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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차차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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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대 국왕
남해 차차웅 | 南解 次次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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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릉(蛇陵) 전경.
출생
(음력)
기원전 50년[1]
사로국 서라벌
(現 경상북도 경주시)
사망
(음력)
24년 9월 (향년 74세)
사로국 서라벌
(現 경상북도 경주시)
능묘 사릉(蛇陵)
재위기간
(음력)
신라 왕태자[2]
연대 미상 ~ 4년 3월
신라 제2대 국왕
4년 3월 ~ 24년 9월 (20년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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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밀양 박씨
남해(南解) / 유(悠) / 민해(愍解)
부모 부왕 혁거세 거서간
모후 알영부인
형제자매 동생 박특, 박민[3]
여동생 박아로
왕후 운제부인
자녀 태자 박유리
왕자 박일지[4], 박나로
왕녀 박아효
종교 토속 신앙
신장 약 160cm 이상[5]
왕호 남해 차차웅(南解 次次雄)
별호 남해 자충(南解 慈充)[6]
남해 거서간(南解 居西干)
칭호 삼황(三皇)(?)[7] }}}}}}}}}

1. 개요2. 호칭3. 생애4. 대중매체에서5. 《삼국사기》 기록6. 관련 서적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2대 국왕으로 혁거세 거서간알영부인의 아들이었다.

이름은 남해(南解)이며 족보에는 유(悠), 민해(愍解)라고 적혀 있으나 사료로서의 가치는 적다. 칭호는 차차웅인데 《삼국유사》에서는 아버지처럼 거서간을 붙여 '남해 거서간'이라고도 했다고 언급했다. 왕후운제부인이었다. 제3대 국왕 유리 이사금의 아버지이자 제4대 국왕 석탈해장인어른이었다. 또한 신라에서 태어난 첫 임금이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키가 크고, 성격이 침착하며 온후하고, 지략이 많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2. 호칭

한국사 군주의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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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
임금 |
고조선 진국 · 삼한 백제 고구려· 신라
단군 한왕, 신지, 읍차 태왕
신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신라· 가야 탐라 발해 고려
간지, 한기 성주, 왕자 가독부 대왕, 황제
조선 대한제국
, 대군주 황제, 대황제 }}}}}}}}}

표기 현대 한국어 발음 중고한어 발음
次次雄 차차웅 tshijH tshijH hjuwng
慈充 자충 dzi tsyhuwng
次次雄或云慈充. 金大問云, “方言謂巫也. 丗人以巫事鬼神, 尚祭祀, 故畏敬之. 遂稱尊長者爲慈充.”
‘차차웅(次次雄)’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방언으로 무당을 일컫는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그래서 존장자(尊長者)를 칭하여 ‘자충’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
'차차웅'이라는 군주의 호칭이 특이한데, 《삼국사기》에서는 위와 같이 김대문의 글을 인용했다. 오늘날로 말하면 신관이 왕이 된 셈. 상고사에 가까운 이 시대의 제정일치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고대에는 신라뿐 아니라 여러 문화권을 막론하고 왕이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주재해 무속적 성격을 지니기는 했다. 중국천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 의식의 신관 역할을 맡았다.[8]

그래도 신라의 남해 차차웅처럼 자기가 무당이라고 이름에 붙이기까지 하는 경우는 드문데 비슷한 예로 일본 야마타이국 여왕히미코 정도가 있다. 남해 차차웅뿐 아니라 왕비 운제부인도 농업여신으로 신격화된 기록이 있으며, 여동생 아로공주시조묘의 제사장을 맡았다는 기록처럼 박혁거세 집안의 구성원 전체가 전통 신앙의 신관 성격이 있었다.

이를 샤머니즘적인 부족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혁거세의 기록상 사망의 형태가 미심쩍음을 보면 혼란한 국가를 종교로 수습했다는 해석이 더 타당할 것이다.

차차웅을 오늘날 순우리말 스승의 어원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옛날 동양에선 이상적 임금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한국이나 중국의 신화들을 보면 단군처럼, 예를 들면 농사, 글자나 철기 같이 백성들을 살기 좋도록 무언가 지식을 가르친다는 내용은 빠지지 않는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인도카스트 제도에서 가장 높은 신분인 브라만이 그렇다. 브라만은 제사장의 역할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도들을 가르치는 역할도 한다.[9] 차차웅 또한 임금이자 제사장도 도맡았으므로 그 성격이 매우 비슷한 것이다. 소벌도리에서 나타나듯 '-돌이'처럼 옛날에는 임금에게 붙일 만큼 존칭이었지만 중국의 제도를 숭상하면서 지금은 뜻이 낮아졌기도 하다. 무엇보다 평안 방언함경 방언에선 '스승'이란 말에 '무당'이란 뜻이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차차웅이 앞서 혁거세 거서간의 호칭인 거서간과 동격의 의미라고 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南解居西干亦云次次雄. 是尊長之稱唯此王稱之.
남해거서간(南解居西干) 또는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한다. 이는 존장(尊長)의 칭호이니 오직 이 임금만 이렇게 불렀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남해왕 #
라고 기록해서 둘이 비슷한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현대에는 《삼국사기》를 따라 거의 남해 차차웅으로만 쓴다.

그리고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 쓰기도 했다. 초기 고대 한국어에는 무기음 (ㅈ 등)만 있고 유기음 (ㅊ 등)은 아직 없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차차웅'은 원래 '자자웅'이고 줄여서 '자중'이라고도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ㅈ'는 지금은 무성 치경구개 파찰음(ʨ)이 되었으나 본래는 무성 치경 찰음(ʦ)으로, 무성 치경 찰음(s)인 'ㅅ'과 매우 근접했다.[10] 그리고 次와 慈의 중고음을 보면 원래 발음은 '자'보다는 '즈'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즈즈웅' → '*즈중' → '*즈증' → '스승' 순으로 변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충남대학교 이금영에 의하면 통일신라 이전의 고대 한국어에는 [ㅈ] 및 [ㅊ] 발음이 아예 없었는데,# 이 주장이 맞다면 처음부터 '*스스웅'이었을 것이다.

3. 생애

기원후 4년 봄에 즉위했다. 가을에는 혁거세 거서간 사망 직후의 국상 기간을 노리고 낙랑이 쳐들어와 금성을 몇 겹으로 둘러쌌다가 결국 점령하지 못해 곧 물러났다.

기원후 6년 봄에 시조묘, 즉 혁거세의 사당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삼국사기》 〈제사지〉에도 있는데 남해왕 3년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사당을 세우고, 사계절에 맞추어 제사를 지냈는데 친여동생인 아로공주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

혁거세 거서간 문서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박혁거세 말년의 기록이 비록 반란 같은 사건을 직접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미심쩍은 묘사가 있는데 아버지 박혁거세의 사망과 장례식을 치른 기간이 차이가 나는 사실 또한 반란설에 무게를 두는 대목으로 본다.

물론 이때 건립한 것은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종묘와 비슷한 곳이다. 아직 중국에서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이기 때문에 흔히 아는 조선 양식의 종묘와는 다르다. 그런 것은 통일신라 대에 가야 생긴다. 여기서 말하는 종묘는 유교식의 사당보다는 일본신궁이나 신사와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논란의 여지는 있다. 사실 《삼국사기》에 남해 차차웅이 왕위에 오르면서
"二聖弃校勘國, 孤以國人推戴, 謬居於位, 危懼若涉川水. ⋯<후략>⋯"
"이성(二聖)[11]께서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에 그릇되게 거하게 되어 위태롭고 두렵기가 마치 하천의 물을 건너는 것 같다. ⋯<후략>⋯"
- 낙랑(樂浪)의 침입을 받은 남해차차웅이 신하들에게 한 말 中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남해차차웅 #
라고 말한 시점에서 의혹 확정이다.

기원후 8년에 딸 아효부인을 어질다는 소문이 나있던 석탈해혼인시켰다. 석탈해는 기록상 신라 외부 출신으로 앞서 금관가야수로왕과 대결했으나 패배하고 계림으로 들어와 있었다.

기원후 10년에 남해 차차웅이 사위인 석탈해를 '대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고 한다. 저 두 가지 일을 빼고, 국왕이 할 일이 몇 가지나 남는지를 생각해 보면 기껏해야 외교지역 순방 정도밖에 없고 굳이 왕호를 무당 칭호로 한 것을 보면 제사 정도는 치렀을 것이다. 사실상 남해 차차웅은 입헌군주제 국가의 군주 정도로 실권이 없었다.

석탈해를 실질적으로 정치를 하는 국왕으로 대접했다는 소리이다. 석탈해가 맡은 대보는 신라 전체 왕사에서 3명만 맡았으며(호공, 석탈해, 김알지) 이는 석탈해의 출신 지역을 추리하는 데 단서가 되기도 했다.

기록상 남해 차차웅의 치세에는 외침이 잦았는데 기원후 4년에 낙랑군이 금성을 2겹으로 에워쌌다가 물러났다. 기원후 14년에 가 100여 척의 배를 타고 몰려와 해변가의 민가를 약탈하자 경주 6부의 병사들을 보내 격퇴하는 사이 이번에는 낙랑 군사들이 빈틈을 노려 다시 신라에 쳐들어왔다가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워해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왜는 그렇다 치고 낙랑이 정말로 한사군의 낙랑인지는 의문인데 여러 학설이 있다.

기원후 19년에는 북명(北溟)에서 예맥왕의 인장(濊王之印)을 발견해 남해 차차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북명은 삼국시대 기록에서 종종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나라인데 원산만 근처의 동예로 보는 시각이 많지만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북명이 동북 부여를 가리키는 것임을 들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부정하고 있다.

초기 신라의 범위가 아무리 영향권을 크게 잡아도 부여와 접점이 있을 만큼 그리 넓지는 않았다는 것. 이를 석탈해가 이끌던 집단이 통째로 신라에 복속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그 외에 박혁거세의 치세에서는 보이지 않던 천재지변의 기록이 잦은데 11년 봄과 여름에 가뭄, 15년 봄과 여름에 대기근, 18년 서라벌에 가뭄, 7월에 누리(蝗蟲(황충): 메뚜기)의 재해가 있었으며 22년 질병이 크게 번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으며 24년 9월에 누리의 피해가 컸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기록이 적기 때문에 적었을 수도 있다.

기원후 24년에 사망하고 왕위를 아들인 유리 이사금이 물려받았다.

4. 대중매체에서

5.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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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남해 차차웅 본기>
一年秋七月 낙랑의 군사들이 침공했다가 물러가다
三年春一月 시조 를 세우다
三年冬十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五年春一月 왕의 장녀를 탈해의 처로 삼다
七年秋七月 탈해를 대보로 임명하다
八年 가뭄이 들다
十一年 낙랑인들이 쳐들어왔다가 물러가다
十三年秋七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五年 서울이 가물다
十五年秋七月 창고를 열어 기근구제하다
十六年春二月 북명 사람이 예왕도장을 바치다
十九年 전염병이 크게 돌다
十九年冬十一月 겨울얼음이 얼지 않다
二十年 금성이 태미로 들어가다
二十一年秋九月 왕이 죽다

6.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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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부인
김행의
聖26
진평왕
진정왕 진안왕
문흥왕 김마차
 
 
 
 
 
 
 
 
 
 
 
 
 
 
 
聖27
선덕왕
김천명 비담 聖28
진덕왕
김알천 眞29
태종 무열왕
현성왕 흥무왕
 
 
 
 
 
眞30
문무왕
김인문 무열왕의 딸
신영왕
 
 
 
眞31
신문왕
 
흥평왕
 
 
 
 
 
 
眞32
효소왕
眞33
성덕왕
 
명덕왕
 
 
 
 
 
 
 
 
개성왕
김사소 효상태자 眞34
효성왕
眞35
경덕왕
김주원 眞38
열조 원성왕
 
 
 
 
 
 
 
 
 
眞37
선덕왕
眞36
혜공왕
김헌창 혜충왕 헌평태자 혜강왕
 
 
 
 
 
 
眞39
소성왕
眞41
헌덕왕
眞42
흥덕왕
선강왕 익성왕 성덕왕
 
 
 
 
 
 
 
 
 
 
 
 
眞40
애장왕
헌덕왕태자 ? 眞44
민애왕
眞43
희강왕
眞45
신무왕
眞47
헌안왕
 
 
 
 
 
의공왕 眞46
문성왕
궁예(?)
 
 
 
 
 
 
 
성무왕 ? 眞48
경문왕
혜성왕 문성왕태자 문성왕의 딸
 
 
 
 
 
 
 
선성왕 흥렴왕
박정화 眞49
헌강왕
眞50
정강왕
眞51
진성왕
의흥왕
 
양부 
 
 
 
 
 
 
 
朴53
신덕왕
김의성 김계아 眞52
효공왕
김억렴 신흥왕
 
 
 
 
朴54
경명왕
朴55
경애왕
眞56
경순왕
 
 
 
 
박언창 박언침 마의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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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남해 차차웅의 출생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신라 박씨의 족보에 따르면 선제 감로 4년(기원전 50년)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삼국사기》엔 태자였다는 기록이 없으며, 《삼국유사》의 기록이다.[3] 신라 박씨의 족보에서만 등장.[4] 장남, 일지 갈문왕[5] 《삼국사기》에 키가 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당시 신라인들의 평균키인 160cm보다 크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6] '자윤'(慈允)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7] 《삼국유사》 〈남해왕조〉엔 "이 왕은 삼황 중 첫째라고 이른다.(此王乃三皇之第一云)"라고 쓰여있다. 아내인 운제부인이 농업의 신으로 여겨지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삼황 중 둘째인 신농과 유사하지만. 그리고 복희여와의 창세신적 면모와 남매혼 묘사를 감안하면 복희=박혁거세에 대응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8] 애초에 '천자(天子)'라는 호칭 자체가 제정일치 시절에는 '신의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후일 유교 정치사상과 결합하면서 '천명'이나 '역성혁명' 같이 '하늘(天)'이 형이상학적 존재로 발전해 나간 것이며, 초기만 해도 천(天)은 상나라 시절 최고신인 (帝)를 대신한 주나라의 인격신에 가까웠다. 근현대까지도 이런 성격이 있어서 예를 들어 중국 옆 제후국을 자처한 조선대한제국 선포 이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환구단 문서 참고.[9] 고대 인도에서는 브라만이 교육을 신성하게 여기며 자신들의 권리로 여겼는데, 석가모니는 브라만이 아닌 한 단계 낮은 크샤트리아 계급에 속했지만 대중들을 가르치고 설법했다. 그래서 이것이 아니꼬운 브라만들이 그를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10] 'ㅈ'의 모양이 'ㅅ'에서 획만 그은 것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 발음은 내려면 입모양은 'ㅅ'를 발음하듯 하되 소리는 'ㅈ'처럼 내면 된다.[11] 박혁거세와 알영부인[12] 해당 회차에서 불사조가 말하고자했던 것은 실제 인간은 난생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미루어 혁거세, 주몽 등의 난생설화로 등장하는 왕들이 사실은 여왕(여제사장)이 낳은 것을 남성의 역할을 축소하거나 생략해서 알에서 태어났다고 표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친구들에게 본인의 출생부터 의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