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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대학교 Universitas Oxoniensis Dominus Illuminatio Mea | 케임브리지 대학교 Universitas Cantabrigiens Hinc lucem et pocula sacr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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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xbridge[1] |
2. 역사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영어권 지역에서 가장 유구한 대학들이며, 유럽 지역에서는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교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둘 다 인근 가톨릭 성당의 신학 연구자들이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교육 및 연구 활동을 하다가 인근 도시에 정착하면서 생겨났기 때문에 라틴어를 사용하며 영어를 쓰는 평민들과 분리됐고 대학 구성원을 가운(gown)으로 부르며 평민들의 타운(town)과 분리해서 살았다. 특히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1209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소요 사태가 일어나서 케임브리지로 피난 온 학자들에 의해 설립된다. 중세-르네상스 시기 양 대학에서 범죄자나 반역자가 나올 시, 상대쪽 대학 캠퍼스에 목을 매달아버리는 살벌한 라이벌리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자세한 설명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문서 참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와 달리 옥스퍼드 대학교는 역사 기록 부재로 인해 정확한 설립 날짜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096년에 옥스퍼드에서 교육이 행해지고 있음이 확인되며, 옥스퍼드 대학교는 스스로 이것을 자교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출처이 양 대학의 설립 뒤에는 19세기까지 약 600여 년 동안 잉글랜드에 대학이 세워지지 않는다. 브리튼 제도 전체로 확장해 봐도 1413~1583년 스코틀랜드에 세워진 4개 대학[2]과 1592년 아일랜드에 세워진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밖에 없을 정도.[3] 이들 7개 대학은 "고대 대학(ancient university)"이라고 하는데 고대 대학 이후에 영국에 세워진 첫 고등교육기관은 기준에 따라 웨일스 트리니티 세인트 데이비드 대학교(1822년 설립, 1828년 왕실 헌장),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1826년 설립, 1836년 왕실 헌장), 킹스 칼리지 런던(1829년 설립 및 왕실 헌장), 더럼 대학교(1832년 영국 의회 발의로 설립, 1837년 왕실 헌장), 런던 대학교 그룹(1836년 왕실 헌장), 아일랜드 퀸스 대학교(1845년 설립 및 왕실 헌장)[4] 등이며, 이 중 설립 당시부터 대학(university)으로 인정 받은 것은 더럼 대학교, 런던 대학교 그룹, 아일랜드 퀸스 대학교 뿐이다. 이외에도 스트라스클라이드 대학교(1796년), 헤리엇-와트 대학교(1823년), 버크벡 대학교(1823년), 맨체스터 대학교[5](1824년)도 있지만 이들이 대학으로 승격되는 것은 나중의 일이므로 논외. 어찌됐든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영미권, 특히 잉글랜드에서 압도적으로 오래됐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편,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사이의 세계 최초의 대학교 정기전인 Varsity Match가 1827년부터 크리켓(1827년) 종목을 시작으로 매년 시작된다. 이후 조정(1829년), 럭비(1872년), 농구(1921년) 대항전도 시작된다. 특히 이 중 템스 강에서 열리는 조정 경기는 영어로 그냥 배 경주(The Boat Race)라고만 해도 해당 경기를 가리킬 정도로 유명하며, 올림픽 선수들도 많이 참가한다. 양교의 라이벌 구도는 세계 대학 라이벌전 및 대학교 정기전의 시초가 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하버드 대학교와 예일 대학교 사이의 라이벌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사이의 라이벌전, 와세다대학과 게이오기주쿠대학 사이의 소케이센 등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옥스브리지라는 용어 자체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첫 용례는 윌리엄 새커리의 1850년작 소설 <펜데니스>에서 주인공이 "옥스브리지 대학교"의 보니페스 칼리지를 다녔다는 내용이며, 현재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1929년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이라는 수필에서 새커리를 참조해 옥스브리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다.
3. 특징
다방면에서 대립 구도이면서도 서로 교류를 활발히 진행한다. 실제로 각 대학 학부별로 연합 형태의 프로그램을 개설하기도 하고 학교 자체에서 "옥스브리지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교류가 많이 이루어지고 영국 최고의 자존심 대학이라는 타이틀을 함께 발전시키고 있다.미국의 아이비 리그나 아이비 리그 플러스의 영국 버전이라고 비교가 되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아이비리그와 같은 예의 영국 대학의 명칭은 러셀 그룹이라고 불리고 있다. 러셀 그룹은 영국의 24개 대학을 일컫는 용어다. 그중에서도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는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1,000여 년 동안 영국 최고의 양대 대학으로서 대결 구도가 형성되어 왔고 이 양 대학을 일컫는 용어가 옥스브리지다.
3.1. 공통점
- 양 대학은 거의 모든 영국 내 대학평가에서 1, 2위를 차지하고 세계 대학평가에서 1~10위를 차지한다. HYPSMC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브랜드 네임밸류가 높은 대학으로 손꼽힌다. 2021년 THE 세계 대학 평판(reputation) 순위[6]
- 양 대학 모두 칼리지 체계의 원조이며 (옥스퍼드 대학교/컬리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컬리지 문서 참조), 대학 교회, 출판부 (케임브리지 대학교/출판부 및 시험개발원 문서 참조), 의과대학 및 부속병원, 평생교육원, 식물원, 박물관, 납본 도서관, 토론 동아리, 경영전문대학원, 첨단산업단지, 연극 동아리, 칼리지별 성당 및 성가대, 칼리지 부설 초중등교육기관 등 수많은 비슷한 산하기관을 거느리고 있다. (예외적으로 옥스퍼드 대학교 시험개발원의 경우는 케임브리지 시험개발원에 병합되었다.) 특히 양 대학의 출판부는 세계에서 매우 오래되고 유명한 출판사 중 하나다.
- 옥스퍼드에서는 튜토리얼, 케임브리지에서는 슈퍼비전이라 부르는 독특한 수업 방식도 공유하는데 교수와 1:1~1:3 정도로 토론하는 식으로 진행하기 때문에 탄탄한 학부 교육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유명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윌리엄스 칼리지의 대학 홍보 자료에서 옥스퍼드의 튜토리얼을 벤치마킹했다는 점을 자랑할 정도.
- 양 대학의 동아리 대부분은 같은 도시에 있는 타 대학(옥스퍼드의 경우 옥스퍼드 브룩스 대학교, 케임브리지의 경우 앵글리아 러스킨 대학교)에서도 가입할 수 있다.
- 영국의 많은 명문대 중에서도 이 양 대학이 특히 오래됐고 유명하기 때문에 학부생 선발 방식도 나머지 영국 대학과 확연하게 다르다. 최대 5개 대학까지 지원 가능한 UCAS 체계에서 옥스브리지에 지원할 경우 1월 15일이 아니라 10월 15일까지 원서를 내야 하며, 둘 중 한 대학에만 지원 가능하다. UCAS 원서 및 추천서만으로 모든 평가가 이루어지는 대다수 영국 대학과 달리 옥스브리지는 12월 중에 본교에서 치르는 면접이 입시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7]이며, 일부 전공의 경우는 11월 초[8]에 케임브리지 시험개발원에서 출제하는 대학별고사까지 응시해야 한다.[9] 자세한 사항은 옥스퍼드 대학교/입시, 케임브리지 대학교/입시 문서 참고. 옥스브리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관리하는 입시 후기 사이트도 있으니 참고. InsideUni
-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둘 다 공백이었던 때가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이 소위로 임관해 참전해서 대다수가 전사(…)했기 때문. 헨리 모즐리가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학교 당 약 1만 명에 달하는 옥스브리지의 인재가 참호전에서 허망하게 쓰러져갔으며, 종전 즈음 양 대학 모두 사립대학에서 공립 대학으로 전환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서 참고.
- 둘 다 지역 연고 축구팀 이름이 "(해당 도시 이름) 유나이티드 FC"이다. 옥스퍼드 유나이티드 FC, 케임브리지 유나이티드 FC 문서 참조.
3.2. 차이점
- 흔히 옥스퍼드는 문과, 케임브리지는 이과만 세다고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오해다. 단적으로 월드 와이드 웹, 코로나19 백신은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이나 동문이 만들었고, 거시경제학의 아버지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및 케임브리지학파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이다. 다만 역사적으로 옥스퍼드(특히 PPE)가 영국 정치권과 더 큰 연줄이 있었고[10], 케임브리지는 오래전부터 수학 교육을 강조해왔던 점[11] 때문에 옥스퍼드에서 정치인을 더 많이 배출했고 케임브리지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더 많이 배출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오히려 지난 100여 년간 옥스퍼드는 이과 분야에, 케임브리지는 문과 분야에 더 투자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거의 균형이 맞춰졌다.
- 양 대학의 학위 과정이나 전공 구성이 다르다. 천문학과 학부 과정을 예로 들자면 옥스퍼드 대학교에서는 물리학과로 입학한 후 3학년 시기에 천체물리학 세부전공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지만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는 자연과학 전공으로 입학한 뒤 3학년 때 천체물리학 세부전공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자세한 설명은 옥스퍼드 대학교/학위과정 및 전공 문서 및 케임브리지 대학교/학위과정 및 전공 문서 참고.
- 옥스퍼드는 45.59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15만여 명이 살고 있지만, 케임브리지는 40.7 제곱킬로미터의 면적에 12만여 명이 살고 있다. 따라서 옥스퍼드시의 상권이 케임브리지시보다 크게 활성화되어 있으며, 시내버스 배차 간격도 더 양호하다. 또한 역사적으로 옥스퍼드는 미니와 포뮬러 1 등으로 유명한 산업도시였는 데 반해 케임브리지는 농업도시이자 시장도시였다. 케임브리지는 최근에 많은 IT 기업(Microsoft, Apple, 아마존닷컴, ARM Holdings 등)과 생명공학 기업(아스트라제네카 등)을 유치하여 유럽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실리콘 펜(Silicon Fen)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 옥스퍼드의 아이시스 강과 처웰 강보다 케임브리지의 캠 강이 훨씬 크다. 따라서 (물론 옥스퍼드에서도 많이 하기는 하지만) 칼리지의 강 연안 지역("The Backs")에서 배를 타는 것(punting)은 케임브리지가 더 많이 한다.
- 옥스퍼드 지역에는 양질의 사암이 많이 나기 때문에 모든 건물이 같은 재료로 비슷하게 지어졌지만, 케임브리지 지역에는 양질의 돌이 많이 안 나기 때문에 건물마다 재료와 건축 양식이 제각각이다.
- 문학과 영화에서는 옥스퍼드가 훨씬 자주 나온다. 대표적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도 옥스퍼드에서 촬영됐다.
- 옥스퍼드에서는 가을학기, 겨울학기, 봄학기를 각각 마이클머스(Michaelmas), 힐러리(Hilary), 트리니티(Trinity)라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는 미클머스(Michaelmas), 렌트(Lent), 이스터(Easter)라고 한다.
- 칼리지에 있는 건물로 둘러싸인 정원을 옥스퍼드에서는 쿼드랭글(quadrangle, 줄여서 quad)이라고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는 코트(court)라고 한다.
- 기숙사 방 청소부를 옥스퍼드에서는 스카웃(scout)이라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는 베더(bedder)라고 한다.
- 박사(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옥스퍼드에서는 D.Phil.이라고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는 Ph.D.라고 한다.
- 학부생의 1:1~1:3 면담식 수업 방식을 옥스퍼드에서는 튜토리얼(tutorial)이라고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는 슈퍼비전(supervision)이라고 한다.
- 옥스퍼드에서는 sub fusc라 하여 시험을 볼 때 교복을 입어야 하지만 케임브리지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 옥스퍼드에서는 2008년 세인트 힐다 칼리지의 남녀공학 전환 이후로 모든 칼리지가 남녀공학이 되었지만 케임브리지의 뉴넘 칼리지와 머레이 에드워즈 칼리지는 아직 여자대학교다.
4. 정기전 (Varsity Match)
Varsity Match 관련 영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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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The Varsity Match |
특히 1872년에 시작한 럭비 경기는 매우 명성이 자자하며 그에 맞게 잉글랜드 럭비 유니언 국가대표팀의 홈구장인 트위크넘 스타디움에서 개최한다.
5. 여담
케임브리지 출신은 옥스브리지가 아닌 자신의 대학명을 앞에 둔 캠퍼드(Camford)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미국과 캐나다의 대학 중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 많은데, 이를 대학 고딕(Collegiate Gothic) 양식이라고 한다. 대학 고딕 양식의 초기 예는 1820~40년대에 지어진 케년 칼리지, 뉴욕 대학교, 시티 칼리지 오브 뉴욕 등이 있지만, 본격적으로 퍼진 것은 1880년대 필라델피아의 건축가인 월터 코프와 존 스튜어드슨이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본떠 브린마 칼리지 건물을 설계하면서부터다.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 세인트루이스 워싱턴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보스턴 칼리지, 노터데임 대학교, 예일 대학교, 맥마스터 대학교 등이 옥스브리지를 본떠 지어졌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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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왼쪽은 케임브리지의 랜드마크인 킹스 컬리지 채플, 오른쪽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인 보들리언 도서관 건물 중 하나인 래드클리프 카메라이다.[2]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교, 글래스고 대학교, 애버딘 대학교, 에든버러 대학교[3] 영미권 전체로 확장했을 때는 1636년 매사추세츠에 세워진 하버드 대학교를 시작으로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전까지 영국령이었던 13개 식민지에 9개의 콜로니얼 칼리지가 세워지기는 한다. 다만 이들은 북아메리카에 세워졌고, 1776년 미국 독립선언 이후로는 미국 대학이 되기 때문에 논외로 친다.[4] 북아일랜드의 퀸스 대학교 벨파스트와 아일랜드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코크, 아일랜드 국립대학교/골웨이 캠퍼스의 전신이다.[5] 당시 명칭은 맨체스터 과학기술대학교.[6] 연구 실적을 중요하게 보는 보통의 THE 세계 대학 랭킹과 달리, 오직 학자들 사이의 평판만을 바탕으로 매긴 순위다. 10,963명의 학자에게 본인 분야에서 세계 최고급이라고 생각하는 대학을 15개 이하 열거해보라고 하는 방식으로 집계됐다.[7] 이 과정을 거친 다음 치르게 되는 A Level 정규 시험 성적도 매우 중요하다.[8] 2021년 CAAT 주관 입학 시험의 응시일자는 11월 3일이었다.[9]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도 시험 응시나 면접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지만 규모나 비중이 더 적다.[10] 옥스퍼드가 케임브리지보다 100년 이상 오래됐기 때문에 정경계에서 영향력 있는 이들을 더 일찍부터 배출했으며, 이에 따라 각종 문화 매체에서도 더 자주 묘사됐다.[11] 19세기까지만 해도 케임브리지에서는 전공과 상관없이 졸업 요건으로 수학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자연과학, 응용과학, 사회과학의 기반이 수학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케임브리지에서 과학자를 많이 배출한 이유가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