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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본명 | 리처드 밀하우스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 ||
출생 | 1913년 1월 9일 | ||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 요바린다 | |||
사망 | 1994년 4월 22일 (향년 81세) | ||
뉴욕주 뉴욕시 맨해튼 뉴욕-프레스비테리언 병원 | |||
묘소 |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 요바린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박물관 | ||
재임기간 | 제36대 부통령 | ||
1953년 1월 20일 ~ 1961년 1월 20일 | |||
제37대 대통령 | |||
1969년 1월 20일 ~ 1974년 8월 9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 아버지 프랜시스 앤서니 닉슨[1] 어머니 해나 밀하우스 닉슨[2] | |
형제자매 | 형 헤럴드 닉슨(1909 ~ 1933) 동생 프란시스 닉슨[3](1914 ~ 1987) 아서 닉슨(1918 ~ 1925) 에드워드 닉슨(1930 ~ 2019) | ||
배우자 | 팻 닉슨[4] | ||
자녀 | 장녀 트리샤 닉슨 차녀 줄리 닉슨[5] | ||
학력 | 휘티어 고등학교 (졸업) 휘티어 칼리지[6] (B.A.) 듀크 대학교 법학대학원 (LL.B.)[7] | ||
병역 | 미합중국 해군 중령 전역[8] | ||
종교 | 개신교 (퀘이커) | ||
신체 | 키 182cm[9] / 체중 78kg / A형[10] | ||
정당 | |||
의원 선수 | 2 (상원) 2 (하원) | ||
의원 대수 | 80, 81 (하원) 81, 82 (상원)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clearfix]
제37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11] |
1. 개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닉슨의 사진[12] |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제36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임기 동안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등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베트남전 철수, 중공과의 데탕트,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닉슨 쇼크), 오일쇼크 등의 공과를 남겼다.[14]
미국 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한데 이어 미국 대통령 재선까지 성공한 미국 역사상 유일한 대통령이다.[15]
하지만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 중 스스로 하야하였고 부통령이었던 제럴드 포드가 남은 임기를 수행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존 F. 케네디로부터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에 이르는 4명의 대통령 모두 해군 장교 신분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것이다. 케네디로부터 4연속 해군 장교 출신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닉슨의 후임인 지미 카터도 해군사관학교 출신 장교이다. 물론 카터는 4명의 전임 대통령과 다르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에 임관하였다.
2. 약력
- 1947.1. 제80대 연방하원의원 (캘리포니아 제12선거구 / 공화당)
- 1949.1. 제81대 연방하원의원 (캘리포니아 제12선거구 / 공화당)
- 1951. 제82대 연방상원의원 (캘리포니아 / 공화당)
- 1952. 제36대 부통령 선거 후보 (공화당)
- 1953.1. 제36대 미국 부통령
- 1960. 제35대 미국 대통령 후보 (공화당 / 낙선, 2위)
- 1962. 제32대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 (공화당 / 낙선, 2위)
- 1969.1. 제37대 미국 대통령
3. 생애
3.1. 성장
캘리포니아의 별로 넉넉치 못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했다.[16] 하버드 대학교에도 합격한 수재였으나 돈이 없어 포기하고, 집 근처의 휘티어 칼리지(Whittier College)에 입학했다. 휘티어 칼리지에서도 발군의 성적을 보여 전액장학금을 받고 듀크 대학교 로스쿨로 갔다. 졸업 후 FBI에서 일하다가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변호사 시험을 보고 변호사가 되었다.제2차 세계 대전에 미 해군 장교로 지원, 전투 병과인 항해 병과 장교로 임관했지만, 남태평양 전투 항공 수송 사령부(South Pacific Combat Air Transport Command)에 베속되어 일명 솔로몬 제도의 햄버거 가게라는 항공대 소속 창고 등 비전투 부대에서만 복무했고, 소령으로 전역했다. 닉슨 스스로는 전투에만 참가하지 않았지 정당하게 군 복무를 마쳤지만, PT-109 격침 사건으로 인해서 전쟁 영웅으로 인식된 케네디에 비해 창고 근무를 했다는 점에서 이미지가 밀린 건 사실이었다. 오죽하면 "저도 군생활을 했습니다."가 닉슨의 선거 모토. 실제로 케네디가 은근히 "내가 어뢰정 타고 사선을 넘는 동안 쟤는 보급창에서 꿀 빨고 있었다."는 식의 언플을 했다. 그런데 케네디가 영웅이 된 것은 침몰 후에 보였다는 리더십 때문이다. 야간에 조는 바람에 일본 해군 구축함 아마기리함에게 들이받혀 어뢰정과 승조원 일부를 잃은 것 자체는 그의 빽과 선전효과를 노려 해군이 좋게 봐줘서 넘어간 것이다.[17]
해군 소령 시절의 닉슨 |
닉슨은 포커의 대가이기도 했다. 심지어 현역 장교였던 시절에 태평양의 그린 아일랜드라는 섬에 '닉스'라는 작은 맥주집을 차려놓고 주로 파일럿들을 상대로 판이 큰 포커 게임을 벌이기도 했다. 닉슨의 포커 실력이 어느 정도였냐면 1946년 닉슨의 하원의원 선거 운동 비용 중 대부분을 닉슨이 전쟁 중에 포커로 딴 돈으로 충당했을 정도다. 그리고 부건빌에서는 '닉의 햄버거 가게'(Nick’s Hamburger Stand)를 열어 가끔식 파일럿들에게 무료로 햄버거와 호주산 맥주를 하나씩 제공했다고 한다.
3.2. 정치 입문
1946년 공화당 하원의원[18] 당선되며 정치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50년엔 일약 캘리포니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는데 상대는 전직 브로드웨이 스타 배우이자 오페라 가수였으며, 최초의 여성 부통령 러닝메이트로까지 거론되었던 민주당 여성 후보 헬렌 G. 더글러스였다. 그는 더글러스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는 매카시즘적인 정치선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19] 이렇게 반공 성향이 강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훗날 중공 등 공산권과의 화해를 표방하는 데탕트 정책을 추진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선거운동으로 그는 더글러스로부터 "교활한 딕(Tricky Dick)"이란 별명을 얻었다.이후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 동조해 반미활동조사위원회 위원까지 하며 공산주의자 사냥에 나섰다. 나아가 1952년에는 고작 만 39세의 나이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후보와 같이 출마해 부통령에 당선되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나이로 부통령에 오른 것이었다. 이후 1961년까지 미국의 부통령을 맡는다.
3.3. 체커스 연설(checkers speech)
하지만 닉슨이 늘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당선 직전에서 좌절시킬 뻔한 것이 이른바 "체커스 사건"이었는데, 대선 러닝메이트가 되기 직전 18,000달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으로 부통령 후보에서 교체될 위기에 놓였다. 하지만 그는 이례적인 전국 TV연설에서 "텍사스에서 온 남자에게 돈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내가 개인적으로 받은 것은 내 딸들을 위한 체커스(Checkers)라는 코카 스파니엘 애완견 강아지뿐이다. 알다시피 아이들에게 강아지가 얼마나 귀엽나. 우리는 어쨌든 우리 가족인 체커스와 함께 살고 싶다."[20]라고 말함으로서 인간미를 살리고 문제의 쟁점을 뒤집어버렸다. 뒤의 워터게이트 사건 때의 "나는 사기꾼이 아닙니다" 발언 등 결정적인 실언들로 인해 곤란한 처지에서 빠졌던 상황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러니까 부통령 후보 지명 전에 지지자로 부터 18,000달러의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걸 대놓고 인정하면서 공화당의 적극적인 TV 중계로 전국민에게 논리와 감정을 적절히 섞어 연설한 것이 다른 의미로 현재도 명연설로 회자되고 있다.[21]
체커스 연설 풀버전 영상 [22] |
My Fellow Americans,
I come before you tonight as a candidate for the Vice Presidency and as a man whose honesty and -- and integrity has been questioned. Now, the usual political thing to do when charges are made against you is to either ignore them or to deny them without giving details. I believe we've had enough of that in the United States, particularly with the present Administration in Washington, D.C. To me the office of the Vice Presidency of the United States is a great office, and I feel that the people have got to have confidence in the integrity of the men who run for that office and who might obtain it.
I have a theory, too, that the best and only answer to a smear or to an honest misunderstanding of the facts is to tell the truth. And that's why I'm here tonight. I want to tell you my side of the case. I'm sure that you have read the charge, and you've heard it, that I, Senator Nixon, took 18,000 dollars from a group of my supporters.
Now, was that wrong? And let me say that it was wrong. I'm saying, incidentally, that it was wrong, not just illegal, because it isn't a question of whether it was legal or illegal, that isn't enough. The question is, was it morally wrong?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 if any of that 18,000 dollars went to Senator Nixon, for my personal use.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if it was secretly given and secretly handled. And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if any of the contributors got special favors for the contributions that they made.
친애하는 미국인 여러분, 오늘 밤 저는 부통령 후보로서, 또 정직성과 진실성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의혹을 제기되었을 때, 보통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세세히 해명하지 않고 그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 특히 현재 워싱턴 행정부에서는 다들 그렇게 해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에게 부통령이란 직책은 영광의 자리이며, 따라서 국민은 그 직책에 출마하여 당선될지 모르는 사람들의 정직성에 대해서 신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실에 대한 비방이나 완전한 오해를 풀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밤 이 자리에 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여러분에게 제 입장을 밝히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닉슨 상원의원이 지지자들로부터 18,000달러를 받았다는 혐의에 대한 기사를 읽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자,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겠죠? 그러면 잘못된 일이었다고 칩시다.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우연히 잘못된 일 이었지 정말 불법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합법이었느냐, 불법이었느냐에 그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느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돈을 비밀리에 받아 비밀리에 처리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기부한 사람들 중에서 그 기부의 대가로 특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중략)
One other thing I probably should tell you, because if I don't they'll probably be saying this about me, too. We did get something, a gift, after the election. A man down in Texas heard Pat on the radio mention the fact that our two youngsters would like to have a dog. And believe it or not, the day before we left on this campaign trip we got a message from Union Station in Baltimore, saying they had a package for us. We went down to get it. You know what it was? It was a little cocker spaniel dog in a crate that he'd sent all the way from Texas, black and white, spotted. And our little girl Tricia, the six year old, named it "Checkers." And you know, the kids, like all kids, love the dog, and I just want to say this, right now, that regardless of what they say about it, we're gonna keep it.
It isn't easy to come before a nationwide audience and bare your life, as I've done. But I want to say some things before I conclude that I think most of you will agree on. Mr. Mitchell, the Chairman of the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made this statement -- that if a man couldn't afford to be in the United States Senate, he shouldn't run for the Senate. And I just want to make my position clear. I don't agree with Mr. Mitchell when he says that only a rich man should serve his Government in the United States Senate or in the Congress. I don't believe that represents the thinking of the Democratic Party, and I know that it doesn't represent the thinking of the Republican Party.
아마 여러분들께 말씀드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이것도 이야기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선거가 끝난 후 저희는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남부 텍사스 주에 사는 어떤 남성분이 페트리샤(제 아내)가 라디오에 출연하여 저희 어린 두 딸이 강아지를 한 마리 갖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곤,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번 선거 유세를 떠나기 바로 전날 저희는 볼티모어의 유니언 역에서 저희 앞으로 온 물건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그 물건을 받기 위해 역으로 갔습니다.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코커 스파니엘 강아지였습니다. 그분이 멀리 텍사스에서 상자에 담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어린 6살 딸 트리샤가 그 이름을 “체커스”라고 지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아이들은 모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이제, 바로 이 점은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저희는 그 강아지를 그대로 키울 것이란 점 말입니다. [23]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전국의 시청자 앞에 나와 자신의 생활을 모두 털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연설을) 마치기 전에 몇 가지 점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여러분 대다수가 동의할 것입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이신 미첼 의원께서는, 미국 상원에 있을 형편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상원의원에 입후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제 입장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미첼 의원께서 부자만이 미국의 상원과 의회에서 정부에 봉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민주당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믿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공화당의 입장을 대변하지도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I come before you tonight as a candidate for the Vice Presidency and as a man whose honesty and -- and integrity has been questioned. Now, the usual political thing to do when charges are made against you is to either ignore them or to deny them without giving details. I believe we've had enough of that in the United States, particularly with the present Administration in Washington, D.C. To me the office of the Vice Presidency of the United States is a great office, and I feel that the people have got to have confidence in the integrity of the men who run for that office and who might obtain it.
I have a theory, too, that the best and only answer to a smear or to an honest misunderstanding of the facts is to tell the truth. And that's why I'm here tonight. I want to tell you my side of the case. I'm sure that you have read the charge, and you've heard it, that I, Senator Nixon, took 18,000 dollars from a group of my supporters.
Now, was that wrong? And let me say that it was wrong. I'm saying, incidentally, that it was wrong, not just illegal, because it isn't a question of whether it was legal or illegal, that isn't enough. The question is, was it morally wrong?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 if any of that 18,000 dollars went to Senator Nixon, for my personal use.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if it was secretly given and secretly handled. And I say that it was morally wrong if any of the contributors got special favors for the contributions that they made.
친애하는 미국인 여러분, 오늘 밤 저는 부통령 후보로서, 또 정직성과 진실성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의혹을 제기되었을 때, 보통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세세히 해명하지 않고 그저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 특히 현재 워싱턴 행정부에서는 다들 그렇게 해왔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에게 부통령이란 직책은 영광의 자리이며, 따라서 국민은 그 직책에 출마하여 당선될지 모르는 사람들의 정직성에 대해서 신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실에 대한 비방이나 완전한 오해를 풀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밤 이 자리에 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그 문제에 대해 여러분에게 제 입장을 밝히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닉슨 상원의원이 지지자들로부터 18,000달러를 받았다는 혐의에 대한 기사를 읽거나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자, 그것은 잘못된 일이었겠죠? 그러면 잘못된 일이었다고 칩시다.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 우연히 잘못된 일 이었지 정말 불법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합법이었느냐, 불법이었느냐에 그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느냐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돈을 비밀리에 받아 비밀리에 처리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기부한 사람들 중에서 그 기부의 대가로 특혜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씀드릴 것입니다.
(중략)
One other thing I probably should tell you, because if I don't they'll probably be saying this about me, too. We did get something, a gift, after the election. A man down in Texas heard Pat on the radio mention the fact that our two youngsters would like to have a dog. And believe it or not, the day before we left on this campaign trip we got a message from Union Station in Baltimore, saying they had a package for us. We went down to get it. You know what it was? It was a little cocker spaniel dog in a crate that he'd sent all the way from Texas, black and white, spotted. And our little girl Tricia, the six year old, named it "Checkers." And you know, the kids, like all kids, love the dog, and I just want to say this, right now, that regardless of what they say about it, we're gonna keep it.
It isn't easy to come before a nationwide audience and bare your life, as I've done. But I want to say some things before I conclude that I think most of you will agree on. Mr. Mitchell, the Chairman of the 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made this statement -- that if a man couldn't afford to be in the United States Senate, he shouldn't run for the Senate. And I just want to make my position clear. I don't agree with Mr. Mitchell when he says that only a rich man should serve his Government in the United States Senate or in the Congress. I don't believe that represents the thinking of the Democratic Party, and I know that it doesn't represent the thinking of the Republican Party.
아마 여러분들께 말씀드려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저에 대해서 이것도 이야기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선거가 끝난 후 저희는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남부 텍사스 주에 사는 어떤 남성분이 페트리샤(제 아내)가 라디오에 출연하여 저희 어린 두 딸이 강아지를 한 마리 갖고 싶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곤, 믿기 힘드시겠지만 이번 선거 유세를 떠나기 바로 전날 저희는 볼티모어의 유니언 역에서 저희 앞으로 온 물건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희는 그 물건을 받기 위해 역으로 갔습니다. 그 물건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코커 스파니엘 강아지였습니다. 그분이 멀리 텍사스에서 상자에 담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어린 6살 딸 트리샤가 그 이름을 “체커스”라고 지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희 아이들은 모든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강아지를 좋아합니다. 이제, 바로 이 점은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저희는 그 강아지를 그대로 키울 것이란 점 말입니다. [23]
제가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전국의 시청자 앞에 나와 자신의 생활을 모두 털어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의 연설을) 마치기 전에 몇 가지 점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는 여러분 대다수가 동의할 것입니다. 민주당 전국위원회 의장이신 미첼 의원께서는, 미국 상원에 있을 형편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상원의원에 입후보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제 입장를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미첼 의원께서 부자만이 미국의 상원과 의회에서 정부에 봉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민주당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믿지 않으며, 또한 그것이 공화당의 입장을 대변하지도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선 뒤에는 확실한 승승장구, 갈수록 쇠약해지는 아이젠하워를 보좌해 8년이란 세월동안 그를 대신해 세계 각지를 누볐다. 1959년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주방 논쟁(부엌 논쟁)" 등 쇼맨십에서도 인기를 끄는데 성공했다.
3.4.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대선 당시 닉슨의 후보 홍보 영상(1960년).[24]
현직 부통령이던 1960년 11월, 닉슨은 대통령 후보로 나서 전 공화당 상원의원이자 당시 미국의 주 유엔대사였던 헨리 캐벗 로지와 함께 민주당의 존 F. 케네디 후보와 선거전을 벌였으나 패배했다. 표차로는 고작 10 ~ 40만표(0.2 ~ 0.6%) 차이의 석패였다. 하지만 선거인단의 결과는 훨씬 차이가 컸다.[25]
이는 남부 텍사스 출신이었던 케네디의 러닝메이트 린든 B. 존슨의 위력 탓도 있고, 닉슨이 50주를 모두 방문하겠다는 공약을 지키느라 전략적이지 못한 선거에 체력을 소모한 점이 크다. 또 닉슨은 일리노이에서는 고작 0.19%p, 텍사스에서도 2%p 차의 근소한 패배를 했는데, 이들 주들에서 선거조작이 이뤄졌다는 의혹이 있다. 즉 린든 존슨이 텍사스 내에서의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텍사스에서 선거조작을 자행했고, 케네디 또한 자기 가문의 시카고 마피아와의 연결고리를 활용해 일리노이에서 선거조작을 자행했다는 것이다. # 만약 해당 의혹이 사실이고, 이러한 선거조작이 없어 닉슨이 텍사스와 일리노이에서 승리했다면, 닉슨은 27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대통령에 당선됐을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증거가 없는 단순한 의혹 수준인데다가 리처드 닉슨 본인이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공화당에서 결과 뒤집기를 위해 일리노이, 텍사스 등 11개 주에서 재검표를 1961년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시도했지만 오히려 재검표 결과 원래 닉슨이 승리했던 하와이를 케네디에게 내주는 망신만 당했다.
이후 선거 통계학자들에 의해 접전주에서 몇몇 통계적 오류가 밝혀지긴 했으나 아무리 닉슨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고 해도 결과를 뒤집을 정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현재까지 이 의혹은 선거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극성 공화당 지지층의 음모론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고로 TV 토론에서 케네디가 이겼고, 그렇기 때문에 케네디가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선 토론을 라디오로 들은 시민들과 언론인들은 닉슨이 케네디를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을 거뒀다고 여겼다.[26] 실제로 라디오로 토론을 청취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49%의 청취자들이 닉슨이 승리했다고 응답한 반면, 케네디의 경우에는 21%에 불과했다.
해당 여론조사 기관은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도 시행했는데, 여기서도 케네디 30% 닉슨 29%로 나와, 케네디가 거의 우위를 나타내지 못했다. 텔레비전으로 시청한 사람이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토론을 시청한 미국인들 사이에서 닉슨이 승리했다는 여론이 분명히 우세했을 것이다. #
1961년 케네디가 취임한 직후 케네디의 취임연설문 작성자이자 비서관이었던 테드 소런슨을 시카고에서 만났다. 닉슨은 대뜸 "그 취임 연설 중 일부는 제가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소런슨이 "어느 부분 말씀이신지요.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묻지 말고...' 그 부분 말씀이신가요?"하자 닉슨 왈, "아니오. '나는 엄숙히 선서합니다'로 시작하는 그 부분 있잖습니까?"
심지어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현직 주지사란 이점에다 현직 대통령의 지지까지 등에 업고 재선에 도전했던 팻 브라운[27]에게 밀려 낙선하면서 그는 한방에 "황태자 부통령"에서 "한물간 정치인" 취급을 받았고 공식적으로 정계 은퇴선언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닉슨의 끝은 아니었다.
3.5.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4년 대선을 앞두고 배리 골드워터와 함께 한 모습 |
그는 한동안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었다. 사실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공화당의 유력 대선 주자로 꾸준히 거론 되었지만 결국 본인은 경선에서 중립을 지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29] 그러던 중 1964년 선거에서 린든 B. 존슨이 배리 골드워터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자 닉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권을 골드워터에게 이양받아 대대적인 공화당 혁신 사업을 벌였다. 절치부심한 그는 다시 8년만에 대선에 출마했고, 당시 린든 B. 존슨의 어설픈 베트남 전쟁 처리 덕분에 사회 안정과 종전을 원하는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를 등에 업고 1968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석패할 때와 비슷하게 0.42%의 간발의 차였다.
선과 과정에서 닉슨은 와신상담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대중 앞에 등장할 때는 에너지 넘치는 이미지를 위해 구보로 연단 위에 뛰어오르거나 밀짚모자에 "NIXON"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이른바 "닉슨 소녀"들을 등장시켰으며 선거구호도 "바로 닉슨이다!(Nixon's the One!)"으로 일관적이고 긍정적이었다.
1968년 닉슨의 대선 광고. |
반면 민주당의 후보였던 휴버트 험프리[30]는 "베트남전 폭격 중지"라는 훌륭한 정치적 수완으로 잠시 닉슨을 앞서갔지만 선거의 초점과 선거 구호를 자주 바꾸면서 일관성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네거티브에만 일관한 전략이 문제였다. 이런 선거 광고는 광고에서 정점에 달했다. 일부 포지티브 광고도 있었지만 대개 닉슨의 말바꾸기(이리저리 도는 풍향계 광고), '닉슨이 당신에게 해준 건 없다'는 광고(하단의 영상), 애그"뉴"(AgNew) 부-'통령'(New President의 말장난) 조롱, 거품이 터지면서 공약을 까는 광고 등등.. 개별 아이디어는 신선했을지 몰라도, 대체 자신이 뭘 하겠다는 식의 분명한 공약이 없었다. 심지어는 험프리가 시종일관 닉슨만 강조하며 비난하는 광고도 있었다. 최종 슬로건 역시 "험프리, 다른 대안은 없다(There's No Altenative)"라는 네거티브한 표현이었다.
결정적으로 닉슨은 자신의 약점인 TV 토론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험프리는 대세를 뒤집지 못했고, 닉슨은 대중선거전의 승자로 거듭났다. 제3당인 미국 독립당 후보로 나선 조지 월리스[31]가 험프리의 표를 상당부분 갉아먹은 것 또한 닉슨의 당선에 한몫 했다.
생각해보면, 1968년 경선에서 슈퍼 화요일을 캘리포니아에서 압도적으로 이겨버리며 승승장구하던 로버트 케네디가 다음날 암살당하지만 않았어도 닉슨은 또 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보수성이 옅었던 아이젠하워를 포함하면) 오랜 민주당 정권을 종식하며 대통령이 되었다. 68혁명 등으로 뜨겁던 1968년이 프랑스 총선에서의 드골파 압승,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과 함께 기존 질서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평이 있다.[32]
하지만 1968년 대선의 결과는 닉슨의 예상보다 훨씬 접전이었다. 선거인단 수에서는 차이가 났지만, 주요 주에서 1%p차로 험프리와 닉슨이 경합한데다가 최종 결과는 불과 0.3%p차 닉슨의 우세에 불과했다. 1968년 10월까지, 험프리는 부족한 수완 때문에 지지율이 오차범위 밖에서 닉슨에 밀렸다. 그런데 험프리와 조지 월리스가 3위 자리를 두고 경합에 이르는 충공깽의 구도가 나오자, 놀란 민주당 지도부와 험프리가 열정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이고 험프리 지지를 거부하던 미국 반전좌파 세력도 험프리를 지지하며 험프리의 지지율이 급등하는 '10월 서프라이즈'가 벌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선거가 일주일만 뒤에 치러졌더라도 닉슨이 패배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등장하였다.
게다가 닉슨은 이 시기 파리 평화회담으로 인기가 높아진 휴버트 험프리와 린든 존슨 정권에 타격을 주기 위해 남베트남의 반 티에우 대통령이 비타협적으로 나오도록 조장했다. 여기에 중심적 역할을 한 것이 후일 국무장관이 되는 헨리 키신저. 키신저는 회담에 참석해 진행 상황을 닉슨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고, 여기에는 중국계 로비스트 천샤오메이, 영명 안나 체놀트의 역할이 매우 컸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을 그녀의 이름을 따 '체놀트 사건'이라고 부른다. 여하간 이는 이적행위를 금하는 로건 법(Logan Act)에 위배되는 사항이었지만, 심지어 도청을 통해 사실을 안 존슨 대통령조차도 이를 폭로하지 못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베트남 전쟁의 전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될 수 있다는 존슨의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존슨이 체놀트 사건을 알게 된 과정 역시 불법이었던 것은 덤이다. 물론 닉슨의 행동이 남베트남의 비타협적 태도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는 논란의 사항이지만, 워터게이트로 귀결되는 그 성정이 미리 드러난 부분이라할 수 있다.
어쨌거나 1968년 대선에서 험프리와 닉슨은 초경합 상태였고 그야말로 운에 운이 따라줘 닉슨이 가까스로 승리한 것에 가까웠다. 선거가 일주일만 뒤에 치러졌다면, 조지 월리스가 독자 출마를 안했다면, 로버트 케네디가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존슨이 국익에 앞서 민주당의 선거를 더욱 고려했다면 닉슨은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민주당에서는 선거 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여론이 높았고 에드먼드 머스키와 휴버트 험프리가 1972년에 재출마해 닉슨의 재선을 저지할거라는 말이 당연하게 나왔다. 안그래도 성격 더럽고 자존심 쎈 닉슨에게 이것이 어떤 의미였을지는 불보듯 뻔했다. 때문에 정작 선거에서 이겼는데도 닉슨이 상당히 불안해하고 화냈다는 일화가 있다. 이련 경합의 결과가 워터게이트 사건의 영향을 줬다는 연구도 있다.
68혁명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뒤로 하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닉슨은 적극적으로 사회 안정 정책을 추진한다. 닉슨 대통령은 히피족을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낙인찍으며 "히피 소탕 작전"에 나섰다. 1969년 로널드 레이건의 지시 하에 UC 버클리에서 농성하던 학생 시위대가 주방위군에 쓸려나갔고, 1970년에는 캄보디아 폭격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대에 경찰이 무차별 총격을 가해 4명이 사망하는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생들은 이에 크게 반발해 1970년 동맹휴학 사태를 일으켰으나 정작 여론은 닉슨의 편이었다. 68혁명의 혼란에 질린 기성 세대가 오히려 대학생들의 항의에 대한 반발 심리로 닉슨을 지지해,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이 대학생들의 잘못이라는 의견이 여론조사에서 58%를 차지한 것이다. 1969년 5월 15일 레이건이 인민공원을 쓸어버렸을 때는 더해서, 레이건에게 보내진 103개의 전보 중 33대 1로 레이건의 편을 드는 사람이 많았을 지경이었다.[33] 여론에 힘을 입은 닉슨 대통령은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여겨지던 마약을 단속하기 위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비록 현재로서는 미국의 마약과의 전쟁이 대실패로 끝난 것으로 평가받지만 이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닉슨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인 다수였다.
대학생과 청년들은 닉슨의 권위주의적이고 반인권적인 처사에 분노해 민주당과 반베트남 전쟁 시위로 결집했다. 1971년, 3개의 상이군인 훈장을 비롯해 수많은 무공 훈장을 탄 베트남 전쟁의 참전 용사 존 케리가 J. 윌리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의 주재 하에 이루어진 언론 인터뷰에서 베트남 전쟁을 "무의미한 전쟁"이라고 비판하며 "미국 정부가 전쟁에서 이기려는 목적만으로 청년의 목숨을 내다 버리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인터뷰를 계기로 켄트 주립대 발포 사건으로 주춤해져있던 학생 운동권은 다시 불타올랐고 대학가에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와 닉슨 사퇴 요구가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닉슨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민주당을 지지했으나, 민주당에서는 68혁명 이후 반전 시위대 지지 여부를 두고 당이 갈라져있었으며,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강경한 반공주의적 국내 노선과 별개로, 대외적으로는 1971년에 키신저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개최, 중국의 공식 초청을 받았으며 1972년 2월에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닉슨-마오쩌둥 회담을 가졌다.
당시 조지 소로스와 함께 퀀텀펀드를 공동창업하고 운영중이던 짐 로저스는 미국인으로써 당시 닉슨의 방중에 대해 당시 새로운 상황에 대해 대부분의 미국인들처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이후 닉슨의 결정으로 인해 세상이 바뀌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짐 로저스는 불인 차이나라는 베스트셀러를 집필할 정도로 중국 투자에 앞장선 월가의 인물이 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닉슨의 방중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베트남 전쟁 관련 사항은 특히 닉슨의 정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항이었는데,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인기 없는 전쟁이 되어간다는 것을 직감한 닉슨은 아시아 국가들은 스스로 자국의 안보를 감당해야 한다면서 남베트남에서 미군들을 본격적으로 철수시킨 것에 이어서 한반도에서도 주한미군 7사단을 철군시켜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주요 아시아 동맹국들과 갈등이 벌여지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닉슨은 베트남 철수 공약을 지켰고, 그 결과 1972년, 소수의 미군 고문단을 제외한 파월미군 50만여 명이 철수하고 북베트남으로부터 미군 포로들을 송환받으면서 닉슨에 대한 지지도는 높아지게 된다. 닉슨은 미군 철수의 정당성을 어필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이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베트남화(Vietnamization) 정책을 추진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남베트남군은 양적 및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강경함을 어필하기 위해 협상을 깨고 부활절 공세로 북베트남이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도전장을 내밀자 라인배커 작전이라는 북폭작전을 감행하는데, 지난 롤링썬더 작전과는 달리 폭격 제한구역을 두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북베트남 주요 거점을 폭격했다. 그 덕에 북베트남-중국 국경지대의 교통로와 하노이 주위의 수도권이 미군의 폭격에 완전히 박살나고 북베트남군의 전쟁 수행능력도 급감해 남베트남에 대한 공세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소련 화물선들의 무기 공급을 중단시키기 위해 항구에다가도 무차별적으로 기뢰를 살포하는 이전과는 다른 강경한 모습을 보였다. 닉슨의 이러한 강경조치에 미군과 보수층에선 열렬한 지지를 표했지만 언론에선 민간인 피해를 이유를 들어 닉슨 행정부를 두고 야만적이라고 비판했다.
3.6. 72년 재선과 워터게이트
대선 당시 광고(1972년).[34] |
이후 닉슨은 1972년 선거에 재출마하며 1964년 존슨의 승리에 맞먹는, 아니 민주당 절대 텃밭인 워싱턴 D.C.와 매사추세츠만을 내주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서 맥거번을 제치고 연임에 성공한다. 닉슨은 49개주에서 승리하며 득표율 60.7%을 올렸다. # 더블스코어로 압승하는 개표영상 이로서 1932년 이후 근 40년을 지배한 남부 텃밭 + 북부 서민과 소수인종 + 서부의 농민과 지식인 + 중산층을 포괄하는 민주당의 뉴딜연합은 붕괴되고[35], 남부의 백인 보수층 + 북부의 중상류층 + 발전하는 서부의 텃밭[36]을 바탕으로 한 공화당의 "남부전략"의 시대가 또 40년간 (조지 W. 부시까지) 도래한다. 이에 닉슨은 헌법을 개정할 만큼 지지를 얻어 3선 이상이 점쳐지기도 했지만 초대형 사건인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1972년 대선 당시 민주당의 선거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이를 은폐하려 한, 이른바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 닉슨이 사전에 알고 있었음이 1974년 드러난 것이었다. 그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증거는 속속들이 나왔고, 1973년 6월 23일에 집무실에서 "워터게이트 침입은 국가 안보 문제이니 FBI는 이 문제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라고 한 그의 육성이 공개되었다. 닉슨은 대통령 권한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무실에서 은밀히 녹음된 테이프의 공개를 막으려고 했지만, 연방대법원에선 만장일치로[37] "대통령이라도 그건 아니되지!"라고 해서 역관광을 당했다.[38]
결국 탄핵 가결 직전에 조건부 자진 사임하게 된다. 자진 사임 대신 사건에 대한 면책 특권과 더불어 테이프 내용의 영구 비공개를 요구했고, 의회가 이를 받아들여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떠나게 됐다. 그리고 후임 대통령 제럴드 포드가 특별사면을 함으로써 그는 대통령 임기 수행 시절 벌인 모든 법률 위반 행위에 대해 완벽한 면책을 받게 되었다.[39]
하야 성명 후, 그가 퇴임하는 시각에 이르기 전 에어 포스 원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귀향길에 올랐는데, 비행중 워싱턴 D.C.에서 포드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리자, 규정에 따라 닉슨의 탑승기의 기장 랠프 앨버타치 미합중국 공군 대령은 비행하던 중 에어 포스 원에서 기체 고유 부호 SAM 27000으로 호출 부호를 변경했다. 이는 에어 포스 원이 비행중 호출 부호를 변경한 유일한 사례다.
닉슨 사임 10일 전 탄핵을 앞둔 닉슨 대통령의 불안한 정신상태를 우려한 제임스 슐레진저 국방장관이 국방부와 군에 대통령과 백악관의 군사명령, 특히 핵전쟁 관련 명령을 수행하지 말라는 비밀지시를 내린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 후 뉴욕과 뉴저지 근교에서 저술활동을 하며 조용히 살았는데, 이 때 낸 책이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1977년 데이비드 프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한다면,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Well, when the president does it, that means that it is not illegal."
"음, 대통령이 그것을 한다면, 그것이 뜻하길 그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음, 대통령이 그것을 한다면, 그것이 뜻하길 그것은 불법이 아닙니다."
전설이 된 이 인터뷰는 당시 한 달에 걸쳐 12번 시행되었으며 5파트에 걸쳐서 방송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론 하워드가 감독한 프로스트 vs 닉슨이란 영화가 나오기도 했다. 이 영화는 해당 인터뷰의 중요도를 너무 과장했다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닉슨의 전기 작가 중 하나인 조나단 앳킨은 해당 멘트가 프로스트가 뽑아낸 닉슨의 고백이 아니고 사실은 미리 계산된 발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허핑턴 포스트의 엘리자베스 드류는 영화에 나오는 발언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했는데, 영화에서 닉슨은 "(진실) 은폐와 관련이 됐었다"고 고백하고 미국인들을 실망시켰다고 체념한 듯 인정하지만, 실제 인터뷰에서는 "당신(프로스트)은 내가 불법적인 은폐 작업에 관련됐다고 고백하길 바라는거요? 그렇겐 안 되지!"라고 말했다.
어쨌거나 이 인터뷰는 닉슨 본인이 자기를 포장하려고 언론에 팔아넘긴 것에 가깝다는 의견이 많고 실제로 닉슨이 매우 영리한 전략가였다는 걸 생각하면, 기자 질문에 말려서 얼떨결에 본심을 드러냈다기보단 이게 진실에 가까워 보인다. 문제는 대중들은 닉슨이 생각하는 것과 아주 동떨어진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런 멘트들이 심한 역효과를 냈다는 것. 당시 인터뷰의 영어 전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 # 1977년 인터뷰
해당 부분을 간단히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중략)...프로스트: 그러니까 말씀하시는게 어떤 상황에서는, 그리고 휴흐턴 계획이나 그런 부분이 그런 상황이었고, 대통령이 국가의 이익을 위해 어떤 걸 하겠다고 결정하고 불법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건가요?
닉슨: 글쎄, 대통령이 뭔가를 하면, 그건 그 (행위가) 불법이 아니란 말이겠죠.
프로스트: 그 정의 그대로 말이죠.(By definition)
닉슨: 맞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 뭔가를 승인하거나, 이 경우처럼 국내의 평화와 질서에 중대한 위험 때문에 (뭔가를 승인할때), 그러면 그 상황에서 대통령의 결정은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이 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중략) 프로스트: 그렇다면 그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이 어딘지 판단하는 건 대통령의 결정이란 말인가요?
닉슨: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결정하는 건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선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과 다릅니다. 대통령이 선거인단 앞에 서야 한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그리고 대통령이 의회 앞에 서야 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40]
닉슨: 글쎄, 대통령이 뭔가를 하면, 그건 그 (행위가) 불법이 아니란 말이겠죠.
프로스트: 그 정의 그대로 말이죠.(By definition)
닉슨: 맞습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위해 뭔가를 승인하거나, 이 경우처럼 국내의 평화와 질서에 중대한 위험 때문에 (뭔가를 승인할때), 그러면 그 상황에서 대통령의 결정은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이 법을 어기지 않을 수 있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명령을 수행하는 이들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중략) 프로스트: 그렇다면 그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이 어딘지 판단하는 건 대통령의 결정이란 말인가요?
닉슨: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결정하는 건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하고선 대가를 치르지 않는 것과 다릅니다. 대통령이 선거인단 앞에 서야 한다는 걸 잊으면 안 돼요. 그리고 대통령이 의회 앞에 서야 한다는 것도 잊으면 안됩니다.[40]
종합하자면 닉슨의 마인드는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게 뭔지 애매할 때 이를 결정하는 건 결국 대통령의 몫이라는 사고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극단적인 생각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애매한 상황에서 합법과 불법을 결정하는 것이 대통령의 몫인 만큼 그 선택에 의해 낙선이나 탄핵 같은 결과가 오는 것 또한 대통령의 몫이라는 단서 또한 분명히 달고 있으므로, "대통령은 맘대로 해도 불법이 아니다"라는 독재자스러운 생각까지는 아니다. 오히려 "애매한 상황이라면 대통령이 총대를 메고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가깝다.[41] 또한 이를 보면 닉슨은 질문자에 말려 얼떨결에 고백을 하고 만 게 아니라 자신의 평상시 지론을 침착하게 설명한 것이다. 어차피 정치판은 동서고금 법과 도덕의 준수 따위는 따지지 않고 온갖 난장판이 행해지는 지옥도였고 미국이라도 특별히 도덕적이고 깨끗한 것은 아니므로,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뭔가를 밀어붙여야 할 때도 있으며 임기 기간에는 대통령이 사실상 왕이라는 게[42] 닉슨의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닉슨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건 당연한 것이다.
3.7. 이후
1978년 1월 지미 카터 대통령은 닉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였다. 그 자리에서 닉슨은 함께 초대된 제럴드 포드와 넬슨 록펠러, 존슨 대통령의 부인과 담소를 나누었다. 그 직후 닉슨은 회고록을 출판했는데, 반성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다는 비난과 더불어 대중적 호기심의 결합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라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났다. 그 뒤로도 16년 동안 8권의 정치분석서를 썼고 평론가와 일반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란 평가를 받았다.1994년 1월 사망 3달 전 모습 |
1993년 6월, 사랑하는 아내 팻 닉슨이 사망하자 닉슨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보다 일주일 전에는 그가 가장 신뢰했던 측근인 존 코널리 전 재무장관도 세상을 떠났기에 닉슨의 충격은 더욱 컸다. 닉슨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오열했고 이후 닉슨의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소련의 해체 당시 미국에서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고, 1994년 3월 81세의 나이로 다시 한번 모스크바를 밟았다. 1992년 미국 대선에서 웬일로 빌 클린턴이 조지 H. W. 부시는 물론 로스 페로에게도 패배할 것이라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다가 보기좋게 빗나가는 꼴을 보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닉슨은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도중에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걷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결국 그 클린턴이 재임하던 1994년에 닉슨은 딸들이 지켜보는 병원의 침대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도와줘(Help)"였다고 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닉슨의 죽음을 애도하며 국장을 지시했고, 그의 시신은 고향 캘리포니아 주로 옮겨져서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4. 리처드 닉슨 행정부
자세한 내용은 리처드 닉슨 행정부 문서 참고하십시오.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이 당선되면서 구성된 행정부다.
5. 닉슨의 사람들
-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 부통령
애그뉴는 닉슨의 부통령이었지만 닉슨과의 사이는 엄청나게 나빴다. 닉슨은 애그뉴의 거친 언행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몇번이나 그에게 발언 수위 조절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말하기 껄끄러워하는 극단적인 보수적인 수사를 그에게 하게 함으로서, 보수층을 만족시키는 역할을 맡겼다. 닉슨은 그 이상으로 애그뉴를 이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국정 사안에서 애그뉴를 배제하였다. 애그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정치가 중 하나였으며 결국 메릴랜드 주지사와 부통령을 지내면서 받은 막대한 불법 자금이 들통나 부통령 직위를 사퇴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대통령 직위 승계를 우려한 검찰 측이 그와 사법거래를 하면서 애그뉴가 빨리 부통령 직에서 하차하고 제럴드 포드가 부통령이 될 수 있더도록 했는데, 이에 앙심을 품은 애그뉴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그러나 애그뉴는 닉슨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국가안보보좌관
말할 필요가 없는 닉슨의 측근으로 알려져있고 많은 매체에서 단짝으로 나왔기 때문에 닉슨과 키신저를 영혼의 단짝처럼 보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 키신저와 닉슨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고 한다. 키신저는 닉슨을 개인적으로 혐오했다고 하며 닉슨도 키신저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키신저는 1968년 대선 도중의 평화회담 사보타주[43]로 닉슨의 당선을 도왔고, 이에 닉슨은 키신저를 해임하면 키신저가 이를 언론에 누설하며 동반 자살 작전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해 키신저를 해임하지 않았다. 더구나 닉슨은 개인적으로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력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닉슨은 정책 파트너로서 키신저를 신뢰한 것으로 보인다. 또 워터게이트 사건 때 정신이 무너진 닉슨은 키신저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의지를 했다고 한다. 키신저는 2023년 11월 29일에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미국의 전직 정치인들 중 가장 장수했다.
- 존 코널리(John Connally) 재무장관
닉슨이 생전 유일하게 신뢰했던 정치가로 알려져있다. 그는 1963년 케네디 암살 사건 당시 케네디와 같은 차에 동승한 것으로 유명한데[44], 본래 민주당원이었지만 보수 성향이 있어서 닉슨을 지지했고 닉슨은 그런 코널리를 마음에 들어해 그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닉슨은 키신저를 포함해 자신의 내각 구성원 모두를 불신하였지만 코널리만큼은 신뢰하여 유일하게 뒷담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72년 대선을 앞두고 애그뉴가 아주 아니꼬왔던 닉슨은 코널리를 부통령 후보로 삼으려 했지만 측근들의 만류로 실패했고,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나게 되자 그를 개인적으로 부통령으로 인준해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 했지만 그러면 민주당이 반발할 것이 뻔하므로 대신 포드를 임명하였다. 1980년 대선의 예비선거에서 존 코널리가 출마하자 닉슨은 코널리를 지지했지만, 결국 레이건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로도 닉슨과 코널리는 원만한 관계를 이어갔고 코널리가 죽은지 1년 후 닉슨도 사망했다.
- 존 N. 미첼(John N. Mitchell) 법무장관
리처드 닉슨의 남부전략에 큰 영향을 미친 닉슨의 전략가 중 한명이다. 존 미첼 법무장관은 리처드 닉슨의 더러운 손 중 하나였으며 닉슨이 온갖 종류의 정치 공작을 감행하고, 좌파 학생운동 그룹과 흑인 민권운동 세력을 소외시키면서 다수의 백인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얻는 남부전략을 시행하는데 대다수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의 아내 마사 미첼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존 미첼만이 알고 있어야할 기밀 자료가 아내에게 새어나가 결국 기자들에게 모두 퍼지게 된 것이다. 닉슨은 마사 미첼을 납치해서라도 입을 틀어막고자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존 미첼은 1975년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19개월간 옥살이를 해야했다.
- H. R. 홀더먼(H. R. Haldeman) 대통령비서실장
존 얼리크만과 더불어 닉슨의 간신으로 평가받은 인물이다. 그와 얼리크만은 닉슨으로 향하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려고 해서 "백악관의 베를린 장벽"이라고 불렸으며 닉슨은 그 둘을 통해서 중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홀더먼은 1956년 닉슨과 만났고 1960년 대선과 1962년 캘리포니아 선거에서 총책을 맡았다. 닉슨은 그를 신뢰해서 1968년 대선 때 온갖 더러운 일을 시켰고, 홀더먼은 닉슨의 "정적 리스트"를 관리하였으며 워터게이트 사건에도 깊숙히 관여하였다. 그 역시 1975년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18개월동안 복역했으며 지미 카터 대통령이 감형을 해줘서 석방되었다. 석방 이후에는 사업을 했는데 아주 성공했다고 한다.
- 존 얼리크먼(John Ehrlichman) 국무보좌관
존 얼리크만은 홀더먼과 함께 "닉슨의 베를린 장벽"으로 닉슨의 눈과 귀를 가리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정치적 범죄를 저질렀다. 워터게이트 사건에도 관여한 것은 물론, 마약과의 전쟁에도 얼리크만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죄가 무겁다고 판단되어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역시나 카터 대통령에 의해 가석방되었다. 사면 이후에는 언론에 여러 중요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는데 특히 마약과의 전쟁이 좌파 세력과 흑인 민권운동 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공작이었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해 마약과의 전쟁에 대한 인식이 반전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 존 딘(John Dean) 백악관 고문
존 딘은 1964년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할 정도로 강력한 보수주의의 지지자였으며 인맥을 통해 닉슨의 백악관 고문으로 임명된 인물이었다. 1972년 대선에서 존 딘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수사망이 조여오고, 얼리크만과 홀더먼 그리고 닉슨이 모두 자신을 토사구팽하려 하자 앙심을 품고 상원 청문회에서 자신이 아는 모든것을 털어놓고 검찰 측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닉슨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존 딘을 해고했지만, 딘은 자신이 기억하는 워터게이트 사건의 정보를 검찰에 넘겨줘 워터게이트 사건이 닉슨의 잘못으로 귀결되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끝난 이후로도 존 딘은 정치적으로 크게 변해, 민주당의 지지자로 변신했으며 이라크 전쟁과 도널드 트럼프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여담으로, 1938년 생이지만 아직도 살아있으며, 닉슨의 측근들 중 헨리 키신저와 함께 가장 장수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 론 지글러(Ron Ziegler) 백악관 대변인
역대 최연소 백악관 대변인으로,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캠페인에서 닉슨을 만나, 닉슨 행정부 내내 닉슨의 입이 되어 백악관의 입장을 대변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에는 워싱턴 포스트 기자들을 신뢰할 가치가 없다고 무시해 큰 비판을 받았다. 존 얼리크만과 홀더먼이 모두 사퇴한 시점에서 지글러는 닉슨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닉슨은 지글러가 사퇴하지 말고 계속 맞서 싸워주길 바랬으며 지글러는 이 요구에 부응해 33번이나 의회에 출석해 최대한 닉슨을 변호하고자 했다. 그는 닉슨이 사임하는 그날까지 백악관 대변인 자리를 지켰고 닉슨은 그런 지글러를 고마워했다. 코널리와 같이 닉슨이 신뢰한 정치인 중 하나. 정계 은퇴 이후에는 사업가로 활동하다가 2003년 죽었다.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닉슨이 모신 보스이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재임하며 보스인 아이젠하워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아이젠하워 본인은 오히려 닉슨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례로 196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숙련된 정치가 이미지를 어필하던 닉슨에게 큰 타격을 입힌 일이 있었는데 바로 인터뷰에서 “닉슨이 부통령 재임시절 뭘 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냐”는 질문에 일주일만 시간을 주면 떠올릴 수 있을거 같다는 얘기를 해 닉슨 캠페인에 큰 타격을 입혔다.
6. 평가
6.1. 개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임한 것으로 많이 각인되었지만 재임기 외교, 경제 등 여러 분야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베트남전 개입 중지와 냉전 완화, 데탕트 등 한국전쟁 후 가장 괄목할만 한 치적을 남긴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치가로서 권력을 남용하고 거짓말을 하다가 불명예스럽게 사임을 했기에 닉슨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 중에서도 낮은 평가를 받는 대통령이었다.[45] 그래도 1990년대 들어서는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고 중국과의 수교 등으로 냉전에 해빙기를 가져오게 한 외교적 성과 덕분에 평가가 올라가고 있는 추세다.경제사적 측면에서는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경제의 근간이었던 브레튼우즈 체제를 닉슨 쇼크로 중단시킨 장본인이 되어 버렸다. 즉 1971년 8월 15일을 기해 미국 달러의 금태환을 거부하고 USD 자체를 본위화폐(기축 통화)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인 1960년대 중반부터, 린든 B. 존슨의 대표적인 사회복지정책인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를 포함한 각종 복지 프로그램들과 베트남 전쟁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이미 금본위제를 무시하고 달러를 찍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를 감지한 서유럽에서 국채 변제를 달러 대신 금괴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를 상환할 능력이 없던 미국은 결국 금본위제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다. 즉 브레튼우즈 체제를 중단하는 것은 불가피한 결정으로, 이를 닉슨 탓으로 돌리는 것은 억울하다고 봐야할 것이다.
1972년 2월 중국 방문에서 마오쩌둥과 접견하는 모습 |
닉슨의 중국과의 접선은 전통적으로 기민한 외교 정책이자 소련에 빅엿을 먹인 전환적 발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비록 소련이 이미 망한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닉슨의 대중국외교가 박한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이건 중국의 경제력이 신장된 21세기 기준에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비판이고,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이었을 때에는 전혀 상황이 달랐다. 당시 소련이 소비재 공급이 부실하다는 평이 있었을지언정 엄연히 세계 2위 군사강국에 경제대국이었고, 1인당 국민소득도 서방 선진국만큼은 아니라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반면 중국은 경제적인 잠재력이 높다는 평가는 있을지언정,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대에 그쳤던 낙후된 후진국이었다. 막말로 당시 소련에서 주말이나 휴가철에 자기 소유 별장에서 여가를 보내는것이 일상적이었던 것에 반해 중국은 라디오와 자전거가 사회인의 상징이었던 시절로, 당연히 당시 시점에서는 소련 견제가 우선인 게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1929년 시작되어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5년 본격 도입한 노인의료보험(메디케어), 주정부의 빈민부조(메디케이드) 의료보험 제도를 완전 폐지했다는 오해를 사고 있는데[47], 이는 사실과 다르다. 두 보험은 멀쩡히 잘 남아있으며, 도리어 닉슨은 1973년 12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만들어낸 HMO(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 Act of 1973)에 서명함으로써 양당 통합을 이끌어낸 성과가 있다. # 링크 닉슨은 모두 3억 7천만 달러에 이르는 기금을 HMO 가입 확대를 위한 기금으로 조성하고 선불정액제 보험을 금지하는 주들의 법률들을 무효화하였으며, 25명 이상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기업 중 의료보험 급여를 하고자 하는 기업은 반드시 HMO를 선택사항 중 하나로 포함하도록 하였다.# 출처 이런 오해의 주된 이유가 마이클 무어의 식코에서 닉슨이 해당 발언을 하는 것처럼 나오기 때문이다.
HMO의 특징은 일반의 네트워크 내에서 저렴한 보험을 쓸 수 있게 한 것으로, 대신 전문의를 사용할 경우 비용이 증가하게 된다.[48] 이는 개인이 가입을 선택하는 보험으로, 뒤를 이은 지미 카터는 1976년 포괄적 의료보험제도를 주장했으나 통과되지 못했다.
닉슨은 레이건 이후의 공화당과는 정책노선에 있어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49] 예컨대 닉슨은 환경주의자로, '환경보호', '환경의식', '생태학'이란 단어를 미국 정치계에 들여놓은 초기 인물 중 하나가 닉슨이었다. 1969년 국가환경정책법(National Environmental Policy Act)을 제정, 1970년에 환경보호청(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과 환경개선위원회(Council of Environmental Quality)를 창설했으며, 같은 해 대기정화법(Clean Air Act)을 확장했고, 1972년에는 수질오염방지법(Federal Water Pollution Act)을 대폭 개정했다.
다만 닉슨이 이러한 환경주의적 정책을 편 것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는 거리가 멀다는 분석이 있다. 버지니아 대학교 산하의 싱크 탱크로, 대통령 리더십과 공공정책, 그리고 미국 정치사를 연구하는 기관인 밀러 센터에 따르면, 닉슨은 사석에서 만약 내가 이러한 조치를 하지 않았더라면, 민주당이 장악한 의회에서 더욱 진보적인 입법을 강행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닉슨은 케인즈주의적인 임금과 가격 통제정책들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정책 프로그램들 또한 자신의 정치철학과 상반되는 것이고 또 장기적으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 당해년의 일시적인 효과를 위해 실행했다고 한다. 궁극적으로 닉슨은 루스벨트가 구축한 뉴딜연합을 극복할 우파 진영의 정치적 동맹을 구축하고자 했다고 한다. 닉슨은 이를 통해 미국을 우측으로 이동시키고자 했고, 결국 그걸 해냈다는 것이다. #
닉슨과 레이건을 비교했을 때, 오늘날 미국인들의 평가는 물론 역사학자들도 닉슨보다 레이건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데, 그것은 레이건 스스로가 닉슨의 지나친 권력 남용과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해서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측면에 있어서 철저한 단절과 극복을 꾀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기자회견과 언론인 간담회를 기피했던 닉슨과 달리, 레이건은 유창한 언변을 앞세워서 대국민 소통에 매우 능했다는 점이 성패를 갈랐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둘은 닉슨이 대통령이고 레이건이 주지사일 시절 통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 통화에서 닉슨은 아프리카인들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레이건의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세계적인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닉슨과 보수당 소속의 전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이 상당히 유사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이 정책의 폐해는 항목 참조.
6.2. 베트남 전쟁
북베트남은 개전 내내 유리한 전략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과의 평화협상에 소극적이었다.[50] 당시 미국의 국력은 더이상 베트남전을 지속할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그냥 발빼면 패배를 자인하는 셈이 되니 자신의 재선도 위험. 그리하여 닉슨은 전략폭격기부대를 24시간 내내 소련 영공 근처에서 비행시키고 ICBM을 상시 발사 대기시키는 등의 소련을 위협하는 미치광이 전략을 사용하여 소련이 북베트남을 설득하여 협상장으로 나오게 했다.하지만 이렇게 미국의 발등에 떨어진 불은 껐지만 그가 워터게이트로 물러난 후 미국의 리더십에 공백이 일어나자 북베트남은 휴전협정을 파기하고[51] 바로 공세를 펴 남베트남을 흡수통일하여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캄보디아가 무너지면서 생긴 폴 포트의 킬링필드도 그렇고 아래의 문단에 나온 것처럼 사회주의 확산을 막는다며 살바도르 아옌데를 쫓아내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지원했다는 큰 흑역사도 있다.
6.3. 1973년 칠레 쿠데타 지원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미국의 이미지를 박살낸 사건이며, 단지 살바도르 아옌데가 좌파 성향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민주주의와 상극인 골수 사회주의자로 몰아 끌어내리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집권을 도와 결과적으로 수많은 칠레 국민들을 희생시킨 점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외교적 실책이다. 현재의 미국이 냉전 시절만큼 적극적으로 우파독재를 옹호하지 않게 된 이유들 중 하나로 닉슨의 이런 외교적 실책이 있다.6.4. 북한과의 일화
의도치 않게 북한에게 굴욕을 겪었는데, 전임 대통령 존슨 시절에 일어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의 해결을 위해 북한에 대한 사과 성명을 냈다. 정찰선 푸에블로호는 몇 차례 북한의 영해를 침범하였고, 이를 벼르던 북한은 푸에블로호를 나포하였다. 닉슨은 강경하게 대처하고 싶어했지만 그 자신이 공산권과의 공존을 강조한 닉슨 독트린의 구호를 외치고 당선된 대통령이었기에 결국 북한에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이에 기고만장해진 북한은 1969년에 또다시 자신의 영공을 침범한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켜버린다. 또 다시 닉슨은 엔터프라이즈호를 이끌고 원산 앞바다에서 시위를 했으나 결국 흐지부지되어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표면적으로는 북한이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승리한 것 같았지만 북한의 내상은 심각했다. 이 이후 북한은 적대국의 군사력을 경계하여 군비를 GDP의 절반 가까이나 올려버렸다. 물론 단순히 미국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는 군수공업 투자를 지양하고 경공업 중심의 성장을 중시한 갑산파와의 정치 투쟁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미국과의 마찰도 원인 중 하나로 봐야 할 것이다.
6.5. 존 F. 케네디와의 비교
재밌는건 닉슨과 케네디의 정치 입문 시기는 1946년으로 같았고, 나이 차는 고작 네 살에 불과했다.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특권층 자녀로 자란 케네디는 진보적인 정책을 펼친 데 반해서 서민층 자녀로 자란 닉슨은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출생부터 시작해서 대학입학이나 정계이력까지 모든 면에서 대조적인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1960년 대선에서 양당 후보로 출마했다.
세세히 파고 든다면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둘의 악연은 길다. 닉슨과 케네디는 같은 1946년 중간선거에서 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1947년 초선 의원끼리의 친목회에서 초선 의원들이 가벼운 정책 토론을 가질 기회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케네디의 상대로 맞붙은 사람이 닉슨이었다. 게다가 하원 의원 시절 닉슨의 의원 사무실은 361호실이었는데, 바로 옆방인 362호실은 케네디의 방이었다.
이 때문에 닉슨과 케네디는 처음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1953년 케네디의 결혼식에 닉슨이 하객으로 참석했을 정도. 둘은 점심까지 같이 먹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고, 1959년에는 케네디가 만약 자신이 대선 후보로 나서지 않는다면 닉슨에 투표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둘의 사이는 각별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경선에서 승리해 본선에 나서 닉슨과 붙게 되었다.
우연히도 닉슨은 케네디가 암살되기 바로 전날 댈러스에 있었는데, 거기서 케네디의 정책을 비판하고 있었다. 암살 당일 날엔 뉴욕에 돌아간 상태였는데, 택시에서 케네디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53] 집에 도착했을때 닉슨의 지인은 닉슨이 매우 놀란 상태였다고 서술했다. 그 다음 날 닉슨은 케네디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명을 내놓았다. '케네디의 암살범 오즈월드가 살해당하자 비록 죽어 마땅한 인물이지만, 그 역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는 인물이었고, 그를 일방적으로 총살한 것은 비열한 행위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모든 면에서 반대인 두 대통령이었건만, 둘 다 임기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는 게 미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아이러니다.[54]
6.6. 한국과의 관계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나도 역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예측 불가능한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을 많이 되새겨 보았으며, 이 노(老) 정치가가 얼마나 지혜로웠는가를 더욱 새롭게 인정하게 됐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의 회고록 中
닉슨은 부통령이던 1953년 11월에 처음 한국을 찾았다. 이 해 6월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 사건을 일으키면서 미국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크게 놀래켰다. 이 사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으나 미국은 여전히 이승만의 돌발행동을 불안하게 여겼고 이에 아이젠하워는 닉슨을 한국으로 보내 이승만에게 다시는 단독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오라고 당부했다. 닉슨을 만난 이승만은 두 번째 만남에서 문서를 내밀었는데 거기에는 "내가 모종의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을 견제하는 것이다. 그걸 먼저 나서서 없애줄 이유는 없다."라고 돼있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닉슨에게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할 때는 불가예측성을 견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충고를 했으며, 이에 닉슨은 나중에 그런 일들을 하면서 배우면 배울수록 이승만의 현명함을 다시 보게 됐다고 회고했다.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의 회고록 中
박정희 정부 때에는 전임 대통령인 린든 B. 존슨 행정부가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냉랭한 편이었다. 닉슨은 주지사 선거에 낙선하고 야인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닐 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박정희는 그를 '끝난 사람' 취급하고 오찬 대신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쫓아내버렸는데[55], 1966년이면 당시 닉슨이 재기를 준비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현명하지 못한 처사였다.[56] 1969년 닉슨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이 되자 상황은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렸고, 68년 한때 30만에 달했던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한국의 외화수익이 닉슨의 베트남 철수로 인해 직격탄을 맞았으며, 68혁명에도 기술된 남북관계 급냉각으로 인한 박정희 정권의 위기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한국 정부와 협의 없이 주한미군 7사단을 그냥 철수시켜버리는 등[57] 제대로 역풍을 맞는다. 이 때문에 다급해진 박정희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백악관이 아닌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만나야 했고, 저녁 식사 때에는 자기 고향 친구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했다. 국가 정상끼리의 저녁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모임에 끼워준 모양새의 굴욕인 셈이다.[58] 애초에 일국의 부통령이었던 사람을 정치적으로 사망했다고 해도 푸대접하는 건 엄연한 외교적 결례였고 앞날까지는 볼 수 없다 치더라도 조심스럽지 못한 처사였다. 이때 급속도로 냉각된 박정희와 닉슨간의 관계 때문에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외치며 핵개발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면서 당시 수출경제의 호황과는 별개로 한미관계는 극도로 심각하게 악화되고 그 여파가 지미 카터시대까지 이어진다.
그래도 닉슨 본인은 한국에 애정이 있었는지 꽤 여러 번 방한했다.[59] 1953년 부통령 시절을 최초로 해서 1993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꾸준히 방한하였다.[60]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한데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을 직접 만나 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 거기에 순정효황후까지 만난 적이 있었다. 1993년 방한했을 때 "내가 한국을 여러번 방문했는데 문민 대통령은 참 오랜만이다.", "경제 기적과 정치 개혁을 모두 이룬 한국을 보니 자랑스럽다."며 뼈 있는 농담과 덕담까지 해줬다.
7.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 당선 여부 | 비고 |
1946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캘리포니아 12구 | | 65,586 (56.02%) | 당선 (1위) | 초선 |
1948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141,159 (87.82%) | 재선 | |||
1950 | 미국 연방상원의원 선거 | 캘리포니아 | 2,183,454 (59.23%) | 초선 | ||
1952 | 미국 부통령 선거[A] | 미국 | 34,075,529 (55.18%, 442명) | 초선 | ||
1956 | 미국 부통령 선거[A] | 35,579,180 (57.37%, 457명) | 재선 | |||
1960 | 미국 대통령 선거 | 34,108,157 (49.55%, 219명) | 낙선 (2위) | |||
1962 | 미국 주지사 선거 | 캘리포니아 | 2,740,351 (46.87%) | |||
1968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국 | 31,783,783 (43.42%, 301명) | 당선 (1위) | 초선 | |
1972 | 미국 대통령 선거 | 47,168,710 (60.67%, 520명) | 재선[63] |
8. 대중매체에서
8.1. 영화
로버트 올트먼 감독이 제작, 연출한 은밀한 영광(Secret Honor, 1984)에 등장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 매그놀리아로 잘 알려진 필립 베이커 홀이 닉슨을 연기하며, 영화는 1인극이다. 시작부터 픽션임을 강조하며 심상치않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약 90분 동안 혼자서 닉슨의 살아왔던 삶과 여러 정치적 행보,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변명들을 마치 광인같은 모습으로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끊임없이 이어나간다. 홀의 연기가 매우 인상적인 영화이며, 국내에는 잘 알려지진 않았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에서 나온 DVD가 있다.
1994년작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중국과의 친선 탁구시합을 한 검프를 초대했다. 검프에게 어디에 묵냐고 묻자 검프는 "에봇인지 뭔지 하는 호텔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닉슨은 자기가 더 시설 좋은 호텔을 안다며 그 호텔에 검프를 묵게 했다. 그런데 그 호텔이 워터게이트 호텔. 그날 밤 검프가 묵고 있던 호텔 건너편에서 플래시 불빛이 비치는 바람에 잠을 못 자던 검프가 관리인실에 전화해서 "건너편 건물에서 두꺼비집을 찾는지 잠을 못 자겠어요. 그 방에 관리인 좀 보내주세요."라고 전화해버린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닉슨은 사임. 닉슨 딴에는 검프에게 호의를 베푼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자신을 대통령직에서 쫓아버린 셈이다.[64] 비슷한 예로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에서는 궁전 욕탕이 고장나 "배관공[65]을 보내달라"라는 팬윅 공국의 요청으로 호의를 베풀었다.
닉슨에 대한 영상물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작품이 올리버 스톤의 1995년작 닉슨(영화)이다. 영국 배우 안소니 홉킨스 경이 닉슨으로 분하였다. 자그만치 3시간 12분의 대작이지만, 그만큼 볼 만한 영화. 여기서 그는 그리스식 비극 연극의 주인공처럼, 한 명의 나약하고 모순적인 인간으로서 그려진다. 예컨대 주립대의 캄보디아 폭격 반대 시위에서 4명의 학생이 총에 맞아 숨지자 "철 모르는 애새끼들! 뭣도 모르고 까불더니 꼴 좋다!"라고 측근들 앞에서는 큰소리 뻥뻥 쳐놓고는, 혼자 있을 때는 "내 형이 죽을 때 그 애들하고 나이가 같았는데..."하면서 매우 울적해하는 식이다. 그렇게 한 인간으로서의 닉슨을 강조한 영화이기에, 그의 약점을 숨기지 않음에도 그 자체로 지나치게 우호적이란 시각도 있다. 안소니 홉킨스의 사실적인 연기가 돋보이며 이로 인해 제6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66] 평은 # 여기 참조.
론 하워드의 2008년작 작품 프로스트 vs 닉슨 역시 닉슨을 다루는 중요한 영화 중 하나다. 미국배우 프랭크 란젤라가 닉슨으로 분하였다. 사임 후에도 자신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지시했다는 말을 끝내 하지 않고 오히려 정치적 재기를 노리는 닉슨에게 1977년 TV 인터뷰로 도전장을 던진 데이빗 프로스트란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본래 연극으로 제작된 적도 있었다.[67]
영화는 언론인 프로스트가 노회한 정치인 닉슨과 닉슨에게 면죄부를 주게 되는 것 아니냐는 여론의 압박 속에 처음엔 인터뷰를 망치지만 결국 닉슨이 자기 잘못을 인정하게 만든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높은 평을 얻었고 인터뷰 자체도 매우 중요하긴 했지만, 역사적 사실은 다르니 위의 내용을 보자. 미국 정치를 다룬 작품이고, 말초적인 재미를 주는 영화는 아니라서 한국에선 그렇게 흥행하진 못했다. 그래도 이듬해인 2009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는 등 좋은 영화다.
2009년작 왓치맨에서는 닥터 맨하탄 덕분에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헌법을 개정하면서 무려 5선[68]을 성공한 1985년을 그리고 있다. 작품 속의 미국이 얼마나 미쳐 돌아가고 있는지[69]를 보여주는 좋은 장치. 영화 백투더퓨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사진 참조). 배우는 로버트 위스든으로 싱크로율이 매우 높으며 여러 영화에서 묘사된 닉슨 중에 가장 노회하면서도 음험한 닉슨을 연기하고 있다.
2013년작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에선 존 쿠삭이 연기하는데 딱 세번 등장한다. 케네디를 그 벼락출세한 부잣집 애새끼라고 욕하면서 주인공에게 "날 찍으면 당신네 흑인들 삶도 훨씬 나아질 거요"라고 뱃지를 나눠주면서 투표를 권유하는 장면과 대통령이 된 후에 블랙 팬더 당을 개발살낼 것을 지시하는 장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완전히 궁지에 몰려서 괴로워하는 장면을 끝으로 퇴장한다. 거기서 절대로 사임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다.[70]이 영화에 등장한 다른 대통령들은 모두 크든 작든 흑인 인권 개선에 한 발자국씩 나가는 일을 했으나 닉슨만은 그런 게 없다. 처음 나올 때 흑인 직원도 백인과 동일합 급여를 주겠다는 약속도 그가 아닌 레이건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니, 위선으로 묘사된 셈이다. 한국판 성우는 장민혁. 장민혁의 중년 연기를 들을 수 있는 부분이다.
2014년작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캐나다 배우 마크 카마초가 분했다. 매그니토와 레이븐의 깽판을 저지른 소식을 듣고 뮤턴트에 위협을 느끼고는 센티널 프로그램의 예산지원을 승인한다. 그리고 센티널 시범식때 참석했다가 매그니토에게 조종당하는 센티널에게 죽다가 살아나서 백악관 벙커로 피신했으나 매그니토는 벙커를 통째로 뜯어서 앞마당에 내놓는다. 그리고 매그니토가 경호원들의 권총을 빼앗아서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들을 겨누자 닉슨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와서 자신을 죽이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살려달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러나 사실 나온 사람은 닉슨으로 변신한 레이븐이었고 진짜 닉슨은 이 상황에 자신도 놀라고 있었다.
2016년작 영화 <엘비스와 대통령>에선 케빈 스페이시가 맡았다. 여기서의 모습은 꼰대 그 자체였다.
2017년작 미국 영화 더 포스트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를 탄압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진다. 커즌 도벨이 분했는데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고 실제 육성만 인용하여 참모진에게 전화하는 뒷모습이 주로 비춰진다.
2018년작 바이스(영화)에서는 배우 대신에 실제 모습이 비춰진다.[71]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연설을 발표할 때의 모습이 주로 인용된다.
8.2. 애니메이션
유리병 안의 대가리로 등장해서 온갖 악행을 다 펼친다. 필립 J. 프라이의 팔을 물어뜯고[72], 플래닛 익스프레스 앞에서 경찰을 불러 레이저 쑈도 해주시고 하다가 벤더의 몸통을 사서 대통령 선거에 나간적이 있다. 벤더는 몸통을 찾기 위해 워터게이트 호텔에 묵고 있는 닉슨에게 가고, 닉슨은 그들에게 망언을 해버린다. 망언 테이프와 몸통을 교환하는 협정이 체결되었고, 몸통빨로 가던 닉슨이 떨어질줄 알았는데, 울트라슈퍼 로봇몸통을 얻어 1표차이로 선거에서 이겨 지구 대통령이 되었다. 여담으로 그렇게 투표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릴라와 함께 벤더, 프라이는 투표를 하지 않았다. 다만 벤더는 범죄자여서 투표권이 없다. 울트라슈퍼 로봇몸통을 가지고 있으나, 그 이후 에피소드에선 보이지 않는다. 부통령으로 스피로 에그뉴의 몸통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후 릴라일행에게 끔살당해 이후 애그뉴 몸통의 클론을 데리고 다닌다.3000년도에 지구 대통령 자리에 오른후 3012년까지 대통령 직을 먹었으며,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돈까지 뿌린 정황까지 있다. Dicision 3012에선 투표에서 이기기 위해 벤더를 고용하고, 외계인 배척을 위해 다이슨 펜스를 설치하여 모 로봇이 주도한 로봇의 지구 지배를 확실하게 하였으며, 이걸 막기 위해 인류는 구원자를 보내 리처드 닉슨을 내쫓으려고 지원자 한 명을 과거로 보내게 되었다.
이외에도 지구를 저항도 없이 오미크로니안에게 바친다든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별을 정복해 버리는 등 여러가지 뻘짓들을 하고 있다. 직속 부하론 잽 브래니건이 있다.
밀하우스의 이름은 닉슨의 미들 네임에서 따왔다. 제작자 맷 그로닝이 초등학생한테 생길 수 있는 가장 나쁜 일이 닉슨하고 이름이 같은거라고 생각해 작명했다.
8.3. 드라마
- 24
찰스 로건은 닉슨으로부터 공화당적과 외모, 윤리관 등에서 모티브를 딴 캐릭터다. 다만 음모와 정치력 둘다 뛰어난 닉슨과 달리 로건은 평상시엔 무능한 주제에 음모를 꾸밀때만 유능해진다.[73]
- 닥터후
11대 닥터, 에이미 폰드, 로리 윌리엄스, 리버 송 일행의 도움을 받아 사일런스를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 때 아폴로 계획이 사일런스 퇴치에 활용되었는데, 타디스를 타고 닥터와 함께 51구역, 나사에 동행해 닥터가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극중에선 닥터에게 협력을 아끼지않으며 타디스에 같이 타기까지하며 꽤 좋은 이미지로 내내 나왔는데 나중에 헤어질때 닥터에게 자기는 역사에 기억될 것인지를 물어보자 닥터는 "사람들이 당신 잊을 일은 없어요"라고 대답한다.[74]
8.4. 소설/만화
해리 터틀도브의 여러 대체역사소설에서 카메오로 출연한다. 대부분 정직한 딕이나 정직한 리처드로 나온 사람이 이 사람의 패러디.슈퍼맨: 레드 선에서는 직접 나오진 않지만 1963년에 대통령으로 있다가 암살당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암살당한 후 미국이 이전 같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케네디가 대통령인데 케네디는 여배우 사진이나 모으는 한심한 정치인으로 상당히 부정적으로 등장.
갓 오브 하이스쿨 195화에 등장.여기서는 달에 남아있던 석가여래의 시신과 재천대성의 여의봉에 남아있던 DNA로 신의 군대를 만드는 프로젝트 갓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비밀로 부치기 위해 닉슨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는것으로 나온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 미국의 대통령으로 등장해 CIA의 요원이 된 알란 엠마누엘 칼손과 대화를 나눈다. 거기서 칼손은 자신이 인도네시아에서 머물렀을 당시 자신의 친구인 니 위얀 락스미가 벌인 정치적 공작과 성공에 대해서 자세히 말했는데, 닉슨은 그 이야기를 매우 흥미깊게 듣는다. 훗날 닉슨은 그 공작들을 그대로 따라했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신문에서 본 칼손은 "당신은 미국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 정치를 했어야 했어. 그러면 확실히 성공했을텐데 말이야"란 평을 남긴다.
8.5. 게임
본격 독재 시뮬레이션 트로피코 4에서는 닉 리처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심지어 모습도 기자회견에게 질문하는. 본 항목 맨 위에서부터 두 번째 사진의 캐리커처 판이며, 그가 시도때도없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바로 'I'm not a crook!'. 처음에는 네브래스카 주의 주 의원으로 등장하며 플레이어에게 이것저것 지원을 해주다가 부통령이 되더니, 마침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마자 자기가 대통령이 되고는 엘 프레지덴테를 케네디 대통령의 살해범으로 지목한다. 이 양반과 더불어 몇몇 국제 인사들에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가카는 결국 세계를 뒤엎을 계획을 세워 끝에는 이 양반이 케네디의 살인범이라는 증거를 소련에게서 입수해 전 세계에 방송하고 성난 FBI 요원들이 그를 체포하지만 누군가의 공작으로 암살된다. CIA의 음모로 추정하고만 있을 뿐 진범이 누군지 알 수 없다고. 물론 엘 프레지덴테를 내내 괴롭히고 방해하며, 심지어는 핵 미사일을 트로피코에 떨구기까지 한다. 여기에 대한 트로피코 측의 대책이라는 게 참 대단한데, 풍력발전기 10개를 세워 그 동력으로 트로피코의 위치를 바꾸는 방법으로 핵 미사일을 피한다!'''그런데 확장팩 모던 타임즈에서는 다시 살아나서 플레이어와 협력하자고 50,000$라는 거금을 달라고 한다. 이것을 던져주면 사라지는데 나중에 플레이어의 조력자가 나타나서 그는 원래 죽은 거 맞다라고 확인사살을 해준다.[75]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2에서 나오는 미국 대통령 마이클 듀건이 이 사람을 모델로 했다. 다만 시기를 잘 만나서 워터게이트까진 안 일어났고 임기는 무사히 마쳤다.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에서는 나치 좀비 맵인 'FIVE'[76]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하나로 등장하는데, 상당히 겁많고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60년 대선에서 JFK한테 졌던 게 깨알같이 언급되는데, 옆에 같이 있던 피델 카스트로가 "이 작자는 졌는데 왜 여기 있는거요?"라고 놀리자 JFK가 "우리의 적들을 용서하되 그 이름은 기억하라고 하지 않습니까"라며 받아치는 게 은근히 웃기다. 시작 직전에는 같이 있는 로버트 맥나마라가 케네디에게 남기실 유언이라도 있냐고 묻자 그걸 또 덥썩 물어서 '우리 이 보잘것없는 부대에게 해줄 동기부여 한 마디라도 있냐'라면서 비꼬는 것도 개그.
제이슨 매튜스(Jason Matthews)가 크리스천 레너드(Christian Leonhard)와 함께 제작한 보드게임인 1960: 대통령 만들기에서는 잘만 하면 존 F. 케네디에게 승리하고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
심슨 가족: 스프링필드에도 캐릭터로 나온다. 근데 여러 대통령 캐릭터들이 있는데 닉슨만 유일하게 악당 항목에도 포함된다.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창작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1960년 대선에서 승리하여 제35대 대통령이 된다.[77][78] 그후 민권법 문제와 미국-독일-일본의 3파전 냉전을 겪는다. 그러다 1964년 초반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을 사퇴한다. 그후 부통령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직을 승계한다. 하지만 얼마 안가 케네디도 암살당하며 미국은 극심한 혼란을 맞게 된다.
위와 동일한 게임의 창작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와 해당 모드의 확장 모드인 카이저리덕스에서는 미태평양합중국으로 플레이 하다보면 1952년에 대선후보로 등장하며 당선 시킬수 있다.
8.6. 기타
닉슨이 나오는 오페라도 있다. 현대음악 작곡가 존 쿨리지 애덤스의 1987년 오페라 데뷔작인 <중국에 간 닉슨>(Nixon in China)에 주연으로 등장한다. 1972년 닉슨의 중화인민공화국 방문을 소재로 했으며, 당연히 영부인 팻 닉슨, 헨리 키신저, 마오쩌둥, 장칭, 저우언라이도 함께 등장한다. 정치적인 사건을 주제로 했지만 분위기는 코믹한 편으로 현대 오페라의 화제작으로 손꼽힌다. 여기에 사용된 곡을 편곡한 The Chairman Dances는 게임 문명4와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 아이 엠 러브에 삽입되었다.크리피파스타 위키인 SCP 재단에서는 SCP-2736으로 등록되었는데, 이 SCP는 그가 상원의원 당선 후인 1951년, 보헤미안 그로브[79]에서 어떤 비밀의식을 통해 정치적 욕망은 사라지고 인간성만 남은 평범한 인간 닉슨과 정치적 욕망으로 똘똘 뭉친 권력의 화신 닉슨으로 나뉘어버렸다는 고인드립스러운 SCP이다. 즉 우리가 아는 대통령 닉슨 자체가 케테르급 SCP였다는 것이다. 마지막에 떡밥으로 냉전기 막바지 4명의 대통령[80]들을 암시하는 것은 덤이다.
워치맨이나 퓨쳐라마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파시스트", "독재자" 등등의 비판을 많이 듣던 인물이다. 미국의 탐사보도 전문기자이자 라스베가스의 공포와 혐오의 원작 소설가로 유명한 헌터 S. 톰슨은 닉슨이 죽자 추모기사를 썼는데, 말이 추모기사지... 제목부터가 He Was a Crook (그는 사기꾼이었다). 다시는 미국 땅을 밟지 못하게 시체를 바다 저 멀리에 수장시켜야 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이처럼 당시 3선까지 확정될 정도로 잘 나가던 대통령임에도 본인의 탐욕과 편집증이 일으킨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스스로 몰락하고 죽은 이후에도 계속 까이는 닉슨을 보면 소탐대실이란 말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준다.[81]
9. 여담
- 중국 방문 중 저우언라이와 함께. 만찬을 위해 영부인, 키신저와 함께 젓가락질을 연습했다. 이때 건배주가 마오타이주였는데 마시고 눈물을 찔끔짰다고 알려진다. 사진에는 잘렸지만 옆에는 4인방의 일원인 부총리 장춘차오가 앉아 있었다.
- 당은 다르지만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을 대단히 존경해서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윌슨이 사용한 책상을 백악관으로 가져왔는데 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항상 닉슨의 팔꿈치에는 책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너무 낡은 책상이라서 그랬는지 백악관 직원이 마호가니로 새롭게 꾸몄는데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그 직원을 "빌어먹을. 시키지도 않은 짓을 왜 했나? 난 다른 대통령들처럼 바로 이 자리에 나의 흔적이 남기를 원한단 말일세!" 이렇게 갈궜다.
- 캐나다의 피에르 트뤼도 수상에 시비를 걸었다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발전소를 끊기면서 미국판 잠가라 밸브에 굴욕을 당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그가 대통령이 되기 이전인 1965년의 일이다.
-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손자가 이 사람의 사위다.[83][84]
- 많은 사람들은 모르지만 1974년 그에 대한 암살 기도가 있었다. 그것도 백악관에 비행기를 충돌시키려는 계획으로. 무직자였던 새뮤얼 비크(Samuel Byck)는 닉슨의 정치에 불만을 품고[85] 여객기를 납치하려 했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미국 대통령 암살(기도)범들 중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뮤지컬 어쌔신에서는 꽤 비중있게 다루어진다.
- 미국의 대통령들은 천주교도인 케네디와 조 바이든 두 사람을 빼면 모두 개신교도다. 그래서 이들도 일요일이면 예배에 참석해야하는데, 대부분 백악관에서 가장 가까운 라파예트 광장에 위치한 세인트 존 교회를 이용한다. 그래서 이곳은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 예배가 열리기도 한다. 여기서 대통령이 성경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선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와 바이든 외에는 유일하게 여기서 취임식 예배 자체를 거절한 대통령이 있는데 바로 닉슨이다. 72년 선거 승리 후 세인트 존에서 예배를 거부한 것. 이 조짐은 이미 1969년부터 보였는데, 닉슨은 '68년 선거 승리 후 대통령으로써 당연히 일요일 예배에 세인트 존 교회로 출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백악관 내부에 목사를 초청해 예배를 보는 것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보수 기독교 우파의 본진급이었던 공화당원이었음에도 기독교 목사들을 비롯한 주류 기독교와 매우 사이가 나빴다.[86] 참고로, 재임기에 이런 식으로 세인트 존 교회 출석을 거부한 미국 대통령은 닉슨 외에도 1명 더 있는데, First Presbyterian church(일리노이 스프링필드 소재)에서 예배를 봤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있다. 그런데, 세인트 존 취임 예배를 거부한 4명 중 현직 바이든을 제외한 누구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으며 그 방식도 암살, 암살, 하야라는 방식이었다.
- 닉슨은 생전에 언론을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에 즉석 질문을 받는 기자 회견을 거의 개최하지 않았다. 본 사진은 1970년 기자 회견에서 질문자를 지정하는 장면으로 특기할 만한 점은 이 회견에서 도널드 럼즈펠드를 대통령 고문으로 임명하였음을 밝혔고, 조지 H. W. 부시도 언급되었다는 것이다.
-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에 유일하게 2년 연속으로 꼽힌 인물이다.[87] 거기다 1973년 선정자인 존 시리카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담당한 판사였기에, 실질적으로는 3년 연속 선정인 셈이다. 닉슨이 1970년대 초 보여준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대통령들 중 대선에서 한 번 패했다가 재도전해서 당선된 유일한 대통령이다.
- 성격 때문에 생전에 가까이 지낸 친구가 거의 없었으며, 백악관에 있으면서도 취미 활동을 혼자서만 즐기는 일이 많았다. 정재계의 주요 인사와 어울린 케네디, 존슨과는 달리 장관들과 사이가 안좋았고, 자신이 오래 알고 지낸 극소수의 부하들과만 어울렸으며 케네디, 존슨 시절 흔했던 여비서와의 염문도 거의 없었다. 이런 저런 일화들을 조합하자면 자발적 아싸였던 것 같다. 예외적으로 존 코널리 재무장관, 존 N. 미첼 법무장관과는 가까운 사이였고, 론 지글러 대변인과도 친하게 지냈다. 헨리 키신저와 영혼의 단짝처럼 미디어에서 묘사되곤 하지만 사실 닉슨은 키신저를 엄청나게 싫어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공적인 일이 아니면 단 한번도 키신저를 만나거나 연락하지조차 않았다고 한다.
- 가장 좋아하는 취미활동은 의외로 볼링이었다. 백악관 지하에 트루먼 시절 지어진 링 1개 짜리 볼링장이 있는데, 닉슨은 이곳에서 종종 홀로 볼링을 쳤으며 혼자놀기의 달인급이었다고 한다. 그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볼링을 치면서 화를 풀었고, 퇴근한 후나 점심 시간 때 종종 지하로 내려와서 볼링을 쳤다. 직원들과 볼링을 칠때도 있었지만 닉슨의 성격 상 직원들이나 닉슨이나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닉슨이 실크 해트를 쓴 것은 부통령 시절로, 당시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실크 해트를 착용했기 때문에 같이 착용했던 측면이 있다. 케네디도 실크 해트를 썼고, 린든 B. 존슨이 그 전통을 끝장냈다.
- 연쇄살인마 존 웨인 게이시의 그림에 사인을 남겼다. 물론 닉슨은 이 그림이 단순한 화가의 그림인 줄 알았고, 이는 이 그림에 사인한 다른 유명인들도 마찬가지다.[88]
- 출생년도를 보면 린든 B. 존슨(1908년 생) 로널드 레이건(1911년 생)보다 어리며, 제럴드 포드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닉슨이 포드보다 5개월 차이로 먼저 태어났다. 제럴드 포드, 존 F. 케네디는 그보다 늦게 태어났다.
- 아내인 팻 닉슨은 1살 연상이다. 1938년에 만나 1940년 6월에 결혼했다. 둘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연애편지가 공개되었다. 아내와의 금슬이 좋아서 항상 아내와 다닐 정도로 각별했다. 특히 아내 팻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닉슨은 아내의 장례식장에서 흐느끼며 울 정도로 크게 슬퍼했다. 나중에 아내가 사망한 지 10개월 뒤에 닉슨도 사망한다.
- 강경한 반동주의자 이미지로 고전적 자유주의자나 보수자유주의자라는 오해가 있으나, 전형적인 케인스주의적 경제정책을 폈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주의자와 거리가 먼 인물이며 보수자유주의도 학술적으로 명시된 래퍼런스를 찾을 수 없다. 반면, 남부전략이나 과거 매카시즘 시대의 커리어 등을 보면 사회자유주의자도 아니다 미국에서 그는 그저 온건 보수주의자로 분류 될 뿐 절대 자유주의자가 아니다.[89] 애초에 이 당시에는 기민/기사련이 장기집권한 서독, 자민당이 장기집권한 일본, 기민당이 장기집권 한 이탈리아처럼 보수정당이 장기집권한곳에서도 케인지언식 경제정책을 펴면서 경제성장을 했을때였고,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도입으로 우경화된 공화당과는 궤가 달라서 그럴뿐이다.
- 율리시스 S. 그랜트와 같이 임기 도중 전직 대통령의 장례를 가장 많이 경험한 대통령이다.[90] 이로서 린든 B. 존슨 사망일인 1973년 1월 22일부터 리처드 닉슨 사임일인 1974년 8월 9일까지 약 1년 반 동안은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이 없는 마지막 시대가 되었다. 이후 50여년이 지난 현재 당분간은 깨지지 않을 기록. [91][92]
- 정작 닉슨 본인은 퇴임 후 20년간 상대적으로 장수하면서 그의 장례식에는 후임인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의 모든 전현직 대통령이 참석했다. 퇴임 후 4년만에 서거하였고 현직 닉슨만이 남아 애도한 전직 린든 존슨과 대비되는 부분.[93][94]
- 꽤나 독특하게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케첩 뿌린 코티지 치즈였다. 매일 아침마다 코티지 치즈를 먹었으며, 백악관에서 사임하기전 마지막으로 먹었던 음식도 우유 한잔과 통조림 파인애플에 코티지 치즈를 얹은거였다.
- Happy Together(1967)로 유명한 터틀즈가 1970년 해체하기 전 마지막 공연을 백악관에서 했는데, 이는 리처드 닉슨의 딸 트리샤가 가장 좋아하는 그룹이 터틀즈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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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키피디아[2] 위키피디아[3] 위키피디아[4] 위키피디아[5]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손자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와 결혼했다.[6] 휘티어 고등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여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집안의 경제 사정으로 인해 집 근처 휘티어 칼리지에 들어갔다. 이후 휘티어 칼리지를 숨마쿰라우데로 졸업하고 전액장학금을 받아 듀크 대학교 로스쿨로 진학해 3등으로 졸업했다.[7] 당시에는 법무박사 학위였으며 1960년대 이후로는 J.D.로 변경되었다. 현재 미국에선 쓰이지 않는 학위이며 국제적으로 보면 법학학사로 쓰이는 국가들이 존재해서 헷갈릴 수 있다.[8] 1942년부터 1946년까지 해군에 복무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9] #[10] #출처[11] 이때부터 대통령 취임 선서가 끝나고 곧바로 Hail to the Chief를 연주하는 관례가 생겼다.[12] 대통령 신분으로 촬영된 마지막 사진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백악관을 떠나 사저로 돌아가기 전에 촬영된 사진이기 때문이다. 불명예스러운 퇴임이지만 오랜 법정다툼을 끝내고 사저로 돌아가서 기분이 홀가분한지 밝게 웃는 인상적인 모습을 남겼다.[13] 하지만 이미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은 닉슨의 이 말은 국민들에게 신뢰를 구걸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게 된다.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 말을 한 순간 닉슨은 전 국민에게 사기꾼으로 남게 되었다며 프레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14] 오일쇼크의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가 닉슨의 금태환 중지 선언으로 인한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로 인한 달러의 평가절하 때문이었다. 다만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는 베트남전쟁으로 과도한 달러를 찍어낸 존슨 정부가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으며, 닉슨의 금태환 중지 선언은 그 뒷처리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다.[15] 이후 조지 H. W. 부시와 조 바이든이 부통령 재선 + 대통령 재선에 도전했으나 둘 모두 대통령 재선을 이루는데에 실패했다.[16] 어린 시절 닉슨이 부모의 사업으로 잠시 소련에 살았다라는 루머가 있는데, 근거 없는 뜬소문일 뿐이다.[17] 사실 닉슨도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다. 1944년 1월 부건빌에 배속되었을 때 일본군의 공습을 경험했는데 동료들과 함께 벙커에 들어가서 피신했었다. 벙커에서 나오고 난 뒤에 확인해보니 불과 30여 미터 부근에 크레이터들이 여러개 생겨났고 텐트는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한다.#[18] 당시 지역구는 캘리포니아 제12구. 닉슨의 당선 당시에는 로스앤젤레스 동부 지역이 관할 구역이었으나, 2013년 이후로는 샌프란시스코로 관할 구역이 바뀌었다. 참고로 캘리포니아 12구의 현역 의원은 하원의장으로 유명한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19] 이건 알저 히스 사건에서도 재반복된다.[20] 후에 체커스는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닉슨 사후 부부 묘지 옆으로 이장되었다.[21] 연설의 초반부는 자신의 재산 내역과 정치 생활에 대한 해명이 핵심이고 후반부는 대립하던 민주당에 대한 반박과 역공을 펼치는 내용이다.[22] 1952년 9월 23일 방영[23] 이 연설의 이름의 유래가 되기도 하는 핵심적인 문장이며 18,000달러의 후원금을 받은 것은 사실인 것을 인정하며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지지자로부터 받은 강아지는 선거법 위반이지만, 두 딸들이 너무 좋아하니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을 정면돌파한 것이다.[24] 미드 매드맨에서 이 광고와 케네디의 광고를 비교해서 보는 장면이 있는데, "어휴 ㅉㅉ 당장 꺼버려"등의 반응이 튀어나오는데,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 진부하고 지루한 내용이기 때문. 심지어 8년 전 아이젠하워의 광고는 TV에서 사실상 최초로 만들어졌던 대통령 후보 홍보영상인데도 불구하고, 에니메이션과 후크송을 결합해 아이젠하워의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각인시킨 광고였다.[25] 패배한 원인은 먼저 tv에서의 케네디 모습이 닉슨보다 잘생기고 자신감이 많은 모습이 유권자 표를 케네디로 향하게되었고 막판 아이젠하워 정부에 평가에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닉슨이 패배를 한거다.[26] 라디오로 들은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케네디의 부통령 후보였던 린든 존슨이다. 나중에 존슨이 회고하길 이 토론을 라디오로 듣고 "쟤(케네디) 토론 완전 망쳤구먼!(The boy's blown it!)"이라고 한탄했다고 한다.[27] 이후 도합 4선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내는 제리 브라운의 아버지.[28] 이때 레이건이 꺾은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바로 62년도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을 꺾고 재선된 팻 브라운이었다.[29] 본선에서는 배리 골드워터를 최대한 도와주었다.[30] 공교롭게도 이 분 역시 부통령을 지냈다. 현직 부통령과 전직 부통령의 대결이었던 셈이었다.[31] 남부 출신으로 노골적으로 인종차별과 분리를 옹호해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민주당이 우세했던 남부지역의 표를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당시 미국 독립당의 부통령 후보가 그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였다.[32] 여담으로, 이 선거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정치 참여의 계기가 되었다. 그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당시 벌어진 이 대선의 TV 토론을 입당 사유라고 회고했던 게 문제. "나는 당시 자유시장과 자유기업, 그리고 작은 정부를 주장했던 닉슨에 비해 험프리가 사회주의에 더 가깝다고 느꼈다."라며 "나는 그때부터 주욱 공화당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앞 주석에서 보았듯이, TV 토론은 없었다. 이 사실이 드디어 2003년 드러났지만, 슈워제네거는 별말 없이 묻어버렸다.[33] https://cdnc.ucr.edu/?a=d&d=DS19690618.2.44&e=-----en201txt-txIN--------[34] 45초부터 나오는 음악은 미 대통령 찬가(Hail to the Chief).[35] 사실 이미 케네디 때부터 무너질 조짐이 보였다. 결국 뉴딜연합은 JFK의 후임자인 LBJ가 흑인 민권 운동의 손을 들어준 시점부터 남부 백인 보수층이 이탈하며 종지부를 찍었다. LBJ본인도 민권법을 서명할 때 "우린 지금 남부를 잃었다" 라고 말을 할 정도로 본인의 행동이 미국 정치 구도에 큰 변화를 불러올 걸 알았음에도 서명한 것이다.[36] 닉슨과 레이건 모두 서부 캘리포니아에 지역구를 두었다.[37] 8-0.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관은 닉슨 정부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서 심리에 참여하지 않았다.[38] 심리에 참여한 8명의 대법관 중 3명은 닉슨이 임명한 대법관들이었다. 삼권 분립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39] 아직 국민적 분노가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행된 닉슨 사면과 베트남 전쟁 패배, 경제 침체 등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은 포드는 결국 2년 후 대선에서 지미 카터에 패하면서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게 된다.[40] 결국 닉슨은 그 말 그대로 탄핵위기에 처했고 자진사퇴로 겨우 불명예를 피하게 됐으므로, 자기 결정에 대한 책임은 진 셈이다.[41] 위의 인터뷰에서도 '애매한 상황에서 대통령의 결정으로 인해 실무자들이 위법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42] 애초에 대통령제 자체가 임기 기간에는 대통령이 국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필요하면 전쟁도 강행할 수 있는 체제다. 트럼프가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당시 시위대에게 군대 투입을 경고한 건, 아예 작정하고 장기전을 한다면 모를까, 단기적으로 미군의 일부를 투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하는 정도는 불법만 아니라면 의회의 동의 없이도 트럼프가 독단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3]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문서 참조.[44] 코널리는 암살 사건의 배후로 종종 지목받곤 하는 두 인물인 리처드 닉슨의 측근이자,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고향 친구였고,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당시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정치가였다는 점에서, 그가 암살 사건에 관여되어있다는 음모론도 꽤 있다.[45] 그 이전에 나온 대통령 5명(32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부터 36대 린든 B. 존슨까지.)은 모두 10위안에 드는 평가를 받았으며, 대공황 당시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 이후 10위안에 들지 못한 대통령이 되었다. 덤으로 후버도 하위권 평가를 받고 있다.[46] 1980년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던 로널드 레이건이 임기 후반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핵 군비감축에 합의하는 등, 화해 모드로 돌아섰던 사례가 대표적이다.[47] "백악관 자문 존 에릭먼이 의료서비스를 적게 제공하는 만큼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를 만들면 알아서 적게 공급할 것이라며 이 제도를 제안했고, 닉슨이 좋다고 해서 통과됐다"는 견해다. #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의 주장[48] 비슷한 경우로 PPO(주치의 중심)이 있다. HMO는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까지 성장하다가 이후 PPO, CDHP(소비자 주도 건강플랜), EPO(전속의 플랜) 등이 등장하면서 비율이 줄어들었다. # 건강보험의 진화와 미래, 보건미래포럼 HMO는 초기엔 비영리였지만 이후로 영리 HMO가 늘어나면서 우리가 아는 그런 문제들이 발생하는데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닉슨이 후대의 문제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49] 닉슨은 대통령으로 모셨던 아이젠하워, 자신의 부통령이었던 포드, 그리고 그 부통령으로 재임한 넬슨 록펠러로 이어지는 공화당 온건주의 라인의 대표주자였고, 레이건은 로버트 A. 태프트를 중시조로 하여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온 배리 골드워터로 이어지는 공화당 보수 강경파 라인이었다. 참고로 넬슨 록펠러는 십수년 동안 뉴욕 주지사를 지낸 인물로 바로 그 록펠러 가문 출신이다.[50] 과거 탈레반이 미국의 협상요청에 일체 응하지 않으면서 "너희는 시계가 있지만 우리는 시간이 있다"고 하는 것과 유사했다. 그리고 2021년 탈레반이 아프간 전역을 석권하며 현실이 됐다.[51] 사실 휴전협정은 조인 후에도 거의 지켜지지 않았고, 국경지역에서는 계속 남북 베트남군의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기 때문에, 휴전협정을 파기했다고 보기도 힘든 그런 상황이었다.[52] 케네디는 모교인 초트 고등학교 졸업 성적도 특권층만 다니는 엘리트 사립학교인 점을 감안해도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미국의 명문 사립 대학은 지금도 특권층의 입학이 수월한 편이기는 하나 이 당시는 대입에 연줄이 훨씬 노골적으로 작용했던 때였다.[53] 택시가 정차했을때 한 보행자가 택시 기사에게 횡설수설하며 대통령이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했다.[54] 그러나 닉슨은 케네디와 달리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으며, 적어도 초선 임기는 마치고 재선 당시 사임했으며, 케네디가 죽은 뒤 30년도 더 지나 죽었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낫다.[55] 이런 냉랭한 대접에 주한 미 대사는 급히 장관들과의 만찬을 추진했는데 박정희는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해버렸다고 한다. 출처는 이동원 외무부장관이 쓴 '대통령을 그리며'(고려원, 1992, 146~147쪽)에 나온 내용을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권(33쪽)에서 재인용했다.[56] 이를 보여주는 것이, 이후 닉슨은 일본에 들러서는 상당한 환대를 받았기 때문이다.[57] 주한미군 역사상 진짜로 주둔군 규모가 감축된 시기는 이때 뿐이다.[58] 역시 강준만의 책(34~35쪽)에서 이동원의 책(147~148쪽)을 재인용한 내용이다.[59] 동시기에 아시아 순방도 여러번 한 것을 보면 아마 닉슨이 아시아 정세에 꽤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60] 그런데 정작 그는 대통령으로서 재직할 때는 한 번도 방한하지 않았다. 방한했을 때 그는 부통령, 개인, 전 대통령 자격으로 한 것이다.[A] 대통령 후보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A] [63] 1974.8.9 불명예 사임[64] 물론 사실과 뒤섞은 영화적 허구다.[65] plumbers; 실제론 특별 도청팀의 별명이었다.[66] 수상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했다.[67] 프로스트는 월터 크롱카이트, 마이크 월리스(60분)같은 시사 보도 언론인이 아니라 주로 토크쇼와 같은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손석희가 아닌 김구라가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특집 인터뷰를 한 셈이었다.[68] 영화판에서는 3선 대통령이다.[69] 실제로는 조지 워싱턴이 딱 2선만 하고 스스로 물러난 뒤로 대통령은 2선 초과를 하지 않는게 미국 정치계의 불문율이었으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전무후무한 4선을 기록한 이후, 미국은 헌법에 2선 초과를 할 수 없다고 헌법을 수정해버리고야 만다. 그런데도 닉슨이 코믹스에선 5선, 영화에선 3선이나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닉슨이 자기 좋자고 헌법까지 수정할 정도로 미국이 미쳐돌아가고 있다는 거다. 상기의 루즈발트는 4선 당시 연임을 제한하는 규정도 없어서 그렇게 해도 되는 법이었고 정상적으로 멀쩡히 선거를 치러서 4선에 당선된 것이었고 선거 때 마다 어려운 선거를 치렀다. 후반기 임기들은 대통령 재직중 2차 세계대전이라는 엄청난 세계 대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미국 본토가 침공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었으므로 최고사령관 교체에 회의적이었던 국민들의 판단도 컸다. 다만 닉슨의 경우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불법을 저질렀기에 더 나아가 법을 뜯어고쳐서 연임하는 독재자로 묘사된 것으로 보인다.[70] 이 때 시중드는 주인공과 대화를 원하는 눈치였으나 주인공은 무미건조하게 더 필요한 거 없냐고 업무상 할 말만 하여 은근히 반감을 드러낸다.[71] 키신저와 회의할 때 뒷모습이 잠깐 등장하긴 한다.[72] 다만 이건 프라이가 닉슨이 든 유리병을 깨먹어서다.[73]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작중 대통령은 데이비드 파머, 웨인 파머와 대니얼스가 민주당원이고 킬러와 테일러, 헬러가 공화당원이다.[74] 초반에 리버 송이 베트남 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같은 닉슨의 행적을 설명할때 닥터가 별로라고 디스한다. 리버 송이 이때 발끈한거보면 리버 송은 좋아하는 모양.[75] 사실 부활한 리처드는 복제인간이었다.[76]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를 배경으로 한 맵이다.[77] 이 세계관에서는 2차대전때 나치가 승리한 세상이고, 미국은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겪는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선거연합을 구성하여 공화민주연합을 창당했다.[78] 부통령은 존 F. 케네디[79] 실제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넓고 우거진 숲으로, 음모론에 의하면 이곳에서 상류층들의 정기적 비밀모임이 이루어진다고 한다.[80] 리처드 닉슨 본인, 제럴드 포드, 지미 카터, 그리고 로널드 레이건.[81]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 평가 받는 워런 G. 하딩도 매체에서는 닉슨보단 덜 까인다.[82] 왓치맨에서는 코미디언을 사주해 케네디를 암살했다고 암시하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에선 오프닝에서 코미디언이 숨어서 케네디를 저격한 진범이라는 장면이 나온다.[83] 그 사위가 바로 현재 미국 대통령 전용 별장이 된 캠프 데이비드의 유래가 된 데이비드 아이젠하워다.[84] 참고로 닉슨은 아이젠하워 시절에 부통령이여서 할아버지와 장인어른이 같이 있는 모습을 봤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85] 이전에도 시크릿 서비스에 협박편지를 보내거나 조너스 솔크나 레너드 번스타인 등에게 녹음 테이프를 보내기도 했다.[86] 이는 흙수저 닉슨의 컴플렉스 때문이었다는 썰이 있다. 닉슨은 이들 미국의 주요 대형교회 목사들에게 당신들은 목사인척하고 정치를 하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깐 적도 있다.[87] 1971년 닉슨 단독, 1972년 닉슨/키신저.[88] 유명 야구선수 등등 많은 사람이 사인했다.[89] 여기엔 특유의 정치 어감 문제도 있는데, 현대 미국에서 자유주의는 주로 진보주의/좌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단적으로 조 바이든 같은 온건한 진보 정치인 뿐 아니라 버니 샌더스,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과거의 조지 맥거번, 유진 매카시 등 급진 좌파 / 강성 진보 정치인도 뭉뚱그려 "자유주의자"라고 표현한다. 즉 미국 정치판에서 중도~중도우파를 보수주의가 아닌 자유주의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 표현이다.[90] 그랜트와 같이 전직 대통령 3명(그랜트 재임시절 프랭클린 피어스, 밀러드 필모어, 앤드루 존슨, 닉슨 재임시절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해리 S. 트루먼, 린든 B. 존슨)이 임기 내 사망하였다. 둘 다 재선에 성공하긴 했으나 닉슨은 임기 도중 사임한 걸 감안하면 임기 길이와 전직 대통령 사망 인원에 비례할 시, 닉슨이 더 많다.[91] 만약 워터게이트 사건이 없었다고 가정하면 4년동안 생존 중인 전직 대통령이 없을 뻔했다. 왜냐면 존슨 사망일이 닉슨 2번째 임기 시작 이틀 뒤(1973년 1월 22일)였기 때문이다.[92] 달리 말하면 닉슨의 사임과 함께 한 세대를 풍미한 트루먼~닉슨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후 공화당 내에서도 레이건이 대두한 것은 물론이고, 민주당은 단임한 지미 카터를 제외하면 빌 클린턴까지 열세의 암흑기를 보내게 되는 장기 80년대가 시작된 것도 닉슨의 사임이 기점.[93] 이들이 재임 순서 순으로 도열해 차례로 카메라에 잡히며 닉슨 이후 20년을 주마등으로 보여주는 절묘한 광경은 영화 닉슨(1995)의 마지막 장면에도 그대로 수록되었다.[94] 지미 카터의 장수로 포드는 물론 레이건, 부시까지 먼저 서거하는 등 닉슨 사후로 후임자 전원이 애도하는 풍경도 이후로는 당분간 볼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