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집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앨범 (1959) 빌 에반스 트리오, <The Complete Village Vanguard Recordings> (1961년 6월 25일) 더 밴드, <The Band> (1969) 패티 스미스, <Horses> (1975) 윌리 넬슨, <Red Headed Stranger> (1975)
버지니아주 누포트에서 혼인 신고 없이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들은 피츠제럴드가 태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졌고 피츠제럴드는 어머니와 함께 뉴욕주 용커즈로 옮겨가 지냈다. 피츠제럴드는 어릴 적에 무용수가 되고 싶어했지만, 어머니가 가져온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한 재즈 아티스트들의 음반을 듣고 음악인으로 희망사항을 바꾸었다. 특히 1930년대 당시 미국을 휩쓴 여성 3인조 재즈 보컬 그룹인 더 바즈월 시스터즈의 리더 카니 바즈월의 가창법에 매료되었는지, 활동 초기에도 바즈월 스타일을 많이 따랐다.
하지만 1932년에 어머니마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면서 피츠제럴드는 고아가 되었고, 평소 자신을 홀대하던 양아버지에게 쫓겨나 이모 집에 얹혀 살거나 고아원 등을 전전하는 피폐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와중에도 계속 가창 연습을 거듭했고, 1934년 11월 뉴욕 할럼의 어팔로우 극장에서 열린 아마추어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면서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1월 할럼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하던 중 당시 유명 빅 밴드 리더였던 드럼 주자 칙 웹의 눈에 띄었고, 웹은 피츠제럴드를 자신의 밴드에 전속 보컬로 기용하면서 그녀의 출세에 큰 몫을 했다. 1939년에 리더였던 웹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피츠제럴드가 웹의 밴드를 이어받아 1942년까지 이끌었다.
1942년에 밴드를 해산한 뒤에는 영국의 데커와 전속 계약을 맺고 솔로 활동에 주력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수완 좋은 재즈 공연 기획자였던 노먼 그랜츠로부터 좋은 평을 받고 그가 주선하던 연례 재즈 음악회인 '재즈 앳 더 필하모닉(Jazz at the Philharmonic. 약칭 JATP)'에 정기적으로 출연했다. 1940년대 후반 무렵에는 비밥 열풍을 불러온 디지 길레스피와 협연하기도 했고, 특히 특유의 스캣 창법을 비롯한 완벽에 가까운 가창 기교로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는 비밥 쪽에만 경도하지도 않았고, 당시 사양길을 걷고 있었던 빅 밴드의 스윙 스타일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1955년에 데커와 계약이 만료된 뒤 노먼 그랜츠의 음반사인 버브와 계약했고, 이 음반사에서 보수와 진보 노선을 떠나 미국의 모든 송북[2]을 집대성해 음반화한다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뛰어들었다.
이 프로젝트는 1956년 제작된 콜 포터 송북을 시작으로 라저즈 & 하트 송북, 듀크 엘링턴 송북, 어빙 벌린 송북, 조지 & 아이러 거쉬윈 송북, 해럴드 앨런 송북, 저로움 컨 송북, 그리고 가장 마지막인 1964년의 자니 머서 송북까지 총 여덟 종류의 음반 세트들로 차례차례 선보여졌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대작업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고, 지금도 상업성과 예술성 모든 면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아낸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송북 녹음 외에도 자신의 음악 인생에 큰 영향을 준 루이 암스트롱과 듀엣으로 공연하고 음반을 냈고, 송북에서 협연했던 엘링턴 외에 그와 라이벌이었던 카운트 베이시와도 1970년대 후반까지 공연과 녹음을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외에도 아스커 피터슨과 타미 플래니건의 피아노 트리오와도 자주 협연했고, 1967년에 버브와 전속 계약이 종료되자 애틀랜틱과 캐피틀, 리프리즈 등의 레이블을 전전하며 녹음을 진행했다. 1972년 여름에는 그랜츠가 새로이 만든 음반사인 파블로에서 산타 모니카 공연의 라이브 앨범을 내놓아 대박을 치면서 생애 마지막이 되는 장기 전속 계약을 맺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피츠제럴드의 목소리는 다망한 활동으로 인해 서서히 노쇠해지기 시작했고, 전성기 때 보여준 3옥타브에 이르는 음역과 부드러운 음색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1980년대에는 당뇨병으로 인해 전반적인 건강도 악화되었고, 1991년에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이 된 'All that Jazz'를 파블로에 취입한 것을 끝으로 음반 녹음 활동을 중단했다.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공연 활동을 했지만, 1993년에 당뇨 후유증으로 두 다리의 절단 수술을 받게 되면서 이것도 중단하고 무대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 재단을 설립해 불우 아동들을 위한 후원금과 서적 기부에 주력했고, 1996년에 캘리포니아의 베벌리힐스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잉글우드 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듀크 엘링턴과의 합동 공연에서 듀엣으로 부른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트레이드마크인 스캣 창법이 잘 드러나는 유쾌한 스윙 곡이다.
Ella Fitzgerald - Misty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빌리 할러데이만큼 고유의 독특한 분위기와 기질, 비극적 생애로 인한 후광은 없지만, 평생 엄격한 자기 관리를 통해 비교적 오랫동안 목소리를 유지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남기고 간 유산과 업적은 할러데이를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역대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들 중 가장 완벽한 기교의 소유자라는 수식어가 한참을 따라다닐 정도였고, 타장르 가수들로부터도 흠모를 받았다. 독일의 유명 바리톤 가수인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까지도 피츠제럴드의 팬이었을 정도.
할러데이와 달리 루이 암스트롱의 강한 영향을 받아[3] 스캣 창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1940~60년대 전성기에 남긴 음반이나 공연 실황을 들어 보면 관악기 연주자 마냥 민첩하고 화려한 즉흥 스캣을 술술 불러내서 청중들을 미치게 만드는 본좌의 실력을 체감할 수 있다. 스캣 등 즉흥적인 역량 외에도 뚜렷한 발음, 억양과 곡조의 조화, 바이브레이션과 목소리 톤의 능란한 조절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송북 앨범들과 여타 솔로 앨범들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 명반으로 남아 여러 매체를 통해 복각되어 발매되고 있다.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인지, 활동 초기에는 너무 수줍음을 타다 못해 대인 관계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피츠제럴드 자신도 훗날 노래할 때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보다 더 편했다고 한다. 그리고 외모가 노안에 여장부 소리를 들을 만큼 터프한 편이어서 이것도 대인 관계에서 어느 정도 불편함을 초래했다고도 한다. 그래도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이나 영화에도 꽤 자주 출연했고, KFC 광고도 찍는 등 대중매체를 잘 활용한 것이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한 비결로 손꼽히기도 한다.
결혼 생활도 그리 순탄치는 않았는데, 첫 번째 결혼은 1941년에 어느 선창 노동자와 했지만 그가 마약 거래 혐의로 잡혀들어가자 2년 만에 파탄나 버렸다. 1947년에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과 두 번째로 결혼했는데, 둘 다 유명 재즈 뮤지션으로 하도 바쁘게 공연 활동을 하다 보니 사생활을 나누기가 힘들어져 1953년에 또 이혼해야 했다. 하지만 브라운과 음악적인 동반자 관계는 평생을 유지했고, 1991년 녹음한 마지막 음반에서도 브라운이 베이시스트로 참가했다. 1957년에는 어느 노르웨이 남자와 비밀리에 결혼했지만 결혼 소식이 로이터 통신을 통해 새나갔고, 남자가 예전에 약혼했던 여자에게 금품을 갈취했다가 스웨덴에서 체포되면서 첫 번째 결혼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짧게 끝나 버렸다.
평생 바쁘게 공연하고 녹음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브라운과 부부였을 때 자신의 이복 자매인 프랜시스 더 실버가 낳은 아이를 레이 브라운 주니어라는 이름으로 입적시켜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피츠제럴드나 브라운이나 너무 바빠서, 아이는 이모가 대신 길렀다고 한다. 그래도 양부모로부터 나름대로 재능을 물려받았는지, 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가수로 활동했다.
이마트 CM송 "난난나나나~"로 유명한 곡의 원곡 "Happy Talk"의 가수이다. 1949년에 초연된 뮤지컬과 영화화인 <남태평양(South Pacific)>(1958)에 나오며 사랑 받았다. 이 곡은 무려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만든 전설적 뮤지컬 콤비인 리처드 라저즈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만든 작품이다. 영화 <그린 북>(2018)에서 단 셜리(머허셜러 알리 분)의 크루가 편곡해서 연주하기도 했다. 원곡의 멜로디에 피아노 속주가 어우러져서 상당히 신나게 편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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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라 피츠제럴드 원곡
영화 남태평양 삽입 곡
1955년, 미국의 악명 높은 짐 크로우 법에 따라, 통합된 관중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체포된 적이 있다.사진 피츠제럴드 뿐만이 아니라 저 시절 유명 흑인 가수들은 인종차별 때문에 저런 고생을 많이 했다. 피츠제럴드 또래인 냇 킹 콜도 인종차별적 폭행을 당해 흑인 민권 운동에 나섰고, 피츠제럴드와 같이 듀엣을 했던 루이 암스트롱도 자신도 차별을 많이 당했다며 소련 공연 여행 취소 강수를 둬가며 흑인 민권 운동을 지지했을 정도.
[1]아프리카 감리교 감독교회 교인.[2] Songbook. 1920-40년대 미국 대중음악계를 주름 잡은 작곡가들의 노래들을 뜻한다. 이 노래들은 지금도 재즈 리얼북에 올라와 있을 정도로 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3] 실제로 듀엣으로 합을 맞춰 많은 녹음을 남기기도 했다. 송북과 함께 피츠제럴드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