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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8:53:12

미천왕

을불에서 넘어옴
파일:고구려 군기.svg
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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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15대 국왕
미천왕 | 美川王
파일:서대총.jpg
미천왕릉으로 추정되는 서대총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f2023>280년대 추정[1]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331년 2월 (향년 40~50대 추정)
고구려 국내성
능묘 미천원(美川原)[2]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15대 국왕
300년 9월 ~ 331년 2월 (30년 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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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본관 <colbgcolor=#fff,#1f2023>횡성 고씨
성씨 고(高)
을불(乙弗) / 우불(憂弗)[3] / 을불리(乙弗利)[4]
조부 서천왕
부모 부친 고돌고
모친 미상
왕후 왕후 주씨
자녀 태자 고사유
왕자 고무
시호 미천왕(美川王)
호양왕(好壤王)[5] }}}}}}}}}

1. 개요2. 생애
2.1. 비운의 유소년기2.2. 왕위 등극2.3. 영토 확장2.4. 왕권 강화2.5. 사망
3. 사후4. 미천왕의 능5. 이름 관련 이야기6. 《삼국사기》 기록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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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予野人, 非王孫也。請更審之。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
즉위 이전, 창조리의 부하들이 자신을 찾아내자 의심하며 한 말.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유일한 말이다.
고구려의 제15대 태왕. 몰락한 왕족으로 어린 시절 큰 고생을 겪어야 했지만 유년 시절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였던 큰아버지인 봉상왕을 국상 창조리의 도움으로 처단하여 고구려의 새 임금이 되었고, 영토 확장 및 왕권 안정화로 고구려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태왕이다. 즉 고구려 전성기의 뿌리를 마련한 명군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사 최악의 고인능욕을 당한 비운의 군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비운의 유소년기

훗날 미천왕이 되는 을불은 서천왕의 차남 돌고의 아들로서 고위 왕족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292년 3월 백부 봉상왕이 왕권 강화를 빌미로 친족들을 경계하면서부터 그의 수난이 시작된다. 즉위 직후 숙신을 격파하며 영웅으로 떠오른 숙부 안국군 달가를 반역으로 몰아 처형함에 이어[6], 이듬해 9월에는 친동생인 돌고까지 숙청해버렸고 이 때문에 드라마틱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아버지 돌고가 처형당하자 을불은 필사적으로 도주하여 간신히 살아남았고, 촌구석인 수실촌(水室村)으로 도망가 신분을 숨긴 채 음모(陰牟)라는 부자의 집에 머슴으로 살게 되었다. 하지만 음모는 을불이 왕족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을불은 죽어라 고생만 해야 했다. 낮에는 땔나무를 해오며 잠시도 쉬지 못했고, 밤에는 주인집 연못의 개구리[7]가 시끄러워 주인이 잠을 못 잔다고 들들 볶아 밤새 연못에 기와나 돌을 던지기도 했다.

결국 고된 머슴살이를 버티지 못하고, 1년만에 음모의 집에서 나와 소금 장수 재모와 만나 동업했다.[8] 소금 장수가 된 이후에도 불우한 생활은 매한가지였다.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마친 후에 압록강에 이르러 소금을 내려놓은 뒤 강 동쪽 사수촌(思收村)[9]에서 어떤 노파의 집에 머물렀다. 하룻밤 묵었을 때 그 집의 노파는 한 번 공짜로 소금 1말을 얻어갔는데, 숙박비로 준 소금을 더 달라는 것을 을불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노파는 을불이 잠든 사이 소금 가마니에 몰래 신발을 집어넣었다. 이후 노파는 짐을 지고 길을 떠나는 을불을 쫓아와 가마니 속에서 신발을 찾아내고는 그를 관가에 신고했다.

을불은 이 때문에 도둑으로 몰리게 되었다. 압록강 변의 재(宰)[10]팔랑귀처럼 노파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려 을불의 소금을 모조리 압수하고 신발 값으로 노파에게 준 뒤, 태형을 내려 매를 친 다음 내쫓아 버렸다. 갖은 고생을 한 을불은 골병이 들어 몸이 야위고 옷차림도 남루해져서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다. 이런 처참한 몰골이었으니 그가 왕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국시대 초기임에도 '임금을 받는 머슴', '행상을 포함한 상업' 등의 생활상이 묘사되기 때문에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기도 하다. 이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조선 후기의 생활사라고 해도 믿어줄 정도이다. 사실 한반도의 경우 암염이 없어 해안가에서 소금을 생산해 내륙으로 운송해야 하는 소금 장수가 매우 일찍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3세기 중반 동천왕 대의 고구려에 대해 기록한 《삼국지》 〈동이전〉에서도 "하층민들이 먼 곳에서 쌀, 생선, 소금 등을 운반해 귀족들에게 공급한다"고 전하여 소금 장수의 존재가 검증된다.

2.2. 왕위 등극

한편 봉상왕은 날이 갈수록 포악해져 폭정이 심화되었다. 지진과 서리, 우박, 가뭄 등이 잇달아 일어나며 흉년이 지속되고 백성들의 굶주림은 극에 달하였지만, 봉상왕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궁실을 더 사치스럽고 웅장하게 짓는 데에만 치중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자주 시정을 건의하였음에도 왕은 따르지 않았고, 국고는 더욱더 바닥나고 있었다. 298년 11월에는 사람을 시켜 을불을 죽이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창조리가 간언하기를, "하늘의 재난이 거듭 닥쳐 흉년이 드니 백성들이 살길을 잃어 장정들은 사방으로 떠돌고 늙은이와 아이들은 구렁텅이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지 않으시고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몰아서 토목공사로 고달프게 하시니, 만 백성의 부모가 되신 뜻에 크게 어긋나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웃에 강하고 굳센 적이 있는데, 만일 우리가 피폐해진 틈을 타서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찌 되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헤아리소서."라고 하였다.

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임금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존재이다. 궁실이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얻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창조리가 말하기를,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인(仁)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간언하지 않는다면 충(忠)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분에 넘치는 국상의 자리에 있기에 감히 말씀드리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들의 칭송을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가? 다시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봉상왕 9년(300년) 8월조 #
2년 후인 300년 8월 봉상왕은 궁궐을 수리하기 위해 온 나라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15세가 넘는 이들을 징발하였는데, 당시 백성들은 먹을 것이 모자라고 일이 괴로워 정처없이 떠돌아다녔다. 이에 국상 창조리는 백성들의 괴로움을 헤아리고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여 궁궐 수리를 그만둘 것을 간하였지만, 봉상왕은 창조리가 자신을 비방함으로써 백성들의 칭송을 바라는 것이냐며 무시했다. 그럼에도 창조리가 뜻을 굽히지 않자 봉상왕은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 싶은가"라고 답하며 오히려 목숨을 위협했다.
이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려고 먼저 북부의 조불(祖弗)과 동부의 소우(蕭友) 등을 보내 산과 들을 물색하여 을불을 찾게 하였다. 비류강 기슭에 이르렀을 때 한 사나이가 배 위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비록 용모는 초췌했지만 행동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라 짐작하고 나아가 절을 하며 말하기를, "지금 국왕이 무도하여 국상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하려고 몰래 꾀하고 있습니다. 왕손께서는 행실이 검소하고 인자하셔서 사람을 사랑하시므로 선왕의 업을 이을 수 있다고 하여, 국상이 저희들을 보내 맞이하게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하기를, "나는 야인이지 왕의 후손이 아닙니다. 부디 다시 살펴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소우 등이 말하기를, "지금의 임금은 인심을 잃은 지 오래되어 진실로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으니, 청컨대 의심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마침내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니, 창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오맥(烏陌) 남쪽 집에 모시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원년(300년) 8월조 #
참다 못한 창조리는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 물러 나와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는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조불과 소우를 비밀리에 파견하여 산과 들을 물색해 돌고의 아들인 을불을 찾아오게 했다. 비류강 기슭에서 을불을 만난 이들은 자기를 잡으러 온 줄 알고 애써 부인하는 을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창조리에게 데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300년 9월, 봉상왕이 후산(侯山) 북쪽에서 사냥을 하자 창조리를 비롯한 신하들도 같이 사냥터에 갔다. 창조리는 다른 신하들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나를 따라하라"고 말한 뒤 머리에 쓰고 있던 관에 갈댓잎을 꽂았는데, 이에 모든 신하들이 그를 따라했다. 민심이 자신의 편임을 확인한 창조리는 함께 반정을 일으켜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모셔다가 옥새와 인수를 바치어 즉위하게 했다. 봉상왕은 얼마 후 병사들로 포위된 감옥에서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살했다.

다만 을불의 생애는 태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순탄치 않았다. 즉위년 하반기에 자연 재해나 괴이한 현상이 연거푸 나타나는 걸 볼 수 있는데 이는 미천왕 즉위 직후의 불안정한 정국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있다. 아무리 봉상왕이 폭군으로 폐위되었어도 어쨌든 정상적으로 계승한 것은 아니었으니 정국이 혼란하거나 불안정한 상태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미천왕을 즉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국상 창조리, 조불, 소우 등은 이후 《삼국사기》에서 기록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창조리는 국상이었던 데다가 《삼국사기》에 개인 열전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인데도 미천왕 즉위 이후에는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공신으로 대접받다가 머지 않아 사망했을 수도 있지만[11] 반대로 정치적 혼란 와중에 제거되었거나 토사구팽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

2.3. 영토 확장

즉위 이후에는 그동안 비축되었던 국력을 바탕으로 태조대왕 이후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서쪽 및 서남쪽 요동 지방으로의 진출을 줄기차게 시도했다. 마침 중국삼국을 통일한 서진이 혜제 사마충 같은 암군들의 치세를 거침과 동시에 팔왕의 난, 영가의 난 같은 대형사고들이 연이어 터지는 등 혼란스러운 상태였기에 고구려가 변방을 공격해도 제대로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미천왕은 이 기회를 잘 살려 302년 9월 30,000명의 병력으로 현도군을 공격해 8,000여 명을 포로로 사로잡아 평양[12]으로 옮기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고, 311년 8월에는 압록강 하구에 위치한 서안평을 점령하는데 성공하여 요동군과 낙랑군 사이 육로를 차단시켜 남쪽의 낙랑군을 중국 본토에서 떨어진 월경지로 고립시켜 버렸다.
14년(313년)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15년(314년) ...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 #
요동 사람 장통은 낙랑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와 수 년에 걸쳐 서로 공격했으나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 사람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서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13]
자치통감》 〈진기〉 건흥 원년(313년) 4월조 #
영토 확장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단연 낙랑군과 대방군 점령이다. 313년 10월에는 낙랑군, 이듬해인 314년 9월에는 대방군을 멸망시켜 고조선의 고토를 수복했고 평안도 지역의 비옥한 평야 지대를 확보하여 국력을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14] 이는 고조선한사군 이후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발전된 도시였던 평양과 그 일대에 대한 한족 지배를 고조선 멸망 이후 400여 년만에 청산한 것이다.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그만큼 한족의 세력이 계속 그 지역에 강하게 남아 있었고 강한 고대 왕조 한나라의 지속 기간이 길었으며, 고구려는 국내성 인근의 척박한 맨땅에서 시작해 이들과 치열하게 싸우며 성장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관점 외에도 낙랑군과 대방군은 중국의 수준 높은 문화와 기술을 누리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이 세력을 흡수한 고구려와 많은 수의 유민을 받아들인 백제는 모두 선진 문물들을 받아들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서북한은 새로 얻은 땅이지만 순식간에 고구려 국력의 기반으로 가장 중요한 땅이 되어 100여 년이 지난 뒤 장수왕이 수도를 이곳의 평양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후 고구려는 힘을 더 길러 광개토대왕 때 요동으로 진출해 중국 왕조와 본격적으로 경쟁한다.

또한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하여 중국과 낙랑군 및 대방군을 단절시키고, 이내 낙랑과 대방을 고구려가 멸망시키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드디어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원래 고구려와 백제는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로 동류 의식이 있어서 외교 관계가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책계왕 때 고구려가 침공한 대방을 백제가 구원하면서 나빠지기 시작한 양국의 관계는 미천왕이 한사군을 멸망시키면서 국경을 직접 맞대고 대치하는 사이가 되자 완전히 파탄에 이르고 험악하게 변해 버린다.

낙랑과 대방 점령에 가려져서 그렇지, 서안평을 고구려의 영토에 공식적으로 편입시킨 것 역시 중요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서안평은 중국 단둥시(구 안동시) 일대를 가리키는데 쉽게 말하면 압록강 하류 용천평야 일대라고 보면 된다. 옛날부터 고구려가 황해 진출을 위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다. 그래서 이 땅을 태조대왕 때부터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당시 요동 세력들의 방해로 온전히 고구려 영토로 편입시키지 못했는데, 이것을 미천왕 대에 와서야 이루게 된 것이다.[15]

서안평을 차지함으로써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황해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일부 역사학자들은 수군의 기반을 닦은 왕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하는데, 서안평은 중국 만주 지방에서 가장 험한 지형을 자랑하는지라 지상군으로는 도저히 점령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어쨌든 수군을 동반한 수·륙 양진을 해야 점령이 가능했다는 것으로 미천왕 때 이 땅을 점령했다는 것은 곧 수군의 기반을 닦았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제 미천왕은 칼 끝을 요동으로 돌리지만, 요동은 지리적 요충지라 노리는 세력이 고구려뿐만은 아니었다. 그 중 선비족 모용부가 가장 강력해 보였기에 319년 12월 진나라 평주자사 최비의 아이디어로 우문부, 단부와 짜고 모용선비를 분할 점령하는 작전에 고구려군도 참가하게 된다. 작전은 실행에 옮겨져 고구려군은 모용선비의 수도인 극성(棘城)을 포위했으나 모용외의 계략에 걸려들어 물말아먹고 끝났다. 모용외는 극성에서 문을 닫고 지킨 채로 사자를 파견해 소고기을 우문부에만 주자, 고구려와 단부 등에서는 우문부와 모용외가 모의했다고 의심해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결국 우문부만 남아 단독으로 공격했지만 역으로 모용외한테 대패했고, 우문부를 이끌던 우문실독관은 겨우 몸만 빠져나갔다.

이 작전을 계획한 평주자사 최비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모용외에게 쫓기게 되자 결국 가족들과 함께 고구려로 망명했다. 한편 고구려의 장수 여노자는 이때 하성(河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파견한 장통의 군대에게 습격당해 1천여 가구의 주민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다.

고구려가 요동 진출을 100년 앞서 실현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지만, 이 작전이 실패한 탓에 모용선비는 전연건국해 요동은 물론 화북 지방까지 석권하는 강대국이 되어 고구려를 괴롭혔다. 이후로도 모용외와 미천왕은 서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일진일퇴의 공방을 이어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미천왕은 꾸준히 요동을 노렸으나 철저히 모용선비에게 격퇴된다. 이미 고구려와 모용선비의 대결은 모용선비에게 승기가 넘어가기 시작했고, 후에 주변 선비족들을 흡수통합하여 강대국이 된 전연에게 고국원왕이 처절히 털리게 되었다.[16]

2.4. 왕권 강화

30년 동안 재위했으나, 애석하게도 미천왕의 내정에 대해서는 딱히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17] 다만 왕권이 강해진 시기였다고 추정은 가능하다. 고국천왕 때에 도입된 부자상속제가 혼란기를 거쳐 이 시기에 제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추측이 있는데, 실제로 고국천왕, 산상왕, 중천왕, 서천왕대에는 왕족들의 반란이 연달아 터졌고, 봉상왕의 경우 자기가 불안해서 숙부와 동생을 죽이기까지 했으나 미천왕 대부터 이러한 모습은 사라지게 된다.[18]

또한 을파소 이후 지속적으로 언급이 되던 국상 직위의 언급이 미천왕 대 창조리 이후로 없는 것을 봐도 역시 왕권이 강화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302년 경부터 국상 자리에 대한 언급이 없는 걸로 봐서 미천왕이 국상 벼슬 자체를 전격 폐지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로도 국상 벼슬은 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즉 신라 시대 상대등 같이 제가회의를 이끌고 국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해오던 국상을 굳이 따로 두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고구려의 부총리급 직위인 좌보와 우보를 합친 게 국상이었는데, 국상 벼슬이 생긴 지 200여년 만에 국상 벼슬이 날라간 것이다. 이후 고구려는 대대로막리지가 나올 때까지 국상에 비견될 벼슬이 나오지 않는다.

2.5. 사망

다사다난한 삶을 살던 미천왕은 즉위 32년차인 331년 2월에 아들 사유에게 양위한 후 승하했다. 미천(美川) 언덕에 묻혔으며, 시호를 미천왕이라고 지었다.

3. 사후

이후로도 모용선비와는 악연이 이어져서 그의 아들 고국원왕 대에 모용외의 아들 모용황이 세운 전연의 침공을 받았다. 모용황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와 국내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고구려는 미천왕의 능이 파헤쳐져 시신이 수레에 실려 전연으로 갔으며, 미천왕의 왕후 주씨를 포함해 왕족, 백성 포로 등 50,000명이 잡혀가는 굴욕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미천왕의 시신은 몇 달 뒤 반환되었으나, 주 태후는 인질로 붙잡혀있다가 13년이 지난 뒤에야 고구려로 귀환하였다. 당시 태자였던 소수림왕이 대신 인질로 끌려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며 고국원왕의 태자가 잠시 사신으로 전연에 다녀온 적은 있다. 다만 이 태자도 소수림왕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나중에 전연이 멸망해 태부였던 모용평이 망명해오자 저족이 세운 전진으로 압송하는 것으로 복수한다.

그런데 전진이 멸망하고 옛 전연이 있던 땅에 모용선비족의 후연이 들어서자 2차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미천왕의 손자인 고국양왕이 요동과 현도를 공격해 승리하나 싶더니 그 해 모용농에게 다시 뺏겨서 도로아미타불. 후대인 광개토대왕 때에도 광개토대왕이 백제, 가야, 왜의 연합군과 대치하는 동안 후연이 신성과 남소성을 털어버리는 등 악연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증손자인 광개토대왕후연을 공격, 숙신성을 빼앗고 얼마 안가서 후연이 한족북연으로 대체되었으며, 고손자 장수왕이 북연의 수도 화룡성을 불사르고 그 황제 풍홍을 끌고 와 용성왕으로 강등시켰다가 풍홍이 장수왕한테 까불락거리자 그와 그의 자손들을 처단하는 것으로 미천왕의 원수를 완전히 갚았다. 고구려는 미천왕 대로부터 약 100여년이 흐른 뒤, 증손자인 광개토대왕 대에 가서야 요동을 완전히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모용선비로 보면 무려 모용외 ~ 모용희까지 4대 9제, 고구려로 보면 미천왕 ~ 광개토대왕까지 4대 5왕에 걸친 악연이었다.

4. 미천왕의 능

4.1. 안악 3호분?

1949년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19]의 재령강 북쪽 구릉 서편에서 농리 정리 중 우연히 발견된 안악 3호분[20]의 주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안악 3호분은 고고학자 도유호가 발견했는데 비록 도굴당해서 내부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잘 보존된 벽화들이 있었다.

최초 발굴자인 도유호와 월북 미술사가 김용준 등은 "이 무덤의 주인은 모용황의 아우 모용인쿠데타에 참가했다가 모용인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로 망명한 전연의 장수 '동수(冬壽)'이다"라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진서》와 《자치통감》에 동수가 난을 피해 고구려로 망명왔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무덤 내부에 동수의 생애가 적혀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도 동수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무덤 내부에 기록된 묵서명[21]에 의하면 서기 357년에 축조된 무덤이다.

그러나 북한 사학계에서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왕릉설을 주장하고 있다. 동수라는 글자가 무덤 주인이 아니라 군관의 일종인 '장하독(帳下督)'의 머리 위에 쓰여 있는 점[22], 주인공의 행렬 벽화에 그려진 깃발 옆에 '성상번(聖上幡)'이라는 명문이 쓰여 있는 점, 주인공 초상화에 고구려 왕의 왕관인 백라관(白羅冠)으로 추정되는 흰 비단 모자를 쓰고 있는 점[23]이 주로 거론된다.

이전까지는 왕릉설 내에서도 어느 왕릉인지를 밝히지 못하다가 1963년 주영헌 등의 학자들이 미천왕설을 주장했다. 이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초기에는 국내성 인근에 미천왕의 무덤이 있었는데[24]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가져 갔다가 돌려받은 시신을 다시 묻은 곳이 이 곳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동수가 기록된 것은 시신 반환 또는 무덤 축조에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논지이다.

반면 근래 박진욱 교수는 고국원왕설을 주장했다. 고국원왕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남쪽 평양'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박진욱 교수는 이 기록을 달리 해석하여 '고구려의 남쪽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지방이던 황해도 근처'에 있던 '남평양'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고국원이 남평양 근처였던 이 안악의 언덕이었다는 것이다.[25]

물론 안악 3호분 자체가 철저하게 도굴되어 유골은 물론 부장품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고증은 현재로서는 매우 힘든 상태다. 따라서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영원히 불분명하며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 학계의 추이에 대해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북한 학계는 스멀스멀 존엄이 역사에 개입하는 암운이 드리우다가 19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김씨 일가의 교조화된 연구로 변질되었으며, 민족주의 고취에 초점을 둔 해석이 공식적인 입장으로 표명되기 시작하였다. 안악 3호분을 동수의 무덤이라고 봤던 도유호가 학계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 대표적인 사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 그렇지, 사실 동수묘라고 주장하는 데에는 미천왕설 또는 고국원왕설을 지지하는 북한학계와 자칭 소장파 학자들이 간과하는 근거가 있다.

안악 3호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1. 안악 3호분은 당시 중국 요령성 일대에서 유행하던 형태의 무덤으로서 계보는 당연히 요령성 일대에서 찾아지는 외래계 무덤이며,
  2. 벽화의 구성이나 방식 또한 요령성의 가옥형 석실과 거의 동일하다.[26]
  3. 요령성에서 확인되는 가옥형 석실[27]들에서도 백라관으로 추정됐던 그 관과 똑같은 농관을 쓴 묘주들이 그려진 벽화가 수두룩하다.
  4. 왜 장하독의 머리 위에 묵서명이 써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사실 간단한데, 묘주도가 그려진 전실 서벽의 바로 옆인 북벽의 모서리에 있기 때문이다. 즉 묵서명의 위치는 장하독의 머리 위가 아닌 묘주도의 바로 옆이며, 벽의 위치가 다를 뿐이다. 또한 장하독 1명만 묵서명이 그렇게 소상히 쓰이는 것도 벽화의 구성 전체를 볼 때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묘주도의 설명으로 추정하는 것이다.[28]

'성상'이라고 쓰여진 부분이 지금은 판독하기 쉽지 않은데, 왕릉설을 주장하는 측의 타당한 논거는 딱 그것 하나뿐이다. 이쯤 되면 성상 하나만 갖고 왕릉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각주에서도 있듯이 이미 고구려 고분은 4세기에 적석총을 위시한 국내 지역, 지금의 중국 길림성 집안시 일대에 아주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왜 통구 고분군에 미천왕이나 고국원왕[29]이 묻히지 아니하고, 이곳에 묻혔는가를 결코 설명하지 못하며, 당연히 전문학계의 견해가 아닌 게 수두룩하기 때문에 추가적 연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학계나 국내의 재야학계에서 이 무덤을 미천왕릉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곳이 낙랑군의 고지가 아니라는 것을 피력하기 위함이 근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낙랑군 문서에도 있지만 이 일대는 313년 낙랑군의 축출 이후 서서히 고구려의 직접 지배 영토로 편입되었고, 4세기 당시에는 간접적인 지배의 방식을 채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으로 보는 논리 자체도 허접할 뿐더러 안악 3호분의 묘주에 대한 문제는 고구려의 자체적 행정방식의 변화나 영역 관리 등의 내재적 문제와 전혀 결부되지 않고, 오직 낙랑군은 애초에 평양[30] 일대에 있지 않았다는 식으로 논지를 전개해 나간다.

4.2. 서대총

다만 한가지 함정이라면 고구려 적석총이 집중적으로 축조되는 통구 고분군에서도 완전히 빼박이라고 할 수준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천왕의 무덤은 견해가 모여 있는 편인데, 바로 서대총이라는 것이다.

통구 고분군은 무기단식 적석총부터 계단식 적석총, 적석총의 완성형인 장군총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축조된 고구려의 고분군이다. 확인된 고구려 적석총 수의 90%가 다 이 고분군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도 무방하다.[31] 여기서 왕과 관련되어 주요한 것은 마치 신라대릉원 고분군처럼 누가봐도 왕이 아니면 이 무덤의 주인이 될 수 없을 이른바 왕릉급 무덤들이 10여기 정도가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32] 적석총의 형태 변화에 따른 시간적인 단계별 변화상을 고려하면 10기의 왕릉급 무덤들은 3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형성된 것으로 고구려 왕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지형 왕호를 사용하던 시점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고고학계에서는 미천왕부터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까지가 토론 가능한 근거를 바탕으로 논의되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의 변화 과정은 3세기 이전까지는 무기단식 적석총, 무기단에서 발전한 기단식 적석총이 유행하다가 3세기에 접어들어서는 계단식 적석총이라는 형태로 변화한다. 큰 규모의 적석총을 만들기 위해서 적석분구를 넓히면서 나타나는 형태의 무덤으로써 여기에서 발전하여 계단식 적석총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계단식 적석총의 등장은 4세기 초반의 일로써 서대총이 계단식 적석총의 초현기에 해당하는 왕릉급 무덤이다. 그 외에도 칠성산 211호분과 우산하 992호분이 4세기 전반 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대총에서는 특히나 와당[33]에서 기축년▨▨간리작(己丑年▨▨干利作)이라는 명문이 있기 때문에 329년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적석총 발전 과정상 동일 단계의 적석총우산하 992호에서도 와당에서 무술년의 기록이 나오는데, 33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 적석총의 역사고고학적 편년이나 왕릉 비정이 완전히 일치된 견해가 모여져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서대총을 미천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것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편이다.

분명한 것은 원래 왕릉의 비정이라는 것이 최대한 근거를 모아서 추정되는 것일 뿐이며 무령왕릉처럼 빼박으로 지석이 나온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확정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되지도 않는 얕은 근거만 모아 특정 무덤의 주인을 비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 안악 3호분의 묘주를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이라고 한다면, 한참 고구려와 전쟁을 치렀던 전연의 영역 내에서 확인되는 중국식 무덤을 채택한 것이 된다.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뒤의 상황과 맞는 것이 하나도 없고, 미천왕은 졸지에 장법마저도 중국식으로 바꿨음[34]에도 숙적인 전연에게 털려서 도굴까지 당하는 굴욕 중의 굴욕을 당하는 셈이다.

우산하 992호 무덤이 미천왕의 2차 왕릉일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5. 이름 관련 이야기

하필 이름이 이름인지라 역덕후가 아니거나 고구려의 역사를 처음으로 배우거나 무식하고 장난기가 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미친왕'이라고 놀림감이 되는 경우가 흔하며, 또한 이 군주의 이름을 처음 접한 사람은 단순히 이름만 듣고 진짜로 미친 군주거나 무능한 군주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은근히 많다. 그렇지만 미천왕은 훌륭한 명군이지 절대로 미친왕이 아니며, 오히려 아들 고국원왕이야말로 미친왕이라는 타이틀에 딱 어울린다. 또한 '신분이나 지위 따위가 하찮고 천하다'라는 뜻의 사전적 의미인 '미천(微賤)하다'와는 애초에 한자부터가 다르다.

6.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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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미천왕 본기〉
一年秋九月 미천왕이 즉위하다
一年冬十月 누런 안개가 끼다
一年冬十一月 강한 서북풍이 불다
一年冬十二月 혜성이 나타나다
三年秋九月 현도군을 침략하다
十二年秋八月 서안평을 점령하다
十四年冬十月 낙랑군을 축출하다
十五年春一月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다
十五年秋八月 대방군을 축출하다
十六年春二月 현도성을 공격하다
十六年秋八月 혜성이 나타나다
二十年冬十二月 진의 평주 자사 최비가 고구려로 도망해오다
二十一年冬十二月 요동을 침략하다
三十一年 후조에 사신을 보내다
三十二年春二月 미천왕이 죽다

링크로 들어가 본문을 보면 알겠지만, 즉위년 9월의 기록과 중국 측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제외하면 기록이 상당히 간략하다. 이러한 경향은 〈미천왕 본기〉 이후의 〈고구려본기〉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장수왕 본기〉부터는 기록의 대부분을 중국 기록에서 인용해서 채웠다. 재위가 10년을 넘어가는 왕조차 기록이 매우 간략[35]하고, 자연재해 기록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백제본기〉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7. 대중매체에서

알고 보면 한국에서 제왕을 영웅화하여 다룬 사극의 전형적인 줄거리인 왕실에서 쫓겨남 → 바깥을 방황 → 왕위 찬탈 → 정치 싸움과 정복 전쟁의 구조를 그대로 살아간 인물이다. 한국 사극에서 흔히 나오는 픽션을 위한 무리수들을 모두 고증이 가능하게 가지고 있다.[36] 이렇게 미천왕은 창작물에서 써먹을 떡밥을 고루 갖추고 있는 블루 오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 번도 사극화가 된 적이 없다.[37]

실제로 그의 인생 스토리와 비슷한 줄거리를 지닌 서양 역사 소설 역작이 있는데, 이 소설은 픽션이라면 미천왕의 일생은 사료에서 분명히 증명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강점이 있다. 그리고 저 소설의 주인공인 에드워드 6세는 몇 년 못 재위하고 요절했지만 미천왕은 즉위해서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죽었으며 고구려는 그 사후 수백 년 간 강성한 국가로 남았으니, 이 부분은 왕자와 거지 시대 배경의 직후 이야기인 엘리자베스 1세의 일대기와도 공통점이 있다. 그야말로 역사 매체로써는 매력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소재인 것.
미천왕은 저 모든 것들을 집어넣어도 고증에 문제가 전혀 없을 만한 충분한 근거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지어낼 거 없이 원래 있는 거 그대로만 재현해도 만사 OK로, 인생 자체가 대하드라마. 사실 딱히 각색 없이 대충 써도 충분히 1편의 훌륭한 한국판 사극 드라마가 될 수 있는 스토리 라인을 갖춘 인물이지만, 아무래도 현대의 창작물은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대중에게 익숙한 조선 시대 위주로 지나치게 치중되어 이 시기가 아직까지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비슷한 처지로는 불세출의 소드 마스터 고려척준경이 있다.[39] 미천왕의 인생 역정에 영감을 받고 이 훌륭한 소재를 이름만으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군주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 덧씌웠을 가능성도 있다.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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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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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숙부인 봉상왕이 271년 이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봉상왕 시절인 300년 8월까지 머슴살이와 소금 장수 일을 했던 것으로 보아, 대충 280년대 즈음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2] 미천왕의 능 문단 참조.[3] 이상 《삼국사기》의 기록.[4]위서》, 《양서》와 《자치통감》의 기록. 고대 한국 인명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쪽이 본명이고 을불은 축약 표기일 가능성도 있다.[5] 《삼국사기》 〈미천왕 본기〉에 나오는데, '양'은 고구려식 시법에서 '천'(川)과 상통 관계에 있으므로 '호'가 '미'(美)에 대응된다.[6] 이에 나라 사람들은 "안국군 달가가 없었더라면 양맥과 숙신의 난을 피하지 못했을텐데, 지금 그가 죽었으니 이젠 누구에게 의탁한단 말인가?"라며 눈물을 흘리었다고 전한다. 당시 봉상왕의 무차별적인 숙청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7] 맹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삼국사기》 원문에서는 (개구리 와)라고 기록되었으므로 개구리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8] 머슴살이 때 번 돈으로 장사 밑천을 댔을 것으로 여겨진다.[9] 현대의 의주군 일대로 추정된다. 이 지역은 서안평의 영역으로 당시 중국계 세력의 힘이 미쳤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이곳에서 생활하며 서안평의 지리적 중요성을 깨달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10] 조선 시대수령과 비슷한 직책으로 추정된다.[11] 이 경우라면 반정을 일으킬 당시에 이미 고령의 나이었기에 대업을 이룬 후 은퇴했다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12] 동천왕 시기에 쌓았다는 평양성과 동일한 지역으로 추정된다.[13] 즉 낙랑군과 대방군을 관장하던 장통이 고구려 미천왕(을불리)과 교전하다가 철수한 뒤 왕준과 함께 요서 지역의 모용부로 망명했고, 모용외는 그곳에 낙랑군을 새로 설치해줬다는 소리다. 낙랑군이 점령된 시기인 313년 10월보다 최소 6개월 전부터 이미 미천왕이 한군현 일대에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14] 한 마디로 미천왕 대에 고구려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고구려가 건국된 압록강 상류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이었고, 혹독한 기후에 더해 부족한 생산력까지 있던 고난의 땅이었다. 국력도 그리 크지 않아서 미천왕 이전의 고구려는 분명 동시대 신라, 백제보다는 체계 정비가 빨랐을지언정 대중적 인식상의 한반도요동 지역의 패권국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미천왕의 정복 사업으로 고구려는 서북한 지역의 비옥한 농토를 얻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농업 생산량을 기반으로 후대인 광개토대왕장수왕은 영역을 더욱 확장할 수 있게 되었고, 요동과 부여를 정복해 얻은 동북평원의 생산량까지 더해져 6~7세기 고구려가 중국의 통일 왕조와도 방어전이나마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국력의 기초가 된다.[15] 동천왕 때 서안평을 한 차례 공격했지만 위나라가 보낸 관구검에게 무참히 박살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수도 국내성이 털리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16] 결국 소수림왕 시기를 거쳐 내실을 다진 후 광개토대왕 때가 되어서야 후연을 털어서 힘의 우위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17] 후술하겠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미천왕 즉위 이후 시점부터 내용이 상당히 부실해지기 시작한다. 기록 문화의 정착과 유교적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전승이나 설화적인 내용이 점차 감소한 탓도 있겠지만, 관직 임명을 비롯한 비교적 사실적인 내용조차 줄어든 것을 보면 당시 전해지던 1차 사료의 분량 자체도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18] 장수왕문자명왕의 사례가 있지만 이건 장수왕의 아들이자 문자명왕의 아버지인 고조다가 장수왕보다 먼저 죽어서 손자인 문자명왕이 세습한 사례다.[19] 현재는 북한의 행정구역 마개조로 인해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가 되었다.[20] 안악 1호분과 안악 2호분도 있으나, 이 두 무덤은 도굴로 훼손이 심한데다가 안악 3호분이 비교적 벽화 보존이 잘 되어 유명한 것이다.[21] 먹물로 기록한 문장[22] 즉, 묘주를 동수가 모신 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다.[23]신당서》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 왕은 백라관이라는 관을 썼다고 한다.[24] 실제로 중국 집안 근처에 거대한 규모의 무덤이 도굴당한 채로 발견된 적이 있는데, 그게 모용외가 도굴한 서천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고 미천왕의 원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25] 그러나 고구려 왕의 장지를 왕의 시호로 사용하던 고구려 문화의 특성상 고국원이 남평양 근처일 가능성은 적어보이는데, 고국원(故國原)이라는 단어 자체가 '옛 수도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광개토대왕의 시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역시 국강상(國罡上), 즉 수도 언덕 위에 묻힌 임금이라는 의미이다. 만일 고국원이 남평양 인근이려면 남평양이 고구려에서 수도로 사용되었거나 인식된 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적은 없다. 당대 고구려의 묘지명인 〈모두루 묘지명〉에 의하면 고국원왕의 시호가 '국강상성태왕'으로 나오는 것처럼, 국강상성태왕이 묻혔던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성 천도로 인해 더 이상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게 되었을 때 '옛 수도 언덕에 묻히신 왕'이라는 의미로 '고국'이라는 말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고국원왕이 묻힌 곳은 반드시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어야 한다.[26] 왕이 아니면 이렇게 화려하게 그려질 수 없다고 했던 그런 행렬도도 다 있다. 안악 3호분이 결코 특별한 고구려의 무덤이 아닌 셈이다.[27] 안악 3호분도 그렇고 가옥을 묘사한 무덤이다.[28]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묵서들이 잘 남아 있었고, 지워졌다고 추정되는 부분은 없다. 즉 관리 한 명의 머리 위에 무수한 직책을 쓸 정도였다면 다른 관리들의 머리 위에도 당연히 써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참고로 장하독이라는 직책을 맡은 이의 그림은 안악 3호분에서도 모두 4명이 표현되어 있다.[29] 심지어 이들은 장지형(葬地形) 왕호를 채용했던 시기의 왕들로써 국, 천 등의 지명이 미천왕이나 고국원왕 말고도 더 있다. 광개토대왕 역시 업적을 제외한 명칭으로는 강상왕에 해당한다.[30] 물론 평양에서 안악군까지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다.[31] 물론 범위 자체의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집안 시내를 둘러싼 곳 만큼은 통구 고분군으로 부르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32] 물론 왕릉급 무덤을 왕릉급이라고 인식할 수 있게 짬찌 무덤도 넓고 많이 분포하고 있다.[33] 막새기와[34] 무령왕릉의 전축분이 대표적인 중국식 묘제를 채택한 사례다. 남조와의 교류의 결과로써, 당시 백제는 남조와의 조공관계를 통해 삼국 중에서도 외교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점하고자 했다. 무령왕의 무덤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35] 대표적으로 개로왕, 책계왕을 들 수 있다.[36] 이 정도 역대급 인생을 산 군주는 미천왕 외에는 고려현종이 있다. 현종은 드라마 출연작은 있으나, 극에선 정작 현종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라서 사실 제대로 안 쓴 것과 다름없다. 게다가 그 작품조차도 여러모로 문제투성이였고, 시청률도 망했다. 다만 2023년 후반기에 나온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주인공이 마침 현종이여서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문제는 이 대하드라마도 이정우(각본가)가 명군이었던 현종을 암군으로 비하하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현종이 현쪽이로 불리게되어 현종의 이미지 자체를 완전히 말아 먹어버렸다. 오히려 천추태후에 나온 현종이 재평가받고 있다.[37] 물론 사극화가 한 번도 된 적이 없는 역대 역사시대 군주는 비단 미천왕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시대 나라의 임금들도 꽤 있으므로 미천왕 한 명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미천왕만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군주는 드문데도 사극화가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 아이러니할 따름이다.[38] 드라마 선덕여왕죽방 정도의 캐릭터를 생각하면 될듯하다.[39] 하지만 척준경은 행적 자체가 너무 줏대가 없는 편이라 뭐라 정의내리기 힘든 인물이다 보니 주인공으로 만들기에는 매력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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