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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ремль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과 붉은 광장 |
러시아어 | Московский Кремль и 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 |
영어 | Kremlin and Red Square, Moscow | |
프랑스어 | Le Kremlin et la place Rouge, Moscou | |
국가·위치 | 러시아 모스크바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0년 | |
등재기준 | (i)[1], (ii)[2], (iv)[3], (vi)[4] | |
지정번호 | 545 |
<colbgcolor=#ddd,#222> 언어별 명칭 | |
러시아어 | Кремль |
영어 | Kremlin |
프랑스어 | Kremlin |
독일어 | Kremlin |
한국어 | 크렘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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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궁.소련 시대에 소련 공산당의 본부로 사용되면서 동구권과 제2세계의 정치 중심지로 군림하였으며 현재에도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되면서 러시아 정치의 중심부로 자리하고 있다. 냉전 시절에는 백악관의 정반대편에 있는 또 하나의 세계 권력의 축이자 공산주의의 상징물로 여겨져 왔다.
어휘 '크렘린(끄례믈)[5]'은 본디 러시아어로 성채, 요새를 뜻하는 일반명사[6]지만 다른 설명이나 지명 표기 없이 크렘린만을 말한다면 러시아 대통령궁인 모스크바의 이 크렘린을 가리킨다.
1.1. 모스크바 이외 도시의 크렘린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카잔, 벨리키 노브고로드, 니즈니 노브고로드 , 아스트라한같이 중세 시절부터 좀 역사가 있다 싶은 도시는 대부분 크렘린이라는 이름의 성이 있으며 이 크렘린 자체가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건설되어 온 요새인 만큼 러시아와 함께 루스의 후계국에 속하는 우크라이나에도 크렘린이 존재한다. 다만 또다른 루스의 후계국인 벨라루스에는 크렘린이 있었다는 흔적만 있고 온전한 크렘린은 남아 있지 않다. 이들은 비록 모스크바 크렘린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상당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되는 등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런 지방의 크렘린을 부를 때는 도시 이름+크렘린으로 따로 부른다. 다만 모스크바의 크렘린은 대문자 Кремль, 러시아 여러 도시에 있는 성채/요새는 소문자 кремль로 표기한다. 현 러시아에서 사용되는 우표(5루블, 50루블 등)에 그려진 끄레믈은 모스크바에 있는 그 끄레믈이 아니라 각 지방의 요새다. 카잔시의 크렘린 러시아 정교회 성당과 이슬람 모스크가 모두 위치해 있다. | 니즈니 노브고로드시의 크렘린 |
벨리키 노브고로드시의 크렘린 | 수즈달의 크렘린 |
이 문서에서는 모스크바 크렘린을 주로 설명하고 있다.
2. 배치
크렘린 궁 설계도 |
17번 건물은 크렘린의 주출입문이자 가장 높은 탑인 트로이츠카야 탑이다. 20번 건물은 보로비츠카야 탑이다. 21번 건물은 보도프즈브드나야 탑이고, 27번 건물이 모스크바 강을 방비하는 베클레미세프 탑, 28번 건물이 콘스탄티노-옐레네스카야 탑이다. 29번 건물은 나바트나야 탑이고, 31번 건물이 유명한 스파스카야 탑, 32번 건물은 방어용으로 지어진 세나트스카야 탑, 33번 건물은 니콜스카야 탑이다. 34번 건물은 북부 아세날나야 탑이며, 35번 건물이 중앙 아세날나야 탑이다. 37번은 해자를 메워 만든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며, 39번은 국립 역사 박물관, 40번은 성 바실리 성당이다. 41번 건물은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전람회장인 마네쥐 전시관이다. 43번 건물은 러시아 최고 백화점으로 꼽히는 굼 백화점이다. 44번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아시아-아프리카 연구소다.
3. 역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동유럽의 주요 민족은 슬라브계, 게르만계, 투르크계, 그 외 토착 민족 세력들로 나뉜다. 이들 중 프리피야트 강 주변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은 5~7세기 경 동유럽으로 이주해 왔으며, 이들 중 동북쪽의 울창한 산림 지대로 나아가 정착한 이들을 따로 동슬라브족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동슬라브족들은 11세기부터 보로비츠키 언덕의 남서쪽 부근에 정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네글리나야 강과 모스크바 강이 합쳐지는 교통의 요지에 가까운 부근에 집단 거주지가 세워졌다. 이 촌락은 교통의 중심지로써 교역이 활성화됨에 따라 경제도 발전하고 사람들이 이주함에 따라 규모가 커졌다. 그러나 모스크바에 위치한 크렘린 남쪽은 대부분이 평야지대로 되어 있어 수비하기 매우 힘든 지형이라 외적침입을 막기 위한 수비용 장벽이 필수였고 이에 11세기 초반에 그라드라고 하는 목조 성채가 세워졌으며, 1156년에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었던 유리 돌고루키(Юрий Долгорукий)가 이 요새를 대폭 확장하면서 본격적인 크렘린의 역사가 시작된다.당대 러시아는 통일 세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키예프 루스를 중심으로 수많은 제후국들이 서로 키예프 대공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이는 실정이었다. 유리 돌고루키의 시대에는 제후국들 중 하나인 블라디미르-수즈달이 그 위세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황금의 고리라고 부르는 여러 지역에 작은 나라들이 있었고 모스크바 지역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지 않는 벽촌 지역이었다. 블라디미르와 수즈달이 지금은 모스크바의 근교 위성도시인 것과 반대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1237년에 몽골 제국이 대대적으로 키예프 공국을 침공하면서 키예프 대공과 블라디미르-수즈달의 위세가 크게 꺾였고, 본격적으로 타타르의 멍에 시기가 시작되면서 판도는 급변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더 서부 지역에 위치하여 타 제후국들에 비하여 몽골의 피해를 적게 받았던 모스크바가 몽골 치하의 러시아에서 점차 힘을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스크바는 타 러시아 제후국들에게 세금을 걷어 몽골에게 바치는, 일종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몽골 하에서 힘을 키워나갔고, 이에 따라 모스크바의 중심지였던 크렘린 역시 점차 규모를 확장하는 등 점차 제대로 된 성채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12세기 크렘린의 모습[7] |
16세기 초반에는 요새 내부에 이반 대제 종탑이 세워졌으며, 키타이고로드라고 불리던 저잣거리와 크렘린 사이에 폭이 30m에 달하는 거대한 도로를 만들어 요새와 시가지를 구분하게 하였다. 점차 모스크바 대공국이 왕국의 형태를 갖추고, 그 후 대공의 권위를 강력하게 강화한 이반 뇌제가 등장하면서 크렘린은 확장을 거듭했다. 이반 뇌제는 성 바실리 성당을 지어 대공의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으며, 크렘린 궁전도 다시 리모델링할 정도로 모스크바 대공국의 전성기를 이끌기도 했다. 다만 대공국의 전성기도 오래가지 않았는데, 1598년에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차르 표도르 1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면서 약 15년 동안 대공이 없는 동란 시대가 다가왔던 것이다. 이 시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근이 닥치면서 주민의 3분의 1인 200만 명이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613년에 미하일 1세가 동란 시대를 끝내고 로마노프 왕조를 개창한 이래로 크렘린에는 새로운 건축물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미하일 1세와 그의 아들인 알렉세이 1세는 크렘린에 11개의 돔을 가진 사치스러운 구세주 성당을 지었으며, 개선문 등을 짓는 등 크렘린에 대대적인 공사를 계속했다. 1636년에는 차르와 그 가족의 저택인 첼무노이 궁정이 건설되었는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3층으로 된 아름다운 석조 건물로 러시아의 전통적인 목조 가옥 양식을 사용했으며, 궁전 내부 장식은 매우 호화로우며 사치스러웠다. 1656년에는 총대주교 니콘을 위해 파트리알시 궁전이 건설되었고, 당대 유럽 본토에 비하여 뒤떨어졌던 러시아의 재정 수준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표트르 1세가 대대적인 서구화 정책을 펴면서, 1712년에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하였고, 이에 따라 모스크바의 중요성이 하락하면서 자연스레 크렘린의 위상도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다만 러시아의 역사적 수도라는 이유로 황제들의 대관식은 여전히 크렘린 내부의 우스펜스키 성당에서 진행하였으나, 이마저도 1773년 이후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황실이 크렘린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어서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인 1788년에는 여제가 직접 크렘린의 옛 궁궐을 헐고 완전히 새로운 궁전을 지으라고 명하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바실리 바제노프가 설계했던 새로운 궁전은 길이만 630m, 층수는 4층에 달하는 거대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이어서, 이를 위한 부지를 내기 위해서 몇 채의 궁전을 헐어버려야만 했다. 다만 러시아의 열악한 재정은 새 궁전에 들어갈 비용을 버티지 못했고, 공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되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새로운 궁전은 마트볘이 카자코프가 재설계한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로 다시 태어났고, 이 것이 바로 현재 러시아 대통령 집무실로 쓰이기도 하는 크렘린 상원궁이다.
한편 1812년에는 러시아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모스크바를 일시적으로 내주면서 크렘린 역시 한시적으로 프랑스의 군홧발에 짓밟혔고, 프랑스군이 물러간 이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대대적인 수리를 통하여 파괴된 건물들의 보수 공사를 지시하였다. 이후에도 크렘린에는 꽤나 많은 보수공사가 진행되었으나, 전체적인 구조나 골조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크렘린은 러시아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러시아 전역의 최고 정치 중심지로 급부상하게 된다. 소비에트는 구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부르주아들의 도시로 간주하고,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겼으며, 공산당 본부가 크렘린에 위치하면서 크렘린이 다시 러시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에 모스크바에 입성하였으며, 블라디미르 레닌은 크렘린 내의 상원 궁전을 관저로 삼고 그 곳에 주로 머물렀다. 4년 후 레닌이 사망하고 소련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차르 체제의 유물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크렘린 꼭대기에 있던 쌍두독수리[10] 동상을 철거하고 공산당을 상징하는 붉은 별을 걸었으며 14세기에 지어진 추도프 수도원과 16세기의 성당들은 사관학교와 하원의사당으로 바뀌었다. 구세주 성당, 니콜라이 궁 등 크렘린 내부의 대부분의 건물들도 궁전에서 정치국 회의장이나 집무실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참고로 스탈린은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집하였으며, 절대로 크렘린을 외부에 공개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집권한 몇 십년 동안 심지어 모스크바의 시민들조차도 크렘린의 내부 모습을 자세히 알지 못했으며, 크렘린 내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사람들은 최고위 공산당 간부들, 그리고 극소수의 외신 기자들 뿐이었다. 이같은 기조가 바뀐 것은 스탈린 사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였는데, 탈스탈린화를 부르짖은 흐루쇼프가 개방적인 면모를 과시하기 위하여 일부러 크렘린 내부를 외부에 공개하였던 것이다. 흐루쇼프는 레닌 영묘에 안장되어 있던 스탈린의 시신을 크렘린 벽 묘지로 이장하여 그의 권위를 실추시켰으며, 1975년에는 크렘린에서 직접 세계청년학생대축전을 개최하면서 전세계의 이목을 크렘린으로 끌기도 했다.
이후 소련은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 등을 지나 마침내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시기에 이르렀다. 고르바초프는 갈수록 경직되어가는 소련의 사회에 위기감을 느꼈고, 페레스트로이카로 대표되는 개방정책을 펼치면서 소련 경제 및 사회를 일부라도 자유화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시도는 오히려 소련의 붕괴를 촉진하였으니 오랫동안 굳어버린 사회에서 살아 오던 소련 국민들과 공산당원들에게 외부의 문화는 큰 충격이었고, 외부 문화의 대대적인 유입으로 인하여 개혁파와 보수파들 사이에서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결국 소련은 8월 쿠데타가 일어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유폐되기까지 하는 등 막장으로 치닫다가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크렘린 외벽에 있던 "СССР"와 소련 국장은 철거되고 러시아 국장인 쌍두독수리로 변경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 역시 크렘린을 정부의 중심으로 삼았다. 초대 러시아 대통령으로 취임한 보리스 옐친도 크렘린에서 집무를 보았고, 이후 러시아의 실세로 군림한 블라디미르 푸틴 역시 크렘린에서 사무를 처리하고 있다. 현재 크렘린은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어 모스크바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며, 한때 소련 공산당대회나 중앙위원회 회의를 개최하던 크렘린 대궁전은 현재 국제 컨퍼런스장이나 극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2021년 전승기념일 기준 성벽 보수공사 중임이 확인되었다.
2023년 5월 3일 우크라이나군의 드론 공격으로 궁전의 일부가 파손되었다고 러시아 측 매체에서 보도했다.# 자폭 드론의 항속거리 문제 등의 요소를 고려하면 러시아 내 반정부단체가 벌인 일이라는 추측이 있다.#
4. 건축
4.1. 탑
크렘린의 탑은 19개이지만, 성벽에서 분리되어 지어진 쿠타프야 탑까지 합쳐서 20개라고도 한다. 탑들의 꼭대기에는 본래 러시아 제국의 상징인 쌍두독수리가 달려있던 것을 이오시프 스탈린 시절에 오늘날과 같은 색유리로 만든 붉은 별 모양으로 대체했다. 소련이 무너진 뒤에도 이건 그대로 두고 있다.Спасская башня(스파스카야 탑)[설명1] |
Кремлёвские часы(크렘린 시계)[설명2] |
Боровицкая башня(보로비츠카야 탑)[설명3] |
Водовзводная башня(보도프즈보드나야 탑)[설명4] |
Водовзводная башня(니콜스카야 탑)[설명5] |
Кутафья башня(쿠타프야 탑)[설명6] |
Троицкая башня(트로이츠카야 탑)[설명7] |
Беклемишевская башня(베클레미세프스카야 탑)[설명8] |
Константино-Еленинская башня(콘스탄티노-옐레나스카야 탑)[설명9] |
Набатная башня(나바트나야 탑)[설명10] |
Сенатская башня(세나트스카야 탑)[설명11] |
Арсенальная Угловая башня(아세날나야 탑)[설명12] |
4.2. 건물
Большо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크렘린 대궁전)[설명13] |
Теремной дворец(테렘 궁전)[설명14] |
Сенатский дворец(크렘린 상원궁전)[설명15] |
Грановитая Палата(그라노비타야 궁전)[설명16] |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Кремлёвский дворец(국립 크렘린 궁전)[설명17] |
Потешный дворец(환락 궁전)[설명18] |
Арсенал Московского Кремля(무기고)[설명19] |
Оружейная палата(무기고 박물관)[설명20] |
4.3. 성당
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성모 희보 성당)[설명21] |
Успенский Собор(성모 안식 성당)[설명22] |
Архангельский собор(대천사 성당)[설명23] |
Колокольня Ивана Великого(이반 대제의 종탑)[설명24] |
Церковь Ризоположения(성의 성당)[설명25] |
церковь Двенадцати Апостолов(열두 사도 성당)[설명26] |
4.4. 기타
5. 관람
입장료는 성인 기준으로 500루블이다. 입장 티켓 자동발매기가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러시아어가 쉽지 않다면 티켓 자동발매기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크렘린 궁전 입장시에는 검문이 매우 심하다. 공항 출국수속에 준하는 검문을 받으면서 몸 수색까지 한다. 사실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대통령 관저로도 쓰는 곳인 만큼 이런 건물이면 세계 어디라도 웬만하면 어느정도 검문은 한다.[37]주류 반입은 절대 금지된다. 만약 주류를 소지하고 있다면 입구 왼쪽 계단 밑의 물품보관함에 물품을 맡기자. 물품보관료는 무료이다.
열두 사도 성당의 아치형 문을 지나면 순백색과 황금색이 빛나는 사원광장이 나온다. 차르 종과 차르 대포도 여기에 있다. 이 안에서 이반 대제의 종루에 올라가는 것은 따로 250루블, 무기고 박물관은 700루블이다. 목요일 휴무.
무기고 박물관은 이름과 달리 무기류뿐만 아니라 러시아 제국 시대의 황실 금은세공 장식품과 왕관, 옥좌, 마차, 각종 화려한 보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으로 여기는 역덕은 물론이고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의 보물창고이기 때문에 둘러볼 만 하다.
비공개되는 지역이 많다. 크렘린은 비록 관람객을 받고는 있지만 청와대나 백악관이 그렇듯 대부분 대통령 집무실이나 공공시설로 사용되는 곳으로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거나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위병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쫓아낸다.
매주 토요일 정오에 성당 광장에선 근위대 퍼레이드를 행한다.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메트로 2033에서는 이곳을 보면 안 된다는 불문율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크렘린의 첨탑 위에 있는 '붉은 별'을 보면 안 된다. 절대로. 보는 순간 계속 멍 때리게 되는데 문제는 괴물이 자주 나오는 낮까지 계속 보게 된다는 것. 다만 게임에선 빠졌다.
- 영화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에서는 웅장한 영상미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코발트 관련 파일 획득 및 제거를 위해 IMF 요원 이단이 러시아 장군으로 위장해서 침투한다. 그러나 코발트의 함정으로 인해 임무에 실패한 채 바로 탈출을 하지만 그가 설치한 폭탄에 의해 폭발한다.[38] 다음편인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에서 피해 규모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구획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다. 하지만 크렘린 성 내부의 촬영허가는 나지 않았는지 일부 촬영분은 모스크바 크렘린궁이 아니라 체코 프라하의 프라하 성에서 찍었다. 미국 영화계인 할리우드에서 정치적 이유로 러시아나 중국의 핵심 건물들이 날아가는 장면은 함부로 찍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희귀한 크렘린의 폭발 장면인 셈.
- 문명 4와 문명 5에서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문명 4에서는 위대한 스파이 점수를 매 턴 제공하고 도시의 주민 두 명을 스파이 전문가로 고용할 수 있게 하며, 금이나 주민으로 생산을 가속화하는 비용을 깎아 준다. 다만 본작에서는 후속작들과 달리 직접민주제를 채택해야만 금으로 생산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점과, 바로 다음 시대에 퇴보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문명 5에서는 약간의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무료 정책 하나를 제공하며 이 불가사의가 지어진 도시에서 기갑 유닛을 생산할 때 강력한 생산력 보너스를 제공한다. 단 체제 이념을 채택해야만 건설할 수 있고, 모든 도시가 아니라 불가사의가 지어진 도시에만 생산력 보너스를 주기에 다른 이념 관련 불가사의들에 비해 약하다는 평을 받는다. 덧붙여 두 작품 모두 게임 내 백과사전에서는 크렘린에 대해 제대로 소개해 놓았지만, 정작 불가사의 모델링이나 아이콘, 완공 시의 동영상이나 설정화 등은 성 바실리 대성당으로 잘못 나온다. 이 문제는 최신작인 문명 6에서 이름도 성 바실리인 불가사의가 나오면서 바로잡혔다.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도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현대 시대에 진입하면 지을 수 있으며, 효과는 식량, 목재, 금속, 석유의 상업 한계치가 크게 증가하는 것과 영토로 침공해 온 적 유닛에 대한 추가 피해가 크게 증가하는 것, 인구를 차지하지 않는 스파이 하나를 얻는 것. 스파이는 죽으면 재생성되며, 상업 한계치 보너스는 자원에서 적보다 우위에 서게 쉽게 만들어 준다. 추가 피해는 원래부터 이쪽에 전문인 러시아가 지었을 경우 끔찍할 정도의 시너지 효과가 나온다. 콜로세움도 지었다면 더욱 흉악해지며, 이 경우 자유의 여신상을 짓지 않았다면 상대 입장에서는 딱히 뾰족한 수를 내기가 어렵다. 이토록 유용하긴 한데, 문제는 여기서도 성 바실리 대성당이 크렘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잘못 나왔다는 것.
- 레드얼럿2 소련군 미션11에서는 유리가 숨어있는 이 건물을 파괴해야 한다. 연합군 미션12에서는 이 건물 주위의 방어건물들과 엘리트 아포칼립스 탱크 4대를 제거해야 한다. 이미지 연합군 미션에선 실수로 파괴하거나 보병으로 점거하면 패배한다(...). 프리즘 탱크 스플래시에 가끔 터져버린다.
- 혁명기 발브레이브 8화에서 엘엘프가 리젤롯테와 처음으로 만났던 과거를 회상하던 장면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건물이 크렘린과 흡사하다. 참고 이미지1 참고 이미지2 한쪽에서는 귀한 몸이신 공주님이 놀고 있고 다른 구석에서는 정치범(?)들이 끌려가고 있다.
궁전과 수용소를 겸한, 발브레이브라서 가능한 설정
- 썸 오브 올 피어스에서도 등장한다. 잭 라이언과 빌 캐벗 CIA국장과 함께 핵미사일 해체를 사찰하러 러시아에 도착한 뒤 새로 당선된 알렉산더 네메로프 대통령을 만나러 들릴 때 등장한다. 당연히 웅장한 모습으로 등장.
- 영화 레지던트 이블 5에서는 테스트장 중 하나로 등장한다. 레온 케네디와 배리 버튼 일행이 소련군 좀비[39]들과 거대 릭커에 고생한다.
- 메가드라이브판 피구왕 통키에 등장하는 러시아 배경이 이곳이다. 러시아의 스페셜 팀 명칭도 이 궁의 이름에서 유래한 "크렘린즈"이다.
- SD 세계대전에서 소련군 사령부 건물 최종단계로 등장한다. 여러모로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군락과 비슷한 부분.
7. 기타
-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과 거주처를 겸하지만 현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모스크바 외곽 오딘초보에 있는 노보 오가료보(Ново-Огарёво)라는 별장에 거주하며 크렘린은 집무 공간으로만 사용한다.
- http://kremlin.ru로 접속하면 러시아 대통령궁 공식 홈페이지로 접속된다. 한국의 대통령실 홈페이지와 같은 포지션이다. https://kreml.ru로 접속해야 크렘린 박물관 홈페이지에 접속 가능.
- 크렘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3D 투어를 설명과 함께해 볼 수 있다. 정확히는 보안 관계상 일반에 공개되지 않는 구역을 구경할 수 있다. 러시아어로만 서비스되니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Adobe Flash Player가 필요하다.
- 성 바실리 성당을 보고 크렘린이라고 오해하는 일이 잦다. 이건 한국뿐 아니라 영어권이나 심지어 러시아 본국에서도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이 은근히 많아서 구글이나, 구글만큼은 아니지만 얀덱스나 Mail.Ru 같은 러시아 토종 검색엔진에서도 크렘린을 검색하면 성 바실리 성당 사진이 많이 쏟아져 나온다. 둘은 비록 가까이에 있지만 전혀 다른 건물이다.
- 소련/러시아의 국가 유공자 중 급이 높은 사람들은 이곳에 안장된다. 과거 모스크바 대공국과 루스 차르국의 역대 대공 및 차르들의 묘도 이곳에 위치한 아르항겔스키 성당에 있으며, 주로 소련 시대의 위인들은 크렘린 벽 묘지에 묻혀있다. 이들 중에는 스탈린이나 게오르기 주코프 같은 정치인/군인을 비롯 당연히 유리 가가린, 블라디미르 코마로프를 비롯한 순직 우주 비행사들이 포함되어 있고, 소유즈를 타고 우주에 가는 우주인들은 오늘날에도 스타 시티에서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떠나기 전에 크렘린의 우주인 묘역에 참배한다. 그런데 이 우주인들 중에는 미국인들이 자주 포함되어있고, 그 덕에 현직 미군 장교가 미국에 날아갈뻔한 ICBM을 개발한 수석 설계자에게 거수경례를 하는 기묘한 광경이 벌어지기도 한다.[40]
- 냉전 시대에는 소련에서 나오는 정보가 제한되었기에 프라우다 같은 기관지의 행간과 퍼레이드 주석단 자리, 당대회 명단, 호칭 분석으로 당내 권력관계나 서열, 심지어 주요 인사들의 건강까지 파악하는 크레믈리놀로지(kremlinology;크렘린학)이 성행했다. 1980년대 이전의 중국의 정치상황을 분석할때 이런식으로 명절때 천안문 광장에 고위급 인사들이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두고 분석하기도 했고. 오늘날 북한의 당대회 사진을 보고 서열을 분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평양올로지주석궁올로지비슷한 사례로, 5월 1일 노동절이나 5월 9일 독소전쟁 승전 기념일, 10월 혁명 기념일에 행하는 군사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군 장비의 모습을 통해서 소련군의 군사 기술 및 장비의 배치 현황을 추측하는 연구도 있었다. 물론 소련시대 정보접근이 쉬워진 1990년대 이후 기준에서 보면 영 안맞거나 핀트가 안맞는 분석도 참 많기도 했다.
- 공산주의 권력의 총본산이었던 만큼 비밀이 많을 것 같은 인상과 엮여 속을 알 수 없거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을 흔히 크렘린 같은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김종필이 있다. 1971년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나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던 김형욱은 문명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종필을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놈'이라고 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당시,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나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있으면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위협과 견제로 전전긍긍하던 처지였다. 그는 멕시코를 방문하고 오다가 뉴욕에 들렀는데 역시 유엔 취재를 위해 뉴욕에 있던 나와 '우리하우스'라는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는 동아일보 기자로서 당시 컬럼비아 대학에서 1년 연수 과정을 밟고 있던 이웅희도 함께 있었다.
김형욱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멧돼지'라는 별명과는 달리 상당히 두뇌회전이 빠르고 교활한 인간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박 정권 최고의 충신은 나이며 이후락과 김종필은 썩었고 나는 깨끗하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JP 가지고는 안 된다고 내가 각하에게 이야기해서 그를 두 번이나 쫓아냈다"고 열을 내기에 나는 물었다.[41]
"JP하고는 왜 그렇게 원수가 됐습니까?"
-"우리는 철저한 반공이지만 그는 과거에 좌익 운동을 했기 때문이오."
"그렇게 치면 박 대통령은 여순 사건 때 남로당 군책 아닙니까?"
-"각하야 모든 걸 다 불고 전향했지만 JP는 다릅니다. 그는 한 번도 잡혀들어 가지 않았고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갔소. 그는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놈이오."
---
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김형욱은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멧돼지'라는 별명과는 달리 상당히 두뇌회전이 빠르고 교활한 인간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의 주장의 골자는 "박 정권 최고의 충신은 나이며 이후락과 김종필은 썩었고 나는 깨끗하다"라는 것이었다. 그가 "JP 가지고는 안 된다고 내가 각하에게 이야기해서 그를 두 번이나 쫓아냈다"고 열을 내기에 나는 물었다.[41]
"JP하고는 왜 그렇게 원수가 됐습니까?"
-"우리는 철저한 반공이지만 그는 과거에 좌익 운동을 했기 때문이오."
"그렇게 치면 박 대통령은 여순 사건 때 남로당 군책 아닙니까?"
-"각하야 모든 걸 다 불고 전향했지만 JP는 다릅니다. 그는 한 번도 잡혀들어 가지 않았고 경찰이 잡으러 다니니까 군대로 도망갔소. 그는 크레믈린처럼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놈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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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 2017년 12월 1일에 이곳에서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 조추첨식이 열렸다. 대한민국은 독일, 멕시코, 스웨덴과 같은조가 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 크렘린 박물관에서 한국과 무기고, 마지막 황제 대관식 선물의 역사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서 한국 학계에서도 보고된 바가 없었던 장승업의 취태백도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174cm의 대작이며 서명 앞에 조선이라는 국호가 붙어 외교 선물용으로 제작됐음을 짐작 하였다.# 추가로 흑칠나전이층농도 공개됐는데뛰어난 작품이라 전문가들을 감탄케 했다.#
- 2023년 크렘린 드론 폭격 미수 사건 사건이 일어나 크렘린 지붕이 파손됐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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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원어 발음은 끄례믈/크레믈린에 가깝고 크렘린은 영어 표기 "Kremlin"을 들여온 것이다. 과거에는 크레믈린이라고도 많이 읽었지만 러시아와의 왕래가 잦아진 2000년대 이후에는 크렘린으로 읽는 경우가 더 많다.[6] 한국에도 똑같은 사례가 있다. 순우리말 "서울"이 한 나라의 수도(도시)를 뜻하는 일반명사지만, 사실상 대한민국 수도 "서울특별시"를 가리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7] 현재와는 달리 목재 성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다.[8] 알렉산드르 넵스키의 막내 아들이다.[9] 드미트리 돈스코이 시절에 지어진 하얀 크렘린 성벽은 무명용사의 묘와 알렉산드로프스키 사트 사이에 일부 남아있다.[10] 쌍두독수리는 로마노프 황가의 상징이었다.[설명1] 스파스카야 탑은 크렘린에서 가장 유명한 탑으로, 1491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높이는 71m이다. 탑에 붙어있는 시계는 1491년과 1585년 사이 즈음에 등장하였으며, 모스크바의 공식 시간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으며 지름만 6m가 넘는다. 스파스카야 탑 아래의 문은 보통 대규모 외교 행사 때에만 주로 사용되었으며, 한때 크렘린 궁전의 정문이기도 해서 이 문을 통과하는 모든 이는 경의의 표시로 모자를 벗고 말에서 내려와야 했다. 한편 소련 시기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러시아 제국 시절의 구유산을 청산한다는 의미로 꼭대기의 쌍두독수리를 없애고 그 자리에 거대한 붉은 별을 달았으며, 이 별 장식은 360도 회전할 수 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가 들어선 이후, 한시적으로 자동차가 탑 아래의 문을 통과하는 것이 허가되었으나 문화유산 보호를 위하여 지금은 도보통행만이 가능하다. 다만 대통령 공식 행사, 신년행사 등 중요한 행사에는 가끔씩 자동차 통행이 이루어지기도 한다.[설명2] 지름만 6m가 넘고 시침 2.97m, 분침 3.27m인 이 거대한 시계는 스파스카야 탑과 뗄 수 없는 상징으로, 표트르 대제 시절인 1706년 설치되었고 네덜란드에서 수입해왔다고 한다. 3백 년 넘는 세월을 거치며 당연히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시각을 알리는 타종 소리는 15분마다 울리는데, 매시간 15분에는 1번, 30분에는 2번, 45분에는 3번, 정각에는 4번 타종한다. # 0시, 6시, 12시, 18시에는 러시아 국가의 일부 소절 멜로디가, 3시, 9시, 15시, 21시에는 미하일 글린카의 영광(Славься)의 멜로디가 울린 후에 시보의 타종 소리가 울린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는 12시와 6시에 <오브라첸스키 연대 행진곡>, 3시와 9시에 보르트니안스키의 <How Glorious is Our Lord in Zion>이 타종되었으나,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이후 1938년까지는 정오에 당시 소련 국가이기도 했던 인터내셔널가를 타종한 후에 시보를 알렸다. (1936년 음원) 1944년 새로 채택된 소련 국가를 타종하게 하려는 시도는 종의 기술적 문제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1938년 이후 58년 동안 멜로디 없이 시보만 타종해오다가, 1996년 보리스 옐친의 재취임을 맞아 정오와 자정에 애국가(러시아)의 멜로디가 흘러나온 후 시보를 타종하기 시작했다. (1996년 음원[설명3] 보로비츠카야 탑은 크렘린 서벽에 위치한 탑으로, 1490년에 스위스 건축가가 설계하여 지어졌으며 1812년에는 후퇴하는 프랑스 군대의 포격을 맞고 훼손되기도 했다. 이후 1815년에 복구하였으며, 1935년에는 소비에트의 상징인 붉은 별을 꼭대기에 달았다. 스파스카야 탑으로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되자, 지금은 이 보로비츠카야 탑을 통하여 자동차들이 주로 드나들고 있다.[설명4] 보도프즈보드나야 탑은 크렘린 남서부 성벽에 위치한 탑으로, 1488년에 처음으로 지어졌다. 1633년에 물공급기가 설치되면서 '물을 끌어올리다'라는 뜻의 '보도프즈보드나야'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812년에 프랑스군의 포격을 맞아 사라졌다가 1817년에 복구되었다. 높이는 약 61.85m다.[설명5] 니콜스카야 탑(Водовзводная башня)'''
니콜스카야 탑은 크렘린 동쪽 벽에 위치한 탑으로, 이 탑을 통하여 붉은 광장에서 크렘린으로 들어올 수 있다. 1491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1806년에 신고딕 양식으로 개건하였으나 1812년에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1816년에 복구된 것이 또 1917년 혁명 당시 대포로 인해 훼손되었으며, 1935년에는 꼭대기에 붉은 별이 달렸다. 입구에 붙어있던 성 니콜라스의 모자이크 성화는 소련 시기에 회칠되었다가 2010년에 복원되었다. 높이는 약 70.4m다.[설명6] 쿠타프야 탑은 크렘린 요새의 초소탑으로, 1516년에 네글리나야 강변의 다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처음 세워졌다. 원래는 해자로 둘러싸야 도개교로만 건너갈 수 있었으나, 현재는 해자가 메워졌고 그 자리에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 조성되었다. 크렘린에서 가장 낮은 탑으로, 높이는 13.5m이다. 관광객들이 크렘린에 입장할 때 가장 먼저 지나치는 건물이기도 하며, 쿠타프야 탑을 지나면 트로이츠카야 탑으로 들어갈 수 있다.[설명7] 트로이츠카야 탑은 크렘린 북서쪽 벽에 위치한 탑이자 성문으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1495년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며, 1658년에 '삼위일체라는 뜻의 '트로이츠카야'라는 이름을 받았다. 16세기와 19세기 사이에는 시계도 달려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졌고,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황궁 감옥으로도 쓰였다. 트로이츠카야 탑은 소련 시절 러시아 공산당 간부들의 주 출입로로 사용되면서 그나마 성화 위에 회칠을 한 니콜스카야 탑보다 더 과격한 조치를 취하여 아예 모자이크 성화가 갈려 나갔다. 현재는 쿠타프야 탑을 지나면 바로 볼 수 있으며, 크렘린 궁전으로 통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요 출입구다. 크렘린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는 80m 정도다.[설명8] 베클레미세프스카야 탑은 모스크바 강변의 동쪽 모서리에 자리한 탑이다. 1487년에 모스크바 강의 선박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높이는 약 46.2m 정도이다. 1917년 10월 혁명 시기에 지붕이 일부 파손되었으나 이후 복구되었다.[설명9] 콘스탄티노-옐레나스카야 탑은 크렘린 동쪽 성벽의 탑으로, 1490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이후 성당으로 사용되었다가 소련 시절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본디 총안과 해자, 그리고 도개교 등이 있었으나, 19세기에 총안은 벽돌로 덮였고 해자는 메워져 사라졌다.[설명10] 나바트나야 탑은 크렘린 남동쪽 성벽에 있는 탑으로, 1495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높이는 약 38m이다. 전통적으로 종을 걸어놓아 크렘린이나 황실에 슬픈 일이 있을 때에 울렸으며, '나바트나야'라는 이름 자체도 '알리다'라는 뜻의 러시아어 '나바트'에서 따왔다. 1771년에는 이 종소리를 기점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기에, 반란이 진압된 이후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 종의 클래퍼[42]를 떼어버리도록 명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종 자체가 옮겨져 무기고로 이관되었기에 현재는 종을 찾아볼 수 없다.[설명11] 세나트스카야 탑은 붉은 광장과 인접한 동쪽 성벽에 자리한 탑으로, 1491년에 순수한 방어용으로 지어졌으며 1787년까지 이름이 없다가 인근에 상원 궁전이 지어지면서 현재의 '세나트스카야'라는 이름을 얻었다. 높이는 약 34.4m이며, 이 탑을 통하여 귀빈들이 크렘린 궁전에서 붉은 광장으로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설명12] 모서리 무기고 탑은 149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인근에 무기고가 지어지면서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Arsenal'은 무기고를 의미한다. 탑 안에는 비밀 우물이 존재한다고 하며, 1707년에는 대북방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좁았던 총안을 대폭 확장하여 대포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축하였다. 1812년에는 후퇴하는 프랑스 군대의 포탄을 맞고 파손되었다가 1815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높이는 약 60m다.[설명13] 크렘린 대궁전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길이는 124m, 높이는 47m, 평방 25,000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자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3층이지만, 실은 2층에 창문이 두 열이 있는 구조로 실제로는 2층 건물이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황제의 알현실이었으며, 소련 시절에는 공산당 최고회의가 열리는 곳이었으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관저이기도 하다. 크렘린 대궁전에는 러시아 최고 훈장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게오르기옙스키 홀, 블라디미르스키 홀, 알렉산드롭스키 홀, 안드레옙스키 홀, 예카테린스키 홀 등이 있으며, 이 중 게오르기옙스키 홀은 아직까지도 공식 외교 행사에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이나, 실제로 푸틴 대통령이 이곳에 머무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설명14] 테렘 궁전은 17세기 차르의 공식 궁전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첫 차르였던 미하일 1세가 지었다.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3층은 황후와 그녀의 아이들이 사용했으며 4층은 차르가 사용했다. 맨 위층인 5층에서는 러시아 제국 의회인 두마가 열렸다. 적색, 황색, 적황색 타일로 치장된 외관이 독특하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관저라서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설명15] 크렘린 상원궁전은 본디 러시아 제국의 최고 입법기관인 원로원을 위하여 만들어진 궁전으로, 예카테리나 대제의 명으로 1776년부터 1787년 사이에 지어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곳을 관저로 삼았으며 레닌 사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곳에 개인 서재를 두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 정부청사가 들어섰고 현재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로 쓰이고 있다. 이때문에 현재까지도 관광객의 입장을 철저히 제한하고 있다.[설명16] 그라노비타야 궁전은 역대 차르들의 연회실이자 알현실이었다.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간소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황금빛 성화와 모자이크, 이콘 등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 굉장히 호화롭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계단은 '붉은 계단'이라고 하여 역대 차르-황제들이 즉위식 때에 사용하던 계단으로, 니콜라이 2세가 1896년에 마지막으로 사용했다. 스탈린 시대에 전제정의 유물이라 하여 철거하고 대신 인부들의 작업장을 만들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다시 계단이 복구되었다. 현재 모스크바에 보존된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이기도 하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공식 연회실로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 취임식이 여기서 열리며, 1994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문하기도 했다.[설명17] 국립 크렘린 궁전은 크렘린 내에서도 눈에 띄는 현대식 건물로, 니키타 흐루쇼프의 지시로 1961년에 완공되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땅 속에 묻혀 있는 건물의 깊이가 17m나 되어 거의 건물의 절반 정도가 지면 아래에 있다. 궁전의 메인 홀은 6,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당대에는 세계 최고 규모였다. 이 건물이 세워질 때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무기고를 철거하면서 지어졌기에, 옛 건물이 즐비한 크렘린 내부에 현대식 건물을 세우는 것이 비조화를 이룬다는 비판이 많았으나 흐루쇼프가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지어졌다. 쉽게말해 만수대의사당, 인민대회당과 같은 역할을 하기위해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설명18] 환락 궁전은 크렘린 서쪽 벽에 자리잡은 작은 궁전이다. 1652년에 차르의 양아버지 일리야 밀로슬라브스키가 지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국유화되어 왕실 일가가 연극을 보는 등 극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소련 시대에는 스탈린의 사저이기도 하였으며, 그의 2번째 부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자살한 곳이기도 하다.[설명19] 무기고는 1736년에 지어진 건물로, 크렘린 요새의 북부 모서리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붉은 광장과 가깝기도 하여 광장에서도 무기고 건물의 벽면을 볼 수 있다. 한때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지기도 했으나 다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고, 지금은 러시아 대통령 경호처가 입주하고 있어 일반인이 절대 접근할 수 없다.[설명20] 무기고 박물관은 무기고와는 다른 별도의 건물로, 1508년에 처음 지어져 황실 무기고이자 보물 수장고로 사용되었으며 수많은 러시아 장인들이 고용되어 황실에 납품할 세공품들을 만들었다. 이후 성화나 이콘 등도 제작하며 명실상부한 러시아 최대의 보물고로 자리하였다. 소련이 들어선 이후에도 이 곳은 전역에서 가져온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에는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 소장품은 러시아 제국 황제관과 홀을 포함하여 러시아 황실의 유물들이며, 그 외에도 서유럽과 터키의 보물들도 소장하고 있다.[설명21] 크렘린 요새의 남서쪽에 자리하여 곧바로 크렘린 대궁전으로 통할 수 있다. 본디 성모 희보 성당은 역대 황제들의 개인 성당이었으며, 성당의 사제들은 대대로 황족들의 고백성사를 주었다. 1489년에 처음으로 지어져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였고 소련 시기에는 박물관으로 활용되다가 현재는 복원 작업을 거쳐 다시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색 석회 파사드와 금빛 양파형 돔이 인상적인 건물로, 내부에는 중동에서 발견한 50여 명의 성인들의 유해를 봉헌하고 있다.[설명22]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들 중 하나로 꼽힌다. 1475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었으며, 1547년부터 1896년까지 루스 차르국의 차르들과 러시아 제국 황제들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소련 시기에는 성당 용도를 박탈당한 이후 박물관으로만 사용되었다. 이 성당에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주교들과 대주교들이 묻혔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설명23] 대천사 성당은 성경의 미카엘에게 바쳐진 성당으로, 크렘린 대궁전과 이반 대제 종탑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505년에 처음으로 지어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하기 전까지 역대 류리크 왕조 차르들의 무덤으로 쓰였으며, 소련 시기를 거쳐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모 희보 성당과 성모 안식 성당에 비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되는 등 당대 모스크바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6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소장되어 있다.[설명24] 이반 대제의 종탑은 독자적인 종탑이 없었던 성모 희보 성당, 성모 안식 성당, 대천사 성당을 위하여 만들어진 종탑으로, 1508년에 지어졌으며 높이가 무려 81m에 달하여 크렘린 내부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총 22개의 종들이 있으며, 이들 중 가장 거대한 우스펜스키 종은 무게가 65.5톤에 달하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등 최대 명절에만 간간히 울린다. 나폴레옹이 대포로 종탑을 무너뜨리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일화도 있다.[설명25] 성의 성당은 성모가 입었던 성의(聖衣)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막았음을 찬미하기 위하여 지어진 성당이다. 1484년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개인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17세기 중반에 황실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설명26] 열두 사도 성당은 크렘린 내부의 소규모 성당으로, 1653년에 니콘 총대주교가 개인 사저로 처음 지었으며 3년 후 사도 필립보에게 봉헌했다. 니콘 총대주교의 취향에 맞추어 비잔틴 양식으로 5개의 돔을 위에 얹었으며,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련 시절에 일시적으로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어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37] 당연히 백악관도 이정도 검문은 한다.[38] 이때 폭발하는 장소가 바로 스파스카야 탑이다.[39] AKM, RPG, 전기톱 등, 다양한 무장을 하고 있다.[40] 사실 저 세르게이 코룔로프라는 사람은 미국에게도 큰 도움이 된 사람이다. R7로켓을 만들어 미국비행사를 러시아 우주선으로 보내니...[41] 김종필은 1963년 소위 1차 외유를, 1964년 소위 2차 외유를 떠났다. '자의 반, 타의 반'은 1차 외유에서 김종필의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오'라는 말이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나온 말이다.
니콜스카야 탑은 크렘린 동쪽 벽에 위치한 탑으로, 이 탑을 통하여 붉은 광장에서 크렘린으로 들어올 수 있다. 1491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1806년에 신고딕 양식으로 개건하였으나 1812년에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1816년에 복구된 것이 또 1917년 혁명 당시 대포로 인해 훼손되었으며, 1935년에는 꼭대기에 붉은 별이 달렸다. 입구에 붙어있던 성 니콜라스의 모자이크 성화는 소련 시기에 회칠되었다가 2010년에 복원되었다. 높이는 약 70.4m다.[설명6] 쿠타프야 탑은 크렘린 요새의 초소탑으로, 1516년에 네글리나야 강변의 다리를 방어하기 위하여 처음 세워졌다. 원래는 해자로 둘러싸야 도개교로만 건너갈 수 있었으나, 현재는 해자가 메워졌고 그 자리에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이 조성되었다. 크렘린에서 가장 낮은 탑으로, 높이는 13.5m이다. 관광객들이 크렘린에 입장할 때 가장 먼저 지나치는 건물이기도 하며, 쿠타프야 탑을 지나면 트로이츠카야 탑으로 들어갈 수 있다.[설명7] 트로이츠카야 탑은 크렘린 북서쪽 벽에 위치한 탑이자 성문으로, 알렉산드롭스키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1495년에 처음으로 건립되었으며, 1658년에 '삼위일체라는 뜻의 '트로이츠카야'라는 이름을 받았다. 16세기와 19세기 사이에는 시계도 달려 있었으나 현재는 사라졌고,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황궁 감옥으로도 쓰였다. 트로이츠카야 탑은 소련 시절 러시아 공산당 간부들의 주 출입로로 사용되면서 그나마 성화 위에 회칠을 한 니콜스카야 탑보다 더 과격한 조치를 취하여 아예 모자이크 성화가 갈려 나갔다. 현재는 쿠타프야 탑을 지나면 바로 볼 수 있으며, 크렘린 궁전으로 통하는 관광객들을 위한 주요 출입구다. 크렘린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높이는 80m 정도다.[설명8] 베클레미세프스카야 탑은 모스크바 강변의 동쪽 모서리에 자리한 탑이다. 1487년에 모스크바 강의 선박들을 감시할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높이는 약 46.2m 정도이다. 1917년 10월 혁명 시기에 지붕이 일부 파손되었으나 이후 복구되었다.[설명9] 콘스탄티노-옐레나스카야 탑은 크렘린 동쪽 성벽의 탑으로, 1490년에 처음으로 지어졌으며 이후 성당으로 사용되었다가 소련 시절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본디 총안과 해자, 그리고 도개교 등이 있었으나, 19세기에 총안은 벽돌로 덮였고 해자는 메워져 사라졌다.[설명10] 나바트나야 탑은 크렘린 남동쪽 성벽에 있는 탑으로, 1495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높이는 약 38m이다. 전통적으로 종을 걸어놓아 크렘린이나 황실에 슬픈 일이 있을 때에 울렸으며, '나바트나야'라는 이름 자체도 '알리다'라는 뜻의 러시아어 '나바트'에서 따왔다. 1771년에는 이 종소리를 기점으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기에, 반란이 진압된 이후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 종의 클래퍼[42]를 떼어버리도록 명하기도 했다. 19세기에는 종 자체가 옮겨져 무기고로 이관되었기에 현재는 종을 찾아볼 수 없다.[설명11] 세나트스카야 탑은 붉은 광장과 인접한 동쪽 성벽에 자리한 탑으로, 1491년에 순수한 방어용으로 지어졌으며 1787년까지 이름이 없다가 인근에 상원 궁전이 지어지면서 현재의 '세나트스카야'라는 이름을 얻었다. 높이는 약 34.4m이며, 이 탑을 통하여 귀빈들이 크렘린 궁전에서 붉은 광장으로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고 한다.[설명12] 모서리 무기고 탑은 1492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인근에 무기고가 지어지면서 현재의 이름을 얻었다. 'Arsenal'은 무기고를 의미한다. 탑 안에는 비밀 우물이 존재한다고 하며, 1707년에는 대북방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좁았던 총안을 대폭 확장하여 대포도 수용할 수 있도록 개축하였다. 1812년에는 후퇴하는 프랑스 군대의 포탄을 맞고 파손되었다가 1815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높이는 약 60m다.[설명13] 크렘린 대궁전은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로, 길이는 124m, 높이는 47m, 평방 25,000제곱미터에 달하는 면적을 자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3층이지만, 실은 2층에 창문이 두 열이 있는 구조로 실제로는 2층 건물이다.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황제의 알현실이었으며, 소련 시절에는 공산당 최고회의가 열리는 곳이었으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관저이기도 하다. 크렘린 대궁전에는 러시아 최고 훈장들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게오르기옙스키 홀, 블라디미르스키 홀, 알렉산드롭스키 홀, 안드레옙스키 홀, 예카테린스키 홀 등이 있으며, 이 중 게오르기옙스키 홀은 아직까지도 공식 외교 행사에 사용하고 있다. 현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집무실이나, 실제로 푸틴 대통령이 이곳에 머무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설명14] 테렘 궁전은 17세기 차르의 공식 궁전으로, 로마노프 왕조의 첫 차르였던 미하일 1세가 지었다. 총 5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3층은 황후와 그녀의 아이들이 사용했으며 4층은 차르가 사용했다. 맨 위층인 5층에서는 러시아 제국 의회인 두마가 열렸다. 적색, 황색, 적황색 타일로 치장된 외관이 독특하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관저라서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설명15] 크렘린 상원궁전은 본디 러시아 제국의 최고 입법기관인 원로원을 위하여 만들어진 궁전으로, 예카테리나 대제의 명으로 1776년부터 1787년 사이에 지어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곳을 관저로 삼았으며 레닌 사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 곳에 개인 서재를 두었다. 소련 붕괴 이후에는 러시아 정부청사가 들어섰고 현재 러시아 대통령의 집무실로 쓰이고 있다. 이때문에 현재까지도 관광객의 입장을 철저히 제한하고 있다.[설명16] 그라노비타야 궁전은 역대 차르들의 연회실이자 알현실이었다.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간소한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황금빛 성화와 모자이크, 이콘 등이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어 굉장히 호화롭다.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계단은 '붉은 계단'이라고 하여 역대 차르-황제들이 즉위식 때에 사용하던 계단으로, 니콜라이 2세가 1896년에 마지막으로 사용했다. 스탈린 시대에 전제정의 유물이라 하여 철거하고 대신 인부들의 작업장을 만들었으나, 소련 붕괴 이후 다시 계단이 복구되었다. 현재 모스크바에 보존된 가장 오래된 공공건물이기도 하며, 현재는 러시아 대통령의 공식 연회실로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 대통령 취임식이 여기서 열리며, 1994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문하기도 했다.[설명17] 국립 크렘린 궁전은 크렘린 내에서도 눈에 띄는 현대식 건물로, 니키타 흐루쇼프의 지시로 1961년에 완공되었다. 유리와 콘크리트로 이루어져 있으며, 땅 속에 묻혀 있는 건물의 깊이가 17m나 되어 거의 건물의 절반 정도가 지면 아래에 있다. 궁전의 메인 홀은 6,000여 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당대에는 세계 최고 규모였다. 이 건물이 세워질 때에 신고전주의 양식의 무기고를 철거하면서 지어졌기에, 옛 건물이 즐비한 크렘린 내부에 현대식 건물을 세우는 것이 비조화를 이룬다는 비판이 많았으나 흐루쇼프가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 지어졌다. 쉽게말해 만수대의사당, 인민대회당과 같은 역할을 하기위해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설명18] 환락 궁전은 크렘린 서쪽 벽에 자리잡은 작은 궁전이다. 1652년에 차르의 양아버지 일리야 밀로슬라브스키가 지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국유화되어 왕실 일가가 연극을 보는 등 극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소련 시대에는 스탈린의 사저이기도 하였으며, 그의 2번째 부인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자살한 곳이기도 하다.[설명19] 무기고는 1736년에 지어진 건물로, 크렘린 요새의 북부 모서리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붉은 광장과 가깝기도 하여 광장에서도 무기고 건물의 벽면을 볼 수 있다. 한때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불타 사라지기도 했으나 다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렀고, 지금은 러시아 대통령 경호처가 입주하고 있어 일반인이 절대 접근할 수 없다.[설명20] 무기고 박물관은 무기고와는 다른 별도의 건물로, 1508년에 처음 지어져 황실 무기고이자 보물 수장고로 사용되었으며 수많은 러시아 장인들이 고용되어 황실에 납품할 세공품들을 만들었다. 이후 성화나 이콘 등도 제작하며 명실상부한 러시아 최대의 보물고로 자리하였다. 소련이 들어선 이후에도 이 곳은 전역에서 가져온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에는 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 소장품은 러시아 제국 황제관과 홀을 포함하여 러시아 황실의 유물들이며, 그 외에도 서유럽과 터키의 보물들도 소장하고 있다.[설명21] 크렘린 요새의 남서쪽에 자리하여 곧바로 크렘린 대궁전으로 통할 수 있다. 본디 성모 희보 성당은 역대 황제들의 개인 성당이었으며, 성당의 사제들은 대대로 황족들의 고백성사를 주었다. 1489년에 처음으로 지어져 파괴와 재건을 반복하였고 소련 시기에는 박물관으로 활용되다가 현재는 복원 작업을 거쳐 다시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백색 석회 파사드와 금빛 양파형 돔이 인상적인 건물로, 내부에는 중동에서 발견한 50여 명의 성인들의 유해를 봉헌하고 있다.[설명22]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들 중 하나로 꼽힌다. 1475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었으며, 1547년부터 1896년까지 루스 차르국의 차르들과 러시아 제국 황제들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행해졌다. 소련 시기에는 성당 용도를 박탈당한 이후 박물관으로만 사용되었다. 이 성당에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주교들과 대주교들이 묻혔으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설명23] 대천사 성당은 성경의 미카엘에게 바쳐진 성당으로, 크렘린 대궁전과 이반 대제 종탑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1505년에 처음으로 지어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천도하기 전까지 역대 류리크 왕조 차르들의 무덤으로 쓰였으며, 소련 시기를 거쳐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모 희보 성당과 성모 안식 성당에 비하면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되는 등 당대 모스크바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내부에는 16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소장되어 있다.[설명24] 이반 대제의 종탑은 독자적인 종탑이 없었던 성모 희보 성당, 성모 안식 성당, 대천사 성당을 위하여 만들어진 종탑으로, 1508년에 지어졌으며 높이가 무려 81m에 달하여 크렘린 내부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총 22개의 종들이 있으며, 이들 중 가장 거대한 우스펜스키 종은 무게가 65.5톤에 달하고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등 최대 명절에만 간간히 울린다. 나폴레옹이 대포로 종탑을 무너뜨리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는 일화도 있다.[설명25] 성의 성당은 성모가 입었던 성의(聖衣)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을 막았음을 찬미하기 위하여 지어진 성당이다. 1484년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의 개인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17세기 중반에 황실로 소유권이 넘어갔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설명26] 열두 사도 성당은 크렘린 내부의 소규모 성당으로, 1653년에 니콘 총대주교가 개인 사저로 처음 지었으며 3년 후 사도 필립보에게 봉헌했다. 니콘 총대주교의 취향에 맞추어 비잔틴 양식으로 5개의 돔을 위에 얹었으며,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련 시절에 일시적으로 파괴되었다가 복원되어 현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37] 당연히 백악관도 이정도 검문은 한다.[38] 이때 폭발하는 장소가 바로 스파스카야 탑이다.[39] AKM, RPG, 전기톱 등, 다양한 무장을 하고 있다.[40] 사실 저 세르게이 코룔로프라는 사람은 미국에게도 큰 도움이 된 사람이다. R7로켓을 만들어 미국비행사를 러시아 우주선으로 보내니...[41] 김종필은 1963년 소위 1차 외유를, 1964년 소위 2차 외유를 떠났다. '자의 반, 타의 반'은 1차 외유에서 김종필의 '이번 여행은 나의 희망 반, 외부의 권유 반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오'라는 말이 신문 기사로 옮겨지면서 나온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