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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6:31:16

의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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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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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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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추존 국왕 · 왕비 · 추존 왕비 · 왕세자 · 왕세자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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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 목조 ~ 연산군 · 중종 ~ 고종
왕녀 : 익조 ~ 연산군 · 중종 ~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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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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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가의 종주와 그 배우자만 표기
왕족
창덕궁 이왕(왕공족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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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궁 공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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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적십자사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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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1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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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장충식
제22대
서영훈
제23대
이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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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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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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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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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근
제28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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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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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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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황자
의친왕 | 義親王
<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조선 고종의 왕자
의화군 | 義和君
파일:의친왕.png
대한제국 육군 부장 예복 차림
출생 1877년 3월 30일[1]
한성부 순화방 범숙의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궁정동 일대)
사망 1955년 8월 16일 (향년 7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부 안국동별궁[2]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3길 4)
사동궁
후계자
이건[3]이곤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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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강(堈)[4]
부모 부황 고종 태황제
적모 명성태황후 민씨
생모 귀인 장씨
형제자매 4남 1녀 중 3남
배우자 정실 의친왕비
첩실 13명
자녀
슬하 12남 9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이건
차남 이우
5남 이수길
6남 이곤
7남 이해청
8남 이현
9남 이갑
10남 이석
2녀 이해원
5녀 이해경
8녀 이현
외 10명
학력 게이오기주쿠대학
로어노크 칼리지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병역 대한제국 육군 부장 전역[5]
종교 유교 (성리학)가톨릭 (세례명: 비오, Pius)
아명 평길(平吉)
사강(士岡)
만오(晩悟)
작호 조선: 의화공(義和公) → 의화군(義和君)
대한제국: 의왕(義王) → 의친왕(義親王)[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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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조선 말기2.2. 미국 유학2.3. 귀국 이후2.4. 일제강점기 치하에서의 행적2.5. 광복 후 말년
3. 여담4. 자녀와 후손5. 기타 사항
5.1. 학위5.2. 상훈5.3. 종교5.4. 경력
6. 대중매체에서7. 참고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임시정부수립 90주년 특집, 의친왕을 망명시켜라 [7]
고종의 2남[8]이자, 고종의 아들들 그리고 나아가 대한제국 황족들 중 유일한 독립운동가이다.[9]

2. 생애

2.1. 조선 말기

1877년(고종 14년), 고종의 2남[10]으로 태어났으며 귀인 장씨(貴人 張氏) 소생이다. 어머니 장씨는 명성황후의 미움을 받아 의친왕을 낳은 이후에 궐 밖으로 쫓겨나 궁 밖에서 살다가 명성황후가 죽은 이후인 1900년(광무 4년)에서야 종4품 숙원(淑媛), 1906년(광무 10년)에야 종1품 귀인(貴人)으로 추증받았다. 1891년(고종 28년), '의화군(義和君)'으로 봉군되었으며, 1893년(고종 30년) 김제남(金悌男)[11]의 10대손 김사준의 딸 김덕수(金德修)를 정실 아내로 맞았다.

1894년(고종 31년), 조선국 보빙대사(報聘大使: 답례로 외국을 방문하는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1895년(고종 32년)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방문을 각각 추진했지만 유럽 방문은 을미사변아관파천의 혼란 속에 1896년(고종 33년), 중도 취소되었다.

2.2. 미국 유학

1899년(광무 3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이곳에서 당시 영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김란사(金蘭史)를[12] 알게 되었다. 1900년(광무 4년) 8월에 친왕 작위를 받고, 의친왕(義親王)으로 승격했다.[13]

1901년(광무 5년) 3월에 미국 버지니아 주 세일럼의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에서 수학했으며, 이 때 로어노크 칼리지 학생으로 있던 우사 김규식 등과 인연을 맺었다. 같은해 6월에 매사추세츠 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수행원 및 김규식 등과 함께 참석하고, 버팔로에서 열린 남‧북미 박람회에도 함께 참석으며, 이후 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지를 돌아다니며 학업을 계속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에 기거하던 도산 안창호와는 김규식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았고, 미국에 거주하는 재미 한인들의 복지를 위해 자금(금일봉)을 보태기도 했다.

한편 의친왕이 미국에서 유학하던 기간에, 대한제국에서는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다름아닌 의친왕을 추대하려는 황실 쿠데타가 발생한 것이다. 1902년(광무 6년)에 있었던 일심회 사건(一心會 事件)이 그것으로, 일본에 국비로 유학한 재일 유학생 일부가[14] 고종 황제양위시키고 의친왕 추대를 획책한 사건이다. 이후 전모가 밝혀져 유길준, 장인근 등 가담자들 일부는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고 주동자 3인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당시 의친왕은 한창 미국 로어노크 칼리지(Roanoke College)에서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사건 자체는 의친왕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의친왕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순종이 즉위한 후, 의친왕이 아닌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받은 것에도 이 사건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본다.

1905년(광무 9년) 3월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해 도쿄로 갔으나, 고종의 명으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학자금 명목으로 5만 원을 받았다. 이후 의친왕은 다시 1905년(광무 9년) 8월 28일에 도쿄로 갔는데, 그 소식을 접한 엄 귀비이근상(李根湘)을 도쿄로 보내 300만 원을 주면서 돌아오지 말라고 종용하며 압박을 가했지만, 의친왕은 계모의 종용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더 이상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귀국했다.

2.3. 귀국 이후

늑약으로 불리게 되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있던 1905년(광무 9년)에 미국에서 귀국하여 대한제국군 육군 부장으로 임관했으며, 이후 제2대 대한적십자사 명예총재 등을 지냈다. 정식으로 금책을 주는 절차는 의친왕이 귀국한 후인 1906년(광무 10년) 양력 7월 24일에 거행되었다.[15]

1907년(광무 11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아버지 고종일본군의 강요와 협박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하고, 이복형 순종이 즉위했으며, 1907년(융희 원년) 9월 의친왕보다 20살 연하인 이복동생 영친왕이 정식으로 대한제국 황태자(大韓帝國 皇太子)로 정식 책봉되었다.[16] 황자로서 다음 황위 계승 순위로는 순종 그다음이었으나, 자신의 아들 영친왕 이은을 밀던 순헌황귀비영선군 이준용 파와 의친왕 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학부 대신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져 결국 황태자가 되지 못한다.

1907년(광무 11년) 1월 15일, 의친왕이 북한산성에 문관 3명, 군관 105명, 민간인 120명 등 총 228명을 비밀리에 소집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정미의병 봉기를 독려하는 연설을 했는데 실제로 이들 중에는 의병을 일으킨 사람도 있었다. 대체적인 기록은 참가자 중 하나였던 '목형신(睦衡信)'에 의해 남아 있으나 228명 전원의 명단은 남아 있지 않다.

1909년(융희 3년) 10월, 의친왕이 경상남도 거창군정태균을 방문하여 1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이 지방의 뜻 있는 사람들과 북상면의 사선대 일대를 장차 의병의 근거지로 확보하기 위해 일부 땅을 매입하려다가 발각되어 서울로 호송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의심스러운 정황이 많다.[17]

2.4. 일제강점기 치하에서의 행적

1911년 봄 의친왕과 손병희는 극비리에 우이동에서 만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방도를 면밀히 모색했다. 1911년 8월 손병희우이동을 다시 방문하여 주변의 땅 3만평을 매입했고, 1912년 봉황각(鳳凰閣)을 세웠는데, 봉황각은 바로 3.1 운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1915년 의친왕은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18]고종 황제북경(北京)으로 망명시키려 한 보안법 위반 사건[19]에도 연루되었다.

1916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관 임병찬이 타계하자, 이에 의친왕이 직접 추모 제문을 보냈다. 이러한 사실은 임병찬독립군과 연통 혹은 교류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의친왕의 궁가이자 처소인 사동궁에는 일본 제국 경찰이 상시 보초를 서면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이왕직 사무관이 파견나왔으며, 의친왕의 처소에는 감시를 위한 유리창이 곳곳에 달렸다.

그런데 이러한 삼엄한 감시를 받아 가면서도 의친왕은 3.1 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비밀리에 회합했다. 1919년 11월 24일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우치다 고사이 당시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공(公)은 즐겨 시정 잡배와 왕래했는데, 올 봄 독립운동의 주모자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했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고 한다."고 말한 걸 봐도 알 수 있다.

1919년 늦가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20]과 연통했다. 이후 독립군 단체인 군무 도독부(軍務都督部)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의친왕은 "3.1 운동을 통해, 침략한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으로 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라고 말했다고 《최진동 장군 평전》에 나와 있다. 나중에 1939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이 아들을 얻자 족자를 보냈는데, 이 족자 사이에 항일 독립운동에 관련한 밀서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

1919년 11월 9일, 나창헌 등의 주도로 상해임시정부로 탈출하려던 사건이 가장 유명한데, 같이 거사를 계획한 단체의 이름을 따서 '조선민족독립대동단사건'(이하 '대동단 사건')이라고도 한다.

3.1 운동 직후인 4월 11일, 여러 독립운동 세력들은 드디어 세를 규합해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정식으로 창설한다. 이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아직 미약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상해 임시정부에 내부적으로는 구심점, 대외적으로는 정당성을 강화하고 한국인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관심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의친왕 망명을 구체적으로 계획한다. 만약 성공한다면, 황족의 입을 통해서 한국인이 마음으로 일본의 통치를 원한다는 일본의 선전전에 대항할 수 있을 거라 기대되었다. 게다가 의친왕은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특권과 예우를 버리겠다"고 스스로 선언했다.[21]
1. 일본은 몇 명의 간신과 부동하여 나의 부황(父皇)모후(母后)를 시해하였으니, 이 원통한 사정을 열국(列國, 여러 나라)에 호소할 것이다.

2. 3월 1일 이래로 전 국민이 빈손으로 독립을 절규하여 외치는데 적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와 인도를 무시하고 학살을 자행하니, 우리 국민들은 백절불굴의 기세로 독립을 요구하는 애국의 열혈이 더욱더욱 들끓어 국민의 정신이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 아니할 것을 선포할 것이다.

3.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10년 전후에 제반조약으로 우리의 국토를 합병한 것은 간사한 도적을 이용하여 협박하고, 강제 체결한 것으로 결코 나의 부황(父皇)이 긍종(肯從)하심이 아님을 내가 확실히 하는 바이다. 그러니 이를 세계에 공포할 것이다.

4. 나 역시 한국 국민의 한 사람(一民)이라. 나는 독립되는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일본의 황족(皇族)이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 임시정부가 성립된 당지에 나아가서 정부의 제공과 더불어 동심하여 생사를 같이 하여 우리나라의 완전 독립에 노력하여 동포들의 고심(苦心)의 만분의 일이라로 도움이 되고자 하노니, 나의 이와 같은 결심은 하나인즉 복수를 위함이요, 또 하나인즉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것이다.
- 《독립신문》에 발표된 의친왕의 성명. 김병조 《한국독립운동사략-의친왕의 피체》

1919년 11월 20일 자 《독립신문》에 의친왕의 성명이 실렸다. 내용은 "나도 한국의 일민(一民)이라 차라리 독립된 한국의 일 서민이 될지언정, 우리나라를 병탄한 일본의 황족이 됨을 원치 않는 바이며 반드시 임시정부 제공(諸公)과 악수 동심하여 사생간에 광복에 힘을 다하여 여러 동포가 고심하는 만의 일이라도 보조하려 하는 것이니 나의 이 결심은 하나는 (自家)의 복수를 위한 것이며, 하나는 조국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를 위함이라."였다.

이전부터 의친왕 이강은 독립운동 세력과 접촉한다든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이 있었다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러던 중 동년 봄에 김가진이 상해 망명을 시도해 성공하는 일이 발생했다. 김가진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었기에 당시 일본으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국내(한반도) 주요인사들에 대한 감시/감독이 더 철저히 강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이에 고무되어 대동단(大同團)이라는 비밀결사의 전협[22], 최익환 등은 아예 더 고위급 인사, 그러니까 황족의 망명을 도모해보자 결심했고, 사동궁(의친왕의 사저)에 자주 들락거리는 인물을 통해 의친왕과의 접선에 성공, 의친왕은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 남루한 농부 차림에 수염까지 붙이는 등 변장한 뒤 거처를 탈출했다.

그 날 밤 10시 쯤 궁의 후문을 감시하던 일본인 리와가 어둠속에서 의친왕과 비슷한 용모의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급히 시내로 향하는 것을 보고 이를 미행했으나, 이동문 부근에서 이들을 놓쳤다. 이를 상관에게 보고하고 이에 궁내 사무관 구로사와가 결재를 핑계로 의친왕을 만나려 했으나, 거절당했다. 거듭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막무가내로 의친왕을 만나려 했고, 결국 의친왕의 탈출은 발각되고 만다.

이에 일본은 필사적으로 의친왕의 행방을 계속 끈질기게 추적했다. 의친왕 일행은 11월 10일 새벽, 청운동세검정을 넘어 서울(경성)을 빠져나왔고, 고종 황제가 남긴 150만원의 고액 채권을 전달받는데 성공하는 등 일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결국 의친왕은 11일 만주 안동[23]에서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일본 요네야마 경무관에게 적발되어 붙잡히게 되고,[24] 목표 접선처인 이륭양행[25]을 불과 2km를 코앞에 두고, 상해임시정부행 탈출은 결국, 정말 아깝께 실패하게 된다.

이후 일본은 그에게서 한반도 내에서의 여행의 자유[26]를 빼앗아 사실상 강제 연금(구금) 당했다. 이 시기에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신분상 불문율에 붙혀져 사법 처벌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27][28] 그런데 그는 이런 상태에서도 대동단 총재 명의로 독립선언서를 공포했다. 이후, 총독부 관사에 연금된 채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친일로 전향) 강요를 받았지만 그는 일절 거절했다.

일본 측의 수사 기록에 의하면, 의친왕은 자의로 탈출한 것이 아니고 이 궁하던 의친왕이 일금 3만 원을 빌려준다는 꾐에 넘어가 궁을 몰래 나섰다가 납치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3.1 운동이 한창이던 당시의 사정과 이후 일본이 의친왕에게 대한 태도를 보면, 사실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 가뜩이나 뒤숭숭하던 차에 조선 땅에 거처하면서 황족 중에서 백성들의 신망을 가장 많이 받고 있던[29] 그가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했다는 사실은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일본이 수사 기록을 은폐, 조작했던 것이다. 물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의친왕이 상해 임시정부망명하려 했다고 하나같이 입모아 말했다.

물론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일본 측의 수사 기록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행적과 잘 맞지 않는데다가, 적어도 그의 탈출에 임시정부가 개입된 건 확실해 보인다.

여하간 의친왕의 상하이 탈출 기도사건 이후 일본 측의 감시는 한 층 삼엄해졌다. 사건 이후 총독부는 의친왕을 일본으로 강제 천거할 것을 고려하기도했다. 이후 의친왕은 이전 통감부 관저로 쓰던 총독부 부속 녹천정(綠泉亭)으로 강제 이궁했다.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의 청원 사건에서 연명부에 황족 대표로 이름이 올랐다. 그런데 이 청원서는 실제로 사람들의 서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이름을 올린 위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청원서에 따르면 서상일 등 항일운동가들과 민족종교였던 천도교 등 민족세력 뿐만 아니라 박영효와 같은 친일파들, 마찬가지로 친일괴뢰였던 시천교 등까지 13도와 260여개 군과 각 사회 단체의 대표자 372명이 뜻을 모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자고 서명을 했다는 것이니, 그 자체로 이미 택도 없는 소리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서명과 필체를 확인하여 위작이라고 결론내리고 연명부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에 대한 처벌없이 조사를 마무리지었으나, 여하여튼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이 건의서와 연명부는 이승만에 의해 워싱턴 D.C. 회의에 제출되었다.

경주 최 부잣집 12대 마지막 부자로 알려진 최준을 돕기도 했다. 《경주 최 부잣집 300년 富의 비밀》에 따르면 최준의 호 문파(汶坡)도 의친왕이 직접 지어준 것이며, 최준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막대한 자금을 송금해 주다가, 정작 자신의 백산 무역 회사가 100여만 원의 부채를 급히 갚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채무를 조정하는데 의친왕이 직접 발벗고 나섰다는 것이다.

전국을 유랑하는척 하며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고, 의병양성을 하는 의친왕은 일제에게는 꽤 골치거리였다. 왜냐하면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의 황족들에게 '왕공족'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창설해서 부여했는데, 왕공족은 나름 불체포특권이 있었고, 사법처리를 받지 않을 특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친왕이 상해 임시정부 망명을 시도하다가, 잡혀왔을 때에도 사법처리를 하지 못했다. 급기야 일제는 1930년 6월 12일, 의친왕에게 부여했던 공족으로서의 작위와 전 재산을, 일본에 거주하던 장남 이건(李鍵)에게 넘겼다. 이렇게 명목상이나마 이건은 아버지 이강의 '공'작위를 습공했고, 의친왕궁인 사동궁은 이강공家에서 공식명칭이 이건공家로 바뀌었다.

의친왕이 공 작위를 상실하자마자, 일제는 바로 의친왕을 체포하여 한반도와 가까운 일본 큐슈 지역로 강제 연행했고, 나중에 도쿄로 옮겼다. 자료에 의하면 이 때 일본어로 쓴 각서가 있는데 "이강공은 은퇴하고 공(公)의 칭호와 모든 재산을 장남인 이건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은퇴 후에는 일본에 머물기로 하며, 일본 국내에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다. 의친왕에게는 당시 화폐로 30만 원을 지불하고 의친왕비에게는 생활비로 1년에 12만원씩을 지불한다."라는 등의 내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장남 이건과는 사이가 나빴다. 의친왕의 5녀인 이해경은 《나의 아버지 의친왕》에서 "차남 이우는 총애했음에도 이건은 매우 미워했다"고 술회했다. 을 마시면 이건에게 "일본으로 가서 살아라!"며 버럭 화를 냈으며, 이우가 귀국할 때는 직접 경성역으로 마중 나가놓고서는 이건이 귀국할 때엔 일부러 피하는 등 노골적인 차별 대우가 있었다.

참고로 이건은 평생 생모를 모르고 살았는데 사실 일본인 소생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건 본인도 자신이 조선인 소생인지, 일본인 소생인지 혼란스러워했다. 생모에 대한 정보도 전혀 남아있지 않다. 반면 이우의 생모에 대해서는 꽤 정보가 남아있는 편인데, 이해경 여사의 인터뷰에 따르면 의친왕이 인력거로 기생을 부르는 척하고 독립투사들을 그 인력거꾼으로 꾸며 여러 독립운동 기밀들을 전달했는데 그 일을 이우의 생모이자 측실 수인당 김씨가 도왔다고 한다. #인터뷰기사 또 의친왕이 일본에 끌려갔을때나 상하이로 탈출할때 의친왕을 모시며 중요한 서류와 증서를 맡았던 이도 수인당 김씨라고 한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을 함께 겪고 신뢰가 깊었다보니 그녀와 사이에서 낳은 이우도 편애 했으리라는 추측이 있다.

1930년대에 첫째 딸 이영의 결혼식 참석을 핑계로 일시귀국하였다가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북동 별장, 운현궁, 석파정 등에서 생활하였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씨(氏)가 없는 일본 황실의 예에 따라서, 대한제국 황족들에게는 처음부터 창씨개명이 강요는커녕 아예 말이 한 번도 나온 적도 없기 때문.[30]

2.5. 광복 후 말년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는 김구김규식상해임시정부 각료들과 함께 방문하였고, 의친왕은 운현궁 양관을 김구의 사무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전폭 허락하였다. 김구김규식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한국독립당의 최고위원으로 임명되었고, 하나의 대한민국으로 남북 분리없이 선거를 치르자는 의친왕의 주장과 남한 만의 단독선거를 하여 대한민국을 수립하려는 이승만과 정치적 견해가 달랐다. 결국 의친왕과 가까웠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비밀리에 암살당하거나 실각하고 황실 인사를 철저히 배척하던 이승만이 정권을 잡으면서 황족 재산이 전부 국유화되고 물질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핍박) 당한다. 그러한 혼란 속에서 의친왕은 거주하던 사동궁을 민간에 매각했고, 안국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6.25 전쟁 때는 고종의 자녀들(황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31] 개전 후 불과 3일만에 서울북한 공산군에게 함락당했을 때,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때 의친왕이 거주하던 안국동별궁의 본채는 북한 내무성과 여맹에서 사용했고, 의친왕 일가는 뒤채로 쫓겨났다가,[A] 나중에는 별궁 전체를 빼앗겨 의친왕은 효자동 이석의 집으로, 의친왕비는 근처의 빈집으로 거주지를 옮겨야 했다고 한다.[33] 그런데다 전쟁 발발 후 정부가 지원하던 생활비가 완전히 끊기게 되면서 의친왕은 극도로 궁핍해졌고,[A] 피죽만 겨우 먹는 생활을 했다.[35] 이후 1.4 후퇴 무렵에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70대의 노구를 이끌고 피난을 하려니 상당한 고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식사를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영양실조 및 각종 질병에 내내 시달렸다.

휴전 후 안국동별궁으로 돌아왔고, 1955년 8월 16일, 영양실조 후유증스트레스(화병) 등의 합병증으로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하기 며칠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 가회동 성당 제3대 주임 박우철 바오로 신부로부터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성사를 받았다.[36][37] 과거의 인기가 무색하게 신문들은 짤막하게 "사동궁주(사동궁의 주인) 이강이 졸(卒)했다"는 기사만 한 귀퉁이에 내걸었다고 한다.
의친왕과 사동궁 이야기(영상)

사후 어머니 귀인 장씨의 묘소가 있는 광진구 능동 의왕릉 묘역(현 어린이대공원 일대)에 묻혔다가 서삼릉 묘역으로 옮겨졌다가 의친왕의 자녀들이 홍유릉 묘역에 매장된 의친왕비 김씨와의 합장을 추진해 1996년, 시신을 이장해 합장묘로 조성했다.[38]

3. 여담

4. 자녀와 후손

위장이었든 진짜 모습이었든 탕아답게 그는 여러 처첩을 두고 자식도 많이 낳았다. 현재 인정된 자녀는 총 12남 9녀. 다만 본처인 김덕수와의 사이에서는 자녀를 낳지 못하는 바람에, 의친왕의 후손들은 전부 서출이다. 고종의 자녀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두었다.

의친왕이 많은 자손을 둔 것은, 그의 존재가 대한제국 황실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고종황제의 후손들이 전부 의친왕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의친왕의 이복형인 순종황제는 후손이 아예 없었다. 영친왕은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 이진은 갓난아기 때 죽고, 장성한 작은아들인 이구도 후손 없이 사망했다. 이복여동생 덕혜옹주의 외동딸 소 마사에(정혜)도 후손 없이 의문사했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고종황제의 후손들은 모두 의친왕계이다.

의친왕의 자녀들 중 일제강점기일제에게서 인정받은 사람은 이건이우 둘뿐이다. 나머지 자녀들은 실질적으로 의친왕의 자녀들로 인정되었지만, 일제에게서 인정받지 못해 법적으로는 호적도 없는 사생아가 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이씨로 만들기 위해 다른 종친들에게 양자, 양딸로 각각 입적시켰다.# 그 중 아들들은 남계 자손이 끊긴 황족의 대를 잇는 명목으로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입적했지만[48], 대를 잇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던 딸들은 가장 가까운 촌수의 종형제인 이기용에게 일괄 입적했다.

의친왕의 사동궁가는 6남 이곤으로 계승되었고 현재 이곤의 장남 이준이 의친왕가의 장손으로 사동궁 사손(嗣孫)이다.



사동궁가 인명 목록
아래는 법적으로 확실히 의친왕의 자녀로 인정된 황손들이다.
아들
순서황실명아명항렬명생모
1남이건(李鍵)이용길(李勇吉)-수관당 정씨
6남이곤(李錕)[49]이명길(李明吉)-수인당 김흥인
8남이현(李鉉)이경길(李敬吉)-수경당 김창희
9남이갑(李鉀)이충길(李忠吉)이해룡(李海龍)함개봉
10남이석(李錫)이영길(李英吉)이해석(李海錫)홍정순
11남이환(李鐶)이문길(李文吉)이해선(李海瑄)김혜수
12남이정(李錠)이정길(李定吉)이해준(李海俊)홍정순
순서황실명아명항렬명생모
5녀이공(李玜)이길상(李吉相)이해경(李海瓊)김금덕[50]
6녀이장(李璋)-이희자(李禧子)김혜수
7녀이용(李瑢)이숙기(李淑基)이해란(李海蘭)홍정순
8녀 이현(李現)이숙향(李淑香)이해련(李海蓮)홍정순
9녀이민(李玟)--김혜수

다음은 출계하여 법적으로는 의친왕의 자녀가 아닌 황손들이다.
아들
순서황실명아명항렬명생모출계
2남이우(李鍝)이성길(李成吉)-수인당 김흥인운현궁 종가의 영선군 이준용
3남이방(李鎊)이흥길(李興吉)이해진(李海鎭)수현당 정운석소현세자파의 이기손#
4남이창(李鎗)이창길(李昌吉)이해직(李海直)조병숙은전군 종가의 이헌용
5남이주(李鑄)[51]이수길(李壽吉)이해창(李海昶)[52]수인당 김흥인인평대군 종가의 이인용
7남이광(李鑛)이형길(李亨吉)이해청(李海淸)[53]송은점계동궁[54]이기용
순서황실명아명항렬명생모출계
1녀이영(李玲)이길순(李吉順)이해완(李海琓)수덕당 이희춘계동궁이기용
2녀이진(李珍)[55]이길운(李吉雲)이해원(李海瑗)수덕당 이희춘계동궁의 이기용
3녀이찬(李瓚)이길련(李吉蓮)이해춘(李海瑃)수완당 김정완계동궁이기용
4녀이숙(李琡)이길영(李吉英)이해숙(李海琡)수길당 박영희계동궁이기용
5녀이공(李玜)이길상(李吉相)이해경(李海瓊)김금덕계동궁이기용[56]

의친왕의 장남 이건모모야마 켄이치라는 이름으로 1955년 일본으로 완전히 귀화했고, 그 후손들도 일절 황실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정말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의친왕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표에서 보듯이 2남부터 5남까지는 전부 다른 왕족들의 양자로 갔기 때문에 의친왕의 가계는 6남 이곤[57]이 이었고 현재도 이곤의 후손들이 의친왕의 제사를 받들고 있다. 사동궁의 현재 사손인 의친왕가 종손 이준을 중심으로 의친왕기념사업회가 2022년에 설립되어 의친왕 기신제를 주관하고, 의친왕 유물전시와 학술회 등을 진행한다. 그리고 상술했듯, 2, 3, 4, 5, 7남이 양자로 갔기에, 현재의 운현궁가, 은전군가, 대궁가, 계동궁가의 후손들 역시 모두 실제로는 의친왕의 자손들이다.

2023년 9월 기준, 의친왕의 아들은 총 3명이 살아있다. 그 중 10남 이석만이 유일하게 한국[58]에서 사는데, 이 때문인지 '마지막 황손'으로 잘못 알려졌다. 11남 이환[59], 12남 이정[60]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이구의 사후, 회은황세손양자가 되어 황실의 후계자(황사손)가 된 사람이 의친왕의 9남 이갑의 아들인 이상협(이원)이며 이갑2014년 12월 13일 미국 뉴욕 롱 아일랜드 자택에서 향년 7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리고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2남 이우의 아들인 이청 또한 생존해있다. 이우야스쿠니 신사 합사와 관련된 KBS1 8.15 광복절 다큐에서 등장한 바 있다.

그리고 의친왕의 딸은 총 5명이 살아있는데, 그 중 그나마 대중들에게 알려진 사람으로는 다섯째 딸 이해경(황실명 이공)이 있다. 그리고 8녀 이해련(황실명 이현)의 딸은 탤런트 박승아로 KBS 2TV 청소년 드라마 〈스타트〉 등에 출연했다.

5. 기타 사항

5.1. 학위

5.2. 상훈

5.3. 종교

5.4. 경력

6. 대중매체에서

7. 참고 문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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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 혈통이 아닌 족보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며, 실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관계임
※ 왕족 / 황족으로서 정식 봉호가 있는 사람만 기재함
※ 은신군은 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후사를 이었으나 당시에는 장조 의황제의 아들로 간주하여 그 후손들에게 황족 작호를 수여함
※ † 기호는 사후 추증된 인물이며, 흥선헌의대원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수립 이전 사망한 왕족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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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2월 16일.[2] #[3] 1945년 광복과 1947년 5월 3일 신헌법 시행으로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왕공족 지위 역시 상실하였고, 무일푼 평민이 된 이건은 장남으로 물려받았음에도 생활이 궁핍하여 사동궁의 계승 자격을 버리면서도 대한 황실과 절연하고, 아예 창씨개명을 하면서 완전한 일본인으로 귀화해버렸다.[4]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아들들 중 이름을 하사받은 완친왕 선(墡), 순종 척(坧), 의친왕 강(堈), 영친왕 은(垠), 육(堉), 우(堣)는 모두 항렬자 에 흙 '토(土)'변을 공유한다. 대개 같은 의 아들들은 이름자에 같은 부수를 공유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고종황제의 사가(私家) 일원인 흥선대원군과 그 형제들의 손자 이름도 항렬자를 제외한 이름 글자에 '흙 토(土)'변이나 '흙 토'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흥녕군의 손자 이기용(李鎔),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鎔)과 이규용(李鎔), 그리고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鎔)과 이문용(李𪣢(土 + 汶)鎔), 그리고 이관용(李土+灌鎔).[5] 부장이란 계급은 현대의 중장과 동일하다.[6] 작호는 평안도 의주에서 유래했다.[7] KBS1 역사추적 18회 (2009.4.11.방송)[8] 일부 기록에서는 영유아 시절 요절아들들을 포함하여 5남으로 표기하기도 하지만 성인까지 장성한 아들 중 장남 순종 다음으로 실질적인 차남이다.[9] 1905년(광무 9년), 을사늑약 직후 의병 운동을 독려, 지원했으며 이후 꾸준히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탈출하려고 시도도 직접 했단 점에서, 일본에 매우 협조적이었던 장남 이건과는 달리 독립운동가로 볼 수 있다. 의친왕의 고모부들과 고종사촌들도 독립운동에 가담했는데, 의친왕과 달리 공식적으로 독립유공자 명단에 있다고 한다. 의친왕은 아직까진 독립유공자로 공식 선정되지는 못했다.[10] 간혹 자료에 따라서는 고종의 5남으로 기록된 곳도 있는데 이는 의친왕보다 먼저 출생한 완친왕, 2남, 4남은 요절하고 장성한 자식은 3남 순종과 의친왕, 영친왕 뿐인데 어려서 요절한 왕자까지 포함하여 5남으로 표기하기도 한다.[11]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12] 훗날 김란사파리 강화 회의에 밀명을 받고 참석한다.[13] 1900년(광무 4년) 양력 8월 17일 '친왕' 신분의 '의왕'(義王)으로 책봉했다.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자를 책봉하다.[14] 정확히는 경응의숙을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 제11기로 들어간 21명.[15] 의왕 이강에게 옥책과 금보를 주다.[16] 내명부엄귀비의 파워가 막강했고 의친왕의 모친이었던 귀인 장씨는 이미 사망했으며 앞서 있었던 일심회(一心會) 사건엄 귀비와의 다소 껄끄러운 관계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 또한 가계가 알려지지 않은 생모 귀인 장씨의 출신이 천민이라는 설도 있고, 여러 요인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17] 거창군에서 편찬한 《거창군지》를 제외한 다른 기록에는 관련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 기념표창자명감》에 기록된 정태균의 기록에 따르면 오히려 정태균은 당시에 거창군폭도를 진압하기 위하여 수비대를 위해 주택을 개방하고 임시 막사를 제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정태균은 조선총독부의 시책에 협조해 기념 표창까지 받은 친일적인 인물로서 독립운동을 할만한 인물은 결코 아니다. 정범준의 《제국의 후예들》, pp.396 ~ 397에 관련된 내용이 상세히 적혀있다.[18] 상하이에서 이상설,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열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19] 경성으로 잠입한 외교부장 성락형을 비롯하여 의친왕의 장인 김사준, 김사홍, 김승현, 변석붕, 김위원, 심인택, 박봉래, 정일영, 염덕신, 이경창 등 관련자가 1915년 이후 전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20] 봉오동 전투의 주역이다.[21] 다만 이 선언이 신상 노출을 이유로 상해 망명에 독이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김가진이 왜 작위를 버리지 않고 상해임시정부로 망명했는지 생각해보자. 독립운동가 서훈은 받지 못했지만 그의 생전 상해임시정부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국가정보원 블랙요원과 같은 이유로, 화이트 요원은 신상이 공개되어있다는 이유로 첩보 활동 등에 제한적이기 때문이다.[22]일진회 인사로, 옛날에 부평군수를 지낸적이 있었다.[23] 지금의 중국 단둥 접경지역.[24] 당시 기록에 따르면 요네야마가 변장한 의친왕을 발견하자 바로 다가가 "어디를 가고 계십니까 전하?"라고 말하며 붙들었다고 한다.[25]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계 영국인인 조지 루이스 쇼가 단둥에 세운 무역회사로 표면적으로는 영국인의 사업체지만, 실제로는 상해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의 사무소가 이곳에 설치되어 독립운동 자금 수합처가 되기도 했으며, 중국으로 탈출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교통편을 지원해주기도 했다.[26] 당시는 황족에게 허용된 유일한 특권이었다.[27] 의친왕은 비록 명목상일지언정 엄연히 구 대한제국 황족이므로 일본 제국에서 예우해야 하는 최상위특권 계급이었기에 천하의 일제조차 한국 황족에게는 사법적 제재를 가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의친왕 본인은 끝까지 일제에게 예우받기를 꺼렸다.[28] 당시 신분은 왕공족 신분으로서, 일본 천황가보다는 낮고 일본 화족(귀족)보다는 높은 애매모호한 신분이었지만, 이왕가의 모든 구황실 일원들을 일본에서는 '전하(殿下)'라 존칭하길 명했다고 한다.[29] 당시의 신문 광고나 전단을 보면 그저 '전하가 칭찬하신 고무신', '전하가 애용하는 위장약' 등의 광고 카피가 보이는데 당시에는 앞에 아무 말도 없이 '전하'(殿下)라고 하면 의친왕을 가리켰다고 한다. 광고에까지 이용될 정도의 인기였음을 알 수 있다.[30] 창씨개명 자체가 조선인 동화 정책의 일환이었으며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여러 제도적 불편함을 주어 개명절차를 밟도록 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당시 이왕가(李王家)는 동화를 유도할 필요도 없었고, 강요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왕가 자체는 일본 천황이 직접 봉한 왕공족이니 '신민'에 불과한 일본 정부가 감히 이 이름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었다. 설령 바꾼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했을 때 일본 정부가 어떤 사회적 불편함을 줄 수도 없었다.[31] 고종의 9남 4녀 중 5남 3녀는 유아기에 사망. 완친왕조선 시대였던 1880년(고종 17) 사망. 순종일제강점기였던 1926년 사망. 영친왕덕혜옹주는 전쟁 후인 1970년1989년에 각각 사망했으나, 전쟁 당시에는 둘 다 일본에 거주.[A] 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91쪽.[33] 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96쪽.[A] [35] 그나마 그 피죽도 딸 이해경이 목숨걸고 어렵게 겨우 구한 것이라고 한다.[36] 의친왕은 사망하기 전에 천주교회에 귀의할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조부 흥선대원군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킨 것(병인박해)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으며, 1955년 8월 9일을 기하여서도 의친왕 이강은 천주교 교우이던 구 황실(舊 皇室) 서무계장과 부통령을 지낸 장면 등과 자주 연락하곤 했다.[37] 아내 김덕수도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이복동생 부부 영친왕이방자 여사도 각각 '요셉'과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의친왕과 영친왕의 경우는 정식 세례성사가 아니라 비상세례(대세)일 가능성이 높다. 대세라는 건 임종 직전의 세례로, 일반적인 세례와 다른 방식이다. 대세에 관한 것은 여기를 참조.[38] 덕혜옹주 묘역 바로 옆에 조성되어 있다. 이구의 회인원을 지나 따라가다보면 전답이 나오기 직전 구릉 두 개가 보이는데 이 중 더 먼 쪽. 다만, 명목상 석물(석등)이라도 조금 있는 바로 옆 덕혜옹주 묘와 달리 의친왕의 봉분은 쓸쓸하게 재실도 묘비도 신도비도 조성되지 않았다.[39] 李元淳, 1988, 《世紀를 넘어서 : 海史 李元淳 自傳》,新太陽社, 106쪽.[40] 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195쪽.[41] 그래서 의친왕은 사격술권총 사격술에 뛰어나 백발백중이었다 한다. 일제강점기 당시 가 나면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사격권총술화풀이를 했다고 한다.[42] 사실 흥선대원군이 자신과 성격, 기질이 가장 닮았다고 생각한 손자는 장손 영선군이지만 영선군친일 테크. 외모는 할아버지 흥선대원군보다는 아버지 흥친왕을 닮았다.[43] 현재는 크라이슬러 산하 브랜드가 되었다. 크라이슬러의 프리미엄 SUV인 지프 그랜드 체로키의 고급 버전도 이름이 오버랜드다.[44] 김완섭에게 사랑받는 학자이니 알아서 잘 판단하자.[45] 그러나 의친왕의 염세주의적, 즉흥적인 성정을 고려해 보면 오히려 그럴 만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46] 2023년에 개정판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이 출간되었다.[47] 출처: 이해경, 2023,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유아이북스, 220쪽.[48] 이우는 예외. 의친왕의 아들로 인정받았음에도 당숙 이준용사망하자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양자로 입적했다.[49] 대한민국 공무원정치인까지 두루 역임했기에, 의친왕가에서 유일하게 정치 당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다. 또한, 이곤의 아들인 이준 황손이 의친왕의 궁호였던 사동궁을 사손(嗣孫)으로서 현재까지 계승하고 있다.[50] 제 1,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두 번 다 낙선했다.#[51] 1917~1982. 대한민국 외교관까지 역임했으며, 이후 이한주(1943~2011)를 거쳐 이덕(1973~)을 통해 안평대군 종가가 이어진다.[52] 호적에는 이해일이라는 이름으로 올라가있다.[53] 의친왕비가 작성한 황손 계보도에는 이해창(李海昌)으로 적혀있으나 사동궁에서 잘 쓰지도 않는 호적상 이름이라 헷갈려 오기한 것이라고 한다.[54] 영조의 이복동생 연령군 이훤의 종가. 흥선대원군의 큰형 흥녕군의 가계다.[55] 후술하겠지만 2006년 대한제국 황족회에서 여황제로 옹립한(…) 그 분 맞다.[56] 1954년 의친왕비 호적에 정식으로 입적되었다.관련기사. 단, 법적 이름은 이해경이 맞다.[57] 1919~1984. 대한민국 국회사무처에서 근무했었다. 1984년 이곤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뒤 아들 이준(1961년생)이 사동궁을 현재까지 잇고 있다.[58]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전주 한옥마을에 '승광재(承光齋)'라는 한옥 집에서 국가에서 약간의 문화재 전승/계승에 대한 보조금(국비 세금)을 받으며 산다. 약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석 문서 참조.[59] 아명 이문길[60] 아명 이정길[61] 정식 세례가 아니라 비상 세례(대세)였을 가능성이 높다. 대세(代洗, Emergency Baptism)라는 건 임종 직전의 세례로, 일반적인 세례와 다른 방식이며 정식 예식 절차를 생략하고 세례하는 방식인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세례명은 '비오(Pius)'이다.[62]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이다.[63] 이은성 작가와 이병훈 PD의 작품 중 하나다.[64] 단, 드라마판에서는 의친왕이 황위를 잇지 않았다고 나온다. 혈통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1916년황실적장자가 해방 후 황실을 다시 복원해 황제가 되었다고 나오는데 의친왕은 적장자가 아니므로 순종순정효황후 사이에 태어난 황태자가 있음을 가정한 듯하다.[65] 사실 순종도 군왕의 적자가 아니었다면, 이름이 '李坧'일 리 없었을 테고, 평범하게 항렬자를 사용해 '이○용'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66] 이강이 없다면 고종이나 이척 같은 다른 무능한 황족에게 황위가 돌아가는데 이러면 개화파의 개혁이 무산될 가능성이 컸다.[67] 정확히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1955년까지의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사카모토 료마의 존재는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사카모토 료마가 유명해진 건 소설 료마가 간다가 출간된 1962년 이후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