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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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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8대 국왕
진덕여왕 | 眞德女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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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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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진덕여왕.jpg
진덕여왕 석상[1]
출생
(음력)
590년대~600년대 추정[2]
신라 금성
사망
(음력)
654년 3월 (향년 50~60대 추정)
신라 금성
능묘 사량부(沙梁部)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28대 국왕
647년 1월 ~ 654년 3월 (7년 2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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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김씨
승만(勝曼)[3]
부모 부왕 국반 갈문왕
모후 월명부인
국서 김기안(?)[4][5]
종교 불교
신장 172cm[6]
시호 진덕대왕(眞德大王)[7]
별호 신라낙랑군왕김진덕
(新羅樂浪郡王金眞德)[8]
연호 인평(仁平, 647년 ~ 647년)
태화(太和, 647년 ~ 650년)[9]
골품 성골(聖骨)
관등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10] }}}}}}}}}
파일:치당태평송.jpg
치당태평송
1. 개요2. 생애3. 평가4. 진덕여왕릉5. 가계6. 《삼국사기》 기록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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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28대 국왕. 즉위 전 이름은 승만공주. 진평왕의 둘째 남동생 국반(國飯)갈문왕의 딸로 어머니는 월명부인 박씨였다. 연호는 '태화'(太和).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므로 제26대 진평왕의 조카였으며, 제27대 선덕여왕의 사촌 자매였다.

신라 3대 여왕[11]들 중 1명이다. 다른 두 여왕과 마찬가지로 진덕여왕도 삼국사기에서는 '여(女)' 자가 빠진 '진덕왕'(眞德王)이라고 기록되어있다.[12] 한국사세계사를 막론하고 역사상 여왕은 예외적인 사례이기 때문에 구분을 위해 여왕이라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즉위한 것은 마지막으로 남은 성골 혈통이었기 때문이며[13] 그녀가 사망하면 더이상 성골이 없으므로[14][15] 진골에게 왕위가 넘어갈 것이 암묵의 규칙으로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던 상황이었으므로 진덕여왕 재위 기간의 정치적 실권은 비담의 난 토벌비담귀족 세력을 제압한 김유신과 차기 왕위 계승의 유력한 후보였던 김춘추가 주도하는 세력이 사실상 잡고 있었다. 아직 알천을 중심으로 한 알천파 귀족들이 남아있었지만 이들도 김춘추파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신라 사회를 전기후기로 나눠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개혁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차기 국왕이 거의 확실했고, 섭정에 해당하는 김춘추의 의도대로 진행된 것으로 보이며 많은 연구서들이 진덕여왕이 왕으로서 실질적인 통치는 거의 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김춘추김유신의 이른바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삼국유사》에서 음갈문왕혼인했다고 하는 선덕여왕 및 김위홍혼인했다고 하는 진성여왕 달리 진덕여왕의 국서(남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진덕여왕이 즉위한 시점에는 더 이상 성골 남성이 근친까지 다 포함해도 없기 때문에 혼인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하지 못했다는 연구도 있다. 김서현만명부인, 김춘추문희의 일화에서 나오듯 같은 골품끼리도 가문의 격이 차이가 나면 역사 기록에 남을 에피소드를 만들 정도로 특이한 경우가 아닌 이상 혼인하기가 어려웠는데 성골과 하위 골품 간의 혼인은 어려우면 어려웠지 쉬웠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동경잡기》 간오(刊誤)에 '진덕여왕의 남편은 갈문왕(葛文王) 김기안(金基安)이다.'라는 기록이 있지만[16]동경잡기》는 19세기 기록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부족하다.

신라 중고(中古)기 왕가 인물들이 그렇듯 진덕여왕의 이름 '승만'(勝曼) 역시 불교 세계관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불교에서 승만부인은 석가모니로부터 장차 성불해 보광여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은 여성으로 불경인 《승만경》의 주인공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흥왕부터 시작된 신라 왕가=석가족(샤카족) 관념과 그에 바탕을 둔 성골 관념을 배경으로 즉위했으며 그렇게 즉위한 마지막 왕이다.[17] 참고로 가까운 시대 사람인 진평왕의 후비 승만부인과는 다른 사람이다. 성도 승만부인은 손씨이고, 한자도 승만부인은 '승만'(僧滿)이며, 진덕여왕의 휘는 '승만'(勝曼)으로 다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승만'(承晩)으로 다르다.

'젊고 아름다운 여왕'에 대한 로망 때문인지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도 당시 30세였던 손여은이 진덕여왕 역으로 출연했는데 사실은 진덕여왕이 즉위 당시에 30대 초반 이하의 젊은 여성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덕여왕은 국반 갈문왕의 딸인데 국반 갈문왕이 형인 진평왕과 몇 살 터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버지인 김동륜이 572년에 사망했으므로 국반 갈문왕을 김동륜의 유복자라고 가정하더라도 진덕여왕이 즉위한 647년에는 살아있었다 치면 76세가 된다. 그러므로 그런 국반 갈문왕의 딸인 진덕여왕도 즉위할 당시에는 아무리 적어도 40대 후반~50대 전반의 중년 여성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고 10대 중후반이 결혼 적령기였고, 빠르면 30대 정도에 손자, 손녀를 보기도 했던 시대에 이 정도면 할머니로 불릴 연령대였다.# 연령대로는 선덕여왕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 역사상 확실하게 젊어서 즉위한 여왕은 제51대 진성여왕 1명뿐이다.[18]

기록에 의하면 자태가 풍만하고[19]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20]에 이르러 팔이 무척 길어 무릎 밑까지 닿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록은 전임자에 이어 후임자도 여왕이라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진덕여왕을 보살과 같이 묘사해서 그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였다는 해석이다. 선덕여왕에 대한 긍정적인 외모 묘사가 없었던 것을 보면 빼박 또한 "팔이 길다"는 것은 있는 이의 상징적인 클리셰이기도 하다. 《삼국지》의 촉한 소열제 유비도 키가 7척 5촌에[21] 팔이 무릎까지 내려간다는 묘사가 있다. 다만 체격이 크다는 묘사 자체는 사실일 수도 있는게 지증왕[22]이나 법흥왕, 진평왕[23], 경덕왕, 진성여왕, 효공왕경주 김씨 신라 왕가는 체격이 크다는 묘사가 있는 인물이 실제로 많은 편이다.

2. 생애

647년 1월 비담의 난 와중에 1월 8일날 선덕여왕이 붕어하고 뒤를 이어서 국왕이 되기는 했지만 애당초 선덕여왕이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지명한 것 같지는 않아보여 일각에서는 선덕여왕이 난리통에 죽고 김춘추김유신이 진덕여왕을 국왕으로 추대한 게 아닌가라고 보기도 한다.[24] 훗날 김춘추 본인 역시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직접 지명받은 것이 아니라[25] 화백회의의 추대로 즉위했다고 말했다. 아니면 진덕여왕을 후계자로 지정하고 가뜩이나 여왕에 반대하던 비담 세력은 또 여왕이 즉위한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껴 여주불능선리[26]를 내세워 진덕여왕의 즉위를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석도 가능하다. 비담의 난 발발 직후에 선덕여왕이 사망한다는 점에서 이미 반란 직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담의 난 진압으로 반 김춘추 세력이 숙청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진덕여왕의 치세에서 실권은 김춘추와 김유신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천상대등이 되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27]군주(軍主)로 임명하는 등 비담의 난으로 야기된 혼란을 수습하고 치세를 시작했다. 선덕여왕 때처럼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김유신의 활약으로 공격을 막아내고 역으로 20여 개의 성을 점령하기도 하며 선덕여왕 때보다는 백제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당시 일본에서도 신라를 우습게 볼 정도였다.

즉위 직후인 647년에는 김춘추가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지만[28] 일본은 이미 백제와의 동맹 관계가 굳건한 나라였기에 잘 되지 않았다. 당시 신라 최고의 거물인 김춘추가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는 점에서 신라가 대충 찔러본 게 아니라 상당히 기대를 갖고 갔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정세를 살펴보면 김춘추가 건너가기 직전인 645년에 친백제계 가문인 소가씨가 몰락하는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는데 김현구의 견해에 따르면 이때 소가씨를 몰락시키는데 큰 활약을 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 후지와라씨의 시조)가 상대적으로 친신라파였다고 보기도 한다.
겨울, 감질허(邯帙許)를 사신으로 보내어 당에 조공하게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를 시켜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라고 물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덕여왕 2년(648년) 겨울.
즉위 이듬해인 648년에는 당나라에 감질허, 김춘추 등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당 태종은 감질허를 사신으로 보낼 때만 해도 까칠했지만 김춘추가 오자 반갑게 맞아들이며 여러가지 요구도 들어주는 태도를 보였다. 이는 예전 선덕여왕 때 신라는 여자가 왕이니까 그 꼬라지라고 무례하게 행동했던 것과 다른 모습인데 결국 김춘추와 회담 결과 적극적으로 동맹을 체결하여 나당 동맹의 기초가 이뤄졌다. 당 태종이 나당 동맹에 적극적으로 임한 것은 645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패퇴했던 것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한 번 실패를 겪은 당 태종이 고구려 재침략을 위해서는 고구려의 후방을 노릴 수 있는 신라와의 협공이 꼭 필요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645년 고구려 침공 당시 당 태종은 동맹국이었던 백제, 신라에게 모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는데 신라가 당나라의 요청에 응해서 원군을 파병했지만 백제는 이전부터 당나라가 고구려를 친다면 지원군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말을 바꾸어 지원군을 파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당나라를 지원하고 있던 신라의 옆구리를 빈집털이했다. 백제의 태도에 큰 분노를 느낀 당 태종은 죽을 때까지 백제의 사신을 받지 않았고[29] 당나라의 목표인 고구려 멸망에 백제가 걸림돌이 되니 고구려를 치려면 방해가 되는 백제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신라 역시 당나라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고구려, 백제, 일본)이 신라를 적대하는 외교적 고립을 타파하기 위해 당나라와의 외교 강화로 반 신라 연합에 대응하고자 했다.

진덕여왕은 직접 비단에 수를 놓고 를 지어 당나라에 바쳤는데 바로 <치당태평송>이다. 아첨이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라서 일각에서는 진덕여왕이 무슨 치어걸이라도 한 거냐고 비판하기도 한다.
대당 (大唐)은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大唐開鴻業
높디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巍巍皇猷昌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止戈戎衣定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文治)를 닦도다.
修文繼百王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가 순조롭고
統天崇雨施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
理物體含章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
深仁諧日月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으로 나아가네.
撫運邁時康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幡旗旣赫赫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鉦鼓旣鎤鎤
명을 어기는 자 외방(外方) 오랑캐여
外夷違命者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剪覆被天殃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淳風凝幽顯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
遐邇競呈祥
사철이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四時和玉燭
해와 달은 만방을 두루 도네.
七曜巡萬方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維嶽降宰輔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維帝任忠良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德)을 이루니
五三成一德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昭我唐家皇

당시 신라의 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굴욕적으로 보이겠지만, 백제와 고구려라는 강력한 외세에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외교를 통해 국가왕조를 보전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결코 치욕이 아니다.[30] 그리고 현대인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굴해 보이는 이런 어법은 현대 이전의 동아시아에서 강대국인 중국과 교류할 때 다들 하는 관행에 가까웠다. 지금의 기준으로 역사를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 얼마나 큰 오류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러기에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 없는 대화'라고 하지 않았는가! 《삼국사기》와 《수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의 영양왕수나라의 침입을 물리친 후 화해를 요청할 때[31] 스스로를 '요동 의 신하'(遼東糞土臣某)라고 자칭하면서까지 사죄하는 문서를 보냈고, 《위서》에 전문이 실린 백제 개로왕북위에 고구려 공격을 요청할 때 보낸 국서에서는 '백제 공주를 (북위에 보내) 후궁을 청소하게 할 수도 있다'라고까지 했다. 이는 당대의 사정을 보지않으면 굴욕 외교로 보이겠지만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나오는 표현들도 <치당태평송>의 구절들의 수위에 못지않았다. 특히 전후 사정을 보면 세 나라 모두 진심 따윈 없이 중국에게서 외교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말 뿐인 외교적 수사였을 뿐이다. 아니 나라가 망할 판인데 뭔 짓을 못하겠는가? 굴욕적이라고 해도 말로만 굴욕을 겪는 것이 진짜로 적 앞에서 무릎 꿇고 조아리는 것보단 낫다. 당장 동시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서 박쥐놀음 하다가 망한 백제가 있지 않은가?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해서 그렇지. 당시 신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이미 선덕여왕 시기에 대야성무너져 압량주가 최전선이 되었는데 이것을 현대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연천군, 철원군 다 뚫리고 동두천시가 최전방이 된 격이다. 그나마 진덕여왕 시기에는 김유신이 20여 개의 성을 빼앗는 등 신라의 숨통을 트였지만, 김춘추가 즉위한 직후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연합한 대군의 침공으로 신라는 30여 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당시 김유신은 수도인 경주가 위협받을 때마다 필사적으로 싸워 개별 전투에서는 승리해 지켜냈지만[32] 양면 전쟁에서 신라의 한계는 분명했다.

일본에 대해서도 김춘추가 직접 건너간 것 이후,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외교를 통한 상황 타개를 노리기도 했다. 652년 6월, 653년 4월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일본서기》에 남아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조정에서는 "어차피 신라는 곧 망할 나라인데 우리가 도와줘서 뭐합니까? 우리가 전력을 안 써도 먹을 수 있습니다. 상황을 보다가 신라가 망할 때가 되면 우리가 낼름 먹어버리죠"[33]라는 반응이었기에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사실 당시 일본의 판단은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았는데 신라는 당나라가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 백제와 고구려 연합 공격에 30여 개의 성을 잃었다. 어떻게 봐도 신라는 외교적 고립과 군사적 공격에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 맞다. 문제는 예상과 달리 당나라가 방침을 바꿔서 고구려보다 백제를 먼저 멸망시키기 위해 10만명 단위의 대군이 황해 바다를 가로질러 참전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도박과도 같은 카드가 통한 것이다.[34]

기왕에 비담의 난으로 귀족 세력이 약화된 이상 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중국의 제도를 대거 도입해 왕권을 강화하게 된다. 진지왕의 폐위에서 알 수 있듯 진덕여왕 이전의 신라는 국왕과 귀족의 관계가 뚜렷한 상하 관계가 아니었고 상호 견제가 강했지만, 이 시기부터 진골 귀족에게 신하의 상징물인 아홀(牙笏)을 갖고 다니도록 했고(650년)[35], 새해에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하는 신정 하례를 시작하기도 한다(651년). 시랑(侍郞)이라는 벼슬 이름을 처음 사용한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런 제도들이 고려, 조선까지 천수백 년을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덕여왕 시대에 바뀐 부분들이 한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진덕여왕은 비록 존재감이 약했지만 그녀의 시대는 뚜렷한 존재감을 나타냈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 중앙집권 체제의 기반이 되는 집사부가 설치된 것도 진덕여왕 때이다. 물론 이런 개혁 대부분은 사실상 실권을 쥐었던 김춘추의 주도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 평가

신라의 정치 제도 개혁은 선대보다 진덕여왕의 재위 시절 더 많이 이뤄졌다. 물론 이런 변화는 진덕여왕 본인이 아니라 김춘추김유신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게 정설.

상대적으로 실권도 별로 없었고 이렇다 할 임팩트 있는 업적이랄 것도 별로 없었던 것 때문인지 선덕과 진성과는 달리 신라여왕 삼총사 중에서 존재감이 제일 약하다. 똑같이 여왕인데다 정치적 평가와는 별개로 최초의 여왕이라는 이미지로 큰 존재감을 가진 전임자 선덕여왕역덕후가 아닌 사람들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인지도와 존재감을 남긴 후임자 태종 무열왕에 끼어 왠지 징검다리 느낌이 강하다. 애초에 휘하의 실세이자 신하들까지 김춘추김유신이라는 유명인사들이다. 게다가 먼 훗날의 진성여왕은 안 그래도 멸망 일보 직전이던 신라를 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었다는 것과 후삼국시대의 창설까지 이런저런 굵직한 사건들까지 여럿 있어서 부정적 의미로라도 존재감이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신라는 선덕여왕 시절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7세기 전반기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 양상은 백제의 선제 공격과 이에 대한 신라의 방어로 이어졌다. 이는 양국의 군사력 내지는 국력에서 백제가 우위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648・649년 전쟁에서는 신라가 적극적으로 기획하여 백제를 선제 공격하기도 하고 크게 승리를 거두기도 한다. 647년에서 648년 사이 신라측 사료에 기록된 백제의 피해들을 정리해 보면, 김유신 열전에는 총 42,600명, 신라본기에는 12,000여 명에 달한다. 기록상 과장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의자왕 즉위 이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분명하다.[36] 이에 신라가 642년 대야성전투의 패배를 설욕하였으며, 통일전쟁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37]

그밖에 진덕여왕 2년 김춘추가 대당외교를 펼치면서 당나라로부터 당나라의 복제였던 복두, 곤룡포, 단령을 도입함으로써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를 거치는 1000여년동안 우리 역사 왕실의 복제가 되었다. 이로써 삼국시대 당시의 화려한 금관 문화가 사라졌다는 점에선 다소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38]

4. 진덕여왕릉

파일:진덕여왕릉.jpg
파일:external/8606c3b1602c1d5fb64b53df535a617cfa81e7510eb128ad7d9db68aed08ccf1.jpg

현재 경주시진덕여왕릉이 남아있다. 사적 제24호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제5 진덕여왕 8년 (서기 654년) 03월 죽은 뒤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을 토대로 지금의 위치로 추정중이다. 물론 그냥 추정이고, 이게 진짜 진덕여왕릉인지는 무열왕릉처럼 뚜렷한 물증이 나온 것은 아니라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는 신무왕 혹은 문성왕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진덕여왕릉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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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계

6.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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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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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진덕왕 본기>
一年春一月 진덕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一月十七日 비담을 죽이다
一年春二月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다
一年 당태종이 사신을 보내다
一年秋七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一年 연호를 태화로 바꾸다
一年秋八月 혜성이 나타나다
一年冬十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해 오자 성주 직선이 이를 물리치다
一年冬十一月 신궁에 제사지내다
二年春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二年春三月 백제가 서쪽의 변경을 침공하다
二年 한질허를 당나라에 보내다
二年 이찬 김춘추당나라에 보내다
三年春一月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다
三年秋八月 백제가 7개 성을 함락시키다
四年夏四月 진골에게 아홀을 갖게 하다
四年夏六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四年 왕이 태평송을 짓다
四年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다
五年春一月一日 백관으로부터 새해 인사를 받다
五年春二月 품주를 집사부로 고치다
五年 김인문을 당나라에 보내다
六年春一月 파진찬 천효를 좌리방부령으로 삼다
六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六年春三月 서울에 큰 눈이 오다
七年冬十一月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다
八年春三月 왕이 죽다

재위 1년차의 기록이 많은 것만 봐도 순조로운 즉위는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당나라에 자주 사신을 보내고, 결국 당나라의 의관 착용과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며[41], 다음의 <치당태평송>까지 짓는 등 당시 신라의 급한 사정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7. 대중매체에서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4012003212_13.jpg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4012003212_1.jpg
파일:진덕여왕(미라쥬 메모리얼).jpg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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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진덕여왕릉 · 치당태평송
연호 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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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하반신 부분만 남아있으며, 1982년 당태종의 황릉인 소릉 산동문 밖 동북쪽 약 1,000미터 부근에서 발견됐는데 석상이 발견된 부근에서 ‘신라…군'(新羅…郡), ‘덕'(德) 등의 명문이 새겨진 석상 좌대 잔편을 발견하여 현재 학계에서는 이 석상이 진덕여왕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고 있었고 현재는 이 석상이 진덕여왕상인 것으로 확정되었다.###[2] 아버지 국반 갈문왕의 추정 생년으로 역산한 것이다.#[3] 사촌자매인 덕만(德曼)과 항렬자인 것으로 보인다.[4]동경잡기》에서 진덕여왕의 국서가 갈문왕 김기안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동경잡기》는 19세기 기록이고 더 이른 사서에는 진덕여왕의 국서(남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실존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5] 기안 84 아니다[6] 《삼국사기》에 7척으로 나온다. 다른 각주에도 서술하지만 현재의 척은 일본이 개항 이후 피트를 척으로 번역한 것이 넘어온 것이다. 진덕여왕때부터 당소척을 사용했으니까 1척은 거의 당의 1척인 24.5cm를 기준으로 한 것.[7] #[8]당 소릉 진덕왕상 대석 명문』의 기록.[9] 진덕여왕 4년부터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사용하면서 독자적인 연호였던 "태화" 연호는 폐지되었다. 즉 신라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된 연호.[10] 당나라에서 추증한 관등.#[11] 제27대 선덕여왕, 제28대 진덕여왕, 제51대 진성여왕.[12] 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진덕왕'인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진덕여왕'으로 표기된다.[13] 다만 승만공주가 어째서 성골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실세였던 김춘추가 선덕여왕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진 백성들을 추스르기 위해 그 대신이 될만한 여왕으로 승만을 추대했다는 설도 있고, 아예 김춘추와 김유신이 짜고 비담의 난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승만공주를 허수아비 여왕으로 추대한 후 정권을 잡았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정설은 아니므로 너무 맹신하지 말 것. 그녀가 성골인 정설은 진평왕의 아버지인 동륜태자의 자손만을 성골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쪽 가문의 유일한 자손을 왕위로 밀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14] 진덕여왕의 출생 시기가 알려지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진평왕이 살아있을 때 임신이 가능한 나이었다면, 성골인 진평왕과의 사이에서 성골을 낳을 수 있었다. 신라는 근친혼이 빈번했으니..[15] 자식도 없었고 자식이 있었다해도 성골 남성이 없으므로 아이의 아버지는 진골 이하일테니 김춘추보다 골품이 높다고 할 수도 없다.[16] 출처는 충남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김수태(金壽泰)의 1997년 논문 '有懷堂 權以鎭의 「東京雜記刊誤」'에서 나온 내용이다.#[17] 다음 왕이자 최초의 진골 출신 왕 김춘추부터는 왕의 이름도 유교적인 이름으로 바뀐다. 신라 상대와 달리 중대~하대 왕들은 성이 김씨인 것까지 겹쳐서 현대 한국인 이름이라 생각해도 어색하지 않은 어감인 이름이 많은데 유교적 사회의 작명법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18] 아름다운 여왕이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연령대는 젊은 여왕이었다. 즉위할 당시 나이는 10대 후반~20대 전반이었고, 10년 재위한 뒤에 조카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니까 말이다.[19] 여러 매체에서도 진덕여왕은 살이 찐 통통한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즉위했을 때의 진덕여왕의 연령대와 경주 김씨 신라 왕가를 고려하면 살찐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20] 진덕여왕 때부터 당소척이 사용되었는데 1척에 24.5cm이므로 7척이면 약 172cm 정도다. 이 당시 여자 키가 172cm면 엄청난 장신이다.[21] 후한 시절 1척의 길이는 23cm 혹은 23.7cm이므로 유비의 키는 173cm 혹은 178cm가 된다.[22]삼국사기》에서는 그냥 체격이 크다고 했다.[23] 《삼국유사》에 따르면 키가 무려 11척이라고 하는데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53cm 정도다.[24] 왕위에 오를만한 성골이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춘추가 오를 수도 있었지만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로 인한 혼란을 우려한 탓인지 어떻게든 성골을 찾아서 어거지로 왕으로 세운 듯한 느낌이 있기는 하다. 하필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비담이 난을 일으킨 상황도 의미심장하다.[25]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648년의 김춘추가 동궁(東宮)(태자)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쓰고 있어서 이미 진덕여왕의 후계자로 내정된 상태였다고 해석하기도 한다.[26] 女主不能善理.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 비담의 난의 명분이었다.[27] 오늘날의 강원도 춘천, 철원 일대.[28]일본서기》에만 관련 기록이 있다.[29] 백제가 중국에 고구려 좀 공격해달라고 징징대다 정작 진짜로 중국이 고구려를 치면 나몰라라 하고 강 건너 불구경하던 것은 이미 100년쯤 전인 수나라 수 문제, 백제 위덕왕 시절부터 시작해 여러 번 있었다.[30] 그러나 중화사상에 물든 소분홍들은 우리나라의 모든 것을 중국 것이라고 우긴 것에 대해 비난하는 한국 네티즌들을 향해 공격할 때, 반드시 진덕여왕이 썼던 <치당태평송>을 들고 '옛날 니네 나라 여왕이 우리 중국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러면 중국 것이라고 인정을 해야 되는데 왜 비난하는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공격한다.[31] 이겼는데 뭔 화해냐 싶겠지만 이래봐도 수나라는 위진남북조시대를 정리하고 중국 역사상 최대의 성군 중 하나인 수문제의 치세였다. 일단 한번 싸워 이기긴 했다만 다음에도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즉 일단 들어온 침공은 이겨낸 뒤 형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여 체면을 세워주는 것으로 재침공의 요소를 막는 것이 최선이다.[32]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본기>와 <김유신 열전>의 분위기가 상이하게 다른데 <김유신 열전>만 보면 외침은 있어도 그걸 다 김유신이 물리쳐내어 별 문제 없어보이지만 <신라본기>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나온다. 애초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만 다룬 만큼 김유신의 활약만 나와있다. 즉 두 자료를 교차검증해 보면 신라는 김유신이 있는 전선에서는 공세를 막아내지만 김유신이 없는 곳에서는 속절없이 밀리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김유신이 유능해도 전체 전선을 다 커버할 순 없으니[46] 신라가 저런 저자세로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33] 《일본서기》 권25 고토쿠 천황 652년 6월 기사.[34] 당나라가 상당히 간을 보고 있었다. 선덕여왕때는 모욕을 주더니 진덕여왕 때 군사동맹을 맺고 태평송을 받고 기뻐하고 신라가 백제와 전투에서 승리 보고를 받고는 계산이 얼추 맞아서 그런 지도 모른다.[35] 신하들이 들고 다니는 길쭉한 상아 재질의 막대기. 이후 고려, 조선에서도 계속 사용한다.[36] 박서영,「백제 의자왕대의 대외정책 -신라와의 전쟁을 중심으로-」, 『백제연구』[37] 이문기, 「648・649년 신라의 대백제전 승리와 그 의미」, 『신라문화』[38] 참고로 익선관은 당시 당나라 황제들도 착용하던 복두가 변형된건데 이는 고려시대에 와서 변형된 것이다.[39] 할머니의 아버지.[40] 할머니의 어머니.[41] 김부식은 신라가 다시 중국의 연호로 복귀한 걸 보고 '중국의 신하 주제에 잘못된 짓을 하다가 이제야 바로잡았다'면서 《삼국사기》에 기술했다.[42] 물론 원효와 엮기 위한 드라마의 독자적 설정일 뿐이다. 역사상 진덕여왕은 즉위할 때 젊은이가 아니었으니 젊은 나이에 죽을 수가 없다.[43] 원효와 이어져 아들 설총을 낳는다.[44] 공홈 둥장인물 목록에 '승만공주'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캐릭터 설명까지 적혀 있던 만큼 초기부터 진덕여왕 캐릭터를 구상한 것은 명백하다.[45] 보다시피 의외로 사극 비주얼이 폭발적이라 당시 디시인사이드 KBS 드라마 갤러리에서 캐스팅 반응이 상당히 좋았다.


[46] 이는 초한전쟁의 초나라 상황과 유사한 것으로 초나라는 항우가 있는 곳에서는 해하 전투를 뺀 모든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항우가 없는 곳에서는 족족 밀렸다. 신라 역시도 이 때의 초나라와 비슷한 신세였다. 그러나 신라는 초나라와는 달리 도움을 청할 나라가 있었다는 점이 초나라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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