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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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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 廣開土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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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표준영정. 1977년 이종상 작.[1]
출생
(음력)
<colbgcolor=#fff,#1c1d1f>374년
고구려 국내성 고이련잠저[2]
사망
(음력)
412년 10월[3] (향년 37~38세)
고구려 국내성
장례 414년 10월 29일[4]
고구려 국강상 산릉
능묘 국강상(國罡上)[5]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왕태자
386년 1월 ~ 391년 5월 (5년 4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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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1년 5월 ~ 412년 10월[6] (21년 5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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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高)
담덕(談德)[7] / 안(安)[8] / 평안(平安)(?)[9]
부모 부왕 고국양왕
모후 미상
왕후 고거련의 모후
자녀 태자 고거련
왕자 1명 이상[10]
종교 불교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11]
별호 광개왕(廣開王)[12]
개토왕(開土王)[13]
존호 영락태왕(永樂太王)[14]
연호 영락(永樂, 391년 ~ 412년)
작위 평주목 요동대방이국왕, 후연[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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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1. 개요2. 호칭
2.1. 명칭의 의미와 논쟁
3. 생애4. 평가5. 기타
5.1. 태왕릉5.2. 시조 동명성왕과의 관계5.3. 사료적 측면5.4. 기년 수정론5.5. 유사역사학
6. 노래7. 대중매체에서8. 관련 문서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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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태왕의 은택이 황천에 두루 미쳤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儻之志.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조
고구려의 제19대 태왕. 이름은 담덕. 한국사에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칭호로 가장 자주 불리는 군주이기도 하다.[16]

18세의 나이로 보위에 올라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기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정복 사업과 많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한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정복군주로 잘 알려져 있다. 즉위 시 불안했던 대외 정세[17]에도 불구하고 주요 적국이었던 백제를 쳐서 항복시키는 동시에 서쪽의 후연 등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광대한 요동 지역을 차지했으며, 북쪽의 유목 민족들을 정벌하여 만주를 포함한 넓은 땅을 영토로 삼고 말갈 등 유목 민족들을 휘하에 두어 북쪽 영토를 크게 넓힘으로써 고구려의 전성기를 열었다. 이러한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힘입어 고구려는 당대 동아시아의 주요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전쟁을 통해 이뤄낸 어마어마한 업적으로 여러 창작물에서 꾸준히 다뤄지고 있으며, 정복군주이면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단 공통점으로 한국에서 알렉산드로스와 자주 비교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호칭

광개토대왕의 공식적인 호칭은 당대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것을 줄여 광개토왕이라 표기하였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 공식적으로 주로 쓰이는 명칭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여기에다 대왕이라는 존칭을 붙인 표기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며, 이것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표기이기도 하다. 한편 당대에 사용된 태왕 칭호를 존중하여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을 줄인 광개토태왕이라는 표기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하는 역사서와 비석에서 대왕을 칭하는 이름들이다.
시호 출처 시기 비고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414년
고구려 공인 시호. 고구려 역대 태왕 가운데 유일하게 완전한 시호가 전한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
414년
능비문 1면에서 위의 공인 시호를 한번 표기한 뒤, 4면에서는 이렇게 축약해서 표기하고 있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호우명 그릇 신라[18]
415년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물 중 하나.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광개토지'로 바뀌었다.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
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모두루묘지명〉 고구려
5세기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대개토지'로 바뀌었으며, '호태왕'이 더욱 강한 의미인 '호태성왕'으로 확장되었다.
왕호 출처 시기 비고
광개토왕
廣開土王
삼국사기 고려
1145년
고구려 역대 국왕의 왕호가 《삼국사기》에 일괄적으로 전하고 있으므로, 다른 국왕들과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주로 쓰인다. 시호의 '국강상'과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광개토'로 축약되었으며, '호태왕'이 '왕'으로 축소되었다. 가장 축약된 형태.
개토왕
開土王
해동고승전 고려
1215년
《삼국사기》 〈연표〉의 광개토태왕 사망 기사에도 '개토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낙자로 본다.
광개왕
廣開王
삼국유사 고려
1281년[19]
《삼국유사》 〈왕력〉에 광개토태왕의 왕호가 '광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낙자로 본다.
출처 국가 비고
담덕
談德
《삼국사기》 고구려, 고려 《삼국유사》에도 본명이 '담덕'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안
平安
광개토태왕릉비 고구려(?), 중국 왕조 중국 학자 장복유가 주장하는 이름. 《진서》, 《양서》, 《자치통감》 등 중국 사료들이 이 '평안'을 '안'(安)으로 줄여 썼다. 《고려도경》에도 '안'으로 나와있다.
호칭 출처 국가 비고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삼국사기》 광개토왕+대(大) 대한민국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는 '광개토왕'이라는 최대한 축약된 호칭에서 나아가, 광개토대왕을 영웅시하는 현대인들의 정서상 이를 다시 '대왕'으로 존칭하는 것.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며, 이따금 학계에서도 사용되곤 한다.
호태왕
好太王
〈광개토태왕릉비문〉 중국, 일본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 광개토대왕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호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전반부의 장지 명과 업적 부분을 전부 생략하고 간단히 남긴 것으로, 국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2.1. 명칭의 의미와 논쟁

다음은 광개토대왕의 시호를 단어별로 구분하여 해석한 것이다.
시호 비고
국강상
國罡上
일반적으로 임금의 묘지 장소를 뜻한다고 해석한다. 왕들의 시호에 묘지 장소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 특징에 따라 이전의 왕들[20]과 통일된 명칭을 부여하자면 '국강상왕'이라고 하는 게 맞다.[21] 국강상 지역의 정확한 위치 비정은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광개토경
廣開土境
영토를 크게 개척하였다는 임금의 업적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광개토지'(廣開土地), '대개토지'(大開土地) 같은 이표기도 보인다.
평안
平安
역시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임금의 업적(시호). 그런데 시호가 탈착형이라는 것을 근거로 임금의 본명이라는 해석도 있다.
호태왕
好太王
훌륭하신 태왕이라는 뜻.

2012년 중국 지린성에서 〈지안 고구려비〉가 발견되어 비문 해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학자 장푸위(張福有, 장복유)가 해석한 비문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내용이 얼추 비슷하며, 임금의 본명이 '평안'이라는 기사를 적어 두었다.(國罡上太王 號平安) 또한 다른 중국 왕조의 사서들을 고찰해보면 임금의 이름을 '안'이라고 칭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지안 고구려비의 진위 논란을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평안'이 임금의 진짜 본명이라고 단정하는 의견도 있으나 여기에는 많은 반론들이 있다.

지안 고구려비는 문서에 서술된 것처럼 중국 당국이 동북공정을 시도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다른 유물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석만 공개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처음 고구려가 세워졌을 때는 중국식 시호 제도나 고구려식 시호 제도가 완전히 세워지지 않았고, 초기에는 그저 이름만으로 전해지다가 이후에 가서야 묘지의 장소를 기입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초기와 다르게 발전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평안'은 이름일 가능성이 있을 뿐 '평안'이 임금의 이름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우리나라 고대 임금들의 이름은 대부분 순우리말인데, 이 이름들은 중국 왕조에서 기록될 때 많은 음차를 거쳤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에 '추모'라고 전해진 이름을 중국에서는 '주몽'으로 전한다든지, 백제 임금의 성은 '부여씨'로 복성인데 중국에서는 단성인 '여씨'로 표기한 것과 같은 잦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중국 사서가 지안 고구려비와 비슷하다고 무작정 교차 검증을 할 수는 없다.[22][23]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평안'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주장 단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3.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광개토대왕/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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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광개토대왕/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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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5.1. 태왕릉

파일:external/bimage.interpark.com/20120309155617927.jpg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확실하진 않으나 집안시에 위치한 태왕릉으로 추정된다. 확증할만한 근거는 없으나 광개토대왕릉비 주변에 왕릉이라 할 만한 무덤이 장군총과 태왕릉 정도밖에 없어서 둘 중 하나가 광개토대왕의 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24]

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동탁(銅鐸)이 출토되기도 했는데, 이 호태왕이 일반명사인지 광개토대왕을 특정한 용어인지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그러한 바 그 사실만으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말하진 않고, 오히려 태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동아시아 광역 편년 체계 속에서의 시간적 위치, 그에 따른 적석총 형태의 변화 등을 고려하여 볼 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서 태왕릉은 대체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교적 소수론이지만 태왕릉고국양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이런 경우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장군총이라고 본다.

하지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태왕릉 묘실이나 봉토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태왕릉의 능원 내에서 출토된 것으로, 도굴되었던 시점에 도굴꾼들이 나중에 가져가려고 퇴장한 것인지 아니면 태왕릉에 있었던 의례행위의 결과로 남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는 〈광개토대왕릉비〉를 고려에서 뽑아다가 현재의 위치에다 박아놓은 거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를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5.2. 시조 동명성왕과의 관계

지안시광개토대왕릉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옛적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하백의 따님이었다. ...(중략)...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호(연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414)〉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3세손이 된다.

동명성왕 - 유리명왕 - 재사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만약 신채호처럼 차대왕,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서자로 본다 해도 1세대가 늘어나고, 진수의 《삼국지》의 설을 채택하여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본다 해도 2세대가 늘어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다른 사서를 참고하지 않고, 연대 계산을 다시 해서 태조대왕을 유리명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가설도 세웠다. 그렇게 보더라도

동명성왕 - 유리명왕 - 대무신왕 - 재사 - 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자손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보는 설을 채택해도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6세손이 된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는 주몽의 뒤를 여달이 잇고, 여달의 뒤는 여율이 이었으며, 여율의 뒤를 막래가 이었다고 했는데 막래는 모본의 오타로도 추정된다. 그런데 여달을 유리명왕으로 보고, 〈위서〉 '동이전'에 막래가 부여를 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막래를 모본왕이 아니라 대무신왕으로 본다면,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한 사람이 더 있게 되며 이렇게 놓고 보면 어떻게든 세대가 맞게는 된다.

한편, 위에서 나온 17세손의 의미는 직계가 아니라 왕계라는 견해도 있다.

태조대왕의 생몰년 의혹에 따르면 대무신왕이 44년에 사망하고 77년 재사와 부여 출신 태후가 7세의 태조대왕을 왕위에 앉히기까지 33년의 공백기간이 있기에, 그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왕이 하나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재사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7살짜리 아들을 앉혔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이상한 광경이니까. 17세손이 왕계라면 ?가 왕이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5.3. 사료적 측면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사료로는 금석문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여러 사료들이 전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현전하는 한국 고대의 비문들 중 내용이 비교적 온전히 전해지는 몇 안되는 것들 중 하나로, 당대 역사를 전하는 내용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부터 사망까지 고구려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대순으로 서술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정리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중국 사서는 광개토대왕 시기 모용선비족의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이외에도 《삼국유사》나 《일본서기》에 단편적인 사건들이 전하고 운좋게 살아남은 〈모두루 묘지명〉과 호우명 그릇은 지워진 역사의 편린을 전해주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 사료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서 보면 적지만 한국 고대사로 한정한다면 매우 풍부한 편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광개토대왕 시기의 통치전쟁 기록이 고구려의 다른 들 기록보다 많고, 고고학 발굴 성과도 광개토대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 있다는 점이 크다.

사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한 뒤 한참 동안 잊혀졌고, 재조명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이루어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근초고왕이나 진흥왕과 비슷한 수준의 정복 군주로 평가되어 수나라에 맞선 영양왕이 훨씬 높게 평가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었던 압록강 이북의 경우에는 발해 멸망 이후로 이민족 국가의 영토였던 데다가 특히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봉금령으로 인해서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금나라 황제가 세운 비석 정도로 여겨져서 재조명이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문화재가 다른 것으로 오해받은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25] 해당 시기에 조선이 여러 강대국들과 얽히면서 외세의 침탈에 시달렸던 때였기도 했고, 그동안 삼전도의 굴욕을 씻어내지도 못했던지라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재조명되기에 시기적으로 타이밍이 맞았다. 당연히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취의 관점에서 다시 부각된 측면이 크다. 물론 비문이 발표되는 과정에서 일본군이 개입해서 의도적으로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내놓았지만, 근본적인 해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 때문에 고구려가 망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광개토대왕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끽해봤자 고구려의 왕들 가운데 1명으로 소개되면서 특징으로 싸움을 잘했다거나 땅을 넓혔다고 언급되는 것이 전부였다.

역사서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주로 무인의 기질이 있고 웅대한 야망을 품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재미있는 것은 두 조선 문인들의 평가이다. 14세기에 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3년상도 다 안 치른 채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고 복수한답시고 지난 일이나 들추는 몹쓸 사람'이라 평가했고[26][27] 반대로 18세기 안정복은 '고작 22년밖에 안 지난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는데 그게 바로 도리'라는 주장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야사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거의 출처 불명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종종 정사인 것마냥 소개되고 있다는 건데 요즘은 예전에 비하여 한국 고대사가 많이 정립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상대적으로 학술적 접근이 관철되지 못한 동화책에는 이런 내용이 넘쳐나고 있다. 사실 동화 작가들이 지어낸게 설화마냥 퍼져나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설화로는 광개토대왕이 여자 때문에 싸움이 난 두 마을을 화해시켜 줬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위서 《환단고기》에도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의외로 중원을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내용은 없다. 선비계인 후연이나 만주 대륙의 국가들과의 싸움은 없고, 와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를 공격하는 내용인데... 이 기록에서만큼은 어느 정도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 참고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호열제'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야사나 다름없는 《조선상고사》에도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대표 업적으로 생각하는 대륙으로의 진출보다는 왜군과의 격돌에 비중을 두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로 유명한 박창화가 남긴 다른 책 《고구려 사초》의 〈영락대제기〉도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다루고 있는데 자잘한 내정 기록, 왕실 비사 등을 제외하면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정사로 통용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정복 전쟁과 관련해서는 탐라국이 항복했다는 것 말고는 새로운 것이 거의 없는데,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 같은 정사로 통용되는 사료의 기록을 살짝 비틀어놓거나 전투 기록을 1줄 더 추가한 게 전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탐라항복했다는 내용과 거란과의 전투 기록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는 내용들이다.[28] 그런데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던 것이 확실한 진이나 모두루가 《고구려 사초》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소설일 가능성도 높다. , 모두루 모두 박창화 사후에 확인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비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유연이라고 했으나 근거 자체가 해괴하다.[29] 신채호가 해괴한 추론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건 매우 극악한 편에 속한다.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시라무렌 강 상류에 위치한 세력으로 훗날 비려가 거란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고는 한다. 이 때 토벌한 비려를 391년 토벌한 거란과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 광개토대왕 때 상대한 들은 모두 기재했다는 가설에 의하면 거란이라고 빠뜨렸을 리는 없으니 아마도 비려는 거란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다. 더구나 비려는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의하면 거란이 위치해 있던 곳에 있었다.

다만 이러한 내용을 딱히 실증할 만한 뚜렷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주요 근거는 비려와 거란의 위치가 비슷한 것 같고 거란의 부족 중에 필혈부가 있었는데 비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위서》에는 '필혈부라고도 읽는 필결부(匹絜部)·려부(黎部)', 《통전》에는 '필려부(匹黎部)', 《북사》에는 다시 '필결부(匹潔部)·려부(黎部)'라고 적혀 있는데[30] 근데 이건 아예 당시부터 물길의 '필려이국'과 헷갈리고 있었으니 더구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당장 고구려를 의미하는 '무구리'와 '말갈'만 해도 발음이 비슷한데 완전히 남남인 것을 보면 발음이 비슷한데 남남인 경우가 매우 흔하다.

비려와의 전쟁터였던 부산, 염수 등의 위치를 재현하면 대강 실마리가 잡히겠으나 그마저도 힘든게 현실이다. '염수'가 고유 명사일 수도 있고, 소금이 많이 나서 붙은 이름일 수도 있는데 만주 지방에 소금이 나는 곳이 한둘인가? '부산' 같은 경우도 고유 명사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고구려인들이 이름 모르는 산을 '아무개'라고 부르거나 '큰 산'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비려는 고구려 국경에 근접한 거란을 먼저 토벌한 점이나 〈광개토대왕비문〉에 장거리 원정이 있었던 것마냥 기술한 점으로 보아 거란보다 서쪽의 내몽골 어딘가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신채호가 주장한 유연설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셈이다. 어쩌면 유연에 복속한 부족일 가능성도 높다.

아니면 《진서》 〈동이전〉에 기술되어 있는 만주 중앙에 위치한 '비리국'일 수도 있는데, 《진서》가 광개토대왕 시기를 기록하고 있고 《진서》 〈동이전〉에서 서술하는 비리국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비문〉의 비려처럼 고구려의 북쪽 어딘가이기 때문에 비리국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비리국이 광개토대왕 시기인 《진서》 〈동이전〉에만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묘한데 광개토대왕 치세에 고구려에게 먹혀서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뭐 한국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사장되기는 했다. 중국 학계에서는 요동의 태자하 상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한다. 헌데 '태자하 상류설'이 말이 안되는게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격파하고 돌아오며 태자하를 거쳤으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비려의 인구는 35만명 정도로 추정된다.[31] 기껏 3개 부락을 격파했는데 어떻게 35만이라는 숫자가 나오는지 의아할 수 있는데, 부락이라는 단위는 고정된 수치를 갖고 있는게 아니라 쓰일 때마다 다르다. 마을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고 부족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비문의 판독에 따라 부락이 아니라 부(부족)로 판독할 수도 있어서 참 애매하다. 3개 부의 의미를 부족이나 부락 3개를 격파했다는게 아니라 거란족이 스스로를 칭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3개 부라는 의미로 해석한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그건 훨씬 후대의 일이다.

396년에 점령한 백제의 58성 700촌은 대강 현재의 강원도, 충청북도경기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58성 700촌의 위치 비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각에서는 충청남도까지 남하한 걸로 보기도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충주 고구려비가 397년에 세워진 것이 맞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비류백제설로 이어지고는 하니 문제.

5.4. 기년 수정론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대주류왕께서 국가의 기초를 이어받으신 후 17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에 등극하니 부르길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다.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능비를 통해 추론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망연대와 맞춰 볼 때도 의아한 점이 있어 학계에 이론이 있다. 학계의 중론은 대체로 374년인 듯하나, 3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18세 되던 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 설은 즉위년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한 것이 되는데, 연표에 따르면 이 해는 바로 임진년이다. 그런데 능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을 391년이라고[32] 하고 있다. 릉비는 60갑자와 왕의 연호를 병기하고 있으므로, 릉비를 만든 고구려인들이 착각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영락 5년 을미(395년)', '영락 6년 병신(396년)' 등으로 정벌 기록마다 확인이 되고, 덕흥리 고분 등에서 교차 검증도 되는 사실이다. 반면에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왕의 연호만 이용하여 기록했기 때문에, 김부식이 사서나 문헌을 인용할 때 오산했는지 추적이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주류 학계에서는 능비문에 《삼국사기》를 맞추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 해 앞당김으로서 광개토대왕이 신묘년 즉 391년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즉위년만 앞당기게 되면 광개토대왕의 재위년 자체가 23년으로 40세에[33] 사망한 것이 되어 《삼국사기》 본래의 기록은 물론이고, 능비와도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며#, 혹시 전체 재위년을 한 해씩 당겨서 391년 즉위해 412년 사망한 것으로 한다면 중국 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삼국사기》의 연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34]# 그러나 연표가 중국 사서와 교차검증된다는 것은 중국 사서에서 전하는 한반도 관련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받아쓰기했기 때문에 일치하는 것이다. 국내 전승이나 문헌에서만 확인가능한 국내 관련 기록과 기사를 인용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각에서 '사서의 연도에 능비의 간지(干支)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도 한국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잘 정리된 연표의 간지를 무시하고 연대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사료 간에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간지와 연호를 병기하고 있으므로 당대에 고구려인들이 년도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릉비 기록에 《삼국사기》를 끼워맞추는게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추측했었다. (e.g. 병신년 = 396년 etc.)
그러던 중 광개토왕릉비의 기년 문제에 대해 의문을 해소해줄 유물이 2004년에 중국 집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청동 방울에는 '호태왕 신묘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로 광개토대왕의 원년은 신묘년(391)년이거나 그 이전이라는게 중론이 되었다. 다시 말해 적어도 391년 = 신묘년이나 그 이전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최소한'[35] 광개토왕의 392년 즉위 기사가 오기되었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 상식적으로 년도가 기록되어 있는 유물이라면 해당 년도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크므로 오기했을리가 없다. 고로 광개토왕릉비의 기년 오기 문제 제기는 자연스럽게 소거된다.

파일:호태왕:신묘년.jpg 파일:호태왕:신묘년2.jpg

이상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능비의 '신라 구원 요청(9년 기해) - 신라 구원군 파견(10년 경자)'에 비정되는 《삼국사기》의 '신라 내구마 울음(9년 경자) - 실성 귀환(10년 신축)'을 굵은 글씨에 주목하며 비교해보자. 추측의 영역이지만, 내물 마립간의 울음은 왜구에 의한 왜란을 비유적으로 표현 했다고 추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릉비 9년에 내물 마립간이 사신을 보내어 대왕께 스스로 신민이 되겠다고 언약한 것과 같은 사건으로 볼수 있으며, 이듬해 대왕이 실성과 함께 신라 구원전에 참여했을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7월에 실성이 귀환했다고 하는데, 왜구는 알다시피 여름에 계절풍을 이용해 약취해 겨울에 훈풍을 타고 도망가는 존재였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 또한 〈고구려본기〉와 같이 1년씩 일괄적으로 마루면, 서로 부합하는 측면도 있다.

혹자들은 이 차이가 칭원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칭원법은 간단히 말해서 선왕이 승하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 해를 새로운 왕의 원년으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이 해를 선왕의 마지막 연호로 보고, 그 이듬해를 새로운 왕이 즉위한 원년으로 볼 것이냐이다.

또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이 승하한지 3년이 되는 해에 이장이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릉비의 기록대로 역산한 광개토대왕의 사망년도는 412년. 그리고 릉비에서 기록한 414년에는 릉을 이전하고 릉비를 건립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을 3년 동안[36]상을 치렀다고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인들이 부모가 죽었을 때 3년상을 치렀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릉비에 맞추어 일괄적으로 그의 치세를 모두 1년씩 당겨 온다면, 릉비에서 증언하는 릉비의 이장 기록은 광개토왕이 승하한지 딱 24개월 차이가 난다.

또, 이를 토대로 복원한 광개토왕의 생몰년도(374년~412년)와 치세기 391년~412년은 세는 나이 기준[37]으로 정확히 릉비의 기록과 맞아 떨어진다. 이를 본다면 릉비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하고 디테일함을 알 수 있고,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년도를 오산해서 향년 (태어난 년도와 승하한 년도)을 오기 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38] 《삼국사기》에는 10월에 사망했다고 기록 되어 있고, 릉묘를 이전한 날짜는 3년후인 (만 24개월) 9월 29일이었다. 그 당시에도 만 24개월 ~ 27 개월동안 상을 치렀다는 사례는 (물론 훨씬 후대이긴 하지만) 백제 무령왕과 그의 왕비의 경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늦다는 학설에 힘이 실린다.
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3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3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북사》 〈열전〉 '고려'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41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414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광개토대왕릉비문〉
국책사업으로 편찬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석도 이러하다
능비는 광개토왕이 죽은 뒤 만 2년째 되는 414년, 즉 장수왕 3년 9월에 대왕의 능과 함께 건립되었다(종래에는 《삼국사기》의 기년에 따라 414년을 장수왕 2년으로 보았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하였던 까닭에 광개토왕이 죽은 412년은 곧 장수왕 원년이 된다. 따라서 비가 건립된 414년은 장수왕 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의 모든 기록을 1년 올려 해석할 순 없다. 전연과의 전쟁 기록은 《자치통감》에서 비롯됐고 백제와의 전쟁 기록이 백제 측 전승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이 일괄적이고 기계적인[39] 오류를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되며,[40] 꼭 교차검증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사료 비판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단순 즉위년도나 사망년도에 대한 단편적인 기사에서 생기는 오류가 아니라, 즉위 기사부터 승하 기사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391~412년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이미 김부식 손에 의해 편년 작업을 할 때 392~413년 동안에 일어났던 사실인양 일괄적으로 욱여넣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첫 단추인 즉위기사부터 1년씩 잘못 끼웠으니, 나머지 후술되는 고구려 전승의 기사들에서 만큼은 광개토왕이 사망할 때까지 편년 작업이 꼬였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릉비의 기록을 실제 대왕의 치세기로 파악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김부식의 착오로 인해 혹은 칭원법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을 착각했기 때문에 1년씩 밀려썼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비문을 포함한 다른 기록을 종합할 때 장수왕은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에 지나지 않아 왕으로서의 본격적인 권위를 발휘하기 대단히 힘들었다고 판단되다. 이런 그가 아버지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이 비를 세울 당시에는 21세였다. 동양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시스템에서는 선왕의 삼년상이 끝나는 시점이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친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본다면 장수왕은 아버지가 죽고 즉위한 바로 그때 실질적인 왕이 아니라 이 비를 세우는 그 시점에서 진정한 고구려왕으로 등극했다고 할 수 있다.
廣開土王碑, 父王의 運柩 앞에서 靑年王이 보낸 경고, 김태식[41] #

주보돈 교수 또한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왕이 죽고 삼년상을 치렀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

왜 칭원법에서 기인한 차이가 생겼냐에 대한 추론은 고국양왕이 광개토왕에게 생전에 양위했기 때문에, 유교의 예법으로 최대한 선왕의 치세기를 존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속사정도 모른채 김부식은 유월칭원법으로 작성된 문헌이라고 가정한채, 그대로 받아적었을 것이다. 애초에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민족주의 사학자 김석형 등도 〈고구려본기〉 392년(광개토왕 원년)에 기록되어 있는 관미성 함락 기사를 391년에 벌어진 사건이라는 주장을 제시했고, 이와 연개해서 릉비에 기록된 신묘년의 신민의 주체를 고구려로 해석하는 등의 학설을 제기했다.[42]

광개토대왕릉비 해석에 일생을 바친 다케다 유키오 도쿄대 동양사학과 학장도 관미성 함락 기사는 392년이 아닌 391년이 유력하다는 취지의 논문을 썼다.[43]

따라서 결론은 왕이 사망한 년도는 릉비에 기록된 412년이 맞고, 생년은 새는 나이로 39살에 죽었다고 하니, 374년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10월에 왕이 죽었다는 기사는 412년을 413년으로 오기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중국 사서의 고구려인들의 장례 풍습이 뒷받침한다. 즉위 원년은 1차 사료인 릉비가 증언하는 391년이며, 다른 1차 사료인 청동 방울에서도 교차 확인 가능하다. 《삼국사기》가 1년씩 밀려써서 생몰년도와 치세기가 1년씩 어긋난다는 결론은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5.5. 유사역사학

민족을 숭배하는 한국의 유사역사학과 엮이기 좋은 소재이다 보니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유사역사학적인 주장들도 많다.

광개토대왕이 젊은 나이로 죽고 나서 훈족아틸라가 등장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아틸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틸라는 선대의 계보가 명확해서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인지도는 후달리지만 한국판 미나모토 요시츠네 = 칭기즈 칸 설이랄까...

〈광개토대왕 비문〉에 등장하는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에서 토곡만 떼와서 토곡이 토욕혼과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주장도 있다. '식신토곡'이라는 말은 '식신땅의 곡'이라는 의미지 토곡 자체가 어떤 세력명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아니다. 더구나 당시 토욕혼은 '백란'으로 국호를 바꾸었다.[44] 토욕혼이 고구려의 원수인 선비 모용씨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그럴싸하기도 한데 환빠들은 토곡 = 토욕혼 주장을 할 때 이런 근거는 들지 않는다. 그런데 토욕혼은 오늘날의 칭하이성에 위치해 있었는데 어떻게 정벌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지...

398년 북위의 수도 업에 고구려인 46만명과 기술자 10만명이 가득차서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는데 사실은 고구려가 북위의 수도 업을 함락해서 북위가 불가피하게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 거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와 북위의 최초 접촉은 장수왕 때다. 둘다 공동의 적으로 후연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굳이 동맹을 맺을 만큼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지도 않았고(서로 눈치보면서 후연을 공격하는 수준) 국경이 닿아있지 않은 관계로 직접적으로 접촉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강원도 고성군에서는 화진포 앞바다의 금구도가 광개토대왕릉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한 유사역사가의 주장을 고성군이 멋대로 받아들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 ##

6. 노래

민족의 영광을 위하여 일어선 나라
끝없는 만주 벌판은 조상의 옛터

보아라 이 땅의 경계가
어디까지 인가? (아하!)

지평선에서 해가 뜨고
지평선에서 해가 진다!

장하다! 우린 대왕의 후손이 아닌가?
그날의 영광 지키자 광개토대왕

안시성 장군 양만춘 당태종 물리치고
을지문덕 그 기개는 살수에 뻗쳤네

서거라 적들아 우리땅
넘보지 마라 (아하!)

송화강에서 번개치면
요동벌에서 천둥 친다!

장하다! 우린 대왕의 후손이 아닌가?
그날의 영광 지키자 광개토대왕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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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절 고해명 왕녀 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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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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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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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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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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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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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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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상상화로 그린 것이며 현재까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사부 표준영정과는 다르게 갑옷 재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재현 오류가 심하다.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구려 개마무사 갑옷 형태로 그려야 한다. 다만 투구에 뿔처럼 달려있는 금색 장식은 고구려 개마무사의 갑옷에 달려있는 장식과 유사한 형태이긴 하다.[2]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광개토대왕이 태어난 때는 백부 소수림왕의 재위 기간으로, 아버지 고국양왕이 아직 즉위하기 전이었다.[3]광개토대왕릉비〉의 향년을 적용.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서는 413년 10월이다.[4] 음력 9월 29일, 율리우스력 10월 28일[5] 태왕릉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으나 어디까지나 설일 뿐 확실하지는 않다. 장군총도 후보로 거론되기도 한다.[6] 능비에는 몇 월에 즉위 및 승하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고, 《삼국사기》에만 392년 5월에 즉위하여 413년 10월에 승하했다고 전한다. ## 391년 및 412년은 능비 기준이고 5월 및 10월은 《삼국사기》 기준인 셈이다.[7]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등 국내의 기록.[8]진서》와 《북사》 등 중국 측 기록.[9] 이름 진위 논란 문단 참고.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보이는 명칭인데, 통설에서는 단순한 시호로 보았으나 이를 왕의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소수설도 있다.[10] 466년 3월에 북위에서 혼인 관계를 요청하자 장수왕은 딸은 이미 출가했다면서 아우의 딸을 대신 보내려고 했다가 중단되었다는 기록을 봤을 때 적어도 장수왕 포함 최소 2명 이상의 자식들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자명왕의 종숙인 고승우의 아버지가 그 중 한 명이다. #[11] '강(罡)'은 '강(岡)'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두 글자는 이체자 관계이다. 시호는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되기 전에는 단지 '광개토왕'으로만 전해져 내려왔었다. 기타 광개토대왕과 같은 현대의 호칭은 '명칭' 항목 참조.[12]삼국유사》 기록.[13]해동고승전》 기록.[14]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 #[15] 396년의 일로 일시적인 외교책의 일환으로 본다. 얼마 안가서 후연이 침입해오면서 잠깐의 평화적 국면은 끝나고 요동쟁탈전으로 이어지며 결국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대에 요동을 점령한다.[16] 고구려 당대에는 태왕이라는 호칭이 더 빈번하게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7] 고국원왕 당시 소모되었던 고구려의 국력을 소수림왕이 재건하여 광개토대왕이 국력 재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던 이점도 있다. 그러나 소수림왕 당시 고구려는 유목 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고, 남쪽의 백제도 근초고왕이 죽었지만 여전히 강력했으며, 무엇보다도 서쪽으로는 모용선비와 한족이 합세한 강국인 후연이 버티고 있었다.[18]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되었으나,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전래되었다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19] 편찬 시기에 약간의 논란이 있다.[20] 고국천왕, 산상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모두 능묘의 위치를 시호로 한 케이스이다.[21] 다만 《삼국사기》에서 고국원왕을 '국강상왕'이라고도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22] 다만 백제의 경우, 백제 스스로 축약 표기하는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측에서 직접 작성한 문서나 일본과 교류했던 문서에서도 성씨와 이름의 축약 표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23] 또한 순우리말 이름을 음차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삼국시대 중기쯤 가면 한문지식이 완숙해지면서 초기에는 드문드문 보이던 한자식 이름이 학자, 귀족층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본문의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대왕~장수왕대쯤부터 한자식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광개토대왕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는 담덕 또한 뜻을 고려한 한자식 이름으로 보이기 때문에 순우리말 이름의 사용과 지안 고구려비의 진위 여부는 별개의 문제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24] 무엇보다 비 옆에 있는 위치도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 크기는 곧 왕의 위상을 지칭하기도 때문에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비를 건설했다고 전해진다면 무덤도 대대적인 공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25] 일례로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진흥왕 순수비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26] 다만 광개토대왕은 어차피 어릴 적에 백제에 이 박박 가는 큰아버지 소수림왕과 아버지 고국양왕을 보고 자랐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성리학 따위가 있을 리도 없었던데다 유교 개념 자체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지도 않았다. 요즘 관점으로 과거사를 이해하면 안되듯이 권근도 똑같은 잘못했다. 그리고 이 오류는 권근을 비판한 안정복도 행했다. 그렇지만 그 둘을 옹호해주자면 당대의 가치관이 당대에는 최고의 가치관으로 여겨지는게 일반적이기는 하다는 점 정도. 고대의 인물에게 성리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물론 평가는 평가하는 이의 잣대가 기준이니 아주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대가 1,000년 가까이 전인 인물에게 저런 잣대로만 잰 것은 문제다. 막말로 저 시대에 3년상이 뭔지 관심이나 있었겠는가? 물론 당시 고대 국가에서 장례 기간이 길었음을 감안하면 정말로 광개토대왕이 장례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전쟁을 일으켰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전사한 후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이를 갚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결실도 못 보고 죽었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보면 어떻게든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하기는 했다. 여담으로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고구려인들은 100일 동안 상을 치렀다(停喪百日)고 한다.[27] 그런데 어떻게 보면 조선 중기 이후의 유학자들이 저 말을 들었다면 되레 헛방귀를 꼈을지도 모른다. 주자는 "복수는 5대까지는 해야 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권근의 말은 주자의 말과 완전히 대비되므로 어떻게 보면 영구까임권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듯. 여기에 그냥 권근이 살던 조선 건국 시기에만 봐도 말이 안되는 주장인데 3년상은 고행이 뒤따라서 권근은 3년상을 안 치르고 전쟁하냐고 비판했지만 정작 조선 왕들 중에서 제대로 3년상을 치른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적국으로 포위당해 있던 고구려 사정상 3년상이고 뭐고 당장 살아가는게 급할 지경이었다. 당장에 광개토대왕 즉위 1년 전 백제의 진사왕이 쳐들어오기도 했으니 말이다.[28]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내용도 있다.[29] '어떤 기록에 의하면 부산 밑에 와룡이 있었는데 와룡이 유연의 별칭인 유유와 발음이 비슷하니 와려(비려)는 유연인 것 같다.'라는 게 근거이다. #[30] 애시당초 ㄱ음과 ㅎ음이 유사한 거야 주지의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몽골어의 '칸'과 여진어의 '한'이 있고, '우랑카이'는 중국에서 '우랑하이'라 불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올량합'(兀良哈)으로 적혀 있다.[31]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참고.[32] 단순히 역산해서 391년, 신묘년이라고 추산하는 것이지, 고구려인들이 오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묘년'에 즉위했다는 소리가 없고, 18살에 즉위했으며 412년에 승하했으니 391년이라고 추정하는 것이다.[33] 그러나 이 또한 《삼국사기》의 일괄적인 1년 오류라고 해석한다면 문제는 전부 소거 되고, 광개토왕은 39세에 사망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 당대에 고구려인들에 의해 세워진 1차 사료인 금석문이 버젓이 12세기에 신라인이 편찬한 《삼국사기》와 대치되고 있다. 무엇을 더 신뢰해야 할까? 릉비를 토대로 복원한 그의 치세는 고구려인들의 당대 관습이었던 삼년상으로도 뒷받침된다[34] 《일본서기》에서도 이주갑인상을 고려한 년도는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와 같다. e.g. 진사왕의 죽음, 아신왕의 즉위 등.[35] 사망기사에 대한 1년 격절은 후술한다.[36] 말만 3년이지 실제로는 24개월이다. 고대 동양에서는 0의 개념이 없었다. 고로 3년은 만 3년이 아니라 햇수의 개념이었다.[37] 18세에 즉위했고, 39세에 사망했다고 하니깐, 딱 각각 391년 412년이다[38]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곧 무덤을 만들고,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시신을 모시며 삼년상(혹은 24개월)을 지낸 뒤 좋은 날을 잡아 장사를 지내고 그 후에 시신을 무덤에 안치한다고 기록 되어 있다.[39] 왕이 즉위한 년도부터 승하한 년도까지 계속 1년 차이가 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40] 실제로 《삼국사기》 392년의 백제 정벌 기록을 보면, 같은 사건을 서술한 〈백제본기〉보다 〈고구려본기〉가 더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으므로, 고구려 전승일 경우가 크며, 그렇게 되면 392년이 아니라 광개토왕의 원년인 391년으로 보는 게 일견 합리적인 해석이다.[41] 홍익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과 동명이인의 역사 전문 기자이다.[42] 출처: 김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1966,298쪽[43] 겨울 10월에 … 빼앗았다 : 본서 권18 〈고구려본기〉 6 광개토왕 즉위년(391)조에는 고구려군이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관미성을 공격하여 20일 만에 함락시켰다고 하여 보다 상세하게 나온다. 관미성이 함락된 시기는 본 기사에 진사왕 8년(392)으로 나오나 〈고구려본기〉에는 광개토왕 원년(391)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이는 즉위년 칭원법유년칭원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동일한 기사이다. 「광개토왕릉비」에는 관미성이 영락(永樂) 6년(396)에 광개토왕이 백제를 쳐서 함락시킨 58성 중의 하나로 나와 본 기사와 5년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광개토왕릉비」에서 광개토왕의 백제 정복을 영락 6년(396)조에 일괄적으로 기록한 것에서 빚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왕의 정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즉위년인 신묘년(391) 기사가 전치구로 강조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된다(武田幸男, 271~273쪽; 李基東, 49~52쪽).[44] 다만 어느 국가가 자국 명칭을 바꾸어도 외국에선 계속 예전 식으로 부르는 경우는 흔하다. 한국의 국명이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지 60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코리아(고려)'라고 알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식신토곡=토욕혼 설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중요한 논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