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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0:11:24

재일 한국-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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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한국어 재일 한국-조선인
재일 한국인
재일 조선인
재일교포
재일동포
일본어 在日韓国・朝鮮人
在日韓国人
在日朝鮮人
在日コリアン[1]
朝鮮籍(조선적)
영어 Koreans in Japan

1. 개요2. 역사3. 규모4. 재일 한국인과 파칭코5. 재일동포 마을 및 코리아타운 목록6. 교포 언론7. 일본인과의 통혼 및 혼혈8. 관련 인식9. 관련 용어/문서
9.1. 양대 단체9.2. 기타 단체9.3. 관련 문서9.4. 유명한 인물 &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
9.4.1. 정치인/법조인/기타 공무원9.4.2. 기업인9.4.3. 작가9.4.4. 학자9.4.5. 배우 & 성우 & 영화인9.4.6. 음악가 & 가수9.4.7. 만화가9.4.8. 스포츠 선수9.4.9. 범죄자 & 야쿠자9.4.10. 기타
9.5. 재일교포였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인물9.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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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재일 한국인-조선인, 즉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 등은 넓은 의미로 보면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모든 한국 국적자 및 그 자손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로는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와 '특별영주자'[2] 자격을 가지고 살고 있는 한국계 거주자[3]만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다시 말해,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일본으로 건너와서 사는 한국인은 그냥 '일본 거주 한국인'[4]이라고 불리며, '재일 한국-조선인'과는 구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5]

한국에서는 재일동포 혹은 재일교포라고 하며, 일본 내에서는 줄여서 재일(자이니치)[6][7]이라고도 부른다.[8] 대한민국 국적[9]을 가지고 있는 재일 한국인조선적(朝鮮籍)[10]을 가지고 있는 재일 조선인의 두 부류가 있다.[11] 본 문서는 좁은 의미의 "재일교포"를 중심으로, "일본 거주 한국인"에 관한 내용까지 통합하여 기술하고 있다.

법적으로 교포의 기준은 해당 국가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다. 그 국가에서 태어난 2세 이하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이주해서 10여년 넘게 체류하여 영주권을 취득하면 재외국민 등록되게 되어있다.[12]

2015년 1월 22일 이전까지는 여권 갱신시 주민등록이 말소되었으나 재외국민 주민등록제도 실시 이후 영주권 취득자, 해외 이주자도 이전처럼 주민등록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 내 선거권이 없다. (특별)영주자도 엄연한 외국 국적이므로 '시민권'의 일부이며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참정권을 갖고 싶으면 귀화하거나, 정 귀화하기 싫다면 그냥 투표권이 없는 외국 국적자로 살든가 국적을 가진 조상의 나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2023년 기준 특별영주자의 국적으로는 대한민국 국적: 270,569명, 조선적[13]: 26,268명, 대만 국적: 1,098명, 중국 국적: 783명, 미국 시민권자: 829명, 구 소련 국적: 8명, 기타: 801명, 그리고 무국적: 85명 등이 있다.
재일 외국인 중에 가장 수가 많았지만 1990년대 이래 들어선 재일 중국인이 더 많다. 2023년 기준으로는 재일 베트남인의 규모에도 추월 당한 상태.[20] 하지만 귀화자까지 합치면 여전히 한국계가 더 많긴 하다. 그리고 귀화자의 경우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일본인으로 살기도 하기에 그 수는 정확히는 예측하게 어려울 정도로 생각보단 많을 것이다. 재일 외국인 참고.


재일 한국인의 역사에 대한 영상.


재일 조선인에 대한 영상.

2. 역사[21]

현대 재일동포[22]의 시작은 대한제국 시기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이 해당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2등 국민 신세가 되지만, 사실 조선인들에게는 병역의 의무가 없어서[23] 일본인보다 사업에 유리하고 외지에서 산다는 끈기가 있어서 조선인을 우대하는 업자도 나와 사업에 성공하는 동포도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일본 본토인부터 자기 일자리를 빼앗겼다는 시기를 받게 된다.

일본에 돈을 벌기 위해 넘어가는 사람도 많았는데, 특히 제주도 출신과 경상도 출신이 가장 많았다. 재일교포(본인 또는 조상들)의 출신 지역 비율을 보면 제주도가 50%, 40%가 경상도, 10%가 나머지 지역일 정도. 실제로 이 두 지방은 일본과 거리가 가까워 역사적으로 교류가 있었고 문화적으로 많이 영향을 주고받은 지역이다. 동남아에 있는 화교들이 그 곳과 가까운 광동성, 푸젠성 출신인 것과 같은 이치다.

오사카이쿠노구 츠루하시역에는 올드커머 계통 일본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있는데, 여기의 백제문 현판에는 경상도 사투리오사카 사투리로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来てえな 見てえな 買うてえな)"라고 써 있을 정도. 부산 자갈치시장에도 똑같은 글귀가 대문에 써 있는데, 영향을 받은 듯 하다. 다른 예를 들면 한국 음식 '전'도 일본에선 서울말 전이 아니라 경상도 방언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표현인 찌짐(チヂミ)으로 더 알려져 있다. 일본어 메뉴에서도 '전(요리)'의 일본어 항목은 찌지미(チヂミ)로 작성되어 있다.#[24]

제주도 출신도 일본에 많이 건너갔는데, 본토에서 경상도 인구가 제주도 인구의 20배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일동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비슷하다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많이 넘어갔다는 말이다. 제주도는 주산업이 농업과 어업으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 따른 실직자가 다수 발생하였고, 당시의 제주도 출신에 대해 멸시하는 분위기가 한반도에 있었기에 결국 제주도에서 발생한 실업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비슷하게 차별받는다면 일자리나 대우면에서 한반도보다 훨씬 큰 시장인 일본본토가 메리트가 있었으므로 일제강점기 초기부터 많은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났다. 경술국치 이후 일단은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로 편입됐기 때문에 그 절차도 다른 외국에 가는 것보다 훨씬 쉬웠고, 특히 1922년 내・외지자유도항제가 실시된 후에는 폭발적으로 일본으로 일하러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났다. 1923년에는 제주오사카를 잇는 직항 배편이 개통하기도 했다. 한때 제주도민 1/4이 일본에 가 있고 오사카 재일교포의 60%가 제주도 출신이었다. 또한 제주가 경제적으로는 열악해도 주로 정치적 이유로 양반등의 지식계급이 귀양을 오는 유배지였던 덕분에 한국에서 문해 수준과 교육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 덕분에 일본 생활에서도 적응에 어려움이 없거나 상당한 지위를 구축하는 사람도 나오게 된다. 지금도 제주 토박이치고 일본에 친척 없는 사람[25]이 드물 정도이고, 거의 모든 동네의 마을회관 앞에는 재일교포 공덕비가 세워진 곳이 많다.

1928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배편의 운영사인 일본 회사가 운임을 기존 8원에서 12원 50전으로 인상하자 오사카 거주 제주인들이 반발해 '우리는 우리 배로' 구호를 내걸고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1930년 11월 임대 선박 '교룡환'을 운항하기 시작했다. 교룡환의 요금이 6원 50전이었기에 일본 선사는 부랴부랴 3원으로 운임을 내렸지만, 제주도 사람들은 두 배가 넘는 돈을 내면서도 우리 배를 이용했다. 이는 1930년 11월 7일자 동아일보에 올라와 있다.

때는 태평양 전쟁. 일본 정부는 조선의 불균형 발전과 공업화의 부진,[26] 인구 증가, 세계 불황, 대량의 실업자 발생, 그로 인한 독립운동의 기운에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만주에서 벌이는 전쟁, 그리고 나중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병역의무가 있었던 자기 국민을 마구 징발해 갔기 때문에 일본 본토는 노동력이 부족한 사태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문제들을 "조선의 실업자에게 일본에 일자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조선인 실업자와, 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는 일본업자들의 서로 이득되는 정책이라 호평이였지만, 싼 노동력의 대량공급은 노동자의 대우를 급격하게 하락시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노동자를 혹대하여 노예 취급하게 된다.

전시 상황에서는 우선 대상인 탄광, 군수공장을 제외한 취업지를 제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를 대량의 조선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은 각 탄광이나 군수공장에서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조치[27]였기 때문에 일본어/한국어에 대한 소통능력의 부족[28], 숙박 인프라의 구축[29]이 따라가주지 못했고, 당시 일본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일본인 우월사상[30]이 동반되어 혹독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다가 건너갔던 사람들의 편지 소식으로 인해 취업지의 열악한 환경이 알려지면서 그나마 자발적으로 돈벌러 가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물론, 일손은 엄청나게 필요했고 할당량은 채워야 됐기 때문에 결국 징용을 실시했다. 당시 강제징용의 형태는 노동력이 필요한 기업의 채용 담당관이 조선에 건너와 인력을 데려가는 형태였다. 그나마 일본에서는 위에서 상술했듯이 고용 사무소가 잘 설치되어서 인력이 금방금방 채워졌지만 조선에서는 고용사무소를 통한 인력수급에는 무리가 있었다. 당연히 채용 담당관들이 전국 각지를 돌면서 채용하게 되었다. 물론 이 사람들이 조선 지리, 사정을 알 리가 없으니 지방 공무원들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 공무원들이 처음에는 구슬리고 위에 나온 택도 없는 법률로 추천하였지만 나중에는 강제로 트럭에 태우는 수법을 이용했다.[31]

참고로 제주도 사람들은 3.1 운동이나 관동대지진으로 취직입국이 제한되어 있던 일본을 거의 자유로이 오고갔다. 얼마나 자유로이 오고갔으면 이런 말이 전해졌다. "긴자의 미츠코시 백화점 스카프가 경성 미츠코시 백화점에 걸리는 것은 1달 뒤, 제주도 소녀의 목에 걸리는 것은 1주일 뒤다."

전쟁 말기에 일본의 패전으로 가면서 일본의 공권력의 약화한 뜸에, 일본 내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대우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거나 조합을 설립하여 일본 업자와 일본 정부에 대항하게 된다. 후에 이 조합들이 이념으로 해산 및 분열되어 민단/총련이 된다.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도 많은 조선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했었는데, 이 때 원자폭탄을 맞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외에도 홋카이도, 사할린등 석탄 다산지에서의 석탄 강제노동으로 끌려간 조선인도 숱하다.[32] 오늘날, 이들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에서 전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33]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여 상당수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34][35] 이미 이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들에 대한 취급이 어땠는지 이를 보아 짐작할 수 있다. 1923년에 일본 열도에 있던 조선인의 수는 8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20년만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광복 직전인 1945년 패전 직전에는 200만에 이른다.
전후 한국으로 귀향하는 재일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은 영상

해방 후 일본에 체류하던 조선인의 상당수는 한반도로 돌아갔지만,[36] 불안한 한반도의 정치 상황과 엔화블록 파괴에 따른 경제 혼란으로 일본에 잔류한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이들은 일자리가 부족했기에, 노동력이 필요했던 한때 일했던 공장과 지역으로 돌아간다. 오사카에 재일동포가 많은 이유는 그 곳에 있는 군수공장이 밀집하고 있었고, 그 곳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일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재일동포 1세대는 이때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북 분단과 6.25 전쟁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일본 내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이념 대립이 발생해 남한을 지지하거나 북한을 지지하는 쪽으로 갈라서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재일교포 양대 단체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과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조총련)가 발족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제주 4.3 사건의 참화를 피하기 위한 제주도 출신의 한국인이 대거 일본에 입항하고[37], 6.25 전쟁의 참화를 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이들도 많았다. 반대로 재일학도의용군이란 이름으로 6.25 전쟁에 참전한 재일교포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재일교포들은 일제시대에 건너간 이들이 물론 더 많으나 사실 4.3사건, 6.25 전쟁 시 이를 피해 열악한 행정망을 뚫고 일본에 건너간 경우도 상당한 것이다.

해방과 전쟁 이후를 거친 뒤로,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온 각종 사회적 차별에 여전히 시달려야 했다. 또한 남북간의 반목이 민단 vs 조총련이라는 형태로 재일교포 사회에서도 나타났었고, 이들은 서로 헐뜯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이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좌절로 돌아갔다.[38] 1960년대~1980년대의 독재시절에는 간첩사건을 찾아다니던 중앙정보부나 보안사에서는 재일교포를 한국인이 아니니 잡아서 고문과 허위 자백을 받아도 별 탈이 없어 간첩 조작을 쉽게 할 수 있는 호구로 봤고 이 때문에 많은 재일교포들이 고초를 겪었는데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을 포함해서 재일교포 간첩 사건만 100건이 넘어갔다.# 사회에서도 한국어도 제대로 못 하니 외국인 특히 일본인 취급받기가 일쑤였다.[39] 북한에선 더 심했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재일 출신 귀환자들을 '재포' 내지는 '째포'라고 낮춰 부른다.

그 와중에, 일본 정부는 패전초기에 비해서 급격하게 늘어난 재일교포와 그에 따른 물자부족, 치안악화, 잦은 민족단체들의 충돌에 따른 테러위험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과 협의하여 자국에 있는 다수의 북한 출신이나 좌익인 재일 조선인을 일본 적십자회의 이름으로 배에 태워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실시한다. 본래 북한은 UN에서 인정하지 않은 비합법적인 국가였으나, 일본 적십자회는 이를 묵인하고 북송을 추진하였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강력히 반발하여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오직 대한민국뿐이며, 따라서 일본에 거주하던 교포의 송환지도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내부의 분쟁들을 하루 빨리 정리하고 싶어했던 미국이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국적 선택은 다른 국가가 참견할 수 없는 권리라고 내세우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주장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북한과 일본(...) 매스컴 모두가 북한을 살기 좋은 유토피아로 묘사하면서 북송을 희망하는 교포들을 재일교포 북송으로 끌어모았다.[40] 허나 실상은 일본에 살던 시절보다 더욱 궁핍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북송한 사람들을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라 치부하며 온갖 차별을 가했다. 이윽고 북한 내부의 비인권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져 나갔는데 정작 국제 적십자회는 이를 쉬쉬했다.[41]

게다가 소문은 처음 북송한 지 몇 년이 지나 처음 흘러나왔으나[42], 일본 적십자회는 무려 1980년대까지 재일교포의 북송을 추진했다.

멋모르고 북한행 배에 탑승했던 9만명의 재일 조선인과 1,800여명의 일본인들의 운명은 [43][44] 비참하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재일 조선인, 특히 조총련계의 반수 이상이 일본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결국, 북한에만 득이 되었고, 일본 내 조총련계 재일 한국인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재일교포 북송을 참고할 것. 다만 이때 북한과 일본이 저지른 일은 나중에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요도호 공중 납치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이들의 약점과 꼬투리를 잡을 구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 내부에서는 조총련빨갱이 공작원, 민단파시스트 깡패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다. 이 항목 초반에도 잠시 나와있듯, 민단의 구성원 중 상당부분이 무직인데다가, 이 항목 끝에 서술되어 있는 재일한국인 중 민단계의 거물 상당수가 실제로 야쿠자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그 야쿠자들이 한국정부로부터 민단 건설 및 교포사회 확립에 대한 공로로 대한민국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45][46]에서 이런 오명을 얻은 흑역사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리고 조총련계는 일본 내 민간인 납치사건과 관련하여 흑역사가 존재하고, 실제로 조총련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비롯한 급진 과격단체와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보니, 시선이 고울래야 고울 수가 없다.

조총련계와 그 가족의 현재 처지를 단적으로 나타낸 비극적인 사례로, 옴진리교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살포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재일조선인 하야시 야스오(林 泰男, 임태남)이 있다. 야스오의 아버지는 북한 출신의 조총련계 비밀공작원이었고, 이미 일본 경찰에게 항상 마크당하는 상태였다. 중학교 때까지 자신이 재일조선인이라는 걸 몰랐던 야스오는 평소 재일한국인들을 멸시해왔으나, 아버지가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걸 알게 되자 지금까지 재일한국인을 멸시해 온 스스로의 위선적인 모습에 충격과 혐오감을 느꼈다. 이후 그는 코카쿠인대학교 전기공학과를 다니던 중[47] 아버지의 죽음을 겪었고, 대학 졸업 후 전 세계를 방황하며 떠돌다 옴진리교 조직에 가입하게 된다.

교단 내에서도 운전사 등 한직에 위치했던 그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고 있었다. 결국 도쿄 사건에 가담하게 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고 남들은 사린가스 용액이 든 봉지 하나만 들고 가는데 3개나 들고 나가서 더 많은 구멍을 뚫었으며, 지하철이 출발하는 타이밍을 잘 잡은 덕분에 그가 탔던 열차 안에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하였다. 이 후 1년여의 도주 생활 동안 가장 위험한 도주범으로 손꼽혔으며, 결국 1996년에 잡혀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후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2018년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GHQ(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전후에 조선인의 귀국을 허락하면서 귀국시 가져갈 수 있는 재산 규모에 제한을 두었고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연합군 최고사령부 측에서 징용된 조선인들의 귀국을 일본 정부에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상당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공장이나 농지 등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에 남아 있다가 이후 발발한 한국 전쟁 등의 여파로 계속 일본에 사는 것을 선택했다.[48]

1952년부터 일본 정부는 '외국인 등록법' 14조를 제정해 모든 외국인에게 지문을 강제 날인토록 했는데, 3년 갱신이 원칙이며 위반 시 1년 이하 징역 및 금고, 벌금 3만 엔을 내도록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외국인에 대한 감시 및 통제수단이라는 지적이 일어 1980년 9월 신주쿠구청에서 교포 1세 한종석이 지문 찍기를 거부했고, 이에 2세들도 동참해 '지문날인 거부운동'을 일으켜 정부에 철폐를 촉구하며 재판도 벌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지문날인 주기를 1982년 5년, 1987년 1회로 각각 완화시키다가 1993년에 완전 폐지했다.

현재 한국에 재정착한 재일교포들은 현재 제주도, 경상도에 주로 살고 있다. 이 후손들은 현재 한국에 동화되었다고 해도 된다. 그리고 한국어하고 일본어 둘 다 유창하게 한다.[49] 그래도 몇몇은 아직도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생만 하기도 한다. 다만 1990년대생 이후의 세대는 그 이전 세대에 비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하다.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 모국 돕기에 앞장서 온 재일한국인의 역사를 초중고 교과서에 실어서 알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

3. 규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Population_of_Koreans_in_Japan.gif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재일 한국-조선인(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뿐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일반 한국인도 포함)의 인구는 한국 426,908명, 조선적 27,214명으로 총 454,122명이라 하며, 이중 일본에 거주하는 일반 한국인이 아닌 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는 300,786명이고, 한국-조선적 국적의 누적 귀화 허가자 수는 379,878명이라 한다. #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식민지배를 거쳐 서서히 늘어나 관동대지진 당시에 8만 명 수준이었다. 1950년대부터 신규 유입이 줄어들고 자연증가하는 만큼 귀화자가 생기면서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다.[50][51]

재일교포도 3~4세대로 가면 일본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가 된다. 이른바 "통명"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이름을 쓰면서 한국어에 서툴고 일본어에 유창하다. 혹은 이 두 언어가 피진화된 '재일어'로 통칭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조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 등의 교육기관을 통해서 "조선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꾸준히 교육받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사카의 이쿠노구는 츠루하시 시장으로 대표되는 일본 최대의 재일교포의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다.[52]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오사카2ch 관서 외 지방의 혐한초딩으로부터 오사카민국[53]이라는 욕을 듣기 일쑤다. 그렇다고 오사카의 한국인들이 순조롭게 정착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도 해방 이후 일본 사회에서 자리매김할 때까지 차별로 인해서 불안하기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관동 쪽의 재일교포가 많은(많았던) 곳은 도쿄도 고토구의 에다가와와, 가나가와현카와사키시이다. 이 2곳은 오사카와 마찬가지로 공장지대라서 조선인 노동자가 많았던 지구였다. 오사카와 달리, 이 2곳은 한국적인 것은 없다. 길게 보면 일제강점기부터, 일반적으로는 해방 전후부터 쭉 살아왔던 오사카와 달리 1964 도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판자촌에 살던 재일교포들을 치안과 경관문제를 이유로 공업지구에 이주시키면서 생긴 곳이다.

당연히 그곳의 치안은 개판이 되었고, 일본 경찰은 그 지구를 포위하는 형식으로 곳곳에 파출소를 설치했다. 깡패마을로 밤마다 폭주족과 야쿠자 및 성범죄가 수두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재개발되어 치안이 급격하게 호전되어 현재는 도심부에 편입되었다.

관동 지역의 한인촌으로 도쿄의 신주쿠구 오오쿠보로 대표되는 히가시신주쿠 일대가 있다.[54] 원래 이 일대는 빈국 출신의 불법체류자 거주지로 유명했다. 가부키초에 가까워 암흑가와도 연결된 우범지대라 땅값이 저렴했다.

이 일대에 한인촌이 형성된 데 2개의 설이 있는데, 롯데의 껌 공장이 이곳에 세워져 재일교포의 고용이 다수 이루어져 노동자거주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있고, 또 다른 설은 이후 70~80년대 일본에 일하러온 불체자 한국인이 그 시초라는 설도 있다. 어느쪽이든 다른 국가 출신 체류자들과 달리 이 일대에서는 재일교포의 네트워크 이용이 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국적에 비해 자리잡기가 유리했다. 그렇게 형성된 코리아타운에, 90년대 후반부터 한일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일본의 한류열풍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 급증하게 되었다. 이렇게 90년대 이후에 일본에서 정착생활을 하기 위해서 건너오는 한국인들은 보통 재일교포 사회에서 뉴커머(New comer)로 불리고 있다.[55]

이 뉴커머들이 오오쿠보에 들어온 초기에는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일본은 쓰레기를 정해진 곳에 투명 비닐봉투를 구매하여 정해진 시간에 버려야 하는데 쓰레기를 아무곳에나 투기하거나 길거리에 버리거나 편의점 쓰레기통에 투기했었다. 담배꽁초를 아무데나 버리고, 한밤 중에 난동을 부려 현지 일본인들과 마찰이 많았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는 한인촌 자체가 축소 되면서 중국인-재중동포(조선족)와 베트남, 네팔, 파키스탄 등의 아시아계 다국적 체류자들이 많다. 할랄 푸드 취급점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이니 아시안타운이라고 해도 될 태세.

한인촌 축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바가지요금이었다. 애초에 일본물가로 봐도 너무 높은 바가지 장사를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일본인도 한류붐과 희소성을 이유로 납득해왔지만, 판매하는 제품이나 서비스, 음식의 질이 가격에 비해 너무 후져, 대다수의 뉴커머 가게는 단골을 만들지 못하고 한인촌=비싸기만 하는 동네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한류가 가라앉고, 그나마 있는 한류팬도 차라리 한국에 가버림과 동시에 혐한바람이 불면서 한인촌에 찾아가는 일본인이 줄어 줄줄이 망했다. 반면 현지화가 이뤄진[56] 일본의 차이나타운이 중일관계악화로 가속된 혐중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되는 결과다.

또다른 뉴커머들이 불러온 부작용으로 한인촌의 단일화가 있다. 뉴커머 업소들은 완전히 일본에 정착하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짧고 굵게 돈을 벌려고 그때 유행을 이용한 업소를 여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일본에서의 1차 한류붐에서는 죄다 삼겹살집을 하고, 2차 한류붐에서는 죄다 막걸리집을, 3차 한류붐에서는 어디가도 치즈닭갈비집인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단일화는 한인촌의 매력 감소와 더불어 다양성이 부족하게 되어, 한류붐이 지나간 후에는 한꺼번에 망하게 되는 부작용을 불러와, 빈 업소에 중국, 인도, 동남아, 중동계들이 창업한 점포가 진출하여 한인촌의 지속적인 감소를 불러왔다.

실제로 1차와 2차 한류붐이 지나가면서 한인촌이 급격하게 축소하여 주변 타국가 업소가 진출하였고, 현재 3차한류 붐에 한국인들이 세운 점포 자체는 늘어났지만, 한인촌의 영역은 예전보다 축소되었고 한인촌 가운데에 대놓고 인도/베트남/터키계들이 창업한 점포가 진출하고, 터키인이 만드는 치즈핫도그집[57], 베트남인이 만드는 치즈닭갈비집등의 한류고객을 노린 외국인 업소도 많이 보이는 실태였는데, 2018년부터의 급격한 한일관계의 악화, 3차 한류붐의 종식[58], 2020년의 코로나 사태로 인한 외식업의 몰락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였지만, 다행이 평균적인 일본 외식업계와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수준의 타격을 받고 버텼다. 1차적 원인으로는 코로나의 여파로 해외여행이 제한되면서, 해외여행기분을 낼수 있는 신오오쿠보와 츠루하시가 재주목되었기 때문이고, 2차적인 원인로는 BTS와 4세대 여아이돌의 흥행, 그리고 오징어게임을 필두로한 한국영화/드라마의 선방이 크게 작용하여, 한류붐이 식기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준 영향이 있다. 추가로 3차 한류붐세대들이 20-30대에 들어서면서 자금력을 가지기 시작하고, 소비력이 있는 고객으로 대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심하기 이르다. BTS를 뒤를 잇는 한국의 남성아이돌의 부재라는 공백을 일본 연예기획사가 한국식 아이돌을 벤치마케팅한 남성 아이돌 그룹을 내보이면서, 파이를 가져오고 있는 중이며, 한류의 주고객인 10대여성을 중심으로 신오오쿠보의 도로건너편에 있는 카부키쵸에서는 호스트와 아이돌을 결합한듯한 남성 지하아이돌 통칭"멘치카(メン地下 멘즈 지하아이돌의 약칭)"이 등장하여, 장래의 한류의 잠정고객을 잠식하고 있는 중이다. 10대여성들을 중심으로 저가로 만나고 이야기 할수 있는 친숙함을 내새운 아이돌로,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콘카페("コンカフェ"컨셉 카페)[59]의 운영법과 결합하여 악질적으로 변하였고, 실질적으로는 호스트와 다름이 없다. 많이 돈을 내면, 얼굴좋은 아이돌과 하룻밤도 보낼수 있기에, 10대 여성들이 스스로 성매매를 하면서까지 돈을 모아 바치는 사회문제로 번지고 있다.[60] 또한 해당 시스템을 도입한 한국인 멘치카[61]까지 등장하여 신오오쿠보의 골목등에서 영업활동 및 극장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하고 있다.

[62] 한류열풍에 편승한 컨셉 카페, 지하아이돌, KPOP바가 증가하면서, 빠르게 호스트거리로 변질되어가는 중이다. 풍속영업법의 규제를 받지않는다는 명목하에 미성년자와 관계를 가지는 정업원이 있는가 하면, 점장이나 오너가 길거리에서 나가서 미성년자를 헌팅하고 다니고 있다.[63] 토요코 키즈문제로 아무리 토요코 키즈들이 타친보(매춘)을 하는 걸 검거해도, 나가자마자 바로 길거리에 서서 손님을 받는 이유가 호스트나 멘치카에게 돈을 갖다 바치기 위해서라는 인터뷰가 나오면서, 큰 사회문제인만큼 상당한 규제가 예상되고 있으며,#기사 이에따라 한인촌의 이미지악화와 규모의 축소가 걱정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뉴커머 업소들은 전통적인 한국 음식점들[64]이 밀려나게 하고, 최신유행 음식만 나오는 곳이 많은 한인촌으로 만들어 버렸다. 유행이 지나면 그 자리를 타국가 출신들이 창업한 점포가 차지하고, 유행이 오면 다 똑같은 업소가 되고를 반복하는 뉴커머 부작용의 연속으로 일본 한인촌 전체가 점점 소멸하는 길로 가고 있다.

뉴커머 업소가 한인촌 축소의 원인이 되는 이유는 지속성이 없어서 이다. 위에서 언급된 유행을 타는 건 관광지인 이상 숙명과 같은 것으로 차이나타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요코하마의 차이나타운도 어딜가도 북경오리, 지파이, 소롱포, 버블티, 탕후루를 파는 가게로 넘쳐나지만, 차이나타운의 업소들은 옛날부터 하던 가게가 유행에 따라 팔리는 요리를 노점 형태등으로 추가하는 형식으로, 원래 가게의 주인과 정체성은 유지되는 반면, 한인촌의 뉴커머의 업소는 n차 한류붐에따라 업소도 다르고 주인장이 매번 다르다. 19세기부터 일본에 온 중국/대만인들로 구정된 차이나타운은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일본에 터를 잡고 버티려고 하지만, 현대에 본국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온 뉴커머의 업소는 장사를 하기위해서 온것이지, 일본에 뼈를 묻으려는 각오를 한 사람은 전무하기에, 장사가 안된다 싶으면 바로 손절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버리고, 다음 한류붐에 또 다른 사람이 와서 유행의 음식으로 장사하기에 유행음식점만 넘쳐나고, 한국음식이라는 원 정체성이 약하기에 유행에 쉽게 휘들리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문제는 관광지화된 요코하마 차이나타운에서도 보여지고 있는 형상으로, 올드커머로 부터 시작된 차이나타운과 달리, 신오쿠보의 한인촌은 태생부터가 뉴커머라서 그 형상이 뚜력하게 나오고 있다.

재일교포들 중에는 이러한 뉴커머를 "'한국인'"이라 부르며 싫어하는 재일교포들도 있다. 뉴커머들에게는 일본에서 사업에 실패하거나 문제를 일으켜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을 할 수 있지만, 재일교포에게는 일본이 삶의 터전이며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에, 일본에 뿌리를 내려 일본사회에 적응하려는 재일교포과 일본에 잠깐 있었다가 가는 한국인의 인식 차이에서 오는 한국인의 경솔한 행동이 일본 내에서의 재일 조선인의 입지를 좁혀버리기에 경계할 수밖에 없다.

또한, 한국에서 온 사람(아주 먼 친척)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한국에 가지도 않았는데 자기를 사칭하는 인간에게 유산을 빼앗기거나, 한국에 가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의 사례가 있다. 특히 심각한 문제로서 재일교포가 자기의 뿌리를 잊지 않도록 세워진 한국학교에, 해외학교에서 3년을 지내면 재외교포로 대학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65] "한국"에서 "한국인 학부모"들이 몰려와 "한국인 교사"와 "한국 교과서"로 "한국어"만 공부시키게 만들어 버려서 정작 재일교포가 제대로 혜택을 못 받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2013년 오사카부 이바라키시에 코리아국제학원이 창설된 계기도 오사카 지역에 조선학교[66]를 대체할 제대로 된 커리큘럼의 한국학교가 없어서였다고. 특례입시생들이 배우는 커리큘럼과, 현지 재일교포 3세들이 배우는 교육 커리큘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조총련계 조선학교나 민단계 한국학교에 다니는 재일교포는 애초에 소수이며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은 일반 일본학교에 다닌다. 이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하고 보통은 자신이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숨기며 다닌다.

4. 재일 한국인과 파칭코

일본에 있는 파칭코 점포, 정확히는 파칭코 기계를 돌리는 파칭코업장[67]의 8할은 한국계가 운영하고 있으며, 파칭코장 체인점 시장점유율 1위의 마루한과 2위의 다이남 모두 한국계 기업이다. 그 8할 중에 5할이 북한계, 3할이 한국계. 북한의 핵실험에 일본 파칭코로 번 돈으로 미사일을 만든다면서 비난여론이 심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실제로 북한계 점포들은 대북송금을 하고 있다. 대표적인 게 규모가 줄긴 했다해도 조총련계의 꾸준한 대북송금이 있다. 물론 공익목적 기부를 한국에 많이 하기도 한다. 연세대학교에는 '한창우 연세과학 발전기금'이 있는데, 이 기금의 주인공이 바로 마루한의 한창우 회장이 있다.[68] 그러나, 파칭코에 돈을 갖다바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이기 때문에 욕해봤자 자기 얼굴에 침뱉기다. 게다가, 일본에서 빠칭코가 성행하게 된 것은 1970년대까지 재일교포들이 일본 국내에서는 매우 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고 일반 기업에서도 채용을 해주지 않는 등, 정상적인 직업으로 먹고 사는게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재일교포들이 일본 사회에서 심하게 차별을 당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영업같은 서비스업이나 다른 일본인들이 꺼리는 건설업같은 3D 직종이나 고리대금업, 유흥업소같은 어둠의 직종으로 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예체능계나 스포츠계로 진로를 정한다면 형편이 나았다. 그 어둠의 직종 중에서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파칭코 사업과 야쿠자였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6년부터 금지됐던 파칭코 업소가 해금되고 해외에서 돌아온 넘쳐나는 전역군인들이 할일이 없어서 술과 도박에 매진하다가, 이전 까지 공을 하나하나 수동으로 발사하던 파칭코를 마사무라 타케이치(正村竹一)라는 인물이 자동으로 공을 연발하는 연발식 파칭코를 발명하면서 일본사회에 대대적인 파칭코붐이 일어난다. 마사무라 타케이치는 자기도 파칭코업을 하고 싶다는 사람에게 자신의 기계나 사업노하우를 적극적으로 전수하였기에 일본 패전으로 본토가 폭격으로 삶의 터가 공터가 되어 버린 일본인은 너도 나도 할 것없이 파칭코 사업에 뛰어 들게 되었다.

이러한 파칭코 열풍과 당시 파칭코 부품의 마모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결과[69], 마을에 있는 소규모 철물공장에서 파칭코 부품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 하였고, 당시에 3D업종이나, 철물공장을 운영/노동을 하는 재일교포에게도 그 엄청난 양의 수주가 계속 들어오면서 "그렇게 돈이 되는건가?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식으로 재일교포들도 파칭코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고, 마사무라 타케이치 또한 재일교포에게도 자신의 파칭코 사업 노하우나 기계를 전수하였고, 일본에서는 파칭코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당시의 파칭코는 순전히 오락기로, 경품으로 당시에는 고가인 담배나 과자를 받을 수 있었는데, 파칭코업이 성행하면서 점차 경품을 현금화하기를 바라는 고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파칭코업장이 현금을 내거나 자신의 경품을 고객으로 부터 현금으로 다시 사는건 도박으로 간주되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이를 우회하는 차원에서 파칭코업소 앞에는 "買人"(바이닌)이라는 파칭코 업소에 나오는 손님에게 경품을 사는 사람들이 나왔다. 불량배나 거지, 장애자, 상이군인, 남편을 잃은 미망인, 야쿠자들이 바이닌을 하는 가운데 재일교포 업소는 재일교포끼리 돕는 차원으로 일이 없는 재일교포 아줌마에게 바이닌을 맡겼었다.

일본 경찰들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파칭코 업소가 실업자를 줄여주고, 자칫하면 폭도화가 될지도 모르는[70] 재일교포들의 일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서 폭도화를 막는 차원으로 일부로 눈감아 왔다. 그러다가 야쿠자의 입김이 강해지고 자신의 세력이 아닌 바이닌들을 내쫏고, 파칭코 업소에게 보호비 및 경품을 과하게 높게 매입하라고 압박하는 행태가 많아지면서, 점차 파칭코라는 업계 자체가 어둠의 직종으로 변질되어갔다. 결국 야쿠자의 자금원으로 변질되어버린 결과, 1954년에 인기였던 연발식 파칭코가 금지되면서 수많은 파칭코 업소와 회사가 사라지게 되는데 당시 일본은 고도성장 시기에 돌입하면서 일본인 업주나 사장들은 일찌감치 업종을 바꾸거나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지만 재일교포들은 그럴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계속 남아서 파칭코 사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또한 이 당시에 일본의 사회적 배경으로는 1954년에 GHQ의 지시하에 이전까지의 중앙집권적인 경찰조직을 각각의 지방마다 쪼개서 민주적인 지방분권적 지방자치체 경찰로 변경되었는데, 이러한 조직의 변모는 기존의 엘리트주의의 중앙경찰에게는 불만이 많는 개편이었다. 1954년, 경찰법이 바뀌면서 경시청(警視庁)가 탄생하는데, 이 때 구성원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악명높은 특별고등경찰을 만든 내무성의 관계자들이였었고, 2대 경시청장관인 이시이 에이조우(石井栄三)는 "일본 같은 민도가 낮은 국가에서 자치체에게 경찰권을 주면 제대로 치안을 지킬수 있겠냐." 라고 지방을 깔보는 발언을 일삼았으며, 나라에서 지방경찰에게 가야할 예산을 도쿄의 경시청이 막아서 혼자 독식함으로서, 일부로 지방경찰이 기능하지 못하게 하는 짓을 해와서,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지방경찰과 경시청의 대립의 씨앗을 뿌려왔었다.

이러한 상황속에 파칭코 업소의 개업 허가는 지방의 서장이 가지고 있기에 지방경찰의 소중한 자금원이기도 했다. 또한 부족한 경찰 인력에 비해, 사회주의 운동과 테러의 확산, 야쿠자의 세력확대에 대처하는 것도 번거로운데, 각종 사회적인 약자들을 받아주면서 사회안정에 이바지하는 파칭코까지 몰락하면, 지방경찰로서는 답답할 노릇였는데, 1961년 오사카부경찰 소속경부였던 미즈시마 넨토구(水島年得)가 고안한 방식으로 파칭고 및 바이닌업계에서 야쿠자를 완전히 배제하는 목적으로, 바이닌이 하고 있는 기능을 지방경찰이 허가한 장애자 및 미망인 협력업체에게 일임함으로서 파칭코에서 야쿠자의 영향력을 없애는 방식, 일명 "오사카 방식(大阪方式)"이 생겨났다.

각 파칭코업자도 야쿠자의 보호비를 낼바에는 공익야쿠자(경찰)가 낫다면서 오사카 방식으로 갈아타기 시작하였고, 이 방식이 전국에 퍼지면서 일명 "삼점방식(三店方式)"로 정착하였고, 1954년의 규제이후, 파칭코의 사행성이 많이 낮아짐에 따라 다시 부활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사카 방식으로 탄생했을때, 도쿄의 경시청이 "그거 도박이니까 금지시켜!" 라고 강제 통보했지만, 파칭코 업계와 지방경찰들이 "경시청 좆까" 라면서 개기다가, 위법도 합법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서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사실, 최근 일본 정부에서 카지노 해금법을 통과시킨 배경에도 일본 도박 사업의 대부분이며, 재일교포들이 중심인 파칭코에 대해 사실상 재편하여 간접적인 제재를 하려는게 아니냐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 법안은 외국인 뿐 아니라 내국인도 출입 가능한 카지노 사업까지 포함하고 있어 카지노가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활성화 되면 현재의 일본 파칭코 사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파칭코 시장 규모와 잠재적인 카지노 시장의 규모가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점 등을 들어(일본 파칭코 사업규모는 약 230조 원, 일본의 초기 카지노 예상 시장규모는 약 10조 원 가량)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어차피 카지노는 대도시에만 있기 때문이다.

5. 재일동포 마을 및 코리아타운 목록

5점 만점 기준. 참고로, 여기 있는 평점은 일본인이 만든 '도쿄 DEEP 안내'라는 사이트의 평점을 인용하였으므로, 일본인(특히 보수 우익)들이 바라보는 관점과 재일 한국인들이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할 것. [71]출처

그 외 지방에서는 오사카츠루하시가 오사카의 한국인 교포 밀집 지역으로 유명하다. 교토에선 히가시쿠조(東九条)와 니시쿠죠(西九条)가 유명하며, 히가시쿠조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동구조가 변형되어 히가시쿠조를 '통쿠'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6. 교포 언론

재일 한국-조선인들 사이에서 자체적으로 발간하는 언론 간행물들은 민단, 총련마다 각각 하나씩 있으며, 신오쿠보에 가보면 무가지가 넘쳐나는 일본의 사정상 한인잡지(월간유학생) 등이 배부되기도 한다. 민단은 민단신문이라는 이름으로, 총련은 조선신보라는 이름으로 각각 남/북교민용 신문지를 발행중이다.

이와는 무관하게 재일 한국인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KNTV라는 방송국이 존재한다. 지상파 방송은 아니고, SM엔터테인먼트 산하 스트림 미디어 코퍼레이션의 비 지상파 위성방송인데 재일 한국인 시청자들을 위해 한국 방송프로그램들을 수입한 다음, 자막을 붙여서 재방영하는게 주요 일과. 처음에는 단순히 한국 방송 프로그램 소개 모둠에 가까운 구성이었으나, 한류붐의 시작 이후 한국 미디어가 궁금한 한류팬들의 수요가 소소하게 생겨서, 한류팬들을 타깃으로 한 프로그램 구성을 추가로 갖추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는 듯.

최근에는 KBS World, 엠넷 재팬도 생기고, 독립방송국, 지방방송국이나 BS, CS 방송국에서 허구헌날 틀어주는 게 한국 드라마라 일본 현지인들도 한류 팬이 되기도 한다. 넷플릭스의 일본 시청자 순위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꾸준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방송사들도 해외전용 유튜브채널로 예능, 드라마를 틀어줘서 교민들도 관심을 갖는 편.

7. 일본인과의 통혼 및 혼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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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출처 : 재일본대한민국 민단

보라색은 한국과 일본이 아닌 외국인과의 결혼, 붉은색은 재일 조선인 남편과 일본인 아내, 연두색일본인 남편과 재일 조선인 아내, 파란색한국인과의 결혼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 30만명 이상이 일본으로 귀화하고 저출산 등으로 젊은 층의 인구가 줄면서 결혼 건수 자체가 감소하고 있다. 어쨌든 통혼으로 한국과 일본의 혈통이 동시에 흐르는 일본인들이 늘고 있다.

여담으로 남자의 혼인 비중보다 여자의 혼인비중이 높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생애 미혼율[92]이 남성이 16%, 여성이 8%인 점을 감안하면 재일 한국인도 일본인의 인구구조를 따라가고 있는 셈[93]이다. 일본 전체로는 여초지만(노년층) 청장년층에선 남초라 그렇기도 하고. 관련기사

8. 관련 인식

근래 들어서서 일본의 단일민족 사상이 조금씩 사라져가면서 비일본인계 인물에 대한 묘사가 대중매체 속에 가끔씩 등장하는 데 반해 '재일 조선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언급을 회피하는 성향이 여전한 편이다. 일본 내에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강하던 시대에는 재일교포 단체에 소속하고 있지 않으면 생활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민단/조총련의 결속력이나 영향력이 강했다. 또한, 일반 취직이 어려웠던 재일교포는 자영업이나, 자기가 사장이 되어 회사를 경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70~80년대의 고도성장기에 들어오면서, 재일교포 사장의 회사에 일본인이 대거 취직하였고, 소규모 회사에는 사장 입김이 강해서, 직접적인 선거권은 없지만, 간접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민단/조총련과의 대립과 잦은 충돌로 재일교포 단체가 과격한 성향이 짙었던 시대에, 재일교포에 대해서 잘못 건드리리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었기 때문에 각종 매체에서는 괜히 건드려서 귀찮게 되는 걸 회피하기 위해서 재일교포에 관한 언급을 금기시하게 되었다. 현재는 재일 교포도 별다른 문제 없이 일반 회사 취직이 가능하며(만약 재일교포임을 구실 삼아 함부로 퇴짜를 놓으면 얄짤없이 소송 걸리고 패소당한다) 재일교포도 일본 사회에 적응하여 단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기에, 거의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이 한국인 단체에 굳이 소속될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이런 추세에 따라 민단/조총련의 영향력이 상실하였고, 과거처럼 과격한 시위를 했다가는 일본 내의 같은 재일교포들의 입지만 좁아지기에 지금은 얌전하게 항의하는 정도로 행동이 순화되어 매체에서도 조심스레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혐한이나 넷 우익들은 자신들의 혐한 사상을 정당화시키려는 수작질의 일환으로 일부러 재일교포와 단순히 한국계 혈통을 타고난 사람들을 뭉뚱그려서 재일 한국인의 숫자는 100만이 넘는다, 일본 국적으로 귀화된 인원을 더하면 재일 한국인이 재일 중국인보다 더 많다는 식의 카더라를 마구잡이로 선동했다. 넷 우익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든 분야에 걸쳐 재일 한국인이 일본언론 매체를 조종한다는 주장을 한다.[94] 또한 자기들과 의견이 맞지 않거나 반발하는 상대방은 몽땅 재일로 몰아간다.[95] 유명한 일화로는 박존파. 공식 집계에서 채 70만도 되지 않는[96] 재일 한국인이 1억 2000만 일본인을 조종한다는 건, 한국에서 채 70만도 안되는 조선족과 재한 중국인이 대한민국을 조종하고 있다는 혐중성 음모론과 거의 동급 수준이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2000년대부터 등장한 신종 넷 우익들이 같은 일본인들한테서도 혐한초딩 소리를 듣는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비슷하게 반한 및 보수 성향을 지닌 5ch에서도 이런 우익들을 돌려서 비꼬고 있다. 하도 재일 타령을 해서 일본 인구 90%는 재일이라는 개드립도 나오고 있다.

넷 우익의 재일교포가 일본을 뒤에서 조종한다는 주장은 과장된 논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일교포의 영향력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일반 회사에 취직이 거의 불가능한 재일교포들이 할수 있는 선택지는 일본인이 꺼리는 분야이나, 국적 상관 없이 종사할 수 있는 분야에 한정되었다.

1. 자기가 회사 차려서 사장이 된다. (경제계/정치계)
2. 야쿠자로 들어가 암흑세계에서 산다. (암흑계)
3. 빡세게 공부해서 변호사/학자/의사가 된다. (정치계/법조계/학계)
4. 스스로 책을 쓰는 작가 또는 잡지를 내서 언론인이 된다. (언론계)
5. 노래나 연기, 스포츠 등으로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가 된다. (연예계)
6. 도둑/사기등의 일반 범죄자가 된다.

뿐인데, 이 중에서 1~5는 경제계/암흑계/정치계/법조계/학계/연예계/언론계 등의 권력에 직결되는 부분이었다.

권력에 관한 부분에 어딜가도 꼭 외국인인 재일교포가 몇명 있으며, 그들이 고위직에 있는 형태는, 정통적인 혈통을 중요시 하는 우파로서는 절대로 달갑지 않은 모습이었고 지문날인거부운동과 지문날인폐지에서 보여준 법조계/학계/언론계/노동계 등의 각종 분야에서 들고 일어나는 모습은 일본 정통 우파로 하여금, 재일교포에 대한 위기감을 가지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2000년대 초에 일본에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이러한 위기감을 적은 정통 우파의 블로그 등을 본 일본 네티즌이, 이제까지 TV나 신문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접한 새로운 정보에 대한 흥분과, 우리나라(일본)가 다른 민족에게 지배당할 수도 있다는 분노로 음모론이 확대 재생산이 지속된 결과다. 애초에 원래 2ch에서는 이미 그러한 우파의 글을 주워들은 뉴비 우익들이, 여러 게시판에 "이게 진실이다! 눈을 떠라 일본인!"이라며 게시판을 도배하는 민폐꾼이라, 혐오대상이며, 일종의 조롱거리이며 밈적인 존재였지만, 기존의 이공계의 능력자나, 어느 정도 내공이 있는 자만이 참가할수 있었던 2ch이, 인터넷의 보급으로 아무나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포교에 내성이 없는 일반인이 먹혀들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넷우익이 탄생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한 넷우익 비즈니스가 시작되었고, 비즈니스화 되면서, 서로 더 자극적으로, 더 선동적으로 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어이없는 음모론으로 파생된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 한국인보다 조총련계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이미지가 훨씬 나쁜 편이다. 일본에서 이 둘에 대한 인식과 대우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로 아예 다른 국적, 인종 취급이다. 물론 혐한 우익에게는 양쪽 다 공격대상이지만[97] 기본적으로 여권과 신분증을 받고 사회에 융화되어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들과 다르게 조선인 학교를 다니고 사상교육을 받는 재일 조선인들은 사회에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98] 다만 한국에서는 재일 조선인이든 재일 한국인이든 전부 재일교포로 뭉쳐서 칭하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사건사고도 한국을 향한 혐오문제로 칭하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재일교포 중에 재일 조선인이란 개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정치적인 문제로도 이어진다. 기본적으로 재일교포들은 투표권이 없지만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인도주의적, 평화주의적 이념을 내세우는 진보정당들은 조총련 계열과 북한 교포들에게 우호적인 편이다. 당연히 보수정당은 그들에 대해 부정적이고 다소 단호한 입장이다. 당장 한국만해도 대북태도에 따라 여론이 천지차이인데 북한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명하고 자국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는 세계의 적으로 인식하는 일본에서 재일교포와의 접점이 없는 일본인들이 그러한 진보정당과 조총련계 재일교포들에 대한 이미지가 나쁜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것이다.

일본에선 의료보험과 여권 등의 처우 개선을 바라면 조총련계를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하라고 재일 조선인들을 종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한국국적 취득이 불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99][100] 정대세 같은 케이스와 같이, 김일성을 찬양하고 본인들의 뿌리가 북한이라고 굳게 믿는 별종도 적지 않게 있어서 그러한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조총련계로 남는 사람도 종종 있다.[101] 게다가 재일 한국인이지만 귀화하여 일본 국적을 취득하는 사람들은 매국노라 할 정도로 이미지가 나쁜데 당장 추성훈만 해도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재일 한국인이라 일본 국가대표도, 한국 국가대표도 되지 못해 귀화를 했더니 매국노라면서 지탄을 받은 경우가 있다.

2010년대 이후 한국이 미디어에 묘사되는 경우가 조금씩 늘고 있는데,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재일교포들은 주로 남한계인 재일한국인이 많다. 재일조선인이 묘사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소수로, 차별 문제 등을 다룬 현실고발성 작품에서 주로 등장한다. 반대로 일본에서 묘사되는 재일교포의 대부분은 북한계가 많다. 이유는 영화/미디어계가 좌익운동을 하던 인간이었고, 조선학교의 교복 같은 기호와, 북송문제라는 생이별이라는 극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어서 쓰기 편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9. 관련 용어/문서

9.1. 양대 단체

9.2. 기타 단체

9.3. 관련 문서

9.4. 유명한 인물 &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

9.4.1. 정치인/법조인/기타 공무원

9.4.2. 기업인

9.4.3. 작가

9.4.4. 학자

9.4.5. 배우 & 성우 & 영화인

9.4.6. 음악가 & 가수

9.4.7. 만화가

9.4.8. 스포츠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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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9.4.9. 범죄자 & 야쿠자

9.4.10. 기타

9.5. 재일교포였다가 일본으로 귀화한 인물

9.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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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일 코리안. 남북관계를 고려하여 한국, 조선 대신 Korean을 그대로 음역하여 사용함으로써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할 때 사용한다.[2] 일본 정부에서 이들에게 부여한 일종의 영주권 자격이자 비자의 일종이라고 보면 된다. 즉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일본에서는 외국 국적의 외국인이다. 다만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일반적인 영주자격과는 달리 취급되며, 실제로도 일본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일단 일본 입국시, 다른 중장기재류자와 달리 일본인과 특별영주자는 같은 입국심사대 이용이 가능하며, 또한 입국관리국에서 발행하는 재류카드와는 달리 특별영주자증명서의 경우 주민표상 주소지의 구(시)역소에서 발급한다.[3] 원래 특별영주자 자격은 한국 독립 이전에 일본으로 이주한 조선인들과 그 자손들만이 대상이었으나, 독립 이후 제주 4.3 사건6.25 전쟁을 피해서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들도 혼란을 틈타(...) 특별영주자 자격을 취득한 경우가 많다. 이 두 집단을 가르켜 보통 '올드커머'라고 한다.[4] 후술하듯이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보통 '뉴커머'라고 불린다.[5] 일본 거주 한국인을 한자로 표기하면 결국 '재일 한국인'이 되기에 말장난인 것 같지만 국교정상화 이전부터 있던 집단과 이후 집단을 구분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표기하는 것이다. 일본 방송에서도 특별영주자 자격을 가진 사람을 지칭할 때만 앞에 '재일'을 붙이며 그 외에는 일본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한국인 000씨', '한국 국적인 000씨'와 같이 표기한다.[6] 在日(ざいにち)[7] 엄밀히 말하면 '재일 한국인/재일 조선인'이라고 해야 하고, 재일이라고 줄이면 '일본에 있는'이라는 의미만 남는다. 하지만 일본 내 재일 한국-조선인의 규모 및 역사 등의 이유로 단지 '자이니치'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이들을 의미하게 된 것. 그리고 재일(자이니치)라는 표현에는 과 같은 노골적 멸칭만큼는 아니더라도 엄연히 차별적인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때문에 웹상, 특히 우익 성향이 강한 5ch이나 야후! 재팬 등지에서는 자이니치라 부르면서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다만 공식적 명칭인 '재일 한국인/재일 조선인'이라고 정확히 호칭할 경우 부정적인 뉘앙스가 없는 중립적인 표현이 되기 때문에 방송 등의 공적인 자리에서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8] 여담으로, 일본어에도 한잣말 동포(同胞, 하라카라)라는 단어가 존재하는데, 기본적으로는 한자 그대로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의미이지만 사어(死語)에 가깝다. 오히려 오늘날 동포(도-호-)라는 표현은 재일 한국-조선인끼리 서로를 인지하는 낱말로 쓰이고 있다.[9] 넓게 보면 북한 국적까지 포함된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들을 재일 한국-조선인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전 국적을 포기하고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경우이므로 한국계 혹은 조선계 일본인이지, 재일 한국-조선인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귀화한 한국인이나 일본 국적을 가진 한국계 일본인들은 그냥 일본인으로 간주하지, 재일 조선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10] 사실상 무국적이며 필요시 북한 여권을 조총련에서 발급받기도 한다. 일본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 국적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 주의할 점은, 재일 조선인은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이전에 일본 정부가 한반도 출신인 사람과 그 후손인 사람들에게 부여한 특별영주자 신분이므로 '재일 조선인=북한 사람' 이라고 구분 짓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다.[11] 드물지만 미국 시민권 등 제3국의 국적을 취득한 상태에서 특별영주자 자격으로 일본에 체류하는 재일동포도 소수 있다고 한다. 특별영주자 자격에 국적 제한은 없기 때문. 다만 보통 이런 경우는 특별영주자 부모로부터 미국에서 출생하여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자녀가 미국 국적을 선택한 상태에서 일본으로 귀국한 경우가 대부분이다.[12] 다만 등록하지 않아도 불이익은 없다.[13] 구 조선호적 등재자를 의미하며 사실상 무국적이나 마찬가지이지만 실제 무국적자는 따로 분류한다.[14] 이들은 모종의 이유로 인해 타 지역 화교들과 달리 대만 국적을 받을 수 없었고, 일중수교 이후 중국 국적을 받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무국적이 되었다.[15] 한반도 출신에게는 대한민국 국적 또는 조선적이, 대만 섬 출신에게는 대만 국적이, 남양 군도 출신에게는 미국 국적이 부여되었기에 무국적은 아니다.[16]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는 사실은 일본인일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17] 혹은 누가 봐도 해당일 이전에 출생하였다는 것이 너무나도 명백한 경우.[18] 예를 들면 사우디아라비아라든지(...)[19] 사실 이런 경우마저도 어쨋든 일본 체류자격을 부여하고 일본에 입국시키려면 여권이 있어야 하니 실무적으로는 국적을 부여해 줄 가능성이 높다.[20] 같은 해 조사자료 기준, 재일 한국-조선인의 규모는 일본 전체 인구에서 처음으로 1% 미만이 되었다.[21] 재일 1세들의 증언을 모아 재일 3세 사진작가가 쓴 책인 '재일 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을 참조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22] 삼국시대 때 넘어간 도래인이나 임진왜란 때 납치된 도공의 후손 등도 있지만 대부분 흔적도 없이 일본인에 동화되었거나 일부 집안의 족보상의 이야기로나 남았고, 이들은 재일 한국인의 범주에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임성태자, 이삼평, 도고 시게노리 등이 이에 해당한다.[23] 조선반도의 조선인까지 징병한 것은 일제의 패전이 가까워진 1944년 9월부터 7개월간으로 징병 병사가 실전에 투입되기도 전에 일본은 패망하였다. 그 전에는 일본인만 징병하고 조선인은 모병제로 조선인 병사를 모집하였다. 이유는 일본어 보급이 낮아서 지휘명령에 어려움이 있기도 하고, 일본군의 명령에 고분고분하게 따라준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24] 90년대이전 까지만 해도 전(요리)를 일본에서는 한국식/조선식 오코노미야키라고 불리다가, 찌지미로 정착했으며, 먼저 외래용어 개념을 선전한 결과, 일본의 중화식당의 일본어 메뉴판에 전에 해당하는 병(요리)가 "チヂミ"또는 중화식 찌지미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화교나 중국음식점도 대다수 손님에게 설명하는게 번거로워서, 그냥 찌지미를 사용하고 있다. (해외에서 두부를 먼저 외래용어를 선점한 "토후"라고 정착된 것과 동일한 상태)[25] 그 몇 안되는 일본에 친척 없는 제주 토박이라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완전 토박이는 아니고 6.25 전쟁 당시 육지에서 넘어온 피난민의 후손이 대부분이다.[26] 만주 진출을 의한 중간기지로,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해서 만주에 공급해 왔다.[27] 애초에 국민들에게는 승전보만 전달되고 있어서 일본이 진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28] 직원 교육이 수월하게 이뤄지지 않았다.[29] 일본인들은 자택에서 출근하면 됐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은 공장이나 탄광쪽에서 자비로 숙박장소를 구해야했다. 그러나 빠듯한 자금사정에 전시상황이라 제대로 된 숙박장소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그 와중에 나라에서는 자국민을 계속 징발해가고, 징발된 일본인 숙달노동자를 머리수로 대체하기 위해 조선인들을 수용한계를 넘어설 정도로 받아들이게 된다.[30] 일본이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으니 우리 일본인들은 우월하다. = 다른 아시아인들은 미개하다.[31] 의외인 것이 당시 징용자들의 가족 대상으로 고용사무소에서 배급품 우선 지급권 등의 혜택을 명시해 놓은 법안이 전쟁 도중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고용 사무소가 일본에는 각 현마다 적어도 2~3개, 많으면 5~6군데 있었지만 조선에는 팔도 전체에 딸랑 2곳이었다. 당연히 가족에 대한 지원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다.[32] 이에 대해서는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후반부에 제법 묘사되어 있다. 홋카이도답게 아이누 촌락도 나온다.[33] 다만 한국 정부의 경우만 서술하자면 노무현 정부시절에 설치된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구체적인 조사에 나선 바 있다. 각종 구술자료집과 자료들을 PDF로 배포한다.[34] 요시노 사쿠조의 <<압박과 학살>>에는 2534명, 김승학의 <<한국독립연구서>>에는 6,066명,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로는 200명 대[35] 관동대학살은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뿐만 아닌 류큐인, 부라쿠민, 화교인, 일본에 거주하던 중국인, 심지어 좌파운동가/아나키스트 일본인(대표적으로 오오스기 사카에)들도 희생당했다.[36]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몇 살배기 시절에 일본에서 일하던 노동자 부모가 한반도(포항)로 돌아간 경우였다.[37] 제주 4.3 사건에서 군정경찰 및 서북청년단 등의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지역(주로 오사카)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다. 애당초 일제식민지 당시 제주도 출신 중 1/4이 일본으로 건너가 살아서, 거기 정착했거나 혹은 제주도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다 제주 4.3 사건이 발생하여 대규모 학살이 있자, 그것을 한국을 피해 연고가 있는 일본으로 피난한 것이다.[38] 한민통 등의 단체가 줄기차게 동포사회의 통합을 추진했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도 지원하는 등 여러가지로 노력했으나 한쪽에서는 용공이라고 까이고 한쪽에서는 반동이라고 까였다. 단, 한민통 자체는 한국의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단체이다.[39] 그중 일부는 1980년에 한국어를 제대로 못해서 그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에 끌려가기도 했다.[40] 당시 궁핍하던 재일 조선인에게는 자신들을 버리다시피 하고 아무런 지원도 하지않는 대한민국 보다는, 조총련을 통한 재일 조선인들의 생활지원, 노조/법정 지원, 민족 교육 지원, 김장 담그기 등의 문화 유지 지원, 북한의 프로파간다 영화이지만, 당시로서는 유일한 낙인 북한 선전 영화의 상영인 오락 지원등의 각종 지원을 해주기에 한국쪽 사람들도 민족 교육받으로 조선학교에 가던 시대라, 당연히 북한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으며, 일본 좌익세력들도 동반해서 북한은 낙원이라는 보증을 해주는 상황이였다. 사실 70, 80년대까지만 해도 실제로 북한은 지금의 막장테크에 비하면 상당히 정상적인 국가였고 그때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기는 했다.[41] 한 마디로 국제협회가 한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수많은 민간인들을 속여 악랄한 북한에 보냈다는 것이다. 안타깝지만 당시 한국은 국제적 발언력이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그 땐 북한보다 국력이 약하고 힘이 없는 국가였다.[42] 북한에 간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 적이 없었다. 편지로 가족들간의 안위를 물을 수 있었는데 심한 검열 속에서도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편지들이 일본에 전해졌다. 북송된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탈북하여 일본으로 돌아왔을 뿐이다. 그것도 1990년대에 말이다.[43] 당시 북한행 배에 몸을 실은 교포들 대부분은 북한을 엄청나게 선진화된 사회, 복지국가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1970년대 중반까지는 소련 지원에 의해 남한보다 북한 경제사정이 더 나은 편이긴 했지만, 그래봐야 그 시절 훨씬 선진국이었던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그나마 북한의 나았던 경제사정도 이후 상황은 역전되었으며 거기에 남한사회가 민주화되는데, 북한은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44] 강철환의 수필 <수용소의 노래>에서 작가의 조부모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이민을 가 그 곳에서 자수성가한 분이라고 한다. 그런데 저 시기 북한행 배를 타고 평양에서 정착하다 어느 날 작가의 어머니의 밀고로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요덕수용소에 끌려갔다고 한다. 이 때 당시 많은 조총련계 재일 조선인이 이러한 이유로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45] 박정희전두환 정부는 일본 내에서 조총련의 활동을 견제하기 위해 민단을 지원했다. 하지만 조총련처럼 학교를 세운다거나 하는 식의 지원이 아니고 그냥 민단이라는 단체에만 지원했다. 재일동포를 위한 지원이 아니라 북한세력 견제라는 정치적 목적만을 가진 이 지원은 남북한을 각각 지지하는 재일동포사회에 반목만 심어주게 되었다. 현실적으로는 그 지원이라는게 평범한 재일동포에게까지 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특히 올드커머 사이에서 한국 정부의 신뢰도는 바닥을 쳤었다. 사실 북한이 조총련계긴 하지만 재일동포에 들인 공에 비하면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에게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었다.[46] 이 과정에서 한국은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요원을 비밀리에 보내어 민단직원으로 등용시켜서 대한민국산하기관으로 만들려고 하고, 민단은 독립성을 지키기위해서 안기부요원을 색출해내는 첩보전이 적지않게 있었다. 당시 북한에 대한 정보는 북한으로 간 재일교포들과 연결된 북한계 재일교포단체인 조총련이였으며, 조총련은 북한 첩보전에도 협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단과 조총련은 서로 요원을 보내, 도청과 미행하여 기밀정보를 빼돌리는 등의 첩보전을 해왔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얻기위해서 민단에 대한 한일첩보기관의 요원이 접촉하려는 움직임이 잦았다. 현재는 조총련 자체의 영향력의 저하와 더불어, 일본정부의 감시태세강화, 북한에서의 조총련의 중요성 하락에 따라 민단에서 얻을수 있는 정보의 중요성도 떨어지면서 이러한 첩보전은 서로 상대를 도청하는 정도로 되었다.[47] 학부생 자격으로 인공지능 연구에 참여했다. 이 사람이 학생이던 당시 일본 통상산업성에서는 '제5세대 컴퓨터' 개발에 국가적 예산을 투입해가면서 인공지능 연구를 지원하고 있었으며, 야스오도 이를 의식해서 전공을 선택했던 듯하다. 참고로 당시에는 규칙기반(rule-based) 자연어 알고리즘이 대세였으며, 여기에 지식기반(knowledge-based) 시스템이 여럿 개발되고, 논문은 발표되었는데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던 오차 역전파(back propagation) 알고리즘이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했으며, RNN(recurrent neural network)이 1982년 발표되는 등 여러 성과로 인해 제1차 AI 겨울에 막 해빙기가 오고 있던 때였다.[48] 지금 일본인들 중에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나 조선 사람이었다는 경우는, 대부분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 노동자가 일본인 아내를 들여 한일 혼혈로 태어난 케이스다.[49] 그 이전 세대는 한국어의 어려움 때문에 피진인 재일어를 구사했다.[50] 파란 그래프는 일본에 거주하는 모든 조선인/한국인을 나타내며, 빨강 그래프는 일본의 "특별영주자"의 수이며 진정한 재일교포의 수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일본 거주 한국인"은 재일교포과는 다른 종족이라 할 만큼 다르다.[51] 특별영주자는 일본이 패전후 일본에 거주하는 한때 지배하던 대만/한반도 출신에 한하여 일본인과 거의 동등한 사회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재류자격인 특별영주권을 가진 자를 말한다. 또한 특별영주자의 아이도 특별영주권을 취득 가능하며 특별한 문제나 전과가 없다면 귀화에도 유리하게 작용된다.[52] 2011년 9월 8일에 방영된 KBS 특집 '쯔루하시 사람들'이 참고가 될 것이다.[53] 대판민국, 大阪民國, 공교롭게도 대한민국과 한자랑 발음이 비슷하다. 이 점에서 착안하여 아예 大阪을 음독으로 읽어서 '다이한민코쿠'(ダイハンミンコク)라고 읽는다.[54] 전후 롯데의 껌 공장이 이곳에 세워졌고, 일본 롯데의 본사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55] 참고로 이러한 뉴커머들이 모여서 세운 단체가 있는데 이것이 재일본한국인연합회다.[56] 무려 19세기부터다.[57] 신오오쿠보에서 장사가 잘돼서그런지, 최근에는 일본 케밥업계는 한국식 핫도그도 같이 파는 게 관습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있다.아키하바라, 타카다노바바, 키치조우지,하라주쿠, 푸드트럭1, 푸드트럭1[58] 붐이 지나 생활화되어, 예전과 같은 집객력이 많이 상실되었다.[59] 메이드 카페등의 특정 컨셉이나 설정을 기반한 음식점 손님과 종업원이 1대1로 상대하면 호스트나 캬바쿠라같은 업종이 되어 풍속영업법의 제한이 걸리지만, 손님과 1대1로 상대하지 않는다는 편법으로 법을 우회하여 "음식점", "바"라는 명목으로 운영되고 있다.[60] 관련 뉴스기사[61] 한국 아이돌 기획사에서 탈락한 부류[62] 2023년 10월상황[63] 한인 상인회에 미가입이거나, 상인회의 요청에 불응하고, 역으로 상인회를 겁박하는 등, 막나가고 있다.[64] 실제로 일본 내에서 오래 영업한 한국음식점을 가보면 정석적이고 전통적인 한국 요리를 판매하면서, 약간 맛이 현지화된 곳이 많다.[65] 실제로 외국어고등학교 고3 교실에서도 국제화전형 등의 입시, 출석 형평성 등으로 인해 이에 대한 불만이 상당한 상황이다.[66] 조선학교의 경우 설립주체가 설립주체라 사상교육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도 있는 모양.[67] 보통 파칭코 기기 자체나, 기기에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는 산쿄유니버설 엔터테인먼트같은 순혈 일본쪽 소프트웨어 회사가 생산한다. 그중에서는 알만한 게임회사가 직간접적으로 파친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든가, 다른 회사의 명의로 전개하는 경우도 있다.[68] 그리고 성균관대학교에 가보면 도상용 강의실이 있는데, 산노미야역 근처에서 파칭코를 경영하는 미야코상사 도상용 회장이 기부한 강의실이다.[69] 철구를 연발로 위에 날려서 못에 내리꼿기에 금방 못이 휜다.[70] 당시에 재일교포가 폭도화하여 몇몇 공장등은 점거하는 등의 문제가 있었다.[71] 참고로 해당 사이트의 몇몇 게시물을 읽어보면 사이트 운영자의 정치 성향은 보수 우익에 가까운 것으로 추측된다. 예시 재일 한국인을 비롯한 이민자들이나 한국에 대한 시선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72] 원래 이곳은 예로부터 저렴한 숙박 시설이 집중해 있었으며, 주로 일용직 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곳이 코리아타운화 된 것은 일본 패전 후에 이곳에 재일교포 기업인 롯데의 공장이 들어서면서 공장 노동자로서 재일교포가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에서부터 일본으로 돈을 벌기 위해 넘어온 불법체류자를 포함한 뉴커머들을 재일교포 업소와 기업들이 받아들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점차 뉴커머에 침식당하면서 올드커머가 쫓겨나면서 급격하게 한국화된 코리아타운이 탄생하게 되었다. 거기에 바로 옆이 일본 최대 유흥가인 가부키초이기에 한국에서 건너온 화류계 여성들이 직장 바로 옆인 이곳에 숙소를 잡고 정착하게 되며 오늘날의 술집과 한국요리집이 밀집된 한국식 유흥가 신오쿠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곳에 한국인 학부모를 위한 한국어로 한국 대학의 특례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도 생길 정도로 심하게 한국화된 지역이다.[73] 신오쿠보는 현재도 신주쿠구라고는 믿기 어려운 저렴한 집값으로 많은 이민자들이 정착하는 곳이다. 반면, 동네 자체가 후줄근한 면모가 있어서 어느 정도 자리잡으면 떠나고 싶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현재는 돈을 모은 재일교포는 많이 떠나고, 그 빈자리를 남아시아계가 채우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코리아타운과 여러 모로 비슷한 상황.[74] 이곳에는 여러 나라들의 대사관이 모이고 있는 지역인데, 한국 대사관과 민단본부가 있는 관계로 한국인도 많이 생활하는 지역이다. 게다가 미나토구가 도쿄 제일의 부촌이라 기본적인 치안이 뒷받침되어 준다.[75] 원래 이곳은 구 일본군 군사 시설이 밀집해 있었던 곳으로 도쿄 대공습 이후 완전히 폐허로 변하였다. 폐허가 된 그 곳에 자리잡기 시작한 재일교포들로 인하여 재건이 시작되었고, 이곳에서 역도산과 같은 신흥 일본 재일교포 사업가를 많이 배출하면서 재일교포 경제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현재는 한국 기업의 일본 지사가 다수 위치하고, 역시 신오쿠보와 마찬가지로 아카사카의 고급 클럽 등에서 일하는 화류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뉴커머에게 잠식되었다. 아카사카에 숙소를 잡으면 한국인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또한 이러한 경위로 이곳을 야쿠자와 한국인밖에 없다고 해서 "얏칸(한국인을 일본어로 칸코쿠진이라고 한다.)"이라 불리기도 한다.[76] 간토에서 가장 오래된 재일교포 마을이다. 옛부터 소규모 공장이 밀집해있던 지역으로 제주도 출신의 재일교포가 가장 많다.[77] 이곳은 원래 아메야요코초 인근에 있었던 암시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그곳에 있던 재일교포들을 이곳으로 이주시키면서 생긴 마을이다. 이러한 경위로 좁은 면적에 비해 높은 밀집도를 자랑한다. 한국인이 많다는 의미로 "키무치요코쵸"(김치 거리)라고도 불린다.[78] 히가시우에노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하는 마을이지만 이곳은 홍등가이다. 전통적인 홍등가인 요시와라가 있던 지역으로 역시 여기서 일하던 한국인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코리안타운. 다만 유흥의 중심지가 가부키쵸, 신오쿠보, 아카사카로 옮겨간 이후로는 젊은 사람의 유입이 잘 없어 대부분 젊었을 적 화류계 일을 했다가 정착한 마마상들이 많다. 새로 유입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사실 지금도 코리안타운이라기보다는 과거 코리안타운이었다는 말이 적절한 낙후된 동네.[79] 전후 혼란기에 재일교포가 눌러 살면서 판자촌과 술집을 열면서 성립된 마을이다. 한때는 조총련 사무소도 있었지만 공터가 되었으며, 현재 관광객도 주민도 다가가지 않는 쇠퇴한 마을이다.[80] 일본 영화인 "박치기 Love & Peace"의 무대가 된 장소로, 이곳은 간토 대지진이 발생 후, 지진 피해로 발생한 잔해 처리를 위해서 매립하면서 생긴 지역으로 그 후 공장이 들어서면서 대표적인 환경오염 지역이 된다. 이곳에 재일교포가 들어서게 된 계기는 바로 맞은편에 있는 시오하마에 전후부터 재일교포들이 판자촌을 형성하면서 급격한 슬럼화가 진행되었는데, 1964년 도쿄 올림픽 유치로 인하여 경관상/치안상 문제가 있었던 시오하마에 있었던 판자촌을 철거하고, 다리 건너 맞은편에 있는 에다가와에 이주시키면서 형성되었다. 그러한 경위로 이곳은 일본화되어서 그냥 일본 지방 시골 도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한국적인 문화를 느낄수 있는 건 굉장히 적으며, 한국계 가게와 불고기 집이 몇 개 있는 정도다. 바로 옆인 토요스 및 아리아케를 포함한 오다이바 일대가 급격하게 개발되면서 중국인의 대거 진출하여 되려 중국 요리집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있다.[81] 원래부터 외국인, 특히 동남아계가 많았던 지역이라 외국인 술집과 야쿠자가 활보하는 거리였으며 대다수의 뉴커머가 이런 곳에서부터 자리잡는 것처럼 이곳도 뉴커머의 한국인 음식점부터 시작되었다. 혈기왕성한 야쿠자와 육식 문화인 외국인들을 상대로 형성되었지만, 지금은 가까운 코이와에 한국인이 몰리면서 한국인의 밀도가 낮아지면서 다문화 지역의 일부가 되었다.[82] 이곳도 킨시쵸와 같은 다문화 마을이지만 최근 뉴커머들이 대거 들어서면서 코리아타운을 형성히기 시작하고 있다.[83] 토지개발에서 버려진 지구에, 한때 암시장이 있었던 복잡한 골목길에 자리잡은 재일교포가 소소 하게 남아 거주하고 있다.[84] 조선학교도 있는 올드커머의 지역이었지만 이케부쿠로에서 중국인의 생활 문화가 많이 들어오고 있는 지역이고, 한때 있었던 재일교포의 슬럼가도 현재진행형으로 철거되고 주택가로 변해가고 있다.[85] 토지 개발에서 버려진 지구에 있는 소규모 판자촌으로, 반쯤 바다 위에 세워진 집이나 다른 집을 뚫고 통하는 등의 괴상한 형태로 만들어진 집을 볼 수 있다. 바로 가까이에 도살장이 있는 관계로 호르몬을 취급하는 고기집이 많다. 현재는 깔끔하게 밀린 상태.[86] 이곳은 소규모 공장이 전쟁 전부터 많았던 지역으로 거기에 근무하는 조선인 노동자가 많이 생활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또한 아라카와(강)의 방수로 건설에도 조선인 노동자도 투입된 관계(주의: 강제 징용 이전인 1924년이기에 강제 징용과 연관 짓지 말 것.)로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올드커머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조총련이 운영하는 병원이 이곳에 있다.[87] 이곳에는 일본 근대화로 인하여 공업 지구가 형성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조선인 노동자가 넘어오게 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특히 "오오힌"지구라는 이름은 근무하던 조선인들이 오오시마/사쿠라모토/하마쵸우의 세 지구를오오힌지구라고 불렀던 것이 그대로 행정지구명으로 된 것이다. 현재는 역부터 먼 관계로 크게 쇠퇴하고 있지만 규모와 역사는 관동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수준이다.[88] 이곳에는 전쟁 이전부터 자갈 채집 작업에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근무했었던 지역으로 전후에 하천 부지를 불법 점거하면서 만들어진 슬럼가였다. 불법 점거이기에 인프라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가와사키역 주변이 신흥 주택가로 재개발되면서 역에 가까운 관계로 이 지역도 급속도로 재개발이 이루어져 완전히 철거되어 소멸되었다. 일부 남은 옛 공장과 폐허만이 그 흔적을 느낄 수 있다.[89] 공장 노동자가 살던 마을이었으며, 한식당이 많지만, 이외에는 평범한 일본 마을이다.[90] 전쟁 전부터 이곳에 있던 주물산업의 공장에 근무하는 조선인 노동자가 살면서 형성된 지역으로 현재는 관동에서도 유명한 홍등가이자 최근에 뜨는 중국 본토 요리의 메카이기도 하다. 중국 본토 요리가 유명하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땅값이 저렴해 현재는 중국인을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몰리면서 다국적 도시로 변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한글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워킹홀리데이로 온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둥지를 많이 트는 편.[91] 지역 이름이 "번창하는 마을"인 것처럼 이곳은 원래 치바현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치바시가 일본 유수의 군사 도시였던 관계로 집중적으로 공습을 받아 말 그대로 삭제당하는데, 전후 혼란기에 공백이 된 자리에 재일교포가 들어서면서 형성되었다. 시내 중심지를 재일교포가 점거하자 그대로 방치되어 홍등가로 변모하였고, 국철의 압박으로 케이세이 치바선이 이설되고 치바현청이 혼치바역 인근으로 옮겨가며 사카에는 쇠퇴하게 되었다.[92] 50세까지 결혼을 하지 않음.[93] 이는 다른 집단이 같은 국가 내에서 결혼에 대한 관점이 크게 차이나지 않는 이상 어디서나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내의 화교도 한국인들의 인구 현상을 따라간다.[94] 실제로 이들이 쓰는 은어 중 재일메이슨(在日メイソン), 즉 재일 프리메이슨이라는 신조어가 있다.[95] 여기에는 일본인, 외국인, 같은 넷 우익도 포함된다.[96]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특별영주권을 가진 재일교포는 300,789명이고, 한국-조선적 국적의 누적 귀화 허가자 수는 379,878명이라 한다. #[97] 나이가 많은 노년층 일수록 이런 인식이 심하다. 전쟁 전후 세대거나 한국의 해방 직후 태어난 사람들 중엔 아직도 한국을 조선이라 생각하며 북한과 구분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98] 조선학교 출신 재일 조선인을 바라보는 대다수 일본인의 시각은 유럽 백인 원주민들이 현지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샤리아 도입을 요구하는 무슬림 이민자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하다.[99] 일본의 원래 재일교포사회에서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조총련인데, 재일교포 북송으로 스스로 세력을 약화시키고, 70-80년대에 들어가면서 일본이 경제성장을 하면서 재일교포들도 경제적으로 성공하는 부유층이 등장하는데, 북한의 지령에 따라 조총련이 부유층에 대한 수금을 강화한 탓에 돈많은 재일교포들이 민단으로 점차 갈아타버렸고, 게다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투자 기회로 본 부유층이 경제활동에 유리한 조총련을 버리고 한국적을 선택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조총련에 남은 재일교포는 경제적 빈곤층 및 장애나 고령자등의 소외계급들이 주류가 되었고, 자립이 불가능하거나, 문제가 있어서 조총련과 일본 좌파정치인/운동가의 지원으로 일본정부에서 주는 생활보호금(기초수급)으로 겨우겨우 연명하고 있다. 한국적을 취득하려면 한국인이었다는 서류가 필요한데, 70-80년대는 민단도 한국정부도 조총련의 세력약화에 집중하고 있어서, 돈만 주면 가능했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서 사전에 스스로 한국인이었다는 서류를 준비해야하는데,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벅찬 이들에게는 낼수도 없는 금액이 필요하는데, 준비했다고 한들 결격사유로 통과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100] (흔하지는 않지만) 특히 북한 지역에 본적을 둔 재일들의 경우 굉장히 난감해졌는데, 북한이 정부 수립 직후 호적 제도 자체를 폐지해 버리면서 관련 기록이 싹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조선적도 아닌 말 그대로 무국적자가 되어버린 상황...이 될 뻔했지만 다행히 2012년 7월 주민기본대장법 개정 이전의 외국인등록대장 기록 및 재일조선인의 호적부표를 일본정부가 영구보존하어 관리 중이기 때문에 밀입국 한게 아닌 이상(...) 원적지가 이북이라고 해서 한국 국적을 못 받을 일은 없게 되었다.[101] 북한은 건국 초기 조총련 계열 조선학교에 물심양면으로 상당한 지원을 해 주었기에, 민단 측 한국학교보다는 조선학교에 다니는 비율이 많았고 자연히 조선학교에 대한 소속감이 커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가르치는 김씨부자 우상화 교과목에 대해서도 북한 관련 사전지식이 없다면 큰 문제제기를 하지 않으며, '일본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 위인 장군이 해방 조선의 지도자가 되었고 외세와 맞서 싸웠으며, 그 아들도 아버지의 자질을 물려받아 지도자가 되었다'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한동안 많았다. 물론 지금은 북한의 실상이 있는 대로 까발려진 실정에다 한국 관련 문화가 일본에서도 쉴새없이 터져나오기 때문에 조총련이면서도 이를 믿지 않는 학생들이 더 많다.[102] 그의 일화는 1991년작 KBS 2TV 드라마 <교토 25시>로 각색됐으며, 1995년에 김일섭 회계사와 이원복 교수가 지은 경제만화 <세계로 가는 우리 경영>에서도 수록됐다.[103] 일본명: 金原 峰雄(카네하라 미네오) 일본예명: 츠카 코우헤이[104] 보안사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석유난로를 뒤집어쓰고 분신자살을 시도했는데, 목숨은 건졌지만 아직도 심한 흉터가 얼굴에 남아있다.[105] 이 사람도 오바타 미노루와 같이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어 있다.[106] 한국에도 정식 발매됐다.[107] 아래의 사이 료지(최영이(崔領二)). 이름 마지막에 둘째를 뜻하는 '二'자가 있는 것 빼고 성과 이름 앞글자가 동일하다.[108] 다른 이의 감독 없이 바이올린을 만들 수 있다는 뜻.[109] 마찬가지로 재일 한국인이며, 이름은 류은화. 수영 선수 출신이며, 태릉선수촌에 있었다고 한다.[110] 구글에 검색하면 국적이 일본으로 나와있고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재일 한국인 2세라고 나와있다. 귀화한 것으로 추정.[111] 시이나 킷페이의 본명은 이와키 마사요시. 즉 '시이나 킷페이'는 예명이다.[112] 김현자라고 알려져있지만 귀화 전에는 김복자(金福子)라는 이름이었으며 일본으로 귀화할 때 변경한 와다 아키코(和田 現子)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화전 현자'이며 '김현자'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은 없다. 최영의가 실제로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113] 그래도 한국어 싱글 앨범을 3차례나 냈다.[114] 작중 등장하는 괴인들은 현실의 재일교포들을 은유한 것이다.[115] 메인 캐릭터 중 한 명인 곽영사가 재일교포[116] 2014년 작품으로 오사카 조선학교 고등부의 럭비팀이 전국 출전 중에 겪는 일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한 작품. 당시 오사카부 지사였던 하시모토 도루도 잠깐 등장해서 까인다.[117] 네이버 웹툰이며 영화로도 리메이크된 작품이다. 여기서 남자 주인공이 재일교포다.[118] 한일 양국 배우들이 섞여 공연했는데, 일본배우들은 한국어를, 한국배우들은 일본어를 배워 2개 국어를 공연 내내 섞어 썼다. 흥미로운 일화로는, 재일교포의 삶을 포기하려는 극중 주인공의 딸이 "북한으로 가겠어요"라고 선언하자, 일본 관객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진 반면, 한국 관객들은 "하하, 저거 바보 아냐?"하며 웃음이 터졌단다. 2018년에는 한국인 제작자에 의해 영화화되어 개봉되기도 했다. 아버지 역인 용길 역에는 김상호씨가, 어머니 역인 영순 역은 이정은씨가 맡았고, 사위역은 오오이즈미 요가 맡았으며, 그 외 딸 역에도 이노우에 마오나 마키 요코 등, 유명 여배우들이 맡은걸로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119] 김명준 감독 작품. 홋카이도 조선학교 고등부 3학년들의 생활을 감독이 직접 함께 생활하면서 담은 다큐멘터리 작품. 국내에서는 2007년 초 개봉.[120] 구지용이 오사카 재일교포이다.[121] 재일교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김성모 만화.[122] 도쿄조선중고급학교 권투부를 그린 다큐멘터리[123] 일본명 마츠다 코우스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