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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10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에게 35년간 주권을 빼앗겼던 한반도는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이후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이 곧 독립국가의 건설을 의미하는건 아니었다. 이미 1945년 8월 9일 부터 소련군이 함경북도까지 남하하고 있었다. 소련의 한반도의 공산화는 오래전 부터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의 핵심 축인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세계의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 속에서 연합국의 점령지였던 한반도는 끝내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엇갈린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대한민국 제1공화국과 북한의 지도자들은 각자 해방 직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비록 방도와 강도는 다르지만 정적들을 숙청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함으로써 정권을 안정시켰다. 자연환경, 노동력, 판매 가능 시장 구매력에서 북한보다 열위에 있던 대한민국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의 원조를 받아 경제 발전의 토양을 마련하였고 대한민국 제3공화국 이후 경제 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을 비롯한 산업화 정책을 통해 북한의 경제력을 추월하기 시작하였다. 경제의 발전으로 민주의식이 태동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6월 항쟁을 거쳐 27년 간 이어진 군사독재를 몰아내고 문민정권의 시대를 열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체재 경쟁 대상인 대한민국은 격동의 20세기 속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였고, 개발도상국 지위에서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자 선진국으로 변신하는 기적을 달성하였다.
반면 일제가 공업지대로 개발했던 북한 지역은 그러한 태생적 이점과 소련의 막대한 지원을 안고 해방 직후 대한민국보다 경제력에 있어서 크게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1940년대 중후반의 토지개혁, 화폐개혁으로 인해 기존의 기업가나 상공인이 일군 재산까지 모조리 당에 몰수당하며 혁신성과 생산적인 투자 활동이 줄어들었고, 농민에게도 땅을 주는 척했다가 막중한 세금을 물리며 전쟁 직후 모두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다. 모든 자원을 독점한 김일성은 초기에는 강력한 권력으로 자원을 동원하며 국력을 키울 수는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군사력에 예산을 과도하게 편성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성장률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1980년대 들어서는 경제성장률이 3% 안팍에 그치는 저성장 국면에 들어서게 되었다.
김일성은 민중의 지지를 얻어 권력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국가라며 세습을 하고, 민속 명절을 탄압하고 태극기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을 평가절하하는 민족주의자도 반발할 일을 했다. 이는 누군가의 진심어린 이념적 지지에 그가 큰 관심이 없었음을 의미하며, 순전히 누가 자신이 나눠줄 권력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기술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 못했다면 조만식 같은 인물에게 밀릴 인물이었다. 적극적 인재 스카웃, 고위 관직이나 학벌이나 물질적 보상을 통한 신분 상승 욕구 자극, 조직을 나누는 이간질과 같은 다양한 정치 기술을 때와 시간에 맞게 활용하며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정치적 기술을 활용하는 능력, 화술은 굉장히 뛰어났기 때문에 권력을 얻은 것이었고 실제로 주민들에게 자원을 주어 지지를 얻고 싶지 않았기에 주민을 속이는 방식으로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1980년대 탈냉전 기류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북한은 시대에 뒤떨어진 스탈린주의만을 고집하며 김일성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김정일에게도 대를 이어 절대적인 충성을 할 것을 인민들에게 강요하였다. 이미 세계적으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던 개방정책을 거부하고 체제 안정만을 목적으로 부자 세습이라는 시대에 역행하는 길을 선택한 북한은 80년대 3대 실정 이후 사실상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공산권이 연이어 붕괴하면서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고 결정적으로 북한 인구 수백만 명을 아사시킨 최악의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북한 주민이 차라리 왜정(일제강점기) 때가 훨씬 나았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할 정도로 현 북한의 경제상태는 파국에 가까운 수준이다. 북한의 반체제 인물들은 일제강점기의 불령선인보다 더욱 가혹한 취급을 받고 있으며 산간오지에 있는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갖은 고문과 노동에 신음하고 있다. 일반적인 북한 주민조차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던 거주 이전과 여행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약 받으며, 북한 남성들은 약 10년의 반강제적인 병역 의무를 강요받는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 식민통치 35년을 2배나 초과하는 기간인 70여 년의 세월 동안 지속되고 있고, 명목상 대한민국의 국민인 이북지역의 주민들은 김씨 일가와 조선로동당의 폭압정치 속에 놓여있는 게 현 북한의 실정이다.
2. 북한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자세한 내용은 친일반민족행위자/북한 문서 참고하십시오.3.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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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종파사건으로 만주파 제외 파벌 숙청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소련군이 북한에 군정을 실시했다. 이때 소련군과 같이 남하한 김일성이 북한 건국의 중심이 된다. 소련군이 입성했을 시기 북한에서도 고당 조만식을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활동했었고, 이들 또한 소련군정과 김일성 측에 협력했지만, 신의주 반공학생사건과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삼상회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갈등을 겪게 된다.
1946년에는 군정이 종식되고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1947년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칭되고, 1948년에 북한 정부가 수립된다. 그러나 국가 건설 초기에는 김일성 독재 체제가 이뤄질 수가 없었는데 이는 공산주의자 내부에도 다양한 파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소련의 직계 라인인 소련파와 중공군과 함께 하다가 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설 이후 국내로 유입된 연안파(중국파), 그리고 국내에서 활동하는 남로당파와 김일성 측근의 주변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도왔던 갑산파, 그리고 김일성파(빨치산파)들이 연합하는 형태의 국가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실상은 8월 종파사건 이전까지는 소련의 영향력이 강한 위성국에 가까웠고, 소련에 상당히 종속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건국초기 김일성과 조선로동당은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주장한 토지개혁을 강행하고 그 와중에 저항하는 지주, 유산가들을 닥치는대로 탄압했다. 이후 반공주의자, 기독교도 등이 월남하거나 정리되었다. 화폐개혁으로도 상공인이나 종교인 등에게 상당수의 돈을 교환시켜주지 않는 식으로 재산을 사실상 몰수했다. 대신 김일성은 빈농 같은 계층이 이런 정치적 활동을 벌이면 큰 혜택을 주어서 소련의 눈에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거의 처음으로 출세를 하여 충성심이 높아진 계층을 통해, 다수의 힘을 잃은 계층을 지배하며 국가를 장악해나갔다. 근로단체를 만들어 주민을 동원하고, 정치 활동을 비밀리의 감시하는 식의 계획은 치밀하고 일사분란했다. 그래서 국가 자원의 동원은 매우 조직적이고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다. 외교상으로도 군사 지원을 받는 등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원 동원력, 군사력을 활용하여 전쟁준비에 착수했다. 곧이어 1950년 전격적으로 남침을 하여 6.25 전쟁을 일으킨다.
4. 김일성 독재 체제 확립
6.25 전쟁이 당초의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휴전으로 끝나고, 3년 간의 전쟁으로 북한은 수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지원을 받아 전후 국가 재건과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 수립에 나서는데 국가 운영에 대한 방식의 차이로 갈등이 나타난다. 소련파와 연안파가 (일단은 먹고 살기 위한) 경공업 우선주의를 표방하는 반면 갑산파와 김일성파의 경우에는 군수 산업 위주의 중공업 우선주의를 주창한 것이다. 통치자인 김일성이 중공업 우선주의를 제창하자 이에 대한 반발이 내부에서 일어나게 되었고, 실제로 김일성을 축출하기 위한 시도가 일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1956년의 8월 종파사건.하지만 김일성의 조직력에 의해 이는 실패하게 되고 소련파와 연안파가 가택연금되지만 다음날 이들은 각각 자동차를 타고 중국과 소련으로 탈출했다. 이로 인해 소련과 중국에서조차 북한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이는 이후 북한에서 주체사상이 성립한 배경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연명하는 국가에게 지원이 끊기는 상황이 발생할 경우 스스로 먹고 살 길을 궁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은 50년대 말 중국과 소련의 국경 분쟁 때 한쪽 편에 붙지 않고 상대에 맞춰서 다른 소리를 하면서 양국 모두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늦어도 60년대에 이르면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스탈린주의체제 국가로 재편되었고, 마지막 파벌인 갑산파도 제거하면서 도서정리사업을 벌였다. 이후 1972년 주체사상이 국가이념으로 선포되어 내각 총리(수상)였던 김일성은 국가주석에 취임하였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로, 내각을 정무원으로 격하시키며 김일성 일인독재 체제를 확립시켰다.
이때부터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 정책은 스탈린이나 일본 제국의 천황을 능가하여 본격적으로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고 1974년 조선로동당 대회에서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로 선포되면서 세습 체제가 수립되었다.
당시의 경제 정책은 자력갱생적인 자립적 경제 노선에 따라 중공업을 발전시키고, 사회주의 블록 내에서 국제 시장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물물을 교환하는, 일종의 원조경제와 고도의 통제체제를 결합한 경제 구조였다.
5. 쇠락
허나 국방 비용 지출이 계속 늘어나면서 그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한국(남한)의 경우 베트남전 참전과 경공업 중심의 수출경제 구조로 외화를 확보하고 미국으로부터 무기 도입에 있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다 유사시 미군 파병이라는 든든한 안보카드를 쥐고 있어 국방비 지출의 증가를 감내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으로 억제할 수 있었다. 한국이 제 값 주고 무기를 도입하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는다. 80년대 이전에는 대부분 미국의 원조라고 봐도 무방하다.반면 북한의 경우에는 갈수록 외화 획득이 어려웠을 뿐더러 사회주의 체제의 경직성이 누적되어 점차 경제성장률은 둔화되는데 국방강화를 위해 대다수의 인적, 물적 자원을 지속적으로 투입하게 되면서 전반적으로 한국에 뒤쳐지게 된다. 이 시대를 거쳐서 나온 무기 중 하나가 천마호 전차. 또한 핵개발도 이 시기부터 손을 대기 시작한다. 북한의 김일성종합대학의 66년 이과생들은 거진 다 핵개발에 투입되었고, 대다수가 방사능 오염으로 죽거나 불구가 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불운의 학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하튼 60년대 이후 국방비가 GDP 비중을 거의 30% 이상 차지하게 되는데 이로써 북한 경제는 사실상 성장을 이룰 수 없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GDP 30%라면 국가 예산의 거의 전부라고 봐도 된다.
6. 고난의 행군
김일성, 김정일의 공동통치 시기 북한의 경제는 그야말로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었다. 일단 동유럽 혁명과 소련 해체로 인해 공산권이 무너져 원조는 물론이고, 물물교환 및 사회주의 우호가격으로 공급받던 원유 등의 원자재를 달러로 사와야 하는 상황에 놓였으며, 설상가상으로 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수해 등의 자연재해뿐 아니라 대외환경의 불확실성이 계속해서 북한을 덮쳤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부분 그렇듯 북한도 이런 대처 능력이 상당히 뒤떨어지는 나라였다. 특히, 1995년 쏟아진 폭우로 인해 식량난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96년, 하루 300g씩 지급하던 식량 배급량도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며, 이마저도 제대로 배급하지 못해 일부 지역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당시, 북한은 '하루 두끼 먹기 캠페인'을 벌였고, 배고픔에 농장을 습격하는 주민들을 막기 위해 공장, 농장 등의 산업 현장에 군대가 투입되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인 선군정치의 시작이었다.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일은 심화조 사건이라는 희대의 대숙청을 자행해 정치적인 불만을 무마시키고 경제적인 문제는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또한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표방하여 기존의 당 위주의 정치에서 군 위주의 정치를 통해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군부를 어르고 달래면서 통제하였다. 기존의 국가주석 직책은 죽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하였고 1998년 헌법 개정을 통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와 정무원을 다시 상임위원회와 내각으로 복원함과 동시에 본인의 직책인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을 선군사상에 따라 국가 무력 전반을 통솔하는 초월적 직책으로 만들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엔 외교권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위임하고 경제관리는 내각 총리가 담당하는 등 집단지도 체제처럼 보이게 했지만 이들은 그저 얼굴마담이나 허수아비일 뿐이고 실상은 모든 정책이 김정일의 지도 아래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 2000년에 북한이 고난의 행군 시기가 끝났다고 선언할 때까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북한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이 과정에서 40만이 넘는 주민들이 아사했다고 추정된다.(...) 이 시기 김일성이 죽기 전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정상회담 시도나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에 대해 합의해 준 일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북한이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정확히 말하면 2002년부터 2005년까지가 북한의 짧은 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른바 "7.1 경제관리 개선조치"가 발표되면서 본격적인 경제개방 정책이 실행되었던 것, 하지만 김정일의 지지를 받았던 이 정책은 핵을 포기하지 않고 보유하겠다는 전제 아래 나온 정책이라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도 북한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다시 고립주의로 나가기 시작했다. 2007년 부시 행정부 말에 다시 한 번 기회가 왔지만, 핵실험 및 기타 사건을 일으키며 스스로 기회를 날려버렸으며 남한도 정권이 바뀌고 그동안의 북한의 행보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 북한에 부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봉쇄는 그치지 않았고, 2008년에 전 세계적 경제위기(미국발 금융위기)가 오자 북한도 타격을 받았고 화폐개혁 등으로 발버둥을 쳤으나 다시 경제가 무너지기 시작했으며, 2009년, 2010년 들어서는 2차 핵실험, 대청해전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일으키는 등 막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 쯤 뇌졸중을 일으킨 김정일은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체감하고 그 즈음부터 김정은 후계 체제를 가동시키게 된다. 그런 현실에서 김정일은 2011년 12월에 죽었고, 김정은이
7. 북한의 화폐개혁
해당 항목 참조.8. 김정일 사망과 김정은 승계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김정일은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12월 19일 정오에 조선중앙방송을 통하여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기념궁전에 안치되었다. 2008년부터 뇌졸중으로 좌반신 마비 증세를 겪고 있었고, 2010년에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수명이 3년 정도 남았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며 그의 사망이 임박했음을 예측하였다. 김정일 위원장의 장례식은 12월 28일 평양시에서 영결식이 시행되었고, 다음 날인 29일에는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추모 대회가 열렸다.이후 김정은이 후계자로서의 업무를 맡게 되었고, 12월 29일에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되어 군 통수권과 핵무기 통제권을 장악했다.
2012년 4월 11일, 김정은은 4차 노동당대표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제1비서로 추대되었고, 이틀 후인 13일에 열린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에 추대되어 김정일의 직책을 모두 세습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2016년, 조선로동당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위원회 비서국을 정무국으로 바꿈에 따라 김정은은 당 제1비서에서 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당 비서직은 당 부위원장직으로 탈바꿈 되었다. 뒤에 열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서 국방위원회를 국무위원회로 개편하고 김정은은 국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2019년 3월, 14기 최고인민회의가 새로 선거, 4월에 출범함에 따라 대대적인 인사가 이루어졌는데 기존에 있던 원로 정치인 대부분이 일선에서 은퇴하였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내각 총리가 국무위원회 위원을 겸직하게 되면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일인 독재체제가 더욱 확고해졌다.
코로나19 이후 국경봉쇄와 미국의 대북제제로 자력발전을 선포하며 더더욱 빈곤해지자 김정은이 이례적으로 현장 방문을 하며 관리들을 질책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며 핵개발을 이어나갔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처음부터 반서방이기에 러시아를 지지하며 러시아의 환심을 샀고 이에 러시아로부터 탄약을 수출하되 대가로 비축 밀가루를 비롯한 러시아의 군사기술까지 받게 되며 김정은으로써는 큰 호재가 되었다.
9. 북한의 현재와 전망
북한은 경제적으로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면에서 파탄 국가이지만 2010년대 극후반에 들어서 정상 국가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있음을 표방한다. 그러나 2020년대 북한의 행보를 들여다 보면 진정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9.1. 2008년 이후의 대외관계 및 무력도발
- 참고 항목: 북한/대남 도발
2009년 4월 5일, 인공위성을 '2번째로' 발사했다. 첫 번째는 1999년의 광명성 1호. 궤도 진입에 실패한 듯하다. 물론 인공위성으로는 턱도 없는 수준이라 미사일 연습용 핑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내부에서는 성공했다고 주장하며 체제 홍보용으로 쓴다고. 궤도상에 안착에는 실패했으나 비거리로 보아 핵탄두를 미국 '어딘가'에 떨어뜨릴 만한 능력이다.
한미일 등 주변국은 로켓에 달린 것이 \'탄두다', '미사일이다\'라며 경계했었고 인터넷에서도 우주 로켓이다, 미사일이다 의견이 분분했었는데 실제로는 매우 간단한 문제로 발사체의 속도만 알면 나온다. 인공위성이면 지구 궤도상에 올리기 위해 다시 지상으로 추락하거나 우주로 탈출하지 않게 초속 8~11km 정도를 유지하나 북한이 발사한 건 초속 5km도 넘지 못했다. 이것은 전형적인 탄도 미사일 속도로 북한이 발사한 것은 미사일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진짜로 인공위성을 쐈는데 기술이 시망일 수도 있지만(...) 그 뒤 미국이 국제 협약 조항에 근거하여 각종 제재를 걸려고 했으나 모든 국가가 우주 개발권을 평등하게 가지고 있다는 조항이 있는데다가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로 난항을 겪었다. UN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한 국가만 반대해도 제재를 가하기 힘든데 2개국이 반대하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참고로 대한민국의 우주 발사체 나로호도 북한을 제재하는 그 법과 비슷한 한미 조약의 맹점을 파고들어 개발한다. 다만 그 뒤에 2차 핵실험을 벌여 경제 제재를 받았다. 한 마디로 말해 자충수.
북핵 HEU 관련 주요 일지, 연합뉴스, 2010-11-21
2009년 6월 8일, 중국 쪽에서 국경을 넘어온 혐의로 약 석 달간 억류하던 미국의 여기자 2명에게 북한 중앙 재판소가 12년 노동교화형을 때려버렸다. 이 노동교화형이란 흔히 말하는 아오지 탄광행 같은 것이다. 풀려날 수나 있나 싶었지만 뜻밖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전격 방문한 뒤 광속으로 협상해 여기자들은 풀려났다. 기사 보기
미국에서는 2009년 7월 4일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에서는 2009년 7월 7일 DDoS로 네이버, 청와대 등 국가 주요 기관 인터넷 사이트와 은행 사이트, 대다수 네티즌들이 쓰는 사이트들에게 사이트 접속 장애로 인터넷 대란이 벌어졌다. 일단 그 웜 자체가 최초에는 미국 사이트를 공격하려고 만들어졌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사실 북한의 공격을 잘 보면 공격자들의 수준이 높다. 하드웨어 쪽은 타 국가에 처절하게 밀려도 소프트웨어 쪽은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만하다는 얘기. 흔한 경우는 중국에 집을 전세 내서 두세 달을 그곳에서 은둔하며 시나리오 짜서 공격하다가 귀환하고 임무 받아서 다시 전선복귀하길 반복하는 놈들. 의외로 진짜 많은데다가 1990년대 이후 투입하는 장소는 다르지만 매년마다 해킹 전문 인력을 100명 정도 꼬박꼬박 증원한다(!!!)
이것에 관해 중국 공안당국은 여러 모로 껄끄러워한다. 남한을 목적으로 하는 해킹이라 확실하게 파악하는데 이놈들을 잡을 수도, 놔줄 수도 없고... 참고로 링크에서 보듯 북한에 할당한 IP 주소는 당시엔 없었다. 2009년 12월에 1024개의 IP 주소가 북한에 넘어가 북한이 IP가 없다는 말은 옛말이다. 자세한 정보는 아이피 문서 참고. 중국 IP에 얹혀살았던(?) 것. 허나 미국에선 북한의 이러한 사이버 공격 능력을 사실상 없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는 떡밥으로 쓰여 DDos 공격 때 북한이 배후에 없다고 주장하는 한 근거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으로 남북 관계는 거의 단절 상태. 남한에서는 천안함 침몰의 원인이 북한 잠수정이 쏜 어뢰라고 밝히며 북한의 사과를 촉구하고 UN 안보리 회부를 준비하며, 북한에서는 이에 반발해 자신들이 한 일이 아니라고 남한 정부를 강력하게 비난한다. 미국과 일본 등 남한의 우방국들은 북한을 맹비난하며 남한 정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이고 EU 등도 북한에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북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중국은 아직까지는 북한 쪽에 가까운 중립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 신 냉전까지 치닫는 이래저래 불안한 상황이다.
2010년 여름이 끝날 무렵 수해로 온 식량 부족 대책으로 우리 정부가 쌀을 보내주고 북은 추석에 이산가족 상봉을 제시하는 등 다시 관계가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보내준 5천 톤의 쌀이 "겨우 북한 주민이 하루 먹을 식량을 그것도 무상이 아닌 차관 형식으로 줬다
그리고 2010년 11월 23일, 북한이 연평도에 지상 포격을 했다. 그리고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도 전체에도 최고 비상령인 '진돗개 1'이 발령됐다. 거기다 오발탄이 아닌 북한군이 연평도를 향해 조준 사격한 것. 자세한 건 연평도 포격전 참고.
2011년 1월 기준으로 하도 가난해서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던 사람조차 굶어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마약 유통으로 마약중독자가 늘어나서 큰 사회 문제라고.
거기다 현재는 대대장쯤인 자가 자신의 부모가 굶어 죽자 자결하며 정권을 저주할 정도고 탈영병이 속출해 보초병들에게도 실탄을 전혀 안 주는 상황까지 갔다. 그 상태에서도 항쟁이 일어나지 않고 버티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
2011년 여름 한반도 전역에(특히 상, 중부) 폭우가 쏟아지자 북한 측에서는 이를 빌미로 수해를 입었다며 시가지의 침수 사진을 내보냈는데(사진) 이걸 합성으로 내보내 문제였다. 전문가의 감정이 딱히 필요하지도 않을 만큼 조잡한 퀼리티를 자랑한다. 컴퓨터로는 해킹+공격만 연구한 모양. 평범한 북한 인민이면 인터넷을 못 쓴다[2]는 걸 본다면 알 만한 수준이다. 물론 북한이 이런 일로 비웃음 겪음은 하루 이틀도 아니며 이 사건이 들킨 뒤에도 그다지 미안해하거나 위축되지 않은 채 그냥 넘어갔다.
이후로도 7, 8월에 걸쳐 수시로 쏟아진 비 핑계를 대며 그간 해댄 포격은 까맣게 잊고 수해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제 돈이 급한지 2011년 9월경 돌연 금강산 관광 지구 관리자들 중 남한 측 관리자들을 전원 추방시켰다. 처음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회피하더니 끝내 금강산 관광 지구의 모든 것은 북한 측의 재산 드립을 쳤다. 기껏 남한 측이 돈이고 재원이고 인력이고 다 대줘서 지어놓으니 시원하게 배신하는 희대의 국가 차원인 날강도 스킬을 시전 했다. 그리고 자체적인 관광 사업을 시작하려 든다. 우선은 북한 체제의 존속을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 중국 쪽에 물 타기를 시도하는 중. #
같은 해 11월엔 개성공단에서 근무 중인 직원들을 위해 남측에서 간식으로 하루 2차례씩 제공하던 초코파이를 그만 지급할 것을 요구했다. 질렸다는 게 이유라며 대체재로 라면을 요구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충분히 가나, 일부에서 달러를 대신 지급할 것을 요구한다.
최근에는 정력제를 개발해서 경제를 살리려고 한다 카더라.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했다. 조선중앙통신 보도 전문 규모 4.9의 지진파가 나왔고 미국과 중국에는 이미 하루 전에 통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2015년 1월까지도 중국은 대외적으로 북한의 편을 들어주고는 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과연 북한을 안고 가는 것의 득실을 따지는 논쟁이 진행 중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가 경색되자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과연 이를 중국 수뇌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따라 중국의 대북 정책 방향이 나올 듯하다.
9.2. 자본주의의 침투
원래 북한은 기본적으로 토지와 자본의 소유를 부정하고 아직도 농지의 개인적 소유는 조그마한 텃밭 정도만 허용한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합영법에 근거하여 국가의 시책에 맞는 상업/공업의 창업을 허용한다. 쉽게 말하면 국가의 계획경제 체제 하에 국가의 계획과 부합하는 사업 아이템을 누군가가 들고 나오면 그 사업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시스템도 국가에서 사무실을 빌려서 국가에 세를 내고 운영하는 식이다. 그리고 창업해도 사장이나 회장의 직함은 없고 오로지 직장 장 직함만 얻는다. 국가에서 파견한 사업체 장의 지위와 같다.2000년대 들어 7.7 경제완화정책 등 여러 가지 경제 정책을 펴면서 돈주라 불리는 신흥 자본가들이 나오니 그들 입장에서는 이들이 새로운 사회 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사실 이 부분은 맥락에 따라 조금 다르다. 2000년대 초중반 북한은 분명 2002년 '7·1 조치' 이후 내각 화학공업 상으로 있던 박봉주 총리의 전격 발탁으로 '내각 상무 조' 하에서 나름대로 급진적인 경제 정책을 폈으나 2005년 장성택 이하 여러 북한 특사들이 남한에 와서 노래방(...)을 즐겼던 시기(...)를 피크로 노동당이 없앴으며 2007년 박 총리를 해임하면서 더 얼어붙고 세습체제 안정화와 '강성대국'의 길을 걸었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국가의 단속을 피해 부서가 존재하는 민영기업을 운영하는 경우까지 등장한다고 한다. 목욕탕, 결혼식장 서비스, 아파트 경비원 고용까지 있다고 한다. 이 시기를 북한에서 보낸 사람들은 끼니는 이었다고 하여 넉넉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는 많이 잘 살아서 외부에서는 놀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비사회주의'라며 이를 탄압하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 북한/경제, 북한/경제/역사 문서를 참조할 수 있다.
9.3. 후계자 문제
2011년까지 권력 서열 1위인 김정일이 아직 공식적으로 지정한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 북한 내에서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점점 도발의 정도가 심해지는 것도 김정일의 후계자 지명 문제로 온 내분을 불식시키려는 의도에 했다는 의견이 있으며 이는 김정남과의 인터뷰("아직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다")와 김정은이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후보인 등 후계 작업이 본격화하는 등의 상반인 분위기임도 알 수 있다.김정일의 3번째 아들 김정은이 권력을 물려받으리라 유력시한 분위기였으며 일부 전문가들은 김정일 사후 북한이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하리라 점치기도 한다. 장남인 김정남은 이미 권력 승계 문제에서는 배제되어 결국엔 김정은이 권력을 물려받았고 김정남은 2017년 2월에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살해당한다. 현재 김정남의 아들인 김한솔이 자유조선의 도움 하에 어딘가 숨어있다. 김정일의 차남인 김정철은 권력 욕심없이 산다고 한다. 그 외 김정일의 동생 김평일은 오랜 해외생활에 국내기반이 없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함에 따라, 김정은이 새로운 전제왕정의 제3대 절대 권력자로 등극했다. 김정은도 여러 모로 건강 상태가 영 아니라는 평을 받지만, 그의 나이가 2019년 기준 고작 35세임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아마) 최소 15년 가량은 더 살 것이고, 그동안 얼마든지 조치를 펼 만하다. 다만 고모부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무작정 대남 협박을 일삼는 등 김정은 본인의 문제 많은 정신 상태가 변수일 수 있다. 2018년부터 등장한 김여정이 김정은의 후계자라는 평도 있다. 하지만 북한도 유교사상이 강해서 김여정이 후계자가 못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확인된다. 다만, 김정은이 사망해서 김정은의 아들에게 권력이 계승된다면, 그 아들이 어리기 때문에 김여정이 옛날 시대 처럼 섭정 역할을 할 수 있다.
9.4. 국가 채무 문제
- 북한의 국채 문서도 참고.
북한은 예전부터 대한민국을 빚더미에 올라앉은 나라라고 비난하지만 정작 그러는 북한의 # 경제 규모는 겨우 남한의 1/100인 주제에 국채는 1조 원이 넘으며 이자까지 치면 무려 7조 원이 넘는 듯하다. 이 채권은 현재도 거래 중인데 북한은 이를 상환할 의지가 없으나 나중에 남한과 통일하면 남한이 대신 상환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다. 그래 놓고는 아직까지 고려연방제나 적화통일을 꿈꾸고 있는 게 아이러니하다. 자세한 것은 북한의 국채 참고. 참고로 우리나라 국채는 2014년 기준 527조다. 경제 규모 차이를 감안하면 북한이 3배 이상이다.
북한은 소련(현 러시아)에게 13억 달러, 중국에게 9억 달러, EC(현 유럽 연합)에게 12억 달러를 빌린 다음 한 푼도 안 갚겠다고 버텨서 현재 채무 불량 국가로 낙인 찍혔다. 사실상 모라토리엄 내지 디폴트 상황. 참고로 저 돈을 빌린 시기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까지로, 지금까지 쌓인 이자를 빼도 당시 물가로 계산해서 수백 억 달러어치를 떼어먹은 셈이다. 여기에 북한의 독자 생존이 불가능하던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과의 경제 협력 과정에서 중국이 빌려준 돈도 엄청난 듯하다.
단, 위의 부채들은 표면으로 드러난 금액들의 수치로만 따졌을 때의 이야기다. 중국-북한을 잇는 철도 공사를 위해 지원받은 물자들로 북한이 고철로 팔아먹었다든지, 광물을 담보로 러시아에 돈을 빌리고 떼먹었던지 하는 것들이
지금 당장은 대한민국과는 별 관계가 없는 문제일 수 있지만 남북통일 이후가 문제다. 중국, 러시아, EU가 '한국이 북한과 통일하는 만큼 북한의 국가 채무도 승계하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커서다. 특히, 통일 한국 정부를 국제적으로 원만히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남북통일의 득실을 모두 온전히 책임진다는 행동을 펴야만 한다. 가령 독일 통일을 추진하던 시기 서독 정부는 통일 뒤 과거 독일 영토[3]의 영구포기 선언을 하는 등, 주변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 2차례나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적이 있다 보니 당시 유럽 각국에서는 독일이 통일하여 국력 신장을 이루고 나면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남북통일을 거쳐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이익만을 본다고 시비 걸 우려를 없애려면 어쩔 수 없이 이 문제를 풀고 넘어가야 한다.
이런 정황 때문에 현재 북한의 체제가 경제 재건에 사실상 관심이 없어서 채무상환이 요원함에도, 북한의 채권은 여전히 거래가 있다고 한다. 당연히 북한 채권을 사는 사람들의 기대심리는 "지금은 휴지조각이지만 언젠가는 대한민국이 다 갚아주겠지?"이다. 2016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경제규모가 호주 등을 뛰어넘는 세계 10위권이 되다보니 해외에선 '대한민국은 그 정도 갚을 능력이 거뜬히 되겠다' 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그 매매 가격이 당시의 남북관계나 남북통일 가능성에 따라 오르내린다고.
10. 원조경제
6.25 전쟁 이후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아 전후복구에 나섰으며, 이후 1960년대까지 고성장을 기록했고 그 영향으로 1970년대 초반까지 한국보다도 1인당 GDP가 높기도 했다. 이후 60년대 중국과 소련이 싸움박질에 나서면서 양국 사이에서 정치적 독립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50년대 같은 무상원조는 불가능해진다. 이에 70년대 북한은 서방에서 차관을 들여오는 등 여러 수단을 동원했으나, 차관 갚을 생각은 안하고 배째라로 일관했고, 결국 채무불이행국 딱지가 붙고 만다. 엉망진창이 된 북한의 신용전력은 북한에 대한 서방의 투자를 꺼리게 만든 요인이었고, 이 영향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는 중국이나 소련과의 교역에서도 온갖 잡음이 흘러나왔다. 80년대에는 소련의 원조와 교역을 가장한 사실상 원조에 기대고 있다 소련의 붕괴를 맞았고, 1993년 '제3차 7개년 계획' 종결 후 완충기를 거침에도 새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혹자는 이런 일련의 사태를 서구권의 대북한 금수조치에 의한 사태로 해석하고 이것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자본주의 진영의 교역 개념을 그대로 북한에 투영한 오류에 의한 해석이며, 애초에 북한은, '무역'을 '동등한 가치를 가진 재화들 또는 자본들을 교환하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건국 이래 한 번도 외국과 제대로 된 무역을 하지 않았(또는 못했)다. 소련, 중국과 마저도.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이야기.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와 여기를 참조.
11. 관련 문헌
한국 내에서 발행된 서적에 한한다.- <연표, 인물, 지표로 본 남북한 45년사(월간 다리 1990년 1월호 부록)> - 한겨레사회연구소 정치분과 편. 월간 다리. 1990.
- <북한 50년사: 우리가 떠안아야 할 반쪽의 우리 역사> - 김학준 저. 동아출판사. 1995.
- <북한현대사 101장면> - 고태우 저. 가람기획. 2000.
- <두 개의 한국> - 돈 오버더퍼/로버트 칼린 공저, 이종길/양은미 역. 길산. 2002(초판)/2014(개정판)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 현대사> - 김성보, 기광서, 이신철 공저, 역사문제연구소 편. 웅진지식하우스. 2004(초판)/2013(개정판).
-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 - 서동만 저, 선인. 2005.
-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 와다 하루키 저, 남기정 역. 창비. 2014.
- <북한 현대사 산책(전 5권)> - 안문석 저. 인물과사상사. 2017.
12. 둘러보기
[1] 통일부측 주장은 수해의 긴급 구호로 무상 제공[2] 아예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북한 안에 자체 인트라넷 망이 있으며 일부 기관에서는 인터넷에 접속한다. 광명망 참고.[3]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포메른 등 과거의 프로이센 동부지역을 말한다.