칭이 '유일한 박사'이다.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잘 상한다는 숙주나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A]를 설립했다.

2.1. 유년기

파일:external/www.pharmstoday.com/99037_24370_632.jpg

1895년 1월 15일 평안도 평양부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 1861~1934. 8. 28.)과 충주 김씨(忠州 金氏) 김확실(金確實, 1873. 5. 22.~1958. 10. 4.)[24]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유일형(柳一馨)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자 당시 평양부에서 재봉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던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4년 당시 9살에 불과한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25] 당시 유일한의 아버지는 미국의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앙이겠거니 하면서 유일한을 미국 대륙의 정중앙으로 보내게 된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 준 미국 돈(달러)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26]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 때 일본 제국 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이름을 바꾼 계기도 비범한데, 중학교 시절 미국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이라고 불렀다.[27] 그는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한(韓)'자를 떠올리고 아예 유일한으로 개명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승낙을 구하였고, 이 요청을 받은 아버지는 일형의 동생들의 돌림자까지 '한' 자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그 시기 이후에 태어난 동생들은 처음부터 돌림자가 '한'이 되었다.

2.2. 대학 시절

파일:external/blog-imgs-76-origin.fc2.com/2015082704080739a.jpg
고교 미식축구부 시절 사진. 가운데의 인물이 유일한.

유일한은 고교시절 미식축구부에 활동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에는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 입학하게 된다.

위 사진은 한때 미시간 대학교 시절의 사진이고 유일한 박사가 미시간 대학교 미식축구부에서 활동하여 장학금을 받았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다. 우선, 저 사진은 1912년 즉 유일한 박사가 고등학교이던 시절에 촬영된 사진이다. 미시간 대학교에 선수였다는 증거가 없다.

대학생 시절, 학비가 부족한 유일한 박사는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전기 변전소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1 #2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 의회에 참여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 때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다만 이승만이나 서재필 등이 미국에 의존하는 듯한 태도[28]를 많이 보이자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2.3. 청년 사업가

대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재미(在美) 중국인중국계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내에서 트럭이 전복되는 사고가 발생했고,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기자들이 이를 보도하면서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하게 된다.[29]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A]를 설립했다.

이후 1925년에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전문의 호미리와 결혼해 1녀 1남을 얻었다. 미국 철도 회사 고위 임원으로서 중국인 사회에서도 이름 높았던 거부의 딸 호미리는 코넬 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재원이었다. 한편 독립운동을 하며 자산을 모두 쓴 서재필에게 유일한이 찾아와 함께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처 호미리에게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하기로 한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이렇게 청년 사업가로서 바쁜 중에도 1922년에 남가주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포드 로스쿨(Stanford Law School)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2.4. 유한양행 설립

1926년에 귀국[31]하여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다.[32]

부모는 장남 유일한이 보내준 돈으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빈곤과 기아로 인한 질병에 허덕이며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인 《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실망해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에 보낸 줄 아느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일을 하거라."라고 훈계를 했다고 한다.

몸소 민족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고민 끝에 1927년 조국에서의 삶을 위해 돌아왔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왔을 당시 짐더미들을 정리했는데 정리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랐다고 한다. 짐들이 전부 약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는 약이 매우 귀했기 때문이다. 유일한은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중국계 미국인이었던 처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소아들을 치료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당시에는 약이 매우 귀했고 일본이 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연이어 일으키면서 돈, 약품, 금속을 비롯한 모든 물건들은 물론 인력까지 공출해서 뺏어간데다가 식민지라 다른나라와 무역도 못하게 했다. 조선인들이 대표 정해서 사정사정하고 시위도 벌여 봤는데도 전쟁에 본토 경제력까지 짜내며 집중한 일본이 식민지에 줄리도 없었고 설령 준 경우에도 조악한 품질로, 그것도 배급제로 아주 조금 친일파에게만 나눠준 정도였다. 유한양행은 다행스럽게도 보유한 약이 많아서 일본의 눈을 피해 보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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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경영 철학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1928년 7월 9일에 유한양행 최초의 신문광고를 냈다. 당시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 등으로 얼버무렸다. 약장수가 신문에 진출한 격.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링크[33]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했으며, 훗날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고 유일한 본인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렇게 꾸준한 납세를 고집했던 이유는 라초이사를 경영하던 시절, 자신과 거래하던 녹두 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1939년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34]를 실시했다.

2.5. 독립운동, 군인으로의 삶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09년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 소년병 학교에 입학하고,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에서 독립운동결의문 기초작성위원으로 선임되어 대회장에서 직접 낭독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1년 해외한족대회에 참석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42년 CIA의 전신인 OSS(미육군 전략처)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고, 군사 훈련도 받았다.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버지니아에서 12개국 대표 160명이 모인 IPR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전후 일본 처리 문제의 논의에 가담했다. 그리고 미국 워싱턴 OSS의 냅코 작전[35]에 1조 조장으로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 높은 군사, 첩보 훈련을 받게 되는데 당시 유일한의 나이는 무려 50살이었다. 학생 시절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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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OSS 훈련 책임자가 유일한을 평가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 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즉,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다.

하지만 국내침투(1945년 8월 18일) 직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8월 15일)하는 바람에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고, 유일한은 살아 생전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일절 함구하여 동생 유특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냅코 작전의 전모와 유일한 등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참고 자료). 이는 다른 공작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알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이들 열아홉 명[36]이 전부 다 세상을 떠난 후에야 모든 사실이 알려졌다. 참고로 이들은 A, B, C, D 식으로 불렸는데 유일한의 코드명은 그중 첫번째인 A였다.

판본에서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일본이 질것이다라고 예상했고 이에 따라 대안을 강구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2.6. 광복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가서 비어있던[37] 유한양행은 물론 온 국토가 쑥밭이 되자, 이를 재건할 인력을 키우기 위해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를,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한 시범케이스로 어느 기업을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권 생각만 그럴 뿐 현실은 그것을 이용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끼리 정치 자금을 대가로 서로 봐주는 상황이었다. 대표적으로 현대그룹. 정주영은 철저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정부의 대규모 토건 정책을 수주받아 대기업이 되었다.[38] 하지만 유일한은 청렴정직한 성격상 당연히 정치 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이런 행동은 결국 권력자의 좋은 먹잇감이 될 수 밖에 없었고 유한양행은 세무조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국세청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처음엔 예고하고 그 후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조사했다.[39] 그러나 당시 세무 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는 이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김만태 당시 유한양행 세무감찰팀장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20일 정도 조사를 하니까, 무슨 한국에 이런 업체가 있나 싶은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튼 정치 자금을 거절한 일종의 괘씸죄로 시범 케이스로 걸려 국세청으로부터 수개월 간 세무조사를 받은 셈이니 이건 박정희 정권이 명백히 잘못한 것이다.

유한양행이 박정희 정권에서 요구한 정치 자금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리 탈세와 탈루 등 조세포탈 혐의를 낙인 찍어 수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벌였음에도 단 하나의 혐의점도 찾지 못하자 불법적인 정치 자금을 거절한 것을 명분으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여 국가에 이바지한 기업에 누명을 씌워 피해를 입혔다는 비판이 일어나게 되었고,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손실이 생길 것을 대비해 원 재료를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딱 맞춰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1968년 유한양행에 동탑 산업 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계몽사 위인전(어린이 그림 전기) 유일한 편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조사원이 엄격하고 공정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하여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쓰여 있으며,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도 비슷한 언급(다만 여기서는 1계급 특진)이 된 걸 보면 사실로 추정된다. 유일한의 남동생인 유특한도 본인이 따로 차린 회사 유유제약에서 형처럼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고 한다.

참고로 세무조사는 일제 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유한양행을 적산으로 간주해 세금 압박을 가했으나 광복까지 버텨냈다. 대한민국 정부 성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의 후원자가 박용만이었고, 유일한 자신이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좋지 않게 봤으니 이승만이 음해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40] 유일한의 은행 예금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유일한이 이승만의 외교론을 좋지 않게 본 것과는 별개로 유일한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며 그의 외교론이 독립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내 한인들과 독립운동가에게 적지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유일한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우선주의적 외교 정책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면서도 지나친 미국 우선주의를 경계한 것인데 이승만이 유일한을 정적으로 간주해서 지나치게 적대적으로 나갔다는 평이다.[41]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CEO)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했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 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1971년 3월 11일 오전 11시 40분경 세브란스병원에서 손녀 유일링의 학자금 1만 달러를 제외한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하고 묘소 주위의 5천 평은 학생들이 놀도록 유한동산으로 가꾸며 아들은 자립하라는[42] 유언장을 남기고 노환으로 사망했고 유한공고에 안장되었다. # #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서거 소식 기사. 중앙일보에 의하면 1968년 4월에 민간 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컴퓨터(IBM1401)를 도입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건 유일선이 부사장 시절 도입했다고.

그가 기업을 경영했던 시절 지인들이 정치에 뛰어드는게 어떻겠냐며 유일한을 찾아왔는데 당시에는 잘 나가는 기업인들이 정치에 뛰어들기도 해서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유일한은 정치 참여를 거절했고 국가,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죽기 전에도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연세대학교 의료원 세브란스병원에도 주식 12,000주를 기부했다. 기부조건으로 주식을 의학과 연구 교육을 위한 활동에만 쓰라고 못박았다. 이는 세브란스병원이 현재의 대형병원으로 발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유일한과 호미리 부부는 유한양행을 세우기 전에 세브란스의전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올리버 R. 에이비슨 박사에게 각각 연전 상과 교수와 세브란스 소아과 과장을 제의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 경영권 인계에도 일화가 있는데, 196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이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부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한은 처음부터 아들이 회사에 취임하는 것을 탐탁잖게 여겼는데, 임원진들이 유일한에게 록펠러,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사례를 그에게 여러차례 보여준 끝에 결국 유일선의 부사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호사 출신의 유일선을 처음부터 좋지 않게 본 유일한은 결국 의견 차이[43]가 벌어졌다. 유일한의 회고에 의하면, 유일선은 부사장 취임 후 오직 기업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44] 기업인으로써 전혀 틀린 자세는 아니지만, 평생 기업은 수단일 뿐 진정한 목적은 공공의 이익, 국민의 건강, 나라를 위해 때로는 모험을, 때로는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면서 살아온 유일한의 입장에서 아들 유일선의 이러한 의견은 그의 신념과 충돌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회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자신의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거나 사직시키고 보유한 주식도 처분해서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 유한양행에서 근무했던 연만희[45]와 대화에서 유일한은 연만희에게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자신이 죽은 뒤 자손들 중에 정말 능력이 있어서 제 실력으로 들어가는 사람이라면 그것에는 아무 말 할 생각 없다고.[46]

유한양행의 이 전문 경영인 임명은 관례에 따라 모두 내부승진으로 행하고 있다. 그래서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했다. 2020년 기준 CEO인 이정희 대표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인물이다. 정관에 의해서도 6년 이상은 있을 수 없는데다 유한양행 사원으로서 시작이 자리에 오른 뒤 6년 내에는 퇴사해야 하기 때문에 퇴사하여 이후 2021년에는 조욱제 대표가 취임하였다. 현재 조욱제 대표도 1987년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지금의 총괄관리 본부장, 부사장을 거쳐 지금의 대표로 취임한 사람이다.

그를 제외하고 회장을 역임한 이는 1993~96년의 연만희뿐이었는데 2024년 3월 15일 유한양행 정기주주총회에서 약 95% 찬성으로 회장직이 부활하면서 유일한 박사의 유지는 28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47] 허나 회장직은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인지 현재 공석으로 놔 두고 있다.

3. 가계도

3.1. 형제 관계

본인이 은퇴하기 전 자신의 혈연, 친척들을 전원 회사에서 해고했다. 가족들 때문에 회사에 파벌이나 알력 다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였으며, 본인 선에서 정리해야 유한양행을 전문 경영인이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는 세습이냐 세습하지 않냐를 떠나서 지분정리나 교통정리를 일찍 하지 않아서 훗날 왕자의 난이나 경영권 분쟁 등이 이뤄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빛나는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내보내면서 퇴직금을 매우 후하게 주었는데, 이 때문에 아들 유일선과 동생 유특한이 유일한을 상대로 '퇴직금 반환 소송'을 걸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본인들이 받은 퇴직금이 너무 많다고 회사에 전액을 반환하고자 소송을 건 것이다.[51] 이 때문에 이 소송을 맡은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있나?"라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후에 타 재벌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보면 판사가 신기해할 만도 하다. 다만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닌 후대에 창작되었거나 과장된 일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

실제로 유유그룹의 공동 창업주이자 남동생인 유특한에게 "특한이 너도, 형처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 경영인을 들이는 데에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권유하자 꽤나 망설인 유특한이 "죄송합니다, 형님. 저는 그릇이 작아서...''라고 했다. 유일한은 "하긴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지. 적어도 친일파만 안 된다면 말이야..."라고 대답했다고 한다.[52] 동생에 의해 반려되기는 했지만 동생에게도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말 것을 권유한 것으로 보아 어떤 형태로든 세습 자체를 매우 싫어한 듯 하다.

계몽사에서 발행한 위인전에는 1954년에 유특한이 "유한양행을 아예 '유한그룹'으로 기업 집단화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유일한은 "쓸데없이 확장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며 유특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유한양행에서 분리된 후에도 유일한과 유특한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유유그룹이 만든 비타엠과 비나폴로도 유일한의 조언을 듣고 지은 약품명이다.

형이 너무 뛰어나서 그렇지, 동생인 유특한도 성공했고 존경받을 만한 기업가다. 유특한은 독립운동이나 미국 유학 등등 여러 가지 사정들로 형이 잠시 기업을 떠나 있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해서 유한양행을 맡아 경영했으며, 본래는 1941년에 3형제ㅡ 유명한, 동한, 특한 삼형제가 설립한 유한무역의 대표였다.

유일한이 친족, 혈연을 전부 퇴사시킬 때 유한양행에서 유한무역의 분리를 선언하고, 1957년에 유한무역을 제약 업체인 유한산업으로 변경하고 최근에 유유제약으로 사명을 변경,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유한양행과 달리 유특한의 후손들이 유유제약을 운영하고 있지만, 여기도 유한양행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성실하게 기업을 꾸리고 있다. 기업이 안정화될 때 즈음인 1975년에 기업 공개를 하고 상장했으며, 유특한 본인도 역시 경영에서 은퇴하고 죽기 전에 유유문화재단을 설립해 형처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후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형을 따라서 유한양행만큼은 아니지만 모범 경영을 원칙으로 유유그룹을 발전시켰으며 그 때문인지 유유제약은 창업 후 단 한 번도 노사분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유일한에게도 가족사의 어두운 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위에 언급된 또 다른 동생 유명한일제강점기 때, 형님인 유일한을 대신하여 당시 최대 민족 자본 기업이었던 유한양행 제2대 사장의 책임을 맡아 운영하며 기업 활동과 기업 존속을 위해, 조선총독부의 강요로 전쟁 지원금을 기부해야만 했던, 소위 친일 행위를 했던 것 때문이다. 선친 유기연과 형님 유일한의 항일 운동 정신과 기업을 운영해야 하지만 현실은 일제 강점기 시절 국민이 겪어야만 했던 이해상충이며 비극이다.[53]

유일한이 미국 유학 중 독립운동에 참여할 당시 이 사람은 친일파가 되어 애국심이 투철했던 자기 형제들과는 완전히 딴판인 행보를 보인다. 그래서 형인 유일한과 동생인 유특한이 유명한과 절연해 버렸는데, 이 때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 놈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 유명한의 창씨개명)라는 놈은 모른다!"였다.[54] 해방 뒤에도 유한산업과 고려문화사 등을 경영하면서 1951년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여객선 사고로 사망했다. 유특한도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는 일본 유학이라는 특수한 경우였다.

4.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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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경 유일한의 가족들. 좌측부터 유일한, 딸 유재라, 아들 유일선, 부인 호미리.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유일한이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 1만 달러만 제외하고[55] 자기 재산을 기부해서 나온 액수는 토탈 407억 원이다. 대기업 회장 재산이 뭐가 이리 적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1971년 기준 407억 원이다.[56] 2021년 기준 7,900억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시간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407억 원이면 돈 걱정이 없는 수준이고 8천 억이면 평생 놀고먹으며 지내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이다. 로또 1등 당첨금이 약 30억 원 대인데, 사실 이것만으로도 집을 사는데 쓰거나 큰 지출이 있지 않은 이상 어지간하면 돈이 부족할 일은 없다. 당장 100억만 있어도 1년에 1억씩 쓰면 100년이 걸리는데 8,000억 원이라는 돈은 말 그대로 3대가 평생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어도 남는 돈이다. 이를 다 사회에 헌납한 셈.지식채널 e. 참고로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0원, 라면은 20원, 짜장면 60원, 커피 60원, 담배는 60~100원, 40kg가 2,880원(한 가마에 8,000원)인 시대였다. 라면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분식집에서 30원, 슈퍼에서 개당 18~20원이었다.참고자료 # 이런 생필품 물가로만 따져 본다면 100배 정도의 상승이 있었으니 현재 가치 4조가 넘는 금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더 기막힌 건 유일링의 아버지인 유일선은 이 재산마저 거부하려고 했다. 유일선이 "아버님께서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고 유언하셨는데 만약 제가 손녀의 학자금 명목이라는 이유로 1만 달러씩이나 받으면 세상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렇게 받은 딸의 등록금도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유족들은 유일한의 결정을 전혀 원망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정도씩이나 가족 몫으로 주겠다고 한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57]

또한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지 주변의 땅을 상속하긴 했는데, 이는 땅을 '유한동산', 즉 공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유재라 본인도 1991년 미국에서 향년 61세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 측에 기부했다. 유재라의 묘소도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손녀 일링 유는 미국 예일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한양행에서 무급으로 영어회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5. 기타

5.1. 공익, 신용, 정직

유한양행을 경영 중이던 일제강점기 때 당시 영업 담당을 맡고 있던 전항섭이라는 사람이 만주 시장 조사 후 만주에서 헤로인, 모르핀, 아편이나 암페타민 계열의 마약류의 거래가 많은 것을 보고 유일한 박사에게 유한양행도 마약중독자가 많으니 마약류를 섞어서 많이 판매할 것을 제안하자 그는 국민들에게 어쩌자고 무서운약을 먹이려 하냐고 큰소리치며 단번에 거절했고, 전항섭은 그 즉시 해고당할 뻔 했다가 자기 발언에 대해 사죄한 뒤 간신히 영업 담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유한양행이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전무로 승진하였다. 이 일화 내용이 진짜가 맞다면, 전항섭은 하워드 고와 헤럴드 고의 외조부이자 전인범의 조부인 사람이다. 헌데, 유일한 평전(조성기 저)에서는 다른 인물이 그러한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만큼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대단했다.

이 일화 말고 하나 더 중요한 일화가 있다. 국민들의 비타민 섭취를 걱정한 그는 당시 비타민 영양제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1961년 동아제약박카스를 출시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치자 다른 제약업체도 따라서 드링크제를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주주총회에서 유일한 회장에게 "우리 회사도 드링크제를 만들어서 팔아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그에게 의견을 제시했지만, 유일한은 "설탕물 같은 드링크제를 약이라고 속여 팔란 말인가?"라는 말로 주주들의 의견을 기각했다고 한다. 당시 박카스에는 카페인, 타우린, 비타민 성분이 첨가되어 금방 피로가 싹 가시게 하는 기분이 들어 인기를 끌었는데, 유일한은 "이 박카스를 포함한 모든 드링크제는 인체의 전반적인 에너지를 향상시키는 게 아닌, 순간적으로 활력이 솟는 느낌만 주는 제품 같다"라고 생각해서[58] 드링크제 개발을 안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출시된 제품이 지금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비타민 영양제 삐콤씨다. 그 이후로도 알약, 주사제 형태로만 약품을 개발해 왔다가 1989년에 '맥생', 1992년에 소화제 '생위천', 2013년에 '내일엔'이란 이름으로 드링크 분야에 진출했다(현재는 '내일엔'만 판매 중이다).

여러 위인전을 보면, 유일한은 약품 제조에 필요한 원료들의 품질을 살펴보면서 어떤 것을 이용할지를 정했고, 비타민제에 필요한 원료가 모두 떨어지자 해당 생산라인을 원료 수급이 완료되기 전까지 가동 중단했다고 한다. 원래 생산 라인이라는 게 구조상 생산 도중에 정지를 시키면 무조건 회사에 손해가 나기 마련이고, 그 원료가 떨어져도 해당 약에 미미하게 영향을 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바로 중단해 버린 것이다. 그만큼 사용자의 보건과 안전을 생각했고, 그렇기에 세무조사 때 검사 당국에서 유한양행의 약들을 샘플로 검사해 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유한양행 설립 후, 자기 회사의 약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의 약임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자기 돈을 내고 약을 사먹었으며, 약을 사려고 가격을 물어보는 중에 '사장님이라 그냥 가져가셔도 된다'고 말하는 종업원을 혼낸 일화가 있다.

양화대교의 건설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양화대교를 건설하고 다리와 직결하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가격 문제로 토지를 싸게 매입하려는 정부와 비싸게 매각하려는 지주들 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주민들이 담합을 통해 가격을 높게 부르고 있을 때 유한양행도 회사 명의로 도로 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일부 소유하고 있었는데, 해당 실무를 보던 직원이 주민들 편에 서서 가격을 높게 올린 것을 안 유일한이 "국민들이 이용해야 할 건설 사업에 훼방을 놔서 되겠냐"며 직원에게 일침을 가했고, 결국 해당 직원은 유일한의 명으로 정부가 제시한 가격에 토지를 매각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주들도 비슷한 가격에 토지를 매각했다고 한다. # 실미도 사건 약 2주 전에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과 비교해 보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일화다.

5.2. 기업 경영

유한양행 초창기에 신경 썼던 부분이 약품의 케이스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기차역도 없는 도시와의 왕래가 어려운 지역에서 의약품을 받기를 원하는 곳이 많았고, 이 때문에 선로 옆에서 받을 수 있도록 열차에서 던지더라도 깨지지 않는 병과 케이스를 고안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라초이 식품 회사를 운영했을 때도 숙주나물을 저장할 수 있는 통조림을 고안한 것과 비슷한 케이스. 여러모로 미국에서의 회사 운영 경험이 아이디어가 된 셈이다.

일부 위인전에서 기술한 바로는, 시골의 병원에서 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데 혈청이 부족하자 유한양행에 문의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골이 워낙 깡촌이라서 철도역은 있지만 비정차 철도역이라 짐을 내려놓는 게 불가능했는데, 유일한 박사가 혈청을 깨지지 않도록 단단히 포장해서 기관사에게 "XXX역에 환자가 있는데 혈청이 꼭 필요하다. XXX역을 지날 때 던져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59]

근로기준법을 다른 기업인보다 철저히 준수했다고 한다.[60] 직원들에게 주었던 월급의 액수가 상당히 높다. 유일한의 이 의지는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유한양행에 계속 이어져 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제약 기업 중 6,330만 원으로 평균 연봉 1위(2014년 기준)를 기록했다.

5.3. 사회 사업

유한양행 홈페이지에 따르면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한양행 사우공제회, 보건장학회, 유공관리기금 등을 설립하고 1970년에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을 설립하여 생전에 이 기관에 96,282주를 기증했고, 이 밖에 연세대학교 재단에 41,000주를, 세브란스병원에 12,000주를, 자신이 설립한 유한공업고등학교에 40,000주를, 유한양행 사우공제회에 27,218주를, 보건장학회에 17,368주를 기증하였다. 1963년에 다시 연세대학교와 보건장학회에 장학기금으로 17,000주를 기증하고 1965년 유한교육신탁기금 관리위원회를 발족하고 56,000주를 희사하여 교육 및 장학 사업을 확대했다. 1971년 사망할 때에는 140,941주를 다시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했다. 이 기관은 이후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으로 분리되었다. 타계할 때까지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 개인 주식은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에 이른다고 한다.

5.4. 세금

세금 납부에 대해, "소방관들에게 불을 꺼 달라고 할 권리는 이들을 운영해야 할 금액을 지불하는 의무에서 시작된다"며, "탈세하지 말 것"이 평전(조성기 저)에 기록되어 있다. 유한양행에서 국세청에 세금 신고를 하는 직원이 날짜를 착각했다가 뒤늦게 신고를 하여 벌금을 피할 수가 없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헌데 매번 기한을 지키던 유한양행이 늦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국세청 직원이 기다려 줘서 세금 납부를 잘 마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일한은, 매번 제 날짜에 법인세를 신고해 왔다는 것을 기특하게 여겨, 해당 직원에게 보너스보다 더 큰 위로금과 상여금을 직접 전달했다.

2015년 1월 10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969회에서 땅콩 회항 등의 갑질 사태를 다루는 말미에, 유일한의 유언장과 털어도 먼지 안 나던 세무조사 일화를 소개했다. 사실 제작진은 유일한의 가족을 직접 만나려고 유한양행에 연락해 보았지만, 유일한의 자손들이 어찌나 워낙 회사와 관계를 맺지 않았는지 사측은 아예 그들의 연락처도 몰랐다. 여러모로 이날 방송의 백미였던 부분. 이들은 유일한 박사의 추모 행사나 혹은 유한재단에서 여는 시상식에 아주 가끔 참석하는 정도라고 한다.# 딸인 유재라 여사의 경우 자식을 남기지 않고 사망했고, 아들인 유일선 변호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다시 변호사 생활을 했으며 현재는 고령이라 은퇴해 더는 사회활동을 하지 않으며, 그의 딸인 유일링이 그나마 가끔 유한학원 이사로서 한국에 1년에 한 번 꼴로 이사회에 참석하는 정도가 전부라고.

하필 이날 방송에 나온 작자들이란 게 백화점 진상 모녀라든지, 조현아라든지, 김승연과 그 아들이라든지 해서 유일한과 더 비교된 상황. 덕분에 그것이 알고싶다가 방송된 토요일 자정부터 일요일 하루 내내 포털 검색어에 유한양행과 유일한이 실검 순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6. 어록

유일한 박사 온라인 기념관 제공 어록[61]
파일:external/www.donga.com/200706300149_1.jpg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배출한다. 기업의 이익은 첫째, 계속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창출하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정직(正直) - 이것이 유한(柳韓)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두뇌가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발전되는 것이다.
기업의 제1목표는 이윤의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실한 기업 활동의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 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 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다.
기업과 개인적 정실(情實 - 비록 그것이 가족의 경우라도)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을 키우는 지름길이요, 또한 기업을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다.
양질, 염가의 제품 생산, 이것은 기업 성취의 ABC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기업은 물건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 이것이 기업에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 활동을 통한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다.
돈을 벌어야만 하는 사람과 돈을 써야만 하는 사람이 만나서 일체가 되어 일을 할 때, 거기에 창조적 작업이 이루어진다.
기업으로 해서 아무리 큰 부를 축적했다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한, 하얀 시트에 누운 자의 손에는 한 푼의 돈도 쥐어져 있지 아니하는 법이다.
죽음을 눈앞에 보는 연령이 되면 누구나 결국은 자기자신이 평범한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너무나도 부족한 점이 많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연마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 자본이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 증진을 위해 존재하는 기구이다.
기술자가 되려면 자기가 하는 일에 흥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 또 정확히 하여야 한다.
국가, 교육, 기업, 가정. 이 모든 것은 순위를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명제들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바로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위가 된다.[62]
사색하고 관찰하는 습관은 인간의 지적 성장을 위한 촉진제이다.
어느 정도를 아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실패, 그것으로 해서 스스로 나의 존재가치를 깨닫는다면, 실패 그것은 이미 나의 재산인 것이다.
이상적인 인간형성을 위해 근면, 성실, 책임감은 바람직한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급하지 않은 성격까지를 구비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약한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특히 외국인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하나의 인간은 체구를 가지게 되며 그 몸에는 귀, 눈, 코, 입 등의 여러 기관이 부수되어 있다. 그 중 하나의 기관만 없어도 완전한 인간일 수는 없다. 사회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러 사람이 각기 사회를 위해서 유익한 기관의 구실을 다할 때 비로소 그 사회는 완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졸업을 축하합니다. 내가 미국에서 보니까 기술이 있는 사람은 잘살고 기술이 없는 사람은 잘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기술자가 되려면 우선 자기가 하는 일에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정확하게 일해야 합니다. 장사를 해도 신용이 으뜸인 것처럼, 물건을 만드는데도 조그마한 속임수가 없어야 합니다. 작은 기술이라도 성의를 다하면 그 기술은 점점 발전하게 되고 그래야만 남으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배운 것에 만족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배우고 연구해서 우리나라의 기술이 세계 수준을 능가하도록 노력하여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졸업을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1970년 제4회 유한공고 졸업식에서.

7. 여담

8. 연표


※ 출처: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

9. 상훈

- 출처: 대한민국상훈, 유일한기념관 홈피

10. 관련 자료



[1] 성 '柳'는 류로 읽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류(성씨) 참고.[2] 본인이 직접 사용한 영문명이므로 개정된 표기의 이용은 자제할 것.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Yu Il(-)han,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Yu Irhan이다. 특이하게도 버들 류를 성씨로 사용하는 이름치고는 Ryu가 아닌 New로 성씨를 정했다. 본인의 유언장에서는 (이 영어 이름의 음차인) 일한 뉴, ILHAN NEW, 柳一韓을 병기했다. 아무래도 한-영 표기법이 정해지지 않은 시기에 미국으로 넘어갔으니 그럴 만도 하며, 원래 그의 고향인 평안도에서는 ㄹ 두음법칙은 있었지만 ㄴ 두음법칙이 없어 이런 한자를 '류'라고 읽을 것을 강제하는 북한 정권이 생기기 전까지 '류'를 '누'로 읽었다. 다만 유한양행의 유한은 Newhan이 아닌 Yuhan이다. 그 밖에 Dean이란 영어 이름도 쓴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나온 Janet, Ilson은 유재라와 유일선의 영어 이름이다.[3] 음력 1894년 12월 13일. 희한하게도 그 시절 사람인데도 오랜 미국 생활 탓인지 음력 생일을 쓰지 않았다.[4] 진천군파 27세손 ○형(○馨), ○복(○馥) 항렬. 본명 류일형(柳一馨).(족보)[5] 1861~1934.8.28.[6] 1873. 5. 22.~1958.10.4. 충주 김씨 김경우(金景禹)의 딸이다. 이후 김기복(金基福)으로 개명했다.[7] 柳仲韓. 1899. 10. 17.~요절[8] 柳東韓. 1918. 11. 6.~1979. 7. 18.[9] 柳善韓.[10] 柳信韓.[11] 柳順韓.[12]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의사다. 박사의 유언장에서 딸에게 아내의 노후를 맡기는 내용으로 보아 그의 사후에도 더 살았던 듯하다.[13] 1929.10.19.~1991.3.19.[14] 1935.6.3.~[15] 미국명 유일링(Il Ling New)으로 한국계 미국인이다. 유일한의 유일한 손녀다. 딸은 아예 후손이 없는 상태에서 사망했고 아들 또한 딸 한명이 전부이며 그 손녀도 후손이 없는 관계로 그의 직계는 아예 끊겼다. 사실 유일링이 만약 자신이 자식을 낳으면 자식이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경영권이든 재산이든 할아버지 팔아 조금이라도 이권을 챙길까봐 아예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16] 기사[17] 이 시절까지만 해도 고등학교만 나오면 나름 엘리트 취급 받았고, 보통은 가난한 환경 때문에 국졸~중졸인 경우가 많았고 특히 여자들은 아들, 특히 장남만 대학에 보낸다는 풍조 때문에 대부분 국졸에 국졸조차 못한 완전 무학도 있을 정도였다.[18] 독립운동을 했거나, 빈민구제사업을 하는 등 유일한 박사와 비슷한 행보를 하나라도 보인 기업 총수는 동화약품, 오뚜기 등 많이 있지만 이것들을 모두 하고 자녀 및 친인척에게 경영권은 물론 재산을 아예 안 물려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기업 총수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아니 한국사에서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포스코의 박태준 회장도 자녀에게 경영권은 물려주지 않았지만 재산은 물려줬다.[19] 한반도에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기는 1910년대 후반으로 보이므로 12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이다.[20] 1930년대 부천 소사공장이 건립될 때 부지에 독신자 사택, 상하수도 시설, 집회소, 운동장, 화원, 동물 사육장, 양어장, 회의소, 수영장 등을 마련해 주었다고.[21] 국내 재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병철이나 정주영조차도 자신은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자칭했으면서도 이런 비판을 심심치 않게 받으며 국민 대다수는 존경과 불신을 동시에 보낸다. 물론 해당 기사가 극좌 트로츠키주의를 내세우는 노동자연대이기에 걸러들을 필요가 있는 데다 가족 경영이야 장학금 지원, 빈민구제 등의 업적을 이룬 함태호도 절대 포기하지 못한 일이고. 사실 경영이라는 것이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지라 유일한이 시행한 전문 경영인 제도도 기아그룹김선홍처럼 실패 사례가 적지 않지만, 어쨌든 회사를 '나와 내 가족의 소유물'로 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는 점에서 대단한 부분이다. 사실 정주영의 경우 가난한 집 빈농의 아들로서 소 판 돈 70원으로 현대그룹과 범현대가를 키워낸 자수성가의 상징이지만 이병철은 부유한 만석꾼 이찬우의 아들로서 적어도 돈 걱정은 안 하고 살았기에 부유한 노동자라는 자칭이 상당수에겐 위선이라는 거부감을 받기는 충분하긴 했다.[22] 사실상 누구든 대학교까지 수료해야만 사회에서 찬밥 신세를 면하는 현재와 달리 중등, 고등교육기관도 입학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던 구한말 및 일제강점기~박정희 초중반기의 한국인으로서는 더더욱 희귀한 고학력자에 속하는 셈이다. 이승만도 비슷한 사례이며, 더군다나 그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기 때문에 대통령보다도 박사라고 많이 불렸다.[A] 아직도 미국에서 아시안 식품 등을 생산, 유통하는 회사로 존재하고 있다. SCP도 만들었다 다만 1943년에 베아트릭스 식품회사(Beatrice Foods)에 인수된 후 1990년에 베아트릭스 식품회사가 미국의 거대 식품기업인 콘아그라(ConAgra Brands)에 인수되어 현재는 콘아그라의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다. 영어 위키백과의 문서에도 초기 설립자가 유일한이라고 기록되었다#.[24] 김경우(金景禹)의 딸이다. 이후 김기복(金基福)으로 개명했다.[25] 이 당시의 사람들은 아직도 현실 파악이 안 되어 있었고, 결국 6년 후 일제강점기를 맞이한다. 외교권 빼앗기기 전에 미국으로 건너간 게 다행.[26]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는 비슷한 시기(1908년)에 있었던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끼워 넣어 유일한이 자긍심을 되새기는 장면을 만들었다. 실화라고 확인된 것은 아니나, 사건 당시 유일한은 13세였으니 적어도 사건 소식을 들었을 가능성은 있다.[27]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는 직원이 서류를 써줄 때 타이핑을 잘못해서 스펠링이 '형'자가 '한'자로 나온 것으로 각색되었다.[28] 전반적으로 미국의 협력을 촉구했고, 이승만은 우호 차원에서 당시 미국 국가인 'Hail, Columbia'를 부르자고 말했다. 참고로 현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는 1932년에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 의해 채택되었다.[29] 다만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한 묘사는 위인전마다 달라서, 1980년대 계몽사 위인전에서는 "유일한이 아이디어로써 사고를 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또 다른 위인전에서는 "실수로 졸음운전을 하는 바람에 사고를 냈다가 운 좋게 관심이 쏟아졌다"라거나 "사고는 우연이었지만 오히려 기회로 삼아 마케팅을 했다"라는 식으로 서술되기도 했다. 공식적으로는 사고를 기회삼아 마케팅을 했다는 것이 정설.[A] [31]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유일한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미국에서 보내는 바람에 한국어 말하기가 서툴러지고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해졌다고 한다. 그래도 한국어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았어서 이후 한국에 영구 정착하고 나서는 다시 한국어 말하기 감각을 회복했다.[32] 이때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조선인이란 이유로 입국을 거부당할 뻔했으나, 영어와 일본어와 한국어에 모두 능통한 세관 직원 예동식이 통역을 맡아준 덕분에 무사히 입국했다. 이전 주석에 언급되었듯 유일한은 한국어가 서툴러지고 일본어는 아예 할 줄 몰라서 통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 예동식은 이 인연으로 유한양행의 경리로 일하게 된다.[33] 위 광고는 석간 3면에 있다.[34] 이미 이 시점에서 대단한 것. 다시 강조하지만 1939년이다![35] 재미 한인들로 구성된 공작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지하 조직화하려던 작전이었다.[36] 유일한을 제외한 나머지의 이름은 가나다순으로 김강, 김필용, 김현일, 박순동, 박기벽, 박형무, 변일서, 변준호, 이종실, 이종흥, 이초, 이태모, 장석윤, 차진주, 최진하, 최창수, 하문덕.[37] 공산군에게 미국 회사로 오인받아 몰수당할까봐, 부득이하게 유일한의 재가를 받지 않고 임시로 임원진을 바꾸고 급히 피난을 갔다.[38] 다만 이후 정주영은 5공 청문회(이 당시 정주영에게 질의한 사람이 바로 부산 동구 초선이었던 노무현 의원이었다. 장세동 등에게 몹시 엄하게 다그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주영에게는 젠틀하게 대했고, 정주영도 여유를 갖고 답변을 했다.)에서 군부 세력에 눈감고 시류에 순응해 바른 소리 못하던 자신의 과거에 죄송하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딱히 이익을 노리고 자금을 줬다기보단 괜한 위해를 당할까 그게 가장 걱정스러웠다고 한다. 실제 유일한 회장이 그 괘씸죄에 걸려 이 사단이 난 것. 물론 유일한처럼 떳떳하고 흠잡을 곳 없이 깨끗하면 태클걸고 싶어도 걸게 없긴 하다만. 그리고 현대와 유한 쪽은 일종의 사돈 관계기도 하다. 현정은의 언니가 유일한의 조카 며느리인 것. 즉, 유특한의 며느리가 현정은의 언니. 거기에 이들 자매는 김무성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들 자매 모친이 김무성의 누나 김문희.[39] 세무조사나 감사 등을 경험해 본 이라면 알겠지만 몸담고 있는 조직이 떳떳한가를 떠나서 세무조사는 예나 지금이나 사실상 그 날의 업무가 마비되는 매우 피곤한 일이다. 국세청 직원들이 무더기로 몰려와 회사를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니 사원도 임원도 사장도 피곤한 날이 된다. 성향을 막론하고 경기가 안 좋을 시 정부가 정기 세무조사를 유예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세금 떼먹어도 봐준다는 게 아니라 저런 업무 마비를 피하게 해 주겠다는 의도. 이 때문에 기업인에 대한 유서 깊은 정치 보복 수단이기도 했다.[40] 유일한은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 의회와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한 바 있는데 이때 참여한 이가 바로 유일한 외에 이승만서재필이다. 이때 이승만이나 서재필 등이 외교독립론에 입각해 있었는데 유일한은 미국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해 유일한은 이승만과 서재필에게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유일한은 자주독립의 주체가 한민족이 되고 그 곁가지로 다른 나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외교론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고 서재필과는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 서재필이 유한양행의 로고를 만들어준 것도 그와 친분이 있고 서로 소통이 되었기에 가능했다.[41] 유일한은 이승만의 외교론을 완전히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6.25 전쟁에 대한 연합군의 파병과 한미동맹으로 미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은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굽히고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는 중도적 입장이었다. 이승만 자신이 정치적으로 도움을 요청한 것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지도 않는 중도 성향인 데다 유일한은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였다. 물론 이승만도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미국에 굽신거리는 외교정책을 펼친 적이 없고 오히려 반공포로 석방 사건 등 미국의 눈치 살피는 것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한 것이 많아졌다.[42] 당시 유일링은 겨우 7세였다. 그래서 유일링의 아버지 유일선이 그 돈의 실질적인 상속자였다.[43] 다만 유일선도 상당히 도덕적인 인물인데, 아래에 나온 일화 말고도 전경련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즉 사람으로서 못쓸 놈이라고 봤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물려받을 만한 그릇은 못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뜻.[44] 당시 유일선 부사장은 컴퓨터를 국내최초로 도입하고 업무의 전산화를 추구하는 등 기업경영과 관련된 선진기술을 도입함으로써 업무효율성을 높였다.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유한킴벌리가 유일선 부사장에 의해서 시작됐다.[45]유한양행 회장, 現 보건장학회 이사장 최근 헌정 기업인으로 추대 #[46] 결국에는 유일한의 유지를 이어 유일한 사후 유일한의 형제자매나 후손 그 누구도 유한양행에 들어가지 않았고 특히 유일한의 직계는 유일한의 유지를 잇는다는 이유로 스스로 대를 끊기까지 했다.[47] 이때 유일한의 하나뿐인 손녀 유일링이 귀국하여 할아버지 유일한의 뜻이 먼저라며 회장직 부활을 결사 반대했다.[48]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49] 유일한 박사의 기일이나 추모 행사가 있을 시 한국을 방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일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현재 미국에서 총기 안전 교육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50]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언니.[51] 물론 그냥 회사에 반납했다면 간단했겠지만 당연히 유일한이 이걸 눈치채고 막았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회사가 퇴직금을 주지 않은 게 되어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물론 아무리 그래도 유일한도 사람인지라 피붙이들에게 퇴직금이라도 잘 챙겨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유일한의 성품을 보면 법을 대쪽같이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욱 반드시 퇴직금을 주려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소송까지 간 것으로 추정된다.[52] 여기서 뜬금없이 친일 얘기가 왜 나오냐면, 후술하겠지만 동생 중 한 명인 유명한일제강점기 때 유한양행 제2대 사장을 맡아 운영하던 시절, 당시 최대 민족 자본 기업이었던 유한양행은 일본총독부의 강요에 의해 전쟁 지원금을 기부해야만 했던, 소위 친일 행위를 했던 것 때문이다. 저런 말을 꺼낸 것으로 보아 유일한에게 평생 한이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53] 참고로 유명한 외의 나머지 동생들은 일찍 죽거나 언론에 노출된 것이 적다. 그래서인지 사실상 유명한이 유일한과 유순한, 유동한, 유특한의 중간형제에 해당.[54] 동생인 유특한 역시 똑같은 말을 했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55] 이후에도 나와 있듯, 유일링의 아버지 유일선(유일링이 당시 미성년이었으므로 그 돈의 실질적인 상속자는 유일선이었다.)은 그 등록금조차 받지 않으려고 했다가 결국 받았으나 반만 쓰고 남은 액수는 다시 사회에 환원했다. 퇴직금 많다고 반환 소송 건 동생도 아들도 좋은 것만 본받았다.[56] 1910년 독립운동가 이회영 형제가 정리한 재산이 40만 원이고 문화재 수집가 전형필이 1943년 훈민정음 해례본을 산 값이 만 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57]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손녀 유일링이 말하길 어릴 때부터 "나중에 뭘 받을 거란 기대는 하지 말아라, 그건 우리 집안 스타일이 아니란다"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을 정도였다고 한다.[58] 실제 카페인의 특성을 감안하면 정확한 지적이다. 피로를 회복시키는게 아니라 피로한 몸을 억지로 각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59] 당시에는 여러 철도 노선의 신호체계가 수동인 통표폐색식이여서 기관사를 하려면 팔힘이 좋아야 했다.[60] 임원들뿐만이 아니라 말단 사원들에게도 격식을 갖추고 정중하게 대했으며 절대로 노동력 착취를 일삼지 않고 합당한 대가를 주었다고 한다. 물론 유한양행 내에도 이를 지키지 않는 임직원들이 많았는데 유일한이 이들을 전부 해고해버렸다. 그들은 적반하장으로 유일한에게 따졌으나 유일한 박사는 "근로기준법도 모르는 바보 녀석들에게 우리 회사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 라고 일갈하며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고 한다.[61] 원래는 유한양행 홈페이지에도 어록을 포함한 여러 소개 항목이 있었는데 여기와 겹치는 내용 때문인지 지금은 기본적인 소개글 페이지 하나만 남았다.[62] 해고되기 전의 유일선 부사장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그는 "먼저 개인이 있고 그 후에 가정과 교육, 기업, 국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했고 이에 "나는 유한양행을 그런 식으로 키우지 않았다. ​국가부터 튼튼해지도록 돕고, 그 다음에 국가의 일꾼을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기업과 가정은 그 뒤를 따라야 한다. ​적어도 지금의 이 시점에서는 그래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임하다 보면 내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63] 유한공고의 교가는 안익태가 작곡했다.[64] 파일:306476_161094_572.jpg
1968년 동탑산업훈장 수훈 당시 박정희(164cm)와의 사진.
[65] 임자의 옛 표기. 임자는 그 시절 어른들이 자주 쓰던 2인칭 대명사였다. 박정희도 주변 사람들을 임자라고 부르는 말버릇이 있었다.[66] 창업주인 유일한 박사의 유일한 손녀 유일링 여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