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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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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5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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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왕릉 전경.
출생
(음력)
890년대 (추정)[1]
신라 금성
사망
(음력)
927년 11월 (향년 30대)
신라 금성
능묘 경애왕릉(景哀王陵)
재임기간
(음력)
신라 제45대 상대등
917년 8월 ~ 연대 미상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55대 국왕
924년 8월 ~ 927년 11월 (3년 3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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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밀양 박씨
위응(魏膺)
부모 부왕 신덕왕
모후 의성왕후[2]
형제자매 3남 중 차남[3]
왕후 미상[4]
자녀 2남[5]
종교 불교
시호 경애대왕(景哀大王)[6][7]
골품 진골(真骨)
관등 이찬(伊飡)
직위 상대등(上大等) }}}}}}}}}
파일:경애왕릉 묘비.jpg
경애왕릉 묘비

1. 개요2. 생애
2.1.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무엇을 했는가?2.2. 견훤은 정말 왕후를 겁탈했는가?
3. 여담4. 가계5. 대중매체에서6. 《삼국사기》 기록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55대 국왕.

시호는 경애왕(景哀王), 휘는 위응(魏膺)이었다.

제53대 신덕왕차남이자 제54대 경명왕의 친동생으로, 신라 후기 박씨 왕조의 마지막 군주다. 후임 경순왕 김부 시대에는 신라의 통치력이 경주시 바깥 어느 곳에도 미치지 못하는 도시국가 정도까지 떨어져버렸으므로[8] 당당한 영토국가 신라로서는 이 임금이 마지막이다.[9][10] 포석정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왕이기도 하며, 시호에 슬플 ''(哀)가 들어가는 것도 이것이 이유다.

즉위 전에는 형 경명왕상대등을 지냈다. 신라는 사위왕위를 물려받는 일이 많았는데, 대개 근친혼이 많아서 넓은 의미로 박혁거세 시조를 중심으로 성씨와 관계없이 따지고 보면 모두 같은 혈족이었다. 따라서 혈족의 의미가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성씨가 다른 왕이 나와도 동요가 생각보다 적었다. 사실 사망한 왕을 기준으로 출생 순서에 따라 자녀의 왕위 계승 순위가 정해지는 것이어서, 이전 왕의 성씨가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1]

2. 생애

경애왕은 즉위 직후부터 시작해 거의 매년 북방의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다. 형인 경명왕궁예가 죽은 뒤에 920년 때 맺은 수호동맹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의도로 보인다. 태조 왕건 역시 이에 화답해 경애왕 정권과 재위기간 내내 굳건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한편 신라 멸망이라는 벼랑 끝에 몰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해외 외교에도 나름 공을 들이게 된다. 《요사》 <태조본기>, 926년 1월 항에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발해 상경용천부 함락전 때 거란 측에 서서 공을 세운 나라들로 (奚), 회흘(回紇), 토번(吐蕃), 당항(黨項), 실위(室韋), 오고 등과 함께 신라가 나오고 있다. 물론 당시 신라는 서라벌조차 겨우 방비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경용천부 공성전에 파병한 병력은 깃발만 보내는 형식적인 정도였거나, 또는 920년대 신라의 안보 상황을 감안하여 지지 선언 정도로 하고, 실제로는 도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삼국시대 역사상 그런 사례가 한 둘이 아니기도 하다.

927년 2월에는 병부시랑 장분(張芬) 등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공함으로써 중원의 국가와도 미리 친분을 맺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 신라는 서해안과 남해안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아예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오늘날의 경남 진주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던 반독립 세력인 왕봉규의 도움으로 남해안을 통해 중국의 중원으로 사신단을 보낸 것으로 보이며, 왕봉규도 덤으로 후당에 같이 조공해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의 관직을 하사받았다. 왕봉규가 비록 신라의 충신까진 아니라지만 경남 중부 해안 일대를 장악한 그를 견훤의 침략을 받아낼 탱커 역할이자 남해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 여겼을 수 있다. 하지만 제3세력치곤 힘이 있었던 왕봉규도 고려후백제라는 고래 싸움에 껴서 새우등 터지듯 927년이 지나기도 전에 망하고 말았다.[12]

한반도 내부에서도 경애왕은 이전에 방어 내지 방치에 가까웠던 신라 조정의 대응과 달리 비교적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도 보였다. 선왕인 경명왕 때 후백제가 기어코 신라의 통제하에 있었던 천혜의 요새 대야성을 무너뜨리는 등 점차 서라벌의 숨통을 조여오자 막 건국된 신생국 고려왕건과 굳건하게 동맹을 맺어두는 한편 후백제와 고려가 대치하는 전선에 신라군을 파견해 고려와 같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후백제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는 등 제법 유의미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선왕 경명왕 시절에는 신라가 고려의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는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신라군이 고려군을 도울 수도 있다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과거의 나제동맹과 같은 공수동맹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심지어는 고려가 후백제와 싸우다가 숨을 돌리기 위해 서로 왕실 종친(왕신, 진호)을 인질로 교환할 때도 경애왕은 견훤은 약속을 어기고 병사들을 일으켰으므로 하늘이 벌을 줄 것이라는 등 그를 까는 글을 보내면서 후백제와 적극적으로 싸워보자고 왕건에게 의견을 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런 적극적인 행보는 경명왕 시절 무력한 신라 조정에 등을 돌리려 했던 경상도 각지의 친신라 성향 호족에게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행했던 조치들로 보인다.

이러한 조치들에 대해 견훤은 격분했다. 과연 견훤은 지체없이 왕건과 경애왕의 허를 찌르는 복수극에 나섰다. 당시 상황은 고려군이 지금의 경상북도 북부를 차지하고,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서부까지 점령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927년 고려-신라 연합군이 친후백제로 기운 왕봉규를 멸망시키고, 추허조가 지키는 대야성까지 함락해 경상남도 서부까지 고려-신라 연합군이 이제 막 주둔한 상황이었다. 어떻게 보면 후백제를 포위한 형세 같았지만 두 지방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서부 방면은 아직 후백제 점령지가 많이 남아있었고 연합군의 대비도 허술했다. 물론 좌•우에 적의 대부대가 있는 상황에서 가운데를 뚫고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행동이었지만, 견훤은 직접 정예 부대를 이끌고 들어가 신라의 심장부를 타격할 대담한 기습 계획을 세운다.

927년 9월, 왕건의 거센 공격을 받은 견훤은 반격을 위해 환갑에 이른 나이에도 불구하고 몸소 친정하여 전장에 나타났다. 견훤은 신라의 근품성(문경시 인근)을 빼앗았다. 고려군과 신라군은 후백제군의 측면을 공격하려 했지만, 이때 엉뚱하게도 견훤은 경북 북부로 진격하려던 것 같던 군사를 돌려[13]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시)를 습격하고, 신라의 왕도인 서라벌(경주시)을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하는 서라벌 기습 작전을 시행했다. 견훤이 서라벌 레이드를 벌린 루트가 딱 현대 한국에서 상주영천고속도로의 경로이다.

순식간에 경주 옆인 고울부(오늘날 경상북도 영천시)까지 후백제군이 다다르자 비로소 견훤의 목적이 오로지 서라벌이란 걸 알게 된 경애왕은 급히 왕건에게 지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왕건은 10,000명의 병력을 급파했지만 고려의 지원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견훤이 친정한 후백제군이 경주에 나타났고[14],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견훤이 막 도착했을 때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 견훤이 급습하자 연회장은 난리가 났고 경애왕은 끝내 견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 견훤의 기습 공격은 당시 상황에서는 엄청난 무리수에 가까웠다. 당시 후백제군이 정석대로 퇴로 및 보급로를 확보하며 진격한다는 전제하에 신라 지역을 공격하려면 문경 일대와 대야성이 있는 합천을 점령한 고려군의 협공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경애왕이 제대로 산성에서 농성하면서 오래 버티기라도 했다면 퇴로가 차단될테고, 왕건이 직접 지휘하는 북쪽 고려 본국의 구원군+대야성과 강주에 나가있던 남쪽 고려군 병력+고려군을 지원해 외지에 나가있던 신라군 병력이 집결하기라도 했다면 본국으로 돌아갈 길도 없이 협공당할 위험이 컸다.[15] 그런데 견훤은 이런 협공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일단 문경 방어선을 뚫은 뒤 멧돼지처럼 우직하게 서라벌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이러니 고려군과 신라군은 도저히 대응할 시간을 벌지 못했던 것.

견훤이 무리수나 마찬가지였음에도 기어이 전광석화처럼 서라벌을 점령할 수 있던 건 견훤 자신이 바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복무하던 군인 출신이니만큼 서라벌 일대의 지리와 신라군의 행동 반경 및 경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처럼 서라벌 군인 출신 장졸들을 대동하여 앞장 서게 했을 터이다.

결국 경애왕은 견훤의 강요로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으며 이후 견훤이 경애왕의 왕비겁탈했고 장군들은 들을 겁탈했으며 경애왕의 동생 박효렴(朴孝廉) 등 귀족들을 포로로 끌고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남아있다.

서라벌을 침공한 견훤은 수도 경주를 약탈하고 방화를 저질러 화려했던 신라의 보물들과 문화재들이 안타깝게도 상당수 사라져버렸다. 또한 이제껏 신라군이 고려와 대(對) 후백제 연합전선을 펼쳤던 것을 뿌리 째 뽑아버리기 위해 병기를 제작하는 기반 시설들까지도 철저하게 없애버렸고, 이런 참상에 자포자기한 서라벌의 많은 사람들이 서라벌을 떠나거나 수도 전주로 돌아가는 견훤을 순순히 따라갔다.

이후 경순왕 김부는 주도권을 되찾자 전왕 경애왕이 했던 것처럼 똑같이 나름대로의 직속 병력을 육성해서 고려군과 또 다시 연합 작전을 벌여 후백제를 저지하려고는 했지만 이때 입은 타격이 워낙 심각하여 다시는 공세 작전에 병력을 투입하진 못하고, 수세적으로 몰렸던 것으로 보인다.[16] 경애왕의 두 아들은 인질로 견훤이 데리고 갔는데, 장남 금성대군 박교순(交舜)의 후손 박윤웅은 울산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으며, 차남 계림대군 박순현(舜玄)[17]은 경주 박씨의 정식 시조가 되었다. 겁탈당했다는 경애왕의 왕비는 기록이 없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자식들과 끌려갔거나 치욕감에 자살했을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3대를 이은 15년 동안의 박씨 왕실을 무너트렸지만 신라 국체를 완전히 끝내진 않고, 제46대 문성왕의 후손인 김부를 새 임금으로 세우고 철군하니 그가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다.[18] 고려 태조 왕건은 철군하는 견훤을 현재의 대구광역시 팔공산 인근인 공산에서 따라잡았고, 치열한 혈전인 공산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왕건은 여기서 개국공신 신숭겸의 목숨을 대가로 겨우 살아나 단신으로 도망치는 대패를 당했고, 일시적으로 힘의 균형이 깨진다. 현재 대구광역시 전역에 많이 있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들은 모두 여기서 유래되었다. 사실상 후백제로서는 이때가 가장 절정기였었고, 견훤이 왕건에게
"나는 평양 성루에 내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의 물로 내 말의 목을 축이게 할 것이다!"
라고 패기있게 국서를 보냈던 것이 이때 있었던 일이다.[19]

경애왕릉은 본인이 일생을 마친 포석정에서 멀지 않은(1.5km 정도 남쪽) 남산 자락에 있다. 이미 신라의 국력이 쇠할 대로 쇠한 시기에 조성된 능인 만큼 소박한 편이고, 능 주변의 숲이 볼만하다. 경애왕릉 바로 옆에 삼릉이라는 3명의 박씨 선대왕들의 릉이 위치한다. 다만 지금 경애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아니라, 지금 일성왕릉으로 알려진 무덤이 실제 경애왕릉이라는 고고학계의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일성왕릉, 경애왕릉 문서 참조.

2.1.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무엇을 했는가?

현대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인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1. 경애왕의 이런 저런 시도들을 볼 때, 분명 무능하진 않은 용기있고 나름 유능한 군주였으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분명히 후백제군이 수도 경주 코앞 영천까지 왔다는 걸 인지하고,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런 마당에 설마 술을 마시고 놀고 있었을까? 일단 후백제군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인지를 했고, 고려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쯤은 할 정도의 개념은 있었다. 아무리 개념없이 굴어도 저 정도 개념이 있는데 자기 목숨을 걸고 그런 풍전등화의 상황에 술을 마시고 논다는 게 맞지가 않다.
2. 포석정은 흔히 그 특이한 물의 흐름을 이용해 술잔을 띄우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놀이를 하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경애왕이 붙잡혀 최후를 맞았을 때는 음력 11월, 양력으로 치면 12월이다. 즉 칼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기도 하는 한겨울이었으므로 그런 시기에 야외에서 술잔을 띄우면서 한가하게 놀기는 어렵다. 경주는 겨울에도 눈이 잘 안 내리고, 얼음도 쉽게 얼지 않는 따뜻한 남부 지방이라 술잔을 띄우는 것 자체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한겨울 야외에서 달달 떨면서 그거나 구경하고 논다는 것도 좀 부자연스럽다.
3.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는 "遊鮑石亭宴娛"라고 되어 있다. 흔히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놀았다"라고 해석되는 부분인데 ''는 "놀다" 말고도 "방문하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절에 다녀올 때도 이 글자를 썼다.
4. 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른 곳도 많았다. 안압지와 임해전 등의 인공호수들. 이 곳들은 신라 말기에도 연회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20] 실제로도 왕과 귀족들의 유희 용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이런 놀 곳이 많은데 굳이 포석정에서 놀 이유가 없다.
5. 포석정은 신라의 성산(聖山)인 경주 남산의 중심에 있다. 포석정 북쪽 가까운 곳에는 시조 박혁거세가 나왔다는 나정신궁이 있으며, 알영부인이 나온 알영정, 박혁거세의 무덤 오릉, 그리고 후기 신라 박씨 왕통의 상징적 장소랄 수 있는 배동 삼릉[21] 등 여러 성지가 많다. 또한 기록에도 '포석정'이란 이름 대신 포석사(鮑石祠)란 이름도 자주 나오고, 실제로 이 터에서 '포석'(砲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도 발견되어 포석정이 노는 장소가 아니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설이 제기되었다. 포석정은 사실은 연회의 장소가 아닌 일종의 성지로서, 술잔을 띄우는 그 구조물도 사실은 연회용이 아닌 제례용이었다는 것이다.[22] 마침 음력 11월은 신라, 고려를 막론하고 팔관회가 있었던 시기였다. 즉, 나라가 위급해지자 경애왕은 팔관회를 통해 신라의 선조들에게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애왕은 "나라 망하는데도 술쳐먹고 논" 막장 왕이 아닌, 흡사 서로마 제국 말기처럼 자력만으론 운명을 타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해볼려고 하다가 그래도 불안하니 천지신명에게 기원할 수밖에 없었던 눈물나는 망국의 군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이며 정설은 아니다. 별로 의미 없는 정황 증거를 제외하면 중요한 근거는 양력으로 12월경인 음력 11월에 포석정에서 덜덜 떨면서 잔을 띄우고 놀 이유가 없다는 것과, 견훤군이 기습 공격해 오는 것을 알면서도 놀고 있었겠느냐는 것인데, 전자는 꼭 겨울에 유상곡수연(잔 띄우기) 놀이를 못한다는 법은 없고, 후자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놀았다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견훤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알면서 비빈들을 거느리고 방어 거점 밖으로 나가는 것도 유희를 위해서건 제사를 위해서건 지나치게 안이한 행동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정 안 되겠으면 고려 제8대 현종이나 조선 제14대 선조처럼 도망을 간다든지,[23] 아니면 경주 근처의 명활산성 같은 데라도 올라가 농성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24]

차라리 경애왕이 견훤의 공격 징후까지는 알아챘었어도 구체적인 공격 내용은 제대로 몰랐거나, 혹은 견훤의 진격 속도를 잘못된 정보 때문에 오판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아니면 실제로는 견훤이 왕건의 구원 시도에 퇴각하는 척하다 질풍신뢰와 같은 급습을 시도해 경애왕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견훤을 지나치게 띄워줄 이유가 없는 고려 왕조에서 작성한 역사적 기록이 이런 견훤의 천재적인 전략 전술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술 퍼마시다 망했다는 의자왕의 이미지와도 겹치는데, 이를 고려하면 당대 후백제 측의 프로파간다가 경주 초토화로 인해 교차검증되지 않은 채, 혹은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보여주려는 고려 정부의 정치적 의도 하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맞을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

경애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간만에 등장한 박씨 왕조는 15년 만에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신라에는 김씨 왕조가 들어섰으니, 즉위한 이는 바로 신라 최후의 왕 경순왕 김부였다. 이런 사실 때문에 후백제가 신라 내부의 이러한 갈등을 알고, 김씨와 손을 잡아 경애왕을 제거했다는 가설 또한 제기된다. 실제로 선왕 경명왕 때는 김씨의 반란 사건도 있었던만큼 박씨가 뜬금없이 재등장해 김씨를 밀어내고, 대를 이어 왕을 하는 것에 대해 남아있던 김씨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제례건 연회건 포석정에서 무언가 행사를 열었다면 이를 빌미로 서라벌의 모든 지배층들을 한 자리에 모아 무언가 뒷장난을 칠 가능성을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김씨가 견훤과 내통해 경애왕을 제거했다는 설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첫째로는 박씨 세력과 김씨 세력의 대립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지 직접적 사료는 없으며, 둘째로는 경순왕이 즉위 직후 경애왕을 위해 통곡하고 장사지내는 모습, 셋째로는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전대 박씨 왕들과 마찬가지로 친고려 반후백제 정책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도 견훤이 전격적으로 신라 영토를 침탈했던 건 김씨 족단이 반란을 일으켰던 순간이었고, 이후에도 견훤이 서라벌 상황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신라 영역을 헤집은 건 분명하다. 적어도 견훤에게 서라벌 내 동조자가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고, 경순왕마저도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즉위한 후 얼마 동안은 친견훤 반왕건 정책을 펼쳤었다. 경순왕의 행적을 보면 경순왕이 경애왕 살해 및 견훤에 대한 영합에 찬성했을 확률은 높지 않지만[25], 적어도 신덕왕계 왕실에 대해 반감을 품은 김씨 족단 입장에선 무슨 수를 써서든 신덕왕계 세력을 서라벌 내에서 완전히 뿌리 뽑고 싶어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아무튼 신라 내부 갈등구도를 묘사하는 것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기에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김씨 세력의 일부인 유염과 김응겸이 박씨 왕실을 제거하기 위해 견훤을 끌어들인 것으로 묘사된 바 있다. 경순왕 김부의 어머니는 경명왕과 경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3명은 모두 헌강왕의 외손(外孫)이다. 따라서 경순왕은 경애왕 사후 가장 가까운 근친 중 하나였다. 또한 견훤에게 수도가 약탈되면서 경애왕과 동성(同姓)인 박씨 일족들이 타격을 받은 영향도 있을 것이지만, 경순왕 김부의 즉위는 당시로서는 정통성 있는 즉위였다.

2.2. 견훤은 정말 왕후를 겁탈했는가?

경애왕의 왕후에 대해선 자세한 기록이 없으며, 그나마 있는 기록이 견훤이 왕후를 강간했다는 것이다.

일단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萱又縱其兵,剽掠公私財物略盡,入處宮闕,乃命左右索王。王與妃妾數人在後宮,拘致軍中。逼令王自盡,强淫王妃,縱其下,亂其妃妾。
견훤이 또한 병사를 풀어 공사의 재물을 모조리 노략질하고, 궁궐에 들어가 좌•우에 명해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과 비첩은 후궁에 있다가 군사들에게 붙들렸다. 이에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아랫사람을 풀어 경애왕의 비첩들을 강간하도록 하였다.
ㅡ《삼국사기》-경애왕-

이 기록이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에 의해 쓰였음을 생각하면 견훤의 잔혹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시켰을지 모른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왕건을 위해 견훤은 깎아내려져야 했는데 그 일환이 이런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런 잔혹한 행위는 삼국시대에 신라가 사비백제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란 해석도 일부 있다. 실제로 과거 백제의 성왕은 비장 도도에게 참수된 머리가 신라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혔다는 썰이 전해지고 있었고[26] 의자왕은 항복 직후 태종 무열왕과 제장들에게 술 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은 문무왕 김법민이 침을 뱉기까지 했다. 이런 역사적 경위에 따라 견훤도 신라를 정벌한 후 "의자왕의 한을 씻었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견훤은 옛 백제 지역 출신은 아니었으나, 그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백제 왕이었고, 그 신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가 그저 지지 기반인 백제 유민들에게 뭔가 보여줄 만한 보복 행위가 필요해서 억지춘향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경애왕의 증외조부인 경문왕(제48대) 시기에 태어나 외조부 헌강왕(제49대)을 섬긴 신라 정규군 장수였던 견훤이, 다소 과도하다 여겨질 정도로 신라 박씨 왕실에 치욕적인 굴욕을 그렇게까지 강요한 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긴 하다.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부분으로 따지면 왕성 서라벌 약탈까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해도 경애왕을 겁박해 자살하게 만들고, 왕후를 강간한 건 다소 불필요한 만행이었던 건 사실이다. 이것은 백제에 대한 복수나 정치적인 쇼보다는, 견훤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과 분노가 더 이유가 컸다고 보인다. 그전까지 경애왕이 적극적으로 뭔가 해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꽤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견훤이 겪으면서 꽤 많이 낭패를 보았던 건 사실이다. 백제니 신라니 뭐니 하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몹시 약이 올라 격앙해있었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 이런 개인적인 큰 분노와 적개심에, 나름 백제의 왕으로서 백제의 복수를 한다는 쓸만한 합리화의 명분이 더해져 행동의 브레이크가 망가져 버린 걸로 보인다. 이 기록을 뒤엎을 수 있는 사료는 현재까진 없다.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 후 신라를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 김씨인 김부경순왕으로 추대해 세웠으니 백제 유민에게 잘 보이려 한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은 더욱 더 설득력이 적다. 신라에 대한 복수라면 이미 경애왕을 살해했을 때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했던데다, 그대로 신라를 접수하기엔 왕건이 이끈 고려 대군이 바로 육박해있어 당장은 시간이 너무나도 없었다. 경애왕이 박씨므로 과거 백제 왕들에게 모욕을 주었던 신라 왕들과 관계가 없다는 얘긴 더욱 너무한 소리. 경애왕은 헌강왕의 외손자였던데다, 박씨와 김씨는 오래도록 통혼과 근친혼으로 엮여 있어 그렇게까지 다른 집안도 아니었다.[27]

일단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그의 왕후를 강간했다는,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그 자리에서 취했다는 내용은 워낙 성적으로 자극적인 내용이라 믿기 힘들어하는 현대인이 많다. 이와 같은 행동은 동양사에서는 사례가 없는 막나가는 행동이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일화는 오히려 설득력이 높다. 견훤이 경애왕 때문에 겪어야 했던 정복사업의 차질은 7년인데, 7년이 짧다면 짧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본인이 살아있을 때 모든 걸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던 60대 노인의 관념으로는 엄청나게 손해본 세월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경애왕에 대한 그의 분노는 백제의 국왕과 신라의 국왕으로써 이전에 인간 견훤이 인간 박위응에게 품은 과도한 적개심과 격앙이 가장 비중이 높았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신라 왕실을 위한 변호를 하자면, 교과서에서 흔히 나오는 진골 독주체제에 대한 6두품 이하 지식인들의 이탈이나 지방 출신 장수의 출세 한계 탓에 견훤이 신라 체제에 미움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인데, 실제 당대 현실은 매우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견훤은 단순한 지방 출신이 아니라 눌지-자비-소지 등 눌지계 왕실이 3대에 걸쳐 왕실 직할령으로 개척한 추풍령 일대 출신이었고, 바로 그 빽으로 신라 왕궁 근위대에 입대해서 매우 빠른 출세를 경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견훤은 반란 일으키기 직전인 겨우 20대 중후반 나이에는 서남해 방수군 비장이었는데 이 자리는 대강 현대 한국군 기준 대령 정도는 된다. 물론 견훤이 대단히 어린 나이에 입대해서 이미 그 나이 때도 군생활 경력은 최소한 11년 이상이었으며 군재가 당대 최고였음도 고려해봐야 하지만, 오늘날 한국군 기준이 아니라 가문도 승진에 영향을 미친 고려 시대 후반을 생각해봐도, 그 긴 고려 역사상 견훤보다 승진과 출세가 빨랐던 인물은 유일하게 경대승 하나 뿐이었다. 즉 견훤의 빠른 승진은 골품제를 통한 우대 또한 작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는 얘기다.

즉 견훤은 적어도 골품제 한도 내에선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아온 것으로, 때문에 객관적으로 봤을 때 딱히 신라가 그를 내쳤다고 보긴 어렵다. 도통을 자처한 걸 신라 왕실이 받아주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관직 자체가 신라사에서 사례가 없었고, 신라 왕실이 견훤의 천재성을 우리 같이 미래시로 보고 알 수 없지 않은 이상 이제 겨우 20~30대에 이미 승진을 엄청나게 빨리 한 편인 그에게 전례를 어겨가면서까지 그런 대우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다만 경애왕 때문에 몇 년에 걸쳐 신라 공략이 지지부진해 쌓인 스트레스를 돌이켜본다면, 그 신라 체제의 최정점인 왕과 왕비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처사를 강요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렇게 자신이 손에 쥔 권력을 재확인하기 위해 불필요할 정도의 가혹행위를 일삼는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고.

견훤과 완벽히 비슷한 사례로 칭기즈 칸이 있다. 칭기즈 칸이 살았던 몽골에서도 아내를 빼앗거나 훔치는 관행은 있을지언정 승자가 패자의 아내를 능욕한다는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유독 칭기즈 칸과 나이만부의 타양칸의 모후에 대해서만 해당 일화가 있다. 타양칸의 모후가 칭기즈 칸과 카마그 몽골부를 여러 차례 골탕먹이고 심한 모욕감을 여러 차례 준 게 원인으로, 견훤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짓을 저질렀을 수 있다.

견훤이 일시적으로 서라벌을 기습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점령 과정이지 견훤이 서라벌을 점령한 지 하루도 못 되어 바로 나와야 했을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서라벌의 무기 만드는 시설을 부수고, 정예병을 압송하며, 서라벌 사람들 일부를 후백제 수도 전주로 보내는 조치 등이 이뤄졌는데 그런 일들을 해낼 정도 시간은 있었으니, 서라벌 궁정 자체를 초토화하며 박씨 왕실에 극도의 모욕감을 안기는 행태를 저지를 시간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적진 한복판이든 뭣이든 적어도 그 상황에서 통일신라의 군사적 유산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후백제군에게 감히 도전해올 신라군은 어디에도 없었고, 유독 경계해야 했을 왕건의 고려군 본대는 여전히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분 단위로 급하고 말고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김부식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신라계인 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으나 김부식은 어디까지나 신라계니 뭐니 이전에 고려의 신하로서 《삼국사기》를 서술했고, 《삼국사기》를 김부식 혼자 전체를 서술한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고려 임금 인종의 확인을 거친 관찬 사서였다. 김부식이 일부러 후백제를 격하하려고 마음먹었다 해도 신라의 왕후가 백제 왕이라지만 한때 신라군 장수였던 늙은 역적에게 강간당했다는 얘긴 김부식이 정말로 신라계로 정체성이 강했다면 오히려 삭제하고 싶었을 치욕적인 일화이다. 견훤은 휘하 장병들에게 서라벌 궁정의 후궁들 및 시녀들을 겁탈하게 했다는데 이 또한 한국사는 물론이고, 동양사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모욕 행위다. 이렇게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센세이셔널한 만행이 김부식 혼자만의 상상에서 나온 창작일 수 있을 개연성은 0에 가깝다. 당시의 과장된 야사를 그대로 적었을 수 있으나, 신라계라는 이유로 곡필을 할거라면 견훤의 만행도 만행이지만 경애왕부터 나라 망하는데 포석정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놀던 암군으로 기록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이러한 복수는 견훤에게 7년 묵은 한을 쑥 내려가게 하는 스트레스 해소이자,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서라벌에서의 모든 정치행위를 좌지우지하는 최강의 권신 지위를 확인하는 숙원 해소였다. 신라사에는 많은 굴곡이 있었고 전기의 실성 마립간진지왕, 후기의 애장왕민애왕처럼 살해당하거나 쫓겨난 임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전 망한 적국을 부활시키까지 한 권신에게 아무 것도 못해보고, 임금부터 가장 지위 낮은 시녀들까지 몸까지 빼앗기며 철저하게 능욕당한 사례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한 만행의 이야기는 신라인들의 후백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굳게 했으며, 신라에게 별 원한이나 악감정은 없었던 패서 호족들의 동정심을 크게 자극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항이 현실로 드러나 왕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본문과는 관계 없지만 어디선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가 지은 <번화곡>(繁花曲)이 전한다. 진짜로 경애왕이 이런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
기원실제혜이사동(祇園實際兮二寺東)
양송상의혜나중(兩松相依兮蘿中)
회수일혜화만오(回首一兮花滿塢)
세무경운혜병몽롱(細霧輕蕓兮幷濃)
기원정사[28]와 실제사, 두 절의 동쪽에
소나무 한 쌍이 등넝쿨 속에 기대 있도다.
머리 들어 한 번 바라보니 꽃이 언덕에 만발했는데,
옅은 안개와 가벼운 구름이 둘 다 몽롱하구나.

3. 여담

4. 가계

파일:경애왕가계도.jpg

5. 대중매체에서

5.1. 태조 왕건

파일:external/blogfiles.naver.net/b03dd9afe9cf584bff6a8b3314acc9b7.jpg
태조 왕건에서의 경애왕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배우 문회원[30]이 연기했다.[31] 드라마에서의 모습은 비록 암군이지만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노력하고 최소한의 보는 눈은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32] 즉위 초부터 후백제를 지지해야 한다거나 후백제한테 이제라도 사신을 보내야 한다는 유염 등의 말을 무시하고 고려한테만 사신을 보내며 친고려 외교 노선을 견지하고 고려후백제 간 전투가 다시 벌어졌을 때 고려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후백제를 공격하는 식으로 후백제를 자극했다.[33] 그렇게 해서 일단 경명왕 때 잃었던 대야성을 되찾는 등[34] 전공도 올리기는 했지만 그 정도를 가지고 샴페인을 일찍 터트렸다. 대야성 수복을 기념으로 3일 동안 나라의 곳간을 활짝 열고 성대히 잔치를 베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견훤은 최승우가 쓴 계략대로 대야성을 미끼로 내어주고 몰래 신하들과 함께 서라벌로 진군 중이었다. 그 사이 유염과 김응겸 등 박씨 왕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김씨 일당들이 몰래 후백제와 내통해 후백제 군대를 신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사실도 모르고 경애왕과 신라 관료들은 포석정에서 놀았고 술자리에서 경애왕은 견훤을 도적 놈이라 멸시하며 "반드시 자신 앞에 무릎을 꿇리리라"는 호기로운 소리를 했다. 사실 신라군도 치열하게 싸웠고 고려의 왕건도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지원하러 가고 있었다. 경애왕이 놀지 말고 전력을 다해 방어라도 제대로 했거나 고려군과 적극적으로 연계를 했더라면 최소한 견훤에게 약간 치명타를 안길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유염과 김응겸이 몰래 지방에서 온 전령들을 죽여버리며 소식을 차단한 사이[35] 이미 서라벌 근교의 고울부가 함락되고 최후의 보루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김율이 지휘하는 경주 월성 마저 함락된 상태였으며 후백제군의 접근으로 병사들은 모두 도망간 뒤였다. 연회를 즐기다가 환관들에 의하여 후백제군이 침입하였고 궁궐이 장악되었다는 말을 뒤늦게 듣고서 그제서야 아연실색하여 왕비와 도망치려 하였으나 이미 늦었다.

포석정 침공 대본 [펼치기•접기]
>(침공 중에 현장 포석정 상황….)

경애왕: 이보시오들, 며칠째 마시고~ 놀아도~ 도무지 피곤하지가 않구려. 경들은 어떠하오?
박연식: 폐하께오서 이리 즐거워하시는데, 어찌 신들이라고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박효렴[36]: 술맛이 좋은데다가 날씨 또한 좋사옵니다. 게다가 주변의 소식들 또한 훈훈하옵니다. 많이 드시오소서, 폐하.
박연식: 이제 모든 근심걱정의 끈을 내려 놓으시오소서. 머지 않아 백제의 도적 견훤이가 폐하의 무릎 아래서 살려달라고 애원할 날이 올 것이옵니다[37].
경애왕: 암, 짐도 그런 날이 올 것이라 믿소이다. 제가 누구였는가 말이오. 우리 황실의 근위대를 맡았던 군관이었소이다. 괘씸한 같으니라고! 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야, 암!
왕비: (웃으면서) 많이 취하셨사옵니다, 폐하!
경애왕: 하긴 좀 취했소이다. 허나. 내 분명 말하오. 견훤이 그자는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오. 암! 괘씸한 자 같으니라고! (술 원샷하며 견훤을 분노하는 표정을 짓는다.)

(즐겁게 보내고 있는 중에, 그때….)

환관: (다급하게 경애왕에게 달려가면서) 폐하! 폐하! 큰일났사옵니다!!!
김부(훗날의 경순왕): (정신 번쩍 차리며) 무슨 소리인가? 궐 안에 무슨 일이 있는가? 왜 그리 피투성이인고…?
환관: 어서 피하시오소서, 폐하. 백제의 도적들이 궁궐을 범했나이다. 어서 피하시오소서, 폐하!

(조금 당황하며...)

경애왕: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고?
왕비: 도적들이 오다니? 궁궐에 범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박연식: (술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며) 상세히 말하봐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환관: 말씀 드린 그대로이옵니다. 수만 명의 백제군이 고울부를 돌파하고, 다시 월성에서 아찬 김율공과 그 군대를 전멸시켰으며, 지금 남문을 통해 궁궐로 들어왔사옵니다.

(경애왕과 왕비, 모든 신하들이 환관의 말에 들어, 술을 깨며 점점 불안감과 당황하기 시작한다.)

경애왕: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냐? 백제의 군대는 대야성에서 전멸을 하였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서라벌로 온다는 말이냐?
김부: 폐하, 허나 환관의 말을 들어보아 궁에 난리가 난 것은 분명한 것 같사옵니다. 일단 경계를 하시고, 전후 사정을 헤아리심이 맞을 것 같사옵니다.
박효렴: 그리하시오어서, 폐하. 저 환관들의 말과 행색을 보니, 뭔가 사정이 있는 것은 분명하옵니다.
경애왕: (그제서야 긴장) 그렇다면 김율 아찬이 죽었다는 말이냐? 김율 아찬이 죽었어?!!
환관: 예, 폐하. 어서 피하시오소서. 적도들이 지금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어서 피하시오소서!
박연식: (그제서야 믿는다.) 폐하, 어서 피하시오소서. 이자들은 대전 환관들이옵니다. 거짓을 아뢸 일이 없사옵니다.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분명하옵니다. (군사들을 불러) 여봐라! (신라의 군사들: 예!) 궐 안에 변이 일어난 것 같다. 모두 폐하를 뫼시어라! 악공들과 광대들은 연회를 물려라! 어서 폐하를 뫼시어라!
(경애왕도 너무나 큰 충격을 먹는다.)
박효렴: (군사들에게) 아, 폐하를 뫼시어라, 어서!
환관: 어서! 어서, 폐하를 뫼시어라!

(갑자기 연회장은 소란이 일어나 엉망이 된다. 경애왕과 황후가 손을 잡고 어쩔 줄 몰라한다. 피투성이 늙은 환관 하나가 관모도 없이 다시 달려와 부복한다.)

환관 1: 폐하!! 폐하! 폐하아아아…!
모두들: ……?
환관 1: 여기 대신들 중에 백제군과 내통한 무리들이 있사옵니다. (유염과 김응겸은 "으음…" 하면서 모른 체한다.) 저들이 내통하여 백제군이 오는 모든 길목을 열었다 하옵니다.
경애왕: (충격을 먹는다.) …뭐라?
환관 1: 뿐만 아니라, 폐하께 이르는 모든 소식을 차단하여, 저들이 서라벌에 이를 때 까지 알지 못하게 하였다 하옵니다!

(모두들 큰 충격을 먹는다.)

경애왕: 이럴 수가 있나…? 그들이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유염과 김응겸은 또 "으음…" 하면서 모른 체한다.)

환관 1: 일단 이 자리를 피하시오소서. 신도 간신히 궁궐에 빠져 나와, 이리로 왔사옵니다. 이미 모든 궁궐은 저들에게 장악되었사옵고, 난폭한 군대들이 이리로 오고 있사옵니다. 피하시오소서! 어서 피하시오소서!
박효렴: (모두들에게) 폐하를 뫼시고 가라! 어서 서둘러라, 어서… 폐하를 뫼시어라!

(우왕좌왕이다. 경애왕과 황후가 환관들에게 이끌려 간다. 그리고 곧 한 쪽에서 말 발굽 소리와 군사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신라 장군: 백제군이다!! 백제군이다!!!

(모두들 얼굴에 흙빛이 되어본다. 애술의 부장들이 군사들과 함께 몰려왔다.)
— 《태조 왕건》 157화, 서라벌에 침공한 백제군 및 늦게 소식을 알게 된 신라 대본.
궁궐까지 장악한 후백제군이 경애왕을 잡으러 포석정으로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는데 남아있던 얼마 되지도 않는 호위 병력들은 갑작스러운 후백제군의 대군 습격에 우왕좌왕하다 경애왕이 도망갈 시간조차 벌지 못하고 모두 전멸했다. 많은 신하들은 죽거나 사로잡혔으며 경애왕과 왕비는 환관 및 후궁들과 같이 급히 도망치다가 밤에 탈출하기 위해 근처 별궁의 병풍 뒤에 숨었으나 곧 발각되었고[38]"게 아무도 없느냐"를 연발하다가 견훤 앞에 끌려나온다.

이후부터는 비굴한 장면의 연속. 한때 신하였던 유염과 김응겸으로부터 조롱을 당하더니 견훤을 잡아서 꿇리겠다는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술에 취해서 한번 해본 말"이라고 변명하는 걸 시작으로 견훤에게 술을 따라 올리고 견훤이 바닥에 흘린 술을 개처럼 핥기까지 한다. 급기야는 견훤으로부터 "더러운 놈"이라고 욕을 먹고 얼굴에 침을 맞으며 발로 걷어차이는데 그런 수모를 겪고도 경애왕은 "살려주시옵소서. 폐하!" 소리만 해댄다.[39]
이에 빡친 견훤은 "내가 너를 미워해서 핍박하고 모욕한 게 아니었으며 단지 지난날 의자왕의 한풀이를 하려는 것이었고[40] 그래도 천년 사직을 이어온 신라의 기백을 보고자 했다"고 일갈한다. 이후 단도를 던져주며 자결할 것을 강요하지만 자결할 때조차도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어이할꼬… 어이할꼬…"만 연발하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 끝에 측근 대신 연식의 도움으로 간신히 단도에 찔려 자결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41] 연민과 혐오가 공존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듯.
경애왕이 자결한 후 견훤은 최승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애왕의 왕비에게 연회에서 자신의 시중을 들라고 하였으나, 왕비는 이를 치욕으로 느끼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견훤은 왕비가 자살했다는 말을 듣고 당황하여 장난이었다고 말했다.[42]

5.2. 기타

6.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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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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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경애왕 본기>
一年秋八月 경애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九月 태조에게 사신을 파견하다
一年冬十月 신궁에 친히 제사지내고, 대사면을 하다
二年冬十月 태조가 투항한 능문을 돌려보내다
二年冬十一月 견훤이 진호를 고려에 인질로 보내다
三年夏四月 진호가 갑자기 죽자, 견훤이 고려를 향해 진군하다
四年春一月 태조백제를 친정하자, 왕이 그를 돕다
四年春二月 장분 등을 후당조공 보내자, 후당에서 관직을 제수하다
四年春三月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다
四年春三月 태조가 친히 근암성을 깨뜨리다
四年春三月 명종이 왕봉규를 회화대장군으로 삼다
四年夏四月 왕봉규가 임언을 후당에 사신으로 보내다
四年夏四月 강주 관할 하의 4개 향이 태조에게 귀부하다
四年秋十一月 견훤이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세우다.[45]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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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어머니 의성왕후 김씨가 헌강왕(제49대)의 딸이다. 어머니의 나이를 최소한 870년대 중반생이고 형 경명왕이 890년대 초중반생으로 보면 재위 당시 연령은 20대 후반으로 경애왕은 최소 890년대 중후반 생인데, 죽었을 당시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봐야 30대로 추정하고 있다.[2] 헌강왕(제49대)의 딸.[3]경명왕, 동생 박효렴[4] 4번 문단 참조.[5] 금성대군, 계림대군[6] '경애왕'의 '경'(景)과 '애'(哀)가 사료를 오독한 사학자들에 의해 각각 발해 13대 왕 대현석과 발해 15대 왕 대인선에게 매치되어 이들이 '경왕', '애왕'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7]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 기록[8] 이처럼 수도와 그 변두리에만 간신히 행정권을 행사한 나라는 주나라, 동로마 제국, 무굴 제국 등이 있다.[9] 단, 경순왕 또한 실권과 영향력은 신라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놓치지 않았기에 후대 고려우왕창왕공양왕, 조선고종순종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경순왕 시대 신라는 영역이 그야말로 시조 박혁거세 시절 사로국으로 축소되어 있었으나, 경순왕은 적어도 국내에서의 실권만큼은 어느 시대 신라 국왕에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공고히 장악하고 있었다. 화백회의에서 마의태자까지 반대에 가세해 엄연히 부결로 뜬 고려 귀부 건을 혼자서 뒤집어버렸을 정도였다. 신라 국왕들이 대체로 왕권이 강한 편이었으나 진골들의 힘이 워낙 강해 몇 가지 예외 외엔 화백회의에서 내려진 결론을 왕이라고 자기 맘대로 밀어붙이기란 정말 어려웠다. 이런 점에선 아예 실권마저 대부분 박탈당한 상태였던 고려조선의 사례와 대단히 다름이 또 확인된다.[10] 당장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왕 역시 연개소문쿠데타를 일으켜서 영류왕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린 사람이라 치세 내내 실권이 없었다. 연개소문의 사후(死後)에도 연남생 - 연남건 - 연남산 등 연씨 일가가 여전히 실권을 독점 중이었고, 결국 고구려가 668년 멸망할 때까지 보장왕은 연씨 일가의 꼭두각시 신세였다.[11] 다만 내물 마립간 이후 수백년간 경주 김씨가 신라 왕위를 차지했던 만큼, 이론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라도 박씨 왕실에 대한 경주 김씨와 기성 세력의 반발 및 알력 정도는 존재했다고 보는 경우가 학계에 많다.[12] 말년에 잠깐 후백제에 붙었다가 고려군이 친히 때려잡았다.[13] 이는 견훤의 전략이라 볼 수 있는데, 근품성은 지금의 문경시 산양면 일대로 예천군 용궁면과 인접해있기에 왕건과 경애왕의 입장에서는 견훤이 근품성을 함락시킨 뒤 예천을 거쳐 안동(당시의 고창)이나 영주 등 경북 북부 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 예상하고 병력을 그쪽으로 보내게 될테고, 그렇게 되면 견훤 본인은 좀더 쉽게 경주로 진격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14] 당연한 소리지만 영천과 경주는 바로 인접한 지역인데, 이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있는 개성의 왕건에게 지원 병력을 요청한다한들 병력들이 내려오는 사이 견훤은 경주로 방향을 돌려 왕궁과 수도를 뒤집어놓은 채 돌아가고도 남는 상황이었다.[15] 결국 경애왕이 너무 빨리 당해서 견훤이 돌아가는 중에 공산(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뒤늦게 도착한 왕건의 고려군과 맞붙었는데, 여기서 왕건이 역대급으로 대패하고, 자신의 오른팔인 개국공신 신숭겸마저 잃은 격전이 공산 전투이다.[16] 그럼에도 왕건은 견훤의 선례를 상당 부분 참조하여, 아예 신라 왕궁 근처에 일종의 파견군 사령부를 설치해서 철저히 감시를 하는 한편 강원도로 통하는 길목에도 정예 부대를 남겨둠으로써 경순왕이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 있는 친신라 성향 호족들과 연결을 못하게 면밀히 감시했다. 경애왕 때까지는 고려와 신라가 신라가 명분상 우위에 있는 대등한 동맹관계였으나, 경애왕 살해 후의 신라는 고려가 신라 왕실의 동의도 받지 않고 자의적으로 호족들과 통신하면서 군부대 또한 제멋대로 배치하는데도 한마디 항의조차 못하게 된다. 이는 고려가 무력화된 신라의 처지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 저항력을 철저히 무력화하는 욕먹을 짓은 견훤이 다 해줬기에, 왕건은 가만히 앉아서 이득만 누리면 되었다.[17] 다른 이름으로는 입순(立舜) 혹은 수현(受玄).[18] <효녀 지은 설화>로 잘 알려진 화랑 김효종의 아들이다.[19] 이 글은 후백제에서 관직 생활을 했던 신라삼최의 일원이었던 최승우가 지었다고 전한다.[20] 예를 들어 경순왕 때 왕건이 서라벌로 찾아오자 안압지에서 연회를 열어 왕건을 접대했다.[21] 초기 신라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아달라 이사금(제8대)과, 후기 박씨 왕조의 두 왕[46]도 여기에 묻혔다고 알려져 있다. 수백년간 김씨 왕통이 이어져오다 왕위에 오른 박씨 경애왕에게는 자신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랄 수 있다.[22]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포석정이 '포석사'(鮑石祠)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포석정이 사실 제례용 사당이었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다만 필사본 《화랑세기》는 사학계에서 위서론이 대세라 일부 학자 외에는 사료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포석정 제사시설 설을 주장한다고 그게 꼭 필사본 《화랑세기》 긍정론으로 연결되진 않는다.[23] 말은 쉽지만 사실 이 시점쯤 되면 신라 조정 입장에서는 딱히 파천 할 곳도 없었다. 그나마 친신라세력으로 추정되는 김해의 소율희조차 고려의 강주 점령과 백제의 대야성 점령 이후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북쪽의 명주지역은 아예 궁예 시절부터 신라에서 완전히 이탈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조정의 파천은 그냥 타국=고려로의 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철기병이 몰려오는데 도망간다고 해봐야 길 위에서 밟혀 죽을 판이다.[24] 다만 포석정의 위치가 남산 등산로의 시작점이며, 남산 위에도 지금까지 성벽 일부와 군량고 유구가 남아 있는 남산신성이 있기는 하다. 남산신성에는 3개의 창고가 있었는데 그 중 좌창지는 가로 47미터, 세로 18미터나 되는 큰 창고였다. 정황상 증거지만, 경애왕이 포석정 위치에서 잡혔다면 병자호란처럼 산성에서 농성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명활산성을 두고 굳이 남산을 택한 이유라면 명활성이 사방에서 포위되기 좋은 방면 남산은 남쪽으로 산줄기가 계속 이어져있어 포위를 면하고 유사시에는 소율희나 강주 고려군의 구원도 기대할 수 있다.[25] 영합하지 않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게, 견훤에게 우호적이었다가 그가 서라벌에서 깽판을 치는 것을 보고 나서 입장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 경애왕을 장사지낸 것도 입장을 바꾸고 나서 선왕을 예우하는 차원이었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26] 다만 이 일화를 언급한 《일본서기》 구절을 보면 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당시에 떠돌던 '그런 소문이 있다'는 정도 기록이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한때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하고, 이후 처단 과정에서도 왕으로써 예의를 차려줬다는 부분을 보면 계단 아래 목을 묻어 모욕을 줬다는 일설 부분과 앞뒤가 맞지 않다.[27] 학자들의 추정으론 박, 석, 김 세 가문은 서로 통혼을 통해서 박성내에 박씨, 석씨, 김씨 이렇게 같은 가문내 다른 '씨'로 취급되었을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28] 인도 마칼타국의 수달장자가 부처님(석가모니)을 위해 세운 절의 이름을 딴 것.[29] 경명왕의 9남이라 기록도 있으나 보통은 경애왕의 아들일 가능성이 더 높다.#[30]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의자왕 역을 맡았고 2006년 KBS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문무왕 역을 맡아서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의 경애왕과는 전혀 다른 당당하고 위엄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실제 역사에서 문무왕에게 치욕을 당한 의자왕의 복수를 한다며 견훤이 한 행동을 생각하면 더욱 재미있는 배우개그가 성립한다.[31] 근데 사망 당시 많아야 3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경애왕을 만 56세의 문회원이 대놓고 흰 수염을 달고 노인 분장으로 나온게 고증 오류. 그러므로 경애왕 역은 왕건 역의 최수종과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가 맡아야 했다. 경애왕 사망 당시의 견훤은 60세였는데 문회원은 견훤 역의 서인석보다 4세 연상이다. 이 드라마 방영 당시만 해도 경애왕의 생년이 불명이다보니 모계나 부계를 거슬러 올라가 탄생 년도를 추정하는 정도까진 하지 않았던 것 같다.[32] 그의 예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는데 후백제는 절대 자신들을 보존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말대로 실제 후백제는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궁궐을 약탈하며 경순왕을 세웠음에도 계속 신라를 침략하여 나라를 개판으로 만들어놓은데 비해 경순왕고려에 귀순하자 그는 태자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상보로도 책봉되었고 그의 딸은 경종결혼한 후 망국의 왕들 중에서는 손꼽힐만큼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가 갔다는 것이다.[33] 고려가 신라에 지원을 요청한 적이 없는데도 멋대로 구원병을 보낸 것이지만 신라군이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안 왕건은 크게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대야성 공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34] 이 대야성 전투의 승리가 극중에서 신라의 '마지막 승전'이 되었다.[35] 이 와중에 전령 하나가 살아남아 소식을 알렸다.[36] 거침없이 하이킥에 나온 "이대근" 역할을 맡은 배우가 양영준이다.[37] 660년 6월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듯이 또 다시 고려와 함께 나당연합군처럼 후백제를 멸망하는 모습을 다시 보겠다라는 의미였다.[38] 사실 발각이 안 될 수가 없는 게 어차피 후백제군 도착 직전에 빠져 나온 거라 멀리 도망가지도 못했고 유염과 김응겸이 숨을 곳이 많지는 않다며 전각들을 다 뒤지면 발각될 거라고 조언해줬고 하필 별궁에 환관들과 궁녀들이 안절부절하며 어색하게 병풍 앞에 서 있었는지라 그 뒤에 숨어 있다는 게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39] 경애왕 본인은 몰랐겠지만 견훤은 "사람이 너무 부드럽다"는 이유로 신덕 대신 애술을 데리고 궁궐로 들어온데다가 "이미 승리했으니 적에게 인정을 베풀라"는 최승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실제로 이게 전략적으로도 옳았다.) "그런 건 왕건한테나 필요한 거"라며 일축하고 경애왕을 처음부터 죽일 작정으로 서라벌에 온 것이었기에 살려달라고 비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차라리 겨우 도망가거나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 죽은 신라 장수들이나 병사들처럼 당당하게 죽었으면 비록 죽더라도 명예는 지킬 수 있었을 것이건만 결과적으로 목숨과 명예 둘 다 지키지 못한 꼴이 되었다.[40] 견훤이 경애왕에게 "더러운 놈"이라고 욕을 하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발로 걷어찼는데 문무왕부여융에게 했던 것을 견훤이 그대로 되돌려준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백제가 멸망할 당시 신라의 왕과 태자는 박씨가 아닌 김씨였고, 김씨들이 박씨 왕을 제거하기 위해 후백제와 내통했다는 것이다.[41] 경애왕이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에서 너무 비굴하게 그려놓은 바람에 그의 후손 및 문중들이 방송사에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출처 1, 출처 2[42] 이후 나오는 내레이션에서는 견훤이 신라의 경애왕 비를 강제로 범했다는 한결같은 기록들에 당황했다고 밝히며, 견훤 같은 인물이 여인 하나로 후세에 욕을 남길 리 없고, 극의 주인공인 견훤을 그렇게 폄하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제작진은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견훤의 왕비 강간을 과장된 기록으로 보았거나 배우 이미지 문제, 심의 등 방송사정으로 인해 달리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견훤이 경애왕과 왕비를 핍박하여 죽게 만들고 서라벌을 유린한 것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지라 고창 전투에서 친신라계 호족들이 결사항전하며 고려에 붙게 만들고 만다.[43] 일성왕릉 항목에도 나오지만 현재 신라 고분 명명 대부분은 고고학적 지식이 없던 조선 시대에 붙여진게 많으며 경애왕을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성왕릉 묘지 형태를 통해 최근에는 경애왕릉 혹은 제52대 효공왕의 무덤인 효공왕릉이라는 추측이 많다.[44] 물론 그때 당시에는 현재와 다르게 피부 관리가 힘들어서 겉늙어보이는 경우가 많은 때였기에 충분히 노인으로 착각할 법만도 하다. 또한 시체처럼 말라비틀어진 모습을 노인으로 착각했다거나. 일단 해당 사연에 나온 경애왕 귀신의 모습은 주름이 많은 진짜 노인처럼 묘사되었다.[45] 스스로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


[46] 신덕왕(제53대), 경명왕(제5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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