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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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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장.svg 중국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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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朝鲜族 | Chaoxianzu[1]
파일:조선족.jpg파일:external/dimg.donga.com/201209031153_1.jpg
조선족의 2010년대 초반 분포지역.[2][3]
<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명칭 [ruby(朝, ruby=Cháo)][ruby(鲜, ruby=xiǎn)][ruby(族, ruby=zú)] (중국어)[4]
재중동포 (在中同胞) / 중국동포 (中國同胞)
중국조선족 (中国朝鮮族)
한국계 중국인 (韓國系 中國人)
조선족 (朝鮮族) (한국어)
Chaoxianzu[5] / Korean ethnic minority group / Korean Chinese[6][7] (영어)
인구 170만(2023년)[8]
주 거주 지역[9] 연변 조선족 자치주
국적 중화인민공화국[10]

1. 개요2. 조선족의 동향3. 명칭4. 역사5. 중국 내의 위상6. 지역과 혈통7. 교육
7.1. 초중등 교육7.2. 고등 교육
8. 문화
8.1. 생활상8.2. 언어
9. 정체성
9.1. 귀속9.2. 정체성의 혼란9.3. 동화
10. 중국 내 조선족 현황11. 한국 내 조선족 현황
11.1. 법적 지위11.2. 높은 범죄율?
11.2.1. 범죄 현황
11.3. 한국에서11.4. 한국 사회로의 동화에 대한 논쟁
12. 해외 조선족 현황
12.1. 조선족 대규모 해외 이주 원인12.2. 조선족 해외 이주 과정
12.2.1. 각 국가들의 이주 정책12.2.2. 조선족의 유럽 이주 과정
12.3. 해외 이주의 특수성12.4. 해외 조선족의 삶
12.4.1. 노동12.4.2. 해외 조선족의 위계12.4.3. 단신 이주 조선족의 삶
12.5. 해외 이주의 장점
12.5.1. 자유12.5.2. 하향 평준화 된 삶
13. 창작물14. 조선족의 분포 지역15. 인물
15.1. 대한민국
15.1.1. 가족이 조선족이거나 조선족 출신인 인물15.1.2. 조선족이었다가 한국으로 귀화한 인물
15.2. 중국·그 외 국가15.3. 기타 개별문서가 없는 유명 인물
15.3.1. 여담
16. 관련 자료와 문서17. 같이 보기

1. 개요

조선족(朝鲜族)[11][12]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공인한 한족 외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1족으로, 한민족 가운데 중국으로 이주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중국 인민정부가 자국 소수민족으로 분류해 지정한 명칭이다. 따라서 한국인귀화한 가능성이 있는 한국계 중국인까지 합쳐서 189만 명 정도 되는 것이고, 중국 정부가 2021년 공식 인정한 조선족 총 인구수는 170만 명이다.[13] #

한국의 조선족 총인구 추계는 조선족 가족이나 친척, 한민족 직계존속이 있으나 중국 수능 가오카오 소수민족 가산점이 필요없는 등 사유로 중국국적자가 민족을 한족 등을 선택해 비(非)조선족으로 분류되어 있는 사람이나 한국으로 이미 이주한 조선족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부정확하다. 대한민국 정부의 한국국적자 포함 재중동포/교포 수치를 보고 210~250만 명이라는 수치를 잘못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객관적으로 당연히 중국에 체류 중인 재중[14] 한국인 유학생, 중국으로 귀화하지 않고 사업 혹은 주재원 등 목적으로 중국에 체류만 하고 있는 한국 국적 교민 40~50만 명까지 조선족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15][16]

중국민족문화리소스 - 당대 조선족 인구 발전현황에 의하면, 조선족의 인구는 약 14억명의 전국 총 인구의 0.14%, 13위에 해당한다. 조선족의 중국 정부 집계 총 인구는 2010년 기준 183만 명이었으나 한국 귀화 등으로 인해 2023년 기준 조선족 중국 정부 추산 총 인구가 170만~190만으로 감소 추세에 있다.[17] 조선족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는 중국 최초의 소수민족 자치구[18]로서 특별한 의의가 있고, 그 외에 장백 조선족 자치현이 따로 있으며 기타 중국 각지에 더 낮은 밀도로 퍼져있다. 대한민국에는 조선족 총 인구 약 170-189만 명 중 70만 명 정도가 거주하여 전체 인구의 41.2% 이상의 인원이 거주 혹은 상주한다. 한국에 있는 조선족이 연변 거주 조선족보다 많아졌다. 총 인구 170만명 가운데 70만이 한국에서 경제생활하는 조선족

후술하겠으나, 애초에 조선인(人)이 아니고 조선족(族)이라는 단어는 중국공산당의 민족식별공작(民族識別工作)으로 만든 신조어다. 이전에 중국 국민당은 중국에 정착한 조선인을 한교(韓僑)라고 불렀고, 청나라는 한민(韓民)이라고 불렀다. '조선족'은 1949-1953년에 최초로 사용된 호칭으로, 이는 《간민교육회장정(垦民教育会章程)》 규약에 명시되어 있다.[19] 조선족이라고 불리는 재중한인/조선인 모태는 중국에서 19세기 중엽부터 형성

2. 조선족의 동향

“하지만 조선족이 갖고 있는 언어적 습성은 교육에 있어 오히려 딜레마를 양산한다. 두세가지 언어를 다스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한가지 언어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쎄미링걸(semiligual)이 될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다.” 재일조선족 - 보이지않는 소수자

3. 명칭

중국 외교부 대사관 - 조선족: Korean ethnic minority group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 - 우리나라의 소수민족 - 조선족

대한제국이 존재했던 시절, 중국 대륙청나라는 대한제국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에, 자국 내의 조선인들을 한민(韓民)이라고 불렀다. 이후 중화민국 시대에 국민당이 성립하고 이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함에 따라 중국에 거주 중인 조선인들을 한교(韓僑)라고 불렀다. 하지만 1949년에 중화민국이 국부천대대만 섬으로 쫓겨나고 공산당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자 한교(韓僑)라는 명칭은 다시 조선인(朝鮮人)으로 환원되었다.

현재와 같은 조선족(朝鲜族)이란 명칭으로 바뀐 것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국 내의 소수민족들을 전부 통제하기로 결정하면서 이들을 민족(民族) 단위로 관리하기로 구분 관리했기 때문이다. 1950년에 시작된 민족식별공작(民族识别工作)[32] 제1단계부터 중국 내 조선인들을 조선족(朝鲜族)으로 묶어버렸다. 이후 중국에서는 조선계 중국인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조선인을 지칭하는 말로 조선민족(朝鲜民族)이라고 따로 표시하였고, 조선족(朝鲜族)으로 표시한 경우는 보통 중국의 조선족을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한중수교 이후로는 한민족이라는 표현도 증가 추세에 있다.

바이두의 "한민족 우월주의(항일 관련)" 페이지

중국 본토 최대의 위키위키 사이트인 바이두 백과에 '조선족'이라고 검색하면 아래와 같이 사용자들이 달아놓은 설명이 나온다. 바이두 백과는 중국에서조차 지식인들의 경우 일반적으로 참고 자료로 사용하지 않지만 이 문서에서는 중국에서 쓰이는 보편적 명칭을 알아보기 위해서 살펴볼 가치가 있으므로 제시한다.
조선족(차오셴쭈)
朝鲜族人口为1830929人(2010年),主要分布在吉林、黑龙江、辽宁东北三省
조선족의 인구는 183만 929명(2010년)이고 주요 분포 지역은 지린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동북 3성이다.

그렇다면 중국, 그리고 한국의 표준 언어 사전에서는 이 '조선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다음은 중국의 <현대한어규범사전>의 설명이다.
1. 중국 내 소수민족의 하나.
2. 조선반도[33]의 주체민족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의 <표준국어대사전>의 설명이다.
중국에 사는 우리 겨레

한중수교 이전에는 한반도 내에 한 국가만 인정한다는 법칙이 있었기에 중국은 한국인과 한(韓)인이라는 단어를 한반도의 조선민족(朝鲜民族)계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로 조선인을 썼기 때문에 조선족(朝鲜族)이란 단어와 조선민족(朝鲜民族)이란 단어를 한국인북한인을 포함한 민족 전체를 의미하는 뜻으로 동일시되기도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한중수교 이후 대한민국이 중국에서 국가로 인정되고 중국인들에게 한국인(韩国人)과 한국(韩国)이라는 단어가 정착하면서 조선족이라는 단어는 '중국'이란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중국계 조선족을 표현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중국이 북한사람은 조선인(朝鲜人)이라고 표기하고 남한사람은 한국인(韩国人)으로 표기하기 때문인데, 한국인은 자신들을 한민족(韓民族)으로 표기하고 북한은 자신들을 조선민족(朝鲜民族)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중국계 조선족을 그냥 조선족(朝鲜族)으로만 표기해도 구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현재 중국 대학교의 대부분 논문은 한민족 관련 내용을 적을 때 조선민족(朝鲜民族•차오셴민쭈)이나 한민족(韩民族•한민쭈)으로 표기한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학술적이지 않은 부분에서는 앞서 언급한 1950년 이후에 생긴 현대한어규범사전 등에서 보듯 중국에서 의도적으로 한민족을 조선족이라고도 하는 경우가 있다.[34] 여기서는 한국의 한민족조차 한민족이라는 의미에서 '조선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나 언론에서 '재중교포', '재중동포'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동포(同胞)'는 외국에 사는 한민족 전체, '교포(僑胞)'는 그중 한국 국적자를 뜻하기 때문에 둘은 좀 다르다. 그러므로 동포이되 외국국적자인 중국 조선족은 재중교포가 아닌 재중동포에 속한다.

'조선민족이 아닌 조선족은 비하 표현'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렇지만 중국어에서는 중국 인구 92%를 차지하는 한민족(漢民族)도 한족(漢族)이라고 잘만 부르고, 만족, 장족 등에서 보듯이 모든 민족이 다 민족명 뒤에 족(族)자만 붙인다. 오히려 선족(鲜族)이라고 부르는게 멸칭으로 간주된다.

조선족들은 그들의 명칭을 조선족으로 부르지 않고 중국인이나 한국사람으로 칭해주길 원하거나 조선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5천만 한국인이던 2백만 조선족이던 국적에 따라서 호칭을 명확히 해야할 필요가 있다. 중국 국적이면 중국인, 한국 국적이면 한국인. 한편 한국인을 중국 국적 한국/조선계 중국인을 특정하는 조선족(朝鮮族)이라고 부르는건 확실히 문제가 있고, 중립적으로 보면 한국인, 조선족을 통틀어 한국의 민족을 뜻하는 한민족(韓民族)이나 한족(韓族) 대신 조선민족(朝鮮民族)이라고 부르는 건 가능하다.

1948년 8월 중국 연변 지구당위원회에서 "연변 등 동북 3개성에 거주하는 조선민족 중 호적을 가진 자는 모두 중국 공민이고, 호적 없이 잠시 거주하는 자는 모두 조선교민"이라고 규정하여, 조선족과 조선 교민의 차이를 구분하였다.

조선족들 스스로도 '조선족'과 '조선민족'을 구분하여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다만 이들 스스로 조선족이자 조선민족이기도 한 만큼, '조선민족'이라는 표현으로 자신들을 정체화하는 경우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네이버 사전에서 제공되고 있는 중국어 사전의 일부를 출판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조선족'의 정의를 '한민족'이며 '조선민족'이라고도 한다.

4. 역사

오늘날 조선족의 직계 기원은 19세기 중후반 간도로 이주한 주민들에서 주로 찾는 편이다.

만주는 대개 몽골-튀르크계 민족들이 거주하던 내몽골 동부 고원 지대 그리고 과거 고구려 영토로 대표되는, 그리고 오늘날 한민족이 거주하였던 농경에 유리한[35] 비옥한 요동 등 남부 지역 그리고 퉁구스계 삼림 수렵채집민들이 사는 동부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구려 영역 관련 지도와 만주 지도를 비교대조해보면 알겠지만, 한민족은 오늘날 만주라 불리는 지역 전체를 다 장악하고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만주에서 알짜배기 땅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했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조선족과 고대-중세 만주사를 같이 엮는 것은 오늘날 기준으로 다소 과한 민족주의 관점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오늘날 조선족 중 가장 정착 역사가 오래된 집단으로는 무려 400년 전 만주에 정착한 랴오닝성 번시시의 '번시 박씨'가 있는데, 이들의 조상들은 1619년 후금(後金)을 정벌하기 위해 명나라와 연합전선을 펼쳤던 조선시대 강홍립(姜弘立.1560-1627년) 장군을 따라 압록강을 넘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부차(富車.현재의 랴오닝 푸순(撫順)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인 사르후 전투에서 패배, 후금의 포로가 됐던 강홍립의 부하였던 그들이 번시 일대에 정착하면서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강홍립은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번시 박씨의 시조는 만주에 그대로 남아 계보를 계속 이어갔다는 것이다. 연합뉴스 기사 KBS 뉴스기사

이후 팔기군에 합류한 조선 출신 박씨 형제들의 후손들은 청나라만주족으로 분류되었다가 1958년에는 한족으로 분류되었고 다시 1982년에서야 조선족으로 재분류되었다. 특히 이중에서 번시 박씨가 만주족으로 분류되었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청나라 때 편찬된 <팔기 만주 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돼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인 출신의 성씨들도 43개나 포함돼 있었다. 다시 말해서 만주 지역에 잔류 혹은 이주했던 한민족 상당수가 만주족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36] 상술한 번시 박씨의 경우도 집성촌을 중심으로 모여살면서 외부인들과의 통혼을 최대한 제한하면서 혈통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어는 거의 대부분 잊어버린 상태였고 조선족으로 인정받고 나서야 다시 조선어(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즉, 번시 박씨 집성촌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전근대 만주 지역의 한민족 이주민들은 대부분 만주족이나 한족 등에 완전히 동화되어 버렸다는 설명이 가능하다.[37] 다만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만주 이주는 1860년대 조선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간도 개척에 나선 조선인들이 그 시초였으며, 이렇게 보면 조선족의 중국 이민사는 길게 잡아도 160여 년 정도이다.

근세 여진족 지도자 누르하치후금을 건국하고 이윽고 청나라를 성립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한 이후 만주족한족에 동화될 것을 두려워한 청나라 황실은 만주지역을 봉금지역으로 만들어 한족이 들어가는 것도 막았다. 만주 봉금령은 1881년까지 유지되었다. 청나라가 아편전쟁으로 쇠락하기 시작하자 러시아 제국이 만주 일대를 노리기 시작하는데 청나라 조정은 이에 맞서서 1870년대부터 만주 봉금을 단계적으로 해제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족 외에도 조선 사람들도 은근슬쩍 간도를 중심으로 이민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바로 오늘날 조선족들의 사실상의 직계 기원이 된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 사람들은 조선의 식습관 그대로 쌀밥을 좋아하였고 비옥한 간도 평야지대에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오늘날 중국 동북3성 지역은 중국의 주요 자포니카 품종 벼 재배지역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다.

조선은 점차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관심은 대한제국의 성립이후에 노골화되기 시작했는데, 대한제국은 이 지역에 서변계관리사(西邊界管理使)를 파견하는 등, 해당 지역 조선인을 통치하려는 노력을 했다. 되려 청나라가 행정력유지를 할 수가 없어서 1889년부터 조선인을 대상으로 변발령을 내리는 등, 강행조치를 했는데, 오히려 이 정책이 해당지역 조선인들의 적개심을 샀고 훗날, 대한제국의 간도병합 욕망에 불을 지폈다. 이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은 조선인이란 정채성이 강했고, 대한제국이 조선으로, 간도병합에 소극적일 시절부터 적극적으로 조선으로의 편입을 원했다.[38] 대한제국은 이에 호응하여 1903년 말에는 선양시 부근까지 영향력을 확장했으나, 1905년에 을사늑약, 1907년에 군대해산을 당함으로서 1897년부터 대한제국이 추진했던 간도편입은 추진력을 상실했다.

1909년의 간도협약이 체결됨으로서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우리 대한민국에 포함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가 날아갔고 이후 조선족의 역사는 한국사와 완전히 분리되어 진행된다. 구한말부터 침략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조선을 떠난 사람들이 간도지역에 많이 정착했다. 경술국치이후, 생업을 유지하기 힘들어진 가난한 조선인들이 삶을 위해 조선을 탈출하여 정착하기 위하여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한족만주족 지주들에게 착취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후에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는 단초가 된다. 만주에 삶을 찾으러 나간 조선인들도 만주의 동포들에게 미쳤던 야욕을 피할 수가 없었다. 1920년에는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으로 공세를 막았지만 연해주 4월 참변간도참변으로 만주일대로 나간 조선인에게 흉수를 저질렀다. 이렇듯이 계속해서 만주일대에 대한 침략야욕을 바탕으로 결국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웠다. 오보사건부터 만주사변의 사건까지 중국인들에게 계속된 눈총을 받던 동북 3성의 조선인들은 윤봉길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이후로 입지가 나아진다.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만주국 신민으로서 살게 되었다. 만주의 개척을 위하여 오족협화의 구호아래 만주에 조선인들의 이주를 장려했는데, 조선인을 만주로 보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만주로 조선인을 보낸다는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다. 1945년 만주국해체되면서, 만주중화민국의 치하로 들어갔다. 이후에 조선인들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다.만주의 조선인들은 만주에 남거나 조국 땅으로 돌아가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했는데, 중국이 공산화될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이나 독립운동을 위해서 만주로 왔던 사람들, 그리고 만주로 쫓기듯이 왔던 사람들은 대부분은 조국 땅으로 돌아갔지만, 자의로 만주에 이주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만주에 남았다. 또한 중국공산당에 협력하여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은 북한으로 가서 연안파가 되었고 훗날 김일성에게 숙청되었다.

만주에 남았던 사람들이 조선족의 직계조상 혹은 당사자가 된다. 한편 만주와 중국에 남아서 조선족이 되었던 또다른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팔로군과 함께 국공내전에서 공산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다. 이들 중에 상당수가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인민군 창건에 근간이 되었고, 6.25 전쟁의 주축이 되어 산화했지만, 북한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사람들은 연변에 정착해 조선족이 되었다. 이렇듯이 본래 친공산당세력들이 꽤 되었기 때문에 연변의 조선족들은 중국공산당마오쩌둥에 꽤나 협조적이었고, 덕분에 수가 적음에도 중국에서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6.25 전쟁시기까지 한반도로 넘어가지 않은 조선인들을 중국공산당은 중국인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1952년까지 중국에 정착한 모든 조선인들에게 시민권이 주어졌는데, 이들을 한데 묶어서 조선족이란 이름의 소수민족으로 구성하고, 연변에 조선족 자치구를 신설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 소수 민족 정책은 레닌주의에서 제시되었던 소수민족 정책을 기반으로 하였는데[39][40] 레닌주의 교리에 따르면 민족 영토가 결여된 채 오직 문화에 토대를 둔 민족은 인정받을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 내 조선족 인구는 유대인처럼 중국 각지에 소수자로 분산되어 흩어져 있던 것이 아닌 이른바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족끼리 마을을 이루어 모여살던 상황이었고, 중국은 이러한 지역들을 묶어서 연변 조선족 자치구라는 행정 구역을 설정하였다.

하지만 조선인 인구는 계속 유출[41]되었기에 숫자가 계속 줄어들었고, 1955년에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로 격하되었다. 연변에 살던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넘어간 이유는 순전히 애국심/민족주의부터[42] 소수민족에 대한 은근한 차별까지 각양각색이었지만, 사실 대약진운동으로 중국/경제가 점점 나락으로 가는 것에 비해서 북한소련동유럽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전후재건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성장가도를 계속 달렸기 때문이다. 만약 중국 내에서 조선족들의 북한 귀국을 막지 않았다면 조선족 자치구도 사라졌을지 모를 일이다.

4.1. 문화대혁명 이후

셋째, 1958~1978년 시기에 조선족의 정체성은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한민족과 구별되는 중국인으로 규정되도록 강요받게 되었으며, 중국의 조선족과 한반도의 한인과 구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모국은 포기하도록 강요받았다. 심지어는 고국이라는 표현도 쓰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문화혁명(1966~1976)의 초기에 더욱 심하였고 일체의 민족적 특색이 나타나는 표현은 쓰지 못했다. 특히 계급 대오 정리운동기간(1968~1969)에는 많은 조선족이 민족 문제로 희생한다. 또 민족문화도 큰 수난을 당했는데 연변일보는 신화사전신으로 개명되어 한자로 출간하였고 연변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에서는 조선어 대신 중국어로 강의했다.
"국내 거주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 형성과 변화 연구," 김영술 (동북아연구, 2019))#

그러나 문화혁명을 기준으로 모든게 달라졌다.

조선인의 인구유출은 뜻밖에도 한족의 국가인 중국에서 막는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이를 피하려는 사람을 반혁명으로 몰았는데 조선인이 문화대혁명을 피해서 북한으로 도피하려 하자[43] 중국에서 북한으로 도피하는 사람을 조선간첩으로 몰아서 감옥에 넣고 제재를 가했다. 때문에 조선인의 북한귀국행렬은 멈춘다. 결국 중국당국의 눈을 피해서 북한으로 넘어가지 못한 사람은 그대로 중국에 눌러 앉게 되었는데, 이들이 현재의 조선족이다.

문화대혁명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한반도의 한민족과 둥베이 3성의 중국조선족으로 나눈 것이 아니다. 조선족의 정신구조 자체를 바꿔버렸는데 문화대혁명은 조선족의 출신성분에 대한 기록, 가령 족보같은 것을 모두 소각하거나 폐기했으며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들의 정신을 개조한다. 예로 문화대혁명이 벌어지기 전의 조선족은 자신이 유래한 지역을 알고 있고 자신을 소개할 때도 "내 고향은 남쪽 ㅁㅁ지역이오"라는 식으로 답변했는데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조선인은 자신을 중국의 항일전쟁에 피흘려 싸운 급부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강렬하고 뚜렷한 민족관과 조국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개조 이후에는 "우리는 중국 내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중국조선족"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북한과도 결별하여 "우리의 조국은 중국"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개조는 4인방의 한 명이었던 장칭의 주도로 시행되었다. 장칭이 파견한 마오위안신(毛遠新)[44]장칭의 뜻을 받잡아 조선족을 족치기 시작했다. 연변에 온 마오위안신은 "조선족은 믿을 수 없다", "조선어의 수명은 기껏해야 10년 내지 15년이다", "연변 문화대혁명에 외국(북한)이 손을 뻗쳤다", "연변의 조선족에 다시 한번 대동란과 대분화가 일어나야 한다", "조국의 동북변방 연길에 몸서리치는 반혁명 반란사건이 일어났다"면서 민족의식이 있는 조선인들을 반혁명분자, 조선(북한)의 간첩 등으로 몰아 집중적으로 박해했는데, 이는 계급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유명한 이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주더하이)가 있고, 그 외의 조선인 주장과 서기들은 분리주의자로 몰아가 실각시키고 죽였으며, 조선의 역사와 말과 글을 가르치던 조선인 교사들을 홍위병으로 끌어내 조림돌림하며 자아비판을 시켰다.

이러한 조선족에 대한 박해행위는 단순하게 현장의 조선인 관리들을 욕보인 것 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저명한 독립운동가를 격하하고[45] 그들의 유물을 파괴했다. 사람을 짓이긴 후에는 조선인의 문화 또한 파괴하려 들었는데, 평양냉면, 함흥냉면, '인천백반' 같이 조선땅의 지명이 붙은 음식점을 파괴했고, 조선인들의 사진과 족보는 물론 조선어로 쓴 책이나 편지를 검열하여 전부 불태워버렸다. 한복을 입은 사진이 나오면 처벌했고, 한글로 쓴 책이나 편지 한 장만 나와도 괴롭혔으며, 족보는 발견하는 즉시 반혁명분자 내지 지주/유학자계급으로 분류하여 극형을 내렸다. 이때 항일 독립운동에 관련한 자료가 상당수 유실되어, 독립운동사와 관련한 수많은 기록이 사라졌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기록조차 4인방과 마오위안신은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마터면 조선족에 대한 박해 및 정신개조사업이 잊혀질 뻔했다. 하지만 황영림이라는 조선족 사진사가 목숨을 걸고 사진을 찍어 관련된 사진자료를 남겼고, 이를 한국인 류은규가 엮어서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이란 이름의 책으로 2010년에 출간함으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제목에 '10년의 약속'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에는 사연이 있는데, 저자인 한국인 류은규가 조선족 사료를 수집하면서 문화대혁명 때의 공백을 백방으로 찾던 중 1999년 용정시(룽징)의 조선족 사진가로 문화대혁명 당시 연길현문화관에서 근무하면서 연변에서 벌어졌던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사진으로 찍었던 황영림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고, 류은규는 그를 찾아가 몇 차례나 설득한 끝에 그가 당시 촬영한 사진을 얻어 <잊혀진 흔적-사진으로 보는 조선족 100년사>(2000년)를 엮을 수 있었다. 황영림이 류은규에게 사진을 줄 때, “사진을 당신에게 주겠으나, 바로 공개하면 절대로 안 된다. 꼭 내가 사망 후 공개하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찍은 사진 6천 장을 모두 류은규한테 넘겼고, 황영림이 2006년에 타계한 뒤에 류은규는 그와의 약속대로 그 사진을 공개했던 것이다. 이것이 부제 ‘10년의 약속’이 붙은 연유다. 조선족들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겪었던 고초나 당시의 상황을 사진으로 보고싶은 사람은 <연변 문화대혁명 - 10년의 약속>을 보길 권장한다. ## 단, 2022년 기준으로 절판되어 구할수 없으므로 도서관을 이용할 것.

이러한 조선족들의 고초는 조선인의 민족정신와 함께 끝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문화대혁명 이후에 조선족이 한족에게 원하든 원치 않든 도전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고, 조선족은 항일전쟁에 함께한 민족으로서 꽤나 대접받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의 북한인과 처지가 180도 바뀌어서 이제는 북한사람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 방향으로 탈북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운명이란 알 수 없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북한으로 탈출했던 친척을 중국에 남은 사람(조선족)이 도와주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이후 개혁개방이 이루어지자 조선족의 교류대상은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문화대혁명이전에 많은 조선족이 북한에 넘어갔듯이, 현재는 많은 조선족이 한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다만 그 시절과 다르게 현재의 조선족은 스스로를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한국에 영구정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외화(원화, 달러)를 벌어서 본국으로 송금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국에 입국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앞잡이나 범죄자집단이란 편견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 조선족의 해외 진출이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1980년대 후반 이주하기 시작한 국내 조선족은 2022년 현재 70만 명이다.

1980년대 중·후반 조선족은 한국 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한국 정부의 간단한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들은 한약재를 가지고 입국하여 큰돈을 벌면서 중국 조선족 사회에 ‘코리안 드림’의 불을 지폈다. 1990년대 초반 불법체류자들이 늘어나면서 사증을 발급받아야 한국 입국이 가능하게 되었다. 합법적 입국통로가 좁아지면서 새로운 입국방식으로 등장한 것이 조선족 여성의 한국 남성과의 혼인을 통한 이동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족 남성들은 대부분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여성은 식당, 가사도우미와 같은 서비스직 노동자로 일한다.

그들이 한국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요인은 우선, 한국 노동시장의 저임금 노동력 수요와 중국에 비해 월등하게 높은 한국의 임금 수준이다. 또 중국의 개혁, 개방 이래로 조선족의 지위상승 열망과 중국 내 중앙 진출의 기회 제약의 상황이다. 또한 같은 언어를 쓰는 한민족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은 재외동포가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여 불법체류자를 양산했다. 조선족노동자들의 집단행동과 시민사회단체의 주장에 따라 최근에는 방문취업을 5년간 복수로 허용하고, 재일동포 비자는 3년의 체류기간을 주고 있고, 2010년에는 육아도우미, 가사도우미, 간병인, 복지시설보조원 등의 서비스직 종사자에 대해 영주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2022년 현재는 2020년에 중국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하여 조선족은 한국과도 북한과도 교류가 줄고 있는 실정이다.

5. 중국 내의 위상

한국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와 지식인들이 만주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였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좌익계열, 항일성향[46]이었다. 때문에 여러 항일단체들이 중국 항일단체들과 어울렸으며, 이는 국공내전에서도 조선족들이 크게 관여하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오게 된다.

중국공산당 내부에도 조선인 출신 간부들이 꽤 있었으며, 만주 내의 민간 조선인들도 국공내전 당시에 큰 도움을 주었고, 이는 만주에서의 대패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국공내전 승리로 이끄는 원인 중 하나가 되게 된다. 따라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이후 조선족은 중국 내부에서 대우가 나은 편에 속하는 소수민족이 되었으며, 조선족자치주도 중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자치주[47]이며, 중국 내 소수민족으로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민족대학 설립까지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중국공산당이 대약진운동 이후 막나가게 되면서 내부 권력 다툼으로 조선족의 위상은 급격히 추락하게 되었으며, 조선족 자치구 주장이 숙청되기도 하였다. 중국이 1970년대 이후 개혁개방을 추진하면서, 연길을 비롯한 조선족자치주는 고도발전에서 소외되었다. 애당초 개혁개방의 모토가 "일부가 먼저 잘 살고 일부가 나머지를 잘 살게끔 이끈다(선부론)"이다. 물론 그 일부는 바다에 인접한 동남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 조선족들이 사는 동북 지역은 "나머지"에 속한다. 북한과 인접해 있어서 북한의 경제상황이 그런대로 괜찮았다면 연변의 공업도 발전될 여지가 있지만, 북한의 경제가 너무 안 좋은데다가 라진항이나 청진항을 쓰기에는 제한이 너무 많고, 러시아의 극동지역 인구도 그리 많지 않기에, 공업이 발달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변에 민족국가가 모국으로 존재하는 몇 안 되는 소수민족인지라, 인구 수에 비하면 그 위상은 여전히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모국 중 한 곳은 경제적으로 부유하기에 조선족들의 경제적 위상은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나은 편으로, 실제 한국으로 건너가 경제활동 하는 사람들도 제법된다. 또한, 한류를 통해 중국 내 조선족에 관심을 갖는 중국인들도 늘었다. #

소득이 높은 한국에서 돈을 벌고 중국으로 다시 간 조선족들은 상류층이며 중국에서도 떵떵거리며 살지만, 일부 조선족들은 대도시의 한족들의 가정부를 하기도 하는 모습이 티비에 비치기도 한다. 이는 지금도 나아질 기미가 없다. 이는 연길의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으며, 조선족의 혼란상을 부추기고 있다. 그래도 외국에서 돈을 벌어온 노동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소득수준은 여전히 상위권이긴 하다. 빈부격차가 워낙에 심하다보니 문제긴 하지만.

중국에서 조선족은 한국어를 조선어문이라는 이름으로 교육과정에서 배우고, 대학입시인 가오카오한국어로 번역해서 보며,[48] 입시과정에 5점의 가산점도 있다. 연변대학은 중국의 유일한 소수민족 중 조선족을 대표하는 연길시종합대학교이다. 중국에서 조선족 소수민족 우대 정책에 따라 소수민족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자기 민족 언어로 대학 입시인 ‘가오카오(高考)’를 치르는데, 이에 따라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고등학생은 중국어를 제외한 수학, 역사 등 다른 과목을 한국어로 본다. 19세기 말부터 이주하여 살았기 때문에 중국인 배우자를 둔 사람들도 많으며, 친척에 중국인 한족들도 다수 존재한다.

중국조선족(재중동포) 중에서도 티베트위구르, 홍콩처럼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중국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닌데 워낙 소수인데다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재중동포)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바닥을 치다 보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화감독 장률이 대표적(6.4 항쟁 참여). #

6. 지역과 혈통

주로 조선족 자치 지역인 연변 조선족 자치주, 장백 조선족 자치현을 중심으로 그 외 지린성,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전역에 분포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의 산업화와 도시화의 영향으로 경제가 발달한 베이징, 상하이 및 중국 동해안 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대한민국에도 많이 유입되었다.

한국, 북한과 대체로 동일한 문화 뿌리와 혈통을 공유하지만 한국의 서구화와 북한의 쇄국화, 그리고 조선족의 중국화 이렇게 완전히 다른 발전분기 때문에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이 같은 차이점은 중국 중앙정부의 동북공정[49]과 남북한의 조선족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더욱 심화되어 가고 있다.

한편 같은 조선족이라도 중국 내 거주 지역에 따라 한국어(조선어)의 방언 차이가 있고, 자기들끼리 지역감정[50]도 존재한다. 연변 지역 출신자거나 북한 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북도치, 연변 외 지역 출신자들은 남한 지역 나아가 한국에서 온 사람들까지 싸잡아 남도치라고 부른다고.

7. 교육

7.1. 초중등 교육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족 학교들이 운영되고 있다. 1990년대까지는 1천여 개를 상회하는 수의 조선족 학교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300개가 채 안 되는 조선족 학교들만이 남아 있다. 중국의 표기에 따라, 초등학교는 소학교(小学), 중학교는 초급중학교(初中), 고등학교는 고급중학교(高中)라고 한다. 거의 모든 조선족 학교들은 동북 3성에 위치하고 있으나, 내몽골 자치구에도 조선족 학교가 존재한다. 그 외에 허베이성 친황다오시에 조선족 소학교가 한 곳 있고, 칭다오시에는 사립 조선족 학교가 있다.

랴오닝성을 중심으로 일관제 학교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그 범위도 다양하여, 소학교-초급중학교 9년제 일관제 학교도 있고, 초급중학교-고급중학교 과정이 합쳐진 학교[51]도 있으며 소학교부터 고급중학교까지의 과정이 모두 합쳐진 12년제 일관제 학교도 있다. 소학교 과정을 포함하는 일관제 학교 중에는 유치원부도 설치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그야말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한 학교를 다니는 것.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학교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교명에 숫자가 붙으며, 랴오닝성, 헤이룽장성, 연변을 제외한 지린성 등에 위치한 학교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교명에 '조선족'이 붙는다. 단, 한 시(市)에 조선족 학교가 여럿 있을 경우 숫자와 '조선족'이 모두 붙기도 한다. 예시는 다음과 같다:
연변 지역: 연변제1중학교(延边第一中学, 연변1중), 훈춘시제2고급중학교(珲春市第二高级中学, 훈춘2중)
다른 지역: 닝안시조선족중학교(宁安市朝鲜族中学), 상즈시조선족중학교(尚志市朝鲜族中学)
대도시: 선양시조선족제1중학교(沈阳市朝鲜族第一中学), 하얼빈시조선족제1중학교(哈尔滨市朝鲜族第一中学)

단, 예외도 있다:
연변 지역: 도문시조선족중학교
다른 지역: 판스시[52] 홍광중학교[53]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위치한 학교들은 대체로 한어를 제외한 교과목을 조선어로 가르친다. 그에 비해 헤이룽장성 등 연변 이외의 지역에 위치한 학교들은 일부 과목은 한어, 일부 과목은 조선어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으며 아예 조선 어문 과목을 제외한 모든 과목을 한어로 가르치기도 한다. 특히 입시 문제 때문에 중학교 이후 과정의 경우 한어로 가르치는 비중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54] 2010년대 이후의 논문이나 방송 등을 보면 창춘시조선족중학교, 다롄시조선족학교 등의 사례에서 학생들의 조선어 실력이 저하되거나 중국어만을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며, 조선어(한국어)를 구사할 수 없거나 구사하기 힘든 경우가 늘어나고 있는 점은 조선족 사회 내에서도 비판적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들은 가오카오를 응시할 때 중국어로 된 시험지와 함께 조선어(한국어)로 된 시험지를 배부받을 수 있으며, 어문(语文) 과목 대신 조선어문 및 한어 과목을 응시할 수 있다. 현재 지린성 기준 소수민족 가산점 5점이 인정된다.[55] 그러나 소수민족 가산점은 폐지 수순을 밟고 있으며, 조선족 학교 및 학생들이 주로 분포하는 곳 중 한 곳인 랴오닝성에서도 2026년부터 소수민족 가산점이 폐지된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동북 지방 일부 조선족 소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2020년 9월 신학기부터 조선어(한국어) 설명이 덧붙여진 연변교육출판사의 교과서 대신 중국어로만 기술되어 있는 인민교육출판사의 '어문(語文)' 교과서를 사용하도록 강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조선족은 중국 소수민족 중에서 교육과 문화 수준이 높은 편으로, 소수민족이라서 중국 대학 입시에 가산점이 있어왔기 때문에 대학 진학률이 비교적 높다...고 하지만 옛말이다. 이과의 경우 특히 조선족 학생들의 성취도가 한족 학생들에 비해 뒤처진다고 한다. 현대 조선족 교육에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점은 학생들의 결손가정 비율이 과도하게 높다는 점인데, 일반적으로 조선족학교의 결손가정 학생 비율은 50%를 넘으며 70~90%에 달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는 부모가 대한민국에 가 있다든가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서 일부 조선족학교의 경우 지속적인 조선족 학생 감소에 버틸 수가 없어 한족 학생들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중에는 그 도가 지나쳐 이름만 조선족학교인 곳들도 있다. 가장 심한 곳은 랴오닝성 모 학교로, 2022년 기준 학생의 80%가 한족이다.

7.2. 고등 교육

조선족의 민족 대학으로 연변대학이 있다. 선양에 있는 요녕발해학원(辽宁渤海学院)은 사립 전문대학으로 조선족 사회단체 등의 연합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과거 랴오닝성 조선족 사범학교와 하얼빈시 조선족 사범학교가 존재하였으나, 현재 랴오닝성 민족 사범 고등전과학교,[56] 헤이룽장 민족직업학원 등으로 통합되었다.

베이징에 위치한 중앙민족대학 등에도 조선어문 전공이 설치되어 있어, 조선족 학생들이 입학하여 공부하기도 한다.[57] 베이징시, 상하이시, 청두시 같은 대도시 지역의 경우 조선족 대학생 연합회가 결성되어 있다.

8. 문화

8.1. 생활상

조선족은 집성지구, 집성촌을 이루면서 조선족끼리 오랜 시간을 생활해 왔기 때문에 한민족의 전통과 민족성을 중요시해왔다. 타 민족과의 결혼, 특히 한족과의 통혼은 원래 기본적으로 금물이었다. 과학소년 1997년 3월호에 소개된 조선족에 대한 이야기 중에, 이와 관련된 이런 이야기가 있다. 툭하면 부부싸움을 밥 먹듯이 하는 조선족 부부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럴 거면 도대체 왜 결혼한 거냐"고 묻자 "100km 이내에 조선족 남녀가 우리 둘밖에 없어서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나마 조선족 남자가 한족 여자와 결혼하면 그나마 탐탁치는 않지만 그대로 봐주는 반면, 조선족 여자가 한족 남자와 결혼한다면 집안망신이라고 부모님이 속을 썩이고, 주변에서 비웃기도 했다. 이런 혈통의식은 고려인 사회도 마찬가지인 듯. 하지만 1990년대 말을 거쳐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이 취업 등 문제로 뿔뿔이 전국으로 흩어졌기에 마음에 맞는 동족과 결혼하는 건 하늘에 별따기. 그래서 이젠 쉬쉬하며 한족과의 결혼도 용인하는 분위기지만, 기성세대에서는 가급적이면 동족 결혼을 바라고 있다.

또한 조선족들은 조상의 출신지에 따라 나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지역감정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서로 크게 싸우는 일은 별로 없으며 서로 어디 출신이냐 물어보며 중국어를 쓰기도 하며 인사한다. 보통 출신지별로 어울리는 편이다.

사실 헤이룽장성의 조선족들은 학창 시절 한족 학생들과 많이 싸우면서 큰다고 한다. 아무래도 연변의 경우 조선족들이 수적(數的)으로 많고 조선족 자치주인 만큼 조선족들이 상대적으로 주도권을 어느 정도 갖기도 하지만, 헤이룽장성은 한족들이 훨씬 많고 그에 비해 조선족들은 훨씬 적기 때문에 그만큼 갈등이 많이 생기는 모양이다.

현재 연변의 조선족들이 그나마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헤이룽장성이나 중국 대도시에 사는 조선족들은 한족과 통혼하거나 다른 중국 대도시들이나 한국으로 떠나는 사람들[58]이 많아서 헤이룽장성 조선족들의 언어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중국어와 많이 섞였으나 연변 조선족들은 자기들의 말을 지키고 있는 편이다.

연변의 중심도시 연길은 조선족이 군집한 지역이기에, 중국의 타 지방과 문화가 완전히 다르다. 도시의 산업은 매우 기형적인데, 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 조선족의 적성에 맞춰서 음식점노래방, 사우나, 바 등이 주된 경제산업이다. 집집마다 위성방송[59]으로 한국방송을 시청하고, 한국에 드나드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국 문화에 친숙하다. 나이 많은 조선족 중엔 맨날 한국TV로 드라마와 뉴스만 보느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새로 당선된 건 알아도 중국 주석이 바뀐 줄은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옥수수, 등의 작물이 주를 이루는 만주지역에서 농사를 고집하고 있다. 만주지역의 도로에서 몇 시간 동안 옥수수밭만 보다가 이 나오면, 십중팔구는 조선족 농가가 그 주변에 있다.[60]

참고로 과거에 중국 내 조선족 이미지는 상당히 좋지 않았었다고 한다. 한중수교 이전 1989년 안재형국제결혼으로 화제가 되었던 자오즈민이 인터뷰에서 여러차례 언급한 것을 보면, 중국에선 조선족, 한국출신의 남성이라고 하면 '직업도 없고 집안일도 하지 않으며 아내를 구타하고 종처럼 부려먹는다'는 남존여비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자오즈민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 가부장적인 이미지는 조선족뿐만이 아니라 동북3성 지역의 북방계 중국 남성들의 전반적인 이미지가 그렇다. 결혼을 허락한 뒤에도 주변 사람들이 '그 남자 재혼 아니냐'며 '뒷조사를 해보라'고 물어봤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중수교 이후 한국과 중국간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한국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은 점차 사라졌고, 발전된 한국의 이미지가 널리 퍼지며 같은 한민족인 중국 내 조선족의 이미지도 덩달아 개선됐다. 이는 모국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중국이 아닌 다른 외국에 거주하는 재외동포들도 모국인 한국이 발전하고 이미지가 좋아질수록 그 나라에서 그들의 이미지와 위상 또한 자연스레 좋아지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조선족에 대한 가부장적인 그릇된 이미지는 여전히 견고해서, 중국 인터넷 같은 곳에서 한국을 비하하거나 조롱할때도 이를 소재로 잡는다. 다만, 중국 인터넷은 한국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 부정적이고 잘못된 정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국 남성에 대해 잘못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중국 남성들은 내로남불 격인 글을 적기도 한다. 가령,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기에 중국인 남성에게 시집 간 한국인 여성은 집안에서 잔치를 할 정도로 중국인 남성이 한국에서 인기가 많고, 중국인 남성이 한국인 여성을 공녀처럼 막 다뤄도 괜찮을 거라며 망상하며 여성혐오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뱉기도 한다.#

하지만 인터넷이 아닌 현실에선 특히 젊은 세대들의 경우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인 성향을 지닌 중국인들도 꽤 많다.[61] 또한 인터넷이나 방송매체에서 한국을 욕하는 사람들 즉, 소분홍들도 사실 자신들이 여전히 한류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62]
다만, 한국인들에겐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중국 동북3성에 사는 조선족들에겐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8.2. 언어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중국 조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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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들은 지명 및 인명을 중국어 발음이 아닌 한국어의 한자 독음으로 읽는다. 이 때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원래 발음을 고수하므로 얼핏 보면 북한말처럼 보인다. 단, 소수민족 언어를 한자로 음차한 지명은 한자 독음보다는 해당 민족 언어 발음에 가까운 표기를 한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중국어 옌볜 옌지 랴오닝 하얼빈
조선족 연변 연길 료녕 할빈
한국어의 한자 발음 연변 연길 요녕 합이빈[63]

이외에도 평소 쓰는 어휘도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예를 들면 조선족들은 전화를 건다는 표현을 전화를 친다고 하는데, 이는 중국어의 打电话에서 나온 표현. 打는 때리다=치다. 그리고 외래어는 편의상 중국어의 음차를 차용한 것이 많다. 예를 들면 TV는 뎬스(电视), 이런 식으로. 다만 이런 호칭은 정식용어가 아니며, TV는 텔레비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당황해하는 것 중 하나가 자신들이 조선말로 부르는 지명을 한국에서 보통화 표기를 한다는 것. 자신들은 북경이라고 하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표준중국어 발음인 베이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예들은 평소에 쓰는 표현일 뿐 학교에서는 이런 표현을 가르치지 않으며, 서적에서도 이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조선족의 한국어 방언은 지역마다 하술한 방언에 기반한다.

조선족들은 대개 함경도, 평안도, 경상도 출신들이 많다. 지리적으로 중국과 가까운 평안도, 함경도 출신들은 구한말 때부터 간도로 많이 이주했다.[64] 상술했던 것처럼 동남 방언을 쓰는 조선족들도 꽤 분포되어 있기도 하고. 물론 호남, 중부 지방 출신 조선족들도 있다. 영화 등지에서 가장 많이 묘사되는 사투리는 함경도 사투리다. 경상도 사람도 이주해서 조선족의 말투는 경상도 사투리와 비슷한게 아닌가 하는 인식이 있는데,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은 말투가 경상도와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 함경도 말투도 성조가 있어 경상도 말투와 비슷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65]

대체적으로 함경도 사투리(육진 방언 포함)는 연길이 있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지린성헤이룽장성 동부에서 많이 쓰이고, 평안도 사투리랴오닝성이나 지린성 서남부에서 쓰이고, 경상도 사투리는 랴오닝성 일부[66]와 지린성 서북부, 헤이룽장성 서부에서 쓰인다. 그 외의 사투리들은 마을 단위로 쓰인다.

연변 조선족의 조선말이 중국어와 섞일 경우는 대부분 명사만 악센트를 순화하여 사용하기에 기본적인 조선말과 중국어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지만,[67] 헤이룽장성이나 랴오닝성의 조선족은 한족과 접촉이 잦아서 중국어가 섞이는 빈도가 상당히 높다. 특히 헤이룽장성은 위치상 러시아어나 몽골어 어휘가 사용되는 일도 많아서 일반적인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물론 한국어와 중국어 양쪽에 능한 사람도 이 동네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 쉽지 않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조선말은 우리가 아는 한국어 문법과는 뭔가 많이 달라서, 분명 같은 언어인데 토종 한국인은 잘 알아들을 수 없다. 문어는 교육받은 사람일수록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쓰고, 구어로 갈수록 중국어와 생소한 방언이 섞여 알아듣기 어렵다. 한국어보다 중국어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이 나온다고 보면 된다.

한국에서는 연변 말투를 듣기가 힘든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개그 콘서트댄서의 순정을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조선족들을 흉내낸답시고 이상한 말투를 사용하는데, 이게 진짜 조선말인줄 알고 조선족과 대화할 때 썼다가 상대방이 당황하곤 한다. 외국인이 미국 드라마 같은 데서 나오는 어설픈 한국어를 보고 우리한테 진짜 한국어인 것처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

연변 조선족 자치주함경북도와 인접해서 대체적으로 동북 방언, 육진 방언의 영향을 제일 많이 받았다. "~ㅂ니다"를 "~ㅂ꾸마"[68]라고 말하고 "~ㅂ니까"를 "~ㅁ둥"[69]이라고 말한다. "~ㅂ시다"를 "~깁:소", "~겝소"[70]라고 말한다.

그런데 젊은 세대 이하에서는 ~슴다체를 많이 사용한다. "~ㅂ니까"를 "~ㅁ까"라고 말하며 "~시오"를 "~쇼", "ㅂ시다"를 "~기쇼"라고 말한다.

젊은 세대, 특히 대학을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타지에 나와 있거나 하여 한국인(과 한국 문화, 미디어 매체)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경우에는 서울말을 따로 할 줄 안다. 자신들도 사용하는 말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연습하기도 한다고. 또한 한국어의 영향으로 연변지역 TV나 라디오 방송의 아나운서들이 상당히 '서울말화'된 한국어를 쓰며, 연변TV에서 방영하는 오락 프로그램들을 보면 아예 한국 인터넷 상에서 사용하는 유행어 등이 나오기도 한다.

화자 수도 250만여 명으로 적지 않지만 조선어를 꾸준히 써온 배경에는, 중국 조선족 사회가 농촌 공동체를 위주로 지속되어 온 이유도 있다. 물론 연길 등 도시에서도 거주해 왔지만 기본적으로 식민지 시대의 조선사람들은 농업이 기본이었고, 조선 땅에서 하던 벼농사를 마을/친족 단위 그대로 만주 땅에 옮겨 가는 식이었다. 즉, 국가는 이국 중국이되 지역은 여전히 조선사람 마을인 이중적인 형태가 수십년간 지속되어 왔다. 전통적인 중국 조선족 사회를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농사를 짓는 수많은 조선족 마을의 연합이라고 봐도 될 정도. 그런데 9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젊은이들이 몽골인한족이 많은 만주 쪽 대도시나 중국 내륙도시로 혹은 싱가포르호주 등 외국으로 진출하게 되면서 농촌의 조선족 공동체가 조금씩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그 빈자리를 압도적 다수인 한족 혹은 다른 민족으로 채우는 경우도 흔하게 되었다.

(2002년 동아일보 기사. 중국 조선족의 이촌향도를 잘 보여준다.)

조선족 사회 붕괴나 조선족 화자가 줄어드는 것은 중국 정부의 한족 위주 정책의 영향이기도 하다. 상술하듯 개혁개방 이후 조선족 사회의 기반인 조선족 마을 공동체는 한족 사회로의 이촌향도와 외부 한족의 유입으로 인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2020년 9월의 일부 한글 교과서 퇴출과 가오카오 소수민족 가산점 폐지 수순 등 한족화 정책을 펼치는 바, 앞으로 조선어 화자가 지속적으로 줄어들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과거 농촌 공동체 위주의 생활을 할 때는 화자 간 중국어와 중국조선어 구사 수준이 크게 차이가 없었으나, 90년대 이후 조선족 개개인의 중국조선어 및 한국어 구사 능력 편차가 심해졌다. 젊은 층의 경우 대도시에서 사는 부모는 중국조선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나 본인은 조선족 정체성만 갖고 중국어만 할 줄 아는 경우부터, 중국에서 쭉 성장했으나 가정의 관심과 본인의 노력에 의해 중국조선어 뿐만 아니라 서울말까지 완벽하게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경우 성장하여 한국으로 유학 와서 공부해 중국조선어보다 서울말이 더 편한 사람도 있는 등 중국조선어 화자들의 언어 구사능력은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중국조선어를 제1언어로 쓰더라도, 경제적으로는 서울말 구사자가 좀 더 우대받는 현실 때문에 서울말을 따로 공부하는 경우도 있다.

조선족들이 쓰는 한국어는 엄연한 피진 겸 한국어의 한 거대한 방언군이다. 미국식 영어, 영국식 영어의 차이, 브라질포르투갈어포르투갈식 포르투갈어의 차이처럼 한 개의 상이한 방언군을 형성하는 것. 차이가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 브라질 포어와 유럽 포어 혹은 스페인 스페인어중남미 스페인어의 차이보단 좀 적은 정도다. 조선족들이 쓰는 연변식 한국어도 한국식 한국어와 어느 정도 상이한 게 사실이다.

조선족이 쓰는 중국어는 동북 지방의 사투리인 경우가 많은데, 보통화 화자가 보거나 듣기에는 시골 사투리로 인식된다.[71] 드라마나 웹툰 등 한국 매체가 중국어로 번역될 경우 가끔씩 조선족이 번역을 수주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중국 시청자나 독자들에게 어색함을 주거나 놀림거리가 되기도 한다. 조선족들은 다른 지방 사투리(광동화, 상해어, 민남어, 객가어 등)에 비하면 자신이 하는 말이 보통화에 가깝다고 느끼고 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지만, 보통화와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9. 정체성

9.1. 귀속

조선족은 스스로도 '중국인'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이들은 한국인과 국적 의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들은 전체주의적인 중국의 교육하에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교육받으며 자란다. 한국어를 한다고 해서 이들에게 한국과 똑같은 국적 의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게다가 중국은 다민족국가이지만 미국처럼 소수민족이 스스로 동화되기를 바라는 것[72]이 아니고, 소수민족의 독립을 허용하는 순간 국가가 분열되는 전체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자신의 민족을 당당히 말하는 게 자유롭지 않다. 중국에서는 미국에서 하듯이 "나는 모국 한국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면 당장 정부기관의 요주의 인물이 되는 것이 현실이며, 공무원이나 국영기업에 근무하고 있다면 당장 실업자가 될 것이다.신비로워질 수도 있다[73] 게다가 현재 독립의식이 강해 강도 높은 탄압을 받고 있는 티베트족이나 위구르족이 뻔히 존재하기도 하고. 이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의 오해는 대부분 풀린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민족의식국적의식을 동일시하는데,[74]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 사람과 남한 사람이 공유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민족(ethnicity) 의식이지 국적(nationality) 의식이 아니다. 한국계 미국인 2, 3세들이 스스로를 미국인이라고 말하며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떠올려 보면,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말하는 조선족의 사고방식이 자연스레 이해가 될 것이다. 물론 한국인 앞에서 조선족이 중국인임을 강조하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매우 부자연스럽고 한심하게 보이기 마련이지만,[75] 대부분의 재미동포들 2, 3세도 마찬가지 행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대부분의 다민족국가의 소수민족들의 행태도 비슷하다. 예를 들어, 메수트 외질 같은 터키계 독일인 축구선수들이 이중국적을 허용함에도 대부분 독일 국가대표를 택하고 있다.[76][77] 즉, 조선족이 특별히 줏대없고 민족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국가귀속의식과 민족귀속의식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도 한국인들은 민족과 국가가 하나인 '본토에 사는 사람들'이라 그런 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보니 두 개념을 혼동하는 것이다. 반면 해외동포들은 자신이 속한 민족과 국가가 당연히 다르며 거기서 몇 대를 살면 그 국가가 자신의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해외동포들은 이러한 존재의 이중성을 갖고 태어나 자란다. 다만 한국 여권을 갖고 외국에 잠시 머무는 한국국적자는 물론 다르다.

파일:서울 금천구 현대시장 팻말.jpg
[78]

소수지만 한국인 못지않은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조선족들도 있으며, 스스로 중국인을 자처하는 조선족이라도 한국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다. 중국 한족들은 "조선족은 한류나 한국을 자랑하니 아니꼽다"고 불평하기도 하니, 모든 조선족이 민족의식이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성급한 일반화다. 지명광 씨처럼 아예 중공에 대항하다가 입국금지를 당한 사례가 그나마 한국에 알려져 있는데, 이런 사람은 조선족을 싫어하던 한국인도 호의적으로 대하기도 한다. # 그 외에 일부 조선족들은 스스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자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는 한국인보다 더 강한 순혈 의식을 보여주기도 하며, 노총각/노처녀로 남는 한이 있어도 한족과는 결혼도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 1970년대까지 조선족 내에서도 남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천시를 받는 분위기였고, 대체로 북부 지역 출신들이 더 우대받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뭐, 중국에서 정책적으로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을 갈라놓았다니 지역감정을 조장한 정책을 편 건 아니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남한은 중국의 적대국이었던 데 반해 북한은 중국의 우방국이면서도 가까웠기도 했고, 교류도 상당히 활발히 이루어졌으니까.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북한이 급속히 빈곤해지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남부 지역 출신자들은 남한에 친척이 있는 경우가 많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자리를 상당히 수월하게 구해서 기회를 잡을 수 있던 데 반해, 북부 지역 출신자들은 상대적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쉽지 않았고, 오히려 북한에 있는 친척들에게 먹을 걸 부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불리했다고. 그래서 당시에[79] "남조선에 친척이 있으면 부자가 되고, 북조선에 친척이 있으면 거지가 된다"는 말이 나왔다나.

9.2. 정체성의 혼란

많은 조선족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낀다. 이러한 혼란은 사실 재미동포든, 재일동포든 동일하게 느끼는 것이고, 타국에서 사는 이민자 2세대~3세대에게는 공통적인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국계라고 다른 사람과 같게 보지 않고, 한국에서는 중국에서 왔다고 다르게 보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 있을 때는 친한적으로 보이고, 한국에서는 친중적으로 보인다. 하여 많은 한국인들은 조선족이 필요에 따라 한국인과 중국인의 정체성을 오가는 기회주의자로 오해하기도 한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연변, 만주 등에 살고 있는 조선인의 조국관은 여전히 한반도에 있었다. 이는 자기가 태어났거나 혹은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한반도라는 지역에 대한 자연적인 감정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태어난 이후 연변, 만주로 이주해 정착하게 된 조선인의 경우 자연스레 조국을 한반도라고 생각하기 마련일 것이다. 19세기 중반 한반도, 특히 북부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해 굶주림을 피하고자 간도로 이주했던 조선인, 1910년 일본제국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 위안부, 강제징용 등을 이유로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그리고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만주개척운동'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 등은 태어난 곳이 본래 한반도였지만 타의로 강제이주가 이루어져 정착한 분들이기에 한민족이라는 조국관이 강하게 남을 수 있었다. 물론 17세기 명, 청 전쟁 당시 강홍립의 투항으로 인해 만주에 남게 된 조선인 군대와 1627년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때 볼모로 끌려간 백성의 경우 정착 이후 여러 세대가 거쳐졌기 때문에 해방 시점 당시 태어난 곳이 한반도는 아니었지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언어, 문화적인 환경을 구축하며 살아왔기에 그들 또한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연변 조선인이 조국을 한반도라고 생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당시 연변에서 발행되었던 <연변신문>(延邊民報)과 북한과의 교류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신탁통치가 실시된다는 소식이 퍼진 이후 1946년 1월 8일 <연변신문>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연변 조선인의 생각을 옅볼 수 있다. 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외에 있는 우리들인들 어찌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만히 있으며 또 어찌 가만히 있게 되랴".[80] 또한 1948년 3.1절 기념행사가 연길시 2중에서 개최된 당시 그때 기록된 <북조선 인민위원회와 인민군에 보내는 멧시지>에서 다음의 문구를 살펴볼 수 있다. "연변에 사는 백만 조선 동포는 평화롭고 자유롭게 조선민족의 명절! 3.1운동 29주년을 기념한다."고 하였다.[81] <연변신문>, 연변에서 진행된 3.1절 기념행사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연변 조선인은 한반도를 조국으로서 생각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변 조선인의 한반도 조국관은 김일성 등 북한에 의해 강화되기도 하였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정부가 수립된 이후, 북한은 연변에 있던 대리인들에게 만주 각지에서 북한 수립 기념 행사를 추진하도록 지시함으로써 동북 지역의 경축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했고, 또한 조국정부 수립 경축단을 결성해서 북한에 방문하게끔 하였다.

만주 내에서 펼쳐진 북한 정부 수립 경축행사는 다음과 같다.
1948년 9월 19일 연길시, "연변문화잡지사의 주최로 시내 2중 강당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중앙정부 수립 경축좌담회를 개최하였는데, 참석한 각 정부 기관 군중단체 학교대포와 각 계층의 인사 1백 50여 명은 조선 민족으로서 천추의 열망이던 조국의 건국을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경축"하였다고 전해진다.[82] 이뿐만 아니라 1948년 9월 25일 길림시에 사는 조선인 300여 명은 "조선인민 민주공화국 정부 설립경축대회"를 거행하였고, 하얼빈의 조선인들 역시 조린극장에서 모여 경축 대회를 개최하였다.[83]

또한 북한 정부수립을 축하하는 조선인 대표단이 경축단을 결성해서 북한에 방문하였다. 1948년 11월 10일 경축단은 평양에 도착한 후 15일에 김일성과 만나며 다음과 같은 말로서 북한 정부수립을 지지하였다. "조국 강토를 멀리 떠나 중국 동북에서 조국의 통일 독립을 갊아하는 중국 동북 조선동포 150만을 대표"하여 주덕해는 "독립적 민족으로서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게 된 광영을 깊이 감사하는 동시에 국장과 국기를 우리 해외 동포들도 함께 지지 옹호"할 것을 맹세하였다. 이와 같이 만주 내에서 펼쳐진 기념행사와 북한 정부수립 경축단의 북한 방문은 연변, 만주에 사는 조선인들의 한반도 조국관을 강화시켰다.

한편 연변 조선인들의 조국과과 더불어 연변 영토 귀속 문제 또한 조선족의 정체성 혼란과 결부될 수 있는 사안이다. 연변의 영토 귀속은 언뜻보면 민족정체성과는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연변 영토가 중국에 완전히 귀속됨으로써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은 점차 변화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연변이 북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면 연변 조선족의 민족 정체성 문제는 제기될 필요조차 없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연변, 그리고 현재의 연변 지역 일부를 가리키는 간도의 영토귀속 문제에 얽힌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1882년 청나라가 간도를 개간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정부에 조선인들의 철수를 요청하였지만, 조선 정부는 이중하를 보내어 백두산정계비의 비문에 경계로 되어 있는 토문강이 송화강의 상류이므로 간도는 조선의 영토임을 주장하며 간도를 지켜내었다. 이후 1900년에는 러시아가 간도를 강제 점령하자 조선 정부는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해 주민들을 안정시켰고, 이듬해에 그를 다시 간도관리사로 보내어서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구역에 포함시킬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간도 영토 문제는 일제강점기로 넘어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이 통감부에 간도 파출소를 설치함으로써 간도를 본인들이 관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1909년 청과의 간도 협약을 체결하으로써 철두 부설과 탄광 개발을 목적으로 조선인들의 의사를 무시한 채 간도를 청의 영토로 선언하였다. 이렇듯 결과적으로 1909년 이후 간도는 청의 영토로 인정된 채 이어졌지만, 해방 이후 국공내전 기간에 연변 귀속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이때 연변의 조선인 지도자들과 북한이 연변을 자신들의 영토에 편이시키고자하는 시도가 있었다.

1947년 4월 길림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었던 김광형은 "김일성의 지시를 몰래 받고 공개적으로 연변을 조선에 획분하여 달라는 황당한 착론을 제출"했다고 알려졌다. 이때 김광협은 다음의 말을 내뱉으며 연변의 한반도 편입을 주장하였다. "연변을 일본제국주의 침략 중에서 해방시키고, 많은 동지들이 자기 생명을 희생하였고, 이들 동지들의 선혈의 대가로 연변은 응당 민족자결을 실행해야 하고, 아울러 조선족의 사회주의 국가인 조선에 합병시키야 한다."[84] 또한 1948년 11월 북한 정부수립 경축 동북조선인대표단이 북한에 입북할 때,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임민호는 "앞으로 민족자결을 쟁취하고, 가맹공화국을 건립해 연변을 조선에 떼어 넣음으로써 두만강 압록강의 경계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였다.[85] 그리고 1948년 2월경 목단강시에서 유엔 조선위원단의 활동을 반대하는 군중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북한에서 온 인사인 북조선 노동당 중앙총무부장 장도지로부터의 보고에서 북한이 연변을 한반도에 편입시켜야한다는 주장을 살펴볼 수 있다. "이역에서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위해 분투하는 해외동포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며 만주와 조선이 역사적으로나 또는 지리적으로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으며 동북은 조선 혁명의 근거지이며 또는 우리 조선의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숨낳은 조선의 애국지사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리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와 같인 연변의 북한 귀속을 주장했던 북한이나 만주 조선인 최고 간부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연변을 한반도의 한 연장으로서 생각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이 국경을 분명히 하고, 소수민족에 대한 통제를 가함으로써 연변은 완전히 중국의 영토로서,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조선족은 6.25 전쟁과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 북한과의 대립을 이유로 점점 민족정체성이 흐려지지게 되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게 된다.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86]이나 중공군 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현대의 조선족들 중 6.25 전쟁 참전자는 고령층의 소수에 불과하므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던 뒷 세대의 조선족들에게까지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다.[87] 다만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아무리 당대 조선족의 정체성이 모호했다 해도 6.25 전쟁 자체는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독일 국방군 참전자들이 나치에 복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진 않지만 과거를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과오로써 반성하며 살아가듯, 국가의 잘못된 명령을 당시엔 어쩔 수 없이 따랐다 치더라도 침략전쟁에 동조한 과오를 과오로 여기지 않는 조선족 참전자들 다수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88] 심지어 사회주의 국가 중국·북한을 아무리 옹호하려고 해도, 군공을 더 많이 세우고 중국에 친밀한 연안파 같은 세력을 숙청시키고 자신과 같은 조선족이 된 독립운동가의 공적마저 도둑질한 김일성의 북한 정권을 옹호하거나, 극도의 경제 교류 기피로 동북3성을 가난하게 만든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자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들이 현재 중국에 소속되어 있는 관계로, 조선족들의 6.25 전쟁 회고담은 상당히 편향된 점이 많다. 세균전 증언이나 남한의 북침 같은 것은 물론이고, 독립운동가 출신 포함 남한의 고위 인사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같은 건 걸러 들어야 한다는 이야기. 한때 이들의 증언들이 사실처럼 기술되는 바람에, 조선족들을 도매금으로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자식을 한족 학교에 보내는 일이 많아져서, 젊은 세대의 조선족 중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한족 학교에서도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사실상 기초적 단계에서 멈춘다. 한족 학교에서 교육시키는 이유는 부분적으론 기성세대가 중국어를 잘 할 줄 몰라서 다른 중국인들과 교류할 때 많은 애로사항을 겪은 트라우마에서부터 출발, 한족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음으로써 중국 사회에 더 잘 융화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신분증상으로만 조선족일 뿐 사고방식이나 생활습관과 언어 등이 완전하게 한족이 되어버린 자식을 보며 후회하기도 한다.

또한 조선족은 1870년대부터 중국에 살면서 한족 친척이 있는 경우도 많으며, 모계가 한족 혼혈인 경우도 매우 많다. 중국은 신분증에 민족명을 기재하고 있어서 신분증에는 한족, 조선족, 만주족 등이 쓰여져 있다. 조선족 여자가 한족과 결혼하는 경우는 한족으로 변경할 수 있지만 조선족 남자가 한족 여자랑 결혼하는 경우에는 신분증상으로 조선족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다수여서, 일부 조선족은 신분증상으로 조선족이지만 한족의 혼혈일 수도 있다. 부모의 민족이 다른 경우에는 하나의 민족을 선택하여 등록한다. 조선족은 대학을 갈 때 특별전형으로 유리한 점이 있고 한족과 달리 자식을 여러명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일부러 조선족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중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이 중국에서 태어나고 중국 국적을 가지고 초, 중, 고등학교를 중국 학교에서 한족들과 공부하였으며 이 중국의 교육 과정으로 인해 한국인과 매우 다른 사고방식과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조선족의 경우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반중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들어서 아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 재외동포 비자를 받고 대한민국에서 거주하는 조선족들은 대한민국의 의외로 매우 심한 반중 성향을 체감하면서 불안과 분노를 느끼게 되고 이것은 조선족들이 대한민국에서 중국인의 정체성을 더욱 강조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이러한 악순환 사이클이 반복되며 꽤 큰 사회 문제가 되었고, 조선족 사회에서도 우려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다.

다만 국적으로 중국인 정체성이 매우 강한 경우에도 조선족과 한족을 굳이 구별하고 민족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평소에는 이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어느 정도 친해지면 서슴없이 한족을 까는 얘기를 하기도 한다. 중장년층의 경우 조선족은 중국 정부나 지도자가 인정하는 민족이었다는 말을 하고, 청년층은 다른 중국 내 민족들의 문화나 생활 습관이 미개하다며 민족적 자부심을 표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또한, 어릴 적 조선족 마을에서 자라 옆 마을 한족 애들과 싸웠던 무용담을 펼치는 조선족도 있는데, 이럴 때 '중국 애들과 싸웠다'고도 표현한다. 자신들도 중국 공민에 속하지만 사회의 주류인 한족과 구분할 때는 한족 중국인 vs 우리 조선족이란 구분 의식이 있는 것. 한족을 비롯한 타 민족과 비교해서 조선족의 우월감을 표현할 때 '중국인들은 조선족보다 문명하지 못해 ㅉㅉㅉ'[89]라고 말할 때도 있다. 중국인이면서 한민족인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백청강이 한국에서 출세하자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것처럼 조선족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왜 자신들이 소속된 국가인 중국의 주석이 아니고 한국 대통령일까? 그건 바로 아프리카 케냐 이민자 출신인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되듯이 한국으로 이민한 중국인인 조선족이 한국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이는 중국 조선족의 의식 속에 역사, 민족, 국가가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족에서 한국 대통령이 나오는 것에 맞는 비유는, 버락 오바마케냐 대통령이 되는 것. 아니면 리셴룽이 중국 주석이 되는 것. 이는 조선족들 또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연평도 포격전 직후 한국을 무시하는 조선족이 발견되는 반면에, 한국식 민족주의로 무장하여 고구려의 기상을 외치는 젊은 조선족도 발견할 수 있다. 서버가 중국밖에 없는 듯한 어느 조선족 커뮤니티에서는 이들끼리 역사, 민족, 국가 논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중국 한족 애들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 있냐', '아니 그럼 한국인들은 우리한테 잘해주냐?' 등. 특히 거주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한국 어디선가 퍼온 듯한 고구려발해에 관한 게시물이 종종 올라오는데, 한국의 환빠의 영향을 받은 주장을 올리기도 한다.

즉, 태어날 때부터 민족과 국가가 같아서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는 한국인과, 태어날 때부터 민족과 국가가 다른 채로[90] 중국의 조선족으로 자라다가 이후 고국의 존재를 체감하게 되는 조선족의 민족의식 및 국가의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위협적인 이민족이 없는 한국에서는 국내에서 타민족으로부터 차별당하거나 구분될 수가 없다. 하지만 조선족은 자신들과 엮인 국가가 중국이며 변경의 소수민족이라, 그 정체성에서 당연히 한국인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의 '민족의식'이란 한국이라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주변 '국가'에 비교하고 대항하는 사실상의 국민의식이다. 그러나 조선족에게 민족의식이란, 절대다수의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경계하는 소수민족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이다. 애초에 '민족의식'이란 단어조차 한국인, 조선족에겐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다른 국가 교민들은 그 국가가 정체성을 강요하는 일이 거의 없지만 중국은 국가가 정체성을 강요하는 상황이라 조선족이 특히나 이런 혼란이 심해질 수 밖에 없다. 미국이 자국 국민들에게 정체성을 강요했다면 재미교포도 한국인의 미국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조선족이 중국 땅에서 살면서 굳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스스로 완전 중국인이라 자칭한다면 중국어만 배우면 될 걸 왜 어렵게 하나의 언어를 더 배워 머리를 싸쥐겠는가? 자신들은 조선 민족이고 그 아이덴티티를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소위 한국인이 조선족을 같은 한민족으로 승인하든 부인하든 조선족은 그동안 조선민족으로 살아 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이른바 친한/친중이라는 것도 사실은 한국을 싫어하는 중국인/중국을 싫어하는 한국인만큼 반한/반중 정서를 보이지 않는 상대적인 것에 가깝다. 한국인들이나 중국인들이나, 다른 나라 국민들을 알아갈 때 실제 접촉보다 인터넷을 통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인데, 인터넷 정보는 언론사 뉴스를 포함해서 왜곡되었거나 편향적인 시각이 많고, 팩트체크도 자신의 확증편향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하는 경우가 많으며, 여기에 한중 양국의 이런저런 갈등으로 진영논리까지 개입되기 때문에 객관성이 결여되기가 십상이다. 가령 중국에서 무슨 흉악범죄가 벌어졌다고 하면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이 무슨 사람이 살지 못할 인외마경이고 중국인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인 것처럼 반응하지만, 한국에서 같은 타입의 범죄가 일어나면 그러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한국이란 땅에서 살아가며 그러한 모습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며, 한국의 멀쩡한 모습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들 역시 중국에서 살아가며 실제로 겪어보았기 때문에 흉악범죄 뉴스가 떴다고 해서 중국과 중국인을 무작정 악마화하지는 않는 것이다.

반대로 많은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이 자국의 위인들과 문화를 도둑질하려는 줄 알지만, 조선족들은 자신이 직접적으로 교제한 한국인이나 TV 등에서 보이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모든 한국인들이 환빠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많진 않으나 조선족들 중에서도 역시 현재 중국의 정치적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다고 눈치를 챈 사람들은 중국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며, 심지어 이규호,[91] 지명광, 권평[92] 등 드물게 한국으로 망명하는 조선족들도 있다.

사실 중국이라는 정치 통제가 강한 독재 국가에서 외국 국적으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대혁명과 같은 험란한 시기에는 외국에 연고가 있다고 간첩으로나 반역자로 몰리는 사건이 부지기수였고,[93] 중국 국적을 가져야만 한족과 똑같이 땅을 분배받고 농사를 할 자격이 주어졌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현지 국적을 택하는 것처럼, 중국에 생활기반을 둔 사람이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중국 국적을 선택했다고 '고국을 배반했다'라는 식으로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94] 또한 중국 국적을 택했다면 당연히 자신이 속한 국가인 중국에 애국심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자국민을 외국인보다 먼저 챙길 수밖에 없는 것이고,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현지 국가의 정책에 맞춰 살아남는 방안을 찾았을 뿐이다. 본질적으로 따지자면 한국과 중국 간의 정치적 긴장이나 자국민들의 건전한 애국심을 침략전쟁이나 각종 범죄, 패권주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왜곡한 중국 지도부에 그 책임을 물어야지, 조선족 개개인을 비난해서 될 일은 아닌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처럼 2개 이상의 언어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영어권에서는 TCK(제3문화 아이)로 분류한다.

9.3. 동화

예전 조선족은 한반도에서 이주해갈 때 가족이나 마을 사람들끼리 집단으로 이주해 마을을 이루고 살아와서 언어, 풍습에서 민족성을 보호하기 쉬웠다. 마을을 벗어날 일이 별로 없는 노인들은, 미국 LA 코리아타운에서만 사는 한인 노인들처럼 평생 중국 땅에 살면서도 중국어는 잘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국의 적극적인 개혁개방 이후로, 조선족은 조선족 자치주와 동북3성을 벗어나 중국 내륙지역과 해안지역으로 이주해가면서 조선족 자체의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한족에 동화되는 현상이 두드러진다.[95] 특히 자치주가 아닌 중국 내지의 도시지역에 사는 조선족 청소년은 조선어(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족 부모들은 중국어를 못해서 자기들이 주류사회에 편입 못하고 한국 회사나 다닌다고 생각하여 아이들에게 조선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96]

앞으로도 이런 경향은 크게 변할 가능성이 없으며, 더욱 많은 조선족들이 중국 내륙지역으로 이주해가고 있는 상황이기에, 조선족은 일부 한국과의 관계가 극히 긴밀한 개인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중국사회에 동화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국 정부 역시 조선족을 비롯한 중국 내 여러 소수민족중화민족이라는 미명 하에 한족에 강제로 동화시키려 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재미교포의 예를 들어봐도 그렇지만, 이민자들은 세대를 거치면서 해당 사회에 동화되는 것이 보통이다. 인구학적으로도 좋은 상황은 아니다. 절대적인 인구가 줄고 있는 것은 물론, 조선족 여성의 1인당 합계출산율은 0.98명(2010)에 불과하다는 통계가 있다. 중국 정부의 2010년 인구 센서스는 0.622명을 합계 출산율로, 2000년 센서스에서도 0.699로 합계출산율을 계산하고 있다. 중국어 자료 그래서 그런지 자치주도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있다. 중국에서 자치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법률상 인구 기준이 있는데 조선족 같은 경우는 동화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을 조선족이라 생각하지 않는 조선족들이 증가하여 현재 35% 정도인 인구 비율이 30% 이하로 떨어질 확률이 꽤 높다.

중국 내 조선족 인구가 20년간 22만여 명 감소해 170만 명대로 떨어졌다.#

중국 정부가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을 축소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조선족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1#2

10. 중국 내 조선족 현황

한중수교 초기, 한국인들의 중국인에 대한 사기가 아직도 연변 사회에 영향을 미칠 정도라고 한다. 도문시의 도시 재개발 사기 사건에 시민의 반 가량이 연루되었다.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해서 상당히 익숙한 지명인 산둥성 칭다오시의 경우 한국인의 상습적인 임금 체납, 사업장 부도와 그에 따른 경영진의 잠적 때문에 한족이 조선족에게 한국인 조심하라고 일러줄 정도로 분위기가 나쁘다.

조선족들 사이에서는 한국인을 '동족을 대우할 줄 모르는 야박한 사람'이라고 인식한다는 말이 있다. 캐나다, 미국, 독일 출신 한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이라서 받는 특혜와 재외동포라는 보호를 동시에 누리지만[97] 자신들은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에 의해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 대한민국에서 재외동포들의 법적인 지위에는 국적에 따른 어떠한 차별도 없으며[98], 오히려 방문취업 비자[99] 등에서 특혜를 받는 면도 있다. 단지 대한민국 입장에서 조선족의 모국인 중국은 잠재적 적성국인데다 그 흔한 무비자 협정조차 없는 개발도상국이지만, 미국 및 기타 서방국가들은 동맹국 내지는 우호국인데다 선진국의 일원으로써 민간 교류를 위한 각종 협약들이 체결되어 있다는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100] 뿐만 아니라 미국, 캐나다, 호주, 독일 등으로 이민간 한인들은 대부분 60년대 이후 건너간 대한민국 국적자들과 그들의 후손이며, 스스로도 단순히 혈통적 한민족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최소 어느 정도라도 귀속의식을 가지는 경우가 다수이기 때문에, 애초에 구한말-일제시대에 중국으로 건너간 경우가 대다수이고 한국으로 이민오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귀속되어본 적 자체가 없는 조선족들과는 세대적, 문화적, 정체성 차원에서 더 가까울 수 밖에 없다.

11. 한국 내 조선족 현황


한국 내의 조선족 인구는 2022년 6월 기준 약 70만 명 정도로 집계된다.[101] 중국(조선족 포함) 귀화자는 2013년 5,380명, 2014년 6,650명, 2015년 6,477명, 2016년 5,126명, 2017년 4,781명, 2018년 4,838명이다.

11.1. 법적 지위

재외동포법에 의해 특정 조건을 만족한 한국 조선족에게는 재외동포 자격이 부여된다. "재외동포"의 법적 지위는 대한민국 국민에 준하는 것으로, 선거권·피선거권 및 일부업종 취업제한을 제외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누리며, 무제한 체류가 가능하고,[102] "외국인 등록증"이 아닌 "외국국적동포 국내거소증"을 부여받는다.

원래 재외동포(F-4) 비자는 재미동포에 한정되었었으나,[103] 2004년 헌법재판소에서 평등권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고 재일동포, 재중동포 등, 부모나 (외)조부모가 한국국적자 혹은 한국국적을 소지한 적이 있었다면 신청이 가능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고려인에게까지 범위를 넓혀 적용하고 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본인이 한국 국적자였어도 조건에 해당된다.

방문취업(H-2)비자는 사실상 조선족을 위해 만들어진 비자체제다. 방문취업 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인 2007년 비자 문제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해 가족 해체 등 고통을 겪는 조선족들을 구제하는 차원에서 5년 기한으로 언제나 왕래할 수 있게했다. 조선족을 다른 외국인 노동자와 달리 동포로서 포용한 정책이었다.# "방문취업제도"란 중국 및 CIS 지역(독립국가연합: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등에 거주하는 일정한 요건을 갖춘 만 18세 이상의 외국국적동포들에 대해 자유로운 출입국과 취업활동이 가능한 비자를 발급하는 것이다. 최초 입국 시 체류기간은 3년 범위 내이고, 고용노동부에서 취업활동 기간 연장 확인서를 받은 경우에는 입국일로부터 최장 4년 10개월 범위 내에서 체류가 가능하다.#

또한 귀화 자격을 심사할 때도 특혜가 부여되는데, 재외동포로서 2년동안 국민평균소득의 2배(약 5,000만 원)에 달하는 연봉 기준으로 근로소득세를 납부하면 바로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받을 수 있다. 일용직노동자들은 5,000만 원 연봉이라는 조건을 갖추기 힘들기에[104] 귀화자들은 대부분 조선족 중 상위 1%에 해당하는 유학와서 한국에 정착하고 대기업에 취직한 사람들이다. 병역은 연령에 상관없이 현역에 가지 않고 바로 민방위로 편입된다. 단, 이는 조선족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모든 귀화자들에 대한 특혜이다.

과거 재외동포의 기준이 "한국인의 3세대 이내의 직계비속"인데 조선족과 고려인의 경우 대한민국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기 전에 한국을 떠났기에 이들은 재외동포로 인정을 받기 위해 특별한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조선족의 경우 처음에는 중국 신분증에 조선족으로 표기가 되어 있어야 하고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중국 4년제 대학을 졸업해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점차 1948년 (정부수립) 이전에 태어난 고령동포까지 확대되었고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뒤에는 건설분야를 제외한 기능사 이상의 국가기술자격을 따면 받을 수 있게 크게 완화되었다. 4년제 대학 졸업자로서 재외동포 자격을 취득했다면 단순노동직(3D, 알바, 식당 종업원 등)에 종사할 수 없으며 전문기술직 소지자는 해당 자격증에 관련된 업무내용 이외에는 취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사판에서 일당을 뛰는 조선족들은 재외동포신분이 아닌 취업비자 H-3비자를 받은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H-3비자가 절대다수였지만, 요즘엔 자격증을 따고 전문기술직으로서 재외동포 자격으로 신분을 변경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한다.

과거에는 조선족 4세부터는 재외동포법상 동포가 아닌 외국인으로 분류되며 이에 한국 장기 체류가 어려웠다. 그러나 2019년 7월에 기존의 동포 3세대까지만 재외동포로 인정하던 법률이 개정되어 전체비속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조선족 4세, 5세, 6세도 법적으로 재외동포로 인정되어 한국거주가 가능해졌다. 해당 뉴스

한편, 2005년 8월 개정된 공직선거법에 따라,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부터 공직선거법 제15조 및 출입국관리법 제10조에 의거하여 영주권을 취득한 후 3년이 경과한 외국인 주민에게 지방자치단체장, 특별시장, 광역시장, 도지사, 시장, 군수, 구청장, 시도교육감, 시도의원, 시군구의원 선거권이 부여됐다. 물론 이는 조선족이나 여타 특정 인구집단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며,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영주권자에게 부여되는 권리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외국국적동포 현황#에서 조선족의 인구비율이 타 국가 출신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사실이며, 때문에 과거 중공군 출신으로 한국을 겨냥한 침략전쟁에 가담하고 오늘날까지도 그 과오를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105]에게 한국 정치의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하느냐는 논란도 존재한다.

2020년대 대한민국은 체류 비자를 완화하는 등 조선족들의 한국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2019년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대한민국 인구의 4.9%로, 2020년에는 통상 학계에서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보는 5%를 확실하게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개중 대다수가 조선족일 정도이다.

11.2. 높은 범죄율?

국내 최악의 치안, 조선족 최대 거주지 대림동 방문 다큐

조선족들의 범죄율이 다른 집단들에 비해 높다는 근거는 딱히 없다. 그러나 이들이 잠재적 범죄자 집단이라는 편견이 있으며증오차별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언론의 인권보도준칙을 신설하고 이주민과 외국인 인권에 대한 보도준칙을 제작하였다.인권보도준칙에 따르면, 한국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이 활동하는 신문사 및 잡지사, 방송사에서는 조선족이 범죄자라는 이미지에 연관될 수 있는 어떠한 표현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인권위는 주기적으로 실태 조사를 통해 조선족들에 대한 인권보도준칙 위반 사례를 공표함으로서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106]

아래는 외국인 범죄자들의 통계인데, 조선족만을 대상으로 한 범죄율 통계는 없다. 또한 중국인 집단과 조선족 집단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파일:attachment/조선족/국적별_강력범죄.jpg

2012년 데이터에선 중국인 범죄자가 63,889명으로 전체 외국인 범죄자의 58.5%를 차지하였으며 베트남인이 9,085명으로 8.3%, 미국인이 6,526명으로 6.0%, 몽골인 6,370명으로 5.8% 순으로 나타났다. # 2013년 데이터에서도 중국인이 6,354명으로 전체 외국인 범죄자의 59.3%를 차지해 가장 많았으나, 이는 앞서 인용했듯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외국인 중 중국인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인구 요인을 배제하려면, 국적별 국내 체류 외국인 수 대비 범죄자 수를 비교해야 한다. 경찰청이 펴낸 '외국인 밀집 지역의 범죄와 치안 실태 연구'를 보면, 2016년 기준 외국인 등록자 기준 10만 명 당 외국인 범죄자 국적별 검거 인원은 다음과 같다.#
국적 인구
러시아 4,837
몽골 4,678
우즈베키스탄 3,221
태국 3,184
파키스탄 2,904
방글라데시 2,429
중국 2,220
스리랑카 2,022
베트남 1,576
미국 1,341
필리핀 1,181

구체적으로 보면, 살인의 경우 중국인 범죄자 비율이 다소 높았다. 지난해 국내에서 검거된 살인범(미수 포함) 995명 가운데 외국인은 108명으로 11%였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외국인 인구 비율(4.9%)의 2배가 넘는다. 이 가운데 중국인은 65%로 전체 외국인에서 중국인이 차지하는 비율(52.8%)보다 높았다. 그러나 살인과 강도를 제외한 강간·강제추행·절도·폭력·사기 등 다른 중범죄 유형에서 중국인 비율은 총인구 대비 중국인 비율(2%)보다 낮았다. 2020년에 중국 국적 불법체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에서는, 10만명 당 범죄자 검거 인원은 1,217명으로, 외국인 평균(833명)보다 다소 높게 나타났다. 다만 조사가 쉽지 않은 불법체류자들이 대상이라, 통계가 과대평가되었을 가능성과 과소평가되었을 가능성을 모두 감안해야 한다. 중국인 집단과 조선족 집단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동일 조사에서 내국인의 10만 명 당 범죄자 수는 3,495명으로 나타났으나, '예비군 소집 불이행'처럼 외국인에게 해당사항이 없는 죄목도 많이 존재하니 천편일률적인 비교는 어렵다.

11.2.1. 범죄 현황

11.3. 한국에서

한국에서 조선족들이 많이 진출한 분야는 건축, 토목으로, 흔히 3D 직종으로 불리는 업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높으며 중화 요리 식당을 운영하는 경우도 많다. 여성들은 요식업 쪽 일이나 가사도우미가 많은 편이다.

2000년대에는 중국 출신 그냥 한민족이라는 인식 정도였다. 그 전은 더해서 1980년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이전 KBS가 조선족의 가족을 찾아줄 정도였으며, 아예 만주에서 태어난 유명 인사인 문익환 같은 사람들이 1945년에 귀국하여 한국에서 큰 영향을 미치며 한국인으로 살아가기도 했다. 윤동주, 송몽규도 북간도 출신 한국인으로 인식되었다. 이순재 같은 유명 인사도, 자신이 조선족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이런 정서가 한국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2001년 강성범이 실제와 차이가 크지만 '연변총각'을 연기하기도 하였고, 2005년에는 댄서의 순정이라는 영화에서 '국민 여동생'으로 불리던 문근영이 주연으로 조선족을 연기하기도 하였다. 2011년에는 조선족 출신 가수 백청강이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서 우승하는 경우도 있었다. # 백청강이 연변 사투리에서 유래한 '앙까'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2010년대 중반 이후의 관점에서는 놀라워보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시진핑이 집권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2016년 주한미군 THAAD 배치 논란을 시작으로 중국이 본격적인 패권을 추구하는데 이들이 중국인 정체성을 가진다고 하여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낮은 인식이 있다면 이것이 그 인식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다. 다른 나라들에 사는 한민족들은 그 나라를 옹호해도 그런 나라들이 한국을 위협하지 않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불편하지 않지만, 중국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107] 사람이라면 일단 한국을 배척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2016년 벌어졌던 사드 보복과 2020년대를 기점으로 훨씬 노골화된 중국의 패권주의, 팽창주의적 행보로 인해 친중 한국인도 평판이 대단히 하락할 정도로 한중관계가 악화되며, 한민족이라면 자신의 편을 들 줄 알았는데 중국을 옹호한다는 것은 심하게는 곧 '간첩'이자 '적국'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정서[108]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예 혐중 수준으로 눈이 뒤집히지 않은 이상 지명광, 권평 씨 같이 중공에 대항하는 사람, 나는 귀화를 했으니 한국사람이라는 일부 조선족은 인식이 좋다.[109] 중국은 복수국적이 허용되지 않기에 귀화는 중국 국적을 버렸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조선족이 연루된 범죄가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주요 요소였다. 일부 조선족에 의한 보이스 피싱, 몸캠 피싱, 불법 도박 사이트 운영 등의 원격 범죄가 사회 문제가 되면서 대중의 인식을 나쁘게 하는데 일조하였고, 오원춘 사건박춘풍 사건 등 조선족이 강력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언론에 보도된 이후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조선족 관련 뉴스 기사나 영상의 댓글은 조선족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어찌나 인식이 안 좋아졌는지, 범죄 피해자가 되어도 오히려 피해자가, 오직 조선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받고 조롱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피해자가 조선족, 가해자가 한국인이고 토막살인이라는 끔찍한 흉악범죄 사건에서도. 매체에서도 이러한 영향으로 황해, 범죄도시, 청년경찰과 같이 조선족이 등장하면 범죄와 유관한 경우가 많다. 황해나 범죄도시는 그나마 조선족이 피해를 받는 모습도 섞여 있는 영화지만 청년경찰은 대림동의 한국인도 불편함을 드러낸 경우가 있었다.

조선족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혐오감만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다. 말하자면 조선족 말투나 문화라고 입증할 근거는 없지만 어색하니까 조선족이라는 식인데, 개중에는 조선족 사회에서도 사용하지 않거나 어색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1.4. 한국 사회로의 동화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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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대한민국선진국으로 부상하고 한중교류가 확장되면서, 대한민국의 조선족 이민자들 역시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2019년 통계에 따르면, 국내 거주 외국인 252만여 명 가운데 조선족은 70만 1,098명으로 가장 큰 인구 집단에 해당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족들은 주류 한국인 집단과 유리된 채 폐쇄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 인접한 한국인들과의 갈등도 빈번한 형국이다. # 또한 조선족 가운데는 중국 본토에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어를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본토의 중국어 내지는 중국식으로 변용된 조선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 때문에 이처럼 다종다양하면서도 이질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는 조선족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는 한국사회 내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이다.

조선족에 대한 여러 시선들은 결국 다문화주의동화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요컨대, 급진 다문화주의자들은 조선족 커뮤니티가 대한민국의 다른 외국인 집단보다 특별히 위험하다는 근거는 없으며#, 다양한 가치와 문화가 공존하는 편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 대해 온건 다문화주의자들은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조선족들이 한국 사회가 각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어 나가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원칙에 동의할 필요는 있다고 주장하고, 반대로 동화론자들은 마땅히 중국적인 정체성을 포기하고 대한민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받아들여 살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도 한다. # 단, 다문화주의동화주의든 모두 사회의 기존 구성원들 간 민주적 합의를 거쳐 이루어져야 하며, 국제적인 보편인권의 기준에 반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 있음은 유의해야 한다.[112]

들어가기에 앞서, 대한민국 내 조선족 집단의 정치·사회적 인식에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연관성이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 사회에서 대체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 일당독재 국가인 중국에서의 교육으로 인해 민주주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가질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족의 정치적 인식을 통계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국에서의 정치 환경에 노출된 조선족들은 낮은 정치적 효능감[113]을 갖게 되어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적 경험을 보다 빨리 습득하기도 한다.[114] 실제로 설문조사에 참여한 조선족 중 절반 가까이가 민주주의에 긍정적인 인식을 보였다.

다만, 이러한 연구 결과들이 조선족 집단이 가진 이질적인 정치관이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동일 논문에서는 선거 과정의 투명성이나 다원성 존중 측면에서 한국이 9.17점을 받은 반면 중국은 북한과 동일하게 0점을 받았음을 지적하며, 조선족들은 양극단에 있는 정치체제를 경험하며 독특한 정치적 태도를 형성할 것이라고도 지적한다. 또한 중국에서의 사회적 계층이 높을수록, 한국 정치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한국 거주 기간이 길수록,[115] 한국사회에 대한 신뢰도가 높을수록, 한국에서의 월 평균 소득이 높을수록 대체로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가 호의적으로 나타났다. 즉, 조선족은 민주주의에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한국에서의 경험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좌우하는 경향이 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급진 다문화주의자들은 조선족이 민주주의에 대해 특별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지 않는다는 결론에 집중한다. 즉, 기존에 조선족 문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여겨졌던 비민주적 인식이 유의미하지 않다고 판명난 이상, 한국 사회의 다양성을 함양하는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어떠한 걸림돌도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선족들은 다른 이민자나 재한 외국인 집단과는 달리, 중국에서 중국 조선어로 된 방송을 하거나 시청할 수 있고, 교육도 조선어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재한 외국인 중에서는 한국어 구사율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요약하자면,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어떤 언어를 쓰고 어떤 문화를 향유할지는 개인의 자유이므로, 조선족 집단이 특정 문화를 향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전체주의적인 비난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된 논지이다.

반면, 온건 다문화주의자들은 조선족들의 한국에서의 경험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좌우한다는 결론에 집중한다. 이들은 한국 사회와 조선족 집단 사이의 문화적 동질성에 관한 급진 다문화주의자들의 지적에는 공감하지만, 소위 정치적 효능감의 문제에는 여전히 미온적이다. 거칠게 말해 한국인이라면 한국이나 다른 서방진영에 속한 국가들에서 나쁜 경험을 했다고 그걸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짓지는 않는다. 반면, 조선족에게 민주주의란 한국이라는 타국의 제도(='이주국에서의 경험')이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나쁜 경험이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조선족 집단의 문화적 다원성은 한국 사회에 기여할 여지가 충분하며, 중국어 화자인 조선족일지라도 중화사상에는 비판적일 수도 있고, 반대로 유창한 한국어로 중국의 잘못된 이념을 옹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정치·사회적인 관점에서는 주류 한국인들에 비해 여전히 잠재적인 위험 요소이며, 따라서 한국 사회가 이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대우[116]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으로까지도 이어질 수 있으므로교화[117]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동화주의자들은 가치관의 형성 과정에서 정치·사회·문화적 요인들은 실질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역설한다. 비단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만이 문제가 아니라, 중국에서 교육받으며 중국의 생활환경에 노출되다 보면 중국적인 가치관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중국은 여전히 한국전쟁을 부끄럽기보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인식#하며, 국가적으로 그러한 프로파간다를 담은 "미디어"를 제작#한다. 조선족들은 당시에도 인민지원군의 주력이었을 뿐 아니라# 일부는 아직까지도 그런 인식을 가진다#. 이러한 것들과 '중국어를 쓰는 것, 중국 음식을 먹는 것'들을 뒤섞어놓고 "여기까지는 정치·사회적, 여기서부터는 문화적"이라고 칼로 자르듯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118] 또한 동화주의자들은 온건 다문화주의의 관점을 일부 공유하지만, 정치적 효능감의 문제에 대해 "조선족들이 한국인과 '여전히 다르기' 때문에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반응 역시 한국인과 다른 것"이라고 해석하며, 따라서 동화가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19] 즉, 중국 지린성 출신 박우 교수의 시사인 인터뷰에서 지적하듯, 분리수거·고성방가·흡연 등 공공 질서에서부터 교통정리같은 사회 내의 암묵적인 합의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충돌'은 결국 '살아온 체제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때문에 동화주의자들은 조선족을 박우 교수의 표현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사회와 모든 면에서 동화하여)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것이 바람직한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12. 해외 조선족 현황

뉴욕의 조선족은 약 5천 명으로 추산되는데 대부분 플러싱 지역에 살고 있다. 플러싱은 중국계와 한국계가 섞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혈통적으로는 한국계이지만 국적은 중국인이며 생활방식과 음식 등 중국문화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한인사회에서 일을 하면서도 중국사회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미국사회에서 일하는 한인들의 일상생활이 한인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흡사하다. 최회장은 한인과 조선족 사이에 이런 분규가 생길 때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많은 조선족들이 한인사회에서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일인데 만약 이런 분규가 확대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분쟁에 말려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혈통으로는 한인이고 국적으로는 중국인이고 또 거주지는 미국이라는 삼각지를 맴돌고 있는 특수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한인이 포용하면 한인이 될 수 있고 중국인이 포용하면 중국인도 될 수 있고, 시민권을 받으면 한인도 중국인도 아닌 미국인이 될 수도 있다.[120] 그러므로 만약 한인과 조선족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조선족의 뒤에 있는 중국계 단체와 중국영사관이 개입하여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 사실 최회장이 회장으로 있는 뉴욕조선족동포협회는 자신들을 한국계 중국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단체는 중국본토계인 뉴욕 중국인연합회의 산하 단체로 가입되어 있고 최회장은 중국인연합회의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인과 조선족 뿐만 아니라 한인과 중국계의 교량 역할을 하기 위해 오는 추석잔치에 중국단체의 참석을 주선하고 있다. - 한국일보 인터뷰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38%) 46,829명의 한국의 재외동포가 거주하고 있고, 런던의 뉴몰든에는 유럽 유일의 코리아타운이 존재하고 있다. (그 중에서 46분의 1 정도가 조선족) 그러나 이곳에는 1,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조선족과 850명 정도로 추정되는 탈북자도 거주하고 있다. 즉, 영국 코리아타운은 한민족의 초국가적 이주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나 1997년 이전에 영국 조선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급증하여 2,000명을 상회하였으나, 2004년부터 감소하여 현재는 1,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영국 조선족은 세계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족과는 구별된다. 합법적 노동비자, 불법적인 여권 위변조는 물론, 탈북자로 위장 망명신청을 하여 시민권을 획득한 영국 조선족은 코리아타운 주변에 거주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한국인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점이 특이한 점이다, 특히 조선족 시민권자의 경우 한국인들과 동등한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의 한족과의 관계는 밀접하지 않다. 그렇다고 거주국인 영국인들과의 관계도 별로 없다. 오히려 다른 한인들과 이주공동체를 형성하여, 영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

조선족의 해외 이주는 1990년대 초중반 한국이 주된 목적지였으나 1997년 이후 점차 다른 나라로 확대되었다. 현재 가장 많이 거주하는 국가는 상주 및 왕래 인구를 포함하여 1. 중국 본토 (약 100만 명 이상) 2. 대한민국 (약 70만 명 이상) 3. 일본 (약 5-10만 명. 중국인 통계의 일부로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 없음.) 4. 러시아, 미주, 유럽 등 순이다. (한중일 외 모든 국가 다 합해 수 만 명 이하. 마찬가지로 중국인 통계의 일부로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 없음.) 독일 유학한 조선족 지명광씨 기사에서 알 수 있듯 중국과 한국 외 제3국으로 이민 혹은 유학하는 조선족이 증가했다. 일례로 1993년 일본인 아내와 하얼빈행을 한 조선족 류은규 사진가도 있다. #

1990년대 중반부터 상당수 영국, 독일유럽 국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2022년 기준 중국 국적의 한민족을 의미하는 조선족 인구는 170만 명으로 지난 20년간 22만 명 감소했다#. 1997년 이후 조선족 인구의 절반 이상을 해외로 이동시킨 현상은 중국의 새로운 이주 패턴 때문이다.

12.1. 조선족 대규모 해외 이주 원인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글로벌화가 가속화되어 ‘신중국 이주’ 현상이 촉진되었다. 이주 현상이 촉진된 이유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때문이다#. 개혁개방 이전, 1차분배제도를 통해 국가가 개인의 고용을 담당했다. 하지만 덩사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고용을 국가에서 담당하지 않으면서 실업 인구가 증가하고, 시장화로 인해 ‘점점 더 많은 현금’이 동원되어야 일상을 영위해 나갈 수 있었다. ‘개인적 물질적 생활 개선을 인생 최대목표로 삼는 협애한 공리의식’이 만연해졌다. 또한, 사회주의-단체주의 국가에서 시장경제-개인주의 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이주’는 자연스러운 선택이 되었다. 또한,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부는 이주 문제를 정치 문제와 분리하여, 이주를 ‘통제’의 문제라기보다는 개인의 ‘권리’라고 생각했으며, 1985년 이주법을 제정하여, 초청장과 해외 스폰서십만 있으면 해외에 나갈 수 있게 하였다.

두 번째 원인은 원 거주지의 사회경제적 낙후 때문이다#. 1990년대에 들어 연변을 포함한 동북 지역의 많은 기업이 경영난에 봉착하는데, 외국 자본과 손잡은 연해 지역 (베이징, 상하이 등) 기업에서 생산한 상품이 대거 몰려오면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변지역의 기업이 문을 닫고, 공장의 노동자들은 새로운 진로를 탐색해야 했다.

세 번째 원인은 잠재된 발전 욕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이주한 소수의 조선족들의 성공 신화가 들려오고, 송금이 유입되며 소비심리가 팽창했다. 해외 이주를 통해 성공 욕망을 현실화하고자 했다.

12.2. 조선족 해외 이주 과정

12.2.1. 각 국가들의 이주 정책

재일조선족 (在日朝鮮族)의 경우 현황은 하기와 같다.
1980년대부터 유학으로 일본으로 오게 된 재일조선족, 초창기에는 일본사람들이 조선족 존재에 대해서 잘 모르고, 한국인이냐? 북조선 사람이냐? 묻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물음에 조선족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20여년이 지난 2010년대 이후부터는 성공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조선족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당당히 밝히는 분위기라는 것, 재일조선족은 일본사회 내에서도 중상층의 삶을 영위한다. 그만큼 일본사람들도 조선족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조선족도 신분을 드러내고, 모임과 단체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도 일본에는 유학으로 오는 조선족이 꾸준히 있고, IT업계 취업으로 오는 경우도 늘고 있다, 게다가 일본 역시 외국인 유치에 적극적이어서 과거보다 일본진출이 많이 수월해지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이라 해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없다고 이홍매 작가는 말한다. #

영국의 재영조선족(在英朝鮮族)의 경우, 영국으로 향하는 조선족 이주자가 증가하는 것은 1999년 변화된 영국의 이민 정책의 변화 때문이다#. 영국 내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난민 신청자에 대한 심사를 엄격하게 하는 대신,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을 관대하게 하고, 유학생들에게 영국에서 일할 수 있게 하였다. 해외 이주자들의 노동 허가를 대폭으로 늘려 합법적인 수단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경제 영역으로 끌어들여 노동력 부족을 해소했다. 인류학자 버토벡은 영국, 런던을 초다양성 도시로 정의한다#. 이주환경이 다변화되어 종족이나 출신지에 의한 범주적 구분을 통해 이주자를 통합하려 했던 기존의 사회통합정책은 더 이상 효력이 없다. 하지만 많은 이주자들은 영국 정부의 정책에 포함되지 못하는데, 이는 이주 정책의 틈새를 드러내며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신노예적 이주자’를 방치한다.

12.2.2. 조선족의 유럽 이주 과정

중국에서 해외에 노동력을 파견하는 노무 수출의 경우, 중국 정부의 해외무역 및 경제협력부에서 허가를 받은 회사에 의해 이루어진다#. 중국인 이주자들은 관료적 절차에 낭비되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허가받은 회사가 아니라 민간 이주 브로커에 의존한다. 2001년의 경우 해외 출국 신청자 중 정부의 허가를 받은 회사를 통해 노무 이주한 숫자는 겨우 0.84%였다. 이주 브로커들은 허위 여권을 만들어 중국인들을 유럽 각지로 운반한다.

조선족 영국 이민자의 경우, 최소 2만 달러 ~ 2만 5천 달러를 민간 브로커에게 지불한다.# 영국 체류하며 2년은 빚을 갚고, 그 후에는 송금해서 중국 땅이나 토지를 구입한다. 독일 이민 조선족의 경우, 시민권을 얻기 위해 북한 출신의 난민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실제 북한에서 이주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것을 독일 난민 당국에서 인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독일에 이주한 대부분의 조선족은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북한 출신으로 위장한다. 독일 정부가 이주민들의 북한 출신인지 아닌지 판명하기 위해 북한의 역사, 김일성 가계, 수도, 경제 등에 대해 질문한다. 조선족은 난민 심사를 받기 위해 제2의 자아를 탄생시킨다.

독일의 경우에도 지난 20년간 이주민을 통합하기 위한 과정에 있었다#. 2005년, 이민법을 단순화해 시행했다. 독일은 이주민의 독일 사회 적응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교육 기회를 제공 의무화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기술자나, 연구원, 학자, 기업체 간부 등 고학력 노동 이주에 초점을 두고 있어 비판받고 있다. 독일의 이주 정책은 이주민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고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지배적인 문화와 가치에 적응하도록 하는 동화에 중점을 둔다.

12.3. 해외 이주의 특수성

조선족 유럽 이주의 특수성은 초기 정착이 대부분 한인타운 지역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영어를 할 줄 몰라 한인을 상대로 일을 하고, 한인 교회에 나가 한인들로부터 일자리를 얻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어라는 문화자원을 공유하는 한인 커뮤니티의 서비스 노동자로서 한인타운이나 한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따라 이주한다.

영국의 경우, 영국 내 한인 인구는 약 4만 명이고, 그의 절반인 2만 명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 20분 1의 정도가 조선족이다. 대우자동차, 삼성전자와 같은 한국계 다국적 기업의 현지 법인이 생겨나며 상사 주재원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1990년, 런던 뉴몰든 지역에 한국인 주재원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과 반찬 가게가 문을 열었다. 1997년 IMF로 주재원 인구가 감소했지만, 2001년 911테러로 인해 미국 정부 비자 쿼터가 감소해서 영국 내 유학생이 급증했다. 뉴몰든은 조선족, 소수의 탈북 조선인, 남한 출신 이주자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초국적 한인타운''(‘transnational Korean town’)으로 볼 수 있다.

12.4. 해외 조선족의 삶

12.4.1. 노동

조선족이 유럽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단순 서비스직이다. 노동시장에서 이들은 생산직에 근무하거나 하위 서비스 업종에 종사#한다. 남성 이주자들은 대부분 건축, 집수리 등의 일을 하고, 여성은 음식점, 미용, 가사, 청소원 아이 돌봄 서비스를 구성하고 있다. 조선족 여성은 서비스 계층으로 등장해 유럽에 거주하거나 여행하는 한국을 대상으로 각종 서비스 노동을 수행한다. 체류자격이 불안정해 사람들과의 빈번한 접촉이 요구되는 민박집보다는 식당 주방이나 개인 집과 같이 ‘남의 눈에 잘 안 띄는 곳’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개인의 경험#
Case A: 영국 이주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조선족 사업가 중 한 사람. 원래는 한국 기업의 직원으로 연변에서 건축 일을 했다. 1995년 중국 돈 3만 위안을 주고 독일로 이주해 집수리 일을 수행하다 영국으로 이주해 건축 자영업을 한다. 2001년 영주권을 획득하고 연변 식당도 열고, 건축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Case B: 영국 거주 조선족으로 대졸 출신의 고학력자. 해외 이주를 매우 꼼꼼하게 기획했다. 연변에서 시계 공장을 운영해 한국에 수출하다가 IMF 이후 수출이 어려워졌다. 먼저 미국 이민을 계획하다가 영국에 가면 더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브로커에게 ‘다른 여권’을 받아 런던에 오게 되었다. 이때 영국 돈 8천 파운드를 지불했다. 영국에서는 일이 고되고 영어도 힘들지만, 사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법과 질서를 동등하게 적용하여 자신의 기업가 능력을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Case C: 상당한 고학력, 영어에도 어려움이 없는 영국 거주 조선족. 한국 미용실의 접수원으로 일하며 얼굴 마사지와 에스테틱을 담당하고 있다. 중국 여행사에서 영국 유학 업무를 담당했다가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왔고, 조선족과 결혼해 영국에 정착했다. 조선족 이주자들이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다며 영어를 극복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조선족들의 정착과 안정을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선교에도 헌신적이다.

12.4.2. 해외 조선족의 위계

영국 거주 조선족들은 한국인 커뮤니티와 접촉하지만, 상당수 동질감은 느끼고 있지 않다##. 조선족 이주자는 남한 출신 한인들의 ‘텃세’가 너무 심하다고 말한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같은 정서를 공유할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조선족은 영국의 주류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한인 타운에 의존적인 형태로 생활하기 때문에 매우 주변화[121]된 이주자 집단으로 보인다.
“한국 사람들이 하도 못 되게 굴어 질려버려서 그 다음부터 조선족들은 한국에 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들도 아주 못된 품성이 나타난다. 민족적으로 한 뿌리라는 생각을 가져야 하는데, 노예 취급을 하면서 민족의 동질성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한국 사람은 똑같은 일을 시간당 8파운드를 받고 일하지만, 조선족은 4~5파운드를 받는다. 같은 민족이지만 노예로 쓸 것인가, 똑같은 사람으로 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이들과 만나면 항상 이용당한다는 느낌이 들고, 진심이 결핍된 교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에서는 자유롭게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누가 나보고 물어보면 난 중국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독일 거주 한국인도 마찬가지로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이나 작업장에서 일한 경험이 많은데 대부분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한다. 한인 식당에서 일하는 경우 “휴가는 물론 몸이 아파도 쉴 수” 없었고, “같은 일을 해도 (자신들은) 한국인의 절반 밖에 임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한인 사회에서 타자화되는 이들은 한국 사회 자체가 조선족에게 차별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한인 동포로부터 하찮은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여담으로, 차별은 지양되어야 하며 문제가 있는 부분은 개선되어야 한다. 다만, 조선족들이 중국이 아닌 한국에 와서 일을 하는 것 또는 해외에서도 중국인 커뮤니티보다 한국인 커뮤니티와 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그들 밑에서 일을 하는 것은 분명 자신들의 이득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조선족들이 다른 한국인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지 못 한다고 서운함을 토로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은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며 강하게 강조하며 선을 긋는 모습은 한국인들에게는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 있고, 조선족 역시 본인들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12.4.3. 단신 이주 조선족의 삶

조선족 이주자는 법적 신분과 언어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당해도 호소할 곳이 없고 영국 정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또한, 단신 이주자들의 삶은 비참하다. 삶의 질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오직 한 달에 얼마를 벌 수 있는지에만 집중한다. 한 달 수입은 1천 파운드 정도 되는데 이는 영국인의 최저 생계비에 훨씬 못 미치는 돈이다#. 하지만, ‘어차피 일하러 밤낮으로 나가 있기 때문에 교대로 잠만 잘 수 있는 방을 얻어 4~5명이 돈을 모아 내서 집값’을 내기 때문에 돈이 많이 안 든다.
“한 방에 4~5명이 살면서 방값을 포함에 한 달에 200파운드(한화 40만 원)로 산다. 일은 힘들게 하면서 술이나 카지노 같은 도박에 쉽게 빠져서 돈을 날리는 사람도 있다.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영국에서 치료를 받는 사람은 드물다. 중국 고향집에 약을 부탁해서 받아먹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 이주자들은 진단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자기 병을 스스로 진단하고 약을 먹는다. 암인데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도 여럿 있다. 영국에 있어도 영국에 ‘사는 것’은 아니다.#

12.5. 해외 이주의 장점

12.5.1. 자유

조선족 이민자들을 이주 초기, 자유로운 시민사회에 적응하는 데 여려움을 겪는다. 독일로 이주한 조선족을 인터뷰한 몇몇 학자는 그들이 권위에 짓눌려 있는 것을 관찰했다고 한다#. 그들은 무엇인가 독립적으로 주체적으로 결정하거나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혼자서 무얼 하는 게” 두렵다거나, 어떤 때에는 누가 자기에게 “어떻게 하라고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반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선택의 자유’에 대한 문화적 동경을 가지고 있다. 비록 법적 신분을 제약당하고 있어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진 사람처럼 자유롭지는 않지만, 정부의 토에나 사상으로부터 어떤 강요도 받고 있지 않다는 점이 독일 사회체제에서 가장 좋은 점이라고 한다.

12.5.2. 하향 평준화 된 삶

조선족 노동자들은 영국 이민 생활의 좋은 점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에게 무시당하는 것만 제외하면 무시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중국에서처럼 권리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한국에서처럼 학력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실력으로 사람을 평가해 열심히 일하면 인정받기 쉽다고 한다. 또한, 폴란드, 체코, 동유럽 국가에서 이주하는 사람도 많아 ‘백인인데 영어 못하는’ 사람도 많아 백인이든 유색인종이든 고달프고 차별받기는 마찬가지이다. “특별히 구별될 것 없이” 전 세계의 이주자 그룹 가운데 하나. ‘하향 평준화 된 삶’에서 오는 동질감과 평온함을 느끼게 한다.
“나를 한국사람으로 보든, 중국사람으로 보든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냥 다른 사람처럼 한 명의 이민자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다만, 주의해야할 것이 이는 유럽에 차별이 없거나, 아시아보다 차별이 적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오히려, 서구권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은 때때로 무례하고, 폭력적이기도 하다. 이는 '중국과 한국에서 주류였던 한족들이나 한국인들도 서구권에선 자신들과 같은 비주류구나'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또한, 조선족들이 해외에서 한국인들에게 무시 받는다고 느끼는 이유는 보통 그들이 중국인들이 아닌 한국인들 밑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22] 다만, 이를 다르게 생각해보면, 조선족들이 해외에서도 중국인 커뮤니티보다 한국인 커뮤니티로부터 돈 벌 기회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13. 창작물

2010년대 전에는 재미교포나 재일교포 등과 더불어 교포출신 인물의 배경으로 나오는 정도의 수준이었으나[123] 2010년대 들어서 조선족들의 이미지가 바닥으로 떨어진 여파인지 창작물에서는 범죄자 등의 폭력적인 성격을 띄는 포지션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주로 대림동 등지의 마구잡이 조폭 세력으로 등장하는 경우와 신세계베테랑에서처럼 히트맨으로 나오는 경우 등이 있다. 3d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 밀입국한 불법체류자, 범죄조직을 이루고 강력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는 것이 미국 영화에서 묘사되는 멕시칸들, 90~00년대 일본 영화에서 묘사되는 재일한국인들의 위상과 동일하다.

2010년 영화 황해, 2017년 청년경찰, 범죄도시 같이 조선족 범죄 세력들이 주적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이 제법 나오고 있다. 다만 <범죄도시>의 경우 혐오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감안한 모양인지 조선족이 한국 경찰과 협력하는 모습도 섞여 있기도 하다. 애초에 '조선족 범죄 조직'이 주적인 것일 뿐이지 조선족 자체가 결코 나쁘게 나오지는 않으며 경찰에 협조하는 조선족 상인들이나, 개그캐로 나오는 조선족 깡패들, 주인공 마형사가 첩보원으로 부리는 조선족 형제, 단골 식당 주인 할아버지와 손자 등 조력자, 선역, 중립 포지션의 조선족들도 많다.

14. 조선족의 분포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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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인물

15.1. 대한민국

15.1.1. 가족이 조선족이거나 조선족 출신인 인물

15.1.2. 조선족이었다가 한국으로 귀화한 인물

15.2. 중국·그 외 국가

15.3. 기타 개별문서가 없는 유명 인물

15.3.1. 여담

16. 관련 자료와 문서

17. 같이 보기


[1] 영문 정식명칭 중국 정부 대사관 조선족 소개[2] 다만 2024년의 분산된 인구와는 차이가 크다. 자세히 보면 지도 중간에 있는 후베이성허베이성으로 잘못 표기되었다. 허베이성은 베이징시, 톈진시 등을 둘러싼 수도권 지위이고, 후베이성은 코로나 19의 발원지로 잘 알려진 중국 남부의 우한시를 끼고 있는 성이다.[3] 2022년 기준 한국 거주 조선족은 70만 안팎이고 지린성이 94만 명, 헤이룽장성이 27만 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4] 중국조선족(中国朝鲜族)으로 불릴 때도 있지만 정식 명칭은 조선족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부 - 민족소개 - 조선족[5] 중국 공식 명칭 및 영문 표기[6] 정식명칭은 아니고 이해하기 쉬운 영문 명칭[7] (ethnic) Koreans in China라고 하면 중국에 있는 모든 한민족 인구를 말하는 것이고 Korean Chinese라고 하면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조선족을 의미한다. 영어 문법 혼동 혹은 한국인과 중국인의 차이를 숙지하지 않은 경우에 Chinese Korean이라고 논문에서도 잘못 표기하는데 Chinese Korean은 중국계 한국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중국 혈통의 대한민국 국적자이다. 조선족을 영어로 기재하려면 Korean Chinese (with Chinese citizenship)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8] 중국 본토에는 약 100만 명 안밖의 조선족이 국내외를 왕래하고 있으며 한국에 있는 70만 명의 조선족과 중복되고, 조선족 최대 총인구는 최대 약 170만 명 안팎이다. 해당 통계에는 수십만의 한국 국적 취득자와 수천명에서 수만명 규모의 일본 국적 취득자는 당연히 포함되지 않는다. 그외의 국가들에도 조선족들이 일부 거주하고 있다.[9] 무단장시 같이 연변 밖에서도 많이 살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 정착하는 조선족도 늘어나서 현재는 이미 연변의 조선족 수가 한국 거주 조선족 수보다 적어졌다. #[10] 보통 조선족들의 국적은 중국이나, 귀화하는 경우도 당연히 있다. 귀화자의 경우는 그 나라로 귀화한 사람으로 취급 한다.[11] 대한민국이나 북한에서는 연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특히 북한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를 조선인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자신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연변 사람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12] 중국 보통화와 한국 표준어의 공식 명칭은 모두 조선족(朝鲜族)으로, 세계의 조선민족(朝鲜民族) 혹은 한민족(韓民族)과 분리해서 표현할 때, 중국의 소수민족임을 강조하는 경우에는 중국조선족(中国朝鲜族)으로 붙여 적는다. 본래 한자문화권에서 표기하는 조선족(朝鲜族)이라는 명칭은 중국조선족의 약칭이 아니라 조선(朝鲜)계의 모든 중국 인민들을 통칭하는 민족명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한민족계를 표현할 때는 한국인 혹은 조선인 등 타국 국민을 표기하듯이 하는 것이 보통이고 중국의 조선족만을 조선족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중국에서 해외조선족(海外朝鲜族)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남한이나 북한의 조선민족 인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땅에서 해외로 나간 중국조선족만을 의미한다. 중국 정부 당위통전부 중국어 자료에서 알 수 있듯, 조선족이라는 명칭 자체가 중국 소수민족 조선족만을 의미하고(朝鲜族的称呼特指中国少数民族)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가진 중국인이라는 뜻이지만 굳이 중국이라는 단어를 간혹 앞에 붙이는 이유는, 중국이라는 국가 소속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형성과 정체성신화망대한민국 정부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13] 《2021 중국 통계 연감》에 따르면, 조선족 총 인구는 1,702,479명이다.[14] 중국에 있다는 뜻. 재화(在华/在華)라고도 한다.[15] 애초에 연변보다 대한민국에 체류하는 조선족 수가 많다는 논문이 수도 없이 많은데, 한국국적으로 귀화도 많이 하고 있는 조선족 총 인구수가 2023년 기준 200만 명을 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2023년 기준 조선족의 인구 분포를 보면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조선족은 59만 명이다. 베이징 등 중국 수도권 8만 명, 칭다오靑島) 등 산둥(山東)성 20만 명, 상하이 5만 명, 광둥(廣東)성 4만 명 등 동북 3성을 제외한 지역에 37만 명이 산다. 조선족 비중이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은 한국으로의 이주 및 귀화다. 거듭 강조하지만 재한 조선족은 70만 명을 넘어섰고 이는 중국 170만 명 인구 통계에 상당수가 포함되어 있으며 중복된다. 재한조선족이 옌볜자치주 내 조선족보다 더 큰 규모인데, 조선족 총 인구가 200만 명이 반드시 넘는다는 억지주장은 납득 할 수 없다.[16] 대한민국 정부의 중국국적 동포의 통계에서는 189만 명대로 추산되기도 하지만 이는 가족이나 친척중에 조선족 출신이 있어 혈통, 즉 혈연 관점에서 중국 체류중인 중국 국적 재외동포로 분류될 뿐이지, 중국 정부 시스템상에 한족 등으로 분류되어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는 정확한 조선족 총 인구 추계라고 볼 수 없다. 상술하였듯 임효준 등 중국으로 귀화한 한국인 출신도 해당 통계에 다수 존재하고, 임효준의 민족 분류는 조선족으로 되어있을 확률이 높지만, 조선족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굉장히 많기 때문이다. 한족-조선족 간의 통혼도 많이 증가하여 주로 중국 수능 가오카오 가산점 등이 필요없는 경우 중국 민족분류를 한족으로 선택을 많이 한다.[17]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 중화 각 민족 - 조선족 문서 참조.[18] 현재는 자치주이다. 자치구는 성급(省級) 행정단위고 자치주는 지급(地級) 행정단위인데, 성급 행정단위 아래에 지급 행정단위가 있다.[19] 청나라 말기 조선민의 개방을 앞두고 청나라 정부는 처음에는 '한민(韓民)'이라고 불렀던 것이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취득한 조선인을 조선족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족이 원래부터 중국에 수백수천년 전부터 있었니 하는 중국인 키보드 워리어들의 말은 말이 안된다.[20] 물론 귀화하면 당연히 한국인이다.[21] 이외에도 후술하듯이 해방 이후 한국에서 개발된 한국 요리를 팔면서 조선족 요리라고 하는 등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22] 전부 중국 앱인 것은 아이러니[23] 다만 국외에서는 Kimchi, Hanbok 등이 영어 사전에도 등재되는 경우도 많고 이미 한국 전통이라고 각인되어 있으며 실시간 피드백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국 문화라고 후려치기 어렵다. 중국의 폐쇄성의 수혜로 이런 일이 중국 국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24] 조선족 단체는 10만 명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해당 인구수는 리 소테츠 등 사실상 귀화 일본인격인 일본 국적 취득자도 포함으로, 재일조선족단체가 주장한 숫자라 정확한 재일조선족 규모는 불명확하며, 일본국적자를 제외하면 절반 이하로 줄어들 것으로 사료된다.[25] 대표적으로 조선족이 기존에 한복을 입었었다고 해도, 현대식 개량 한복 등은 한국이 개발한 것이 당연한데 한국식 디자인의 개량 한복을 입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하는 등[26] 참고로 함께 공부하거나 일하면 알겠지만 조선족에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가 많습니다. 조선족은 중국어와 한국어의 이중언어를 가진 '성조와 한자에 굉장히 강한 한국인'입니다. 그래서 일본어도 일반 한국어 원어민보다 훨씬 빨리 습득하고 한중일 트라이링구얼도 흔합니다.(ちなみに一緒に勉強したり、仕事したりするとわかるが、朝鮮族にはぐうの音も出ないぐらい優秀な人材が多い。中国語と韓国語のバイリンガルで、早い話「声調と漢字にめちゃくちゃ強い韓国人」です。なので日本語も一般の韓国語ネイティブよりはるかに早く習得し、日中韓トリリンガルも珍しくないです。) 라는 주장. 이에 대해 반박하자면 → 오히려 한중일 세개 다 완벽하지 않고 애매한 사실상 0개국어인 경우도 많을 것이다.[27] 반면 한국인은 중국에서 평생을 살아도 투표를 할 수 없다. 상호주의가 원칙인데 이것은 대한민국의 중국 예속화만 가중시킬 뿐이다.[28] 한국인과 북한인은 족(族)을 붙이는 대신에 인(人)을 붙여서 한국인 또는 조선인으로 표기하는 것이 보통이다.[29] 한민족 혈통임이 확인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F-4 재외동포 비자를 내어 준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30] 흔히 사람들이 아는 조선족이다.[31] 상술하였듯 조선족 총 인구 약 170만명 중 약 90~100만 명 이상은 중국 국내에 체류 중이고, 2020년대 기준 매년 70만 명~80만 명 이상이 대한민국에 있다. 이는 중복된 수치이며,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7만 명 정도가 일본 등에 체류하고 있다. 한국 내 외국인 약 240만 명 중 약 3분의 1이 조선족이다. 연변에 있는 조선족보다 한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더 많은데 대한민국에서 많은 부분에서 권리만 주장하고 기여하는 것은 적은 현실이다. 물론 케이스 바이 케이스겠지만 조선족이 대한민국에서 성공시킨 글로벌 기업 같은 공헌 실적이 아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32] 중국어에서 공작(工作)은 작업, 노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민족식별공작은 의미를 살려 우리말로 번역하면 '민족식별작업'이 된다.[33] 중국, 베트남, 일본 등을 포함한 한자문화권에서는 일반적으로 한반도를 조선반도라고 한다. 대한민국이 외교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후에 한반도라고 적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34] 의도적으로 이영애를 서울 태생의 '조선족'이라고 하는 사례, 의도적으로 김연아를 경기도 출생의 '조선족'이라고 하는 사례[35] 조선족들이 벼농사를 짓는 지역이기도 하다.[36] 청나라 시대 만주족은 엄연히 귀족이었고, 만주족이 아닌 이상 만주에 체류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팔기군에 소속된 조선인들이 만주족에 편입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청나라 치세 당시에는 한족 중 청나라 황실의 총애를 받은 경우나 벼슬을 받은 사람들이 종족을 한족에서 만주족으로 바꾸는 경우에서 보듯, 청나라 당시 만주족은 민족 집단이라는 혈통적 개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지배 계급이라는 신분적 개념 또한 함께 포함하고 있기도 했었다.[37] 번시 박씨들이 만주족에서 한족으로 그리고 한족에서 조선족으로, 그 뿌리를 확실하게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한민족에게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박씨라는 성(姓) 때문이기도 했지만 박영강을 시조로 지금까지 16대를 이어오며 간직해온 자신들의 족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만약 족보가 아예 없었더라면 자신들의 뿌리를 되찾기란 그 만큼 더 힘들었을 것이다.[38] 청나라가 변발을 강요한 것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39] 마르크스주의에서는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로 한정지었다면, 블라디미르 레닌은 당시 빈농과 소수민족이 많았던 러시아 상황에 맞추어 혁명의 주체를 노동자 외에도 농민과 소수민족으로 확장하였는데, 이러한 레닌의 소수민족 정책은 민족자치구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40] 20세기 초반에서 중반으로 이어지는 시대 중국국민당장제스는 소수민족들을 한족으로 완전히 동화한다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부쳤으나, 당시 군벌들이 활개치던 상황에서 중국의 행정력이 소수민족 거주 지역에 잘 닫을 턱이 없었고 이런저런 문제만 발생시켰다. 이를 목격한 중국공산당은 국공내전 전후로 "민족 자치 구역을 설정하고 구역 내 소수민족들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한다"는 식으로 한 발 양보하는 척하는데, 그 결과물이 중국 내 여러 소수민족 자치구이다.[41] 북한으로 넘어가는 인구가 있었다.[42] 중국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김산의 일화에 따르면 연변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집은 지붕이 물이 샐 지경으로 허물어져가고 있는데도 수리를 하지 않아서, 김산이 집주인에게 지붕이 다 낡아서 물이 새는데 왜 수리를 하지 않느냐고 묻자, 집주인의 대답이 압권이다. "뭐하러 집을 수리하죠? 이제 조선이 곧 독립될 것이고 그럼 우리는 고국으로 돌아갈 텐데."[43]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북한은 중국에 비해 오히려 정상적인 나라였다. 경제적으로도 북한이 중국을 앞섰는데, 중국이 북한의 1인당 GDP를 제치는건 1994년의 일이다.[44] 마오쩌둥의 조카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신강 위구르인한테 살해당했고,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 ‘동북의 태상황’이라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세를 자랑했다고 한다. 마오위안신이 연변에 왔던 사실은 중국 정부의 기록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고, 후술할 연변의 조선족 사진사가 찍은 사진을 통해 공개되었다.[45] 함경도 회령 출신으로 윤동주 시인의 고향 명동마을을 개척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인 독립운동가 김약연의 칭송비는 문화대혁명 때에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어 파묻혔다가 나중에야 다시 파묻힌 것을 꺼내서 다시 세웠다. 지금도 명동교회에 가면 그 파괴되었다 다시 세운 칭송비가 남아 있다. #[46] 홍범도[47] 설립 당시에는 자치구였다.[48] 이 때문에 까오카오 외국어 과목에 한국어가 없다.[49] 중국에서 말하는 공정이란 단순히 알려진 것처럼 역사만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의 모든 인문, 환경, 경제를 조작하는 것이다.[50] 식당에서 연변 조선족들이 식사를 하는 도중 헤이룽장성 조선족의 억양이 들리면 나가면서 헤이룽장성 조선족 방향으로 침을 뱉고 나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51] 이를 '완전중학교'라고 한다.[52] 지린성에 있다.[53] 독립운동가 이홍광을 기념하여 이름을 바꾸었다.[54] 김해영, 2018에 따르면 지린성(연변 제외) 학교 22개 중 10개가 한어를 제외한 과목을 조선어로 수업, 2개가 조선어문을 제외한 과목을 한어로 수업, 12개가 일부는 조선어 일부는 한어로 수업한다고 하며 한어를 제외한 과목을 조선어로 수업하는 학교는 10개 중 8개가 소학교였다.[55] 과거에는 10점이었다.[56] 랴오닝성 조선족 사범학교와 랴오닝성 몽골족 사범학교가 통합하여 세워짐.[57] 참고로 중국 소수민족 언어/문학 전공으로서의 조선어문 전공과,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전공은 동일하지 않다.[58] 특히 남한 출신 조선족들[59] 물론 중국에서는 외국인들이 투숙하는 호텔같은데가 아니면 자국 위성방송만 시청할 수 있으며, 셋톱박스의 펌웨어도 chinasat만 수신되도록 구현되어있다.[60] 구한말 초기에 만주나 연해주 등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경우, 쌀농사(농사이면서 논농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매우 강해 집착으로까지 받아들여질 정도였다고 한다. 본래 열대~아열대 지방에서 널리 재배하는 작물로써 춥고 겨울이 긴 만주나 연해주에서는 재배하기 불리한 작물인데도 굳이 벼를 재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며, 이 때문에 소련연해주에서는 조선인들이 중심이 된 집단농장이 벼농사의 북방한계선을 밀어올리고 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할 정도.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기 전 이야기다.)[61] 이는 일본과 비슷하다. 일본 인터넷에는 혐한이 주류라 한국에 대해 부정적이고 잘못된 정보들로 가득한데, 현실에는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인 일본인들도 꽤 많다.[62] 중국의 인플루언서들은 한국에 대해 우호적인 의견을 남겼다가 중국 네티즌들에게 사이버불링을 당하고 그 이후로 반강제적으로 한국을 과장하여 비판하는 혐한 컨텐츠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또 혐한 컨텐츠는 조회수도 많이 나온다.[63] 만주어 "하르빈"의 중국식 음차다. 한국 독음으로 적어봤자 무의미하니 참고용으로만 보면 된다.[64] 특히 을축년 대홍수 이후에 터전을 잃은 낙동강 유역의 주민들이 많이 이주했다.[65] 여담으로 조선족이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창작물 중 하나인 범죄도시에서 장첸 일당은 경상도 어휘나 억양이 섞였다는 반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함경도 사투리다. 함경북도 출신 탈북민인 김필주 씨가 연변의 조선족을 대상으로 익힌 말투라고 한다. # 굳이 따지자면 함경도 말투가 경상도 말투와 공유하는 점이 있다. '너'를 '니'라고 한다든지, 성조가 규칙적으로 대응한다. 함경도 말투를 쓰는 고령층 고려인의 말투도 이런 소리를 많이 듣는다.[66] 선양, 톄링 등[67] 한국 국적의 젊은 화교들도 한국어 문장에 단어나 관용구는 중국어를 쓴다거나 하는 식으로 양쪽 나라 말을 같이 쓰는 케이스가 있다. 이런 경우는 집에서 중국어를 쓰고 학교는 한국 원주민과 같이 다녀 양쪽이 섞인 경우다.[68] 예를 들면 "밥을 먹습니다"를 "밥으 먹습꾸마"[69] 예를 들면 "~입니까"를 "~임둥", "합니까"를 "~함둥"[70] 예를 들면 "일을 합시다"를 "일으 하기입소", "빨리 합시다"를 "날래 하겝소"[71] 예를 들어 喜歡(시환)을 稀罕(시한)이라고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72] 그마저도 화교히스패닉 같은 예외도 존재한다.[73]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 한인 축제가 열렸는데, 현지에서 태어난 교포들이 태극기성조기를 함께 걸어놓은 장면을 보고 중국 조선족이 충격을 받았다는 말이 있다.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지만 중국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행동을 하는 즉시 요주의 인물이 되고 끌려갈 것이라고 한다.[74] 이게 무슨 말이냐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한국인(Korean)이다"라고 했을 때, 한국인들은 그 단어가 민족적인 의미로서의 한국인(Ethnic Korean)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한국 국적(Korean nationality)으로서의 한국인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둘을 혼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조선족들이 "나는 중국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민족의식과 국적의식을 구분하지 않는 대다수의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이 말의 의미를 혼동하여 "그럼 조선족들은 자기가 한민족 혈통임을 부정하는 건가?"라는 식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75] 특히 재중교포들과 재일교포들의 경우 중국과 일본이 6.25 전쟁, 일제강점기로 한국에 개입한 역사가 있고, 현대에도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다보니 똑같은 가치관을 가져도 재미교포들보다 취급이 좋지 못한 경향이 심하다.[76] 다만 외질은 독일 국가대표로는 활동할지언정 터키계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편에 속하며, 이런 외질의 행태에 독일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특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현 터키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논란이 되는 정치 행보들마저 옹호하는 태도가, 에르도안의 반민주적 행태를 비판하는 독일 정부 및 국민정서와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대체로 이중국적 선수들이나 이민자 출신 국가대표 선수들이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이유만으로 강하게 비판받지는 않으며, 그런 행동은 극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일례로 폴란드계 독일인루카스 포돌스키 역시 국적이 독일이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속되어 있으니 최선을 다한다 말할 뿐 폴란드계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편이지만, 이 이유로 비판 대상이 되진 않는다.[77] 사실 외질의 사례는 터키계 독일인이 독일에서 생활하며 생긴 문제이므로, 조선족(=한국계 중국인)이 한국에서 받는 비판보단 중국에서 받는 비판, 혹은 화교(=중국계 한국인)들의 대한민국 내 처우에 비교해야 한다. 단지 조선족이 부분적으로 중국인 - '한족'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자' - 의 정체성을 갖는 것이 딱히 이상한 건 아니라는 정도 얘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78] 유연한 필체로 "금천구"를 간체로 적은 점(한국 표준 표기로는 衿川로 표기하지만, 중국의 간체자 표기로는 衿川로 쓴다. 다만 우리도 필기시에는 区로 쓰는 경우도 많으니 区로 쓴다고 중국인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区 표기는 일본어에서도 사용되기에 더더욱 그렇다.(ex, 도쿄도 치요다구(東(东)京都 千代田区)중국에서 간체자 만들 때 기존에 쓰던 약자나, 속자로 만든경우도 많다.) 현대 한국어의 격식체인 해요체와 어미를 혼동하는 점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문구를 적은 사람은 조선족일 가능성이 높다.[79] 정확하게는 1990년대 초반부터 나온 말이기는 하다. 남한이 북한을 완전히 찍어누른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북한의 경제는 1970년대부터 둔화 기미가 보이다 80년대 삽질을 거쳐 완전히 무너졌고, 1990년대 고난의 행군이 오면서 역전을 확정지었다. 한국은 6.25 전쟁 이후 6-7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보다 가난했으나 한강의 기적 이후인 80년대부터 고도성장으로 다가갔다. 90년대 후반에 IMF가 오긴 했으나 이미 극복하고 경제강국으로 올라섰다.[80] ≪延邊民報≫ 1946년 1월 8일자[81] <북조선 인민위원회와 인민군에 보내는 메시지>≪吉林日報≫ 1947년 3월 날짜 미상[82] ≪延邊日報≫ 1948년 9월 21일자[83] ≪延邊日報≫ 1948년 10월 4일자, 8일자[84] 연변대학 신8,27혁명조반단 002전안조 유영준전투대, 앞 글, 11[85] 위 글, 13[86] 6.25 전쟁 직전에 중국에서 귀국한 조선족으로 편성된 조선인민군. 6.25 전쟁 당시 상당한 전투력을 자랑했다.[87] 실제로 한국인들은 일본 같은 나라라도 이런 과거사를 부정하는 부류, 역사를 왜곡하려는 기성세대 극우를 비판하지 일반적인 일본인은 수많은 일본인이 매체에 등장하듯 강경한 사상을 가지지 않는한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당연히 조선족이 중공의 만행에 동조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88] 다만,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들의 한국 전쟁에 대한 절대적인 인식은, 북한이 먼저 침략한 것은 인정하더라도 남한도 미군을 등에 업고 북한 영토까지 들어가 통일을 시도했으니, 미군 포지션으로 중국이 개입하여 북한이 망하지 않게 도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점을(항미원조) 감안하기는 해야 한다. 물론 아예 북한군으로 참전해서 침략전쟁의 선봉을 맡았던 이들은 이런 허울뿐인 변명도 안먹힌다. 설령 중국의 교육이 그렇다할지라도 역지사지로 생각해보면 한국인들은 왜 대륙의 중국은 대만과 통일하려고 하는데 자신들의 통일은 방해하는가, 통일 한국에게 잘 대해주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 생각은 안하는가(저우언라이가 이 입장과 비슷했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도 그가 예견한 것과 유사하게 미국이 소련을 침공하지는 못했다.), 교역을 거부하는 북한 때문에 만주의 자기 땅이 가난해지는 것을 딱히 제대로 처리하지는 못하는 것이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특히 자신은 통일하고 싶어하지만 남의 나라의 통일은 방해한다는 인식이 한국에서 반중감정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89] 여기서 문명(文明)이란 현대적인 시민의식, 개화 정도를 의미.[90] 게다가 고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이 바로 옆에 붙어 있다.[91]중국 공안. 동포를 고문하는 방식 등 자국 공안의 부패에 대한 환멸을 느껴 망명했다. 현재 난민 자격으로 체류 중.#[92] 인권운동가.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출신이며, 고향 연변에서 시진핑을 비판하는 티셔츠를 입었다가 징역형 및 출국 금지령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 2023년 8월, 제트스키를 타고 장장 14시간을 이동하여 상륙에 성공.[93] 현재 북한과 별 다름이 없을 것이다.[94] 현대 사회에서 국적은 개인의 선택이다. 어떤 나라에 태어났다고 그 나라에서 평생 살아야 할 이유는 없고, 내가 몸을 의탁하고 보호받으며 그 대가로 충성을 바칠 나라를 정하는 건 내 마음이다.[95] 홍콩이나 마카오로 간 소수의 조선족들은 현지 사회에 사실상 동화되었다.[96] 이는 재일조선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니, 전세계 모든 국가의 모든 민족 이민자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사고라고 해도 무방하다.[97] 더군다나 혈통만 한국인이고 미국인이나 다름없는 미국 시민권자가 꾸준히 한국으로부터 지원 받는 일도 있다.[98] 1998년 처음으로 재외동포법이 생겼을 때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국외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한국 국적을 명시적으로 확인받은 자와 그 직계비속에 한하여 재외동포로 인정한다는 부속조항을 두었으며, 사실상 중국의 조선족, 러시아의 고려인 등을 겨냥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이 법은 이후 2003년에 대한민국 헌법 제11조의 평등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다. #[99] 외국인이지만 동포임을 배려하여서 일단 한국내에 들어와서 알아서 취업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인 H-2(방문취업)비자는 오직 고려인과 조선족을 위한 비자이다. 이 비자는 중국인(한족), 동남아시아인을 위한 취업비자인 E-9 비자와 달리 농업, 제조업, 건설업, 식당, 가사보조인 등 노동부에서 외국인고용이 허가되는 모든 업종에 취업이 가능하다. E-9비자와 가장 큰 차이는 취업을 하든 안 하든 정해진 비자기간 동안은 한국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이다.[100] 쉽게 말해 한국에서 조선족과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대우의 차이는 중국인미국인에 대한 대우의 차이, 나아가 한중관계한미관계의 차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리고 국민에 대한 대우는 국가가 책임지는 영역이다. 조선족 입장에서 그게 싫으면 중국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귀화하여 정식으로 한국인으로서 대우받든가, 중국인으로서 중국의 정치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여 한중관계를 더 우호적으로 만들든가 할 문제이지, (같은 민족이 좀 많이 모여살 뿐) 그네들 입장에서 남의 나라인 한국이 중국을 판단하는 방식에 왈가왈부할 권리는 없는 셈이다.[101] 모두 장기체류자는 아니고, 단기체류자도 포함한 값이다.[102] 정확히는 체류기간이 존재하지만, 무직니트여도 연장이 가능할 정도로 널널하다. 애초에 체류자격의 조건이 한국계 외국인일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체류기간 만료 4개월 전부터 hikorea 홈페이지나 출입국 외국인청에 방문해서 수수료 5만 6천 원만 지불하고 절차만 밟으면 땡.[103] 그래서 소위 높으신 분 자녀들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도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만든 편법이 아니냐는 논란이 많았다.[104] 이들은 애당초 일반적으로 재외동포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105] 항일투쟁 함께 했으니 6.25 때 총부리 겨눴어도 동지라고? 한국전쟁 시기 중국인민지원군·연변 조선인 사회의 후방지원 활동과 북중 혈맹관계의 강화[106]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주요 언론의 인권보도준칙 준수 실태조사", 국가인권위원회, pp.142, 2013.[107] 앞서 언급했듯 중국은 국가적으로 티베트족, 위구르족에게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모국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한민족의 문화를 중국 공산당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교육을 받기에, 일반 한국인을 두고 자신이 한민족의 동의어로 알던 '조선족'이라고 하는 식의 언동을 하는 것이 한국에서는 국민 정서에 어긋나 반감을 산다는 것을 정말로 모르고 그런 말을 하면서 한국에 대해 진심으로 아무런 악의가 없는 경우가 있다.[108] 이런 정서가 드러난 사건이 차이나 게이트 사태다.[109] 탈북민이 꽤 정치적으로 인식이 나쁜 곳 출신인데도 2010년대 중반 이후 조선족보다는 인식이 좋은 이유가 이들은 한국인임을 원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외국인 취급을 싫어한다. 애시당초에 북한이 좋아도 탈출하기가 어렵기도 하다.[110] 제주도에서 '감귤 과즐'을 팔기도 한다. 다만 찹쌀 반죽의 모양이 약간 다르다.[111] 해당 짤방의 인물은 한강 몸통시신 사건의 범인 장대호다. 주소를 보면 알 수 있듯 장대호를 옹호하는 측에 있는 일베 혹은 그와 비슷한 성향의 남초 커뮤니티 이용자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112] 이외에 이민자들을 3D 등 일부 업종의 노동자로만 받아들이고 국가 구성원의 하나로는 간주하지 않는 "차별배제모형"이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차별배제모형은 한국 사회와 무관하고 어떠한 문화적 동질성도 없는 머나먼 나라들에서 소규모로 오는 이주자들이면 모를까, 역사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접점이 깊고 인구 규모도 큰 조선족에게 적용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그리고 애초에 이건 그냥 "우리는 노예를 원해요."를 좀 고상하게 말한거나 다름없는 극단정 주장이다.[113] 자신이 효과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신념#.[114] 쉽게 표현하자면 특정 방향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표출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에, 독재국가에선 독재를 지지하고 민주국가에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115] 일부 조사에서는 한국 거주 1년 미만 집단이 민주주의에 제일 호의적이고, 1년 이상 5년 미만 집단이 제일 민주주의에 비호의적으로 나타났음을 명시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스스로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으며, "회귀분석을 통한 모집단 추정 단계에서 여러 변수들을 통제한 후 명확히 확인될 필요가 있다"고 시인한다.[116] 문화적인 다원성에 대한 존중 자체도 중요하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차별로 인해 발생한 조선족 집단의 부정적 인식이 조선족의 정치적 특수성으로 인해[117] 중국인으로서 살아오며 만들어진 낮은 정치적 효능감을 한국인들과 비슷한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하므로[118] 동화주의자들 중 친서방적인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래 비슷한 역사적 궤도를 함께하며 대부분의 정치·사회·역사인식을 공유하는 미국인과 영국인, 기타 서방국가의 이주민들이 오히려 조선족들보다 충돌의 여지가 적다고 생각한다.[119] 단순히 "민주주의가 좋다"고 말하는 것과 민주주의적인 의식을 갖고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한국인이 북한이 싫다고 한글을 안 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선족이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한국이라는 국가를 분리해서 인식한 뒤에도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가 있어야 진정으로 민주주의에 우호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과 유사한 수준까지 정치적 효능감을 높이기 위한 동화 작업이 필요하다는 논지이다.[120] 중국계 미국인인지 한국계인지 선택해야한다.[121] 어떤 사회나 집단에 속하여 있으면서도 그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겉돌게 됨. 또는 그렇게 함.[122] 다만, 조선족들 뿐만이 아니라 해외 거주중인 한국인들도 한국 회사 특유의 수직적인 사내 분위기를 고되다고 여기기도 한다.[123] 오히려 이때는 미디어에서 "연변에서 온 착한 어린 아내" 이미지가 많이 소비되었었다. 대표적으로 영화 파이란, 댄서의 순정, 국가대표(영화). 영화 퀄리티는 좀 심하게 차이나지만 주글래 살래 같은 작품에서도 비슷한 캐릭터가 나온다.[124] 모티브가 된 인물은 범죄도시위성락이다. 배우 선규 + 위성락[125] 주 무대가 대림동인지라 주연들과 그 주변인물을 제외하면 전부 조선족이다.[126] 조선족인지 탈북한 인민군인지 확실치 않다. 그렇지만 일단 관객들은 조선족으로 받아들이므로 여기에 서술.[127] 조선족 출신의 중국계 탄자니아인으로 등장한다.[128] 이들은 한국 거주 중국인으로 중국에서 흔한 성씨로 설정했기 때문에 화교에 가깝다.[129] 1934~1963년까지는 중국 국적을 가졌고, 1963년~2000년까지는 북한 국적을 가졌다. 이후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130] 국적 규정이 느슨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중국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뛴다.[131] 중국어명: 长征四号乙运载火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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