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
남우주연상 | ||||
제42회 (1989년) | → | 제43회 (1990년) | → | 제44회 (1991년) |
존 클리즈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나의 왼발) | → | 필립 느와레 (시네마 천국) |
제55회 (2002년) | → | 제56회 (2003년) | → | 제57회 (2004년) |
러셀 크로우 (뷰티풀 마인드)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갱스 오브 뉴욕) | → | 빌 머레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
제60회 (2007년) | → | 제61회 (2008년) | → | 제62회 (2009년) |
포레스트 휘태커 (라스트 킹)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데어 윌 비 블러드) | → | 미키 루크 (더 레슬러) |
제65회 (2012년) | → | 제66회 (2013년) | → | 제67회 (2014년) |
장 뒤자르댕 (아티스트)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링컨) | → | 추이텔 에지오포 (노예 12년) |
역대 | ||||
영화부문 남우주연상 | ||||
제8회 (2002년) | → | 제9회 (2003년) | → | 제10회 (2004년) |
러셀 크로우 (뷰티풀 마인드)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갱스 오브 뉴욕) | → | 조니 뎁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 |
제13회 (2007년) | → | 제14회 (2008년) | → | 제15회 (2009년) |
포레스트 휘태커 (라스트 킹)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데어 윌 비 블러드) | → | 숀 펜 (밀크) |
제18회 (2012년) | → | 제19회 (2013년) | → | 제20회 (2014년) |
장 뒤자르댕 (아티스트)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링컨) | → | 매튜 매커너히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 | ||||
남우주연상(영화) | ||||
제7회 (2002년) | → | 제8회 (2003년) | → | 제9회 (2004년) |
러셀 크로우 (뷰티풀 마인드) | → | 잭 니콜슨 (어버웃 슈미트) 다니엘 데이루이스 (갱스 오브 뉴욕) | → | 숀 펜 (미스틱 리버) |
제12회 (2007년) | → | 제13회 (2008년) | → | 제14회 (2009년) |
포레스트 휘태커 (라스트 킹)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데어 윌 비 블러드) | → | 숀 펜 (밀크) |
제17회 (2012년) | → | 제18회 (2013년) | → | 제19회 (2014년) |
조지 클루니 (디센던트) | → | 다니엘 데이루이스 (링컨) | → | 매튜 매커너히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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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다니엘 마이클 블레이크 데이루이스 Daniel Michael Blake Day-Lewis |
출생 | 1957년 4월 29일 ([age(1957-04-29)]세) |
영국 잉글랜드 미들섹스 켄싱턴 (現 잉글랜드 그레이터 런던 켄싱턴)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2] |
직업 | 배우 |
활동 | 1970년 ~ 현재[3] |
학력 | 브리스톨 올드 빅씨어터학교 |
신장 | 187cm |
부모 | 아버지 세실 데이 루이스(1904년 ~ 1972년) 어머니 질 밸컨(1925년 ~ 2008년) |
남매 | 누나 타머신 데이 루이스(1953년생) |
배우자 | 레베카 밀러[4](1996년 결혼 ~ 현재) |
자녀 | 장남 가브리엘케인 데이루이스(1995년생)[5] 차남 로난 칼 데이루이스(1998년생)[6] 3남 카셸 블레이크 데이루이스(2002년생)[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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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3회나 수상한 모습 |
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자라는 기록을 세웠으며, 영국 기사작위를 받았다.[8] 메소드 연기의 대표적 배우로[9] 첫 주연을 맡았던 《나의 왼발》과 2007년작 《데어 윌 비 블러드》로 앞서 두 차례의 오스카를 가져갔으며, 2013년 영화 《링컨》으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3번이나 받은 기록을 세운 배우가 되었다.[10]
2. 생애
1957년 4월 29일 아버지 세실 데이루이스(Cecil Day-Lewis)[11]의 두 번째 아내인 질 밸컨(Jill Balcon)[12] 사이에서 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출생지는 잉글랜드 런던. 그의 외조부는 마이클 밸컨 경(Sir Michael Balcon)으로 영화사 일링(Ealing) 스튜디오의 대표였다. 다니엘의 누나인 태머신 데이루이스(Tamasin Day-Lewis)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이다.데이루이스가 태어난 지 2년 후, 가족과 함께 런던 동남쪽의 그리니치에 위치한 크룸즈힐로 이사를 갔다. 데이루이스와 그의 누나는 어렸을 때 아버지의 전처인 콘스턴스 메리 킹의 자녀(이복형제)를 거의 보지 못하고 자랐으며, 그리니치에 위치한 인빅타 초등학교와 셰링턴 초등학교에 다녔다.[13] 이때 데이루이스는 단순히 유대인이자 품위 있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런던 남부의 거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받았으며, 동시에 지역 방언과 매너리즘을 완벽하게 터득하여 자신의 첫 연기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괴롭힘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당시의 자신을 무질서한 사람이라고 칭했으며, 실제로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는 도둑질이나 사소한 범죄들을 저질렀다.
1968년에 데이루이스의 부모는 자식의 행동이 너무 거칠다고 생각하셔 켄트에 위치한 독립 사립학교이자 기숙학교인 세븐오크스 스쿨로 보냈다. 이 학교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두드러진 관심사 3가지가 목공, 연기, 낚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학교에 대한 혐오감이 커진 나머지, 세븐오크스는 2년만 다니다가 햄프셔 피터스필드에 위치한 남녀공학 사립학교 및 기숙학교인 베달레스 학교로 전학갔다. 이미 데이루이스의 누나가 해당 학교에 재학 중이기도 했고, 느긋하고 창의적인 정신을 지닌 학교라서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2.1. 연기 활동
첫 데뷔작은 존 슐레진저 감독의《사랑의 긴 여로(1971)》로, 동네 교회에 주차된 비싼 차를 파손시키는 역할이었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14세였다. 비록 크레딧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로 작은 역할이었지만, 2파운드를 받았고 후에 이를 천국 같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1972년, 몇 주 동안 데이루이스의 가족은 소설가 킹즐리 에이미스와 엘리자베스 제인 하워드의 집으로 유명한 '레몬스(Lemmons)'에서 신세를 졌다. 생전에 킹즐리와 인연이 있던 세실은 당시 췌장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소식을 전해들은 킹즐리가 가족과 그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세실은 1972년 5월에 생을 마감했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한층 성장한 데이루이스는 1975년에 베더일을 떠나면서 기존의 제멋대로 굴던 성질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한다.
이후, 5년짜리 가구공 견습직에 지원했다가 경험 부족으로 거절당했다. 다행히 청소년 시절에 다닌 영국 국립 청소년 극장에서 무대 장악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었기 때문에 직업을 확실히 배우로 바꾸었고, 미란다 리차드슨과 함께 브리스톨 올드빅 영화 학교에서 3년 동안 공부한 다음 브리스톨 올드빅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당시 데이루이스의 연기 교수였던 존 하토치는 "그때도 데이루이스에게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데이루이스는 조용하고 예의 바르지만, 분명히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불타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표면 아래에 불타는 무언가가 있는 듯했습니다. 그 조용한 모습 아래에는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학생들이 클래스 에너미(Class Enemy)라는 연극을 했을 때, 그는 정말 빛났고, 우리에게 매우 특별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 순간이었습니다."라며 데이루이스의 연기를 극찬했다.
나중에《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 함께 연기한 피트 포스틀스웨이트의 대역을 맡기도 했으며, 1980년대부터는 연극과 TV쇼에서 중점적으로 일했다. 여기에는《Frost in way》의 무력한 어린아이 역과《How Many Miles to Babylon?》에서의 1차 세계대전 장교 역이 대표적이다. 그렇게 데뷔한 지 11년 후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생을 영화화한 리차드 애튼버러 감독의《간디》에서 간디를 인종적으로 괴롭히는 남아프리카의 거리 깡패인 콜린 역을 맡게 되었다. 1982 ~ 1983년까지는 영화계에 발을 끊고 브리스톨 올드 빅과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연극 배우로 활동했다. 82 ~ 83년까지는《다른 나라》의 가이, 83년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로 출연했다.
이후, 로저 도널드슨 감독의《바운티(1984)》로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다. 충성스러운 1등 항해사 역으로 조연을 연기했지만 딱히 주목받지는 못하다가,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내 아름다운 세탁소》에서 파키스탄 청년과 성관계를 맺는 젊은 게이 영국 남성을 연기하여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게 된다. 이 영화는 미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영국 영화 100위 중 50위에 랭크된 명작이다. 같은 해에는 에드워드 모건 포스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전망 좋은 방(1985)》에 세실 바이스 역으로 출연하여 대중들의 인정을 받고 인지도를 넓히게 된다.
1987년에는 밀란 쿤데라의《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를 각색한 영화인《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8)》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데이루이스는 여성과 감정적으로 연루되면서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삶이 엉망이 되어가는 체코 외과의를 연기했으며, 이를 위해 8개월간 체코어를 배우고 촬영 일정 전체에 걸쳐 세트장 안팎에서 캐릭터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다녔다. 즉, 메소드 연기를 시작한 것. 이 기간 동안 데이 루이스는 "영국에서 가장 흥미로운 젊은 배우 중 한 명"으로 여겨졌으며, 게리 올드만, 콜린 퍼스, 팀 로스, 브루스 페인과 함께 "브릿 팩(Brit Pack)"이라는 별명을 얻었다.[14]
▲ 영화 《나의 왼발》 中 |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 - 남우주연상 수상 |
동일한 해에 영국 런던 국립극장에서《햄릿》의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어 리차드 에어와 함께 작업하기 위해 연극계로 돌아왔지만, 공연 중 햄릿이 아버지의 유령을 만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쓰러진 뒤에 미친 듯이 울며 탈진해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데이루이스는 그 날 이후로 햄릿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그의 공백은 당시 에이즈로 투병 중이전 이안 찰슨이 채웠다. 그리고 데이루이스는 햄릿 공연을 끝으로 연극계를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후에 밝히길, 자신의 역할이 악마와도 같았으며 이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피로하여 탈진한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 저는 매일 밤 아버지의 유령을 보았을 겁니다. 햄릿과 같은 연극을 한다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을 탐구해야 하니까요."라며 은유적으로 아버지의 유령을 보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데이루이스의 이미지에 흡집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더 유명해졌고,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아일랜드로 이사갔다.
1990년대에는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이클 만 감독의《라스트 모히칸》에 주연인 나디니엘 범포 역을 맡았다. 이를 위해 데이루이스는 엄격한 웨이트 트레이닝 및 캐릭터가 사는 땅과 숲에서 캠핑, 사냥, 낚시를 하며 실제로 살았고 목공 기술을 터득했으며 카누를 만드는 법 또한 배웠다. 또한 캐릭터에 충실하기 위해 촬영하는 동안 항상 긴 소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이후, 짐 셰리던 감독의《아버지의 이름으로》에 주연인 제리 콘른 역으로 출연하였고, 이 역할로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 BAFTA 후보, 골든글로브 후보에 올랐다.
1993년에는 미국으로 돌아와 에디스 워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순수의 시대》에서 주연인 뉴랜드 아처 역을 맡았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의 첫 번째 협업이었으며, 데이루이스의 연기와 영화의 완성도 전부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롤링 스톤즈의 피터 트래버스는 "데이루이스는 감정과 사회 윤리 사이에서 갇힌 남자 역을 훌륭하게 묘사했다. 폭풍의 언덕의 올리비아 이후로 날카로운 지성과 인상적인 외모, 신체적 우아함을 겸비한 배우는 없었다."며 그의 연기력을 크게 칭찬했다. 이후, 1996년에 아서 밀러의 희곡을 영화로 각색한《크루서블》에서 위노나 라이더와 재회, 이번에도 영화와 데이루이스의 연기 전부 호평받았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오웬 글레이비먼은 데이루이스의 연기가 훌륭했다고 평했다.
이어 짐 셰리던 감독의《더 복서(1997)》에서 에밀리 왓슨과 함께 출연했는데, 감옥에서 막 출소한 전 권투 선수인 대니 플린 역할을 맡았다. 복서 이후 데이루이스는 연기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반 은퇴 상태에 들어가 목공 일에 전념했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 피란체로 이사를 갔고, 그곳에서 제화 기술에 매료되어 제과공인 스테파노 베머에게 관련 수업을 받았다.
▲ 영화 《갱스 오브 뉴욕》 中 |
2000년 대 초에는 아내인 레베카 밀러의 제안을 받고 그녀가 감독을 맡은《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에 출연했다. 여기서 데이루이스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또 십대 딸을 어떻게 키웠는지에 대해 후회하며 죽어가는 남자를 연기했지만 영화 자체의 평은 좋지 못했다. 흥행 역시 미국에서 712,275달러의 수익, 전 세계에서 916,051달러에 불과했는데, 이는 애초부터 제한 상영이 되어 가장 광범위하게 개봉된 극장이 74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데이루이스가 연기한 '잭'의 캐릭터 역시 추악한 행동으로 점철된 신랄한 노래라는 비판을 받았다.
▲ 영화 《데어 윌 비 블러드》 中 |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 - 2번째 남우주연상 수상 |
결국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다시금 수상하였으며, BAFTA 및 골든글로브, 미국배우조합에서 부여하는 SAG 등 43개의 시상식을 휩쓸었다. 동시에 말론 브란도와 잭 니콜슨 이후, 3번째로 10년 동안 2개의 오스카상을 수상한 배우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참고로 SAG 수상 당시 5일 전에 사망한 히스 레저의 연기에 영감을 받았으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의 연기가 독특하고 완벽했다며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2009년에는 롭 마샬 감독의《나인》에 출연했다.
▲ 영화 《링컨》 中 |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 - 3번째 남우주연상 수상 |
데이루이스는 5년 만에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다시금 수상하며 남우주연상을 3번 수상한 유일무이한 인물이 되었고, 제70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2번째 남우주연상 수상 및 4번째 BAFTA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브리스톨 올드 빅 연극 학교에서 데이루이스의 연기를 가르친 교사인 존 하토치는 제자의 성과를 크게 뿌듯해했다.
Although we have quite an impressive alumni – everyone from Jeremy Irons to Patrick Stewart – I suppose he is now probably the best known, and we're very proud of all he's achieved. I certainly hold him up to current students of an example, particularly as an example of how to manage your career with great integrity. He's never courted fame, and as a result, he's never had his private life impeached upon by the press. He's clearly not interested in celebrity as such – he's just interested in his acting. He is still a great craftsman. - 존 하토치 |
▲ 영화 《팬텀 스레드》 中 |
3. 은퇴 및 근황
2017년 6월 20일, 배우 은퇴를 선언하였다. 여러가지 이유가 추측되는 가운데, 신빙성을 얻고 있는 가설 중 하나는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업을 위해서라고 한다. 다만 다니엘 데이루이스 자체가 은퇴와 번복을 반복하던 인물이라, 지켜보겠다는 입장도 많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은퇴 발표 직전인 2017년에 촬영이 완료된 영화 팬텀 스레드를 끝으로 다니엘 데이루이스는 정말로 영화계를 떠났다. 근황도 2019년에 길거리 파파라치에서 공개된 이후에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4. 위상 및 연기력
THE WORLD'S {{{#FF0000 GREATEST}}} ACTOR 세계 {{{#FF0000 최고의}}} 배우 |
우리 대부분은 진정으로 뛰어난 배우 몇 명(때때로 셰이프 시프터라고 불리는, 다른 캐릭터를 완전히 연기하면서도 결코 모방에 빠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목록을 말론 브란도로 시작해서, 로렌스 올리비에가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진부한 속임수를 쓰는 늙은 배우인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으로 방향을 틀 것입니다. 물론 로버트 드 니로가 언급될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메릴 스트립도 언급되겠죠.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데이루이스로 마무리할 것입니다. |
Five movies that prove Daniel Day-Lewis is the world’s best actor. - Far Out Magazine, 출처 |
더 가디언의 마이클 심킨스[15]는 데이루이스의 연기력이 다른 배우들과 비교해도 한 단계는 높으며, 이런 수준의 배우는 100년에 한번 나올 것이라고 평했다. 같은 일간지 소속의 조 퀴난(Joe Queenan)은 2013년에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로렌스 올리비에와 리처드 버튼, 말론 브란도보다 더 위대한 배우인지에 논쟁하는 것은 메시가 펠레보다 재능이 있는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알렉산더 대왕을 군사적 능력으로 앞지르는지에 대해 논쟁하는 것과 같다며, 데이루이스를 전설적인 배우들과 경쟁해도 전혀 꿇릴 게 없는 인물로 언급했다. 이외에도 'The Cinema Archives'에서 선정한 최고의 남자 배우 Top 100위 중에 7위, 최고의 퍼포먼스 중에서는 2위를 차지했으며, 뉴욕 타임스에서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배우 중에서는 3위, 인 터치지가 선정한 변신의 제왕 1위, 테이스트 오브 시네마 선정 '영화 사상 가장 강렬한 연기 Top 10' 중 4위 및 21세기 최고의 남자 배우 중에서는 1위에 올랐다.[16]
All Daniel Day-Lewis Voices and Accents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모든 목소리와 악센트 |
- 《프라하의 봄》
영어 대사밖에 없는 체코 의사 역할을 맡았음에도 독학으로 체코어를 학습해왔다. 본인 왈, 체코어를 모르면서 체코 억양으로 영어 대사를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생각했다고.
- 《나의 왼발》
실제로 뇌성마비나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애인들을 만나보기 위해 더블린에 위치한 샌디마운트 병원을 2달 동안 자주 방문하여 우정을 쌓고, 그들의 행동을 전부 기록하여 그대로 실행에 옮겼으며 발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연습을 했다. 또한 촬영을 하지 않을 때도 휠체어를 타고 다녔으며, 경사면이 있으면 제작진들에게 들어 옮겨달라고 부탁하거나 심지어는 밥을 먹여달라고 말했다.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쁜 제작진들이 개고생을 해서 화가 잔뜩 났었다고. 이때부터 출연 배우들을 본명이 아니라 극중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으며, 자신을 부를 때에도 캐릭터 이름으로 불러주기를 요구했다.
- 《햄릿》
스스로의 역할에 악마가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몇 주 동안 몰입하여 무대를 준비했으나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실신하고 오열을 했는데, 이후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메소드 연기를 너무 열심히 해서 피로해진 나머지 쓰러졌다고 한다. 인터뷰에서는 매일 밤 아버지의 유령을 보았으며, 그 이유는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을 탐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 이후로 데이루이스는 연극계를 아예 떠나버렸다.
- 《라스트 모히칸》
야외(앨러배마 야생)에서 반년 가까이 숙영을 했다. 야생동물을 추적하는 방법과 사냥법, 가죽을 벗기는 법 등을 터득했으며 직접 카누를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도끼와 총기를 수준급으로 다루는 법을 익히고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화승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촬영 기간 동안에는 자신이 직접 채집하거나 사냥한 것만 먹었다.
- 《아버지의 이름으로》
30파운드(14kg)를 감량하기 위해 실제 감옥에서 나오는 식단으로 연명했으며, 촬영장에서 오랜 시간을 버려진 감옥 독방에서 보냈고,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거기다 실제 경찰에게 4일 동안 심문을 받고, 사실적인 체험을 위해 스태프들에게 중간중간 찬물을 뿌리거나 욕을 해달라고 요구했으며, 촬영장 바깥에서도 북아일랜드 억양을 유지하고 다녔다. 그렇게 3일째 되는 날에는 심문 장면을 무려 9시간 동안 촬영했다.
- 《크루서블》
17세기의 위생 상태를 재현하기 위해 촬영 기간 동안 샤워를 하지 않았다. 메사추세츠주의 한 섬에 영화 세트장으로 마을을 만들었는데, 본인도 목수로서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세트장 건설에 직접 참여했으며 자기 집을 직접 만들었다. 당연히 17세기 기준 마을이니 전기나 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촬영 기간 동안 자신이 만든 집에서 살았다.
- 《더 복서》
1년 반 동안 전 헤비급 챔피언인 배리 맥기건에게 복싱 트레이닝을 받았으며, 촬영 기간 동안에는 매일 2회씩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고강도 훈련을 소화해냈다. 실제로 훈련 중 코뼈 골절과 허리 디스크 손상 같은 부상도 입었지만 개의치 않았다고. 덕분에 맥기건은 데이루이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프로 복서도 도전할만한 실력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배역을 위해 필요하다며 자신의 팔에 직접 문신을 새겼다.
- 《갱스 오브 뉴욕》
정육점에서 보조로 일하며 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법을 배웠으며, 촬영하지 않을 때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무서운 눈빛으로 째려봐서 섬뜩하게 만들고, 쉬는 시간마다 칼을 갈아댔다. 지금은 사라진 19세기 복장을 착용하고 뉴욕 억양만을 사용했으며, 추운 날씨 때문에 스태프들이 외투를 가져다 줬으나 영화의 배경과 맞지 않는다며 거절하다가 폐렴에 걸렸다. 근데 그 와중에도 치료를 끝까지 거부했으나 의사의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항생제를 투여받았다고 한다. 광기 넘치는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새벽 5시쯤에 항상 일어나서 에미넴의 노래를 들었던 건 덤.
-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
외딴 섬에서 딸과 단 둘이 살아가는 아버지 역할을 위해 가정을 떠나 세트장 근처 판잣집에서 살았다. 해당 영화의 감독이자 다니엘의 아내인 레베카 밀러는 "배우마다 연기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르다. 그게 다니엘의 방법이므로 이해한다."며 그의 선택을 존중했다.
- 《데어 윌 비 블러드》
석유업자 역할을 위해 실제로 석유를 시추하는 기계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영화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인 볼링장 씬에서는 폴 다노에게 볼링공과 핀을 던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폴 다노의 말에 의하면 다니엘이 진심으로 던진다는 걸 느끼고 살기 위해 피했다고 한다.
- 《링컨》
촬영장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대통령 각하 또는 미스터 링컨"이라 부르라고 요구했으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조차 따라야만 했다. 몰입이 깨진다는 이유로 영국 배우들에게는 촬영을 하지 않을 때에도 영국 억양을 쓰지 말라고 요구했으며, 서명을 해야 할 때가 있으면 항상 에이브러햄의 첫 글자인 'A'로 싸인했다. 심지어 영화에서 영부인 역할을 맡은 샐리 필드에게 휴대폰으로 메세지를 보낼 때조차 캐릭터를 깨지 않았으며, 링컨의 자서전을 비롯하여 관련된 책만 100권 이상 읽었고, 최대한 닮은 외모를 만들기 위해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오랜 시간 동안 작업했다.
- 《팬텀 스레드》
패션 디자이너 역할을 위해 옷 만드는 법을 배워서 영화에 쓸 발렌시아가 드레스를 직접 리폼해서 가져왔다. 쉬는 날마다 영화 의상 디자이너에 함께 쇼핑을 하러 다니며 영화에 쓸 의상 디자인을 연구하고, 촬영 전에는 그날 찍을 장면에 어울리는 의상을 직접 골랐다.
5. 필모그래피
5.1. 영화
<rowcolor=#fff> 연도 | 제목 | 활동 | 배역 |
1971 | 사랑의 여로 | 단역 | 벤다 역 |
1982 | 간디 | 단역 | 콜린 역 |
1984 | 바운티호의 반란 | 조연 | 존 프라이어 역 |
1985 | 전망 좋은 방 | 조연 | 세실 바이즈 역 |
1985 |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 조연 | 죠니 역 |
1986 | 나노 | 조연 | 맥스 역 |
1988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주연 | 토마스 역 |
1988 | 정열과 사랑 | 주연 | 헨더슨 도스 역 |
1989 | 나의 왼발[17] | 주연 | 크리스 브라운 역 |
1992 | 라스트 모히칸 | 주연 | 나다니엘 포 / 호크아이 역 |
1993 | 순수의 시대 | 주연 | 뉴랜드 아처 역 |
1994 | 아버지의 이름으로[18] | 주연 | 제리 콘론 역 |
1996 | 크루서블 | 주연 | 존 프락터 역 |
1998 | 복서 | 주연 | 대니 플린 역 |
2002 | 갱스 오브 뉴욕[19] | 주연 | 빌 더 버처 커팅 역 |
2005 | 발라드 오브 잭 앤 로즈 | 주연 | 잭 역 |
2007 | 데어 윌 비 블러드[20] | 주연 | 다니엘 플레인뷰 역 |
2009 | 나인 | 주연 | 귀도 콘티니 역 |
2012 | 링컨[21] | 주연 | 에이브라함 링컨 역 |
2017 | 팬텀 스레드[22] | 주연 | 레이놀즈 우드콕 역 |
미정 | 아네모네 | 주연 |
5.2. 드라마
연도 | 제목 |
1980 | Shoestring |
1981 | Thank You, P. G. Wodehouse |
1981 | Artemis 81 |
1982 | How Many Miles to Babylon? |
1982 | Frost in May |
1983 | Play of the Month |
1985 | My Brother Jonathan |
1986 | The Insurance Man |
5.3. 연극
연도 | 제목 | 활동 | 배역 |
1979 | 채용담당자 | ||
1979 | 트로 일러스와 체리 다 | ||
1979 | 올드 킹 콜 | ||
1980 | 에드워드 2세 | 조연 | 랭커스터 백작 역 |
1980 | 클래스 에너미 | 주연 | 아이언 역 |
1980 | 한여름 밤의 꿈 | 주연 | 플루트 역 |
1981 | 분노로 돌아 봐 | 주연 | 지미 포터 역 |
1981 | 드라큘라 | 주연 | 드라큘라 백작 역 |
1982 | 다른 나라 | 주연 | 가이 베넷 역 |
1983 | 한여름 밤의 꿈 | 주연 | 플루트 역 |
1983 | 로미오와 줄리엣 | 주연 | 로미오 역 |
1984 | 드라큘라 | 주연 | 드라큘라 백작 역 |
1986 | 퓨처리스트 | 주연 | 볼로디아 마야 코프 스키 역 |
1989 | 햄릿 | 주연 | 햄릿 역 |
6. 기타
- 커리어 초창기에는 영국의 로버트 드 니로란 얘기를 많이 들었다.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배우도 로버트 드 니로다.# 또 라스트 모히칸과 갱스 오브 뉴욕의 다니엘 데이루이스의 배역은 로버트 드 니로에게 먼저 제안되었던 역할들이다. 라스트 모히칸 때 로버트 드 니로는 당시 마틴 스콜세지와 케이프 피어 촬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 출연 제안을 포기했었다. 대신 마이클 만과의 협업은 그 후 히트에서 이뤄진다. 갱스 오브 뉴욕 촬영 때는 이 영화 대신 말론 브란도, 에드워드 노튼과 함께 스코어 찍는 것을 택했다.
- 메소드 연기가 독한 것으로 유명한데 영화 '나의 왼발'에서 장애인 역을 맡았을 때에는 촬영을 하지 않을 때도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갱스 오브 뉴욕에서 같이 연기한 존 C. 라일리에 따르면 다니엘이 이탈리아에서 촬영하는 동안 촬영할때의 날씨가 추운 겨울인데도 19세기에 존재하지 않았던 따뜻한 코트를 입고 연기할 수 없다고 코트 입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폐렴에 걸렸는데 다니엘은 19세기에 폐렴 치료법은 없었다며 치료를 받지 않으려고 해서 의사가 억지로 항생제를 놔야 했다고 한다. 특히 감독과 동료배우들도 치료를 받으라고 설득해야 했다.
- 메소드 연기의 대가답게 존 웨인의 연기를 무척 싫어한다. "아무 노력도 없고 쉽고 편한 길만 가려 했다. 연기가 항상 똑같다."란 평가를 남겼다. 반면 존 웨인 저 혼자만 라이벌이라 의식하고 뒤에서 열심히 캐스팅 방해하고, 험담 열심히 하고 다녔던 게리 쿠퍼의 연기에 대해서는 "나는 게리 쿠퍼를 사랑한다. 그의 연기가 보여준 순수함과 정직함은 나에게 많은 것을 의미한다."라는 극찬을 남겼다.#
- '평생 회피를 공부한다'는 말로 자신의 인생을 표현했다. (a lifelong study of evasion).
- 실제 성격은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학교에서 유명하지 않았으며 아웃사이더였다고 한다. 인터뷰도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고 칭찬받으면 후배들도 잘한다고 칭찬하면서 겸손한 태도로 유야무야 임팩트 없이 넘어가는 느낌이 강하다. 이 부분은 그가 유대인 혈통에 아일랜드 혈통[23]이라서 작용한 면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사교성을 늘리는 대신 내향적인 생활을 거치며 공상을 많이 했고 나중에 캐릭터를 깊이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 배우 생활과 별개로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분리하는 편이며 결혼 전의 애정 관계가 상당히 복잡했다고 알려져있다. 특히, 이자벨 아자니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 사귀었고 이자벨이 아이까지 가졌지만, 그녀의 임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엘이 "이제 헤어지자"는 팩스 한 장을 남기며 일방적으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했다는 것이 유명하다. 결별 방식도 방식이지만 결별 원인도 다름아닌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줄리아 로버츠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라는 것이 알려져서 당시 다니엘과 줄리아 두 사람이 대중들로부터 욕을 엄청 많이 먹었다. 두 사람은 1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헤어졌다.[24] 이후 다니엘은 극작가 아서 밀러가 쓴 동명의 희곡을 영화화한 크루서블에 출연한 인연으로 아서 밀러의 딸 리베카 밀러와 1996년 11월 13일에 결혼했으며, 슬하에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 아내 리베카 밀러[25]와 두 자식들. 사진은 좀 옛날 것 같은데 둘 사이에 난 첫 아이가 1998년 6월 14일 생인 로넌 칼(Ronan Cal Day-Lewis)이고 둘째가 2002년 5월에 태어난 캐셜 블레이크(Cashel Blake Day-Lewis)이다. 거주지는 아일랜드와 뉴욕을 왔다갔다 한다고. 다니엘은 1993년에 아일랜드 시민권을 획득했다. 그래서 현재는 이중 국적자이다. 런던 동남부의 축구팀 밀월의 팬이다.
- 배우이면서 숙련된 목수에다 제화공인데 목공과 신발 제작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고있다고 한다.
- 반지의 제왕의 아라고른 역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수많은 아라고른 역의 후보중 최초로 제안을 받은 사람이며 이후에 후보로는 크리스찬 베일, 조니 뎁, 러셀 크로우, 스튜어트 타운센드, 짐 커비즐 등이 있었다.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 예수 그리스도 역으로 고려됐지만 멜 깁슨이 보기에 너무 유럽인스러워서 대신 제임스 카비젤을 골랐다고 한다.
- 갱스 오브 뉴욕 촬영했을 때 뉴욕 억양으로 얘기했고 점심 때면 칼을 다듬곤 했다고 한다. 한편 같이 영화에 출연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정신적 압박이 상당했다고 한다.[27]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는 상대역인 일라이 선데이 역을 맡은 배우가 결국 겁을 먹고 도망갔다.[28] 폴 선데이 역을 맡았던 폴 다노가 그 역할까지 겸하게 되었는데 (쌍둥이),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데이루이스의 상대역을 해냈을뿐 아니라 자신 또한 주눅들지 않고 광적인 연기를 한 것은 매우 칭찬해 줄 만하다.
- 라스트 모히칸을 찍었을 때 카누를 만들었고 동물을 추적하고 가죽 벗기는 법도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12파운드 짜리 화승총도 완벽하게 익혔는데 영화를 촬영할 동안 이 총을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심지어 크리스마스 정찬까지 이 총으로 사냥한 동물을 먹었다고 한다.
- 2008년 오스카 주연상을 탔을 때 자신의 외할아버지 마이클 밸컨과 아버지 세실 데이루이스 와 자신의 세 아들에게 헌사했다.
- 187cm로 장신이다.
- 《데어 윌 비 블러드》 인터뷰가 올라왔다.(#)
- 다니엘이 젊은 배우 중에는 히스 레저와 라이언 고슬링에게 존경을 표한 적이 있다. 《데어 윌 비 블러드》 때 미국배우조합상(SAG)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 수상소감에서 마침 당시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레저에 대한 경의[29]를 표하기도 했다.영상
- 에런 테일러존슨이 다니엘을 존경한다고 밝히는 등 많은 배우들에게 롤모델이 되는 배우이다.
데어 윌 비 블러드, 갱스 오브 뉴욕, 링컨(영화) 등 데이루이스가 연기한 주요 배역을 엮어 만든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살기란 동영상.
-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거절한 배역들#
- 2010년 7월 15일엔 브리스톨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어릴 때 브리스톨 올드 빅 연기학교에 다녔던 인연으로 그랬다. 종교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며(had no religious education) 자신을 완고한 불가지론자라고 생각(suppose I'm a die-hard agnostic)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2년엔 아버지인 시인 세실 데이루이스의 원고 등을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증하기도 했다..
[1] 2014년 Knight Bachelor 기사작위를 받아 Sir가 붙는다. Knight Bachelor만 받은 인물은 이름 앞에 Sir만 붙을 뿐, 이름 뒤에 붙는 건 없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2] 아일랜드와 영국의 시민권 둘 다 가지고 있는 복수국적이다.[3] 2017년에 은퇴를 선언했지만 아네모네에 출연하는 것이 공개되면서 번복되었다.[4]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이다.[5] 이자벨 아자니 사이의 자녀[6] 레베카 밀러 사이의 자녀[7] 레베카 밀러 사이의 자녀[8] 다니엘 마이클 블레이크 데이루이스 경(Sir Daniel Michael Blake Day-Lewis)[9] 그래서인지 영화를 찍는 주기가 긴 편이다. 게다가 링컨 이전에도 2~3년에 한 편씩 찍었으며, 더 복서와 갱스 오브 뉴욕 사이에도 5년이라는 긴 공백이 존재한다. 바로 이때가 그 유명한 이탈리아 제화공 일을 배운 시기. 이 때문인지 네이버에 등록된 출연작 개수는 2020년 기준으로도 22건밖에 되지 않는다.[10] 심지어 여성 배우계의 본좌라는 메릴 스트립도 여우주연상 2회, 조연상이 1회다. 물론 이 쪽도 끝판왕은 끝판왕. 그런데 지금은 사망한 배우 캐서린 헵번은 여우주연상만 4번을 가져갔다.[11] 아버지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혼혈이다. 영국의 계관시인(국가나 왕 등에 의해 공식적으로 임명된 시인)이며, 니콜라스 블레이크라는 필명으로 추리소설도 발표했다. 한국에도 황금가지 밀리언셀러클럽으로 '야수는 죽어야 한다'가 출판되었다.[12] 배우며 유대인으로 다니엘의 외조부 가족이 라트비아와 폴란드에서 이민온 사람들이었다[13] 2개의 초등학교를 다닌 건 전학을 갔기 때문.[14] 할리우드에서 성공을 거둔 젊은 영국 배우들을 칭하는 말.[15] 동료들 사이에서 널리 존경을 받을 정도로 인망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16] 과거에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어처피 시간이 지나면 항상 바뀌는데 세계 최고의 배우 같은 걸 뭐하러 정하냐는 식으로 대답했었다.[17] 제62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18]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19]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20]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21] 제85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22]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23]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두 집단 모두 영미권 주류에서 은근히 배척을 받아 왔으며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는 성향이 있다.[24] 1995년, 이자벨은 뉴욕에서 혼자 그들 사이의 자식인 게이브리얼케인 데이루이스(Gabriel-Kane Day-Lewis)를 낳았는데 데이 루이스는 혼자 아이를 낳은 아자니에게 아이의 양육비를 줄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장남이 성인이 된 후에는 관계를 회복했는지, 공식석상에 아들과 함께 등장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링크 계모인 리베카 밀러와의 관계도 원만하다고 한다.[25] 1962년생이다[26] 1994년 아카데미시상식 에서 두사람은 루이스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크스는 필라델피아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경쟁해 행크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았다.[27] 하긴 이 영화에서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맡았던 역할이 늘 칼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위압적으로 노려보는 "도살자 빌(Bill the Butcher)"이었으니...[28] 그러나 다니엘과 감독은 이를 부인했다.[29] "unique he was perf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