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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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후 영향
임진왜란은 조선과, 원군을 보내준 명이 승리한 전쟁이다. 일본의 전략적 목표는 조선의 영토를 교두보로 삼은 명의 침략과 조선 정복이었고[1] 조선의 전략 목표는 일본군을 자국의 영토에서 격퇴하는 것이었다. 도요토미 정권 일본은 원했던 전략 목표를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조선을 떠나야 했고 퇴각 과정에서도 조명 연합의 노량 해전을 통해 철저하게 응징되었으므로 도요토미 정권 일본이 패배한 전쟁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2]전후 처리와 결과 측면에서도 조선은 기유약조를 통해 침공 행위에 대한 공식 사죄와 포로 쇄환 등을 받으며 새로 수립된 에도 막부와 국교를 회복하였다.[3] 광해군 시대 원년에 맺어진 이 기유약조는 한일 양국의 조속한 관계 개선을 원했던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조작으로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사실상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수립한 에도 막부의 공식 입장이 되었고 이후 조선과 일본은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가 동아시아에 도래하기 전까지 우호관계를 구축한다.[4]
1.1. 조선의 전후
▲ 전후 인구 변화 | ▲ 전후 토지 변화 |
조선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문화와 인적 자원도 잃었다. 전쟁은 조선의 경제와 사회를 뒤바꾼 계기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패한 도요토미 정권 일본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고 결국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져 나라의 주인조차 바뀌었다는 점에서 실속없는 전쟁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을 약탈함으로써 얻었던 자원으로 상당한 경제적, 문화적 수혜를 얻었다. 반면 조선은 국가의 멸망을 막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폐허가 된 국토만이 남은 상처 뿐인 승리였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기존 제도를 개혁하게 되었고, 기존의 사회와 문화가 새롭게 뒤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당대 조선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음은 물론 세계적인 관점에서도 초강대국에 가까웠던 명나라조차 척계광 이전까지는 일본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상대로 제2의 도시인 난징까지 위협받았을 정도로 고전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달리 생각한다면 조선이 100년 가까이 전국시대라는 실전 경험을 겪은 총력전의 일본군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5]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이 방화로 없어졌고[6] 종묘와 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모두 소실되었다고 기록한다. 일부 사찰들도 일본군의 약탈당하거나 불에 타버렸다. 약탈된 문화재들은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혹은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조차 전주 사고의 판본 1질만 남기고 다 소실되었다. 그 외의 관련 사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이전 기록이 매우 소략하게 되었으며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7]만 남아 있다.
조선의 경제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농업 및 산업 기반이 대거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15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가 임진왜란 후엔 30만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다. 농업을 제 1의 산업으로 치는 농경국가에서 이정도면 아예 파산상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이는 농토를 조사할 행정력이 일시적으로 붕괴한 것도 크다.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 등의 천재가 겹치긴 했지만 전후 복구가 이어져 이전의 경제력을 급속도로 회복한다. 대략 17세기 초중반에 조선은 전쟁 이전의 경제력을 넘어섰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이라는 중요한 성격도 띈다. 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상호 외교 관계 또한 급격하게 뒤바뀌었다.
임진왜란의 여파는 곧 만주족의 흥기로 이어졌다. 만주족은 급속히 강성해져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명나라로부터 분리시키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임진왜란은 중국에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가 들어서게 만들었고, 조선의 대외관계도 뒤바꾸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조선은 그 폐쇄적인 지형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의 교류 덕분에 임란 이전에 비해 서양과 더 빈번하게 접촉한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조선 내부에 서양식 과학이 소개되고, 청나라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과 명분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국교 회복에 성공하고 청-일 직접 교역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양국 간의 육로 무역을 중개하면서 상당한 무역 흑자를 누리게 된다.[8] 이후 농업 측면에서도 전란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파탄이 역으로 대동법 개혁이 추진되는 동력으로 작용하여 농업 생산량이 급증한다. 국가적 재난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재정비되기도 했다.
군사력의 경우 크게 약화된 것은 아니며 주적인 여진족들을 정벌할 수준의 군사력은 남아 있었는지라 왜란 직후 여진정벌을 나간 기록이 있는데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해서 여진족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9]
전후 조선에서는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 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끝나면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당시로선 고도로 발달한 중앙 집권, 관료제 국가였던 조선은 원래 공직자인 무장들은 물론 향촌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도원수 권율이나 전쟁 이후 의병 활동을 명분으로 집권한 북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휘관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문신이었기에 무장들이 치고 올라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굳이 뽑자면 이순신 정도가 치고 올라갈 여지가 있었고, 선조도 이를 알기에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알다시피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10] 이순신과 김시민의 예에서 보듯이 유능한 무장의 상당수가 전쟁에서 전사했기에 고려 말 신흥 무장들의 집권[11]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바뀐 것이 없다는 편견이 있었다. 전쟁의 피해를 져야할 국왕과 양반 세력이 물러나거나 하지도 않았고, 어떤 정치 체계가 바뀌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워낙 중앙 집권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어 어떤 재난을 겪어도 조선의 통치 체계는 끄떡 없었기 때문이다.[12]
현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일대 국란을 겪고도 체제를 유지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보다 주목하는 추세다. 과거 조선 세조가 심어놓은 사회적 모순이 연산군과 중종 시대를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러 16세기 조선의 사회는 천인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던 노비 국가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개혁할 의지를 보였던 당대 인사도 조광조와 이이 정도밖에 없었다. 이런 국가 체제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며 인구의 감소와 신분을 규정하던 노비 문서 등이 소실되면서 결과적으로 노비의 수가 대폭 감소하게 된 보통 사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는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농노 수가 감소하자 이후 농노에 대한 지위 상승이 이루어지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다만 전란 때문에 국토가 황폐화된 바람에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어진 양민들이 양반들에게 생계를 보장받는 대가로 양반들의 사노비가 되는 협호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 17세기에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3~40%에 이르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해석대로라면 임진왜란은 조선이 보통 사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보통 사회를 노비 국가로 만든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15~16세기 호적자료는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 이 시기의 노비비율은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노비비율을 높인 사건인지 낮춘 사건인지 의견이 서로 갈릴 수 밖에 없다.
승병들이 많이 활약한 전쟁이기도 해서 사대부들이 이들을 보고 스스로 반성하는 기록도 남겼다.[13] 사명대사는 일본인들이 승려와 친숙하다는 특성 때문에 전후 사실상의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훗날 선종할 당시 왕인 광해군이 친히 병세를 살피고 약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승병들의 전공에 대한 대가로 조정 측에서는 사찰에 대한 수리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였는데 덕분에 ‘전장’이 되어버려 불타버린 사찰들을 급속히 복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숭유억불 기조 하의 조선 불교가 이전보다는 사회적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1.1. 근대 한국어
한국어의 주격 조사 '가'의 기원이 임진왜란이라는 가설이 있다.1.2. 명나라
(임용한 박사가 말하는 명-청 전환기에 대한 이야기-건들건들)
이미 국운이 기울고 있던 명나라는 자신들의 군사적 방패막이 되어줄 조선이 왜에 함락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더욱더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14] 조선과 일본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 - 청 왕조가 성립되어 명나라에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 것.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진년의 대기근까지 겹치며 재정이 파탄나고 이자성, 장헌충 등의 농민 반란#까지 겹쳐서 일어나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15]
그러나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멸망했다는 말은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임진왜란(1592)에서 명나라 멸망(1644)까지는 몇십 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다. 암군인 만력제 치하의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국가적인 활력을 잃었다. 임진왜란이 이미 침체된 명의 쇠퇴를 가속화 했을 수는 있겠지만, 명나라가 전쟁 이전에는 잘 나가다가 전후에 갑자기 쇠퇴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자세한 내용은 명4대암군 참조
1.3. 일본
조선이 입은 피해에만 주목하는 역사계의 관행과 달리 일본 입장에서도 이 전쟁의 피해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본은 7년에 걸쳐 침공을 반복했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채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침공을 주도한 도요토미 정권은 애초부터 명분 없는 전란을 일으켜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그를 따르던 수많은 영주들의 원성이 높았다. 긴 전란으로 인해 착실하게 쌓아온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에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후유증이 심했다.[16] 당연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일본 서쪽의 다이묘들과 그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상식적으로도 명나라조차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흔들렸을 정도인데, 명나라보다 경제력이 떨어지고 병력은 더 많이 보냈으며, 그리고 패배하기까지 한 일본이 아무 문제가 없었을 리가 없다. 병량 등 물자의 수송을 맡은 인부들, 왜성의 건축 등을 맡은 인부들도 조선땅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陣夫라고 불렀다)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서부 지방의 백성들은 막대한 병역과 부역으로 인해 피폐해졌다.
1594년에 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기 영지인 히고의 인부들에게 '지금이라면 집단으로 히고로 돌아가더라도 대관의 단속이 없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다'라고 지시를 내린 문서가 발견되었다. 일본 측 유력 지휘관 중 하나가 자기 인부들에게 도망치라고 종용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는 알만하다. 일본 사극에서 임진왜란이 묘사될 때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다만,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역사책) 같은 국가 편찬 정사 역사서가 없고,[17] 정식 사료는 유력 가문들의 행장기 등을 통해 볼 수밖에 없는지라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직접적으로 집계하기가 힘들다. 임진왜란이 일본에게 부를 가져다 준 실리를 얻은 전쟁이라는 일반적인 통설과 달리 일본 역시 명분과 물질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실리 이전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신이 걸린 상징적인 대외사업에서 실패하고, 더욱 중요한 명분을 잃은 것이다! 실리를 얻었으므로 일본이 이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 그대로 국가의 위신을 무시한 정신승리에 불과하며, 이는 일본의 이후 행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18] 무려 수십만에 달하는 일본의 총력을 들여 진행한 대대적인 원정을 당대부터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 스스로 이를 수치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에게 있어 곧 트라우마이고, 지우고 싶은 치욕이었던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 참전한 병사들과 장수들의 숫자와 질을 생각하면 일본이 후에 메이지 유신 이후 창설한 근대화된 일본군이 나오기 전까지 최대이자 최강의 원정군이었고, 그런 이들이 목숨만 건진 채 돌아왔다는 것은 100년 전국시대를 거친 강군, 무사의 나라 일본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전란을 주도한 무리의 후손들은 300여년 뒤에 다시 한 번 더 팽창욕을 불태우며 대대적인 전란을 일으켰으나 이번엔 무조건 항복이라는 훨씬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은 모두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며, 전후 조선과 외교 관계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붙잡아온 조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 보내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화해하고, 조선은 일본에 문위행과 조선 통신사를, 일본은 차왜와 국왕사를 파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일본은 조선과 달리 국토가 황폐화되지 않았기에 전란으로 입은 피해는 오래가지 않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권을 빼앗겨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이는 도요토미 개인의 자업자득일 뿐이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전란이 끝난 지 단 2년 만에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벌이거나 임진왜란의 주축을 맡았던 사쓰마 번이 단독으로 류큐 왕국을 털어 복속시키는 등 국력을 과시하고 대외적으로 존재감을 높였다. 이후 260년간 에도 시대에 발전을 거듭하여 겐로쿠 시대 의 경제적 호황을 누렸으니 패전과 별개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득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19] 이는 또 하나의 거대 군벌이었던 도쿠가와 세력이 계속 힘을 키우고 있었던 탓이 크다.
경제적 측면에서 상당한 비약도 존재했는데, 특히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들 포로 중에는 이삼평과 심수관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고, 일본의 도자기 공업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들 도자기 장인들은 임진왜란 직후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고 중국의 대외 무역이 일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시기적 배경과 함께 일본이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도자기는 대체재를 찾던 유럽 및 아라비아 상인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일본은 은 생산량 폭증 및 제련 기술의 향상으로 넘쳐나는 은을 소비할 무역 창구 확보를 절실히 노렸는데, 이후 청과의 직접 무역은 어려웠으나[20] 조선을 통한 중계 무역을 통해 일정부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1.4. 조선인 포로
1.4.1. 정착, 또는 귀환한 경우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朝鮮日日記’, 종군 승려 케이넨. 1597년 11월 19일
일본군은 전쟁 중 수많은 조선인을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노예 시장에 팔아 넘겼다. 특히 나가사키의 노예 상인들은 인신매매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朝鮮日日記’, 종군 승려 케이넨. 1597년 11월 19일
조선은 "쇄환사"를 통해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9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 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 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 중엔 사쓰마 번, 가고시마 현 출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 있다. 조선식 이름으론 박무덕. 아버지, 어머니 모두 끌려간 도공 집안이었고 박무덕이 도쿄 제국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박씨 성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소수 민족에 대한 병합 정책에 못 이겨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샀다고 한다. 가고시마 현 뿐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번주였던 구마모토 현에는 울산에서 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집성촌을 형성해서 지금도 울산町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들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해 일본에 정착하며 일본인으로 살고싶어 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링크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어서,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쇄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지 정착 포로들을 보며 통신사들이 분개하거나 어이없게 생각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조선에서 귀환 포로들을 잘 대해준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신세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비참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연려실기술 17권에 보면# 1605년에 승려 유정이 데리고 온 귀환 포로 3천 명은 통제사 이경준이 맡았고 해군 선장들에게 일임했는데 선장들이 출생한 곳을 물어도 어릴 때 포로가 되어서 본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모두 자기의 종이라 칭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그 남편을 묶어서 바다에 던지고 마음대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 강훙중이 포로 146명을 데려왔지만 부둣가에 방치되어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이런 추태가 소문으로 퍼지자 이문창이란 조선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봐야 좋을게 없다는 말을 퍼트려 송환을 기피하는 조선인들이 많아져 더욱더 송환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에 끌러왔던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에서 농노로 정착했던 부류가 많은데 고국말도 잊은지 오래된 상황에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던 것은 당연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가려는 포로들은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다도 문화가 발달하여 훌륭한 도자기를 얻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던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 수준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수 세기간 구축한 세력으로 독자적인 장인 가문을 만들어 지역에서 대접받으며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다. 이삼평 등 도공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이 있다.#. 다만 도공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끌고 간 도공들 중에서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밥을 주지 않아서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기술이 새어나갈까봐 조선인 도공들이 사는 마을은 엄격하게 감시했고 혼인도 다른 마을과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일본에서 굶어죽은 조선인 도공들 그 외에도 두부 장인 아키츠키 타네노부 등이 일본에 정착하였다.
1.4.2. 노예화
물론 상술한 도공 같은 기술자, 또는 다이묘의 참모진이나 일본 학자들에게 초빙된 일부 유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인 포로의 대우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최대 70% 정도의 악명높은 세율[21] 을 기록하던 막번체제 하에서 평범한 조선인 포로가 일본에서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과 교류하던 유럽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나갔다.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백 년째 내전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 딱히 내다팔 상품이 없었기 때문에[22] 상대 번과 전쟁을 벌여 얻은 포로나 천민들, 옆 동네 주민들, 또는 왜구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유럽 상인에게 노예로 내다 팔고 그 대가로 화약과 조총을 사오곤 했다. 이들 일본인 노예들의 몸값은 서아프리카 흑인의 절반 이하였고, 수십만 명이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이 노예무역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포르투갈 상인과 일본의 왜구 및 지방 다이묘들이었는데, 이들의 노예무역은 안그래도 전쟁 때문에 손실이 극심한 일본의 인구 유출을 가속화시키는 한편, 지방 번국들의 무장을 강화하고 전쟁을 격화시켰다. 유럽에 상대 부족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 군자금과 머스킷을 구매하던 당대 서아프리카 부족 국가들과 상황이 비슷했던 것이다.
자국민도 잡아다 팔아치우는 상황에 조선인 포로라고 예외는 없어서, 이들은 당시 최고의 해상 유통망으로 전성기를 맞았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일본 학자들의 경우 해외로 팔려간 조선인 노예의 단위는 만(萬) 단위로 보기도 한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선교사들은 이런 비인도적 행동을 혐오하며 노예 상인들에게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실효는 미미했다. 이 당시 조선인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헐값에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쌀 2가마 4말에 해당하는 2.4 에스쿠도였으며 참고로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여 에스쿠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카오 · 인도 고아 · 유럽 대륙으로 나갔다.
이러한 조선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1701년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이 대표적으로 나온다. 한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밑그림 중 포함된 동양풍 복식을 한 남자의 그림(한복 입은 남자)을 통해 당시 유럽으로 유입된 조선인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23]
그러나 노예무역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구 유출과 지방 영주의 군사력 강화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일개 다이묘가 아닌 통일 일본의 위정자들에게는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노예무역의 실상을 본 후 가톨릭과 유럽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던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고 노예 매매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수십 년간 이어지던 노예무역은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조선인 노예가 팔려나간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노예무역은 후에 에도 막부가 키리시탄 공동체와 다이묘들을 군사적으로 토벌하거나 가이에키시키고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서양 상인들을 다 쫒아버린 뒤에서야 사라졌다. 물론 조선인 포로를 겨냥했다기 보다는 일본 사람이 노예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다.
후에 서양 국가 중 막부의 유일한 무역 파트너가 된 네덜란드는, 통상을 허가받기에 앞서서 가톨릭과 자신들이 믿는 개신교 사이의 적대적인 관계와 차이를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데지마를 벗어나지 않을 것과 포교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맺은 뒤 막부의 가톨릭 탄압에 동참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전부 거치고 나서야 제한적인 무역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선에 표류한 조선이 일본으로 갈 수 없던 이유도, 조선이 일본으로 보내주려 했던 것을 일본이 서양 키리시탄이라며 거부해서였다고. 오랜 포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기독교 신자가 거의 없는 이유, 그리고 근세 일본이 쇄국을 고수했던 이유 중에는 이런 노예 무역과 얽힌 역사적인 영향이 있었다.
[1] 전쟁 초기에는 현지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조선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여 조선을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 취급했지만 조명연합군의 반격에 직면하면서, 전략 목표가 이전보다는 현실적으로 수정되었다.[2] 일본 내에서는 우익 성향을 중심으로 전쟁 도중에 일본의 절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일본이 조선에서 철군했을 뿐이라며 조선이 승리한 전쟁임을 부정하고 애둘러 역사왜곡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으나 명백하게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유리한 고지를 점한 상황에서 지도자 1인이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점령한 영토를 그냥 두고 철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비추어보아도 말이 안되는 일이다.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고 패색이 짙어져서 일본 내에서도 사기가 떨어지고 전쟁에 회의감을 가지게 되었던 상황에서, 전쟁을 고집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으로써 이를 명분으로 철군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다. 철군 조차도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추격해온 조명 연합수군에게 응징을 당했다. 국내외 역사학자들도 임진왜란은 결과적으로 조선이 승리한 것으로 본다.[3]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의 국토가 황폐화되었고 조선을 도와 참전한 명나라도 결국 이 전쟁에서 소모한 국력이 몰락원인 중 하나가 되어 멸망했으므로 완전한 승리라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으나 피해 정도나 전쟁 이후 정권의 존속여부와 전쟁의 승패는 무관하다. 세계사적으로도 침략군이 방어하는 쪽에 밀려 퇴각하면 해당 전쟁은 방어 진영의 승리고 침략국의 패배로 본다.[4] 대마도주가 중간에서 내용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조선 조정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나 일이 꼬이는 것을 원치 않아 묵인했고, 대마도주의 조작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에도 막부도 결과적으로 묵인하면서 근대까지 평화 관계가 유지되었다.[5] 당장 대한민국도 한국전쟁 휴전한지 60여년이 지나 이런 추태를 보였는데 200년간 큰 전쟁없던 조선이 100년간 전국시대를 거치며 일본군을 상대로 그정도 싸운건 정말 대단한 것이다.[6] 창덕궁과 창경궁은 전쟁이 끝난 후 복원하였다.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 큰 규모라서 조선 정부도 복원하는 데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7] 정확히는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비변사등록은 광해군 9년(1617)부터.[8] 당시의 주요 상인들은 자본의 몇 곱절에 가까운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고 할 정도이고, 이것은 독점적 민간 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진다.[9]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직후에도 수천의 기병으로 원정을 나가는것을 보면 조선의 국력이 그리 허약하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단지 왜군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10] 전쟁 후 선정된 선무일등공신 3명은 모두 당시에 사망한 인물들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 권율은 전란 종료 후 1년이 지나 사망하며, 원균 역시 죽었다고 공표된 인물이다.[11] 무신정권이 아니라 이성계와 최영 등등을 말한다.[12] 이와 비슷한 사례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영국이 있다.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였던 인도까지 독립을 승인해주면서까지 전후복구에 총력을 들여야만 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이후 최강대국의 자리를 미국에 빼앗긴 영국은 계속해서 국력의 하락세를 그리며 꾸준히 내리막을 걷게되며, 80년대 마거릿 대처 시대 이후 어느 정도 위신을 높이는가 싶더니 다시 브렉시트 사태 이후로 국력이 더욱 쪼그라드는 처지가 되었다. 영국이라는 나라가 그동안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하며 이룩한 그 막강한 국력을 대부분 잃어버렸음에도, 입헌군주제에 기초한 민주적 정치시스템을 근간으로 하는 유럽의 강국이라는 지위만은 지켜낸 것이다.[13] 가령 중들도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들은 뭐하냐는 식으로.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불교로 개종하여 출가를 하는 그 순간 천민으로 떨어질 정도로 경멸당했다. 사명당이 일본 군영을 살펴보고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자 중이라도 말 참 잘했다는 논평을 실록에 실었다.[14] 실제로 명나라는 이후 재조지은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조선에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사신들의 개인적인 뇌물 받기, 모문룡의 행패 등이 겹쳐 현대 한국에서 명나라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15] 특히 사르후 전투와 송산 전투에서 청군에 참패하여 청에 대한 예방 전쟁이 불가능해졌다.[16] 일례로, 이순신에게 주력 함대 대부분 잃었고, 이를 운용하던 숙달된 선원들을 상실하면서 왜구 등을 통해 대대로 확보해온 항해술과 해상 전투 기술이 실전되었다. 사실 전쟁이 나면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군의 실질적인 운용을 책임지는 중간지휘관들, 장교단의 상실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군은 수전 조련에 능한 우수한 장교단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의 해군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 제국 해군을 건설하기 전까지의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도요토미 시대만큼의 해상 전력을 갖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대외 진출용 선박의 건조가 대부분 금지된 것도 한몫했다.[17] 일본도 중앙 정부가 그나마 강력하던 헤이안 시대 이전에는 육국사로 불리는 정사 역사서가 있지만 전국 시대 무렵에는 중앙 정부가 이미 무력해졌다.[18] 이런 주장대로라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원폭까지 당해 일왕이 무조건 항복하는 수모를 당했지만, 전후 빠른 복구로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으니 결국 일본이 이겼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억지이다. 국력의 신장 이전에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긴 것이다.[19] 이런 식으로 전쟁에서 패배했으나 도리어 국력을 크게 신장한 사례는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원정과 대진국 정벌에서 실패한 당나라가 그랬고,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나중에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워 2세계의 맹주가 되었고, 1차세계 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독일도 전쟁복구 이후에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국으로 금세 입지를 회복하였다.[20] 한국에서는 실학의 영향으로 청나라가 개방되고 진보적인 국가였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데, 청나라는 중국 왕조를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폐쇄적인 무역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했던 왕조이다. 물론, 실학자들이 강희-옹정-건륭 초기의 최전성기를 주목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청나라의 발전상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청나라는 폐쇄무역을 했다고는해도, 신대륙의 막대한 은이 유입되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국이었다. 무력으로 러시아를 제압한 나선정벌과 준가르 토벌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 등의 뛰어난 서민문학이 널리 퍼질 정도로 인문예술도 수준급이었다.[21] 이 정신나간 세율 때문에 마비키라는 악습도 생겨날 정도였다.[22] 당시 막대한 생산량을 자랑하던 은광은 대영주들의 차지였고, 도자기 산업의 경우에는 임란 이후 조선인 도공들이 발전시키기 전까지는 일천했다.[23] 소설가 오세영이 이 그림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쓴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흥포(興浦)'라는 명나라 상인이 그림의 실제 모델 혹은 모티브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동양인과 조선인 노예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