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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3:52:24

경제왕 연산군

경제왕 연산군
<nopad> 파일:경제왕 연산군.jpg
<colbgcolor=#ae5b54,#ae5b54><colcolor=#e9d7a2,#e9d7a2> 장르 대체역사, 빙의
작가 라구.B.P
출판사 문피아
연재처 문피아
네이버 시리즈
연재 기간 2024. 05. 08. ~ 연재 중
이용 등급 전체 이용가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특징5. 패러디 요소
5.1. 1~10화5.2. 11~20화5.3. 21~30화5.4. 31~40화5.5. 41~50화5.6. 51~60화5.7. 61화~
6. 등장인물
6.1. 조선
6.1.1. 왕실6.1.2. 문신6.1.3. 무신6.1.4. 기타
6.2. 명나라6.3. 일본
6.3.1. 조정6.3.2. 영주
6.4. 포르투갈
7. 설정
7.1. 사용되는 경제학 개념7.2. 조선 전기의 사회상 고증
8. 개변된 역사9. 평가10.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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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 웹소설. 작가는 라구.B.P. 이 작품이 데뷔작이다. 약칭은 경제연산.

2024 지상최대 웹소설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이다.

2. 줄거리

젊음의 치기로 복수전공이라는 잘못된 선택을 한 사학과&경제학과 학부생 박경식. 이제 4학년이니 이 고생도 곧 끝이다!

급한 마음에 사학과 졸업논문을 날림으로 썼는데, 교수가 갑자기 부른다. 교수를 따라갔더니 대학원 오라는 권유가 아니라 자기가 산신령이라고 커밍아웃해오는데?!

정신을 차리니 조선의 왕으로 즉위해 있다.

조선의 파이어족이 되기 위해 조선의 경제부터 정치까지 모든 걸 뜯어고치기 위한 박경식의 분투가 시작된다.

3. 연재 현황

2024 지상최대 웹소설 공모전 참가작으로, 문피아에서 2024년 5월 8일부터 연재를 시작했다. 처음 연재시간은 매일 저녁 6시였다. 주 5일 연재. 평일 연재로 공지하고 있으나 주말에도 올라오는 경우가 있었으며, 연재시간이 자주 지연되거나 바뀌기도 한다. 작가의 자료조사나 건강 문제 때문인지 휴재도 종종 있는 편이다.

2024년 7월 17일, 2024 지상최대 웹소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2024년 8월 2일, 연재시간이 저녁 9시로 변경되었다.

2024년 8월 16일, 작가가 요로결석으로 인하여 입원한 관계로 3일간 휴재하였다.

2024년 9월 23일, 연재시간이 오전 9시로 변경되었다.

2024년 9월 26일, 작가가 다시 30일까지 연재를 중단했다.

2024년 10월 14일, 작가가 다시 휴재를 알렸다. 10월 16일 연재가 재개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당분간 연재 주기가 불규칙해질 것임을 알렸다.

4. 특징

조선에서의 짬을 어느 정도 먹은 경식은 합리적 경제적 동물(Homo economicus) 조선인의 행동 패턴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철 값이 올랐을 때, 이 철로 된 무기랑 갑옷들을 병사들에게 나눠주면 어떻게 될까?

병사들은 분명 지급받은 철갑의 찰을 팔아먹는다.
29화, 「아니 내 10만 철기가!!!」
원래대로라면, 조선인들에게 무기를 쥐여줘봤자 엿 바꿔먹고 팔 것이다. 심지어 적에게 팔기도 한다.

이 오진[1] 주민들도, 공납이 폐기되기 전이었다면 이 철을 야인들에게 팔아서 초피를 산 후 공납으로 바쳐서 빚더미에 앉는 삶을 이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오진 주민들이 철을 야인들에게 주고 초피를 받는 것보다는, 철을 야인들 목에 대어 주고 초피를 받는 게 더 경제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경제학 서적에도 나오지 않는 지식이고 경식도 따로 전수하지 않았지만, 경제학의 시초 대영제국의 역사서에는 자주 나오는 경제적 지혜를 함경도민들은 스스로 체득한 것이다.
32화, 「진격의 세종(The conqueror)
흔히 이데올로기종교의 자식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사고방식, 생활 양식, 믿음, 추구하는 가치 등등.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틀을 규정한다는 점에서 같다.

기독교에서는 겸손한 자, 빈민에게 자선을 베 푸는 자, 다른 사람에게 온화한 자, 박해를 인내 하는 자, 정절을 지키는 자, 절제하는 자, 근면한 자를 이상으로 여긴다.

기독교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신앙이다.

유교에서는 사농공상이라는 직역에 성실한 자, 왕과 신하라는 의에 충성하는 자, 부모와 자식이라는 인륜을 다하는 자를 이상으로 여긴다.

유교는 인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윤리를 믿는다.

자유주의에서는 억압에서 벗어난 자, 스스로 하고 싶은 걸 하는 자, 그러면서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질서를 지키는 자를 이상으로 여긴다.

자유주의는 한 명의 인간이 한 명의 사람으로 존재함을 믿는다.

그래서 자본주의자유주의에서 나왔다. 오직 자유주의만이 개인의 욕망을 긍정한다. 자본주의는 욕망에서 자란다.

모든 종교는 욕망을 부정했지만, 미처 종교가 억누르지 못한 욕망이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향신료에 대한 욕망, 영국의 차에 대한 욕망, 미국의 땅에 대한 욕망...

그러나 욕망이 반드시 자본주의를 낳지는 않는다. 잘 작동하는 시장 경제가 기반이 될 때 비로소 욕망은 그 잠재력을 발휘한다.
106화, 「욕망의 세계사와 조선 1 - 음식」
연산군에게 빙의한 사학과+경제학과 복수 전공의 대학생이 전공했던 지식을 활용해 조선을 뜯어 고친다는, 전반적인 이야기 구조 자체는 전형적인 영웅사관 기반의 현대인 천재론적인 대체역사물이다. 작중에서도 간간이 이세계물 드립을 치며, 맛있다는 개념을 모르는 엘프 같은 것을 거론하며 풍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본작에 강력한 개성을 부여하는 것은, 제목 값을 하는 높은 수준의 경제사회적 묘사와 경제학을 활용하는 주인공의 모습이다. 기존의 대체역사물에서는 두루뭉술하게 지나가는 조선의 거시, 미시경제와 민간 생활상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 묘사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제목에 경제가 들어간 웹소설 중에 경제 관련 내용이 있는 게 없다'는 게 일반적인 웹소설 독자들의 인식일 정도로 경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 적은 것이 현실이지만, 본작은 정말로 경제 관련 내용이 매우 디테일하게 다뤄진다. 이에 독자들은 학습만화를 보는 것 같다거나 노빈손 시리즈를 떠올리기도 할 정도다. 경제를 소재로 하는 대중소설 기성작 중에서는 늑대와 향신료와 자주 비견된다.

또 일반적인 빙환트로 스타팅하는 대체역사물에서의, 주인공의 개혁이 주인공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편의적인 묘사를 뒤집어서, 정책이 '합리적인 경제적 주체'로서의 전근대 조선인들과 만나며 주인공의 의도랑 전혀 다르게 굴러가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주인공이 도입한 개혁들을 조선인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꾸역꾸역 빈틈을 찾아 악용하고, 현대적 개념을 이용해서 개혁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막상 개혁이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사실 매우 전근대적인 이유 때문[2]인 등, '먼치킨 용사가 개혁을 해도 사실은 이런 부작용이 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을 최대로 발휘한 듯한 모습이다. 일반적인 웹소설에서 이것이 고구마 전개가 된다면, 이 소설은 고구마를 아예 고구마맛탕으로 요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주인공이 해내는 개혁들 역시 당대 조선에 가능한 것인지, 매우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데, 조선 당대에 있던 제도들을 적절하게 활용하고 개조하여 근현대의 제도와 유사하게 수렴하게 만드는 전개가 계속되어서 설득력이 있는 것 역시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들조차도 부작용 사건들이 계속되는데, 부작용 부분조차도 역시 매우 디테일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또 이러한 고증들은 미주로 최신 논문들을 인용하며 고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어서 전개가 더욱 설득력 있어 보이게 한다.

조선 사회를 경제학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하여 일반적인 역사 매니아들의 관점과 정반대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를 다루는 대체역사물에서는 모내기를 도입하고 퍼트리는 경우가 많지만, 이 작품에서는 모내기를 노동생산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서 밭농사에 비해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논문과 구체적인 수치까지 동원해서 논증하고 조선에서 모내기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노동생산성이 낮은 것은 1인당 소득이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신 일본에는 모내기를 전파하고 장려시킨 다음 일본에서 쌀을 갈취하겠다는 결론을 낸다. 또 인구에 대해서도, 보통은 전근대 국가는 인구와 국력이 비례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체역사물에서도 인구를 늘리는 전개를 보여주려 하지만, 본작에서는 맬서스 트랩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해서 솔로우 모형에 따라 인구가 늘면 1인당 소득이 줄어든다며 산아제한을 시도하기도 한다.

즉,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경제사학과 산업 혁명의 원인에 대한 작가의 학문적인 수준의 관점이 깊게 녹아 있다. 본작에서는 중국이 그렇게 전근대시기에 규모의 경제를 발전시켰으면서도 산업 혁명에 왜 도달하지 못했는지 노동생산성 관점에서 설명하는 '대평형이론'을 언급하기도 한다. 중국의 경우 도시가 성장하면 사람들이 모여서 식량가가 상승하고 반면 도시의 공업 생산품들은 가격이 싸지면서 생산량이 증가하는데 처음 어느 정도는 문제가 없지만 식량가가 더 상승하고 공업품의 가격이 떨어지면 노동자의 임금을 줄일 수밖에 없고 식량가의 상승을 통한 농촌 노동자의 임금 상승과 도시 노동자의 임금 하락으로 인해 도시 노동자들이 고임금을 찾기 때문에 농촌으로의 하방이 이루어져 도시화와 산업의 발전을 막는다는 것이다.

경제사학적으로 보면 '1인당 노동생산성을 올리기 위해선 고도의 도시화와 공업의 발전으로 인한 분업을 하면 생산성이 복사가 된다'는 건 애덤 스미스부터 지적된 얘기고, 중국의 경우 단순히 생산성을 폭증시키는 기술 자체는 고대에 이미 여러 가지를 발견해놨다. 파종기와 쟁기를 합친 중국 농기구 누거만 해도, 기원 전인 한나라 시대에 만들어졌으며 이 덕에 전근대 당시 중국인의 1인당 농업 노동생산성은 16세기까지도 서양의 30배에 달했을 정도라고 한다.[3] 그리고 고도의 분업으로 생산성 높이는 건 고대 전국시대에 이미 때 해본 것으로, 진나라는 병사들에게 표준화된 갑옷이나 무장을 지급한 갑병을 양성하기도 했다.[4] 그런데 이 고도의 생산성이 유지되고 계속 발전한 게 아니라 진이 멸망하고 정부가 혼란 상태가 되니 한순간에 사라진다. 비단 진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역사를 살펴보면 이렇게 고도로 노동 생산성이 높아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전란이나 입구 압박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생산성 향상이 무산되어 버리는 역사의 순환 반복 케이스가 수두룩하며, 이것이 중국의 노동생산성을 정체화시켜 산업 혁명으로 가는 것을 실패하게 만들었다.

상기한 대평형이론에 따라 중국의 도시화 수준이 정체되고, 이를 통한 노동 생산성 향상 역시 어느 시점을 지나면 다시 감소하여 중국사 전반의 긴 흐름으로 보면 중국의 생활 수준은 어느 시점부턴 그저 정체되고 있으며, 심지어 감소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따지면 송원시대 이래로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명청시대에는 '정체'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고 인구가 늘었기 때문에 경제 규모도 증가한 것이지 1인당 생산성으로는 오히려 퇴보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시기에 기술의 발전이나 서구 등 외부세력의 교류가 있기야 했지만 각종 통계 그래프를 보면 중국의 1인당 GDP나 생산성은 명나라 중기 시기부터 청나라 때까지 거의 늘지 않았다. 서구권 학자들의 경우엔 송나라의 경제력을 높게 평가하는데, 앵거스 매디슨(Angus Maddison)은 1인당 GDP를 450달러로 추산해 당시 송나라가 세계 전체 GDP 비율 중 23%을 차지한다고 추산했고(#), 더 최근의 연구 결과에선 스티븐 브로드베리(Stephen Broadberry)가 1인당 GDP가 1,200~1,500달러 사이였다고 추산했다(#, 양측 자료 모두 1990년 달러가 기준이다). 산업 혁명 초인 1750년 영국의 1인당 GDP가 1,710 달러, 1800년엔 2,080 달러였다. 반면 이로부터 6~700여년 후인 청나라 건륭제 시대 말엽에 이르면 중국의 1인당 GDP는 겨우 조선과 비슷한 600 달러였고 동시기 네덜란드의 1인당 국민소득 2,609달러(1999년 가치 기준), 영국의 2,097 달러보다 훨씬 낮았다. # 이 때문에 당대 서구인들은 황실이나 일부 대도시만 화려했지 대부분 낙후된 중국 농촌의 실상을 보면서 중국이 썩어들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독 명청시대에 이렇게 유독 더 심해진 이유는 중국이 인구가 늘면서 전근대의 맬서스 트랩에 걸린 것도 한 몫을 하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무엇보다도 조선에도 영향을 미친 명청의 비효율적인 제도와 이를 성립시킨 잘못된 지도층의 의식을 주 원인으로 지목한다. 예컨데 실제로는 다른 나라와의 밀무역 등의 지하 경제가 성행하는데도 조공을 안 받아주면 그들이 조공무역을 못해서 명나라에 복종 의사를 보인다고 근거도 없이 생각한다는 식이다.[5] 명나라는 태조 홍무제부터가 원말명초의 혼란기의 파괴된 중원을 재건하기 위해 사실 본인조차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정말 있었기는 한 건지 의심스러운 소농민 자급자족 향촌공동체 복구를 이상으로써 평생토록 견지했고 결국 그 이상대로 명청시대의 발전 가능성을 서구한테 두들겨 맞기 전까지 그쪽으로 항구적 고정시켜 놓았다. 문제는 이런 체제가 혼란한 전후 재건기에만 시행된 임시방편의 군정책이 아니라 건국 시기 군주인 홍무제와 영락제 이후로도 시대 내내 지속적으로 견지된 것이 문제였고 초기에는 국가를 재건하고 외적의 침입을 제어하는 제도였던 이갑제, 위소제, 해금령은 곧 명나라 경제 발전의 심각한 걸림돌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그래도 세계적 발전 추세를 따라가던 송원시대 때와는 달리 명청시대는 해양력의 상실 등 여러 시대적 퇴보를 겪으면서 몰락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명나라는 그 거대한 사회의 물적운동을 정권의 의지만으론 통제할 수 없었기에 결국 은본위제가 성립되고 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되었지만 이에 영향을 받은 옆동네 조선은 진짜 '자급자족적인 향촌공동체'라는 작중 시대의 명나라가 생각한 유교적 이상을 상당 부분 실현했던 탓에 더욱 경제가 위축되었고, 이 결과물이 바로 작중에서 보여지는 조선 전기의 민간 경제였던 것이다.[6]

따라서 생산에만 집중했던 다른 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은 국가적 제도의 개선과 사회 여건의 변화를 통한 수요의 창출도 중요하게 여긴다. 중국이 궁극적으로 자생적 산업 혁명에 이르지 못한 것도 높은 생산성으로 뽑아져 나온 물건을 소비해줄 소비층이 있어야 지속적인 발전이 유지가 되는데 중국은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이유[7]로 일정 정도 국가경제가 발전하다가도 결국에는 선술했던 이유들로 노동자들이 축적한 자본과 임금이 적어지면서 결국 노동 생산성이 부족해지고 수요층이 줄어들어 이것이 정체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심지어 원래 역사에서 산업 혁명을 일으킨 영국도 곡물법의 예를 들며 자칫하면 산업 혁명이 이어지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곡물법은 영국에 수입되는 곡물에 관세를 매겨 지주들의 이익을 도모하며 전반적인 생활비용의 증가-가처분 소득 감소-소득의 감소로 인한 수요의 감소-제조업 수익 감소-국민들의 가처분 소득 감소-저축감소-자본의 축적 저하를 겪었다는 것이다.

작중에서 발생하는 문제도 그렇다. 용광로를 도입해서 이론적 철 생산량은 10배가 넘게 폭증하지만, 다른 작품과 달리 '철 생산이 늘어서 철 농기구를 많이 쓰게 되어서 농업 생산량도 늘었답니다' 같은 전개는 나오지 않는다. 되려 삼남의 경우 철 농기구가 있어도 경작할 충분한 밭이 없는 빈농이 많아서, 잘해야 호미나 팔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로 인해 의주 제철소는 철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음에도 수요가 없어서 철의 가격이 하락하자 일을 쉬는 모습을 비추는데, 철을 많이 생산해도 수요처가 없으면 철장들은 조금만 만드는 게 더 돈 된다고 생산성 혁신을 때려치려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반면 본래 역사에서 영국은 직물 등 소비재 중심으로 혁신이 있었고 그걸 소비해줄 중산층이랑 해외 시장이 있었고, 경식은 그 사례를 아니까 농업은 다소 소홀해도 직물 공업이랑 대외 진출, 중산층 양성에 전력을 쏟는다. 그래서 경식의 정책은 일견 흔한 미래용사물 같지만, 조선의 농본주의적 경제학과 그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반적인 역사 매니아들의 직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정책을 하기도 한다.

흔히 역사가 선형적으로 점진적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기술발전-사회 여건의 발전 등 모든 조건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순간, 기존의 낮은 생산성 발전과 느린 변화를 초월하고 혁명적 시대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결국 벽에 막혀 도돌이표 속에서 살아왔던 것이 인류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즉 이런 기술들이 꾸준히 개량되어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기 위해선 단순히 우월한 현대기술을 이용한 기물만 무조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 전반의 변혁이 필요하다.[8] 영국 역시 산업 혁명기 무렵에 이런 생산성을 계속 향상하는 기술들을 발견하는 동시에,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경제학자들이 이론을 정립해서 이 생산성 높이는 기술을 유지하는 사회를 만드는 법을 찾았기에 산업 혁명은 이 두 가지가 맞물려서 성공할 수 있었다.

작중 경식의 개혁에 사용된 기술은, 몇몇 사례들을 제하고 보면 이미 이전 시대~당대 중국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개발된 기술들로 첫 도입 자체는 어렵지 않은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수익성과 정책의 문제 등 사회적 제반 문제 때문에 효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경식이 제도를 뜯어 고쳐서 수익을 내고 투자를 유도하는 사회 구조를 만들고서야 기술들의 효용이 폭발해 조선 경제의 생산성이 극적으로 향상되는 장면들이 나온다.

단편적인 기술은 아무리 뛰어나고 혁신적이어도 사회나 세상을 바꾸는 것은 어렵지만, 경제 개발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가지고 제대로 된 사회 제도를 구성한다면 비로소 혁신적인 기술이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으며, 느릿하게 변화하던 전근대의 틀을 깨고 급격한 발전을 이룰 수 있고, 산업 혁명 역시 그 연장이라는 것이 본 소설의 주장인 것이다. 주인공 박경식은 단순히 현대인 천재론에 따른 영웅이 아니라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정확히 알고 이를 만들려는 인물이며, 이 소설은 대체역사물 웹소설의 틀을 빌려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산업 혁명은 어떻게 촉발되었고 어떻게 영국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 왜 영국 외 다른 국가에서는 이게 실패했는지 조선 전기 시대를 대입해서 고찰해 보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엄청 진지한 소설 같지만 의외로 문체는 매우 가벼운 편으로, 다양한 종류의 패러디가 뜬금없이 튀어나와 가볍게 웃으며 읽을 수 있다. 특히 오타쿠 관련 소재 개드립이 교묘하고 자연스럽게 삽입되어 있어서 알아본다면 더욱 즐겁게 볼 수 있다. 또한 웹소설 트렌드에 맞게 작품 내용이 너무 복잡하거나 어려워지지 않도록, 작중에서 거론되거나 사용되는 경제학 지식은 학습만화나 고등학교~대학생 교양 수준을 넘지 않는 정도를 유지한다.

심지어 경제학 지식 부분을 잘 이해 못한다고 해도, 코락스혁내취, 탐태창 이후로 유행하고 있는 블랙 코미디성 서술을 중간중간에 섞은 개그성 장면이 잘 삽입되어 있는데다가, 인터넷 밈이나 드립을 자연스럽게 잘 녹여넣는 높은 필력으로 독자가 지루하지 않게 서술하기 때문에, 마치 학습만화에서 이론 부분을 스킵하듯 경제학 파트를 넘어가며 보더라도 재미가 있다. 물론 곱씹으면서 보면 더 재밌다.

개그적으로 스토리를 전개하고 서술함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에 대해서 진지하게 현대적인 경제 이론을 접목시키는 매우 파격적인 작품이라서 조선에 억지로 현대 시사적 관점을 도입하는 작품 아닌가 하는 불안을 가지는 독자들도 있으나, 작중 사건들은 정말로 현대 경제 제도가 도입되었을 때 진짜 전근대 조선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을 위주로 전개하기 때문에 그런 억지 관점은 안 보인다. 그런데도 근현대부터 전근대까지 모두 풍자하는 서술 자체는 버리지 않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있다. 특히 작중 주인공은 박경식은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고, 내레이션은 또 그런 박경식을 계속 비판하는 구도라서 풍자의 균형이 절묘하게 맞는 것이 웃음거리. 예를 들어 혼분식 장려 운동 포스터 하나로 공산주의 국가들과 현대 대한민국을 동시에 풍자하는 절묘한 풍자력을 보여준다.

5. 패러디 요소

5.1. 1~10화

5.2. 11~20화

5.3. 21~30화

5.4. 31~40화

5.5. 41~50화

5.6. 51~60화

5.7. 61화~

6.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6.1. 조선

6.1.1. 왕실

6.1.2. 문신

6.1.3. 무신

6.1.4. 기타

엑스트라 같은 캐릭터들조차 작가가 실제 기록을 토대로 재창작하였거나, 최소한 이름이라도 빌려온 인물들이 많다.

실존 인물이면 ★ 표시, 이름만 빌려온 인물이면 ☆ 표시한다.

6.2. 명나라

전지적 시점에서 평하기로는 덩치 큰 조선. 거대한 영토와 그걸 가득 채운 막대한 인구는 어마어마한 저력을 가지고 있을 것처럼 보이나, 현실과 어긋난 제도와 부패 때문에 덩치에 비해 국력은 극히 약하다.

병력의 경우 건국 시절의 위소제를 유지 중인데, 장부상으로는 260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홍치제 시절에 재조사했더니 그 중 160만 명 이상이 탈영한 상태고, 남은 병력이 93만 명인데 그것도 전혀 훈련이 안 되어 있고, 탈영병을 잡기 위해 보내는 군관이 1만에 달하는데 군관들은 매 해 100명 남짓의 탈영병을 잡아온다는 나쁜 의미로 대륙적인 스케일이다.[43]

또 해금령과 상업 탄압 때문에 남중국에서 나는 막대한 물자가 북중국으로 전혀 넘어가지 않고 있으며, 남중국의 상인들은 해금을 무시하고 해외무역을 하고 있으나 불법 출국자인 신세인지라 명의 군사적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고 있어 조선의 해동제국사에게 나날히 밀리는 중이다.

아무튼 조선보단 잘 살지 않을까 싶은 인상과 달리, 화북은 난개발과 과도한 인구로 삼림이 소실되어서 집을 목재로 짓지도 못하고 연료도 부족해 생활수준과 구매력이 떡락해 있기까지 하다.

정치인들도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 시도는 계속하고 있으나, 구제도를 유지한 채로 보수하려고 하다 보니 개혁을 해도 성과를 얻지 못해 절망하고 있으며, 상업에 관해서는 유교 이념에 따라 탄압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서 문제가 풀릴 가능성은 전혀 없는 상태에, 암군으로 알려진 정덕제가 즉위하며 개선 가능성은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

6.3. 일본

일본 내 정세에 대해서는 상당히 빠르고 간략하게 넘어가는 편인데, 작중 설정상으로는 경식이 관심이 없고 잘 알지도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작품 외적으로는 독자들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는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경식은 아예 '호소 뭐시기'라고 부르기도 하고, 오우치에 대해서도 오우치 요시오키가 상당히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작중에서 이름이 명시되지 않고 그냥 '오우치 가문' 정도로만 서술된다.

묘사되는 정보로 보아 작가는 어느 정도 조사를 해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서술 자체는 굉장히 빠르게 넘어간다. 그러나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과 깊게 엮이면서 1500년대 초반에는 당면한 개혁이 전부 궤도에 올라 한동안 관리와 수정이 주축이 될 조선에 이어 주요 배경이 되기 시작했다.

10여년 가까운 조선까지 엮인 정쟁과 전쟁 끝에 오우치, 사츠마, 천황이 중심으로 한 태정관 중점의 귀족원-황가 체제의 정부가 설립된다.

6.3.1. 조정

기존 일본을 통치하던 아시카가 막부, 오우치 씨와 조선이 지원해 세워진 다자이후 막부, 최종적으로 막부를 폐하고 덴노와 귀족원 체제로 세워진 태정관 체제로 나눠진다.

6.3.2. 영주

6.4. 포르투갈

본격적으로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한 조선의 라이벌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 연표를 봐도 알겠지만, 작중 시간적 배경인 연산군 시기는 서양사에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항해시대를 열고 세계로 진출하던 때다.

원래 역사에서는 조선은 성리학이 강화되어서 외부와 교류를 끊고 내부로 들어가지만, 경식이 바꾼 조선은 해외로 진출하며 이들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복선이 계속 깔리는 중이다.

7. 설정

7.1. 사용되는 경제학 개념

본작에서 작중 조선인들과 함께 독자들 상당수가 작중에서 설명되는 경제학적 개념을 어려워하기 때문에 별도로 설명한다.

7.2. 조선 전기의 사회상 고증

일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조선 전기의 사회 경제사에 대해서도 틈틈이 설명하기 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 서술한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불합리한 정책이 잔뜩 산재되어 있고, 이런 것을 굉장히 상세히 설명하기 때문에 놀라는 독자들도 많다. 일부 독자들은 그냥 조선의 법률이 조선의 국력을 봉인하고 있던 것 아니냐고 할 정도. 작가 본인의 서술에서도 '전근대 기준으로도 비합리적인 법률들이 많다'고 했다.

8. 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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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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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기타



[1] 육진 중 내륙의 부령을 제외한 두만강 유역의 다섯 진.[2]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듯해서 기겁을 하며 원인을 찾는데, 사실 알고 보니 단순히 백성들이 돈을 장롱에 보관해서 시중에서 돈이 사라진 것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전황이라는 이름으로 18세기에 벌어졌던 일이다.[3] 16세기까지는 서양에서조차 제대로 된 파종기가 없었다.[4] 당시 상방이었던 여불위가 주도해서 생산책임자 시스템 체계적으로 명료하게 만들었다.[5] 실제 역사로는 그 반대인 것이 융경제가 해금령을 풀고 대외무역을 허가하자 왜구가 유의미하게 줄어들고 청나라 시기 강희제가 정성공 세력을 물리친 이후 해금령을 풀자 해적이 들끓던 푸젠성의 치안이 완전히 안정화되고 이 지역의 경제가 발전하게 된다.[6] 이 때문에 명청시대 중국 경제의 경우, 중국의 막대한 생산량은 그냥 단순히 중국의 인구가 많으니 그만큼 자급자족하는 양도 많았을 뿐이며 추가적인 수요를 창출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예컨데, 농가의 아낙네들이 식구들에게 입힐 면포길쌈하여 1년에 1~2필씩 생산한다 치면, 인구 1천만이면 1천만 필의 면포가 생산되고 4억 명이면 4억 필의 면포가 생산되는 단지 그뿐인 것이다. 이럴 경우 당연히 실질적인 부국강병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로의 진입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고 남는, 외부에 투사할 수 있는 '잉여 생산물'이나 추가적 생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요가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한데 산업 혁명 없는 전근대적 가내수공업으로는 당연히 근대적인 소비시장을 열지 못한다. 중국의 막대한 생산량은 "중국은 인력이 남아돌아 산업 혁명의 필요성이 적었다"라는 논리를 뒷받침해왔는데, 실제로는 생산량의 대다수는 단순 자급자족, 최소한의 의식주를 충족시키는데 급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 중국 역사를 살펴봐도 중국은 역사 내내 어떻게든 1인당 노동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왔지만 몇몇 고점의 시대에 생산성이 높아져도 그 시기를 제외하면 이게 다시 도루묵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7] 일정 이상 성장할 수 없는 도시화 문제와 애초에 1인당 자본 축적량과 외부로부터의 수요가 도시보다 훨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족적 농촌공동체에만 유리하게 설계된 사회제도.[8] 이른바 19세기 동양의 동도서기론도 당대의 우월한 '현대기술'만을 가져오면 기존 체제를 유지하면서 우리도 똑같이 발전할 수 있을거라는 착각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작중에도 인용되는 일화지만 괜히 보빙사로 갔던 민영익이 '미국의 밝음과 조선의 어둠' 운운하며 동양의 전반적인 문명이 완전히 서양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지적한게 아니고 후쿠자와 유키치가 기존에 있던 동양적 요소를 다 뜯어 고쳐야 일본이 발전할 수 있다고 평가한 게 아니다.[9] 해당 맥락에서 최초로 드립을 사용하여 대체역사 소설계에서 밈이 되었다.[10] 한국 독립 전쟁에 마유즈미 후유코를 모델로 등장한 후유코/겨울이로 대체역사 소설계에서 밈으로 활용되었다. #[11] 치쿠젠국-하카타/스오국-시모노세키/셋츠국-사카이/무사시국-요코스카. 협상 시점에서 요코스카는 너무 먼데다가 아직 발전하지 않았을 시기이고, 시모노세키는 오우치 관할이라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12] 조선 시대에는 명백히 윤리적으로 어긋난 일이며, 조선식 유교 윤리랑은 거리가 먼 경식조차도 쫄려했는데, 암행 나가서 겨울이가 소매를 잡아끌자 상중이라고 뿌리친 그 날이었기 때문.[13] 그리고 이것이 연산군 이융의 영향이라는 것이 밝혀진다.[14] 본래 역사에서도 정현왕후는 친자가 아닌 연산군에게 꽤 잘해주었다고 한다. 연산군이 폐비 윤씨 사건을 알기 전까지는 사이가 좋았다.[15] 원 역사에서도 왕대비는 본인이 죽으면 장례식 절차를 간소화해서 자식들을 너무 고생하지 말라고 사전에 말해두었다.[16] 연산군이라는 젊은 종친에게 첩으로 들어갈 수라도 있을까 기대했지만 경식이 전혀 눈치를 주지 않았으므로 예전에 잠깐 마주쳤던 걸 알아보지도 못하는 줄 알고 포기했다.[17] 패러디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마유즈미 후유코와 같은 수치다.[18] 이 과정에서 경식이 주변 일대를 의학적인 의미로 소독해 버려, 이 풍습이 민간에 퍼지면서 인구증가율에 나름 영향을 끼쳤다.[19] 다만 매번 말 안 들으면 엄벌하자, 잡아가두자 식의 폭력본위제만 내놓는 바람에 권력의 핵심인 평준도감에선 밀려났다. 그러면서 능력이 있는데도 도학 지상주의를 내세우니 유자광이나 이극규처럼 그 외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20] 역사적으로 '창고가 없어서 세곡을 보관할 수 없는데 세곡이 없어서 창고를 지을 수 없다'가 반복된다. 그것도 조선 건국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내내.[21] 갑옷 기준으로만, 종이갑옷을 사흘에 한 벌 만들던 걸 철갑을 하루 80벌 만들게 되었다. 종류 빼고도 240배에 종이와 철물의 질적 차이를 감안하면 천 배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22] 그렇게 과도한 흉년은 아니었지만 경식에 의해 조선에 화폐가 도입되면서 극소규모 자영농이나 소작농들이 '한양 가서 막일하는 게 낫겠다'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달리 말하면 도시화 현상.[23] 다만 뇌물이 없었어도 무늬가 들어간 돗자리틀 제조법은 특허가 나왔을 거라는 내레이션의 서술이 있다.[24] 지폐 도입을 통해 세입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 이후 언급되지만 세금을 못 내는 백성은 불량채권으로 분류하여 장부상 "좋아 세금을 거두는 데 성공했군."이라고 간주한 후 장부상 예산으로 사업을 진행하며 그에 필요한 인력에 세금 못 낸 불량채권들을 동원하여 인건비로 갈음했다.[25] 사실 최부는 반박하려고 되묻거나 한 게 아니라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26] 사실 탐사대의 공적은 명분이고, 임사홍은 재이론을 헛소리라고 여기고 상소하다 대간과 싸운 인물이라서, 경식이 쓸 만하다고 발탁한 것이다.[27] 윤필상은 1427년생으로 1498년도인 작중엔 70세.[28] 마시멜로 실험에 비유하는데 애당초 당장 매해 겨울마다 얼어죽거나 굶어죽을 걱정을 하는 함경도 주민들에게 내년에 오를 테니 팔지 말라는 게 무리한 부탁이었다. "함경도는 그런 거 몰라. 당장 목면 한 필이 더 소중해".[29] 그리고 중추원은 원 제도상의 허점을 이용해 경식이 중용하는 사람들만 들어왔기 때문에 유자광의 중추원 총리대신은 실권자로선 어지간한 판서, 정승을 넘어서는 자리다.[30] 원 역사의 연산군은 이런 간언을 하는 유자광에게 자존심 상한다면서 국문을 하라고 명했다.[31] 다만 후술하겠지만 이 공납제 자체가 조선의 잘못된 유교경전 해석 때문에 발생한 뒤떨어진 체제이기 때문에 조선 성리학에 호의적인 타다마사조차도 이게 말이 되는 경세론인가 의문을 품고 있기는 하다.[32] 원 역사에서도 무오사화 때 같은 이유로 투옥되었다 석방된 적 있다.[33] 당시 관점에서는 '지폐를 사러'가 될 것이다. 화매소에서는 "지폐 천 전을 쌀 얼마에 팔겠소!"라고 경매를 붙였다. 그 이외의 잡곡이나 후추 등은 반대로 지폐를 기준으로 파는 모양.[34] 다만 당시 조선의 미신상 물귀신은 제삿밥도 못 얻어먹고 저승에도 못 가는 등 귀신 중에서도 유독 대우가 박한지라 실제로 뛰어들진 않았을 거라고 한다.[35] 이것도 경식이 인두로 지지는 등의 근본 없는 고문은 금지하고, 장슬 등도 병신이 된다고 장으로 바꾸었다. 또한 손톱 뽑기 같은 미래적인 고문은 전수하지 않았다. 곤장에 맞아죽는 것보다 손톱이 인도적인 것 아닐까?[36] 키가 작고 전공을 세울 기회가 없어서 갑사는 못되었다고 한다.[37] 그런데 푸만이 총에 맞아 죽기 직전의 단말마가 하필이면 와우의 동방제과 패러디다.[38] 조선인들도 이게 뭔지 몰라서 당황했다. 중국에서 암컷 송골매를 부르는 속어라고 해석.[39] 작중에서 능력이 있는데 관학에 들지 않으면 처벌받는다고 언급된다.[40] 사실 이 시점의 성균관은 별로 쓸데없는 선비들을 수군이나 하라면서 처넣는 발령대기소로 변모했다.[41] 여기서 마이크로크레딧에 보증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42] 사민훈련원에서 초(소대 정도) 단위로 훈련시킨 뒤 통째로 사민시킨다.[43] 이 시기 몽골의 명군 만두카이와 다얀 칸이 매섭게 기세를 올리고 있어서 명의 국경은 지극히 위태로웠다.[44] 대신들의 현황보고에서 드러나길 도교 제사에만 수천만 냥의 은을 썼고, 돈이 없으면 조정에서 세금을 빼돌리기를 반복했다.[45] 원래 역사에서는 감기를 몇 달 간 앓다가 갑자기 코피를 대량으로 쏟고 사망해서 약을 잘못 복용해 부작용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46] 조공무역에 대한 평가는 장단점이 있지만, 조선이든 명이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밀고 당기는 제도였다. 국초에만 해도 말, 공녀, 금은 등을 과하게 요구해 조선에선 조공을 극혐했고 어떻게든 회피하려고 기를 썼다. 명나라도 금은이나 말이 아닌 흔한 물건을 가져와서 바치고 훨씬 값진 비단을 받아가는 조선과 조공국들을 비난했다. 최소한 황제가 뇌물 좀 더 받자고 맘대로 갈아치워도 되는 제도는 절대 아닌 셈.[47] 전개상 닝보의 난이랑 거의 똑같은 사건이다.[48] 수험도는 산에 틀어박혀서 수행을 할 것을 권하고, 여자를 안지 말라고 하는 등 속세와 현실성이 괴리된 종교다.[49] 원 역사 1507년에 오우치 가문은 요시타네를 앞세우고 상락해 교토를 장악하나, 요시즈미 세력과의 연이은 전투, 규슈 내의 쇼니, 아마고 가문의 빈집털기 탓에 천하인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50] 조선에 대한 몰이해로 탄생한 일로, 조선의 의회가 조정에 비견되는 권한을 가졌다고 생각한 요시오키, 더 이상 막부와 쇼군이라는 실세에게 휘둘리기 싫고 정권을 얻고 싶은 덴노, 조선식 주자학을 도입하고 싶은 타다마사의 이해가 합치한 것이다. 물론 조선에서는 경식은 최종적으론 국민과 의회에 권력이 이양되기를 원하면서도, 연산군의 권력욕에 영향을 받아 실질적인 권력을 틀어쥐고 있다.[51] 폴란드 여왕 키우기 작품으로 유명하다.[52] 그런데 고카시와바라 덴노의 시대인 15세기 말~16세기 중순까지는 전국시대 여파로 워낙 덴노가 힘들게 살았던 시기라 원 역사에 비하면 상당히 대우가 좋다.[53] 의회가 주권을 차지하는 것 같지만, 귀족원 의회제도 특성상 왕가 쪽에도 상당한 권한을 줄 수밖에 없다.[54] 이때 뻔뻔하게 '자기들도 해적질은 했지만 가난하니까 어쩔 수 없다'라고 되뇌인다.[55] 본작에서 종종 보이는 명군의 오마주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명군의 주요 빌런이나 중요 인물들이 본작에서는 이렇게 허무하게 아웃되는 경우가 있는 편이다. 예컨대 명군 1부에서 재석을 암살하려 했던 인물이자 재석이 히로인 상희와 만나는 계기가 됐던 배목인은 동네 파출소 노릇을 하던 갑사들이 그냥 산적으로 생각하고 때려잡아서 경식은 갑사들이 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으며, 명군 2부에선 협력자로, 3, 4부에선 동맹관계로 나오는 아이신기오로 가문은 황형에게 약탈당해 역사에서 퇴장하기도 한다.[56] 뚝딱하면 뭔가 나온다. 가끔 자신들을 뚝딱뚝딱 때린다.[57] 어차피 조선의 요역제는 이미 거의 다 붕괴했다. 심지어 경식은 돈까지 주고 있어 요역을 강탈하는 비리까지 발생할 정도.[58] 조선은 지위에 따라 입을 수 있는 옷이 제한되어 있긴 한데 어차피 다들 무시하다 사대부들이 빡쳤을 때 시비 거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원칙이다.[59] 사실 1천 전짜리 납전첩을 살 정도면 상당히 돈 있는 계층이므로, 양반 지위를 얻고 양반으로서 행동반경을 넓혔다가 갑자기 다시 천민으로 굴러떨어지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다.[60] 본래 위험과 내년 수확량을 가늠하여 적정한 수준에서 가치가 형성되어야 하는데 다들 '값이 오르니까 산다, 그래서 값이 더 오른다'가 무한반복되는 전형적인 버블 루트에 진입했다.[61] 공납은 기본적으로 전세 거두고 난 뒤에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하려는 목적에서 유지된 세금이다. 근데 막상 거두다 보니 전체 예산 중에서 전세대신 공납으로 메워야 하는 양이 많아졌고, 부족분을 주먹구구식으로 채우는 공납 특성상 중간에 떼먹기도 전세보다 훨씬 편한 관계로 쉽게 폐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62] 잡학을 좋아하고 이에 능했던 세조나 아버지의 정책노선을 충분히 따른 예종 시기까지는 실무에 밝은 사람들이 실무에 맞게 배치되었지만 조선 최초의 도학군주인 성종 시기부터 실무에 어두운 유생들이 기용되어 문제가 생겼다고 언급된다. 비단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 운용이나 수공업 등 사회 전반에서 발생된 문제라고.[63] 이러한 변화는 원래 역사에서 조선 후기에 실제로 있었던 일로, 대동법이 시행되자 함경도는 공납의 부담에서 벗어나며, 북포나 북어 등 지역 특산물이 경상도 등 남방으로 수출되어 경제 개발이 진행되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 함경도민들은 경제적 이득을 찾아 스스로 북쪽의 간도로 진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64] 해당 작에서는 염라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65] 어디까지나 밈일 뿐이다. 이재석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른 대역물 주인공들의 능력과 비교해서 능력이 살짝 애매할 뿐 이재석도 매우 유능한 편이고 사이코패스 기질도 변호의 여지는 있다.[66]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보다 1년,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보다는 3년 먼저 연재가 시작됐다. 쉼없이 트렌드가 바뀌는 웹소설계에서는 엄청난 차이로, 대체역사 장르 내에서도 명군이 되어보세가 연재되는 동안 시작하고 완결된 작품이 셀 수조차 없다.[67] 설령 국왕파가 반란군에게 이겨도 반란의 원인이 된 국왕의 정책 몇 가지가 통과되는 것일 뿐,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은 이권 좀 내놓는 정도로 끝이고 심지어는 반성문만 쓰고 넘어간 적도 있다고.[68] 태종이 제주도 외 도서 지역에 목장을 설치하고 군마를 기르려 한 것이 최초의 시도였고 세종과 세조를 거쳐 연산군조차 이 부분에 신경을 썼으나 태조~문종 시기 명에 6~7만 필을 바쳐야 했던데다 지긋지긋한 호랑이(...) 때문에 잘 안 되었다.[69] 사실 성종 입장에서는 억울한 평가인데 성종 시대 군축은 태종부터 세조까지 일관되게 추진해온 군사력 확충이 한계에 달해 이시애의 난으로 터져버린 상황에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즉위하자마자 취해진 조치였다. 이때 성종은 아직 친정도 못하는 어린 왕으로 세조의 구신과 정희왕후부터가 군축 필요성에 합의한 상태였다. 게다가 세종, 문종, 세조가 지속적으로 개선해오던 공납 문제를 단번에 롤백시켜 성종이 일 못 벌리고 긴축에 매달리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신공신을 죄다 숙청해 사림을 건드릴 수 없게 만든 건 예종의 책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