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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7-21 20:02:52

BoA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미국의 투자은행 'BoA'에 대한 내용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BoA의 주요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SBS로고.png 가요대전 대상
god

(2001년)
BoA
No.1
(2002년)
이효리
10 Minutes
(2003년)

파일:seoulmusicawards2.png
서울가요대상 대상
김건모
미안해요
(2001)
보아
No.1
(2002)
이효리
10 minutes
(2003)

}}} ||

파일:S.M. 엔터테인먼트_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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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로듀스 101 가로 로고.png
국민 프로듀서 대표
SEASON 1 SEASON 2 48 X 101
장근석 BoA 이승기 이동욱

파일:IMG_20190702_194012.jpg
본명 권보아 (權𤣰雅)
본관 안동 권씨 (安東 權氏) 37세손[1]
출생 1986년 11월 5일 ([age(1986-11-05)]세)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신체 158cm[2], 45kg, AB형
가족 부모님, 오빠 2명
데뷔 2000년 정규음반 <ID;Peace B>
학력 남양주 양정초등학교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 합격[3]
종교 천주교 (세례명:키아라)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4]
유통사 IRIVER[5]
직업 가수
팬덤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JUMPING BoA
파일:일본 국기.png SOUL
링크 파일:SM_Entertainment_Logo.png 파일:트위터 아이콘.pn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pn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png

1. 소개2. 상세3. 팬덤4. 가수 활동
4.1. 데뷔 전후4.2. 1집의 시작4.3. 일본에서의 데뷔와 대성공4.4. 한국으로의 금의환향 그리고 전성기4.5. 전성기 이후, 미국 진출과 일본 활동4.6. 2010년 이후
5. 평가
5.1. 보아를 존경한다고 밝힌 인물들
5.1.1. 여자5.1.2. 남자
6. 음반7. 콘서트8. 실력 및 음악성9. 자작곡10.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11. 논란12. SNS13. 여담14. 연기 활동

1. 소개

파일:보아20.gif

2000년 8월 25일에 데뷔한 한국의 여성 솔로 가수. 1986년 11월 5일생.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보컬도 댄스도 외모도 수준급인 일종의 사기 캐릭터로 시간이 지나면서 작사&작곡, 연기, 진행, 심사 등도 한 나름 팔방미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데뷔해 대한민국 최초/최연소의 수식어를 달고 다닌 아티스트로 말 그대로 ''아시아의 별"이라는 별명을 가진 걸로 알려져 있다.

2. 상세

2000년 8월 25일 "ID; Peace B"로 데뷔했으며, 8월 27일 'SBS 인기가요'를 통해 데뷔 무대를 가졌다.[6] 2001년에는 데뷔곡을 일본어로 번안해서 일본에 데뷔하였다. 2008년에는 "Eat You Up"으로 미국 본토에서 데뷔했다. 데뷔만 3번 한 가수다.

사실상 SM엔터테인먼트가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 중 하나로 SM엔터테인먼트 내에서도 이수만 본인에게 캐스팅된 연예인은 얼마 없는데 보아가 그 중 1명이다. 그 공로 덕인지 2014년 3월에는 강타와 함께 비등기 이사로 선임되었다.#[7] 비단 SM의 성장이 아닌 한국인 가수의 본격적인 해외진출 성공에도 한 획을 긋고 최연소, 최초, 최다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등 한국 가요계의 역사를 다시 쓴 인물이다. 강타가 무릎팍 도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이수만이 가장 아끼는 인물이라고 한다.

BoA의 오디션은 SM내에 전설과 같이 구전되고 있는데, 보아의 데뷔는 잘 알려져 있듯 오디션보러 간 둘째 오빠를 따라갔다가 보아만 캐스팅 되었다는 흔한 얘기. 그러나 후에 자세한 이야기가 공개되었는데, 비보이인 둘째 오빠가 참가한 백화점 댄스경연대회에서 무대에 올라 나이키를 하는 등 격한 춤을 추며 그 당시 연예기획사들로부터 명함을 15개를 넘게 받았고, 거기에 SM도 있었다. 그렇게 SM 오디션을 보러가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는데 관계자들에게는 춤으로 캐스팅, 이수만에게는 노래로 캐스팅된 특이 케이스. SM오디션에서 보통 춤, 노래 한 가지로만 캐스팅 되는데 반해 보아는 두 가지 모두로 캐스팅된 희귀한 사례.[8][9] 당시 보아는 초등학생이었다.

일본어, 한국어, 영어의 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데뷔 전부터 신비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모든 어린 소녀들을 뒤져 해외진출용 가수로 키워질 예정이었는데, 당시 보아를 발견하여 옳다구나 캐스팅했다.[10] 보아는 노래와 춤의 트레이닝 이전부터 일본어 언어 교습을 훨씬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본인이 자신에게 가장 대견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언어습득력이다.

보아의 대표적인 수식어로 유명한 ''아시아의 별"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200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한류 스타 중의 한 명이자 SM엔터테인먼트의 암흑기 시절을 책임진 소녀가장이기도 했다.

3. 팬덤

파일:LE3nvWW.jpg
한국 팬클럽 공식품
파일:o0tLVk5.jpg
일본 팬클럽 공식품

팬클럽 명칭은 한국 기준으로 ' 점핑보아(JUMPING BoA) '. 세계로 도약하는 보아를 뜻한다. 자세한 내용은 점핑보아 문서 참고. 공식적으로 팬클럽이 유료 운영되고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두 곳이다. 반면에 일본의 팬클럽 명칭은 'SOUL(소울)'로 2003년 4월 1일 공식적으로 출범되었다. 팬클럽 명칭인 SOUL의 뜻은 “마음”이라는 뜻과 보아를 응원해주는 팬의 “마음”을 소중히 하고 그 “마음”에 감사한 보아 자신의 “마음”을 팬에게 전하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보아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점핑보아와는 다르게 1년에 2번씩[17] 꼬박꼬박 회지를 내주고 1년에 한번 그리팅카드를 보내주는 등 그나마 팬클럽의 기능을 하고 있다. 다만 한국 팬클럽 점핑보아와 다른 점이 있다면 1년마다 갱신비 4,200엔을[18] 내야 한다.

4. 가수 활동

4.1. 데뷔 전후

위에 서술되어있듯 초등학교 6학년때 오빠를 따라 춤대회에 나갔다가 이수만에 발탁되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약 2년반을 연습생으로 있었다.

파일:MxW6K67.jpg
파일:ezgif-1-d09f7d425c.gif[19] 마성의 짤

데뷔 당시에 SM 당시 소속가수인 H.O.T.S.E.S., 신화 등의 팬들이 많은 루머를 쏟아냈다. 보아를 잘 안 돌봤던 선배가수들, 즉 신화나 H.O.T. 멤버들을 이수만이 폭행했고 심지어 다른 소속사 가수인 god까지도 폭행했다는,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황당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루머[20]들이었다.

실제로 데뷔 당시의 전후로 피묻은 칼이나 난도질된 곰인형 등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들 또래의 여자아이가 자신의 오빠들과 함께 활동한다는 모습이 질투를 불러 온 듯 하다.[21]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보아 본인이 언급한 바에 의하면 그 당시에 H.O.T. 해체설이 돌았는데, H.O.T. 팬덤에서 "H.O.T.는 푸대접하면서 저런 어린애한테 H.O.T.가 벌어다 준 돈을 다 퍼붓는다!" 같은 오해를 하면서 보아의 안티가 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역시 원조는 다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데뷔하기 전부터(!) 많은 안티를 양산하게 되었다. 당시 PC 통신망이나 인터넷상 공개게시판에서 심심찮게 보아에 대한 루머나 비방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연령대가 높은 이들 중에도 싫어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지금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어린 애가 공부는 안하고 가수한다고 설친다"는 것이 일반인에게 비호감으로 비쳐진 원인이었다. 요즘이야 나이 어린 친구들이 어릴때부터 가수를 준비하고, 윗세대도 딱히 나쁘게 보는 시선이 없었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보아가 한참 트레이닝 받던 과거 90년대만 해도 춤을 추러 다니거나 연예인 된다고 이리저리 쫓아다니면 "어린게 헛바람 들어서 공부는 안하고 연예인 되고 싶어 나댄다"는 시선이 팽배했다. 심지어 곧 성인이 될 고등학생 아이가 이렇게 하고 다녀도 이런 시선인데, 이제 갓 초등학교 졸업한 아이가 그런다고 생각해보라. 절대 곱게 보일리가 없다.[22]

이 때 쓰인 보아의 안티 팬픽들이 유명하다. 당시 모든 인터넷 게시판에다 무더기로 (심지어 쥬니어 네이버나 야후 꾸러기 같은 곳에도) 도배가 되었으며, 이때 유행한 만화나 게임의 팬페이지 개인 홈피 방명록에도 도배가 되어 있었다.[23] 지금 기준에서는 작성자 및 퍼나른 사람들에게 싸그리 체포해서 빨간줄을 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보아 안티세력의 사이버 폭력 및 오프라인 폭력은 정말 도가 지나쳤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보아가 이수만과 그렇고 그런 사이여서 비정상적인 총애를 받았다는 루머. 10대 초반의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이런 말도 안되는 헛소문과 악성 팬픽이 버젓이 유행했던 것이다. 사이버 폭력에 대해 개념이 희박했고 정부 주도로 정보인프라 구축과 수요기반 확대를 밀어붙이던 시절이라 인터넷을 규제하는 것에 애를 먹었던 2000~2002년[24] 일이라서 가해자들이 운좋게 거의 무탈하게 넘어간 경우였지, 최진실 사건 이후로 사이버 폭력의 위험성이 알려진 지금은 얄짤없이 감방으로 직행인 일들이었다.

안티로는 비견될 사례가 없으며, 그나마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사실상 문희준이나 간미연 정도 밖에 없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금의환향한 이후부터 2002년 2집 No.1으로 전국적으로 뜨면서 "아시아의 별"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안티들을 실력 하나로 잠재워버린 무서운 정신력의 소유자다.

과장해서 보아 팬을 제외한 남자 아이돌 팬들 모두가 안티였던 시절이었다.[25] SM의 과도한 마케팅, 당시 가요계의 범람하던 실력이 없는 아이돌에 대한 염증, 너무도 어린 나이에 대형 소속사의 힘으로 솔로 가수로 데뷔하면서 상업화에 대한 혐오감, 난해한 컨셉과 괴상한 가사로 인해 실력을 보여주기 어려웠던 점이 컸다.

4.2. 1집의 시작


파일:졸커보아.gif
파일:1보아.gif

그렇게 약 3년 간의 고된 트레이닝과[26] 준비기간을 거쳐 2000년 8월 1집 <ID: Peace B>를 발매하며 데뷔하게 된다.

보아의 데뷔는 SM에게는 대형 프로젝트 중 하나였는데, SM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해외 진출의 초석으로 여기며 오랜 기간과 비용을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각종 다큐멘터리에서 밝혀진 바로는 보아의 방학 기간 동안 일본으로 어학연수를 보내며 현지 아나운서 집에서 홈스테이를 시켜 가며 일본어에 능숙해지도록 교육을 시켰다. 게다가 보아 1집은 김형석, 유영진, 방시혁, 김조한, 박진영 등 지금 들어도 거물급인 작곡가 및 음반 제작진들이 대거 투입되어 만든 대형 프로젝트였다. 뮤직비디오도 쉬리강제규 감독이 참여하며 화제가 되었고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약 30억[27]이 보아의 데뷔에 들어간 비용이었다고... 이 때문에 SM의 입장에서는 자사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기획물이었던 셈이었다.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가 매우 컸던 2000년대 초반을 생각해보면, 그 당시 30억 투자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ID; Peace B>는 난해한 곡 스타일과 유영진 특유의 괴상한 가사로 인해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며 아쉽게 되었지만 어느 정도 주목받는 신인으로 인지도를 높이게 되었다.[28] 설상가상으로 이 당시 H.O.T. 팬들을 비롯한 신화 등등 각종 보이그룹 팬들의 악성루머와 또래 연령층의 질투로 안티층을 대거 양산하는 결과를 낳고 만다. 지금이야 가요계 짬도 높고 위상이든 실력이든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지만, 저 당시 보아는 대중적인 기반이 전혀 없는 신인이었다. 당연히 안티들에게는 만만한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이 당시 공격은 지금 생각해보면 무시무시하였다.[29]

<ID; Peace B>의 최고 성적은 SBS 인기가요에서 핑클의 <NOW>와 1위 후보로 같이 오른 사례다. 판매량은 177,612장으로 그 해 데뷔했던 신인들 중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다. 유영진 특유의 비마이너한 노래임에도 절반의 성공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당대 최고의 신인임을 내세우며 홍보한 대형 신인으로는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절 보아를 기억 못한다.[30]

어쨌든 어린 소녀 가수라는 점 만큼은 대중에게 어필이 되어서 통신사 광고와 식품[31] 광고도 찍고 적자까지는 아니어서 금전적으로 정산은 받았다고 한다. 첫 수입은 5천만원.

이후 <sara>라는 후속곡으로 활동한 뒤 2001년 3월에 1.5집인 <Jumping into the new World - Don't Start Now>를 스페셜 앨범으로 발매하고 활동하지만 큰 호응은 얻지 못하고 조기에 활동을 끝낸 후, 바로 일본 데뷔 준비를 하게 된다. 사실 이 앨범으로 큰 반응 자체를 얻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보아가 세계무대로 활동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보여준 앨범으로 실제 앨범 수록곡은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구성되어 있다.

4.3. 일본에서의 데뷔와 대성공

보아의 일본 데뷔는 앞서 기술한 대로 SM의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SM은 과거 S.E.S.의 실패 노하우를 분석해 보아의 데뷔를 준비한다. 음반시장에서 지원여력이 충분한 에이벡스와 계약을 하고 쇼케이스를 하며 데뷔를 준비해 나가게 된다. 덧붙여 에이벡스의 소속가수만 당시에 200팀이 넘었다. 이 중에 스타급은 상위 10% 정도밖에 없었으며 '대형 음반사'와 계약한 것만으로 성공을 가늠할 수 없었다.

에이벡스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에 능통하고 춤과 노래가 완벽한 천재 가수'라는 홍보전략을 세우고 보아를 홍보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2001년 7월 발매된 2번째 싱글인 'Amazing Kiss'까지는 큰 반응이 오지는 않았고[32] 이 때 보아도 향수병에 걸려 벽을 보며 대화하고, 무척 외로워했다고 한다.

스케줄도 없어 매일 연습만 했다고 하는데, 특히 이후 독감에 걸려 30kg대까지 빠지면서 입원을 하게 되어 잡혀 있던 스케줄도 취소되고 울어도 달라지는 게 없다고 하여 독하게 마음먹고 재즈댄스를 배운다.[33] 이 때 아파서 활동을 못하였을 때 싱글 하나가 엎어졌다고 하며[34], 2001년 하반기에 공백기가 길어지자 일본 활동이 망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으나 이 때 보아는 재즈댄스를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회심의 재즈댄스를 익혀서 2001년 12월 발매한 '気持ちはつたわる'[35]부터 점차 반응이 오기 시작한다. 이 당시의 보아는 아직 '1집 앨범도 안낸 신인 가수'였지만 NHK가 주관하는 슈퍼 드림 라이브에 초청되어 라이브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보아는 여기서 자신의 노래를 올라이브로 격렬한 댄스와 함께 소화해내며 시청자들의 반응을 얻어냈다. 당시 방영 후 NHK 예능국에 '저 어린 가수가 누구냐?'라는 문의전화가 쇄도했다고 하니 그 반응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리라 본다. 이 시기부터 일본 소속사도 보아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서 유명 CF의 배경음으로 보아의 노래를 넣는 등 점점 홍보를 시작한다. 그 유명한 'LISTEN TO MY HEART'도 유명 핸드폰 cm으로 우선 소개가 되었다.


도모토 코이치는 30살로 보이는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NHK POP JAM의 LISTEN TO MY HEART

이후 2002년 1월 "LISTEN TO MY HEART"가 예상치 못한 호응을 얻어내며 인기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노래 악곡 자체는 당시 유행하던 J-POP흐름에 반하는 R&B 느낌이 강한 댄스팝이었지만 매력적인 멜로디와 곡전개, 곡을 능숙히 소화해내는 보아의 보컬 등으로 히트를 치게 된다. LISTEN TO MY HEART는 과장 조금 보태 일본 블랙뮤직의 판도를 바꾼 노래 라고 평한 평론가도 있을 만큼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모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좋은 평가를 받아낸다.

이 당시 보아는 한국 2집 No.1의 발매준비를 위해 한국에 있었으나 일본에서 LISTEN TO MY HEART가 오리콘 데일리 차트 3위에 올라간 덕분에 빨리 일본으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는다. 당시 보아도 순위가 믿기지가 않아 오리콘 홈페이지에 접속해 차트를 확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02년 3월 발매된 일본 정규 1집인 동명의 'LISTEN TO MY HEART' 앨범 역시 90주가 넘게 차트인을 하며 무시무시한 롱런을 보여주면서 밀리언셀러에 준하는 판매량을 얻어내 대브레이크를 시작한다.

일본레코드협회의 인증으로는 출하량 기준이라 밀리언이지만, 소매점 판매량을 집계하는 오리콘 기준으로는 밀리언에 살짝 못 미쳤다. 한국에서는 출시 당일 1위 소식이 공중파 9시 뉴스에 보도되었다.

보아의 성공배경에는 여러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중요한 건 SPEED 이후 암전이었던 '춤과 노래에 능한 소녀가수'컨셉의 빈틈을 보아가 적절히 파고들었다는데 있다.[36] 일본 언론에서는 "한국인 가수 보아가 아무로 나미에의 후계자가 될지도 모른다!"라고 극찬을 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춤과 노래에 능하다는 것 이외엔 딱히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다. 아무로 나미에는 춤과 노래 이외에 패션이나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여성 워너비 적인 아이돌 캐릭터이므로 이 부분은 하마사키 아유미가 더 적절하다. 사실, SPEED 이후로 Folder5나 Earth같은 비슷한 컨셉의 걸그룹들도 많이 나왔지만 이렇다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모두 사라졌다. 보아는 그 빈자리를 적절히 메꿔놓았다는 평가다.

결정적으로 에이벡스가 데뷔초부터 차근차근 쌓아올린 스토리가 큰 계기가 되었다. 리슨투마이하트가 반응이 좋자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누구냐는 반응이 많아졌는데 '알고보니 BS 슈퍼라이브에서 춤과 노래를 잘 하던 그 가수였네?' '근데 한국인이었어?' '심지어 3개 국어에 능통하다고???' '천재소녀네!!'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스토리가 보아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37]

4.4. 한국으로의 금의환향 그리고 전성기

일본 진출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도 성공을 못 한 아이가 어떻게 일본에서 성공을 하는가?"라면서 반신반의하던 대중들은 보아의 성공과 금의환향에 모두 놀라게 되었다. 미디어에서는 보아의 경제적 가치를 분석하는 뉴스 자료가 연일 쏟아지기 시작하였고, 어린 고등학생 나이로 9시 뉴스 대담에 초청되면서 생방송 인터뷰까지 하는 등[38] 일본에서 대성공을 한 뒤 보아에게 전국적으로 쏟아진 스포트라이트는 어마어마하였다.


2002년 가수 보아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No.1무대로 전성기 인기를 누렸을때 모습이다.

그리고 2002년 4월 한국에서 2집 No.1을 발매하게 된다. 신나는 비트와 파워풀한 댄스는 한국 대중들에게도 크게 먹혔고 보아에게 '우리 오빠를 넘보는 나쁜X' 정도의 시선을 보이던 철없는 또래층 역시 팬층으로 흡수해 내며 한국에서도 히트하게 된다. 10대와 20대를 중심으로 남녀 구분없이 팬층이 확보되었고 시사 프로그램 및 신문에 단골 출연하여 다양한 세대에서 인지도를 알리게된다. 2집은 56만 장을 판매하며 그녀의 한국 최대 음반판매 기록을 달성했으며 2002년 음반판매량 순위 4위를 차지했다.

일본에서는 그 해 8월 여름에 걸맞는 댄스곡 VALENTI를 발매했으며 보아 최고의 히트곡이 된다. 일본에서 아직도 보아하면 '타이토나 진즈니~'를 부르며 등장함 그리고 그 해 여름, 에이벡스에서 자사 소속 가수들을 메인으로 출연시키며 전국을 투어하는 콘서트 '에이네이션'에 메인게스트에 올라 Every Little Thing, 하마사키 아유미 등 에이벡스의 간판급 가수들과 함께 일본 전역을 순회하게 된다.

이후 일본에서는 奇蹟, JEWEL SONG 같은 노래를 발매하고 모두 1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안정적인 인기궤도에 오른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일본에서의 히트곡들을 번안한 2.5집 Miracle 앨범을 발매하고 Valenti, 기적 등의 노래로 활동하며 3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그러나 원곡에 비해 한없이 다운그레이드 된 코러스와 일본 가사를 그대로 직역해 놓은 한국 정서에 전혀 맞지 않는 난해한 가사등으로 혹평받았다. 심지어 Valenti는 원곡의 후반부 애드리브를 절반 가량 덜어내며 아쉬운 평가를 받기도. 보아의 번안곡들은 이런 식으로 애드리브나 미세한 사운드가 빠진 경우가 많다.

이 해 2002년 한국에서 2장의 앨범을 발매하여 한국에서 총판 88만 장을 넘게 기록하였으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및 해외 활동으로 인해 길게 활동하지 못했음에도 대히트하게 된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한일 양국을 잇는 문화 전도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프랑스의 신문 르몽드지에 기사가 실리기도. 그리고 일본에서는 그 해 연말 NHK에서 주관하는 최고의 가요 프로그램인 홍백가합전에 첫 출전하는 영광을 얻었고, 서울가요대상 대상과 한국에서 역대 최연소 나이로 SBS 가요대전엠넷 뮤직비디오 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KBS 가요대상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는 2002년 후반기에 매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온 세기말 코리안 스윗하트 장나라에게 패해 아쉽게도 지상파 그랜드슬램에 실패했다. 이 시기의 여자 솔로 가수를 대표하는 경쟁 구도는 사실상 보아-장나라의 양강구도가 형성되었다.[39]

여담으로 장나라가 SM 연습생 시절에 보아와 같이 연습했다고 한다. SM에서도 둘이서 듀엣 그룹으로 데뷔할 예정이었다는 썰이 있는데, 모종의 사정으로 장나라가 SM을 나가는 바람에 따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랬던 둘이 연말 시상식에서 만났으니, SM 입장에서는 굉장히 묘한 느낌이었을 듯 하다.

2003년 1월에는 일본에서 2집 앨범 VALENTI를 발매하게 된다. 이 음반은 높은 퀄리티와 구성력으로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 모두 좋은 호응을 얻어내고 발매 당일 출하량 100만 돌파, 총판 12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넘기며 매우 히트하게 된다. 앨범 발매 후 처음 치룬 자신의 첫 일본 투어 콘서트는 본래 4회 예정이었으나 호응이 좋아 2회 더 연장하고 매진. 일본의 전 총리인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까지 보러 오는 등의 성공을 거둬 한국에서도 보도되었다.


2003년 방영된 MBC 음악캠프 BoA의 아틀란티스 소녀 무대이다.

같은 해 한국에서도 3집 앨범 Atlantis Princess를 발매한다. 멜빵바지와 고글 안경을 쓴 코디가 화제가 되기도 한 이 앨범은 35만 장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올리며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상대적으로 아쉬운 수록곡 퀄리티와 앨범 구성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 보아는 직접 9월 쯤에 한국에서도 콘서트를 열겠다고 하였으나 소속사 사정때문인지 콘서트는 2013년도에 처음 열림. 2003년 7월 9일 보아의 매니저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는데 당시 7월 12일 음악캠프 자료를 보면 '아틀란티스 소녀'를 상당히 힘들게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보이는데[40] 이는 그 사건의 영향 때문인 듯. 그리고 7월 13일 SBS 인기가요에선 결국 컨디션 난조로 인해 차분한 분위기의 발라드 곡인 '나무'를 부르고 1위를 차지했다. 물론 '1등 곡'은 '아틀란티스 소녀'. 콘서트를 개최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 이 이유일 수 있다. 여담이지만 아틀란티스 소녀로 활동하던 시기에 때마침 롯데월드의 동명의 새 롤러코스터 아틀란티스가 매직아일랜드에 개장을 하면서 보아가 축하 공연을 오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Shine We Are!/Earthsong 을 발매하였다. 이 싱글은 보아의 첫 오리콘 차트 싱글 데일리 차트 1위를 획득한 곡으로 일본 한국에서 모두 화제가 되었다. 위클리에선 2위를 하였지만 SM 측에선 그냥 데일리 1위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또한 이 시기 혼다기업 전체의 이미지 모델을 맡았는데, 우리로 치면 외국인으로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해외 출신 가수가 삼성이나 LG 기업의 이미지 모델을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인연으로 보아 첫 아레나투어 오프닝에 자사 개발 로봇인 아시모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국내에서도 화제가 되었었다.

이후 한일 양국에서 DOUBLE을 동시 발매하게 된다. 당시 에이벡스 사장은 "에이벡스 최고의 악곡을 보아가 부를 수 있게 하였다."며 이 노래가 히트할 것을 확신하였지만[41] 판매량은 8만 장대에 준하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여담으로 작게나마 브리트니 노래 'Let me be'와 표절 시비가 있었다.

그래도 일본 연예인 연말 수입 랭킹에서 에이벡스 자사 연예인들 중 하마사키 아유미 다음으로 높은 수익을 거두고 홍백가합전에도 2회 연속 초청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에이벡스내 뿐만 아니라 전체 일본 여가수 수익 2위를 기록했다. 그냥 에이벡스가 다 해먹었다. 또한 보아는 일본 연말 가요제에 출연하느라 한국 연말 가요제에 참석을 하지 못했다. 헬기를 타고 이동하려는 계획도 있었으나, 국가간 헬기 이동은 무리였는지 취소됨.

2004년 1월에는 LOVE&HONESTY 앨범을 발매하고 정규앨범을 3연속 차트 1위에 올리며 인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 때부터 이렇다 할 히트싱글이 나오지 못하면서 판매량은 감소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판매량도 65만 장대로 전작의 절반에 준하는 성적을 거두었다.

이 시기 처음으로 아레나투어를 시작한다. 5회 예정이었던던 투어 규모는 4회 연장해서 9회 정도 공연을 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말만 아레나 투어일 뿐, 다른 가수들의 아레나 투어와 비교하면 모자른 투어 규모라던가[42] 비슷한 인기대의 다른가수들이 보아보다 적은 규모의 투어를 진행하는 모습과 대비되어 '무리하게 투어를 돌리는거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었다. 일례로 보아와 판매량과 인기가 비슷했던 나카시마 미카의 당시 콘서트를 보면 규모가 상당히 작다. 소규모 무대에서 별다른 퍼포먼스 없이 보컬 위주로 진행.

그래도 콘서트 질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콘서트 내내 대부분의 노래를 라이브로 격렬한 춤과 함께 소화하는 모습 또한 호평받았으며, 특히 시각적으로 뛰어난 효과와 함께 혼다 개발 로봇인 '아시모'의 출연으로 화제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 해 6월 자신의 4집 앨범 My Name을 발매하고 활동에 돌입한다. 이 시기 유명한 인물로 옆에서 같이 백업댄서를 맡은 가희가 있다.[43] 예쁘장한 백댄서로 당시 화제가 되었었다. 4집 앨범은 이전과 다른 파워풀한 컨셉과 강렬한 안무 등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일본 유명 클럽을 대여해 찍었던 것도 화제였고 이전까지 틴팝 위주의 부드러운 멜로디의 노래만 부르던 모습과 대비되 어반알앤비풍의 세련된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강렬한 색조 화장을 한 보아의 모습은 그 당시 큰 충격으로 각인되었다. 4집의 이미지변신은 큰 성과를 거두어 이후 보아의 한국활동에 중요한 기점으로 작용하게 된다.[44] 2003년엔 이효리에 약간 밀려 여가수 선호도 조사에서 2위를 했던 보아가 이 시기엔 1위로 치고 나왔다. 20만 장이 팔려 전작들에 비해 감소했지만 2년 연속 이수영에 이은 여성 솔로가수 2위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이 시기 남희석의 사회로 진행된 팬미팅에서 올해 한국 콘서트 계획이 있다고 했었으나 소속사 사정때문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또한 MKMF에서 대상인 최우수 뮤직비디오상을 받았다. (그 때의 MC가 신동엽-김정은이었는데, 2002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일본에서는 QUINCY/コノヨノシルシ를 발매하고 중박 성적을 거두고 그 해 12월 메리크리를 발매. VALENTI 이후 자신의 대표 히트곡을 만들며 화제가 된다. 메리크리는 시즌겨냥송으로 당시 쟁쟁한 가수들과 함께 발매되었지만[45] 연말 공연까지 이어지면서 꾸준히 차트에서 롱런, 히트하게 된다. 결국 초동의 3배 이상을 팔게 되고 선행 싱글이었던 메리크리의 인기는 이후 발매된 베스트 앨범의 밀리언 버프를 더한다.

05년도 초에는 자신의 첫 베스트앨범인 BEST OF SOUL을 발매하고 100만장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하며 히트한다. 이후 발매한 DO THE MOTION도 위클리 차트 1위를 기록하며 수록곡 모두 FASIO, 립톤, KDDI같은 유명 회사제품들에 타이업되며 좋은 판매량을 보였다.

한국에서는 5집 Girls On Top을 발매. 초창기 조금 난해한 가사와 컨셉 때문에 아쉬운 평가를 받았지만[46] 무대 위에서 보여준 강렬한 퍼포먼스와 뛰어난 안무실력에 라이브 실력 등을 뽐내며 후속곡 MOTO까지 모두 좋은 반응을 얻으며 히트한다.

전작 My Name보다는 대중의 반응이 약했지만 댄서의 등에 올라타는 춤이 화제를 모았고 보아가 하고 나왔던 울프컷 헤어스타일이 여자 중, 고생들에게 대히트를 쳤다. 2005년~2006년 졸업 앨범을 보자. 한 반에 5명 이상은 그 머리를(...) 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연말 엠넷 시상식인 MKMF에서 뛰어난 공연을 선보이며 화제가 되었다. 음반 판매량 역시 13만 장을 기록하며, 그 해 여성 가수 중 빅마마 다음으로 앨범을 많이 팔았다.

4.5. 전성기 이후, 미국 진출과 일본 활동

보통 보아의 전성기는 2천년대 초중반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데, 일본에서는 2003년 낸 2집 VALENTI 이후부터 판매량이 조금씩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 왔었다. 물론 지금도 회자되는 메리크리 같은 시즌 히트송도 나오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VALENTI~베스트앨범(BEST OF SOUL)을 발매한 뒤로는 인기가 한풀 꺾였이기 시작했다. make a secret 부터는 5만장대 판매량으로 떨어지며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이후 다키시메루도 비슷한 판매량을 보이며 조금씩 하락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아의 하락세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2집 이후 입지가 높아진 상황에서 한국 활동과 병행하면서 확실히 일본에서 자리매김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 제일 크다. 실제로 Shine We Are!발매 까지 거의 반년 가까이 신보가 없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기존에 보아에게 호감을 가지던 대중들은 '춤과 노래에 능한 당찬 외국인 소녀'이미지에 호감을 느꼈는데 사실상 2집 이후부턴 일본어도 능숙해지고 나이도 점점 먹어가면서 이런 메리트가 줄어들었던 것도 요인. 이후로 QUINCY나 DO THE MOTION에서 성숙한 이미지를 보여주며 나름대로 이미지 변신을 꾀했지만 크게 먹혀들지 못했던 것도 원인.

그러나 전성기 이후로 음반 판매량이 급감한 배경은 역시 코어팬이 적은 게 가장 큰 이유. 하마사키 아유미 같이 강력한 코어팬층을 가진 가수들은 전성기가 지나도 확고한 고정팬들 덕분에 대중들에게는 한물간 가수처럼 취급되어도 계속 코어팬 중심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은데 보아는 대세가수였던건 맞지만 전성기 시절에도 인기에 비해 코어팬은 적은 편이었다. 보아의 일본내 이미지는 '일본 가요계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건강하고 밝은 천재 외국인 소녀가수' 같은 이미지였지 아무로 나미에코다 쿠미 혹은 한국으로 치면 이효리처럼 패셔니스타, 여성워너비 이미지는 아니었기에 코어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따라서 베스트 이후 코어팬을 잡을 컨셉과 노선을 확실히 했어야 하는데, 보아가 가장 잘하고 자신 있어하는 보이시하고 파워풀한 모습은 결정적으로 일본에서는 그렇게 반기지 않는 컨셉이었다. 한국에서의 마이네임, 걸스온탑 등의 여덕몰이를 한 컨셉을 일본 팬들이 보고 기절초풍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반응이 좋았던 LOSE YOUR MIND, Sweet Impact 등의 컨셉은 일본에서 먹히지 않았다. 애초에 베스트 이전 보아의 트레이드 마크는 5:5 긴생머리였고, 보아의 최전성기 시절 이를 따라하는 10대, 20대 여성 또한 많았기 때문에 보아의 숏컷, 단발머리 컨셉에는 거부감을 보였다. 남팬들이 다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특히 팬들 중심으로 이 당시 AVEX에서 보아가 반버닝파였기 때문에 푸쉬에서 밀렸다는 소문이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오히려 마츠우라 전무로 바뀐 이후 싱글들을 보면 DO THE MOTION 때는 타이업도 빵빵히 넣어준 편인데다가 프로모션과 콘서트도 바뀌기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밀어주었다. 애당초 바닝파/비바닝파 논란 자체가 팩트보다는 추측에 가까운 썰들이 많기 때문에 무작정 받아들이기에는 곤란하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사실상 5집 이후 5년 동안 끊겼기 때문에 하락세라고 하기도 뭐하다. 나중에 SM이 회사차원에서 보아는 미국 활동 준비를 해왔다고 했으나[47] 보아의 한국 활동은 사실상 명맥이 끊겼다고 봐도 좋을 정도.

이후로 애니밴드 같은 프로젝트성 활동에 참여도 하였지만 대부분 단발성 프로젝트나 OST 몇 곡 부르는 정도에 그쳤고 예전만큼 왕성한 방송활동은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당시 보아도 한국에서의 무대와 팬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48]

2007년 즈음 SM과의 계약이 마무리되어 엠넷미디어 등 다른 기획사에서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으나 쿨하게 SM과 재계약했다.




08년도말 데뷔싱글 Eat You Up을 발매하고 미국진출을 시작한다. 뮤직비디오를 내수용, 미국용으로 나눠서 찍었는데 위가 내수용이고 아래가 미국용이다. 보면 알겠지만 나름대로 기존 팬들 정서에 맞고 무리한 연출이 없는 내수용에 비해 난해한 연출과 저렴한 CG(...), 그리고 댄스브레이크 부분에서 꼭 동네 꼬마애가 낙서해놓은 듯한 뒷배경등 여러모로 싼티나는 연출로 인해 혹평을 받았다.[49]

미국 1집은 한국인 최초 메인 앨범 차트에서 127위를 기록한다. 하지만 그냥 어느정도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다였을 뿐 대중적 성공이라고 보긴 많이 힘든 수준이다. 멜론차트 6~70위한게 의미없는건 아니지만 대박이라고 볼 순 없듯이 말이다. 아시아 톱가수로 성장한 보아가 미국에선 3번째 데뷔를 하며 불합리한 스케줄을 (비행기에 탑승해서 가고 있는데 현지 스케줄이 취소됨. 그러나 미리 알려주지 않음 등) 소화한다. 일본 진출 때와는 달리 자아가 이미 형성된 상황에서의 해외 진출은 또 다른것이었기에 여러모로 힘든 경험을 해야 했다. 3번째 싱글인 Energetic으로 레이디가가가 섰던 무대인 SF프라이드(San Francisco Pride) 무대에 서고 차트에서도 반응이 슬슬 오던 중. SM은 동방신기의 소송 문제에 휘말리게 된다. 이에 보아를 미국 진출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프로듀서로서 케어하던 이수만이 헐레벌떡 급거 귀국. 보아의 모든 미국활동은 올스탑. 무려 5년을 투자한 모든 계획이 엎어지게 된다.

미국에서 지역 가수들은 투어를 하면서 점점 관객을 모으고 지역을 기반으로 인기를 모으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데, 보아도 이와 같은 프로모션이 일환으로 전미투어를 직접 계획하고 있었다. 각종 인터뷰와 언론매체에서 전미투어 소식을 알렸고 이것은 미국 활동에서의 가장 큰 핵심 활동 계획이었으나 투어 계획 발표 후 두 달도 안 되어 소송이 터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보아의 미국 활동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본인을 케어하거나 홍보를 할 여력도 없었으며 이렇다할 활동도 없이 다시 아시아 시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도 2007년이 본인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고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다고 하는데 2008년 미국 진출이 그런 회의감을 없애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전미 투어까지 준비하고 지방 라디오 활동부터 시작해서 밑바닥부터 천천히 올라갈듯 했던 미국 활동이 흐지부지하게 끝난 이유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동방신기가 불화로 팀이 나눠지며 동방신기가 잔류한 SM, JYJ를 안고 간 AVEX의 불편한 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게다가 이 JYJ 사건 때문에 이수만이 미국 진출한 보아 도와주다가 황급히 한국으로 달려오기도 했으니...

실제로 보아도 미국 투어가 잡혀있었으나 투어가 갑자기 취소되고 AVEX에서 하는 A-NATION에 강제 참여하게 되었다. 2007년에도 참여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스케줄에도 없는 갑작스런 참여가 여러 의혹을 낳았다. 실제 보아는 한 인터뷰에서 일본 기획사엔 알리지 않고 미국 진출을 하느라 한국에서 활동하는 시간까지 줄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일본 기획사가 보아의 미국 진출을 싫어했다는 건 확실한 사실이다.

여하튼 정규 앨범 발매 후 한국인 최초로 빌보드 메인차트 중 하나인 빌보드 200에 125위로 진입하며 미국 투어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일본에 와서 작년에도 나가지 않았던 a-nation에 나와서 노래를 하고 있다거나 소리 소문도 없이 일본에서 싱글과 베스트앨범이 나오는 등 팬들에게는 여러가지로 의문이 많았던 미국 활동의 결말이었다.

원더걸스가 HOT 100에 진입한 직후 한국인 최초 메인차트 진입이라고 언플을 한 탓인지 보아도 빌보드 메인차트에 진입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원더걸스가 진입한 빌보드 HOT 100 의 경우 싱글 차트, 보아가 진입한 빌보드 200은 앨범 차트로 둘 다 메인 차트가 맞다.[50]

비록 상업적으로 실패하였지만 보아는 후에 자기 입장에서는 더 넓은 시장도 경험하고 음악적 성장에 있어 좋은 경험이었다고 인터뷰하기도 하였다.[51]

4.6. 2010년 이후

일본에서의 인기는 이미 전성기도 충분히 겪어 보았고 본인도 음악적 성장에 보다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에 사실상 라이브 활동에 주력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대중적인 노출도 심하게 줄어들었고 BoA the LIVE같은 소규모 라이브 활동에 집중하는 편.

일본에서의 현재 인식은 추억의 가수. 인지도는 한 때 대세 여가수였던만큼 높고, 두고두고 회자되는 히트곡도 몇 개 있지만 현역 수준으로 활발히 소비되지는 않고 트렌드에 한참 못미치는 가수정도. 근래에는 미디어 노출도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있다. 싱글을 내면 심야음방, 라디오 1회~2회 정도 출연에 그치고 있다. 인지도는 여전히 높지만 일본 대중에게 '보아는 요즘 뭐해?' '보아는 이제 활동하지 않는가?' '추억의 가수'로 간간히 회자되고 있다.

겨울마다 2004년에 발매한 '메리크리'가 매년 크리스마스송의 각종 차트에 들며 11월부터 음반차트와 음원차트 역주행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시간이 갈수록 일본의 국민 크리스마스 명곡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듯. 2014년엔 높은 인기에 힘입어 메리크리 발매 10주년이라며 깜짝 CM을 깜짝 프로모션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2010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했다. 유희열이 보아에게 13살때로 돌아가도 가수가 될꺼라는 말에 가수는 되겠지만 보아는 되지않을것이라는 웃음반 진담반의 말을 했다. 해외에서 홀로 싸워나가야한다는 고독감때문이라고 한다. 대신 키를 키워 소녀시대 맏언니로 들어가고싶다는 말을 했다.

2011년에 메이크 유어 무브 촬영으로 미국에 가있느라 일본에서 음반을 안 내면서 휴식기를 가지다가 2011년 12월 DVD 싱글 "Milestone"으로 일본 활동을 재개했는데[52] 아이튠즈 순위가 7년전에 발매한 메리크리와 20위에서 투닥거리며 다투다 결국 Milestone 은 70위권 밖으로 밀려났고 메리크리는 여러 신곡들을 제치고 7위를 기록하며 대 이변을 기록했다. 메리크리가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같은 해에 나온 신곡들이랑 벨소리 순위 같은 곳에서 경쟁하던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지만 이건 뭐... 괜히 괴물크리가 아니다 본격 겨울판 벚꽃엔딩

약 2년 동안 일본에서의 활동은 암전. 그리고 이 때의 엠스테 출연이 마지막. 보아 역시 음방이 막히게 되었다. 2년의 공백기에는 K팝 스타의 심사위원 때문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고, 보아 본인이 시즌2를 마지막으로 하차할 때, 더 이상 가수로서의 활동을 미룰 수 없어서 라는 말을 하였다.[53]

2013년 2월 일본에서 한국 7집인 Only One을 번안한 싱글로 활동 재개. 4~5개월에 한 장씩 싱글이 나오며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14년 9월 마침내 4년 만에 일본 정규 8집 WHO`S BACK?[54]을 내며 같은 달 4년 반만에 전국투어 콘서트를 개최. 비록 콘서트 규모나 횟수는 전성기 시절에 한참 못미쳤지만,[55] 공연 모두 전석 매진시키며 공연 전문가와 팬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댄스가수임에도 라이브 활동에 집중한다는 점. 뛰어난 가창력과 라이브 실력이 호평의 요인으로 보임. 또한 동일 콘서트에서 부른 자작곡 'FLY'를 12월에 발매하여 일본활동을 이어갔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그래도 간간히 노래 내주면 음원차트 상위권에도 들고 어느정도 화제가 되는 수준. 6집 허리케인 비너스를 발매할때는 5년만에 컴백이라고 하며 컨셉사진이나 뮤직비디오 공개가 검색어 상위권에도 오르고 수록곡들이 전부 차트에도 드는 등 화제가 되었으며 여성 솔로로 그해 음반 판매량 1위를 기록하였다.[56] 6집 선공개곡이었던 GAME은 히치하이커로 활동하는 지누가 만들었으며 뮤비는 보아의 둘째 오빠인 권순욱 감독이 제작. 보아가 앤디워홀의 뮤즈 에디세즈윅에게 영감을 얻어 '한국의 에디세즈윅'으로 만들어달라고 부탁. 팩토리걸의 에디세즈윅을 오마주한 컨셉으로 대호평을 받았다. 곡 자체는 호불호가 갈렸지만 그래도 퍼포먼스는 역시 믿고 보는 보아정도의 반응을 얻으며 화제. 하지만 허리케인 비너스의 컨셉이 기대한 것과는 달리 너무나도 난해하여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들었다.[57] 결과적으로 볼 때, 5년만의 국내컴백이었던만큼 기대감도 컸고 팬덤의 충성심도 대단했기 때문에 성적은 꽤나 준수했다. 앨범은 발매 당일 판매량이 2만장을 넘었고 초동이 3만장이 넘었으며, 총판은 약 6만장에 달했다. 데뷔 10년차 솔로여가수로서는 경이로운 성적임은 분명하다. 활동 2주차에 타이틀 곡 Hurricane Venus로 뮤직뱅크 1위를 차지했을 당시 음반점수가 9천점을 넘었다. 같은 1위 후보였던 가수들의 총점보다 높았다. 음원성적도 2~3위 상위권을 머물렀다. 당시 순위제가 없던 음악중심을 제외하고 뮤직뱅크에서 3주 연속 1위, 인기가요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해 총 5회 1위를 거두었다.

영화 메이크 유어 무브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어 2011년에 촬영해 이듬해 개봉한다고 했지만 밀리고 밀려서 2014년에 개봉했다. 영화의 아시아 쪽 배급을 SM과 극적으로 화해한 CJ가 맡게 되어 미국 활동의 또다른 가능성이 열렸다. 미국 쪽 배급사는 영화 쥬만지 등을 배급했던 회사.

2012년 여름엔 본인 작사 작곡의 자작곡 미디움템포 댄스곡인 Only One이 공개 후 전 음원차트 올킬, 전문가들에게 높은 평을 얻었으나,[58] 같은 시기 싸이강남스타일런던올림픽이 터지면서 묻힌 감이 있다. 팬들이나 대중들이나 이 노래는 봄이나 가을에 나왔으면 대박이 터졌을거라며 아쉬워 했다.[59] 하지만 그 해 연간 멜론차트 40위를 차지하는 등 히트를 기록했고, 당시 오랜만의 보아 컴백곡이라는 점이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이 당시 2절 댄스 부분을 소속사 후배 가수들과 커플댄스로 구성했는데,[60] 절륜한 춤솜씨와 퍼포먼스로 후배가수 팬들에게도 큰 호평을 받았다. 무엇보다 이 노래를 기점으로 사실상 보아의 음악 스타일이 바뀌었다는 점이 중요. 가수로서의 전환점이 된 노래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의미 있는곡. 특히, 서정적인 멜로디와 달리 엄청난 고난도의 안무가 화제를 모았다. 그도 그럴것이 메이크 유어 무브, 스텝업의 안무를 맡았던 세계적인 안무가 내피 탭스 부부가 안무를 짜주었기 때문.

2011년도에는 K팝 스타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연하였다. 10년 넘게 갈고 닦은 내공과 오랜 무대경험, 연예계 짬밥을 바탕으로 양현석, 박진영같은 대선배들 사이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내뱉는 심사평이 큰 호응을 얻었다. 당시 대한민국 굴지의 3대 연예기획사인 SM, YG, JYP가 모여 오디션을 한다는 소식에 프로그램 자체가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YG, JYP에서는 대표수장이 나오는 반면 SM에서는 소속가수인 보아가 섭외되자 본인도 고민을 많이 했다고. 결과적으로 출연을 결정했고, 프로그램과 본인 스스로에게 모두 득이 되었다.[61][62]다른 심사위원들이 지나치게 과잉된 심사평이나 심히 편향적인듯한 심사평으로 논란이 되었던 것과는 달리 실력 위주의 냉철한 심사, 참가자의 장단점을 정확히 지적하는 심사, 멘토를 맡을 때 참가자의 단점을 확실히 고치는 모습 등으로 큰 호평을 얻었다. 또한 일본 진출 직전인 2001년 이후로 무려 10년 만의 예능프로 출연으로서, 그동안 신비주의 전략을 고수해 미디어 노출이 극히 적었기 때문에 보아가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 알았다는 평이 대다수. K팝 스타로 입덕한 신생 팬도 많다고 한다.

파일:149771517.jpg[63]

이후 K팝 스타 시즌2[64]에도 심사위원 자격으로 출연하고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더 이상 가수 활동을 미룰 수 없다며 K팝 스타 시즌3부터는 불참. 그 자리는 안테나 뮤직유희열이 대신해 심사를 하였다. [65]

현재 보아가 한국에서 중점적으로 미는 장르는 '어쿠스틱 팝'. 허리케인 비너스가 화제성에 비해 생각만큼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예 Only One을 기점으로 방향 전환했다. 비록 상업적인 성과는 전성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음악자체에 대한 반응은 나쁘지 않은 편, Only One은 그 해 연간 차트에도 들고 퍼포먼스, 음악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나온 '그런 너'는 비활동 곡이었지만 발매직후 모든 음원차트 순위에서 TOP 10에 진입. 어느정도 선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댄스팝, EDM 등 다양한 장르를 거치던 보아가 드디어 자신에게 맞는 음악을 찾고 어덜트화되어간다며 호평하는 이들도 늘었다.

2013년도 1월에 한국에서의 첫 단독콘서트BoA Special Live 2013 Here I am을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개최. 13년 만에 한국에서 콘서트를 진행해 수많은 팬들이 환호. 그동안 일본에서의 콘서트를 보며 부러워 끙끙대는 한을 드디어 풀게 되었다. 티켓팅이 열리고 약 30초 만에 매진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1회 예정이던 콘서트가 1회 추가 공연이 결정되었고, 그 추가 공연도 1분만에 전석 매진. 이렇게 열성적인 모습을 보인 탓인지 결국 전국 투어가 결정되었고, 대만 콘서트까지 진행되었다. 콘서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으며 이 때 팬들을 위한 자작곡인 '그런 너'가 공개 'Only One'의 전 이야기로 팬들이 무척 아끼는 곡이 되었다.



5월 12일 정규앨범 8집 "Kiss My Lips"를 발표하였다. 관련기사 5월 6일 자정에 보아 본인이 작사, 작곡하고 다이나믹 듀오의 개코가 피쳐링으로 참여한 선공개곡인 Who Are You를 발표 하였는데,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2위로 진입하였다. 8집 앨범은 12개곡 전곡 작사, 작곡, 프로듀싱에 보아가 직접 참여하며[66]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십분 발휘했다. 평단에서도 무척 좋은 평을 들으며 아이돌 가수로서는 드물게 IZM에서 별 4개를 받았고, 올 해의 음반 TOP10 중 유일한 아이돌 가수의 음반이었다. 또한 하이원 서울가요대상에서 최우수 앨범상을 수상하며 퍼포먼스 가수의 면모뿐 아니라 음악가로서도 인정받았다.

3년이라는 긴 공백기와 전체적으로 달라진 음악적 색채 때문인지 이전보다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과거 댄스팝 위주의 음악에서 어쿠스틱, 일렉트로니카 등 다양한 음악장르를 보기 좋게 버무린 앨범 구성. 음악적으로 한단계 진보했다는 평을 받으며 리스너와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각종 호평들

한 기획사의 아이돌에서 발전해 이제는 진정한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중. 2015년 8월 여성 아이돌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2015년 12월 2일. 일본 FNS 가요제에 출연해 카하라 토모미와 함께 자신의 겨울 명곡 '메리크리'를 열창하였다. 오랜만의 메이저 연말 방송 출연이었기 때문에 반가워하는 반응들이 많았다. 방송 직후 일본 웹사이트 인물 검색순위 3위에 올랐으며, 아이튠즈 싱글 차트에서 발매된 지 10년도 훨씬 넘은 메리크리가 23위에 오르는 등 간만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2015년 12월 25일, 엠스테 슈퍼 라이브에서 '메리크리' 무대를 선보였다.


2016년 6월 17일 SM과 타 아티스트의 콜라보 SM'STATION'의 19번째 음반인 No Matter What을 발매 하였다. 콜라보 가수는 빈지노이다.

2017년에는 프로듀스 101 시즌2의 국민 프로듀서 대표 및 MC로 활약했다. 프듀 시즌2의 제작자 안준영PD의 말에 따르면, 기획 당시부터 보아를 꼭 섭외하고 싶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 '연습생'이라는 개념을 거의 최초로 알린 인물이 바로 보아였기 때문. 국민 프로듀서 대표로 활약하며 보아는 연습생들에게 여러 조언을 해주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67]


2017년 4월 28일 SM STATION2의 5번째 음반인봄비 (Spring Rain)를 발매 하였다.


2017년 6월 26일 CAMO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디지털싱글 CAMO를 발매하였다.

2018년 1월 16일 마이클잭슨 데뷔 30주년 기념을 맞이하여 SM STATION2로 마이클잭슨의 곡 Man In The Mirror을 원작자 사이다 가렛과 함께 불러 발매했다.

2018년 1월 30일 선공개곡 내가돌아를 발매하였다.


2018년 2월 20일 데뷔 후 첫 미니앨범 ONE SHOT, TWO SHOT를 발매하였다. 그리고 이 노래는 2018년 4월초부터 전세계 H&M 매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2018년 2월 14일 일본 정규 9집 私このままでいいのかな (나 이대로 괜찮은걸까)가 발매되었다.
또한 4년만에 보아의 일본 전국 투어 《BoA THE LIVE 2018 ~Unchained~》 공연을 진행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갈 때 공연을 위해 재녹음한 곡들을 모은 미니앨범 Unchained를 나눠주었다.

2018년 10월 24일 한국 정규 9집 WOMAN 이 발매되었다. ‘홧김에 (Irreversible)', ‘Little More', ‘If', ‘No Limit' 등 자작곡 4곡은 물론, 타이틀 곡 ‘Woman'과 수록곡 ‘Encounter'도 직접 작사해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WOMAN 무대 시작부분이 인상적이다.

2018년 12월 《BoA THE LIVE 2018 X'mas / in Seoul》 공연을 진행했다. 보아의 7년만의 크리스마스 라이브이자, 한국에서 처음 개최한 BoA THE LIVE 공연인사이다. 한일 개최를 위해 최초로 한국곡, 일본곡을 절반씩 구성하였다. 또한 보아 데뷔 18주년만에 공식 응원봉이 나왔다. (아별봉이라고 부른다.)

2019년 1월 25일 보아 일본 싱글 'AMOR' 음원이 공개되었다. 뮤비는 12월 20일에 선공개 되었으며 AMOR 무대는 보아 더 라이브 2018 X'mas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2019년 4월 3일 보아 일본 싱글 'スキだよ-MY LOVE-'의 음원과 음반 둘 다 공개되었다. 원래 본 앨범은 2월 27일에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내부 사정으로 인해 4월 3일로 미뤄졌다. AMOR와 커플링 곡인 것 같다. 정확할 시 수정바람
한국 음원사이트에는 4월 4일 정오에 공개되었다. AMOR와 スキだよ-MY LOVE- 둘 다 보아가 프로듀싱 했으며 スキだよ-MY LOVE-은 각트가 작사가로 참여했다. 본 곡의 무대는 3월 30일 MUSIC FAIR에서 공개되었다.

6월 4일, 보아의 새로운 한국 디지털 싱글 'Feedback'이 공개되었다! 피처링으론 넉살이 참여하였다. 6월 5일 8시 차트에 23위까지 반등을 성공하였다! Feedback의 뮤비가 2시간 30분 만에 공개되는 등 또 팬들의 화를 돋구었다. 스엠이 스엠했다... SM 공식 트위터에 점핑보아들의 뮤비 어디에 삶았냐는 원성이 많다.

보아의 신곡 Feedback이 나오는데 이어 동방신기유노윤호의 첫번째 미니앨범의 수록곡인 'Swing'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또한 나 혼자 산다에도 유노윤호와 함께 출연했다.

5. 평가

보아는 현재 한국 대중가요계의 연습생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만든 1등 공신이다. 하지만 연습생 육성 시스템 자체는 보아가 최초라고 할 수 없다. 당장 몇 십년 전 선배격 가수들인 펄 시스터즈, 김완선, S.E.S., H.O.T.만 봐도 혹독한 트레이닝을 통해 데뷔한 케이스였다. 또한 한국의 연예 기획사에서 연습생을 육성하는 시스템을 완성하고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사례가 보아였기 때문에 대부분 보아를 연습생 시스템이 만든 모범사례로 인정하고 있다.[68]

요즘 아이돌 시장에서 흔한 '연습생 이후 데뷔'의 모범사례이기 때문에 보아의 성공은 이후 데뷔하는 가수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전에도 연습생 시스템은 존재하였지만 대형기획사가 아닌 이상 대부분 주먹구구식이었으며[69] 시스템을 갖추더라도 지금만큼 치밀한 육성시스템은 아니었다. 보아만 하더라도 연습실 환경이 낙후되어서 거울도 없이 댄스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보아의 연습생 시절 연습실은 지금의 하늘무늬 커튼이 있는 쾌적한 공간이 아니라 지하에 있는 연습실이었고 비가 오면 물이 찼을 정도로 열악한 시설이었다.

특히 이때부터 기획사들이 자사 아이돌들을 트레이닝할 때, 거의 필수적으로 외국어를 교육하는 비율이 급증하였다. 적어도 일본어는 무조건 필수적으로 가르치며, 국내 프로모션과 해외 프로모션을 겸하는 기획사들이 많아졌다.

5.1. 보아를 존경한다고 밝힌 인물들

5.1.1. 여자

5.1.2. 남자

6. 음반

앨범 발매의 상세한 내용은 BoA/음반 목록 참고.

7. 콘서트

보아의 콘서트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BoA/콘서트 목록 참고.

8. 실력 및 음악성

동작을 알고 춘다. 동작에 필요한 근육의 움직임이 있는데 그 시작점부터 완결점까지가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정돈돼 있다. 보아는 분명 일정 수준을 넘어선 댄서다. - 이주노
질투를 많이 했죠. 제일 어린데 제일 잘 했어요.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잘할까 싶을 정도로. 잘하기만 한 게 아니라 엄청 열심히 했죠. 보아 빼고 다 언니 오빠 연습생들이었는데 아마 모두 질투했을거에요. 그 나이에 그 재능과 노력은 쉽지 않으니까. - 장나라
누군가 국가대표로 우리나라 가수 한 명을 뽑아야 한다고 하면 나는 보아를 반드시 추천할 것이다. - 신승훈
일본에서 성공했다거나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노래를 정말 잘 부른다. 내가 아는 많은 작곡가와 제작자들이 그녀와 작업한 뒤 전부 칭찬을 한다. 어떤 노래라도 보아가 부르면 살고 빛이 난다. - 유희열
보아의 춤 한 동작 한 동작을 보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보아는 춤과 노래에 미쳐있는 것 같다. 무대에 서는 각오가 남달라 보이는 것이, 무대에 설 때 눈빛부터가 다르다. 보아가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무대를 꽉 차 보이게 만드는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이런 후배가수가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 클론
그룹, 솔로 댄스 가수 중 최상위권의 실력을 자랑한다. 또, 웬만한 발라드 가수 뺨치는 가창력도 갖고있다. 특히 보아 정도의 퍼포먼스를 라이브로 소화할 수 있는 가수는 거의 없다. 댄스곡 위주로 활동하기 때문에 단순한 '라이브가 안정적인' 댄스 가수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순수한 가창력만 따져도 실력파 가수들과 비교해 뛰어난 수준이다. 애초에 일본에서 뜨게 된 계기가 이만큼 춤과 노래를 동시에 소화하는 어린 여가수가 역대 J-POP 역사상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LISTEN TO MY HEART 활동 시절 일본의 반응이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보러 미국에 갈 필요가 없다!'였을 정도였다.

음색은 허스키한 편. 데뷔 당시의 1집 앨범과 최근의 앨범을 들어보면 목소리가 꽤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데뷔 당시에는 나이가 나이인지라 목소리에서부터 어린 티가 나고 미성과 탁성의 중간에 있었던 느낌이라면 2003년 이후론 탁성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보아 특유의 창법은 대중들에게 호불호가 갈렸다. 탁하고 누르는 듯한 목소리가 감정 표현에는 적격이지만 너무 답답하게 들리고 가사전달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은 고음을 낼 때 목에 무리가 갈 수 밖에 없는 창법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보면 가수 생명에 지장이 올 수 있었다.

본인도 이것을 알고 있어서 2008년 즈음에 박선주에게 집중적인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는데, 이 탁성을 싹 고쳤다(!). 연습생 시절을 포함하여 10년 가까이 그렇게 부른 것을 바꾼다는 건 보통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지금은 상당히 깨끗하고 청아한 보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전의 탁한 창법을 좋아하던 사람들은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탁성이 포인트였던 발라드들[71]을 간드러지게 부르게 되었다는 것. 또한 이 맑은 음색으로는 노래들이 그 전처럼 파워풀하게 들리지 않고 너무 얕게 들린다는 사람들도 많다. 또한 비음이 생겼다는 평도 있다.

예전의 보아 노래와 현재의 보아 노래가 많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 곡 스타일이 달라져서도 있겠지만, 창법의 변화도 한 몫한다.

보컬 트레이너들과 관계자들이 높히 평가하는 보컬리스트 중에 한 명이다. 한국에서는 댄스곡 위주의 활동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보컬 테크닉도 매우 다양하고, 어떤 장르든 능숙하게 소화하는 몇 안되는 가수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쓰는지 매우 잘 아는 똑똑한 가수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평론가들의 보아 음반과 관련된 평을 읽어보면 노래 못지 않게 가창력에 대한 호평도 상당히 많다.[72]

의외로 어릴적부터 작곡에 참여해왔는데, 처음 작곡했던 노래는 일본 1집에 수록된 Nothing's gonna change. 이후로도 꾸준히 앨범에 한두곡 정도 작곡에 참여하긴 했지만, 편곡은 다른 이의 손을 빌렸고, 자작곡의 비중도 그리 큰편은 아니었기에 싱어송라이터로서 활약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완전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던 시기는 일본 7집 앨범인 IDENTITY. 미국진출 이후 발표한 앨범으로 작사작곡 비중이 눈에띄게 늘었으며,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한 앨범이었다. 상업적인 성과는 크지 않았지만 음악적인 성장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로 직접 앨범에 참여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증가. Only One 활동 당시에는 아예 본인이 만든 노래를 타이틀과 후속곡으로 들고 나왔다. Only One은 그 당시 멜론 연간차트 순위권에도 들고, 꾸준히 상위권에서 롱런하며 인기를 얻었다.

Kiss My Lips에서는 아예 자신이 모든 노래를 작사, 작곡. 심지어 편곡에까지 참여했다. 직접 노래도 부르고 저작권료도 벌고 비록 크게 흥행하진 못했지만 리스너와 평론가들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내며 프로듀서로서의 면모를 인정받았다.

춤실력하면 보아를 빼놓을 수 없다. 보아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인 댄스트레이닝을 받았고 이후 활동 중에도 미국, 일본 등지에서 세계적 수준의 댄서와 안무가들에게 지속적인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러나 트레이닝 덕만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트레이닝을 받는 것과 트레이닝을 소화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며 보아의 연습 영상을 보면 초기부터 춤에는 천부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연습생 당시의 춤연습 영상이나 활동 극초반인 Don't start now 연습 영상을 보면 복잡한 스텝을 중학생 소녀가 흑인 댄서에게 알려주는 대목도 나올 정도. 그게 아니더라도 데뷔곡 ID:Peace B나 Amazing Kiss 등만 봐도 보아가 스텝 밟으며 날라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보아는 이 때만 해도 주로 보이쉬한 스타일의 춤을 소화했다면 일본 데뷔 이후에는 차츰 웨이브나 곡선을 살린 안무도 살리게 된다. 싱글 3집 気持ちはつたわる를 보면 초반에는 안무의 포인트인 허리 돌리기가 약간 어색해보이는데 이후 어떤 안무도 만능으로 소화하는 댄서가 되어간다. 보아가 마음을 먹고 춤을 추는(특히, 뮤비와 첫방을 보면) 경우, 박자를 굉장히 정확하게 타면서 작은 체구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동작을 크게 한다. 그러면서도 동선은 깔끔해서 군더더기가 없다. 이러한 부분은 valenti 간주 댄스를 찍은 캠 영상이나 only one 뮤비 촬영 영상에서 훨씬 잘 드러난다.

9. 자작곡

보아가 작사,작곡을 한다는건 Only one 때부터 강조되어서 최근에야 자작곡을 만드는 걸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은 2002년 넘버원 때부터 Realize를 작곡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작곡 활동을 하다가 Only one에선 자작곡을 타이틀로, Kiss my lips에선 앨범 전곡 작사 작곡를 하면서 평론가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회사에서 SM Rookies의 곡을 써달라 부탁하여 곡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

또한, 보아는 2015년에 여자 아이돌 최초로 한국저작권협회 정회원이 되었다.*

10. 홍백가합전 출전 경력

연도출연 횟수곡명출연 순서상대
2002년VALENTI02/27D-51
2003년2DOUBLE01/30w-inds.
2004년3QUINCY07/28EXILE
2005년4抱きしめる06/29키시단
2006년5七色の明日 〜brand new beat〜02/27토바 이치로
2007년6BoA 겨울 발라드 스페셜14/27바바 토시히데

11. 논란

12. SNS

싸이월드 초창기 시절 주변 지인들과의 친목 위주로 미니홈피를 운영했으나 얼마 못가 폐쇄하고 회사에서 관리해주는 미니홈피로 전환하였다. 일상생활을 담은 사진이나 글은 없이 공식 프로필 사진 위주의 운영. 그렇다고 업데이트가 활발한 것도 아니었다. 이 시기 본인의 사생활은 거의 일본 쪽 블로그에 올렸었는데 이마저도 몇 년 못 버티고 폐쇄. 지금은 SNS 운영이 활발한 보아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에선 SM 엔터테인먼트의 신비주의 컨셉 요구가 이유였던 듯.

2010년에 트위터를 개설하고 꽤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한때 국내 여자 연예인 트위터 팔로워 수 1위였으나 다른 SM 후배 팬들과의 어이없는 공격을 받아 탈퇴했다가 다시 개설했다. 이후 일적인 용도로 주로 쓰고 있다. 현재 제일 활발하게 활동하는 SNS는 인스타그램이다. 31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 중.

2018년 2월 19일 처음으로 단독 브이앱을 했으며 개인 채널이 없다보니 SMTOWN 계정을 통해 방송했다.

1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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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된 자세에서 루주하게 '뚝'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면 좋겠어."
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모스키노의 인형처럼?"
순간, 고개를 흔드는 패션 에디터를 본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다시 말했다.
"오케이, 알겠어요. 그러니까 앤 드멀미스터의 모델들처럼 말이죠? '무심한 듯 시크'하게!"
하긴, 두 시간 전, 보아는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외쳤었다.
"아, 지난 5월호 <보그>의 컬렉션 부록은 최고였어요. 그 풍부한 비주얼과 명료한 텍스트, 깜찍한 사이즈는 바로 내가 바라던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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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연기 활동



[1] '純'자 항렬이다. 보아의 두 오빠 모두 항렬자를 사용한다. 큰오빠는 피아니스트 권순훤이고 작은오빠는 권순욱이다.[2] '어렸을 때 키가 자라지 않은 이유는 무리한 다이어트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키가 제대로 자랄 리가 있겠냐'고.[3] 초등학교 졸업 후, 삼육중학교에 수석 입학했으나 입학 후 얼마 안 되어 외국어 공부를 이유로 한국 켄트외국인학교로 적을 옮겼다. 하지만 바쁜 해외 활동으로 인해 자퇴한 후 2002년에 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합격했다. 더군다나 그때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가장 바쁘게 보낼 때였다. 과외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문제집 한 권을 다 풀어왔다고 한다.[4] 2010년도에 이사 직책을 맡게 되었다. 강타와 함께 보아는 비등기 이사로 등록되었다.[5] SM엔터테인먼트가 유통사를 지니뮤직에서 아이리버로 옮기는 과정에서 함께 교체되었다.[6] 데뷔 전에 데뷔일을 알리는 CF가 나왔다. 당시 상품이 아니라 가수의 데뷔를 알리는 CF가 지상파 TV에 나온다는 건 생소했다. 이는 SM에서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상품'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SM 티저에 삽입된 '에!쓰엠~엔터테인먼트'라는 구호는 2000년대까지 꽤 오랫동안 사용되었는데, 이 목소리는 H.O.T.토니의 목소리[7] 비등기 이사 선임 이전에도 회사 높은 분들이 반농담으로 권이사라고 불렀다. 실제로 K팝 스타에도 SM을 대표하여 YG양현석, JYP박진영과 심사위원석에 나란히 앉기도 했다. 물론 이수만은 방송 나올 짬밥은 아니라(...) 연예인인 보아가 나온 것도 있지만. 참고로 SM 회장은 당연히 이수만이고, 사장은 김영민, 그리고 다음이 유영진, 보아라고 봐도 무방할듯. 보아가 정식으로 SM 사업에 뛰어들거나 그런건 아니지만.[8] 후에 보아는 이수만에게 왜 자기를 캐스팅했냐고 물어보자 이수만은 '웃는 게 예뻐서'라는 의외의 대답을 한다. (2012.06.05 방영된 '김승우의 승승장구' 출연당시 보아가 했던 말)[9] 비슷한 선례로 선배 가수였던 바다도 이수만에게 노래로 캐스팅되었다.[10] 이때 SM에는 신비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캐스팅된 다른 여자 연습생들도 많았는데, 알려진 사람으로는 장나라가 있었으며 장나라는 후에 소속사를 옮겨 데뷔하게 된다. 소녀시대로 데뷔했던 제시카f(x) 멤버 크리스탈 역시 이때 캐스팅되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확실하진 않다. 당시면 나이가..[11] 한미일 정규, 싱글, DVD앨범을 모두 합쳐 추정치 10,349,772장. 집계가 되지 않은 라이센스 앨범들을 합하면 이보다 약간 더 많을 것이다.[12] 2002년 SBS가요대전, MKMF까지 2회. 당시 17세[13] 2004년 KBS가요대상, MKMF까지 2회. 당시 19세였다.[14] 앨범과 DVD차트는 2003년에 최초 1위, 싱글차트는 2005년에 최초 1위[15] 정규 1집부터 6집까지 총 6장 연속 1위. 베스트 앨범 포함시 7장 연속 1위지만, 오리콘 기록에서는 베스트 앨범은 제외된다.[16] 일본 정규2집 Valenti 125만장, 베스트 1집 Best of Soul 약 109만장[17] 원래는 연 4회 발행되었으나 53호부터 리뉴얼 되어 연 2회 발행으로 바뀌고 정사각형에서 A4사이즈로 변경되었다.[18] 별도로 수수료 200엔이 더 붙는다.[19] 1998년도 13세 때 연습생으로 들어간지 2개월 되었을때다.[20] 당시의 보아 덕후들의 증언에 의하면 SM건물 앞에는 항상 지금도 빠순이들은 늘 죽치고 있었고, 보아가 지나가면 '보아야!!'하고 불러서 보아가 웃으며 쳐다보면 입에 담지 못할 쌍욕을 퍼붓거나, 보아가 1집 후속곡 '사라'로 활동할 때 후렴구에서 '안사!, 안사!'를 외치거나 다함께 '꺼져라!'를 외치거나 사라(살아)의 반댓말로 죽어! 죽어! 등의 행패를 부림[21] 이와 비슷하게 데뷔하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안티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경우는 소녀시대의 제시카가 있었다.[22] 안무가 배윤정은 춤이 너무 좋아 안무팀을 쫓아다니며 배웠는데 부모님한테 들켜 다리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맞았다고 한다. 가수 가희는 아예 부모가 더 이상 춤바람 들지 말라고 강원도 이름모를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집어 넣어 가희가 서울로 도망갔던 적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 그 당시 20살이 갓 된 그들조차 이런 시선을 받았는데 보아에 대한 시선이 고왔을리가 없다.[23] 행운의 편지처럼 끝부분에 이 글 퍼나르지 않으면 가정불화가 생긴다고 협박을 적어놨고 당시 순진한 개초딩들은 다 낚였다.[24] 당시는 2~3차 정보화촉진기본계획 등이 추진되던 확장기, 심화기였다.[25] 그래서 보아의 팬들은 대부분 전성기부터 현재까지 아직도 남초 성향이 짙다. 걸크러쉬 기믹을 얻은 것은 전성기를 찍고 난 이후부터다.[26] SM의 사옥은 서울인데, 보아의 집은 당시 경기도 남양주시였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버스로 왕복 2~3시간이 넘는 거리를 다니며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이 당시엔 남양주에서 서울에 가려면 무조건 버스로 다녀야 했는데, 경춘선은 전철이 안 뚫렸을 때라서 어쩔 수 없이 남양주에서 서울까지 버스로 다녀야 했다. 경춘선 전철이 개통된 것은 2010년 12월이다.) 게다가 2000년 초반 당시 SM은 시설도 매우 낙후되어서, 비가 새는 건물에서 댄스 트레이닝을 받고, 그것도 거울 없이 유리창에 비치는 모습을 보며 연습하는 등, 여러모로 열악했다고.[27] 이 기획의 이름은 '신비 프로젝트'로 보아에게 투자한 30억을 다 쓰기 전 일본에서 대박을 치면서 투자원금을 모두 회수하고 흑자 전환한 프로젝트.[28] 이 때 유영진은 신화의 <Only One>을 1년이 넘도록 공들여 작업하고 있었는데 후에 너무 신경 쓰느라고 보아의 데뷔곡을 대충 만들었다고 사과 인터뷰를 함.[29] 이 당시 팬덤 문화가 좀 그런 경향이 심했다. 지금이야 보는 시각들도 많아지고, 자칫 잘못하면 팬뿐만 아니라 해당 가수한테까지 악영향을 끼쳐서 웬만하면 조심하는 편이지만. 특히 H.O.T. 팬들의 베이비복스 멤버 테러 사건, 젝스키스 팬들의 DSP사옥 테러 사건 및 조영구 차량 피해 사건은 지금 일어났다면 사회적으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지금은 이런 일이 벌어지면 소속사가 빡쳐서 고소장 넣고 가해자를 인실좆시켜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테러방지법은 덤이고.[30] 사실 어찌보면 당연하다. 1집 이후 나온 스페셜 앨범활동은 성공하자 못했고, 오히려 일본에서 히트 친 이후 주목을 받았으니 체감차이가 클 수밖에.[31] 초코틴틴[32] 물론, 성공은 아니지만 아주 폭망까지는 아니었다. 두 싱글 합쳐서 10만장 가량 나갔다.[33] ID ; peace B 는 당시 일본인들에게 소녀인데 무섭다는 반응이다. 이에 여성스럽게 수정해서 나온게 Amazing kiss. 그러나 이때 보아를 보면 날아다닌다. 그리고 살이 너무 빠져 뼈밖에 없었지만 미소녀의 정석을 보여줌. 그리고 탄생한 곡이 바로 훗날 2집에 실리는 'moon&sunrise'이다. 보아 작사 곡으로 혼자인 외로움을 담은 가사로 당시 히라가나밖에 몰라 한자는 눈물 루(淚)밖에 없었다.[34] 싱글로 나오려던 곡이 'Next step'이라는 설이 유명하다[35] 한국제목 '마음은 전해진다'[36] SPEED의 해체 이후로는 친근한 옆집 누나 이미지를 무기로 내세웠던 모닝구 무스메가 일본 걸그룹의 패자로 등극한다.[37] 이 과정에서 이전 가수들의 성공 스토리를 치밀하게 벤치마킹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미국에서 건너온 천재소녀 이미지가 먹혀 들어간 우타다 히카루의 사례를 벤치마킹 한 것[38] SBS 나이트라인, 스튜디오 초청 생방송 단 1회, 이외는 인터뷰 녹화 뉴스였다.[39] 흔히, 두 가수를 라이벌 구도로 몰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둘의 음악적 색깔도 다르고(장나라는 팝발라드, 보아는 댄스), 활동방향도 항상 달랐다. 같은 점은 솔로 여가수라는 것 뿐이다. 하지만, 음악적 방향이 아니어도 당시의 인기도만 놓고 본다면 장나라와 보아의 양강구도였던 것도 사실이다.[40] 음이탈(삑사리)는 기본이고 어두운 표정, 애써 밝게 불러보려고 하는 목소리 등.[41] 자사 대표가 이런식으로 어느 노래에 대해 자신하며 홍보하는 경우는 이례적이었기에 이후에 이 노래가 그다지 좋은 판매량을 거두지 못했을 때 여러 번 회자되었었다. 실제로 판매량이나 반응면에서는 Shine We Are!쪽이 더 호응이 좋았음에도 DOUBLE로 홍백가합전에 출전한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자신이 있었던 모양[42] 횟수가 적었고 계획된 좌석수도 다른 가수에 비하면 많이 적은 편이었다. 추가공연으로 횟수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최대 9회 정도 아레나 공연을 하는 수준이었는데, 이 정도면 다른 가수들과 비교해도 부족한 편.[43] 가수 애프터스쿨의 멤버이자 리더였던 그 가희가 맞다. 2.5집 Miracle로 활동할 때, 기적과 Valenti 무대에서도 백업을 했었다. 이 둘은 훗날 프로듀스 101 시즌2에서 재회한다.[44] 이 때쯤부터 보아 본인이 앨범에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게 되었으며 sm에서는 Spark를 타이틀곡으로 하자고 했으나 보아 본인이 장문의 편지를 써 My Name으로 타이틀 곡을 결정하였다.[45] 마츠우라 아야, 나카시마 미카, 오오츠카 아이 같은 가수들과 경쟁[46] 가사가 시대를 앞서갔다고 일부 팬들은 평가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전형적인 유영진식 페미니즘 가사 중 하나일 뿐으로 유영진은 이런 노래를 꽤 발표한 편이지만 개중 어느 노래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페미니즘이 주목되고 있는 상황에서 보아가 정규 9집 Woman으로 컴백함과 더불어 Girld On Top이 재조명되기도 했다.[47] sm과 avex는 1년 단위로 보아를 한국 6개월, 일본 6개월 나누어서 활동을 시켰다고 한다. 연말연초가 되면 매니저를 비롯한 보아의 한일 스탭들의 신경전이 대단했다고 하는데, 주로 오가는 대화는 "작년에는 한국에서 ㅇㅇ일 더 일했으니 이번에는 일본에서 ㅇㅇ일 더 일하도록 하죠?" 따위의 대화. 한국에서 활동하는 이 6개월의 시간을 미국 진출 준비에 썼다고 하니..[48] 07년도 제주 한류엑스포 공연에서 한국에서의 무대에 굶주려 있었다고 본인이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을 보고 팬들도 같이 오열. 이 때만해도 공백이 5년이나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49] 참고로 이 감독의 전작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Genie in a bottle, 제니퍼 로페즈의 Get Right로 유명 히트곡의 뮤직비디오를 다수 찍어왔던 감독. 위 작품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면 대체 보아 뮤직비디오는 왜 저렇게 찍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50] 보아가 먼저 빌보드 200에 진입했으니 한국인 최초 메인 차트 진입은 보아가 맞다.[51] 이 인연으로 보아는 새로운 안무가와 프로듀서들을 접하며 보다 넓은 음악적 인맥을 가질수 있게되었고, SM 입장에서도 미국 시장과 인맥이 터진 덕분에 다양한 프로듀서와 관계자들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52] 일본 데뷔 10주년 기념 1탄으로 홍보해 놓고 티저까지 뽑는 등 다음을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1탄 이후 감감 무소식. 많은 팬들에게 분노와 실망을 안겼다.[53] 이후 SM은 아예 소속사 자체가 해당 프로그램에서 하차했는데, 후에 썰전에서 희철이 말하길 SM이 참가자들에게 딱히 줄 수 있는 혜택이나 참여자를 뽑거나 하는 모습이 없어 논란이 되기 전에 그만두었다고 밝혔다.[54] 후즈백의 신곡은 First Time 단 한 곡. 어떤 팬들은 신곡이 1곡 뿐이라며 실망하며 논란이 되기도 하였으나, 정작 곡수보다 논란이 된 것은 성의없는 앨범 디자인. 3분 완성짜리 디자인으로 자켓디자이너도 보덕살생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앨범을 내지 못한 4년 동안 쌓인 싱글이 무척이나 많았고, 앨범을 내려다 한 번 엎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의 활동곡을 모은 베스트앨범 격의 앨범. 그런 만큼 수록곡 하나하나 퀄리티가 높다.[55] 첫공연이었던 NHK홀 공연은 7600명 동원. 이후 공연들은 2000여 명 남짓한 규모로 전성기에 비하면 한참 적은 숫자이긴 하다. 다만 2010년도 BoA the LIVE 이후로는 일본에서 전국 투어는 안한 지 오래였고,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는 점을 감안해서 봐야 할듯.[56] 당시 선공개곡인 GAME은 공개되자마자 30만 건 이상의 유튜브 조회수를 기록하였으나 SM에서 뮤비 속 글자 하나의 스펠링을 틀리는 바람에 삭제. 영상을 교체하며 조회수가 다 날아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57] 허리케인 비너스의 코디는 예란지. 역대 최악의 코디라고 말해지며 충격의 보라돌이는 아직도 회자됨. 보아가 직접 같이 일해달라고 부탁해 모든 옷은 수작업으로 공을 많이 들인 옷을 제공하였으나 너무나 독창적인 세계관과 보아의 체형을 고려하지 않은 의상, 과한 메이크업 등으로 총공깽으로 불림.[58] 후크송 일색인 아이돌노래 판에 멜로디로 승부를 둔 노래라는 점이 좋은 평가를 얻은 것으로 보임.[59] 5월에 컴백하려 했으나 밀렸다는 소리가 있음.[60] 동방신기유노윤호, 슈퍼주니어은혁, 샤이니태민, EXO-K카이,세훈, EXO-M루한,레이까지 당시 SM 소속의 모든 남성그룹에서 최소 한명씩은 이 무대에 섰다. TRAX는 밴드이므로 제외[61] 현직 가수보다는 프로듀서에 가까운 양현석이나 박진영과 달리, 현직 가수로 활동하는 보아에게는 어린 참가자를 보는 것이 감회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보아 스스로도 어리고 꿈많은 참가자들을 보며 스스로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고.[62] 사실 보아가 캐스팅된 것은 이수만이 반강제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이수만 본인이 안 나가는 이유가 뭐냐고 묻자, 중년 남자 셋이 앉아있으면 프로그램 아무도 안 볼 거라고 했다고... 실제로 보아 앞에만 PPL 음료가 몰려있었다..[63] 마지막회 생방송 때.[64] 이 시즌에는 구구단김세정우주소녀남다원이 나섰다. 그런데 김세정은 보아에게 "캐스팅 포기"라는 굴욕을 당했다.[65] 보아는 K팝 스타로 SBS 연예대상에서 특별상을 수상. 이로써 미디어 노출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요대상, 연기대상, 연예대상에서 모두 상을 받는 희귀한 경험을 했다.[66] 사실 홧김에 소속사 측에 '다음 앨범은 내가 다 할게요!'라고 선언해서 만들기 시작한 앨범이라고... 한 두곡도 아니고 열 곡이 넘는 양을 작사,작곡,프로듀싱한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기에, 본인이 뱉은 말을 후회하기도 했다고... 그러나 결과가 좋게 나와 뿌듯해했다고 한다.[67] 제작진들에 따르면 보아는 촬영 하루만에 연습생 98명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고 한다. 또한 보아가 연습생들의 고민상담이나 해주고 조언을 해주는 일이 많았는데, 보아가 제작진에게 '연습생들이 방송될 분량을 뺏고 싶지 않다'며 자신을 편집해달라고 요청했다고.[68] 연습생 시스템의 흥행은 꼭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이클 잭슨, 자넷 잭슨, 비욘세 같은 해외 유명 가수들도 어린 시절 혹독한 트레이닝을 거쳐서 데뷔한 것으로 유명하다.[69] 그냥 길가다가 외모가 뛰어난 사람들이 기획사 명함을 받고 캐스팅되는 경우도 흔했다. 1세대 아이돌 그룹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캐스팅되었었다. 지금도 길가다가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사람을 보고 기획사 명함을 주는 경우는 아예 없지는 않다. TWICE의 멤버들만 보더라도 길거리에서 쇼핑하거나 유튜브의 영상을 보고 회사 측의 명함을 받은 케이스가 꽤 많다. 하지만 길거리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우리 회사 들어와라 이러는 경우는 없고, 오디션 한 번 보라는 식으로 가볍게 제의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요새는 연예 예술고등학교처럼 아예 그런 쪽으로 특성화된 학교나 방송연예과 위주로 기획사들이 명함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70] 어렸을 땐 의외로 댄스가수를 목표로 춤에 빠져 있었던 적도 있다. 연습했던 춤도 팝핀.[71] 특히 메리크리, 윈터러브[72] 작곡가 황성제는 자신이 작업했던 가수들 중에 보아가 가장 노래를 잘한다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보아의 트레이닝을 담당했던 가수 박선주는 보아의 중저음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극찬하기도.[73] 물론 보아의 음반은 사재기란 증거도 없거니와 전혀 아니다. 순전히 1위를 빼앗겨 투정을 부리려던 것. 본인들이 진짜 1위라는 것은 아마 당시 음원 1위가 DJ DOC의 노래였기 때문. 하지만 보아의 음원 역시 2~3위에 머물렀으며 음반은 보아가 3배 이상 앞섰다.[74] 그러나 이때 1위 수상자는 보아가 아니라 샤이니였다. 같은 소속사 후배니까 퉁치자 이건가 아마 DJ DOC는 당연히 보아가 1위일 것이라 생각하고 준비한듯 하나... 보아는 수상자도 아닌데 어리둥절...[75] 그간 DOC 멤버들의 성격이나 행적을 볼 때, 단지 보아가 대인배라 좋은 그림으로 넘어가 주었다고 보는 게 적당하다. DOC는 당시 행동 때문에 실검에 인성 논란이 올랐었고, 대중의 반응도 'DJ DOC가 원래 그렇지 뭐. 그 성격이 어디 가겠나' 수준이었다.[76] 보아는 실물보다 안 예쁜 반면 이수만은 현실보다 지나치게 잘생겼다고 한다.[77] 한 때 동방신기의 前 멤버이자 JYJ김재중과 절친 사이로 통할 정도로 친했다.[78] 보아와 마츠우라 아야와 크리스털 케이는 1986년생 라인이다.[79] 때린다는 건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등짝이나 어깨처럼 손에 닿기 쉬운 부위를 때리는 걸 일컫는다.[80] 일본 활동 중 입원하게 됐을 때[81]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82] 휴대폰, 자동차, 의류, 화장품, 음료, 과자, 맥주, 카메라, 나이키 의류 등등[83] 2위는 욘사마 배용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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